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경흥길』
『제6-1길 만세교길 : 신북면사무소~영북농협』
"함흥차사의 진실과 백로주 암각문을 찾아서"
['제6-1길 만세교길 실트랙']
<경흥길 6코스>에는 두개의 길이 조성되 있더군요.
하나는 오늘 걷게 되는 <6-1코스>로서 <포천천>을 따라 <영중면 양문리>까지 가는 <만세교길>이고
또 하나는 <포천아트밸리>를 경유하여 <천주산 등산>을 하며 <영중면 양문리>까지 가는
<독곡아트밸리길>이었습니다. <6-2코스 독곡아트밸리길>은 입장료 5,000원을 내고 가야 한다는데
다음에 날씨 좋은 봄날에 <포천아트밸리>도 구경하며 가기로 하고
오늘은 빨간색 선으로 표기한 <6-1코스 만세교길>을 먼저 진행합니다.
['신북면행정복지센차 앞'] 10:15
['제6-1길 만세교길' 안내판]
2022년 2월 24일 (목) 맑음
<잠실 광역버스 환승센타 '25번 gate'>에서 <3006번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15분이 걸려
<신북체육문화센타>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먼저 <신북면행정복센타> 앞에 있는 출발지점에서
['신북읍행정복지센타' 앞]
<신북행정복지센타 앞 사거리>에서 <경복대학교> 방향으로 돌아 나가면...
['신북교' 방향]
<3006번 직행버스>가 정차하는 <신북체육문화센타>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신북교' 앞] 10:18
조금 직진하면 <신북교> 입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가면...
['신북교' 밑] 10:19
<신북교> 밑에 <포천천 둑방 데크길> 입구를 만나 데크길을 이용 합니다.
['포천천' 데크길]
<포천천> 둑방길을 따라 조성된 데크를 따라 <신포천아파트>까지 진행하는데
좌측에 수증기를 내뿜으며 <반월산성>에서 부터 보이던 석탄발전소인 <'GS포천그린에너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신포천아파트' 앞 갈림길] 10:27
<신포천아파트> 앞에 <경흥길>은 좌측 <포천천>으로 내려 가라고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는데
관심 가지지 않으면 지나칠수 있으니 유의 해야 하겠더군요.
['포천천 징검다리']
<신포천아파트> 앞에서 <포천천>을 건너는데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징검다리'로 가서
['포천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가는 <포천천>을 조망하는데
이 <포천천>이 <영평천>과 합류하는 "영중면 양문리"까지 오늘 갈 예정입니다.
<포천천>을 건너 서측 둑방길로 올라 가면....
[둑방길] 10:36
우측 <43번국도>에 유명한 "포천방어방커"가 있는데 모르고 가면 알수 없습니다.
우측 <43번국도>엔 보행자를 위한 보도가 없어 <경흥길>은 부득이 이 둑방길로 안내하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저 <포천방어방커>를 직접 찾아 보려면 승용차를 이용해야 안전 하더군요.
['포천방어방커' 조망] 10:38
['포천방어방커' 줌인]
"포천방어방커"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60호
<6.25 남침> 때에 <포천지역>엔 4개의 방어 방커가 있었다는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방커랍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쏘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시작하여
잠시후 만나게 될 <만세교> 방면으로 진출하여, 파죽지세로 <만세교>를 지나 포천방향으로
진출하자 <대전차방어방커>를 주축으로 방어 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 방어벙커가 남침하는 북한군 탱크를 4시간 정도 지연시켰다는게 공적이라면 공적이랍니다.
그 시간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시민들에겐 안심하라고 방송했는데
그러면서 그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부산으로 몽진하는 시간을 벌게 했으니 공적이라면 공적이죠.
['둑방길']
<'GS포천그린에너지'>가 더욱 가까워지며, <장자교>가 다가 옵니다.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금주산' 조망] 10:47
"금주산 金珠山 568.3m"이 조망 됩니다.
"금 아홉 덩이가 묻혀 있는데 아들 아홉을 둔 사람이라야 그 금을 캘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실제로 이 산에는 금광이 있어 얼마 전까지도 금을 캤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금주산>의 남쪽엔 제가 좋아하는 "봉래 양사언선생 묘"가 있습니다.
<포천>이 고향인 <양사언선생>은 고향의 품에서 잠들고 있습니다.
<포천>은 의외로 많은 유명 인물들의 고향 이더군요.
<백사 이항복선생> <한음 이덕형선생>등을 비롯해 잠시후 <만세교>에서 알아 볼 <성석린선생> 등등
조선의 최고 명필을 꼽으라면 누굴 꼽겠습니까. <추사 김정희>? <만호 한석봉>? <안평대군>?....
저는 神의 필치라는 <봉래 양사언선생>을 꼽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태산가 太山歌>를 쓰셨죠.
<무지무지 유명한 양사언선생의 글씨 "비 飛">
<금강산>을 무지무지 사랑한 <양사언선생>은 관직생활도 <금강산> 주변 고을을 자원해서 하며
자신의 '호'까지도 <여름 금강산>을 의미하는 <봉래 蓬萊>로 지을 정도였답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보이는 <선녀와 나뭇꾼>으로 유명한 <감호 鑑湖> 가에
<비래정 飛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 글자를 남겼다는데 그 글자가 바로 이 글자랍니다.
['장자교'] 10:53
이어서 <장자교>를 만나는데 <포천장자산업단지>와 <43번국도>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GS포천그린에너지"라는 열병합발전소로 직접 통하는 다리이더군요.
['한바위교'] 10:59
이어서 바로 <한바위교>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 건너편 둑방길을 이용해야 하더군요.
[뒤돌아 본 'GS포천그린에너지'] 11:01
<한바위교>를 건너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GS포천그린에너지"라는 열병합발전소는 석탄화력발전소랍니다.
그래서 주민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는데 유연탄 사용량을 50% 줄이기로 하며 타협해서 가동 중이라고..
이 화력발전소는 석탄발전소이지만 친환경 공법으로 가동 되도록 건설되었다네요.
그리고 타지역 발전소와는 달리 주변 공단에 전기와 온수를 공급하는 열병합발전소라고 합니다.
['북만세교'] 11:14
이어서 <북만세교 北萬歲橋>를 만납니다.
<포천 쓰레기소각장>과 <스포츠센타>로 연결하는 다리더군요.
['만세교리' 조망]
<북만세교>에서 우측으로 <포천시 영중면 만세교리>가 펼쳐지며
그 뒤로 <금주산>이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금주산> 우측 아래에 <양사언선생 묘>가 있습니다.
선생의 묘는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있으며 <포천시 향토유적 제32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만세교검문소' 앞] 11:18
다시 <43번국도>로 나가면 "옛 만세교검문소"가 있었던 곳을 만나며
<만세교리>라는 마을이 제법 번화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앞에 보이는 빨간색 모텔 앞에서 길을 건너 건너편 길을 이용 해야 하더군요.
['만세교1리']
<만세교1리>를 통과하는데 여기서 <경흥길6-2길 독곡아트길>과 다시 합류하여 함께 가기
시작 하는 곳이더군요.
['만세교'] 11:28
[안내문]
"만세교 萬歲橋"
<북관대로 北關大路>, 즉 <경흥로>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있는 다리랍니다.
<포천시 신북면>과 <포천시 영중면>의 경계를 이루는 "영덕천"에 있는 다리 입니다.
안내판에는 <3.1운동> 당시 포천시민들이 만세를 부른 다리라고 하며,
<6.25전쟁>때에는 북한군의 남침에 격열히 저항한 방어선이었다고 안내하고 있는데...
가장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태조 이성계>와 <함흥차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여암 신경준의 도로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등 고지도에도 등장하는 <만세교>에 대해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명덕천'과 '금주산' 조망]
<만세교> 위에서 <명덕천>과 그 뒤로 <금주산>을 조망합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대동지지』에 "육송정천(六松亭川)은 포천현(抱川縣)의 동쪽 25리에
있는데, 현등산(운악산)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 만세교(萬歲橋)에 이르러 한천과 합쳐져
<백로주>로 흘러 들어간다.”고 되어 있으며, <육송정천六松亭川>은 이 고을에서 판서 한명이
탄생 할때 마다 소나무 한그루씩 심었는데 여섯명의 판서가 배출되어 六松이 되고,
그곳에 <六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도로 개설로 사라지고 주변에 있던 <명덕사>
라는 절 이름을 차용해 와 <명덕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세삼거리']
<만세삼거리>는 <37번국도>와 <43번국도>가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함흥차사 咸興差使"라는 사자성어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심부름 보낸 사람이 소식없이 영영 돌아 오지 않는 경우"를 <함흥차사>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계시죠?
특히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 특사를 파견하여 아버지가 환궁
할것을 요청했지만,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환궁을 거절하며 찾아온 특사 모두를 죽여버려서
돌아 오지 않는 특사를 <함흥차사>라고 한다고 알고 계시지는 않나요?
대부분 이렇게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은 <함흥차사>의 허구와 역사적 진실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만세삼거리 조형물'] 11:30
<만세삼거리>에는 <포천시 상징 조형물>이 설치되 있습니다.
<경흥길>은 앞에 보이는 굴다리를 통과하더군요.
"함흥차사 咸興差使"는 도대체 몇명이었을까? 실제 인물은 누구 누구였을까?
실제로 <함흥>에 특사로 파견 되엇다가 죽어 돌아 오지 못한 <함흥차사>는 과연 있었을까?
역사 기록에 근거하여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함흥차사>는 단 한명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들에게 "죽어 돌아 오지 않는 특사"로 대부분 알게 되었을까....
그 진실을 잠시 후 알아 보겠습니다.
['금주3리'] 11:35
<만세삼거리 굴다리>를 통과하면 <금주3리>가 이어지며 우측에 <미륵박물관>이 보입니다.
<미륵박물관>은 <경흥길6-2코스>가 통과하는 곳이지만 <경흥길6-1길>에서도 구경하고 갑니다.
길을 건너 <미륵박물관>으로 들어 가면....
['미륵박물관'] 11:40~11:45
"미륵박물관"
<금주산> 자락에 있는 <금룡사>는 1865년 조선 <고종 2년>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지담스님>이
작은 암자를 짓고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이 <금주사(금룡사의 이전 이름)>의 출발점이 되었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단법인 구천미륵회>라는 단체가 인수하고, 이곳에 이런 <미륵박물관>을 지었으며
<영농법인 하늘마당>이라는 10만평 규모의 과수원도 운영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더군요.
종교단체 맞어? 궁금하더군요.
<미륵 彌勒>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나라 말이 아니죠.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마이트레아>를 한자로 음역한게 <彌勒>이고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게 <미륵>이니.....<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랍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랍니다
그 <미륵>은 아직까지도 자기 고향인 <인도><네팔>등의 중생을 잘 살게 구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못 구제하는 <미륵>에게 우리를 맡길수 있을까...
[지나온 길 조망]
<미륵박물관>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볼수 있었고...
['43번국도']
['백로주' 입구] 11:55
<미륵박물관>은 코로나 사태로 후문을 폐쇠하여 다시 정문으로 나와
<43번국도>를 10여분 진행하면 "백로주입구-금주1리 버스정류장"을 만나는데
여기서 건너편 <백로주교> 방향으로 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백로주' 입구]
['백로주' 입구 조형물]
['거사리 마을' 안내판]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는 한자로 <居士里>로 쓰는데,
<조선 선조> 때에 활약한 "지천거사(芝川居士) 황정욱(黃廷彧)"이 살았다고 하여 <居士里>가
되었다는데, "백로주 白鷺洲"로 더 유명한 곳이죠.
['배로주교' 앞 스탬프함] 12:00
[안내문]
<영평8경 중에 제7경>이라는 "백로주 白鷺洲"가 있는 곳이라고 알리는 표지석이 있으며
<경흥길 6코스 스탬프함>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표지석에 새겨진 오리지날 "白鷺洲" 刻字를 바위에서 오늘 직접 찾아 보려고 합니다.
['백로주' 조망]
['백로주']
<백로주교> 위에서 "백로주 白鷺洲"를 조망합니다.
<백로주>의 뜻을 알아 보면 <백로>는 글자 그대로 '황새' '외가리'등으로 불리는 새이고
<주 洲>의 뜻을 확실이 알아야 전체 의미를 알수 있겠죠.
<洲>는 <섬>이라는 뜻이니 <백로주>는 <백로 모양의 바위 섬>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사진 속 가운데 바위 섬이 <백로주>이고, 우측 바위가 <동암 東巖>인데
좌측에 있는 <서암 西巖>에 "白鷺洲"라는 刻字가 있다고 해서 오늘 찾아 보려고 합니다.
['백로주교' 서쪽 끝] 12:03
<백로주교> 서쪽 끝에서 <경흥길>은 좌측길로 가지만
저는 우측 제방길을 따라 <서암>의 <白鷺洲> 각자를 찾아 보고
다시 나와 좌측 <경흥길>로 진행하겠습니다.
['동암' 조망]
<동암 東巖>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저 바위에도 많은 암각문이 있다고 합니다.
['백로주' 조망]
가까이 측면에서 바라 보는 "백로주 白鷺洲"입니다.
<백로>가 물 위에 떠있는 모양이라고 하는데....각자 감상 하시고...
여기에도 무수한 암각문이 있다고 합니다.
['서암' 가는 길] 12:07
"백로주 白鷺洲"라는 암각문을 찾아 가기 위해 <서암 西巖>으로 가야 하는데
먼저 수문 아래로 내려가면....
['서암' 가는 길]
부교가 놓여 있는데 예전에 암각문으로 가도록 만들었으나 홍수로 거의 파손되어 이용 할수 없고
걸어서는 앞에 보이는 <서암 西巖>으로는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와 우측 모래톱으로 나가서
[모래톱에서 '서암' 조망]
모래톱에서 바라보니 "백로주 白鷺洲"라는 刻字가 실제로는 잘 보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아서 줌인해 보니
['백로주' 각자와 암각문]
"白鷺洲"
'己卯秋鐵原府使東岡書'
기묘추철원부사동강서
"기묘년 가을에 철원부사 동강이 씀"
<기묘년>은 <선조 12년(1579)>이라고 계산되며
<철원부사 동강>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백로주> 암각문 좌측에는 또 하나의 암각문이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자료>를 참고 하면...
“山有白雲洲白鷺 산유백운주백로 산에는흰구름 물가에는 백로가 노니는데
雲隨鷺去隨鷺雲 운수로거수로운 구름은 백로따라 백로는 구름따라 가네
山雲洲鷺相隨處 산운주로상수처 산엔 구름 물가엔 백로가 서로 따르는 곳에
我方閒情一群 아방한정공일군 나 또한 한가롭게 한무리가 되었다네
素洲 소주”
라고 새겨져 있으며, 시를 지은 <소주>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백로주교'로 회귀] 12:17
<백로주>에서 지름길이 있나 헤메다가 시간만 허비하고 다시 <백로주교>로 나가서
['거사리' 통과]
"지천거사(芝川居士) 황정욱(黃廷彧)"이 살았다고 하여 <居士里>가 되었다는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를 통과합니다.
<명성지맥>이 지나는 추억의 <불무산 佛舞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명성지맥>을 종주하며 <불무산>을 올랐던 때가 벌써 13년이 흘렀군요. 그땐 청춘이었는데..ㅠㅠ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하겠습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라는 나라를 무너뜨리며 왕이 되었으나
가장 가까운 자기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게는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이방원>이는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자 자신의 형제들을 거의 다 죽이고, 친인척까지 많이 죽였습니다.
<태조 이성계>에게 적군은 <고려의 잔재>가 아니라 바로 아들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겨우 7년정도 있었을 뿐 <이방원>이를 죽이지 못하고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를 적으로 보며 유랑시위를 하게 되었지요.
[''백로주 유원지' 조망] 12:40
<거사리>를 23분 가량 통과하면 우측에 <포천천>이 보이며 건너편에 <백로주유원지>도 보입니다.
이 근처에도 대규모 펜션이 여럿 있더군요.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1. 태조의 첫번째 유랑 시위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대를 이어 영구집권 할듯 했던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의 형제살생에
환멸을 느끼고, <조선>을 개국하고 고작 7년여만에 왕위를 둘째 아들 <정종>에게 물려주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세상사를 잊고 조용히 살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수 있으며, 무척 낭만적인 철학자 같은 느낌도 줍니다.
왕위를 물려 받은 <정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기며 권토중래 했지만
<이방원>의 위협에 즉위 3년여만에 자기 셋째 동생 <이방원>에게 다시 왕위를 물려주고
아버지와 같이 상왕으로 물러나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종>때 까지 오래 살수 있었습니다.
<정종>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이틀만에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다시
<한양>으로 천도 할것을 요구하며, 요구를 받아 들이자 어찌된 일인지 유랑 시위를 풀고
<개경>으로 돌아 갑니다. <이방원>이를 인정 했다는둥 여러 설이 있습니다.
['영북면' 방향 조망]
오늘의 종점인 <영북면 양문리>가 조망되기 시작하고
15분 정도 진행하면...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2. 두번째 유랑 시위
<개경>으로 돌아 온 <태조 이성계>는 다시 울분이 치솟아 올랐는지
20여일만에 또 다시 <유랑 시위>를 떠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방원>이 이 놈을 인간으로
볼수 가 없었던게죠. 이번엔 <금강산>으로 들어 가서 <유랑 시위>를 했습니다.
<이방원>이는 즉시 <도승지 박석명>으로 하여금 <태조>의 안부를 묻기 위해 그를 급파합니다.
첫번째 <차사 差使>가 되겠습니다. 첫번째 특사인 <도승지 박석명>이 <금강산>에 도착했을 때엔
<태조>는 <금강산>을 거쳐 <함경도 안변>에 있었으므로 <안변>까지 가서 <태조>를 문안합니다.
('안변 安邊'은 '원산'과 '통천' 사이에 있는 고을인데 '원산'과 가까운 곳)
그는 <태종>의 걱정을 <태조>에게 전하였으나 <태조>는 완강하게 여기서 살겠노라 고집합니다.
첫번째 차사는 <함흥차사>가 아니라 <안변차사>인 셈이죠.
돌아 온 <박석명>으로 부터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 강한 특사를 보냄니다.
<태조>가 아끼던 신하이자 <태조 이성계>의 절친이었던 영의정 <성석린>을 <안변>으로 파견합니다.
<성석린>은 <포천> 출신으로 <이성계>와 함께 쿠데타를 함께한 절친이었습니다.
<성석린선생 묘>는 여기서 가까운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있는데 <포천 향토문화유적 20호>로
지정되 있는 <포천>의 자랑이라고도 합니다.
두번째 특사도 <함흥차사>가 아닌 <안변차사>인 셈입니다.
<성석린>은 당시 민심이 흉흉함을 들어 환도를 요청하였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즐거웠던 <태조>는 둘이서 바닷가 정자에 올라 바둑도 두며 회포를 풀며
다정하게 놀다가 요청을 수락하며 <성석린>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 왔습니다.
(<성석린>이 <태조>를 설득하는 방법등에 대한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에 너무 기뻤던 <태종>은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며, 큰 공을 세웠던 <성석린>에게 말 한필
을 내려주며, 공을 치하하였습니다.
<함흥차사>가 죽어 못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려한 환영을 받으며 돌아 온 것입니다.
['양문IC교' 조망]
[다리밑] 12:55
<37번국도>가 지나는 <양문IC교> 밑에 도착하면 <경흥길 안내판>이 있습니다.
또한 추억의 <명성지맥>이 더욱 윤곽을 보여주고....
종점인 <영중농협>까지 1.4km만 가면 되겠군요.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3. 세번째 유랑 시위
<안변>에서 돌아 온 <태조>는 <이방원>이를 직접 보니 다시 울분이 치솟아 올랐는가 봅니다.
그래서 다시 세번째 <유랑시위>에 들어 갑니다.
기록에는 간곳이 <소요산>으로 나옵니다만, 현재의 <양주 회암사>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성석린> 등과 함께 추운겨울, <회암사>로 직접 행차하여 아버지 <태조>를 뵈옵고,
오랜 기간 환도를 주청하였지만, <태조>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태조>의 최측근이었던 '동북면 도순무사' <박만>이 특사로 파견되어
<태조>에게 돌아오실 것을 눈물로 간청하니 그때서야 환궁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죽어 돌아 오지 않는 <함릉차사>가 아니라 살아 돌아 온 <양주차사>였던거죠.
<양주>에서 장장 130여일이라는 '가출'은 이로서 중단하게 된 것입니다.
130여일간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상왕으로서 정무에 소외된 것을 위로하기 위해
일부 정승을 <양주>로 보내어 상왕의 결재를 맡도록 조치하고, 자신이 장기간 그곳에 머물며
상왕을 설득할 때에 신하들이 결재를 받으러 장기간 그곳에 파견되어 마치 정부가 그곳으로
옮긴 것과 같다하여, 그곳의 지명이 오늘날 "의정부(議政府)"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예전엔 <의정부><동두천>도 <양주>에 속한 고을이었으니...
['거사교' 조망]
이어서 <거사교>가 나타나며, 다음 구간에 진행할 <운산리고개>가 <불무산>과 <보장산> 사이에서
어서 오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4. 네번째 유랑 시위
환궁 두달만에 다시 분노는 치솟아 오른 <태조>는 다시 <양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명분에 밀려 두달만에 다시 환궁했고...
['거사교' 통과] 1:00
<거사교>를 통과 하여 건너편 둑방길로 가면...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계속
5. 다섯번째 유랑 시위......"조사위의 난"
<태조>는 또다시 다섯번째 가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가출은 지난 여러차례의 가출에 비해 다른 성격을 띄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이며 세자로 책봉 됬던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의 외족이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 趙思義"가 <태조>의 고향이자 근거지인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덕왕후>와 <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이었습니다.
<趙思義>이라는 이름도 당시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 집니다. ㅎ
<안변부사 조사의 趙思義>는 주변 수령과 주변 여진족들을 회유하여 1만여명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바로 <조사의 무리>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을때 즈음에
<태조>는 다섯번째 가출을 하여 <함흥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경도 동북면>의 급박한 정세와 아버지 태상왕의 <함흥행>을 보고받은 <태종>은
<상호군 박순>을 <함경도 동북면>으로 급히 파견하여 <조사의>의 군대에 회유된 그 지역
수령들을 설득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바로 이 <박순>의 죽음이 <함흥차사>의 잘못된 고사성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즉 <박순>은 <태조 이성계>에게 보내어진 <차사>가 아니라 반란군을 회유하라는 어명을
받은 <회유사>였고, 그를 죽인 것은 <이성계>가 아니라 반란군 <조사의의 군사>였습니다.
한편, 당시 <태조>가 있었던 <함흥>은 <조사의>의 반란군에 접수당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태종실록>을 비롯한 조선의 正史에는 조선왕조 최초의 반란인 <조사의의 난>이
당시 상황에 비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 이성계>와 <조사의>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태조>가 <조사의의 난>과 연관이 되어있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의>가 난을 일으킬 시점에 <함흥>으로 행차한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분명, 의혹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사의의 반군> 진영에는 <태조 이성계>가 있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반군>은 반란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성계>를 모실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이는 다시 특사를 보내는데 이번엔 <내관 노희봉>을 <함흥>으로 보냈습니다.
<노희봉>은 <태조>의 안부를 묻기 위해 떠난 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분명히 <태조 이성계>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조사의의 반군>에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조사의의 반군>은 <이천우 군대>를 격파하고 승승장구 <평양>으로 진군하였으나,
<평양>에서 정부군에게 궤멸당하며 <조사의의 난>은 평정되고 맙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영원한 동지 <무학대사>의 설득에 의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기록되 있지만 <조사의의 난>이 실패하면서 갈곳을 잃어 돌아 오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설득도 있었겠지만 상황이 어쩔수 없었다는게 대부분 학자들의 분석입니다.
['뻐꾹천교'] 1:08
바로 앞에는 <뻐꾹천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고, 좌측 <포천천>에는 <은현교>가 보입니다.
다음 구간에서 저 <은현교>를 건너게 되겠습니다.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 결론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오는 <차사>들을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희생당한 두명은 <태조 이성계>의 명령으로 희생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 <조사의의 군사>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함흥차사 咸興差使"에 대한 옛이야기는 아마도 <태종>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뭇사람들이
살을 붙여 만든 창작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란게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확실합니다.
더더욱 <김진명 작가>는 그의 책에서 <함흥차사>는 <태종 이방원>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조사의의 난>의 우두머리가 아버지 <태조 이성계>이므로 그 반란군 속으로 가면 반드시 죽으니
우리편은 어느 누구도 <함흥>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방원의 경고"가
"함흥으로 가면 죽어 돌아 오지 못한다"라는 "함흥차사 咸興差使"이며
글자와는 관계없는 "경고"를 부여 한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태조 이성계>에게 살해 당한 <함흥차사>는 단 한명도 없었으니....
['낙귀정지' 조망]
<네이버 지도>에는 <낙귀정>이 있었던 자리가 건너편이라고 표기 하는데 정확치 않은듯 하고
실제 <낙귀정터>는 다음 구간에서 확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43번국도' 영북면 양문리 중심가] 1:13
<뻐꾹천>을 따라 <43번국도>로 다시 나가면 <뻐꾹1교>를 만나 건너고
<영북면 양문리> 중심거리를 잠시 진행하면....
['영북논협' 앞 '양문1리(터미널) 버스정류장'] 1:17
<영북농협> 앞에 <경흥길 6-1코스 종점>인 <양문1리(터미널)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경흥길 7코스> 출발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뒤에 붙어 있어 여기선 보이지 않더군요.
오늘 걸은 거리는 11.77km였으며 3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1386번 직행버스>를 타고 <도봉산역>으로 가서 전철로 환승하여 귀가 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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