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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Ⅱ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 취조실 재현>


  [다녀온 길]
          
  <1부>에 이어 <Ⅱ부>에는 <조선통감부>가 있었던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주변을 답사합니다.
  <숭의여대(경성신사)>-<리라초등학교(노기신사)>-<조선통감부터(ㅏㅠㄴ)>-<예장공원(조선통감부관사)>-
  <서울소방재본부(중정 행정동)>-<산림문학관(중정부장 공관)>-<기억의 터(조선통감 관저)>-
  <서울유스호스텔(중정 본관)>-<서울시남산청사(중정대공수사국)>-<남산한옥마을(일제헌병사령부)>-
  <한국의 집(총독부정무총감 관저)>-<충무로(혼마치)>



  ['숭의여대' '리라초' 입구]                   1:50
    
  <Ⅰ부>의 마지막 답사지였던 <외교구락부>가 있었던 <숭의여대 별관>에서 <숭의여대 본교>로
  올라 가면 <리라초등학교 정문>과 <숭의여대 정문>을 만납니다.
  정문 입구에 이곳이 예전 "경성신사 京城神社""일제 갑오역기념비"가 있었던 곳이라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숭의여대' 정문]
  
  <숭의여고>는 '영등포구 대방동>으로 이전했고, 여기엔 <숭의여대>와 <숭의초교>가 남아 있습니다.
  이 학교는 <경성신사>에 대한 것보다 설립 과정에 우리 현대사가 압축되어 있답니다. 
  <숭의여학교>는 본래 <평양>에 외국 선교사가 설립해 30여년간 운영 한 여학교였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시절 이 학교는 신사 참배 거부라는 죄명으로 폐교되었답니다.
  그 학교에 다녔던  <박현숙>이라는 학생이 졸업 후 <평양 3.1만세운동>등을 주도 했다고, 
  해방후 <이승만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지금 이 자리 <경성신사>가 있던 자리에 자신이 다니던 <평양>의 <숭의여학교> 이름을 그대로 
  <숭의여고>를 설립하여 직접 이사장이 되며, 이어서 '무임소장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5.16혁명> 뒤에는 '공화당 국회의원'이 됬답니다. 
  사실 이곳은 공원 용지라 학교 설립이 불가능했지만 자유당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를 지었다는 
  일화도 <'서울&'>에 나와 있더군요. 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안중근의사 동상>도 세워져 있다는데
  이 동상은 친일파 <김경승>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고...
  <경성신사>의 흔적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관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기타 유구들이 학교기념관 앞에 남아 있다는데 코로나사태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들어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경성신사'] ['경성신사 배전']
현 <숭의여자대학교>에 있었다는 "경성신사 京城神社" 1898년에 일본거류민단이 <남산대신궁 南山大神宮>을 만들어 참배하기 시작한 최초의 <일본신사>인데 1916년에 이름을 "경성신사 京城神社"로 개칭하여 정식 神社가 되었답니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이라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등 네명의 귀신을 모시고 조선을 영원히 자신의 땅으로 지켜주기를 일본 귀신들에게 빌었답니다. 이것도 모자라 <Ⅰ부>에서 탐사했던 <남산>에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1925년에 지을 때까지 이곳이 쪽바리들의 종교시설이었답니다. <갑오역>은 <청일전쟁>을 의미 한다고 하며, 그 전쟁 승리 기념비가 <갑오역기념비>라고 한다는데 ['리라초등학교'] "리라초등학교" 이곳엔 "노기신사 乃木神社"가 있었던 곳인데, <乃木神社>보다 <리라초등학교>가 더 관심 갑니다. <리라초교> 설립자인 <권응팔>이 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답니다. 1957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되었답니다. <리라초등학교>라는 이름도 1965년 <권응팔>의 장녀 <권리라>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아예 딸의 이름을 따서 <리라초등학교>가 되었고, 당시 병아리를 닮은 딸을 위해 병아리 모양의 교모를 만들었고, 교복은 물론 교사의 색깔도 노란색으로 통일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제가 국민학교 시절 <남산의 리라>는 부잣집 자녀들이 다니는 선망의 사립 국민학교였습니다. 아마 최초로 실내외에 대형 수영장이 있고, <스쿨버스>가 운행된 국민학교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권응팔>의 딸 <권리라>가 최근까지 교장을 해 왓다고 하네요. 현재 이 초등학교 다닐려면 분기(3달)에 3,000,000원 정도 내야 한다니 부유층들이 애용하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딸들이 다닌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학교도 완전히 세습학교이죠. ['리라아트고'] <리라 아트 고등학교>는 <권응팔>이 경찰관으로 <6.25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다고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전쟁의 혼란스런 시기에 사비를 털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고아들을 열과 성을 다해 돌보고 공부를 가르친다는 소식은 미국에 까지 알려져 뉴욕 타임즈와 리더스다이제스트가 특별 취재 보도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아사히신문 등 세계 각국 및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답니다. 또한 이 사실은 미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참교육의 본보기가 되었고, 당시 한국의 국민학교 4학년 도덕교과서에도 이 내용이 실렸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직업소년학교를 방문하여 격려를 하고,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된 역사가 있다고...
['노기 신사']
<리라 아트 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노기신사 乃木神社"의 사진입니다.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우리나라 <이순신장군> 추앙과 비스무리한 일본놈이죠. 전쟁범죄자 일본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의 절대 충신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며, 천황의 아들인 <히로히토 황태자>의 가정교사도 했던 인물입니다. 전쟁에선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충성심이 엄청 부각된 日本神으로 추앙 받는데... 결정적인 칭송의 배경은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이 죽자 장례식 때 자신도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해서 그 충성심이 돋보였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의사>가 보았다면 "그런게 애국이나 충성이 아니고 <메이지천황>이 살아 침략전쟁을 할때 니가 <메이지천황>을 죽였어야 애국이고 충신인거야~"라고 했을 것.... 이 인간에 대해선 다음을 참고 하세요.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군신(軍神)인가 우장(愚将)인가?" ['조선통감부(총독부) 터' 조망] 1:55 <숭의여대>와 <리라학원> 정문 옆에는 <남산 에니메이션센타>가 있었던 자리가 철거되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전엔 "KBS방송국"이 있었던 이곳이 "조선통감부 (후 총독부)"가 있었던 자리 랍니다. 역사를 좀 정리 해 보면... (1)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과 함께 침략의 본거지를 지은 곳이 바로 이곳 "조선통감부"입니다. <남산>을 무지 좋아 한 쪽바리들은 비록 <남산의 북사면>이지만 북향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통감부를 지었다죠. (2) 1910년 <경술년>에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완전 식민지화로 가면서 <조선통감부>의 이름을 "조선통독부"로 변경하여 1926년까지 존속 했었답니다. 그리고 1926년 <경복궁>에 새로 지은 "조선통독부" 건물로 이사했답니다. <통감부>와 <총독부>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걸 알수 있죠?
['조선통감부(총독부)'] ['조선통감부 주변']
당시 <통감부>의 위치와 모양 규모를 알수 있는 사진이라 생각됩니다. 빌딩이 없던 시절의 <예장동> 주변이어서 <명동성당>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게 또 새삼스럽습니다. <동본원사>의 위치도 기억 해 두세요
['조선통감부(총독부)']
당시 <조선통감부> 사진입니다. 침략의 전초기지라 할수 있겠습니다. ['조선통감부' (옛 '에니메이션센타') 자리] <조선통감부>가 있던 자리는 후에 <'KBS방송국>이 되었다가 다시 <남산에니메이션센타>가 되었는데 지금은 철거하고 뭘 새로 지을려는지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면.... ['한양교회'] 1:57
["동본원사"]
<한양교회>를 만납니다. 일제시대엔 "동본원사 東本願寺 (히가시혼간지)"가 있던 자리랍니다. 그 이후에 이 주변은 "KBS TV 방송국"이 자리 했었고..... 일본 <교오토>에 근거를 둔 일본 불교 <정토종> 절간이 <동본원사 東本願寺>인데 남산 주변에 모여 살던 쪽바리들을 위해 절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답니다. 종교시설 <동본원사 東本願寺>라는 절간은 전국 대도시 몇곳에 있었었답니다. 대표적인게 <부산 동본원사>와 <목포 동본원사>... 당시 <부산>은 관문이니 당연하고, <목포>는 '쌀 수탈'로 엄청 많은 쪽바리들이 몰려 들었다죠. ['드라마센타'] 1:58 일제시대 <통감부> 부속건물이 있던 곳에 <유치진 선생>이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극장이죠. 선생은 우리나라 희곡 작가, 연출가...연극 문화예술의 선구자란 평을 받지만, 일제시대 일본 칭송 연극을 무지 많이 공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여서 좀 그렇지요? <청록파 시인 유치환>의 형 ['적십자사'와 '예장공원' 조망] <대한적십자사>와 <예장공원>이 조망됩니다. <적십자사>는 옛날에 <중앙정보부 학원사찰과>가 있었던 곳이라 하고 <예장공원>은 몇달 전인 2021년 6월 9일 새로 만든 공원이랍니다. ['예장공원 안내도'] ['예장공원'] 2:00 "예장공원 藝場公園" <예장동 藝場洞>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武藝를 연마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일제강점기> 시대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암울한 시대를 상징하는 곳이 됬죠. 그래서 <서울시>는 <조선통감부 관사>가 자리 했다가 <중앙정보부6국>..그러다 <교통방송>이 되었던 자리를 헐고 새로이 <예장공원>을 만들었답니다. ['조선통감부(총독부) 관사 유구'] "조선통감부 관사 터" 관사가 있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구를 누구나 볼수 있도록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안내문]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이 있었던 곳으로 얼마 전까진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였는데 모두 철거하고 이렇게 "기억6"이라는 빨간 우체통 모양의 <옛 공포의 취조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내부] ['빨간우체통'] <옛 중정6국 취조실>은 입장료 없이 무료더군요. 들어 가니 음습한 음향과 소름끼치는 중정 요원의 목소리가 취조실 안을 공포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남산 갑시다 ~~" "아아악 숨 막혀~~" 빨간 우체통을 설치해 놨는데, 훗날까지 처참한 인권탄압의 현장을 잊지 말고 전하자고 설치했답니다. [안내문] 제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안내문에 소상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취조실'] [안내문] 저러한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 2:07 <일본통감부(총독부) 관사>와 <중정(안기부)6국>이 있던 자리를 차용해서 얼마 전까지도 "TBS 교통방송" 이 있었던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가운데 길을 <남산 위의 저 소나무길>이란 이름으로 꾸며 놨습니다. 애국가 2절에 나오는 가사에서 따 왔답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2:08 현재는 "서울소방방재본부"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행정동"이었답니다.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의 관사는 좌측 뒤에 있더군요. 관사로 갑니다. ['문학의 집'] 2:11 현재 <문학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이 "중앙정보부장 관사"였고 뒤에 보이는 건물로 가면.... ['산림문학관'] 2:12~2:22 (10분 휴식) 현재 <산림문학관>으로 이용되는 "중정부장 경호원 숙소"였답니다. ['옛 정보부 정문'] 2:24 <중정부장 관사>를 둘러 보고 다시 <서울소방방재본부> 정문으로 나가면 <옛 중앙정보부 정문>의 모습이 여전히 살아 있는듯 보이는데 옛날엔 엄청 큰 철문이 있었지만..... <옛 중앙정보부 본관>을 가기 위해선 여기서 우측 길로 올라 가야 하더군요. ['중앙정보부 본관' 가는 길] 2:25 우측길로 올라 가면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있더군요. 그 공원 터가 에전 "조선통감" 먹고 자고 하는 관저가 있었다는 것인데 ['조선통감 관저' 가는 길] 옛 <조선통감 관저> 사진과 윗 사진을 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들어 가는 길과 나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군요. ['기억의 터' 입구] 2:26 "조선통감 관저"가 있었던 자리엔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19,755명의 기부를 받아 이 공원을 만들었답니다. ['대지의 눈'] "대지의 눈"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라고 외치는 피해 위안부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끝까지 바라 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그래서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대지의 눈"이라 한답니다. ['조선통감 관저 터''] 이어서 "조선통감 관저 터"를 알리는 표지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조선통감 관저'와 '하야시 곤스케' 동상] [작품 '거꾸로 세운 동상'] [안내문]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초대 조선총감 이토히로부미>를 모시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공사>였으며 그때까지 사진의 관저는 <일본공사관저>였는데 그때 사진 속의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 관저는 <조선통감관저>가 되었다는데...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통감관저로 불러 "일·한 병합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공포한 치욕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면서 <통감>은 <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1938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관저>를 새로 지어 옮겨 갔습니다. 해방 후 그 관저는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다시 <청와대>가 되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경무대> 를 지나 다녔는데 그 때는 담이 요즘 사유지 철조망 같은 울타리여서 <윤보선 대통령>이 산책하는게 훤히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얘깁니다. [작품 '세상의 배꼽'] 계속해서 "세상의 배꼽"이라는 작품이 이어 집니다. <세상의 배꼽>은 이 세상의 중심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겠는데 <통감관저>가 있던 터에 민족의 치욕을 누르고 이제는 추모의 공간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원반형 반석>을 둘러싼 <81개>의 <자연석>은 전국 각지에서 모은 것으로, 강제로 부모, 조국과 헤어져야 했던 전국의 할머니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 2:33 <기억의 터>라는 공원을 지나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가는 길엔 <세계인권선언문>이 눈길을 끄는데 다시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지 말자는 의미겠죠? 에휴~ 인권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개쌍노무시끼들..그런 놈들은 아직도 연금 받으며 잘 먹고 잘살아요. ['서울유스호스텔' (옛 중정 본관)] 2:34 현재 "서울유스호스텔"인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본관"이었답니다. <군사정권>의 파수꾼으로 국민을 억압해 정권유지를 한 권위주의의 상징인 건물입니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지면서 <김종필 중령>이 맡아서 3천명의 요원들과 함께 했으나, 3년 후에는 요원의 수가 37만명에 달할 정도로 대공업무, 내란죄, 외란죄, 반란죄 등의 범죄 수사와 정보업무를 광범위하게 담당했답니다.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반정부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와 통제를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서울시 코로나 생활치료센타>로 이용되고 있어 접근금지 였습니다. ['서울종합방재센타'] <본관> 앞엔 <서울종합방센타>가 있는데 예전 본관과 지하로 연결된 <중정의 지하 방카>였답니다. 지하 취조실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 ~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영장 없이 체포되어 강압과 고문으로 빨갱이와 간첩이 되었나 [터널] 2:36 본관을 지나면 짧은 터널이 있는데 어마무시한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남산창작센타' 앞] 터널을 지나면 앗! 좌측에 <남산1호터널>로 들어 가는 도로가 보이고, 그 위에 <한옥마을>과 연결되는 육교가 새로 건설되 있군요.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에는 다시 긴 터널이 나타납니다. ['남산창작센타'] 2:39 우측에는 "남산창작센타"가 있는데 예전엔 "중정요원 체육관"이었답니다. ['소릿길 터널' 앞] <소릿길>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진 <터널>이 앞에 나타나며, 좌측엔 <한옥마을>로 연결되는 육교가 있습니다. <대공수사국>을 다녀와 좌측 육교로 넘어 갈 예정입니다. ['소릿길 터널'] 2:40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남산별관>으로 가기 위해선 이 터널을 통과 해야 했는데, 이 앞에는 엄청나게 큰 찌저지는 소리를 내는 철제문이 있었답니다. 눈을 가리고 끌려 가던 공포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 터널에 음향기기를 2015년에 설치하여 이곳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들었을 공포스러운 타자기 소리, 철문소리, 발자국 소리, 물소리, 노랫소리 등 5가지로 짜인 소리들을 터널을 지나는 동안 들을 수 있게 설치했다는데 제가 통과 할땐 아쉽게 그런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청 별관' (옛 중정 대공수사실)] 2:42 "서울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로 사용되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건물이랍니다. 간첩을 잡는 곳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곳이란게 대법원 판결로 확인되었지요. 100% 전부는 아니겠지만.... 수 많은 조작 간첩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대 상대 학생>이었던 "천상병 시인"을 잊지 못합니다. 1967년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간첩단사건"을 기억 하시나요.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거나 유학중인 학생들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었죠. 그 중에는 유명한 작곡자 "윤이상씨", 화가 "이응로"씨 등 200여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는데 발표와는 달리 최종 대법원에선 간첩혐의에 대해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었죠. 지금까지도 독재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국면 전환용 조작사건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죠. 당시 우리나라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그 사건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삼선개헌"을 위한 준비를 하려는데 최대 걸림돌이 개헌을 위한 국회의원 2/3 의석수 확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수를 확보합니다. 하지만 부정선거라는 규탄이 전국에서 일어나는데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가하는 '자유당 3.15부정선거' 이후 최대의 데모가 일어났죠. 그때 저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소극적이었지만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정권'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데모를 진압하려했습니다. 당시로는 주요 도시의 모든 고등학교 대학교가 휴업 당한거였지요.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분기점에 놓여 있었는데.... 이 때에 등장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메뉴인 간첩단사건"이 발표되어 공안정국이 시작되는데, 그 간첩단사건이 바로 "동백림간첩단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의 지휘자는 '날으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죠. 그런데 외국에 나가 본적도 없는 "천상병 시인"도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됩니다. 모두 의아해 했는데 범죄사유가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가 갖고 온 공작금을 받아썼다는 혐의"였습니다. 서울대 동기동창 '강빈구'는 독일에 유학 갔었을 때 '동 베를린'에 여행 갔다가 왔다는 사실을 '천상병'에게 자랑삼아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간첩행위와 간첩 불고지죄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독일도 '동.서독'으로 분단된 국가였지만 "동베를린"으로 여행을 할수 있던 때여서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은 한국인에겐 자랑거리였답니다. 공작금이라고 하는 것도 그 친구로부터 가끔 막걸리값을 얻어 사 먹었는데 그것이 공작금으로 몰려 당시 '남산 중정 지하실'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반신불수가 되며 6개월이나 감금 당하며 죽다가 풀려 났답니다. 특히 전기 고문을 수차례 당했는데 성기에 전기고문을 해 생식능력을 상실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천인공노 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중앙정보부는 전기고문을 하면서까지 간첩단으로 몰려고 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하고 풀어줬는데 "천상병 시인"은 그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어 고행길로 들어서서 술을 마시며 奇行을 했지요.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런 일들은 아직까지도 정치적 고비마다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는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가 노래한 "이 세상은 아름다운 소풍길"이라는 싯귀가 정말일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생식능력이 없는 '천상병 시인'을 남편으로 맞이한 "목순옥(睦順玉)여사"가 운영하던 '종로구 인사동'의 "귀천 歸天"이라는 전통찻집도 문을 닫았더군요. "목순옥여사"가 <시인 세계> "2007년 가을호"에 <시인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일부를 소개하며 "천상병 시인"을 회고해 봅니다. "남편이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간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소풍길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 소풍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할 일이 아직 남았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촬영하고 쓴 다음 사진과 글을 볼까요? ['천상병 시인' 동상] (수락산등산로 입구 근처에서 2014년 5월 19일에 촬영한 사진) <수락산역>에서 <수락산등산로 입구>로 가는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디자인거리>에 있는 "시인 천상병공원"에 있는 "천상병시인 동상"입니다. 이 동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느껴 집니다. 몰골이 앙상한 행려병자 같은 시인은 이제 하늘나라로 가려고 일어 서는 듯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하늘로 가려는 시인을 붙잡고 못가게 메달리는 듯 하군요. "아직 갈 때가 아니에요~"라고 어린이들이 생때를 쓰는듯 합니다. 강아지까지 시인의 고무신을 껴 안고 하늘로 가지 말라고 하는 듯하게 보여 저에게는 무척 슬픈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이 사진만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림니다. 그가 쓴 <귀천>이라는 시는 너무 유명하니 <새>라는 시를 소개 합니다.
['한옥마을 육교'] 2:44 <대공수사국>을 둘러 보고 다시 <소릿길터널>을 통과하여 <남산한옥마을 육교>를 건너 갑니다. ['한옥마을 북문'] 2:47 <한옥마을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한옥마을 북문>을 만납니다. ['망북루'] 북문 옆에는 <한옥마을>을 두루 조망 할수 있는 "망북루 望北樓}라는 팔각정이 있고 ['서울천년타임캡슐'] <망북루>에서 내려 가면 바로 "서울천년타임캡슐"이 있는 곳을 만납니다. [미로] <타임캡슐>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는 미로같은 길을 잠시 내려 가면 ['서울천년타임캡슐'] 2:50 "서울천년타임캡슐"을 만납니다. 2394년 11월 29일에 개봉 할 예정이라고.... ['타임캡슐' 출입구] 2:53 나와서 뒤돌아 본 <타임캡슐 정문>입니다. ['남산골공원'] <타임캡슐>에서 부터 "남산골공원"이 이어지며 신혼부부들이 기념사진을 남기ㅣ기도 하더군요. ['남산한옥마을'] 2:56 이어서 "남산한옥마을"을 만납니다. ['남산한옥마을' 안내도] ★ 사진을 클릭하면 무지무지 확대 됨 ★ <남산한옥마을 안내도>입니다. 제가 편집해서 무지 크게 확대해서 볼수 있도록 했으니 확대해서 보시면 좋겠고 ['민영휘 옛집'] [안내문] ['민영휘 옛집'] 이 집은 저의 모교 설립자의 집이여서 잘 알지만 다음에 자세히 언급 하기로 하고... 이곳은 전통혼례식이 주말에 주로 열리는 곳입니다. 예전에 이곳 예식에 참석해 슨 참관기가 있으니 참고 하세요 『남산한옥마을』전통혼례식 참관기 ['윤덕영 첩 가옥'] [안내문]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이 개쌔끼는 누구인가 "이완용"이와 함께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중에 최고 친일매국노이죠. 이 새끼는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되죠. 그러니까 아래에 언급하는 <윤택영>의 형이 됩니다. "윤덕영"과 "순정효황후" 사이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죠. <이완용>이와 나라를 팔아 먹을 때 옥쇄를 찍어야 하는데, 이 때 옥쇄를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주지 않자, 이 새끼는 아무리 조카라 하지만 황후인데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쇄를 빼앗아 [한일합방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천인공노 할 핵심 친일매국노이죠. 그외에도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천황을 알현하게 한다거나 헤아릴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했죠. 친일의 하일라이트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은 유효하답니다 이런 나쁜 놈들이 아니면 무슨 수로 이런 집을 20채씩이나 짓고 살았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한옥은 <첩>의 집을 지어 준 것이니 저기 집은 다음 사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일본놈들이 나라를 판 <윤덕영>에게 하사금으로 준 돈으로 지은 제일 큰 집이 제가 <서울 서촌 역사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다음 사진의 서양식 집이었습니다.
['윤덕영'이 '옥인동'에 지은 '벽수산장']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1부" 여기 클릭 ['윤택영 재실'] [안내문] <윤택영>은 누구인가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고, 그러니까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며, 위의 <윤덕영>의 동생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나라를 팔아 먹는데 큰 일을 한 매국노 입니다. 이런 인간들 아니면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없었죠. ['천우각'] 3:05 <남산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현병대사령부"였습니다. <중앙정보부 안기부> 보다 더 무시무시한 탄압과 인권 말살을 했던 <일본헌병대>였습니다. <남산한옥마을>이 우리 평시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려고 <친일매국노들>의 집을 엄청난 돈을 들여 전시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저런 집이 부러운게 아니라 위화감을 조성하는 듯 한데.... "<친일매국노>가 되어야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다~"라고 하는 메시지는 아닌지.... ['남산' 조망] <일본헌병대>가 무력으로 식민지 통치를 하는데 첨병이 되며 주둔했던 <남산한옥마을>에서 <조선통감부>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한옥마을 정문'] 3:08
['옛 일본 헌병대 사령부 정문']
<남산한옥마을> 정문을 나서며, 옛 일본헌병대 정문 사진을 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수도경비사령부>가 대물림을 했던 곳이기도 하죠. ['한국의 집' 입구] 3:11 <한옥마을> 옆에는 "한국의 집"이라는 한식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엔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답니다. 진입 도로가 아직도 유물로 남아 있는데...독특하죠? ['박팽년 집터']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한국의 집>은 "박퍙년 집터"라고 표지석까지 설치 해 놨습니다. <세종대왕> 시대 한글창제에도 한몫 했다는 <사육신> 중에 한 분이죠. 이 분이 살던 집을 기리 보존하지 못하고 쪽바리들의 관저로 물려 줬다니 슬픈 마음 뿐입니다. ['충무로'] ['혼마치 (本町)'] "충무로와 명동" <경성의 혼마치> 일제강점기 시대 총감부 공사관등 대부분의 관청이 이 근처에 있어 가장 많은 쪽바리들이 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여 번 돈으로 흥청망청 소비하던 곳이 <경성의 혼마치>라고 불리워진 <충무로와 명동>이랍니다. <혼마치 (本町)>는 일본 <오오사카>의 번화가이기도 하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있는 곳 ['충무로역4번출입구'] 3:15 암울하고 굴곡진 역사를 뒤돌아 보며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답사를 마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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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 1부』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朝鮮神宮" 전경]
[다녀온 길] 일제강점기시대 쪽바리들이 무한히 사랑했던 南山............木覓山 <조선통감부>와 <조선신궁>등을 南山에 짓고, 침략의 마수를 내 뻗었던 곳이 南山이었답니다. <서울시>가 그 침략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남산>에 "남산 국치길"을 조성 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많은 예습을 하고 답사에 나섭니다. <서울시 관련 홈페이지>와 <블로그 송풍수월>에 게재된 『남산의 역사와 문화』를 참고 해 답사 했다는 것을 알려 드림니다. ['명동역 5번출입구'] 12:30 2021년 9월 23일 (목) 구름 약간 맑음 <4호선 명동역 5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명동역5번출구' 앞] <명동역 5번출구> 정면으로 <신세계백화점 신관>이 보이는 <회현사거리>로 진행해서 우측 <소공동>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서울중앙우체국'] ['홍영식 동상'] 12:35 "서울중앙우체국"이 <제비 날개 모양>을 하고 우뚝 솟아 있으며 정문 앞에는 <우정총국>의 초대 총판이었던 "홍영식 1855~1884"의 동상이 있더군요. 현재의 이 자리는 일제시대 <경성우편국>이 있던 자리이고, 당시 <우정총국>은 현재의 <조계사> 옆에 있었으며, 지금은 <체신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홍영식>은 <우정총국>을 세우고 개국 축하 파티를 여는 틈을 이용해 <갑신정변>이라는 쿠데타를 <박영효><김옥균>등과 함께 일으킨 인물이죠. 하지만 3일만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청나라 군>에 의해 스무아홉살에 살해 당한 인물인데, 이곳에 동상까지 세울만한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신정변>이란게 일본놈들의 후원을 받고 한 쿠데타이니....
[현재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경성우편국']
['한국은행'] <서울중앙우체국> 건너편에는 "한국은행"이 있습니다. 일제침략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조선은행>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건물을 짓고 친필 휘호를 남긴 <조선은행 머릿돌>을 없애지 않고 남겨 두기로 했다는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뒤에 신축건물을 새로 지어 <한국은행 본점>이 우리나라 금융을 총괄 관리하고 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신관과 구관] <한국은행> 건너편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습니다. 이 백화점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소비문화를 바꿔 놓았다는 "미스꼬시 백화점" 이었답니다. 현재의 <롯데백화점>은 <조지아백화점>이 있었던 자리고, 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악명 높았던 <동양척식회사>가 있었답니다. <미스꼬시백화점>을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 本町>는 당시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한 욕망의 해방구 였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쪽바리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답니다. <이상의 날개> 읽어 보셨나요? 아내가 몸을 팔고 가져다 주는 돈..그 돈을 변소에 버리고 그 단절된 관계를 벗어나 "날개"를 꿈구며 올라간 건물의 옥상이 저 <미쓰꼬시백화점> 옥상이었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솟아 나길 바라는 그는 추락을 위해서인가 ...자유룰 위해선가... 환락의 상징 <미스꼬시백화점>에서 몸도 마음도 사고 파는 자본주의를 경멸하는 것인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암울함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밀어 닥치는 자본주의 환락 환상이 어른거리는 <이상의 날개>에도 등장하는 <미스꼬시 백화점>이란걸 생각하며 바라보면 감회가 남다를 겁니다. ['회현사거리'] 12:40 <경성우편국><조선은행><미스꼬시백화점>을 둘러 보고 다시 <회현사거리>로 돌아 와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직진해서 <남산3호터널> 방향으로 잠시 올라 가면.... ['남산3호터널' 앞] 12:45 <남산3호터널> 조금 못미쳐 갈림길을 만나는데 <남산오르미 승강장> 방향을 안내합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 가면... ['남산오르미 승강장'] 12:47 "남산오르미 승강장"을 만나며, 좌측엔 "남산3호터널준공기념탑"이 있습니다. 탑승은 무료이고 누구나 탈수 있는데, 운행시간 중에 일요일 운행시간을 유의하면 되겠습니다. [경사형 엘리베이트] <남산오르미>는 경사형 엘리베이트였습니다. 무료여서 더 즐겁고...ㅎㅎ 또한 <남산>으로 오르는 가장 편리하고 쉬운 시설이었습니다. ['남산3호터널 요금소'] <남산오르미>를 타고 올라 가는데 지난주에 답사 했던 <남산옛길>의 <삼풍아파트>가 보입니다. 제가 이 <남산오르미>를 이용하게 된 것은 지난번 <남산옛길>을 걸을 때 보여서 뭔가 해서 검색해 봤더니 바로 이 <남산오르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코스를 택했구요. ㅎ [뒤돌아 본 '회현사거리'] 1층과 2층 두개층만 있는 <남산오르미>지만 운행 거리가 제법 되지요? 잠깐이지만 뷰도 좋아서 대 만족이었습니다. ㅎ ['남산오르미 승강장'과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12:50 <남산오르미>의 2층은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옆이었습니다. <남산 정상>으로 가실 분들은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가면 간단한데 왕복 13,000원 여기서부터 <서울시>가 조성한 "남산 국치길"을 시작합니다. 우측으로 조금 올라 가면... ['국치길'] <국치길>에 있는 첫번째 '국치의 상징'인 <한양공원비> 이정표를 만납니다. ['한양공원비 쉼터'] 12:53 ['한양공원비'] ['한양공원비' 뒷면] [안내문] "한양공원비"를 만나는데.... 일제강점기시대 쪽바리들의 <남산사랑>이 시작되는 징표라 할수 있는 <한양공원비>가 길섶에 서 있는데, 뒷면의 글자들은 모두 홰손되어 알아 볼수 없습니다만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남산> 일대 약 30만평을 무상 임대해 쪽바리들을 위한 어마어마한 <남산공원>을 만들었는데, <고종>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비석에 새겨진 "漢陽公園"이라는 글자는 <고종>의 진필이라니....갸우뚱 ~~ ['남산3호터널기계실' 입구] 12:58 이어서 <남산3호터널기계실> 출입문을 만나는데, 지난주 <남산옛길>을 걸을 때 통과했던 곳입니다. ['삼순이계단' 앞] 12:59 이어서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바로 올라 갈수 있는 <삼순이계단>을 지나 <백범광장>으로 먼저 갑니다. <조선신궁터>를 답사 한 후 <삼순이계단>으로 내려 올 예정입니다. ['호현당' 앞 삼거리] 1:00 <호현당> 앞 삼거리를 건너 <호현당>으로 가면... ['호현당'] 1:03 "호현당 好賢堂"은 "어진 사람들(賢人)이 좋아 하는 집"이라는 의미라는데... 코로나 시대에 인기 있는 무료 야외 예식장이라고 하네요. ['백범광장'] 1:03 <호현당> 바로 옆에 <백범광장>이 있으며 "백범 김구 선생 동상"도 보입니다. 이곳에 <백범광장>을 만든 사연에 대해선 앞으로 답사하게 될 <조선신궁>에서 느낄수 있겠고 ['남산' 오름길] <남산>으로 오르는 오름길이 시작됩니다. 현재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얫길의 여운이 남아 있는듯 한데.... 다음 옛 사진을 보자구요.
['조선신궁' 전경 사진] '서울역'을 찾아 보세요 ㅎ 바로 앞 큰집 ['조선신궁 384계단' 오름길] ['조선신궁' 정문]
일제는 1925년에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짓고 조선인의 영혼까지 점령하려고 했답니다. 학생, 징병된 병사, 징용 가는 사람들...모두 이곳에서 강제 '신사참배'를 해야 했답니다.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384개 계단>이었다는데, 현재와는 지형과 경사도가 다르군요.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 광장] 1:06 <옛 384계단>으로 추정되는 오름길을 오르면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앞 광장을 만나는데 아곳이 옛날 <조선신궁> 앞 광장이었답니다. <조선신궁> 건물은 앞에 표시한 곳에 있었다는데, 후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되고 이어서 <육영수여사>가 심혈을 기우린 <남산식물원>이 있던 자리인데, 현재는 <한양도성 유적지>로 탈바꿈 했습니다.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의사' 휘호] <조선신궁>이 있던 앞 광장에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멈추게 한 "안중근의사"와 기념관이 대한 건아의 건재함을 알리며 쪽바리들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해 지면 목숨을 주라" 1910년 2월에 <여순감옥>에서 쓴 글로서 <보물 제569-6호>로 지정된 유명한 글이죠.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는 <남산식물원>이 차지하다가 지난해 그러니까 2020년 11월에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으로 변모 했답니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안내도'] ['한양도성 유적'] 이 <한양도성>을 밑에 깔고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해방 후엔 다시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의거>로 철거되고 <남산식물원>이 <어린이회관>과 함께 들어 섯지요. 슬픈 역사를 걷어내고 이제 <한양도성> 유적으로 복원되었답니다. ['방공호'] <한양도성 유적지>를 지나면 <神殿>이 있었던 자리 뒤에 <방공호>가 눈길을 끕니다. [방공호 입구] [안내문] 쪽바리들도 공습은 무서워 해서 곳곳에 방공호를 만들었다지요. 특히 이곳 <조선신궁>의 방공호는 더 큰 의미를 주는듯 하군요. 경비병들도 숨어 있었으리라 제가 다녀 온 다른 방공호는 <김포공항> 근처의 <강서구 궁산땅굴>이 인상 깊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바라보는 '조선신궁터'] <방공호>에서 바라보는 <조선신궁 터> 입니다. 다음 옛 사진들을 감상 해 볼까요? 이 자리가 일제강점기 시절엔 어떠 했는지 실감 할수 있습니다. ['조선신궁 전경도'] ['조선신궁'] 이 사진은 현재의 <잠두봉>에서 촬영 한듯한데 규모가 상당합니다. 당시의 <경성역>이 지척에 보이는게 더욱 새삼스럽군요.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 <대우빌딩>등 대형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보이지 않아 거리가 엄청 멀게 느껴졌는데, 아무 건물도 없이 보니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군요. <만리동 고개>도 보이고...^*^ ['조선신궁 배전 터'] [안내문] <神殿>이 있었던 자리에서 조금 내려 가면 "배전 拜殿 터"가 있는데 <배전 拜殿>의 기초 구조물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배전 터 위치'] ['배전'] <배전 拜殿>은 <신궁 神宮> 앞에 있는 건물로 글자 그대로 "절하는 곳"을 의미하겠죠 ['조선신궁' 배치도] <배전 拜殿> 뒷 사무소 등 집들이 있는 곳에 현재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 동상']
해방이 되면서 <남산 조선신궁>은 완전 폭파되었답니다. 그 자리엔 80세의 절대권력자인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을 세워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답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인용 합니다. "이 동상은 몸통 길이가 23.5척(7m), 축대 높이를 합하면 81척(25m)로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었다. (중략) 동상 건립에 필요했던 3억환가량의 자금은 전국 극장 입장권에 10~20환씩의 경축금을 부과해 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동상은 1960년 <4.19의거> 뒤 해체 철거됐답니다.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따 지었던 <남산> 정상의 <우남정> 또한 <4.19의거> 때 파괴됐다가, 1968년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부산의 <용두산공원>도 <우남공원>으로 변경되었다가 <4.19의거>후 제 이름을 찾았지요.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남산>과 우리 산하는 심하게 굴곡되 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 개인 보관중인 동상 일부]
해방 후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지낸 절대 권력자였던 <이승만박사>는 <4.19의거> 후 <미국 하와이>로 도망가 살다 그곳에서 5년 정도 더 살다가 요양원에서 죽었지요. 이곳에 있었던 동상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해체 철거 후 <이승만박사> 동상의 행방에 대한 신문기사를 인용합니다. "윗 사진은 <코리아 라이프> 1970년 3월호에 보도된 <서울 명륜동 1가>에 남겨진 이승만 동상의 잔영들이다. 머리부분만 남아 있는 왼쪽의 동상은 남산에 세워졌던 것이고, 상반신만 남은 오른쪽의 동상은 파고다공원에 세워졌던 것이다" 30년이 흐른 현재도 <명륜동 1가> 주택에 남아 있다고 하네요. ['남산 분수대'] [안내문] <일제강점기시대>와 <이승만독재시대>가 지나니 <5.16군사쿠데타>세력이 <남산>을 점령했습니다. <배전 拜殿> 아랫쪽엔 <5.16군사쿠데타> 후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심혈을 기우려 설립한 <어린이회관 (현 교육정보연구원)>과 <남산식물원>, 그리고 <분수>가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여러번 아범님 따라 올랐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민주화가 된 현재에는 있을수 없는 권위주의 시대의 잔존물인거죠. 이 사진을 보면 <조선신궁>과 <이승만박사 동상>,<남산식물원>의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1:20 <분수대>에서 내려 가면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옆 <삼순이계단>으로 내려 가는 곳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있습니다. ['위안부 기림비'] <아시아 태평양 13개국>의 수십만명의 여성과 소녀들의 고통을 증명하기 위해 세웠답니다. <한국><중국><필리핀>의 세 소녀를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랍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실을 실명으로 처음 증언한 분이 <김학순 할머니>라고 하죠? 25년여 전에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삼순이 계단']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를 지나면 "삼순이계단"을 만납니다. ['남산둘레길 북측순환로 입구'] 1:26 <삼순이계단>을 내려가 다시 <남산순환로>로 내려가 진행하면, <남산둘레길>과 연결되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국치길>은 좌측 <남산순환로>로 이어 집니다. ['한양공원비' 조망] 조금전 오르면서 들렸던 <한양공원비>가 건너편에 보이고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1:29 이어서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을 지나면 ['남산 돈까스 거리'] 1:30 좀 유명한 <남산돈까스거리>가 시작됩니다. 대여섯집의 돈까스집이 있는데, 저는 이 남산돈까스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가격은 13,000원씩이나 하는데 맛은 7~8,000원짜리 다른 집과 별 차이 없는듯 해서 입니다.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입구] 1:31 <남산돈까스거리> 건너편에 이런 계단 하나를 만나는데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입구라고 해서 또 언제 오겠나 싶어 올라가 봅니다. ['반공청녀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1:33~1:35 [안내문]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우리나라 남산에 이런게 있었나? 의아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좀 애매모호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내림길] "애국 愛國"....간단히 말해 나라를 사랑하는 것. 과거에도 수많은 애국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처럼 애국은 아주 숭고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애국청년단체>라는게 있었는지...있었다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보기 위해 검색을 했더니 <박사모 홈페이지>가 나오며 실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청년단체>라는 단어만 검색 되더군요.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기념비 안내문의 <애국청년단체>라는 단체는 검색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념비를 만드는데 성금을 내고 기여한 분들의 명단이 별도 비석으로 세워져 있어 자세히 봤더니 <정일권><김종필><이후락>...등등이고, 건립위원회 회장이 <이은상>...ㅎㅎ 대략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육국제1보병사단 창설지>라고 하는 표지석도 있더군요. 이 표지석을 세운 당시 보병1사단장이던 <신현돈>씨는 무지 유명하죠? ㅎ 대통령 해외 순방 중이라 엄중 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별 넷의 군단장이 만취 상태로 추태를 부리며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민간인들과 싸우지를 않나 개지랄 떨다가 수사가 진행되자 전역했죠. 2014년도 일이니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니 기억납니다. 잠시후 탐방하게 되는 <중앙정보부>가 눈 앞에 서성거립니다. ['원조 남산 왕 돈까스' 앞] ['재미로' 입구] 1:40 <기념비>를 내려가 건너편으로 건너 가면 <원조 남산 왕 돈까스> 음식점 옆에 <숭의여대 별관 입구>가 있고, <재미로>라는 길안내 이정표가 보입니다. 여기서 군사정권시대에 유명했던 <남산외교구락부>를 답사하고 <리라초등학교>로 가겠습니다. 트럭이 공사를 위해 주차되 있어 사진으로 길 확인이 좀 그렇지만 트럭 뒤에 너른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 가면... ['숭의여대 별관'] 1:42 그러면 "숭의여대 별관 정문"을 만나며 <외교구락부>는 사진 속의 주차장 옆에 있습니다. ['외교구락부'] "남산 외교구락부 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이곳이 7~80년대 그 유명했던 <남산외교구락부>라는 걸 증명합니다. <구락부>는 "club"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거죠. <외교클럽>이 맞지만 당시의 표기가 더 친근감이 드는건 너무 많은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리라 ['외교구락부 이야기'] 국내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인데 유명한 정치인들인 <신익희.조병옥.장택상.윤치영>씨가 이 레스토랑을 설립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수 있는데..... 군부독재시대에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인물들...40대 기수론의 <김영삼><김대중>선생들이 회동과 회견등 굵지굵직한 행사를 거행 한곳으로 유명하지요. 특히 <나훈아> <김지미>씨가 약혼 발표를 한곳으로도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던 곳이죠. <김지미씨> 1940년생이고 <나훈아씨> 1947년생이니 연상의 여인에서부터 최고 인기를 누리던 가수였으니 세간의 화제는 보통이 아니었죠? ㅎㅎ <김지미씨>는 미국에서 산답니다. [옛 '외교구락부'] 사연 많았던 <남산외교구락부>의 실제 옛 모습입니다. 민주화와 함께 <외교구락부>는 역활을 잃어 숯불갈비집으로, 예식장으로, 다시 레스토랑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결국 문을 닫고 <숭의여대>에 팔려 <숭의여대 별관>이 되었답니다. ['조병옥선생''신익희선생'] ['이민우' 'YS' 'DJ'] <외교구락부>를 만들고 이용했던 분들의 사진이 안내판에 있어 촬영했습니다. 벌써 추억이 되버린 인물들입니다. ['숭의여대' 조망] 1:46 <외교구락부>에서 <숭의여대>와 <리라초등학교>를 바라보며 올라 갑니다.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Ⅱ 2부로 이어 집니다.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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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산 옛길』 
['남산옛길']
['남산옛길 안내도'] ['남산옛길 코스'] [탐방코스 실트랙] "남산옛길"은 약2.5k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이지만 <남산> 기슭에 숨어 있는 역사의 향기를 느꺄 볼수 있는 코스로 <열두명의 정승>을 배출한 <정광필선생>의 생가 앞 <은행나무>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선생>과 <이항복선생>의 집터가 근처에 있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탄생된 지역이어서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회현역(남대문시장) 1번 출입구'] 오후 2시 40분 2021년 9월 18일 (일) 구름 약간 맑음 조금 늦은 시간에 <4호선 회현역 (남대문시장역)> 1번 출구를 나서며 답사를 시작합니다. ['퇴계로'] <회현역 1번출구> 정면으로 두번째 빌딩인 <우리은행 본점>으로 진행하면.... ['우리은행 본점 앞'] <우리은행 본점> 옆에 안내석이 하나 보이는데... ['은행나무'] ['은행나무 설화'] "회현동 은행나무"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나와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남산옛길>에서 볼거리 중에 최고 볼거리라고 하는군요. ['정광필 집터'] <은행나무> 쉼터 좌측에는 "정광필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되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은행 본점 터>가 <정광필선생 집터>가 되는 것이니 그의 위상을 느낄수 있습니다. "정광필 鄭光弼 <1462년(세조8)~1538년(중종33)>" <성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군> 시절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된 할말은 하는 강직한 사람이었답니다.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답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오른 <중종>대의 핵심 정치인이었답니다. <문익공 文翼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2명의 과거 급제자 후손을 두었고 장수 하신걸로도 유명하답니다. 한편 이 집터에서 <병자호란>에서 주전파로 유명한 <김상용><김상헌>선생도 이곳에서 태어 났다고.. <정광필선생>의 외손이랍니다. <김상헌 선생>이 <병자호란> 당시에 살던 집은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대통령>을 권총으로 시해한 유명한 <궁정동 안가> 자리가 그의 집이었다죠. <김영삼대통령>이 <궁정동 안가> 자리를 현재 <무궁화동산>으로 만들어 <김상헌선생 집터>라는 표지석과 詩碑 <가노라 삼각산아 잘 있거라 한강수야~~>만 세워져 있더군요. ]'호텔 렉스' 앞] <정광필선생 집터> 은행나무를 지나면 우측에 <호텔 렉스>가 있고 좌측에 <롯데캐슬아이리스아파트>가 있는 사잇길로 진행하는데 <남산>의 <서울타워>와 <교육정보교육원>이 아주 가까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사진의 한계 때문에 사진 속에는 조그마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남산옛길>의 정취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NEW SUN GUESTHOUSE'] 이어서 "NEW SUN GUESTHOUSE" 건물 벽면에 <남산옛길> 표시가 있으며 안내도 등 관광 안내를 하고 있더군요. 여기서 50m쯤 조금더 올라 가면.... ['삼거리] ★ 중요한 갈림길 ★ <수도종합공사>라는 가게 앞에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 삼거리는 <남산옛길>에서 매우 중요한 삼거리 였는데, <청운의 길>은 우측으로 가는데, 한편 <소나무 숲길>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삼거리 였습니다. 저는 집에서 미리 조사를 하여 종합적으로 탐방 할수 있는 길을 미리 나름대로 계획하고 와서 먼저 직진길인 <소나무 숲길>을 오르고 내려 올때 우측길로 내려 왔다가 다시 올라 가 <저잣거리길>로 진행 할 예정입니다. 먼저 앞에 보이는 <회현체육센타> 방향으로 올라 가면.... ['중구회현 체육센타' 앞] <중구회현체육센타>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소나무숲길>은 좌측으로 갑니다만 <체육센타> 뒤에 쬐끔 보이는 빨간색 아파트인 <별장아파트> 앞에 있는 <회현동 경로당>을 다녀와서 좌측으로 갈 예정입니다. <중구회현체육센타>가 옛 <회현 제1 시범아파트> 자리였답니다. 잠시후 <회현 제2 시범아파트>로 올라가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별장아파트>로 올라 가면.... ['회현경로당'] <별장아파트> 앞에 <회현경로당>이 있는데, 저곳이 "표암 강세황 姜世晃선생 (1713~1791)"의 집터 였다고 하는군요. <강세황 선생>은 누구인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니 화가로만 알고 있지는 않나요? <영조><정조>시대의 인물로 <한성판윤(서울시장)> <예조판서> 까지 지낸 고위급 관료였죠. 詩 書 畵를 섭렵하는 三絶로 불리웠으며 <예원의 총수>로 군림했답니다. <영조>는 그가 書畵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유명하죠. 76세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행문과 그림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분이 살았던 곳이 여기라니...시멘트 콩크리트 건축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폐쇠 공간 속에서 그가 살던 그 시절의 산수화를 생각해 보기만 합니다. ['남산 힐 호텔' 조망] <강세황 집터>를 나와 다시 <체육센타> 앞 삼거리에서 좌측 골목으로 잠깐 올라 가면 적산가옥 인듯한 일본식 2층집이 아직도 그 모양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골목인데 <남산 힐 호텔>이 보이고 ['작품 임금의 자리'] <남산 힐 호텔> 옆 계단에 "임금의 자리"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계단은 <삼풍아파트>로 올라 가는 계단이더군요. 일반적으로 御座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여기선 왠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남? [삼거리] <임금의 자리>라는 그림이 있는 <삼풍아파트 계단>을 지나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윤주한의원'] <윤주한의원>이 있으며, 이 한의원 정문 담벼락에는... ['작품 선비의 길'] "선비의 길"이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삼풍아파트' 입구] 이어서 <삼풍아파트> 차량 진출입구를 만나는데 <남산옛길>은 좌측 방음벽 옆 계단으로 안내되고 있었습니다. [계단] ['남산3호터널 톨게이트'] 계단 입구에는 <남산3호터널 요금소>가 보이는데 <요금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출입구가 있더군요. 그러니까 이 계단 좌측 방음막은 <요란스런 <남산3호터널> 차량 소음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촌어린이놀이터'] 제법 긴 데크 계단을 올라 가면 "남촌어린이놀이터"를 만나는데.... 여기서 <소나무숲길>이라는 <남산옛길>의 소나무를 좀 볼수 있었고, 다른 곳에선 소나무를 못봤습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 소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현재 <남산>에는 소나무 보단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 점령했다고 합니다. ['남촌어린이놀이터'] [도로] <남촌어린이놀이터> 앞에는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는 <남산3호터널 환기 기계실> 진출입로더군요. 이 길 따라 조금 올라 가면.... ['남산3호터널 기계실' 출입문] <남산3호터널기계실> 정문을 만나 우회전하고 ['남산순환로'] ['삼순이 계단' 조망] <남산순환로>인 <소파로>를 올라 가면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건물 옆에 있는 "삼순이 계단"을 보고.. ['백범광장' 앞 삼거리] <백범광장>과 <남산>을 연결하는 생태터널 앞 삼거리를 지나면... ['마뫼'] <마뫼>라는 전망 좋은 조그마한 카페를 만납니다. <회현동> 조망에는 최고라고... "회현동 會賢洞"이라는 남산골 동네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하여 현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랍니다. "마뫼"는 <南山> 즉, 오리지날 이름 <목멱산 木覓山>의 순 우리말이라는데 일반명사인 <남산>은 알아도 고유명사인 <목멱산>은 잘 모르죠? 특히 순 우리 말이라는 <마뫼>는? ㅎ [엘리베이트] <마뫼>에서 <남산옛길>의 정점인 엘리베이트를 조망하며 옆에 있는 "제2시범아파트"를 조망합니다. <남산옛길>의 <청운의 길>과 <소나무숲길>이 만나는 정점이더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시민아파트>를 아십니까? 그리고 당시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6.25전쟁> 이후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집중으로 서울 전역이 판잣집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죠. <박통>은 그들의 주택난도 해결하고 도시개발도 하기 위해 <부산시장>을 하던 군대 후배 <김현옥>을 <서울시장>으로 앉히며, <불도져>라는 별명 다웁게 2,000가구도 아닌 아파트 2,000동을 2년 안에 짓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의 밀어 부치기 공사를 했답니다 판잣집 철거민들을 위한 아파트 건설공사. 1호는 <서대문구 천연동> <안산> 근처에 지어지고, 이어서 바로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산>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들이 들어 서기 시작했다지요. 이때의 아파트 이름이 <시민아파트> 였답니다. <와우산>에 있다고 <와우아파트>로 불리워 졌고... 하지만 부실공사로 지은 이 아파트들은 속절없이 허물어 지며 <김현옥시장>과 함께 사라졌죠. <가수 조영남>이 <신고산타령>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 ♬ 우르르르 ♪"로 불러 군사정권들은 그를 출연정지를 시키기도 했지요. 제가 대학시절이었습니다. <와우시민아파트>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고 튼튼한 아파트의 시범을 보이겠다고 지은 시민아파트가 <회현 시범아파트>였답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 업그레이드 된 아파트였던 것이죠. 중앙난방으로 온수도 나오는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살기 좋은 아파트로 알려지며 인기가 짱이었답니다. 판잣집 철거민들을 위해 지은 <회현 시범아파트>는 공기, 경치 좋은 남산 자락에 있어 인기 연애인들이 더 많은 돈을 주고 입주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앙정보부>가 가까이 있어 끗빨있던 중정요원들이 앞다퉈 입주 한 곳이 바로 이 <회현 시범아파트>였답니다.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수 있죠? <회현 제1 시범아파트>는 헐리고 없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회현체육센타> 자리였다고 하고, 보이는 이 아파트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회현 제2 시범아파트>랍니다. <회현 제2 시범아파트>는 올해로 준공 51년을 넘었답니다. 세월 만큼 세월이 더덕더덕 붙어 있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단 말이 실감납니다. 15평 정도 크기에 방2개 화장실 하나로 구성된 이 아파트가 70년대엔 인기 연예인들에게 까지 엄청 인기있는 아파트였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군요. 철거민을 품기 위한 아파트는 이제 다시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철거 대신 리모델링을 택했다고 하네요. 리모델링해서 청년예술가를 위한 공방과 작업실 등이 들어설 계획이라니 잘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개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따듯한 보존도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되고.... [엘리베이트에서 '남산' 조망] 엘리베이트를 타기 전에 <남산>을 조망합니다. "누에 머리를 닮았다"고 <잠두봉 蠶頭峰>이라고 하는 봉우리가 가까이 보입니다. 서울 시내 조망으로는 최고로 포토죤이 있죠. <백범광장>에서 바라보면 진짜 "누에 머리"처럼 보입니다. ['남산옛길-저잣거리길' 조망] 엘리베이트에서 <남산옛길>의 정점을 조망하고 내려 가서... [뒤돌아 본 엘리베이트]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르내리며 공부하던 선비들이 거닐었을 <남산옛길> <회현 제2시범아파트>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찾아 올지 궁금합니다. 리모델링 해서 젊은 예술가들이 활보하면 다시 찾아 보겠습니다. 이곳이 <남산옛길>의 <청운의 길>과 <소나무숲길>이 만나는 꼭지점이더군요. [안내도] 이곳에 <현위치>를 알리는 안내도가 설치되 있었습니다. 저는 빨간색으로 그은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올랐고, 파란색선으로 그은 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하산 할때엔 골목 좌우를 몇번 왔다리 갔다리 하니 유의 해야 합니다. [벽화거리] 엘리베이트가 있는 <회현 제2시범아파트>에서 <청운의 길>을 따라 내려 가면 먼저 좌측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골목으로 잠시 지나고... [삼거리] ★ 중요한 삼거리 ★ 이어서 <제일유리상사>라는 영업을 하는지 문 닫았는지 모를 가게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청운의 길>은 우측 골목으로 연결되 있어 <소나무숲길>의 출발지였던 <수도종합공사> 앞 삼거리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돌아 와야 <청운의 길>을 완주 할수 있으니 유의 해야겠습니다. 우측 골목으로 내려 가면... ['청운의 길'] <청운의 길>에선 가장 가파른 골목이 150m 정도 이어지더군요. 내려 가면... ['소나무숲길' 출발지] ★ 중요한 삼거리 ★ <소나무숲길>의 출발지였던 <수도종합공사> 앞에 도착하는데 <제일유리상사>에서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정도였으니 비교적 짧은 골목이었습니다. ['청운의 길' 오름길] 다시 왔던 길로 올라 갑니다. 올라 갈때는 사진 촬영 없이 올라 갔더니 2분 걸리더군요. ['제일유리상사' 앞 삼거리] 다시 <제일유리상사> 앞 삼거리에 돌아와 우측으로 30m쯤 내려 갑니다. 여기서부턴 "저잣거리길"이 이어 집니다. ['정화예술대학'] <정화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가 있고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 ★ 중요한 삼거리 ★ 이어서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에 있는 <회현사랑채>를 다녀 옵니다. ['회현사랑채' 앞 골목] <회현사랑채>로 통하는 골목은 사람만 왕래 할수 있는 좁은 계단 골목이었습니다. ['회현사랑채'] "회현사랑채"는 오래된 근대 가옥을 리모델링하여 주민들을 위한 공공 공유 공간이랍니다. ['작품 골목길']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선생>의 호가 <백사>인데 이 마을을 <백사마을>이라고도 하는군요. 잠시후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를 방문합니다.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앞 사거리] ★ 중요한 사거리 ★ 다시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로 돌아와 조금 내려 가면 <남산의 사계절>이라는 음식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좌측에 있는 <쌍회정터>와 <계단집>을 다녀 옵니다. ['계단집' 가는 길]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앞 사거리에서 <계단집> 가는 길 입니다. 50m쯤 고개를 넘어 가면.... ['일신교회' 앞] <일신교회>를 만나며 <쌍회정터 표지판>이 보이는데 맞은편에 <계단집>이 있습니다. ['계단집'] "계단집" 도시재생사업으로 리모델링 한 <적산가옥>이랍니다. 붉은 지붕을 얹은 일본식 2층집... 근대 일본가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적산가옥이랍니다. 원형 탁상에 둘러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다미방>은 다른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계단집> 만의 특별한 공간이라고 자랑합니다. 현재 <계단집>은 주민 바리스타 4명과 대형 프랜차이즈 점장, 개인카페 운영 경험이 있는 주민 매니저가 협업해 마을카페로 활용하고 있다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많이 찾아와 인기있는 명소가 되어 있더군요. 나오는 젊은이와 대화 파란문 : "커피값은 얼마하던가요?" 젊은이 : "아메리카노 한잔에 3,500원 하더라구요" 파란문 : "그렇게 안 비싸네?" 젊은이 :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햇어요. ^.^" ['쌍회정터'] <계단집> 문앞 <일신교회> 입구에 "쌍회정터 雙檜亭址"표지판이 있습니다. <백사 이항복선생>의 집앞에 정자가 있던 곳인데, 그후 집 새 주인이 다시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지어 "雙檜亭"이 되었다는군요. 여기서 멀지 않은 <대우재단센타> 빌딩이 있는 곳이 <이덕형선생> 집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어릴적에 잼있고 재치있는 에피소드가 이곳 <회현동>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백사 이항복선생>이 후에 살던 집은 현재 <배화여고> 안에 "필운대"라고 하는 곳이죠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여기 클릭 ['회현역' 방향] 다시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사거리로 돌아와 <저잣거리길>로 내려 가면.... ['회현동 주민센타'] "회현동주민센타"를 만나는데...여기 어디에 있다는 벽화는 못보고 ['성도교회' 앞 사거리] ★ 중요한 사거리 ★ <회현동주민센타>에서 다시 조금 더 내려 가면 다시 사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에 있는 벽화를 구경하고 돌아 옵니다. 우측 골목으로 30m쯤 가면... ['24시 셀프빨래방'] <24시 셀프빨래방>이 있는데 빨래방 벽에 벽화가 있습니다. ['작품 장원급제'] 이곳 벽화 이름은 "장원급제"라는 그림이었는데 요즘말로 하면 <수석합격>이라는 뜻이죠? ['성도교회'] 다시 <저잣거리길>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성도교회>를 지나고 ['정화예술대'] <회현역>과 아주 가까운 곳인데 <정화예술대>가 여기도 있군요. ['회현역(남대문시장)"] 오후 3시 40분 지하철 <회현역(남대문시장역) 1번출입구>로 돌아와 <남산옛길> 답사를 마침니다. ['실트랙'] 거리는 예상보다 짧아 약2.5km였으며 정확히 1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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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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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정동길-고종의 길-환구단』Ⅱ부


  ['환구단']


  ['1902년 한성부 지도']

  [탐방코스 지도]
          
  "1부 덕수궁"에 이어서 <정동역사거리>와 <고종의 길>, 그리고 <환구단>으로 향합니다.
  그러니까 <덕수궁>을 한바퀴 빙 돌아 <환구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동길' 입구]
  
  2021년 9월 12일 (일)  맑음       
  <덕수궁> 답사를 마치고 <덕수궁돌담길>로 들어 갑니다.


  ['덕수궁돌담길']
  
  <덕수궁돌담길>로 들어 가면 먼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를 만나는데 이 청사 13층에 <정동전망대>가
  있어 <덕수궁>을 비롯해 <정동지역>을 한눈에 조망 할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오늘은 건물 보수공사 중이라 들어 갈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촬영한 사진을 첨부 합니다.



  ['정동전망대'에서 '덕수궁' 조망]   2018년 4월 18일에 촬영한 사진
  


  ['김장생 생가터']
  
  <서울시청 서소문청사>는 옛날 "김장생 선생" 생가터였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김장생선생>은 <우암 송시열>의 스승으로 유명하지요. <김집>은 <김장생선생>의 아들
  <金長生 선생>은 존함이 "長生"이라는 독특한 이름인데 1548년 7월8일~1631년 8월3일까지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꽉채운 83세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진짜 "長生"하셨죠?
  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돈암서원']
  
  <김장생선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며 설립된 서원이 <돈암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된 우리나라 9개 서원 중에 하나더군요.
  <충남 논산>에 있는데 제가 다녀와 답사기를 쓴 바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세요
  "[논산] "계백혼이 살아 숨쉬는 솔바람길" 답사기 여기 클릭


  [거리 공연]
  
  <김장생선생 생가터>를 지나면 <경운궁>의 정문이었던 "대안문 大安門"이 있었던 곳을 지나고


  ['운교' 터]

  이어서 "운교 터 雲橋址"를 만납니다. 무심코 지나면 알수 없는데 보행로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요즘 명칭으로 "육교"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사진을 보면...


  ['운교' 사진]

  [안내문]
  
   "운교 雲橋"는 <고종>이 궐밖 가까운 곳에 고위관료들의 관청을 만들어 쉽게 <고종>과 접촉하며
   업무를 보고하거나 어명을 받들게 할 목적으로 만들었답니다.
   그곳이 잠시 후 들릴 예정인 <서울시립박물관> 자리 였답니다.
   그러니까 이 <운교>는 <경운궁>과 궐밖 관리들 집무실인 각사를 바로 연결하는 다리였던거죠
   일본놈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겠죠?


  [옛 '홍교' 사진]               
  
  <운교>와 같은 육교는 또 있었답니다.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홍교 虹橋"였는데 사진 속에 전찻길이 선명히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홍교>는 지금의 <서대문>과 <광화문로타리> 사이에 있었겠습니다.
  뒤로 <인왕산>이 변함없이 솟아 있군요.


  ['정동 사거리']                 
  
  <운교 터 雲橋址>를 지나면 바로 <정동사거리>를 만납니다.
  우측엔 <미국대사관저>가 있고, 정면엔 <정동제일교회>가 있으며
  7시 방향엔 <서울시립미술관>이 있습니다.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들어 갑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엔 <최정화씨> 작품의 <장미빛인생>이라는 작품이 눈길을 끌고...
  조금 올라 가면...


  ['독립신문사' 터]
  
  <서울시립미술관>이 예전엔 <육영공원 터>였다가 <독일영사관>이 되고, 이어서 <독립신문사>가
  있었었다는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조금 더 추가하자면 
  조금전 <운교>에서 알아 본 바와 같이 <독일영사관> 이후 잠시 <궐밖 각사>인 관청이 있었고, 
  이후 <독립신문사>가 자리 했는데, 일제에 의해 <독립신문>이 폐간 당하면서 "경성재판소"가 차지하고. 
  해방 후엔 "대한민국 대법원"이 자리하다가, 1995년에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이 되었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쪽바리들이 1928년 <독립신문사>를 폐간 시켜 몰아내고 <경성재판소>를 설치하여 식민통치의 
  선봉에 섯던 곳인데,.해방 후엔 우리나라 <대법원>이 그 뒤를 이었이었지만.......좀 그렇죠?
  이 주변엔 가정법원등 각종 법원들이 함께 줄줄이 설립되어 <정동길>은 <법조거리>가 되었었습니다.
  1995년 몽땅 <서초동>으로 이전해 갔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같이 걸으면 이별한다는 속설이 있지요?
  이별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는 이유는 몇가지 있지만 ....그 중 하나 언급하면...
  모든 법원이 줄 서 있는 <덕수궁돌담길>에서 사랑을 속삭이다가 결혼 한 연인들은 
  결국 이혼소송을 하러 다시 <덕수궁돌담길>을 걷게 된다는.....믿거니 말거나...ㅎ
  지금은 모두 <서초동>으로 이사 가서 괜찮아요 ~~ <서초동>에선 데이트하는거 조심하시고...ㅎ
  현재 <미술관>은 코로나사태로 사전 예약자들에게만 관람을 허용하고 있어 내부엔 들어 가서
  관람은 못하고 주변만 둘러 보았습니다.
.


  ['운교' 흔적 조망]
  
  <미술관>에서 옛날 <운교>가 설치되었던 곳을 이곳에서 조망하고


  ['정동사거리']
  
  다시 <정동사거리>로 내려 가면
  건너편에 <마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있습니다. 
  예전엔 <덕수궁>에 포함되었던 곳인데 <고종>이 미국에 팔았다죠? 
  현재 <덕수궁>은 당시의 1/3 수준으로 줄어 들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주변은 대부분 <덕수궁>이었죠.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는 예상과 달리 우리나라 전통 가옥인 "한옥"이더군요.
  들어 가기도 어려운 <하비브하우스>를 최근에 다녀와 탐방기를 블로그에 올리신 분이 있어
  그 블로그를 링크 시켜 드리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 하세요
    "주한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방문"   여기 클릭


  ['정동제일교회']

  [안내문]
  
  "정동제일교회"
  <유관순 누나의 장례식>을 거행 한곳으로 유명 합니다만....
  이 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로서 미국의 <아펜젤러>가 설립한 개신교 교회이죠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교장도 역임한 우리나라 신교육과 개신교의 선구자이죠.
  이 교회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출신 유명 인사들이 다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팔 박사>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을 다니며 <정동제일교회>를 다녔기에
  해방후 그들이 대통령과 칭송받는 인물이 되어 <정동제일교회>의 신도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답니다.
  더 유명한 얘기 하나 더 언급하겠습니다.
  우라나라 新女性 1호로 꼽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여성소설가, 여성해방운동가 등등등
  "우리나라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정월 나혜석>이 이곳 <정동제일교회>에서 <김우영>이라는
  변호사와 결혼식을 올려 세간의 화재가 되었죠. <김우영>이는 조선총독부 관리로 친일파로 분류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결혼식 청첩장을 일간 신문에 광고로 사나흘이나 내서 당시로는 파격이었죠.
  그렇게 요란스럽게 결혼한 <나혜석>은 결혼 10여년만에 조금 전에 들렸던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신인
  <경성재판소>에서 이혼 소송을 당해 이혼하죠. 간통혐의 였지만 판결 전에 서로 합의이혼했죠.
  <덕수궁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은 이별한다는 속설을 만들어 내는데 한몫하기도 했습니다. ㅎ
  <나혜석><수덕사의 여승>등 新女性들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으면 제가 쓴 다음 글을 보세요
      "新女性과 女僧"  여기 클릭


  ['배재학당 기념관' 조망]
  
  배재학당 졸업생들 중에 유명인들은 <이승만 전대통령> <주시경> <김소월> <나도향> <한동일> 
  <백건우>등 유명인사들이 많이 있지요?
  <이승만 박사>는 뒤에 <배재학당>을 초급대학으로 인정받아 미국 <조지 와싱턴 대학> 3학년에 
  편입하게 되고...영어를 잘해 결국 <미 군정> 이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되고....


  ['정동극장' 조망]

  ['정동극장']
  
  "정동극장 貞洞劇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 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등의 목적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혈의 누>를 쓴 <이인직 선생>이 창설 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인직>에 대해선 잠시후 <중명전>에서 알아 보기로 하고...
  특히 조선 근대 5대 명창 중에 한분인 <이동창 명인>의 판소리를 들은 <고종>이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리기도 해 지금까지도 마당에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정동극장' 내부]
  
  <정동극장>은 요잠 코로나사태로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는데 카페는 성업 중에 있더군요.
  요즘은 전통 악극보다 현대극 등을 공연한답니다.


  ['장동극장' 옆 골목]

  ['중명전' 입구]

  <정동극장> 왼쪽 골목으로 들어 가면 "중명전 中明殿"을 만납니다.


  ['중명전']

  [안내문]
  
  "중명전 中明殿"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한일협상조약>이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역사의 현장이죠.


  ['을사늑약' 현장 모형]

  ['을사늑약'의 인물들]
  
  <늑약 勒約>이라는 말이 '강제로 맺은 조약'을 의미하니 무효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핵심은 우리나라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이었으니 주권을 잃어 버리는 조약이었죠.
  윗 사진에 등장하는 일본놈은 <이토 히로부미>와 주한일본공사관인 <히야시 곤스케>이며
  우리 측 인물은 8명입니다. 요즘 말로 정부 각부처 장관들입니다.
  8명 중에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적극 찬성하여 <을사오적>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성했으니
  윗 사진 속의 인물을 모두 욕하며 씹으면 않되겠습니다.


  ['옛 러시아공사관' 조망]
  
  <중명전>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이 지척에 보입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곳....
  옆에 있는 <예원학교>는 근간에 지은 예술중학교 건물이니 역사와 무관합니다.


  ['을씨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의 어원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조금 전 <정동극장>을 창설한 사람이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이라고 언급했지요?
  우리는 이 <경술국치>의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만을 기억하지는 않습니까?
  ‘최초의 신소설’이라 배운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 .... 그는 누구인가 !
  그는 일본에 유학했으며,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 통역관을 했던 인물로서
  일본말을 못하는 <이완용>의 비서로서 <경술국치>의 실무자였습니다. 
  그가 쓴 <혈의 누>라는 소설도 고아가 된 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이 구해주고 교육해주는 등
  일본인을 은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설 제목 역시 우리말로 <피눈물>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도 <혈루’(血淚)>가 옳은 말임에도 일본식 표기인 <血の 淚>를 
  그대로 직역하여 <혈의 누>라고 표현한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는 <이인직>을 <신소설의 개척자>로 칭송하며, 
  그의 소설도 여전히 일본식 문법으로 표기하고 부르니 이게 왠일입니까...우리나라 학자들은 뭐하는지
  저는 <이인직>만 생각해도 <피눈물>이 날듯하며 "을씨년스럽습니다".


  ['정동거리']
  
  <중명전>에서 나와 다시 <정동거리>로 나가면 좌측엔 <이화여고>가 있고, 우측엔...


  ['신아일보 별관']  

  [안내문]
  
  "신아일보 별관"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이화여고']

  
  이어서 <이화여고> 정문을 만납니다.
  옛 교정과 비교하면 변해도 너무 변했죠?
  <유관순 누나>의 동상과 기념관이 함께 있습니다.
        "[천안역사문화둘레길] 유관순열사 초혼묘 답사기"  여기 클릭


  [''예원학교']
  
  <예원학교>는 이름에서 좀 이상하지만 <이화학당>이 세운 예술전문중학교 입니다.
  학교 옆길로 학교 뒤로 올라 가면....


  ['정동근린공원']         
  
  조그마한 "정동근린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이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고종>이 <아관파천 俄館播遷>을 한 곳이죠.
  <아관 俄館>이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는 것이니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혰다는 의미이지요.


  ['옛 러시아공사관' 흔적]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을 사진으로 세워 놨습니다.
  현재는 조금전에 지났던 <정동제일교회> 뒤에 있는 <옛 배재학당 운동장>을 매입해서
  그 자리에 <러시아 대사관>을 지어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배재학당>은 '강동구 고덕동'으로 1984년에 이전하여 자율형사립고등학교로 변신했습니다.
  당시 <배재학당 운동장 값>이 <고덕동> 전체 땅값보다 더 비쌋다고....ㅎ
  이 사진에서 눈 여겨 볼 곳은 제가 화살표로 표시한 <고종의 길> 출입구 위치입니다.


  [옛 러시아공사관' 사진]
  
  <고종>이 파천했던 <구 러시아 공사관> 사진입니다.



  ['고종의 길' 출입문]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고 수시로 <덕수궁>과 통했던 길이라고 추정하는 길을 복원했답니다.



  ['고종의 길']
  .
  <고종의 길>이라는 길 이름이 좀 거시기 하지만...
  우측엔 당시 <미국공사관>이었던 <미국대사관저>가 높은 담 너머에 있고
  

  ['구세군' 조망]
  
  정면 건너편엔 <구세군>과 <덕수궁>이 보입니다.
 

  ['선원전' 조망]
  
  좌측엔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이 폐허가 되어 발굴 복원공사 중에 있습니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랍니다.
   이 터는 무엇보다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이죠. 고삐리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는데...ㅎ
   <경기여고>는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했습니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보수정비 공사 안내문]
  
  미국, 러시아공사관, 경기여고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끗빨있었던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보수 정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으며 떼돈을 번 고리대금업자들이죠.


  [동측 '고종의 길' 출입문]
  
  <고종의 길> 동측 출입문을 나서서 뒤돌아 본 출입문입니다.


  ['광화문 사거리' 방향]
  
  <고종의 길> 동측 출입문에서 <광화문 사거리> 방향으로 내려 갔다가 돌아 오겠습니다.
  

  ['구세군']
  
  크리스마스가 되면 거리에서 종을 울리며 이웃돕기 모금활동을 하는 <구세군> 본부를 지나고


  ['덕수초등학교']
  
  이어서 <덕수초등학교>를 만납니다.
  예전엔 서울 5대 국민학교 중에 하나였던 명문 초등학교였습니다.
  '파란문'은 '교동국민학교' 출신입니다. ㅎㅎ '윤보선대통령' 출신학교...


  ['옛 선원전' 입구]
  
  <덕수초등학교> 맞은편엔 <경기여고> 정문이 폐허가 되 있습니다.
  학창시절 이 앞을 자주 왔다리 갔다리 했는데...ㅎ
  이 곳이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 자리였다는 것은 근간에 알았습니다.
  현재 발굴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언제까지인지 기약이 없는듯...


  ['1900년대 초중반 '덕수궁' 주변 사진]
  
  1900년대 초중반의 <덕수궁> 주변 사진입니다.
  <선원전>의 위치와 모양을 보여 주는데 그 앞에 <덕수궁 중화전>과 <석조전> 등이 보이는군요.
  <선원전> 뒤에 <경희궁>도 보이는듯 하는데 자 자리에 <서울고등학교>를 세웠죠.
  <덕수궁> <경희궁>이 거의 황폐화 된 후의 사진인듯...


  [되돌아 온 '고종의 길' 동측 출입문']
  
  <덕수궁 선원전> 등을 둘러보고 다시 <고종의 길> 동측 출입구로 돌아와
  좌측 <덕수궁돌담길>로 들어 갑니다.
  미국대사관저의 담장 높이가 왠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군요.
   

  ['북측 덕수궁돌담길']
  
  <덕수궁>의 북측 돌담길로 들어 갑니다.
  얼마 전 까지만해도 <덕수궁돌담길 북측길>은 통행 할수 없었죠
  조금 들어 가면....


  [음식점 '콩두' 자리]
  
  좌측 폐쇄된 집이 예전 유명한 <콩두>라는 음식점이었는데 폐업했는지 문을 닫았고
  가운데 샛문은 뭔지 몰라 안에 경비를 서고 있는 경비원을 불러 내 물어 봤더니  
  <영국대사관>의 뒷쪽 샛문이라고 알려 주더군요.


  ['북측 덕수궁돌담길']

  ['덕수궁 내부 출입문']
  
  <덕수궁돌담길>의 이 구간이 130여년만에 개통된 <북측 덕수궁돌담길>이랍니다.
  <영국대사관>과의 오랜 협상에서 서로 조금씩 양해하여 길을 뚫었는데
  <영국대사관 구역>은 절대 불가라고 해서 <덕수궁 담장>에 門을 만들어 내부통행로를 만들었다고...
  <덕수궁> 안으로 들어 가면


  ['덕수궁돌담길 내부 보행로']

  ['덕수궁돌담길 외부 출입문']
  
  짧은 거리이지만 어쩔수 없이 <덕수궁돌담길>을 궁 안으로 <내부 보행로>를 만들어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문이 <창신문>이며 그 뒤에 <정관헌>이 보입니다. 


  ['영국대사관 정문']
  
  <덕수궁> 밖으로 다시 나가면 좌측에 <영국대사관 정문>이 있고 정문 옆에 <덕수궁 양이재>가 있는데
  대사관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있어 못 들어 가는 줄 느끼게 합니다만 들어 갈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며


  ['양이재' 입구에서]
  
  <양이재> 입구에서 뒤돌아 본 지나온 길입니다.
 


  ['양이재']

  [안내문]
  
  "경운궁 양이재 慶運宮 養怡齋"
  안내문을 참고하면되겠습니다.
  <성공회> 본부 속에 있으며 현재는 <성공회> 소유라는군요.


  ['세실극장']
  
  "세실극장"은 <대한성공회>의 주교였던 "세실 쿠퍼 (Cecil Cooper)"의 이름에서 따 왔으며
  70~80세대들에겐 잊지 못할 소극장으로 인기를 누렸는데 몇년전에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다가
  재개관 했다나 뭐래나....
  <대한성공회> 소유랍니다.



  ['하늘마루']

  <세실극장> 앞에는 <하늘마루>라는 소공원이 있는데 아래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있더군요.
  그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성공회']
  
  "대한성공회"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
  <경운궁(덕수궁)>의 일부를 <영국성공회>가 매입하여 건립한 영국 교회
  <덕수궁>은 <미국교회-정동제일교회> <영국교회-성공회>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태리교회-명동성당>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성공회수녀원']               
  
  <성공회수녀원>의 문이 독특하군요.


  ['조선일보' 관련 건물]              
  
  골목 안쪽으로는 <조선일보>가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회' '북악산' 조망]
  
  <옛 국회의사당>이다가 <시민회관>이 되고 지금은 <서울시의회>가 된 건물을 지나 
  시청앞으로 <세종대로>를 건너며 북쪽을 조망하고


  [뒤돌아 본 '성공회']
  
    지나온 <성공회>와 <하늘마루>라는 소공원을 이고 있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을 뒤돌아 보고


  ['서울시청']
  
  <서울시청>을 바라보며


  ['서울시청광장']
  
  <서울시청광장>을 가로 질러 가면...


  ['남산' 조망]
  
  <소공동> 사잇길로 <남산서울타워>가 조망되는데 조만간 <남산둘레길>을 답사 할 예정입니다.
  조금 왼쪽을 보면...


  ['환구단' 입구]

  
  "환구단" 입구가 보입니다.
  정문인데 왜 입구 라고 하는지는 안내문을 읽어 보면 알수 있습니다.


  ['환구단']

  [안내문]
  
  "환구단 圜丘壇"
  쓰러져 가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에 오르고
  황제가 하늘에 <천제 天祭>를 지내는 곳이랍니다.
  선왕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곡식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
  그리고 하늘에 올리는 제사, 즉  <천제 天祭>를 지내는 곳이 바로 여기랍니다.


  ['석고']
               
                     [안내문]
  


  ['환구단 난간석 석물']

  [안내문]
  


  ['환구단' 정면]
  
  <유교의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랍니다.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골표하고 싶었던 <고종>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환구단'에서 남쪽 조망]

  <환구단>에서 정문 방향인 남쪽을 바라보면 <조선호텔>이 숨막히게 앞을 가로 막으며
  정문을 외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조선호텔' 정문]
  
  <환구단> 출입문으로 나가면 <조선호텔 정문>이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조선호텔' 앞 '소공동 지명의 유래' 표지석]
  
  <조선호텔> 정문 앞 화단에는 모르고 가면 도저히 볼수 없는 <소공동 지명의 유래> 표지석이 있습니다.
  <작은 공주>가 살던 곳이라고 불리워진 지명이라고....처음 알았습니다. ㅎ



  ['롯데호텔'과 백화점]
  
  <조선호텔>에서 <명동>방향과 <을지로입구>까지는 온통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이 자리 잡고



  ['을지로입구 사거리']
  
  <을지로입구역>에서 답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려는데...


  ['살다 보니']
  
  지하철 출입문에 있는 詩 한수가 하루를 뒤돌아 보게 하더군요.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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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덕수궁-고종의 길-환구단』Ⅰ부


  ['덕수궁 중화전']


  ['1902년 한성부 지도']

  [탐방코스 지도]
          
  어렸을 때 부터 무수히 다녀온 <덕수궁>이지만 그 궁에서 어떤 역사가 이루어 졌는지 관심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우리의 역사에 더욱 관심이 가기 시작하고, 미처 몰랐던 역사를 들춰 보며
  운동을 겸한 도보여행을 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덕수궁>을 둘러 보고 <정동거리>의 역사유적과 최근에 조성되었다는 <고종의 길>을 돌아
  <대한제국>의 신전이라 할수 있는 <환구단>을 둘러 보려 합니다.


  ['시청앞']               오후 2시 10분
  
  2021년 9월 12일 (일)  맑음       
  <시청역 1번출입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시청역 1번출구>로 나가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 펼쳐지며 좌측으로는...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大漢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문>의 "월대 복원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월대 月臺>는 궁궐이나 종묘 같은 곳의 중요한 건물 앞에 넓고 높게 쌓은 대(臺)를 가리킨다고


  ['금천교']
  
  <대한문>을 통과해 궁 안으로 들어 가면 바로 "금천교 禁川橋"를 만납니다.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명당수를 <금천>이라고 부르는데, 그 위에 놓여진 다리를 가리킨답니다.
  이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답니다. <하마비>는 궁 밖에 있었던걸 옮겨 놨겠죠? 궁 안까지 말이 들어 갈수는
  없었으니...


  ['금천교' 물길]
  
  <금천>에는 현재 물은 흐르지 않고 있더군요.


  [뒤돌아 본 '대한문']

  <금천교>를 지나 뒤돌아 본 <대한문>입니다.
  현재의 "덕수궁 德壽宮"이라는 이름은 1907년에서야 <고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며, 그때까진 "경운궁 經運宮"으로 불리워 졌답니다.


  ['대안문']
  
  그리고 현재의 <대한문>도 1906년까진 "대안문 大安門"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진입니다.


  ['대한문']                 
  
  1904년에 <덕수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모든 전각들이 불타고, 
  1907년에 궁궐을 새로 건설 할때 <대안문 大安門>도 "대한문 大漢門"으로 고쳤답니다.
  저는 門 이름에 <왜 '한나라 漢'자를 사용 했을까?...사대주의 아닌가?'>라고 궁금했었습니다.
  <大韓門>이라고 하는게 더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한양 漢陽>의 번영을 기원한다는데서 유래했다지만.....
  恨 많은 <大漢門>과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이 승하 하면서 <대한제국>과 함께 잊혀져 갔습니다.
  윗 사진은 <고종>의 상여가 <대한문>을 나서는 광경


  ['대한문' 이전공사]
  
  <1970년>에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에 <시청> 앞 <태평로> 확장공사를 할때
  <대한문>을 궁 안쪽으로 33m를 옮겼다는군요.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더 특이 한것은 문 자체를 해체하여 이전 한것이 아니라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문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땅을 파서 문 전체를 밀어 옮겼다고 하네요.


  ['상상의 정원']
  
  <금천교>를 건너면 <상상의 정원>이라는 <덕수궁 가꾸기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고 알리더군요.


  ['광명문']
  
  궁 안으로 들어가면 첫번째 만나는 "광명문 光明門"이 우측에 나타납니다.
  1897년에 건립되었으며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들어 가는 대문이더군요.
  1919년 <고종>이 승하하기 전 까지는 <광명문> 양옆으로 행각이 있었지만 
  <고종> 승하 후 쪽바리들에 의해 훼철되며 헐리고....


  ['함녕전']  

  ['함녕전' 내부]
  
 1897년 건립된 "함녕전 含寧殿"은 <보물 제820호>로서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 했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해 12월에 새로 중건된 건물이랍답니다.
 <1919년 1월 22일>에 <고종>은 이곳에서 이 세상과 하직 하였다고...
 현재는 <덕수궁 안내 영상실>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덕홍전']

  ['덕홍전' 내부]
  
  "덕홍전 德弘殿"은 원래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 魂殿>이었는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은 건물로 그 이후엔 주로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는 접견실로 사용했다고....
  천장에 샹드리에를 설치한게 눈에 띕니다.
  현재는 뭔가를 전시해 관람시키고 있더군요.



  ['정관헌']

  [안내문]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 뒤엔 "정관헌 靜觀軒"이 있습니다.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 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답니다.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이라고...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이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로마네스크)을 혼합하여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정관헌'에서 바라보는 '덕홍전'과 '함녕전']         
  
  <정관헌>에서 바라보는 <함녕전>과 <덕홍전>입니다.
  <정관헌 靜觀軒>은 글자 그대로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뜻인데
  커피 중독자라고 불릴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으며,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외빈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정관헌>은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가미된 서양식 정자로 지어진 <대한제국 카페 1호점>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ㅎ


  ['정관헌' 뒤 "창신문']
  
  <정관헌> 뒤에는 샛문인 "창신문 彰信門" 있더군요. 그 밖으로 <영국대사관>이 보이고...
  샛문으로 나가면...


  ['덕수궁돌담길' 샛문]
  
  궁 밖으로 연결된 문이 보이는데, 밖에는 <영국대사관 정문>이 있더군요.
  <덕수궁> 안에서 직접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덕수궁돌담길>의 
  <내부보행로>이기 때문인데 잠시후 <고종의 길> 답사 후 지나 갈 예정입니다.


  ['유현문']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과 나랏일을 보는 <중화전> 사이를 구분하는 꽃담과 門이 있는데
  왕의 私的인 공간과 公的인 공간을 구분하는 의미있는 꽃담장과 門이라고 느껴지는군요.
  "유현문 惟賢門"이라고 하는 샛문이 여러 소설 영화에도 등장했던 門이죠
  <고종>이 60세에 얻은 고명딸...<이덕혜 李德惠>...<귀인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덕혜옹주>로 불리워지며 파란만장한 삶이 소설 영화등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인이죠.
  그녀가 어렸을 때 <고종>은 <덕혜옹주>를 애지중지하며 늘 데리고 다녔는데, 
  반드시 저 <유현문>으로 <덕혜옹주>가 다니도록 했다는거 아닙니까.
  <惟賢>이라는 뜻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
  <유현문> 아래에 있는 문은 <용덕문 龍德門>인데 "제왕의 덕"을 의미한다고하며
  가운데 문이 <석류문 錫類門>으로 "선(善)을 내려준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 랍니다.


  ['중화문']

  ['중화전' 앞 광장]
  
  "중화문 中和門"을 통과하여 들어 가면 <대한제국>의 正殿인  "중화전 中和殿"을 만납니다.
  문무백관이 나열해 조례를 하고 각종 국가행사가 열리던 곳이라죠.
  1901년 1월에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결혼식이 열린 곳이며
  1907년 7월엔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양위 한 곳이기도 하다고...
  

  ['중화전']
  
  "중화전 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 正殿"으로,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현재로 치면 <청와대 집무실>과 <국회의사당> 역활을 함께 하던 곳이라 할수 있겠군요.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있답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 正殿'으로 사용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네요.
 

  ['중화전; 변천]

  [안내문]

  ['닫집']
  
  <고종>이 앉아 정사를 보던 御座가 <일월오악도> 앞에 있습니다.
  몰락해 가는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일으켜 세우려 안간 힘을 쓰는 <고종>의 모습이 보이는듯...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중화전'에서 조망]
  
  <중화전>에서 남쪽을 바라 봅니다.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 仁和門>은 <중화문> 앞쪽에 있었다고 하며
  눈 여겨 보아 둘것은 "운교 雲橋"의 위치 입니다.
  <운교>는 잠시 후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며 자세히 알아 보겠으니 <운교>의 위치를 여기서 기억해 
  두면 잠시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조당' 일원과 안내도]
  
  <중화전> 뒤에는 <석어당>과 <즉조당>. 그리고 <준명당>이 있습니다.


  ['석어당']
  
  "석어당 昔御堂"은 <덕수궁>에 지어진 목조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건물이랍니다.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이 궁은 바로 이 <석어당>이라는 건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먼저 <임진왜란>으로 졸지에 피난민이 된 <선조>가 <의주>까지 도망 갔다가 돌아 오니
  <경복궁>은 불타 없어져 갈곳이 없어 왕족들이 살던 <경운궁>으로 들어와 바로 이 건물 <석어당>
  에서 16년간이나 살다 이곳에서 죽었답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일본놈들이 불태웠다고들 알고 계시죠?
  아님니다. 홀로 살겠다고 도망친 <선조>의 배신을 용서 할수 없었던 우리 백성들이 화가 치밀어
  <경복궁>을 불태웠다고도 합니다. 촛불혁명 보다도 더한 저항이었던거죠.
  <석어당>에서 나라를 다스리던 <선조>는 1600년 왕비 <의인왕후>가 승하 하자 
  2년 뒤 33살 연하인 18세 소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여 1606년 <영창대군>을 낳고.
  이미 세자로 책봉되 있는 아들 <광해군> 보다 <광해군>의 새엄마인 <인목왕후>가 무려 10살이나
  적은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니 권력투쟁의 불행은 살육으로 이어졌죠.
  <선조>는 궁궐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석어당> 거주 16년 만인 1608년 떡을 먹다 기도가 막혀 죽고
  이어서 <광해군>이 이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5년째이던 1613년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계남>을 처형하고.
  여덟 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한 후 이듬해 밀실에 가두고 불을 때어 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인 <인목대비>는 1615년 이곳 <석어당>에 가택연금시켰습니다.
  자기는 <창덕궁>을 지어 옮겨 가고...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다시 실권을 쥐게 되는 <인목대비>가 이곳 앞 마당에서 <광해군>을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하며, 7년의 <석어당 유폐생활>과 죽은 자식 <영창대군>의 복수를 하며
  인생역전으로 화려하게 조선왕조의 권력자로 군림하게되죠
  이런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석어당>인데 "옛날(昔)'에 '선조 임금(御)'이 머물렀던 집"이라고 
  후에 <영조>가 "석어당 昔御堂"이라고 지었다고, 


  ['홍도화']

  [안내문]
  
  현재 <석어당> 안에는 <홍도화>라는 조형물이 전시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즉조당'과 '준명당']
  
  "즉조당 卽阼堂"은 "조상(祖)들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卽)한 집"이라는 의미랍니다.
  여기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종> 때에는 후처인 <엄귀비>가 이곳에서 4년간 거쳐했다는군요.,


  ['석조전' 앞 정원]
  
  "석조전 石造殿"은 東館과 西館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西館입니다.


  ['석조전 동관']

  [안내문]
  
  "석조전 石造殿"에 대한 설명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만....
  이 건물은 <고종>이 실제 거주하기 위해 지었으나 일제에 의해 미술관으로 변하고
  일본 본토인들의 조선 관광지로 개발했답니다.
  <덕수궁 석조전>의 <동관>은 일본의 당대 미술품을, <서관>은 조선시대 이전의 고 미술품으로
  채웠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은 '발전 국가', 조선은 '미개발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석조전'에서 조망]
  
  이렇게 아름다운 궁궐을 더 꽃피우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시대로 갔으니 너무 씁쓸합니다.


  ['석조전' 본관과 서관 연결통로]
  
  <석조관>의 <동관>과 <서관>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나 뒤로 나가면



  ['평성문']
  
  궁에서 외부로 출입 할수 있는 <평성문>이라는 작은문이 있는데,
  현재는 나갈수는 있지만 들어 올수 없더군요. 
  <덕수궁>은 유료 관람시설로서 입장료를 내는 곳은 <대한문> 뿐이기 때문입니다.


  ['돈덕전' 복원공사 중]
  
  <평성문> 옆에는 "돈덕전 惇德殿"이 복원공사 중에 있습니다.
  <돈덕전>은 <고종황제>가 덕수궁안에 현대식 건물로 세우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중요한 용도로 쓰였는데, 1907년 8월 27일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답니다.


  [산책로]

  ['덕수궁돌담길' 샛문]
  
  <평성문>에서 <덕수궁>의 북쪽 돌담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이 길을 따라 정문으로 갔습니다.
  중간에 <덕수궁돌담길 내부통행문>이 있더군요. 조금전 <창신문>에서 언급 했지요.
  잠시후 <고종의 길> 답사 후 이 문으로 들어 올 예정입니다.


  ['대한문']
  
  <대한문>을 나서며 <덕수궁>의 이곳저곳을 나름대로 보고 느기며 공부했습니다.
  계속해서 "2부 "고종의 길"과 "환구단"이 이어 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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