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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 효의 정신이 함께하는 충효의 고장』 [동작충효길] 1~5코스 "고구동산길-보라매길" 답사기 보라매역-보라매공원-신대방삼거리역-용마산-노량진근린공원-노량진역- 사육신묘-노들나루공원-한강수변길-동작역-현충원둘레길-현충원상도출입문- 서달산 동작대-달마사-서달산생태공원-중앙대후문-고구동산-노들역 ['동작충효길' 안내도] [국토지리원 e맵 지도] "동작충효길"은 7개코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총길이는 25km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7코스부터 역으로 답사하고 있는데 오늘은 5코스부터 역으로 1코스까지 답사합니다. [5코스 보라매길 2.7km] [4코스 노량진길 3.4km] [3코스 한강나들길 4.7km] [2코스 현충원길 2.6km] [고구동산길 3.2km] 합 16.6km ['5코스 개념도'] ['보라매역2번출구'] 10:00~10:05 2020년 5월 8일 (화) 맑은후 흐림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보라매역2번출구"에서 "5코스 보라매길"을 시작합니다. [2번출구]로 나가면 "동작충효길 5코스 보라매길"을 알리는 안내목이 설치되 있으며 [보라매길]은 직진합니다. ['(주)농심' 본사] 10:13 [보라매역2번출구]에서 [여의대방로]를 따라 7분 정도 직진하면 "{주}농심" 본사를 만나는데 ['기상청입구교차로'] "(주)농심" 본사를 좌측에 끼고 좌회전합니다. ['보라매공원' 입구] 그러면 "옛 공군사관학교 정문"이었던 [보라매공원] 입구가 이어지는데 ['보라매공원 기상청앞 광장'] 10:21 공원으로 들어 가면 면저 광장을 만나는데 "기상청 조형물"이 눈길을 끕니다. 이곳에 "기상청 본청"이 있기 때문이겠죠. [충효길]은 여기서 좌측 공원관리사무실 방향으로 가야 하더군요.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보라매공원 관리사무소'] 10:23 [보라매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데 관리사무소 좌우 어느 길로 가도 되더군요. 화살표 방향인 우측으로 올라 가면... ['보라매북동산 숲길'] 10:23~10:33 "보라매북동산숲길"이 이어집니다. 10여분 숲속 산책로를 진행하면 [보라매공원]을 벗어나며 "보라매병원"을 만납니다. 병원을 돌아 [보라매공원] 동쪽 출입구 도로로 나가서 ['보라매병원' 앞] 10:36 ['보라매로'] 지하철 공사인지 뭔지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 나가 [보라매로]로 좌회전하여 15분 정도 진행하면 ['신대방삼거리'] 10:51 "신대방삼거리역"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며 "동작충효길 5코스 보라매길"이 싱겁게 끝납니다. ['4코스 노량진길 개념도'] ['신대방삼거리역6번출입구'] 10:54 "신대방삼거리역 6번출구"에서 "동작충효길 4코스 노량진길"이 시작됩니다. 100m 정도 직진하면... ['상도3치안센타' 옆 골목] 10:57 ['새벽어린이공원'] 10:58 ['상도동' '성대경로당길'] [상도3치안센타]를 만나고 그 옆에 있는 [휴대폰매장]을 끼고 좌회전하여 골목으로 들어 가서 [새벽어린이공원]을 지나 골목을 5분 정도 직진합니다. 골목 끝에 [용마산]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용마산' 입구] 11:03 골목 끝까지 가면 "용마산 등산로 입구"를 만나는데 안내도도 있습니다. [계단] [군부대] 11:06 [데크길] [용마산]으로 올라 가는 길은 정비가 잘 되 있으며 길안내도 하고 있었습니다. [군부대 울타리] ['용마산' 정상] 11:15 [충효길]은 데크길로 진행하지만, [용마산] 정상으로 올라 가 보았는데 군부대 담장이 [용마산]을 반으로 짤라 설치되 있었으며 벽화가 그려져 있더군요. '네이버지도'에는 이곳 군부대가 [공군항공안전단]이라고 표기해 놨더군요. [용마산]엔 정상석도 없는 높이 7~80m 정도 되는 조그마한 동산이었습니다. 정상에서 내려 가면... ['노량진근린공원'] "노량진근린공원-대방공원"이 상당한 규모로 조성되 있습니다. ['견우와 직녀교'] 11:25 [견우와 직녀교]라는 육교를 건너 가며 좌측을 바라보면 ['대방동' 방향 조망] [대방동] 아파트들이 조망됩니다. ['공군본부 터' 기념비] 11:28 [견우와 직녀교]를 건너면 "공군본부 터 기념비"가 독특한 모양으로 있는데... '대방동'에 있었던 공군본부는 [대전 계룡대]로 이전했죠. ['노량진근린공원'] [노량진근린공원]을 20여분 통과하면... ['동작전화국입구교차로'] 11:49 [한강대교]에서 [영등포]로 연결되는 [노량진로]를 만나는데 ['노량진로'] [노량진로]의 중앙차로에는 [현대아파트.유한양행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길을 건너 건너편 보도로 진행합니다. ['노량진 가로공원'] [경부선 철로] 옆엔 가로공원이 화려하게 조성되 있었습니다. 10여분 가로공원을 거닐면 ['노량진수산시장' 입구] 11:59 [노량진수산시장 입구]를 만납니다. [동작충효길]은 [노량진수산시장]도 둘러 보고 가라고..사 먹고 가라고 뺑뺑이를 돌립니다. ㅎ ['경부선' 굴다리] 정말 오랜만에 굴다리를 통과하여 수산시장으로 들어가서 ['노량진수산시장'] 새로 만든 [노량진수산시장] 안을 한바퀴 빙 돌아 나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로 모처럼 손님이 좀 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3코스 한강나들길' 개념도] ['노량진역'] 12:14~12:46 [노량진수산시장]을 돌아 나오면 "노량진역"을 만납니다. "동작충효길4코스 노량진길" 종점이며 "3코스 한강나들길"의 출발점이 되겠습니다. "노량진역"은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이 시작된 곳이죠. [경인선]은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제물포'까지 총 33.2㎞ 구간의 철도로, 1899년 개통 당시 증기기관차와 함께 파격적인 교통의 혁명이었답니다. 지금은 [1호선]과 [9호선] 전철이 환승하는 전철역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사육신공원' 정문] 12:49 [노량진역]을 지나면 "사육신역사공원" 정문을 만납니다. 여러번 방문 한바 있지만 한번 더 답사합니다. ['불이문'] ['의절사'] 정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사육신묘"로 들어 가는 "不二門"을 만나 통과하면 "사육신'을 배향하는 "의절사 義節祠"를 만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 다시 오픈되어 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의절사' 경내] [의절사]에서 경내를 둘러보고, [의절사] 뒤로 돌아 가면... ['사육신 묘'] "사육신묘"가 있습니다. 현재는 "김문기선생묘"까지 합쳐져 "사칠신묘"가 되 있지요. ['사육신역사관'] [사육신역사관]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아직까지도 휴관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제한하고 있더군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예전에 제가 쓴 [관악지맥 세번째 답사기]를 읽어 보세요. ['사육신역사공원길'] [사육신역사공원]을 [노들나루공원] 방향으로 산책로를 따라 나가면... ['래미안아파트' 정문 앞] 1:15 ['노들나루공원' 조망] [래미안트윈파크아파트단지] 정문 앞을 통과하며 건너편 [노들마루공원]으로 갑니다. ['노들나루공원' 입구] 1:17 "노들나루공원"은 예전에 수돗물을 만드는 정수장이었지요. [9호선 노들역] 엘리베이트가 정문 앞에 있습니다. ['노들나루공원 안내도'] [관리사무소] ['힌깅' 방향 출구] 1:29 옛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노들공원]을 10여분 걸려 [한강대교] 방향으로 나가면.... ['한강대교 남단 교차로'] ['한강강변길'로 내려 가는 곳] 1:30 [한강대교 남단교차로]를 만나는데 [한강대교] 남단 끝지점으로 가면... ['한강강변길'로 내려 가는 계단] [한강강변도로]로 내려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가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한강대교' 밑] [한강대교] 밑을 통과하며 [한강강변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진행합니다. ['노량대교' 밑] ['원불교' 조망] 1:45 [노량대교] 밑을 지나며 [원불교 서울교구청]도 조망하고... ['명수대'] 1:47 이어서 "명수대 明水臺" 안내목을 만나는데.... [명수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서달산' 꼭대기에 일본놈 '木下榮'이라는 놈이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들어 놀며, 맑은 한강이 흐르는 경치를 즐겼다고 [명수대]라 했답니다. 요즘 이 근처 아파트들 이름도 [명수대 아파트]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내용을 알고 사용하기 바람니다. [강변길] ['동작대교' 조망] 계속해서 강변길을 진행하며 [노량대교]를 벗어나면 [동작대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동작대교전망카페' 조망] ['반포천교'] 2:07 "반포천""한강"과 합류하는 곳을 만나는데 "반포천교"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반포천'] [반포천]이 보이는데 [올림픽대로]등 여러 다리들이 있는데 좌측 멀리 다리 밑으로 [동작역]이 보입니다. [동작역]으로 가면... ['4호선동작역 2번출입구'] [4호선동작역]의 [2번출입구]로 올라 가서 [동작역] 안을 통과하여... ['4호선동작역 3번 출입구'] 2:10~2:30 [동작역3번출구]로 나가면 [현충로]를 건너가는 육교를 건너게 되는데 ['2코스들머리' 조망] 육교 위에서 [2코스 현충원길]의 들머리를 조망하고... ['2코스 현충원길' 개념도] ['4호선동작역 3번출입구'] 2:31 [동작역 3번출구]로 내려가면 "동작충효길 2코스 현충원길"을 알리는 안내목을 만납니다. [3코스 한강나들길]의 종점이고, [2코스 현충원길]이 시작됩니다. [계단 오름길] 2:33~2:45 매우 가파르고 긴 계단을 8분여 오르면... ['이수폭포갈림길 쉼터'] 2:45 [이수폭포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는 쉼터에 도착하고 ['Memorial Gate'] 2:51 ['정금마을갈림길'] 2:57 [현충원] 울타리를 따라 10여분 진행하면... ['어버이 모시기 동상'] 3:02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 조형물을 만나는데 오늘이 [어버이날]이라 더욱 감명 깊게 느껴졌습니다. [쉼터] ['우면산' '청계산' 조망] ['관악산' 조망] 이어지는 쉼터에서 [우면산] [청계산]등을 조망하는데, '수원'의 [광교산]까지 보입니다. 남서쪽으로는 [관악산]도 보이고... ['극동아파트 갈림길'] 3:08 ['현충원사당출입문'] 3:14 [현충원]의 샛문인 [사당출입문]을 지나면 [쉼터] 3:25 ['현충원상도출입문' 조망] 다시 쉼터를 만나며 [현충원 상도문]이 있는 곳이 조망되고 12분여 진행하면... ['현충원상도출입문'] 3:37 [현충원]의 또 다른 샛문인 "상도출입문"을 만납니다. ['현충원상도출입문' 앞 이정표] ['1코스 고구동산길' 개념도]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있는 이곳 삼거리는 "동작충효길 2코스 현충원길"이 끝나고 "동작충효길 1코스 고구동길"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좌측엔 "백운고개(사당이고개)"가 있는데 며칠전에 답사한 "동작충효길 6~7코스"와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은 [관악지맥]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죠. ['서달산' 가는 길] [현충원상도출입문]에서 7분여 오름길을 오르면... ['서달산' 정상] 3:45~3:55 "서달산 179m"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높이가 "173.1m"라고 표기되 있는 [현충원]을 품고 있는 산입니다. [상도동] 주민들의 건강생활휴식처라고 하는군요. ['동작대'] ['까치산' '국사봉' 조망] 정상에는 또한 "동작대 銅雀臺"라는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 조망을 하면 [6코스~7코스]에서 올랐던 [까치산]과 [국사봉]이 가까이 보입니다. ['달마사' 가는 길] [동작대]에서 [달마사]를 둘러보고 가려면 [서달산 정상석]이 있는 정자 뒤로 50m쯤 직진하면 됩니다. [발지압] ['달마사' 입구] 3:56~4:00 [서달산 정상 정자] 뒤에는 발지압 하는 시설이 있는데 [현충원]의 울타리에 붙어 있습니다. 이어서 출입문을 만나는데 안으로 들어 가면... ['거북바위'] 먼저 "달마사 거북바위"가 반겨 줍니다. 이 거북이는 매년 두어번씩 한강에 내려가 목욕을 하고 온다죠? ㅎ 보는 각도에 따라 거북이로 보이다 말다 하니 각도를 바꾸며 감상해야 합니다. ['달마사' 조망] [거북바위]에서 바라보는 "달마사"와 '한강', 그리고 '서울 남산'은 정말로 최고의 가경입니다. '흑석동'에 이런 명소가 있는줄 몰랐죠? ㅎ ['롯데월드' 조망] 동쪽으로는 '롯데월드타워'등 잠실지역이 조망됩니다. ['사육신묘' 조망] 북서쪽으로 내려 가며 바라보는 "사육신묘"가 있는 [사육신역사공원]이 조망되며 '여의도 63빌딩'등도 가까이 보이는군요. ['달마사' 진출입로] ['서달산 생태다리' 오름길] 4:05 [달마사] 진출입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면 다시 [동작충효길]로 올라가 합류하는 곳을 만납니다. ['서달산근린공원' 통과] 4:25 이어서 "서달산근린공원"을 20여분 통과합니다. [서달산 수목합습원] [초화원] [숲속도서관]등 근린공원으로서는 일등급 공원이었습니다. ['상도로'] ['중앙대' 후문] 4:28 [서달산근린공원]을 통과해 도로로 내려 가면 [상도로]를 만나고 이어서 [중앙대 후문]을 만납니다. ['고구동산' 가는 길] [고구동산]으로 가는 길은 [중앙대 후문] 맞은편에 있는 골목 우측 샛길로 가야 합니다. 길주의를 해야 겠고 [갈림길] 4:29 이어서 이정표가 숲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으로 올라 가면 ['고구동산' 정상 가는 길] "노량진근린공원-고구동산" 길이 이어 집니다. [고구동산 정상]으로 올라 가면... ['고구동산' 정상] 4:40 "고구동산 108m" '동작구 본동' '상도동' '흑석동'의 경계가 되는 나즈막한 산인데, 우리가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갈때 보이는 산이죠. 얼마전 이 산에 천문대를 짓는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는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북이' 산책] 공원 운동장에서 거북이를 산책시키고 있는 아가씨를 만났는데.... 애완동물도 가지가지...신기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거북이를 잠시 구경하고 ['노량진고구동산공원' 통과] [노량진고구동산공원]을 20여분 거닐면... [계단 내림길] 공원을 벗어나는 계단 데크를 만나 [상도터널입구]로 내려 가고 ['한강대교 남단 교차로' 방향 조망] ['9호선 노들역 4번출구' 조망] 5:05 [한강대교] 남단 방향에 있는 [9호선 노들역 4번출입구]로 가서 ['노들치안센타' 앞] 5:07 [9호선 노들길 4번출입구] 앞에 있는 [노들치안센타] 앞에서 [동작충효길]을 모두 마침니다. [국토지리원 지도] [구글어스] [고도표] 공식안내도에는 이번 구간 거리가 16.6km라고 알리고 있으나 제가 직접 걸으며 GPS 세개로 측정된 거리의 평균은 19.5km였으며 총7시간이 걸렸습니다. 걸은 시간은 5시간 20분이며 식사등 휴식시간은 1시간 40분이었습니다. 이로서 忠과 孝의 길이라는 "동작충효길"을 모두 마침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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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 효의 정신이 함께하는 충효의 고장』 [동작충효길] 7~6코스 "까치산길-동작마루길" 답사기 사당역-까치고개-까치산공원-상도중-백운고개-숭실대입구역-살피재- 상도근린공원-양녕대군묘-국사봉-사자암-성대시장-신대방삼거리역 ['동작충효길' 안내도] [국토지리원 e맵 지도] "동작충효길"은 7개코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총길이는 25km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7코스부터 역으로 답사하려 합니다. ['사당역6번출구'] ['사당역6번출구' 앞 '만남의 광장'] 9:55 2020년 5월 5일 (화) 흐림 [사당역6번출구]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서 "동작충효길 7코스 까치산길"을 출발합니다. 이곳은 [동작충효길]의 종점이지만 출발점으로 잡고 역으로 진행해 보도록 하는 것이고... ['낙성대' 방향] 10:00 [사당역6번출구]에서 서쪽방향인 [낙성대역] 방향으로 10여분 올라 가면... ['까치고개'] 10:05 공식적인 명칭이 "관악까치자연길"이라는 생태통로 육교를 만납니다. 이 생태통로가 있는 고개는 "까치고개"라고 하는데 "관악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고갯마루입니다. [관악지맥]은 [한남정맥]의 "백운산"에서 분기하여 [안양천]과 [탄천]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줄기이죠. '까치'는 한자로 '작 鵲'으로 쓰지요. 그래서 이고개를 "작현 鵲峴"이라고도 부르더군요. + [관악지맥]에 대해선 이 글의 끝에 첨부된 [파란문]이 두발로 쓴 산행기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들머리] [까치고개]에는 [관악산둘레길] [인헌공 강감찬길] 등 지역둘레길의 출입구이기도 하군요. 계단을 조금 올라 가면... [갈림길] 이정표가 길안내를 하는 갈림길이 바로 나타나는데 직진성 좌측길은 [관악산]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길은 [동작충효길]이 되겠습니다. 우측 [관악까치자연길]이라는 생태통로 육교로 들어 가면... ['관악까치자연길'] ['사당역' 방향 조망] 생태통로 위에서 동쪽방향을 조망하고... ['동작충효길' 안내도] 10:14 ['7코스 개념도'] [동작충효길 종합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7코스]를 확대해서 자세히 참고 하면 [7코스]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까치산공원"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자 쉼터] 10:17 [운동시설] [까치산공원]에는 높이가 100m 정도 되는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있는데 [동작구]에서는 자연생태환경이 가장 잘 보존되 있는 공원이랍니다. 주변 주민들의 건강생활공간이어서 관련 체육시설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 있군요. ['까치산' 정상] 10:21 [까치고개]에서 15분여 공원을 거닐면 [까치산공원]의 대표 산봉우리인 "까치산 鵲山 122.3m"에 오릅니다. 정상엔 발지압 시설이 있습니다. [공터] ['청산정'] 10:27 이어서 "청산정 靑山亭"을 지나면... [내림길] [영산홍] 내림길이 이어지며 영산홍이 공원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는 갈림길을 지나 내려 갑니다. ['까치산공원' 출입구] 10:46 ['까치산 차없는 거리'] 그러면 [상도동] 방향으로 통하는 공원출입구를 나가게 되는데 "까치산 차없는 거리"가 이어 집니다. 이 거리도 [관악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산줄기인데 도시개발로 무력화 되었습니다. 좌측은 [관악구 봉천동]이고 우측은 [동작구 사당동]이 되겠습니다. ['상도중' 앞 갈림길] 10:52 [차없는 거리]를 잠시 진행하면 [상도중학교] 후문 근처에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납니다. 우측 [백운고개(사당이고개)] 방향으로 들어 가면... ['상도중' 가는 길] ['상도중' 후문] 10:55 [상도중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관악지맥]은 여기서 [상도중학교]로 올라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백운고개(사당이고개)]로 가서 [서달산]으로 갑니다. 하지만 학교 후문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잠겨 있으며 [동작충효길]은 학교를 우측 도로로 돌아 갑니다. ['상도중' 돌아 가는 길] 도로를 따라 [상도중] 축대를 돌아 가면... ['상도중' 정문] 11:00 [상도중학교] 정문을 만나고 ['사당롯데캐슬골든포레아파트 단지'] 11:00~11:21 (20분 휴식) [아파트단지 정문] 제가 [관악지맥]을 할때만해도 일반주택들이 밀집되 있었는데 그동안에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 했군요. 아파트단지 이름은 [사당롯대캐슬골든포레아파트] 랍니다. 아파트 쉼터에서 20여분 쉬다가 출발합니다. ['백운고개'] 11:26~11:28 아파트단지 정문을 나서면 "백운고개(사당이고개)"를 만납니다. '사당동'은 큰 사당 舍堂이 있었다고 붙여진 명칭이라는데, 이 근처에 있었나 봅니다. 그레서 이 고개를 "사당이고개"라고도 부른다는군요. ['백운고개 생태통로'] "백운고개(사당이고개)" 보이는 생태통로를 건너가면 [서달산]과 "현충원"이 있으며 [관악지맥]과 [동작충효길 1~2코스]로 이어 집니다. 며칠후 답사 할 예정입니다. ['6코스''7코스' 시종점] [백운고개(사당이고개)]는 [동작충효길7코스 시종점]이고, [6코스 시종점]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동작6코스 동작마루길]까지 진행하려고 합니다. ['6코스 개념도'] [6코스 동작마루길]은 이곳 [백운고개]에서 [상도근린공원]과 [국사봉]을 통과하여 [신대방삼거리역]까지 가는 4.8km 거리라고 알려 줍니다. ['숭실대' 입구 방향] ['숭실대' 정문] 11:38 도로를 따라 10여분 내려 가면 "숭실대"를 만나고 ['숭실대입구역'] 11:47 이어서 [숭실대입구역]을 만나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살피재' 가는 길] [살피재]를 넘어 [관악구 봉천동]과 [서울대]로 가는 도로를 걷게 되는데 6분 정도 올라 갑니다. ['살피재 (봉천고개)'] 11:53 "살피재(봉천고개)"를 만납니다. [관악구]와 [동작구]의 경계로 [지하철7호선]이 땅 밑으로 지나 가고 있는 제법 높은 고개입니다. 그래서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 등 나쁜놈들이 지나는 사람들로 부터 재물을 뜯어서 이 고개를 넘을 땐 '주변을 잘 살피며 넘으라'고 하는데서 유래하는 지명이랍니다. ['살피재'의 유래] ['상도근린공원' 들머리] 11:56 [살피재]에서 [상도근린공원]으로 들어 가는 입구 입니다. ['상도근린공원'] ['상도근린공원'] [살피재]에서 공원으로 들어가 8분여 진행하면... [삼거리] 12:04 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고 ['상도근린공원'] 12:05 이름 모를 고개를 가로질러 건너편 공원으로 들어 가면 [배드민튼장] 12:19 배드민튼장등 생활체육시설이 있는 [상도근린공원]을 통과하고 [내림길] ['구암고교'] 12:26 이어서 내림길을 내려 가면 [구암고등학교] 옆을 지나게 됩니다. ['구암정'] 12:27 [구암고등학교]를 지나면 바로 "구암정 龜巖亭"이라는 정자를 만납니다. 거북바위가 근처에 있는지 돌아 봤는데 그런 바위는 보이지 않았고 ['봉현배수지' 입구] ['유아숲체험장'] [삼거리] ['솟대'] 12:36 계속해서 [상도근린공원]을 지나 가는데, [봉현배수지]가 지하에 있답니다. [봉우리] 12:39 ['국사봉' 조망] 12:40 [상도근린공원]의 끝 지점에 봉우리가 하나 나타나는데, 봉우리 위에선 "국사봉 180.9m"이 조망됩니다. [내림길] ['국사봉터널' 위 고개] 12:45 [상도근린공원]에서 내려 가면 [국사봉터널] 위 고개를 만나는데, [국사봉]은 직진합니다만 저는 이 근처에 있는 "양녕대군묘"를 둘러 보고 [국사봉]으로 오르기 위해 우측으로 내려 갑니다. ['양녕대군묘' 방향] (20여분 양녕대군묘 한바퀴 순회) 조금만 내려 가면 [양녕대군묘]인데 실수로 [양녕대군묘]를 한바퀴 빙 도느라고 15분 정도 소비하고 ['양녕대군묘' 정문] 1:10 ['지덕사'] "양녕대군묘" 정문에 도착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문은 잠겨 있습니다. [양녕대군]은 [세종대왕]의 큰형님이며 왕위를 양도한 세자였는데....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 된 뒤에도 행실이 개차반이라고 아버지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세자 자리를 박탈 당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양위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양녕대군]의 행실은 아버지의 살인 행위에 대한 반항적인 거라고 평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태종 이방원]이는 무지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요. 사돈인 [세종대왕]의 장인 어른까지 죽였으니.... 여하튼 [양녕대군]으로부터 [충녕대군]에게로 세자 자리가 양위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이라는 [세종대왕]을 탄생시킬수 있었으니 [양녕대군]을 좋게 말하면 聖君을 만든 聖兄이 되겠습니다. ㅎ 그런데 그는 왕이 된 동생 [세종대왕]보다 훨신 더 오래 살며 70세근처까지 천수를 누렸는데 [문종]의 아들 [단종] 때에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 찬탈을 할때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그 거사를 추인해 주며 [세조]를 탄생시키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죠. 왕위에 오르지 않고 동생에게 양위한게 오히려 세종보다 더 오래 살며 권력을 행사 할수 있어서 인생 전체로 보면 더 잘 된 결과가 되었습니다. ㅎ 어쩌면 자신이 박탈 당했던 왕위에 대한 보복을 조카 [수양대군]을 통해서 한것으로... ['국사봉' 조망] 세자에서 대군으로 돌아 간 [양녕대군]이 시간 날 때마다 앞에 보이는 [국사봉]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를 염려 했다는 [국사봉]이 아주 가깝게 조망됩니다. ['국사봉' 등산로 입구] 1:19 [양녕대군묘]에서 [행복유치원]을 찾아 가면 [국사봉 등산로] 입구를 만납니다. ['국사봉생태놀이터'] [행복유치원] 옆길로 조금 올라 가면 "국사봉생태놀이터"를 만나고 [오름길] 계속해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20여분 올라 가면 [바위] [운동시설]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정상 부근엔 지붕까지 있는 생활체육시설이 즐비했습니다. ['국사봉' 정상] 1:39~1:46 ['국사봉' 정상 이정표] "국사봉 國思峰 180.9m"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양녕대군묘]에서 언급 한바와 같이 [國思峰]이라 한다는데 정상에는 사설단체들이 세운 '스승 사 師'를 사용하는 [國師峰]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무학대사]가 조선 개국시에 이 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보았다고... 그러니까 [國思峰]과 [國師峰]을 혼용하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운동시설과 전망대] [관악구 봉천동]과 [동작구 상도동]의 행정구역 경계인 [국사봉]인데 주변 주민들에게는 인기 있는 건강생활 등산로인듯 합니다. [내림길] [정자] [내림길] 제법 가파른 국사봉 내림길을 8분 정도 내려 가면... ['사자암'] 1:54 "사자암 獅子庵"이라는 절간이 보이는데 안내문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내림길] ['재넘이고개'] 2:00 다시 내림길을 6분여 더 내려 가면 "재넘이고개"에 도착합니다. [상도3동]의 최상단에 있는 도로더군요. 좌측으로 잠시 진행하면... ['장미어린이공원'] 2:06 [장미어린이공원]이라는 조그만 공원을 만나는데 여기서 [노량진]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상도3동' 마을길 통과] [상도동] 마을 골목을 13분여 내려 가면... ['성대전통시장'] 2:19~3:22 (약1시간 뒷풀이) ['성대전통시장'] "성대전통시장"을 만나는데 시장 안 순대국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한잔하고 ['신대방삼거리역'] 3:23 [신대방삼거리역]에서 [7코스-6코스] 답사를 마치고 귀가했습니다. ['7코스-6코스' 실트랙 구글어스] ['7코스-6코스' 실트랙 국토지리원지도] 안내판에는 [6~7코스]의 거리가 8.4km라고 알리고 있으나, 제가 알바 포함 실제 걸은 거리를 GPS로 측정한 결과는 11.3km였으며 4시간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관악지맥 마지막구간 산행기 http://blog.daum.net/paraanmoon/7801493 여기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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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

 
동작충효길6~7코스.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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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숲*남산길』
 
 『서울의 봄을 즐기다』
 
  "서울숲-응봉산-금호산-매봉산-남산"


  ['서울숲-남산길 안내도']        ★ 클릭하면 확대 ★ 
  <서울숲-남산길>에 대한 안내도 입니다.
  미리 숙지하고 떠나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서울숲 1번 출입구']                
  2022년 4월 10일 (일)  맑음             
  <서울숲-남산길>을 다녀 온지가 한달이 넘었는데 사정상 이제야 포스팅 합니다.
  <서울숲-남산길>은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하는 봄에 가야 제 맛 입니다만
  다녀 온지가 좀 지났지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
  <수인분당선>을 타고 <서울숲역3번출구>로 나가 <서울숲 1번출입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방문자센타']                     
  <서울숲 1번출입구> 안쪽에 <공원관리사무소>와 <방문자센타>가 함께 있습니다.
  <방문자센타>에서 안내팜플릿등을 얻어 참고하며 우측 뒤로 나가면...


  ['서울숲-남산길 출발지']                 

  [현위치]                        
  "서울숲-남산길 시종점"을 만납니다.
  현위치와 앞으로 진행 할 길에 대한 안내도가 설치되 있고...


  ['옛 경마장' 입구]

  ['서울숲' 발자취]                      
  <서울숲>은 <조선> 초기부터 <살곶이목장>이라는 <말 목장>이 있던 곳이죠.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첨부 되 있는 
  "<서울역사탐방> 살곶이목장과 모진여인을 찾아서"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벚꽃]                
  벚꽃 씨즌에 맞춰 갔기에 <서울숲>의 벚꽃을 맘껏 즐기고



  ['구름다리']              
  공원의 서쪽으로 가면 <구름다리>를 만납니다.
  <구름다리> 좌측으로 올라 가면...


  ['서울숲 9번 출입구']                  
  <서울숲 9번출입구>로 나가게 되는데...


  ['성수대교 북단 사거리']            
  <서울숲 9번출입구> 앞에는 <성수대교 북단 사거리>가 있는데 북쪽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용비교' 앞]

  ['용비교']                  
  "용비교 龍飛橋"만나는데 건너편에 잠시 후 오를 <응봉산>이 조망됩니다.
 

  ['중랑천']

  ['경의중앙선']                        
  <동부간선도로>가 지나는 <중랑천>과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응봉역>을 바라보며 <용비교>를 건너 가면...


  ['응봉' 입구]                 
  <용비교> 끝에 <응봉산 입구>가 나타 납니다.
  계단을 따라 앞에 보이는 쉼터 정자로 올라 가면...


  [쉼터]

  [정상 방향 조망]                 
  주민들과 방문자들을 위한 쉼터가 조성되 있고



  [오름길]                   
  개나리가 만발하는 오름길을 올라 가면...


  ['응봉' 정상]             
  "응봉산 鷹峰山 110.5m"
  <88올림픽>이 개최 될 즈음에 이 산은 볼품없는 초라한 돌산이었지요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개나리 20만 그루를 심어 가꾸었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응봉산 개나리>는 <서울에서 봄을 제일 먼저 맞이 하는 곳>이라고 알려지게 되고
  이젠 개나리의 명소로 봄이면 축제까지 열린다고 합니다.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에서 보이는 <응봉 개나리>는 너무 아름다워 언젠가는 한번 올라 가
  보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찾아 왔습니다.


  [조망]                 
  조망처로 나가서 조망을 하면...


  [조망 1]                     
  동쪽으로는 출발지였던 <서울숲>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데
  <삼표레미콘공장>이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군요.


  [조망 2]             
  남쪽으로 조망되는 광경은 이곳 아니면 볼수 없는 경관을 보여 줍니다.


  [조망 3]       
  <중랑천>이 <한강>과 합수하는 이곳은 "입석포 立石浦"라는 나룻터가 있었었다고


  ['독서당 공원' 가는 길]                    
  <응봉 정상>에서 <독서당공원>으로 가는 길인데
  개나리로 출입구를 만들어 개나라산의 명성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내림길] 

  [갈림길]                           
  내림길을 잠시 내려가면 갈림길을 만나는데


  [급경사 계단]

  [육교]                    
  급경사 계단으로 연결되어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2동> 옆으로 올라 가면...
  

  ['독서당 공원']           
  조그마한 가로공원인 "독서당 공원"을 통과하고
 


  ['대현산 장미원']       
  이어서 "대현산 장미공원"을 만납니다.
  아직 장미 씨즌이 아니라 벚꽃 만 구경하고
  

  ['금봉어린이집']                  
  이어서 <성동구청>이 설립 운영한다는 <금봉어린이집> 정문을 지나면


  ['응봉근린공원(대현산)']               
  "응봉근린공원(대현산)"을 만납니다.
  조금전 <응봉>이 <작은응봉산>이고 이곳 <대현산>이 <큰응봉산>이랍니다.
  공원을 잠간 통과하여
 

  ['공원 출구]

  ['논골사거리']               
  공원출구로 나가 조금 진행하면 "논골사거리"를 만납니다.
  직진해서 올라 가면...
 

  ['대현산 배수지 공원' 입구]                       
  지도에는 또 다시 <응봉공원>이라고 표기 한 "대현산 배수지 공원"을 만납니다.



  [ '대현산 배수지 공원']            
  벚꽃이 허드러지게 핀 "대현산 배수지 공원"을 통과하여 좌측으로 나가면...


  [공원둘레길]                 
  공원둘레길이 이어지고


  ['대현산 배수지 공원 관리소' 출입구]         
  이 동네 공원은 온통 <응봉>이라는 이름이 붙는 공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주택가가 형성 되기 전에는 <남산>에서 뻗어 내리는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들을 통칭하여
  <응봉> 또는 <매봉>으로 불리워지고 정식 명칭이 <대현산>이었나 봅니다.
  <대현산배수지> 정문을 나서서 앞에 보이는 사거리의 왼쪽으로 진행하면...


   ['응봉근린공원(금호산) 입구']                
   이번엔 <응봉근린공원(금호산)> 입구를 만나 올라 가고...


  [마을버스 종점]

  ['응봉근린공원(금호산)']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곳에 "응봉근린공원(금호산)"이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여기는 <금호동>인가 봅니다.


  [갈림길]                    
  공원길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안내 표지에 따라 우측으로 올라 가고



  ['응봉근린공원(금호산) 정상']            
  "응봉근린공원(금호산) 정상"에 오릅니다.


  [내림길] 

  ['남산' 조망]                    
  <금호산 정상>에서 내려 가면 <남산타워>가 보이기 시작하고


  [유아숲]

  ['금호터널' 위 고개]                     
  <금호터널 위 고개>를 지나면...
 

  [공원길]

  ['서울방송고등학교']              
  <서울방송고등학교>와 <서울동호초등학교>를 만나며



  [오름길]

  [쉼터]                       
  계속해서 오름길을 오르다 만나는 쉼터에서 좀 쉬어 가기도 하고


  ['매봉산 안내판']

  [오름길]       
  이번엔 <매봉산>으로 올라 갑니다.


  [정상 앞 갈림길]                       
  <매봉산 정상> 바로 앞에서 <서울숲-남산길>은 우측으로 안내 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매봉산 정상>을 다녀 옵니다. 매우 가깝습니다.


  ['매봉산' 정상]               
  <매봉산>이나 <응봉산>은 같은 의미인데 구분을 위해선지 이곳은 
  "매봉산 172.7m"이라고 지도에 표기되 있는데, 팔각정의 이름은 또 다시 <응봉정>이군요.
  몇번 다녀 간바 있는 <매봉산>에서 잠시 조망을 하면...
  
       
  [조망]             
  동남쪽 중앙에는 <서울숲>이 보이며,
  좌측 멀리 <용마산-아차산>과 <롯데월드타워>가 조망됩니다.
 

  [내림길]

  ['남산' 조망]                       
  <남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한남테니스장' '응봉유아숲 체험장' 출입구]

  [내림길]                      
  <'한남테니스장' '응봉유아숲 체험장' 출입구>를 건너 다시 계단 내림길을 진행하면...


  ['버티고개 생태통로']                    
  "버티고개 생태통로"를 건너고
 

  ['버티고개' 앞 한남로터리]                 
  이어서 <장충동>과 <한남동>, <신당동>으로 연결되는 로타리로 내려 서서
 


  ['버티고개 유래']                      
  <장충단공원> 방향으로 올라 가면...


  ['남소문 터']                       
  고갯마루에 "남소문터"가 있었다는 표지석을 만납니다.
  현재의 <남소문>은 <광희문>이죠.


  ['국립극장' 입구]                     
  이어서 <국립극장> 입구로 건너가면


  ['국립극장 해오름']                  
  "국립극장 해오름" 앞을 통과하여 <남산>으로 올라 갑니다.


  ['남산' 오름길]                            
  벚꽃 씨즌을 맞아 상춘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남산으로 올라 가면...



  ['남산둘레길']                         
  봄꽃이 만발하는 <남산둘레길>을 만나는데....
  <서울숲-남산길>은 <남산 정상>으로 올라 가지만, 교통 편의를 위해 우측 <장충단공원>으로 갑니다


  ['석호정']                    
  조선시대 한양 5대 활훈련장 중에 하나였던 <석호정>을 지나서


  ['장충단공원' 갈림길]                     
  <남산둘레길>을 버리고 우측 <장충단공원>으로 방향을 바꾸면...


  ['신라호텔' 조망]                 
  <신라호텔>이 정면에 조망됩니다.
  <장충단 奬忠壇>은 요즘의 <국립 현충원> 같은 곳인데 ...저곳에 원래 <장충단>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안중근의사>가 저격한 <이또 히로부미>를 쪽바리들이 추모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로 지은 "박문사 博文寺"라는 <신사 神寺>가 있던 자리 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한자 이름이 "이등박문 伊藤博文"이어서 <박문사 博文寺>가 되었는데
  만이천평의 부지에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죠..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3용사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하였답니다.
  바로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입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저곳에서 <대통령 취임 축하연>을 연다고 합니다.
  축하연 열 장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알수 없지만 괜한 억측이 생기는 건 우연일까


  ['장충리틀야구장']                 
  <장충리틀야구장>을 지나면...
 

  ['장충단공원']

  ['수표교']                    
  "장충단공원 奬忠壇公園"이 이어지며 
  <청계천>에 있다가 옮겨 놓은 "수표교 水表橋"를 보며 내려 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예전엔 만발하던 벚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이 <박문사 앞>이어서 쪽바리들이 벚꽃나무 수천그루를 심어 <장충단>의 의미를
  홰손하려고 했기에 근간에 전부 제거 했나 봅니다.


  ['장충단비']

  [안내문]                        
  "장충단비 奬忠壇碑"
  치욕의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경식> <홍계훈>등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요즘의 <현충원> 같은 곳이 <장충단>이었습니다.
  이 <장충단비>가 세워진 원래 자리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드시
  쪽바리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라는 신사를 지으며 홰손한 비석을
  1969년에 아곳으로 옮겨 세웠답니다.
  비석의 글씨는 무늬만 조선왕이었던 <순종>이 썻다고....
 

  ['동대입구역 6번 출입구']                     
  오늘 걸은 거리는 약10km였으며 3시간 35분 정도 걸렸습니다.
  <지하철3호선>이 지나는 <동대입구역>에서 답사를 마치고 귀가 했습니다.
  **별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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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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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뒷산』
      『북악산 신규 개방등산코스 Ⅱ』 


  ['국토지리원 지도']          
  <삼청동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삼청공원 후문> 앞을 통과하여 <삼청안내소>로 들어가
  <삼청쉼터>에서 좌측 방향으로 올라 <청와대전망대>를 둘러 보고, <만세동방>이라는 약수터를 지나
  <청운대전망대>를 통과하고, <청운대쉼터>로 올라 <촛대바위>를 보고, 다시 <청운대전망대>로
  돌아와 <법흥사 터>로 내려 가 <삼청공원>을 통과하며 하산 하였습니다.


  ['삼청터널길']             10:25          
  2022년 6월 1일 수요일 맑음 
  <서울역>에서 <11번마을버스>를 타고 <삼청동삼거리>에서 내려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 가는 <삼청터널길>로 잠시 올라 갑니다.
  참고로 <삼청동> 가는 <11번마을버스>는 요즘 주말이나 휴일에는 승객이 많아 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점인 <서울역>에서 승차했는데 다음 정류장인 <시청>에서 만원을 이루었으니
  참고 해야 할것입니다.


  ['삼청공원 후문']               10:27         
  <삼청동삼거리>에서 데크길을 이용하여 100m 정도 올라 가면
  "삼청공원 후문"을 만납니다.
  "북악산 신규개방등산코스 Ⅱ"의 출발지가 되겠습니다.


  [산행안내도]       
  <삼청공원 후문> 앞에 설치된 안내도에 제가 실제 진행한 괘적을 표기 했습니다.


  [쉼터]            10:28              
  <삼청공원 후문>에서 조금 올라 가면 쉼터를 만나고
 

  ['삼청안내소' 입구]              10:30            
  이어서 조금 전 <삼청공원 후문> 앞에서 헤어졌던 <삼청터널길>을 다시 만나 건너 
  녹색 철문 안으로 들어 가면...


  ['삼청안내소']              10:31              
  "삼청안내소"가 반겨 주는데, 등산코스 안내 팜플릿이 비치되 있으며
  화장실도 있습니다.


  [오름길]             
  계속해서 오름길을 5분 정도 올라 가면....


  ['삼청쉼터']                 10:36~10:40     .
  <청와대 경비병>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던 곳을 만나는데
  이곳에 "옥호정 沃好亭"이라는 "삼청쉼터"가 있습니다.


  [갈림길]            10:40    
  "옥호정 沃好亭" 앞에는 삼거리 갈림길이 있습니다.
  <북악산 신규개방등산코스Ⅱ>는 이곳에서 좌측길이던 우측길이던 올랐다가 다시 원점회귀하는
  곳이 이곳 삼거리가 되겠으니 어느 방향으로 가던 상관은 없겠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좌측으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하더군요.


  [안내도]                       
  "옥호정 沃好亭" 앞에는 친절하게 안내도가 설치되 있더군요.
  저는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시계방향>인 좌측길로 진행하여 돌아 내려 왔습니다만...
  등산 초보들과 동행하는 경우엔
  한가지 알고 가면 좋은 팁은 직진코스인 <법흥사 터> 방향으로 올라 <청운대전망대>에서
  <시계반대방향 코스>로 내려 오는 코스가 조금은 힘이 덜 들겠습니다.
  <청운대전망대>에서부터는 긴 좌측길이 대부분 내림길이기 때문이니 참고하시고...



  [오름길]              10:44        
  <옥호정>에서 부터 <만세동방>으로 오르는 길은 초입부터 계단과 급경사가 이어지지만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 4분여만 오르면 첫번째 봉우리에 오르고



  [산불진화장비함]              10:47    
  계속해서 내려가고 오르고를 반복하면 <산불진화장비함>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합니다.


  ['백운1교']                        
  이어서 계곡을 하나 건너 가는 내림길을 내려 가면서 정면에 보이는 <북악산>을 바라보면...


  ['백악산 부아암' 조망]                    
  아는 사람들만 아는 유명한 "백악산 부아암 白岳山 負兒岩"이 쬐끔 보이는군요.
  "아기를 업은 엄마" 같은 형상이라는 "負兒岩"은 <백악산(북악산)>의 랜드마크라 할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백악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백악산 白岳山"이라는 그림입니다.
  바라보며 그린 각도가 <효자동> 근처인듯 하여 조금 다릅니다만, 이곳에서도 보는 감흥은 같습니다.


  ['백운2교']               10:48         
  이어서 "백운2교"를 건너서                    



  [오르내림]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오름길]                  
  다시 계단 오름길을 오르면....


  [★중요한 삼거리★]             10:54      
  이정표가 있는 중요한 삼거리를 만납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이 생기는 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민 할 필요 없겠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청와대전망대"를 다녀와 우측 "만세동천"으로 가면 됩니다.


  [안내도]                    
  이곳 삼거리에 친절하게 안내도가 설치되 있으니 참고하고
  좌측으로 20m쯤 가면...


  [★'청와대전망대' 갈림길★]            10:55      
  <청와대 철제 펜스>를 통과하자 마자 우측으로 <청와대전망대>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청와대전망대' 가는 길]                 
  <청와대전망대>로 가는 길은 "일방통행"이니 한바퀴 돌아 원점 회귀하면 되겠고...
  

  ['청와대전망대']             11:00      
  "청와대전망대"는조금 협소한데 노인 해설사 한분이 열변을 토하며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식 해설사인지 개인적으로 하는 해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설명을 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설명 속엔 다소 편향된 내용을 강조하며
  역사학자나 되는 것처럼 침을 튀기며 씨부리고 있더군요.
 

  ['청와대' 조망]                      
  <청와대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광경입니다.
  예상보다는 <청와대>가 그리 넓지는 않군요.
  조선 초기부터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이었죠.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좋은 역사이던 흑역사이던 간에 우리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니 
  잘 보존하며 더 의미있는 용도로 활용 해야 겠습니다.


  [내림길]             
  <청와대전망대>에서 내려 가면 경비초소였던 건물들이 있고
 

  ['백악정' 갈림길]                11:05     
  이어서 "백악정 갈림길"을 만나는데
  <춘추관> 옆 등산로와 <칠궁> 옆 등산로 입구에서 올라 오는 코스와 만나는 곳이더군요.
  이곳에 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안내도]                     
  안내도가 있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청와대>의 좌우에 있는 <칠궁>과 <춘추관>에서 오르는 등로를 알수 있습니다.
  다음에 이 코스도 올라 봐야 겠군요.


  ['청와대전망대' 갈림길 회귀]             11:10     
  일방통행인 <청와대전망대>를 한바퀴 돌아 나와

                

  ['만세동방' 오름길]                
  <만세동방 약수터>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계단이 없는 일반 등로로 제법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만세동방 약수터']                 11:16~11:19   
  "만세동방 약수터"
  <고종 황제>도 마셔 보았다는 약수입니다만, 현재는 마실수 없는 물이더군요.
  '화살표'로 표기 한 곳이 약수터입니다.
['만세동방 약수터']
약수터 전경입니다. 약수터는 암벽에 움푹 패인 곳에 물이 고여 있는데. 바위 속에서 솟아 나는 물이 아니고 바위 위에서 흘러 내린 물이 고여 있는듯...
['萬歲東方']
"萬歲東方 聖壽南劇" "임금님 오래 오래 사세요~"라는 뜻이랍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의 중국 전설이 여기에서도 활용되고 있군요. "三千甲子 東方朔" <동방삭>이가 몇살까지 살았는가를 알려 주는 말이죠. <甲子>는 <60년> 만에 한번 돌아 오니까 三千번이면 <180,000년>이니 무지무지 오래 살았다는거죠. <중국 漢나라> 때 인물로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를 훔처 먹어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저승사자>를 잘 꼬셔서 접대를 잘해 오래 산것으로 회자되곤 하죠. <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사자>가 만들어 낸 아이디어가 잼있죠. 십팔만년이나 살아서 거의 귀신 수준으로 신출귀몰해 잡을 수 없는 <동방삭>이를 잡기 위한 아이디어. <저승사자>가 <탄천>에서 숯을 몇년간이나 씻고 있으니, 지나가다 본 <동방삭>이 한마디 합니다.. "세상에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 씻는 놈은 처음 본다"라고 말하자 <저승사자>들이 이 놈이 <동방삭>이라는 걸 확신하고 덮쳐 <동방삭>을 체포하여 저승으로 보냈다는거죠. ㅎ ['청운대전망대' 가는 길] <만세동방 약수터>에서 13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청운대전망대'★] 11:32
매우 중요한 삼거리인 "청운대전망대"에 도착합니다. <북악산 신규개방코스Ⅱ>는 여기서 우측 <삼청안내소>방향으로 가서 <법흥사>로 내려 가면 됩니다. 저는 여기까지 왔으니 <한양성곽>이 있는 <청운대쉼터>와 <곡성><촛대바위>를 돌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아 우측 <삼청안내소> 방향으로 하산하겠습니다. ** 성곽으로 올라 가는 분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 와야 <법흥사 터>로 갈수 있습니다. 이번 <신규개방코스Ⅱ>의 핵심 중 하나가 <법흥사 터>이니까요. [뒤돌아 본 '청운대전망대'] <한양성곽>이 있는 <청운대쉼터>로 올라 가며 뒤돌아 본 <청운대전망대>의 모습입니다. 다녀 와 좌측 <법흥사>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오름길] 이름이 <청운대 전망대><청운대 쉼터>여서 서로 붙어 있는 걸로 생각하면 큰 오해...ㅎ 가파른 계단 오름길을 올라야 <청운대전망대>에서 <청운대쉼터>로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망대>가 <쉼터>보다 훨신 아래에 있으니 혼동이 올수 밖에...ㅎ 보통 <전망대> 아래에 <쉼터>가 있죠? ['한양성곽'] 11:46 헥헥거리며 계단을 오르면 <한양성곽길>을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에 있는 <청운대쉼터>를 다녀와 우측 <곡성><촛대바위>를 다녀와서 올라 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 가야 합니다. [안내도] 이곳에 설치된 안내도를 참고 하고... 안내도에 표기된 <촛대바위 쉼터>와 <촛대바위 전망대>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청운대전망대>와 <청운대쉼터>와 같이 완전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1차 북악산 개방코스' 출입문] 이곳은 "북악산 개방코스Ⅰ"과 <한양성곽 순성길>과 만나는 곳입니다. 2020년 11월에 1차로 개방된 코스가 우측에서 올라와 만나는 곳이죠. 자세한 사항은 제가 당시 답사한 답사기를 참고 하고 "북악산 개방코스Ⅰ 산행기" 여기클릭 ['청운대 쉼터'] 11:48~11:54 "청운대쉼터"에 올라 화장실을 이용하고 조망을 합니다. 아곳은 <북악산 개방코스Ⅰ차> 때에 만들어진 곳이죠. [조망] 조망을 하는데 여기선 <청와대> 방향은 보이지 않고 동쪽이 조망됩니다. ['한양성곽길'] ['곡성' 조망] 11:57 오늘 코스에서 제일 높은 곳인 <곡성>으로 갑니다. ['곡성'] 11:59 "곡성 曲城" 입구를 지나면 ['곡성'에서 조망] <경복궁> 방향이 조망되고 ['촛대바위 전망대'] 12:05 이어서 "촛대바위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촛대바위'] "촛대바위" 일제가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지만 광복 후 제거했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촛대바위'라 칭했다고 하는 바위입니다. 그리고 옛 임금들이 이 바위를 거점 삼아 백악산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일제와 쇠말뚝" 쪽바리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는다고 전국 요소 요소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이 계획과 실행은 누가 했는지 아시나요?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한것입니다. 쪽바리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정기와 맥을 알겠습니까 쪽바리들에게 빌붙어 아부하기 위해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죠. 이런 짓을 한 인간들의 이름들은 생략합니다.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선 민족의 얼과 정기까지 끊으며 아부 한것이죠. 앞으론 "쪽바리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라고 하지 마시고,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박았다고 해야 합니다. ['삼청각' 조망] 12:10 "삼청각 三淸閣" 1972년에 개관하여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던 최고급 요정이었죠. 그후 민주화로 요정정치가 종말을 고하니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2000년에 서울시가 인수하여 문화시설로 지정하여 리모델링해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새로 열었지만... 현재 예식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을 운영하는데 '세종문화회관'이 경영한다고 하네요. 결혼식 때문에 한번 가 봤는데 한정식 음료 차등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과 '구진봉' 조망]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신혼여행 코스로도 각광을 받던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ㅎ <구진봉>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접근금지 ['청운대 쉼터' 갈림길 회귀] 12:26 다시 <청운대쉼터 갈림길>로 돌아 와 <청운대 전망대>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가파른 긴 계단을 내려 가면서 좌측을 바라보면... ['촛대바위' 조망] 조금전에 찾아 봤던 <촛대바위>가 보입니다. <촛대바위 전망대>는 위에 있고, <촛대바위 쉼터>는 아래에 있습니다. ['청운대전망대' 회귀] 12:30 다시 "청운대 전망대"로 돌아와 좌측으로 2~30m 정도 가면... ['법흥사' 갈림길] 12:31 이정표가 있는 데크 계단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정표에 <삼청안내소(화장실)>이라고만 알리고 있어 이 길이 <법흥사 터>로 가는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더군요.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우측으로 내려 갑니다. 이정표에 <법흥사>를 표기 하면 좋겠습니다. [내림길] ['법흥사터'] 12:35~12:38 계단 내림길을 4분여 내려 가면 <법흥사 터>를 만납니다.
"법흥사 터"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는데 지난번 <문재인대통령>이 이 코스 개방 행사 때에 이곳을 올라와 쉬며 앉은 주춧돌이 뉴스를 장식해서 그 주춧돌을 찾아 보는게 급선무...ㅎㅎ 현재 밧줄로 <출입금지>를 시키고 있는 곳인데...그런데도 들어가 왁자지껄 노는 사람들이 많군요.
[줌인한 '법흥사 주춧돌'] ['문재인 대통령'] ☆ 신문 사진 캡쳐 ☆
보수매체와 일부 불교계에서 "성불 聖佛"에 앉았느니 뭐니 해서 뭔가 궁금했는데 건물 주춧돌이었습니다. 좀 모양있는 주춧돌이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공원이나 산으로 가면 흔히 볼수 있는 쉼터의 돌의자와 별반 다를 바 없더군요. 앉아 쉬기엔 딱! 좋은~~ㅎㅎ 저 주춧돌은 아직 유적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평범한 주춧돌인데 의미부여를 해서 "불교를 기만 했다"는 둥 아무리 퇴임하는 대통령이라 해도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막말을 퍼부었지요.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불교계가 건물 주춧돌에 좀 앉았다고 할수 있는 말인가. 내 맘에 않들면 무조건 씹는 풍토는 바뀌어야 그들도 모두도 즐거운 사회를 만들수 있는게 아닌가요 현재는 그런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출입금지>를 시키고 있는데 이 또한 단편적 생각이지 않나요. 주춧돌을 그렇게 "성불 聖佛"로 모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수 있도록 개방해야지 밧줄로 포위를 해 출입금지를 시키며 고립시켜야 되겠습니까? <출입금지>를 시켰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주변에서 음식을 먹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골키퍼'가 있어도 골은 들어 간다~~ㅎ [내림길] <법흥사 터>에서 8분여 내림길을 내려 가면... ['삼청쉼터'] 12:46 오전에 만났던 "삼청쉼터 옥호정"을 다시 만나고... 앗! 외국인 여자들의 옷차림새가 이채롭습니다. 등산을 왔는지 해수욕장을 왔는지 구별이 어려워...ㅎㅎ ['옛 수영장 터'] 오늘은 와이프와 함께 <북악산>을 올랐습니다. 옛 수영장 터를 지나 5분 여 더 내려 가면.... ['삼청안내소'] 12:51 <삼청안내소>를 벗어 나고 ['삼청터널길']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 가는 <삼청터널길>을 건너서 ['삼청공원'] 12:58 이번엔 "삼청공원 三淸公園"을 통과합니다.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1:00 <삼청공원>에는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이 있죠. ['삼청공원 정문'] 1:03 "삼청공원 三淸公園" 정문에서 "북악산 신규개방코스Ⅱ"를 마침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5.2km로서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여기서 계속 <북촌한옥마을>을 통과하여 <운현궁> <낙원상가>를 지나 <백병원> 앞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총 걸은 거리는 10km 정도였습니다. **부록** "북악산 개방코스Ⅰ 산행기" 여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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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삶, 끝 없는 그리움』 [서울 종로]"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유적 답사기 낙산공원입구-비우당-청룡사 정업원-동망봉-동망정-여인시장-영도교 [구글맵] [구글어스] ['숭인동' 안내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낙산공원입구"에서 출발하여 "단종비 정순왕후 유적"을 따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을 둘러보고, "청계천 영도교"까지 약3.3km를 갑니다. ['낙산공원' 입구] 3:05~3:09 2020년 5월 19일 (화) 맑음 구름 조금 [6호선 창신역 4번출구]에 내려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번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좁은 마을길을 잠시 올라 [한양성곽]에 있는 "낙산공원 입구"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3번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신쌍용아파츠2단지' 조망] [낙산공원]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낙산길]을 따라 먼저 "비우당"을 찾아 갑니다. [비우당]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옆에 있으니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됩니다. 150m정도 직진하면... ['낙산삼거리 버스정류장'] 3:11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담에 붙어 있는 [낙산삼거리버스정류장] 옆에 [비우당]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길안내를 합니다. 200m 정도 아파트 담을 따라 가면...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앞]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3:15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을 만나는데 [비우당]은 아파트 정문 옆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비우당'] 3:17~3:22 3~40m 정도 내려 가면 초가집을 하나 만나는데, 이 초가집이 "비우당 庇雨堂"이더군요. 건너편에 보이는 절간은 [원각사]라는 절인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최근에 지은 절이었습니다. ['비우당' 안내문] "비우당 庇雨堂"에 대해선 위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파란문'은 "지봉 이수광선생 芝峯 李睟光"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선진외국문물을 깊이 있게 습득했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켜서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게 되었답니다.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글] "지봉유설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죠. 우리나라 문화 문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망라하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지봉유설]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듯 하죠? ㅎ 또한 청백리로 유명하다는건 이 집 만 봐도 알수 있죠? "비우당 庇雨堂"이라는 말의 뜻이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 초가집은 원래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선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이 새서 우산을 받히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살까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는데 [지봉 이수광선생]에게 상속되어 개보수해서 "비우당 庇雨堂"이라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지동천'] "자지동천 紫芝洞泉" ^.^ 발음에 유의해야 하는데, 현재의 '창신동' 주변을 옛날엔 "자지동 紫芝洞"이라 했답니다. [자지 紫芝]는 '영지버섯'과 비슷한 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이랍니다. 자주색 물이 나온다고... 이 주변에 그런 버섯이 많이 자생했나본데,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로 빨래를 하니 빨래에 자주색 물이 들었답니다. 폐비가 되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비단 등 천에 자주색 염색을 해주면 주변 여인들이 염색한 천을 내다 팔아 주고 채소 등 먹을거리를 담 너머로 던져 주곤하며 식생활을 이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그런 우물터라 유명해졌답니다. ['낙산길'] 3:24 ['명신초' 앞] 3:27 [비우당]과 [자지동천]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명신초등학교]와 [숭인교회]를 지나 우회전하여 잠시 더 내려 가면... ['청룡마트' 앞 사거리] 3:30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 [청룡사]와 [정업원터]를 보고 다시 이 사거리로 나와 앞에 보이는 [동망봉]으로 가야 합니다. ['청룡마트'에서 '청룡사' 조망] 3:31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고 앞에 [청룡사]가 보입니다. ['청룡사'] 3:32~3:39 [대웅전] "삼각산 청룡사 三角山 靑龍寺"는 비구니 요람이라는데... 고려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낳은 [경순(慶順)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였으며, "세조 3년(1457)"에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출가하여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보낸 곳이어서 우리에겐 "한 많은 장소"로 알려져 있지요. ['우화루'] "우화루 雨花樓" 1457년 6월 22일 (세조3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헸던 곳이라 하니 "雨花"라는 말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꽃비가 내리다..." ['단종실록' 1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단종실록]도 아니고 [노산군일기]라고 나옵니다. 비극의 시작인 그 첫장을 한번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정통(正統) 6년 신유년001) 7월 23일 정사(丁巳)에 나서 무진년002) 4월 초3일 무오(戊午)에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년003) 8월에 문종(文宗)이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신미년004)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勅]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3년 임신년005) 5월 14일 병오(丙午)에 문종(文宗)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정업원'] "정업원 淨業院"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청룡사" 좌측 끝에 있습니다. "정업원 淨業院"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던 곳을 의미 한답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고려 공민왕]의 "惠妃"가 폐위되어 머리 빡빡 깍고 중이 되어 산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낳은 2남1녀 중에 아들 [방번]과 [방석]이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기와 비구니로 살았고 아시다시피 [단종]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어 외롭게 한많은 삶을 산 곳이기도 하죠. ['정업원'] "前峯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 어천만년"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 - 조선 21대왕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친필 - ['정업원구기']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정업원 옛터' 신묘년(1771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떠나간지 170여년이 흐른후 [영조]가 찾아와 이곳이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친필로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13살 때에 14살의 [정순왕후]가 간택되어 부부가 되었지요. [정순왕후]를 [단종]의 王妃로 간택되도록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수양대군-세조]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단종]을 왕위에 앉힌지 1년만에 상왕으로 내밀고, 그후 2년만에 '영월'로 귀양 보내 죽여버렸죠. 졸지에 왕비에서 노비가 되어 궁궐에서 쫒겨난 [정순왕후]는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이곳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요즘 같으면 '오거돈' 같은 놈 ~ ㅎ '코로나바이러스균'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숙주 宿住"라고하죠? ㅎ 한자야 틀리지만 '신숙주'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같은 놈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ㅎ ['청룡마트' 앞 사거리] 3:40 [청룡사]와 [정업사터]를 돌아 보고 다시 [청룡마트] 앞 사거리로 돌아와 우회전 하면... ['동망봉' 조망] 3:41 [숭인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동망봉]이 조망됩니다. 좌측 너른 길로 올라 가면... ['숭인근린공원' 입구] 3:43 ['동망봉' 정상 입구] 3:45~3:51 "동망봉 정상 입구"에 도착합니다. ['숭인근린공원 안내도'] [숭인근린공원 안내도]를 숙지하고 [동망봉 정상석]을 찾아 올라 갑니다. ['동망봉' 정상 배드민튼장] [동망봉 정상]은 배드민튼장과 어린이 놀이 시설, 그리고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주민들의 건강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동망봉 표지석' 위치] ['동망봉 표지석'] [동망봉 정상석]은 배드민튼장 우측 공원 둘레길에 있었습니다. "동망봉 東望峰 93.2m" [정순왕후]가 동쪽 '영월'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랍니다. 1771년 [영조]가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정순왕후]와 [단종]의 넋을 기리며 이 근처 바위에 "東望峰"이라는 친필을 새겼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낙산'과 이곳 "동망봉' 주변을 채석장으로 만들어 그 글씨는 없어졌다고... 제가 알기로는 쪽바리들이 여기서 채석한 돌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등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안내판] ['정순왕후'의 일대기]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만화로 만들어 놧습니다. 제가 읽기 쉽게 하나 하나 확대 편집해서 올렸으니 한번 읽어 보고 가세요~~ ㅎ ['아차산' 조망] 3:52 [동망봉] 정상에서 내려 가면 [아차산] [용마산]이 조망되는데...'영월'은 어디매뇨~ ['동망각']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동망각]과 쉼터 정자가 있는데 [영조]의 친필을 각인한 "東望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군요. [공원길] ['숭인제'] ['유아숲 체험장'] "숭인근린공원"은 주민들을 위해 예상보다 잘 조성된 근린공원이었습니다. '달동네'라고만 알고 있었던 '창신동'과 '숭인동'이었는데 그런 관념을 깨주는 공원이엇습니다. ['동망봉 북카페'] 3:57 [동망봉]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이어서 내려가면 다시 배드민튼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있고 특히 [동망봉 북카페]가 눈길을 끕니다. 들어 가 봤더니 비치된 책도 많고 몇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동망정'] 4:00 [안내문] "동망정 東望亭"은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정자라고 합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진정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그녀는 1440년에 태어나서 15살이 되던 해인 1454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定順王后"가 된거죠. 1년 정도 왕비로 살다가 [단종]이 上王으로 밀려나니 그녀는 "의덕왕대비 懿德王大妃"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에 '왕비' '대비'까지 역임했으며, 그리곤 폐서인이 되어 '노비'로 떨어졌지요. 최단 초고속 변화였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그녀는 무지무지 오래 장수했습니다. '1521년 7월 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나이가 82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엄청 장수 한거죠. 더 실감나게 풀어 드릴까요? ㅎ 그녀는 '1440년'에 탄생했으니 그때가 [세종대왕]이 즉위 22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장남이며 자신의 시아버지인 [문종]이 1450년에 즉위하였으나 일찍 죽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지배하다가, 1468년에 [예종]이 왕이 되고, 또다시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94년엔 [연산군]이...그리고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즉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인 "1521년 7월7일"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권력찬탈과 쿠데타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산것입니까?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세종대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시대까지 여덟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렁다면 그녀는 과연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구중궁궐 권력암투 속에서 골치 아프게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오래 살수 있었을까.... '파란문'은 [정순왕후]의 인생을 비록 과부로 살았지만 장수했으니 그렇게 슬프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수 있다면 그까짓 '왕비'에서 과부가 되더라도 뭔일 있겠습니까? ㅎ 권력을 쥐려고 피비린내 나게 형제 자매 죽이며 살면 뭐합니까. 허무하게 일찍 죽는걸.... ['영월 방향' 조망] [정순왕후]가 첫사랑 [단종]을 애타게 기다리며 돌아 오길 기원하던 동쪽 '영월' 방향엔 마천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애절함은 느낄수 없고... ['한양성' 조망] 서쪽으로는 [한양성곽]이 "낙산"을 자나가고 있는데 [한양성곽]을 이루는 [인왕산]이 조망되며 그 뒤로 [안산]도 보이는군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은 바로 [한양성곽]과 거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살던 [경복궁][창경궁]이 몇km도 않되는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았으니 그녀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비극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찾아 보기 위해서 여기서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좀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을 꼽으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종대왕]을 꼽지요? 하지만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입니다. 왜냐구요? 지금부터 '세종대왕'의 어두운 사생활 부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식 福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자식을 자식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또한 '소헌왕후'의 친아버지, 즉 '세종대왕'의 장인까지 없는 죄를 뒤집어 쒸어 죽여버렸죠. 그가 '심온선생'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둘째, 며느리 福도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식 福'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福'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압승술'은 남편의 성적욕구를 높이기 위한 미신행위였습니다.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밤에 독수공방 시켰기에 성욕을 해결 못해 궁녀들과 레스비안을 즐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요즘같으면 남편 구실 못하는 [문종]이 위자료 주고 이혼 해 줘야 하는데...ㅎ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셋째, 사위 福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놈은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사위인 "안맹담"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자식들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넷째, 세종대왕 본인은 살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으니 그 아이로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망정'에서 출구 방향] 4:03 [동망정]에서 [묘각사]로 내려 가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야만 합니다. [문종]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계유정란"을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중에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세자빈', 즉 장차 王妃가 될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은 인간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수양대군'은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며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계단 내림길] [골목 내림길] 제법 가파른 계단과 비탈진 달동네 골목을 7분 정도 내려 가면...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4:10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안심건강길]이라고 안내하는 [숭인근린공원] 출입구를 만나 우회전하고 ['묘각사'] 4:11 [뒤돌아 본 '묘각사'] 이어서 "낙산 묘각사 駱山 妙角寺"를 만납니다. 전통사찰은 아니고 1930년에 개산한 "대한불교 관음종 총본산"이라고 하며 템플스테이가 좀 알려져 있는듯... [골목길] 골목길을 4분 정도 진행하는데 新舊가 비교되는군요. ['묘각사' 입구] 4:15 [뒤돌아 본 '묘각사' 입구] [1호선지하철]이 다니는 [종로]를 만납니다. [묘각사]와 [동망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동묘' 조망] 길을 건너 건너편에 보이는 [동묘]로 갑니다. ['벼룩시장'] 4:19 [동묘] 우측길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죠. ['동묘' 정문] 4:21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후에 神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관우 關羽"만이 중국에서 神格化되어 지금도 중국사람들 상당수가 神으로 모시고있죠. 이곳의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로서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나라]가 [선조]에게 요구해 "관우 關羽"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했답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보수공사 중에 있습니다. ['옛 여인시장'] "옛 여인시장" [정순왕후]를 위해 주변 여인들이 [정순왕후]가 염색한 옷감 등을 내다 팔고 채소시장들을 열어 식재료를 공급하곤 했다는 남자는 출입을 금하는 禁男市場이었답니다. ['영도교'] 4:24 [안내문]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 가는 영원한 이별...永渡僑" 우리들에겐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여러편의 영화로도 알려진 "端宗哀事"입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화양정"은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화양동'에 그 터가 현재도 남아 있지요.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보내고, 잠시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살곶이교"를 건너 '화양동'의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까지 이동하여, '원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4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청계천'] 4:25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며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며 '한양성' 안에 있는 유일한 개천이기도 하죠. 조선왕조 500년...27명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 중에 유일하게 힘 한번 못쓰고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라진 비운의 [단종 端宗]과 그의 비 [정순왕후]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새살림을 차리고 있으리라....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3.3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 짧은 코스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수백년을 걸은 느낌이 드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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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숙종의 길Ⅱ』중흥사-행궁지-금위영-동장대      
"[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여기 클릭 먼저 Ⅰ부를 보고 Ⅱ부를 읽으면 도움되겠습니다
['북한도1']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지난 <Ⅰ부>의 종점이었던 "중흥사"에서 부터 답사기를 쓰며 출발합니다. 이어지는 코스는 Ⅱ부로 마지막 코스가 되겠습니다. ['중흥사' 입구] 11:25 2022년 11월 2일 (수) 맑음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지난 <Ⅰ부>에서 답사기를 쓴 <중흥사>까지는 <Ⅰ부>를 참고하고 <Ⅱ부>를 "중흥사 重興寺" 입구에서 부터 답사기를 시작합니다. 우측 길로 조금 올라 가면.... ['태고사' 갈림길] 11:2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숙종>은 <팔도도총섭-성능스님>이 상주하며 근무하고 잇는 <중흥사>를 지나 <행궁>으로 갔답니다. [안내표지] 이곳 삼거리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행궁지>는 우측길로 "0.7km"만 가면 있다고 알려 줍니다. ['대남문' 오름길] <중흥사>부터 <대남문> 방향으로 <행궁> 가는 길은 갑자기 좁아 지며 험해지는데 <행궁> 근처의 길이 넓으면 적군이 침입하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길을 이렇게 좁고 험하게 했답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를 보면 여기서부터 <행궁>까지 걸어 올라 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길을 넓게 닦지 않은 이유를 그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걸어 올라 갔겠죠? [건물터] 300여년전 왕조시대 임금의 피난처가 있을 <행궁>을 머릿 속으로 그리지 않으면 이어지며 나타나는 석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없겠죠. 허물어져 황폐해졌지만 이 석축들을 보면 의미심장한 건축물들이 있었을거라는 상상은 벌써부터 웅장한 王宮을 연상케하며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호조창지'] 11:38 아니나 다를까 "호조창지 戶曺倉址"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납니다. 전쟁이 터지면 이 산속으로 도피할 "왕과 왕을 보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어마 무시한 크기로 지어져 있었답니다. <북한산성>에는 7개의 대형 식량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식량창고였겠죠? 군사들은 물론이고 아무리 왕이라해도 안 먹고 싸울수 없고, 살수도 없으니.... 최소 6개월 정도를 버틸수 있는 50만석 이상의 식량 확보는 당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청수동암문' 갈림길] 11:39 <호조창 터>를 지나자마자 바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매우 중요한 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성 좌측길은 <대남문>방향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우측 <청수동암문>방향으로는 <행궁>과 <남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북한산성>의 핵심 중심부가 되겠습니다. ['행궁권역'] 이 주변을 "행궁권역 行宮圈域"이라고 별도 안내판을 설치했더군요. <행궁>과 주변 경호, 병영시설들의 위치를 잘 알수 있습니다. [건물터] 삼거리에서 우측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행궁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건물터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행궁' 입구] 11:47 이어서 "행궁 行宮"입구에 도착하는데, 현재는 복원공사 중으로 출입이 금지되 있습니다. ['행궁' 복원 공사중] [안내문] 그래서 우측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서 <행궁터>를 내려다 봅니다.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건물은 임금이 먹고 자는 <내전 內展>과 업무를 보는 <외전 外展>이더군요. 오리지날 <행궁>은 1915년 대홍수와 특히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었답니다. 그래서 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며 오리지날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1902년 사진] 일본놈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02년에 찍었다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1904)에 실려 있습니다. ['1893년경 사진] 1893년경에 촬영 되었다는 사진을 하나 더 보면 <행궁>의 전체적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한국사 전문 작가인 "로버트 네프(Robert Neff)의 소장품"이라고 합니다. <숙종>은 위기시에 자신이 도피할 이곳 <행궁>에 도착하여 詩 한수를 읊었습니다. <숙종>이 읊은 <御製詩 6수> 가운데 세번째 행을 읽어 보면 그의 감회를 잘 느낄수 있습니다.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간관십리도행궁 줄줄시단즉재동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노적봉두운미권 백운대상무유몽 험한 길 10리를 걸어 행궁에 이르니 험한 시단봉이 동쪽 가까이 있네 (시단봉에 동장대가 있음) 노적봉 머리위의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아니하고 백운대 위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네. ['청수동암문' 갈림길 회귀] 11:58 20여분이 걸려 <행궁>을 둘러 보고 다시 <청수동암문 갈림길>로 돌아 와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대남문' 방향] <행궁> 앞 삼거리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개울을 하나 건너면 건너편에 바로 <경리청 상창 터>가 보입니다. ['경리청 상창지'] 12:01~11:09 "경리청 상창지 經理廳 上倉址"가 상당한 규모로 있어 올라 가 봅니다. <북한산성>의 관리와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보던 관청이 있었던 곳이며 또한 관리와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니 그 규모를 알수 있습니다. [오름길] 다시 7분여 오름길을 올라 가면.... [갈림길] 12:16 <숙종의 길>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길은 <대동문>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금위영 유영지>와 <어영청 유영지>로 올라 가는 <대남문 방향>입니다. <숙종>은 1772년 4월 12일에 환궁하기 위해 <동장대>와 <대동문>을 경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숙종>은 여기서 좌측 <대동문>으로 올라 갔을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이곳엔 이정표가 없고, 우측으로 30m쯤 올라가서야 나타나더군요. ['대동문' 갈림길] 12:17 조금전 갈림길에서 30m쯤 올라 가면 <대동문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여기선 좌측 <대동문 방향>길로는 사람들의 통행 흔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정표의 위치를 조금전 삼거리로 옮기던지 해야 겠습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가 <금위영 유영지>를 돌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숙종의 길>인 <대동문>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보국문' 갈림길] 12:20 <대동문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 가면 이번엔 <보국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50m쯤 올라 가면... ['보국사지'] 12:21 "보국사 터 補國寺址"를 만납니다. <북한산성> 13개 僧營 가운데 제일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절간이라기 보단 무기고와 식량창고등 군수지원 시설의 역활이 더 컷답니다. ['보국사지' 흔적] <보국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 규모도 상당 했다는 것을 느낄수 있더군요. ['금위영 유영지'] 12:27~12:58 <보국사> 위에는 바로 "금위영 유영지 禁衛營 留營址"가 있습니다. 요즘의 <대통령 경호실> 역활을 하던 <금위영>인데, 戰時엔 본영이 주둔 하겠지만 평시엔 <금위영 파견부대>가 상주하던 곳이랍니다. <숙종>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 조금전 <대동문 갈림길>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금뮈영이건기비'] "금위영 이건비 禁衛營 移建碑"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숙종>이 시찰 왔을 때엔 <금위영>이 <대동문> 앞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높은 곳에 있어 풍우에 무너질 위험도 있고 <행궁>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4년 후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이건비>를 여기에 세웠다고.... 그러니까 <숙종>이 시찰 왔을 왔을 때엔 이곳에 <금위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궁>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올라 가며 그 앞에 있던 <금위영>도 시찰 했을 것입니다. ['금위영 이건기 비'] <금위영 이건비>는 마모가 심하고 한자 실력도 모자라 읽을수 없어서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기록을 참고 합니다.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今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 命訓 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 置軍營御信地廋糧備械 國家 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 也其十月城役完本營等 自龍巖東南至普賢峯下 二千八百二十 一步 一千六十五垜 城門二曰大東小東 皆上設譙樓暗門二 柴壇峯爲將臺下有房屋十間 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 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 營舍倉庫九十餘間 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 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 哨官郭義賓經紀財力 把摠張友軫董領攻役至八月告成 石砌一百二十步 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四十五間山抱水深結構增固可 以永護儲胥云 乙未卽大明崇禎甲申後七十 二年也 都提調李頣命識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 숙종 37년 신묘년 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렸다. "백제의 옛 성을 개축한 뒤 각각 군영을 설치한 뒤 목적지에 군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준비하라. 국가가 변란을 맞아 다급할 때 장차 서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내린 이 요새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해 10월 성을 완축한 뒤 금위영을 설치했다. 용암(龍巖) 동남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 2,821보이고, 타(垜)는 1,065개다. 성문은 대동문(大東門)과 소동문(小東門) 둘인데 초루(譙樓)와 암문(暗門)을 설치했다. 시단봉(柴壇峯)에 장대를 짓고 그 아래 방옥(房屋) 10칸을 두니 성랑 61채에 모두 178칸이다.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巖寺), 태고사(太古寺) 네 절을 소속시켰다. 군대의 영사와 창고는 90여 칸으로 처음에는 소동문 안에 세웠는데, 지세가 높고 비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물길이 나서 무너지기 쉬워 을미년(1715년) 3월에 보국사 아래로 옮겼다. 초관 곽의빈(郭義賓)이 재력을 잘 관리하고, 파총 장우진(張友軫)이 공사를 잘 감독하여 8월에 완성하게 되었다. 돌계단 120보를 쌓고 중당은 부손(負巽:동남을 뒤로 함) 방향으로 지었는데, 중군 이하 거처할 곳과 창고, 행랑 등 모두 145칸이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 기록 ['금위영 유영지' 터] <이건비> 앞에서 등산로 우측으로 들어 가면.... ['금위영' 각자] 개울 건너편에 "禁衛營"이라는 刻字가 있다는데 찾지 못하고 참고 사진을 올립니다. ['금위영' 건물 축대] ['보국천'] ['누혈'] <금위영> 건물터 주변 석축과 <補國泉>이라는 약수터를 찾아 보고 석축에 튀어 나와 있는 엄청 큰 규모의 <누혈 漏穴 (배수구)>도 볼수 있었습니다. ['대동문' 갈림길 회귀] 1:02 <보국사터>와 <금위영터>를 둘러 보고 다시 <대동문 갈림길>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 오는데 40분 정도 걸렸군요. ['대동문' 오름길]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벌써 단풍이 지고 있었습니다. 완만한 오름길을 15분 정도 올라 가면..... ['북한산성'] 1:17 <북한산성>의 城郭을 만나는데 <금위영>을 옮기기 전까지는 이 근처에 <금위영>이 있었겠죠. ['대동문'] 1:18 "대동문 大東門"은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좌측에 있는 <시단봉>을 다녀 와 <대동문>으로 나갔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을 다녀 오기로 하고... ['시단봉' 오름길] <시단봉>으로 올라 갈 때엔 성곽을 따라 올라 가고, 내려 올땐 우회로를 이용하겠습니다. 어느 길이나 비슷비슷합니다만.... [산성] 성곽을 따라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4분여 올라 가면 ['동장대'] 1:32 "시단봉 柴丹峰 601m" "동장대 東將臺"는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한산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오는 곳에 위하고 있습니다. <금위영> 장수가 관할하며 산성 수비의 총괄 지휘를 하던 곳이어서 <숙종>은 이곳에도 올랐습니다. ['동장대'] 1:32 "동장대 東將臺" <숙종>이 올라 쓴 <숙종 御製詩 6수> 가운데 네번째 행을 음미해 보겠습니다.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등피동대약상천 천봉삭립접운연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구부비도불감근 원노역필수반연 동장대에 오르니 하늘 위에 오른 듯하고 천개 봉우리 깍아지른 듯 서서 구름에 접해있네. 도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긴 팔 원숭이도 기어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 ['삼각산' 조망] <동장대> 아래엔 현재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주변 조망이 나쁘더군요. 그래서 <백운대><만경대><인수봉> 방향 만 조망하고 [전망 안내도] . 남쪽 방향으로는 전망안내도가 있어 참고 합니다. <남장대지> 아래에 <행궁>이 보입니다. ['처녀 총각 바위'] 1:39 <동장대>에서 다시 <대동문>으로 내려 가는 길 바로 앞에는 좌측 성곽에 붙은 큰 바위 두개가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처녀 총각 바위"라고 부르더군요. ['대동문'] 1:48~1:51: 다시 "대동문 大東門"으로 돌아 왔습니다. ['대동문' 밖] 1:52 <대동문> 문 밖으로 나가면, 城에 포위 되 있던 갑갑함이 뻥 뚫리며 동북부 서울이 훤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서 <숙종>은 그의 <御製詩 6수> 가운데 다섯번째 행을 읊었습니다.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장위이선진반도 성동가출역기구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서행풍람다형승 황시청강흥불고 호위병이 이미 앞서 나아가 돌아가는 길에 늘어서 있고 성 동쪽으로 어가가 나가는데 역시 길이 험하다. 천천히 가면서 두루 살펴보니 뛰어난 경치가 많은데 더구나 맑은 물이 있어 흥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구나 ['진달래능선' 갈림길] 1:53 <대동문>에서 20m쯤 내려 가면 이정표가 있는 중요한 갈림길을 만납니다. 좌측 길은 <진달래능선>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가 <우이동>으로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구천게곡>을 경유해 <수유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아래에 편집한 <위성지도>를 보며 <숙종의 길>을 추정해 보면...... ['숙종의 길' 예상도] <숙종>은 <대동문>에서 "도성암 道成庵"으로 내려가 <우이동> → <수유리> → <미아리> → <한양도성>의 <혜화문(동소문)>을 통해 환궁 한것으로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도성암 道成庵"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세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신 할수 없는 것들이어서 학계에서도 추정만 할 뿐이더군요. 저의 생각으로는 <숙종>이 지도에 표기한 노란색 선을 따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거라고 확신이 들지만, 그 길은 전에 여러번 다닌바 있어 오늘은 가 보지 못한 <구천계곡>으로 내려 갔습니다. ['구천계곡' 내림길] 가을이 깊어 가는 "구천계곡 九天溪谷"은 처음으로 만납니다. <대동문>에서 하산 할때엔 거리로는 제일 짧은 거리지만 계곡이 가파르고 깊어 <숙종>은 이 길을 절대 이용 할수가 없었겠습니다. 왜냐 하면 <어가 御駕(임금이 타는 가마나 수레)>나 말은 도저히 통행이 불가능하겠더군요. 등산로가 발달해 있는 현재도 어려운데 300여년 전엔 더욱 불가능 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숙종>은 분명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께 분명해 보입니다. ['구천계곡 안전쉼터'] 2:13~2:25 <대동문>에서 급경사 내림길을 25여분 내려 가니 "구천계곡 안전쉼터"가 있더군요. [내림길] 처음 방문하는 <구천계곡>을 음미하며 하산합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 6수> 가운데 마지막 행을 보면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과찰도성봉탄로 풍애만목일장모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사여여림첨우모 포원개허가전소 <도성암>을 지나니 평탄한 길 나오고 바람과 먼지 눈에 가득한데 해는 저물어 가는구나. 사람들이 많아 나와 의장행렬 바라보고 원한을 품은 자 어가 앞에 나와 하소연하게 허락 하였도다 "도성암 道成庵"은 매우 유명하고 의미있는 절로 실록에 기록되 있답니다. <세종대왕>의 딸 <정희공주>가 창건한 절이서 더욱 유명하다는데 기록에만 남아 있고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만, 현재 여러 조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도성암>의 위치에 대한 세가지 설은 1. 강북구 인수동 산125번지에 있는 <본원정사>와 2. 강북구 우이동 산69번지에 이쓴 유명한 <도선사> 3. 강북구 우이동 2060-6에 있는 <선운각>이라고 하는데.... 완벽한 <숙종의 길>은 자료가 없어 하산길은 단순히 <중앙일보 안내도> 만 참고하여 다녀 왔습니다만 다녀와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가장 믿을 만한 단편소설이 있더군요. <숙종의 길> 중에 <도성암>에 대한 상세한 추정 글이어서 링크로 첨부 하오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산불장비함] 2:39 <구천게곡 안전쉼터>에서 급경사 내리림길을 다시 25분 가량 내려 가면 <산불방지 도구함>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이곳 좌측 아래가 유명한 "구천은폭포"가 있더군요. ['구천은폭포'] "구천은폭포"는 <구천계곡>의 랜드마크라고 하는데 가을이어서인지 폭포수는 볼수 없었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조망] 서울의 동북부인 <도봉구><노원구><중랑구>등이 <수락산-불암산> 아래 펼쳐 집니다. <백제 온조>는 이곳에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위례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름하여 "하북 위례성" 설이지요. 이곳에 있다가 "하남 위레성"으로 옮겼다고.... [급경사 계단] 다시 급경사 계단을 내려 가면.... ['송계별업' 터'] 2:47 [안내문] "송계별업 터"였다는 안내문과 <구천은폭포> 하단부가 반겨 줍니다. 27명의 조선 왕들 중에 제가 제일 싫어하는 왕인 <인조> 그의 아들은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그리고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있었죠. <인평대군>의 호가 <송계 松溪>인데, 이곳에 별장을 짓고 자신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풍류를 즐기며 詩畵를 남겼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구곡은폭포'] ['사릉 석물 채석장' 안내문] 또한 이곳은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가 죽고 난 다음 평민으로 강등 당했다가, <숙종>에 의해 다시 왕비로 복위 되면서 그의 무덤인 <사릉 思陵>을 축조하기 위한 石物을 채석한 채석장이었다고 ['아카데미하우스'] 2:59 짧은 거리지만 엄청 가파른 <구천계곡>을 벗어 나면 <아카데미하우스>를 만나며 ['구천계곡' 등산로 들날머리] ['아타데미하우스' 정문] 3:04 <아카데미하우스> 정문에서 <숙종의 길>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가서 지하철로 귀가 하였습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총 거리는 11.8km였으며, 5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팔도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3.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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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
     『덕흥대원군묘-도솔봉-용굴암-학림사』 


  ['산행 지도']                        .
  
  <당고개역>에서 <10-5번시내버스>를 타고 "덕릉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를 먼저 찾아 보고, "수락산 도솔봉"을 오르고, <도솔봉> 아래에 있는
  "용굴암"을 들려 "명성왕후 도피처"를 보며 역사를 뒤돌아 봅니다.
  그리고 "학림사"를 경유하여 <당고개역>으로 회귀하는 GPS 측정으로 약7km를 갑니다.
  



  ['덕능마을' 버스정류장]           11:04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
  <당고개역>에서 이곳으로 운랭하는 시내버스는 <10-5번>과 <86-1번> 뿐인데
  이 고개 아래로 <덕릉터널>이 뚫리고, <지하철 4호선>이 <진접>까지 연장되어
  이 고개를 넘는 시내버스는 완전 줄어 들어 1시간에 한대 꼴로 다니니 매우 불편했습니다.
  저는 <10-5번>을 오래 기다렸다가 타고 6~7분 걸려 <덕릉마을버스정류장>에 내렸습니다.
  바로 뒤돌아 서면.....



  ['덕능고개' 방향]                             
  버스를 타고 지나온 <덕릉고개> 방향으로 150m 정도 올라 갑니다.
  


  ['덕흥대원군묘' 입구]             11:07         . 
  <덕흥대원군묘>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나 50m 정도 들어 가면...
 


  ['하원군 신도비']                11:08      
  이렇게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위에 "하원군 이정 신도비"가 보입니다.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가면 바로 <덕흥대원군묘>로 갈수 있더군요)
  묘역 전체를 답사하려면 <하원군 신도비>로 올라 갔다가 우측으로 진행하면 되더군요.
  


  ['덕흥대원군 묘역']               11:11           .
  "경기도 기념물 제55호 덕흥대원군 묘역" 표지석이 있는데
  앞에 보이는 묘는 <하원군묘>이고 <덕흥대원군묘>는 <하원군묘> 위에 있습니다.
  


  ['하원군 묘']                11:12      .
  "하원군 이정 묘 河原君 李珵 墓"
  <덕흥대원군>은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하원군 이정>이며, 차남은 <하릉군 이인>이고
  막내가 <임진왜란> 때에 왕이었던 <하성군 이균> "14대 왕 선조"입니다.
  
  <하원군>의 부인은 <남양 홍씨>로 쌍분으로 조성되 있군요.



  ['덕흥대원군 신도비']               11:14        
  <하원군묘>에서 위로 조금 올라 가면 "덕흥대원군 신도비 德興大院君神道碑"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 대원군> 중에 <초대 大院君>으로 <14대 선조>의 아버지의 신도비입니다.
  
  <조선왕조 대원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면....



  [대원군 관련 가계도]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예우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죠.
  왜냐하면 모두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시험도 볼수 없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서자'가 왕위에 오른 후
  권위와 정통성을 억지로 만든 제도가 <대원군 제도>였던 것입니다.
  
  첫번째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며 이곳에 묘가 있습니다.
  두번째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었는데, 이 분은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추존 원종>으로 만들어 대원군이라는 대열에서 벗어 났는데, 그의 무덤이 요즘 시끄러운
           <김포시청> 뒤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문화재 문재가 불거진 "장릉"입니다.
  세번째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군>이며 <포천>에 무덤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답사기 <경기옛길-경흥길 4코스>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네번째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이죠. 
           너무 유명해 <대원군>은 이 분 한사람인 줄 아는 분들이 많죠. ㅎ
           <흥선대원군 묘>는 <남양주 마석역> 앞 건너편 동산에 묘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서리산-축령산 철죽과 흥선대원군묘 탐방기>를 참고 하세요.
           
  요약하면 <조선시대 대원군>은 네명이었는데 <인조의 아버지-정원군>이 추존왕이 되어
  결국 세명이 <대원군>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 <사도세자>도 왕이되지 못하고 죽은 <정조>의 아버지인데, <장조>로 추존되어 대원군 명단에는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세자>는 후궁에게서 태어 난게 아니라 정비에게서 태어나 대원군 얘기가
      없는 것이고...위의 대원군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대원군이라 합니다.
  


  ['덕흥대원군 묘']                  11:15

  [안내문]                    
  "덕흥대원군 이초 德興大院君 李岹"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을 두고 20명의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계도를 보면...
  

  ['중종'의 가계도]                      
  "덕흥군"은 윗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명의 자녀를 낳고 불행이도 고작 30세에 병으로 일찍 죽어서, 
  <인종><명종>이 아들을 못낳아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어부지리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아들 <선조>에 
  의해, 자기가 <대원군>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죠.
  


  [조망]                      
  <중종>의 서자 중에서도 최하위 정통성 없는 '서자'의 아들로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하성군 이균-선조>는 자기 아버지의 위상을 끌어 올리려고 엄청 수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리고 '서자' 출신 아버지의 아들인 <선조>는 컴플렉스가 쌓여 언제나 의심 많고 왕권 안위를 
  걱정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권위를 높여야 자기도 위상이 높아 지며 정통성이 생기니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의 '묘'부터 '왕의 묘'를 부를 때 쓰는 "릉 陵"으로 올려 부르도록
  술수를 썼다고 전해져 옮니다. 기록으로도 전해져 옮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건 아닌데도, 그 술수가 성공하여 "덕릉"으로 불리워지게 되었고, 
  이 고개의 이름도 "덕묘 德墓고개"가 아닌 '왕릉'을 칭하는 "덕릉 德陵고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술수를 알려 드리면....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아버지 <덕흥군>의 <묘 墓>를 <릉 陵>의 수준으로 높이고 싶었으나 
  신하들은 끝내 불가하다는 대답 뿐 이었답니다. <릉 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븥일수 있죠?
  <선조>는 할 수 없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고 대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믿을 만한 내시를 동문밖에 있는 가게로 내보내어, <별내면>에서 나무와 숯을 실은 수례를 끌고 오는 
  장사꾼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까지 왔느냐 물어서 그가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서 왔다”고 하면 
  장사를 못하게 돌려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서 왔다"고 하면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후한 값으로 쳐 모두 사들여 주도록 하였답니다. 
  이 소문은 한 사람 두 사람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불길처럼 퍼져 나갔겠지요. 
  그리하여 사방에서 나무와 숯을 끌고 온 장사꾼들이 모두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왔다고 떠들어 대니 
  정식으로 "릉 陵"이라 반포한 것보다 효과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저절로 이 묘소를 "덕릉 德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선조"를 효자라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에구~ 쪼다리라고 해야겠습니까 



  [등산로 입구]               11:17         
  <덕흥대원군묘>를 둘러 보고 <수락산> 등산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 봉분 바로 뒤에 이렇게 길이 뚫려 있더군요.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수락산>으로 올라 가려면 <덕릉마을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 가서
  <덕릉>의 원찰인 <흥국사>를 경유하여 진행해야 하는데, 많이 돌아야 해서 
  모르는 길이지만 지도를 보며 이 길로 진행 하는 것입니다.



  [일반 묘역]                     
  <덕흥대원군묘>에서 조금 올라 가면 아주 너른 묘지길을 만나며 이곳의 묘들은 일반인 묘들이더군요.
  너른 묘지길을 따라 7분여 올라 가면...



  [군부대]                11:24          
  군부대 철문을 만나는데, 지금부터 이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군부대 울타리]                      
  이 부대는 예비군 훈련장인데 10여분 이 울타리를 따라 계곡을 오르내리며 올라 가면...
  


  [군부대 울타리 끝지점]              11:34            
  군부대 울타리가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 가는 곳을 만나는데
  울타리에 여러개의 사진촬영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울타리를 버리고 직진하면....
  


  ['덕릉고개' 등산로 만남]                11:35          
  <덕릉고개>에서 올라 오는 일반등산로를 만나며 이정표도 만납니다.
  오늘이 가을의 정점을 이루는 좋은 날씨의 일요일이니 당연 등산객들도 많아 만나게 됩니다.
  
  이 길은 <서울시-경기도 경계>가 되며, 또한 <수락지맥 마루금>이기도 하죠.
  여기에 대해선 제가 예전에 쓴 산행기가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등산로]

  ['흥국사' 갈림길]                11:39              
  조금 올라 가면 "흥국사 갈림길"을 만납니다.
  "흥국사 興國寺"는 <덕흥대원군묘>의 원찰이 되는 절이죠.
  그러니까 <덕흥대원군묘>를 유지 관리하는 <묘지관리소> 역활을 하는 곳
    

 
  [오름길]                         
  제법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오름길을 15분여 오르면...
 


  [쉼터]                11:44~11:55        
  첫번째 쉼터를 만나는데 10여분 쉬어 가고
    
 
 
  [오름길]              
  다시 오름길을 7분여 더 오르면
  


  ['도솔봉' 조망]                12:02             
  조망이 트이는 쉼터봉우리에 올라 진행방향을 조망하고
  능선길 <수락지맥-서울市界>를 따라 앞에 보이는 <송전탑>으로 10여분 진행합니다.

 

  [송전탑]                12:12

  [오름길]                          
  <송전탑>을 지나 <372.6m봉>으로 올라 가면



  [조망소]              12:14~12:17      
  전망이 좋은 바위 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하고 갑니다.
  


  ['당고개' 방향 조망]            
  먼저 남쪽으로 <덕릉고개>와 <불암산>이 <수락지맥>으로 이어져 있고
  우측에는 <당고개역>이 있는 <상계동>이 펼쳐집니다.


                
  ['덕흥대원군묘' 방향 조망]                   
  고개를 돌려 약간 동남쪽을 바라보면
  출발지였던 <덕흥대원군묘> 부근이 조망되며, 
  <덕릉고개>엔 예비군훈련장이 있다는 것도 확인이 됩니다.
  


  ['남양주' 방향 조망]              
  동남쪽으로는 <별내신도시>가 펼쳐지며, <남양주시>를 감싸고 있는 <천마지맥>의 <천마산><백봉산>
  <예봉산>이  보입니다. <검단산>은 <한강> 건너편에 있고...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으로는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도솔봉 정상>으로 오르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5여분 오르면...



  ['도솔봉 정상' 갈림길]             12:51        
  <도솔봉 정상 갈림길>을 만납니다. 정상까지 170m 거리라고 알려 주는데
  오랜만에 왔으니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하고 좌측으로 4분여 올라 가면...
  


  ['도솔봉 정상']              12:55       
  "수락산 도솔봉 538.5m"에 도착합니다.
  <수락산>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죠.
 


  [조망]                    
  기암괴석들이 모여있는 <도솔봉>에서 남쪽을 조망하고
  


  [정상 갈림길 회귀]            12:58     
  정상 갈림길로 다시 회귀하여, 좌측으로 조금 가면...



  ['수락산역' 방향 갈림길]              12:5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도솔봉 삼거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직진방향은 <수락산 정상>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수락산역> 방향으로가는 길이라고 안내합니다.
  저는 오늘 <용굴암>을 찾아 가려고 하기에 좌측 <수락산역>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도솔봉 정상>을 우회하는 길이기도 한 가파른 내림길을 5분여 내려 가면...



  [조망소]           1:05       
  조망이 좋은 곳을 만나는데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한산' '도봉산' 조망]                   
  이제 <수락산>의 서쪽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 봉우리로 <三角山>이라 해던 <북한산>과 <도봉산>이 잘 보입니다.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도 잘 보이는데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코끼리바위>등이 잘 보이는군요.
  


  [뒤돌아 본 '도솔봉']                    
  뒤돌아 동쪽을 올려다 보면 조금전 <도솔봉 정상>이 보이고
  


  ['탱크바위']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탱크바위"가 있는데, 나무에 가려 전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잠시후 <용굴암>에서 다시 조망하고...
    

 
  [내림길]                       
  다시 내림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조망소]             1:16       
  또 다시 조망소를 지나고...
    


  ['용굴암' 갈림길]            1:17          
  이어서 이정표가 있는 "용굴암 갈림길"을 만납니다.
  여기서 많은 산객들이 이용하는 <수락산역 등산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내림길]                 
  <용굴암><당고개역> 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고,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 가면...
    
 

  ['관세음보살']                1:20          
  <용굴암>의 <관세음보살> 앞을 지나

 

  [내림길]   

  ['용굴암'과 '탱크바위' 조망]            1:21          
  내림길을 잠시 내려 가면 <용굴암>과 조금전 언급했던 <탱크바위>가 조망됩니다.



  ['용굴암' 입구]           1:22~1:28        
  오늘 <용굴암>을 찾아 온 이유는 <임오군란> 때에 <명성왕후>가 도피 했던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명성왕후>가 도피 한곳은 앞에 보이는 <대웅전> 좌측에 있는 <자연동굴>이었다고 예습하고 왔으니
  <대웅전> 좌측 <자연동굴>로 올라 갑니다.
  


  ['나한전']                 
  <명성왕후>가 도피해서 숨어 7일 치성을 드린 곳이 바로 이곳 <자연동굴>이었는데
  현재는 <나한전>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나한>은 <석가>의 제자들을 일컷죠.
 


  ['나한전' 내부]                    
  <명성왕후-민자영>은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필사적으로 도망쳐 숨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고...
  <명성왕후>는 <임오군란> 때에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고, 2년후 일어나는 <갑신정변> 때에
  또 도피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로부터 11년후 <을미사변> 때엔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암살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던 <명성왕후>....
  


  ['용굴암' 안내문]                        
  <용굴암 안내문>에는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황후께서 잠깐 숨어 있었던 곳"으로 알리고 있는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쓴 이런 안내문이 공공연하게 설치 되 있는데도 수정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제가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명성왕후>가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나 이곳으로 도피 한게 절대 아닙니다.
  <임오군란>이 일어 나기 훨신 전에 <명성왕후>와 <고종>은 <대원군>을 정권에서 완전 밀어내
  거의 감금 상태에 있어서 <명성왕후>를 밀어 낼 힘도 없었고 그럴 처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성왕후>와 <민씨외척세력>들의 부정부패로 1년 이상 봉급을 못 받은 구식군대들에게 
  13개월 만에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를 섞어 주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봉기하여 
  <민씨외척세력>들을 죽이며 최고 정점에 있던 <명성왕후>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던 때가 아니라 <명성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때 <임오군란>을 진화시키기 위해 <고종>이 자기 아버지 <대원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화 시켰죠. 그리하여 다시 <대원군>의 시대가 되었으나......
  <고종>과 <명성왕후>는 <청나라>를 끌어 들여 33일만에 <대원군>을 무너 뜨리고 재집권하게 되었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 가고...그 후 우리나라는 쪽바리들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죠.
  그러니 위 안내문은 잘못된 안내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용굴암'에서 조망]           
  <임오군란>과 <명성왕후>의 도피에 대해선 
  지난 <경기둘레길 37코스 명성왕후의 도피처-감곡매괴성당> 답사기에 언급 한바 있는데 
  다시 한번더 언급하면....

  <순조><철종> 때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 보다 더 추악한 부정부패가 성행했던
  "민씨 외척 세도정치 시대"의 정점에 <고종>과 <명성왕후>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선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성과 민란,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 세계 열강들이 <조선>을 잡아 먹을려고 어러렁거리는데 
  힘쎈 외국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정치자금이 필요 했던 <명성왕후 민자영>은
  자신의 <민씨 외척 세력들>을 이용하여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정축제에 여념이 없었으니
  터질게 터진 게 바로 <임오군란>이었죠.
  <창덕궁>으로 총을 쏘며 들이 닥치는 구식군대들은 <민씨세력>의 우두머리인 <민태호>를 죽이고
  <명성왕후 민자영>을 죽이기 위해 <창덕궁>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녔죠.
  
  "36계의 여왕-민자영"은 먼저 현재의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자리 근처에 있던 <윤태준>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바로 <수락산 용굴암>으로 도피하여 며칠을 숨어 지내며 부처님에게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현재 <화양동사무소>가 있는 <화양정>을 통과하여 <광나루>로 가서 뱃싹이 없어 자신의 금반지를
  주고 <한강>을 건너 <여주 민영휘>의 집으로 도피하고, 다시  <장호원(감곡)>에 있는
  자신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아흔아홉칸 대궐같은 집으로 갔지요. 
  이런 집은 도피하는 <명성왕후>에겐 좋은 도피처가 아니죠.
  그래서 <명성왕후>는 한 곳에 오래 머룰지 않았다는게 최근 발굴된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광주 치적리>에 있는 <임천구수 이근영>의 집으로 갔다가 <여주 단감 권삼주>의 집으로
  옮기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충주 노은 이시일>의 집으로 옮겨 일주일 정도 기거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다시 <지평 섬실(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의 한정옥>의 집으로 옮기고
  열흘 정도 머룰다가 다시 이곳 근처 <오봉학>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현 <감곡 매산마을>의 <민응식>의 집과 주변 집들에 머물 때에 그 유명한 "진령군-박창렬"이라는 
  이름도 남자 이름같은 여자 무속인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지는데 <삼국지>의 <관우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점쟁이였습니다.이 부분은 별도로 언급 하겠습니다.
  또한 <명성왕후-민자영>은 도피 기간 중에 인후염, 부종, 말라리아에 걸려 엄청 고생하며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일기에 나와 있습니다만, 역경을 이겨 내고 "불사조"처럼 금의환궁 하게 되죠.
  
  <명성왕후>에게 도피처를 마련해준 인물들은 후에 승승장구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윤태준>은 <명성왕후>의 <청나라 밀사>가 되어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여 <대원군>을 몰아 내는데
  공을 세워 <명성왕후>가 환궁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때에 반군들의 칼과 철퇴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으며, <민응식>도 그 후 <고금도>로 유배당하고...

  <명성왕후>의 51일간의 피난생활>은 다음을 참고 하세요.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여기 클릭 
  


  ['소원의 종']              
  <용굴암> 앞 우측에는 <소원의 종>이라는 범종이 있는데 타종을 하는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화장실]          1:28        
  <용굴암>을 나서면 화장실이 있는데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삼거리]              1:37~1:47         
  <용굴암>에서 10여분 평지성 길을 진행하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학림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학림사 등산로>는 잘 조성되 있더군요.
  17분 정도 내려 가면...
  


  ['학림사' 담장]                 2:04

  ['학림사' 내부 조망]                

  ['학림사 연혁' 안내문]                       
  "학림사 鶴林寺"를 만나는데 매우 큰 사찰이더군요.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학림사 일주문' 앞']             2:06     
  "학림사 鶴林寺" 일주문 앞에서 뒤돌아 본 <용굴암 가는 길>입니다.
  <명성왕후>는 이 길을 따라 <용굴암>으로 도피 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명성왕후>는 다리에 부종이 생기고, 인후염까지 있어 건강상태가 매우 안좋았다는데
  살기 위해선 당시엔 등산로도 없었을 이 험한 수락산을 죽기살기로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당시 그녀의 나이가 고작 31세 였는데....
    


  ['학림사' 입구]              2:07   
 <학림사>에서 <당고개역>까지는 포장도로였습니다.
 조금 내려 가면...
   


  ['서울둘레길1코스']              2:10       
  <서울둘레길 1코스>가 잠시 지나는 곳을 만나고....
    


  ['상계동']                 2:23   
  20여분 정도 더 내려 가면 <당고개역>에 도착하고....... 산행을 마침니다.
  


  ['고도표']                     
  거리는 약7km로 3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산행이라기 보단 역사탐방이었습니다.

 
 ★ 부록 ★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3> 충주 백운암 여기 클릭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예천 금당실 솔숲에 숨은 근대사의 비밀 여기 클릭 
서울市界 종주기 2코스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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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      


  ['북한지 1페이지']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조시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승려 <성능(性能)>이 
  <북한산성>에 대해 기록한 책을 1745년에 목판본으로 편찬한 책이 "북한지 北漢誌"랍니다.
  <북한산성>의 역사와 규모등을 망라하는 그야말로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이번엔 <북한지>에 나타나는 중요 지점을 중심으로 답사 겸 산행을 하려 합니다.
['북한도1'] ['북한도2'] ['북한도3']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그 첫번째 답사로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 <중성문>을 통과하여 <노적사>와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보고, <산영루>와 최근 복원 했다는 <중흥사>까지 갑니다. 거리는 짧지만 5시간 이상 걸리는 답사코스였습니다. 이제 떠나 볼까요? ^*^ ['북한산성 입구'] 2022년 1월 12일 (수) 맑음 2022년도 첫 산행 겸 답사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합니다. <북한산> 품안으로 들어 가는 입구엔 <원효봉>과 <의상봉>이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듯 합니다. ['북한산성 안내소'] <북한산국립공원>은 1985년도에 우리나라 열다섯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여의도> 면적의 26.5배가 되는 77㎢ 면적이라고 하죠? 년간 탐방객수가 천만이 넘는다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대표 건강생활공원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계곡길'과 '차도'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조금 올라 가면 <계곡등산로>와 <도로 등산로>가 나뉘는 곳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자연과 함께 걷는 <계곡길>을 주로 이용하지만, 오늘 저는 옛날 <숙종>이 행차했던 길의 흔적을 따라가기 위해 도로를 이용하여 <대서문>으로 갑니다 도로가 <옛 숙종의 길>을 확장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로] <1712년 4월 10일> <숙종 행차>를 앞두고 <대서문 길>을 정비했다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오솔길 수준이었답니다. 지금처럼 넓찍한 길이 난 것은 1958년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서문>을 찾을 때였다고 하네요. <숙종실록-숙종38년 4월 10일>의 기록을 살펴 보면 "上幸北漢。 早發由西郊, 至北漢。 自西門入, 歷覽水門, 仍欲登小釋迦峴, 周覽城內外, 以路險不治, 只上柴丹峰"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柴丹峰)까지만 올랐다." <소석가현(小釋迦峴)>은 현재의 <백운대>를 의미하는 듯 합니다. 정확치 않지만... 그러니까 <백운대>에 오를려고 했으나 어려워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까지만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는 행차 경로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에는 좀 더 세밀하게 행차 경로가 기술되 있는데 잠시 후 알아 보겠습니다. ['용암사'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용암사> 입구를 만나며 길 좌측엔 <자연보호헌장 탑>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쓸쓸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연보호헌장'] 자연보호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에 전국 곳곳에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큰 규모랍니다. <유신체재>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때 였군요. 높이 5m로 <롯데제과>가 건립비용을 내고, 당시 세종대 교수이던 <서희환씨>가 글을 썻다고... 요즘 더욱 자연보호 운동을 해야하지 않나요? [도로] <자연보호훈장탑>을 지나면 <대서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는 총6수로 되있는데 하나하나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 첫행을 먼저 살펴 보면...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계심음양행신성 효출남문고각명 효기수천분호필 풍훈일영속주명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을 거울삼아 전쟁에 대비한 심오한 계획으로 새로 세운 성을 시찰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남대문을 나서니 군악대의 북과 호각소리 울려 퍼지네 날랜 기병 수천이 나뉘어서 길을 내며 앞뒤로 따르는데 훈훈한 바람까지 불며 해가 길어지니 마침 여름이 다가 오는구나. 한자 실력이 좀 부족한 <파란문>이 나름 해석 한 것이나 이해하기 쉽게 나름 풀이해 해석했으니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그러려니 생각해 주세요. <숙종>이 <한양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서대문>으로 나가면 더 가까울 텐데 궂이 <남대문>으로 나간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요? 당시 정치상황을 이해해야 어느정도 추측 할수 있겠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왕권이 약화된 <숙종>은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등으로 당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데, 왕권은 다소 강화되었지만 오히려 당파싸움은 더욱 격화되어 나라가 더욱 시끄러웠씁니다. 그래서 <숙종>은 정치적 상황 전환이 필요하던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숙종>이 <북한산성> 건설이라는 큰일을 온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며 왕권은 건재하고,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한듯 합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왕이 백성들과 좀더 가까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 규모의 행사를 펼치며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대서문'] "대서문 大西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16개 城門 중에 가장 큰 규모랍니다. "숙종 어제시 御製詩"의 두번째 행을 읽어 보면....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서문초입일회두 기장심웅사아우 국도지척금탕고 하기오민수한주 대서문 바로 앞에 도착하여 머리 들어 둘러 보니 장대한 기상과 웅대한 마음이 솟아 나의 근심 사라지네 한양성 가까이에 이렇게 견고한 금성탕지 같은 성이 있으니 내 어찌 나의 백성 수호하지 않고 한양을 버리랴 두번째 행에서는 <대서문>에 도착하여 <북한산성> 완공에 뿌듯함을 표현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 城을 축성한 이유가 자기가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라고 하는듯...
[1900년대초 '대서문']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뎅 (Frandin)>이 1902년에 촬영하여 1905년에 펴낸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서문>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시대> 이전으로 나무들이 무성하며 사람들의 왕래도 많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 '대서문'] <일제강점기시대>로 들어 가며 우리 산하는 황폐화 되기 시작했답니다. 땔감 부족으로 <북한산>은 무분별한 벌목이 시작되어 민둥산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쪽바리들을 씹지 않을수 없는 이유는 이 사진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은 오솔길 수준으로 좁았다는 것도 알수 있는데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선 당연한거죠. <숙종>이 행차하며 올랐을 때의 길 모습을 연상해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대서문> 앞에 선 <이승만 대통령>" 현재의 <大西門>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랍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구한말 과거에 11번 도전한 한학도 였습니다만 모두 낙방했죠. 그리고 신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운 좋게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미군정과 가까워지게 되고... 영어를 잘하게 되었으니... 현판에 찍혀 있는 <낙관(落款)>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 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라고 젹혀 있는데 <우남 雩南>은 이승만대통령 호이고 뒤의 <印信>은 <도장>이라는 뜻이고 끝에 있는 <長壽>는 이 현판을 만든 사람이 대통령의 장수를 비는 것이니 '아첨'하는거죠 <두인 頭印>에는 "天地爲師 천지위사"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라는 뜻. ['대서문 문루'] <대서문 문루>는 일제강점기 말에 홰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신도면사무소'를 짓는 자재로 쓴다며 문루가 헐렸다고 하며 그나마 해방 후 <6.25전쟁>으로 완전 사라졌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당해 <북한산 상운사>에 숨어 도피생활을 해서 <북한산>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답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산>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부랴부랴 중수를 했으며 길도 불도져 등 건설 장비를 동원하여 넓히며 신작로를 냈답니다. 현재 문루 안에는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1958년에 쓴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습니다. <대서문>을 복원한 내력이 장황하게 적혀있는데 몇 부분만 읽어보면 ... "우리 민족의 영도자이신 이대통령각하의 민족문화재 보수보전의 뜻을 받들어 문루를 복원하였다" "공사기간은 5개월. 비용은 총 698만환이 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누혈'] "누혈 漏穴"... 요즘 말로 <배수구>입니다. 이 <누혈>은 홰손되지 않고 오리지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인데 배수 목적 보다도 <대서문>의 위용을 뽐내는 장식품으로 느껴지는군요. ['근총안'] "근총안 近銃眼"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쏘기 위한 총구멍을 <근총안>이라 한다는데 <평여장>에 하나씩 뚫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근총안>은 <북한산성>에만 있다고 합니다. ['수문' 방향] <북한산성> 안에 흐르는 <북한천>에는 <水門>이 두군데 있었는데 이곳 <대서문> 아래와 <중성문> 옆에 있었었답니다.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내려가 <수문>을 둘러 보고 올라 왔다고 기록에 남아 있더군요. 저는 다음번에 별도로 <수문>과 <서안사> <민지암>등 계곡 주변을 탐방하겠습니다. ['대서문'에서 조망] 이제부터 <북한산성> 안으로 들어 갑니다. 예전엔 이 주변이 온통 가게나 유락시설로 가득했었습니다만 지금은 맑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510m 높이의 <원효봉>과 835.6m의 <백운대>가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이 주변의 1980년대 옛 사진을 보여 드리면 ['대서문' 안 1986년 사진] 출처:경기문화재연구원
[옛 '별미원'] <대서문>을 지나면 기와집 한옥이 하나 아직도 남아 있는데 <별미원>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집입니다. 보존 가치가 있는 한옥이어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고... [옛 '북한산성 버스종점'] <옛 별미원>을 지나면 바로 추억의 <북한산 버스종점>이 유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저도 옛날 청춘시절에 <백운대> 산행 후 하산 할때 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세월 빠릅니다. ['석장승'] 버스정류장과 화장실을 지나면 <석장승>이 있는데 <도의원>을 지낸 <문기수>라는 사람이 세운 것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잠시후엔 이 분이 세운 <석불>도 곧 만나게 됩니다. ['무량사' 앞] <석장승>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무량사>가 나타납니다.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無量寺"는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이 없는 절이지만 잠시 올라 가 봅니다. ['무량사 약사전'과 '대웅전'] ['범종'] "무량사 無量寺"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상궁>으로 유명한 <엄귀비>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인 "영친왕"을 낳았다고 유명해진 절간입니다.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해 우리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엄상궁>은 다섯살에 궁녀로 들어가 일평생을 궁에서 보냈는데, 특히 <명성왕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을 때, 내전에 왔다 갔다 하던 <고종>의 눈에 들어 짝짜쿵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명성왕후>가 <엄상궁>을 궐 밖으로 내쫒기도 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입궐하여 <고종> 곁에서 실제 황후가 되고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된 여인이죠. ['아미타사' 조망] <무량사>에서 건너편 <원효봉> 아래에 있는 <아미타사>를 조망하고 ['무량사'에서 조망] 햐 ~~ <무량사>에서 조망하는 <북한산>은 그 어느 곳보다 색다릅니다. 특히 <기린봉>과 <시단봉>의 조망이 최고라고 생각됩니다. <기린봉>에는 <북한산성>의 "북장대 北將臺"가 있던 곳인데 출입금지 지역이라 오를수 없습니다. 또한 <시단봉>에는 <북한산성>의 "동장대 東將臺"가 복원되 있는데 <북한산성>의 방어체계를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 이곳 <무량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창마을 (북한동)' 앞] "북한동 하창마을 北漢山 下倉址" 이곳이 <북한산성>의 곡식창고인 <下倉>이 있던 곳이라고 <北漢誌>에 나와 있습니다. ['북한동역사관']
[옛 '만석정']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 <하창마을-북한동>은 음식점들이 여러곳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북한동역사관> 자리엔 <만석정>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자리이죠. <만석정>은 산성입구로 옮겨 영업을 계속하고 있더군요. [2006년 3월 이전까지 '하창마을'광경] [철거 반대 시위] <백운대등산코스>와 <대남문방향 등산코스>가 만나는 곳이어서 등산객들이 몰리는 곳이니.... 여기서 음식이나 술을 사 마시면 버스 타는 곳까지 봉고로 태워다 주며 지친 등산객들을 유혹했죠. ['새마을교'] <北漢誌>에는 이곳에서 <행궁>까지의 <북한천>에 다리가 다섯개 있었다고 표기해 놨습니다. 봉황교(鳳凰橋) 청운교(靑雲橋) 강선교(降仙橋) 환선교(喚仙橋) 언룡교(偃龍橋) 지금은 이곳의 다리를 <새마을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만 정확치는 않지만 이곳엔 "봉황교 鳳凰橋"라는 다리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창' 삼거리] <봉황교>라고 생각되는 <새마을교>를 지나면 <백운대방향>과 <대남문방향>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있는데, <숙종의 길>은 우측 <대남문방향>으로 갑니다만, 좌측에 있는 <보리사>를 잠깐 다녀 가겠습니다. ['북한산 향나무'] <새마을교> 옆에는 <북한산 향나무>가 있는데 매우 특이한 향나무입니다. <향나무>는 일반적으로 하늘로 곧게 뻗지 않고 줄기가 심하게 굴곡을 가지며 여러 갈래로 자라지만 이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이 특이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 있는 <제기동>의 <선농단 향나무>와 비슷합니다. ['보리사'] "보리사" 이 절은 아주 조그마한 절이며 <북한산성> 축성과도 관련이 없는 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절은 1957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58년에 완공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대서문>에서 언급했던 <이승만대통령>의 <북한산 방문>에 발 맞추어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대서문>을 중수 하면서 이곳에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승만대통령 별장>을 지어 올렸는데 아부도 보통 아부가 아니지요? 어용 도지사의 진면목를 보여준 건물이라서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유당> 독재시절이니 망정이지 요즘 같으면 국고 낭비로 감옥 갈 일이잖아요.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형인 "김종소(金鍾韶)"씨가 삿는지 어쨋는지 소유하게 되고 그가 별장으로 쓰다가 <보리사>라는 이름의 절로 만들었답니다. 2001년 4월 7일에 별세한 <김종소>씨의 신문 부고란을 보면 <보리사 창건주>라고 명기돼 있더군요 ['등운각'] 사진출처:공유마당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보리사>는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름의 <이승만대통령 별장>이었습니다. <5.16군사쿠데타> 그후 <김종필>의 형인 <김종소>씨 소유가 되었지만... 이런 사실 알고 <북한산> 등산 다니셨나요? ㅎ 또한 <대서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이승만대통령>은 <북한산>을 매우 좋아 했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 <북한산 상운사>로 도피하여 숨어 지냈고 또한 그의 어머니가 <대남문> 근처 <문수사>에서 백일 기도를 해서 태어 났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파주 용미리 용암사>에도 그의 탄생설화가 있습니다.
['파주 용미리 용암사의 '쌍미륵불'] ['동자상'과 '칠층석탑'] 2013년 10월 22일 <파주 용암사>에서 촬영한 사진 [설명문]
이 사진은 제가 2013년 10월 22일 <오두지맥>을 종주하며 촬영한 사진인데 사진 속의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설화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었던 <유영익씨>가 하늘로 모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 <용암사 쌍미륵불>에게 득남 발원 기도로 부터 탄생되었다는 설. ㅎㅎ <이 대통령>은 아버지 <이경선>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로 부터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 났죠. 형 둘이 어려서 천연두로 일찍 죽어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답니다. 이 산 저 산 돌아 다니지 않으면 알수 없는 사실들을 이렇게 돌아 다니며 알게 되는거죠. <이승만대통령>은 <박승선>이라는 분과 결혼을 해 아들을 한명 낳았는데 <이봉수>라고 하죠 그런데 그는 일찍 병사하고 말았답니다. 자식복도 없으셔...또한 본처와 이혼도 하고 아시다시피 <프란체스카여사>와 재혼을 했는데 후사가 없었죠. 그래서 83세에 아들을 한명 두기로 한게 <이기붕의 아들-이강석> 양자였습니다. <이강석>은 권총자살하고.... ['대남문 방향 북한천길'] <보리사>를 둘러 보고 다시 <대남문 방향>의 <북한천>을 따라 올라 갑니다.
['북한도2'] ['국토지리원 지도'에 실트랙 표기]
이곳부터 <중흥사>까지 <北漢圖>와 제가 실제 걸은 <국토지리원 지도>를 비교 하며 올라 갑니다. <도총섭 성능 스님>이 지형지물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렸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석불] <새마을교>에서 조금 올라 가면 길가에서 <석불>을 하나 만나는데 조금 전 <대서문> 안에 있었던 <북한산버스종점> 근처의 <석장승>을 세운 <도의원 문기수씨>가 이곳에 <석불>을 추가로 세웠다는 것을 알수 있고.... [오름길] ['선봉사']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름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선봉사>라는 절을 지나며 이 절도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 없는 절이라 그냥 패스합니다. ['거북암'] 이어서 <거북암>이라는 오래된 집을 만나는데 자판기는 아직도 있군요. ['범용사' 앞 삼거리] 계속해서 <범용사>라는 절 앞에서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곳이 <北漢誌>에 나오는 "청운교 靑雲橋"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범용사>도 <북한산성> 축성과 관련없는 절이어서 그냥 지나 갑니다. 단지,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북한산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녕사"가 있는데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주변을 수비하며 관리하던 절이었답니다. 이런 절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 하죠. [쉼터] <옛 청운교> 위에는 쉼터가 조성되 있어서 <숙종>도 이곳에서 좀 쉬어 갔으리라 ['북한천'] <범용사>앞 쉼터에서 부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집니다. 7분 정도 오르면.... ['중성문' 앞 바위 각자] <중성문> 앞에 도착하는데, 큰 바위에 뭔가 글자가 있었던거 같은데 지워지고 뭔 글자인지 알수 없고... 이런게 여러곳에 있더군요. ['중성문'과 '시구문'] ['시구문'] "중성문 中城門""시구문 屍口門"이 나타 납니다. ['중성문' 정면] ['중성문' 측면에서 조망] "중성문 中城門" <숙종>이 이곳에 왔었었을 땐 이 門은 없었습니다. <북한산성>의 서쪽이 낮아 적의 침입이 쉬우니 이곳에 다시 內城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숙종실록 1712년 4월 10일자>를 보면 "上以西門邊最低, 重城不可不築, 命斯速議築.上引諸臣論形便."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근총안'] "중성문 中城門"은 1998년에 복원되었답니다. 그리고 현판은 당시 <고양시장>이였던 <신동영>이라는 분이 썻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양시>가 복원공사를 했다는거겠죠. ['증취봉' 방향 조망] <의상능선>의 <증취봉>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성곽을 조망하고
['시구문' '수문' 방향 조망] ['水門'이 있던 곳] ['수문' 흔적]
북쪽 <기린봉> 방향 성곽 바로 아래에 <북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수문 水門"이 있었었답니다.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어 없어 졌는데 그 흔적만 남아 있고 ['행궁' 방향 조망] <중성문> 안으로 들어 갑니다. 지금부터 <북한산성>의 주요 시설들이 모두 있는 "山城 속의 山城" 지역이 되겠습니다. 조금만 올라 가면.... ['노적사' 입구 갈림길] "노적사 입구"를 만납니다. <노적사>는 매우 중요했던 <승영사찰 僧營寺刹>인 "진국사 眞國寺"여서 다녀 오기로 합니다. 또한 매우 중요한 軍營인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가 <노적사> 근처에 있어 반드시 돌아 보고 와야겠습니다. ['노적사 (옛 진국사)' 안내석] <北漢誌>에는 <북한산성> 안에 13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두었다고 표기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진국사 眞國寺"가 있는데 현재 <노적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오름길]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노적사'] ['노적사 보임루'] <노적사> 정문이 있는 <보임루>라는 건물을 통과합니다. ['노적봉' 조망] <보임루>를 통과하면 <노적봉>이 열열한 환영을 하는데 <北漢誌>에는 "진국사 眞國寺"가 <노적봉 露積峯> 아래에 85칸으로 승려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국사 眞國寺"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노적사 대웅전'] ['석사자상' 안내문] <대웅전> 앞에는 "석사자상"이 있는데 유일한 향토문화재라고 합니다. 익살스런 사자 모양이라네요, 사자 궁둥이가 토실토실...^*^ ['진신사리탑'] [안내문] 부처 진신사리 기증 증명서까지 설치한 사리탑이 있고 ['나한전'과 약수터] <나한전> 아래엔 약수터가 두곳 있는데 우측 <감로수>는 법당 헌공수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하고 좌측 <생명수>는 일반인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라고 하네요. ㅎ ['훈련도감 유영지' 가는 길] ★ 길조심 ★ <노적사>에서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가는게 어려웠습니다. <노적사 보임루> 앞으로 나와 우측을 바라보면 <출입제한지역 표지판>이 보입니다. 저곳으로 가면.... [출입제한 지역] <추락위험 출입제한지역>이라고 겁을 줍니다. <노적봉 암벽등반>을 하려는 산객들에게 하는 경고이니 <훈련도감유영지>를 가려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고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한>과 <금지>는 의미가 완전 다르죠? 나무 울타리를 밀면 열리도록 되 있더군요. 우측은 <노적봉 암벽>으로 가는 길이니.... <훈련도감유영지>는 울타리를 밀고 들어가 좌측으로 가야 합니다. ['훈련도감유영지' 간는 길] 처음엔 길이 선명하고 넓어 별 생각없이 두리번 거리며 진행하는데 길의 형태가 없어지며 개울을 하나 건너 가게 되더군요 ['훈국 유영지 흔적'] 개울을 건너면 바로 집터가 있었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는 흔적이 나타나며.... ['누혈'] 이어서 엄청 큰 규모의 축대가 나타나며 축대엔 "누혈 漏穴-하수구"가 보이며 아곳이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라는 것을 알수 있더군요. 이 축대 우측으로 올라 가면.... ['우물']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 <유영 留營>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파견부대"라는 의미이니 <한양>에 있는 "훈련도감 본부 訓鍊都監 本府"에서 파견한 부대가 되겠죠. <北漢誌>에는 이곳에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십여명의 정규군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전시에는 물론 많은 군인들이 오겠지만.. 산속에서 군대가 주둔하려면 우물이 없어서는 절대 않되겠죠. 그래서 <북한산성> 안에 많은 우물이 있다고 <북한지>에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주 큰 규모 앞으로 탐방하겠으나 미리 알아보면 정규군은 <북한산성>에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파견한 부대도 있었답니다. ['戊'] ['무법대 戊法臺'] <우물> 우측에는 "무 戊"라는 글자와 "무법대 戊法臺"라는 글이 세겨진 바위가 있더군요. "무 戊"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창"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이곳에서 <창검술>을 연마하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법대 戊法臺"는 창검술을 지휘 감독하던 곳으로 여겨지고.... ['무법대'에서 '우물 방향 조망] "무법대 戊法臺"에서 <우물>이 있는 <훈련도감 유영지> 방향을 바라보니 전쟁이 발발하면 더 많은 군인들이 합류하여 거주 할수 있도록 설계된듯 합니다. 이곳 병기고에는 조총 3,000자루, 중총 17정, 수철대포(水鐵大砲) 19좌, 목모포(木母砲) 40좌, 철자포(鐵字砲) 40좌등등 있었고 화약 24,929근 8냥, 연환(鉛丸) 503,100개, 수철환(水鐵丸) 4,538개 등을 보유하고 있었답니다. 어마무시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죠? ['훈련도감유영지'에서 '의상능선' 조망] <훈련도감 유영지>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건너편 <의상능선>에 안겨 있는 <행궁>이 있는 가운데 <백운계곡>을 내려다 보고.... "북장대 北將臺"는 여기서 뒤로 가까운 <기린봉>에 있는데 출입금지구역이라 다음에 <상운사>쪽에서 올라 가기로 하고..... 다시 <노적사>로 돌아 가는데 내려 가는 길을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올라 갈때 내려 올때를 생각하며 올라 가야 내려 오기 쉬운데, 길 흔적이 워낙 없고 잔설까지 계곡에 쌓여 있어 고생 좀 했으니 후답자들은 참고하기 바람니다. ['노적사' 회귀] 다시 <노적사>로 돌아와서 <보임루>로 가면... ['노적사' 앞] 올라왔던 길이 좌측으로도 연결되고 있더군요. 좌측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지 잠시 후에 알게 되고, 저는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갑니다. ['진국교'] 다시 <노적사> 입구 다리로 내려가 <대남문> 방향 주등산로를 따라 아주 조금 올라가면 "진국교 眞國橋"를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강선교 降仙橋"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국교> 자리엔 옛날 <강선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었다고 생각됩니다. ['노적사' 출입구] <진국교>를 지나면 다시 <노적사 입구>를 만나는데 조금전 <노적사 보임루> 앞에서 좌측으로 연결된 길이 이곳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고 [바위 각자] 이어서 큰 바위에 뭔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는 바위를 또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백운동문 白雲洞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데 못 찾고 지나가서 다음번 답사 때 다시 찾아 봐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곡은 "백운동 白雲洞" 계곡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부왕동 암문' 갈림길] 이어서 "부왕동 암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환선교 喚仙橋"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산영루>를 조망하고 올라 가는게 좋습니다. 우측 북한천 계곡으로 조금 들어 가면... ['산영루' 조망] <북한산성>에서 최고의 경치를 제공해 준다는 "산영루 山映樓"가 조망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영루>가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룬다고, 외국인들까지 이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산영루'와 '어제시각' 옛 사진] ['어제시각' 옛 사진]
<숙종>이 행차하면서 쓴 <어제시 御製詩>를 비석에 새겨 보관한 "어제시각 御製詩閣"이 <산영루> 건너편에 분명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 찾기 조차 어렵답니다. <어제시비 御製詩碑>는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없어 졌지만 그 글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제가 관련 장소를 탐방하며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북한산성 입구에서 음미 했음>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중성문에서 음미했음>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행궁에 가서 음미 하겠음>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동장대에 올라 음미 예정>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대동문>에서 음미해 보겠음>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어딘지 모르던 도성암터가 현재 발굴 중에 있는데 4.19묘역 근처에 가서 음미해 보겠음>
[독일인 엘러(Otto E. Ehlers)가 촬영한 1892년의 사진인 "산영루"] [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인 베버(Nobert Weber)가 찍은 "산영루"]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된 사진만 남아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사진기가 없었으니...ㅉㅉ 가운데 <산영루> 뒤로 솟아 있는 <시단봉>의 <동장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산영루'와 '용학사' 조망] 다시 주등산로로 올라와 조금 올라 가면 좌측에 <용학사>가 조금 보이고 우측엔 <산영루>가 보입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산영루> 앞에는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이 있습니다. 안내판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북한승도절목'] "북한승도절목 北漢僧徒節目" 인간이 가는 곳엔 특히 계급 사회에선 부정부패가 있기 마련이어서 이곳에 부임하는 승병대장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승병대장인 <총섭>이 지켜야할 규칙을 새겨 놓았다는데 기록에서 간추려 보면 "북한산성은 국가를 보호할 중요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최근에 승도가 없어지고 사찰이 피폐하여 조석으로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승도를 뽑을 때 공평하게 뽑고 비리가 없도록 하라" 대충 이런 내용이라고... ['산영루'] "산영루 山映樓"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느끼듯 <북한산성> 최고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건립되었다고 수많은 관리들과 시인 묵객들이 다녀 가며 많은 아름다운 글들을 남겼습니다. 유람지 역활 뿐 아니라 승병대장인 <총섭>이 회의를 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총섭>을 찾아 오는 손님들을 맞이 하고 대접을 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詩]
대표적인 詩 중에 하나가 <추사 김정희>의 詩랍니다. 뿐만 아니라 <미수 허목>, <송상기>, <성호 이익>,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유광천>, <이덕무>, <이옥>, <다산 정약용>, <이계서>, <신기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들이 글을 남겼답니다
['선정비군 현황도']
<경기도문화원>이 발굴조사한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 현황도입니다. 관심 있거나 아시는 분들 있나요? 저는 관심있는 몇 사람의 선정비를 찾아 봤습니다. ['김문근'과 '민겸호' 선정비] ['민영준' 선정비] 눈에 띄는 인물은 구한말 세도정치의 핵심들의 이름이 여럿 있었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세력>이었던 <김병기><김문근>등등등.... <민씨 세도가>의 대표주자들 중에 대표격인 <민겸호>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등등.... 이들이 이 산골짜기에서 근무한게 아니라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한양본부 수장이었기에 파견부대가 있던 이곳에도 공덕비를 세웠을 것입니다.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위치] <북한산성> 축성을 총지휘한 승려 "성능""영세불망비"도 있다고 해서 꼭 가보려고 했는데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으며 글도 알아 보기 어렵게 마모되 있어 더욱 찾기 어려웠으나 고생 고생하며 기어이 찾아 봤습니다. 앞으로 가실 후답자들은 이제 쉽게 찾아 갈수 있을 겁니다. 계곡 개천을 건너 가야 하는데 여름철엔 좀 어렵겠으나 오늘은 계곡이 얼어 건너기 쉬웠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용학사' 입구] <용학사>로 올라 가는 입구가 있는데 여기서 뒤돌아 본 <산영루>입니다. 그러니까 <산영루>에서 조금 올라와 <용학사> 입구에서 우측 계곡을 바라보면... ['용학사 용왕당 공덕비'] <용학사용왕당공덕비>가 조그마하게 있는데, 계곡 건너편 바위로 가면....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都摠攝聖能永世不忘碑" <성능 스님 영세불망비>는 바위에 새겨 놨더군요. 글자는 마모가 시작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고 이곳의 위치를 표시하는 표지판도 없어 모르고 가면 찾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축성 인력으로 승려를 동원하고, 축성 뒤에는 승려를 군인으로 삼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맡겼답니다. 이와 함께 <북한산성> 내에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를 새로 짓거나 보수해 <승군僧軍>이 주둔하는 <승영사찰僧營寺刹>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북한산성> 승군을 이끌고 <승영사찰>을 총괄했던 승군대장을 "총섭總攝"이라 했는데, <성능>은 1711년 <팔도도총섭>의 직위를 맡아 이후 30년간 <중흥사>에 머물면서 370명 내외의 승군을 통솔하였다고 합니다. <팔도도총섭>은 우리나라 <승군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니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북한산성>을 알아 보려면 먼저 <팔도도총섭 성능 스님>을 생각해야 할 정도입니다. ['산영루' 조망] <성능영세불망비>에서 내려 가며 바라보는 <산영루>입니다. ['중흥사' 입구 갈림길] <산영루>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중흥사>입구를 만납니다. ['중흥사' 입구] "중흥사 重興寺" <북한산성>을 관리하고 승군을 지휘하던 총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으니 참고하고... 『北漢誌』에 의하면 <중흥사>는 본래 30여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북한산성>이 완성된 1715년 당시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세루' 조망]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조그마한 절이었던 <중흥사>는 고려말 "태고보우국사太古普遇國師"에 의해 중수되었답니다. <태고보우국사>에 대해선 <태고사>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최영 장군>들이 이 분의 제자라고 하니 어떤 분인지 짐작 가죠? ['만세루' 밑 정문]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 대웅전' 옛 1902년 사진] 그동안 화재와 대홍수로 <중흥사>는 사라졌었습니다만 2012년에서야 <중흥사 대웅전>이 복원되었고, 2017년엔 <만세루>와 <전류전>이 복원되었답니다. 복원하는데 10여년이 걸린셈이죠. 다닐때마다 언제 완공되나 했는데 오늘 복원된 <중흥사>를 감격스럽게 만납니다.
['출토된 향로]
"중흥사 향로重興寺香爐" <현재 '강남구 봉은사' 보관> 이곳에서 출토된 <향로>인데 이 향로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하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献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將此功德用 祝皇帝萬歲國王千秋天下太平同願僉議政承蔡河中午山郡夫人梁氏徹明勸善比 "지정(至正) 4년(충혜왕 복위5, 1344) 5월에 은(銀)을 입힌 청동향로(靑銅香爐) 1좌(座)를 공경히 만들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의 부처님 앞에 봉헌(奉獻)하였다. 이 공덕(功德)에 힘입어 황제의 만수무강[皇帝萬歲]과 국왕의 장수[國王千秋] 및 천하가 태평[天下太平]하기를 기원하였다." ['종무소'] <대웅전> 좌측에는 종무소등 요사체가 있고 ['도총섭 사령부'] [도총섭 집무실] <대웅전> 우측에는 <성능 스님>이 기거하며 집무실로 사용하던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한 요사체가 복원되 있습니다. ['도총섭 집무실' 앞] ['도총섭 사령부' 옛 사진]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하던 곳이니 관련 부속실들이 있었을 것이고 <중흥사>와 별개로 <도총섭 집무실>로 직접 통하는 문이 별도로 있었다는 것을 옛 사진이 보여 줍니다. ['대남문' 방향] ['대남문' 갈림길] <중흥사>를 둘러 보고 다시 주등산로로 나가면 다리를 하나 건너고 이어서 <태고사>와 <대남문>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오늘은 거리 대비 시간이 많이 걸려 여기서 답사를 마치고 하산합니다. [뒤돌아 본 '중흥사'] 주등산로로 나와 <중흥사>를 조망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언룡교偃龍橋"라는 다리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래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과 <옛 사진>을 비교하며 추리해 봅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북한산 인수봉도']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 ~ 1759)>의 인수봉도仁壽峰圖 재질:비단에 수묵, 크기: 25x22cm -출처:마이아트옥션 이 그림은 2013년 11월에 경매에 나온 작품인데 그림의 이름이 “인수봉仁壽峰”입니다. 아마도 <백운대> 뒤에 우뚝한 바위봉우리에서 <인수봉>을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중흥사中興寺>와 중흥사 앞 계류의 <옛 항해루>가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노적봉露積峯>과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그린 것이라고 단언 할수 있는데, <겸재 정선 선생>은 중요 부분들을 나름대로 재배치해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그렸기에 <실경산수화>와는 구별해야 한다면 이 그림은 <중흥사>와 <노적봉>을 그린게 확실합니다. 그림의 하단에 <홍예교> 위에 작은 누각이 보이는데, <산영루>인지 분명치 않습니다만 <성능>의 <북한지>의 기록과 그림을 보면, 지금 복원된 산영루에 대하여 1717년(숙종 43년) <언룡교偃龍橋> 위쪽에 2층 누각을 만들었고 이를 "항해루抗瀣樓라 하였으며, 이전의 <산영루>에 대하여는 "中興寺前 舊有小橋 覆以閣卽此樓 今毁” “중흥사 앞에 옛날에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위에 지붕을 덮고 누각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 누각이였다. 지금은 헐리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제명은 <인수봉도仁壽峰圖>가 아니라 <노적봉도露積峯圖>로 불려야 하겠습니다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위의 <겸재 정선 선생>의 1600년대 그림과 1902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중흥사> 앞 집들은 "중창 中倉"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량의 곡식이 필요했기에 곡식을 비축하는 대규모 창고가 산성 내에 다섯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창지>는 <북한동역사관> 앞 부근이었으니 조금 전에 답사 했고 <중창지>가 이 곳이며 나머지 세곳은 앞으로 답사 예정입니다. [내림길] ['중성문'] ['북한동역사관' 앞] ['대서문'] ['북한산성' 입구 삼거리] 다시 <북한산성 입구>로 회귀하여 귀가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km 정도였으며 5시간이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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