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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과 "돌아 오지 않는 강" 여기서 저는 이중섭의 그림 세계라던가 생애를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고 조용필의 "돌아 오지 않는 강"이란 노래가 어떤 배경 속에서 만들어 졌는가에 촛점을 마추어 이 글을 씁니다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에 오산학교를 나와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고... 무슨 미술학원에 들어 갑니다. 선묘낭자와 그의 아버지 유지인이 '의상대사'를 한눈에 범상치 않은 훌륭한 분이란걸 알았듯이 같은 미술 학도였던 일본인 여학생 '야마모또 마사꼬'는 첫눈에 이 중섭이 범상치 않은 위대한 화가라는걸 느끼고 존경과 사랑에 빠지게됩니다. "마사꼬"는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일본 굴지의 그룹인 미쓰시비 회장의 손녀딸인가 되는 그런 가문있는 집의 예쁘디 예쁜 아가씨 "마사꼬'양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그런 아가씨가 조선의 가난한 화가 이중섭에게 시집을 오고, 함경도 원산에서 살림을 꾸밉니다. 아기도 낳고,( 이 자식들이 요즘 가짜 그림으로 아버지를 욕 보이고 있습니다만) 행복을 꿈꿉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조선반도에선 순수그림쟁이가 먹고 살수가 없었습니다 '마사꼬'는 가난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납니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부인과 아이들이 보고싶어 심각한 수준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부인을 그리워하며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돌아 오지 않는 강"이라는 그림입니다. 1956년 어느날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대부분 보셨을법한 유명한 영화 --추억 속에 살아 있는 영화 마리린 몬로와 로보트 밋참이 주연한 영화 "돌아 오지 않는 강"이라는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그린 마지막 그림..."돌아 오지 않는 강" 금광을 가지려는 허영과 욕망, 사랑이 허무하게 돌아 오지 않는 강으로 떠내려 가는 그 영화를 보고 자기 곁을 떠나간 사랑하는 '마사꼬'.... "마사꼬" 그녀 만큼은 곧 자기 곁으로 올것같은 예감을 느끼며 그리는 "돌아 오지 않는 강"..... "돌아 오지 않는 강"이란 그림은 그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지 못하면 단순한 스케치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님이 올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팔벼개를 배고 비스듬이 창가에 걸터 있는 이중섭.. 처마 끝에 앉아있는 삐싹마른 새 한마리가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전해 주려는가 이 모두가 꿈인가! 처마 끝에서 엿장사 가위같은 입을하고 무슨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는 듯한 삐싹 마른 저 새를 보면.. 저는 그리움이 쌓여 한맺혀진 이중섭의 마음을 읽는 것같아 가슴이 찌저지는 듯합니다 이 중섭 작 "돌아 오지 않는 강" (이중섭은 몇장의 "돌아 오지 않는 강"을 그리곤 꾸겨 버리고를 반복했답니다) {그래서 몇점의 "돌아 오지 않는 강"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 무렵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애뜻한 사랑을 느낄수 있으리라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 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 (중섭은 '마사꼬'를 南德君이라 불렀습니다) 하루 종일 제작을 계속 하면서 남덕군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 하고 그것만을 마음속에서 준비하고 있다오.... 어서 아고리의 두 팔에 안기어 긴 입맞춤을 해 주오, ('아고'는 일본말로 '턱'이란 뜻이고 '리'는 李 중섭을 말한답니다. 이중섭이 턱이 좀 크더군요) 언제나 내 가슴은 상냥한 당신으로 가득 차 있소, 하루 빨리 기운을 차려 내가 좋아하는 발가락 군을 마음껏 어루만지도록 해주오, 나는 당신을 아침 가득히, 태양 가득히, 신록 가득히, 작품 가득히 사랑하고 있소, 내 머릿속은 당신을 향한 사랑의 말로 가득 차 있소."


돌아오지 않는 강-

조용필

당신의 눈속에 내가 있고
내 눈속에 당신이 있을때
우리 서로가 행복했노라~
아~ 그 바닷가 파도소리 밀려오는데
겨울나무 사이로 당신은 가고
나는 한마리 새가 되었네
제가 이글을 쓰는 더 중요한 이유는 이 노래에 있다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겨울나무 사이로 당신은 가고... 나는 한마리 새가 되었네'..로 대변되는 이 노래의 가사와 曲이 이중섭의 '돌아 오지 않는 강'이란 그림과 이중섭의 그리움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노래를 대중 가요라 할것인가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당시 이 중섭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가슴 아파 옵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아시는 분들은 아실만한 임택수 교수... '정이란 무었일까~♬'로 시작되는 "情"이라는 노래도 작곡했으며 KBS 드라마 음악 작곡가이기도 한 그도 지난해에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이 중섭 보다 못하다고 말할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歌辭 하나에도 이렇게 숨겨져 있는 깊은 사연이 많습니다 여러분! 망우리에 가면 쓸쓸히 빈 바람만 부는 언덕에 이제는 들을수도 말할수도 없이 대자연 속에 뭍혀 "돌아 오지 않는 강"을 건너간 한국의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李 仲燮이 잠들어 있습니다 어쩌다 들리게 되면 江이 아닌 하늘을 보고 이 노래를 한번 불러 보세요~~ "돌아 오지 않는 江"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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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산촌민속박물관']              1:26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이 있는데 시간 관계상 관람은 다음으로 미루고


    ['박인환문학관']            1:27~1:37       
  박물관 우측에 "박인환문학관"이 붙어 있습니다.
  문학관은 좀 세세하게 관람하고 갑니다.


    ['시인의 품']                         
  <박인환문학관> 입구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시인의 품"이라는 "박인환 상"이 있는데 방문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더군요.


    ['박인환-만남']                      
  문학관 정문으로 다가 가면 "박인환-만남"이라는 조형물이 있는데
  <목마와 숙녀> 詩와 테이블 위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가 눈길을 끕니다.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 인생"이라고 감히 말해도 될 <애주가 박인환>이 소박한 술상을 펴고 반깁니다.


    [문학관 입구]                
  문학관 정문을 열고 들어 가면 이렇게 <박인환>은 다가 옵니다.


    ['박인환'과 '목마와 숙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었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명동백작" "명동 빽구두" "조니워커와 카멜담배" 등 명동 최고의 멋쟁이였던 <박인환>
  당시 <이화여대생>들에게 최고 인기 스타라고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인기 만점의 시인인데
  그가 쓴 詩들은 어찌 슬픈 이별의 노래가 많은가.....


    ['해방 후 서울 거리']                         
  <박인환 문학관>의 특징은 당시 서울 문학인들이 거닐며 
  술과 함께 문학을 논하던 거리를 재현 해 놨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그가 29세라는 짧은 생을 마치고 사라졌기에 그에 대해 남아 있는 유품들이 거의 없기도 해서겠죠.


    ['마리서사']                    
  "마리서사 茉莉書肆"
  <시인 박인환>은 1926년 이곳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태어나 인제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서울 덕수국민학교>로 전학가서 <경기중학교>로 진학하고, 청소년관람금지 영화 보러 다니다
  중퇴하게 되고, 황해도 <명신중학교>를 졸업합니다. 이후 현재의 <평양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려
  했으나 <8.15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와 1945년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합니다.
  20세~23세까지 3년여 운영하다가 문을 닫았는데, 이후 <경향신문 기자>로 활약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처음 만난 부인 <이정숙 여사>
  <박인환>의 키는 당시로는 상당한 장신인 180cm 정도여서 여자도 키 큰 여자를 선호했는데
  <이정숙>씨의 키가 170cm로 <진명여고> 농구선수 출신으로 당시 여성잡지 기자였으니,
  그들이 단짝이 되어 명동에 나타나면 <한 쌍의 학(鶴)과 같다>는 문우들의 찬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커플로는 이상적이었으니 바로 결혼하고  2남1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박세형>씨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왔으며 아버지 뒤를 이어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고 
  <바람이 이처럼 다정하면>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서정시인이랍니다.


    ['포엠']                      
  "포엠"은 명동의 위스키 등 양주를 파는 술집이었답니다.


    ['유명옥']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 대포집이었답니다.
  <박인환>은 선배인 <김수영>과 처음엔 매우 가까이 지냈지만, 문학적 입장이 달라 사이가 멀어졌다죠.
  <6.25전쟁> 이후 지식인들이 모여 술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곳이 이런 곳이었답니다.


    ['봉선화 다방']                          
  이런 다방은 저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1~2층 계단']                           
  <박인환문학관>을 가면 반드시 2층에 올라 가 봐야 합니다.


    ['은성']                    
  "은성집"은 현재 명동입구 <유네스코빌딩> 앞 골목에 있었습니다.
  현재 표지석이 세워져 있더군요.
  텔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대포집이었답니다.
  
  <박인환>이 죽기 열흘쯤 전 이 <은성집>에서 마지막 詩가 쓰여 지고 작곡이 되었는데....
  "세월이 가면..."이라는 불후의 명시 명곡이죠.


    ['은성집'과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에서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이진섭>,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한 <가수 나애심>이 같이 술을 마시던 가운데, 
  <박인환>이 자신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듯 종이를 들고 詩를 썻는데,
  그 詩를 본 <이진섭>이 詩가 너무 좋아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바로 불렀답니다. 
  <나애심>이 먼저 술자리에서 떠나자,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받아들고서 
  다시 노래를 불렀고, 주위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려와 노래를 감상했다고 합니다.
  
  그후 <뚜아 에 모아>의 <박인희>가 리바이벌해 공전의 힛트를 쳤지요.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 인생--박인환"은 며칠후 <시인 이상 추도식>에서 3일간 술을 퍼 마시고
  이 노래와 함께 '알콜성 심정지'로 생을 마감하며, "술병에서 별이 떨어 지는 곳으로" 갔습니다.
  
  당시 9세였던 <박인환> 시인의 장남 <박세형>씨는 67세가 되어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와 토를 하시니 제가 등을 쳐 드렸습니다. 
   입에서 활명수 냄새가 났던 것으로 기억해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뛰어가셨어요. 그때 밤 9시가 넘고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이미 아버진 눈을 감으셨어요.”


    ['박인환 유품 전시']                            
  <박인환>을 시인으로만 생각하시면 않됩니다.
  영어를 잘해서 번역가이기도 했으며, 여성잡지 기자였던 부인 <이정숙>씨와 함께 "영화평론가"였습니다.
  
  천재는 단명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29년의 짧은 인생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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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래포구  


[소래포구역]    

2016년 11월 27일 (일)      비 약간 흐림 
오늘은 원래 [인천둘레길 8코스 원인재-문학산]을 다녀 오려고 길을 나섯습니다.
인천에 사시는 "구름재등님"과 만나 안내를 받을려고 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특히 안개가 장난이 아니어서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한잔하러 "소래포구"로 갔습니다.
저는 30여년만에 "소래포구"를 찾았는데 엄청나게 변했더군요.
협괘열차가 다니던 "수인선"에는 전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역사도 위용을 자랑하더군요.
  


[수인선]

"수인선"은 1937년에 개통되어 1995년까지 운행되다가 폐쇄되고
2012년에 복선전철로 재탄생되었답니다.
  



[소래역사관-협괘열차]

비린내 나던 포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소래역사관"과 역사관 앞에는 추억의 "협괘열차"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192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립된 '협괘용 증기기관차'랍니다.
이 기관차는 '대관령휴게소'에 전시되 왔으나 2008년에 이곳으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는군요.
  





[소래포구재래시장]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곳은 재래시장 뿐이었습니다.
소래포구재래시장에서 회를 뜨고 해삼 멍개를 곁들여 사서
  



[소래포구]

  포구에 걸터 앉은 "소망횟집"으로 들고 들어가
대낮부터 먹고 마시다가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떳습니다.
자리를 만들어준 "구름재등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림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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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경기도 도립공원" [남한산성] "인조의 길" [남한산성 서문]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 [구글어스]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마천역"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서문-북문]을 오르고 '경기도 하남시'의 "고골 古邑"을 통과하여 "광주향교"까지 약10km를 갑니다. ['거여삼거리'] 12:39 2020년 3월 18일 (수)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지하철5호선 마천역1번출구]로 나가 50m 정도 직진하면 삼거리에 있는 "거여119안전센타"를 만나 좌회전 하고, 조금 올라 가면 이곳 "거여삼거리"를 만납니다. [남한산성]이 보이는 이 도로에서 좌측은 [마천동]이고, 우측은 [거여동]이더군요. 직진해서 8분여 올라 가면... ['만남의 장소'] 12:47 [송파상운]이라는 버스회사의 버스종점을 만나는데 정면에 [남한산성]의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남의 장소"라는 등산객들의 집합소가 있는데, 이 주변을 상세한 지도로 확인하고 출발합니다. [현위치] [구글어스] "만남의 장소"라고 표기한 곳이 [현위치]입니다. 제가 이번 산행의 실트랙을 구글어스에 편집하여 보여 드리는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385년 전 [병자호란]으로 조선 16대 왕 [인조]가 항복을 하러 내려간 루트를 대략 추정하기 위해서 제가 걸어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현재의 등산로 중에 하나이며 역사적 고증을 거친 길은 아니고 추정해 본 길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인조의 길"이라고 제가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앞으로 전문가들이 확실한 역사적 고증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하남시 市界'] 12:50 [만남의 장소]에서 100m 정도 직진하면 "서울시-하남시 市界"를 지나게 되는데, '하남시 감이동 甘二洞' 속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조그마한 전통시장 같은 상가 골목을 잠시 통과하면... ['위례대로'] 12:51 현재 공사중인 [위례대로] 밑을 통과하는데, 좌측으로 가면 [성불사] 방향으로서 [연주봉옹성]으로 직접 오르는 등산로이고 직진성 우측으로 가면 [서문]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되겠습니다. [인조]는 실록에 [서문]을 통과해 [삼전도]로 내려 갔다고 쓰여 있으니 우측길로 진행합니다. 8분 정도 진행하면... [다리] 12:59 조그만 다리를 건너는데 [우익문(서문)]까지 1.3km라고 알려 줍니다. 뒤에 보이는 뾰쪽한 산이 [남한산성]의 "연주봉" 인듯 [오름길] 다리에서 완만한 오름길을 100m 정도 잠시 더 오르면... [등산로 들날머리] 1:02 먼지털이와 화장실이 있는 실질적인 [남한산성 서문 등산로]의 들날머리를 만나고 [갈림길] 1:03 [안내도] 들날머리에는 갈림길과 등산로 안내가 있습니다. 저는 [서문]으로 가장 빨리 오를수 있는 [3번등산로]를 이용합니다. [오름길] 대부분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름길을 15분여 오릅니다. 인조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14일 그날의 [인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日晩, 大駕將發, 而太僕人盡散, 內乘李星男, 牽御馬而來. 駕到崇禮門, 聞賊兵已到良鐵坪, 上御南大門樓, 令申景禛結陣于門外. 崔鳴吉請赴虜陣, 以觀變, 遂遣鳴吉, 請成於虜, 以緩其師. 上還從水溝門, 出向南漢山城。 是時, 變出倉卒, 侍臣或有步從者, 城中人父子、兄弟、 夫婦相失, 哭聲震天. 初更後, 大駕到南漢山城. 해가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실록의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기 쉽게 '파란문'이 친절하게 풀이해 드리면 [대가(大駕)]는 임금이 타는 가마를 의미하는데 요즘으로 치며 '벤즈 리무진'같은 거겠지요? ㅎ [태복인(太僕人)]은 '궁중의 말과 가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고 [내승(內乘)]은 '태복인의 직급 중에 하나' 인듯 한데 높은 지위인듯 합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현재의 [광희문]을 말하는 것인데 '을지로7가'와 '퇴계로7가'가 합류하는 현재의 [동북고] 앞 삼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삼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광희동'에 복원해 놨습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한양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환경 오물을 성밖에 내다 버리는 문으로 이용되었고,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어 [남소문]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했습죠. '왕십리'라는 지명은 이 [수구문]에서 십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往十里'라고 했는데 한양성에서 배출되는 환경 오물들을 내다 버리는 곳이어서 '똥파리'들이 들끓었다고 [왕심리똥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답니다. '초경(初更)'은 밤 9시경인데 "初更後"이니 밤 10시경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위의 실록을 알기 쉽게 제가 간단하게 풀이 하자면 청나라 군대가 쳐내려 오자 [인조]는 '한양성'의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백성들의 시선을 피해 시체나 똥물을 내다 버리는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 갔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이 비록 도망이지만 행차인데도, 가마를 메는 놈들까지 대부분 도망 가서 가마 멜 놈들이 없어 [내승(內乘)]이 가마 대신 말을 끌고 와 도망 갔다는 것 아닙니까...어휴~~쪽팔려... [갈림길] 1:18 화장실에서 15분 정도 오름짓을 하면 이런 갈림길을 만납니다. 직진성 좌측길은 조금전 안내도의 [2번등산로]이며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주등산로여서 계단과 로프등 시설이 잘 되 있으나, 저는 지형적으로 [인조]가 우측 [3번등산로]를 이용 했을거라 추정하여 우측길로 올라 갑니다. 어느 길로 가나 다시 만납니다. 우측길로 잠시 나가면... [조망처] 1:22 여기선 정확한 [서문]의 위치를 알수 없으나 [남한산성] 능선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을 15분여 더 올라 가면... [주등산로] 1:37 조금전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로프등 안전시설이 설치된 가파른 등산로를 다시 만나는데... [인조]는 평민복을 입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대동하고 자신은 백마를 타고 [서문]을 나섯다고 실록에 쓰여 있는데 가파른 산길에서 말을 타고 내려 가는 것은 걷기보다 더 위험하기에 아마도 말을 탓다가 가파른 곳에선 말에서 내려 걷다가를 반복하며 하산 했을 거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송파]로 통하는 산길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오름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러 내려 간길은 [서문]에서 [삼전도]로 갔다고 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지만 [인조]가 몽진을 하며 [남한산성]으로 올라 갈때엔 어느 길을 이용해 [남한산성]으로 올라 갔는지에 대해선 실록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 때 [수구문]을 출발하여 '초경'이 지나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정문이라 할수 있는 [남문]을 통해 올라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설화가 거의 정설화 되다시피 전해 내려 옵니다. 1636년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갔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인조실록]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살찐 비만의 [인조]를 업고 간다는 것은 무지 힘들었겠죠? 그래서 업혔다 걷다가를 반복했다는데, 현재의 [송파구 오금동] 쯤을 지날 때에는 [인조]가 다리가 아파 주저 앉았는데, 후세의 백성들은 "살찐 임금 인조는 오금이 져려 체면이고 뭐고 주저 앉았다"고 비아냥거리며, 그통에 이 동네 지명이 [오금동]으로 불리워진 사연 중 하나라고 놀려 댓답니다. [오금동]은 [오동나무 梧]와 [가야금 琴]으로 오동나무가 많아 가야금을 많이 만드는 마을에서 지명이 유래하는데도....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쪽팔리는 도망을 해서 백성들로부터 비아냥을 받은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올라 갔답니다. 현재 '송파구 도서관' 앞 마당에는 그 날의 그 상황을 동상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무꾼 "서흔남"이 [인조]를 업고 올라 가는 동상이 엄청 크게 건립되 있는 것이죠. 그 사진을 보여 드리면... ['송파구립 도서관' 앞 마당에 건립되어 있는 '서흔남'과 '인조' 동상]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 갈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임금님은 피난하는 것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무릎을 탁 치면서 "너 나보다 낫다"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무엇이던 들어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두말없이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 나뭇꾼이었는데, [인조]는 그에게 '종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관리 사무소와 역사기념관 앞 주차장 가에 있는 '서흔남 묘비'] ['서흔남 묘비'] ['인조'가 내린 '서흔남 공적비'] 산성안에 들어 가서도 서흔남은 여러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어지자, 남한산성 주변 지리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속여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답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하네요. [서흔남]은 죽을 때 자기 관 위에 [인조]로 부터 받은 '곤룡포(袞龍袍)'를 올려 달라고 하여 '곤룡포(袞龍袍)'를 덮어 쓰고 죽은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이었답니다. [인조실록]에도 밀사로 [서흔남]을 내 보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나옵니다. 1637년 1월7일자에는 ○城中居徐欣男及僧人斗淸, 應募出去, 持都元帥金自點、黃海兵使李碩達、全羅監司李時昉狀啓而來。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찮은 천민 임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서흔남에게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으며 그 공적비가 바로 위 사진입니다. 이것은 野史가 아니고 正史입니다 [주등산로] 1:49 [병자호란]은 왜? 일어 났는지를 알아야하겠죠. 제 나름 언급하자면...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후임인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세력인 훈구파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인조'를 옹립한 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나라'를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훈구파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쉼터]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서문] 앞에 있는 쉼터를 만나는데 호랑이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조망] 출발지였던 '거여동' '마천동'이 희미하게 조망됩니다. [인조]는 분명 이 길로 몽진과 항복을 하러 눈 덮힌 산길을 오르내렸을 거로 짐작 됩니다. ['서문' 입구] ['서문'] 1:52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경기도'가 지정한 도립공원 3개 중에 하나로서 정식 명칭이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이 되었죠. 또한 2014년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서문] 통과] ['서문' 안내문] 지금으로부터 385년전..그러니까 무지무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남한산성]의 문 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은 "西門-右翼門"을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통과했습니다. '청나라'에 항복하러.... [城안] 城 내부를 들여다 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 行宮이 있습니다.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어디로 갈것인지 길을 찾지 못하고 말싸움만 하다가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헤 부러지고 마는 허무한 국가의 운명이 바람 부는 날의 촛불같았을 그 날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 갑니다. ['서문'] (10분간 휴식) 본명이 "우익문 右翼門"인 "西門"을 城안에서 바라본 광경입니다. 1636년12월 14일 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유난히도 춥고 눈도 엄청 많이 내렸고 일식도 나타나는 겨울에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며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1637년 1월 30일의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남염의(藍染衣)]는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을 의미하지요. 계급장 떼고 평민복 입고 자식들을 인질로 끌고 나가는 패전보다 못한 항복, 그 치욕을 감내한 남한산성.... 아 ! 백성들이 통곡을 한것은 나라 잃은 슬픔일까 [인조]에 대한 연민일까... [옆에서 본 '서문'] '김훈'의 역사 소설 '남한산성'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합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 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바스락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 가면 눈 덮힌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 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 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 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서울' 조망] 2:17 [서문]에서 [연주봉옹성] 방향으로 조금 가면 전망명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전된 서울과 서울을 감싸고 있는 북한산 도봉산 등을 조망합니다만 저의 눈에는 1637년 1월 30일의 상황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삼전도에서의 항복" "三田渡"는 앞에 보이는 [롯데월드타워]가 있는 [석촌호수] 주변이라고 합니다. [석촌호수] 옆에 항복을 하고 충성을 맹세한 치욕의 "삼전도비"가 현재도 세워져 있죠. 제가 예전에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한 사진과 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삼전도비']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가 오리지날 이름이죠. "삼전도비"라고 하는 것은 이 비를 '삼전도'에 세워서 부르는 일반명사입니다. "삼전도"는 저곳 잠실나루터 부근인데 밀물 때에도 잠기지 않는 밭이 세곳 있었다고 "三田渡"라고 했답니다. 이 비석의 전면 좌측에는 '몽골글자'로, 우측에는 '만주글자'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놨습니다. 글의 내용을 번역하면....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 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삼전도비']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삼배고구두례'를 하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남긴 "치욕의 비석"입니다. 포로로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주축으로 수만여명을 포로로 보냈으며 여자가 대부분이라죠. 정조를 짓밟힌 여자를 "화냥년"이라 하죠? 이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라고 했는데, "환향녀"가 음운변화로 "화냥년"이 되었으니 "인조"는 자신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화냥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 오는 "환향녀"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 "홍제동"에 있는 "홍제천"에서 '여자의 그곳'을 씻기만 하면 처녀로 구제해 준다고 했으며 그래서 개천 이름이 "모두 구제헤 주는 개천"이라고 "弘濟川"이 되었다는 겁니다.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 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이 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듯 합니다. - 파란문 - ['연주봉' 조망] 전망대에서"연주봉"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연주봉"은 한자로 "連珠峰"으로 쓰는 듯 하지만, '파란문'의 생각에는 "戀主峰"으로 느껴집니다. [서문]을 통해 항복하러 가는 임금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어떤 연민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주봉]에선 [서문]에서 이어지는 행렬이 [삼전도]까지 잘 보였을 겁니다. ['서문'에서 '북문'까지 지도] [서문]에서 [연주봉옹성]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상세 지도입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 2:21 [안내문] "연주봉옹성"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남한산성]에는 네개의 옹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입니다. ['연주봉옹성' 조망] 城 밖에 돌출되 있는 [연주봉옹성]을 조망하고 [내림길] [북문]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조망] [북문]으로 가며 조망하는 [남한산성]의 동쪽 끝에 있는 [동장대]가 있었던 봉우리가 보이며 [남한산성]의 외곽성인 "봉암성"까지 잘 보이는군요. 실록에는 저 [봉암성] 근처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이 [북문] 아래에 있는 행궁까지 날아 왔는데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술되 있습니다. 대포알은 '오리알' 정도 크기였다고... ['북문'] 2:34 "全勝門-北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한 "고골-법화골"로 나가는 문입니다.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300명이 내려가 기습공격을 해? 당시엔 겨울이어서 앙상한 나무가지로 시야가 트여 성문으로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망원경이 있어 동태파악이 확실이 되었는데도 성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으니 뭔 껀수를 만들려고 한게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습니다. 조선군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던 청나라군은 문 밖에 있는 고골계곡에 없는듯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어리둥절하여 철수하는 조선군 300명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후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북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개명 하였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29일)' ○是日, 出兵北門外, 陣于平地, 賊不與之戰。 日且暮, 體察使金瑬在城上, 傳令收軍上城, 賊自後掩之, 別將申誠立等八人皆死, 士卒死傷甚多。 瑬以覆軍、(債)〔僨〕 事待罪, 上慰諭之.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수어장대' 조망] [북문]에 올라 [수어장대]를 조망하고... ['북문' 밖 조망] [북문]을 통과하여 [고골계곡]으로 내려 가서 [뒤돌아 본 '북문'] 2:39 [북문]을 뒤돌아 보고 ['북문갈림목'] 2:42 계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북문갈림목]을 만나는데, [위례둘리길]과 [고골계곡]이 나뉘는 곳이군요. [급경사 내림길] [머리 조심] 2:49 [북문]에서 내려 가는 길은 엄청 가파랏습니다. 적군을 방어하기엔 좋은 지형이지만 공격하러 내려 가기엔 부적절하겠더군요. 제가 느끼기에도 이 길로 내려가 "바위에 계란 던지기"를 한것은 자살행위가 아닌지... [데크 계단] 제법 긴 데크 계단이 10여분 이어지고 [쉼터] 2:58 데크가 끝나는 곳에 제법 너른 쉼터가 있고 이 길이 "세미길 稅米"이라고 알리고 있더군요. 한강을 통해 운송된 곡식이 [남한산성]으로 다시 올려 보내지는 길이었다고 ['고골' 계곡길] 이어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8분여 진행하면... ['토박이' 음식점] 3:06 '토박이'라는 음식점을 만나는데, 닭, 오리 백숙과 도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더군요. ['벌봉 갈림목'] 3:10 조금 더 내려 가면 "벌봉 갈림목"을 만나는데 [고골]에서 "벌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군요. ['덕풍천'] [북문]에서부터 [한강]으로 흐르는 개천이 "덕풍천"이군요. 다시 8분여 진행하면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 3:18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에 도착해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북문]에서 급격한 내리막 이후엔 바로 평지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좌측에 [연자방아]가 있다고 해서 다녀 옵니다. ['벌봉' 조망] 삼거리에서 50여m 가까운 곳에 [연자방아]가 있으며 여기선 [벌봉]과 [봉암성]이 아주 잘 조망되는군요. 그리고 "법화사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군요. "법화사" [법화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이곳에서 전사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답니다. 당시의 [법화암]은 '양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딴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고골]을 [법화골]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연자방아'] 3:20 [연자방아]를 흘깃 구경하고 다시 돌아 나갑니다. [공용주차장] 3:27 "고골 공용주차장"을 지나는데 마을버스가 다니더군요. ['고골로'] ['하남 교산 신도시'] "고골-古邑"은 [하남 교산 신도시]가 건설 될 예정이라는군요. 곳곳에 반대하는 현수막도 엄청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돈 돈 돈 때문이겠지요? ㅎ [뒤돌아 본 '남한산성'] 3:45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십만대군이 진을 치고 [남한산성]을 향해 항복을 강요하던 곳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골말' 안내석] 4:05 "고골-古邑"은 [한성백제] 초기 왕궁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아마도 [유리왕]이 살던 왕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동네 이름이 "春宮洞"이라는 곳이 있죠. 이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등으로 확장 이전 했다고 합니다. ['덕풍천' 수변길] 4:08 [덕풍천 수변길]을 잠시 통과하면 좌측에 [광주향교]를 만납니다. ['광주향교' 관리사무소] 4:13~4:20 ['광주향교 정문'] ['명륜당'] ['대성전'] "광주향교 廣州鄕校" [광주향교]가 왜 '하남시'에 있냐구요? ㅎ 예전 "廣州"는 현재의 '광주시' 뿐만 아니라 '한강' 아랫쪽 '하남시-성남시-과천시-안양시-안산시'까지 '광주현'이었답니다. 그래서 '넓을 廣'을 사용하는 "廣州"여서 "광주향교 廣州鄕校"가 이곳에 있는거죠. 매우 큰 규모의 향교입니다. ['객산' 조망] "객산'을 조망하는데 추억이 새롭군요. ['고골사거리'] 4:21 [춘궁동]의 "고골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둔촌역]으로 가 귀가했습니다. [고도표] [구글어스] 구글어스로 보는 "고골"은 풍수지리적으로 어던 느낌이 드나요 [한성백제]의 초기 왕궁이 자리 잡았다고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 않나요? 오늘 걸은 거리는 약10km였으며 3시간 40분 정도가 걸렸군요. '병자호란'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삼전도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 파란문 -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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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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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마천동-서문-고골.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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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 2022년 6월 28일 (화} 어디서? : 골프존 어느 코스? 인터불고 경산 CC 16번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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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가고 싶다~ 기록적인 무더위가 우리 강산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요즘 시원한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보내 드릴까요? ㅎㅎ 더위에 지쳐 계실 횐님들에게 '파란문'이 선물을 하나 드릴려고 하는데 ...ㅎ 선물이 될려는지... 피서도 못가고, 에어컨도 못켜고 더위와 쌈박질을 하고 사시는 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시원해 지시라고 남태평양 어느 시원한 청정 바닷가로 진주조개잡이를 떠날수 있게 해 드림니다. ㅎ ^.^ 어여 빨리 뱅기 타고 날아 가세요~ 그냥 맘으로만 날라 가도 됩니다.~ ㅎ 별다른 세상사는 생각은 버리시고 오로지 樂園으로 생각하시고 떠나세요. 다만 이런곳도 며칠만 있어야지 오래 살면 한 인생 너무 짧아 여기저기 못가 아깝습니다. 다른 곳에도 파라다이스는 많으니까요. ㅎ 넘 부러워 마시란 얘깁니당~ 넘넘 시원해 쉬기만하면 심심하니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해 보세요~ '진주조개'도 찾으시고... 어여쁜 여인도 만나시고...진짜 진주조개 ㅎ 모든 근심 걱정일랑 벗어 던지고 황홀한 천국의 꿈을 꾸세요~ "나는 행복하다!~" 너무 더워 잠시 '파랑새의 꿈'을 꿔 봤습니다. 곧 가을이 다가 온답니다. 그리고 낙엽은 또 지고...눈 내리는 겨울로 갈겁니다. 여름도 잠깐이겠죠? ㅎ 제가 잘 사용하는 말을 끝으로 전해 드리며 건강한 여름 나시길 기원합니다. "여름엔 춥지 않아 좋고..." "겨울엔 덥지 않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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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류의 강은, 늙은 강이다
          큰 강의 하구 쪽은 흐려진 시간과 닿아 있고 
          그 강은 느리게 흘러서 순하게 소멸한다
          흐르는 강물 옆에 살면서 여생의 시간이 저와 같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물가 마을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저녁나절을 보낸다
          이제, 시간에 저항할 시간이 없고, 시간을 앞지를 기력이 없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운명 사이에는
          사소한 상호관련도 없다는 또 다른 운명도 보인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저물어서 강가에 나가니
          내 마을의 늙은 강은 증오조차도 마침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비틀거림은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 김 훈 < 밥벌이의 지겨움 > - 중에서
   
          시간이 우릴 누르는지 우리가 시간의 노예가 되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시간을 누를 힘이 소진되었는지
          코로나 소용돌이 속에서 거저 살얼음 언 깜깜한 강을 
          시간은 뒤뚱거리면서도 쏜 화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送舊迎新"을 또 언급하지 않을수 없군요.
          희망의 새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 파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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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효석문화제 9월 6일(일) "휘산회" 정기산행지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있는 "보래봉-회령봉"으로 정한 이유중에 9월 4일(금)부터 9월 14일(월)까지 열리는 "봉평효석문화제"를 참관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보래봉-회령봉" 산행보다 이 기회에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하고 싶어 이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해 볼까요? 그리고 여기에 기술하는 필자의 개인적 글은 오로지 개인적 감상이나 개인적 느낌으로 쓰는 것이니 특별히 의미를 두지 마시고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람니다 江原道平昌郡蓬坪面 봉평은 한자로 蓬坪 이라고 씁니다. 蓬坪 봉 蓬"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봉평"은 "쑥밭"이라는 말이 됩니다. 어떤 연유로 이 지역 이름이 봉평 蓬坪 - 쑥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蕎坪 교평이어야 제격인데... 蕎는 메밀 '교'입니다 이효석의 고향이 우리말로 하자면 "쑥밭"이라는 뜻이 되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라면 이 마을 이름을 살리려면 "쑥대밭 될 때"라고 해야 하는건 아닌지....ㅎㅎ 쑥밭이라~ 이런 이야기는 홍어와 무인도에서나 읽을수 있는 것들입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 효석문화제 행사장] "보래봉-회령봉" 산행을 마치고 "효석문화제 행사장"에 오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차량들로 좁은 시골길은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이곳을 찾으실 분들은 평일을 이용하시고, 대중교통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길 추천드림니다. 주말에 괜히 승용차 몰고와서 주차하는데 한나절 보내지 마시고... [행사장 입구 - 가산공원] 사하라사막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집트는 선조들의 유산 - 피라밋으로 먹고 산다는데... 종이 호랑이가 된 이태리는 왕년의 로마제국 덕택에 그래도 선진국 소릴 들을수 있다는데.. 강원도 산간 오지 평창군 봉평면이라는 조그만 마을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봉평면은 총1,084가구에 총 인구수가 4,800여명이라 합니다. 이런 조그만 마을에 엄청난 차량들과 방문객을 끌어 드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효석 "이 효석"이라고 하는 작가가 태어난 곳이고 그가 쓴 고작 다섯장짜리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10분이면 읽는 작품의 배경이 이곳 봉평이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차량과 방문객을 불러 모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이효석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좀 하자는 ..... 이렇게 말한다고 봉평면민들이 저를 욕하진 않겠죠? 실제 그런거니까... "이 효석"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메밀꽃 필 무렵"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고 훌륭한 것인가? 이제부터 오로지 '파란문'의 개인적 관점에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은 독자의 몫이니 어떻게 감상하던 특별히 시비 걸 필요는 없겠지요 [행사장] '가산공원'이라는 곳에 방문객들이 앉을수 있는 객석을 이렇게 설치해 놨습니다. 이곳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봉평장을 본따 만든 곳이랍니다. "여름 장이란 예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뭇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렇게 여름 봉평장의 파장 때쯤을 비추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공연장] 제가 이곳 행사장을 찾았을 때엔 국악공연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열리고 있는 '가산공원'은 "가산 이효석"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며 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생원'과 '동이' 같은 장돌뱅이들의 지친 여정을 풀던 술집인 '충줏집'이 옆에 있어 다시금 소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떡치기] 얼금뱅이 곰보이며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 학식도 재력도 없고, 결혼도 못해보고 늙어 버린 총각인 '허 생원' (ㅎㅎ "드팀전" 뭔 말인지 모르지요? 친절하게 알려드리면 "포목상점")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어떤 부류의 소설로 생각하십니까?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게 깊이 있게 느끼며 감상하지는 않을겁니다. '낭만주의'소설이다. '자연주의'소설이다. 뭐 이런 저런 그럴듯한 유식한 척을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이 당시로는 획기적인 '에로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에서 억눌려 온 "性"을 주제로 하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연애"라는 단어가 새로이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연애"를 소재로 너나 나나 할것없이 소설로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연애"가 "문학"이 될수 있느냐로 논쟁도 많았던 때입니다.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도 에로 소설의 대부로 잘못 알려진 방인근과 같은 내용의 에로 소설을 썼는데, 방인근은 월북했다고 저속한 인물로 만들어 지고,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등은 순수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는지..... 사춘기 시절에 몰래 많이 읽은 방인근선생의 소설들과 '감자', '봄봄봄'등과 뭐가 다른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다섯장 짜리 단편 소설...... 얼금뱅이 왼손잡이 학식도 재력도 없는 늙은 장돌뱅이 허생원이 일평생 딱 한번 물레방앗간에서 경험한 "혼외 정사" 그리고 그 딱 한번의 쌕스 SEX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얼금뱅이 허생원 물론 이효석선생의 문학성이라던가 이런 저런것들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아주 단순한 "쌕스의 추억"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저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실제 이효석선생도 늙은 곰보 장돌뱅이 허생원의 삶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속성인 애정"을 그릴려고 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나귀] 이 봉평 행사장에 살아있는 당나귀 한마리를 메어 놨습니다. 당연히 "메밀꽃 필 무렵"에 주인공과 버금가는 역활로 나오는 "당나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효석선생은 이 "나귀"를 통해 동물이나 인간이나 性慾은 같은 것이라고 빗대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도 동물과 인간의 욕정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효석 문학관과 생가 가는 길]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이곳 봉평에서 태어나 지금의 평창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 특차로 진학합니다 그리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합니다. (당시의 학교명을 지금의 학교명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려서 부터 공부에는 '천재'였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이곳 봉평에서는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도 평창에 가서 하숙을 했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학창생활을 했고, 졸업후에는 함경북도 경성과, 평양에서 살다가 짧은 36년의 생을 마감하고 멀리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이효석선생의 프로필을 소개하려면 간단합니다 학창시절과 함경북도 경성에서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4년정도 생활한것과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6~7년정도 생활한것이 전부입니다. [징검다리] '메밀꽃 필 무렵'에서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우스꽝스러운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니 밤의 물은 뼈를 찔렀다." 이 개울을 건너며 허생원은 '동이'가 혹시 아들이 아닐까 생각되어 '동이'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지요 [섶다리] 이효석의 사생활을 조금 언급해 볼까요? 玄民 유진오선생 아시지요? 고려대 총장, 신민당 당수, 헌법 기초위원..이렇게들 주로 아시죠? 이양반 유명한 文學人입니다. 시인이자 수필-소설가 제일 유명한 소설은 '김강사와 T교수'로 생각되며, 그외 수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동료인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노천명 시인의 스캔들 이야기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쓰기도 했지요 우리나라 법대생들은 대부분 유진오교수의 '헌법이론과 실제'라는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친일파'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양반의 신상에 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이효석과 가장 친한 친구여서 서로의 작품 속에서 서로를 투영하고 있고, 특히 이효석의 마지막 애인인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기 깨문입니다 명문대 출신이며 교수이며 화려한 작가가 된 "이효석"을 암암리에 노리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가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였습니다. [다리를 건너 와 뒤 돌아 본 행사장]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유명한 이야기 - "왕수복"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을수가 없군요 남인수의 연인기도 했으며 국민가수이기도 했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당시의 최고 인기 가수 였던 선우일선, 전옥 보다도 더 인기 있었던 가수가 누구 인지 아십니까? 1935년에 종합연예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당당히 일등을 한 가수가 다름아닌 "왕수복"이었습니다. 이 유명했던 가수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없는 이유는 이 미모의 기생 출신 여가수가 이효석과 마지막 연인 동거 관계를 가진후 이효석이 죽자, 곧바로 '사슴'을 쓴 시인 '노천명'의 꿈속의 사랑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재빨리 결혼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국으로 월북했기에 이 여가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도 금기시 되 왔으므로 "왕수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분단 국가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들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왕수복의 일생은 또 하나의 다시 쓰기 힘든 드라마였으니 꼭 이 여인의 일생을 최근 알려진 것들을 합쳐서 제 블로그 애독자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기생 - 인기 대중 가수 - 성악가 - 이효석의 마지막 연인 - 월북 -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결혼 - 북한 최고 인민가수 - 애국열사능에 영면 왕수복은 평남 강동에서 1917년에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명륜여자보통공립학교'를 다니다 3학년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여 소리와 거문고를 배워 기생이 되었습니다 노래에 천재적 소질을 보이던 왕수복은 1933년 열여섯살의 나이에 당시 최고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 스카웃되어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로 탄생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난영 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유행가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때에 자신의 최대 컴플랙스인 '기생출신 대중가요 가수'라는 딱지를 때기 위해 새로운 음악세계인 '서양 음악 - 성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변신하여 돌아 온 왕수복은 주로 우리나라 민요를 성악으로 불렀답니다 북한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털어 최고의 민족혼 무용가로 지목되는 '최승희'가 민족 무용을 살리는것과 같이 우리나라 민요를 위해 몸바치겠다고 한 '왕수복' 북한으로 월북한 그녀는 공훈배우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국민가수가 되었으며 1997년 여든의 나이에 리싸이틀 공연을 하고,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은 것이 국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2003년 여든여섯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고 북한 애국열사능에 뭍혔다고합니다 그녀가 北으로 가지 않았다면....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수복은 33년부터 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곡 가운데서 왕수복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이란 노래 한곡 소개하겠습니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메밀꽃밭 테마 포토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많은 사람들이 메밀꽃을 보고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한대목인 "소금을 뿌린듯"이라는 대목 하나만 오로지 기억하며 전체를 기억하는듯이 말합니다. 사실 "소금을 뿌린 듯이"보다는 그 메밀꽃이 달빛에 비치는 모습이 소금을 뿌린듯하여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말이 더 강조 되는 대목인데, "소금"을 너무 강조합니다 앞으로는 윗 글을 전체적으로 얘기하시고 너무 "소금"은 뿌리지 마세요. ㅎㅎ [메밀꽃밭] 현민 유진오가 쓴 「마지막 날의 효석」에는 이효석과 왕수복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왕수복과의 관계를 자전전 소설로 남겼는데 "풀닢"이라는 소설입니다.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가수 왕수복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기생출신'이 무지막지한 컴플랙스였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전력인 '기생 출신'에서 당당히 벗어 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최고의 명문대 출신인 교수이자 작가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명 작가이자 교수와 함께 살아 천민에서 벗어 나고 싶어 한 가련한 여인 - 왕수복 그녀는 집요하게 이효석을 꼬셨습니다. 나이 차이가 십여년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이효석은 조강지처 이경원여사와 사별하고 장남도 죽어 여러모로 방황하고 있었으니 왕수복은 찬스를 잡았던 것입니다. 결국 두 딸과 차남이 함께 살고 있는 이효석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이효석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요절하면서 결혼식까지는 올리지 못했지만 왕수복은 그의 꿈을 반쯤은 이루고 이효석의 집을 떠납니다. 이효석이 죽자 왕수복은 재빨리 다른 남자를 꼬십니다. 교수를 무지 원했거던요.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를 쓴 新女性 시인 "노천명"의 남편같은 애인이었던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김광진을 빼앗아 결혼을 합니다. (김광진은 노천명과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와 이혼까지 한 사이였습니다) 동경제대에서 공산주의 경제학을 전공하여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북으로 가 김일성의 경제 정책을 진두 지휘한 김광진 교수의 품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생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대단한 집념의 여인~ [인기 절정을 누리던 1933년에 위장약 "노르모산" 광고에 등장한 "왕수복"] 어때요? 왕수복 이쁜가요? "노르모산"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옆에 글자는 왕수복 자필이라고 합니다 미인도 시대적으로 다른가 봅니다만, 미인이라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기 보다는 최고 인기 여가수여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고 봐야겠죠?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거 이런데 올리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습니다 시대가 바꿔져 '왕수복'이도 제 블로그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리는군요 ㅎㅎ [메밀꽃밭 옆 흥정천과 산책로] 당시 이효석과 친했던 작가들 중에는 "기생과의 사랑"을 나눈 작가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몇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학교 선배님이기도한 "봄봄봄"의 김유정 <봄봄봄>의 천재작가 김유정은 기생 '박녹주'를 열렬히 짝사랑했답니다. 명기명창으로 송만갑의 사사를 받고 각종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유명인이었던 박녹주는 자신보다 연하인데다 학생인 김유정을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김유정은 매일 한통씩 편지를 보내며 안달했답니다. ‘간혹 길가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소…’, ‘목욕을 하고 오는 자태는 정말 이쁘게 보였노라…’,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결국 김유정은 3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됐고 박녹주에게는 부음과 함께 ‘니가 죽였지’라는 김유정 친구들의 저주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코스모스와 메밀꽃] '금홍이'와 '날개'를 쓴 '이상' “십팔가구에 각기 밸너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안해는 특히 아름다운 한 딸기의 꽃으로 이 함석 지붕 밑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이상의 <지주회시>에서- 1935년 초 금홍이의 두 번째 가출 이전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이상이 금홍이를 염두해둔 묘사입니다. 배천온천에서 만난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관계는 2년 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금홍이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본격 교제한 첫 여인이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여인이었으며, 이상이 유일하게 ‘안해’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 의지대로 작용하지 않아 속을 태웠던 요부"로서의 여성상을 그의 작품에 드리웠습니다. 이상의 불멸의 소설 "날개"에서도 몸팔러 나가는 아내를 그리고 있는데.... 이상은 종로 우미관 뒤에서 금홍이와 동거를 하며, 파격적인 상호의 "식스나인 69"라는 다방도 했지요 이효석도 커피 중독자였으며, 왕수복의 언니가 하던 평양의 "방가로"라는 다방에서 왕수복과 데이트를 많이해 평양숭실전문학교 학생들로부터 핀잔을 많이 받기도했습니다 [물레방앗간 안내 표지석]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여.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이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야.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팔자에 있었나 부지." 허생원이 물레방앗간으로 들어 가게 된 동기와 성 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쓰일 때 쯤에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엔 너나 나나 할것없이 '연애'를 소재로 글을 써야 문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였습니다. 남자 여자 文人이 따로 없이 "자유연애"가 소재로 다루어 지던 시대입니다. 이효석도 절묘한 필치로 "혼외 정사"를 소재로 "메밀꽃 필 무렵"을 썻습니다. 여러분~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이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할까요? [물레방앗간] 수많은 관광객들이 물레방앗간을 서성입니다. 제일 관심있는 장소인듯합니다. ㅎㅎ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 물레방앗간에서 정사를 꿈 꿀 것입니다. 다만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자제할 뿐.... 물레방아 돌아 가는 소리때문에 거칠은 숨소리는 무마 될것이고 쿵덕쿵~~쿵덕~ 인간의 속성은 잘난 놈 못난 년, 가진 년 없는 놈, 불문하고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고상한척 하는 인간들이 더 밝힌다고 "X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고 하는 속담도있습니다 [물레방앗간 내부] "메릴꽃 필 무렵"의 하일라이트.... "아무렴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는 아끼는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중략)....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허생원의 첫경험 [효석문학관 올라 가는 길] '효석문학관'은 '물레방앗간' 뒤로 산길을 따라 올라 가야합니다. [효석문학관] 산 중턱에 "이효석문학관"이 있었습니다. 이효석은 공산주의 문학가들의 모임인 '동반자 작가'에 몸담기도 했지요 하지만 곧 휘문출신 문인들의 주축인 정지용선생등의 권유로 탈퇴하고 '구인회'에 참여하여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순수문학의 글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박동락선생 추모비] 이효석문학관을 짓는데 크게 공헌하고, 이효석 연구에 전념한 '박동락선생기념비'가 있습니다 [효석문학관 본관] 문학관에는 이효석과 관련된 692개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뒷동산에 올라 촬영한 '효석문학관 전경'] [이효석 동상] 이효석은 스스로 "자신은 300~400대의 주사를 맞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짤라 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 특정 부위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무나 짧은 인생에 병마와도 싸우며 살았으니 어찌 가엽다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최종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 유진오를 불러 옆에 두고, 아버지와 왕수복이 지켜 보는 가운데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함북 경성공업학교 교사 시절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이 그의 문학의 절정기여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 할수 있었답니다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평양에서 쓴것입니다. [이효석과 함께] 글자 나부랭이를 쓰는 놈이라고 비록 동상이지만 '이효석'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의 이효석 나이로 치자면 저의 아들뻘 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이효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을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동이'와 당나귀] "왕수복"에 대한 이야기 뽀나스로 하나 더해 드리면 왕수복의 스켄들 중에는 당시 최고의 조선 갑부인 화신백화점 사장인 "박흥식"도 있었습니다 [충줏집] '가산공원' - 옛 봉평장터 옆에는 "충주집"이 있는데 친구들은 "효석문화제"엔 관심이 없고 메밀전에 수육, 동동주와 소주에 더 관심이 있는듯 일찍이 이곳에서 한잔들 얼큰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곳 저곳 돌아 다니다가 돌아와 합세해 여기서 메밀전에 수육, 그리고 쇠주에 메밀막국수를 먹고 돌아 왔습니다.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애증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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