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시청역에서 창의문까지 역사탐방』
- 2부 -
['창의궁터'에서 '칠궁'까지 실트랙]
3. "창의궁터-보안여관-백송-김가진집터-세종대왕탄신지-
이완용집-이광수집-청와대사랑채-무궁화동산-칠궁"
2021년 11월 2일 (화) 구름 약간 맑음
<1부>에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창의궁 터']
"창의궁 터 彰義宮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궁이었답니다. 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영조>의 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가 여기서 49세를 일기로 죽었답니다.
잠시후 찾아 볼 <육상궁>에 이 여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화순옹주"를 <영조>는 사위로 [추사 김정희]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을 맞아드리고 결혼시켜
이 [창의궁]에서 살게 했죠. 그런데 [김한신]이 일찍 죽자 [화순옹주]도 따라 자살해 버리지요.
이런 부인을 "열녀"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왕족 출신 "열녀"는 오직 [화순옹주] 뿐이랍니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에게는 무지무지 불효한 딸이 되어 불효한 딸을 인정 할수 없다고
아버지인 <영조>는 자기 딸인 [화순옹주]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는거 아닙니까.
"열녀"가 된 [화순옹주]와 그녀의 후손인 [추사 김정희]가 [창의궁]에서 살게 된 연유가 되겠습니다.
<창의궁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영추문']
가을 풍광이 물씬 물씬 풍기는 "경복궁 영추문 迎秋門" 주변이 펼쳐집니다.
<경북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에 있는 서쪽 문이죠.
동쪽은 '봄'에 해당하여 <춘春>이라고 하였는데, '가을'은 서쪽 문이어서 <추秋>를 붙였다고.
주로 승지 등 관료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이용하였답니다.
['통의동 마을마당']
<영추문> 앞에는 <통의동 마을마당>이 있는데 이 뒷쪽에 <백송 터>와 <추사 김정희 집터>가 있습니다.
<보안여관>을 다녀와 가도록 합니다.
['보안여관']
"보안여관"을 만납니다. 단순한 오래된 여관인데 왜 찾았냐구요? ㅎ
1930년에 지어진 여관인데 당시 많은 문학인들이 이 여관에 툭숙하며 창작활동을 했다네요.
대표적 작가들 중에 '서정주' '김동리'등이 장기 투숙하며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했답니다.
2006년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에서 인수해서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일반이들에게 무료 개방하고 있습니다.
['통의동 백송']
[안내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었던 백송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2년 전에 왔었을 땐 백송 앞 집 벽에 "추사 김정희 선생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의궁>은 <영추문> 앞에서부터 이곳까지 매우 큰 궁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할아버지 "김한신"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서 살게 된 집은
[영조] 자신이 살던 {창의궁}을 물려 주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는 <화순옹주>의 피를 이어 받았으니 왕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는 것이죠.
<추사 김정희선생>이 이곳에 살때 북한산을 무척 자주 올랐는데,
이때에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냈죠. 그리고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김가진선생 집터' 조망]
<백송터>에서 <자하문길>로 나가면 건너편에 <'GS25편의점'>이 보입니다.
저곳으로 건너 가면...
['김가진선생 집터']
"김가진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잠시후 찾아 볼 <충정공 김상용>의 11대 후손이지만 서얼 출신이라 과거 응시 자격이 없어
서얼에게 허락된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했으나 워낙 똑똑해서 중요한 외교업무까지 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서얼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구한말의 개화파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외교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이기도 한
선생은 한글 학교를 설립하고 법부대신, 규장각 대제학까지 오른 수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김좌진장군>의 고문을 맡기도..
대한제국 고위 공직자인 <대신> 출신 중에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 든 분입니다
나머지 <대신>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섯습니다.
['토속촌삼계탕']
<'GS편의점'> 뒤에는 <토속촌삼계탕> 음식점이 있는데 <노무현대통령>이 즐겨 찾던 음식점이라서
퇴임 후 <이명박 정권>이 세무조사를 하기도 해 더 유명해 진 음식점인데, 이 집 옆 주차장 근처에
<김가진 선생>의 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옥류동천'-'백운동천' 합수부]
[안내도]
<김가진선생 집터>에서 북쪽으로 잠시 올라 가면 <우리은행>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이 <옥류동천>이 <백운동천>에 합류하는 지점이 되겠습니다.
좌측으로 올라 가면 <이상의 집> <윤동주 하숙집> <수성동계곡>등이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제가 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를 참고 하시고
['통인동']
['세종대왕 탄신지']
이어서 <통인동>이 시작되는 사거리 <독일안경점> 앞에 있는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을 만납니다.
['통인시장']
"통인시장 通仁市場"
[경복궁] 옆 사대부 집안들과 신흥 중인들이 많이 살았던 "서촌"의 먹거리를 제공해 온 시장이랍니다.
지금은 떡볶기가 유명하던데...ㅎ
일제강점기시대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는 쪽바리들이 많이 이용했답니다.
현재는 쿠폰으로 <엽전>을 구매해서 음식을 사먹는 시장으로 좀 유명하죠
['옥인동']
<통인시장>을 지나면 <옥인동>이 시작됩니다.
<이완용 저택> 정문은 앞에 보이는 <옥인교회> 좌측에 있습니다.
먼저 <이완용 저택> 정문으로 갔다가 되돌아 나와 좌측 뒷골목으로 가서 <이완용 저택>을 보겠습니다.
['옥인교회']
<옥인교회> 바로 뒤에 <이완용의 저택> 중 본관이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저택']
"이완용 집"
이 집은 <이완용>이 실제 살았던 오리지날 그대로의 집은 아니고 누군가 인수하여 새로 단장했다는데
원래 집과 거의 비슷하게 복원 된 것이 확실 하답니다.
당시 실제 집 사진은 자료가 없고 신문 기사에 난 집을 보여 드리면...
[ <이완용의 옥인동 가옥> 신축 기사(1909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이완용 장례식> 기사(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나타난 이완용가옥]
현재의 집 모양과 거의 같은데 주변 정원 등이 다릅니다. 4,000여평이었다니 짐작되죠?
지금은 본관 건물만 비슷하게 복원되고, 그 정원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완용 집' 뒷 골목]
<이완용 저택>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뒷 골목으로 돌아 가면
"상촌재 上村齋"가 있는데 <종로구 문화재단>이 공공으로 운영하는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시와 함께 한복, 한글, 전통공예 등 한국문화 콘텐츠 활성화를 위한 거점공간이랍니다.
그리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이완용 저택> 바로 옆에 있어 묘한 느낌을 줍니다.
<상촌재>와 <민주언론연합>은 물론 주변이 대부분 <이완용 저택>이었답니다.
['이완용 저택']
뒷 골목에서는 <이완용 저택>이 조금 더 잘 보입니다.
['조선총독부 지도']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친일파의 극치인 <이완용 저택>과 <윤덕영 저택>의 위치와 규모를 알수
있는데, "이완용"의 집은 [통인시장] 북쪽에 약4,000여평의 저택을 지었답니다.
또한 <윤덕영의 저택>은 더 크고 넓어 '옥인동'의 57%인 16,628평이었다고 하니...
<이완용>은 우리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호의호식하려 했습니다만, 그렇게 오래 살지도 못하고
1926년 양력 2월 11일, 세간에선 한창 음력설 준비를 서두를 때 그는 서울 옥인동 자기 집에서
겨울철만 되면 해수병이 도졌는데, 이때에도 천식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이번엔 완전 가버렸습니다.
윗 지도의 가운데 [순화병원 順化病院]이 잠시후 만날 <자수궁터=겸재선생 집터>입니다.
지도 윗쪽에 [재생원]이라고 표기된 곳이 현재의 "서울농학교"-"선희궁터"입니다.
[뒷쪽에서 '이완용 저택' 조망]
<이완용>은 1913년 이 집을 짓고 1926년 양력 2월 11일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군요.
불과 13년 간이지만....
"여간첩 김수임 사건의 현장"
해방 후에는 미군 헌병대사령관 <존. E. 베어드>가 이 집을 관사로 사용하며 살았는데
<김수임>이 <존. E. 베어드>와 이곳에서 동거하며 살았답니다. 재미있죠?
<이완용>이 살던 집에서 <미군헌병사령관>과 <여간첩 김수임>이 짝짜쿵 동거생활을 했답니다.
이화여고,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통역관으로 활약하다 미국헌병사령과과 짝짜쿵~
<김수임>의 절친이 유명한 <모윤숙>, 그리고 <낭랑클럽>의 멤버들...
<김수임>은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 <이강국>의 월북을 도운 혐의로 1950년 4월 체포되어 2개월 만에
사형 선고를 받고, <6.25 전쟁> 직전에 바로 처형되었죠. <이강국>은 그후 북한 초대 외무상이
되었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강국> 역시 북에서 미군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과 재미를 더 느끼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모윤숙의 패악질과 여간첩 김수임사건"
['순화원' '자수궁' 터]
[안내문]
<이완용 저택>과 <민주언론연합회>를 돌아 나가면 "순화원 {자수궁터}"를 만납니다.
지난 <서촌 답사기>에서 답사했으므로 생략하고
['사이버수사과' '과학수사과'']
<순화원터-자수궁터>를 지나 북쪽에는 "사이버수사과.과학수사과"라는 경찰부서가 있는데
이곳이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은 <옥인동 대공분실>이 있던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독재정권의 정권안보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존재하던 것들이
지금은 사이버과학수사과로 변신했나 봅니다. 잘 하는 일...
['효자동']
<이완용 저택>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가면 <효자동>이며 <경복궁>으로 행하게 되는데...
['쌍홍문 터']
<성주빌라>라는 빌라 앞에 이정표와 표지판이 있습니다.
<성주빌라> 좌측 뒤에 <신익희선생>이 살던 집이 있는데 비좁은 골목에 있어 사진 촬영이 어렵고
우측 직진성 길 좌측엔 <춘원 이광수 집>이 있습니다.
"쌍홍문터 雙紅門址"
<효자동>이라는 지명을 만든 효자 <조희정>과 <조희철>의 정려문 한쌍이 있었던 자리라고
그래서 이 동네가 <효자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답니다.
['춘원 이광수 집']
"춘원 이광수 살던 집"
우리나라 3대 천재라는 <춘원 이광수>, '해에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임꺽정'의 <홍명희>...
<이광수>는 변절하여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선동하며 일제강점기를 보내다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된 곳도 이곳이라죠.
<육당 최남선>의 우리나라 최초의 新詩라는 '해에서 소년에게'는 <일본이 조선 소년에게> 친일 하라는
의미의 詩인데...우리는 이런 詩를 교과서에서 배우는 친일 청산 못한 시대에 살았죠.
'임꺽정'의 <홍명희>는 북으로 가고...
이 집은 <이광수>의 집이라기 보다 그의 부인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의
집이라 해야 할것입니다. <김수임 여간첩사건>과도 연관된 <모윤숙>, <노천명>, <일엽스님 김원주>
등등의 신여성들과 수많은 스캔들을 만든 <이광수>를 부인 <허영숙>은 <이광수>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학대와 조롱을 일삼다가 결국 이혼했지요.이혼 당해도 싸지요? ㅎㅎ
그들의 딸들은 아직도 미국에 살고 있다는데 좀 오래 됬지만 언젠가엔가 귀국해서
"아버지의 친일행위를 사죄한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진명여중고교' 터]
<이광수 집> 앞에는 <청와대행정관실>이 있는데 옛 <진명여고>가 있던 자리이죠.
'목아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사슴>을 쓴 시인 <노천명>이 여기 출신.
<진명여고>는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라고 하는데
<고종>의 애첩이던 <엄상궁>이 <황귀비 엄씨>가 되어 이 학교를 세우는 역활을 했다죠.
['효자로']
<옛 진명여고>를 지나면 <효자로>를 다시 만나며 <청와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효자동 삼거리>엔 <청와대> 앞 분수대가 설치되 있고
['청와대 사랑채']
"청와대 사랑채"
<한국의 관광>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지요.
이미 여러번 답사 했으므로 생략하고...
['겸재 정선'의 그림 배경 '백악산']
<한국화>의 선구자인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 선생"이 현재의 <경복고>자리에서 태어나 살다가
조금전 <이완용 저택> 옆에 있었던 "자수궁 터=순화병원=정선살던집터"로 이사하여 살며
<西村>의 여러 경치를 그렸는데 주로 <백악산><인왕산>을 그린 "장동팔경첩"이 전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있는 이 지역이 옛날엔 <장동 壯洞>이었답니다.
그 그림들 중에 이 지역과 관련있는 안내판에 나와 있는 그림만 현재와 비교하며 감상하겠습니다.
['겸재 정선' "대은암"]
"대은암 大隱岩"이라는 그림은
<중종> 때의 <지정 남곤>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집 옆의 바위에
<대은암 大隱岩>이라는 각자를 새긴데서 유래 한답니다.
훈구파 <남곤>은 <조광조>등 신진사림파를 숙청 하는데 앞장 서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역사는 그를 아주 나쁘게 평가하지요. 그래서 말년에 조용히 은거하며 살았는데,
그가 자기 집 옆 바위에 새긴 "숨어 있는 큰 바위"라는 의미의 <大隱岩>은
자기를 잘난척 비유 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겸재 정선' "독락정"]
"독락정 獨樂亭"
'홀로 풍악을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겠고
['겸재 정선' "취미대"]
"취미대 翠微臺"
'푸르름이 어스럼해지는 곳'...즉 산비탈을 의미하는듯...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자기 자유이니 나름대로 감상하면 되겠지요? ㅎ
['무궁화동산' 앞]
<청와대 분수대>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며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과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무궁화동산>으로 건너 갑니다.
사복 차림의 청와대 경호원들이 거부감을 덜 주며 경비를 곳곳에서 서고 있고
['무궁화동산' 정문]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를 헐고
<김영삼대통령>이 공원을 만들었죠
['김대중 대통령' 기념식수]
입구를 들어 서면 <김대중대통령>이 심은 <기념식수>도 있고...
['무궁화동산' 중앙 쉼터]
공원 가운데엔 쉼터도 있습니다.
['김상헌 집터']
<무궁화동산>은 <병자호란> 때의 주전파인 "청음 김상헌" 선생의 집이 있던 곳이어서
조금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감상한 <대은암>이나 <독락정> <취미대>를 자주 방문하며
남긴 詩도 있더군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저는 이 詩보다 <병자호란> 때의 화친파인 <최명길>과 나누는 대화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박정희대통령 시해장소']
<궁정동 안가>를 헐고 공원을 만들 때 그래도 <박대통령 시해 위치>는 표시했다는군요.
<김상헌 시비>로 들어 가는 입구 "소나무 밑 바위" 자리랍니다.
['칠궁'에서 '자하문고개'까지 실트랙]
4. "칠궁-1.21사태격전지-경복고-청운초-정철집터-김상용집터-
정주영회장집-청운각터-경기상고-백운동천-자하문고개"
['칠궁안내소']
<무궁화동산> 북문 쪽에는 "칠궁안내소"가 있습니다.
<칠궁>은 코로나사태로 문을 닫은 이래 오늘 처음으로 개방하며 해설도 한다고 해서 관람을 합니다.
무료이지만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한시간에 한번이니 안내판을 참고하세요~
<주의> : <청와대> 옆이라 신분증은 필히 지참해야 합니다.
['칠궁 정문']
<칠궁> 입장은 정문 옆에 있는 샛문으로 가더군요.
[안내문]
[안내도]
해설사의 해설을 10여분 듣고 출발했습니다.
해설사가 코로라사태로 2년여만에 해설을 해서 좀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하던데
아주 매끄러웠으니 걱정 할 필요 없겠습니다. ^.^
한마디로 "칠궁 七宮"은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못된 후궁이었던 여인 일곱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 입니다.
['풍월헌 風月軒'] ['송죽재 松竹齋']
['재실' 안내문]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먼저 둘러 보는데 <청와대>가 <칠궁>을 많이 침범한듯....
['삼락당'과 '중문']
<재실> 좌측으로 들어 가면 <삼락당>이라는 생활공간이 있고 우측에 사당으로 들어 가는
<중문>이 있는데, <중문>을 통과하면 ....
['육상궁 毓祥宮'과 '연호궁 延祜宮']
[현판]
['육상궁' 안내문]
['연호궁' 안내문]
사당은 하나지만 두분을 모시고 있는 "육상궁 毓祥宮"과 "연호궁 延祜宮"이 함께 있고
"육상궁 毓祥宮"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데
드라마 <동이>에서 <동이>였던 <숙종>의 총애를 받은 무술이 였습니다만
<영조>를 낳아 <숙빈>에 오른 입지전적 여인이죠.
당시 <장희빈>을 축출하여 죽이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여인이기도....
무술이 출신 어머니를 컴플렉스로 여긴 <영조>는 어머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어머니의 무덤인 <효령묘>를 <효령원>으로 격상시키고 자주 참배를 갔으며
이곳에 "육상궁 毓祥宮"이라는 사당을 만든게 대표적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칠궁>은 원래 <육상궁 毓祥宮>에서 시작 된것이죠.
['냉천 冷泉']
['영조'가 직접 쓴 오언시]
<육상궁 毓祥宮> 좌측에는 "냉천 冷泉"이 있는데 <영조>가 직접 지은 詩가 있습니다.
<영조>는 여기저기 다니며 이런 글들을 무지 많이 남겼지요.
['냉천정 冷泉亭']
[안내문]
"냉천정 冷泉亭"
<냉천> 옆에 있는 정각인데,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고
['자연 紫淵']
[안내문]
사당에 연못도 조성한 갖출건 모두 갖춘 아름다운 사당입니다.
['삼문']
<냉천정>에서 <대빈궁>으로 들어 가려면 다시 별도의 <삼문>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요.
[감실 내부와 신위]
宮의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데 관람객을 위해 내부 모습을 사진으로 안내하더군요.
['덕안궁']
[안내문]
<삼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덕안궁 德安宮"이 가운데 있습니다.
<고종>의 애첩이었던 <엄상궁>이 <명성왕후>가 죽고 <대한제국>이 되자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가 되었죠.
<영친왕>을 낳았기 때문에 이곳에
['저경궁 儲慶宮'] ['대빈궁 大嬪宮']
['대빈궁 大嬪宮'] ['선희궁 宣禧宮'] ['경우궁 景祐宮']
"대빈궁 大嬪宮" 좌측엔 "저경궁 儲慶宮"이 있는데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인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우측엔 "선희궁 宣禧宮"과 "경우궁 景祐宮"이 한 사당 안에 있습니다.
<선희궁>은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사당이고
<경우궁>은 <순조>의 어머니이며 <정조>의 마지막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의 사당이랍니다.
그런데 <수빈 박씨>는 <유빈 박씨 綏嬪 朴氏>로 불러야 한다고 최근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綏>의 발음이 당시엔 <유>였다고....
['대빈궁 大嬪宮']
<칠궁>에는 또 하나의 유명세를 타는 무지무지 유명한 여인의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대빈궁 大嬪宮"입니다.
무술이에서 왕비에 까지 오른 여인천하의 입지전적 여인인 <장옥정>.....
우리에게 <장희빈>이라고 더 알려진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에서 왕비까지 오른 여인이죠.
사당의 기둥도 다른 후궁들의 기둥과 모양이 다릅니다.
다른 사당은 사각형 기둥인데, <장희빈>의 사당은 원통형입니다.
왕비까지 올랐던 여인이라 예우를 갖춰 기둥도 원토영으로 하고 "대빈궁 大嬪宮"이라 한듯
['주한 교황청 대사관']
<칠궁>을 관람하고 나오면 <주한 교황청 대사관>이 있고
['1.21사태 격전지']
<칠궁> 담장을 따라 <창의문로>를 조금 오르면 <청운실버센타(노인정)> 앞에서
"1.21사태 총격전 터"를 표시하는 "북한 무장공비 침투 저지한곳" 표지석을 만납니다.
<창의문> 앞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동상>이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청와대> 담벼락 옆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었군요.
['궁정교회']
<궁정동 宮井洞>은 근처에 우물이 많았나 봅니다.
<七宮>과 <우물井>이 합쳐진 동네 이름이라고
['경복고등학교' 정문]
<경복고등학교> 자리가 "겸재 정선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정문을 통해 학교 본관 앞으로 올라 가면...
['경복고 본관 앞']
['겸재 정선' 집터]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년~1759년 <영조>대에 활동한 화가이자 관리
중국 그림을 모방만 하던 "실경산수화"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화법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를
탄생시키며 발전시킨 그를 저는 "한국화의 시조"라고도 표현 하고 싶습니다.
일본놈들까지도 "신조선 산수화 新朝鮮山水畵"라고 극찬을 했으니까요
여기서 태어나 52세까지 사시고 조금전에 찾아봤던 <이완용 저택> 옆 "자수궁 터" 근처로 이사를
하고 84세까지 장수하셨는데, 선생은 후진도 많이 양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심사정" "김희겸"등이 그의 제자이죠
['청운초등학교' 앞]
['청운초' 운동장-'자교 유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자하문로>로 나가면 건너편에 <청운초등학교>가 보입니다.
이 곳 운동장엔 <자수궁> 근처에 있었던 "자교 慈橋"의 유구를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송강 정찰"의 생가가 있던 곳이라는데....
['정철 생가터']
"송강 정찰" 생가터 표지석은 교문 앞에 세워져 있고....
우리나라 國文學史에 우뚝 솟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한글로 쓴 詩歌 중에선 가장 아름답다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등을 남겼죠.
말빨 글빨에서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철"이지만
끊임없는 권력욕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인도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청운초 후문']
<청운초등학교> 후문으로 가면 골목 삼거리가 있는데 우측으로 30m 정도 들어 가서
<김상용선생 집터>를 확인하고 다시 나와 위로 올라 갑니다.
먼저 우측으로 30m 정도 들어 가면....
['김상용 집터']
"김상용 金尙容" 1561~1637
<병자호란> 당시 <인조>대에 병조판서,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는데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자 책임을 느끼고 자폭 순절한 의지의 한국인이죠.
<병자호란>의 주전파 <김상헌>의 친형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안내 표지판을 땅바닥에 눞혀놔서 모르고 가면 도저히 찾기 어렵겠습니다.
뭔 보물찾기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표지판을 땅바닥에 눞혀 놨을까....
['청운 현대아파트']
['백세청풍' 각자]
<김상용 집터>에서 다시 <청운초등학교> 후문으로 나와 위로 조금 올라 가면 <청운현대아파트>를
만나는데 앞에 "백세청풍 百歲淸風" 각자가 있는 바위가 있는데
주택 담장 주축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刻字는 조금전 찾아 봤던 "김상용"선생이 "청풍계"라는 계곡의 아름다움믈 노래하며 새긴
글이라 합니다. "오랜 세월 세대를 두고 맑은 바람이 부는 곳"이란 뜻이겠죠?
시멘트로 둘러 싸인 담벼락에라도 남겨 두어 다행인가? ㅎ
['겸재 정선'의 '청풍계']
이 계곡의 옛 모습은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림으로 남겨 놨습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계곡으로 지금의 모습과 비교됩니다.
이 그림 계곡 중간쯤에 <현대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정주영 회장 자택>이 현재도 있는데
조금더 올라 가면....
['정주영회장 집' 조망]
['정주영회장 집' 정문]
[집 내부] {빌려 온 사진)
<청운동> 골목의 최상단부에 "정주영회장 자택"이 있는데 예상보다 크지 않습니다.
<백세청풍 百歲淸風>의 기운을 미리 알았는지 <인왕산> 자락 <청풍계 淸風溪>에 자리했습니다.
<청와대>와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은건 필요시 언제나 <박대통령>의 <청와대>를 들락 거릴수
있어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주한 브루나이 대사관'']
다시 <청운초등학교>로 내려와 조금 올라 가면 <주한 브루나이 대사관>이
<경기상고> 건너편에 있는데, 여기서 좌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대시멀']
['옛 청운각']
현재 <대시멀>이라는 촬영 대여처로 있는 이 집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전기 사장의 집>이었는데,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였답니다
그 이후 요정정치의 산실로 군림한 유명한 "청운각 淸雲閣" 으로 변했고,
이곳에서 <한일협정의 기본 윤곽>이 마련되었다고 하네요.
이곳에서 한밤중 회담을 했던 일본 <시나 외상>의 유명한 말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는 말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경기상고' 정문]
다시 <자하문로>로 나와 <경기상고>로 들어 가면...
['청송당 터']
['청송당유지']
"청송당 聽松堂"
표지석에 "조광조"의 제자로 대학자 '청송 성수침'이 두문불출하며 공부했던 독서당터"라고 합니다.
"청송 성수침 聽松 成守琛" 선생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율곡 이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대학자로 알려진 "우계 성혼 牛溪 成渾"선생의 아버지이죠.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일정시간이 흐르자 정치집단들이 나타나 당파 싸움을 벌이죠.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 [사림파]가 대립을 시작했습니다만,
[4대사화]를 통해 [사림파]가 처참하게 당하며 멸망의 길을 걷다가,
[훈구파]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선조]가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등이 [사림파]의 대를 이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개혁세력의 거장인 "정암 조광조"와 그의 제자 "청송 성수침"선생으로 이어진 [사림파]의 후예이니
이들을 [사림파] 중에서도 이들이 "西村"에 산다고 "서인 西人"이라 하게 되었는데,
그 "西人들의 聖地"가 바로 "성혼선생"의 아버지가 세운 "청송당 聽松堂"이 되는 것이니
그 의미는 크다 할수 있겠습니다
['겸재 정선' "청송당"]
이 근처에서 태어나 살았던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로 "청송당"을 남겼습니다
옛 풍치를 감상 할수 있어 다행입니다.
['자하문터널' 입구]
<경기상고>를 나와 올라가면 <자하문터널>을 만나는데 우측길로 올라 가면...
['자하문터널' 위]
['백운장' 터]
['안내문]
"백운장 터 白雲莊址"
안내문에 상세히 설명해 놨습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대신 출신 중에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 든 분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대대손손 흥하다는 말이 지금도 유효한데.....
['겸재 정선' "백운동"]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 <백운동>에 대해서도 진경산수화를 남겨 옛 정취를 느낄수 있고
[오름길]
<옛 백운장>의 입구를 알리는듯 하는 탑같은 돌기둥이 있는데 이 길로 계속 올라 가면...
['청운화장실']
<청운화장실>이 나오더군요.
['인왕산숲길']
['청운공원']
이 길은 <인왕산 숲길>이 이어지는 길이고
['청운문학도서관']
<백운동 계곡>의 상단부엔 <청운문학도서관>이 있는데
<동농 김가진>선생의 뜻을 기리며 <백운장>이 있었던 계곡 상단에 설립된 도서관이라 합니다.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답사를 마치고
['청계천 발원지']
<자하문>으로 더 익숙한 <창의문> 입구에 "청계천 발원지"가 있는데
여기가 아니라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다는 표지석입니다.
['겸재 정선' "창의문"]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 <창의문>에 대한 경치도 남겼습니다.
['자하문고개']
<자하문고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4km였으며, 5시간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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