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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요산 역사 속으로....
5월10일(토)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우리나라 불교의 巨聖 원효스님의 숨결이 깃든
동두천 "逍遙山"을 찾아 나섰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산행을 하려고...ㅎ

                    
                    동두천역

                    소요산 역까지 전철이 연결되어 소요산 가기가 무척 쉬워졌으며
                    그로인해 산객들의 수가 몇배 늘었다고 합니다
                    중앙선 팔당역이 신설되어 예봉산-적갑산-운길산-수종사가 
                    새로운 등산 코스로 각광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철의 운행 간격이 40분 이상이라 시간표를 잘 맞추어야 하며,
                    시간을 놓치면 2~3분 거리 때문에 오랜 시간을 동두천역에서 기다려야하오니
                    전철 시간표를 인터넷을 이용하여 확인 하시고 출발하시기 바람니다
 
                    
                    소요산역

                    40여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전철이 도착하기에, 도착하는 열차의 승객들은 한거번에
                    왕창 쏟아져 나오고.........또 그런 간격으로 산객들이 소요산으로 들어 갑니다


소요산역

40여분의 간격으로 �아져 나오는 산객들로 잠시 동안 소요산역은 북적댑니다
편의 시설은 화장실을 비롯해 초만원을 이루더군요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줄을 오랜동안 섰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됫지만 화장실은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까지 여러군데에 깨끗한 시설로 줄을 서 있으니 복잡한 소요산역에서
줄을 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소요산역앞 횡단보도

앞의 수퍼옆 노랑 현수막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소요산을 감으로 휩쓸려 가도 무방할듯합니다

골목을 따라 조금 가면 견본 하우스가 있는 이런 양갈래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갑니다

좌측은 소요산 산림욕장 입구입니다
(입장료 아까우신 분들은 여기로...하지만 자재암 구경은 못합니다)

소요산 자재암 입구를 알리는 바위 이정표와 잘 포장된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따라 약 30여분 트랙킹을 해야 자재암을 지나 등산코스로 들어 설수 있으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워밍업을 하며 걷습니다


소방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앞

소요산역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화장실은 곳곳에 설치되있으니 복잡한 소요산역은
피하셔도 무방합니다. 또한 집이나 가게에서 물을 미리 준비 할 필요도 없더군요.
곳곳에 물을 준비 할수 있는 급수대가 있었습니다


소요산 관리 사무실 앞

저는 오늘 우리나라 불교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해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에 까지
佛法을 전파하시고 聖人으로 우뚝 서신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산행 중에
이런 저런 각도에서 음미 해 보려 합니다
물론 여러 기록들을 읽고 역사적 기록이나 현대 학자들의 저서등을 참고 하여 읖조리지만
나름대로 주관적 의견이나 생각이 많이 있으므로 재미삼아 그냥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소요산 등산 안내도가 큼직하게 길 가운데에서 안내하며,
안내도 바로 뒷쪽으로 "요석궁터"가 있었다는 안내와 함께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어 놨다는
안내판을 만날수 있습니다


요석궁터

오늘 소요산을 거닐며 가장 많이 나올 인물이 원효와 요석공주(瑤石公主)가 
되리라는 것은 벌써 짐작 가시죠? ㅎㅎ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상 흔치 않은 스님과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 산행 내내
소요산 기슭을 수놓을 것입니다

소요산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고 단순하게
"소요[逍遙] : [명사]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산에서 소요[逍遙]한 사람들중에 유명한 선인들은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있으며 소요산의 절경에 취해
자주 소요하였다는 기록들이 있듯이,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올라 본 결과 그렇게 만만하게 소요할만한 산은 아닌듯합니다


매표소

어른 2,000원.........좀 과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오로지 자재암 문화재 관람료라 합니다.
조금 있다 알게 되겠지만 '자재암'이라는 절간은 그간에 새로 지은 볼품없는 초라한
절간같지 않은 절이었습니다.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정말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역앞 골목 음식점 종업원들이 입구에서 입장료 내지 않고 가는 코스를 알려 주며
하산후에 자기 집을 들리라고 영업행위도 했습니다만, 저는 초행길이라 입장료를 내고
대다수가 이용하는 길을 갈수밖에 없으므로 다음부터는 "소요산삼림욕장입구' 쪽으로
이용 할것입니다. 앞에 사진으로 소개해 드렸죠? 


트랙킹을 제법 합니다..약30여분

산을 다니다 보면 절간을 만나고, 만나는 절간의 거의 대부분은 원효와 의상이 開山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분들 원효와 의상스님은 스님이 아니라 절간을 지어러 다니는 
건축가들이라고 해야 할 정도 아닌가요?. 
직접 짓기도 했겠지만 "해동국의 석가"라는 칭호를 들었으니
절간을 짓는 자들이 너도 나도 할것없이 원효와 의상을 팔아 먹었을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요산자재암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소요산 자재암"
그 밑에 "京畿小金剛"이라는 안내판이 보이시나요?
소요산은 경기도의 작은 금강산이라 칭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 얘기겠죠
글쎄요...저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여겨 집니다만, 아름다운 곳은 틀림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절간은 이름뒤에 절寺자를 붙이는데 여기는 自在庵이라 한것에 의문이
가시는 분은 아마 저와 같이 탐구열이 있는 분이시죠..ㅎㅎ
왜? 自在寺라고 하지 않고 自在庵이라 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寺자가 붙는 절간은 종교활동을 하는 곳이고 이렇게 庵자가 붙은 곳은 수련을 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원효스님은 수련을 하였지 종교활동을 한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 자재암은 지금은 종교활동 뿐만 아니라 입장료까지 징수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원효스님이 수련했다는 원효굴이 규모가 상당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생각 할때는 수련 할때 굴속은 오히려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합니다
습도도 높으며,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각종 벌레들이 서식하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울 듯 합니다
소요산을 올라 보니 수련하기 좋은 장소가 한두 곳이 아니더군요..물론 제 관점에서..ㅎ


원효굴 오른쪽으로 "俗離橋"가 나옵니다

저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한때 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고
분석해 보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공부한답시고 덕유산 용추사에 들어가 7개월정도 있으며
불교에 대해 아주 쬐끔 들은바 있으며, 기독교는 약10년정도 교회를 다닌적이 있습니다
종교는 종교로 믿어야하는데, 종교의 본질을 파헤치려했기에 종교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물건너 불보듯 이렇게 비판적 시각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俗離橋"를 건널땐 世俗의 번뇌와 근심 걱정을 완전히 이별하고싶었습니다.
무지 무지하게 이기주의적이죠? ㅎ

"俗離橋"를 지나면 삼거리 이정표 - 등산코스 상세 안내도가 환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선택해야 합니다 왼쪽으로 갈려는지..오른 쪽으로 갈려는지...
소요산 등산코스는 U자 모양의 말발굽 모양으로 생겨서
어느쪽으로 가던 이곳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왼쪽 코스를 따라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을 거쳐 이곳으로 오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왼쪽 계단으로 오릅니다. 그리 오래 오르지 않습니다

길지 않은 계단을 오르면 "自在庵"이 그 자태를 내 보입니다.
규모가 의외로 작은데 놀랍니다.
그리고 건축물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간에 지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거의 전부입니다
원래 寺가 아니고 庵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좌측 건물이 원효스님이 기거했던 초막 자리였다하며, 오른쪽이 대웅전 같지 않은 대웅전
건물은 달랑 윗 사진의 두체와 좌우에 최근에 지은 듯한 부속 건물 두체가 더 있었을 뿐이며
규모가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축소 사진으로 올림니다

대웅전만 확대해서 다시 보여드림니다.
초파일이 모래이기에 법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는 스피커를 타고
산행하는 소요산 골자기에 내내 울려 퍼졌습니다.
소요산 등산 능선은 말발굽처럼 생겨 한바퀴 뺑 돌기에 어느 곳에서나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에 "三聖閣"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하나 더 있어 올라 가 봤습니다.
三聖은 七星, 山神, 獨星을 가리키는 말이죠?
七星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壽命長生 한다는 별이고,
山神은 불교와 관련없는 우리나라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 만사형통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獨星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聖子를 말하지요. 
이 三聖은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건물은 전(殿)이라 하지않고
각(閣)이라 하는데 여기엔 그런 설명이 없어서 제가 계룡산 갑사에 있는
삼성각의 설명서를 참고하여 여기 알려 드림니다.

    
삼성각 현판과 내부

한두평 될듯한 좁은 곳에서 공양을 하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三聖이 누군지 뭐하는 神인지 아는지 모르는지..그저 자기 잘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있는 듯했습니다만...종교란 뭐 그런거니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自在庵전경과   나한전 동굴 밖의 암벽
나한전은 아래 사진을 보시고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나한전

컴퓨러에는 나한전의 "나"자가 한문으로 없으니 사진의 한문을 참고하세요
참고하고 뭐고 할것도 없이 "나한"이라는 말의 뜻은 제가 여러번 저의 산행기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16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며, 인도 옛말(티벳트語)를 중국어로
音譯한것이라고 말한적 있습니다. 
이 곳 '나한전'은 석모니의 16제자와 부처를 모신 殿이며, 바로 우측 옆에
원효약수가 있습니다


동굴 속의 나한전 내부 모습

동굴 속에 수많은 촛불로 공기가 별루이고...습기
석가 제자들이 좀 괴로울듯

나한전을 끝으로 自在庵을 모두 둘러 보고 본격적으로 登山을 시작합니다
나한전 바로 왼쪽 옆으로 등산로는 곧 엎어질듯 날카로운 각도를 세우며
체력에 자신있는 분들만 오르라고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禮佛을 드리러 왔거나 관광차 오신 분들은 여기까지가 모든 여정입니다
당찬 마음을 가지고 올라야합니다

경사도는 평균 60~70도 정도 될 정도로 급경사이며 '하백운대'까지 계속 되며, 
이 구간이 오늘 등산 코스 중에 가장 힘든 코스가 되겠습니다

뒤따라 오시는 분들을 봅니다.
급경사가 실감 나시나요?

숨가쁘게 오르면 첫번째 휴식을 취할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며
건너편에 오늘 등산의 하일라이트가 될 "나한대"와 소요산의 최고봉인 "의상대"가
울창한 숲을 뚫고 보입니다.
여기서 보고 정상이 가까운 줄 알았습니다만, 뒷쪽으로 다섯개의 산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를 해야 정상에 갈수 있었습니다.

소요[逍遙]하며 산행 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란걸 느끼며
글자 그대로 登山을 합니다

장난 아닙니다.
멋 모르고 따라 올랐던 자재암 구경왔던 사람들은 중도에서 대부분 하산합니다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합니다.
숨이 차고 땀이 나기 시작 할 무렵부터 이럴때 등산하는 신체적 기분은 점점 더 좋아 집니다.
이런 기분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죠?

달리기이던 등산이던 무슨 운동이던 30여분 이상 계속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날때쯤에
기분이 좀 좋아지고 "이제 몸이 좀 풀리기 시작하는군"이란 말을 많이 하죠?
그 이전까지는 제일 힘들고 괴롭습니다만.....
숨이 차고 땀이 날때쯤에 우리 몸속에서 "세파 엔돌핀"이란 호르몬이 분비 된다고하죠.
이 호르몬이 기분을 좋게하고 모든 근육을 부드럽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려면, 최소한 30분이상 땀이 날때까지 해야 효과가 있다는거죠
    
소요산 등산코스의 장점은 고비마다 휴식을 취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차근 차근 오르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겠더군요...점점 소요[逍遙]의 의미를
터득해 갑니다.

서너번의 전망 휴게터를 지나야 '하백운대'에 오를수 있습니다
'하백운대'까지가 가장 경사가 심합니다

소요산도 肉山에 속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정상봉우리들과 칼바위 능선을 제외하고는 흙이라 숲이 우거져 바같 세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재암이 있는 계곡을 뒤돌아 보며...오르고 또 오름니다

소요산은 화강암, 퇴적암, 편무암등 다양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듯한 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산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여기는 봉우리마다
암석의 종류가 다른듯했습니다. 저도 옛날에 모 광업회사 해외자원개발실에 근무한적이 있어
지질에 대해 쬐끔 줏어 들은 초보적인 지식은 있습니다. ㅎㅎ

하백운대 정상이 보입니다
소요산 전철역에서 여기까지 이곳 저곳 자재암들을 구경하며 올라 1시간30분 정도
걸린듯합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저는 말합니다. 제가 등산을 홀로 하는 이유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행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악회나 동반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단체 생활에 동조 해야하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진도 찍어야하고, 내력이나 사연도 자세히 알아 봐야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마시고 싶을 때 퍼질러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할수 있기때문입니다.
대자연을 감상도하고, 세상살이 스트레스도 풀며, 소리도 지르고, 잠도 자고.....
                
                이정표를 스테인레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 독특했습니다


'하백운대 정상'

왜 백운대라 했는지는 조사하지 못했습니다만, 여느 산이나 같이 하얀 구름이 걸려
쉬어 가고, 또한 그 雲海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감상도 하는 그런 곳이라 이름 했겠죠
여기에도 막걸리를 올려 판매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대단한 생존노력입니다


'하백운대'를 내려 '중백운대'로 향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듯한데 이곳 쯤에 風穴이 있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겨울엔 상대적으로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리고 개발 예정이라는 이야기까지 기억 납니다만, 찾을 수가 없었고
다른 분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시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되버렸습니다..ㅎㅎ

이제부터 소요산 자재암의 핵심 이야기를 산행을 하며 얘기 하렵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겁니다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함께 하시죠...
원효스님에 대해 알아 보고,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三日夜話 얘기를 하겠습니다.
원효는 아시다시피 佛敎를 나라 통치 이념으로 佛國을 이룰려고 했던 新羅時代의
진평왕 39년(617년)에 지금의 대구옆 경산시에서 태어 났습니다
아버지는 '설 담날'이라는 분이고 벼슬을 했는데 지금으로 따지자면 6급 공무원쯤 되는
신라시대 관직 서열 17계급중에 열한번째 서열인 육두품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는 원효에 대해 7가지 설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백운대를 향하여...

7가지 설화중에 첫번째가 원효의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쓰는 글들은 물론 기록에 기초를 두고 쓰지만 저의 주관적 상상력과 개인 의견이
많이 가미되어 다소 사실과 다를수도 있으며, 과장 허무맹랑 할수도 있으니 참고적으로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길 바라며 종교적 다툼은 별 의미가 없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원효의 아버지 설 담날과 어머니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서 오랜 동안 고민하며, 
자식을 얻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이던 어느날 밤....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습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은 그런 시각이었습니다.
"그럼.....내가 꿈을 꾸었단 말인가?
이건 예사 꿈이 아니야. 너무나도 생생한꿈 이렇게 멋진꿈은 처음이야."
사리부인은 자신의 마음이 설레는것을 느꼈습니다.
놀랍고도 기이한 예감이 부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어둠속이었지만 부인의 마음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한 꽃밭에라도 서 있는 느낌,
아니면 귀하고 아름다운 꽃가마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었다할수있습니다.
부인은 자고있는 남편을 흔들었다.
"여보,여보."
사리부인이 흔들었지만 남편, 설담날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다시 흔들었습니다. 그제야 남편은 겨우 눈을 떠며...
깅상도 남편 무뚝뚝한건 예나 지금이나 뭐 변하겠소만
"왜 그러오? 날이 새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설담날은 돌아 누웠습니다.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응, 으응........." 설담날은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 여보. 하늘의 별 중에서 큰 별 하나가 새가 날아들듯 내 몸속으로 떨어졌어요."
" 지금 뭐라고 했소?"
설담날은 홱 몸을 돌리며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기로 세계적인 깅상도 냄편도 이런건 짱구가 획 돌아 가죠
잽싸게 이불 뒤집어 쓰고 '내 아 나~도~'하며 작업을 했겠죠?
이렇게 원효는 잉태됩니다요~
어머니가 원효(元曉)를 잉태(孕胎)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의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일으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해산하였답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沙羅樹)' 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나무의 열매가 보통과 달랐으므로 '사라밤'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중백운대가 보입니다
 하,중,상 백운대 중에서 중백운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밤에 관한 이야기인데
옛날 절을 주관한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더니,
종은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소하였답니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구니 하나에 가득 차는 큰 밤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한 개씩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군요
여기서 제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제 아버님이 제 이름을 지을 때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살아 생전에 말씀 하신적이 있습니다
꿈의 내용인즉 
"깊은 산속에 밤나무가 무지하게 많았는데, 그 밤나무들이 모두 갑자기 꽃을 활짝 피우더니
그 밤꽃 사이로 네가 홀연이 나오더라~ 그래서 밤栗자에 영화榮자를 택했노라~"
ㅎㅎ 세월이 흘러 제가 원효 전기를 읽어 본 다음...
"음~~아버님이 내 이름 지을 때 원효 탄생설화를 컨닝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시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신 분이 이러한 컨닝을 했다면 의미있다고...
왜냐면 컨닝도 뭘 쬐끔이라도 알아야 컨닝하는거 아닌가요? ㅎㅎ
돌아 가신지 30년이 넘었으니 저도 아버지 없이 여기까지 홀로 왔습니다
이제와서야 아버님이 자꾸 그리워지는군요..세월 가봐야 쬐끔 철든다더니....제가 그렇습니다
훗날.....제 아들들에게도 그리운 아빠가 되어야 할텐데....
      
세번째 이야기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元曉)를 잉태하였는데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효(元曉)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학문을 깨쳤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獨聖이라 하지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중국 송나라의 찬영이 쓴 '송신라고승전 원효편'등을 참고하여
이런 설화를 썼다고 하니, 이미 원효와 의상대사는 신라의 聖人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에 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럴때 한국인으로 태어 난걸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중백운대의 소나무들은 수령도 오래되고 험난한 지형에서 자라고 있어 모양도
험난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숱한 북풍한설에 시달려 북쪽에서 남쪽으로 줄기와
가지가 기울었더군요
네번째 이야기가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산행기의 핵심이므로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원효가 요석공주와의 간통 사건으로 파계승이 되어 거리로 나가
거지, 창녀들과 어울리며 양아치 행세를 하다 깨우침을 느끼고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 즉 대승불교의 길을 걷는 과정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이야기는 원효(元曉)는 바다 龍의 권유에 따라 노상(路上)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저술하여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는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번째 이야기는 원효의 입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원효(元曉)가 입적하였을 때 
아들 설총(薛聰)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하며
설총(薛聰)이 절을 하니 원효상(元曉像)이 문득 돌아보았다고도 합니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상백운대를 향하여 중백운대를 하산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 기록되 있는 네번째 이야기가
三日夜話로 유명한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원효는 의상대사의 9년 선배이고,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 있는 우리의 보물인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혜초스님들과 한 시대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 차돈과 원광스님, 자장율사를 흠모하며
불교에 귀의합니다


상백운대를 향하여....

원효와 요석공주에 대한 저의 글은 물론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두고 씁니다만
매우 주관적 시각에서 드라마 극본같은 흥미 위주로 과장되고 비유되며 기술하오니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라며 종교적 시각으로는 제발 보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본명이 '설 서당'인 원효는 중이 되기 전에 그 유명한 신라의 화랑이었습니다.
화랑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신분도 있어야 했지만, 수능시험 400점 만점에
380점 이상은 얻어야하고, 강건한 체력과 무예도 있어야 들어 갈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요즘 우리나라 SKY대학에 사관학교를 합친 그런 곳에 들어 갈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런 자들이어야 했답니다.
이 당시 요석공주는 공주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김춘추의 둘째딸인 요석은 사실 이 때에 이미 원효인 설 서당과 눈에 불이 붙어 
오가는 눈길 속에 ♥♡♥ 요런게 발산되고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요석궁에 들어 간게 아닙니다. 이미 짝사랑 연애질을 했던거죠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로미오와 쥴리엣이 신라시대에도 왔다 갔단 말입니까.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 양희은이 이들을 두고 그 노래를 부르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들은 처녀 총각으로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요석은 원효와 같은 화랑이었던 '진 여랑'이라고 하는 다른 고위직 자녀와 정략적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최후의 막바지 땅따먹기 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석의 신랑 '진 여랑'과 원효는 백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진 여랑'은 그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요석은 봄철 버들강아지에 물오르듯 한창 나이에 청산과부가 됩니다요~~ 아깝다 에구
한편 살아 남은 '설 서당'은 전투에서의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고, 
인간사의 허무를 느끼고   머리 깍고 중이 됩니다............
아까운 청산과부 요석을 완전히 과부로 홀로 남겨 두고...


상백운대로 가는 능선은 암반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인상적입니다

스님이 되어 돌아 온 원효
또 이 뭔 웃기는 일이란 말입니까. 
세익스피어의 희곡 속에나 나올법한 母女가 한 남자를 서로 짝사랑하는 일이 일어 납니다
요석공주와 요석공주의 엄마인 왕비는 원효를 서로 짝사랑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옷길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에는 없지만 野史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효에게 서로 잘 보일려고 두 母女가 경쟁적으로 노력합니다.
어느날 왕비가  설법을 듣는 다는 핑개로 스님이 된 원효를 宮으로 불러 드립니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답니다.
남자 맛을 아는 왕비와 공주는 원효가 스님이 아니라 멋진남자 화랑으로만 느껴지고
소녀시절 첫사랑의 연민과 사랑했던 이에게 가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루어질수 없는 스님과의 속세의 인연을 끊으려 긴긴밤을 보내지만 끊을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요석 공주는 원효를 위한 법복과 행장을 만들어 선물도 하고...
연꽃도 꽃꽂이 잘 하여 선물하고..
점점 속내를 원효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요석공주도 이미 현대 여성과 같은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여성들이 자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상위시대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라시대가 절정기라 할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 女王을 둘이나 배출한 유일한 王朝이니까요
한편 머리 빡빡 깍고 면도질까지해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머리에 모양을 내고 스님이 된 원효.
스님이 되면 뭣합니까? 스님 되면 인간의 본성도 사라집니까? 
억제 할 뿐이지 절대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동양, 서양, 아프리카, 아메리카 어느 곳의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본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청춘의 첫사랑 요석과의 열정이 아직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원효 - 
눈을 감지 않아도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어여쁜 과부 요석공주가 적극적으로 대쉬해 오는데
아무리 스님이라도 아직 넷떼루도 떼지 않은 화랑 출신 원효의 마음은 상상에 맡겨도 되겠지요
    
요석공주는 아빠인 무열왕에게도 속내를 드러내고 졸랐습니다. 원효와 결혼 시켜달라고....
이렇게 홀로 짝사랑만 하고 사느니 죽는게 더 낫겠다고 엄포도 넣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는 처음 들으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이글을 쓰는 '파란문'이 너무 오바 하는 거 아님감? 하면서 의문시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 동안 모두 우리나라 불교의 巨聖 원효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으신 분들이
이런 저런 속들여다 보이는 그런 내용들의 이야기들은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많이 감추었다죠
오로지 원효에 의해 요석공주가 당했다고만 알고 있지요?
신라시대 많큼  여성 상위시대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시대 보다 더한 시대 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왕들을 배출한 유일한 왕조이니까요..시대적 상황도 고려하며...


상백운대가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도 막걸리 올려다 파는 분이 계십니다. 삶에 대한 대단한 집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길이나 물어 보고 그냥 가더군요.ㅉㅉ

날이 갈수록 사모하는 마음이 더해 가는 요석공주와 스님이기 전에 한 남성인 원효.
세상에 이런 시나리오가 지구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내면의 번뇌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부처님의 계율과 승려로서의 명예등 참으로 많은 것들 속에서 
고뇌하는 원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효 아니라 석가모니라도 고민 않할수있겠냐?라고 하신다구요? ㅎㅎ


상백운대

원효 - 세로운 세계를 만나다

고뇌와 번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원효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기회가 옵니다
깨달음인지 술수인지 핑게인지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생각컨데 분명 원효는 '묘수'를 찾을려고 노력했을꺼라 확신합니다
깨달음인지 술수인지 모르지만 원효는 행동에 나섭니다
바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남산의 거지 땡초 대안대사와의 만남과
그 유명한 요석공주와의 3일간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백운대 정상

여러분~!
이 이야기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 하거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 진실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현실의 자기 삶 속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라고 여겨 저는 매우 감명 깊게 느끼는 이야기이니
아시는 얘기라 할지라도 한번 더 음미 해 보시길 권합니다

상백운대에서 나한대로 가는 길목에 "칼바위 능선"이 있습니다
소요산의 압권이라 할수 있는 멋진 곳이니 가시면 꼭 감상 하시기 바람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더라구요
원효에게 요석공주와의 결합에 결정적 역활을 하게 되는 대안대사와의 일화는 중요합니다
경주의 남산 작은 토굴에 사는 거지같은 대안대사는 말 그대로 타락한 땡초의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홀로 도인인 것입니다 
원효는 왕실에서 설법을 하는 왕실의 고승대덕이고. 
대안대사는 중생들의 눈에는 타락한 중(땡초)의 모습이니 둘은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느날, 원효를 좋아하는 왕비의 부름을 받고 설법하러 왕궁으로 교자를 타고 가는 도중에
 대안 대사와 운명적으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대안 대사는 술에 취해 거지꼴을 하고서는 가마위의 원효대사에게 씨부립니다
"부처님 말씀에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데. 
어떤 놈은 복이 많아 사람위에 사람이 타고 가며 (사람을 가마에 태우고 가는 것을 빗대)
좋은 옷을 걸치고 , 좋은 곳만 들락거리느냐……?"큰 소리로 조롱합니다
"어떤 놈은 천지가 내 집이고, 내 법당이니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천지가 다 내 것인데 어떤 놈이 더 편한가! 어디 한번 해보자 "하며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원효에게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고 
다른 사람들은 술 먹은 미친 중놈의 미친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자기 신분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 부슬 내렸고...... 
왕실에서 설법을 하는데. 요석공주 이 싸가지 없는 과부가 비에 젖은 옷을 입고
속살이 살짝 살짝 들여다 보이는 요염한 자태로  나 좀 잡아 잡슈~~ 우~하며 있는게 아닌가
세상의 남자가 아무리 스님이라 하더라도 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에 와서 별짓을 다해도 동하는 그 마음을 삭힐수는 없었습니다


칼바위 능선의 소나무들

다음날. 
원효는 대안대사를 찾아 나섭니다
토굴 안에는 죽은 어미 곁에 오소리 새끼인지 호랑이 새끼인지 새끼 한마리가 끙끙대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그 슬피 울고 있는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그를 위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때 대안대사가 돌아와 목탁을 치고 있는 원효를 보며 
"당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앙?" 성질 버럭 내며 물었습니다 
원효는 "어린 이것이 어미가 죽어 울고 있기에 불쌍해서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대안대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완전히 비웃으며
"쯔쯔쯔...배고플 때는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니라……" 하며 아랫마을에서 동냥해온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원효는 또 한번 대안대사에게 쇠망치로 매를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며 혼자 중얼거립니다.
"아~하. 미친 승이 아니라...고승 대덕 이로구나. 내가 고승대덕이 아니고 이 분이 고승대덕이로다~"
원효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 자신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대안대사는  "좋다. 좋다. 날 따라와라 ~!"


칼바위 능선  정말 아름답고 멋있고....

대안대사는 원효를 데리고 서라벌의 어느 대포 집에 들어가 여자 둘을 사이에 두고 술을 마십니다. 
원효는 '술은 않먹습니다. 여자도 멀리합니다' 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대안 대사 
"진리를 가는 데는 마음 따로 몸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니라~"
극락을 갈려면 추락을 맛보아야지 극락을 가는 거야……. 
원효에게 이래도 법에 걸리고 저래도 경계에 걸려서는  영원히 한발자락도 나갈 수 없을 것이야.
요석이 꾀거든.하루 밤을 보내고. 
목탁을 쳐 주거라……
그리고 그걸 뛰어 넘어라……"


칼바위 능선 - 

원효는 요석공주를 사모하는 마음과 이름 있는 승려의 신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으리라~~
어떤 놈이고 갈등 하지 않을 남성이 있겠는가!!
의상이 내성적이라면 원효는 외향적 성격이라 할수 있습니다
호탕하고 판단이 서면 과감히 실행에 옮기는 그런 성미였습니다
고민과 번민........속에서 살아 오다가 대안대사로 부터 완벽한 해법을 찾아 낸 원효는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 유명한 말이 이렇게 탄생 되고 이 말을 서라벌 거리 거리에서 씨부리고 다닙니다
요즈음 개그콘써트식으로 말하자면
"도끼가 도끼 다울려면 도끼 구멍에 또끼 자루를 끼워야지~~
자루 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구멍에 박히지 않은 자루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ㅎㅎ
그런데 이 방식은 요석공주의 고모가 되는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업어 가는
백제의 무왕이 신라 서라벌에서 한번 써 먹은 방법과 유사한 방법이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향가로서 最古 오래된 "서동요(薯童謠)"이지요?
동요(후에 백제 무왕이 됨)가 선화공주를 업어 갈려고 서라벌에서 스캔들을 떠벌리고 다니죠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한마디로 스캔들을 인위적 의도적으로 뿌리고 다녀 스캔들이 현실화 된다는 얘기입니다
백제 무왕이 신라의 공주를 왕비로 삼을려고 사용한 스캔들 뿌리기이었죠
이 '서동요'는 내용이야 스캔들이지만 국문학사에서는 이두문자 연구에 최고로 꼽지요


칼바위 능선의 바위들은 이렇게 칼처럼 생겼습니다
편마암이라고 하나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 온 흔적이 낭자합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원효가 퍼트리고 다니는 의도적 스캔들 "도끼자루와 도끼구멍 이야기"를 알아 들을 사람은
요석공주와 무열왕, 그리고 왕비 밖에 더 있었겠슈?
"짜식이 이제야 정신 차리고 꼬심을 당했군~~!!"이라 생각 한 무열왕은 
"짜식이 명색이 스님인데 파계승까지 될 각오로 내 딸을 만족 시켜줄까?"라고 의심도 하며
거리를 떠돌고 있는 원효를 모셔 오라고 신하를 보냅니다.
월정교..문천교라고도 하더군요. 서라벌의 남산 밑에 있다는데..저는 못 가봤습니다
짠~~ 무열왕의 신하가 월정교를 건널 때, 이미 올줄 알고 있었던 원효가 쑈를 벌입니다.
원효의 짱구도 여색 앞에선 아주 잘 돌아 갑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안대사를 만났는지도 모름니다. 그렇다면 대단한 고수일텐데..ㅋㅋ
갑자기 발을 헛디디는 척 하며 월정교 아래로 떨어져 옷을 모두 적십니다.
왜그러는지 모두 아시져?
중이라도 간통을 하려면 옷은 벗어야 할테니....
내 옷 벗겨 줘~~나 이젠 중 안할래~~파계승, 그러니  요석공주와 간통 할테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상백운대와 나한대 사이의 이정표
이젠 이런 소요산 사진은 눈에도 안들어 오죠? ㅎㅎ
3일간의 사랑

요석궁에 들어가게 된 원효는 자연스럽게 적셔진 승복이 요석공주에 의해 벗겨지고
수많은 나날을 독수공방으로 보내 온 두 남녀에게 촌음도 아까워하며
알몸으로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열정적인 정사는 벌어집니다...
뭇세상 사람들은 간통이라 폄하하지만
제가 생각컨데 절대 간통은 아니고 '스님과 공주의 정사'라고....
세계사에 남는 희귀한 로멘스라 여깁니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벼렁빡에 벼룩도 남아 나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죠. 속담인가?ㅎ
이들이 하루로 족하겠습니까? 3일 밤낮을 붙어 떨어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3일 밤낮을 이 소요산의 소나무처럼 붙어 있었다니까요~~

결혼을 목적으로 같이 3일밤낮을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과부와  중이 성행위 만을 하고 헤어 진다면 무슨 법에 접촉 될까요?
에구~ 이런 사례가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옥소리가 헌법재판소에 간통이 뭔 죄인가요?하며 헌법소원을 냈던데..
옥소리의 얘기는 "내가 내몸 이불 속에서 뭔짓을 하던 국가가 왠 참견이여?"
"국가가 언제 날 만족 시켜준적있어?" "내 성행위를 니네들이 왠 참견이야!!~~"
"내가 니네들에게도 피해 줬어?..닝기리~" 이렇게 항변하고 있죠
시대가 바꼈다고 판결이 합법적으로 나지 않을까~한다는 신문기사들이 있더군요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 아십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로마 시민의 문란한 성생활이었답니다
세계 방방곡곡 식민지에서 들어 오는 엄청난 富
그 다음 갈곳은 인간이 갈수 있는 최후 최고의 오락 SEX라고 하더군요
로마에는 화려한 공중 목욕탕이 수없이 들어 서고 문란한 性狂亂은 시작 되었죠
그 결과 로마 시민의 40%이상이 성병에 결려 종족 보전을 할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죠
그래서 콘스탄티니우스 대제는 로마를 버리고 터어키 이스탄불로 도읍을 옮기는 거지요.
소위 말하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가 아닌 터어키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문란한 성생활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와 우리 역사를 좌우하는 문제 일수 있습니다
짧은 한 순간을 살다 가는 하루살이로 인간을 평가하면 않된다고 강조합니다
(저의 블로그 '역사의 숨결'란에 "간통과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글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가 보세요~)
애 못낳는 여자가 절에 가서 백일 기도 드리면 애를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자와 난자가 만나지 않아도 애가 탄생 될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컨데 애못낳는 여자가 백일 동안 절에 있으면
분명 뭔 일이 벌어지지~~~그러니 애를 낳지~~라고 입방아를 찧습니다
3일이 지난 후, 원효는 이별을 고합니다..요석공주에게...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떠난다구? 이 땡중아!!~"라고 요석공주가 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딜 가시든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 넓은 이 가슴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내가 어느 한구석 기댈 데는 없는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런 물음에 원효는 대안대사에게서 배운 말을 써 먹습니다
요런 잔머리는 잘 돌아 갑니다
"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공주는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냅니다 . 아 무정한 땡중~
에구~ 아까버라~단 3일간의 사랑만 남기고 놈은 떠나가고~~
남은게 사랑만 남았겠습니까? 영자 숙자.....정자도 남아서
그 유명한 신라시대 최고의 학자 중 한사람인 "설 총"을 낳습니다

원효는 3일간의 정사 후....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라고 뇌이며 
이름 모를 어느 산속으로 가서 승복을 벗고 불목한이 되어 
다시 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행을 했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 
경기도 소요산 자재암이었답니다


칼바위 능선에서 나한대 가는 계곡에 있는 하산하는 길 안내 이정표
  '소요산'의 정상인 ''나한대-의상봉'으로 갑니다.

     
나한대를 오르고 있습니다


나한대를 오르는 길도 경사도가 좀 있습니다

원효는 소요산 자재암에 들어 오기 전에 
스님으로서 요석공주와 간통하여 수행의 길 - 불교-를 파계했으니
자기 자신을 ‘아랫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아행을 폈습니다.
즉 저잣거리에 나가 거지, 창녀, 기층민중들 속에서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하층 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며 떠돌았다합니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것이 대승불교의 시발이 됩니다


뒤돌아 보며....

이는 <화엄경>의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서 거리낌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랍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는데...
     


나한대 정상



나한대 정상엔 구경거리가 별루입니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는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로 향합니다


의상대 근처는 암석이 석영 같았습니다
 

의상대 가는 길도 절경입니다
산행 내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소요산의 최고봉 - 의상대
 

의상대사는 여기 온적도 없고 원효가 와서 수행했는데....
왜 소요산의 최정상 봉우리를 원효봉이라 하지 않고 의상대라고 했을까....??

의상대 정상에서 주위를 관망합니다

의상대 아래는 천길 낭떨어지이고


의상대에서 바라 본 '공주봉'

저 공주봉이 요석공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요석공주는 저 봉우리를 바라 보며 원효가 잘 되기를 기도했답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으로 내려 가는 길도 경사가 심합니다
이쪽으로 올라 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계단이 길었고 경사가 심합니다


의상대와 공주봉 사이의 계곡에서 점심 식사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이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쇠주 한잔 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와 같이 사태볶음 안주였으며 다른 것은  청양고추와 고추장이었습니다
 

공주봉으로 향합니다


만만하게 봤던 공주봉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공주봉이라서인지 공주 오르기가 힘든다고 지나는 뭇남성들이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힘들게 공주봉을 오릅니다
힘든 이유는 이제까지 많이 걸었고 소주도 한잔 해서 더욱 힘들어 나타나는 현상이겠죠

공주봉 정상이 나옵니다만 이곳은 장소가 협소했구요....

원효와 헤어진 요석공주는 일년후쯤 아들을 낳습니다
아시다시피 "설 총"입니다
요석공주가 그냥 청산과부로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살 여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요석공주가 누구입니까?  원효라는 당시 國僧을 꼬셔서 3일 동안 정사를 벌인 여자 아닙니까?
"중 따먹는 여자"는 공식 기록으로는 요석 공주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보통 여자는 아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공주봉 정상 휴게소는 옆에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요석공주는 애만 하나 만들어 놓고 떠나 버린 서방을 찾아 나섰습니다
신라시대에 서라벌에서 여기 소요산까지 오려면 고생 깨나 했을 것입니다
땡중이던 뭐던 요석에게는 서방이었기에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서방 찾아 삼천리는 시작됩니다


소요산 산행 중에 미국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이유가 있더군요 

제 개인 생각으로는 원효가 여기 소요산에 몰래 홀로 들어와 수행하지는 않았을 걸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요석공주가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찾아 올려면 거주지를 확인 했기에 가능 했을 걸로 짐작되기 때문. 
요즘처럼 헨드폰이나 스마트폰이 있었겠습니까? 1,300년 전인데...KTX나 자가용이 있었겠습니까
즉, 원효가 슬쩍 요석공주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도져히 이곳 '소요산 자재암'을 알수 없었겠죠


공주봉 정상은 넓직하게 꾸며져 있어 놀기 좋았습니다

요석공주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 온 소요산
아휴~ 이젠 서방 곁에서 닐리리~하며 살아야지..하고 생각 했겠지요
하지만 원효는 요석공주를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이제는 佛僧으로 돌아가 수행에 만전을 다하겠으니, 공주는 돌아 가라고 냉정하게 뿌리칩니다
이래도 되는겁니까?
요즈음 같았으면 어쩌면 혼인빙자간통혐의로 쇠고랑을 찻을수도 있는데
머나먼 길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찾아 온 여자에게 너무 합니니다~♬ 김수미가 曲을 할일


공주봉에서 바라본 미군 기지와 동두천 시가지

앞에 보이는 계곡 전부가 유명한 미군부대 동두천 사령부입니다
소요산에 미국사람이 많은 이유를 아시겠죠?
그런데 이 미군부대가 모두 평택으로 이전한다고 하지요
미군들로부터 나오는 딸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떡하나....
밤의 환락가로 라스베가스 같은 밤이 된다는 동두천이 이젠 다른 산업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할텐데....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무지하게 발전했습니다

     
정상 오른쪽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조금 내려 가니 전망대가 나오더군요

원효는 냉혹하게 요석공주를 뿌리치며 자재암에 올라 두문불출을 하니
요석공주는 에~라 이쌔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는지
오전에 올라 올때 봤던 일주문 밖 "요석 궁터"에 별궁을 짓고 살았답니다.
요새끼 꼴려서 밤에 내려 오면 국물이라도 주나 봐라~~!!
설마 이런진 않았겠죠?ㅎㅎ  하지만 궁을 짓고 살았다는 것은 확실한 모양인데......
오늘 산행에는 가지 못했던  이정표로만 보았던 "선녀탕"의 전설이 있는데
요것이 묘하게 혹시 선녀를 요석공주로 분하여 우회적으로 원효 위상을
업-그레이드 시킨게 아닌가합니다. 분명 제 생각입니다.
선녀탕과 자재암의 유래를  들려 드림니다


전망대에서 의상대를 올려다 보고...

이곳 自在庵에는 元曉가 머물 때 觀音菩薩을 親見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元曉가 庵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고합니다 
元曉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수도승인 元曉는 공연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여자 맛을 본 원효인지라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元曉는 精進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석영암으로 이루어진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천길 낭떨어지....

元曉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고합니다 
元曉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고하는데....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아무리 설화라 한다 하더라도...
원효 업그레이드 시킬려고 꾸민 이야기 냄새가 물씬 물씬 납니다만 계속합니다


내려가는 길의 경사도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자재암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던 왼쪽 - 즉 공주봉부터 먼저 오르던
힘들기는 같을 듯 합니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元曉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습니다.
여자란 다 이런 가요?
저는 이 여인이 요석공주라고 확신합니다만....설화에서는 절대 아니랍니다 
元曉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고합니다.
삥~신..옛날 거지 땡초 '대안대사'한테 배운건 요석공주한테만 써먹으라고 갈켜줬나? 아니면
이젠 인간세계를 떠나 진짜 해탈의 경지로 간다는 말인가

새벽녘에 元曉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답니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佛心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고하는군요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元曉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고 하는데....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꼬시는거 아닙니까?"하고 대꾸하였다네요.ㅎㅎ
맞는 말입니다. 밤중에 이 여인 몸을 주물러 주물탕으로만 녹여만 주고 ..만족 시켜주지는 않고...
새벽녁에 혼자 밖에 나가 홀라당 벗고 보는 앞에서 목욕을 해?  이게 여자 몸 달구는게 아니고 뭐여?
元曉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또 업그레이드 시킵니다..ㅎ


옛절터가 나왔으며 그 규모는 커지 않았을듯..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는군요 
元曉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답니다
이거이 틀림없이 한탕 하고 난 다음의 일이라 여겨지는데 어떻던 설화는 그렇습니다..ㅎㅎ


절터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무슨 절이었는지도 안내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後光을 띈 관세음보살(觀音菩薩)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는군요
ㅋㅋ 이거 말 됩니까? 여하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은 요석 공주를 빗대서 나타난 여인으로
생각합니다
觀音菩薩이 元曉의 佛心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한 것이랍니다. 
이 절 이름을 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元曉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원효에겐 여자 멀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세음 보살 여인은 요석공주 같지 않으세요? ㅎㅎ

하산이 끝나갈 무렵 
뭔가 했더니 '자연보호 헌장' 비석이더군요
               
오전에 소요산을 오르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했던 자재암 입구 삼거리에 다시 내려 왔습니다

오후가 되니 그림자가 땅바닥에 들어 눕기 시작합니다
오전에 들어 왔던 일주문을 나서며 트랙킹 코스를 내려 갑니다

입장료가 비싸게 느껴졌던 매표소를 지나고....
입장료 수입만 한달에 10억이 넘겠더군요..일년에 백억..억..억..
원효 덕으로 입장 수입을 벌어 들인다면 薛氏 집안이 혜택을 받아야 할텐데
조계종이 싹쓸이 하겠지요


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오늘 산행을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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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백운산 산행기

5월3일(토)  연휴라고 모두들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많은 도로가 몸살을 앓는 날
그 동안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광교산을 오르기로 하고 어려운 발길을 수원으로 돌렸습니다
水原 - 왠지 친근감이 가는 그런 도시입니다
물론 저에게는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산행을 하며 하나 하나 추억을 더덤어 보려 합니다
수원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경기대 입구'에 내렸습니다
이때가 벌써 오전 11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광교공원]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이 광교공원이었으며 잘 단장되 있는듯했습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내려 오며 광교공원을 구경하기로 하고 바로 올라갔습니다

광교공원을 왼쪽에 끼고 경기대 입구로 오르는 길이 펼쳐집니다

[경기대 입구 삼거리]
조금 오르니 삼거리가 나왔는데 오른쪽이 경기대 입구이며
왼쪽길이 광교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토요일인데도 산꾼들이 제법 많이 보였습니다
   
반딧불이 화장실 못미쳐서 왼쪽은 광교저수지 댐이고
오른쪽은 '광교 생태 학습장'이란 표지가 있었는데 여기가 광교산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인듯 합니다

[반딧불이 화장실]
광교산 관련 인터넷 글들에서 거의 대부분 등장하는 유명한(?) 반딧불이 화장실입니다.
광교산 산행을 바로 시작 하는 입구가 이 화장실이더군요
화장실 들려서 윗문으로 나가니 바로 등산로였습니다
화장실을 통과하는 등산로는 이곳 뿐이지 않을까 생각되며..그래서 유명한지도....

그래서 반딧불이 화장실을 자세히 구경하였습니다
요즈음 만나기 힘든 반딧불이가 화장실을 �히고 있는듯 독특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화장실 문화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등 외국인들의 관광 명소가 되어 "한국 화장실 투어"도 있다고 하죠?
    
화장실 안에서 보이는 광교저수지댐이 인상적이었으며, 내부가 매우 청결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와 등산로 입구에서 화장실 안을 촬영했는데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화장실 출구가 등산로 입구 였습니다
          
화장실을 나오니 바로 등산로 계단이 이렇게 펼쳐지고
앞으로 광교산을 점령할 생각을 하니 가슴 설래였습니다
          
그런데 한 코너를 돌고 위를 보니 까마득한 계단이 있지 뭡니까.
아~~이 광교산도 계단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힘께나 드는 산인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계단을 약 150m정도 오르니 이정표가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곳이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올라 오는 코스와 경기대 후문쪽에서 올라 오는 코스가
만나 함께 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오르막"이 강력하게 나올것에 대비하며 왼쪽 등산로를 따라 갔습니다

'오르막'이 곧 나오겠지~~라고 생각하며 가는데...평평한 평범한 평지였습니다

이상하게 오르막이 나오지 않고 평지만 계속되고...산꾼들의 옷차림도 이상했습니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장비가 산책하는 듯한 차림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오르막은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평지만 계속되었습니다
걷는 도중에 만나는 산꾼들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 등산화도 신지 않은 처녀 총각,
하물며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들도 간혹 보였습니다
광교산은 水原市의 대표산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어느정도 험난한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등산객들의 모습이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 처럼 보였고
등산로가 登山路가 아니라 山策路가 계속되고 있어 의아한 생각을 가지며 걸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반딧불이 화장실 위 이정표에서 형제봉 턱밑까지는
약간의 높낮이가 있는 경사도가 매우 낮은 완만한 경사도의 능선길이었습니다.
남여노소 누구나 오를수 있는 매우 쉬운 코스였습니다
    
[문암골 갈림길]
문암골에서 올라오는 코스와 만나는 곳 같았습니다.
산길은 이렇게 다른 길과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네 세상살이처럼 이어집니다

오르막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보시다시피 이런 정도가 오르막이라고 특별히 촬영했으니
얼마나 완만한 경사인지 아시겠죠?
          
[천년수 약수터]가 여기서 440m 지점에 있다고 알려 주는 갈림길입니다
    
또 평지를 걸으며 김소월의 유명한 詩팻말도 감상하며....
          
[이의동 갈림길]을 지나

숲속 산책은 계속되고....
    
[백년 약수터]갈림길
천년 약수를 먹으면 천년을 살고..백년 약수를 먹으면 백년을 산다?
두군데 약수를 다 먹으면 천백년?
무언가 전설이 있겠지만....안 마셔도 오래 살것같은 기분은 기분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백년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 조금 가니 이제서야 오르막이 나타났습니다
오르막이 나타나자마자 공사중을 알리는 현수막
오르막이라고 등산객들을 위해 등산로 - 즉 계단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등산로에 계단을 설치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많은 예산을 들여
건설하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편의 제공은 등산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의가 아닙니다
저는 산에가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산에 가는 이유는 여럿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힘들기 위해 갑니다"라고 답합니다
산에 오르는데 힘들지 않는다면 뭣하러 갑니까? 집에서 편히 구둘짱 짊어 지고 뒹굴지...
힘들고 땀이 뻘뻘 나고 숨이 할딱거리지 않는다면 등산을 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힘들고 땀이 많이 날수록 즐거운게 바로 등산입니다
그런데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인공편의시설을 거금을 들여 건설을 한다?
저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자연은 모두 아시다시피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는게 자연을 위하는 길이라 여깁니다

계단 건설 구간 몇십m를 오르니 형제봉 바로 밑 작은 봉우리더군요
대부분의 산에 있는 '깔닥고개'치고는 너무 짧았습니다
    
여기까지 강아지도 올랐더군요..얼마나 쉬운 산책길인지 아시겠죠?
그리고 박재삼 시인의 유명한 詩한수가 산을 오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산에서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
    젊어 한창때
    그냥 좋아서 어쩔줄 모르던 기쁨이거던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中年들어 肝腸(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이거던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 들거라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도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박재삼 시인은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등 우리나라 전통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지죠
박재삼 시인의 시 중에 제가 아는 시는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인데 소개 해 드릴까요?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박재삼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형제봉 정상을 향하는 길
등산객이 한곳으로 모이는 곳이 정상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가니 [형제봉]을 우회하는 길과 릿지를 해서 형제봉 정상을 오르는 길안내를 했습니다
저야 당연히 정상을 올라야죠?

형제봉까지 처음으로 암벽이 나타났습니다.
친절하게도 로프까지 설치해 놨더군요. 사실 이런 정도의 경사는 로프는 오히려 짐이 됩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듯 로프를 잡고 유격훈련 하는듯 올랐습니다
        
저는 릿지를 좀 하기에 그냥 뒷짐지고 발가락 두개로 올랐더니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군요

[형제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이라봐야 서울의 남산 정도이지만 이곳까지 특이한 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처음으로 하늘과 주변 경관을 조망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산행기를 쓰려면 동서남북, 좌우 위 아래를 잘 설명을 해야 다음에 오시는 분들에게
이 산행기가 도움도 되고, 또한 나의 위치를 알며 온길과 가야할 길을 느끼며 산행 할수있는데
울창한 숲으로 인해 등산로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습니다
형제봉이 동쪽인지 북쪽인지도 알수 없이 그냥 오르기만 한 것입니다
岩山과 陸山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만, 형제봉을 오르는 마지막 봉우리 이외에는
돌맹이 구경하기도 힘든 그런 陸山이기에 산꾼들은 이런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죠

형제봉 정상에서 아마 수지 방향이라고 추측되는 곳을 처음으로 조망했습니다

서쪽 방향..

북쪽 방향
형제봉 정상에서도 간신히 조망한게 세장의 사진 뿐입니다
도데체 바같 세상이 보이지 않아 감옥생활 하는듯했으며
하산 할때까지 거의 같은 "숲의 터널" 속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산림이 잘 우거졌다고 해야하나요?

형제봉을 내려와 시루봉으로 향하는 곳에 하늘이 쬐끔 보이니 사람들이 몰려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비집고 들어가 처음으로 겨우 앞으로 가야할 길을 알아 냈습니다
저 앞의 제일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비로봉(종루봉)이며 우측 능선의 중간 쯤이 
광교산의 정상인 시루봉이라하더군요
가운데 멀리 보이는 철탑 같은 것이 방송국 송신탑이라는 설명을 산꾼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이제서야 광교산의 윤곽이 조금 잡혔으며, 흠~ 이제부터 등산이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내려가야 하더군요

바로 오른쪽에 급경사라 계단을 설치해 놨습니다
    
내리막 급경사도 잠깐이고 순탄한 길을 걷습니다
    
[김준용 장군 전승비]안내 표지판
내용을 요약하면
병자호란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김준용 장군(1586~1642)의 戰勝地에
碑모양으로 암반에 다음과 같이 새겨 놨다고 합니다
'충양공김준룡장군전승지(忠襄公金俊龍將軍戰勝地)'라 새기고, 그 좌우에
'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胡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戰勝 내용을 새겨놓았다는데....
정조대왕이 "華城" 축조 때, 영의정이었던 번암 채재공선생이 광교산에 올랐다가 
이 분의 얘기를 듣고 새기게 했다고 합니다.
 번암 채재공 선생에 대해선 저의 산행기 "예봉산-적갑산-운길산 연계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번암 채재공 선생은 등산을 무지무지하게 좋아 하신 분으로 육십칠세에
경기오악중에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관악산을 오르시고 산행기를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팔순까지 사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이지요
        
김준용장군 전승지 안내판에서 조금 가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왼쪽길은 비로봉(종루봉)을 올랐다가 시루봉으로 가고,
오른쪽 길은 바로 시루봉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연히 왼쪽 비로봉으로 올랐습니다. 
어느 봉우리나 마찬 가지로 비로봉도 조금 오르막입니다.
        
비로봉 정상 표지판

비로봉 정상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비로봉 정자 안에는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조가 걸려있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말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비로봉에서 또 하늘을 보고, 또 가야할 곳도 조망 할수 있었습니다
시루봉정상이 능선에 걸쳐 있는듯...

시루봉에서 송신탑 - 통신대 가는 방향이 확 펼쳐지는 군요.
백운산 가는 방향은 저 송신탑과 통신대를 보면 알수 있기에 길안내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비로봉을 내려가니....

[토끼재]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토끼재 등산로에 대한 설명
아마 토끼가 넘나 드는 그런 곳이겠죠?
예쁜 토끼가 뛰어 다니는 모습을 연상하니 토끼재의 옛모습을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청춘의 모습처럼...

토끼재에서 조금 가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광교산의 정상인 "시루봉"으로 가는 길과
시루봉을 가지 않고 바로 "억새밭"으로 가는 우회길 안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시루봉 정상을 갔다가 억새밭으로 가야지요

갈림길에서 조금 가니 광교산의 정상 [시루봉] 표지석이 숲을 뚫고
환한 햇빛을 받으며 그 모습을 드러 냈습니다.
대부분의 산정상은 오르는 경사가 있는데 경사도 없이 불쑥 나타나더군요

[광교산의 정상 시루봉]
582m 높이의 광교산은 백과사전에는 光橋山이라 표기되 있고,
수원시 공식 홈페이지에는 光敎山이라고 표기 해 놨더군요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아는 체 좀 하시는 분들이 광교산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하는데...
정확한 내력은 저 정상석 뒷면에 다음과 같이 써 놨더군요
"수원 북쪽에서  찬 바람을 막아주며 수원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해발 582m의 광교산은 
원래 이름이 광악산이었다. 고려야사에 의하면 928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친히 
정벌하고 귀경하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서 군사들을 위로할 때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을 
솟아 오르는 광경을 보고 부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하여 산이름을 '光敎山'이라 하였다."
    
원래 내 자신의 사진은 산행기에 잘 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물도 시원찮아서 자주 등장하면 보시는 분들이 짜증을 내거던요. ㅎㅎ
그래도 증명사진이니 보일듯 말듯하게 축소해서 한컷 올리니 양해 바람니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5월초 날씨로는 제일 더웠다는 날이라 저도 땀좀 흘렸습니다

시루봉을 내려와 억새밭 방향으로 향합니다

조금 가니 [노루목 대피소]가 나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시다시피 노루목 대피소는 지리산에 있죠? ㅎㅎ 여기도 노루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 정도의 산에선 비를 피하기 위한 정도 일듯....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햇볕이 광교산의 숲으로 차단되어서 최고 더운 날씨임에도 시원했습니다
        
        [TV방송국 송신탑]
조금 가니 우리나라 각 TV방송국 안테나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더군요
        
        에펠탑 같죠?
                
                 두개의 큰 송신탑중에 하나는 3개방송사 것이고
                 다른 하나는 MBC

[억새밭]
송신탑에서 조금 가니 '억새밭'이라는 팻말이 나오는데, 
억새는 없고 돌무덤만 하나 있었습니다
지나는 산꾼에게 억새밭에 왜 억새는 없냐고 물었더니, 옛날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없는거라고 하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산에 갈대가 특정지역에 자라면 그곳은 전에 집이 있었던 자리이며
그 집이 불에 탓을때 그 자리엔 반드시 갈대가 자란다고 알고있습니다
여기도 아마 옛날에 집터가 있었을것입니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로 온길을 자연스럽게 뒤돌아 볼수 있었습니다.
너무 심한 숲은 오히려 우리를 감옥 속에 넣는것과 같습니다
해방 된듯 하지 않습니까? 산은 이래야 다닐 맛이 나는데...

억새밭에서 약간의 오르막을 오름니다
    
미군 군사시설이 나옵니다

[통신대]
여기가 통신대입니다.
저는 '통신대'라고 해서 放送通信大學敎가 있는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美軍 通信部隊를 '통신대'라고 하더군요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백운산과 지지대고개 갈림길 안내판

'通信隊 주요시설'앞 이정표
왼쪽으로 가면 지지대 고개나 광교저수지로 가는 하산길입니다.
白雲山을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합니다

갈림길에서 우측 철조망을 타고 白雲山으로 갈수있습니다.
미군 레이더 기지 시설이 장난이 아니게 규모가 컷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곳을 촬영했다간 잘못하면 붙잡혀 갔습니다만
이제는 숨겨야 할 이유도,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라 암묵적으로 촬영이 허용되죠

백운산 방향으로 와서 뒤돌아 본 미군 통신대 시설

조금 오니 바로 "백운산" 정상이었습니다
미군 통신대는 광교산에 있는게 아니라 백운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원시가 아니라 의왕시였습니다
백운산 정상은 통신대 갈림길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형제봉까지 1시간 10분정도 걸렸고,
형제봉에서 시루봉까지 1시간정도,
시루봉에서 백운산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저는 산행기를 쓸때 시간은 전체적으로 걸린 시간만 표기합니다.
왜냐하면 걷는데 개인차가 크기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별루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평이한 능선코스이기 때문에 알려 드림니다

광교산과 백운산은 "한남정맥"에 있는 산으로서 한남정맥 중의 산중에는
광교산이 제일 높습니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하여 안성의 칠현산을 거쳐 광교산, 백운산,
지지대 고개를 지나 인천을 통과해 김포반도의 끝인 문수산에서 끝납니다
문수산에 대해서도 제가 쓴 산행기를 참고 하세요~ 
정맥을 종주하는 등산마니아들에겐 '지지대 고개'가 유명합니다. 왠지 아시겠죠?
요즈음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나 산경표의 신경준을 따라 백두대간이나 정맥을 종주하는 산행이
등산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남정맥 종주의 릴레이 장소가 바로 "지지대 고개"여서
"지지대 고개"가 마니아들에게 유명한 것입니다

백운산 정상에까지 막걸리를 들고 올라 영업을 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대단한 신념을 존경합니다
    
백운산 정상에서 점심 식사와 쐬주 한잔 했습니다
약 45분정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밥 옆의 돼지고기 안주가 보이시나요?  제 옆지기의 주특기 안주인데 조리법을 알려드리죠
돼지고기는 제일 싼 부위인 '사태'입니다. 
고기는 기름 부위는 분리시키고, 
고기를 삶을 국물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생강,마늘,파,양파,된장,커피,통후추를 넣고 푹 끓입니다.
그리고 소주를 조금 넣고 돼지 사태를 넣고 한시간 이상 삶습니다
기름은 쫙 빠지고 부더러운 살코기만 남습니다. 
많이 삶으면 부더럽고, 조금 삶으면 좀 질깁니다. 너무 부더럽게 오래 삶으면 않됩니다. 
왜내하면 다시 볶아야 하기 때문에 볶을 때 고기가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삶은 사태를 꺼내 찬물에 씻어 적절한 크기로 썹니다.
그리고 후라이팬에 식용유와 다진 마늘을 볶다가, 고기를 넣고 조금 볶다가,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물엿과 파, 후추가루를 넣고 볶아냅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주 안주 입니다. ㅎㅎ 한번 해 보세요. 특허료 주셔야하고..

통신대 우측 철책을 타고 하산하기 시작합니다
광교산, 백운산까지 오르는 시간과 지금부터 하산하는 시간이 비슷하게 걸린듯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알게 됩니다

통신대 정문

통신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계단길이 나 있습니다

계단길이 제법 길었습니다

미군 숙소인듯한 兵舍가 나오면 좌측으로 돌아 나아 갑니다

兵舍를 돌아 나와 뒤돌아 봤습니다

포장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니 "통신대 헬기장"이 나왔습니다
이 헬기장에서 좌측 포장도로를 따라 하산하면 '상광교 버스 종점'이 나온다더군요.
다리 아프신 분들은 여기서 하산하여 버스를 타시면 등산로를 탈출하게 된다는군요
저는 헬기장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표지가 있었고

통신대 헬기장에서 뒤돌아 보고

"광교 헬기장" 가는 길을 찾아 내려 갔습니다
    
    
미군 통신대 헬기장에서 광교 헬기장까지는 지도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거리가 있었습니다
내리막 오르막을 여러번 거치며....길을 모르면 길손에게 묻고...

[광교 헬기장]에 왔습니다
통신대 헬기장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있습니다

광교 헬기장에서 오른쪽 똑바로 가면 "지지대 고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지대(遲遲臺)고개
수원은 효의 도시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대왕의 애틋한 사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하는데, 
그 중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국유지)에 위치한 지지대고개라고 하는 
서울에서 융릉으로 오거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야트막한 산으로 
우리에게 효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것 같습니다. 
이 고개에는 정조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조가 이 산을 오르면 멀리 화산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가 보이는데도 
거기까지 가는 시간이 아주 더디게 느껴져서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한탄을 하였고, 
참배를 마치고 서울에 환궁을 할 때는 이고개의마루턱에 어가를 멈추어 서게 하고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져 
이러한 사연 때문에 이 고개를 '느리게 느리게 넘어가는 고개' 
또는 '더디게 더디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의 한자어를써서 지지대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순조 7년(1807) 정조의 효성을 전하자는 신현의 건의에 따라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답니다.

광교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내려 가야 반딧불이 화장실로 원점회귀를 할수 있습니다
멀리 형제봉 능선이 보입니다.
이제서야 왜 오르막이 별루였는지 알았습니다
형제봉에서 좌측으로 폭 페인 부분이 형제봉에서 비로봉-시루봉으로 가는 계곡 같지 않은
계곡이었을 뿐 거의 평지를 걷고 또 걷고 걸었을 뿐 힘든 오르막은 거의 없었습니다
    
광교 헬기장에서 내려 가는 길엔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등산로에 들어 서면 숲으로 외곽 조망이 안됨으로 어디가 어디인지 갑갑합니다

앞에 가는 부부 산객에게 길안내를 부탁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반딧불이화장실로 회귀해야하고 저분들은 '보건환경연구원' 쪽으로 간다고하더군요
"홍어와 무인도" 저의 블로그를 알려주고 시간 나면 들리시라고 했는데....

거북바위 방향으로 제법 내려 갔습니다

광교 저수지 방향으로 내려 가는 이정표가 나왔습니다
안내를 해 주신 부부산꾼분들이 여기서 마을회관 방향인 좌측으로 내려 가라고 하더군요

부부산꾼들은 보건환경 연구원 쪽으로 가시고....
"홍어와 무인도"라고 블로그 이름을 지은 이유를 묻기도 했는데....
저의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 보시면 아실수 있습니다만..읽으실려는지...
고마웠구요~건강하시고 안산 즐산 하세요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 오니 예림식물원이라는 무인경비 꽃판매장이 있었고....

상광교 마을이 나왔습니다

이 다리가 新上光敎橋이며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버스를 탈까 망서리다가
종주하러 와서 버스를 탄다는건 쪽 팔리는 일이라 걷기 시작 했습니다
여기서 반딧불이까지 무지하게 멀더군요.
    
이제부터는 산행이 아니고 트랙킹입니다.
사실 산길보다 트랙킹이 더 지루하고 다리 아픔니다.
오르막이 별루여서 다리는 괜찮은데, 워낙 많이 걸어 발바닥이 아팟습니다

상광교에서 하광교로 내려가니 길 가운데에 큰 느티나무가 멋있게 서 있었습니다.
수령이 370년 �답니다


가게에서 아이스 돼지 바- 하나 사먹으며 걸어 내려 가니 영동고속도로가
광교터널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고....

[광교 쉼터] 공원
고속도로 밑을 지나니 바로 광교 쉼터가 나왔습니다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광교저수지 맨윗쪽에 만들어진 휴식공간이었습니다

광교쉼터에서 광교저수지 오른쪽 산밑 산책로를 따라 가면 경치가 좋다는 안내를 받고
산책로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산책로는 한산 하면서도 운치가 있었습니다
발바닥이 아파 앞에 보이는 정자에서 조금 쉬었습니다.

정자에서 바라 본 형제봉과 시루봉
언제나 그렇듯 지나고 나면 내가 어떻게 저 먼 거리를 걸었을까..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오늘 광교산은 경사도가 별루여서 힘들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장난이 아니게 길어
많은 시간이 소요�습니다

산책로 운치 있습니다
이런 산책로에는 주로 젊은이들이 걷는게 아니고 연세 있으신 홀애비 과부들이 주로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지요 ㅎㅎ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의 자기 고장 가꾸기가 무진장 활성화 되어 환경이 좋아 졌습니다만
더 급한 곳에 들여야 할 예산을 전시행정을 위해 소모한다는 비판도 있지요

광교저수지댐에 다달았습니다
이 저수지 산책로만 4km가 넘으니 얼마나 많이 걷는지 아시겠죠?
건너편에 "반딧불이 화장실"이 보입니다

산책로에서 댐위로 오르는 길도 아름답게 치장 해 놨습니다

광교저수지 댐 윗길

댐 위에서 바라 본 걸었던 산줄기가 아득히 뻗어 있습니다.저 맨 뒷쪽의 검은 능선을 돌았습니다

[광교 공원]
오를 때 못 들어 가 봤기에 들어 가 봤습니다
             
강감찬 장군 동상을 세워 놨는데 수원이랑 뭔 관계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는 잘 아시는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산 밑의 "낙성대"이지요?
태어 날때 별이 떨어 졌다해서 생긴 이름이라는데....
또 묘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고...팔십사세까지 장수하신것도 유명하고...
강감찬 장군은 키가 아주 작았고 못생기기로도 유명했습니다. 
서른다섯이 넘어 과거에 급제해서 대기만성형 역사인물로 자리 메김하고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강감찬 장군은 文科 과거에 합격하여 요즘으로 말하자면 교육부, 문화관광부등에서 일했으며
나중에 武人으로 거란족의 천적으로 활동했지요. 
강감찬 장군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文武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분이었지요
이것으로 길고 긴 "걷기"를 마쳤습니다. 총 6시간40분이 걸렸습니다.
트랙킹이 장난이 아니었으며 백운산 정상에서 점심과 소주 한잔 하는데 45분이 걸렸을 뿐
열심히 걸었는데도 시간은 많이 걸린 듯 합니다
             
              오늘 걸은 코스를 요약 정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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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岳山(포천 운주사-대원사 방향) 
4월26일 모처럼 새벽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요즘 봄가뭄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하는데 내리는 비는 분명 단비였습니다만
산행을 예정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겐 불청객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운악산(포천 운주사-대원사 방향)을 가기로 한 날이기에 내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못먹어도 GO~!!를 외치며 강변북로를 따라 구리로 해서 퇴계원, 광릉, 베어스타운을 지나
47번 국도를 따라 이동 방향으로 올라가면 '운악산휴게소'가 나옵니다.
(중간에 현등사 방향은 가평쪽에서 운악산 등산하는 곳이니 구별하시어 가시기 바람니다)
'운악산휴게소'에 차를 주차 시키고(무료) 산행 준비를 했습니다.
다행이 내리던 비는 완전히 그치고 구름만 잔뜩 끼어 운악산 중턱부터 정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운악산(포천 운주사 방향) 입구
운주사는 앞의 '운악산자연휴양림'이라는 입간판 바로뒷쪽에 있습니다

운악산(포천 운주사 방향)입구에 있는 휴게소
이곳에 주차(무료)하고 화장실등 용무를 보고 산행 준비를 합니다

등산로 입구
등산관광버스가 한대 와서 갑자기 산객이 늘었습니다만, 이쪽편은 현등사쪽 보다
등산객이 적다고 합니다

등산 안내도를 보고 1코스로 올라 3코스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등산로를 들어서면 바로 이정표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으로 가야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향하는 1번코스가 나옵니다. 가운데는 계곡코스

앞의 나무 계단 보이시죠? 저곳으로 올라야 1번코스를 갈수 있습니다

나무계단을 올라 등산로에 진입하면 이젠 특별히 길안내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길을 따라 열심히 오르면 됩니다

조금 오르면 [폭포전망대]가 나오는데 꼭 구경하고 가세요
설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고 피투성이가 되 도망가다가
저 虹爆에서 피를 닦고 갔다고하는데, 그래서 폭포의 바위가 붉다고 한다네요
하지만 虹爆의 虹은 무지개 '홍'자 입니다. 홍예문 할때의 홍자와 같습니다

"虹爆"
운악산의 정상은 구름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고, 중턱의 虹爆이 물이 없어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만 여름엔 빗물이 폭포를 이뤄 물보라가
무지개를 이룬다고 해서 虹爆이라고 한답니다..그러므로 우리말로 '무지개 폭포'
겨울엔 저 虹爆에 얼음이 얼어 붙어 빙벽타기에 유명한 곳이라는군요
여하튼 새벽에 비가 내렸는데도 그 량이 적었는지 물보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천방향의 운주사에서 오르는 등산코스는 경사가 심했습니다
아주 가파르게 정상까지 올라야합니다

조금 더 오르면 웅장한 암벽 아래 샘물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급한 경사길을 오릅니다


"신선대"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만, 정말 神仙臺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특별한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까 등산로 초입의 '폭포전망대'에서 바라 봤던 虹爆 밑에서 폭포수가 없는
폭포라고하는 암벽만을 바라 보았습니다

포천방향에서 오르는 운악산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별루였습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보는 운악산은 원시림의 느낌이 들 정도였답니다

"대궐터"라는 안내판은 있으나 어디에도 대궐이 있을 만한 곳은 안보였습니다.
가파른 길을 올라 왔는데도 앞으로 정상까지 900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암벽에 붙은 이끼들이 멀리서 볼때는 꼭 소나무 같이 보였습니다

완전히 구름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구름 때문에 지나온 길이나 아랫 풍경은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雲岳山에 온 것이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 아리송송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이 '오리무중' 산행이기에 잘못한 일인것 같기도 한데
글자 그대로  雲岳山을 구름 속에서 볼수 있어 다행이었는지....말입니다
정상 부근이 다가 올수록 구름은 그 위력을 더욱 뽐냈습니다

구름 속에서 뭔가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습니다.

"애기봉"이었습니다
절묘한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 이제까지의 공허함을 한번에 메워주었습니다.
애기를 업고 있는 듯 합니다

애기봉 옆에는 아마도 애기를 낳는데 일등공신이 되었을 듯한 부러운 연장이
두개나 우뚝 서 있었습니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를 즐겁게 해줍니다

여성들이 매우 좋아 할듯...ㅎㅎ

"애기봉" 옆에는 황홀한 밤의 정사 같은 진달래가  활짝 피어  희뿌연 구름나라 속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애기봉에서 운악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수 없었고
꿈속을 헤메이는 듯 했습니다.
그냥 이 꿈 속에서 영원히 깨어 나지 말것을.....

운악산 서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운악산엔 정상이 서봉과 동봉이 있었는데 동봉이 조금 더 높더군요
구름 때문에 주변 경관을 아무것도 볼수 없었습니다
봉래 양사언 - 이 분이 '태산이 높다하되 구름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들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라는 태산가를 지은
조선 중기의 명필가이지요. 이 양반이 운악산을 이렇게 표현 했답니다
"꽃같은 봉우리는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瑞記(서기)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다"
봉래 양사언은 철원현감으로 있을때 금강산을 너무 사랑하게되 자신의 호를 "봉래"라고 지었습니다
여름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하죠? 하여튼 등산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했으며 그의 산행기도
많이 있습니다. 봉래 양사언에 대해서 제가 오래전에 쓴 글이 있는데 찾아 한번 읽어 보세요
저의 블로그 "역사의 숨결"에 가셔서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를 찾아 읽어 보세요

운악산 서봉에서 동봉으로 갔습니다만, 구름 속을 떠도는 느낌 
東峰이 西峰보다 2m 더 높았는데 저 뒤에 보이는 바위 높이 때문인듯 했습니다
저 바위를 가까이 가보니....

뭔 漢文이 쓰여있었는데...이런곳엔 주로 옛선비들이 詩한수 갈겨 놓는 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함부러 아는 척을 않하지요. 왜냐면 어려운 한문들이 많아 잘못하면 무식이 탄로
날수 있기 때문에 그냥 고개만 끄득거리고 지나치지요..ㅎㅎ
그런데 자세히 봤더니
忠誠 名譽 團決
飛虎決死隊
決死突擊隊
決死突擊隊
決死突擊隊
이렇게 쓰여져 있는게 아닙니까? 어떤 눔들이 이런 자연홰손을 했단 말입니까?
아마 이곳에 군부대가 있었었는지....나쁜 눔들
잘못했으면 무식이 더 탄로 날뻔 했습니다...ㅎㅎ

운악산 동봉 정상석
서울의 관악산, 파주의 감악산,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과 함께
京畿五岳으로 불리워지는 雲岳山 정상에 섰습니다

절고개
운악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 오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현등사 방향은 가평으로 가는 길이므로,  원점 회귀를 하려면 대원사 방향으로 내려가야만
주차 해 논 차를 찾을수 있습니다

하산 할수록 무슨 바위인지 모르는 바위가 구름을 뚤고 조금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운주사 입구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던 능선을 반대쪽 하산하는 능선에서 바라 보는 경관
구름으로 뒤덮여 그 속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정말 진귀한 구름 속 여행은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사진은 저의 산우가 찍은 것인데 너무 멋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구름속 雲岳山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듯합니다

내려오는 중턱에서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소주에 진달래를 띄워 한잔 했습니다
그 맛은 글자로 표현 할수 없습니다
다른 반찬이 많았는데 여기서 사진으로는 보여 주지 못합니다
보여 드리면 앞으로 같이 가자고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질것같아서...ㅎㅎ


내려 가는 길도 급경사였습니다
저는 한번 굴러서 엉치뼈를 약간 다쳤습니다만 엉치뼈보다 옷이 더러워져서,,,ㅎㅎ

경사가 심한 곳에는 사다리도 설치해 놨더군요. 어느 정도의 경사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계곡까지 내려오니 구름이 걷치고 시야가 트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계곡물에 발 담궈보고 금년엔 처음으로 시원하게.....
날씬한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등산을 더 잘한다구요..ㅎ

대원사로 하산 했습니다

대원사는 전통있는 절이 아니고 최근에 지은 절인듯....
구경거리는 하나도 없었고....

앞 화단에 핀 꽃만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대원사에서 운악휴게소로 되돌아 가는 길.
멀지않은 트랙킹을 합니다.

내려와서 바라 보니 雲岳山의 전체 모습이 보였습니다
운악산은 산세가 아름다워 경기도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는데
저희는 산행중에 구름때문에 그 진면모를 보지 못했습니다

"봉래 양사언"과 "백사 이항복"의 고향이 포천이라 그 분들의 자취가 많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구름 때문에 ......가을에 꼭 다시 와 그들의 체취를 느끼리라....

오늘 산행 코스는 1번 코스로 올라 3번 코스로 내려 왔습니다
오르는데 1시간30분 걸렸으며, 점심에 한잔 하는데 1시간30분, 하산에 1시간정도
시간은 별로 안걸리지만 경사도가 높아 땀은 많이 흘렸습니다
♬ 꽃이 피는 날에는 / 소리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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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門에서 우측으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나타나는 북한산성의 핵심문
오늘의 출발지가 될 大西門입니다
北漢山城十二之門從走를 하는 대부분의 산꾼들이 이곳에서 출발합니다만
北漢山城十二之門從走를 하시는 분들은 산행에 대해선 방귀깨나 뀐다는 분들이
도전함으로 운동겸 하시는 분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지요

[大西門(十二之門의 첫번째 문]
대서문--> 가사당 암문--> 부왕동 암문--> 청수동 암문--> 대남문
-->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위문--> 북문--> 시구문
일반적으로 산행 시간은 약8시간30분으로 예상하고 떠나지만 개인차도 있고
중간에 백운대를 오른다거나 쐬주를 한잔 하면 더 걸릴수도 있습니다
   

대서문 좌측 의상봉 등산코스 진입로
14문 종주도 종주이지만 의상봉코스 산행을 즐기시려면 中城門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물론 中城門으로 해서 가사당 암문으로 오르는 쉬운 14문종주 코스도 있습니다만
의상봉을 오를수 없기 때문에 재미 없습니다. 
등산으로는 의상봉이 하일라이트이기 때문입니다

[초입의 의상봉코스]
성벽을 따라 길고 긴 산행을 시작합니다

[조금 올라서 내려다 본 大西門]
사진 속에 올라 오는 등산마니아가 저의 山友인데 매주말 산에 가는 일과
교회 가는일이 삶의 유일한 樂이라고 합니다

[의상봉 코스]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성12문종주나 의상봉코스를 자주 간다고 합니다만
대서문에서 시작하는 의상봉 코스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별루입니다.
그 많큼 경사도가 높고 험난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이 없기 때문입니다
城을 쌓기에는 천혜의 요새가 되기도 하겠지요

[의상봉 중턱에서 바라 본 백운대]
앞으로 이 의상봉 코스를 돌아  북한산의 최정상인 저 백운대 꼭대기까지 오를 예정입니다

대서문에서 의상봉을 오르는 길은 암벽과 나무가지로 길을 못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적어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으며 호젓한 릿지를 즐길수 있습니다

깍아지른 암벽 밑으로 산성 내부가 보입니다.

이곳을 가지 않고는 감상할수 없는 자연경관이 흐르는 땀을 닦아 줍니다

의상봉 정상이 다가오고 있는 듯 합니다
왜냐면 의상봉 다음 봉우리인 '용출봉'이 보이기 시작 하기 때문입니다

[의상봉 정상]
우리나라 대표산에는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많습니다
불교를 얘기하자면 절간을 얘기해야하고, 절간을 얘기하려면 원효와 의상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지요
그러한 유명 절간은 대부분 名山들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 북한산에도 좌측엔 원효봉, 우측엔 의상봉이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불교에서는 석가보다 이 분들이 더 유명하지요?

[의상봉에서 바라 본 용출봉]
우측 멀리 비봉이 조그마하게 보이는군요
힘들게 오른 의상봉에서 거의 하산 수준으로 내려 갔다가 다시 용출봉을 올라야 합니다
의상봉 코스를 능선으로 생각하고 가면 혼줄 납니다
오르라ㅏㅏㄱ 내리라ㅏㅏㄱ을 여덟번 정도 합니다. 앞으로 소개 됩니다

[의상봉에서 용출봉으로 가는 중간쯤에 있는 국녕사]
이 절은 새로 증축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몇년전 까지만 해도 없었으니까요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그런 의미의 절이겠죠?
엄청나게 큰 불상이 인상적입니다

[가사당 암문(十二之門의 두번째 문)]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 가사당 암문
여기서 北漢山城의 城門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하고 가겠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북한산성에는 14개의 성문이 있는데, 크게 大門과 暗門의 형태로 나누워지고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등이 大門에 해당되고, 
문의 높이가 11척~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와 문루가 설치되 있습니다
1척은 요즘 단위로 33cm정도라니 환산해 보세요
한편 암문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조그마하게 설치하여 비밀통로로
이용하는 그런 용도의 문이며 암문의 암은 어두울 暗입니다
이런 암문이 있는 곳에는 절을 지어 승려로 하여금 守門도 하고 생활터전도 되게하여
일거양득을 노렸는데, 전쟁이 없을시에 정규군을 배치하려면 많은 경비가 들기때문에
그런 방법을 썼다고 하는군요
          

[가사당 암문에서 용출봉 오르는 길]
용출봉 오르는 길은 암벽보다는 흙길이 많습니다만 정상 부근은 모두 암벽입니다
경사가 심해 의상봉에서 힘을 뺀 상태라 더 힘들게 올라야 합니다

우측으로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 산성의 성벽이 함께 따라 올라 갑니다

용출봉 정상을 향하여

용출봉 정상 부근에서 뒤돌아 본 의상봉
북한산의 자랑 적송 사이로 의상봉이 보입니다만, 산성 입구에서 올려다 본 모습과는
자못 다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잡았던 흔적이 소나무 가지의 광택으로도 짐작 갑니다

[용출봉 정상]

[용출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응봉"]
가운데 응봉이며 우측 계곡에 조그마하게 삼천사가 보입니다
재미있습니다. 저 응봉코스를 오를 땐 무척 힘들었는데 용출봉에서 내려다 보니 초라하게 보이는 군요
응봉능선코스에 대해선 저의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용출봉에서 바라 본 용혈봉]

용출봉에서 용혈봉을 가기 위해선 다시 하산 수준의 내리막을 가야 합니다
이런 인공 구조물들이 설치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의상봉코스를 찾게 되었습니다만
자연경관은 홰손되고 말았습니다

[용출봉을 뒤돌아 보며...]

용출봉과 용혈봉 사이에 있는 멋진 조물주의 조각품
감상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거시기가 생각 납니다..ㅎㅎ

더 와서 뒤돌아 본 용출봉

용혈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용혈봉 정상]
뒤로 용출봉이 빼꼼이 얼골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곳 용혈봉은 지난해 여름에 낙뢰 사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당시 조선일보 신문기사를 보여 드리오니 산에 가실 때는 언제나 조심 하시기 바람니다

◆낙뢰 사고 현장
29일 오전 11시55분쯤 ‘산비둘기 산우회’ 회원 10여명이 북한산 용혈봉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전날 북한산 인수봉의 산장에서 야영을 했던 회원들은 이날 오전 8시쯤부터 서둘러 등반에 나섰다. 
       
           
선두에 섰던 남녀회원 4명이 20㎡ 가량 넓이의 바위 꼭대기 정상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작스런 낙뢰(落雷)가 봉우리 바위를 내리쳤다. 
황모(여·38)씨 등 3명은 몸에 낙뢰를 맞고 그대로 쓰러져 숨졌고, 
안모(57)씨는 낙뢰를 맞고 튕겨져 나가 15m 아래 바위에 부딪혀 숨진 채 발견됐다. 
정상 부근에 도착한 나머지 회원들도 낙뢰를 맞고 숲 속으로 튕겨져 나가거나 등산로에서 쓰러져 부상을 입었다. 
일부 회원들은 하반신이 일시적으로 마비돼 움직이지 못했다. 
비옷을 챙겨 입느라 선두와 100m가량 떨어진 채 등반하고 있었던 회원 강한철(55)씨는 
“갑자기 눈 앞에서 불이 번쩍하면서 충격을 받아 내 몸이 뒤 쪽으로 튕겨져 나갔다”고 말했다. 
이들은 2001년 7월 히말라야의 K2(8611m)를 정복한 뒤 하산길에 실종된 박영도 회원을 추모하는 
제(祭)를 올리기 위해 북한산에 왔다가 변을 당했다. 
이날 용혈봉 정상을 향해 걷던 20여명의 다른 등산객 중 일부는 등산로 계단에 심어놓은 
쇠말뚝과 쇠줄을 잡았다가 감전돼 부상당했다. 
왼쪽 발등에 2도 화상을 입은 양동훈(57)씨는 “용혈봉 못 미친 곳에서 쇠줄을 잡는 순간 왼쪽 발목에 
전기가 찌릿하고 통하면서 의식을 잃었다”며 “깨어나 보니 양말이 찢어지고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용혈봉은 북한산 의상능선 구간에 있는 봉우리들 중 하나로 암릉산행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용혈봉에서 뒤돌아 본 용출봉과 의상봉]

[용혈봉에서 바라 본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
저곳을 오르는 일이 오늘 산행의 피크입니다. 부지런히 가야합니다

용혈봉에서 증취봉을 향해...진달래는 정상 부근에서 만개하고 있습니다

[증취봉 정상]
삼천사에서 의상봉 코스를 올려다 봤을때, 증취봉이 가장 우람하고 멋있게
삼천사의 배경이 되어 줍니다만, 이곳에선 삼천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암문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증취봉에서 나월봉으로 가고 있습니다

증취봉을 내려 가는 길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증취봉에서 나월봉 중간에 있는 "부왕동암문"(十二之門의 세번째 문)
앞으로 가야할 문이 아직도 아홉개가 남았습니다

부왕동암문에서 산성 안쪽으로 50m 정도 내려 가면 약수터가 있습니다
여기서 북한산 대피소 약수터까지는 물이 나오는 곳을 못봤습니다
의상봉 코스를 오다 보면 물을 많이 마셔 물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물을 보충해서 갑니다. 하지만 성질 급한 사람은 물을 받는데
인내심이 많이 필요합니다. 물이 쬐끔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맛은 매우 시원하고 좋습니다
옛날엔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고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제 눈에는 몇개 안보입니다

부왕동암문에서 나월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나월봉 정상을 향해....

나월봉 정상엔 릿지를 해야하기 때문에 올라 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정상 표지판도 없기 때문에 처음 가시는 분들은 나월봉이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나월"이나 "나한"은 석가모니의 제자들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월봉이니 나한봉이니 하는 봉우리 이름들도 우리나라 여러 명산에서 볼수 있는 것은
의상봉과 원효봉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셔도 무관 할듯합니다

나월봉 정상 옆구리를 타고 나한봉을 가기 위해 내려갑니다

나월봉 옆구리에 이런 바위틈을 타고 내려가야만 나한봉으로 갈수 있습니다
저의 山友가 사진을 찍고 서 있는 저 바위가 냐려가서 보면 정말 절묘한 조각품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틈을 내려와 뒤돌아 보지 않고 그냥 갑니다
정말 절묘하지요? 보는 사람들에 따라 "제비"를 닮았다고 하거나 "참새"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같은 값이면 "제비"를 닮았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날개 모양까지 정확히 만들어졌는지 감탄사만 나옵니다

나월봉에서 바라본 오늘 산행의 피크가 될 백운대의 모습이 아직도 아득합니다

완전 돌덩이 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 뿌리가 돌덩이 위로 옆으로 뻗어 아래 흙이 있는 곳까지
내려서 물을 가져 오는 듯합니다. 존경스런 소나무

[나한봉 정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이며 식사하는 장소로 유명합니다

나한봉에서 문수봉으로 가기전에 이름을 잘 모르는 큰 봉우리를 넘어야 합니다
우측 뒷쪽에 문수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 합니다

비봉과 사모바위 쪽에서 승가봉을 지나 문수봉을 오르는 문수봉 암벽코스가 보입니다

[뒤돌아 본 나한봉]

[청수동암문(十二之門의 네번째 문)]
비봉, 사모바위쪽에서 문수봉 암벽코스를 우회해서 오면 이 "청수동암문"을 통과하게 되있습니다
가장 많은 등산객이 통과하는 門중에 하나 입니다

이 청수동암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북한산성 주능선을 다닐수 없습니다

청수동암문의 성벽을 타고 문수봉으로 갈수 있습니다만, 좌측에 인도가 있으니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인도를 이용하시기 바람니다


[청수동암문에서 바라본 문수봉 정상]

저의 산행기를 계속 읽으신 분들에게는 익숙해진 문수봉 정상의 태극기입니다
     
대남문이 보입니다. 저의 산행기에서 여러번 보셨죠? 이렇듯 북한산 서부지역에서 산행을 하면 대부분 대남문을 거치게 되있습니다 [대남문] [대남문(十二之門의 다섯번째 문)] 대남문 근처까지 오르면 대체로 점심시간이 됩니다 점심식사를 하는 산꾼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이 다정스럽습니다 [대성문] 대남문을 지나 동쪽으로 山城주능선을 따라 조금 가면 대성문이 나옵니다 대성문이 대남문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대성문(十二之門의 여섯번째 문)] 대남문은 구기동 쪽에서 올라 오는 문이며, 대성문은 평창동쪽에서 올라 오는 문입니다 다시 주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넘어 갑니다 산성의 주능선은 동쪽에서 남쪽까지의 서울을 모두 조망 할수있습니다 산성 주 능선은 평이한 능선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합니다 뒤돌아 보고.... 또 오르막을 오르고... 저 앞의 성곽의 돌출부분이 '곡성'이라고 성곽의 바같 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 놨답니다 [곡성을 지나면 "보국문"이 나옵니다(十二之門의 일곱번째 문)] 보국문은 북악터널이나 국민대쪽에서 올라 오는 문입니다 성벽을 따라 또 봉우리를 넘습니다 그러면 그 유명한 "칼바위 능선" 표지판이 보입니다 북한산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중에 이 칼바위 능선과, 진달래 능선이 유명합니다. 칼처럼 보이시나요? [대동문(十二之門의 여덟번째 문)] 칼바위능선 입구를 지나 조금 가면 大東門이 나옵니다 대동문은 정릉쪽에서 주로 올라 옵니다 [대동문] 대동문 앞은 제법 넓직한 마당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곳 근처 숲속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쐬주도 한잔 했습니다 다시 봉우리를 넘습니다 중간에 이름 붙이기 나름인 바위가 있는데 저는 처녀총각 바위라고 부름니다 [東將臺] 산성 주능선에선 제일 높은 곳에 東將臺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북한산성 내부 구석구석을 모두 관측할수 있는 가장 조망이 좋은 곳입니다 [東將臺] 그래서 이곳이 북한산성 수비 총사령관이 작전지휘를 하는 곳입니다 유식하게 영어로 하자면 command center인 셈이죠 다시 용암문을 향해 걷습니다. 오늘 무지하게 걸었습니다만. 이제 반쯤 걸었으니 어느정도 거리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죠? 북한산 가장 높은 곳에서 샘물이 나오는 '북한산 대피소'입니다 원래 이곳은 '용암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답니다 가사당암문에서 설명 드렸다시피 이런 암문 근처엔 절간을 만들어 전쟁이 없을 때엔 정규군 대신에 승려들로 하여금 守門도 하고 또 벌어 먹고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를 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워준 절들이었습니다 북한산 대피소 실제 추위를 피하긴 어려운 문도 없는 환경이나 명목상 있는듯�니다 북한산 대피소에서 보는 노적봉의 옆 모습 앞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옆모습을 보고는 반쪽 가리라고 합니다 북한산 대피소에 백운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용암문"이 나옵니다 [十二之門의 아홉번째 문] 이쪽 용암문은 서울의 수유리쪽에서 올라 오는 문입니다 조금 더 가까워진 노적봉의 옆모습 노적봉을 향하여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깁니다 노적봉 정상은 아닙니다만, 정상부근의 갈림길에 올랐습니다 우측의 만경대를 끼고 백운대로 향합니다 우측의 만경대와 좌측의 백운대가 그 자태를 뽐내며 위용을 들어 냅니다 북한산의 최고봉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백운대를 가기 위해선 다시 암벽을 올라야 합니다 여기쯤 오면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많이 힘들어 합니다 [백운대] 30억년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그리고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백운대 --- 이제까지의 저의 산행기에선 이 백운대를 먼 발치에서만 보여 드렸는데 이번엔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 즉 삼각산을 완전히 정복해 드리겠습니다 [백운대] 북한산성12지문종주에는 백운대 정상을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로지 저의 산행기를 기다리시는 분들을 위해 힘들지만 오릅니다..ㅎㅎ 만경대와 백운대 사이의 계곡에 열번째 성문인 "위문"이 있습니다 "위문"을 향하여 다시 오릅니다 [北漢山城十二之門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衛門"입니다(十二之門의 열번째 문)] 만경대와 백운대 사이를 막아 출입을 통제하던 곳이랍니다 "위문"쪽은 주로 우의동쪽에서 오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인수봉, 영봉, 상장능선, 도봉산, 우의동쪽으로 갈수 있습니다 [위문밖 성곽] 이곳 위문의 높이가 625m이니 백운대 정상까지는 해발로 200m가 넘게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 십이지문종주 하시는 분들은 시간관계상 백운대 정상을 오르지 않고 바로 北門으로 갑니다만 오늘 저는 백운대 정상을 올라 못 오르신 분들을 위해 사진을 몇장 찍어 올리려합니다 깍까지른 백운대 암벽을 해발 200m이상을 다시 오른다는 것은 왠만한 산을 하나 더오르는것과 같습니다 [백운대를 오르며 바라 본 "인수봉"] 점점이 암벽에 개미처럼 붙어있는 수많은 락클라이머들이 보이시나요? 저는 저런 곳을 오를 능력도 없지만 만수무강에 큰 영향을 줄까봐 저런 곳은 처음부터 갈 생각을 않습니다만 저분들은 무척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사고도 많이 일어나 인수봉 아래의 靈峰에는 백사십여개의 추모碑가 공동묘지처럼 세워져 있습니다. 공원화를 위해 5월말까지 강제 철거 한다지요? 가파른 백운대를 오릅니다. 일요일에는 산객들이 많아 교통체증이 엄청나게 일어 나는 곳입니다 일요일에 이곳 백운대를 오르려면 한시간 정도 이상 시간 낭비를 해야 할겁니다 [만경대] 만경대는 조선 건국의 실세 삼봉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양천도를 위해 풍수지리에 입각해 한양땅을 살피러 올라 서울을 조망 했다고 하며 펼쳐지는 그 경치가 만개가 넘어 불려졌다는 말도 있더군요 어떻게 이름이 붙여졌던 그런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운대 정상의 모습입니다 두세평정도 될까요? 아주 좁아 대여섯명만 올라도 꽉 찰 정도이니 일요일엔 오를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백운대 정상에 올랐습니다 산성입구를 출발한지 7시간반만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岳)입니다. 부아악이란 명칭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어느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 )과 산봉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 (부아 →불→뿔)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부아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시대 성종(成宗) 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華嶽)으로 불렸습니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 중기의 숙종이 축조한 북한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 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백운대 정상에 새겨진 삼일운동관련 글입니다 백운대 정상 바위에 새겨 논 글의 내용을 설명해 놨습니다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 본 남쪽의 만경대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 본 남쪽의 노적봉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 본 동쪽의 인수봉 엄청나게 많은 락클라이머들이 개미처럼 인수봉에 붙어 있습니다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 본 서쪽의 염초봉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 본 그 유명한 "숨은 벽 능선" 숨은벽 능선은 저의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통일 기원 정상석 백운대를 내려 와서 나머지 두개의 門을 향해 길을 재촉했습니다 북문을 가기 위해선 백운대를 반쯤 내려와 우측 대동사와 상원사쪽으로 오르면 길이 많이 단축됩니다 [대동사] 백운대에서 계곡으로 조금 내려와 우측으로 '대동사' 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상운사] 대동사를 지나면 곧 상운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의 北門을 향해 또 오릅니다 이때는 걷는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종주를 위해 열심히 걸었습니다 북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문의 누각은 불타 없어지고 홍예와 성벽만이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十二之門의 열한번째 문) 어서 빨리 복원이 되길 바람니다. 北漢山城十二之門의 열한번째 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인 시구문은 원효봉을 올랐다가 완전히 하산 하는 곳 쯤에 있어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날이 어두워 지기 시작합니다 원효봉 정상을 향해 다시 또 걷습니다 [원효봉 정상] 오늘 오전에 종주한 '의상봉 코스'가 보이시나요? 무지무지하게 걸었습니다 저 의상봉 코스를돌아 다시 산성 주능선과 백운대 정상을 오르고, 이 원효봉 정상에 왔습니다 원효봉 정상 - 누워 자고 싶었습니다 이젠 지루한 원효봉을 하산 하는 중입니다 북한산 원효봉의 '원효암'하면 제법 큰 절이겠지하는 생각은 '원효암'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너무 초라한데 왠일인지 모르겠습니다 北漢山城十二之門의 마지막 문인 "시구문"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성안에서 죽은 시체들을 내다 버리는 문이라 시구문이라 한답니다 (十二之門의 마지막 열두번째 문) 여기까지 오는데 아홉시간이 걸렸습니다 백운대도 오르고 점심식사와 쇠주 한잔을 한시간 이상 했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만 저 정도의 산행 능력으로는 그래도 잘 걸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걸어 정말 시구문으로 나오는 느낌이 묘했습니다. 하산하여 북한산성입구 포장마차에서 잔치국수 한그릇 훌훌 마시고 소주 한잔 하고 돌아 왔습니다 걷기도 힘들었고 산행기 만드느라 또 힘들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림니다 언제나 즐산 안산 하세요~~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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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D.K.Hannis,노년의 사회학]에서 발최하여 쉽게 알아 볼수 있도록 편집 한것입니다






♣ 수명을 알려주는 테스트 ♣













오늘도 이렇게만? ㅎㅎ
수명이 어떻게 나왔어요? 짧게 나오신 분들은 생활 습관을 바꿔야하겠지요~~등산 열심히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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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인왕산을 내려와 북악산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인왕산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 4~50분정도 걸린듯 합니다
북악산을 들어 가려면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합니다
바로 청와대 뒷산이기 때문에 경비문제로 신분 확인이 필요하기도 하겠죠

창의문인 자하문 바로 옆 오른쪽에 출입국 사무소같은 신분 확인하는 출입소가 
제법 그럴듯하게 있습니다. 이 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북악산을 들어 갈수 없습니다
컴퓨러에 신분확인을 하고 출입증을 받습니다.

저의 출입증이며 "북악산 서울 성곽 문화유산 탐방"이라고 되있으며
반드시 목에 걸고 다녀야 합니다. 50m간격으로 경비병들이 확인을 합니다

출입구를 통과해 나오면 서울 성곽이 이렇게 펼쳐지며
이제부터 힘든 오르막 계단을 무지 올라야 합니다.

북악산 탐방로는 정말 깔끔하게 단장되 있었습니다.
앞으로 사진을 보시게 되겠지만 역시 대통령궁이라 대내외적으로 상징성이 있어서인지
자연친화적인 목재들을 사용해서 깔끔하게 탐방로를 만들어 놔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제가 왠만하면 칭찬을 않는 넘인데 이번엔 칭찬을 좀 하고 싶군요

북악산은 모두 서울성곽으로 잘 이어져 있으며 탐방길은 거의 모두 계단입니다

북한산 족두리봉이 조망됩니다. 멀리 이곳에서 족두리봉을 보니 새로운 맛

북한산 주능선길에 비봉도 보입니다.
비봉 우측으로 쬐끔 돌출된 것이 사모바위입니다

북악산 서울성곽은 보존이 아주 잘되있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이제까지 일반인들이 들어 갈수 없었던 소위 비무장지대였으니까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 있어 이제까지 못들어 갔던것이 후회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에구~ 걷는게 장난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간 중간 힘들만한 곳에 쉼터를 멋지게 만들어 놔 조망하기에 좋고
잠시 쉬며 여유를 갖게도 해 주었습니다.
많은 배려가 있었습니다

         힘들게 올라 오시는 분들

진달래와 개나리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때, 전에는 '위하여~!!'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진달래~~!!"한다죠?  "진정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의미라네요

처음으로 이정표가 나옵니다
백악마루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나와  서울성의 북문인 "숙정문"으로 가야합니다

북악산의 정상을 올랐는데 북악산이라 표기되 있지 않고 "白岳山"이라는 표지석이
해발 342m를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백악산
이렇듯 일반명사와 고유명사가 우리도 모르게 혼용되서 
일반명사가 고유명사인것처럼 사용하고 있는게 많습니다

백악산 정상에서 바라 본 인왕산

백악산 정상에서 바라 본 남산,,뒷쪽에 관악산이 보입니다

백악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북한산

가야할 길 - 이제부터는 내려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 가는 일도 제법 힘듭니다
저기 가운데가 볼록 나온 성곽이 '곡장- 치'라고 하는 곳입니다

곳곳에 볼거리와 쉼터를 잘 만들어 놨습니다

생각보다 북악산 성곽은 길었습니다. 혜화동까지 보존이 되있다는군요

성벽을 구경 할수 있도록 성벽 밖으로도 탐방로를 일부러 만들어 놨더군요

서울성 [옛이름은 한양성]은 태조 이성계 때부터 세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계속 축성과 개보수를 했다는데 그 때 그때의 축성 형태를 알려주는 섬세함도
잊지 않고 탐방코스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제 성벽의 형태를 보고 시대를 추측할수 있겠죠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 공사를 할때 구간별 공사 책임자 표시제를 시행해서
부실시공을 막았다는 얘기를 KBS역사 스페샬에서 본듯...

단순한 성곽 순환로를 지루하지 않게 잘 꾸며 놨습니다
경치는 정말 좋았습니다.

여기가 성곽의 돌출부로서 "곡장-雉"이라 하더군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OP 즉 관측소이며 성벽을 옆에서 감시하는 곳이기도 하죠

성곽의 돌출부가 생각보다 꽤 컷습니다
외부 사진 촬영이 제한된 곳이 많아서 바깥 광경을 많이 담지 못했습니다만
북악산 뒷쪽으로의 침투는 매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쇠주 한잔도 몰래 하고...좀 쉬면서 커피도 한잔

성곽 사이의 구멍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구멍이 뚤려있는 형태에 따른 용도 설명

화장실도 호텔 수준으로

뒤에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보입니다

다시 "북문"인 "숙정문"을 향하여 내려 갑니다

중간에 구경거리인 "촛대바위"가 있는데 가시면 꼭 구경하세요
사진으로는 모습을 잘 표현할수가 없었습니다. 실력 부족..ㅎ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걸으면 더욱 좋을 듯....

서울성의 북문인 "숙정문"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肅靖門 - 四大門 가운대 가장 원형 그대로 보존되 있는 門이라는 군요
엄숙할 肅, 꽤할 靖

숙정문 계단에 솟아 난 소나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시 세월을 알려 주는 지렛대였습니다.

숙정문 바로 뒤가 "삼청각"이더군요. 삼청각이야 우리가 오래 전부터 자주 접하던 
곳이지요. 한때 갈비집으로 일반음식점 영업을 할때 몇번 가본적도 있고요.
요즘은 한정식집으로 일인분에 4~5만원 하는 듯한데...
지난 2월달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정호영 특별검사팀의 조사를 
여기 삼청각에서 식사하며 받았다고 하죠?... 에궁  말을 아껴야지...
특히 삼청각은 옛날부터 외국 귀빈들이나 근간의 북한 7.4남북공동선언 대표들의
만찬 장소로도 쓰여 졌으며....
독재정권시절 정권실세들의 밀실 정치의 심장역활을 하고, 
하다 못해 독재정권시절 정치깡패들까지도 이곳을 자주 이용한곳으로도 유명하지요
이곳 삼청각에서 스카이웨이 팔각정까지 오르는 산행로를 만들어 놨군요

북문에서 바라 본 서울

북악산 출(입)구에서 출입증을 반납하고 나옵니다

출구에서 나와 삼청공원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이 곳이 나옵니다.
여기서 종로쪽으로 가실 분들은 삼청공원 쪽으로 직진 하시고
정릉이나 삼선교등 북동쪽으로 가실 분들은 여기서 ''와룡공원'쪽으로 내려 가시면
됩니다

         가다 보니 수심에 잠긴 듯한 얼굴 모습의 바위가 보입니다

성벽을 따라 내려 가면 이곳이 나오는데...대공포인듯....여기서 우측으로
내려가며....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끝납니다

삼청공원으로 하산하는 길...길은 하나 뿐이므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삼청공원이 나옵니다.

삼청공원에도 봄꽃들이 만발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이 시절 사회사범들 영장없이 체포해 삼청대 보낸다고 할때 저는 삼청대가
여기  삼청공원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ㅎㅎ
이 삼청 공원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가끔 드나들던 곳이죠
제가 이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녔거던요...좀 있다 모교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뭔 핵교 다녔는지 궁금하세요?  ㅎㅎ 좀 기다리세요

감사원
삼청공원 정문을 나오면 우측이 경복궁 가는 길이고, 좌측이 감사원으로 해서
언덕 넘어 저의 모교 가는 길이 나옵니다

가회동 길..이명박 대통령 사저가 이 근처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의 모교를 가기 위해선 저 앞의 횡단보도있는 곳에서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야하며 바로 중앙고등학교 정문이 나오며 그 앞으로 계동 골목이 펼쳐집니다

중앙고등학교 정문
변함없습니다

계동 골목
이 골목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별로 없는 듯합니다
추억에 젖어 감개가 무량입니다

옛날에 이 계동골목엔 3개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맨 꼭대기 먼곳이 중앙고등학교, 중간이 대동상고였습니다
그 대동상고는 "대동세무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군요.
계동 골목 초입에는 휘문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40여년전에도 있었던 떡뽑기집이 있어 추억도 되새길겸 사먹으며 할머니 한테
지난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 그 할머니는 벌써 가시고 자기도 이렇게 할머니가 됬다고
세월의 무상함을 얘기하더군요..그런면 저도 좀 삭았다는 얘기인데..ㅎㅎ

여기가 저의 모교였던 "徽文高等學校" 자리입니다
이 계동 골목에 변한것은 거의 없는데 유독 이것만 완전히 변해 있습니다
운동장이었던 곳은 주차장으로...교실과 희중당이 있던 곳은 현대그룹 사옥으로
완전히 탈 바꿈해버렸습니다

교문이었던 이곳은 보시다시피....
저희 학교 건너편이 창덕여고였습니다. 지금은 창덕여고도 이사 가고 그 자리엔
헌법재판소가 들어 서 있습니다
회장 선거가 있을 때 마다 입후보자들이 공약으로 내 세우던 것이 있었는데
"제가 당선되면 저 앞에 보이는 창덕여고와 지하도를 놓고 육교를 만들겠습니다"
ㅎㅎ
물론 저의 모교는 강남의 8학군의 대표학교가 되있습니다. 대치동으로 갔습니다
휘문.경기 때문에 대치동을 비롯한 강남의 아파트값이 엄청 오른거 아시나요?
이사를 잘 한거죠..ㅎㅎ 우리 때는 별루이던 학교가 매우 좋아 졌으니까요  ㅎ

저희 학교 교가에도 있는 "볼재"인데 이것만은 잘 보존 되 있군요
당시엔 교실 뒤쪽에 사실 방치되다시피 있어 관심도 없었고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경주의 첨성대와 같은 천문대 였다는 군요

순수 우리말인 "볼재"를 사용하지 않고 "관상감 관천대"라고 설명을 해 놨더군요
오늘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잔득 흐려 있어서 사진빨도 별루였습니다
다행이 산행을 마치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건너편의 "운현궁" - 고종의 아부지 - 흥선 대원군이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던
집을 둘러 보고 오늘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총 산행 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 였습니다. 물론 이곳 저곳 둘러 보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도 했습니다만 이 정도 시간은 염두에 두고 하루를 보내시면
한결 즐거우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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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 북악산 

4월9일 선거일 - 
오늘은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을 가려고 했으나 비님이 오신다는 예보도 있고
미국 갔던 옆지기도 모래 온다고 해서 간단한 산행 후 집청소를 위한것도 있지만
서울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한번도 못가 본 곳 -
청와대 경비 문제로 대한민국 개국이래 처음으로 노무현대통령 때 개방된 곳 -
언젠가 꼭 한번은 가봐야할 곳 - 인왕산과 북악산을 둘러 보기로 했습니다.
인왕산은  완전히 서울 도심에 있으므로 교통이 매우 편리합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됩니다

지하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사직터널쪽으로 직진을 하면 
"사직공원" 직전 삼거리가 나옵니다. 
사직공원 정문을 통과해서 공원 후문으로 나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올라 갔습니다

우측으로 들어서면 배화여대 가는 길이 나오며, 
저 앞의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등산로를 찾아 들어 가는 통로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조금 가면 '종로도서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앞이 사직공원 후문입니다

사직공원 내부
사직공원 정문으로 들어와 후문으로 나오면 거리가 많이 단축되는데 
저는 모르고 조금 돌았습니다

사직공원 안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동상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니, '인왕산 스카이 웨이'가 나왔습니다

인왕산 스카이웨이를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우측으로 들어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인왕산은 좌측위에 있으므로 우측으로 들어 갔다가 
다시 인왕산 스카이웨이로 나와야합니다

인왕산 스카이 웨이를 따라 제법 올라 갑니다
벗꽃과 개나리가 만발 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잡는게 일년 중 한두번 밖에 없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검문소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며 여기서 좌측으로 100m 정도 갑니다

초소가 나오며, 저 초소 건너 편, 즉 우측으로 
아래 사진과 같은 인왕산 입구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장소"
인왕산 등산로 입구는 여기 한곳 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로 와야 합니다.
물론 자하문쪽 출구 한곳이 입구가 될수 있으므로 두곳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쪽에선 유일한 입구이오니 여기를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인왕산 입구에서 부터 길고 긴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좌측의 서울성곽을 끼고 새로 단장한 계단을 성곽이 끝날때까지-즉 북악산을지나
삼청공원 입구 까지 가야만 하니  인왕산-북악산을 가시려면 평상시에
아파트 계단 오르는 연습을 해 두시면 도움이 많이 될것이라 생각됩니다. ㅎㅎ

물론 계단이 없는 곳도 가끔씩 있습니다..ㅎㅎ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오면 인왕산 정상이 보입니다
우측 봉우리가 인왕산 정상입니다

좌측에 멋진 바위가 있는데 ... 인왕산의 비경 선바위라는 듯...

母子바위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모양이라고 母子바위라고 합니다
인왕산과 북악산에는 청와대 외곽경비병들이 사복차림으로 약50m 간격으로 
경비를 서고있어 궁금한게 있으면 안내원 역활을 하며 잘 알려주어 
아주 좋았습니다.

제법 올라 왔습니다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 오기 시작 합니다.
아~! 우리의 서울 !!
전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꿀리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국민의 저력입니다
이제부터의 산행 길은 저 서울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보는 일입니다

곳곳에 방공 군시설들이 있었습니다

좌측 바위가 '범바위'라는데 이쪽에선 범같지 않습니다. 
우측에 인왕산 정상이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나와 있는 인왕산 호랑이 출몰 이야기는 몇번 나오는데
태종5년에는 인왕산 호랑이가 경복궁에도 난입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연산군11년에는 종묘에 까지 난입하는 등 민가의 피해가 컷다고 기록 되 있으니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건 확실한 사실인듯합니다

지나와서 좌측의 범바위를 봤는데 ..글쎄 범바위 같습니까?
아마도 저 아래쪽에서 봐야 할듯...
우측의 대공 방어 군시설이 있는 곳이 옛날의 관측소 였다하고
저 관측소 건너편이 안산 정상인데 봉화대가 있던 곳으로, 
(관측소와 안산 사이가 무악재)
일산 고봉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경복궁에 전달하는 곳이었다 합니다

안산입니다. 안산의 봉화대 자리엔 방공 군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왕산 정상을 향해

인왕산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에서 본 인왕산 정상

인왕산 정상 오르는 마지막 코스

인왕산 정상
처음으로 인왕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십여년을 저 아래 종로구 익선동에 살았으며 
서울을 생활 터전으로 잡고 오랜동안 살았는데도 처음으로 인왕산에 올랐습니다.
그 동안 입산금지였기 때문입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남산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여의도와 관악산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남서쪽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북한산
드디어 북한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한산과 북악산은 구별하며 이 산행기를 읽어야 합니다

가야할 북악산
인왕산-북악산 코스를 우습게 보고 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저도 간단 단순하게 다녀 오겠다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이거 장난이 아닙니다.
4시간 30분 코스이며, 2개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하문 쪽으로 하산 하고 있는데, 
왠 이상한 깃발을 펄럭이며 올라 오는 좀 특이한 사람이 있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대한민국에서 자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꺼꾸러 나보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뭡니까
명함을 주는데 자칭 '참 역사 새 문화 집행관'이라 써 놨습니다
약간 과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자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따따따따 소리를 내면서 올라 오는 무인 모노레일 운반선을 보았습니다
성곽 보수에 사용할 돌들을 아래에서 위로 운송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끝없이 성곽을 따라 진행 합니다

인왕산 출구 입니다
입구가 될수도 있겠죠
인왕산엔 두개의 철문으로 출입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철문을 나와 철문을 한컷 찍어 뒀습니다
처음 사직공원 뒷길에서 만난 '인왕산 스카이 웨이'가 여기로 뻗어 있었으며
이 길은 다시 '북악산 스카이 웨이'로 이어집니다

'인왕산 스카이 웨이'를 따라 조금 내려 와 우측으로 들어 서니 정자가 하나 
나왔습니다.저 정자의 왼쪽 뒤로 진행 해야 자하문(창의문)으로 갈 수 있습니다
뒷쪽으로 북악산이 보입니다

우측의 자하문(창의문)
좌측 다리가 '인왕산 스카이 웨이'에서 '북악산 스카이 웨이'로 바뀌는 지점
효자동에서 세검정 넘어 가는 길 - 옛날엔 이 도로가 엄청 막혔는데
지금은 이 밑으로 터널이 뚤려 교통난을 해소해 이곳은 한산합니다

자하문 입구에는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겨하러 쳐내려 왔을때
이를 막아 낸 종로 경찰서장으로  있던 최규식 서장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자하문 입구
잘 꾸며 놨습니다

창의문(자하문)
서울성은 四大門과 四小門으로 총 8개의 문이 있었답니다
四大門은 아시다시피 남쪽대문인 숭례문, 동쪽대문인 흥인지문,서쪽대문 돈의문,
북쪽대문 숙정문입니다
다만 서대문이라하는 돈의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四小門은 북동쪽에 혜화문, 남동쪽에 광희문, 남서쪽에 소의문, 
북서쪽에 창의문입니다
"창의문"은 우리들에겐 "자하문"으로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하문"이라 하지 "창의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門 이름 하나도 멋있게 호칭한것 같습니다
"자하문"은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하듯,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입니다.
'자'는 자줏빛 紫이며,'하'는 노을 霞로 - 
"자줏빛 노을"門이라는 뜻으로 서쪽 문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입니다
서대문은 대문으로 이미 있으므로, 小門인 창의문은 자하문으로 서대문과 구별해 
서쪽문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인왕산 산행은 여기서 마치고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탐방을 2부에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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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정맥의 끝 - 고봉산과 장명산을 가다 

일산을 많은 사람들은 고양시 일산구로 느끼기 보다는 독립된 도시 일산으로 느낍니다
분당을 성남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도시 분당으로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新都市중에 최대를 자랑하기에 新都市로 느끼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일산에 신도시 분양 때부터 살면서 '한북정맥'이 일산을 지나 交河에서 끝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 동네 얘기도 모르며 다른 지역의 산들에 대해 산행기를 쓴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지역의 한북정맥을 샅샅이 파헤쳐 보려합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별로 없어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또 부실한 산행기를 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만
최선을 다해 보려합니다

한북정맥은 금강산위의 백두대간 분수령인 장바위산에서 시작하여 북한지역 다섯 분수령을 지나 
휴전선을 건너 남쪽에서는 삼천봉, 광덕산등 25개의 산을 지나 交河의 장명산에서 끝납니다
등산 메니아들은 주로 화천군의 수피령에서 '한북정맥 종주'를 시작 하더군요
보통 6개월 정도 걸려 완주를 하는데 주로 휴일을 이용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수피령-백운산-민둥산-청계산-운악산-국사봉-사패산 도봉산을 거쳐 우이령에서 상장능선으로 내려가
솔고개를 건너 서울 각지역의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북한산 뒷쪽 노고산을 통과해서
삼송리 '뉴코리아 골프장', 원당의 '한양칸트리 클럽'을 지나 일산의 "고봉산"으로 한북정맥은 뻗어와
교하의 "장명산"에서 끝납니다
오늘은 제가 사는 곳인 이곳 일산의'고봉산'과 교하의 장명산'을 다녀 왔습니다

일산 고봉산 


신도시가 건설되 제가 이사 올때는 이곳들이 대부분 논밭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맨땅 찾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고봉산은 일산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봉우리에 엄청나게 큰 안테나가 있기 때문에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만 
등산로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파트촌 사이를 뚤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산 신도시에서 갈때는 일산교를 건너 중산지구 '산들마을 아파트' 뒤쪽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릅니다

안곡초등학교옆 고봉산 등산로 입구
5~6년전에 와 보고 처음이라 이곳 찾는데 조금 헤맸습니다
그동안 엄청나게 아파트와 부대 시설들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안곡초등학교 뒤로 고봉산 안테나가 보입니다.

등산로로 들어 오니 완전히 도시를 벗어 나는듯 합니다

등산로 초입
고봉산 등산로는 여러 곳이 있습니다만 이곳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등산로입니다


좌측이 국민은행 연수원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금년엔 처음으로 진달래꽃을 보았습니다
오늘 날씨가 무척 따뜻하다 못해 더웠습니다

일산의 옛 이름은 -한뫼- 입니다.   한문으로 풀어서  한 (一)자와 뫼(山)자 해서 일산이 되었습니다. 
순수한 우리말 -한 뫼- 는 어데가고 한문으로 뜻을 붙여서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일산-  이란 지명이 되었답니다.
한뫼(一山)는 하나의 산  즉 고봉산을 칭하는 지명입니다.

『하루』와 동행했습니다
일산의 모산이자 제일 높은 산인 고봉산은 높이가 208.6m로 서울의 남산(262m)보다 낮지만
한북정맥의 끝자락인 이 지역에선 가장 높은 산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루'가 같이 산행을 할 정도로 누구나 언제나 산책겸 운동 할수 있는 곳이라 여겨집니다

힘들어서 어거적 거리며 따라 오는 '하루'

고봉산 등산로에서는 좌우의 아래 일산신도시나 원당쪽을 촬영할수가 없습니다
아직 봄인데도 모두 울창한 숲으로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어거정거리는 우리 '하루'
고봉산은 옛부터 태미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고봉산은 높은 산봉우리 또는 봉화를 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 
삼국시대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유명한 산으로 한강유역 일대를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인 군사, 교통, 전략상의 요충지였다는군요 
이 산에서는 이를 증명하듯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합니다

고봉산 정상 바로 아래의 헬기장 
고봉산 정상 부근의 헬기장에 올랐습니다
고봉산은 정상에 무지하게 큰 안테나가 있어 북한산에서도 잘 보입니다
저 안테나는 군사시설로 표기되 있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국정원의 정보,첩보 수집용 안테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봉산 정상
저곳이 정상인데 불행이도 정상은 밟을수가 없습니다.
저 안테나 시설 밑에 많은 군사시설이 있어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 갈수 없는 저곳에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가 있다고 합니다
일산구 싸이트에서 찾아 낸 자료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 
형태 : 직사각형으로 돌 석축을 쌓아 놓음 
규모 : 석축의 총 둘레는 약 120m, 높이는 약 5m 
보존상태 : 자연돌을 쌓아 만든 봉수대로 특별히 무너진 곳 없이 보존 상태 양호함. 
이 고봉 봉수대는 조선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봉수망 제 4 노선의 직봉으로 
파주군 교하면의 형제봉에서 봉화를 받아 해포 봉수대, 서울의 무악(안산) 봉수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상태로 보아 그 규모나 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 29년(1447) 5월에 제정된 규정으로 
그 규모를 유급해 보면 봉수의 높이는 25척, 둘레 70척, 봉수대 아래쪽의 사면에는 30척의 규모로 여겨지고 있다. 
고봉 봉수대 정상에서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 강화의 마니산, 서울의 남산과 파주의 감악산 등이 조망되어 
봉수대로서의 지리적 여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듯 하다. 
봉수는 봉수대를 중심으로 봉화를 올려 그 신호로써 다음 봉화대에 전하는 제도인데 
옛부터 전통적인 통신 수단 가운데 가장 신속하고 간편한 일반적인 송신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고봉산 정상의 술판
요즘 왠만한 산에는 이런 장삿꾼이 있지만 여기는 규모가 꽤 크고 손님도 많았습니다
인근 아파트촌의 쫌생이들이 여기 술마시러 오는 듯합니다

정상에 올라 할딱거리며 힘들어 쉬고 있는 '하루'

조금 쉬더니 이젠 할딱거리지는 않네요
우리 '하루'는 저의 도움없이 하산 했습니다.
오늘 일년치 운동을 다 한것같습니다. ㅎㅎ
고봉산 산행은 이것으로 마치고 장명산으로 이동합니다

한북정맥의 끝-장명산을 가다
4월6일 고봉산을 내려와 한북정맥의 끝봉우리인 장명산으로 향했습니다
한북정맥은 이제 맥을 잇지 못하고 온통 짤리고 파헤쳐져 옛모습을 찾을수는 없습니다
특히 도시화 되버리는 지역은 권투로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훅, 아퍼컷,뻐팅까지 다 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K.O.직전인듯 싶습니다.
얼굴 모습이 모두 일그러져 누가 누구인지 알아 볼수도 없을 정도로 도시화 되버렸습니다
그래도 많은 등산 마니아들은 용케도 길을 찾아 종주를 하고 있습니다
6개월 이상씩이나 걸리는 머나먼 종주를 구간 구간 끊어 걷고 또 걷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대단한 존재 이상의 존경스럽기까지합니다
그들의 산행기를 보면서 잃어버린 우리 옛 산하를 체험하곤 합니다
고봉산에서 장명산을 가려면 일산 신도시로 나와
옛 월마트였던 현재 이마트에서 금촌, 문산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일산가구공단 입구 
고봉산을 지난 한북정맥은 아파트와 경의선 철도, 몇개의 확장된 도로를 거쳐 이곳 일산가구공단입구를 통과합니다
이곳 일산 가구공단 앞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좁은 편도1차선의 국도였으며 약간 높은 언덕이었습니다만
그동안 개발이 되어 언덕은 간곳없고 화려한 간판들로 메워져 있습니다.
저도 이곳이 한북정맥이 지나는 곳이란걸 이제서야 알게 �습니다.
한북정맥은 이곳을 지나 아미가 골프 연습장 뒷쪽을 거쳐 장명산으로 갑니다만
오늘 저는 장명산을 가려고 차를 몰고 왔기에 바로 장명산으로 향합니다

교하 이마트
 
금촌방향으로 가다 보면 '교하 이마트'가 나옵니다
이 교하 이마트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 해야만 하기에 미리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곳이 "교하 삼거리"입니다

교하 삼거리 이정표
교하 삼거리에서 교화읍사무소쪽으로 좌회전하여 직진합니다

삼거리 갈림길
이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직진을 하여 50m쯤 앞에서 차를 세우고 우측 오솔길을 따라 올라 가면 장명산의 앞면을 볼수 있고
여기서 우회전하여 통일동산쪽으로 가서 좌측으로 들어 가면 장명산의 뒷모습과 정상을 오를수 있습니다
우선 저는 직진을 하여50m쯤 가서 장명산의 앞 모습을 보려 합니다.
직진을 하면 처음으로 우측으로 올라 가는 차도 다닐수 있는 오솔길이 나옵니다

장명산 입구
표지판 하나 없습니다
저는 옆의 식당 아주머니에게 물어 이 길을 찾았습니다
여기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걸어 올라 갔습니다.

오솔길에 들어 서면 보이는 광경
저 앞의 능선이 한북정맥이며 그 끝자락에 와 있는 것입니다.
사진 속에 불을 피우고 있는 분 보이시죠?
저 분을 만나서 장명산의 위치와 장명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이 분입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증인 채택을 했습니다 ㅎㅎ
다음은 이 분과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 드림니다.
파란문 : 아저씨 장명산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 : 어~ 장명산은 뭐할려고 그러시오?
파란문 : 한북정맥의 끝봉우리라고 해서 무슨 산인지 구경하려고요
아쩌씨 : 장명산이 그런 산이여?
파란문 : 예, 아주 의미 있는 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북정맥의 끝이니까요...
아저씨 : 내가 어려서 부터 여기 살았는데도 처음 듣는 얘기구먼요.
         여하튼 장명산은 옛날의 장명산이 아니고 지금은 거의 없어져 버렸소
파란문 : 아니, 왜요? 산이 없어지다니...
아저씨 : 장명산은 저기 능선 뒤에 한 봉우리있는데 반토막 났거던....
         내가 어렸을 때에는 장명산에서 횟가루를 파냈어요. 
         거 왜 묘지에 뿌리고 담벼락에 흙과 합쳐 사용하는 하얀 횟가루..
         그러다 10여년 전 부터는 산을 부셔서 레미콘용 자갈을 채취해서 신도시 건설하는데 썼겠지...
         반 이상 파먹었어. 파먹고 텅비니까 ...
         이제는 그 자리에 건설패기물 쓰레기들을 가져다 뿌셔서 매립을 했는데..반쯤 메꿨어요.
         지금도 건설 패기물 쓰래기 처리하고 있어요
         더럽고 냄새 나서 가까이 가기도 싫어요. 해도 해도 너무 해요  별짓을 다하고 있어요.
         그렇게 중요한 산이면 왜 이렇게 방치를 했을까? 내가 더 궁금하네.
         일전에 시청에서 일본놈들이 박아 논 철심 뽑아 낸다고 여기 저기 찾아 다니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그런 맥락인 모양이지? 지금은 온 산에 일본놈들이 박아 논 철심보다 더한 전신주, 아파트,
         뭐 더한 것들을 우리나라 놈들이 때려 박고 있쟌수~
파란문 : 예전에는 경치가 좋았나요?
아저씨 : 옛날에는 장명산이 매우 유명했다우~
         나도 아버지한테 들은 건데  특히 조선 시대엔 구절초가 장명산을 메우다 시피 피어나 
         전국의 애 못낳는 여자들이 임신에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나 
         장명산 구절초를 구하러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여기가 조용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저 옆의 곡릉천에서 고기도 잡고....
         지금은 냄새나는 더러운 땅과 강이 �다우

길을 따라 '하루'와 함게 올랐습니다
우리 '하루'는 무지 하게 걷습니다
중간 중간 물을 줬어야 했는데...집에 와서 물을 줬더니 한사발을 마시더라구요..ㅎㅎ 미련한 제가 잘못이죠
머리 나쁘면 개까지 고생 한다니까요

건설 패기물 처리 매립장 입구
아저씨가 들려 준 얘기들이 얼마큼 진실일까 ..뻥튀긴건 아닐까 약간 의심했는데
상상할수 없는 일들이 장명산 근처에서 벌어 지고 있더군요
안으로 들어 가 볼까요?

엄청난 건설 패기물 쓰래기 더미

장명산을 만나다
저 앞의 반토막 난 초라한 산이 한북정맥의 끝 봉우리 "장명산'이랍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도 다녀 가고, 산경표의 신경준도 다녀 갔을 산 - 장명산
그 장명산은 나에게 저런 모습으로 다가 왔습니다

래미콘 공장
파낸 자갈들과 건설 패기물을 처리 하여 재 활용하는 지는 몰라도 제법 큰 래미콘 공장도 있었습니다

저 장명산의 왼쪽 짤려 나간 부분이 한북정맥이 었는데 그 脈이 끊긴 것입니다
물론 13개정맥이  끊긴 곳이 한두 곳이겠습니까만은....
한북정맥의 상징적인 이 곳이 이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장명산의 뒷쪽을 가기 위해 아까 진입했던 삼거리로 다시 나와 통일동산 쪽으로 갔습니다

조금 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통일 동산 쪽 곡릉천 다리이고
좌측으로 가면 곡릉천 제방을 따라 장명산으로 갈수 있습니다.

조금 내려 가니 곡릉천이 제법 넓게 확 펼쳐졌습니다.
저 앞의 다리를 여러번 지난적이 있었지만 곡릉천이 이렇게 큰 하천인줄은 미쳐 느끼지 못했습니다

곡릉천 제방에 올라 장명산을 뒷쪽에서 바라 보았습니다
곡릉천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앞쪽에서 볼때 보다는 모양이 살아 있었습니다만, 상상했던것 보다 작아 山이라기 보다는 동산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이 산의 이름이 長命山이더군요..그 이유를 자료 조사를 해 보니 아까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와 비슷하더군요

◈ 척교 : 102m 
◈ 거리(시청기준):4.0km 
◈ 별명 및 본명 : 약 산 
고양의 고봉산 서북맥 내령으로 와동산을 거쳐 끝머리 벌판 가운데로 우뚝서있는 이산은 
산아래 곡릉천(공능천이 발음이 변해 곡릉천이 �다고 함)이 흘러 경관이 아름다우며 
이산 주위로 전부 구절초가 자생, 주민들은 이를 많이 복용 수명이 연장되었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님네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 에 장명산에 내려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구절초는 여자의 냉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정상같지도 않은 정상에 그래도 올랐더니 
그 동안 한북정맥을 완주한 마니아들이 自祝하기 위해 걸어 논 현수막들이 쓸쓸히
세월의 풍상을 얘기 하듯 펄럭이고 있었으며...
그 뒤로 건설 패기물 처리 시설들과 래미콘 공장시설들이 가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북정맥을 완주한 많은 등산 마니아들도 저와 같은 허무한 감상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장명산 정상 나무가지엔 숱한 고난을 무릅쓰고 한북정맥을 완주한 마니아들의 기념 리본들이 달려있었으며
멀리 한강과 오두산 통일 전망대를 향해 손짓하는듯 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고생해서 찾아온 종점이 이런 모습이라니......

곡릉천 하구 갑문
곡릉천은 장흥계곡에서 북한산의 송추계곡에서 흘러 내려와 이곳에서 한강과 합쳐집니다.
한강 하류의 祖江이 서해의 만조 시간 때에는 강물이 불어 이곳 곡릉천 같은 곳은 역류를 함으로
갑문을 만들어 역류 현상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 交河는 이렇듯 큰 강 줄기인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조그만 지류들이 합쳐지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역사 속에서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여러번 있었을 정도로 풍수지리설에서는 
알아 주는 명당 자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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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냥 '슬픈 노래'라고만 생각하며  지나칩니다.
"단장"이 뭔 말이여?하면 대충 얼버무립니다
그래도 조금 아는 척 하시는 분들은 '6.25때 파괴된 미아리 고개를 예쁘게 단장 한거지..슬픈 역사를...'
'아녀 뭔 소리...단장에 있는 미아리 고개라는 뜻이여~ 미아리 고개가 있는 곳이 단장이여~'
한문 좀 안다는 분들은'짧을 短에 지팡이 杖으로 짧은 지팡이를 짚고 넘은 슬픈 미아리 고개라는 말이여~'
허~ 점점 그럴듯해지는 듯하군요
이 노랫말의 뜻을 알고 부른 신세대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半夜月선생이 작사한 곡이며 이재호씨가 작곡하고 이해연씨가 부른 노래입니다
이 노랫말은 半夜月선생의 實話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半夜月선생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半夜月선생은 1917년생이시며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翁'이 되셨지요. 
본명이 朴昌吾선생이며 우리나라 가요를 대표하시는 불세출의 음악인이라해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헤아릴수 없는 곡을 쓰셨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작으로는 〈산장의 여인〉·〈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넘는 박달재〉·〈산유화〉등 우리들이 아직도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들이 이 분의 노래입니다.
특히 半夜月선생은 가수 생활로 시작을 하셨죠. "진방남" 기억하시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KBS 가요무대에
등장하여 노래도 부르고 대담도하고 하셨습니다. "진방남"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 기억 나시죠?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
半夜月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일생의 恨이 세가지 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22세때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일본 오사카로 녹음하러 가자마자
'모친별세'라는 전보를 받고 눈물범벅 속에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른게 첫번째 한이요...
두번째는 6.25전쟁때 남북이산가족으로 운명 지워진 큰누이 작은누이와의 생이별이고...
세번째 한은 바로  저 세상으로 먼저 간 딸 '수라'입니다...
세번째 恨 - 딸 '수라'에 대한 얘기
半夜月선생은 전쟁이 터지자 음악을 하는 연예인이기에 가족을 두고 먼저 피난을 떠났답니다. 
그의 부인은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피난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어쩌다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각자
몸을 피하게 되었답니다. 애타게 찾았지만 전쟁중이라 어쩔수 없었는데 9.28 수복 때 서울에서
아내를 극적으로 만날수 있었답니다. 얼싸안고 좋아 했으나 잠깐뿐 ...
"우리 딸 수라가 죽었어요. 전쟁의 북새통에 죽 한그릇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던 수라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오다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갔어요. 
저의 손으로 뼈만 남은 4살짜리 딸 수라를 입은 옷 그대로 호미로 땅을 파고 언덕에 묻고 넘어 왔어요"
半夜月선생은 딸의 명복을 빌고 원한을 달래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전공인 노래로 승화 시키려했고
아무런 죄없이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 사라져간 딸의 모습을 그리며 노랫말로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 라는 것입니다.
이 노랫말은 남편과 아내의 생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가엽게 사라진 딸 '수라'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단장은 '끊을 斷, 창자 腸', 즉 창자를 끊는 아픔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자가 끊어 지면 어떤 고통이 오겠습니까? 상상 할수 없는 고통 - -
미아리 고개에서 격는 이별의 아픔을 '斷腸의 미아리 고개'라 한 것입니다

"斷腸"에는 중국 고사가 있습니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이라 아시는 분들도 있으실겁니다.
중국의 진(晉:東晉, 317∼420) 나라의 환온(桓溫)이 촉(蜀)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이라합니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답니다.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슬피 울부짖었답니다. 
배가 출항하자 어미 원숭이는 낭떨어지 깊은 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 헤엄쳐 갔답니다. 
100여리 이상 나아간 뒤 강기슭에 배가 나룻터에 닿았을 때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너무나 지쳐 그대로 죽고 말았답니다.
선원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가 이상해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크게 노하여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배에 실은 그 부하를 매질하며 반 죽여버렸답니다.
동물도 저 토록 자식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어디 비유하겠습니까....
동물도 사랑하고..모두 모두 사랑 하자구요
그리고 참혹한 6.25와 같은 전쟁은 없어야 겠습니다
요즘 또 냉기류가 흐를려고 합니다. 제발 좋은게 좋으니 사이 좋게 놉시다
환장도 있지요?

*좋은소식* 
살다 처음으로 남편이 꽃을 가져왔네

*나쁜소식* 
근데 국화꽃만있네

*환장할소식*
장례식장 갔다가 아까워서 가져온거라네

 

 

영어로 하자면 좋은 소식은 당연히 Good !일테고

나쁜 소식은 두말 할것도 없이 Bad !

환장할 소식은 잘 표현 되는건지는 몰라도 Crazy ! 일 겁니다

환장은 바뀔換에 창자腸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1.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달라짐.

2.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정신을 차리는 지경이 됨을 속되게 이르는 . 이라고 되 있습니다.

등산에 환장한 사람들을 요즈음의 우리들은 등산마니아[mania]라고 부르며 좀 유식한척하지요

황순덕 KBS 가요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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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愛妓峰  
국방의 의무를 다하긴 해야하는데 이왕 가는거.....짧고 굵게 갔다 오자고...
지금도 그렇지만 해병대는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짧습니다.
당시 교련 혜택받고 하면 육군 그냥 가는것 보다  상당히 짧게 갔다 올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 국방의 의무를 육군 병장으로 다녀 온 두 아들이 군대 시절 얘기를 추억처럼 하고 다니니
저의 군대 시절도 아득히 먼 옛일 같이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남성들은 군대 얘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하고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 놓죠
저도 70년대 요즈음 해병대와는 좀 달랐던 "귀신 잡는 해병"이란 칭호를가진 청룡부대에서 
청춘의 한 토막을 잘게 부수었기에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들은 당시 월남戰이 한창일때 다녀 왔으나 
저는 졸업하고 가는 바람에 조금 늦은 월남戰이 끝난 무렵이었습니다
현 김포에서 백령도까지의 서부전선을 지키는 청룡부대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요 무대이며 저의 추억의 군시절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역 후 처음으로 여전히 그 모습이 살아 있는 곳으로 가을 여행을 떠났습니다 
옛날 제가 복무 할 때엔 단순히 여단이었는데 지금은 사단으로 변해..그것두 두군대로 나뉘어... 
엄청 덩치가 커진 한강 하류의 최전방 서부전선 - 해병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은 해병대 가려면 대학 입시처럼 엄청난 경쟁율을 뚫고 간다죠? 학력도 높아지고 
세월 많이 변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인기있는 군대로 변모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옛날엔 좀 그런 그런 사람들이 해병대를 갔죠? 그래서 犬兵隊라고..ㅎㅎ
"愛妓峰"
요즘은 설치를 않는 모양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북녁땅을 향해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며 12월이면 설치하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환하게 화려하게 밝혀지던 곳 
"愛妓峰"
북한이 지척인 이곳은 여러 사연이 겹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병자호란때 피란을 하던 평양감사의 애첩 "愛妓"가 님을 잃어버리고 간신히 피신해 와 
눈물로 님 오실 날을 기다리다 산화 해간 곳이라 그 사연이 우리 남북 분단의 사연과 너무 비슷하다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愛妓"의 이름을 따 명명한 "愛妓峰" 
그곳에 삼십여년만에 올라 북한의 산하와 
요즘 우리집 기쁨조 '하루'와 그 엄마가 깊어가는 이 가을에 
한장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북한의 개풍군
손에 잡힐듯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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