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덕수궁-고종의 길-환구단』Ⅰ부
['덕수궁 중화전']
['1902년 한성부 지도']
[탐방코스 지도]
어렸을 때 부터 무수히 다녀온 <덕수궁>이지만 그 궁에서 어떤 역사가 이루어 졌는지 관심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우리의 역사에 더욱 관심이 가기 시작하고, 미처 몰랐던 역사를 들춰 보며
운동을 겸한 도보여행을 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덕수궁>을 둘러 보고 <정동거리>의 역사유적과 최근에 조성되었다는 <고종의 길>을 돌아
<대한제국>의 신전이라 할수 있는 <환구단>을 둘러 보려 합니다.
['시청앞'] 오후 2시 10분
2021년 9월 12일 (일) 맑음
<시청역 1번출입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시청역 1번출구>로 나가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 펼쳐지며 좌측으로는...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大漢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문>의 "월대 복원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월대 月臺>는 궁궐이나 종묘 같은 곳의 중요한 건물 앞에 넓고 높게 쌓은 대(臺)를 가리킨다고
['금천교']
<대한문>을 통과해 궁 안으로 들어 가면 바로 "금천교 禁川橋"를 만납니다.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명당수를 <금천>이라고 부르는데, 그 위에 놓여진 다리를 가리킨답니다.
이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답니다. <하마비>는 궁 밖에 있었던걸 옮겨 놨겠죠? 궁 안까지 말이 들어 갈수는
없었으니...
['금천교' 물길]
<금천>에는 현재 물은 흐르지 않고 있더군요.
[뒤돌아 본 '대한문']
<금천교>를 지나 뒤돌아 본 <대한문>입니다.
현재의 "덕수궁 德壽宮"이라는 이름은 1907년에서야 <고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며, 그때까진 "경운궁 經運宮"으로 불리워 졌답니다.
['대안문']
그리고 현재의 <대한문>도 1906년까진 "대안문 大安門"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진입니다.
['대한문']
1904년에 <덕수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모든 전각들이 불타고,
1907년에 궁궐을 새로 건설 할때 <대안문 大安門>도 "대한문 大漢門"으로 고쳤답니다.
저는 門 이름에 <왜 '한나라 漢'자를 사용 했을까?...사대주의 아닌가?'>라고 궁금했었습니다.
<大韓門>이라고 하는게 더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한양 漢陽>의 번영을 기원한다는데서 유래했다지만.....
恨 많은 <大漢門>과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이 승하 하면서 <대한제국>과 함께 잊혀져 갔습니다.
윗 사진은 <고종>의 상여가 <대한문>을 나서는 광경
['대한문' 이전공사]
<1970년>에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에 <시청> 앞 <태평로> 확장공사를 할때
<대한문>을 궁 안쪽으로 33m를 옮겼다는군요.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더 특이 한것은 문 자체를 해체하여 이전 한것이 아니라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문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땅을 파서 문 전체를 밀어 옮겼다고 하네요.
['상상의 정원']
<금천교>를 건너면 <상상의 정원>이라는 <덕수궁 가꾸기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고 알리더군요.
['광명문']
궁 안으로 들어가면 첫번째 만나는 "광명문 光明門"이 우측에 나타납니다.
1897년에 건립되었으며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들어 가는 대문이더군요.
1919년 <고종>이 승하하기 전 까지는 <광명문> 양옆으로 행각이 있었지만
<고종> 승하 후 쪽바리들에 의해 훼철되며 헐리고....
['함녕전']
['함녕전' 내부]
1897년 건립된 "함녕전 含寧殿"은 <보물 제820호>로서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 했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해 12월에 새로 중건된 건물이랍답니다.
<1919년 1월 22일>에 <고종>은 이곳에서 이 세상과 하직 하였다고...
현재는 <덕수궁 안내 영상실>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덕홍전']
['덕홍전' 내부]
"덕홍전 德弘殿"은 원래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 魂殿>이었는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은 건물로 그 이후엔 주로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는 접견실로 사용했다고....
천장에 샹드리에를 설치한게 눈에 띕니다.
현재는 뭔가를 전시해 관람시키고 있더군요.
['정관헌']
[안내문]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 뒤엔 "정관헌 靜觀軒"이 있습니다.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 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답니다.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이라고...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이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로마네스크)을 혼합하여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정관헌'에서 바라보는 '덕홍전'과 '함녕전']
<정관헌>에서 바라보는 <함녕전>과 <덕홍전>입니다.
<정관헌 靜觀軒>은 글자 그대로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뜻인데
커피 중독자라고 불릴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으며,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외빈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정관헌>은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가미된 서양식 정자로 지어진 <대한제국 카페 1호점>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ㅎ
['정관헌' 뒤 "창신문']
<정관헌> 뒤에는 샛문인 "창신문 彰信門" 있더군요. 그 밖으로 <영국대사관>이 보이고...
샛문으로 나가면...
['덕수궁돌담길' 샛문]
궁 밖으로 연결된 문이 보이는데, 밖에는 <영국대사관 정문>이 있더군요.
<덕수궁> 안에서 직접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덕수궁돌담길>의
<내부보행로>이기 때문인데 잠시후 <고종의 길> 답사 후 지나 갈 예정입니다.
['유현문']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과 나랏일을 보는 <중화전> 사이를 구분하는 꽃담과 門이 있는데
왕의 私的인 공간과 公的인 공간을 구분하는 의미있는 꽃담장과 門이라고 느껴지는군요.
"유현문 惟賢門"이라고 하는 샛문이 여러 소설 영화에도 등장했던 門이죠
<고종>이 60세에 얻은 고명딸...<이덕혜 李德惠>...<귀인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덕혜옹주>로 불리워지며 파란만장한 삶이 소설 영화등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인이죠.
그녀가 어렸을 때 <고종>은 <덕혜옹주>를 애지중지하며 늘 데리고 다녔는데,
반드시 저 <유현문>으로 <덕혜옹주>가 다니도록 했다는거 아닙니까.
<惟賢>이라는 뜻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
<유현문> 아래에 있는 문은 <용덕문 龍德門>인데 "제왕의 덕"을 의미한다고하며
가운데 문이 <석류문 錫類門>으로 "선(善)을 내려준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 랍니다.
['중화문']
['중화전' 앞 광장]
"중화문 中和門"을 통과하여 들어 가면 <대한제국>의 正殿인 "중화전 中和殿"을 만납니다.
문무백관이 나열해 조례를 하고 각종 국가행사가 열리던 곳이라죠.
1901년 1월에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결혼식이 열린 곳이며
1907년 7월엔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양위 한 곳이기도 하다고...
['중화전']
"중화전 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 正殿"으로,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현재로 치면 <청와대 집무실>과 <국회의사당> 역활을 함께 하던 곳이라 할수 있겠군요.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있답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 正殿'으로 사용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네요.
['중화전; 변천]
[안내문]
['닫집']
<고종>이 앉아 정사를 보던 御座가 <일월오악도> 앞에 있습니다.
몰락해 가는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일으켜 세우려 안간 힘을 쓰는 <고종>의 모습이 보이는듯...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중화전'에서 조망]
<중화전>에서 남쪽을 바라 봅니다.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 仁和門>은 <중화문> 앞쪽에 있었다고 하며
눈 여겨 보아 둘것은 "운교 雲橋"의 위치 입니다.
<운교>는 잠시 후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며 자세히 알아 보겠으니 <운교>의 위치를 여기서 기억해
두면 잠시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조당' 일원과 안내도]
<중화전> 뒤에는 <석어당>과 <즉조당>. 그리고 <준명당>이 있습니다.
['석어당']
"석어당 昔御堂"은 <덕수궁>에 지어진 목조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건물이랍니다.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이 궁은 바로 이 <석어당>이라는 건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먼저 <임진왜란>으로 졸지에 피난민이 된 <선조>가 <의주>까지 도망 갔다가 돌아 오니
<경복궁>은 불타 없어져 갈곳이 없어 왕족들이 살던 <경운궁>으로 들어와 바로 이 건물 <석어당>
에서 16년간이나 살다 이곳에서 죽었답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일본놈들이 불태웠다고들 알고 계시죠?
아님니다. 홀로 살겠다고 도망친 <선조>의 배신을 용서 할수 없었던 우리 백성들이 화가 치밀어
<경복궁>을 불태웠다고도 합니다. 촛불혁명 보다도 더한 저항이었던거죠.
<석어당>에서 나라를 다스리던 <선조>는 1600년 왕비 <의인왕후>가 승하 하자
2년 뒤 33살 연하인 18세 소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여 1606년 <영창대군>을 낳고.
이미 세자로 책봉되 있는 아들 <광해군> 보다 <광해군>의 새엄마인 <인목왕후>가 무려 10살이나
적은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니 권력투쟁의 불행은 살육으로 이어졌죠.
<선조>는 궁궐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석어당> 거주 16년 만인 1608년 떡을 먹다 기도가 막혀 죽고
이어서 <광해군>이 이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5년째이던 1613년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계남>을 처형하고.
여덟 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한 후 이듬해 밀실에 가두고 불을 때어 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인 <인목대비>는 1615년 이곳 <석어당>에 가택연금시켰습니다.
자기는 <창덕궁>을 지어 옮겨 가고...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다시 실권을 쥐게 되는 <인목대비>가 이곳 앞 마당에서 <광해군>을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하며, 7년의 <석어당 유폐생활>과 죽은 자식 <영창대군>의 복수를 하며
인생역전으로 화려하게 조선왕조의 권력자로 군림하게되죠
이런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석어당>인데 "옛날(昔)'에 '선조 임금(御)'이 머물렀던 집"이라고
후에 <영조>가 "석어당 昔御堂"이라고 지었다고,
['홍도화']
[안내문]
현재 <석어당> 안에는 <홍도화>라는 조형물이 전시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즉조당'과 '준명당']
"즉조당 卽阼堂"은 "조상(祖)들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卽)한 집"이라는 의미랍니다.
여기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종> 때에는 후처인 <엄귀비>가 이곳에서 4년간 거쳐했다는군요.,
['석조전' 앞 정원]
"석조전 石造殿"은 東館과 西館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西館입니다.
['석조전 동관']
[안내문]
"석조전 石造殿"에 대한 설명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만....
이 건물은 <고종>이 실제 거주하기 위해 지었으나 일제에 의해 미술관으로 변하고
일본 본토인들의 조선 관광지로 개발했답니다.
<덕수궁 석조전>의 <동관>은 일본의 당대 미술품을, <서관>은 조선시대 이전의 고 미술품으로
채웠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은 '발전 국가', 조선은 '미개발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석조전'에서 조망]
이렇게 아름다운 궁궐을 더 꽃피우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시대로 갔으니 너무 씁쓸합니다.
['석조전' 본관과 서관 연결통로]
<석조관>의 <동관>과 <서관>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나 뒤로 나가면
['평성문']
궁에서 외부로 출입 할수 있는 <평성문>이라는 작은문이 있는데,
현재는 나갈수는 있지만 들어 올수 없더군요.
<덕수궁>은 유료 관람시설로서 입장료를 내는 곳은 <대한문> 뿐이기 때문입니다.
['돈덕전' 복원공사 중]
<평성문> 옆에는 "돈덕전 惇德殿"이 복원공사 중에 있습니다.
<돈덕전>은 <고종황제>가 덕수궁안에 현대식 건물로 세우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중요한 용도로 쓰였는데, 1907년 8월 27일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답니다.
[산책로]
['덕수궁돌담길' 샛문]
<평성문>에서 <덕수궁>의 북쪽 돌담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이 길을 따라 정문으로 갔습니다.
중간에 <덕수궁돌담길 내부통행문>이 있더군요. 조금전 <창신문>에서 언급 했지요.
잠시후 <고종의 길> 답사 후 이 문으로 들어 올 예정입니다.
['대한문']
<대한문>을 나서며 <덕수궁>의 이곳저곳을 나름대로 보고 느기며 공부했습니다.
계속해서 "2부 "고종의 길"과 "환구단"이 이어 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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