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수염 생과 사의 그 어디쯤에서 끝내 삶으로 끌어오지 못했던 환자들의 마지막 면도를 준비할 때면 늘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곤 했다. 아버지처럼 수염으로 뒤덮인 그들의 얼굴을 아주 오래도록 정성을 다해 면도해주었다. 어릴 적 어느 아침, 면도하는 아버지를 잠이 덜 깬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물어보았다. "아빠 뭐해?" "뭐하긴, 면도하지." "면도는 왜 해?" "수염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거든." - 김현아의《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중에서 -




           


          
          
              『충남 서천군의 바닷가』  
             『철새나그네길 1~2코스』"붉은낭만길-해지게길"  
                                       
          
          
            ['철새나그네길' 전체 코스 위치도]
          
            "서천군 철새나그네길"은 다섯개 코스 총37.9km로 구성되 있답니다.
            1코스(붉은낭만길) : 홍원항(0km) → 춘장대역(2.3㎞) → 춘장대해수욕장(3.3㎞) → 부사호(8.8㎞)
            2코스(해지게길) : 동백정(0km) → 성경전래지(4.2㎞) → 마량포구(5㎞)
            3코스(나그네길) : 해오름관광농원(0km) → 월하성어촌체험마을(4.5㎞) → 선도리어촌체험마을(5.5㎞) →
                                해변길 → 다사항(14㎞)
            4코스(윤슬길) : 장구만철새도래지(0km) → 송석리어촌체험마을(2㎞) → 죽산해변(매바위)(5㎞)
            5코스(해찬솔길) : 송림산림욕장 주차장(0km) → 옥남리 철새도래지(2.5km) → 송림산림욕장 주차장(5㎞)
            오늘은 그 첫번째로 [1코스~2코스]를 묶어 갑니다.
          
          
            [구글어스]
          
            [국토지리원 지도]
          
            대중교통 편의 상 [2코스 종점] 부터 역순으로 진행합니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있는 "마랑리 버스종점"에서 출발하여 "마량포-동백정-홍원항-춘장대"를
            통과하여 '충남 서면 도둔리'에 있는 "서도초등학교"까지 약11.6km를 갑니다.
          
          
            ['서천역']                    9:35
          
            ['서천역 버스정류장']                  
          
            2020년 6월 30일 (수) 흐림 
            [용산역]에서 6:21 에 출발하는 [장항선 열차]를 6:54 에 [수원역]에서 타고 [서천역]에 9:35 에 내렸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서천 땅"을 밟았습니다. 이곳이 충청남도라는 것도 새롭게 다가 옵니다.
            고정관념엔 "충주-청주" 지역이 "충청도"라고만 인식되 있었는데...오늘은 고정관념 탈출을 해야겠습니다.
            날씨는 꾸물꾸물해서 덥지 않아 좋았지만 사진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서천역] 좌측에는 [택시]와 [버스] 승강장이 있습니다.
          
          
            ['서천역' 버스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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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역]에서 [마량리]나 [춘장대해수욕장]까지 직접 가는 시내버스는 없습니다.
            여기서 "시내방면' 버스를 타고 [서천버스터미널]로 가서 환승을 해야 합니다만 버스 시간이 어중간하여
            택시를 타고 [서천버스터미널]로 갔는데 요금은 4,000원 이었습니다.
          
          
            ['서천버스터미널']                   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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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역]에서 택시로 5분 정도 걸려 "서천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시외버스와 시내버스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버스터미널이었는데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았습니다.
            [서천군]의 총 인구가 55,000명 정도라고 하며 150,000명이다가 점점 줄어 1/3토막이 되었다니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듭니다.
          
          
            ['서천버스터미널 버스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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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철새나그네길 1~2코스]로 접근하려면 버스시간표 맨 우측에 있는 "동백 방향" 버스를 타야 합니다.
            [1코스]로 접근하려면 [동백-춘장대]라고 표기된 버스만를 타야하고, [2코스]는 모두 갑니다.
            30분을 추가로 기다리기 보다는 [2코스]부터 역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10:00"에 출발하는 [동백]방향 버스를
            타고 종점인 "마량리"로 갔습니다.
          
          
            ['마량리 버스 종점']                  10:55~11:00
          
            [서천버스터미널]에서 약50분이 걸려 이 버스의 종점인 "마량리"에 도착했습니다.
            간단하게 걷기 준비를 하고 [성경전래지기념관] 방향인 남쪽으로 진행합니다.
            [마량포]와 [성경전래지]를 둘러보고 다시 이리로 나와야 합니다.
          
          
            ['마량리']
          
            좌측에는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공원]이 있고, 이어서 [마량포 港]이 계속됩니다.
          
          
          
            ['성경전래기념관' 가는 길]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성경전래기념관' 조망]                 11:03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이 보이는데 뭔 펜션이나 모텔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최초성경전래지기념관' 입구]                    11:05~11:20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
            입장료가 있으며 '경노와 장애인'도 입장료를 내야 하더군요. 좀 이례적이죠? 요즘 종교는 꽁짜가 없어요.ㅎ
            이 기념관에 대해선 홈페이지의 안내문을 인용합니다.
            조선후기 1816년(순조16년) 마량진 갈곶에 일시 정박한 영국 함선 알세트호의 선장 머리 맥스웰 함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이 전해졌으며 한국최초 성경전래 기념관은 성경 전래의 역사를 연구,전시교육,
            체험하여 국가와 세대를 넘어 바른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여 2016년 9월5일 한국최초 성경전래 2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기념관 건물 연면적 1374㎡ (약415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꾸며져 있으며 
            1,2층은 전시관 3층은 전망 카페 4층 다목적실 (예배당)이 있다.
          
          
            [기념관 1층-서천의 역사]          
          
            기념관에 들어서면 먼저 우리나라와 세계 속에서의 서천의 역사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서천에 성경이 1816년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기록들이 <조선실록>과 
            '바실 홀'이 1818년 출간한 <한국서해안과 류큐 항해기>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내문]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히 알고 가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언급하자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 된것과 여기서 얘기하는 '성경'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이 최초로 전래 된것이 기독교가 최초로 전래 된 것으로 오해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최초라고 주장하는 성경이 전래된 것은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이지만,
            기독교와 관련 성서들은 이로부터  훨신 이전인 17세기에 들어 왔죠.
            [임진왜란] 때에 들어 왔다던가 [광해군] 때라던가 [인조] 때에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아담샬신부'에게서 기독교서적을 받아왔다던가...이후 성리학등 유교문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서양문화를
            받아 드리는 실학자들이 사신으로 갔다가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와 그들이 먼저 믿음을 갖게
            되었다던가 하는 기록들은 차고 넘침니다.
            동양 3국 중에서 중국과 일본은 비교적 빨리 기독교를 받아 드렸는데 우리나라보다 수백년 먼저 였습니다.
            우리나라만 많이 늦어졌습니다. 강력한 유교문화와 왕조체제등으로 늦어 졌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주장하는 [성경최초전래]와 기독교 최초전래가 횟갈리게 되는 이유는
            제 생각에 기독교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지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크게 나눌수 있는데 여기서는 "개신교"의 입장에서 "최초"라는 것이죠.
          
          
            [범선 모형]
          
            1816년(순조16년) 영국 정부는 '암허스트경'을 중국에 사절로 파견하였는데 
            이 때 사절단을 태우고 중국으로 향한 함선이 '알세스트(Alceste)호'와' 리라(Lyra)호'였다고 합니다.
            당시 두 함선의 함장은 '맥스웰(Maxwell)'과 '바실 홀(Bassil Hall)' 대령이였는데 
            이들은 사절단의 임무를 마치고 중국 광둥성 항구에 대기하던 중 영국 본국으로부터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고 약 10일간 백령도와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것은 아니라는 걸 알수 있죠?
          
          
            [상황극]
          
            1816년 9월 5일 서해안 탐사중 두 함선은 이곳 '비인현 [마량진] 해안가'에 정박하게 되는데 
            당시 [마량진] 참사였던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이 이들의 함선에 승선하여 조선으로 온
            내항 목적을 물었지만 서로 언어가 달라서 소통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때 침략이라던가 간첩행위를 하러 온게 아니고 탐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걸 알리며 우호적이란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주었는데, 그 선물 중에는 '술 酒'이 많았는데 '조대복'과 '이승렬'에게는 비싼
            "체리 브랜디" 몇 병을 주었고, 수행원들에겐 "럼주"를 주었답니다.
            그리고 함선에 있던 책들도 주었는데, 많은 책들 중에 "킹제임스 성경책"도 '조대복'에게 줬다고 합니다.
            여러 책들 중에 하나 선물로 준 책인데, '개신교'를 믿는 분들에겐 엄청난 의미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실물크기로 생동감 있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당시 전달된 성경은 1611년에 출간한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
          
          
            [모형 범선]
          
            [대포]
          
            '리라호'를 둘러보던 첨사 '조대복' 일행은 그 배의 대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데요.
            이에 화답하듯 '리라호' 선원들이 대포에 탄알을 장전하고 아래를 향해 발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조선의 음악]
          
            각각의 레버를 돌리면 조선의 음악과  영국의 행진곡을 들을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 놨습니다.
            영국의 행진곡,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가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행진곡이라 하고
            조선의 행진곡은 부는 악기인 취 악기와 때리는 악기인 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뜻에서 
            '대취타'라는 곡명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2층]
          
            1층을 구경하고 2층으로 올라 가면, 1층과 2층이 뻥 뚫려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성경 원본]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킹 제임스 성경"이었습니다.
            1611년 영국에서 제작된 '킹 제임스 바이블 원본'과 시기별 한국어 성경 번역본 등이 전시되 있는데
            저는 처음에 이 성경책이 "맥스웰 함장"이 "조대복"에게 준 그 성경책인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런데 옆에 무지 비싼 책이란걸 자랑이라도 하듯, "구입가 3억원"이라고 안내합니다.
            3억원을 주고 근간에 외국에서 사온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해서... 깜놀 ㅎㅎ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에는 최초 전래된 성경 원본이 전시되 있을거라고 모두 생각하지요?
            외국에서 3억원씩이나 주고 사온 성경을 전시하는 기념관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념관의 이름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3억원 주고 사온 성경 전시관"이라고... ^.^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조사를 해 봤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 또는 "흠정역 성경"은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는 왕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이에 성공회가 1604년에 번역을 시작하여 1611년에 끝마친 기독교 성경의 영어 번역본으로
            여기서 '흠정'의 뜻은 '임금이 몸소 제정함'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일성록']
          
            "일성록 日省錄 "은
            [영조 6년]이후 조선왕조의 정무일지로서 [국보 제153호]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기록물로서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되 있습니다. 이곳의 "일성록"은 사본인듯....
            여기에는 [순조 16년] 충청 수사 '이재홍'이 '마량진'에 도착한 영국함선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을 만나고 돌아간 사건에 대해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답니다
          
          
            [포토존]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은 첨사 '조대복' 일행이  '알세스트호'의 선실을 방문하자
            '체리 브랜디' 몇 병과 '럼주'를 주었다고 위에서 언급했죠? 특히 '조대복'에게는 성경 책을 주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조대복'과 '이승렬'은 큰 갓과 장죽, 부채 등 조선의 토산물을 선물로 주었답니다.
          
          
            ['마량 회센타']                  11:25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을 관람하고 [철새나그네길]을 계속 진행합니다.
            [마량포]로 나가면 회센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버스 문제만 아니라면 1코스부터 답사하여 이곳에서 마치고 뒷풀이 하기에 적합 할듯..ㅎ)
          
          
            ['비인항']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있는 이 漁港은 지도에 "비인항 庇仁港'이라고도 표기되 있고
            "마량진 馬梁津" "마량포 馬梁浦" "마량항 馬梁港"등으로도 표기되 있습니다. 규모가 큽니다.
            옛날엔 이 지역 전체가 "비인현"이었다가 현대에 와서 "서천군 서면 마량리"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라고
          
          
            ['마량진방파제']                   11:30
          
            [마량진 방파제]로 가면 "마량진 해넘이 해돋이 명소"라고 자량하고 있습니다.
            '서천군 서면'은 [안면도]의 축소판으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래서 양면이 바다여서 西海임에도 불구하고 [해넘이]와 [해돋이]를 함께 볼수 있는 곳이 되겠습니다.
          
          
            ['마량진방파제' 위]
          
            [마량진 방파제] 위에서 주변을 조망합니다.
          
          
            ['개야도' 조망]
          
            먼저 남쪽으로는 "개야도 開也島""죽도 竹島"가 조망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개야소도(開也召島)"라 하여 '충남 서천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전북 옥구군 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의 통합으로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고
            높은 봉우리가 없고 구릉으로 이루어져 마치 이끼가 피어나는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개야도라 하였다는데
            한자의 뜻대로라면 육지와 가깝고 논밭이 넓어 누구나 섬에 들어오면 잘 살 수 있다는 뜻에서 개야도라
            했다는 유래가 더 신뢰가 갑니다.
            건너편 멀리에는 "군산시내"의 건물과 아파트들이 잘 보였는데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군요.
          
          
            ['연도' 조망]
          
            서쪽으로는 "연도 煙島"가 조망되는데 '전북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랍니다.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중국 산동에서 화창한 맑은 날에는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연기 煙"자를 써서 부른다는 설과, 한편으로는 호수 속에 피어오르는 연꽃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고 하는군요.
          
          
            ['성경전래기념관' 조망]                  11:41
          
            [마량진 방파제]에서 [동백정]으로 진행하며 조금 전에 들렸던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를 바라 보고
          
          
            ['아펜젤라 순직기념관']
          
            북쪽으로는 "아펜젤라 순직기념관"이 보입니다.
            "아펜젤라"는 [배재학당]을 설립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 순직기념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아펜젤라"는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이곳에서 가까운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로 순직했다는군요.
            순직기념관을 건립했다는데, 돌아가신 분을 "기념"하는 기념관" 명칭은 좀 어색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엔 "기념관"이라고 하지 않고 "추념관" 또는 "추모관"이라 하지 않나요?
          
          
          
          
            ['마량진 성경전래기념공원']                11:43~11:48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도 많은 예산을 들여 상당한 규모로 조성해 놨는데
            당시 영국 함선과 우리나라 판옥선 모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비교 됩니다. ㅎ
          
          
            ['비인면' 조망]                  11:54
          
            [철새나그네길 3코스]인 [비인면] 해변이 조망되는데 다음번에 답사할 예정입니다.
          
          
            ['해돋이마을']                  11:58
          
            ['철새나그네길' 이정표]                  12:07
          
            [마량진]을 벗어나면 이곳이 "마량포 해돋이 마을"이라고 알리는 안내석이 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철새나그네길 이정표"를 만납니다.
          
          
            ['마량포' 입구]                    12:08
          
            [마량포 입구]를 통과하면
          
          
            ['마량진 동백정마을']                  12:10
          
            [마량진 동백정마을] 임을 알리고 있는데
            [동백정] 가는 길은 이곳이 아니고, 우측 [서천화력발전소] 입구로 가야 했습니다.
          
          
            ['동백정' 가는 길]                     12:14
          
            "서천화력발전소"는 현재 대단위 공사가 진행 중에 있더군요.
            기존 발전소는 철거하여 관광리조트로 개발하고, 새로운 친환경 화력발전소를 건설 중에 있답니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철교인데 기존 발전소에 국내산 석탄을 운송 하던 기찻길이었답니다.
            건설 공사로 주변 지형이 바뀌어 [동백정] 가는 길의 길찾기를 잘 해야 했습니다.
          
          
            ['서천화력발전소' 정문]
          
            "(신)서천 에너지파크 1·2호기 발전소"의 정문으로 가서 좌측 길로 5분여 도로 따라 가면...
          
          
            ['(구)서천화력발전소']                 12:21
          
            "(구)서천화력발전소" 정문을 만납니다.
            이 화력발전소는 폐쇠되어 앞으로 대규모 관광리조트로 개발 될 예정이라 합니다.
            현재 가동 중단 상태라는군요.
          
          
            ['(신)서찬화략빌잔소' 건설중]                  12:24
          
            "(신)서천화략빌전소"는 현재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전부가 "동백정해수욕장"의 일부였답니다.
          
          
            ['동백정' 입구]                   12:27~12:50
          
            "(구)서천화력발전소"와 붙어서 바닷가 쪽에 조그마한 동산에 "동백정"이 있더군요.
          
          
            [매표소]
          
            입장료를 내야 출입 할수 있는 [동백정]이었습니다. 경로.장애인 무료.
          
          
            [계단 공사중]
          
            [동백정]으로 바로 올라 가는 계단은 공사 중인데...
            공사가 완료 된다 하더라도 기존 길로 가는게 "동백나무숲"을 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동백정' 가는 길]
          
            [동백정]은 "(구)서천화력발전소"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좌측 발전소도 예전엔 [동백정해수욕장]이었답니다.
          
          
            ['동백나무 숲' 오름길]
          
            [안내문]
          
            ['천연기념물 제169호']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舒川 馬梁里 冬栢林"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동맥나무 80여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동산이랍니다.
            헤아릴수 없는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인줄 알았는데 80여 그루로 그 규모는 예상보다 너무 작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됩니다.
          
          
            ['동백정']
          
            해수욕장에 발전소를 건설하며 지은 "동백정 冬栢亭"이라는 2층 정자가 있습니다.
            올라 가서 조망을 하면
          
          
            [서쪽 조망]
          
            서쪽으로 西海와 "오력도 五歷島"라고 한다는 조그만 섬이 보이는게 볼거리입니다.
          
          
            [동쪽 조망]
          
            뒷쪽인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구)서천화력발전소"가 바로 앞에 보입니다.
            조만간 폐쇠하여 세계최초로 폐쇠된 해수욕장을 다시 복원한답니다.
            KBS 뉴스에 나온 영상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다음을 클릭하여 들어 가 영상을 재생해 보세요. 완벽한 설명과 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KBS : 사상 첫 해수욕장 복원…동백정 절경 부활" 여기 클릭 
          
          
            [북쪽 조망]
          
            북쪽을 바라보면 [당집]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내려 가 보면
          
          
            ['당집']
          
            풍어를 비는 제사당이랍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헌금을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천원짜리 였지만 오천원권도 몇장 보이고 만원권도 한장 보였습니다. ㅎ
          
          
            ['오력도' 조망]
          
            "오력도 五歷島"를 다시 조망합니다.
            이 섬에서 서쪽으로 조금전 [마량진 방파제]에서 보았던 "연도 煙島"가 보인다는데,
            옛날 장수 한 사람이 여기서 [연도]로 건너다닐 때 뛰어넘다가 신발 한 짝이 떨어져서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더군요. ㅎ
          
          
          
            ['동백나무 숲']
          
            다시 80여그루의 동백나무 숲을 통과하여 내려 갑니다.
            여긴 3월 말에서 4월 초에 와야 동백꽃도 보고 축제도 함께 할수 있다는군요.
          
          
            [발전소 내 '동백정길']                 12:52
          
            [동백정]에서 나와 다시 [마량리]로 나갑니다.
            이 지역이 모두 [동백정해수욕장]이었답니다.
            다시 복원하여 충남 최대의 복합 관광지를 만든다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내도마을']                   1:19
          
            [동백정해수욕장]이었던 [서천화력발전소]를 벗어 나서 "내도마을"을 지나고
          
          
            ['홍원항' 입구]                  1:28
          
            이어서 "홍원항 입구"를 만나 들어 갑니다.
            10여분 들어 가면...
          
          
            ['홍원항' 앞 삼거리]                   1:39
          
            "홍원항 입구 삼거리"를 만납니다.
            [홍원항]은 좌측으로 가고, [춘장대해수욕장]은 우측으로 간답니다.
          
          
            ['홍원항' 조망]
          
            "홍원항"
            1991년 1월 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漁港다웁게 규모가 상당하군요.
            '전어'가 가장 많이 잡힌다는 漁港이라는데 가을이면 '錢漁' 굽는 냄새가 진동 한다는군요. ㅎㅎ
            집 나간 며느리 뿐만 아니라 바람난 처녀들 까지 돌아 오게 한다는 '전어' 맛보러 다시 함 와야 겠습니다.
          
          
            ['춘장대' 가는 길]                    1:53
          
            이정표를 따라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갑니다.
            15분 정도 진행하면...
          
          
          
            ['춘장대해수욕장' 조망]                  2:08
          
            "춘장대해수욕장"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춘장대해수욕장' 솔밭]
          
            해수욕장 중심부로 가면 솔밭과 여러 유락시설들이 있고
          
          
            ['춘장대해수욕장']                    2:15
          
            "춘장대해수욕장 春長臺海水浴場"
            [춘장대 해수욕장]은 1980년대 초 [동백정해수욕장]에 [서천화력발전소]가 설립되자 
            그 대안으로 새롭게 부각된 곳이라고 합니다. [동백정해수욕장]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만한 해수욕장을 다시 발견하여 개발하게 된 것은 서천군민에게 퍽 다행스런일이었다군요.
            그러나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피서인파는 춘장대해수욕장에 대한 개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지만
            [춘장대]는 한 개인의 사유지가 대부분이어서 개발에 어려움이 뒤따랐다고 합니다.
            [춘장대 해수욕장]에 대한 명칭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좀 황당했습니다.
            이 해변은 거의 대부분 "민완기씨"라는 개인 소유의 토지였답니다.
            이 땅 소유자 "민완기씨"가 이곳에 서너개의 방갈로를 만들고 자신의 호(號)인 춘장(春長)을 따서
            "춘장대"라고 명명한 것이 유래되어 [춘장대 해수욕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대토지를 개인이 소유 할수 있었다면 [명성황후]시절의 "민씨 일가"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 해수욕장의 가장 큰 특징은 "아카시아 숲"이 우거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카시아가 우거진 해수욕장은 저는 처음입니다.
          
          
            ['춘장대해수욕장 주차장']                 2:20
          
            기차표를 4시차로 끊어 놔서 여기서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로 급히 나갑니다.
          
          
            ['요치마을']                     2:27
          
            [요치마을] 안내석이 있는 곳을 지나 [서도초등학교]를 찾아 가는데
          
          
            ['서도초등학교' 앞]                   2:32
          
            [춘장대해수욕장]에서 약12분이 걸려 "서도초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서도초' 앞 버스시간표]                   2:33
          
            이곳 버스정류장에 부착되 있는 버스시간표를 보니 [서천시내]로 가는 "2시35분" 도착 버스가 있군요.
            이 버스는 2시40분경에 도착했는데 서천시내에서 [서천역]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여 역으로 갔습니다.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1.6km"였으며  3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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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파일 [서천]철새나그네길1-2코스.gpx
          
          
               『영주의 역사』  
             『금성대군신단』『소수서원』  
          
                                       
          
          
            ['금성대군신단' 입구]              1:14
          
            2020년 6월 24일 (수) 흐림 
            [부석사] 답사를 마치고 [27번시내버스]를 타고 약25분 정도 걸려 [소수서원] 앞에 내렸습니다.
            [소수서원] 앞에 있는 "금성대군신단 錦城大君神壇"부터 먼저 찾아 보고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입구에는 "단종복위운동 聖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금성대군신단' 정문]
          
            神壇 정문으로 들어 가면...
          
          
             ['주사 廚舍']                                                 ['제청 祭廳']
          
            좌우에 '주사 廚舍'와 "'제청 祭廳'"이라는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데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齊室'이랍니다.
            이 건물들은 1980년에 건립되었다는군요.
          
          
            ['금성단' 정문]
          
            이어서 "錦城壇"이라는 현판이 달린 神壇 정문인 "일각문一角門" 으로 들어 갑니다.
            조선시대 현판글은 모두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도록 되 있는데 반대여서 특이하군요.
          
          
            ['錦城壇']
          
            "금성단 錦城壇"
            이곳에 대한 내용은 [영주시 홈페이지]에서 인용합니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비롯한 순절의사들을 제사드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평소 '수양대군'을 경계하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謀叛)의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관노의 밀고에 의해 관군의 습격을 받게되고,
            순흥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순흥부는 폐부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19년(숙종 45)에 순흥인 이기륭이 단소를 설치했으며,
            1742년 (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고,
            높이 140㎝, 폭 55㎝, 두께 24㎝의 크기로 순의비를 세웠답니다
            제가 느끼기엔 둘째 형으로부터 살해 당한 "금성대군"보다 그들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더 비극적 삶을 산
            최악의 불행한 아버지라고 늘 느낌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지만 "修身齊家"는 빵점 아닌가요?
          
          
            ['금성단' 앞]
          
            제단을 둘러보고 나가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압각수']
          
            [안내문]
          
            "압각수 鴨脚樹"라는 보호수가 있더군요.
            1,200년이 넘는 엄청 오래된 은행나무라는데 그 잎의 모양이 "오리발" 같다고 "압각수 鴨脚樹"라 부른 답니다.
            忠臣나무라고도 불린다는 이 은행나무의 내력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
            건너편에 있는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소수서원' 입구 주차장]                     1:36
          
            ['소수서원' 정문 앞 광장]
          
            ['소수서원' 정문]
          
            [소수서원] 정문 앞에는 주차장과 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엔 모든 관람객에게 입장료가 무료랍니다.
            우린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ㅎ
          
          
            ['학자수 學者樹']
          
            정문으로 들어 가면 무척 오래된 금강송 소나무들이 우거진 "학자수림 學者樹林"이 반겨 줍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 學者樹"라고 부른답니다.
            우측엔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숙수사 당간지주']
          
            [안내문]
          
            "숙수사 당간지주 宿水寺 幢竿支柱"
            [소수서원]은 서원이 되기 전엔 이 자리가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었답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은 폐사되고 그 자리에 서원이 들어 섯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불교시대에서 유교시대로 넘어 갔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소수서원' 정문 앞]          
          
            [당간지주]를 지나면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좌측을 보면
          
          
            ['영귀봉']
          
            "영귀봉 靈龜峰"이 보이는데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영귀봉]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는 "소혼대 消魂臺"가 있군요.
            이 주변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다음 안내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안내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우리나라 서원 9개소 중에 하나입니다.
          
          
            ['지도문'과 '경렴정']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과
            정문 앞엔 "경렴정 景濂亭"이 있는데 "신제 주세붕 선생"이 창건한 정자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랍니다.
          
          
            ['취한대']
          
            ['경자바위']
          
            [줌인한 '경자바위']
          
            [경렴정] 뒤에는 "죽계구곡 竹溪九谷"으로 유명한 "죽계천 竹溪川"이 흐르고 있는데
            "취한대 翠寒臺""敬字바위"가 보입니다.
            "취한대"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이는데,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라고
            "敬字바위"라고 한답니다.
            이 글자도 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이 새긴 글자랍니다.
          
          
            [안내문]
          
            이곳이 원래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 있었던 곳이란건 조금 전 당간지주에서도 확인했습니다만
            "宿水"라는 말이 '물도 자고 간다'라는 뜻일테니 흐르는 "죽계천"도 이곳에 머물며 하룻밤 자고 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걸 직간접적으로 알려 주는듯 합니다.
          
          
            ['죽계천']
          
            "죽계천 竹溪川"이 [소수서원]을 휘감고 흘러 갑니다.
            조금 전에 들렸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으로 친형인 [수양대군]으로부터 처참한 보복을 당해
            죽을 때에 이곳 관리들은 물론 일반 양민들까지 거의 몰살 당했답니다.
            그래서 이 [죽계천]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변했었다죠.
            이렇게 아름다운 "죽계천"과 "순흥"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피로 물들인 그런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강학당'] 보물 제1403호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을 통과하면 강의를 하던 교실인 "강학당"이 바로 나타납니다.
            강학당에는 "백운동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주세붕 선생"이 창건시에 "주자"의' 여산 백운동서원'을 본따 "백운동서원"이라고 불렀답니다.
                                
          
          
            ['강학당' 내부]
          
            강학당 내부로 들어 가면 제법 너른 강의실이 펼쳐집니다.
            "소수서원 紹修書院" 사액현판이 엄청난 의미로 다가 옵니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효시가 되었는데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답니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당시 [명종] 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교육기관-학교"가 탄생된 것이지요.
          
          
            ['강학당' 우측]
          
            ['강학당' 좌측]
          
            "소수서원"이 공립교육기관으로 탄생되는 배경을 알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아야하겠죠.
            그래서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정치 상황을 요약해 보겠으나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나라의 정치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꾼 '조선왕조'...
            "공자 孔子"가 세운 "유학"을 "주자 朱子"가 새로이 정립한 "성리학"으로 정치이념체계를 바꾸어 나갔죠.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까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리고 여러차례의 정변으로 인해 나라에는 공신들이 넘쳐났습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따른 공신, [중종]의 반정을 이끈 공신들이 넘쳐났는데
            왕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들이 득세했는데 이름하여 "훈구"라 하죠.
            개혁을 외치는 신진 사림세력들을 수구세력인 훈구파들이 무오, 갑자, 기묘, 을사의 네차례 사화로
            신진 사림들은 처참하게 일망타진되고 말았지요.
            이때 "퇴계 이황", "서경덕", "조식"등의 성리학자들은 왜 우리가 이렇게 참화를 당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각자 자신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 덕분에 아직까지도 완벽한 이해를
            보지 못했던 "성리학"은 이때 학문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훈구파'의 전횡에 휘둘리던 [중중]이 그들에게서 벗어 나기 위해 "신진 사림들"을 중용하게 되었지요.
            "정암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되고, "훈구파"를 몰아내고 개혁은
            시작되었지만, 또다시 막강한 수구세력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신진 사림'들은 다시 몰락하게 되었죠.
            수구세력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쥔 부와 권력을 절대 놓지 않으려교 하죠.
            그러나 [명종]대에 와선 다시 '훈구파'들의 권력독점에 제동을 걸지 않을수 없었던 상황이 다시 돌아 왔는데
            훈구파들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 왕은 견제세력으로 다시 '신진 사림'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을 수 없었죠.
            이때에 등장하는 '신진 사림'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 "성리학"을 설파한 "퇴계 이황"등 신진 사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서원"을 세워 새로운 인재 양성을 하게 해 주는 것이었죠.
            그 첫번째가 바로 "소수서원"이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서원 이름도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라는 "紹修書院"...
            "이미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인재 양성을 한다"라고 유추해석해도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 서원이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사림'들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탄압받던 사림들과 이런 사림들의 국가 질서 운영방식이
            국가로 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선배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고 학문을 교육하는 기관이 되었고
            곧 그들의 근거지가 된 것이죠. [명종]이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겠나요.
            제가 서두에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상황을 요약한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라고 언급했습니다만
            그냥 관광으로만 다녀가지 말고 그 의미도 나름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미래지향적일 것입니다.
          
          
            ['정료대'와 '관세대']
          
            [안내문]
          
            "장서각"앞에는 "정료대"와 "관세대"가 있고
          
          
            ['문성공묘']
          
            "문성공묘 文成公廟"는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랍니다.
            불교를 국가 이념체계로 삼은 고려시대에 이미 "성리학"은 고려에 전래되고 있었습니다.
            최초가 "회헌 안향 선생"이고 뒤이어 모두 잘 아시는 "포은 정몽주선생", "삼봉 정도전선생"등이 있었습니다.
          
          
            ['직방재']
          
            ['학구재'와 '지락재']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는 
            요즘 말로 쉽게 말하자면 학생들의 기숙사
          
          
            ['영정각']
          
            선배 '유학자'들의 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이 있는데
            "영정각" 앞에 있는 "일영대"가 눈길을 더 끄는데...
          
          
            ['일영대']
          
            [안내문]
          
            해시계이군요...ㅎ
          
          
            ['주자 선생'과 '안향 선생' 영정]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의 영정과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의 영정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안향 선생의 영정""國寶 第111號"로 지정되 있답니다.
          
          
            ['허목 선생'과 '이원익 선생'영정]
          
            ['주세붕 선생'과 '이덕형 선생' 영정]
          
            "주세붕 선생의 영정""寶物 第717號"로 지정되 있다는군요.
          
          
            ['소수서원' 후문]
          
            [소수서원]을 둘러 보고 [소수서원] 뒷문으로 나가면....
          
          
            ['사료관']
          
            "사료관"이 있고 뒤에는 "충효교육관"과 "관리사무실"이 있더군요.
          
          
            ['소수서원'에서 '선비촌' 통로문]                 2:02
          
            [공원]
          
            [소수서원]에서 [선비촌]으로 가는 통문을 통과하면 공원이 이어지고
          
          
            ['죽계교']
          
            ['선비촌' 연결 통로]                    2:07
          
            [죽계천]을 건너 [선비촌]으로 가는 [죽계교]를 건너 갑니다.
          
          
          
          
          
          
          
            ['선비촌' 이곳저곳]
          
            "선비촌"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과 비슷하여 휭하니 둘러 보고
          
          
            ['죽계루']                   2:13
          
            ['선비촌' 정문 광장]                         3:08
          
            [죽계루]로 나가면 [선비촌 광장]이 펼쳐 집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속 음식점들이 있는데, '종가집'이라는 음식점에서 식사와 안주로 한잔 걸치고...ㅎ
            경상도 음식문화를 낮게 보던 시대는 지나 갔습니다. 
            경상도 음식들도 새롭게 혁신하여 무지 좋아 졌습니다.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
          
          
          
            ['영주 선비상']                      3:20
          
            '영주시'가 자랑하고 있는 "선비"
            그리고 조선시대를 휩쓴 "유교문화-성리학"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상명대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시 저자 "김경일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로 정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 따라 지금의 제목으로 바꾸었고,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풍기역']                        3:36
          
            [플랫홈]                         3:55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사랑이야기』『유교문화의 得과 害』를 보고 느끼며 보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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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많은 삶, 끝 없는 그리움』 [서울 종로]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유적 답사기 낙산공원입구-비우당-청룡사 정업원-동망봉-동망정-여인시장-영도교 [구글맵] [구글어스] ['숭인동' 안내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낙산공원입구"에서 출발하여 "단종비 정순왕후 유적"을 따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을 둘러보고, "청계천 영도교"까지 약3.3km를 갑니다. ['낙산공원' 입구] 3:05~3:09 2020년 5월 19일 (화) 맑음 구름 조금 [6호선 창신역 4번출구]에 내려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번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좁은 마을길을 잠시 올라 [한양성곽]에 있는 "낙산공원 입구"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3번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신쌍용아파츠2단지' 조망] [낙산공원]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낙산길]을 따라 먼저 "비우당"을 찾아 갑니다. [비우당]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옆에 있으니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됩니다. 150m정도 직진하면... ['낙산삼거리 버스정류장'] 3:11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담에 붙어 있는 [낙산삼거리버스정류장] 옆에 [비우당]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길안내를 합니다. 200m 정도 아파트 담을 따라 가면...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앞]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3:15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을 만나는데 [비우당]은 아파트 정문 옆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비우당'] 3:17~3:22 3~40m 정도 내려 가면 초가집을 하나 만나는데, 이 초가집이 "비우당 庇雨堂"이더군요. 건너편에 보이는 절간은 [원각사]라는 절인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최근에 지은 절이었습니다. ['비우당' 안내문] "비우당 庇雨堂"에 대해선 위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파란문'은 "지봉 이수광선생 芝峯 李睟光"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선진외국문물을 깊이 있게 습득했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켜서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게 되었답니다.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글] "지봉유설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죠. 우리나라 문화 문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망라하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지봉유설]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듯 하죠? ㅎ 또한 청백리로 유명하다는건 이 집 만 봐도 알수 있죠? "비우당 庇雨堂"이라는 말의 뜻이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 초가집은 원래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선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이 새서 우산을 받히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살까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는데 [지봉 이수광선생]에게 상속되어 개보수해서 "비우당 庇雨堂"이라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지동천'] "자지동천 紫芝洞泉" ^.^ 발음에 유의해야 하는데, 현재의 '창신동' 주변을 옛날엔 "자지동 紫芝洞"이라 했답니다. [자지 紫芝]는 '영지버섯'과 비슷한 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이랍니다. 자주색 물이 나온다고... 이 주변에 그런 버섯이 많이 자생했나본데,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로 빨래를 하니 빨래에 자주색 물이 들었답니다. 폐비가 되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비단 등 천에 자주색 염색을 해주면 주변 여인들이 염색한 천을 내다 팔아 주고 채소 등 먹을거리를 담 너머로 던져 주곤하며 식생활을 이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그런 우물터라 유명해졌답니다. ['낙산길'] 3:24 ['명신초' 앞] 3:27 [비우당]과 [자지동천]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명신초등학교]와 [숭인교회]를 지나 우회전하여 잠시 더 내려 가면... ['청룡마트' 앞 사거리] 3:30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 [청룡사]와 [정업원터]를 보고 다시 이 사거리로 나와 앞에 보이는 [동망봉]으로 가야 합니다. ['청룡마트'에서 '청룡사' 조망] 3:31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고 앞에 [청룡사]가 보입니다. ['청룡사'] 3:32~3:39 [대웅전] "삼각산 청룡사 三角山 靑龍寺"는 비구니 요람이라는데... 고려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낳은 [경순(慶順)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였으며, "세조 3년(1457)"에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출가하여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보낸 곳이어서 우리에겐 "한 많은 장소"로 알려져 있지요. ['우화루'] "우화루 雨花樓" 1457년 6월 22일 (세조3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헸던 곳이라 하니 "雨花"라는 말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꽃비가 내리다..." ['단종실록' 1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단종실록]도 아니고 [노산군일기]라고 나옵니다. 비극의 시작인 그 첫장을 한번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정통(正統) 6년 신유년001) 7월 23일 정사(丁巳)에 나서 무진년002) 4월 초3일 무오(戊午)에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년003) 8월에 문종(文宗)이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신미년004)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勅]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3년 임신년005) 5월 14일 병오(丙午)에 문종(文宗)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정업원'] "정업원 淨業院"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청룡사" 좌측 끝에 있습니다. "정업원 淨業院"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던 곳을 의미 한답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고려 공민왕]의 "惠妃"가 폐위되어 머리 빡빡 깍고 중이 되어 산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낳은 2남1녀 중에 아들 [방번]과 [방석]이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기와 비구니로 살았고 아시다시피 [단종]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어 외롭게 한많은 삶을 산 곳이기도 하죠. ['정업원'] "前峯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 어천만년"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 - 조선 21대왕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친필 - ['정업원구기']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정업원 옛터' 신묘년(1771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떠나간지 170여년이 흐른후 [영조]가 찾아와 이곳이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친필로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13살 때에 14살의 [정순왕후]가 간택되어 부부가 되었지요. [정순왕후]를 [단종]의 王妃로 간택되도록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수양대군-세조]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단종]을 왕위에 앉힌지 1년만에 상왕으로 내밀고, 그후 2년만에 '영월'로 귀양 보내 죽여버렸죠. 졸지에 왕비에서 노비가 되어 궁궐에서 쫒겨난 [정순왕후]는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이곳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요즘 같으면 '오거돈' 같은 놈 ~ ㅎ '코로나바이러스균'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숙주 宿住"라고하죠? ㅎ 한자야 틀리지만 '신숙주'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같은 놈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ㅎ ['청룡마트' 앞 사거리] 3:40 [청룡사]와 [정업사터]를 돌아 보고 다시 [청룡마트] 앞 사거리로 돌아와 우회전 하면... ['동망봉' 조망] 3:41 [숭인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동망봉]이 조망됩니다. 좌측 너른 길로 올라 가면... ['숭인근린공원' 입구] 3:43 ['동망봉' 정상 입구] 3:45~3:51 "동망봉 정상 입구"에 도착합니다. ['숭인근린공원 안내도'] [숭인근린공원 안내도]를 숙지하고 [동망봉 정상석]을 찾아 올라 갑니다. ['동망봉' 정상 배드민튼장] [동망봉 정상]은 배드민튼장과 어린이 놀이 시설, 그리고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주민들의 건강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동망봉 표지석' 위치] ['동망봉 표지석'] [동망봉 정상석]은 배드민튼장 우측 공원 둘레길에 있었습니다. "동망봉 東望峰 93.2m" [정순왕후]가 동쪽 '영월'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랍니다. 1771년 [영조]가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정순왕후]와 [단종]의 넋을 기리며 이 근처 바위에 "東望峰"이라는 친필을 새겼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낙산'과 이곳 "동망봉' 주변을 채석장으로 만들어 그 글씨는 없어졌다고... 제가 알기로는 쪽바리들이 여기서 채석한 돌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등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안내판] ['정순왕후'의 일대기]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만화로 만들어 놧습니다. 제가 읽기 쉽게 하나 하나 확대 편집해서 올렸으니 한번 읽어 보고 가세요~~ ㅎ ['아차산' 조망] 3:52 [동망봉] 정상에서 내려 가면 [아차산] [용마산]이 조망되는데...'영월'은 어디매뇨~ ['동망각']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동망각]과 쉼터 정자가 있는데 [영조]의 친필을 각인한 "東望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군요. [공원길] ['숭인제'] ['유아숲 체험장'] "숭인근린공원"은 주민들을 위해 예상보다 잘 조성된 근린공원이었습니다. '달동네'라고만 알고 있었던 '창신동'과 '숭인동'이었는데 그런 관념을 깨주는 공원이엇습니다. ['동망봉 북카페'] 3:57 [동망봉]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이어서 내려가면 다시 배드민튼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있고 특히 [동망봉 북카페]가 눈길을 끕니다. 들어 가 봤더니 비치된 책도 많고 몇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동망정'] 4:00 [안내문] "동망정 東望亭"은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정자라고 합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진정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그녀는 1440년에 태어나서 15살이 되던 해인 1454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定順王后"가 된거죠. 1년 정도 왕비로 살다가 [단종]이 上王으로 밀려나니 그녀는 "의덕왕대비 懿德王大妃"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에 '왕비' '대비'까지 역임했으며, 그리곤 폐서인이 되어 '노비'로 떨어졌지요. 최단 초고속 변화였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그녀는 무지무지 오래 장수했습니다. '1521년 7월 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나이가 82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엄청 장수 한거죠. 더 실감나게 풀어 드릴까요? ㅎ 그녀는 '1440년'에 탄생했으니 그때가 [세종대왕]이 즉위 22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장남이며 자신의 시아버지인 [문종]이 1450년에 즉위하였으나 일찍 죽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지배하다가, 1468년에 [예종]이 왕이 되고, 또다시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94년엔 [연산군]이...그리고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즉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인 "1521년 7월7일"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권력찬탈과 쿠데타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산것입니까?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세종대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시대까지 여덟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렁다면 그녀는 과연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구중궁궐 권력암투 속에서 골치 아프게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오래 살수 있었을까.... '파란문'은 [정순왕후]의 인생을 비록 과부로 살았지만 장수했으니 그렇게 슬프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수 있다면 그까짓 '왕비'에서 과부가 되더라도 뭔일 있겠습니까? ㅎ 권력을 쥐려고 피비린내 나게 형제 자매 죽이며 살면 뭐합니까. 허무하게 일찍 죽는걸.... ['영월 방향' 조망] [정순왕후]가 첫사랑 [단종]을 애타게 기다리며 돌아 오길 기원하던 동쪽 '영월' 방향엔 마천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애절함은 느낄수 없고... ['한양성' 조망] 서쪽으로는 [한양성곽]이 "낙산"을 자나가고 있는데 [한양성곽]을 이루는 [인왕산]이 조망되며 그 뒤로 [안산]도 보이는군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은 바로 [한양성곽]과 거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살던 [경복궁][창경궁]이 몇km도 않되는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았으니 그녀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비극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찾아 보기 위해서 여기서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좀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을 꼽으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종대왕]을 꼽지요? 하지만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입니다. 왜냐구요? 지금부터 '세종대왕'의 어두운 사생활 부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식 福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자식을 자식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또한 '소헌왕후'의 친아버지, 즉 '세종대왕'의 장인까지 없는 죄를 뒤집어 쒸어 죽여버렸죠. 그가 '심온선생'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둘째, 며느리 福도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식 福'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福'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압승술'은 남편의 성적욕구를 높이기 위한 미신행위였습니다.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밤에 독수공방 시켰기에 성욕을 해결 못해 궁녀들과 레스비안을 즐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요즘같으면 남편 구실 못하는 [문종]이 위자료 주고 이혼 해 줘야 하는데...ㅎ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셋째, 사위 福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놈은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사위인 "안맹담"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자식들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넷째, 세종대왕 본인은 살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으니 그 아이로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망정'에서 출구 방향] 4:03 [동망정]에서 [묘각사]로 내려 가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야만 합니다. [문종]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계유정란"을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중에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세자빈', 즉 장차 王妃가 될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은 인간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수양대군'은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며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계단 내림길] [골목 내림길] 제법 가파른 계단과 비탈진 달동네 골목을 7분 정도 내려 가면...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4:10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안심건강길]이라고 안내하는 [숭인근린공원] 출입구를 만나 우회전하고 ['묘각사'] 4:11 [뒤돌아 본 '묘각사'] 이어서 "낙산 묘각사 駱山 妙角寺"를 만납니다. 전통사찰은 아니고 1930년에 개산한 "대한불교 관음종 총본산"이라고 하며 템플스테이가 좀 알려져 있는듯... [골목길] 골목길을 4분 정도 진행하는데 新舊가 비교되는군요. ['묘각사' 입구] 4:15 [뒤돌아 본 '묘각사' 입구] [1호선지하철]이 다니는 [종로]를 만납니다. [묘각사]와 [동망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동묘' 조망] 길을 건너 건너편에 보이는 [동묘]로 갑니다. ['벼룩시장'] 4:19 [동묘] 우측길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죠. ['동묘' 정문] 4:21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후에 神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관우 關羽"만이 중국에서 神格化되어 지금도 중국사람들 상당수가 神으로 모시고있죠. 이곳의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로서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나라]가 [선조]에게 요구해 "관우 關羽"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했답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보수공사 중에 있습니다. ['옛 여인시장'] "옛 여인시장" [정순왕후]를 위해 주변 여인들이 [정순왕후]가 염색한 옷감 등을 내다 팔고 채소시장들을 열어 식재료를 공급하곤 했다는 남자는 출입을 금하는 禁男市場이었답니다. ['영도교'] 4:24 [안내문]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 가는 영원한 이별...永渡僑" 우리들에겐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여러편의 영화로도 알려진 "端宗哀事"입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화양정"은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화양동'에 그 터가 현재도 남아 있지요.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보내고, 잠시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살곶이교"를 건너 '화양동'의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까지 이동하여, '원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4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청계천'] 4:25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며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며 '한양성' 안에 있는 유일한 개천이기도 하죠. 조선왕조 500년...27명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 중에 유일하게 힘 한번 못쓰고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라진 비운의 [단종 端宗]과 그의 비 [정순왕후]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새살림을 차리고 있으리라....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3.3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 짧은 코스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수백년을 걸은 느낌이 드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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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지난날의 성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술 잘 하던 사람만이 이름을 남겼네…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 버리리라.”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장진주(將進酒)’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뜻을 얻었을 때 즐겨야 하므로…마셨다 하면 300잔은 마셔야 한다’면서 풍류남아의 호방한 기백을 토해냈다.

          그러나 한자 ‘술잔 치(치)’는 ‘위태로울 위(危)’와 비슷하고, ‘취할 취(醉)’에는 ‘술 유(酉)’ 변에 ‘죽을 졸(卒)’자가 붙어있다.

          술잔에 위태로움이 있고, 술에 죽음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임금과 신하들의 술자리라면 어떨까. 심심찮게 죽음의 향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서 ‘역린’을 건드려 군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해서 평소에도

          파악하기 어려운 ‘군주의 역린’을 어떻게 취중에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신정승! 구정승!” 아재개그로 재상들을 골탕먹인 세조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를 싫어한다”면서 소주 한 잔 정도만 겨우 마셨던(<세종실록> 1422년 5월26일) 세종 같은 군주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간 술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예컨대 세조는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들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을 불러 수시로 주연을 베풀었다.


          <신윤복필 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 중 ‘유곽쟁웅(遊廓爭雄)’. 유흥가에서 만취한 사내들의 몸싸움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다. 싸움의 당사자들은 갓을 벗어던지고 옷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했고, 별감이 가운데에서 이를 말리고 있다. 화면오른쪽 아래에는 두 동강이 난 갓을 챙기며 난감해 하는 이가 보인다. 유곽 앞에 서 있는 기녀는 장죽을 물고 팔장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필 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 중 ‘유곽쟁웅(遊廓爭雄)’.

          유흥가에서 만취한 사내들의 몸싸움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다.

          싸움의 당사자들은 갓을 벗어던지고 옷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했고, 별감이 가운데에서 이를 말리고 있다.

          화면오른쪽 아래에는 두 동강이 난 갓을 챙기며 난감해 하는 이가 보인다.

          유곽 앞에 서 있는 기녀는 장죽을 물고 팔장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세조와 신숙주·구치관의 술자리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463년(세조 9년) 세조는 영의정이던 신숙주(1417~1475)와 새롭게 우의정이 된 구치관(1406~1470),

          두 사람을 내전에 마련된 술자리에 불렀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내리겠다”면서 운을 떼면서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틀렸다.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구치관)을 부른 것”이라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이번에는 ‘구정승!’이라 했다. 이에 구치관이 “예”라고 답하자 세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으면서 “틀렸다.

          나는 옛 구(舊)자 구정승(신숙주)을 불렀다”면서 역시 구치관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다시 ‘구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틀렸다, 이번에는 내가 구정승(구치관)을 불렀다”면서 다시 신숙주에게 벌주를 하사했다.

          이어 세조가 ‘신정승’ ‘구정승’을 교대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짐짓 꾸짖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벌주를 내렸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 두 정승이 만취하자 세조는 크게 웃었다. 세조가 싱겁기 이를데없는 ‘아재개그’로 정승들을 곯린 것이다.


          송강 정철(1536~1593년)의 은 술잔. 선조가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탄핵을 받은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잔 석 잔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 늘려 사발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함부로 두드려 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송강 정철(1536~1593년)의 은 술잔. 선조가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탄핵을 받은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잔 석 잔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 늘려 사발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함부로 두드려 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정인지의 ‘너’ 사건

          세조의 술자리 일화 중 백미는 역시 정인지(1396~1478)의 ‘너’ 사건일 것이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세종~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술만 마시면 하늘같은 임금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금(세조·1417년생) 보다 21살 연상이었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1458년(세조 4년) 9월 15일 취중 막말 사건이 터진다. 정인지가 왕세자와 종친, 의정부, 육조 판서 이상이 참여한

          양로연에서 세조 임금에게 ‘너’라고 지칭한 것이다. 17일자 <세조실록>은 정인지의 막말을 직접 들은 세조의 증언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 글쎄, 정인지가 ‘나(予)’를 ‘너(汝)’라고 칭하고는(麟趾與予稱爾汝曰)

          ‘(네가) 그같이 하는 것을 나는 모두 취하지 않겠다(若之所爲 皆吾不取)고 했네”.

          ‘나(정인지)는 네(세조)가 한 말을 모두 듣지 않겠다’는 것이니 임금을 능멸한 죄, 즉 불경죄에 해당됐다.

          세조는 “술에 취하면 본성이 드러난다는 옛말이 있지 않느냐”면서 “정인지의 말이 너무 방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발맞춰 종친과 의정부, 육조는 물론 대간들이 벌떼처럼 나서 “정인지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단종 복위 사건 때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한) 성삼문과 다를 바 없는 역신(逆臣)의 막말”이라고 탄핵했다.

          하지만 세조는 “정인지가 취중(醉中)에 한 말은 모두 고구(故舊·엣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면서 “정인지는 지금 나라 일을 맡아 보는 대신도 아니고 노쇠하고 쓸모없는 일개 유생일 뿐”이라고 두둔해주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취중 막말은 한번이 아니었다.

          1458년(세조 4년) 2월12일 열린 공신연에서도 세조를 향한 불경한 취중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너’ 사건이 일어난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459년(세조 5년) 1월19일의 연회와,

          다시 7개월 뒤인 8월 1일의 내전 술자리에서도 ‘임금에게 불경한 언사’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탄핵됐다.

          세조는 그때마다 “그게 정인지의 술버릇인데 어찌 문책하겠느냐”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1719년(숙종 45년) 숙종(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를 그린 <기사계첩도> 중 ‘경연당석연도’. 임금들은 군신간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때때로 충성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19년(숙종 45년) 숙종(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를 그린 <기사계첩도> 중 ‘경연당석연도’.

          임금들은 군신간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때때로 충성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금의 팔 비튼 신숙주

          비교적 이렇게 술자리 실수에 너그러웠던 세조에게도 ‘역린’은 있었다.

          세조 역시 때때로 마음을 풀어놓는 술자리를 신료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리로 여겼다.

          그러니 임금과의 술자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였다.

          예컨대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역대 이상적인 군신의 상징인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태종의 위징’이라 칭했다. 군신관계를 떠나서도 두 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였다.

          어느날 연회에서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면서 “경(신숙주)도 내 팔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역시 인사불성이 된 신숙주는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 비튼 셈이 됐다.

          세조가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세조가 예종에게 “괜찮다”면서 흥을 깨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1415~1487)는 술자리가 파한 뒤 신숙주의 집에 청지기를 보내 신신당부했다.

          “범옹(신숙주의 자)! 자네는 평소 만취해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등불을 켜고 책을 본 뒤 잠자리에 드는 습성이 있지.

          그러나 오늘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네. 곧바로 불끄고 잠자리에 들게.”

          과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책을 들춰보던 신숙주는 한명회의 전언을 듣고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과연 세조가 한밤중에 넌지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집에 가보라”고 지시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침수에 들었다.

          (<소문쇄록>)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임금의 팔을 비튼게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오래 해먹었느니 그만 물러나라’는 공신

          이런 판국인데 술자리에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면 무사했겠는가.

          1466년(세조 12년) 6월8일 세조는 평안도절제사로 근무하다가 돌아온 양정(?~1466년)을 위한 위로연을 베풀었다.

          양정은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이었지만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했던터라 인사불만이 컸다.

          연회에서 술에 취한 양정은 “전하는 이제 편히 쉬셔야 할 때”라고 폭탄선언했다.

          세조가 재차삼차 “나보고 물러나라는 거냐”고 물었지만 양정은 “신의 마음도, 민심도 그렇다”고 했다.

          세조가 다시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는 물론이고, 경(卿·양정)도 죽는다면 나랏일은 누가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양정은 “차차(次次·차례차례)로 있게 될 것입니다”라 꼬박꼬박 말대답했다.

          세조가 “어서 상서원(어보 담당관청)에서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양위소동을 벌이자

          대소 신료가 벌벌 떨며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정은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상탑) 아래 꼿꼿이 앉아

          “왜 어명을 받들지 않느냐. 승지들은 빨리 옥새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이쯤되면 취중진담이었다.

          결국 양정은 임금에게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죄로 참수됐다.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승정원 일기 사초’. 술자리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실수 때문에 가문이 멸문의 지경에 빠졌다가 중종반정 이후 겨우 회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승정원 일기 사초’.

          술자리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실수 때문에 가문이 멸문의 지경에 빠졌다가 중종반정 이후 겨우 회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술 취해 소매 속 귤을 떨어뜨린 신하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은 증조할아버지(세종)를 빼닮아 학문을 워낙 좋아했다.

          <용재총화>는 “성종은 홍문관에서 숙직하던 선비들을 불러 학문을 토론하고 편복(평상복)으로 마주 앉아 촛불 하나만을

          켠채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성종과 성희안(1461~1513)의 일화가 유명하다.

          성종과 술을 마시던 홍문관 정자(정9품) 성희안은 술상에 올려져있던 감자(柑子·밀감) 10여개를 소매 속에 넣고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내시가 강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일이 떨어졌다. 어전에서 과일이 이리저리

          흩어지져 터지고…. 시쳇말로 ‘갑분싸’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튿날 밀감 한 쟁반을 홍문관에 내리면서 “어제 강희안이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과일이 쏟아졌으니 지금 다시 내려준다”고 했다. 죽을 죄를 졌다고 여긴 강희안은

           “이 은혜를 죽음으로 갚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종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종실 중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큰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져 산산조각 냈다”고 전한다.

          <오산설림>은 “이런 종실의 행동은 성종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은연 중 간하는 뜻이었고,

          임금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했다.

          허엽(1517~1580)의 <전언왕행록>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연회를 즐겨 베풀었다”고 기록하면서 일침을 놓았다.

          “혹자는 ‘태평성대라면 모르되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산군이 아버지를 닮아 술자리를 즐겼고, 그 때문에 정사를 그르쳤다는 논평이다.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제1404호).1450년(세종 32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 예겸과 치열한 시문 대결을 펼친 뒤 시문의 내용을 두루마리로 엮은 것이다. 이중 정인지는 세종~성종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는데,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는 등 여러차례 불경죄를 저질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제1404호).1450년(세종 32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 예겸과 치열한 시문 대결을 펼친 뒤 시문의 내용을 두루마리로 엮은 것이다.

          이중 정인지는 세종~성종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는데,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는 등 여러차례 불경죄를 저질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취중 발령을 그대로 실행한 연산군

          물론 연산군도 나름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즐긴 적이 있다.

          1503년(연산군 9년) 11월 21일 창경궁 내전에서 연산군과 대신들이 군신의 예를 잊고 광란의 술자리를 벌였다.

          연산군은 이날 스스로 북을 쳐 노래하고, 더러는 손으로 대신들의 사모를 벗겨 머리털을 움켜쥐고 희롱하며 욕보이기도 했다.

          영의정 성준(1436~1504)과 좌의정 이극균(1437~1504)에게 어의(御衣)까지 하사하여 직접 입혔고,

          참의 한형윤(1470~1532)에게는 신발까지 벗어주면서 “너를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또 김감(1466~1509)에게도 “너에게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다.

          이때 좌의정 이극균은 연산군에 하사한 어의에 ‘오바이트’까지 하는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취중실수를 탓했다.

          “임금의 패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역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면서 “대신들 보기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연산군은 그러면서 “내가 어제 한형윤, 김감에게 낸 취중발령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약속까지 했다.

          <연산군일기>는 “(어젯밤 광란의 파티에서 일어난 불상사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대죄를 청하던)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신숙주와 중국사신 예겸이 나눈 시문. 신숙주는 세조가 ‘촉 선주의 제갈공명이자, 당 태종의 위징’이라 일컬을만큼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신숙주도 술자리에서는 때때로 충성을 시험받는 신하에 불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숙주와 중국사신 예겸이 나눈 시문.

          신숙주는 세조가 ‘촉 선주의 제갈공명이자, 당 태종의 위징’이라 일컬을만큼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신숙주도 술자리에서는 때때로 충성을 시험받는 신하에 불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잔을 떨어뜨린 예조판서

          이 대목에 이르러 필자는 군주, 아니 연산군의 죽 끓는듯한 변덕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은 분명 1503년 11월 군신간 벌인 질탕한 광란의 파티를 두고 ‘임금인 나의 패덕’이라 했다.

          그런데 그보다 두 달 전인 9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사건인가. 9월11일의 양로연에서 연산군과 신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실 때 예조판서 이세좌(1445~1504)가 그만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양로연이 끝난 뒤 연산군은 “오늘 이세좌가 과인에게 올리던 술잔을 떨어뜨려 내 옷까지 적셨다”면서

           “이세좌를 국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내 옷은 물론이고 어좌 위에도 흘러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느니,

          “예를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그럴 수 있냐”느니 하며 트집을 잡았다.

          술자리 실수 치고는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이세좌는 곧 파직됐다.(15일) 이때만 해도 이세좌와 그의 동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세좌는 의금부에서 “몸이 뚱뚱하고 행동이 느려서 너무 조심하다가 술잔을 엎지르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원로 재상들도 이세좌를 적극 변호했다.

          “이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성상의 위엄이 황공스러워 자기 딴에는 빨리 마시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세좌가 연회가 끝난 뒤 “내가 평상시 술을 못마시는데 오늘은 성상께서 돌리는 술잔을 다 받아 마셨다”고 자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다 웃었다”는 것이었다.

          원로 재상들은 “이세좌가 일부러 엎질렀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겠냐”고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의정부와 육조, 한성부 당상들이 불러

          “(59살인 이세좌가) 나이 늙은 대신이 어린 임금(28살 연산군)이라고 우습게 여긴 것”이라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다.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이세좌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도 탄핵하지 않는다.

          이는 이세좌의 아들 이수의가 한림이고, 이수정이 홍문관원이기 때문에 무서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연산군의 명분은 군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무렴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한림(예문관 검열 정9품)과 홍문관 수찬(정6품) 따위가 무서워 그 아비(이세좌)의 죄를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자리 실수가 멸문의 지경까지

          연산군은 왜 ‘이세좌 가문의 세력’ 운운했을까.

          이유가 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 으뜸”이라고 했다.

          이세좌의 ‘광주 이씨’ 가문은 세조~성종까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고 할만큼 번성했다.

          8명의 광주 이씨 ‘극’자 돌림이 영의정에서 장차관 벼슬에 올라 조정회의를 쥐락펴락했다는 것이다.

          이극배(영의정·1422~1495)·극감(형조판서·1423~1465)·극증(영의정·1431~1494)·극돈(이조판서·1435~1503)·

          극균(좌의정·1437~1504), 극규(대사간·?~?), 극기(예공조참판·대사헌·?~1489)·극견(좌통례공) 등이다.

          당시 의정부 사인(정4품) 이수형(?~1504)과 홍문관 수찬(정6품) 이수정(1477~1504), 예문관 검열(정 9품)

          이수의(?~1504) 등은 이극감의 아들인 이세좌의 자녀들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술자리 실수를 빌미삼아

          광주 이씨 가문을 손볼 생각을 했다.

          결국 이세좌와 그 자녀들은 물론 유일하게 남아있던 ‘극’ 자 돌림의 좌의정 이극균도 “조카(이세좌)의 죄는

          ‘큰 불경(大不敬)’은 아닌 ‘불경’이라고 변호했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5월6일자는 “연산군은 (이씨) 종친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세좌와 그의 자식은 물론 가문까지 씨를 말리려 했던 의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세좌가 연산군에게 찍혀 죽임을 당한 다른 이유도 있다.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된 것이다.

          이세좌는 1482년(성종 13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1482)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결의 명을 받았다.

          술자리 실수에서 비롯된 이세좌와 가문의 수난은 극에 달한다.

          갑자사화가 마무리된 뒤 1년 6개월이 지난 뒤인 1505년(연산군 11년) 10월7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는

          ‘간흉의 괴수로서 임금을 능멸했고(魁兇陵君)’, 이극균에게는 ‘포악하고 간사하여 임금을 능멸했다(桀힐陵君)’는 죄목을 달았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시신을 파내어 토막내어 사방에 돌리고 그 머리에 ‘찌’(요즘의 포스트잇)를 써붙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이세좌는 물론 삼촌인 이극균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의 형벌까지 내렸다.

          ■술에 취하면 황제도 없다지만…

          어떤가.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같은 임금의 술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떤 술자리(1503년 9월 11일)에서는 실수로 술잔을 엎은 신료는 물론 그 일족까지 임금을 능멸한 역적으로 몰아붙여 급기야

          그 해골까지 가루내어 바람에 날리고, 또 어떤 술자리(11월21일)에서는 취중실수는 모두 임금이 패덕한 탓이라고

          자책하고 참석자들에게 선물까지 내리고…. 극과 극을 오가는 군주의 변덕을 어쩌란 말인가.

          새삼 1791년(정조 15년) 7월 취중 살인사건을 판결하던 정조 임금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대체로 술 취한 사람에게는 비록 천자(天子·황제)라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중에도 역시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군주가 생각하기에 따라 신하들의 취중언행은 얼마든지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제기로도 쓰인 꽃무늬 은잔. 성종 같은 임금은 큰 술잔으로 신하들과 대작하고 기생을 동반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들(연산군)인 연산군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술 취향을 배워 향락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제기로도 쓰인 꽃무늬 은잔.

          성종 같은 임금은 큰 술잔으로 신하들과 대작하고 기생을 동반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들(연산군)인 연산군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술 취향을 배워 향락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필자는 술맛도 모르면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예전의 술자리를 돌이켜본다.

          생각해보니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벌였던 술판이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면 거의 대부분 ‘후회막급’이었다.

          술김에 하는 얘기라며 남에게 상처주는 이야기를 했거나, 혹은 거꾸로 술김에 나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공자의 그 유명한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고哉고哉)’(<논어> ‘옹야’). ‘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라고 해석된다. 청나라 고전학자인 모기령(1623~1716)도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고)’는 원래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3되를 적당하다고 하고, 5되를 과하다고 했으며, 2되를 적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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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전경련회관 50층] ['전경련회관' 50층에서 바라 본 'KBS'와 '국회의사당'] ['전경련회관' 50층에 있는 '사대부집 곳간'] [엄마 생일이라고 얘들이 축하 초대] [생일 축하 케익] 2020년 3월 22일 (일) 여의도 전경련회관 50층에 있는 "사대부집 곳간"이라는 음식점에서 와이프 생일 축하를 했는데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초대를 했습니다. 평시 같으면 예약하기도 어렵다는 음식점이라는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음식점은 텅텅 비었더군요. ㅎㅎ 그래서 널널하게 즐겼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걸 알아 가고 있습니다. ^*^
          '조선일보'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네요.

          우리나라와 정부를 씹기만하던 '조선일보'가 왠일이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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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1/2020031101709.html


          술과 언어 "수작질"이란 말의 어원을 아시나요? [오랜 벗과 한잔]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이 얼마나 즐겁지 아니한가? 멀리서 벗이 찾아 왔습니다. 교통이나 통신 수단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 산 넘고 물 건너 수십리 길을 마다 않고 걸어온 오랜 벗이 얼마나 반가웠으랴! 한껏 그리던 벗과 함께 주안상을 마주하고 술을 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상 다반사죠. “이 사람아~. 먼 길을 찾아와주니 정말 고맙네, 이 술 한 잔 받으시게." 벗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이토록 반갑게 맞이해주니 정말 고맙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가?” 하며 다시 잔을 되돌려 따라 줍니다. 이것을 "수작 酬酌" 이라고 한다죠. "수 酬"라는 한자는 "갚을 수, 보답할 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작 酌"이라는 한자는 "술 따를 작"이라는 뜻이니. 합쳐서 해석하면 "잔을 되돌려 보답에 술을 권한다"고 하는 뜻이 되지요. 원래 '수작'은 손님과 주인이 '서로 공경'의 뜻으로 술을 주고받는 것을 뜻한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보답하여 건배하는 것을 '작(酌)'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장삿속으로 술을 따라 주는 주인들이나 주인에게 잘 보일려고 손님이 하는 행동거지로 나타나면 "남의 말이나 행동을 하찮고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 이르는 말"로 변질되지요. "닭 유酉"자가 닭의 의미만을 나타내지는 않지요. "유 酉"라는 한자는 원래 배가 잘록하고 밑이 뾰족해 모래나 진흙 바닥에 꽂아두기 좋도록 만들어진 "술병"으로 '닭대가리' 모양을 하고 있어 "닭 酉"자가 되었지만, "닭 酉"가 들어간 글자들은 술과 관련된 경우가 훨신 많지요. 왁자지껄한 고갯마루 주막집 들마루에 나그네 서넛이 걸터 앉아서 "주모 여기 술 한 병 주게.” 연지분 냄새를 풍기며 주모가 주안상을 가져다 놓으면 “어이 주모도 한잔 하실런가?” 주인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이토록 반갑게 맞이해주니 정말 고맙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가?”하며 다시 잔을 되돌려 따라 줍니다. 원래 "수작"은 이렇게 손님과 주인이 서로 공경의 뜻으로 술을 주고받으며 서로 친분을 도모하자는 것인데 한 놈이 주모의 엉덩이를 툭 툭 치며 음담패설을 섞어 개걸거리면 “허튼 수작(酬酌) 부리지 말고 술이나 마셔~"라는 반사적 경고가 나오곤 하는 걸 영화 등에서도 많이 봤죠. 음탕한 남성들이 주모에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요즘말로 성추행.성희롱을 하는 경우가 많아 주모가 그런 남성들에게 "개수작, 허튼수작 하지 마라!"등으로 표현 했다는거 모두 아시죠? ㅎㅎ 주모가 말하는 "개수작" "허튼수작"은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척 하지 마라~ 딴 맘 먹지 마라~"등의 의미겠죠? ㅎㅎ 술과 언어 "짐작"이란 말의 어원을 아시나요? "짐작 斟酌"은 "미리 어림쳐서 헤아리는 것"이라고들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짐작"이라는 말도 "술"에서 부터 어원이 탄생되었답니다. "짐작 斟酌"도 위의 "수작 酬酌"과 거의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더군요. "짐"은 한자로 "술 따를 짐 斟"이고, "작"도 "술 부을 작 酌"으로 원래 술자리를 베풀어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신다"라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술을 따를 때 도자기로 된 술병에 술이 담기면 술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 양을 가늠하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술을 따를 때 여러 실수를 하는 때가 비일비재 발생하는데 그리하여 "짐작 斟酌"이라는 단어는 "술병 속에 술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라고 예측하는 것에서 탄생했답니다. 또한 "작정 酌定"이라는 말도 있죠. 이것은 "술을 얼마나 따를지를 미리 정해서 따른다"라는 것에서 부터 나온 말이랍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작정(酌定)을 해야 하죠? "작정 酌定"은 '술 따를 작(酌)', '정할 정(定)'자로 '술 따르는 양[酌量]을 정하는 것'이 랍니다. "작정 酌定"의 반대말로는 "무작정 無酌定"이 있죠. "무작정 無酌定" 술을 따르다 보면 잔이 넘치고, 술자리에서 무성의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무례한 짓이 되기도 하죠. 이외에도 "참작 參酌"한다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오랜 벗과 오랜만에 만나 세상사 다반사를 얘기하다보면 상대방의 주량을 알지 못하고 실수하는 경우가 많지요. "참작 參酌"이라는 단어의 원 뜻은 "함께 할 '참 參'"과 "술 따를 '작 酌'"이어서 "참작 參酌"은 상대방의 주량을 헤아리어 술을 알맞게 따라주는 것이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입니다.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을 내릴 때 피고인의 정상을 '참작'하여 양형을 낮추어 주기도 하는데 술을 알맞게 따라 준다는 "이해와 배려"인 것에서 출발한거죠. 술 마실 때 항상 생각하며 마셔야 하는 단어들을 종합하겠습니다. 술은 "감흥酣興"이 일 정도까지만 마시는 것이 좋다는건 모두 알지요. "감흥 酣興"이란 마음속 깊이 감동받아 일어나는 흥취인데 원래 이 단어의 뜻은 ‘술을 마시고 한껏 즐거워한다'라는 것이며 또는 ‘흥겨움이나 즐거움이 절정에 이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단계를 넘어서면 "즐길 탐酖"이 됩니다. "즐길 탐酖"은 술에 취해 즐거움 속에 잠겨 [沈, 잠길 침]이 붙어 있는 모습인데 조금 과도함을 뜻하죠.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가면 곧 술을 끝까지 마시게 되면 "마칠 '졸 卒'"이 추가되어 "취할 취 醉'"가 되는 것입니다. 더 취해서 귀신[鬼, 귀신 귀]처럼 되면 이젠 "추할 추 醜"가 되니 술은 언제나 적당히 마시는 습관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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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파랑길과 남파랑길의 시작과 끝 - 부산 오륙도'에서...] 백두대간, 9정맥, 50지맥과 770km 해파랑길을 종주하고 1,463km 남파랑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홍어와 무인도'를 즐겨 찾으시는 회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류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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