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삼청공원에서 북촌을 따라 광교까지』
<2부>
<1부> 못 보신 분들은 [종로구]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 답사기 여기 클릭
[전체 답사 지도]
['여섯번째구간-삼청공원에서 김형태가옥까지 실트랙]
6. "삼청공원-감사원-취운정-현상윤집터-동양차문화원-
맹사성집터-북촌6경-이명박살던집-이준구가옥-김형태가옥"
['삼청공원 정문']
2021년 11월 16일 (수) 맑음
"1부 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에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물이 맑고 <水淸>, 숲이 맑으며 <山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맑은 곳 <人淸>
그래서 "삼청 三淸"이라 한다는 <삼청공원>의 정문을 통과하여 <감사원> 앞으로 가면...
['감사원']
<감사원>을 만나는데 <감사원> 앞에 <주한 베트남 대사관>이 있고
['취운정 터']
<감사원> 정문을 지나 <삼청터널 입구>로 가면 모퉁이에
"취운정 터 翠雲亭址" 표지판이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족벌 중에 변절하지 않고 청렴했던 몇 않되는 인물중에 한 분이 "민영익"인데
그의 아버지 "민태호"가 지은 집이 <취운정>이며 대를 이어 살던 집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감사원> 주변이 <취운정>이었다고...
<민씨 족벌 세도정치>의 대명사인 아버지 <민태호>는 <갑신정변> 때에 개화파에 의해 참살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은 <민영익>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나?
그런데 이들과 비숫한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군 아들>은 또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인 <유길준>이 이 <취운정>에 유폐인지 여튼 숨어 살며 쓴 유명한 책이
"서유견문 西遊見聞"이라서 <취운정>이 일반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유길준>은 개화파였지만 결국 변절하여 일본으로부터 하사금까지 받아 챙겨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본은 친일에 고맙다고 작위까지 하사했지만 하사금만 받고 작위는 받지 않아 그나마 다행.
*<유길준 묘>는 <하남 검단산 등산로>에 있지요.
['중앙중고교']
이어서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여기도 찾아 봐야할 곳이 몇 있어 다음에 답사할 예정입니다.
['중앙중고' 조망]
<중앙 중고등학교>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창덕궁>과 <신선원전>인데 다음에 근접 촬영 하기로 하고
['현상윤 집터']
<중앙중고>에서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면
"기당 현상윤선생 집터 幾堂玄相允先生家址" 표지석이 있는데
<현상윤선생>은 우리나라 제1호 박사이며 <중앙고보>의 교장을 지내고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신 교육자이자 문학가이시죠.
<고려대> 총장 시절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북으로 가서 소식이 없었는데
최근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 있는 <재북인사의 묘>에 안장되 있답니다.
*<동양그룹 현재현회장>이 <현상윤선생>의 손자랍니다.
['북촌로']
['맹사성 집터' 가는 길]
<가회동>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 가면
우측에 독특하게 한옥에 개업한 <이 해박는 집>이라는 치과를 만납니다.
여기서 우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한화 김승연회장집' 입구']
곧 바로 <한화그룹>의 <김승연회장집> 입구를 만납니다.
앞에 있는 집이 경비실인듯 해서 경비원에게 <김승연회장댁>이 맞냐고 물으니 자기는 모른답니다.
나도 아는데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이 여긴 왜 있지? ㅎ 알려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는가 봅니다만
유튜브 검색해 보면 이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이나 노동자들 동영상 많습니다.
['북촌 정상]
['맹현']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북촌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는데 꼭대기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맹현 孟峴"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맹사성 집터>라고 분명히 표기하지는 않고 <맹고개 孟峴>로 표기해 놨습니다.
여기서 좌측 <동양차문화관>으로 들어 가면....
['고불서당']
"고불서당 古佛書堂"이라는 집이 있는데 <古佛>은 <맹사성 선생의 호>지요.
워낙 유명한 사육신 중에 한분이니 선생에 대해선 생략하고...
오리지날 옛집은 아닐테고 요즘 지은듯
여기서 우측을 보면...
['동양차문화원']
<동양차문화원>이 있습니다.
<북촌 北村> 조망처로는 최고라고 자랑하는데 <맹사성 집터>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당연히 영업적인 안내로 여겨지는데 조망을 위해선 입장료를 5,000원 내야 한다고 하네요.
차 한잔 써비스로 준다고....물론 카페 이용료로 차 한잔 마시며 조망하는 비용으로는 비싼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조망을 할수 있으니 시간도 없어 그냥 패스하고
['북촌 한옥마을']
<동양차문화원> 우측 골목을 빙 돌아 가면
우측으로 첫번째 골목을 만나는데
['북촌팔경 중 6경']
첫번째 우측 골목이 <북촌8경> 중에 <제6경>이라는 한옥촌이 남산을 바라보며 펼쳐져 있습니다.
이 근처에 <북촌4~7경>이 몰려 있다는데 모두 답사하지는 못하고...
이 한옥촌은 일제시대에 <정세권>이라는 건축업자가 지어 분양한 한옥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집 모양이 거의 같고...
['이명박 전대통령 살던 집']
두번째 골목에는 <이명박 전대통령>이 대선 후보일때 길지 않은 기간동안 살았다는 집이 있는데
<북촌로 11가길 39번지>로 '카카오지도'에는 <취운정스파스위츠바이락고재>라고 표기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북촌>에 살아야 한다는 점괘가 있는지 <이회창 후보><정주영후보> 등도
<북촌>으로 일시 이사를 했죠. 결과는...ㅎ
뒤에 <이준구 가옥>이 보이는데...
['이준구 가옥']
[안내문]
"가회동 이준구 가옥 嘉會洞 李俊九 家屋"
현재 이 집의 소유자가 <이준구>라는 사람이니 그에 대해선 알 필요 없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중요하죠? ㅎ
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익>이 세도가의 위세를 떨치며 지은 일제시대 집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집은 원래 집의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하니 원래 이 집 규모를 짐작 할수 있겠습니다.
일제시대에 개성에서 신돌이라는 화강암을 가져오고, 프랑스산 기와를 수입해서
이런 프랑스식 양식에 한옥을 약간 가미한 대저택을 <가회동> 북촌 꼭대기에 지었으니....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부정축재를 한 <민씨 족벌>의 한 단면을 보는듯 해서 좀 씁슬...
이 집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 <이명박 살던집> 윗쪽 끝에서만 보이더군요.
['가회동 북촌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김형태 가옥']
[안내문]
<서울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된 "김형태 가옥"을 만납니다.
<김형태씨>도 현재 이 집 소유자여서 알아 볼 필요가 없고
원래 소유자는 "이달용 李達鎔"이라는 놈이군요.
이 놈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완>의 아들인데, 그러니 <고종>의 오촌 조카가 되는 놈이죠.
왕족이면서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서며 친일행위를 한 나쁜놈 중에 나쁜놈, 치졸한 놈이죠.
['일곱번째구간-김형태가옥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실트랙]
7. "김형태가옥-가회동성당-가회동한씨가옥-진단학회터-손병희집터-
백인제가옥-최승희집터-성삼문집터-김옥균집터-정독도서관"
['가회동 성당']
[안내문]
<김형태 가옥>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가회동 성당"을 만납니다.
"주문모 신부 周文謨"가 조선에 와서 첫 미사를 올린 곳이라는군요.
<주문모 신부>는 <중국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랍니다.
['재동초교' 뒤]
<가회동 성당>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좌측에 <재동초등학교> 뒷모습니 보이기 시작하는데
조금 못미쳐 좌측에 <휘겸재>가 있습니다.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嘉會洞韓氏家屋)"
밖에서 보기엔 좀 큰 일반 한옥 같이 보이나 안에 들어 가 보면 어마어마 크고 너른 대저택입니다.
어찌 대저택은 거의 대부분 친일파들 중에서도 최고 악질 친일파들의 집인지...에그~~
지금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을 해야 안으로 들어 갈수 있어 들어 가 보는 건 생략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후 방문 할 <백인제 가옥>을 지은 놈이 이 집 주인이었던 <한상룡>이기 때문입니다.
<한상룡>은 우리나라 최초 한성은행을 설립 운영했지만 악질 고리대금업자라 할수 있습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고 할 정도...
이 쌔끼 얼마나 친일 행위를 했는지 집 이름도 <한상룡 가옥>이라 하지 못하고 <한씨가옥>이라
했겠습니까. 잠시 후 <백인재 가옥>에서 더 자세히 알아 보겠지만
이곳 북촌의 대저택들은 거의 대부분 다 친일매국노들의 집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재동초' 뒷골목]
<한씨가옥>을 지나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뒷골목을 만납니다.
이 골목으로 50m 정도 조금 들어 가면...
['진단학회 터']
"진단학회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락고재 樂古齋"라고 하는 한옥집이 <진단학회>가 일시 있었던 곳이랍니다.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라고 주장 합니다만
일부 식민사관등에서 탈피하지 못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단체였죠.
['가회동 주민센터']
<재동초등학교> 됫골목 <진단학회 터>에서 다시 나오면, 건너편 좌측엔 <가회동주민센타>가 있고
우측엔 <북촌박물관>이 있는데 골목 입구 <북촌박물관> 앞으로 가면...
['손병희선생 집터 표지석']
"손병희 孫秉熙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손병희선생>이 살던 집은 이 빌딩 <북촌박물관> 뒤 골목 안에 있습니다.
['손병희선생 살던 집']
"손병희 孫秉熙 선생 살던 집"
극열 친일파가 아닌 분으로는 아마도 유일하게 대저택에서 사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손병희선생>도 그렇게 좋게만 볼수는 없지만...
여하튼 우리나라 <동학>의 3대 교주로 <동학>을 <천도교>로 일으켜 세우며 많은 헌금이 들어 와
교세가 확장되어 부유하게 된것은 틀림없는듯 합니다.
['백인제 가옥']
<손병희선생 살던 집>에서 조금 더 들어 가면 "백인제 가옥"을 만납니다.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설립자인 <백인제>가 살던 집이었는데
현재는 <서울시>가 매입하여 개보수 해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2호>로 지정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없으며 월요일엔 휴관이니 시간 맞춰 가야 겠습니다.
<北村>에서 두번째로 으리으리한 한옥이 되겠습니다.
잠시 후 들릴 <윤보선家>가 제일 크고 으리으리 한데 들어가 관람 할수는 없으니 여기가 최고.
조금전 <휘겸재(한씨가옥)>은 세번째?
['중문']
['백인제 가옥' 안내문]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중문을 만나는데 중문은 벽돌문으로 되 있군요.
<백인제>는 최근까지 집 소유자일 뿐이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누군인지가 중요 하겠죠?
['사랑채']
이 저택의 역대 소유자는 크게 네명으로 구분된답니다.
이 가옥을 짓고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한상룡 韓相龍 (1880~1947)"이랍니다.
친일매국노 중에서도 첫번째 매국노인 <이완용>이 그의 외삼촌인데 그 끝빨로 우리나라 초창기
금융가를 지배한 인물입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 할 정도였답니다.
친일 왕족인 <고종>의 종형 <이재완>을 내세워 설립한 <한성은행>의 총무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경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신임을 얻어 1923년에는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행장)>으로 취임하고,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이 되었으며,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찌>의 동상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며 일본에 전투기를 사 주는등 뼈빠지게 친일행위를 했죠.
당시 은행이라는게 고리대금업자였죠. 우리 백성들의 땀과 피를 고리로 빨아 먹으며 떼부자가 되어
지은 집이 이 집과 조금 전 <휘겸재>등 여러 채랍니다.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을 정도이니 최고급 자재를 사용 한것은 물론 고유 한옥과 현대적
유리창문을 조화시켜 그야말로 명품 개량 한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허구한날 연회를 배풀곤 했다는군요.
['작은 사랑채']
<사랑채> 좌측엔 <작은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
두번째 이 집 주인은 "최선익 1905~?"이라고 하는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 언론인이었답니다.
<조선일보> 주주이자 기자로 활약하다가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여운형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답니다. 매물로 나온 이 집이 더러운 친일매국노의 집이란 걸 알면서도
한옥에 대한 애착으로 인수하여 집을 새로 수리하고 살다가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백인제>에게
이 집을 1944년에 매각하고, 이어서 터진 <6.25 때>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수 없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작은사랑채'-'영상 상영실']
<작은사랑채> 끝 방은 현재 <영상 안내실>로 이용하고 있더군요.
영상에는 <백인제-최경진 부부>의 장녀가 여러 일화를 소개 하고 있었습니다.
[기념사진]
이 집의 세번째 주인이 "백인제 白麟濟 (1898~?)" 입니다.
<백인제>에 대해선 안내문에 잘 설명 되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사진 속에 홍일점 여인이 그의 부인인 "최경진 1908~2011"이랍니다.
<최경진여사>는 일본 <나라고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배화여고> 선생을 할때 <백인제>와
결혼했다는데, 남편이 납북 된 후 <백병원>을 실제 일군 사람이랍니다.
<최경진 여사>는 103세까지 장수했는데 뉴스였지요.
사진 속의 인물 중에 제가 확신을 갖고 알수 있는 분은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에 앉아 있는
<춘원 이광수>이고. 가운데 <최경진여사>의 우측에 않아 있는 <서재필>입니다.
<백인제>는 윗줄 좌측에서 다섯번째라고 하는데 정확치 않습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가로 교과서에 까지 실리며 포장됬지만, 일찍이 <미국 국적>을 취득한
미국사람이며, 스스로 미국사람이고 싶어하며 조선을 우습게 본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죠.
<갑신정변> 쿠데타의 주역 중 최연소 22살의 <서재필>은 일본으로 토꼈다가 미국에 귀화하고..
미국에서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여튼 의사 인턴까지는 해서 <백인제>와 더 가까운척 한듯..
여하튼 당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초대되어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틀림없네요.
['백인제-최경진 결혼사진']
신랑 <백인제> 우측 옆에 흰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춘원 이광수>랍니다.
사제지간이라고 하는군요.
여튼 일제시대 무지 인기있는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는 떼돈을 벌었나 봅니다.
진료를 받을려는 환자들이 한달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니....
그러니 이런 집도 사들이고, 대학도 설립하고 <백병원>이라는 종합병원도 만들고....
<백인제>는 특히 사냥을 좋아해서 <북한산>등으로 사냥을 나가 잡은 맷돼지 등으로
이 집 정원에서 미국국적의 <서재필>등을 초대해 바베큐 파티를 자주 열었다고 하네요.
[안내문]
<백인제-최경진 부부>가 이 집을 매입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안채와 2층]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있는데 2층이 있습니다.
<한상룡>이 이 집을 지을 때 친일파로서 일본식 집 흉내를 낸게 아닌가 추측한답니다.
[안채 뒤 부엌과 좌측 별채]
<안채> 뒤로 돌아 가 보니 부엌이 상당히 크고
또 다시 <별채>가 상당한 규모로 있는데 <백인제>의 장인 장모가 살았다고 하네요.
<백인제>는 이 집에서 고작 6년 정도 살다 북으로 갔으니, 아마도 부인인 <최경진>이 친정 부모를
이곳에 모셨다고 봐야 하겠죠?
['별당']
[안내문]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별당>입니다.
<한상룡>이 인생 절정의 쾌락을 즐기며 영원토록 살고자 마련한 <별당>이었겠지만
그도 고작 67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했습니다만, 당시 하도 사람들로 부터 욕을 많이 얻어 먹어서인지
그 당시 나이로는 제법 오래 산 것이죠? ㅎㅎ
그 후 집주인이었던 <최선익>과 <백인제>도 인생 중반에 북으로 가 죽었으니 인생무상입니다.
['별당']
<별당>을 나오며 뒤돌아 본 <별당>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집 자체만은 정말 멋있습니다.
['별당' 앞 산책로]
<별당> 앞에서 담장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 있군요.
['사랑채'와 '안채' 조망']
의사가 되어 돈 많이 번 <백인제>는 <6.25>때에 미처 피난을 못가 북으로 잡혀갔답니다.
부인 <최경진여사>와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고 모두 잘 키웠다고 입시철만 되면 주목 받았죠.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백인제> 다음으로 그의 부인 <최경진여사>가 이 집의 제4대 주인이 되어
원형 변경없이 이 집을 잘 가꾸고 살다가 이 집은 2009년 11월에 <서울시>에 넘기고
자신은 2011년 7월 3일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정독도서관' 조망]
<백인제 가옥> 옆에는 <옛 경기고> 자리인 <정독도서관>이 붙어 있습니다.
잠시후 도서관에 올라가 이곳을 조망하겠습니다.
['재동초앞 교차로']
<손병희선생 집>과 <백인제가옥>이 있는 골목에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가면
<재동초등학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인
<옛 최승희 집>을 다녀 오도록 합니다.
['최승희 집' 입구]
['최승희 집' 입구] '
<최승희집>은 <헌법재판소> 북측 건너편에 있는데 현재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입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 가면....
['한뫼촌']
<한뫼촌>이라는 음식점 입구 벽에 "최승희 집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최승희' 사진]
<한뫼촌> 대문 안에는 <최승희 사진>이 두장 걸려 있더군요.
우리나라 최초, 최대 한류스타였던 월북 무용수 <최승희의 집>이었답니다.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쓰이고 있어 어쩐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북한 애국열사 능'에 잠들고 있는 '최승희']
"최승희 (1911~1969)"
18살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25살에 <나의 자서전>을 썼고,
그의 책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조선아동무용기본>은 조선 춤의 기본 교과서가 될 만큼
무용에 대해선 천재였다고 불려진 여인이죠.
['한뫼촌' 음식점]
<최승희>가 살았던 집 안을 횡하니 둘러보고
['홍현' 조망]
다시 <재동초 사거리>로 나와 서쪽으로 올라 갑니다.
서쪽엔 나즈막한 언덕이 보이는데 언덕으로 올라 가 <정독도서관>을 둘러 보고 다시 내려와
좌측 <윤보선家>로 가는 골목으로 갈 예정입니다.
['홍현']
붉은 흙이 고개를 뒤덮고 있어 "홍현 紅峴"이라 한답니다. 지금은 물론 아스팔트로 뒤덮혀 있지만
이 고개엔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는데 <옛 경기고등학교>의 한 건물입니다.
좌측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들어가 이리로 나올 예정입니다.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가는 내리막 길 <정독도서관 정문> 앞에는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정독도서관' 정문]
"정독도서관" 정문에 도착합니다.
"옛 경기고등학교"로서 도서관으로 바뀌고 나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겁니다.
정문에는 "장원서 터"와 "성삼문 선생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역사적인 곳이라고 강조하고
['옛 경기고']
머리를 싸메고 이 교문을 통과하려고 공부했던 그 시절이 눈 가에 눈웃음 치게 하는 군요. ^.^
['정독도서관']
이제는 "정독도서관 正讀圖書館"으로 변모해 시민들의 휴식과 양식을 주는 곳이 되었군요.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도서관 중앙통로']
본관으로 올라 가는 중앙 통로가 있는데, 예전엔 운동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해 놨습니다.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김옥균 집터 표지석' 조망]
['김옥균 집터']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려운 "김옥균 집터"표지석이 있습니다.
<서재필>도 이곳 <김옥균>의 집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지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쿠데타가 모의 된 곳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요.
10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다시 집권한 <민씨 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거절했고
하지만 일본은 1886년 8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섬'에 연금시켰고
1888년에는 '홋카이도'로 이송했다가 1890년에야 풀어 주었답니다.
일본에 배신감을 느끼며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했고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습니다. 효수 사진이 있는데 처참해서 못 올리겠습니다.
같은 쿠데타 동지 였던 <박영효>가 <김옥균>에 대해 일본에 망명해서 살며 자주 언급한 말을 인용하면...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충남 아산에 있는 <김옥균 묘>에 세워진 <묘비명>에는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경근당''옥첩당' 있던 곳]
서쪽편엔 운동장이 공터로 남아 있는데
<1부>에서 언급 한바 있는 <경복궁 건춘문> 앞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을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이 그 자리에 <기무사 테니스장>을 만든다고 문화재를 지들 맘대로 이곳으로
이전 했던 곳입니다. 민주화가 되고 다시 원래 자리로 이전 했으니 망정이지만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군바리들의 행태는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정말 과관이었습니다.
<경근당>과 <옥첩당>이라는 문화재가 테니스장을 위해 <전두환 패거리들>이 국민의 세금을 들여
유랑생활을 시킨 것이니...그도 그저께 저 세상으로 갔더군요.
이 공터 우측 끝 <백인제 가옥 조망>이라고 표기 한 곳으로 가 보면....
['백인제 가옥' 조망]
조금 전에 관람했던 <백인제 가옥>이 가까이 조망되고...
['인왕제색도' 기념탑]
공원으로 조성된 운동장 가운ㄷ데로 다시 가면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인왕제색도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의 경치를 그린 국보 그림이죠.
깜박하고 여기서 바라보는 <인왕산>을 촬영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꼭 촬영해야지...
['경기고 본관 앞']
[안내문]
"정독 도서관 正讀圖書館"
한자로 <正讀>이라고 쓰는데...원래 "책을 깊이 있게 읽다" 할 때는 <精讀>이라고 하죠.
여기는 <박정희 전대통령> 이름의 <正>를 넣어 지은 도서관 이름이라서 그렇게 됬다고...
또한 "Library"를 우리말로 "도서관"이라고 한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책을 많이 비치하고 그 책을 읽는 곳'에 <그림 圖>가 왜 들어 가느냐라는 것 때문입니다.
일본식 번역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치고...
[물레방아]
['도서관 2관 3관 사이]
공원화 된 도서관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서울교육박물관']
<홍현 紅峴>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앞으로 나가면...
['여덜번째구간-서울교육박물관에서 안동별궁터까지 실트랙]
8.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조선어학회터-
윤보선家-감고당터-안동별궁터"
['홍현'에서 '윤보선가' 가는 길]
<재동초 사거리> 방향에 우측 <윤보선家> 가는 길이 있습니다.
['윤보선家'와 '조선어학회터']
골목으로 들어 가면...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 터 朝鮮語學會址"표지석을 만납니다.
<한글학회>의 전신이죠. 이런 좋은 일 하던 사람들의 활동 공간들은 왜이리 초라한지...ㅠ
['윤보선家' 담장]
['윤보선家' 정문]
<北村> 최고의 한옥 저택인 "윤보선家"를 둘러 봅니다만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들어 갈수 없어 아쉽습니다.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지며 탄생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살던 집입니다.
<윤보선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는 누구인가...이런 정도는 알고 가야죠?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웅렬>과 동생 <윤영렬>....<윤영렬>의 아들이 <윤치소>이고 <윤치영>의 형이죠.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서며 <조선총독부 참의>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세째 아들인 <윤원선>은 그러니까 <윤보선>의 동생은 <흥선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하여 황실 가족이
되기도 했지요.
['감고당길'에서 '정독도서관' 조망]
<윤보선家>에서 나와 <감고당길>로 들어서서 뒤돌아 보면
조금전에 들렸던 <정독도서관>이 가까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옛 경기고 학생>들의 등하교길이었습니다.
['감고당길']
이어서 <육교>를 하나 만나는데 이 육교 유명한 육교이죠 ㅎㅎ
이 육교는 좌측 <덕성여고>와 우측 <덕성여중>을 연결하는 교내 육교인데
옛날 <서울 5대 극성> 기억하십니까? 그 중에 대표 극성 여고가 <덕성여고>라고들 했죠? ㅎㅎ
당시 농담 하나 언급하면...저 육교 위에서 <덕성여고 여학생>들 일부가 밑에 등하교하는
<경기고 남학생>들을 히야까시ㅎ 히곤 했다는...ㅎ <풍문여고>는 몸빼바지를 입었었고
<덕성여고>는 치마를 입었었는데...ㅎ
['덕성여고' 정문]
['덕성여고']
"덕성여고"는 그렇게 예전도 아닌 1966년까지 "감고당 感古堂"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숙종>의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그 유명한 <장희빈>에 의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폐서인으로 산 곳이 <감고당>이랍니다.
또한 <명성왕후>가 여덟살 때에 한양으로 올라와 이곳에서 살았는데 왕비로 간택.책봉 되는
1866년<고종3년>까지 머물렀답니다.
그런 연유로 건물은 현재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로 이전 복원되 있습니다
사진 보여 드리면...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 이전 되 있슴]
더 자세한 사항은 "여주여강길 5코스 황학산길" 답사기 여기 클릭
['여성독립운동가길']
<감고당길>은 또한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고도 하는군요.
<덕성여고>와 붙어 있는 <옛 풍문여고>로 가면...
['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만, 현재는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변모해 있군요.
<명성왕후>의 <민씨 족벌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전국에서 <동학혁명><임오군란>등 여러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지요. 이 틈을 노리는 외세의 침락 그림자가 드리우고....
<고종>은 민심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 첫번째로 <부정축재 가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에 <민영휘>에게도 명령을 내려 어쩔수 없이 재산의 아주 일부를 내 놓고 설립한 학교가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 랍니다.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 다수가 그런 조치로 설립됬지만..
<고종>이 학교 이름도 지어 줬는데 돈을 낸 <민영휘>의 <휘 徽>에 <글 文>자를 붙여 <휘문 徽文>이라 하고,
또한 <민영휘>의 처인 <안유풍 安遺豊여사>의 <풍 豊>에 <글 文>을 붙여 <豊文>이라고 했답니다.
필자인 <파란문>이 <휘문高> 출신이라 잘 압니다. ㅎ
그러니까 <휘문>과 <풍문>은 같은 뿌리인거죠. 지금도 <민씨 가문>이 운영하고 있지요.
그런데 <휘문>은 일찌기 <강남>으로 이사했지만, <풍문여고>는 2017년 3월에 남녀공학학교가 되어
<자곡동>으로 이사해서 <풍문고등학교>가 되었더군요.
['풍문여고'와 '안동별궁']
[이전 복원 되 있는 '안동별궁']
[안내문]
"안동별궁 安洞別宮"
이 곳은 원래 왕실의 대군들이 살던 <연경궁>이 있었는데 <고종> 때에 건물을 새로 지어
<고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의 가례를 올렸는데
<순종>의 첫번째 세자빈인 <순명효왕후 민씨>와 결혼식을 올렸고, <순명효왕후>가 죽자
두번째 <순정효왕후 윤씨>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죠.
그러다가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식>에게 넘어 가고...<풍문여고>가 설립되고....
['풍문여고'와 주변 전경]
주변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 캡쳐해 올립니다.
<北村>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데..특히
<휘문고 (현 현대그룹사옥)>와 <풍문여고 (현 서울공예박물관)>의 위치를 확연히 알수 있군요.
바로 앞 공터는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의 관사>가 있었고,
해방 후부터는 <미국대사관저>가 있던 곳인데 <대한항공>이 인수해서 호텔을 지을려다가
<땅콩 회항 사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터로 남아 있답니다.
이곳은 <경복궁> 바로 옆 동산이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한 고개였다고 <송현 松峴>이라 한데서
이 동네 이름이 <송현동>이 되었답니다.
['안동별궁 표지석']
<옛 풍문여고> 정문에 "안동별궁 安洞別宮"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안국동>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안동별궁>이라고
['아홉번째구간-안동별궁에서 광교까지 실트랙]
9. "안동별궁터-충훈부터-우정총국-조계사-민영환자결지-태화관터-
순화궁터-한양중심점표지석-의금부터-보신각-전옥서터-광교"
[''북인사 안내소'와 '충훈부 터']
<풍문여고> 정문 건너편에는 <인사동 북쪽 출입구>가 있으며 "북인사 안내소"가 있으며
그 앞에는 "충훈부 터 忠勳部址" 표지석이 있는데, 실제 터는 뒤에 별도로 있더군요.
또한 "해방병단 결단식 터 海防兵團" 표지석도 있었습니다. <해군> 창설 결단식이 있었다고
['일획을 긋다']
<인사동 북쪽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획을 긋다>라는 조형물이 눈길을 끌고....
이 근처에 예전 <김영삼 총재> 시절 <신민당 당사>가 있었는데...
['우정총국' 앞]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방향으로 조금 가면 "체신기념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 있었던 자리이며 <갑신정변>의 진원지이죠.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부르주아혁명>의 발화지였던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관서인 "전의감 典醫監"이 있었다고 하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다거나, 궁중의 각종 행사를 기록으로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그림을 관장하던 관청인 "도화서 圖畵署"도 있었었답니다.
또한 <민씨 세도 족벌> 중에 몇 안되는 우국충정의 "충정공 민영환"이 살던 집터가 앞 주차장 자리였답니다.
['우정총국']
[안내문]
"체신기념관"
이 우체국 개원식이 당시엔 근대선진국가로 가는 큰 상징적 행사였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죠.
['민영환 동상']
"민영환 閔泳煥 (1861~1905)"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도 다른 집안이 얼마나 있을까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 閔謙鎬 (1838~1882)"가 <민씨 족벌세력>의 우두머리 격으로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이죠. 그러니까 <고종>의 외삼촌이 되는거죠.
당시 <민겸호>는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국방장관이었던거죠.
그런 그가 기존 군인들의 봉급을 13개월이나 주지 않고, 그나마 한달치를 주었는데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주어 마침내 불만이 폭발한 군인들이 <민겸호>를 죽이고 항거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죠.
군사데타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에게도 먹고 살수 있는 봉급을 달라는 단순한 요구였던 군란이었지요.
그러니까 <충정공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는 <임오군란>의 원흉으로 탐관오리의 절정이었습니다.
아들 <민영환>은 어떠 했는가.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며 나라가 식민상태로 들어가자 격렬한 저항을 했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어
다른 방법으로는 저항할 방법이 없어지자, 자결로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조선백성들에게 각성을 요청하는 내용>과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조선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며
또 다른 한통은 <고종에게 올리는 글>이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우국충정에 뒤따라 자결하는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습니까?
['조계사' 조망]
<우정국>과 <조계사>는 서로 붙어 있어 경계가 없습니다.
<조계사>로 넘어 가면...
['조계사 백송']
"조계사 백송 曹溪寺 白松 (천연기념물 제9호)"
가을 국화 퍼레이드 속에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없는지 여러번의 외과적 수술울 했지만 거의 죽어 가고 있는 <조게사 白松>입니다.
['조계사 회화나무']
<조계사>에는 4~500년 수령의 <회화나무>도 있습니다.
['조계사']
국화로 뒤덮힌 <조계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총본산이지만 설립된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1911년에 <만해 한용운>과 <이회광>이 <중동중학교> 자리에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답니다.
['조계사 정문']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조계사>를 나와
['종각' 방향 '우정국로']
<종각>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제일은행 본점']
<제일은행 본점>이 나타나는데, 옛날 이곳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의 공터는 겨울철
스케이트장이 되곤 해서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었는데....그동안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태화빌딩' 조망]
<태화빙딩>이 보이는데...
['옛 세븐당구장']
사거리에 이 건물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군요.
학창시절 이곳 2층에 <세븐당구장>이 있었는데, 가끔 원정 당구를 왔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집은 <익선동>이었으니 그리 멀지 않은데 있었지만...
미국에서 의사를 하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친구가 이 당구장 최고수였는데...그때 700을 쳤으니까...
['하나로투어빌딩''태화빌딩''하나로빌딩' 조망]
['민영환 자결터']
<하나로빌딩> 앞마당에는 앞에서 언급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자결터"가 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한 자리에서 죽순이 돋아 났다고들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
<민영환>이 자결할때 피뭍은 옷을 부인인 <박수영씨>가 집에 보관했는데
8개월 후쯤 피뭍은 그 옷이 있는 방에서 죽순이 돋아나 보관했다고 합니다.
죽순은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다가 유족들이 1962년에
<고려대>에 기증해서 <고려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또한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했빛이 잘 들어 오지 못하는 방에 흙과 수분이 없는 바닦에서 대나무가 자랄수 있는지 논란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국충정의 그 뜻을 기리며 "血竹=애국심"으로 믿고... 믿어 주고 있는거겠죠.
['태화빌딩']
['3.1독립선언유적지' 안내문]
"명월관 明月館"
<명월관>은 1904년에 구한말 궁중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옛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 자리에 <궁중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했는데, 화재가 나 종로3가에 있는
<현 'CGV피카디리1958'극장> 자리로 이전하여 음식점으로 대성황을 이루기 시작 했답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실직한 궁중의 기녀들과 지방의 관기들이 모여 들어 <명월관>은
사교장으로 변모하며 새로운 유흥 문화의 장으로 승승장구 했답니다.
시간이 지나며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 흥청망청 방탕하게 노는 기생집으로 변모하고
주요 고객이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등 친일매국노들이었답니다.
장사가 잘되니 분점이 생겼는데 이곳 <태화관>도 <명월관>의 별관이었는데, 식사 술 춤과 노래를
함께하는 종합 유흥업소를 만들며 1918년 본점이 화재로 소실되자 실제 본점 보다 더 성황을
이루어서 <명월관>하면 이곳 <태화관>으로 인식되며 종합 유흥업소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태화관>은 원래 <중종>의 딸 <순화공주>가 살았던 <순화궁>이라는 宮이었는데
<이완용>이 자기 소유로 만들어 <이완용의 별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이토 히로부미>와 이곳에서 政事를 논의 하기도 했답니다.
그후 <이완용>이 <명월관>에 넘긴거죠.
이러한 내력이 있는 <태화관>에서 <삼일독립선언>이 이루어 졌다는게 의미가 남다릅니다.
['순화궁 터']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에 "순화궁 順和宮" 표지석이 있습니다.
<중종>이 자신의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려졌지만
이곳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살았고 그녀 사후 사당으로 사용되었다네요.
[백과사전]을 인용하면...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고,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가
태어난 저택이 있었다. 이 저택은 구수영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에는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 헌종 사후 후궁 경빈 김씨가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이후 이윤용, 이완용이 소유하였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요정 태화관이 있었다. 현재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세워져 있다."
['하나로빌딩']
['하나로빌딩 로비']
['한양중심점 표지석' '하마대']
[안내문]
<순화궁 표지석> 좌측에 있는 <하나로빌딩> 입구에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안내석이 있는데
오리지날 표지석은 안으로 들어가 로비 끝에 있으니 알고 가야 볼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짓고 <한양의 중심점>을 표기 했다는데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좌측에 있는 돌은 <순화궁>에 있었던 <하마비> 옆에 있던 말 타고 내릴 때의 디딤돌이랍니다.
['종각역 1번출입구']
<종각역1번출입구> 앞 <'SC제일은행 본점'> 앞에는 "의금부 터 義禁府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현재의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검찰청 대법원 국정원을 한데 묶어 집행하는 무시무시한
<의금부>가 있었던 곳으로 탐관오리와 국사범들에겐 지옥같았던 곳이죠.
특히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장군>을 어명을 거역했다고
<선조>는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이곳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하지만 <원균>이 폐전하자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을 풀어 주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했죠.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지요.
그후 1년 후에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차라리 감옥에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 할수 있었을텐데...)
자세한 내용은 제가 두발로 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피맛골'의 흔적]
['피맛골' 안내문]
['피마골' 위치]
사라진 "피맛골 避馬골"
<피마골>은 <종로> 양옆에 있었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이 늘어 나며 <종로> 대로변에는
난잡하게 불법 노점상들이 들어 서기 시작해 "가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1부>에서 언급 했드시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개최 하며 대내외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려고 <종로>의 난잡한 "가게"들을 철거하고 길을 넓혔답니다.
이 때 <종로>의 남쪽 <피맛골>까지 철거 했는데, 철거된 상점들을 <남대문> 근처 <선혜청> 부근으로
이전시켜 영업 할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이게 <남대문 시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대문시장>은 철거된 <종로 남측 피맛골의 가게>들이 옮겨가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현 피맛골']
[12년 전 '피맛골']
[12년 전 '청일집']
제가 학창시절 자주 찾았던 <피맛골>의 <참새집><열차집><청일집>은 현대판 빌딩 숲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보신각']
['6.25 때 폭격 맞은 '보신각 종']
"보신각 普信閣"
조선왕조 출범 때부터 <한양도성>과 성밖의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기 위해 4대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루였는데 지금은 년말에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으로 변했죠.
<보신각 普信閣>이라는 명칭은 1895년 <고종 32년>에 처음 <보신각>이라 했다는데
그러니까 <갑신정변> 다음 해에 <종각>에서 <보신각>으로 이름이 변경된 것인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이후 새로 만들면서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편액을 썼답니다.
1979년엔 철근 콩크리트로 <보신각>을 새로 짓고 鐘도 새로 만들어 치고 있답니다.
['영풍빌딩']
건너편엔 <영풍빌딩>이 있는데 저 자리가 <전옥서 典獄署>가 있던 자리인데
<전봉준 장군> 동상이 있는 곳입니다.
['전봉준 像']
[안내문]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고
['전옥서 터'와 '황성신문 터']
<영풍빌딩> 앞 <전봉준 장군 동상> 좌측 <종각역6번출입구> 앞에는
"전옥서 典獄署" 표지석이 있는데 "죄인들을 수감하는 감옥"이 있던 자리이고
우측 <종각역5번출입구> 옆에는 "황성신문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광교']
오전에 출발했던 <광교>로 돌아와서 <옛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 신한은행 광교빌딩>을 조망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화폐개혁>이 있었을 때 아버지와 돈가방을 들고 새 돈으로 바꾸러 왔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도 빠릅니다.
['광통관' 조망]
[뒤돌아 본 '종각']
<청계천 광교>로 나가 출발지였던 <광통관>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1부><2부> 합쳐서 오늘 걸은 거리는 약14km였으며 6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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