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  


[소래포구역]    

2016년 11월 27일 (일)      비 약간 흐림 
오늘은 원래 [인천둘레길 8코스 원인재-문학산]을 다녀 오려고 길을 나섯습니다.
인천에 사시는 "구름재등님"과 만나 안내를 받을려고 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특히 안개가 장난이 아니어서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한잔하러 "소래포구"로 갔습니다.
저는 30여년만에 "소래포구"를 찾았는데 엄청나게 변했더군요.
협괘열차가 다니던 "수인선"에는 전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역사도 위용을 자랑하더군요.
  


[수인선]

"수인선"은 1937년에 개통되어 1995년까지 운행되다가 폐쇄되고
2012년에 복선전철로 재탄생되었답니다.
  



[소래역사관-협괘열차]

비린내 나던 포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소래역사관"과 역사관 앞에는 추억의 "협괘열차"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192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립된 '협괘용 증기기관차'랍니다.
이 기관차는 '대관령휴게소'에 전시되 왔으나 2008년에 이곳으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는군요.
  





[소래포구재래시장]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곳은 재래시장 뿐이었습니다.
소래포구재래시장에서 회를 뜨고 해삼 멍개를 곁들여 사서
  



[소래포구]

  포구에 걸터 앉은 "소망횟집"으로 들고 들어가
대낮부터 먹고 마시다가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떳습니다.
자리를 만들어준 "구름재등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림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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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 2022년 6월 28일 (화} 어디서? : 골프존 어느 코스? 인터불고 경산 CC 16번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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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가고 싶다~ 기록적인 무더위가 우리 강산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요즘 시원한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보내 드릴까요? ㅎㅎ 더위에 지쳐 계실 횐님들에게 '파란문'이 선물을 하나 드릴려고 하는데 ...ㅎ 선물이 될려는지... 피서도 못가고, 에어컨도 못켜고 더위와 쌈박질을 하고 사시는 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시원해 지시라고 남태평양 어느 시원한 청정 바닷가로 진주조개잡이를 떠날수 있게 해 드림니다. ㅎ ^.^ 어여 빨리 뱅기 타고 날아 가세요~ 그냥 맘으로만 날라 가도 됩니다.~ ㅎ 별다른 세상사는 생각은 버리시고 오로지 樂園으로 생각하시고 떠나세요. 다만 이런곳도 며칠만 있어야지 오래 살면 한 인생 너무 짧아 여기저기 못가 아깝습니다. 다른 곳에도 파라다이스는 많으니까요. ㅎ 넘 부러워 마시란 얘깁니당~ 넘넘 시원해 쉬기만하면 심심하니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해 보세요~ '진주조개'도 찾으시고... 어여쁜 여인도 만나시고...진짜 진주조개 ㅎ 모든 근심 걱정일랑 벗어 던지고 황홀한 천국의 꿈을 꾸세요~ "나는 행복하다!~" 너무 더워 잠시 '파랑새의 꿈'을 꿔 봤습니다. 곧 가을이 다가 온답니다. 그리고 낙엽은 또 지고...눈 내리는 겨울로 갈겁니다. 여름도 잠깐이겠죠? ㅎ 제가 잘 사용하는 말을 끝으로 전해 드리며 건강한 여름 나시길 기원합니다. "여름엔 춥지 않아 좋고..." "겨울엔 덥지 않아 좋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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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류의 강은, 늙은 강이다
          큰 강의 하구 쪽은 흐려진 시간과 닿아 있고 
          그 강은 느리게 흘러서 순하게 소멸한다
          흐르는 강물 옆에 살면서 여생의 시간이 저와 같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물가 마을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저녁나절을 보낸다
          이제, 시간에 저항할 시간이 없고, 시간을 앞지를 기력이 없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운명 사이에는
          사소한 상호관련도 없다는 또 다른 운명도 보인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저물어서 강가에 나가니
          내 마을의 늙은 강은 증오조차도 마침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비틀거림은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 김 훈 < 밥벌이의 지겨움 > - 중에서
   
          시간이 우릴 누르는지 우리가 시간의 노예가 되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시간을 누를 힘이 소진되었는지
          코로나 소용돌이 속에서 거저 살얼음 언 깜깜한 강을 
          시간은 뒤뚱거리면서도 쏜 화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送舊迎新"을 또 언급하지 않을수 없군요.
          희망의 새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 파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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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효석문화제 9월 6일(일) "휘산회" 정기산행지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있는 "보래봉-회령봉"으로 정한 이유중에 9월 4일(금)부터 9월 14일(월)까지 열리는 "봉평효석문화제"를 참관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보래봉-회령봉" 산행보다 이 기회에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하고 싶어 이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해 볼까요? 그리고 여기에 기술하는 필자의 개인적 글은 오로지 개인적 감상이나 개인적 느낌으로 쓰는 것이니 특별히 의미를 두지 마시고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람니다 江原道平昌郡蓬坪面 봉평은 한자로 蓬坪 이라고 씁니다. 蓬坪 봉 蓬"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봉평"은 "쑥밭"이라는 말이 됩니다. 어떤 연유로 이 지역 이름이 봉평 蓬坪 - 쑥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蕎坪 교평이어야 제격인데... 蕎는 메밀 '교'입니다 이효석의 고향이 우리말로 하자면 "쑥밭"이라는 뜻이 되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라면 이 마을 이름을 살리려면 "쑥대밭 될 때"라고 해야 하는건 아닌지....ㅎㅎ 쑥밭이라~ 이런 이야기는 홍어와 무인도에서나 읽을수 있는 것들입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 효석문화제 행사장] "보래봉-회령봉" 산행을 마치고 "효석문화제 행사장"에 오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차량들로 좁은 시골길은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이곳을 찾으실 분들은 평일을 이용하시고, 대중교통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길 추천드림니다. 주말에 괜히 승용차 몰고와서 주차하는데 한나절 보내지 마시고... [행사장 입구 - 가산공원] 사하라사막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집트는 선조들의 유산 - 피라밋으로 먹고 산다는데... 종이 호랑이가 된 이태리는 왕년의 로마제국 덕택에 그래도 선진국 소릴 들을수 있다는데.. 강원도 산간 오지 평창군 봉평면이라는 조그만 마을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봉평면은 총1,084가구에 총 인구수가 4,800여명이라 합니다. 이런 조그만 마을에 엄청난 차량들과 방문객을 끌어 드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효석 "이 효석"이라고 하는 작가가 태어난 곳이고 그가 쓴 고작 다섯장짜리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10분이면 읽는 작품의 배경이 이곳 봉평이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차량과 방문객을 불러 모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이효석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좀 하자는 ..... 이렇게 말한다고 봉평면민들이 저를 욕하진 않겠죠? 실제 그런거니까... "이 효석"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메밀꽃 필 무렵"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고 훌륭한 것인가? 이제부터 오로지 '파란문'의 개인적 관점에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은 독자의 몫이니 어떻게 감상하던 특별히 시비 걸 필요는 없겠지요 [행사장] '가산공원'이라는 곳에 방문객들이 앉을수 있는 객석을 이렇게 설치해 놨습니다. 이곳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봉평장을 본따 만든 곳이랍니다. "여름 장이란 예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뭇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렇게 여름 봉평장의 파장 때쯤을 비추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공연장] 제가 이곳 행사장을 찾았을 때엔 국악공연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열리고 있는 '가산공원'은 "가산 이효석"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며 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생원'과 '동이' 같은 장돌뱅이들의 지친 여정을 풀던 술집인 '충줏집'이 옆에 있어 다시금 소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떡치기] 얼금뱅이 곰보이며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 학식도 재력도 없고, 결혼도 못해보고 늙어 버린 총각인 '허 생원' (ㅎㅎ "드팀전" 뭔 말인지 모르지요? 친절하게 알려드리면 "포목상점")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어떤 부류의 소설로 생각하십니까?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게 깊이 있게 느끼며 감상하지는 않을겁니다. '낭만주의'소설이다. '자연주의'소설이다. 뭐 이런 저런 그럴듯한 유식한 척을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이 당시로는 획기적인 '에로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에서 억눌려 온 "性"을 주제로 하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연애"라는 단어가 새로이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연애"를 소재로 너나 나나 할것없이 소설로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연애"가 "문학"이 될수 있느냐로 논쟁도 많았던 때입니다.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도 에로 소설의 대부로 잘못 알려진 방인근과 같은 내용의 에로 소설을 썼는데, 방인근은 월북했다고 저속한 인물로 만들어 지고,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등은 순수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는지..... 사춘기 시절에 몰래 많이 읽은 방인근선생의 소설들과 '감자', '봄봄봄'등과 뭐가 다른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다섯장 짜리 단편 소설...... 얼금뱅이 왼손잡이 학식도 재력도 없는 늙은 장돌뱅이 허생원이 일평생 딱 한번 물레방앗간에서 경험한 "혼외 정사" 그리고 그 딱 한번의 쌕스 SEX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얼금뱅이 허생원 물론 이효석선생의 문학성이라던가 이런 저런것들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아주 단순한 "쌕스의 추억"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저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실제 이효석선생도 늙은 곰보 장돌뱅이 허생원의 삶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속성인 애정"을 그릴려고 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나귀] 이 봉평 행사장에 살아있는 당나귀 한마리를 메어 놨습니다. 당연히 "메밀꽃 필 무렵"에 주인공과 버금가는 역활로 나오는 "당나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효석선생은 이 "나귀"를 통해 동물이나 인간이나 性慾은 같은 것이라고 빗대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도 동물과 인간의 욕정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효석 문학관과 생가 가는 길]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이곳 봉평에서 태어나 지금의 평창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 특차로 진학합니다 그리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합니다. (당시의 학교명을 지금의 학교명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려서 부터 공부에는 '천재'였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이곳 봉평에서는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도 평창에 가서 하숙을 했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학창생활을 했고, 졸업후에는 함경북도 경성과, 평양에서 살다가 짧은 36년의 생을 마감하고 멀리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이효석선생의 프로필을 소개하려면 간단합니다 학창시절과 함경북도 경성에서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4년정도 생활한것과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6~7년정도 생활한것이 전부입니다. [징검다리] '메밀꽃 필 무렵'에서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우스꽝스러운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니 밤의 물은 뼈를 찔렀다." 이 개울을 건너며 허생원은 '동이'가 혹시 아들이 아닐까 생각되어 '동이'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지요 [섶다리] 이효석의 사생활을 조금 언급해 볼까요? 玄民 유진오선생 아시지요? 고려대 총장, 신민당 당수, 헌법 기초위원..이렇게들 주로 아시죠? 이양반 유명한 文學人입니다. 시인이자 수필-소설가 제일 유명한 소설은 '김강사와 T교수'로 생각되며, 그외 수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동료인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노천명 시인의 스캔들 이야기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쓰기도 했지요 우리나라 법대생들은 대부분 유진오교수의 '헌법이론과 실제'라는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친일파'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양반의 신상에 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이효석과 가장 친한 친구여서 서로의 작품 속에서 서로를 투영하고 있고, 특히 이효석의 마지막 애인인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기 깨문입니다 명문대 출신이며 교수이며 화려한 작가가 된 "이효석"을 암암리에 노리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가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였습니다. [다리를 건너 와 뒤 돌아 본 행사장]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유명한 이야기 - "왕수복"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을수가 없군요 남인수의 연인기도 했으며 국민가수이기도 했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당시의 최고 인기 가수 였던 선우일선, 전옥 보다도 더 인기 있었던 가수가 누구 인지 아십니까? 1935년에 종합연예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당당히 일등을 한 가수가 다름아닌 "왕수복"이었습니다. 이 유명했던 가수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없는 이유는 이 미모의 기생 출신 여가수가 이효석과 마지막 연인 동거 관계를 가진후 이효석이 죽자, 곧바로 '사슴'을 쓴 시인 '노천명'의 꿈속의 사랑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재빨리 결혼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국으로 월북했기에 이 여가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도 금기시 되 왔으므로 "왕수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분단 국가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들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왕수복의 일생은 또 하나의 다시 쓰기 힘든 드라마였으니 꼭 이 여인의 일생을 최근 알려진 것들을 합쳐서 제 블로그 애독자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기생 - 인기 대중 가수 - 성악가 - 이효석의 마지막 연인 - 월북 -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결혼 - 북한 최고 인민가수 - 애국열사능에 영면 왕수복은 평남 강동에서 1917년에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명륜여자보통공립학교'를 다니다 3학년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여 소리와 거문고를 배워 기생이 되었습니다 노래에 천재적 소질을 보이던 왕수복은 1933년 열여섯살의 나이에 당시 최고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 스카웃되어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로 탄생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난영 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유행가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때에 자신의 최대 컴플랙스인 '기생출신 대중가요 가수'라는 딱지를 때기 위해 새로운 음악세계인 '서양 음악 - 성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변신하여 돌아 온 왕수복은 주로 우리나라 민요를 성악으로 불렀답니다 북한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털어 최고의 민족혼 무용가로 지목되는 '최승희'가 민족 무용을 살리는것과 같이 우리나라 민요를 위해 몸바치겠다고 한 '왕수복' 북한으로 월북한 그녀는 공훈배우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국민가수가 되었으며 1997년 여든의 나이에 리싸이틀 공연을 하고,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은 것이 국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2003년 여든여섯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고 북한 애국열사능에 뭍혔다고합니다 그녀가 北으로 가지 않았다면....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수복은 33년부터 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곡 가운데서 왕수복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이란 노래 한곡 소개하겠습니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메밀꽃밭 테마 포토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많은 사람들이 메밀꽃을 보고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한대목인 "소금을 뿌린듯"이라는 대목 하나만 오로지 기억하며 전체를 기억하는듯이 말합니다. 사실 "소금을 뿌린 듯이"보다는 그 메밀꽃이 달빛에 비치는 모습이 소금을 뿌린듯하여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말이 더 강조 되는 대목인데, "소금"을 너무 강조합니다 앞으로는 윗 글을 전체적으로 얘기하시고 너무 "소금"은 뿌리지 마세요. ㅎㅎ [메밀꽃밭] 현민 유진오가 쓴 「마지막 날의 효석」에는 이효석과 왕수복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왕수복과의 관계를 자전전 소설로 남겼는데 "풀닢"이라는 소설입니다.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가수 왕수복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기생출신'이 무지막지한 컴플랙스였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전력인 '기생 출신'에서 당당히 벗어 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최고의 명문대 출신인 교수이자 작가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명 작가이자 교수와 함께 살아 천민에서 벗어 나고 싶어 한 가련한 여인 - 왕수복 그녀는 집요하게 이효석을 꼬셨습니다. 나이 차이가 십여년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이효석은 조강지처 이경원여사와 사별하고 장남도 죽어 여러모로 방황하고 있었으니 왕수복은 찬스를 잡았던 것입니다. 결국 두 딸과 차남이 함께 살고 있는 이효석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이효석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요절하면서 결혼식까지는 올리지 못했지만 왕수복은 그의 꿈을 반쯤은 이루고 이효석의 집을 떠납니다. 이효석이 죽자 왕수복은 재빨리 다른 남자를 꼬십니다. 교수를 무지 원했거던요.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를 쓴 新女性 시인 "노천명"의 남편같은 애인이었던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김광진을 빼앗아 결혼을 합니다. (김광진은 노천명과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와 이혼까지 한 사이였습니다) 동경제대에서 공산주의 경제학을 전공하여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북으로 가 김일성의 경제 정책을 진두 지휘한 김광진 교수의 품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생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대단한 집념의 여인~ [인기 절정을 누리던 1933년에 위장약 "노르모산" 광고에 등장한 "왕수복"] 어때요? 왕수복 이쁜가요? "노르모산"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옆에 글자는 왕수복 자필이라고 합니다 미인도 시대적으로 다른가 봅니다만, 미인이라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기 보다는 최고 인기 여가수여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고 봐야겠죠?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거 이런데 올리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습니다 시대가 바꿔져 '왕수복'이도 제 블로그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리는군요 ㅎㅎ [메밀꽃밭 옆 흥정천과 산책로] 당시 이효석과 친했던 작가들 중에는 "기생과의 사랑"을 나눈 작가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몇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학교 선배님이기도한 "봄봄봄"의 김유정 <봄봄봄>의 천재작가 김유정은 기생 '박녹주'를 열렬히 짝사랑했답니다. 명기명창으로 송만갑의 사사를 받고 각종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유명인이었던 박녹주는 자신보다 연하인데다 학생인 김유정을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김유정은 매일 한통씩 편지를 보내며 안달했답니다. ‘간혹 길가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소…’, ‘목욕을 하고 오는 자태는 정말 이쁘게 보였노라…’,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결국 김유정은 3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됐고 박녹주에게는 부음과 함께 ‘니가 죽였지’라는 김유정 친구들의 저주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코스모스와 메밀꽃] '금홍이'와 '날개'를 쓴 '이상' “십팔가구에 각기 밸너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안해는 특히 아름다운 한 딸기의 꽃으로 이 함석 지붕 밑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이상의 <지주회시>에서- 1935년 초 금홍이의 두 번째 가출 이전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이상이 금홍이를 염두해둔 묘사입니다. 배천온천에서 만난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관계는 2년 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금홍이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본격 교제한 첫 여인이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여인이었으며, 이상이 유일하게 ‘안해’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 의지대로 작용하지 않아 속을 태웠던 요부"로서의 여성상을 그의 작품에 드리웠습니다. 이상의 불멸의 소설 "날개"에서도 몸팔러 나가는 아내를 그리고 있는데.... 이상은 종로 우미관 뒤에서 금홍이와 동거를 하며, 파격적인 상호의 "식스나인 69"라는 다방도 했지요 이효석도 커피 중독자였으며, 왕수복의 언니가 하던 평양의 "방가로"라는 다방에서 왕수복과 데이트를 많이해 평양숭실전문학교 학생들로부터 핀잔을 많이 받기도했습니다 [물레방앗간 안내 표지석]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여.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이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야.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팔자에 있었나 부지." 허생원이 물레방앗간으로 들어 가게 된 동기와 성 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쓰일 때 쯤에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엔 너나 나나 할것없이 '연애'를 소재로 글을 써야 문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였습니다. 남자 여자 文人이 따로 없이 "자유연애"가 소재로 다루어 지던 시대입니다. 이효석도 절묘한 필치로 "혼외 정사"를 소재로 "메밀꽃 필 무렵"을 썻습니다. 여러분~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이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할까요? [물레방앗간] 수많은 관광객들이 물레방앗간을 서성입니다. 제일 관심있는 장소인듯합니다. ㅎㅎ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 물레방앗간에서 정사를 꿈 꿀 것입니다. 다만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자제할 뿐.... 물레방아 돌아 가는 소리때문에 거칠은 숨소리는 무마 될것이고 쿵덕쿵~~쿵덕~ 인간의 속성은 잘난 놈 못난 년, 가진 년 없는 놈, 불문하고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고상한척 하는 인간들이 더 밝힌다고 "X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고 하는 속담도있습니다 [물레방앗간 내부] "메릴꽃 필 무렵"의 하일라이트.... "아무렴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는 아끼는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중략)....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허생원의 첫경험 [효석문학관 올라 가는 길] '효석문학관'은 '물레방앗간' 뒤로 산길을 따라 올라 가야합니다. [효석문학관] 산 중턱에 "이효석문학관"이 있었습니다. 이효석은 공산주의 문학가들의 모임인 '동반자 작가'에 몸담기도 했지요 하지만 곧 휘문출신 문인들의 주축인 정지용선생등의 권유로 탈퇴하고 '구인회'에 참여하여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순수문학의 글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박동락선생 추모비] 이효석문학관을 짓는데 크게 공헌하고, 이효석 연구에 전념한 '박동락선생기념비'가 있습니다 [효석문학관 본관] 문학관에는 이효석과 관련된 692개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뒷동산에 올라 촬영한 '효석문학관 전경'] [이효석 동상] 이효석은 스스로 "자신은 300~400대의 주사를 맞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짤라 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 특정 부위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무나 짧은 인생에 병마와도 싸우며 살았으니 어찌 가엽다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최종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 유진오를 불러 옆에 두고, 아버지와 왕수복이 지켜 보는 가운데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함북 경성공업학교 교사 시절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이 그의 문학의 절정기여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 할수 있었답니다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평양에서 쓴것입니다. [이효석과 함께] 글자 나부랭이를 쓰는 놈이라고 비록 동상이지만 '이효석'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의 이효석 나이로 치자면 저의 아들뻘 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이효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을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동이'와 당나귀] "왕수복"에 대한 이야기 뽀나스로 하나 더해 드리면 왕수복의 스켄들 중에는 당시 최고의 조선 갑부인 화신백화점 사장인 "박흥식"도 있었습니다 [충줏집] '가산공원' - 옛 봉평장터 옆에는 "충주집"이 있는데 친구들은 "효석문화제"엔 관심이 없고 메밀전에 수육, 동동주와 소주에 더 관심이 있는듯 일찍이 이곳에서 한잔들 얼큰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곳 저곳 돌아 다니다가 돌아와 합세해 여기서 메밀전에 수육, 그리고 쇠주에 메밀막국수를 먹고 돌아 왔습니다.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애증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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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기도 바람에게 부드러운 팔을 허락하소서 허리 약한 코스모스 넘어지지 않게 하시어 가장 작은 햇살도 꽃잎에 내려앉게 하소서 맑게 고이는 햇살음성이 들판 구석진 곳까지 고루 흐르게 하시어 파랗게 떠는 구절초 입술에도 바람 한 점에 어깨를 흔들며 오늘이 순조롭게 하소서 바람에게 커다란 귀를 주소서 나뭇가지는 악기를 꺼내 들고 잎사귀는 푸른 박수를 아끼지 않게 하시어 바람이 가을 음악에 취하여 몸을 흔드는 동안 사과나무에는 노을의 파편을 노래하게 하시고 포도나무는 이슬방울을 주렁주렁 달게 하소서 바람에게 작은 입술을 열게 하소서 집이 없는 자에게 바람이 자는 곳을 나누게 하시고 어미 없는 자에게 바람의 품속으로 들게 하시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그 옛날 하늘이 열리고 높은 곳에서 바람이 내려와 만인이 건강을 얻던 날을 전하게 하소서 구월에는 가을바람이 푸르게 하소서 - 유 상 옥 - P.S. : 코로나19 사태와 긴 장마, 그리고 태풍등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 아들 결혼식을 무사히 치뤘습니다. 모두 염려 해 주신 여러분들의 덕이라 생각하며 축하와 관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림니다.

● (서울 삼성병원에 있는 것을 복사함) *


*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것은 핵 전쟁이 아니라, ---- 바이러스다.
한 달도 안 돼, ---7만 여 명이 죽을 줄이야.
세계 인구가--- 다 마스크를 쓸 줄이야.
미국, 중국 등 -열강의 피해가--더 클 줄이야.

*내일을 알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스님, 신부, 목사, 예언가, 무속인 등 아무도 몰랐다.

< 인간 사회의 변화 > ;
하찮은 것에-- 맥없이 무너지는--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전쟁이나 다툼도--- 중지시켰다.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사양길에 들었다.
사회보장, 유류가격, 투자도 영향을 미쳤다.
돈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았다.

* 인간이 멈추니, ---지구가--- 살아났다.
공기가 깨끗해 졌다.
가정과 가족이 소중한 것을 알았다.
입에 재갈을 물리니, 과묵해 졌다.
모두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호주도 안전지대가 아닌것을 알았다.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의 뜻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자.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것이다.
(The debil is in the detail.)
< detail은-- 세부사항-- 이라는 뜻 >

*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사람이 숨을 못 쉬면, 바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숨쉬는 폐를 공격합니다.
맛도 냄새도 못 맡게 하고, 설사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을 마비 시킵니다.

* 사람은 발이 달린 짐승 아닙니까?
그런데 집에만 있으라고 합니다.
애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른들 마저--- 답답하고 속이 터집니다.

코로나는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뒤에서 누군가 조정하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걸리기 때문입니다.
오만은 인종간 국가간 차별을 가져왔습니다.

* 미국 트럼프나, 일본 아베를 보세요.
오만의 극치였지 않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오만의 댓가를 받을 것입니다.
환경 파괴는 되돌릴 수 없는 자연의 재앙입니다.

청정지역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동•식물들은 인간이 죽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 이란의 성직자, 영국의 황태자와 총리,
독일의 운동선수, 헐리우드 배우, 요양원 노인, 노숙자, 6개월된 갓난아기 등등.
신분. 나이. 인종. 성별, 직업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구분하지 않고, 평등하게 공격합니다.

* 국경과 여권?
국경은 인간의 탐욕으로 만든 것입니다.
공기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중국의 우한 폐렴이 남미 끝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여권은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여객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항공산업이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 건강이 우선입니다.
공장에서 만든 음식을 먹고, 화학물질에 오염된 음료수를 마시면서,
우리는 몸을 무시했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병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 코로나는---건강이 제일이라고 알려 줍니다.
코로나는 ---서로 돕고 살라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병이 나면, 강원도 청평의 산림욕이 무슨 소용입니까?
휴지 사재기가 코로나를 없게 해 주지 않습니다.
급한 대로 충분히 먹고, 건강을 챙긴 다음에 약을 드셔야 합니다.
코로나는 먹을 것을 챙기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의지가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참고, 견디세요.
그 길 밖엔 없습니다.

* 서로 도우며, 나누고, 협력하고, 지원하며 살아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코로나 극복은,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는 ---의지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반성을 모르면, 희망이 없습니다.
코로나는 인간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해 보라고 합니다.

역사 공부는 왜 합니까?
일기는 왜 씁니까?

지난 일을 알아야,
실수를 되풀이 안합니다.

* 코로나를--- <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백신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나갈 것입니다.
코로나가 지나간 뒤엔,
평온이 온다는 것은---누구나 믿을 것입니다.
코로나는 ---주기마다 생기는 질병입니다.
주기의 한 단계이니, ---공황에 빠질 일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곳은- 가족과 집입니다.

* 요양원 환자에게 물어보니,
집에 가서 마누라가 차려주는 음식을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격리된 사람은 --누구나 집에 가고 싶어합니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크루즈 여행, 그만하고 교회에 매달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합니다.
그리고, 홈 스위트 홈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코로나는 ---인간의 잘못을 ----바로잡아 줍니다.
코로나가--- 인간에게 온 것은 잊고, 살아 온 교훈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것,
모두를 상기하자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거대한 재앙으로 보나,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역사라 할지라도 곡절이 있습니다.
모든 판단, 당신의 생각에 맡깁니다.

* 아울러
이번 코로나 사태가 가져 올 앞으로의 인문 • 사회적인 부문에서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의---- 예측 입니다.
* 위생적인 --생활이--- 몸에 밸 것이다.
* 디지털 경제가 늘어나, 핀테크, 무인 점포가 증가할 것이다.
* 유통은 오프라인에서-- 빠른 속도로,- --온라인으로 재편될 것이다.
* 대형 교회는 몰락할 것이고, 탈 종교화는 가속할 것이다.
* 배달 사업은 번창하고, 음식 문화는 크게 바뀔 것이다.
* 자동화는 생활화 되고, 경제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 기업들은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투자 분산 정책이 늘어날 것이다.
* 대중교통 이용이 감소하고, 교통 체증이 증가할 것이다.
* 공연장, 찜질방, 영화관, 노래방, 스포츠,--- 단체 여행 등은 --사양길에 들 것이다.
* 술집보다 --골프장, 등산 등 야외 스포츠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 미래 예측은
꼭 읽어서 삶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수염 생과 사의 그 어디쯤에서 끝내 삶으로 끌어오지 못했던 환자들의 마지막 면도를 준비할 때면 늘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곤 했다. 아버지처럼 수염으로 뒤덮인 그들의 얼굴을 아주 오래도록 정성을 다해 면도해주었다. 어릴 적 어느 아침, 면도하는 아버지를 잠이 덜 깬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물어보았다. "아빠 뭐해?" "뭐하긴, 면도하지." "면도는 왜 해?" "수염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거든." - 김현아의《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중에서 -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지난날의 성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술 잘 하던 사람만이 이름을 남겼네…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 버리리라.”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장진주(將進酒)’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뜻을 얻었을 때 즐겨야 하므로…마셨다 하면 300잔은 마셔야 한다’면서 풍류남아의 호방한 기백을 토해냈다.

          그러나 한자 ‘술잔 치(치)’는 ‘위태로울 위(危)’와 비슷하고, ‘취할 취(醉)’에는 ‘술 유(酉)’ 변에 ‘죽을 졸(卒)’자가 붙어있다.

          술잔에 위태로움이 있고, 술에 죽음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임금과 신하들의 술자리라면 어떨까. 심심찮게 죽음의 향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서 ‘역린’을 건드려 군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해서 평소에도

          파악하기 어려운 ‘군주의 역린’을 어떻게 취중에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신정승! 구정승!” 아재개그로 재상들을 골탕먹인 세조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를 싫어한다”면서 소주 한 잔 정도만 겨우 마셨던(<세종실록> 1422년 5월26일) 세종 같은 군주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간 술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예컨대 세조는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들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을 불러 수시로 주연을 베풀었다.


          <신윤복필 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 중 ‘유곽쟁웅(遊廓爭雄)’. 유흥가에서 만취한 사내들의 몸싸움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다. 싸움의 당사자들은 갓을 벗어던지고 옷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했고, 별감이 가운데에서 이를 말리고 있다. 화면오른쪽 아래에는 두 동강이 난 갓을 챙기며 난감해 하는 이가 보인다. 유곽 앞에 서 있는 기녀는 장죽을 물고 팔장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필 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 중 ‘유곽쟁웅(遊廓爭雄)’.

          유흥가에서 만취한 사내들의 몸싸움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다.

          싸움의 당사자들은 갓을 벗어던지고 옷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했고, 별감이 가운데에서 이를 말리고 있다.

          화면오른쪽 아래에는 두 동강이 난 갓을 챙기며 난감해 하는 이가 보인다.

          유곽 앞에 서 있는 기녀는 장죽을 물고 팔장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세조와 신숙주·구치관의 술자리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463년(세조 9년) 세조는 영의정이던 신숙주(1417~1475)와 새롭게 우의정이 된 구치관(1406~1470),

          두 사람을 내전에 마련된 술자리에 불렀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내리겠다”면서 운을 떼면서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틀렸다.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구치관)을 부른 것”이라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이번에는 ‘구정승!’이라 했다. 이에 구치관이 “예”라고 답하자 세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으면서 “틀렸다.

          나는 옛 구(舊)자 구정승(신숙주)을 불렀다”면서 역시 구치관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다시 ‘구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틀렸다, 이번에는 내가 구정승(구치관)을 불렀다”면서 다시 신숙주에게 벌주를 하사했다.

          이어 세조가 ‘신정승’ ‘구정승’을 교대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짐짓 꾸짖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벌주를 내렸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 두 정승이 만취하자 세조는 크게 웃었다. 세조가 싱겁기 이를데없는 ‘아재개그’로 정승들을 곯린 것이다.


          송강 정철(1536~1593년)의 은 술잔. 선조가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탄핵을 받은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잔 석 잔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 늘려 사발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함부로 두드려 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송강 정철(1536~1593년)의 은 술잔. 선조가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탄핵을 받은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잔 석 잔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 늘려 사발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함부로 두드려 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정인지의 ‘너’ 사건

          세조의 술자리 일화 중 백미는 역시 정인지(1396~1478)의 ‘너’ 사건일 것이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세종~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술만 마시면 하늘같은 임금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금(세조·1417년생) 보다 21살 연상이었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1458년(세조 4년) 9월 15일 취중 막말 사건이 터진다. 정인지가 왕세자와 종친, 의정부, 육조 판서 이상이 참여한

          양로연에서 세조 임금에게 ‘너’라고 지칭한 것이다. 17일자 <세조실록>은 정인지의 막말을 직접 들은 세조의 증언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 글쎄, 정인지가 ‘나(予)’를 ‘너(汝)’라고 칭하고는(麟趾與予稱爾汝曰)

          ‘(네가) 그같이 하는 것을 나는 모두 취하지 않겠다(若之所爲 皆吾不取)고 했네”.

          ‘나(정인지)는 네(세조)가 한 말을 모두 듣지 않겠다’는 것이니 임금을 능멸한 죄, 즉 불경죄에 해당됐다.

          세조는 “술에 취하면 본성이 드러난다는 옛말이 있지 않느냐”면서 “정인지의 말이 너무 방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발맞춰 종친과 의정부, 육조는 물론 대간들이 벌떼처럼 나서 “정인지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단종 복위 사건 때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한) 성삼문과 다를 바 없는 역신(逆臣)의 막말”이라고 탄핵했다.

          하지만 세조는 “정인지가 취중(醉中)에 한 말은 모두 고구(故舊·엣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면서 “정인지는 지금 나라 일을 맡아 보는 대신도 아니고 노쇠하고 쓸모없는 일개 유생일 뿐”이라고 두둔해주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취중 막말은 한번이 아니었다.

          1458년(세조 4년) 2월12일 열린 공신연에서도 세조를 향한 불경한 취중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너’ 사건이 일어난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459년(세조 5년) 1월19일의 연회와,

          다시 7개월 뒤인 8월 1일의 내전 술자리에서도 ‘임금에게 불경한 언사’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탄핵됐다.

          세조는 그때마다 “그게 정인지의 술버릇인데 어찌 문책하겠느냐”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1719년(숙종 45년) 숙종(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를 그린 <기사계첩도> 중 ‘경연당석연도’. 임금들은 군신간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때때로 충성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19년(숙종 45년) 숙종(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를 그린 <기사계첩도> 중 ‘경연당석연도’.

          임금들은 군신간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때때로 충성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금의 팔 비튼 신숙주

          비교적 이렇게 술자리 실수에 너그러웠던 세조에게도 ‘역린’은 있었다.

          세조 역시 때때로 마음을 풀어놓는 술자리를 신료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리로 여겼다.

          그러니 임금과의 술자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였다.

          예컨대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역대 이상적인 군신의 상징인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태종의 위징’이라 칭했다. 군신관계를 떠나서도 두 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였다.

          어느날 연회에서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면서 “경(신숙주)도 내 팔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역시 인사불성이 된 신숙주는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 비튼 셈이 됐다.

          세조가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세조가 예종에게 “괜찮다”면서 흥을 깨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1415~1487)는 술자리가 파한 뒤 신숙주의 집에 청지기를 보내 신신당부했다.

          “범옹(신숙주의 자)! 자네는 평소 만취해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등불을 켜고 책을 본 뒤 잠자리에 드는 습성이 있지.

          그러나 오늘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네. 곧바로 불끄고 잠자리에 들게.”

          과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책을 들춰보던 신숙주는 한명회의 전언을 듣고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과연 세조가 한밤중에 넌지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집에 가보라”고 지시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침수에 들었다.

          (<소문쇄록>)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임금의 팔을 비튼게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오래 해먹었느니 그만 물러나라’는 공신

          이런 판국인데 술자리에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면 무사했겠는가.

          1466년(세조 12년) 6월8일 세조는 평안도절제사로 근무하다가 돌아온 양정(?~1466년)을 위한 위로연을 베풀었다.

          양정은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이었지만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했던터라 인사불만이 컸다.

          연회에서 술에 취한 양정은 “전하는 이제 편히 쉬셔야 할 때”라고 폭탄선언했다.

          세조가 재차삼차 “나보고 물러나라는 거냐”고 물었지만 양정은 “신의 마음도, 민심도 그렇다”고 했다.

          세조가 다시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는 물론이고, 경(卿·양정)도 죽는다면 나랏일은 누가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양정은 “차차(次次·차례차례)로 있게 될 것입니다”라 꼬박꼬박 말대답했다.

          세조가 “어서 상서원(어보 담당관청)에서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양위소동을 벌이자

          대소 신료가 벌벌 떨며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정은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상탑) 아래 꼿꼿이 앉아

          “왜 어명을 받들지 않느냐. 승지들은 빨리 옥새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이쯤되면 취중진담이었다.

          결국 양정은 임금에게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죄로 참수됐다.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승정원 일기 사초’. 술자리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실수 때문에 가문이 멸문의 지경에 빠졌다가 중종반정 이후 겨우 회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승정원 일기 사초’.

          술자리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실수 때문에 가문이 멸문의 지경에 빠졌다가 중종반정 이후 겨우 회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술 취해 소매 속 귤을 떨어뜨린 신하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은 증조할아버지(세종)를 빼닮아 학문을 워낙 좋아했다.

          <용재총화>는 “성종은 홍문관에서 숙직하던 선비들을 불러 학문을 토론하고 편복(평상복)으로 마주 앉아 촛불 하나만을

          켠채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성종과 성희안(1461~1513)의 일화가 유명하다.

          성종과 술을 마시던 홍문관 정자(정9품) 성희안은 술상에 올려져있던 감자(柑子·밀감) 10여개를 소매 속에 넣고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내시가 강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일이 떨어졌다. 어전에서 과일이 이리저리

          흩어지져 터지고…. 시쳇말로 ‘갑분싸’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튿날 밀감 한 쟁반을 홍문관에 내리면서 “어제 강희안이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과일이 쏟아졌으니 지금 다시 내려준다”고 했다. 죽을 죄를 졌다고 여긴 강희안은

           “이 은혜를 죽음으로 갚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종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종실 중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큰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져 산산조각 냈다”고 전한다.

          <오산설림>은 “이런 종실의 행동은 성종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은연 중 간하는 뜻이었고,

          임금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했다.

          허엽(1517~1580)의 <전언왕행록>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연회를 즐겨 베풀었다”고 기록하면서 일침을 놓았다.

          “혹자는 ‘태평성대라면 모르되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산군이 아버지를 닮아 술자리를 즐겼고, 그 때문에 정사를 그르쳤다는 논평이다.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제1404호).1450년(세종 32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 예겸과 치열한 시문 대결을 펼친 뒤 시문의 내용을 두루마리로 엮은 것이다. 이중 정인지는 세종~성종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는데,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는 등 여러차례 불경죄를 저질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제1404호).1450년(세종 32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 예겸과 치열한 시문 대결을 펼친 뒤 시문의 내용을 두루마리로 엮은 것이다.

          이중 정인지는 세종~성종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는데,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는 등 여러차례 불경죄를 저질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취중 발령을 그대로 실행한 연산군

          물론 연산군도 나름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즐긴 적이 있다.

          1503년(연산군 9년) 11월 21일 창경궁 내전에서 연산군과 대신들이 군신의 예를 잊고 광란의 술자리를 벌였다.

          연산군은 이날 스스로 북을 쳐 노래하고, 더러는 손으로 대신들의 사모를 벗겨 머리털을 움켜쥐고 희롱하며 욕보이기도 했다.

          영의정 성준(1436~1504)과 좌의정 이극균(1437~1504)에게 어의(御衣)까지 하사하여 직접 입혔고,

          참의 한형윤(1470~1532)에게는 신발까지 벗어주면서 “너를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또 김감(1466~1509)에게도 “너에게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다.

          이때 좌의정 이극균은 연산군에 하사한 어의에 ‘오바이트’까지 하는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취중실수를 탓했다.

          “임금의 패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역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면서 “대신들 보기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연산군은 그러면서 “내가 어제 한형윤, 김감에게 낸 취중발령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약속까지 했다.

          <연산군일기>는 “(어젯밤 광란의 파티에서 일어난 불상사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대죄를 청하던)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신숙주와 중국사신 예겸이 나눈 시문. 신숙주는 세조가 ‘촉 선주의 제갈공명이자, 당 태종의 위징’이라 일컬을만큼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신숙주도 술자리에서는 때때로 충성을 시험받는 신하에 불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숙주와 중국사신 예겸이 나눈 시문.

          신숙주는 세조가 ‘촉 선주의 제갈공명이자, 당 태종의 위징’이라 일컬을만큼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신숙주도 술자리에서는 때때로 충성을 시험받는 신하에 불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잔을 떨어뜨린 예조판서

          이 대목에 이르러 필자는 군주, 아니 연산군의 죽 끓는듯한 변덕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은 분명 1503년 11월 군신간 벌인 질탕한 광란의 파티를 두고 ‘임금인 나의 패덕’이라 했다.

          그런데 그보다 두 달 전인 9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사건인가. 9월11일의 양로연에서 연산군과 신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실 때 예조판서 이세좌(1445~1504)가 그만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양로연이 끝난 뒤 연산군은 “오늘 이세좌가 과인에게 올리던 술잔을 떨어뜨려 내 옷까지 적셨다”면서

           “이세좌를 국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내 옷은 물론이고 어좌 위에도 흘러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느니,

          “예를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그럴 수 있냐”느니 하며 트집을 잡았다.

          술자리 실수 치고는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이세좌는 곧 파직됐다.(15일) 이때만 해도 이세좌와 그의 동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세좌는 의금부에서 “몸이 뚱뚱하고 행동이 느려서 너무 조심하다가 술잔을 엎지르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원로 재상들도 이세좌를 적극 변호했다.

          “이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성상의 위엄이 황공스러워 자기 딴에는 빨리 마시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세좌가 연회가 끝난 뒤 “내가 평상시 술을 못마시는데 오늘은 성상께서 돌리는 술잔을 다 받아 마셨다”고 자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다 웃었다”는 것이었다.

          원로 재상들은 “이세좌가 일부러 엎질렀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겠냐”고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의정부와 육조, 한성부 당상들이 불러

          “(59살인 이세좌가) 나이 늙은 대신이 어린 임금(28살 연산군)이라고 우습게 여긴 것”이라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다.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이세좌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도 탄핵하지 않는다.

          이는 이세좌의 아들 이수의가 한림이고, 이수정이 홍문관원이기 때문에 무서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연산군의 명분은 군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무렴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한림(예문관 검열 정9품)과 홍문관 수찬(정6품) 따위가 무서워 그 아비(이세좌)의 죄를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자리 실수가 멸문의 지경까지

          연산군은 왜 ‘이세좌 가문의 세력’ 운운했을까.

          이유가 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 으뜸”이라고 했다.

          이세좌의 ‘광주 이씨’ 가문은 세조~성종까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고 할만큼 번성했다.

          8명의 광주 이씨 ‘극’자 돌림이 영의정에서 장차관 벼슬에 올라 조정회의를 쥐락펴락했다는 것이다.

          이극배(영의정·1422~1495)·극감(형조판서·1423~1465)·극증(영의정·1431~1494)·극돈(이조판서·1435~1503)·

          극균(좌의정·1437~1504), 극규(대사간·?~?), 극기(예공조참판·대사헌·?~1489)·극견(좌통례공) 등이다.

          당시 의정부 사인(정4품) 이수형(?~1504)과 홍문관 수찬(정6품) 이수정(1477~1504), 예문관 검열(정 9품)

          이수의(?~1504) 등은 이극감의 아들인 이세좌의 자녀들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술자리 실수를 빌미삼아

          광주 이씨 가문을 손볼 생각을 했다.

          결국 이세좌와 그 자녀들은 물론 유일하게 남아있던 ‘극’ 자 돌림의 좌의정 이극균도 “조카(이세좌)의 죄는

          ‘큰 불경(大不敬)’은 아닌 ‘불경’이라고 변호했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5월6일자는 “연산군은 (이씨) 종친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세좌와 그의 자식은 물론 가문까지 씨를 말리려 했던 의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세좌가 연산군에게 찍혀 죽임을 당한 다른 이유도 있다.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된 것이다.

          이세좌는 1482년(성종 13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1482)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결의 명을 받았다.

          술자리 실수에서 비롯된 이세좌와 가문의 수난은 극에 달한다.

          갑자사화가 마무리된 뒤 1년 6개월이 지난 뒤인 1505년(연산군 11년) 10월7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는

          ‘간흉의 괴수로서 임금을 능멸했고(魁兇陵君)’, 이극균에게는 ‘포악하고 간사하여 임금을 능멸했다(桀힐陵君)’는 죄목을 달았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시신을 파내어 토막내어 사방에 돌리고 그 머리에 ‘찌’(요즘의 포스트잇)를 써붙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이세좌는 물론 삼촌인 이극균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의 형벌까지 내렸다.

          ■술에 취하면 황제도 없다지만…

          어떤가.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같은 임금의 술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떤 술자리(1503년 9월 11일)에서는 실수로 술잔을 엎은 신료는 물론 그 일족까지 임금을 능멸한 역적으로 몰아붙여 급기야

          그 해골까지 가루내어 바람에 날리고, 또 어떤 술자리(11월21일)에서는 취중실수는 모두 임금이 패덕한 탓이라고

          자책하고 참석자들에게 선물까지 내리고…. 극과 극을 오가는 군주의 변덕을 어쩌란 말인가.

          새삼 1791년(정조 15년) 7월 취중 살인사건을 판결하던 정조 임금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대체로 술 취한 사람에게는 비록 천자(天子·황제)라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중에도 역시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군주가 생각하기에 따라 신하들의 취중언행은 얼마든지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제기로도 쓰인 꽃무늬 은잔. 성종 같은 임금은 큰 술잔으로 신하들과 대작하고 기생을 동반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들(연산군)인 연산군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술 취향을 배워 향락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제기로도 쓰인 꽃무늬 은잔.

          성종 같은 임금은 큰 술잔으로 신하들과 대작하고 기생을 동반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들(연산군)인 연산군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술 취향을 배워 향락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필자는 술맛도 모르면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예전의 술자리를 돌이켜본다.

          생각해보니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벌였던 술판이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면 거의 대부분 ‘후회막급’이었다.

          술김에 하는 얘기라며 남에게 상처주는 이야기를 했거나, 혹은 거꾸로 술김에 나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공자의 그 유명한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고哉고哉)’(<논어> ‘옹야’). ‘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라고 해석된다. 청나라 고전학자인 모기령(1623~1716)도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고)’는 원래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3되를 적당하다고 하고, 5되를 과하다고 했으며, 2되를 적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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