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Ⅱ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 취조실 재현>
[다녀온 길]
<1부>에 이어 <Ⅱ부>에는 <조선통감부>가 있었던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주변을 답사합니다.
<숭의여대(경성신사)>-<리라초등학교(노기신사)>-<조선통감부터(ㅏㅠㄴ)>-<예장공원(조선통감부관사)>-
<서울소방재본부(중정 행정동)>-<산림문학관(중정부장 공관)>-<기억의 터(조선통감 관저)>-
<서울유스호스텔(중정 본관)>-<서울시남산청사(중정대공수사국)>-<남산한옥마을(일제헌병사령부)>-
<한국의 집(총독부정무총감 관저)>-<충무로(혼마치)>
['숭의여대' '리라초' 입구] 1:50
<Ⅰ부>의 마지막 답사지였던 <외교구락부>가 있었던 <숭의여대 별관>에서 <숭의여대 본교>로
올라 가면 <리라초등학교 정문>과 <숭의여대 정문>을 만납니다.
정문 입구에 이곳이 예전 "경성신사 京城神社"와 "일제 갑오역기념비"가 있었던 곳이라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숭의여대' 정문]
<숭의여고>는 '영등포구 대방동>으로 이전했고, 여기엔 <숭의여대>와 <숭의초교>가 남아 있습니다.
이 학교는 <경성신사>에 대한 것보다 설립 과정에 우리 현대사가 압축되어 있답니다.
<숭의여학교>는 본래 <평양>에 외국 선교사가 설립해 30여년간 운영 한 여학교였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시절 이 학교는 신사 참배 거부라는 죄명으로 폐교되었답니다.
그 학교에 다녔던 <박현숙>이라는 학생이 졸업 후 <평양 3.1만세운동>등을 주도 했다고,
해방후 <이승만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지금 이 자리 <경성신사>가 있던 자리에 자신이 다니던 <평양>의 <숭의여학교> 이름을 그대로
<숭의여고>를 설립하여 직접 이사장이 되며, 이어서 '무임소장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5.16혁명> 뒤에는 '공화당 국회의원'이 됬답니다.
사실 이곳은 공원 용지라 학교 설립이 불가능했지만 자유당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를 지었다는
일화도 <'서울&'>에 나와 있더군요. 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안중근의사 동상>도 세워져 있다는데
이 동상은 친일파 <김경승>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고...
<경성신사>의 흔적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관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기타 유구들이 학교기념관 앞에 남아 있다는데 코로나사태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들어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경성신사']
['경성신사 배전']
현 <숭의여자대학교>에 있었다는
"경성신사 京城神社"
1898년에 일본거류민단이 <남산대신궁 南山大神宮>을 만들어 참배하기 시작한 최초의 <일본신사>인데
1916년에 이름을 "경성신사 京城神社"로 개칭하여 정식 神社가 되었답니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이라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등 네명의 귀신을 모시고 조선을 영원히 자신의
땅으로 지켜주기를 일본 귀신들에게 빌었답니다.
이것도 모자라 <Ⅰ부>에서 탐사했던 <남산>에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1925년에 지을 때까지 이곳이 쪽바리들의 종교시설이었답니다.
<갑오역>은 <청일전쟁>을 의미 한다고 하며, 그 전쟁 승리 기념비가 <갑오역기념비>라고 한다는데
['리라초등학교']
"리라초등학교"
이곳엔 "노기신사 乃木神社"가 있었던 곳인데, <乃木神社>보다 <리라초등학교>가 더 관심 갑니다.
<리라초교> 설립자인 <권응팔>이 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답니다. 1957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되었답니다.
<리라초등학교>라는 이름도 1965년 <권응팔>의 장녀 <권리라>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아예 딸의 이름을 따서 <리라초등학교>가 되었고, 당시 병아리를 닮은 딸을 위해
병아리 모양의 교모를 만들었고, 교복은 물론 교사의 색깔도 노란색으로 통일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제가 국민학교 시절 <남산의 리라>는 부잣집 자녀들이 다니는 선망의 사립 국민학교였습니다.
아마 최초로 실내외에 대형 수영장이 있고, <스쿨버스>가 운행된 국민학교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권응팔>의 딸 <권리라>가 최근까지 교장을 해 왓다고 하네요.
현재 이 초등학교 다닐려면 분기(3달)에 3,000,000원 정도 내야 한다니 부유층들이 애용하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딸들이 다닌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학교도 완전히 세습학교이죠.
['리라아트고']
<리라 아트 고등학교>는 <권응팔>이 경찰관으로 <6.25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다고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전쟁의 혼란스런 시기에 사비를 털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고아들을 열과 성을 다해 돌보고
공부를 가르친다는 소식은 미국에 까지 알려져 뉴욕 타임즈와 리더스다이제스트가 특별 취재
보도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아사히신문 등 세계 각국 및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답니다.
또한 이 사실은 미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참교육의 본보기가 되었고,
당시 한국의 국민학교 4학년 도덕교과서에도 이 내용이 실렸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직업소년학교를 방문하여 격려를 하고,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된 역사가 있다고...
['노기 신사']
<리라 아트 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노기신사 乃木神社"의 사진입니다.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우리나라 <이순신장군> 추앙과 비스무리한 일본놈이죠.
전쟁범죄자 일본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의 절대 충신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며,
천황의 아들인 <히로히토 황태자>의 가정교사도 했던 인물입니다.
전쟁에선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충성심이 엄청 부각된 日本神으로 추앙 받는데...
결정적인 칭송의 배경은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이 죽자 장례식 때 자신도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해서
그 충성심이 돋보였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의사>가 보았다면 "그런게 애국이나 충성이 아니고 <메이지천황>이 살아 침략전쟁을 할때
니가 <메이지천황>을 죽였어야 애국이고 충신인거야~"라고 했을 것....
이 인간에 대해선 다음을 참고 하세요.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군신(軍神)인가 우장(愚将)인가?"
['조선통감부(총독부) 터' 조망] 1:55
<숭의여대>와 <리라학원> 정문 옆에는 <남산 에니메이션센타>가 있었던 자리가 철거되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전엔 "KBS방송국"이 있었던 이곳이
"조선통감부 (후 총독부)"가 있었던 자리 랍니다.
역사를 좀 정리 해 보면...
(1)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과 함께 침략의 본거지를 지은 곳이
바로 이곳 "조선통감부"입니다. <남산>을 무지 좋아 한 쪽바리들은
비록 <남산의 북사면>이지만 북향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통감부를 지었다죠.
(2) 1910년 <경술년>에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완전 식민지화로 가면서
<조선통감부>의 이름을 "조선통독부"로 변경하여 1926년까지 존속 했었답니다.
그리고 1926년 <경복궁>에 새로 지은 "조선통독부" 건물로 이사했답니다.
<통감부>와 <총독부>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걸 알수 있죠?
['조선통감부(총독부)']
['조선통감부 주변']
당시 <통감부>의 위치와 모양 규모를 알수 있는 사진이라 생각됩니다.
빌딩이 없던 시절의 <예장동> 주변이어서 <명동성당>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게 또 새삼스럽습니다.
<동본원사>의 위치도 기억 해 두세요
['조선통감부(총독부)']
당시 <조선통감부> 사진입니다.
침략의 전초기지라 할수 있겠습니다.
['조선통감부' (옛 '에니메이션센타') 자리]
<조선통감부>가 있던 자리는 후에 <'KBS방송국>이 되었다가 다시 <남산에니메이션센타>가 되었는데
지금은 철거하고 뭘 새로 지을려는지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면....
['한양교회'] 1:57
["동본원사"]
<한양교회>를 만납니다.
일제시대엔 "동본원사 東本願寺 (히가시혼간지)"가 있던 자리랍니다.
그 이후에 이 주변은 "KBS TV 방송국"이 자리 했었고.....
일본 <교오토>에 근거를 둔 일본 불교 <정토종> 절간이 <동본원사 東本願寺>인데
남산 주변에 모여 살던 쪽바리들을 위해 절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답니다.
종교시설 <동본원사 東本願寺>라는 절간은 전국 대도시 몇곳에 있었었답니다.
대표적인게 <부산 동본원사>와 <목포 동본원사>...
당시 <부산>은 관문이니 당연하고, <목포>는 '쌀 수탈'로 엄청 많은 쪽바리들이 몰려 들었다죠.
['드라마센타'] 1:58
일제시대 <통감부> 부속건물이 있던 곳에
<유치진 선생>이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극장이죠.
선생은 우리나라 희곡 작가, 연출가...연극 문화예술의 선구자란 평을 받지만,
일제시대 일본 칭송 연극을 무지 많이 공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여서 좀 그렇지요?
<청록파 시인 유치환>의 형
['적십자사'와 '예장공원' 조망]
<대한적십자사>와 <예장공원>이 조망됩니다.
<적십자사>는 옛날에 <중앙정보부 학원사찰과>가 있었던 곳이라 하고
<예장공원>은 몇달 전인 2021년 6월 9일 새로 만든 공원이랍니다.
['예장공원 안내도']
['예장공원'] 2:00
"예장공원 藝場公園"
<예장동 藝場洞>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武藝를 연마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일제강점기> 시대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암울한 시대를 상징하는 곳이 됬죠.
그래서 <서울시>는 <조선통감부 관사>가 자리 했다가 <중앙정보부6국>..그러다 <교통방송>이
되었던 자리를 헐고 새로이 <예장공원>을 만들었답니다.
['조선통감부(총독부) 관사 유구']
"조선통감부 관사 터"
관사가 있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구를 누구나 볼수 있도록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안내문]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이 있었던 곳으로 얼마 전까진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였는데
모두 철거하고 이렇게 "기억6"이라는 빨간 우체통 모양의 <옛 공포의 취조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내부]
['빨간우체통']
<옛 중정6국 취조실>은 입장료 없이 무료더군요.
들어 가니 음습한 음향과 소름끼치는 중정 요원의 목소리가 취조실 안을 공포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남산 갑시다 ~~" "아아악 숨 막혀~~"
빨간 우체통을 설치해 놨는데, 훗날까지 처참한 인권탄압의 현장을 잊지 말고 전하자고 설치했답니다.
[안내문]
제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안내문에 소상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취조실']
[안내문]
저러한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 2:07
<일본통감부(총독부) 관사>와 <중정(안기부)6국>이 있던 자리를 차용해서
얼마 전까지도 "TBS 교통방송" 이 있었던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가운데 길을 <남산 위의 저 소나무길>이란 이름으로 꾸며 놨습니다.
애국가 2절에 나오는 가사에서 따 왔답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2:08
현재는 "서울소방방재본부"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행정동"이었답니다.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의 관사는 좌측 뒤에 있더군요.
관사로 갑니다.
['문학의 집'] 2:11
현재 <문학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이 "중앙정보부장 관사"였고
뒤에 보이는 건물로 가면....
['산림문학관'] 2:12~2:22 (10분 휴식)
현재 <산림문학관>으로 이용되는 "중정부장 경호원 숙소"였답니다.
['옛 정보부 정문'] 2:24
<중정부장 관사>를 둘러 보고 다시 <서울소방방재본부> 정문으로 나가면
<옛 중앙정보부 정문>의 모습이 여전히 살아 있는듯 보이는데 옛날엔 엄청 큰 철문이 있었지만.....
<옛 중앙정보부 본관>을 가기 위해선 여기서 우측 길로 올라 가야 하더군요.
['중앙정보부 본관' 가는 길] 2:25
우측길로 올라 가면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있더군요.
그 공원 터가 에전 "조선통감" 먹고 자고 하는 관저가 있었다는 것인데
['조선통감 관저' 가는 길]
옛 <조선통감 관저> 사진과 윗 사진을 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들어 가는 길과 나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군요.
['기억의 터' 입구] 2:26
"조선통감 관저"가 있었던 자리엔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19,755명의 기부를 받아
이 공원을 만들었답니다.
['대지의 눈']
"대지의 눈"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라고 외치는 피해 위안부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끝까지 바라 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그래서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대지의 눈"이라 한답니다.
['조선통감 관저 터'']
이어서 "조선통감 관저 터"를 알리는 표지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조선통감 관저'와 '하야시 곤스케' 동상]
[작품 '거꾸로 세운 동상']
[안내문]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초대 조선총감 이토히로부미>를 모시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공사>였으며 그때까지 사진의 관저는 <일본공사관저>였는데
그때 사진 속의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 관저는 <조선통감관저>가 되었다는데...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통감관저로 불러 "일·한 병합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공포한 치욕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면서 <통감>은 <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1938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관저>를 새로 지어 옮겨 갔습니다.
해방 후 그 관저는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다시 <청와대>가 되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경무대> 를 지나 다녔는데 그 때는 담이 요즘 사유지 철조망 같은 울타리여서
<윤보선 대통령>이 산책하는게 훤히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얘깁니다.
[작품 '세상의 배꼽']
계속해서 "세상의 배꼽"이라는 작품이 이어 집니다.
<세상의 배꼽>은 이 세상의 중심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겠는데
<통감관저>가 있던 터에 민족의 치욕을 누르고 이제는 추모의 공간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원반형 반석>을 둘러싼 <81개>의 <자연석>은 전국 각지에서 모은 것으로,
강제로 부모, 조국과 헤어져야 했던 전국의 할머니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 2:33
<기억의 터>라는 공원을 지나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가는 길엔 <세계인권선언문>이 눈길을 끄는데
다시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지 말자는 의미겠죠?
에휴~ 인권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개쌍노무시끼들..그런 놈들은 아직도 연금 받으며 잘 먹고 잘살아요.
['서울유스호스텔' (옛 중정 본관)] 2:34
현재 "서울유스호스텔"인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본관"이었답니다.
<군사정권>의 파수꾼으로 국민을 억압해 정권유지를 한 권위주의의 상징인 건물입니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지면서 <김종필 중령>이 맡아서 3천명의 요원들과 함께 했으나,
3년 후에는 요원의 수가 37만명에 달할 정도로 대공업무, 내란죄, 외란죄, 반란죄 등의 범죄 수사와
정보업무를 광범위하게 담당했답니다.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반정부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와 통제를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서울시 코로나 생활치료센타>로 이용되고 있어 접근금지 였습니다.
['서울종합방재센타']
<본관> 앞엔 <서울종합방센타>가 있는데 예전 본관과 지하로 연결된 <중정의 지하 방카>였답니다.
지하 취조실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 ~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영장 없이 체포되어
강압과 고문으로 빨갱이와 간첩이 되었나
[터널] 2:36
본관을 지나면 짧은 터널이 있는데
어마무시한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남산창작센타' 앞]
터널을 지나면 앗! 좌측에 <남산1호터널>로 들어 가는 도로가 보이고,
그 위에 <한옥마을>과 연결되는 육교가 새로 건설되 있군요.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에는 다시 긴 터널이 나타납니다.
['남산창작센타'] 2:39
우측에는 "남산창작센타"가 있는데 예전엔 "중정요원 체육관"이었답니다.
['소릿길 터널' 앞]
<소릿길>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진 <터널>이 앞에 나타나며,
좌측엔 <한옥마을>로 연결되는 육교가 있습니다.
<대공수사국>을 다녀와 좌측 육교로 넘어 갈 예정입니다.
['소릿길 터널'] 2:40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남산별관>으로 가기 위해선 이 터널을
통과 해야 했는데, 이 앞에는 엄청나게 큰 찌저지는 소리를 내는 철제문이 있었답니다.
눈을 가리고 끌려 가던 공포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 터널에 음향기기를 2015년에 설치하여
이곳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들었을 공포스러운 타자기 소리, 철문소리, 발자국 소리, 물소리,
노랫소리 등 5가지로 짜인 소리들을 터널을 지나는 동안 들을 수 있게 설치했다는데
제가 통과 할땐 아쉽게 그런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청 별관' (옛 중정 대공수사실)] 2:42
"서울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로 사용되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건물이랍니다.
간첩을 잡는 곳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곳이란게
대법원 판결로 확인되었지요. 100% 전부는 아니겠지만....
수 많은 조작 간첩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대 상대 학생>이었던 "천상병 시인"을 잊지 못합니다.
1967년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간첩단사건"을 기억 하시나요.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거나 유학중인 학생들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었죠.
그 중에는 유명한 작곡자 "윤이상씨", 화가 "이응로"씨 등 200여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는데
발표와는 달리 최종 대법원에선 간첩혐의에 대해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었죠.
지금까지도 독재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국면 전환용 조작사건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죠.
당시 우리나라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그 사건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삼선개헌"을 위한 준비를 하려는데
최대 걸림돌이 개헌을 위한 국회의원 2/3 의석수 확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수를 확보합니다.
하지만 부정선거라는 규탄이 전국에서 일어나는데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가하는 '자유당 3.15부정선거' 이후 최대의 데모가 일어났죠.
그때 저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소극적이었지만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정권'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데모를 진압하려했습니다.
당시로는 주요 도시의 모든 고등학교 대학교가 휴업 당한거였지요.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분기점에 놓여 있었는데....
이 때에 등장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메뉴인 간첩단사건"이 발표되어 공안정국이
시작되는데, 그 간첩단사건이 바로 "동백림간첩단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의 지휘자는 '날으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죠.
그런데 외국에 나가 본적도 없는 "천상병 시인"도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됩니다.
모두 의아해 했는데 범죄사유가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가 갖고 온 공작금을 받아썼다는 혐의"였습니다.
서울대 동기동창 '강빈구'는 독일에 유학 갔었을 때 '동 베를린'에 여행 갔다가 왔다는 사실을
'천상병'에게 자랑삼아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간첩행위와 간첩 불고지죄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독일도 '동.서독'으로 분단된 국가였지만 "동베를린"으로
여행을 할수 있던 때여서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은 한국인에겐 자랑거리였답니다.
공작금이라고 하는 것도 그 친구로부터 가끔 막걸리값을 얻어 사 먹었는데 그것이 공작금으로
몰려 당시 '남산 중정 지하실'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반신불수가 되며 6개월이나 감금
당하며 죽다가 풀려 났답니다. 특히 전기 고문을 수차례 당했는데 성기에 전기고문을 해
생식능력을 상실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천인공노 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중앙정보부는 전기고문을 하면서까지 간첩단으로 몰려고 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하고 풀어줬는데
"천상병 시인"은 그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어 고행길로 들어서서 술을 마시며 奇行을 했지요.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런 일들은 아직까지도 정치적 고비마다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는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가 노래한 "이 세상은 아름다운 소풍길"이라는 싯귀가 정말일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생식능력이 없는 '천상병 시인'을 남편으로 맞이한 "목순옥(睦順玉)여사"가 운영하던
'종로구 인사동'의 "귀천 歸天"이라는 전통찻집도 문을 닫았더군요.
"목순옥여사"가 <시인 세계> "2007년 가을호"에 <시인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일부를 소개하며 "천상병 시인"을 회고해 봅니다.
"남편이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간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소풍길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 소풍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할 일이 아직 남았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촬영하고 쓴 다음 사진과 글을 볼까요?
['천상병 시인' 동상] (수락산등산로 입구 근처에서 2014년 5월 19일에 촬영한 사진)
<수락산역>에서 <수락산등산로 입구>로 가는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디자인거리>에 있는
"시인 천상병공원"에 있는 "천상병시인 동상"입니다.
이 동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느껴 집니다.
몰골이 앙상한 행려병자 같은 시인은 이제 하늘나라로 가려고 일어 서는 듯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하늘로 가려는 시인을 붙잡고 못가게 메달리는 듯 하군요.
"아직 갈 때가 아니에요~"라고 어린이들이 생때를 쓰는듯 합니다.
강아지까지 시인의 고무신을 껴 안고 하늘로 가지 말라고 하는 듯하게 보여
저에게는 무척 슬픈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이 사진만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림니다.
그가 쓴 <귀천>이라는 시는 너무 유명하니 <새>라는 시를 소개 합니다.
['한옥마을 육교'] 2:44
<대공수사국>을 둘러 보고 다시 <소릿길터널>을 통과하여 <남산한옥마을 육교>를 건너 갑니다.
['한옥마을 북문'] 2:47
<한옥마을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한옥마을 북문>을 만납니다.
['망북루']
북문 옆에는 <한옥마을>을 두루 조망 할수 있는 "망북루 望北樓}라는 팔각정이 있고
['서울천년타임캡슐']
<망북루>에서 내려 가면 바로 "서울천년타임캡슐"이 있는 곳을 만납니다.
[미로]
<타임캡슐>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는 미로같은 길을 잠시 내려 가면
['서울천년타임캡슐'] 2:50
"서울천년타임캡슐"을 만납니다.
2394년 11월 29일에 개봉 할 예정이라고....
['타임캡슐' 출입구] 2:53
나와서 뒤돌아 본 <타임캡슐 정문>입니다.
['남산골공원']
<타임캡슐>에서 부터 "남산골공원"이 이어지며
신혼부부들이 기념사진을 남기ㅣ기도 하더군요.
['남산한옥마을'] 2:56
이어서 "남산한옥마을"을 만납니다.
['남산한옥마을' 안내도] ★ 사진을 클릭하면 무지무지 확대 됨 ★
<남산한옥마을 안내도>입니다.
제가 편집해서 무지 크게 확대해서 볼수 있도록 했으니 확대해서 보시면 좋겠고
['민영휘 옛집']
[안내문]
['민영휘 옛집']
이 집은 저의 모교 설립자의 집이여서 잘 알지만 다음에 자세히 언급 하기로 하고...
이곳은 전통혼례식이 주말에 주로 열리는 곳입니다.
예전에 이곳 예식에 참석해 슨 참관기가 있으니 참고 하세요
『남산한옥마을』전통혼례식 참관기
['윤덕영 첩 가옥']
[안내문]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이 개쌔끼는 누구인가
"이완용"이와 함께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중에 최고 친일매국노이죠.
이 새끼는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되죠.
그러니까 아래에 언급하는 <윤택영>의 형이 됩니다.
"윤덕영"과 "순정효황후" 사이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죠.
<이완용>이와 나라를 팔아 먹을 때 옥쇄를 찍어야 하는데, 이 때 옥쇄를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주지 않자, 이 새끼는 아무리 조카라 하지만 황후인데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쇄를 빼앗아 [한일합방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천인공노 할 핵심 친일매국노이죠.
그외에도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천황을 알현하게 한다거나 헤아릴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했죠.
친일의 하일라이트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은 유효하답니다
이런 나쁜 놈들이 아니면 무슨 수로 이런 집을 20채씩이나 짓고 살았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한옥은 <첩>의 집을 지어 준 것이니 저기 집은 다음 사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일본놈들이 나라를 판 <윤덕영>에게 하사금으로 준 돈으로 지은 제일 큰 집이
제가 <서울 서촌 역사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다음 사진의 서양식 집이었습니다.
['윤덕영'이 '옥인동'에 지은 '벽수산장']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1부" 여기 클릭
['윤택영 재실']
[안내문]
<윤택영>은 누구인가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고,
그러니까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며, 위의 <윤덕영>의 동생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나라를 팔아 먹는데 큰 일을 한 매국노 입니다.
이런 인간들 아니면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없었죠.
['천우각'] 3:05
<남산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현병대사령부"였습니다.
<중앙정보부 안기부> 보다 더 무시무시한 탄압과 인권 말살을 했던 <일본헌병대>였습니다.
<남산한옥마을>이 우리 평시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려고
<친일매국노들>의 집을 엄청난 돈을 들여 전시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저런 집이 부러운게 아니라 위화감을 조성하는 듯 한데....
"<친일매국노>가 되어야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다~"라고 하는 메시지는 아닌지....
['남산' 조망]
<일본헌병대>가 무력으로 식민지 통치를 하는데 첨병이 되며 주둔했던 <남산한옥마을>에서
<조선통감부>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한옥마을 정문'] 3:08
['옛 일본 헌병대 사령부 정문']
<남산한옥마을> 정문을 나서며, 옛 일본헌병대 정문 사진을 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수도경비사령부>가 대물림을 했던 곳이기도 하죠.
['한국의 집' 입구] 3:11
<한옥마을> 옆에는 "한국의 집"이라는 한식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엔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답니다.
진입 도로가 아직도 유물로 남아 있는데...독특하죠?
['박팽년 집터']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한국의 집>은
"박퍙년 집터"라고 표지석까지 설치 해 놨습니다.
<세종대왕> 시대 한글창제에도 한몫 했다는 <사육신> 중에 한 분이죠.
이 분이 살던 집을 기리 보존하지 못하고 쪽바리들의 관저로 물려 줬다니 슬픈 마음 뿐입니다.
['충무로']
['혼마치 (本町)']
"충무로와 명동" <경성의 혼마치>
일제강점기 시대 총감부 공사관등 대부분의 관청이 이 근처에 있어 가장 많은 쪽바리들이 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여 번 돈으로 흥청망청 소비하던 곳이 <경성의 혼마치>라고 불리워진
<충무로와 명동>이랍니다.
<혼마치 (本町)>는 일본 <오오사카>의 번화가이기도 하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있는 곳
['충무로역4번출입구'] 3:15
암울하고 굴곡진 역사를 뒤돌아 보며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답사를 마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