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지맥4구간]
먹치고개-갑산-새재고개-적갑산-철문봉-예봉산-
율리봉-예빈산 견우봉-직녀봉-천주교 묘역-능내리
[산행 개념도]
[중앙선 이촌역]
5월24일(일)
天摩枝脈의 마지막 구간인 제4구간을 종주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날씨는 약간의 안개를 빼고는 매우 좋은 날씨였습니다.
오랜 세월 서울에 살면서도 처음으로 내려보는 "중앙선 전철 이촌역"
지하철 4호선과 환승하는 역으로 환승하는 거리가 짧고 편했습니다.
이촌동은 二村洞으로 西氷庫과 東氷庫 사이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덕소역-팔당역-국수역"가는 중앙선 전철로 8시경에 환승했습니다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인 "먹치고개"]
중앙선 "덕소역"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는 [88-3번] 시내버스를 타고
"천마지맥 4구간" 들머리인 "먹치고개"로 갔습니다.
[88-3번] 시내버스는 약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으니 시간을 반드시 맞추어야합니다
덕소역에서 먹치고개까지 약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인 "먹치고개"]
지난 5월 10일(일) "천마지맥 3구간'의 날머리이기도한 "먹치고개"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 時雨里의 경계이기도 한 "먹치고개'는
마석에서 양수리로 바로 갈수있는 新作路입니다
[먹치고개에서 바라 보는 "갑산"]
"甲山'이 손에 잡힐듯 보입니다.
4구간 산행은 의외로 쉬웠습니다
지난 3구간에 저 "甲山"을 넘어 "새재고개"까지 가려고했는데, "알바"라는 복병을
여러 대원들이 만나 이곳 "먹치고개"에서 끊었었지요.
그런데 오늘 4구간을 이어 종주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종주 하실분들은 먹치고개에서 3구간 4구간을 끊어 종주하시기 바람니다.
[먹치고개 산행 들머리]
오늘도 "서울백두클럽" 회원님들과 함께 합니다.
오전 10시 정각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전날까지 비가 와서 모든 自然이 깨끗하고 맑았습니다
[갑산 오르는 길]
귀신처럼 천마지맥 마루금을 찾아 산행을 합니다.
제가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닮고 싶은 인물 - 茶山 정약용 선생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퇴계 이황선생님이시고, 닮고 싶은 인물은 茶山 정약용 선생입니다
오늘은 "茶山 정약용 선생"의 생가가 있는 팔당댐 바로 앞 능내리에서 "天摩枝脈"을 졸업합니다
그래서 遊山을 하며 자연스럽게 茶山 정약용 선생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갑산을 오르며 뒤 돌아 본 "먹치고개"]
甲山으로 조금 올라 뒤돌아 본 '먹치고개"
뒤로 마치고개에서 "栢峰山'을 넘고 "수레넘이고개"를 지나, '해비치 골프장'과 "고래산"을 점령하고
내려왔던 "천마지맥3구간" 마루금이 선명합니다
[갑산 오르는 길]
오늘 제4구간은 거리는 제법 긴 약14km 정도입니다만, 급경사 오르막이 별루여서
산행하기에는 "천마지맥 네개 구간" 중에서 제일 쉬운 구간인듯했습니다
"먹치고개"에서 "갑산" 정상 오르는 길이 경사가 가장 심한 정도이니 짐작 할수 있겠나요?
약 30분간만 된비알을 오르면 됩니다
[능선 쉼터]
'먹치고개'에서 약 30분 정도 오르면 처음으로 능선을 만나고 한숨 돌릴수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사실 여기까지가 제일 급경사였으니 오늘은 遊覽山行입니다.
[437m봉 삼각점 갈림길]
능선 쉼터에서 능선을 따라 조금 가니 처음으로 '삼각점'이 있는 갈림길인 437m봉이 나오며,
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합니다
[갑산 정상 부근 쉼터]
甲山 정상 바로 밑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오늘은 길을 잃고 헤메일 염려는 없습니다.
甲山만 통과하면 '새재고개'부터는 대부분 이미 여러번 산행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객들이 우굴대는 유명한 '적갑산-예봉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막걸리도 한잔씩 하며 여유를 부림니다
일반 산객들과는 차별화 되고 싶어하는 '서울백두클럽'이기에....
[갑산 정상]
甲山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 대신에 기상관측대가 우뚝 솟아 있으며
조그마한 '팻말'이 甲山의 정상임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甲山까지는 일반 산객들이 이용하지 않는다는 걸 암시합니다
에구~ 우리같은 오지 산줄기를 따라 다니는 산꾼들이나 이런 곳을 다닙니다
[갑산 정상 표지판]
정상 표지팻말이 조금은 안스럽게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타나는 이정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만들어 설치했다고 생각되는
멋진 이정표들이 산객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러니 甲山은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관계 공무원이 세금을 아꼈으리라
甲은 제일이라는 의미이기도하지요
그러므로 甲山은 최고의 山이라는 의미인데.....여기는 좀..
[갑산 정상부 갈림길]
甲山 정상을 조금 지나면 멋진 이정표가 甲山 정상과 주변 지리 안내를 잘하고 있습니다
[갑산 정상부 갈림길 이정표]
山水甲山
[헬기장]
甲山 정상에서 '새재고개' 사이에 헬기장이 하나 있습니다
[운길산]
甲山 정상 헬기장에서 바라 보는 "雲吉山"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이 산줄기의 끝이 저기 보이는 "雲吉山"으로 나옵니다.
백두대간과 13정맥, 그리고 수많은 기맥, 지맥, 분맥은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를
표준으로 해서 현대인들이 나름대로 선을 그어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론에 따르면 우리는 "雲吉山"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봉산-예빈산"을 거쳐 능내리로 가는 것은 산줄기의 끝을 찾아 가는
일반 지맥 산객들의 임의적인 발상일 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봉산-예빈산"을 거쳐 두물머리로 가는 산길이 더욱 아름다워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은 "산경표"에서 "산줄기"를 포괄적으로 산이름과 고개로 열거 해 놨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탄력적으로 재해석하는데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새재고개로 하산하는 길]
甲山에서 '새재고개'로 하산하는 길은 급경사였습니다
[새재고개]
'새재고개'가 반깁니다
'새재고개'는 남양주시 瓦阜邑 陶谷里에서 鳥安面 時雨里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재'라는 말이 '고개'라는 말이니 그냥 "새재"라고 하던지 "새고개"로 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영남지방이라는 이름을 만든 고개가 문경에 있지요? "聞慶새재" 鳥嶺이라고도하지요
새가 울고 넘는 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새재"도 아랫 동네의 이름이 鳥安面이니
분명히 날아 다니는 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새재고개 이정표]
매우 멋진 이정표가 예빈산까지 안내합니다
한가지, 남양주시 瓦阜邑 陶谷里의 瓦阜는 瓦는 기와를 뜻하는 '와'이고,
阜는 언덕을 뜻하는 '부'이지요?. 그리고 陶谷里의 陶谷은 陶가 질그릇 '도'이니...
이 지역에서 기와나 도자기를 굽는 가마터가 많았던게 틀림없습니다
[도곡리 버스정류장 안내] [와부읍 도곡리 하산길]
새재고개를 이용해 예봉산이나 운길산을 오르는 코스도 권장 할만합니다
"중앙선 전철 덕소역"까지 마을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니고있기에
교통이 편리합니다.
그리고 이 코스는 MTB코스로도 유명합니다
[조안면 時雨里 가는 길] ["갑산" 가는 길]
[적갑산-예봉산 오르는 길]
赤甲山 정상을 향해 된비알을 오르는데 거리는 짧아 간단히 오를수 있습니다
[적갑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새재고개"]
赤甲山 정상을 오르며 뒤 돌아 본 "새재고개"와 "甲山"
[적갑산 오르는 길]
'새재고개'에서 적갑산 능선까지 약15분 정도 오릅니다
[운길산과 예봉산 갈림길]
잘 알아 두어야하는 갈림길.
예봉산에 오시는 일반 산객들은 주로 "팔당역-예봉산-철문봉-행글라이드 활공장-
적갑산"을 거쳐 이곳으로 옵니다.
그리고 "雲吉山"- 水鐘寺로 종주를 하는데 여기가 갈림길이니 잘 기억해 두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절하죠? ㅎㅎ
[운길산과 예봉산 갈림길 이정표] [류시화시인의 詩]
"雲吉山"- 水鐘寺로 가시는 분이나 "도곡리"로 하산 하실 분들은 여기서 갈라져야합니다
이곳 이정표에는 詩가 한수씩 걸려있어 산객들에게 신선함을 더해 줍니다.
남양주시 관계 공무원은 "遊山"을 아는 분인듯....
새와 나무
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없는 산 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무가지 하나만 움직인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 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적갑산 가는 능선]
지난 해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산길은 울퉁불퉁 사람들의 흔적이 별루였습니다
"중앙선 전철" 개통으로 "예봉산-운길산" 종주 코스가 각광을 받으며
수많은 산객들이 찾아와 이렇게 산길이 고속도로가 되었군요
[적갑산 가는 능선에서 바라 본 "운길산"]
"雲吉山"이 이젠 앞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 등장하는 산이름입니다.
그리고 "雲吉山"에는 "水鐘寺"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지요
수양대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다는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는 평생 피부병에 시달렸지요. 우리도 어렸을 때에 종기가 많이 났었는데 요즘은
종기 나는 얘들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여튼 '세조"는 피부병 치료를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갔다가 돌아 오며
이곳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됩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쇠북소리가 들려와 어디인지 찾아 올라 갑니다.
그곳을 찾아 가니 동굴 속에서 "물망울 떨어 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조그만 절간이 하나 있어 "세조"가 신기하고 경치도 좋아 절간을 중창해 주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쇠북 소리같다하여 "水鐘寺"라 했다고하는 유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茶山 정약용선생이 쓴 "遊水鐘寺記"도 매우 유명합니다
[적갑산 가는 능선]
능선길이기에 편안한 산책길입니다.
요즈음 수많은 산객들이 예봉산-적갑산-운길산으로 찾아 오는 이유는
중앙선 전철 개통으로 편리한 교통 접근성과 이런 편한 산행길 때문일 것입니다
[적갑산 정상]
赤甲山 정상은 능선길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어 힘들지 않게 오릅니다
길을 가다 불숙 나타나는게 赤甲山 정상입니다
[적갑산 정상]
"적갑산'의 유래는 절터가 있어서 예로부터 적골(절골의 변음)이라 했던 곳이며
절골산-적골산 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이런 유래를 모르고 적갑산으로 기록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진다고 합니다. 남양주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적갑산 정상석]
지난해에는 없던 정상석이 새로이 설치 되었군요
[적갑산 정상에서 패라글라이딩 활공장 가는 길]
가족끼리 함께하는 산행지로 추천 드리며, 회사 행사로 하는 산행에도 좋은 코스입니다
[점심식사]
적갑산을 조금 지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시간은 언제나 즐겁지요
[적갑산에서 패라글라이딩 활공장 가는 길]
적갑산에서 패라글라이딩 활공장까지는 매우 가깝습니다
[패라글라이딩 활공장 가는 길에 바라 본 "雲吉山"]
雲吉山은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는 구름이 많아 구름도 쉬어 가는 吉地'라고 지어진 이름이라는군요
그리고 일찍이 서거정이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격찬했을 정도의 절경을 가진 水鐘寺.
그리고 水鐘寺에서 바라 보는 "두물머리'라고 합니다.
운길산 앞으로 흐르는 북한강이 보이시죠? 가운데 마을이 조안면 진중리입니다
<수종사중수기>에는 雲吉山으로 나오고, 또한 여암 신경중선생의 산경표에도 雲吉山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鳥谷山"이라고 적혀있답니다
水鐘寺까지 승용차가 올라 갈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더군요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적갑산에서 조금 가면 "패라글라이딩 활공장"이 나옵니다
이 활공장은 남양주시 공식 활공장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차와 술을 파는 허름한 카페가 있습니다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제가 도착하는 순간에 한사람이 패라글라딩을 타고 막 떠났습니다
저는 아직 경험이 없어 모르지만, 아마도 창공을 나는 기분은 타본 사람들이나 알겠죠
"안 타봤으면 말들을 하지 마~"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다음 사람이 활공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지켜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두명이 동시에 타는 것이라 크기가 엄청나더군요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혼자서는 도저히 탈수 없고 여러 사람이 도와 주어야 하늘로 날라 오를수 있더군요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날개를 펼치고 맞바람이 불어 올때에 힘차게 낭떨어지로 뛰어 내리더군요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 보다 훨신 더 높은 예봉산의 철문봉에서 낭떨어지로 뛰어 내릴수 있는
분들만 하늘을 날수 있겠습니다. 저는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구경이나 하렵니다. ㅎㅎ
[페라글라이딩 활공장]
창공을 가르고 날라 갑니다.
구경하기에는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페라글라이딩 활공장에서 바라 본 "한강"]
패라글라이딩이 한점이 되는 창공 속으로 날아 갈때 이젠 한강이 시야에 들어 옵니다
한강 건너편 '하남시'가 펼쳐집니다
[喆文峰]
패라글라이딩 활공장에서 또 조금 가면 "철문봉'이 나옵니다.
'철문봉'은 조그만 봉우리이지만 무척 유명한 봉우리입니다
그 이유는....
[이정표] [산행 안내도]
茶山 정약용선생과 그의 형제들 , 둘째 형인 정약전과 셋째 형인 정약종이 어린 시절에
건강 단련을 위해 자주 오르던 봉우리입니다
정약용선생은 이후에도 전국의 많은 산을 遊山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遊山記를 남기셨습니다
[철문봉 내력]
정약용 삼형제가 자택인 능내리에서 여기까지 왕복하려면 5시간 이상이 걸렸겠지요
이곳에 와서 학문(文)의 道를 밝혔다(喆)고 하여 이 봉우리의 이름을
"喆文峰"이라고 하였답니다
[철문봉과 예봉산 사이의 헬기장]
茶山 정약용선생은 1762년에 이곳 능내리 마재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진주부사라는 관직까지 한 정재원이라는 분이며, 본부인은 정약현을 낳고 일찍 죽어
세칸드인 海南 尹氏에게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그리고 누이 까지 네명이 태어 납니다.
물론 다른 여러 형제가 있으나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어머니 海南 尹氏는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6세손이고,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詩·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입니다.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약용선생은 어려서 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곱살때에 선생의 최초의 漢詩인 "山"이라는 詩를 지었으니 천재임을 입증해 줍니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
[헬기장에서 바라 보는 "검단산" "고추봉" "용마산"]
'한남정맥"의 석성산에서 분기하여 뻗어 나오는 "검단지맥"의 마지막 산줄기인
"검단산"이 한강 건너에 선명히 보입니다. 그 뒤로 "고추봉"과 "용마산"이 맥을 잇고...
"은고개"를 지나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으로 검단지맥은 이어져있습니다.
저는 "검단지맥"을 이미 종주한바 있습니다
[예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다산 정약용선생이 10세 이전에 지은 詩文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다고하니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三眉"라는 말은 "眉"가 눈섶이라는 뜻이죠. 눈섶이 세개라는 의미이니,
정약용선생은 자신을 "三眉子"라고도 했던 것입니다. '눈섶이 세개인 놈"이라는 말이지요
정약용선생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눈섶 사이에 흉터가 생겨 눈섶이 떨어져
눈섶이 세개로 보여 해학적으로 스스로를 "三眉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정약용선생은 곰보 였던 모양입니다. 옛날엔 곰보가 많았지요?
[예봉산 정상]
예봉산 정상이 하늘을 열고 나타납니다.
遊山을 엄청나게 좋아한 茶山 정약용선생
산 오르는 것을 매우 좋아한 다산 정약용선생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를 하셨죠.
칠십오세까지 사셨으니.....
우리 역사 속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으시는 분들은
거의 모두 등산을 하셨습니다. 등산을 않하면 출세가 의미 없는거죠?
밑빠진 독에 물 부어 봤자..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거죠
정조대왕의 가정교사였고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다산 정약용선생인데 당시 여러 직위를 맡으시고 영의정까지 하신 번암 채제공 선생의
관악산 산행기인 "遊冠岳山記"는 무지 무지 유명합니다. 저의 관악산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당시 예순일곱살에 관악산을 종주 했기에 더 유명한것입니다.
최고령으로 여든넷에 관악산을 종주 하신분이 숙종 때에 서인의 수괴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남인의 총수 허목 선생이죠. 퇴계선생보다도 더 등산을 좋아하셨습니다
채제공 선생이 존경한 분이 바로 허목 선생이고 허목 선생이 존경한 분이 퇴계 이황선생이지요
이 분들 모두 등산을 엄청나게 좋아 해서 방통 황희 선생이 팔순까지 사시고,
퇴계 이황선생이 칠순, 미수 허목 선생이 여든일곱, 번암 채제공선생이 팔순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대단한 장수이지요. 관직은 지금의 국무총리인 영의정까지 모두 하신 분들이지요
정약용 선생은 학문적으로 성호 이익선생을 스승으로 하며,
정치적으로는 번암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봉산 정상]
태극기가 휘날리는 禮峰山 정상
[예봉산 정상]
150여년전에는 정약용 형제들만이 이 산을 오르내리며 풍운의 꿈을 키웠으리...
지금은 많은 산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예봉산 정상석]
이 정상석도 지난해 까지는 없던 것입니다
지난해 예봉산 산행기에 이미 언급했던 얘기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를 자주 만나는 분들은 저의 주장을 귀가 아플 정도로 많이 듣고 상당 부분 공감하는 게 있는데..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의 이름을 '정약용 국제 공항'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 최고의 만물박사 -미술, 음악, 건축, 의학, 과학,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르네상스시대 당시 세계 최고라 할수 있는 사람 - 레오나르드 다빈치 -
이 사람에 대해선 더이상 설명 할 필요가 없지요?
정약용선생이 이테리의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견줄수있는 세계 유일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테리의 수도인 로마의 국제공항 이름이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이기 때문에
우리도 편협한 지역 지명으로 공항 이름을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붙여 '정약용 국제공항'이나 '세종 국제공항'등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국제 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 공항', 파리는 '드골 공항', 런던은 '히드로 공항',
이미 말했듯이 로마는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입니다. 모두 지역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동양 쪽에서나 지역 지명을 붙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은 사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항인데도 인천 지역적 이미지가 짙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에겐....
[예봉산 정상에서 북쪽방향의 雲吉山]
우측 앞이 '운길산'이며 좌측 이 지나온 '甲山'이며 가운데 멀리 보이는 산이 '고래산'
그 뒤로 '축령산'등이 어렴푸시 보입니다.
[예봉산 정상에서 동쪽방향의 한강의 "두물머리"]
예봉산의 眞價는 이곳에서 "두물머리"를 바라 보는 것입니다.
北漢江과 南漢江이 만나는 곳 - 두물머리 兩水里
이곳에 다시 서게되면 꼭 이 詩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는 "박후자 詩人"의 "두물머리에서"라는 詩인데
<문예한국>을 통해 등단한 "박후자 詩人"은 <이대문인회>,<한국시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그림자를 세워 집을 짓는다"등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편집한 것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두물머리에서
박후자
만남의 절창이다
물속으로 숲과 구름이 만나고
파란 하늘의 풍금 소리
고요한 오후와 만난다
강물 일렁이는 슬픔
햇볕이 다독이는 강변에
물방개 발자국 따라 퍼져가는 동심원
파장이 크다
저기 떠내려온 붉은 잎
어느 먼 골짝을 돌아왔는가
상처 난 단풍잎 하나 동심원에 갇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이별의 선창가다
|
[예봉산 정상에서 남서쪽방향의 팔당과 한강 건너 하남시]
박후자 시인의 "두물머리"에서"라는 詩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詩라고 여겨집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것을 '만남의 절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絶唱'이라는 한자이리라~
"어느 먼 골짝을 돌아왔는가. 상처 난 단풍잎 하나"
꼭 제가 살아온 인생길을 말해주는듯....
여기 두물머리에서 지나온 세월을 한번쯤 추억하고 떠나는 이별의 선창가 - 두물머리
[예봉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동남쪽의 "예빈산"]
"천마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앞으로 가야할 "예빈산'이 보입니다
'예빈산"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와 "두물머리"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앞으로 "두물머리'는 계속 보여 드림니다
[예봉산에서 하산]
정약용선생이 일곱살에 지었다는 漢詩 "산"에 대해 느낌을 조금더 피력해 보렵니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
엄청 철학적인 詩를 일곱살에 지었습니다. 해석은 제 마음대로이니 믿거나 말거나...ㅎㅎ
가까이 있는 작은 산 때문에 멀리 있는 큰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작은 산 뒤에 있는 큰 산을 보고 있다는 뜻이라 여겨집니다.
직관력(直觀力)입니다.
평범한 저같은 인간은 '근시안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작은것 때문에 더 큰것을 보지 못합니다
더 큰것을 놔두고 좁은 생각으로 작은 것을 탐하며 살지는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산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내면화 된 정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바둑으로 따지자면 9단의 수읽기 경지에 도달한듯한 詩라 생각 됩니다
일곱살에 이런 직관력(直觀力)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천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너무 칭찬하는건가요? ㅎㅎ
제가 가장 닮고 싶어하는 분이니 이해해 주세요
[예봉산에서 율리봉 가는 길]
다산 정약용선생이 집필한 책은 750권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것들은 '목민심서","흠흠심서","경세유표"등등이 유명하지요
기억나는 "목민심서" 중에 한구절 -
돈 쓸줄 모르면 친척도 배반한다
절약만 하고 쓸 줄을 모르면 친척도 배반할 것이니,
덕을 심는 근본은 선심쓰기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다.
가난한 친구나 곤궁한 친족들은 제 힘을 헤아려 두루 돌보아 주도록 하라.
제 집 광에 남아도는 물건이 있거든 남에게 주어도 좋거니와
공유 재산으로 몰래 남의 사정을 돌보아주는 것은 예가 아니다.
또한 권문세도가를 지나치게 후히 대우해서는 안 된다.
정약용선생은 검소함과 절제를 강조하면서도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도와주는 것을 즐기라고 가르칩니다.
여유가 없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라는 말에 담긴 뜻이 깊게 느껴 집니다
[예봉산과 율리봉 사이의 안부 - 팔당역 코스]
다산 정약용선생이 재물에 대해서 언급한 글들을 추려보겠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1810년 9월 유배지에서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재물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구절이 눈에 띕니다.
"꽉 쥐면 쥘수록 더욱 미끄러운게 재물이니, 메기같은 물고기라고나 할까?"
[이정표] [율리봉 오르는 길]
1816년 5월 큰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저울, 다른 하나는 이익과 손해라는 저울,
이 두 개의 저울에서 네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최상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다.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른 것을 추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는 그른 것을 추구하다 해를 입는 것이다"
[율리봉 정상]
자식에게 유산 遺産을 남겨 주는데 현금이나 부동산등을 남겨 주지 않고
"글자"를 遺産으로 남겨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마도 정약용선생 뿐일것입니다
그 유명한 정약용선생의 遺産 전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 만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근(勤)’부지런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늦추어서는 안된다.
집안 식구들이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순간도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부지런함이라 한다.
또 ‘검(儉)’검소함이란 무엇인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이 옷을 먼 훗날까지 입을 수 있는지 헤아려 보라.
가는 베로 만들면 머지않아 해어지고 말테니 질박한 천으로 만들어 입으라.
음식도 목숨을 이어가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거라.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면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조건을 극복하는 일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여유있는 가정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항구적인 생활 규범이다.
그러니 가슴깊이 새겨 두라고 거듭 당부한다."
여러분들도 혹시 아시려는지....
정약용선생은 정학유와 정학연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며, 이 아들이 아버님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후에 조선시대의 大學者가 되지요?
[율리봉 정상]
장약용선생의 아들 "정학유 丁學游"는 그 유명한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지었지요
"農家月令歌"에 대해 잠깐 공부좀 할까요?
農家月令歌는 긴 노랫말입니다. 장편가사라 하지요
시골의 농부들이 농사 지을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쉽게 노래로 만들어 보급한 것인데
"24절기"에 농부들이 절기에 맞춰 시기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짓도록한 노랫말입니다.
다시말하자면, 1년을 12달로 차례대로 맞추어 나가며 농가에서 할 일을 읊은 노래로
농가의 행사를 월별로 나누어 그 달의 자연, 기후 상태와 관련 지어 농촌 풍속과
농사짓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생활에 교훈이 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율리봉 정상]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한 이곳 출신 정화성 선사가 지은 "강역산유기"에서
"율리봉"은 栗里峰으로 밤나무가 많아 붙여진 산봉우리이라 합니다
[예빈산 가는 길]
[율리고개 가는 길에서 올려다 본 "예빈산의 직녀봉"]
"天摩枝脈"의 마지막 산인 "예빈산"이 보입니다.
"예빈산"은 큰 봉우리 두개가 있는데 "직녀봉"과 "견우봉"입니다
[율리고개 가는 길]
[율리고개 가는 길에서 보이는 "두물머리"]
아!~~ 두물머리
금강산에서 흘러 흘러 오는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오는 남한강이
다시 바다로 손잡고 나가기 위해 모이는 곳 - 두물머리
[율리고개 가는 길]
[율리고개]
[율리고개]
"율리고개"에서 오른쪽으로 '중앙선 팔당역"으로 하산 할수 있으며,
왼쪽으로 내려가면 '중앙선 운길산역'으로 갈수 있습니다.
'팔당역'이 훨신 가깝습니다
[이정표] [정약용선생이 쓴 詩]
이정표에 정약용선생이 쓴 詩팻말이 보이니 정약용선생의 생가가 가까워 오는듯합니다
"소내 집에 돌아 오다"라는 詩인데 이 詩에 대해서는 원문과 내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還苕川居라는 詩인데 우선 원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還苕川居 소천(苕川)집에 돌아 오다
茶山 다산 정약용
忽已到鄕里 갑자기 고향 마을에 이르고 보니
門前春水 문 앞에선 봄물이 흐르고 있네
欣然臨藥塢 기쁜 듯 약초밭에 다다라 보니
依舊見漁舟 예전처럼 고깃배 눈에 보여라
花煖林廬靜 꽃들이 어우러져 산집은 고요하고
松垂野徑幽 솔가지 늘어진 들길은 그윽하다
南遊數千里 남녘 땅 수천 리를 노닐었으나
何處得玆丘 어디메서 이런 언덕 찾아보리요
[예빈산의 직녀봉 오르는 길]
還苕川居는 정약용선생이 16세에 아버지가 전라도 화순현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아내와 함께 형님들을 모시고 임지에 따라가 지내다가,
과거공부를 하라는 아버지 명령으로 18세의 봄에 고향 마을에 도착하여 지은 시입니다
"苕川"은 이곳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정약용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입니다.
苕川 소천으로 읽어야하나, "川"이 "내"라는 우리말로 바껴 "소내"라고 한답니다
[예빈산의 직녀봉 오르는 길]
경사가 제법있는 된비알을 오릅니다
고향은 언제나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언제나 자고 먹으며 살아가는 고향집도 아늑하고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 때가 없건만,
오랫동안 객지에서 노닐다가 돌아온 고향집은 더욱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안락의 거처입니다.
경기도 광주군의 소내(苕川)는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로 호칭되는 곳인데,
바로 이곳이 다산 정약용선생이 태어나서 자라고 학문을 익히며 화목하게 가족들과
생활했던 고향집이 있는 곳입니다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예빈산의 정상인 "직녀봉"이 나타납니다
정약용선생이 15세에 서울의 회현동 홍씨집안으로 장가들어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는 당대의 신진사류들과 교제하면서 청운의 뜻을 키우던 곳은 서울이었습니다.
하지만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월을 보냈던 곳이
바로 고향 마을 "소내"에 있는‘여유당’이라는 선생의 집이었습니다.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
"天摩枝脈"의 마루금을 이곳에서 능내리 '다산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연결짖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 '직녀봉'에서 좌측 급경사 내리막길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곳 '직녀봉'에서 '견우봉'으로 가 '천주교 묘역'으로 가는
큰 산줄기가 "天摩枝脈"의 마루금이라 확신하고, "天摩枝脈"은 "팔당댐" 바로 위에서
한강 속으로 잠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제각각인 이유는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는 자세한 안내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마지막 산이 "雲吉山"이라고 표기 해 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던 "天摩枝脈"의 마루금을 벗어 나는 것은 아니기에 어느쪽으로 가던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
'직녀봉' 정상은 제법 넓은 공터가 있군요.
그 옛날, 아니 그렇게 옛날도 아닌 150여년전에 세계 최고의 천재 정약용선생이
웅지와 기상을 일깨우던 곳에 서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특히 저는 정약용선생을 '레오나드 다빈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기에......
[직녀봉의 내력]
예빈산은 건너편 검단산등과 함께 한성백제 시대에 영토를 수비하던 "와오성" 산이었고
조선조에는 나라굿 기우제를 지내던 명산이라고 합니다.
정약용선생 형제들과 정화성선사, 몽양 여운형선생등의 얘기들이 전해 온다고 하는군요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서쪽방향 "팔당대교"]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쪽방향의 지나온 "예봉산"]
지나온 "天摩枝脈"의 산줄기 -
뒤돌아 보니 그 동안 4구간으로 나눠 진행한 天摩枝脈이 다시 그립기 까지 하군요
天摩枝脈도 서서히 한강물속으로 잠기려 합니다.
주금산 철마산 천마산 백봉산 고래산 갑산 적갑산...그리고 예봉산이 그립군요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쪽방향의 "검단산-고추봉-용마산"]
하남시와 서울의 강남, 강동구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검단산"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뒤로 '고추봉'과 '龍馬山'이 "나도 산이니 많이 오시라~!"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저의 산행기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산행기"를 찾아 읽어 보시면, 산행에 도움이....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쪽방향의 "天摩山"]
'예빈산의 직녀봉'에서는 天摩枝脈의 대표산인 "天摩山"이 아련히 보입니다.
좌측 앞이 "운길산"이며, 天摩枝脈이 길게 뻗어 있습니다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쪽방향의 "天摩山"- 줌인한 사진]
그래서 "天摩山"을 줌인합니다
줌인하니 "天摩山" 뒤로 "鐵馬山"도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예빈산의 직녀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남쪽방향 가야할 예빈산의 "견우봉"]
정약용 형제가 웅지를 불태우며 오르 내렸던 산줄기가 능내리까지 뻗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견우봉"입니다.
견우봉을 지나는 이 산줄기가 天摩枝脈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빈산의 "견우봉" 정상]
'견우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이정표와 돌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예빈산의 "견우봉" 정상에서 하산]
견우 직녀(牽牛織女)는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는 전설이지요?
한국에서는 견우직녀(牽牛織女)의 전설로, 중국은 우랑직녀(牛郎織女)의 이야기로
내용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여름의 별자리인 견우, 직녀와 관련이 있지요.
한국의 칠월칠석과 일본의 타나바타(七夕) 등의 풍습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빈산의 "견우봉"에서 보이는 "八堂湖"]
견우 직녀(牽牛織女) 이야기의 내용은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견우와 베를 짜 옷을 짓는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七月七夕)에만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 준 오작교 위에서
만난다는 이야기이지요. "오작교"는 한자로 "烏鵲橋"로 씁니다.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
[예빈산의 "견우봉"에서 보이는 "두물머리"]
두물머리는 일반명사이기에 전국 곳곳에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은 모두 두물머리이지요
세 물줄기가 만나면 세물머리가 되는 샘이니까...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펼친 곳이 "아우내 장터"이지요?
"아우내"도 "병천"의 순 우리말입니다. 정선의 '아우라지'와 비슷한 말이지요
'열수洌水',양수兩水, 병천竝川, 두물머리, 아우내, 아우라지..등등이 거의 비슷한 말입니다
[예빈산의 "견우봉"에서 보이는 능내리 "정약용선생 생가"]
茶山 정약용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묘소가 양수대교 옆 팔당호로 툭 튀어 나온 저곳
능내리 마재 마을에 제법 규모가 크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茶山 정약용선생을 떠올리면 전남 강진의 草堂을 생각합니다.
그곳이 곧 茶山 정약용선생의 本家같은 느낌을 받습니다만,그곳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유배지였습니다.
그곳에서 18년간이라는 유배 생활을 하며 외롭게 지냈는데 왜 그토록 그곳이 더 각광 받을까요?
사실은 이곳 능내리 마재 마을이 本家이며 生家이니 이곳이 더 각광 받아야 당연한데도....
전라남도와 강진군의 공무원들이 업무를 잘해서일까요?
아마도 그곳이 각광 받는 이유는 그곳에서 정약용이라는 실학자가 일생의 최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겠죠. 500여권이 넘는 책을 그곳에서 집필하였고 사연도 많았기 때문일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정약용선생의 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정약용선생의 호는 사암(俟菴)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사암(俟菴)은 정약용선생이 가장 좋아한 호였다고 합니다.
사암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라는
기다림의 의미가 있고, 뒷날의 성인에게도 학문적 질책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과 떳떳함이 배어있는 가장 선생다운 호라는 것입니다
사암(俟菴) 정약용이라 불러야하는데.....
[八堂湖]
여유당(與猶堂)은 뭔 여유있게 사색을 즐기려고 지은게 아니고,
선생의 불우했던 정치적 환경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생은 요즘 말로 하자면 사상범이었습니다. 천주교를 접했다는 이유 하나입니다.
그 이유로 유배생활 18년...
물론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한 진보 개혁파가 정조대왕의 의문의 죽음으로
보수 수구세력인 서인 벽파들로부터 처참한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지만...
그로인해 조선왕조는 세도정치로 멸망의 길로 접어 들기 시작하지만....
"與猶"의 與는 머뭇거릴 '여'이며, 猶는 망서릴 '유'로
즉 망설이기를 사방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랍니다
선생의 호로 茶山이 많이 쓰이는건 전남 강진의 유배지 뒷산이 조그마한 '茶山'이라는 地名이어서
茶山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낼때 쓰셨는데 이것이 후세에 그냥 '호'로 자리 메김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유배생활을 끝내고 여기 本家에 왔을 때는 "洌水" 정약용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이곳 '두물머리'를 '洌水 열수'라고 했기에 '洌水 열수'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 낼때 사용했는데
그의 자서전에는 '洌水 열수' 정약용이 쓰다...라고 되 있습니다.
이렇듯 정약용선생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세엔 모두 "茶山" 정약용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八堂댐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
[예빈산의 견우봉 하산]
[체육시설이 있는 전망대봉]
마지막 봉우리가 되겠습니다
[체육시설이 있는 전망대봉에서 바라 보는 "두물머리"]
정약용선생의 가족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18년간의 유배생활
유배지에서 그리워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 표현은 극치를 이룹니다
如夢令寄內이라는 사랑詩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如夢令寄內 - 꿈속에서 본 아내에게
하룻밤 사이에 지는 꽃이 헤아릴수 없는데
산비둘기와 어미제비가 지붕을 맴도네.
외로운 나그네 돌아간다 말 못하니
언제나 침실에서 아름다운 인연 맺을까나.
그리워 말자 그리워 말자.
슬프고 서글픈 표정의 꿈속에서 본 아내 얼굴을
[체육시설이 있는 전망대봉에서 바라 보는 "雲吉山"과 北漢江]
정약용선생은 75세까지 사셨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 한것입니다
그리고 15살에 결혼해서 결혼 60주년까지 사시는데 이런 것을 회혼 回巹이라고 하지요?
부부가 함께 결혼60주년까지 살아야 하니 매우 어려운 경우입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회혼례 回巹禮를 올리려는 날 아침에 돌아 가십니다.
정약용선생은 돌아 가시기 전에 回巹詩를 남겼습니다
또 친절하게 소개해 드립니다. ㅎㅎ
[체육시설이 있는 전망대봉에서 바라 보는 완벽한 "두물머리"]
回巹詩
六十風輪轉眼翩
穠桃春色似新婚
生離死別催人老
戚短歡長感主恩
此夜蘭詞聲更好
舊時霞帔墨猶痕
剖而復合眞吾象
留取雙瓢付子孫
회혼시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두물머리]
'칼의 노래' 김훈 작가 아시죠?
저의 고등학교, 대학 4년 선배되시고 일산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라고 해도 이의를 다는 분은 없을것입니다
그의 저서 '자전거 여행'에서 여기 "두물머리"를 노래한것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종사 마당에서 산하는 크게 열린다.
산하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굽이치며 다가와 다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흘러나간다.
내륙의 산악과 평야를 파행으로 흘러 온 남한강과 북한강이 눈 아래서 합쳐지고,
거기까지 강을 따라온 산맥들이 다시 여러갈래로 모이고 흩어져 하구를 향하는 대오를 갖춘다.
어디서부터 몰려오는 것인지, 산맥들의 대오는 푸르고 강성해서 하늘 밑을 가득 출렁대는데,
그 푸른 기세의 먼 변방으로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품어서 자애롭다."
[천주교 묘역]
'열수'강은 '열수'마을을 3면으로 휘감고 크게 굽이치면서 돌아나간다.
그 강 건너편 광주시 퇴촌면 앵자산 밑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선각자들인 이벽(1754~1786),
권철신(1736~1801), 권일신(1751~1791), 이승훈(1756~1801), 정약종(1750~1801)이 묻혀있다.
그들은 모두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젊은 날은 서학을 통해서 새롭게 열리는 세계와 미래의 모습으로 설레었다.
그들은 평등과 보편의 신세계를 향해 개안했다. 그들의 청춘은 찬란하고 치열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장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
*'열수'는 설명드린데로 "洌水"로 이곳 한강 두물머리를 옛날에는 '열수 洌水'라고 했답니다
[천주교 묘역]
강물이 합쳐져서 앞으로 향하는 그 두물머리 남쪽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전환하려는 꿈과 전환되지 못하는 세계의 참극은 비롯되었다.
수종사 마당에서 합쳐지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정다산의 고향과 강 건너 퇴촌면 천진암 언저리가 한눈에 보인다.
강물에 실려오는 전환과 신생의 꿈이 아직도 그 양쪽 유적지 사이를 흐른다.
합치고, 굽이쳐서 기어이 바다로 나아간다."
[천주교 묘역] [천주교 묘역 정문]
[봉안대교 아래 산행 날머리- 45번 국도]
[매운탕집 "오성회관"]
[오성회관 안 계곡에서 알탕]
[뒷풀이]
山行을 하며 苦樂을 함께한 "서울백두클럽" 회원들과 졸업식을 매운탕으로 자축했습니다
아무른 사고없이 전구간을 함께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림니다
[구글어스로 본 산행도]
[天摩枝脈 개념도]
4월12일 "한북정맥"의 '운악산'과 '수원산' 사이의 명덕고개에서 시작한 天摩枝脈.
서파고개-鑄錦山(814m)을 지나 "금단이 고개"를 지나고,
4월18일에는 鐵馬山 北峰(780.8m)-鐵馬山 南峰(710m)-과라리 고개-
배랭이 고개- 멸도봉-天摩山(812m)-磨峙고개.
5월10일에는 柏峯山(590m)-수레넘이고개-고래산(542m)-먹치고개
그리고 오늘 5월24일에는 먹치고개에서 갑산-새재고개-적갑산-철문봉-예봉산-
율리봉-예빈산 견우봉-직녀봉-천주교 묘역-능내리까지 산행했습니다
총산행 거리는 약 65km
천마지맥 마루금은 53.9km
총산행시간 약30시간
天摩枝脈을 졸업합니다.
다음부터는 "도솔지맥"을 종주할 예정입니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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