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효석문화제
9월 6일(일)
"휘산회" 정기산행지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있는 "보래봉-회령봉"으로 정한 이유중에
9월 4일(금)부터 9월 14일(월)까지 열리는 "봉평효석문화제"를 참관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보래봉-회령봉" 산행보다 이 기회에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하고 싶어 이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봉평효석문화제"를 구경해 볼까요?
그리고 여기에 기술하는 필자의 개인적 글은 오로지 개인적 감상이나 개인적 느낌으로
쓰는 것이니 특별히 의미를 두지 마시고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람니다
江原道平昌郡蓬坪面 봉평은 한자로 蓬坪 이라고 씁니다.
蓬坪 의 봉 蓬은 "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봉평"은 "쑥밭"이라는 말이 됩니다.
어떤 연유로 이 지역 이름이 봉평 蓬坪 - 쑥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蕎坪 교평이어야 제격인데...
蕎는 메밀 '교'입니다
이효석의 고향이 우리말로 하자면 "쑥밭"이라는 뜻이 되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라면
이 마을 이름을 살리려면 "쑥대밭 될 때"라고 해야 하는건 아닌지....ㅎㅎ
쑥밭이라~ 이런 이야기는 홍어와 무인도에서나 읽을수 있는 것들입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 효석문화제 행사장]
"보래봉-회령봉" 산행을 마치고 "효석문화제 행사장"에 오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차량들로 좁은 시골길은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이곳을 찾으실 분들은 평일을 이용하시고, 대중교통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길 추천드림니다.
주말에 괜히 승용차 몰고와서 주차하는데 한나절 보내지 마시고...
[행사장 입구 - 가산공원]
사하라사막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집트는 선조들의 유산 - 피라밋으로 먹고 산다는데...
종이 호랑이가 된 이태리는 왕년의 로마제국 덕택에 그래도 선진국 소릴 들을수 있다는데..
강원도 산간 오지 평창군 봉평면이라는 조그만 마을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봉평면은 총1,084가구에 총 인구수가 4,800여명이라 합니다.
이런 조그만 마을에 엄청난 차량들과 방문객을 끌어 드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효석
"이 효석"이라고 하는 작가가 태어난 곳이고
그가 쓴 고작 다섯장짜리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10분이면 읽는 작품의 배경이
이곳 봉평이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차량과 방문객을 불러 모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이효석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좀 하자는 .....
이렇게 말한다고 봉평면민들이 저를 욕하진 않겠죠? 실제 그런거니까...
"이 효석"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메밀꽃 필 무렵"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고 훌륭한 것인가?
이제부터 오로지 '파란문'의 개인적 관점에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은 독자의 몫이니 어떻게 감상하던 특별히 시비 걸 필요는 없겠지요
[행사장]
'가산공원'이라는 곳에 방문객들이 앉을수 있는 객석을 이렇게 설치해 놨습니다.
이곳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봉평장을 본따 만든 곳이랍니다.
"여름 장이란 예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뭇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렇게 여름 봉평장의 파장 때쯤을 비추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공연장]
제가 이곳 행사장을 찾았을 때엔 국악공연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열리고 있는 '가산공원'은 "가산 이효석"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며
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생원'과 '동이' 같은 장돌뱅이들의 지친
여정을 풀던 술집인 '충줏집'이 옆에 있어 다시금 소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떡치기]
얼금뱅이 곰보이며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
학식도 재력도 없고, 결혼도 못해보고 늙어 버린 총각인 '허 생원'
(ㅎㅎ "드팀전" 뭔 말인지 모르지요? 친절하게 알려드리면 "포목상점")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어떤 부류의 소설로 생각하십니까?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게 깊이 있게 느끼며 감상하지는 않을겁니다.
'낭만주의'소설이다. '자연주의'소설이다. 뭐 이런 저런 그럴듯한 유식한 척을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이 당시로는 획기적인 '에로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에서 억눌려 온 "性"을 주제로 하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연애"라는 단어가 새로이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연애"를 소재로 너나 나나 할것없이 소설로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연애"가 "문학"이 될수 있느냐로 논쟁도 많았던 때입니다.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도 에로 소설의 대부로 잘못 알려진 방인근과 같은 내용의
에로 소설을 썼는데, 방인근은 월북했다고 저속한 인물로 만들어 지고,
김동인, 김유정, 이효석등은 순수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는지.....
사춘기 시절에 몰래 많이 읽은 방인근선생의 소설들과 '감자', '봄봄봄'등과 뭐가 다른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다섯장 짜리 단편 소설......
얼금뱅이 왼손잡이 학식도 재력도 없는 늙은 장돌뱅이 허생원이
일평생 딱 한번 물레방앗간에서 경험한 "혼외 정사"
그리고 그 딱 한번의 쌕스 SEX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얼금뱅이 허생원
물론 이효석선생의 문학성이라던가 이런 저런것들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아주 단순한 "쌕스의 추억"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저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실제 이효석선생도 늙은 곰보 장돌뱅이 허생원의 삶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속성인 애정"을 그릴려고 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나귀]
이 봉평 행사장에 살아있는 당나귀 한마리를 메어 놨습니다.
당연히 "메밀꽃 필 무렵"에 주인공과 버금가는 역활로 나오는 "당나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효석선생은 이 "나귀"를 통해 동물이나 인간이나 性慾은 같은 것이라고 빗대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도 동물과 인간의 욕정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효석 문학관과 생가 가는 길]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이곳 봉평에서 태어나
지금의 평창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 특차로 진학합니다
그리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합니다. (당시의 학교명을 지금의 학교명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려서 부터 공부에는 '천재'였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이곳 봉평에서는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도 평창에 가서 하숙을 했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학창생활을 했고, 졸업후에는
함경북도 경성과, 평양에서 살다가 짧은 36년의 생을 마감하고 멀리 떠나 갔습니다.
그래서 이효석선생의 프로필을 소개하려면 간단합니다
학창시절과 함경북도 경성에서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4년정도 생활한것과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6~7년정도 생활한것이 전부입니다.
[징검다리]
'메밀꽃 필 무렵'에서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우스꽝스러운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니 밤의 물은 뼈를 찔렀다."
이 개울을 건너며 허생원은 '동이'가 혹시 아들이 아닐까 생각되어
'동이'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지요
[섶다리]
이효석의 사생활을 조금 언급해 볼까요?
玄民 유진오선생 아시지요?
고려대 총장, 신민당 당수, 헌법 기초위원..이렇게들 주로 아시죠?
이양반 유명한 文學人입니다. 시인이자 수필-소설가
제일 유명한 소설은 '김강사와 T교수'로 생각되며, 그외 수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동료인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노천명 시인의 스캔들 이야기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쓰기도 했지요
우리나라 법대생들은 대부분 유진오교수의 '헌법이론과 실제'라는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친일파'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양반의 신상에 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이효석과 가장 친한 친구여서
서로의 작품 속에서 서로를 투영하고 있고, 특히 이효석의 마지막 애인인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기 깨문입니다
명문대 출신이며 교수이며 화려한 작가가 된 "이효석"을 암암리에 노리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가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였습니다.
[다리를 건너 와 뒤 돌아 본 행사장]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유명한 이야기 - "왕수복"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을수가 없군요
남인수의 연인기도 했으며 국민가수이기도 했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당시의 최고 인기 가수 였던 선우일선, 전옥 보다도 더 인기 있었던 가수가 누구 인지 아십니까?
1935년에 종합연예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당당히 일등을 한 가수가 다름아닌
"왕수복"이었습니다.
이 유명했던 가수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없는 이유는
이 미모의 기생 출신 여가수가 이효석과 마지막 연인 동거 관계를 가진후 이효석이 죽자,
곧바로 '사슴'을 쓴 시인 '노천명'의 꿈속의 사랑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재빨리 결혼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국으로 월북했기에 이 여가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도 금기시 되 왔으므로
"왕수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분단 국가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들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왕수복의 일생은 또 하나의 다시 쓰기 힘든 드라마였으니 꼭 이 여인의 일생을
최근 알려진 것들을 합쳐서 제 블로그 애독자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기생 - 인기 대중 가수 - 성악가 - 이효석의 마지막 연인 - 월북 -
고려대 김광진교수와 결혼 - 북한 최고 인민가수 - 애국열사능에 영면
왕수복은 평남 강동에서 1917년에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명륜여자보통공립학교'를 다니다
3학년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여 소리와 거문고를 배워 기생이 되었습니다
노래에 천재적 소질을 보이던 왕수복은 1933년 열여섯살의 나이에
당시 최고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 스카웃되어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로 탄생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난영 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유행가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때에
자신의 최대 컴플랙스인 '기생출신 대중가요 가수'라는 딱지를 때기 위해 새로운 음악세계인
'서양 음악 - 성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변신하여 돌아 온 왕수복은 주로 우리나라 민요를 성악으로 불렀답니다
북한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털어 최고의 민족혼 무용가로 지목되는 '최승희'가 민족 무용을
살리는것과 같이 우리나라 민요를 위해 몸바치겠다고 한 '왕수복'
북한으로 월북한 그녀는 공훈배우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국민가수가 되었으며
1997년 여든의 나이에 리싸이틀 공연을 하고,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은 것이 국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2003년 여든여섯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고 북한 애국열사능에 뭍혔다고합니다
그녀가 北으로 가지 않았다면....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수복은 33년부터 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곡 가운데서 왕수복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이란 노래 한곡
소개하겠습니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메밀꽃밭 테마 포토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많은 사람들이 메밀꽃을 보고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한대목인
"소금을 뿌린듯"이라는 대목 하나만 오로지 기억하며 전체를 기억하는듯이 말합니다.
사실 "소금을 뿌린 듯이"보다는 그 메밀꽃이 달빛에 비치는 모습이 소금을 뿌린듯하여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말이 더 강조 되는 대목인데, "소금"을 너무 강조합니다
앞으로는 윗 글을 전체적으로 얘기하시고 너무 "소금"은 뿌리지 마세요. ㅎㅎ
[메밀꽃밭]
현민 유진오가 쓴 「마지막 날의 효석」에는 이효석과 왕수복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효석은 왕수복과의 관계를 자전전 소설로 남겼는데 "풀닢"이라는 소설입니다.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가수 왕수복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기생출신'이 무지막지한 컴플랙스였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전력인 '기생 출신'에서 당당히 벗어 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최고의 명문대 출신인 교수이자 작가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명 작가이자 교수와 함께 살아 천민에서 벗어 나고 싶어 한 가련한 여인 - 왕수복
그녀는 집요하게 이효석을 꼬셨습니다. 나이 차이가 십여년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이효석은 조강지처 이경원여사와 사별하고 장남도 죽어
여러모로 방황하고 있었으니 왕수복은 찬스를 잡았던 것입니다.
결국 두 딸과 차남이 함께 살고 있는 이효석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이효석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요절하면서 결혼식까지는 올리지 못했지만
왕수복은 그의 꿈을 반쯤은 이루고 이효석의 집을 떠납니다.
이효석이 죽자 왕수복은 재빨리 다른 남자를 꼬십니다. 교수를 무지 원했거던요.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를 쓴 新女性 시인 "노천명"의 남편같은 애인이었던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김광진을 빼앗아 결혼을 합니다.
(김광진은 노천명과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와 이혼까지 한 사이였습니다)
동경제대에서 공산주의 경제학을 전공하여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북으로 가 김일성의 경제 정책을 진두 지휘한 김광진 교수의 품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생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대단한 집념의 여인~
[인기 절정을 누리던 1933년에 위장약 "노르모산" 광고에 등장한 "왕수복"]
어때요?
왕수복 이쁜가요?
"노르모산"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옆에 글자는 왕수복 자필이라고 합니다
미인도 시대적으로 다른가 봅니다만, 미인이라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기 보다는
최고 인기 여가수여서 광고 모델이 되었다고 봐야겠죠?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거 이런데 올리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습니다
시대가 바꿔져 '왕수복'이도 제 블로그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리는군요 ㅎㅎ
[메밀꽃밭 옆 흥정천과 산책로]
당시 이효석과 친했던 작가들 중에는 "기생과의 사랑"을 나눈 작가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몇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학교 선배님이기도한 "봄봄봄"의 김유정
<봄봄봄>의 천재작가 김유정은 기생 '박녹주'를 열렬히 짝사랑했답니다.
명기명창으로 송만갑의 사사를 받고 각종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유명인이었던 박녹주는
자신보다 연하인데다 학생인 김유정을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김유정은 매일 한통씩 편지를 보내며 안달했답니다.
‘간혹 길가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소…’,
‘목욕을 하고 오는 자태는 정말 이쁘게 보였노라…’,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결국 김유정은 3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됐고 박녹주에게는 부음과 함께
‘니가 죽였지’라는 김유정 친구들의 저주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코스모스와 메밀꽃]
'금홍이'와 '날개'를 쓴 '이상'
“십팔가구에 각기 밸너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안해는 특히 아름다운 한 딸기의 꽃으로 이 함석 지붕 밑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이상의 <지주회시>에서-
1935년 초 금홍이의 두 번째 가출 이전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이상이 금홍이를 염두해둔 묘사입니다.
배천온천에서 만난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관계는 2년 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금홍이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본격 교제한 첫 여인이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여인이었으며, 이상이 유일하게 ‘안해’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 의지대로 작용하지 않아 속을 태웠던 요부"로서의 여성상을 그의 작품에 드리웠습니다.
이상의 불멸의 소설 "날개"에서도 몸팔러 나가는 아내를 그리고 있는데....
이상은 종로 우미관 뒤에서 금홍이와 동거를 하며, 파격적인 상호의 "식스나인 69"라는 다방도 했지요
이효석도 커피 중독자였으며, 왕수복의 언니가 하던 평양의 "방가로"라는 다방에서
왕수복과 데이트를 많이해 평양숭실전문학교 학생들로부터 핀잔을 많이 받기도했습니다
[물레방앗간 안내 표지석]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여.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이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야.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팔자에 있었나 부지."
허생원이 물레방앗간으로 들어 가게 된 동기와
성 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쓰일 때 쯤에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엔 너나 나나 할것없이 '연애'를 소재로 글을 써야 문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였습니다.
남자 여자 文人이 따로 없이 "자유연애"가 소재로 다루어 지던 시대입니다.
이효석도 절묘한 필치로 "혼외 정사"를 소재로 "메밀꽃 필 무렵"을 썻습니다.
여러분~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이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할까요?
[물레방앗간]
수많은 관광객들이 물레방앗간을 서성입니다.
제일 관심있는 장소인듯합니다. ㅎㅎ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 물레방앗간에서 정사를 꿈 꿀 것입니다.
다만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자제할 뿐....
물레방아 돌아 가는 소리때문에 거칠은 숨소리는 무마 될것이고
쿵덕쿵~~쿵덕~
인간의 속성은 잘난 놈 못난 년, 가진 년 없는 놈, 불문하고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고상한척 하는 인간들이 더 밝힌다고 "X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고 하는 속담도있습니다
[물레방앗간 내부]
"메릴꽃 필 무렵"의 하일라이트....
"아무렴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는 아끼는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중략)....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허생원의 첫경험
[효석문학관 올라 가는 길]
'효석문학관'은 '물레방앗간' 뒤로 산길을 따라 올라 가야합니다.
[효석문학관]
산 중턱에 "이효석문학관"이 있었습니다.
이효석은 공산주의 문학가들의 모임인 '동반자 작가'에 몸담기도 했지요
하지만 곧 휘문출신 문인들의 주축인 정지용선생등의 권유로 탈퇴하고
'구인회'에 참여하여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순수문학의 글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박동락선생 추모비]
이효석문학관을 짓는데 크게 공헌하고, 이효석 연구에 전념한 '박동락선생기념비'가 있습니다
[효석문학관 본관]
문학관에는 이효석과 관련된 692개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뒷동산에 올라 촬영한 '효석문학관 전경']
[이효석 동상]
이효석은 스스로 "자신은 300~400대의 주사를 맞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짤라 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 특정 부위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무나 짧은 인생에 병마와도 싸우며
살았으니 어찌 가엽다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최종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 유진오를 불러 옆에 두고,
아버지와 왕수복이 지켜 보는 가운데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함북 경성공업학교 교사 시절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이 그의 문학의 절정기여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 할수 있었답니다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평양에서 쓴것입니다.
[이효석과 함께]
글자 나부랭이를 쓰는 놈이라고 비록 동상이지만 '이효석'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의 이효석 나이로 치자면 저의 아들뻘 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이효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을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동이'와 당나귀]
"왕수복"에 대한 이야기 뽀나스로 하나 더해 드리면
왕수복의 스켄들 중에는 당시 최고의 조선 갑부인 화신백화점 사장인 "박흥식"도 있었습니다
[충줏집]
'가산공원' - 옛 봉평장터 옆에는 "충주집"이 있는데
친구들은 "효석문화제"엔 관심이 없고 메밀전에 수육, 동동주와 소주에 더 관심이 있는듯
일찍이 이곳에서 한잔들 얼큰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곳 저곳 돌아 다니다가 돌아와 합세해 여기서 메밀전에 수육,
그리고 쇠주에 메밀막국수를 먹고 돌아 왔습니다.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