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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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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아기를 임신한 어머니가 머리를 풀고, 두손을 가슴 위에 다소곳 올리고 누워있는 듯한 형상의 송악산 정경
개성공단 쪽에서 바라본 송악산 정경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어떻습니까?
정말 그럴듯합니다

고려 충신 72현이 두문불출하고 살았다는 두문동과 황성옛터로 유명한 만월대를 언젠가는 가 봐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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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딴에는 운동이랍시고 좀 했다고 하지만
가만이 돌이켜 보면 재미를 더 강조하는 레져 스포츠나 잡기적 운동이
훨씬 더 많았던것 같아 정신 차리고 실질적인 체력 운동을 좀 하려고
크게 마음 먹고있는데.....

운동의 기본은 걷기..달리기...높이 멀리 뛰기....헤엄치기......
공 놀이......등등등 순서이라하던데.....
무릎 관절염으로 자주 다니던 등산이나 골프도 즐겨본지 오래
다행이 여기저기 다니며 치료한 끝에 조금 나아져 체력 운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만 잘 될려는지....
수영장 회원님들이 많이 하는 마라톤...
그래서 제가 아는 마라톤을 다시 정리를 해서 머리 속에 잘 그려놓고
앞으로 열심히 뛰는데 기본으로 삼으려고 이 글을 씁니다
이글은 오로지 제 개인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나름대로 종합한것이기에
약간 사실과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냥 재미 삼아 한번 읽어보세요
제딴에는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되살리며 하룻저녁 꼬빡 걸려 쓴것입니다

마라톤 !!~~
우선 마라톤이란 단어를 아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마라톤의 기원을 알아보자구여

마라톤을 얘기하려면 그리이스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복잡할것같다구요? 아님니다...그리이스 역사는 그 자체의 역사만을
놓고 보자면 역사가 없다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아주 단순하고 짧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워낙 그리이스 신화에서부터 시작되는 무수한 문학작품들과
기록으로 남아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한시대의 역사"때문에
무궁무진한 역사를 가진것 처럼 보이지만 그리이스다운 역사는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몇백년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을겁니다

그리이스다운 역사는 기원전 5세기~4세기 사이의 그 유명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별되는 도시국가 시대 일것입니다
그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서
로마제국, 비쟌티움제국, 오스만터키제국의 지배를 받아 오다
서기1830년경에 비로소 그리이스라는 나라로 탄생되니
그리이스는 이천몇백년동안 이름없는 식민지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일반인들은 우리 인류의 역사를 얘기하려면
그리이스부터 떠오를까요?
그것은 무수히 많은 신들의 얘기와 또한 위에서 얘기한 "기원전 5세기~4세기
사이의 그 유명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별되는 도시국가 시대"를
기록한 불멸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김부식보다 천여년이상 앞서 '역사'를 기록했으며
그 책속에는 그리이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정치,경제,문화,인간들의
삶까지 막라하고 있기때문입니다...즉 세계사라해도 과언이 아닐껏입니다
그 책 덕택으로 우리는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것들을 알수있고
그런것들을 영상화한 영화와 후대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가들의
리메이크 작품들도 볼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전쟁 승리 이후 그 유명한 쏘크라테스와 싸피스트의
등장으로 교육에대한 열의가 고조되고 지금도 자주 영화관에서 볼수있는
불멸의 작품들의 원본이 이때에 쓰여집니다
특히 오르테스 3부작-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인, 자비로운 여신들-을 남긴
아이킬로스도 이때의 작가였습니다.
아이킬로스가 페르시아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옴니다.
이때가 그리이스의 유일한 최고의 번성기 였습니다

이제 "마라톤"에 대해 얘기해야하죠?
이에 관한 기록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에 와서도 "마라톤"의 역사를 알수 있는겁니다.
그리이스가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전투가 하나라면 하나라 할수있는
페르시아 전쟁입니다. 특히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을 말합니다
페르시아의 일만오천 대군에 대항해서 만여명의 '아테네' '스파르타'를
비롯한 몇몇 그리이스 연합군이우리나라의 "황산벌"과 비슷한
"마라톤"이라는 벌판에서 맞짱떠서 승리하는 전쟁을 말하는 것이기에
"마라톤 전투"라고도 말합니다. 즉 "마라톤"은 달리기의 뜻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고
아테테 동북쪽 에게해에 인접한 평야를 지칭하는 지명입니다..
군산과 전주 사이의 익산, 즉 황산벌을 생각하시면 연상하시기 쉬울것입니다
"The Battle of Marathon"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유일한 그리이스의 승전의 역사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이스인들의 자존심인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그리이스 전국체전(올림픽)에 "마라톤"이라는 달리기를
자랑스런 한 종목으로 채택하는 것입니다

(원래 마라톤 코스는 40km정도였는데
근대 올림픽을 영국에서 개최하면서 원래 거리에 버킹검궁을
돋보이기위해 버킹검궁을 도는 거리가 합처져 42.195km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달리기의 마라톤"을 이해하기 위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초해
'마라톤 전투'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오자 도시국가 '아테네'는 인근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에 원군을 청하러 전령을 보냅니다.
그 전령의 이름이 그 유명한 '필리피데스'입니다.
필리피데스는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달려 갔다 옵니다.
그 거리가 246km입니다. 마라톤보다 더 힘든 철인 경기인 "울트라 마라톤"이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창설된것입니다.."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알고 나서 부터
현대인들이 마라톤보다 더 강력한 달리기를 .....'울트라 마라톤'이 생겨나는 기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필리피데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가하고 피비린네 나는 몸을
이끌고 승전보를 알리러 아테네로 달립니다.
마라톤평야에서 아테네까지.....42 여km......
'우리가 승리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그리고 죽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마라톤"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울트라 마라톤'과 '마라톤'은 거의 동시에 탄생되는 배경이 되며
'울트라 마라톤'이 '마라톤'보다 먼저이란걸 알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때의 유명한 정치적 상황을 알려드리면 들은 기억이 있으실겁니다
당시 아테네는 노예들에게 전투에 참가하면 시민권을 준다고 약속할 만큼
급박한 상태였고, 군사독재를 막기 위하여 순번제로 군대를 통솔하던
10인의 사령관 중 5명이 일부에서는 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교전의 불가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항전론의 선두주자였던 열 명의 사령관중의 한 명인
밀티아데스는 케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군사장관 칼리마코스를 설득합니다.

"칼리마코스여, 바야흐로 아테네가 노예로 전락할 것이냐, 아니면 그 자유를
확보하고 찬란한 업적을 세워 후세에 전할 것이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싸워 이긴다면 그리스 가운데 일등국가가 될 것이고,
그대가 반대하는 쪽의 편을 든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될 것이다!"
결국 칼리마코스는 항전에 나서죠..유명한 말이죠?

그리고 이때에 전장에 나설 병사가 절대 부족한 '아테네'는 전투에 참여하는
노예들에게 시민권및 참정권까지 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노예들이 자원 입대하여 첨병 역할을 하며 최일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둬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공신이 되죠?
그리고 노예에서 벗어나 정치 일선에 나서게되고........
우리 인류 역사의 "민주주의"가 무르익는 기틀이 되었다고 하는데...학교때 배웠지요?
"민주주의"가 그리이스에서 탄생되었다는것은 배워도 그 원인은 모르신다구요?
이제 아시겠다구여?

그리고 그 이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민주주의 때문에
결국 서로 헐뜯고 싸우다 내부에서부터 공멸하고
그 이후 서기1830년대까지 이천몇백년을 식민지 국가로 남아 있게 됩니다요....
민주주의가 제일 좋은 체제라는것은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또 "마라톤 전투"의 전법도 무지 유명하지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마라톤벌의 지형이 양쪽에는 약간 높은 산이 있고 가운데가 평야인데
평야의 가운데에 구릉이있었답니다
옛날의 전투는 양쪽 병력이 일렬로 나란이 서서 앞으로 발맞춰 전진하며
맞짱 뜨는 것이였죠
아테네 연합군 만여명은 구릉 앞쪽에 나란히 열을 지어 섰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군복도 없는 겉으로 보기엔 허럼한 노예들을 배치 했던거죠.
페르시아 일만오천대군이 이들을 우습게 보고,
겉으로 보기엔 허럼한 노예들을 향해 우르르 돌진하는데....
이때에 실제로는 노동으로 체력이 매우 강한 노예들이 완강히 저항하다가
갑자기 구릉 뒤쪽으로 후퇴를 하니까 가운데 부분의 구릉으로 페르시아군들이
휩쓸려 들어가게되고, 자연스럽게 우리 이순신 장군도 써먹었던 학이진 전법('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밀집대 전법'이라 기술)이 자연스럽게되어
양쪽 구릉위에서 아테네 스파르타 연합군이 덮쳐 대승을 거두고,
도망가는 적들을 해안까지 추격하여 거의 몰살 시킨다는
그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 일명 "마라톤 전투"입니다


'필리피데스'가 달린 거리를 후대의 인간들이 믿을수 없다하여
의문을 품은 영국인이 기록에 의존하여 필리피데스가 달린 아테네와
스파르트의 왕복코스 246km를 직접 쉬지 않고 달려보았고 22시간이
걸렸음을 증명했고,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오늘날의 울트라 마라톤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필리피데스는 일주일 사이에 전투를 하며 달린 거리를 제외하고도
스파르타 왕복 거리 246km, 마라톤 평야 왕복거리 84km를 달린 것입니다.
전투도 했습니다...그러니 죽을수 밖에 없었겠지요?

"필리피데스'의 혼을 기리며 달립시다 !!~~~~
저도 삼월부터 더 열심히 호수 공원을 달려 볼까 합니다
잡동사니 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휘문 개교 100주년 기념 마라톤에서...페션상을 받았다우..ㅎㅎ..잘 달린 상을 받아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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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1964년

캔버스에 마그나, 38*38 inch,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1월 13일 낙찰

 

이건희회장 집에 걸려 있다는 이 그림 <행복한 눈물>

 

1960년대 후반의 팝아트와 현대미술 전문 아트 딜러인 리차드 폴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한 눈물>은 1963년에  완성된 작품이라고 하네요.

이후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최고 작품중 하나로 선정이 되었죠.

이후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지만 1200만불을 부르는 통에 유찰되었다가

 200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훨씬 낮은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고합니다.

이 때에 이건희 회장이 구입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더군요

 

 

 

 

 

 

 

 

 

 

로이 리히텐슈타인 <입맞춤> 1962년 캔버스에 유채, 80*68 inch

폴 알렌 컬렉션 소장

 

이전까지 로이 리히텐 슈타인의 최고 낙찰 작품은 위에 보시는 <입맞춤>이랍니다.

600만불 정도되는 작품이었다는거죠. 입맞춤은 로이 리히텐 슈타인이 미술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된 <만화>에서 상상력을 차용한 작품의 첫 포문이었다고합니다.

 

그는 만화가들의 작업에 매혹되어 있었고 그는 현대미술의 양식과

만화 사이에 연속선이 있다고 믿었고, 이를 회화적으로 풀어냈던 사람이라는군요

그림 속 입맞춤의 황홀한 순간, 그 고혹의 시간에 푹 빠져있는

여인의 모습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아~~!!!

 

 

입맞춤도 행복한 눈물도

투명하고 진실함 속에서 이루어질때, 더욱 값진것을 느낄수있지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최대 재벌 이건희씨와 홍라희씨가 행복한 눈물과 입맞춤을 하려면

김용철 변호사가 주장하는 비자금으로 예술 작품을 구매 하지말고

돈도 무지 많을텐데 정정당당히 사서 소장했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니까요

 

그렇던 말던 우리는 이 그림을 조그만 사진으로라도 보면서

그 재벌들이 그토록 몰래 집 한켠에 걸어 두고

자기들만 느끼고 싶어 했던 "행복한 눈물과 입맞춤"을 우리들도 마음껏 느껴보자구요

내것이냐 아니냐보단 내가 감상할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떳떳하게 더 아름답게 더 큰 기쁨으로 더 행복하게 감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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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라고만 하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정승(政丞)'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제격인 모양입니다.
그많큼 그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속에서 관료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분이시며,
淸白吏로서도 너무나 유명한 黃喜政丞의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감회 새로운 일이라 여겨
눈이 내리는 지난주초에 횡하니 발길을 "半鷗亭"으로 내디뎠습니다.



일산 신도시 거리 풍경

일산에 살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황희정승의 유적지 "半鷗亭"을 찾아 본다는게 벌써 십년이 넘었지만
오늘이 처음이라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모습이 모두 역사 속으로 달리는 듯
눈 내린 거리는 한가롭기까지 했습니다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보이는 자유로 . . . . . . . . . . . . . . . . . . . . . . . . .호화유람선이 있는 정경

도시를 벗어나니 뻥~뚤린 '자유로'가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낙하리 근처에서 손님을 유혹하고있는 호화 유람선이 산비탈에 올라 앉아있었습니다.
저 유람선의 주인은 여러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배가 산으로 올라 가려면 사공이 많아야할테니 사장님이 혹시 여러명이 아닐까하는 씰때없는 생각을 하면서,
"半鷗亭"으로 들어가는 문산 나들목으로 나갔습니다.
문산 나들목을 나가자마자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5~600m정도 가면 바로 "半鷗亭"이 나옵니다


반구정 매표소와 주차장

생각했던것보다 규모가 크고, 깨끗하게 단장되있는 "半鷗亭"을
저의 생애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라 다소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월요일 오전 눈이 내린 날이라서인지 방문객은 저와 저의 愛犬 '하루' 뿐이어서
아무런 제약없이 돌아 볼수 있었습니다.



황희정승 기념관



기념관 안에는 기대했던 역사의 숨결 -유물-등은 전혀 볼수 없어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기념관 한쪽은 영상으로 황희정승의 생애와 업적을 관람하는 곳이라 했는데
관람객이 한 사람뿐이라 상영하지 않는 듯해서 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정문에서 좌측으로 바라보니 짜~짠~
자료 사진에서만 보던 "半鷗亭"이 회색빛 하늘 아래 우뚝 솟아 정겹게 나타났습니다.


반구정 전경...................................'하루'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 저의 愛犬 '하루'가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구정을 마음대로 돌아 다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ㅎㅎ
앞으로는 공공장소에 애완동물을 묶어 다니지 않으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한다니
우리 '하루'는 이번이 마지막 '자유'였을 가능성이 큼니다
그러나 저는 평시에 묶어야할 것들은 우리 '하루'라기 보단 진짜 묶어야 할 인간이 너무 많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淸政門이라는 정문 뒤에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半鷗亭"과 "仰止臺"가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찾았다니 게으른 습성을 탓할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淸政門. . . . . . . . . . . . . . . . . . . . . . . . . . . .

사실 이곳은 "半鷗亭"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 명칭은 "黃喜先生影堂"이었으며,
"黃喜先生影堂" 속에 "半鷗亭"과 "仰止臺"가 있다고 표현 하는게 더 나을 듯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에겐 그나마 "半鷗亭"이 더 친숙한 느낌이 드는건 어찌 할수 없었습니다.
月軒祠는 황희정승의 高孫인 소양공 月軒 황맹헌(1457~1535)선생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라고합니다.
月軒선생은 문장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明나라에서까지 격찬을 받았다고 하네요




사진의 가운데가 황희정승의 影幀을 모시고 있는 "黃喜先生影堂"이며 좌측이 "月軒祠"


黃喜先生影堂









 

黃喜先生의 호는 방촌이시며 본관은 장수라고 합니다.
여담임니다만, 그래서 지방자치가 활발한 요즈음 전라북도 장수군도 본관이 장수임을 강조하며
黃喜先生을 자기 고을 인물화하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합니다. 요즘 곳곳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죠?


방촌 황희선생의 일생을 간략히 훌터보고 가야겠습니다.
黃喜先生은 고려의 왕들중 마지막왕 공양왕으로부터 뒷쪽으로 세번째 왕인 공민왕 때인
1363년 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말의 정치 상황

우선 이 당시의 우리나라 고려말의 정치 상황을 되짚어 보고 가겠습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원나라 침입을 몰아내고 원나라 배척화와 국토회복에 앞장선 공민왕.
그도 무인정권으로 대변되는 로마제국의 씨이져를 시해하는 부루터스와 같은 역활을 하는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처참하게 시해당하고 맙니다.
그의 아들이 열살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이었으며 그 시절 신군부세력 이성계를 못마땅히 여긴 집권세력은
이성계를 전장터로 내 몰지만,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세력을 무너뜨리고 실권을 쥐게되지요
이때부터 '신군부 국보위 위원장'은 이성계가 훗날 전두환처럼 되며,
장세동이 같은 정보부장은 이성계의 셋째아들 이방원이가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릅니다.
이성계가 우왕을 내몰고 창왕을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워 섭정을 하게 되는데,
최규하대통령과 국보위 위원장 전두환이와의 관계처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도 최규하같은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이성계와 이방원이의 얼굴 마담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했던 고려말시절,
黃喜先生은 1383년 우왕 시절에 21세로 생원시, 그후 23세에 진사시, 27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기나긴 관료생활을 시작합니다.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성계였으나,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했으니...
그래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와의 시조 대결이 성사 되죠.
군바리들 치고 주고 받는 시조가 품격이 있다고 아직도 유명합니다요

이방원 :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따식아 내편 되어 주라~~!!" 아무리 애걸구걸을 해도...

정몽주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따식아 니가 아무리 꼬셔도 안넘어 간다~ 이 전두환 장세동이 같은 넘들아~~!!"

이방원은 정몽주와는 도져히 같이 공생할수 없음을 확인하고 12.12사태를 일으키죠....선죽교에서...
잔인하게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제 어느 누구도 덤비지 못하는 명실공히 절대 권력을 쥐고
새로운 5共을 탄생 시키니 바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 "朝鮮"입니다...

에구~ 조용할 날 하루도 없는 나라인데...

고려의 관료로 일하고 있던 黃喜先生은 피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과 손잡고 政事를 함께 할수 없었습니다.




황희정승이 반구정과 앙지대를 바라 보고 있습니다



두문불출

쿠데타 철혈정권인 신군부 세력에 협력해서 政事를 함께 할수 없었던 고려의 충신들 73명이
현실 정치를 떠나 지금의 송악산인 만수산의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며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 73명중에 黃喜先生도 있었습니다.
이 만수산의 깊은 산속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했으며,
그 두문동에서 일체의 세상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탄생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문동에 들어 간 고려의 충신 73명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인 것입니다.

이 "두문불출(杜門不出)" 이야기에 얽힌 古史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첫 과거 시험을 치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시험장에 나온 이성계는 과거시험장에 시험보러 온 선비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선비가 없다는 것은 정권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왕조의 운명이 어떻게될지 알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이 때 과거시험장의 한 선비가 "이제 보셨소이까? 이것이 바로 백성들의 마음이고,
또한 하늘의 뜻이올시다!"라고 외치며, "우리도 두문동으로 갑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시 두문동에는 신규, 조의생, 임선미등 73명의 선비가 정권에 거부하고 은거하고 있었다고 위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성질 더럽게 난 이성계와 이방원은 두문동의 선비들을 끌어내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고려왕조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이성계 이방원이가 아무리 설득해도 고집불통인 두문동의 선비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성계와 이방원이는 성질이 개뿔따구까지 솟아 이들을 끌어내기위해 두문동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 죽을 운명을 맞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답니다.
이때 죽은 72명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문밖 출입을 하지않는 것을 두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半毆亭



두문동(杜門洞)에서 살아 나온 유일한 한 사람 --- 그가 바로 黃喜였습니다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黃喜!~ 당신만은 살아 나가 그 학식과 덕을 백성을 위해 베풀게나~!!"라고 했다나요?
이 말은 좋게 평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신군부 세력에 동조했다는 평이지요.
사실, 黃喜는 나중 자신을 회고 할때 "내 생애에 최고로 수치스런 두가지 사건 중에 하나"라고 실토합니다.
" 그 하나는 杜門洞에서 나온 일이며, 다음은 제주 감목관 태석균을 사정으로 구원을 청한 일"이라고 합니다.




仰止臺

仰止臺 올라 가는 담 옆으로 국토분단의 상징 "휴전선 철책"이 지나고 있습니다











半毆亭에서 바라 본 仰止臺

半毆亭이 원래 이 仰止臺 자리에 있었는데 1915년 半毆亭을 현 위치로 옮겨 지어면서
방촌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仰止臺라 하였답니다.




半毆亭 안에 걸려있는 許穆의 半毆亭記




반구정에서 보이는 건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과 분단의 상징 휴전선 철책 뿐....



半毆亭인 이곳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 바다로 사라져 가는 洛河里에 있어
원래 洛河亭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답니다.
황희선생이 틈틈이 갈매기와 벗하며 삶의 충전을 위해 보냈다는 데에서 다시 半毆亭으로 개명 되었다는군요
같은 시대에 한동안 함께했던 한명회는 정계은퇴후 한강변에 狎毆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는데
현재 그곳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狎毆亭은 이제는 찾아 볼수 없습니다.
황희 정승과 한명회 - 비교되는 인물이죠.
우선 황희선생은 뒤에 "정승"이란 말이 붙으나 한명회 뒤에는 아무 것도 붙이지 않습니다.
실제 한명회도 엄청나게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핵심에서 군림했으며 영의정도 오래 했고
특히, 한명회의 딸들은 모두 왕비가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습니다만
조선의 두번째 쿠데타정권의 핵심 수양대군에 빌붙었던 그를 역사는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전세계 역사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두딸이 모두 왕비가 된 일...
예종,성종의 마눌이 모두 한명회의 딸이며,조선 왕 두명을 사위로 둔 시집보내기의 명수인 한명회,
세조의 둘째 아들이 예종으로..예종이 일찍 꼴까닥하자 후세가 너무 어려...
더 일찍 고향 앞으로 간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차남이 제9대 성종이 되는데.....
어휴~ 족보 따지기도 골머리 아픈데, 삼촌 조카 사이인가요? 예종과 성종 관계가...
그러면 언니 남편이 뭐가 되던가요? 아유 골머리 아프~~
여하튼 한명회는 왕들을 사위로 만들기의 대가이며 권모술수 모사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술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이라고 누가 평가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기심에 불타는 한명회를 부러워하는 넘들이나, 좀 무식한 분들이
압구정의 압은 누를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압구정도 반구정과 거의 같은 뜻으로
갈매기와 함께 벗하며 지낸다는 익숙할 狎이오니 외곡되지 않길 바람니다 .

우스게 소리입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淸白吏의 대명사 황희정승이 노닐던 半毆亭 동네는 땅값이 개값이고
쿠데타정권에 빌붙어 사리사욕에 눈멀었던 한명회가 노닐던 狎毆亭 동네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고 있는데...역시 돈은 붙는 놈 한테만 붙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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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돌아 오거나 애경사가 생기면  멀리 떨어져 살아 가고 있는 가족들이 제일 먼저 생각납니다
가족은 종자가 완전히 다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만들기로 맹서하며 가족을 만들어 갑니다.
종자가 다르지 않으면 가족을 만드는데 문제점이 많다고 법으로도 결혼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아빠 - 엄마 - 형제 - 자매- 할아버지 -할머니 - 삼촌 -외숙모.......등등등
이 얼마나 다정 다감하며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까
그리고 한 가정에 제일 큰 일들 - 즉 결혼이나 장례등 애경사가 생기면 평상시 아무리 소식없이 떨어져 살았다해도
머나먼 길 찾아 웃어주고 울어주고...축하해 주고 애통해 주는 이들은 핏줄 - 친인척들이 입니다
이러한 '피는 물 보다 진하다'란 말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른 집안의 남녀가 만나 만든 가정이지만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 - 부부관계는 이래서 그토록 중요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 "관계"를 너무 쉽게 부셔버리며 그 "관계"를 이용해서 간통죄등으로 형사 고소를 한다던가하는
수많은 사람이 사는 사회이기에 없을 수 만은 없겠지만 너무 많아졌습니다
더더욱 그"관계를 깨뜨리며 다른 사람과 통정하는 일"을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불일치 한다고 헌법소원을 내는 일까지
훤한 대낮에 챙피함도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여자 연예인이 헌법재판소에 
"간통죄는 헌법에 기초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프라이버시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라고 주장하며 
또“이미 가정이 파탄 나 혼인만 존재하는 상태에서 간통죄가 배우자의 복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실효성이 없다"고
헌법소원을 냈다고 각종 언론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헌법소원에 대해 전혀 이유가 없다고는 생각하지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측면에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니고 우리 인류의 존속문제까지 갈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지구의 반 가까이를 점령하고 그에따른 富가 넘쳐 났던 "로마제국"이 왜 멸망 했는지를 보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어느정도 가늠 해 볼수 있을듯합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되는 연유들은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관심있게 들여다 볼 이유는 로마 시민의 상당수가 걸린 "성병"때문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말합니다.
세계 방방곳곳에서 들어 오는 막강한 富 - 이 富가 넘쳐나면 다음은 인간이 갈수 있는 최고의 오락 "섹스"입니다.
로마 전역엔 화려한 목욕탕이 들어 서고 그 한편엔 옷 벗고하는 향락문화가 판을 치게 �다는 사실은 모두 아시리라 여깁니다
요즘말로 스와핑 까지도 아무른 죄의식 없이 자행했으며 성질서는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민의 3~40%가 성병에 걸려 죽어 갔고 종족 보존을 할수 없는 지경에 까지 갔다고 합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정 = 국가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문란한 성질서는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 오는 한 원인이 됫습니다
문란한 성행위... 간통...이런 것들을 헌법을 고쳐서 까지 보호 해야겠습니까?
정상적으로 살면 법이 있던 없던 뭔 상관이겠습니까
비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간통중에 있는 사람들이 간통죄 폐지 운운하는 거 아닙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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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제가 그냥 느낀 점을 쓴 글이니
종교적 의미로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람니다.



























           "동자승 사진을 보며....."

윗 사진들은 여기저기 인터넷상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동자승 사진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사진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 사진들을 볼때마다 저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깁니다 우선 첫번째로 느껴지는 느낌은 세상살이 고달픔이나 살아야겠다는 처절함이 없이 너무나 청순하고 맑고 순수해 저같은 핫바리 인생은 그저 숙연해 질 뿐입니다 제 마음까지 검은색이 하~아얀 색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이 얼기설기 엮여 머릿속이 우주라는 혼잡한 세파에 고민과 근심 걱정으로 살지 않고 그저 맑고 깨끗하게... 아무른 근심 걱정없이... 즉 忘憂里가 필요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을 볼때마다 제 육신의 구석구석까지 맑고 깨끗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누가 저들을... 저 어린 것들을..... 저런 모습으로 저 나이에 ..저런 곳에 보냈을까?... 저들은 석가모니가 중생들의 생로병사를 해결해 줄꺼라 믿을까 저들은 석가모니가 세상사 근심 걱정을 사멸시키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열반"하여 "극락왕생"하리라 믿을까 저들이 무슨 그렇게 해야할 많큼의 근심 걱정이 있을까 저들은 석가모니가 '인디언'인줄 알까? 우리는 백의민족 단일민족 우수한 민족이라 주창하면서 인도사람을 神으로 믿는 사연을 알까 석가모니가 영어로는 Buddah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는 '칙사머니'인줄 알까? 석가모니의 고향인 인도에선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알까? 예를들면 같은 맥락의 예수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에선, "이스라엘 극좌 세력의 우두머리"였으며 지금으로 말하자면 반체제 인사로 국보법 위반 혐의로 십자가에 처형 당했다는 정도로 알려져있고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아닌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니우스 대제에 의해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 선포로 국교로 인정되고... 신약성경이 그때에 급히 만들어 지고... 그래서 기독교 총본산이 이스라엘이 아닌 로마에 있는 이유를.... 저들을 저곳에 저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저들 스스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어린것들이 스스로 저 수행(?)의 길에 나서진 않았으리... 무엇을 얻고 무엇을 줄것인지도 모르리라 산다는게 행복인지 불행인지도 모르리라 오로지 어른들...즉 부모의 욕심이 아닐까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모르는 무식하고 욕심 많은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한 수행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학원도 몇군데 다니며... 저녁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쉬기도하고....컴퓨터 게임도 좀 하고... 아빠 엄마에게 찡짜도 부리고...손잡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살아야 짧은 인생길을 준비하는 대다수의 어린이들처럼... 우리나라 교육이 뭐 어떻고 저떻고해도 그냥 그렇게 그렇게 가는 길이 오히려 정상적인 길이 아닐까 그래서 '동자승' 사진만 보면 만감이 교차하는건 비록 저 뿐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럽디다. 세상 사는 일 다 그렇고 그렇다고.... 넓은 침대서 잔다고 좋은 꿈꾸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음식 먹고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랍디다. 떠날때 주머니 없는 수의 입고 빈털털이로 사라지는 게 인생의 말로라는데 어린것들 시켜 대리만족하는건 더욱 아니고 죄악이며 불행이라고...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데.... 뭘 그리 원하는게 많을까요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 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던 때가 좋은 때였습니다 윗 사진의 동자승을 보면 맑고 깨끗했던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무한히 그립습니다 우리 나이이면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른들은 결코 되돌아 갈수 없는 어린시절의 무념무상의 시절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아 가고파하는 '욕심'으로 돌아갑니다 남들과 좀 다르게 살아보자고 바둥거렸는데... 결국 저도 남들과 다를바 없습디다
파 란문 李 栗 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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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憂里


파란문

모든 사람 사는 일에는 걱정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모든 사람 사는 일에 걱정이 없다면...
그건 사람 사는 일이라 말하지 않는다

청량리 지나 중량교...그리고 망우리가 나온다
조선 왕조의 시조 이성계는 서울에 도읍을 정한 후
자신의 묘자리를 물색하게 했다.

무학대사와 하륜으로 부터 받은 음택(陰宅)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東九陵인 자기의 묏자리를 이쪽 산위에서 바라 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었다"하여 망우리라 하였는데
그곳이 지금 망우리 공동묘지가 되었다.

  현재의 망우리는 수도 서울의 공공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葬地이다
그러나 그 망우리는 그 면적을 다해
지금은 더 이상 그곳에 누울래야 누울수 없다

망우리(忘憂里)
그 뜻이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고
사람이 죽어 뭍치는 곳 정도로 안다

망우리 忘憂里--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곳 --
정말 선조들은 선견지명이 있어 산 이름도 잘 지었다
그렇다! 망우리에 들어 누우면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게된다
까마귀 우는 소리..아귀다툼 짖꺼리는 소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잠을 자도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자연의 품 안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흙으로 변한다
그 곳에 빨리 가고 싶으신가여~~~
아무도 빨리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근심 걱정 없이 산다는게 살아 있다는 얘긴가?
망우리 공동 묘지에 들어 누워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근심 걱정을 가지고 사는게 얼마나 인간적 삶인가!~~
근심 걱정을 두려워하지마라
근심 걱정!~
그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을 사랑할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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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八景 중에 하나이며 남쪽에서는 8경중에 제일 북쪽에 위치하는
"淸澗亭"과 육군 복지시설인 "淸澗亭 콘도"를 다녀왔습니다
제 기억에 저는 국가시설을 휴가용으로 사용해본적이 없는거같은데
살다보니...수영장 오래 다니다 보니...계급 높은 회원 덕분에 육군 복지단이 운영하는
'청간정 콘도'에서 잠을 자는 행운도 얻었나봅니다
모든 직원이 군인인 이 콘도에서 군생활을하는 사병들은 꺼꾸로 돈을 내고 군생활을 해야하고,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사병들은 돈을 받고 해야 형평이 이루어지지않을까요? ㅎㅎ
바닷가 모래위에 콘도를 지었기에 여름엔 방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바로 나가 동해물속으로 첨벙 할수 있게 되있었습니다
淸澗亭의 "澗"자가 계곡 사이에 흐르는 맑은 물을 의미 한다니
대략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짐작 가시죠?
설악산의 맑은 계곡물이 흘러 모여지는 곳...




제가 생각해도 잘 찍은 "淸澗亭" 전경


關東八景을 이야기 하자면 松江 鄭澈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각지역을 돌며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한 長歌, 즉 긴 노랫말인 " 關東別曲"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겠지요
정치인 鄭澈선생이야 비록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역사는 다소 별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國文學史에서는 松江 鄭澈선생을 정말로 위대하게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아마도
최고 권위를 자랑할지도 모릅니다
關東別曲에는 松江 鄭澈선생이 청간정에 머물렀다는 글은 없는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등학교 고문시간에 골머리를 썩히던 글 다시 한번 음미해 볼까요? ㅎ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랄 차자가니,

丹단書셔난 宛완然연하되 四사仙션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대 가 또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郞낭湖호 거긔나 가 잇난가.

淸쳥澗간亭뎡 萬만景경臺대 몃 고대 안돗던고.


학교시절 고문 성적이 형편없어서 설명이 잘 될려는지 모르겠읍니다만...
저보다 못하신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ㅎㅎ


고성을 저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삼일포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四仙이 쓴

'영랑도남석행 永郞徒南石行:영랑의 무리가 남쪽으로 가다'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四仙)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이나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단 말인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고?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신라 시대 때, 사선(四仙), 즉 네 명의 화랑(영랑, 남랑, 술랑, 안상)이 심신 수련 차,
금강산에 갔다가 서라벌로 돌아가는 길에 곳곳에 많은 흔적을 남겼답니다.
총석정의 사선대도 그들의 흔적이며,
삼일포도 그들이 절경에 취해 삼일이나 돌아갈 생각을 않고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되었고,
경포대, 월송정에도 사선의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속초에서 걸어서 돌아 본 호수 영랑호도
화랑 영랑이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놀았던 데서 연유된 것이랍니다.
松江 鄭澈이 관동별곡에서,
그들이 혹시 청간정에 들르지 않았나, 하고 추측하는 것으로 봐서
그때도 여기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경관은 동해에서 흔히 볼수있는듯해서
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청간정의 천정은 우물 井처럼 만들어져있다고 우물천정이라하더군요





허수아비 대통령이던 뭐던 강원도가 낳은 대통령인 최규하 대통령의 헌시가 있었습니다

嶽海相調古樓上
果是關東秀逸景

실력없는 제가 해석하는것이니 믿거나 말거나~~ㅎㅎ

악해상조고루상
과시관동수일경

"설악과 동해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청간정에 오르니
정말 따질 수 없이 과연 관동지방에서는 빼어난 일품의 경치로구나"









청간정 콘도 앞에서 바라본 "日出"
송강은 일출로는 양양의 낙산사 의상대를 최고로 꼽았습니다
그래서 의상대가 있는 양양(襄陽)은 "해오름"의 한자이랍니다






사진이 얼핏 '쟝프랑스와 밀레'의 그림 '만종'처럼 보이는데
"하루를 만지는 사람"으로 하면 어떨까요...ㅎㅎ

와이프가 '하루'를 안고있는데 대대장이 '할'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광경입니다.
일출과 그럴듯하게 어울리는군요
참고로 '하루'는 울집 강아지 이름..ㅎㅎ 제딴에는 의미있게 지은 이름입니다



휴가의 하일라이트는 뭐니무어니해도 한잔 걸치는 일...ㅎㅎ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소개 드리겠습니다. 좌측 앞이 '파란문'이구 그 뒤가 옆지기,
우측이 '설악 빛모리; 회장인 고삐리때 칭구, 그 뒤가 후배 현역 대대장


서울을 등지고 타향땅 속초에 파뭍혀 앞으로는 동해의 푸른 물과 뒤로는 설악을
벗삼아 살고있는 고삐리 동기동창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답니다
그는 설악을 영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설악 빛모리"의 회장으로 있더군요..
역시 예술분야..
파도가 출렁출렁 일렁이는 바다 위에 지어진 횟집으로 안내되어
검푸른 동해와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을 배경으로 옛이야기 조잘대며
제법 값나가는 회를 곁들여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취하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아!!~~언제 그 때로 되돌아 갈수 있을까

松江 鄭澈 선생이 關東別曲에서 맨 마지막으로 월송정에서 읊은 노랫말을
한잔 술에 걸쳐 한번 읊지 않을 수가 없군요

 

北븍斗두星셩 기우려 滄챵海해水슈 부어 내여

저 먹고 날 머겨날 서너 잔 거후로니,

和화風풍이 習습習습하야 兩냥腋액을 추혀 드니,

九구萬만里리 長댱空공애 져기면 날리로다.

 

空공中듕 玉옥簫쇼 소래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여 바다할 구버보니,

기픠랄 모라거니 가인들 엇디 알리.

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 대 업다


윗글을 고교시절 생각하며 나름대로 해석하면....

"북두 칠성과 같은 국자 모양 술잔을 기울여

동해바닷물 많큼의 술을 부어 저 먹고 나에게도 먹이거늘,
서너 잔을 기울이니 온화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양 겨드랑이를 추켜올리니,
아득한 하늘도 웬만하면 날 것 같구나"

공중의 옥퉁소 소리가 어제던가 그제던가 어렴풋하네.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깊이를 모르는데 하물며 끝인들 어찌 알리.
명월이 온 세상에 아니 비친 곳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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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창회 홈피에 올린 글을 옮겨왔음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무지하게 이쁜 여자..무지하게 밝힌 여자?...
그녀의 코가 한치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것....혹시 이 정도 아니세요? ㅎㅎ

클레오파트라(BC69~30).....
설명이 필요없는 이 여인. 이 여자에 대해 아무리 간단하게 쓴다 하더라도
족히 책 한권이 되니 너저분한거는 빼고 그녀의 남성관계만을 중심으로 엮어 볼까 합니다.



▲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인이라구요?

클레오파트라는 순수 이집트 토박이가 아니올시다.
아프리카 깜둥이가 아닌 마케도니아 여인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서양 여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을 한것입니다
마케도니아가 어디 붙어 있느냐.....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 아시지요?
그리이스 윗 동네의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아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워째서 마케도니아 넘덜이 이집트를 통치했느냐가 궁금하시지요?

알렉산더 대왕..........
이 유명한 사람이 어디 나라넘인지 오늘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겁니다
마케도니아 왕이었죠. 20살에 왕이 되서 서른셋에 꼴까닥하는 무지하게 명이 짧아
그동안 차지했던 그 넓은 땅이 아깝고도 아까운 넘이었죠. 땅 욕심 무자게 많은 넘이죠.

역사적인 땅 재벌에는 동양의 징기스칸, 서양의 알렉산더가 대빵입니다.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째로 먹으려 설치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되자
(친구를 사랑한 동성애자여서 요즈음 말하는 에이즈로 죽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만)
이넘이 구축한 그 넓은 땅덩어리를 지역 사령관들이 그냥 나눠갖게 됩니다.

이 당시 이집트 총독사령부 오야붕은 "프톨레미"장군입니다.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미"는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이집트를 털도 안뽑고 꿀꺼덕 접수하고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왕가의 출발이고
클레오파트라는 그 왕가(BC323~30)의 마지막 여왕이 되겠습니다.

이 왕가는 약 3세기에 걸쳐 이집트를 통치하면서도
이집트인이 아닌 정복자라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토착어를 사용하지 않고 민중과 멀리하는 시건방을 떨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토착어에 능했고, 이집트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등
이집트인들의 마음에 쏙드는 행동을 하여 단연 인기 짱이었습니다.



▲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남동생....

BC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꼴까닥하면서 유언하기를
장녀 클레오파트라와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너거덜 둘이 사이좋게 힘을 합쳐
나라를 공동통치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8살의 누나와 10살의 남동생은 결혼을 합니다.
근친결혼은 당시 이집트 왕가의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총명함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역사, 문학, 철학, 음악등 두루 박식함은 물론 특히 8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EBS 어학강좌 선생에 거액받고 전속출연할 정도였답니다.

그러나 머니머니 해도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언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서양최고의 미인으로 알고 있고
특히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역을 맡았던 예쁜 젊은 날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연상하지만은 실제로는 미인과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남자를 낚는 비법은 미모에 있지않고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기술"에 있었다는게 정설입니다.

여왕인 그녀가 가장 주력한 정책은 로마와의 친선외교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막강 로마제국은 중근동 지방을 죄다 싹쓸이해서
이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독립국은 이집트 하나 뿐인 것입니다.

그녀는 로마 실력자인 폼페이우스가 추진하는 NMD정책에 무조건 찬성을 하며
그넘의 환심을 사려고 병사와 물자를 보내는등 갖은 아양을 다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녀 욕심 크기도 하지....
남편이자 남동생인 왕을 밀쳐내고 저혼자 여왕노릇하려고 설치다가
오히려 남편에게 박살이 나서 아라비아 반도로 쫓겨가는 처지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집트 내부의 왕권쟁탈전에 불과한 이 싸움이
로마의 영웅들이 개입하면서 역사적 대사건으로 방향 전환을 합니다.



▲ 로마제국의 5.16쿠데타

이집트에서 왕권쟁탈전이 타격태격 벌어질 즈음에
로마에서도 대권을 놓고 치고 받는 싸움이 전개됩니다.
시이저와 폼페이우스의 맞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로마의 삼두정치.....
군인대표 시이저, 귀족대표 폼페이우스, 재벌대표 크라수스....
이 세명이 서로 견제하며 로마를 이끌어가자고 합의한거죠.
이게 잘 지켜지겠습니까?.......믿는 넘이 호구죠.
우리나라도 노태우 정권 말기에 합의서 공개니 머니 해서 똥칠한 적이 있지않았습니까?

대외정벌에 나선 시이저가 영국을 비롯한 온 유럽을 함락하며 휘파람 날릴때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때는 이때다 싶어 원로원과 결탁해서
라이벌 시이저를 타도하고자 하는 정풍운동을 꾸밉니다.

열이 꼭지까지 돌은 시이저는 "동작그만! 고향앞으로"를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단숨에 루비콘 강까지 다달아 잠시 멈칫합니다.
루비콘강은 로마와 속국의 경계선 공동경비구역JSA로 원로원의 승인없이 이강을 건너면
곧 반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알까기 시합의 유명한 대사죠.
이 말과 함께 로마로 맹진격하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로마시내를 탱크로 휩쓸어 버려
주둥이만 나불대는 귀족, 부호 정치인들을 반혁명분자로 눌러 버립니다.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 말을 애드립한 시이저는
정치군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청와대에 입성하여 최고 실권자가 됩니다.



▲ 로마가 이집트에 코 꿰인 이유

신라의 달밤 맞짱에서 시이저에게 대판 깨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해와서
정치적망명을 요청합니다. 약소국 이집트 국회는 벌집 쑤신듯 발칵 뒤집어집니다.
일본에서의 김정일 동생 김정남 밀입국 사건처럼 스리슬쩍 제3국으로 송환하느냐.....
새 실력자 시이저에게 잘 보이기위해 아예 폼페이우스를 죽이느냐.... 갑론을박 끝에
그의 목을 쳐서 시이저에게 선물합니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진군한 시이저는
자연스럽게 이집트 국보위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전두환이처럼...
이때 이집트 왕가는 누나(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클女의 남편)이 서로 패가 갈려 으르렁대면서
서로 지가 이집트의 실권자라고 아등바등 싸울때 였습니다.
국보위위원장은 누나(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클女의 남편)을 불러 중재를 하려고 합니다.

이날 밤 그 유명한 모포자락 일화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시이저의 중재를 받아들여 봤자 결국 남동생과 공동통치 뿐이다...."
"시이저 저넘을 내 육체의 포로로 만들면 이집트는 내꺼다...."
이렇게 짱구를 굴린 그녀는 묘수를 생각합니다.



▲ 그녀....시이저를 낚다

그날 밤 시이저의 아파트에 퀵 서비스 배달나온 넘이 웬 모포자락을 들쳐업고 와서
시이저 앞에 져놓으며 말합니다.
"함 풀어보슈.....여왕이 보낸 선물이유"
"띠바.........이거이 머야?......혹시 중국영화에 나오는 강시 아녀?"
쭝얼거리며 모포를 확 제끼니.....두둥~~!!!
거기에는 나체의 쭉빵걸이 요염하게 몸을 꼬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그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통째로 후루룩 잡아 잡슈....하는 그녀의 뇌쇄적인 접근에 천하의 시이저는
그날 밤 직빵으로 그녀의 포로가 돼 버립니다.

국보위위원장 시이저를 밤새 녹여버린 그녀에게 자연 정권의 힘이 쏠리자
졸지에 새 돼버린 남동생은 떨거지 추종세력을 규합해서 시이저에게 맞장 뜨자고 깝싹대다가
오히려 궤멸당하고 마니 이때가 BC47년....마침내 그녀의 전성시대가 열린것입니다.
수무두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녀는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14세와 재혼하면서 여왕자리에 오르고
이때 그녀는 시이저의 아기를 잉태하여 시이저 입을 찢어지게 만듭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시이저는 소아시아, 아프리카를 아작내고 로마에 개선하는데
이 원정에서 시이저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명언을 남기죠.



▲ 부르터스 .....너마저도?

독재자 시이저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10년임기의 독재관이 된뒤
내사랑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초대해서 왕궁에 모십니다.
그녀는 이제 로마제국의 여왕이 되는 꿈을 꾸며 낮에는 퍼스트레이디 연습을 하고,
밤에는 만찬을 주도해 로마정치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 여념 없었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역사의 진리입죠.
시이저의 독재가 점점 지나쳐 급기야 황제자리까지 넘보게 되자
부르터스를 포함한 반 시이저파 중앙정보부 행동대원들이 10.26 거사를 단행하여
국회의사당에 출근하는 시이저를 난도질 살해해 버리고 맙니다.
"김재규......너마저도?" "부루터스...너 마저도?" 이 명대사가 이때 탄생하죠. ㅎㅎ

기둥서방이 살해당하니 그녀가 로마에 있어봤자 뭐합니까.
까딱하다간 자기 목숨도 부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랴부랴 남행열차 타고 이집트로 되 돌아와서 어린 남편을 죽이고 아들 케사리온과 또 결혼합니다..
이거 완전히 엽기적 집안이죠?



▲ 그녀의 두번째 제물.....안토니우스

이때 로마의 정세는 "80년 서울의 봄" 처럼 좌충우돌 오리무중속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양김 대결로 압축됩니다.
이 두넘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땅따먹기 시합을 벌입니다.

초반전은 옥氏보다 안氏의 승리.....안氏는 지금의 터키까지 쾌속 진출합니다.
그런데.....사실 안氏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맘이 있었습니다.
땅따먹기는 핑계고, 속셈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고 싶었던거죠.
안氏는 그녀가 로마에 있었을 때 이미 홀딱 반해 있었고 그녀를 어떻게든 낚아보려고
이집트 가까이 있는 터키까지 내려 온 것입니다.

터키 해변에 진을 친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손폰을 때립니다.
그러나 안氏의 껄떡거림을 눈치챈 그녀.....
계속 뺀치 놓으며 애간장을 태우자 몸이 단 안氏는 체면이고 뭐고
그녀에게 칭얼칭얼 매달리게 되는데......





▲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안토니우스가 "한번 만나줘요.....울랄랄라" 를 불러 제끼며
이메일, 스팸메일, �업메일....갖은 메일을 보내자
클레오파트라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그넘을 만나 줍니다.

BC41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28살의 익을대로 익은 농염한 그녀는 42살의 안氏를 육체의 포로로 만들었고
사랑의 노예가 된 안氏는 로마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지냅니다.

플루타르크는 그의 저서 "영웅전"에서 그들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만 빠져 할 일 안 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짝짜꿍 힘을 합쳐 인근 국가들을 야금야금 먹어 치웁니다.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리비아, 페니키아, 실리시아....
물론 로마, 이집트 공동경비구역JSA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게 어디입니까?
님도 보고 뽕도 따고.....사랑도 얻고 식민지도 얻고....



▲ 남 잘되는 걸 보면 배가 아프지....

옛 이집트의 화려한 영광을 재현한 그녀의 행복도 잠깐......
그녀의 급성장에 위협을 느낀 로마의 칼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어쩌면 로마와 이집트를 거머쥔 안氏의 독주에 더 겁을 먹은 것입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氏의 반대파들이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며 몰아 붙입니다.
로마 원로원의 청문회 기록에 의한........안氏와 옥氏의 설전을 보면

옥씨 : 안씨...당신은 너무 방탕하다.....동방의 요부와 놀아나다니....
안씨 : 그녀는 내 아내와 다름없다.... 요부라니?......졸라 똑똑하다.

옥씨 : 그래두.. 명색이 로마의 실력자가 그렇게 여자품에만 있으면 돼?
안씨 : 교전중에 내가 골프를 쳤어?..왜 이래....그 여자랑 같이 땅 무자게 넓혔어.

옥씨 : ....얀마... 너는 내 여동생과 결혼한 놈인데 어케 그럴수 있어...엉?
안씨 : 옥씨....아니 처남....그러는 처남은 딴 여자랑 그거 안하우?
(옥씨와 안씨는 서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거던요...)

뿔딱지 이빠이 난 안토니우스..... 내친김에 원로원에 아예 승부수를 던져 버립니다.
자기를 "동방제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강짜를 부린것입니다.
즉 로마의 실력자 + 이집트의 왕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안氏를 티꺼워한 반대파들이 찬성을 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죠 (아...이말 ..참 오랜만에 써 먹는당)
반대파 넘덜은 안氏의 약점을 찾는데 혈안이 됐고
드디어.... 안氏의 유언장을 입수해 로마방송에 전격공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언론 플레이 하는거죠

"엄마 엄마 나 죽거덩...이집트에다 묻어주.... 로마에다 묻지 말고 이집트에다 묻어주..."
이런 유언장의 내용을 시청한 로마시민들은 경악, 분개했고
안토니우스의 인기순위는 급강하하기 시작합니다.
이 찬스를 놓칠리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잘 됐다 싶어 전쟁을 선언합니다.




▲ 로마와 이집트... 한판 붙다.

BC 31년.......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겉으로야 이집트에게 선전포고 한 것이고
내심으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는게 주 목적입니다.

역사 교과서에 뻔질나게 등장하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집니다.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이집트 전력이 더 쎈 것 처럼 보이지만
이집트 전함은 굼뱅이....로마 전함은 날쌘돌이....
뻔할 뻔자로 이집트 군대는 바닷귀신이 되고 맙니다.

한때 로마와 이집트의 실력자에서 패전장수로 몰락한 안氏는 울분과 충격을 가눌길 없어
독방에 기거하며 은둔생활을 합니다. (아이엠에푸 이후의 실직자들 심정이 이랬겠지요?)

그러나 곤경에 처하면 남자보다 강해지는 게 여자 !!!
클레오파트라는 안氏에게 용기와 생기를 넣어주려 갖은 방법으로 안간힘을 썼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인들은 클레오파트라를 닮아야 합니다 ! )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한 둘은 잠시 행복에 젖습니다.
그 많던 식민지 다 뺏기고 이집트만 달랑 남았어도 .......둘은 행복합니다.
80평 아파트에서 살다가 단칸 지하방으로 가도 소박한 사랑은 다시 피어 날 수가 있는거죠....ㅎㅎ

그런데.....2년간의 행복도 잠깐........ 이들의 사랑이 다시 위협받게 됩니다.
빌어먹을 옥장판....아니 옥氏가 다시 이집트를 겹겹이 포위해버리고 .....

옥氏 : 안토니우스....너 ..어여 모가지 내밀어라.
안氏 : 모든 권력 포기하고 평민으로 살테니 그녀와 함께만 있게 해 주라...

옥氏 : 밥맛 똥인 너와는 상대 않겠다.....니 애인좀 바꿔 바바.
클女 : 전화 바꿨다...옥소리 오빠...아니 옥타비아누스야...

옥氏 : 내 말 잘 들어....니가 안氏 목을 따서 바치면 너만은 살려주마.
클女 : 이쉐이...떵싸는 소리하네.......얀마....한판 더 붙자.



▲ 이집트 버전 "로미오와 주리엣"

하수 골퍼가 지 아무리 독을 품어봤자 고수 골퍼를 어떻게 이깁니까??
이번도 역시 뻔할 뻔자로이집트 군대가 작살나게 깨집니다.
썩어도 준치요 왕년에 천재라고...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면서도
안토니우스는 결사적 항전에 선봉을 섭니다.
그런데....."여왕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도는게 아니겠습니까?

급격히 전의를 상실한 안토니우스....
그녀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결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건 웬 코메디입니까?.......아니면 이집트 판 "로미오와 주리엣" 입니까?
"여왕은 아직 살아있다"라는 소문이 다시 도는 겁니다.

아직 목숨이 실낱같이 붙어있는 안토니우스는 부하에게 명해서
자기를 여왕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여왕은 여왕대로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싸늘히 죽어가고 있는 그를 맞이하며 크레오파트라는 오열합니다.

그 장면을 플루타르크는 그의 저서 "영웅전"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누인 뒤 자기 옷을 덮어주고,
내 사랑....나의 남편....전하...라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며
전투로 엉망이 된 그녀의 비참한 처지도 잊은 채 멍이 들도록 그녀 가슴을 치고,
얼굴로 비벼 피를 닦아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 하라"고 말한 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맙니다.
얼마 뒤 그녀는 로마군에게 체포되는 포로신세가 됩니다.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 그들의 사랑 ....영원히 하나가 되다.

그녀는 옥氏의 허락을 얻어내 안토니우스의 장례식을 치르고는 죽기를 작정하고
그날로부터 단식에 들어 갑니다.
그러자.....당황한건 옥氏였습니다.
그녀를 산채로 로마로 압송해서 로마시내를 질질 끌고다녀야
자신의 승리가 더욱 돋보일거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를 위협합니다.
"만일 단식을 그만두지 않으면, 네 자식들을 죽이겠다...."
어쩔수 없이 그녀는 다시 음식을 입에 댔으나 비참하게 사느니
깨끗이 죽겠다는 마음은 변함 없었습니다.

일설에는 그녀가 옥타비아누스를 몸으로 유혹해서 목숨을 구차하게 부지하려 했다는 썰도 있으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창백하고 야윈 몰골로 유혹은 어림없다"고 일축합니다.

이윽고 그녀가 로마에 끌려가기 3일 전.....
그녀는 몸을 정결히 하고 의관정제하여 안토니우스 묘를 참배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 와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를......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주오"
편지 받고 놀란 옥타비아누스가 부랴부랴 사람을 보냈으나
그녀는 이미 독사에게 물려 자결한 뒤 였습니다.
39살의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그 화려한 생을 마감합니다.




▲ 주절주절 잔소리.....

클레오파트라는 흔히 요부, 악녀, 색골등으로 묘사 됐고.....
로마의 영웅들 사이를 오간 창녀같은 여왕이라 알려졌고....
나라야 어찌됐던 남자만 밝힌 여자인 것처럼 전해지지만.....
약소국인 조국 이집트의 생존을 위해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부었던 여왕임이 분명합니다.
그녀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평가한 기록을 몇개 소개하며 글 맺습니다.

[수에토누스]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은 시이저와 안토니우스...단 두사람 뿐이다.
그 관계도 몰래한 사랑이 아닌 공식적인 떳떳한 사랑이다.
당시 로마여인들의 난잡한 성생활에 비하면 더없이 정숙한 여인이다.
(가장 부유했던 로마제국은 인간이 갈수 있는 최후 최고의 오락 -섹스-로 로마 인구의 40%이상이
성병에 걸려 죽게 �으며 이것이 로마제국 멸망의 큰 원인중 하나라는것 알고 계세요?)

[마르탱]
옥타비아누스는 비겁한 역사검열자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시이저, 안토니우스 사이의 모든 공식 문서, 편지, 각종 사료를 깡그리 없애 버렸다.
그녀에 대한 억측이 구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몽텔]
로마역사가들의 가장 큰 사명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갖은 비방과 비난을 써 대는 것이었다.
사실.....그녀만큼 무고한 여인도 없다.




어찌 잘 읽으셨는지요
전세계에 그녀를 연구한 논문만 헤아려 보려 해도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일생은 화려했으며 흥미진진입니다
그런 여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셨는지요
이제 나가서 클레오파트라를 술안주 삼아 한잔 해 보시죠...ㅎㅎ
즐거운 하루가 될것입니다
그리고 유식하다는 말을 듣게 될겁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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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언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고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시인세계]에서 현역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그 설문 조사에서 그 유명한 손로원선생 작사, 박시춘선생 작곡,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가 단연 1위에 선정 되었답니다.
이어서 '킬리만자로의 표범','북한강에서','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한계령','아침 이슬',
'가시나무',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그 겨울의 찻집', '황성 옛터'...순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통계가 있기 훨씬전부터..아니 우리 대부분이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일것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이 노랫말이 흐를 땐 나의 청춘과 사랑과 삶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삶의 허무와 인생, 그 근원적 비극성이 한꺼번에 회화적으로 돌출되는 듯 합니다.

항구의 페이소스가 더없이 어우러져 있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단한 시절에 우리 어머니들의 멍든 가슴을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고
역설적 카타르시스로 엉어리 진 멍든 가슴을 쓰다덤어 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아직도 그 시절 어머니들에겐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이 남아 있으리....

이런 노랫말들중 으뜸은 뭐니 뭐니해도 '봄날은 간다'라고 난 말합니다.

열아홉 시절에 보았던 그 아름답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온통 내 세상 같고 내 편일 것 같던 그 세월은 언제 이렇게 변했던가!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속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인생의 허무를 열아홉 사랑으로 표현한 불후의 명작
나같은 허무주의자들이 한잔 술에 취해 벽에 머리 박고 부르는 노래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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