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둘레길』
『버섯공원-비석공원-송파공원-오금공원』
['가락동 구글어스']
이번엔"송파 松坡=소나무 고개"가 실제 어디인지 찾아 보고
'송파구 가락동-오금동'의 근린공원 몇군데를 다녀 보려 합니다.
['송파역 1번출입구'] 1:10
2021년 8월 30일 (월) 구름
오늘은 <송파역 1번출입구>에서 출발합니다.
['송파대로' 잠실방향]
<송파역 1번출입구>에서 <잠실> 방향으로 <롯데월드타워>를 바라 보며 5분 정도 진행하면...
['송파사거리'] 1:15
"송파사거리"를 만납니다.
이 사거리에서 우측 <방이동 방향 모퉁이>를 보면...
['송파유래비']
['송파유래비건립취지']
"송파유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양>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던 <한강>의 주요 나룻터 중에 하나인 "송파진 松坡津=송파나루"를
이용하기 위해 넘어야하는 나즈막한 고개가 하나 이 근처에 있었는데,
고개에 소나무가 많아 "송파 松坡=소나무고개"라고 한데서 지명이 유래한다고...
또한 <송파나루> 근처에 살던 270여 가구가 비만 많이 내리면 잠겨 살수 없어 이곳 <소나무고개>로
이주했는데, 지대가 다소 높은 고갯길 주변이다 보니 비가 내려도 걱정이 없어 너무 살기 좋았다고
<송파> 주변을 특히 "가락골 可樂里"라 하였고 <송파=소나무고개>는 <可樂洞>으로 대변되었답니다.
['가락시장사거리'] 1:23
<소나무고개=송파>를 둘러 보고 뒤돌아 다시 <가락시장 사거리>로 가면 우측에 <가락시장>이 있고
좌측 건너편엔 "버섯분수공원"이 있습니다.
['버섯분수공원'] 1:24~1:27
"버섯분수공원"
독특한 버섯모양의 분수대가 눈길을 끌어 구경거리라고 들려 보았습니다.
['버섯분수']
분수가 가동되면 더 좋았을 텐데....
['버섯분수공원']
버섯분수 뒤에는 제법 너른 녹지가 조성되 있었고, 점심식사 후 산책하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송파대로'] 1:28
계속해서 <송파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행하면
['가락시장몰']
"가라시장몰"을 만나며
['비석거리공원' 앞] 1:33
<가락시장몰> 건너편에 관심 가지지 않으면 무심결에 지나치는 <비석거리공원>이 있습니다.
['비석거리공원' 입구] 1:33~1:39
['안내석']
"비석거리공원" 입구에 도착하여 안내석을 살펴보고 올라 가면...
['비석거리공원']
몇백평 되지 않을 조그마한 공원이었는데 가운데에 느티나무가 한그루 우뚝 서 있고
비석 11개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비석]
[공원 안내문]
['비석 안내문']
11개 비석은 모두 <선정비 善政碑>로 이 지역을 다녀간 지방 관리들..즉 요즘 관직으로 하면
市長 군수 쯤 되는 관리들 중에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석이랍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비석거리공원' 출구] 1:39
공원 입구에는 <가락시장.가락시장역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찾기 쉽습니다.
지나다 시간 나면 한번쯤 들려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락시장역3번출입구'] 1:41
['가락시장역 사거리'] 1:44
.
<가락시장역 사거리>로 내려 가면
<서울공항-성남군비행장>에 이착륙하는 군용기들이 수시로 굉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건너편엔 비싼 금싸라기 땅에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며 항상 문이 닫혀있고
지도엔 지명 표기도 없는 곳이 있는데, 평상시 뭐하는 곳인지 궁금했습니다.
사거리를 건너 정문 앞으로 가면....
['중앙전파관리소']
정문으로 가 보니 <중앙전파관리소>라고 하며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대략 궁금증은 풀렸습니다...ㅎㅎ 짐작하시겠죠? 국가정보기관....
['중대로']
['중앙전파관리소']
<가락시장역 사거리>에서 좌회전 하여 <중앙전파관리소> 담장을 따라 <경찰병원> 방향으로 갑니다.
<중앙전파관리소>는 매우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도심 한가운데에 있군요.
앞으로 아파트로 탈바꿈 하면 엄청 인기 있을듯....ㅎ
['경찰병원사거리'] 1:51
['경찰병원']
이어서 "국립경찰병원"을 만나는데, 뒤에 보이는 <가락근린공원>을 둘러 보고 갑니다.
['가락근린공원' 입구] 1:56
<가락근린공원>으로 올라 가는데 제법 높은 동산이더군요.
올라 가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입구] 1:58
<가락근린공원> 정상에 올라 뒤돌아 보면 높이를 가늠할수 있고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경찰병원' 조망]
<경찰병원>이 전체적으로 조망되고
['정자']
정상부에 있는 정자와 운동시설이 주민들의 건강생활을 돕고
[공원길]
['배드민튼장' 조망]
[공원길] 2:06
<가락근린공원>은 많은 운동시설과 산책로가 긴 매우 너른 공원이었습니다.
['옛 성동구치소'] 2:11
<가락근린공원>을 나와 동쪽 <오금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우측에 "옛 성동구치소"가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지은 <동부구치소>로 제소자들을 이전 하고 비어 있던 구치소를 철거하고 있었습니다.
['옛 성동구치소' 담장]
[철거공사중']
<옛 성동구치소> 담장을 따라 <오금역>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구치소의 크기를 짐작 할수 있습니다.
주변 아파트엔 무수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오세훈은 사퇴하라. 구치소를 공원으로 개발하라>등등 이었습니다.
송파주민 대다수 자기들이 뽑은 시장인데도 이젠 자기들 이익에 배치된다고 사퇴하라는 뜻이겠죠?
기존 아파트 주인들은 자기 집 주변에 엄청 큰 공원이 들어 서면 집값이 뛰겠지요? ㅎㅎ
서울시 입장에선 이런 부지를 이용해 아파트를 지어 주거난을 줄일려고 할테고...
['오금역 사거리'] 2:16
<옛 성동구치소>를 지나면 "오금역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건너편 <오금근린공원> 입구에 폭포가 보입니다.
['오금공원 폭포'] 2:18
오늘은 가는 곳 마다 폭포는 가동되지 않고 있군요.
폭포 위 정자로 올라 갑니다.
['오금역2번출입구']
['오금근린공원']
<오금역2번출입구> 옆에 공원 입구가 있습니다
잘 꾸면진 공원길을 잠시 올라 가면...
['오금공원 폭포' 위 정자]
<오금폭포> 위 정자를 조망하고
[공원길]
[이정표] 2:22
공원길을 진행하는데 이정표가 보입니다.
<중앙광장>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배드민튼장']
[지압길]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들이 여기도 많이 있는데
특히 지압길이 매우 길었습니다. 그런데 지압을 위한 말뚝과 돌들이 너무 커 지압은 커녕
신발을 신고도 걷기 어려웠습니다. 거의 장애물 수준이더군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이용한 흔적은 전혀 없더군요. 전시행정의 표본 같았습니다.
['류희림 부부 합장묘'] 2:28
['류복룡 부부 묘']
[안내문]
지압길을 지나면 "류희림-류복룡 묘"가 이 공원의 주인인듯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신선경 묘' 가는 길]
<류희림 묘>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신선경과 류인호 묘"를 만납니다.
['신선경' '류인호' 묘] 2:32
[안내문]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거창 신씨>는 중국 송나라의 "신수 慎修"가 시조인데 고려에 출장 왔다가 주저 앉은 중국인이죠.
사실 <거창>하고는 원래 연고가 전혀 없고 후손이 거창에 내려가 은신하며 살아서 <거창신씨>가
되었는데, 이들은 분명 중국인 인데 고려에 정착하고는 조선시대까지 과거에 150여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여 조선 초기 조선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집안이죠.
대표적 인물이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죠. <중종>의 장인 어른이었지요.
<연산군>의 장인이 <신승선>으로 딸이 <연산군>의 왕비가 된 <폐비 거창신씨>이고 <신수근>의 여동생.
[내림길]
[공원입구]
[공원안내도'와 현위치] 2:37
묘지에서 내려 가면 <오금근린공원>의 <중앙공원>을 만납니다.
['오금동 유래비'] 2:39
[안내문]
<송파도서관> 방향으로 산책로를 잠시 진행하면 "오금동 유래비"를 만나는데
<송파둘레길>을 돌며 여러번 언급한 내용입니다. 한번 더 언급하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는데 경호원들까지 대부분 도망가서
직접 걸어 이 지역을 통과하는데 평시 운동 부족인 <인조>는 "오금이 져려" 이 근처에서 주저 앉았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걷지도 못하는 <인조>를 비아냥 거렸답니다. "오금이 저려 걷지도 못하는 쬬다~~"라고..
<오금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화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답니다.
현재는 <오동나무 梧>와 <가야금 琴>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원]
공원 산책로를 거니는데 이 공원은 매우 큰 공원이었습니다.
[내림길]
['송파도서관']
<송파도서관>으로 내려 가면
['송파도서관'] 2:44
"송파도서관"을 만나며 답사를 마침니다.
이 도서관 앞에는
['인조'와 '서흔남' 동상] 2:45
[안내문]
"인조와 서흔남 동상"이 있습니다.
<인조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14일>
그날의 [인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日晩, 大駕將發, 而太僕人盡散, 內乘李星男, 牽御馬而來. 駕到崇禮門, 聞賊兵已到良鐵坪,
上御南大門樓, 令申景禛結陣于門外. 崔鳴吉請赴虜陣, 以觀變, 遂遣鳴吉, 請成於虜, 以緩其師.
上還從水溝門, 出向南漢山城。 是時, 變出倉卒, 侍臣或有步從者, 城中人父子、兄弟、
夫婦相失, 哭聲震天. 初更後, 大駕到南漢山城.
해가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왕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왕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러 내려 간길은 [서문]에서 [삼전도]로 갔다고 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지만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가 몽진을 하며 [남한산성]으로 올라 갈때엔 어느 길을 이용해
[남한산성]으로 올라 갔는지에 대해선 실록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 때 <한양성>의 <수구문>인 <광희문>을 출발하여 '초경 (밤 9시경)'이 지나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정문이라 할수 있는 [남문]을 통해 올라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인조>가 눈 내리는 가파른 <남한산성>으로 올라 갈때
대부분 아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거의 정설화 되다시피 전해 내려 옵니다.
1636년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갔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인조실록]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살찐 비만의 [인조]를 업고 간다는 것은 무지 힘들었겠죠?
그래서 업혔다 걷다가를 반복했다는데, 현재의 [송파구 오금동] 쯤을 지날 때에는 [인조]가 다리가 아파
주저 앉았는데, 후세의 백성들은 "살찐 임금 인조는 오금이 져려 체면이고 뭐고 주저 앉았다"고
비아냥거리며, 그통에 이 동네 지명이 [오금동]으로 불리워진 사연 중 하나라고 놀려 댓답니다.
[오금동]은 [오동나무 梧]와 [가야금 琴]으로 오동나무가 많아 가야금을 많이 만드는 마을에서
지명이 유래하는데도....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쪽팔리는 도망을 해서 백성들로부터 비아냥을 받은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는건 당연지사...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단숨에 모시고 올라 갔답니다.
윗 사진에서 보는 <인조와 서흔남 동상>이 그날의 그 상황을 조금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무꾼 "서흔남"이 <인조>를 업고 올라 가려는 순간인거죠.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 갈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임금님은 피난하는 것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무릎을 탁 치면서 "너 나보다 낫다"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무엇이던 들어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두말없이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 나뭇꾼이었는데,
<인조>는 보답으로 그에게 '종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관리 사무소와 역사기념관 앞 주차장 가에 있는 '서흔남 묘비']
['서흔남 묘비'] ['인조'가 내린 '서흔남 공적비']
산성안에 들어 가서도 서흔남은 여러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어지자,
남한산성 주변 지리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속여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답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하네요.
[서흔남]은 죽을 때 자기 관 위에 [인조]로 부터 받은 '곤룡포(袞龍袍)'를 올려 달라고 하여
'곤룡포(袞龍袍)'를 덮어 쓰고 죽은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이었답니다.
[인조실록]에도 밀사로 [서흔남]을 내 보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나옵니다.
1637년 1월7일자에는
○城中居徐欣男及僧人斗淸, 應募出去, 持都元帥金自點、黃海兵使李碩達、全羅監司李時昉狀啓而來。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찮은 천민 임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서흔남에게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으며 그 공적비가 바로 위 사진입니다.
이것은 野史가 아니고 正史입니다
[도보여행 실트랙]
오늘 걸은 거리는 5.7km였으며, 1시간 3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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