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작은 소인은 숭재요, 큰 소인은 사홍이라.                                             小任崇載大任洪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千古姦兇是最雄
천도(天道)는 돌고 돌아 마땅히 보복이 있으리니,                                天道好還應有報
알겠느냐.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從知汝骨赤飄風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이 간흉(奸凶: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으로 지목되었음과 함께 간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준엄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흔히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모자로 알려진 임사홍은 두 아들과 함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처형을 당했고,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후에도 연산군의 악행과 패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간신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잠시간의 정치적 출세와 영원한 간신의 낙인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임사홍의 행적을 통해 찾아보기로 한다.

부마(駙馬) 집안의 빛과 그늘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이의(而毅)이다. 좌리공신(佐理功臣)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자,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였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여 풍성군(豊城君)에 올랐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가 되게 했다. 첫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왕)의 딸인 현숙공주(顯肅公主)에게 장가들어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셋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여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왕실과의 지나친 혼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임사홍의 셋째 아들인 임숭재가 휘숙옹주와 혼인한 것에 대해 사관(史官)이 부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 날 밤 임사홍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사관은 이것을 복이 지나쳐 재앙이 발생한 것으로 논평하였다.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다. 불의로써 부귀를 누렸는데, 그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가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여 불이 그 집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니, 천도(天道)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1)고 하여 임사홍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임사홍은 1465년(세조 11)에는 알성문과에, 1466년(세조 12)에는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ㆍ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총애 했던 성종은 임사홍이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문관으로 등용하여, 홍문관교리ㆍ승지ㆍ도승지ㆍ이조판서ㆍ대사간ㆍ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하게 했다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은 그러나 1478년(성종 9년) ‘흙비’로 빚어진 사건 때문에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흙비는 지금의 황사비를 말하는데, 1478년 4월 초하루에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하여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의 의견은 달랐다. 임사홍은 흙비를 재이(災異)로 여기지 않았으며,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2)

이에 삼사(三司) 등에서는 임사홍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그들은 임사홍을 소인(小人)으로 일컬으며, 그가 말한 바가 모두 아첨에서 나온 음험하고 간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인 임원준까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정의 교훈이 바르지 못했고 임사홍의 간사함은 내력이 있는 것이라고 몰아갔다. 이처럼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탄핵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대간들은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던 임사홍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왕실과 혼인을 맺은 연줄로 권력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성종은 처음에 대간들의 탄핵을 저지하며 임사홍에게 잘못이 없다고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간들의 탄핵이 격렬해지자, 성종은 대간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손녀인 임사홍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상소했다. 3) 그리고 첫째 며느리인 현숙공주(당시에는 정숙공주라 함)는 아버지 예종이 돌아가신 후로 임사홍을 친아버지와 같이 의지했다며, 음식을 먹지 않으며 울기만 하였다. 4)이처럼 왕실의 여인들이 만류하려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사홍의 당인이었던 유자광(柳子光, 1439~1512)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5)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대에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 사후 마침내 그들은 연산군의 폭정에 구미를 맞추면서 재기를 했고, 각각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주도하는 데에 이르렀다.

갑자사화, 복수의 칼을 겨누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였다. 연산군은 많은 이복 여동생 가운데 휘숙옹주를 유난히 아꼈고, 그녀의 남편인 임숭재를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이것은 연산군이 임숭재가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 승지를 한강까지 보내 마중하게 하고, 잔치를 벌이거나 사냥을 할 때 꼭 그를 불렀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들이 왕의 총애를 얻자, 임사홍은 그 연줄로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처음에 폐주(廢主, 연산군)가 임숭재의 집에 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한창 어울렸을 때 숭재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 또한 신의 집에 왔습니다.’ 하였다. 폐주가 빨리 불러 들어오게 하니, 사홍이 입시하여 추연히 근심하는 듯하였다. 폐주가 괴이하게 여기어 그 까닭을 물으니, 사홍이 말하기를, “폐비한 일이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이는 실로 대내에 엄(嚴)ㆍ정(鄭) 두 궁인이 있어 화를 얽었으나, 실제로는 이세좌ㆍ윤필상 등이 성사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즉시 일어나 궁궐에 들어가서 엄씨ㆍ정씨를 쳐 죽이고, 두 왕자를 거제에 안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죽여 버리니, 두 왕자는 정씨의 아들이다.

- [중종실록] 1506년(중종 1) 10월 22일(정묘)

자신의 생모가 참소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광분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 연산군은 잔혹한 형벌들을 자행하였는데, [연려실기술]에는 “윤필상ㆍ한치형ㆍ한명회ㆍ정창손ㆍ어세겸ㆍ심회ㆍ이파ㆍ김승경ㆍ이세좌ㆍ권주ㆍ이극균ㆍ성준을 십이간(十二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坐罪: 연좌되어 벌을 받음)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윤필상ㆍ이극균ㆍ이세좌ㆍ권주ㆍ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연좌되어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杖刑)을 집행하였으며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 보내고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고 하여 그날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천하의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광기는 극에 달하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러한 잔인한 일들이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평가했다.6)

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의 오빠들)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그에게 쪽지로 통지하고, 임사홍은 곧 들어가 지도하여 명령이 내려지니, 그가 부도(不道)한 것을 유도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다.7)

아들과 바꾼 권력, 그러나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임을 잃지 않으려고, 둘째 아들인 임희재(任熙載)를 희생양으로 삼기까지 했는데, 그 일화가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실려 있다.8)임희재는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 때는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秦皇何事苦蒼生
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不知禍起所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虛築防胡萬里城

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이었는데,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누가 쓴 것인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임사홍과 임희재의 관계는 제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권력의 핵심 자제 중에서 운동권 학생이 배출된 사례와도 유사하다.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라고도 했다.9)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 더욱 경계하였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은 아들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구미에 맞는 측근이 되어 전대미문의 관직에 올랐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처음에 임사홍은 기생을 뽑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여러 사류(士類)에게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 년에, 내가 특별히 들어 써서 마치 물에서 구원하고 불에서 건져 준 것과 같으니,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어야 하거늘, 만약 두터운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임금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참으로 소인이다.” 10)하면서 임사홍을 압박했다. 결국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 기생)과 흥청(興淸: 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권력의 최측근 임사홍은 체포된 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실록에서 대간(大奸: 매우 간사함)ㆍ대탐(大貪: 매우 탐학함)ㆍ대폭(大暴: 매우 포악함)ㆍ대사(大詐:큰 사기꾼)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전형적인 간신의 최후였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 의금부에서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 관대한 은전)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하고 가산(家産)을 적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11) 자신이 주도했던 부관참시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 것이다. 적몰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는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임사홍은 권력을 위해 뭇 선비와 아들까지 죽였지만, 권력의 부메랑은 임사홍 자신의 처형으로 날아왔다. 그에게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라는 불명예가 더해졌고, 이 낙인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2013년은 새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가는 첫 해이다. ‘권력의 유혹’이라는 순간의 향략보다는 영원한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최향미, [조선 공주의 사생활], 북성재, 2011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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