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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뒷산』
      『북악산 신규 개방등산코스 Ⅱ』 


  ['국토지리원 지도']          
  <삼청동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삼청공원 후문> 앞을 통과하여 <삼청안내소>로 들어가
  <삼청쉼터>에서 좌측 방향으로 올라 <청와대전망대>를 둘러 보고, <만세동방>이라는 약수터를 지나
  <청운대전망대>를 통과하고, <청운대쉼터>로 올라 <촛대바위>를 보고, 다시 <청운대전망대>로
  돌아와 <법흥사 터>로 내려 가 <삼청공원>을 통과하며 하산 하였습니다.


  ['삼청터널길']             10:25          
  2022년 6월 1일 수요일 맑음 
  <서울역>에서 <11번마을버스>를 타고 <삼청동삼거리>에서 내려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 가는 <삼청터널길>로 잠시 올라 갑니다.
  참고로 <삼청동> 가는 <11번마을버스>는 요즘 주말이나 휴일에는 승객이 많아 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점인 <서울역>에서 승차했는데 다음 정류장인 <시청>에서 만원을 이루었으니
  참고 해야 할것입니다.


  ['삼청공원 후문']               10:27         
  <삼청동삼거리>에서 데크길을 이용하여 100m 정도 올라 가면
  "삼청공원 후문"을 만납니다.
  "북악산 신규개방등산코스 Ⅱ"의 출발지가 되겠습니다.


  [산행안내도]       
  <삼청공원 후문> 앞에 설치된 안내도에 제가 실제 진행한 괘적을 표기 했습니다.


  [쉼터]            10:28              
  <삼청공원 후문>에서 조금 올라 가면 쉼터를 만나고
 

  ['삼청안내소' 입구]              10:30            
  이어서 조금 전 <삼청공원 후문> 앞에서 헤어졌던 <삼청터널길>을 다시 만나 건너 
  녹색 철문 안으로 들어 가면...


  ['삼청안내소']              10:31              
  "삼청안내소"가 반겨 주는데, 등산코스 안내 팜플릿이 비치되 있으며
  화장실도 있습니다.


  [오름길]             
  계속해서 오름길을 5분 정도 올라 가면....


  ['삼청쉼터']                 10:36~10:40     .
  <청와대 경비병>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던 곳을 만나는데
  이곳에 "옥호정 沃好亭"이라는 "삼청쉼터"가 있습니다.


  [갈림길]            10:40    
  "옥호정 沃好亭" 앞에는 삼거리 갈림길이 있습니다.
  <북악산 신규개방등산코스Ⅱ>는 이곳에서 좌측길이던 우측길이던 올랐다가 다시 원점회귀하는
  곳이 이곳 삼거리가 되겠으니 어느 방향으로 가던 상관은 없겠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좌측으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하더군요.


  [안내도]                       
  "옥호정 沃好亭" 앞에는 친절하게 안내도가 설치되 있더군요.
  저는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시계방향>인 좌측길로 진행하여 돌아 내려 왔습니다만...
  등산 초보들과 동행하는 경우엔
  한가지 알고 가면 좋은 팁은 직진코스인 <법흥사 터> 방향으로 올라 <청운대전망대>에서
  <시계반대방향 코스>로 내려 오는 코스가 조금은 힘이 덜 들겠습니다.
  <청운대전망대>에서부터는 긴 좌측길이 대부분 내림길이기 때문이니 참고하시고...



  [오름길]              10:44        
  <옥호정>에서 부터 <만세동방>으로 오르는 길은 초입부터 계단과 급경사가 이어지지만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 4분여만 오르면 첫번째 봉우리에 오르고



  [산불진화장비함]              10:47    
  계속해서 내려가고 오르고를 반복하면 <산불진화장비함>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합니다.


  ['백운1교']                        
  이어서 계곡을 하나 건너 가는 내림길을 내려 가면서 정면에 보이는 <북악산>을 바라보면...


  ['백악산 부아암' 조망]                    
  아는 사람들만 아는 유명한 "백악산 부아암 白岳山 負兒岩"이 쬐끔 보이는군요.
  "아기를 업은 엄마" 같은 형상이라는 "負兒岩"은 <백악산(북악산)>의 랜드마크라 할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백악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백악산 白岳山"이라는 그림입니다.
  바라보며 그린 각도가 <효자동> 근처인듯 하여 조금 다릅니다만, 이곳에서도 보는 감흥은 같습니다.


  ['백운2교']               10:48         
  이어서 "백운2교"를 건너서                    



  [오르내림]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오름길]                  
  다시 계단 오름길을 오르면....


  [★중요한 삼거리★]             10:54      
  이정표가 있는 중요한 삼거리를 만납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이 생기는 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민 할 필요 없겠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청와대전망대"를 다녀와 우측 "만세동천"으로 가면 됩니다.


  [안내도]                    
  이곳 삼거리에 친절하게 안내도가 설치되 있으니 참고하고
  좌측으로 20m쯤 가면...


  [★'청와대전망대' 갈림길★]            10:55      
  <청와대 철제 펜스>를 통과하자 마자 우측으로 <청와대전망대>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청와대전망대' 가는 길]                 
  <청와대전망대>로 가는 길은 "일방통행"이니 한바퀴 돌아 원점 회귀하면 되겠고...
  

  ['청와대전망대']             11:00      
  "청와대전망대"는조금 협소한데 노인 해설사 한분이 열변을 토하며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식 해설사인지 개인적으로 하는 해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설명을 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설명 속엔 다소 편향된 내용을 강조하며
  역사학자나 되는 것처럼 침을 튀기며 씨부리고 있더군요.
 

  ['청와대' 조망]                      
  <청와대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광경입니다.
  예상보다는 <청와대>가 그리 넓지는 않군요.
  조선 초기부터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이었죠.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좋은 역사이던 흑역사이던 간에 우리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니 
  잘 보존하며 더 의미있는 용도로 활용 해야 겠습니다.


  [내림길]             
  <청와대전망대>에서 내려 가면 경비초소였던 건물들이 있고
 

  ['백악정' 갈림길]                11:05     
  이어서 "백악정 갈림길"을 만나는데
  <춘추관> 옆 등산로와 <칠궁> 옆 등산로 입구에서 올라 오는 코스와 만나는 곳이더군요.
  이곳에 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안내도]                     
  안내도가 있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청와대>의 좌우에 있는 <칠궁>과 <춘추관>에서 오르는 등로를 알수 있습니다.
  다음에 이 코스도 올라 봐야 겠군요.


  ['청와대전망대' 갈림길 회귀]             11:10     
  일방통행인 <청와대전망대>를 한바퀴 돌아 나와

                

  ['만세동방' 오름길]                
  <만세동방 약수터>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계단이 없는 일반 등로로 제법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만세동방 약수터']                 11:16~11:19   
  "만세동방 약수터"
  <고종 황제>도 마셔 보았다는 약수입니다만, 현재는 마실수 없는 물이더군요.
  '화살표'로 표기 한 곳이 약수터입니다.
['만세동방 약수터']
약수터 전경입니다. 약수터는 암벽에 움푹 패인 곳에 물이 고여 있는데. 바위 속에서 솟아 나는 물이 아니고 바위 위에서 흘러 내린 물이 고여 있는듯...
['萬歲東方']
"萬歲東方 聖壽南劇" "임금님 오래 오래 사세요~"라는 뜻이랍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의 중국 전설이 여기에서도 활용되고 있군요. "三千甲子 東方朔" <동방삭>이가 몇살까지 살았는가를 알려 주는 말이죠. <甲子>는 <60년> 만에 한번 돌아 오니까 三千번이면 <180,000년>이니 무지무지 오래 살았다는거죠. <중국 漢나라> 때 인물로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를 훔처 먹어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저승사자>를 잘 꼬셔서 접대를 잘해 오래 산것으로 회자되곤 하죠. <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사자>가 만들어 낸 아이디어가 잼있죠. 십팔만년이나 살아서 거의 귀신 수준으로 신출귀몰해 잡을 수 없는 <동방삭>이를 잡기 위한 아이디어. <저승사자>가 <탄천>에서 숯을 몇년간이나 씻고 있으니, 지나가다 본 <동방삭>이 한마디 합니다.. "세상에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 씻는 놈은 처음 본다"라고 말하자 <저승사자>들이 이 놈이 <동방삭>이라는 걸 확신하고 덮쳐 <동방삭>을 체포하여 저승으로 보냈다는거죠. ㅎ ['청운대전망대' 가는 길] <만세동방 약수터>에서 13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청운대전망대'★] 11:32
매우 중요한 삼거리인 "청운대전망대"에 도착합니다. <북악산 신규개방코스Ⅱ>는 여기서 우측 <삼청안내소>방향으로 가서 <법흥사>로 내려 가면 됩니다. 저는 여기까지 왔으니 <한양성곽>이 있는 <청운대쉼터>와 <곡성><촛대바위>를 돌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아 우측 <삼청안내소> 방향으로 하산하겠습니다. ** 성곽으로 올라 가는 분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 와야 <법흥사 터>로 갈수 있습니다. 이번 <신규개방코스Ⅱ>의 핵심 중 하나가 <법흥사 터>이니까요. [뒤돌아 본 '청운대전망대'] <한양성곽>이 있는 <청운대쉼터>로 올라 가며 뒤돌아 본 <청운대전망대>의 모습입니다. 다녀 와 좌측 <법흥사>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오름길] 이름이 <청운대 전망대><청운대 쉼터>여서 서로 붙어 있는 걸로 생각하면 큰 오해...ㅎ 가파른 계단 오름길을 올라야 <청운대전망대>에서 <청운대쉼터>로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망대>가 <쉼터>보다 훨신 아래에 있으니 혼동이 올수 밖에...ㅎ 보통 <전망대> 아래에 <쉼터>가 있죠? ['한양성곽'] 11:46 헥헥거리며 계단을 오르면 <한양성곽길>을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에 있는 <청운대쉼터>를 다녀와 우측 <곡성><촛대바위>를 다녀와서 올라 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 가야 합니다. [안내도] 이곳에 설치된 안내도를 참고 하고... 안내도에 표기된 <촛대바위 쉼터>와 <촛대바위 전망대>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청운대전망대>와 <청운대쉼터>와 같이 완전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1차 북악산 개방코스' 출입문] 이곳은 "북악산 개방코스Ⅰ"과 <한양성곽 순성길>과 만나는 곳입니다. 2020년 11월에 1차로 개방된 코스가 우측에서 올라와 만나는 곳이죠. 자세한 사항은 제가 당시 답사한 답사기를 참고 하고 "북악산 개방코스Ⅰ 산행기" 여기클릭 ['청운대 쉼터'] 11:48~11:54 "청운대쉼터"에 올라 화장실을 이용하고 조망을 합니다. 아곳은 <북악산 개방코스Ⅰ차> 때에 만들어진 곳이죠. [조망] 조망을 하는데 여기선 <청와대> 방향은 보이지 않고 동쪽이 조망됩니다. ['한양성곽길'] ['곡성' 조망] 11:57 오늘 코스에서 제일 높은 곳인 <곡성>으로 갑니다. ['곡성'] 11:59 "곡성 曲城" 입구를 지나면 ['곡성'에서 조망] <경복궁> 방향이 조망되고 ['촛대바위 전망대'] 12:05 이어서 "촛대바위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촛대바위'] "촛대바위" 일제가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지만 광복 후 제거했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촛대바위'라 칭했다고 하는 바위입니다. 그리고 옛 임금들이 이 바위를 거점 삼아 백악산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일제와 쇠말뚝" 쪽바리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는다고 전국 요소 요소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이 계획과 실행은 누가 했는지 아시나요?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한것입니다. 쪽바리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정기와 맥을 알겠습니까 쪽바리들에게 빌붙어 아부하기 위해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죠. 이런 짓을 한 인간들의 이름들은 생략합니다.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선 민족의 얼과 정기까지 끊으며 아부 한것이죠. 앞으론 "쪽바리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라고 하지 마시고,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박았다고 해야 합니다. ['삼청각' 조망] 12:10 "삼청각 三淸閣" 1972년에 개관하여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던 최고급 요정이었죠. 그후 민주화로 요정정치가 종말을 고하니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2000년에 서울시가 인수하여 문화시설로 지정하여 리모델링해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새로 열었지만... 현재 예식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을 운영하는데 '세종문화회관'이 경영한다고 하네요. 결혼식 때문에 한번 가 봤는데 한정식 음료 차등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과 '구진봉' 조망]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신혼여행 코스로도 각광을 받던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ㅎ <구진봉>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접근금지 ['청운대 쉼터' 갈림길 회귀] 12:26 다시 <청운대쉼터 갈림길>로 돌아 와 <청운대 전망대>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가파른 긴 계단을 내려 가면서 좌측을 바라보면... ['촛대바위' 조망] 조금전에 찾아 봤던 <촛대바위>가 보입니다. <촛대바위 전망대>는 위에 있고, <촛대바위 쉼터>는 아래에 있습니다. ['청운대전망대' 회귀] 12:30 다시 "청운대 전망대"로 돌아와 좌측으로 2~30m 정도 가면... ['법흥사' 갈림길] 12:31 이정표가 있는 데크 계단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정표에 <삼청안내소(화장실)>이라고만 알리고 있어 이 길이 <법흥사 터>로 가는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더군요.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우측으로 내려 갑니다. 이정표에 <법흥사>를 표기 하면 좋겠습니다. [내림길] ['법흥사터'] 12:35~12:38 계단 내림길을 4분여 내려 가면 <법흥사 터>를 만납니다.
"법흥사 터"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는데 지난번 <문재인대통령>이 이 코스 개방 행사 때에 이곳을 올라와 쉬며 앉은 주춧돌이 뉴스를 장식해서 그 주춧돌을 찾아 보는게 급선무...ㅎㅎ 현재 밧줄로 <출입금지>를 시키고 있는 곳인데...그런데도 들어가 왁자지껄 노는 사람들이 많군요.
[줌인한 '법흥사 주춧돌'] ['문재인 대통령'] ☆ 신문 사진 캡쳐 ☆
보수매체와 일부 불교계에서 "성불 聖佛"에 앉았느니 뭐니 해서 뭔가 궁금했는데 건물 주춧돌이었습니다. 좀 모양있는 주춧돌이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공원이나 산으로 가면 흔히 볼수 있는 쉼터의 돌의자와 별반 다를 바 없더군요. 앉아 쉬기엔 딱! 좋은~~ㅎㅎ 저 주춧돌은 아직 유적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평범한 주춧돌인데 의미부여를 해서 "불교를 기만 했다"는 둥 아무리 퇴임하는 대통령이라 해도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막말을 퍼부었지요.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불교계가 건물 주춧돌에 좀 앉았다고 할수 있는 말인가. 내 맘에 않들면 무조건 씹는 풍토는 바뀌어야 그들도 모두도 즐거운 사회를 만들수 있는게 아닌가요 현재는 그런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출입금지>를 시키고 있는데 이 또한 단편적 생각이지 않나요. 주춧돌을 그렇게 "성불 聖佛"로 모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수 있도록 개방해야지 밧줄로 포위를 해 출입금지를 시키며 고립시켜야 되겠습니까? <출입금지>를 시켰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주변에서 음식을 먹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골키퍼'가 있어도 골은 들어 간다~~ㅎ [내림길] <법흥사 터>에서 8분여 내림길을 내려 가면... ['삼청쉼터'] 12:46 오전에 만났던 "삼청쉼터 옥호정"을 다시 만나고... 앗! 외국인 여자들의 옷차림새가 이채롭습니다. 등산을 왔는지 해수욕장을 왔는지 구별이 어려워...ㅎㅎ ['옛 수영장 터'] 오늘은 와이프와 함께 <북악산>을 올랐습니다. 옛 수영장 터를 지나 5분 여 더 내려 가면.... ['삼청안내소'] 12:51 <삼청안내소>를 벗어 나고 ['삼청터널길']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 가는 <삼청터널길>을 건너서 ['삼청공원'] 12:58 이번엔 "삼청공원 三淸公園"을 통과합니다.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1:00 <삼청공원>에는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이 있죠. ['삼청공원 정문'] 1:03 "삼청공원 三淸公園" 정문에서 "북악산 신규개방코스Ⅱ"를 마침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5.2km로서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여기서 계속 <북촌한옥마을>을 통과하여 <운현궁> <낙원상가>를 지나 <백병원> 앞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총 걸은 거리는 10km 정도였습니다. **부록** "북악산 개방코스Ⅰ 산행기" 여기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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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삶, 끝 없는 그리움』 [서울 종로]"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유적 답사기 낙산공원입구-비우당-청룡사 정업원-동망봉-동망정-여인시장-영도교 [구글맵] [구글어스] ['숭인동' 안내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낙산공원입구"에서 출발하여 "단종비 정순왕후 유적"을 따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을 둘러보고, "청계천 영도교"까지 약3.3km를 갑니다. ['낙산공원' 입구] 3:05~3:09 2020년 5월 19일 (화) 맑음 구름 조금 [6호선 창신역 4번출구]에 내려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번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좁은 마을길을 잠시 올라 [한양성곽]에 있는 "낙산공원 입구"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3번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신쌍용아파츠2단지' 조망] [낙산공원]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낙산길]을 따라 먼저 "비우당"을 찾아 갑니다. [비우당]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옆에 있으니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됩니다. 150m정도 직진하면... ['낙산삼거리 버스정류장'] 3:11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담에 붙어 있는 [낙산삼거리버스정류장] 옆에 [비우당]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길안내를 합니다. 200m 정도 아파트 담을 따라 가면...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앞]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3:15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을 만나는데 [비우당]은 아파트 정문 옆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비우당'] 3:17~3:22 3~40m 정도 내려 가면 초가집을 하나 만나는데, 이 초가집이 "비우당 庇雨堂"이더군요. 건너편에 보이는 절간은 [원각사]라는 절인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최근에 지은 절이었습니다. ['비우당' 안내문] "비우당 庇雨堂"에 대해선 위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파란문'은 "지봉 이수광선생 芝峯 李睟光"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선진외국문물을 깊이 있게 습득했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켜서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게 되었답니다.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글] "지봉유설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죠. 우리나라 문화 문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망라하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지봉유설]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듯 하죠? ㅎ 또한 청백리로 유명하다는건 이 집 만 봐도 알수 있죠? "비우당 庇雨堂"이라는 말의 뜻이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 초가집은 원래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선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이 새서 우산을 받히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살까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는데 [지봉 이수광선생]에게 상속되어 개보수해서 "비우당 庇雨堂"이라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지동천'] "자지동천 紫芝洞泉" ^.^ 발음에 유의해야 하는데, 현재의 '창신동' 주변을 옛날엔 "자지동 紫芝洞"이라 했답니다. [자지 紫芝]는 '영지버섯'과 비슷한 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이랍니다. 자주색 물이 나온다고... 이 주변에 그런 버섯이 많이 자생했나본데,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로 빨래를 하니 빨래에 자주색 물이 들었답니다. 폐비가 되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비단 등 천에 자주색 염색을 해주면 주변 여인들이 염색한 천을 내다 팔아 주고 채소 등 먹을거리를 담 너머로 던져 주곤하며 식생활을 이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그런 우물터라 유명해졌답니다. ['낙산길'] 3:24 ['명신초' 앞] 3:27 [비우당]과 [자지동천]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명신초등학교]와 [숭인교회]를 지나 우회전하여 잠시 더 내려 가면... ['청룡마트' 앞 사거리] 3:30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 [청룡사]와 [정업원터]를 보고 다시 이 사거리로 나와 앞에 보이는 [동망봉]으로 가야 합니다. ['청룡마트'에서 '청룡사' 조망] 3:31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고 앞에 [청룡사]가 보입니다. ['청룡사'] 3:32~3:39 [대웅전] "삼각산 청룡사 三角山 靑龍寺"는 비구니 요람이라는데... 고려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낳은 [경순(慶順)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였으며, "세조 3년(1457)"에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출가하여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보낸 곳이어서 우리에겐 "한 많은 장소"로 알려져 있지요. ['우화루'] "우화루 雨花樓" 1457년 6월 22일 (세조3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헸던 곳이라 하니 "雨花"라는 말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꽃비가 내리다..." ['단종실록' 1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단종실록]도 아니고 [노산군일기]라고 나옵니다. 비극의 시작인 그 첫장을 한번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정통(正統) 6년 신유년001) 7월 23일 정사(丁巳)에 나서 무진년002) 4월 초3일 무오(戊午)에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년003) 8월에 문종(文宗)이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신미년004)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勅]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3년 임신년005) 5월 14일 병오(丙午)에 문종(文宗)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정업원'] "정업원 淨業院"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청룡사" 좌측 끝에 있습니다. "정업원 淨業院"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던 곳을 의미 한답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고려 공민왕]의 "惠妃"가 폐위되어 머리 빡빡 깍고 중이 되어 산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낳은 2남1녀 중에 아들 [방번]과 [방석]이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기와 비구니로 살았고 아시다시피 [단종]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어 외롭게 한많은 삶을 산 곳이기도 하죠. ['정업원'] "前峯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 어천만년"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 - 조선 21대왕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친필 - ['정업원구기']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정업원 옛터' 신묘년(1771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떠나간지 170여년이 흐른후 [영조]가 찾아와 이곳이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친필로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13살 때에 14살의 [정순왕후]가 간택되어 부부가 되었지요. [정순왕후]를 [단종]의 王妃로 간택되도록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수양대군-세조]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단종]을 왕위에 앉힌지 1년만에 상왕으로 내밀고, 그후 2년만에 '영월'로 귀양 보내 죽여버렸죠. 졸지에 왕비에서 노비가 되어 궁궐에서 쫒겨난 [정순왕후]는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이곳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요즘 같으면 '오거돈' 같은 놈 ~ ㅎ '코로나바이러스균'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숙주 宿住"라고하죠? ㅎ 한자야 틀리지만 '신숙주'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같은 놈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ㅎ ['청룡마트' 앞 사거리] 3:40 [청룡사]와 [정업사터]를 돌아 보고 다시 [청룡마트] 앞 사거리로 돌아와 우회전 하면... ['동망봉' 조망] 3:41 [숭인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동망봉]이 조망됩니다. 좌측 너른 길로 올라 가면... ['숭인근린공원' 입구] 3:43 ['동망봉' 정상 입구] 3:45~3:51 "동망봉 정상 입구"에 도착합니다. ['숭인근린공원 안내도'] [숭인근린공원 안내도]를 숙지하고 [동망봉 정상석]을 찾아 올라 갑니다. ['동망봉' 정상 배드민튼장] [동망봉 정상]은 배드민튼장과 어린이 놀이 시설, 그리고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주민들의 건강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동망봉 표지석' 위치] ['동망봉 표지석'] [동망봉 정상석]은 배드민튼장 우측 공원 둘레길에 있었습니다. "동망봉 東望峰 93.2m" [정순왕후]가 동쪽 '영월'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랍니다. 1771년 [영조]가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정순왕후]와 [단종]의 넋을 기리며 이 근처 바위에 "東望峰"이라는 친필을 새겼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낙산'과 이곳 "동망봉' 주변을 채석장으로 만들어 그 글씨는 없어졌다고... 제가 알기로는 쪽바리들이 여기서 채석한 돌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등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안내판] ['정순왕후'의 일대기]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만화로 만들어 놧습니다. 제가 읽기 쉽게 하나 하나 확대 편집해서 올렸으니 한번 읽어 보고 가세요~~ ㅎ ['아차산' 조망] 3:52 [동망봉] 정상에서 내려 가면 [아차산] [용마산]이 조망되는데...'영월'은 어디매뇨~ ['동망각']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동망각]과 쉼터 정자가 있는데 [영조]의 친필을 각인한 "東望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군요. [공원길] ['숭인제'] ['유아숲 체험장'] "숭인근린공원"은 주민들을 위해 예상보다 잘 조성된 근린공원이었습니다. '달동네'라고만 알고 있었던 '창신동'과 '숭인동'이었는데 그런 관념을 깨주는 공원이엇습니다. ['동망봉 북카페'] 3:57 [동망봉]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이어서 내려가면 다시 배드민튼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있고 특히 [동망봉 북카페]가 눈길을 끕니다. 들어 가 봤더니 비치된 책도 많고 몇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동망정'] 4:00 [안내문] "동망정 東望亭"은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정자라고 합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진정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그녀는 1440년에 태어나서 15살이 되던 해인 1454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定順王后"가 된거죠. 1년 정도 왕비로 살다가 [단종]이 上王으로 밀려나니 그녀는 "의덕왕대비 懿德王大妃"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에 '왕비' '대비'까지 역임했으며, 그리곤 폐서인이 되어 '노비'로 떨어졌지요. 최단 초고속 변화였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그녀는 무지무지 오래 장수했습니다. '1521년 7월 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나이가 82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엄청 장수 한거죠. 더 실감나게 풀어 드릴까요? ㅎ 그녀는 '1440년'에 탄생했으니 그때가 [세종대왕]이 즉위 22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장남이며 자신의 시아버지인 [문종]이 1450년에 즉위하였으나 일찍 죽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지배하다가, 1468년에 [예종]이 왕이 되고, 또다시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94년엔 [연산군]이...그리고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즉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인 "1521년 7월7일"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권력찬탈과 쿠데타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산것입니까?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세종대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시대까지 여덟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렁다면 그녀는 과연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구중궁궐 권력암투 속에서 골치 아프게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오래 살수 있었을까.... '파란문'은 [정순왕후]의 인생을 비록 과부로 살았지만 장수했으니 그렇게 슬프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수 있다면 그까짓 '왕비'에서 과부가 되더라도 뭔일 있겠습니까? ㅎ 권력을 쥐려고 피비린내 나게 형제 자매 죽이며 살면 뭐합니까. 허무하게 일찍 죽는걸.... ['영월 방향' 조망] [정순왕후]가 첫사랑 [단종]을 애타게 기다리며 돌아 오길 기원하던 동쪽 '영월' 방향엔 마천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애절함은 느낄수 없고... ['한양성' 조망] 서쪽으로는 [한양성곽]이 "낙산"을 자나가고 있는데 [한양성곽]을 이루는 [인왕산]이 조망되며 그 뒤로 [안산]도 보이는군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은 바로 [한양성곽]과 거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살던 [경복궁][창경궁]이 몇km도 않되는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았으니 그녀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비극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찾아 보기 위해서 여기서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좀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을 꼽으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종대왕]을 꼽지요? 하지만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입니다. 왜냐구요? 지금부터 '세종대왕'의 어두운 사생활 부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식 福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자식을 자식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또한 '소헌왕후'의 친아버지, 즉 '세종대왕'의 장인까지 없는 죄를 뒤집어 쒸어 죽여버렸죠. 그가 '심온선생'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둘째, 며느리 福도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식 福'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福'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압승술'은 남편의 성적욕구를 높이기 위한 미신행위였습니다.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밤에 독수공방 시켰기에 성욕을 해결 못해 궁녀들과 레스비안을 즐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요즘같으면 남편 구실 못하는 [문종]이 위자료 주고 이혼 해 줘야 하는데...ㅎ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셋째, 사위 福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놈은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사위인 "안맹담"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자식들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넷째, 세종대왕 본인은 살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으니 그 아이로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망정'에서 출구 방향] 4:03 [동망정]에서 [묘각사]로 내려 가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야만 합니다. [문종]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계유정란"을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중에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세자빈', 즉 장차 王妃가 될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은 인간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수양대군'은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며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계단 내림길] [골목 내림길] 제법 가파른 계단과 비탈진 달동네 골목을 7분 정도 내려 가면...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4:10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안심건강길]이라고 안내하는 [숭인근린공원] 출입구를 만나 우회전하고 ['묘각사'] 4:11 [뒤돌아 본 '묘각사'] 이어서 "낙산 묘각사 駱山 妙角寺"를 만납니다. 전통사찰은 아니고 1930년에 개산한 "대한불교 관음종 총본산"이라고 하며 템플스테이가 좀 알려져 있는듯... [골목길] 골목길을 4분 정도 진행하는데 新舊가 비교되는군요. ['묘각사' 입구] 4:15 [뒤돌아 본 '묘각사' 입구] [1호선지하철]이 다니는 [종로]를 만납니다. [묘각사]와 [동망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동묘' 조망] 길을 건너 건너편에 보이는 [동묘]로 갑니다. ['벼룩시장'] 4:19 [동묘] 우측길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죠. ['동묘' 정문] 4:21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후에 神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관우 關羽"만이 중국에서 神格化되어 지금도 중국사람들 상당수가 神으로 모시고있죠. 이곳의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로서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나라]가 [선조]에게 요구해 "관우 關羽"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했답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보수공사 중에 있습니다. ['옛 여인시장'] "옛 여인시장" [정순왕후]를 위해 주변 여인들이 [정순왕후]가 염색한 옷감 등을 내다 팔고 채소시장들을 열어 식재료를 공급하곤 했다는 남자는 출입을 금하는 禁男市場이었답니다. ['영도교'] 4:24 [안내문]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 가는 영원한 이별...永渡僑" 우리들에겐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여러편의 영화로도 알려진 "端宗哀事"입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화양정"은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화양동'에 그 터가 현재도 남아 있지요.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보내고, 잠시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살곶이교"를 건너 '화양동'의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까지 이동하여, '원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4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청계천'] 4:25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며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며 '한양성' 안에 있는 유일한 개천이기도 하죠. 조선왕조 500년...27명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 중에 유일하게 힘 한번 못쓰고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라진 비운의 [단종 端宗]과 그의 비 [정순왕후]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새살림을 차리고 있으리라....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3.3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 짧은 코스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수백년을 걸은 느낌이 드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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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숙종의 길Ⅱ』중흥사-행궁지-금위영-동장대      
"[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여기 클릭 먼저 Ⅰ부를 보고 Ⅱ부를 읽으면 도움되겠습니다
['북한도1']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지난 <Ⅰ부>의 종점이었던 "중흥사"에서 부터 답사기를 쓰며 출발합니다. 이어지는 코스는 Ⅱ부로 마지막 코스가 되겠습니다. ['중흥사' 입구] 11:25 2022년 11월 2일 (수) 맑음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지난 <Ⅰ부>에서 답사기를 쓴 <중흥사>까지는 <Ⅰ부>를 참고하고 <Ⅱ부>를 "중흥사 重興寺" 입구에서 부터 답사기를 시작합니다. 우측 길로 조금 올라 가면.... ['태고사' 갈림길] 11:2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숙종>은 <팔도도총섭-성능스님>이 상주하며 근무하고 잇는 <중흥사>를 지나 <행궁>으로 갔답니다. [안내표지] 이곳 삼거리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행궁지>는 우측길로 "0.7km"만 가면 있다고 알려 줍니다. ['대남문' 오름길] <중흥사>부터 <대남문> 방향으로 <행궁> 가는 길은 갑자기 좁아 지며 험해지는데 <행궁> 근처의 길이 넓으면 적군이 침입하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길을 이렇게 좁고 험하게 했답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를 보면 여기서부터 <행궁>까지 걸어 올라 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길을 넓게 닦지 않은 이유를 그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걸어 올라 갔겠죠? [건물터] 300여년전 왕조시대 임금의 피난처가 있을 <행궁>을 머릿 속으로 그리지 않으면 이어지며 나타나는 석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없겠죠. 허물어져 황폐해졌지만 이 석축들을 보면 의미심장한 건축물들이 있었을거라는 상상은 벌써부터 웅장한 王宮을 연상케하며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호조창지'] 11:38 아니나 다를까 "호조창지 戶曺倉址"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납니다. 전쟁이 터지면 이 산속으로 도피할 "왕과 왕을 보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어마 무시한 크기로 지어져 있었답니다. <북한산성>에는 7개의 대형 식량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식량창고였겠죠? 군사들은 물론이고 아무리 왕이라해도 안 먹고 싸울수 없고, 살수도 없으니.... 최소 6개월 정도를 버틸수 있는 50만석 이상의 식량 확보는 당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청수동암문' 갈림길] 11:39 <호조창 터>를 지나자마자 바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매우 중요한 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성 좌측길은 <대남문>방향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우측 <청수동암문>방향으로는 <행궁>과 <남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북한산성>의 핵심 중심부가 되겠습니다. ['행궁권역'] 이 주변을 "행궁권역 行宮圈域"이라고 별도 안내판을 설치했더군요. <행궁>과 주변 경호, 병영시설들의 위치를 잘 알수 있습니다. [건물터] 삼거리에서 우측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행궁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건물터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행궁' 입구] 11:47 이어서 "행궁 行宮"입구에 도착하는데, 현재는 복원공사 중으로 출입이 금지되 있습니다. ['행궁' 복원 공사중] [안내문] 그래서 우측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서 <행궁터>를 내려다 봅니다.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건물은 임금이 먹고 자는 <내전 內展>과 업무를 보는 <외전 外展>이더군요. 오리지날 <행궁>은 1915년 대홍수와 특히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었답니다. 그래서 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며 오리지날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1902년 사진] 일본놈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02년에 찍었다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1904)에 실려 있습니다. ['1893년경 사진] 1893년경에 촬영 되었다는 사진을 하나 더 보면 <행궁>의 전체적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한국사 전문 작가인 "로버트 네프(Robert Neff)의 소장품"이라고 합니다. <숙종>은 위기시에 자신이 도피할 이곳 <행궁>에 도착하여 詩 한수를 읊었습니다. <숙종>이 읊은 <御製詩 6수> 가운데 세번째 행을 읽어 보면 그의 감회를 잘 느낄수 있습니다.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간관십리도행궁 줄줄시단즉재동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노적봉두운미권 백운대상무유몽 험한 길 10리를 걸어 행궁에 이르니 험한 시단봉이 동쪽 가까이 있네 (시단봉에 동장대가 있음) 노적봉 머리위의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아니하고 백운대 위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네. ['청수동암문' 갈림길 회귀] 11:58 20여분이 걸려 <행궁>을 둘러 보고 다시 <청수동암문 갈림길>로 돌아 와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대남문' 방향] <행궁> 앞 삼거리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개울을 하나 건너면 건너편에 바로 <경리청 상창 터>가 보입니다. ['경리청 상창지'] 12:01~11:09 "경리청 상창지 經理廳 上倉址"가 상당한 규모로 있어 올라 가 봅니다. <북한산성>의 관리와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보던 관청이 있었던 곳이며 또한 관리와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니 그 규모를 알수 있습니다. [오름길] 다시 7분여 오름길을 올라 가면.... [갈림길] 12:16 <숙종의 길>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길은 <대동문>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금위영 유영지>와 <어영청 유영지>로 올라 가는 <대남문 방향>입니다. <숙종>은 1772년 4월 12일에 환궁하기 위해 <동장대>와 <대동문>을 경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숙종>은 여기서 좌측 <대동문>으로 올라 갔을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이곳엔 이정표가 없고, 우측으로 30m쯤 올라가서야 나타나더군요. ['대동문' 갈림길] 12:17 조금전 갈림길에서 30m쯤 올라 가면 <대동문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여기선 좌측 <대동문 방향>길로는 사람들의 통행 흔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정표의 위치를 조금전 삼거리로 옮기던지 해야 겠습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가 <금위영 유영지>를 돌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숙종의 길>인 <대동문>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보국문' 갈림길] 12:20 <대동문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 가면 이번엔 <보국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50m쯤 올라 가면... ['보국사지'] 12:21 "보국사 터 補國寺址"를 만납니다. <북한산성> 13개 僧營 가운데 제일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절간이라기 보단 무기고와 식량창고등 군수지원 시설의 역활이 더 컷답니다. ['보국사지' 흔적] <보국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 규모도 상당 했다는 것을 느낄수 있더군요. ['금위영 유영지'] 12:27~12:58 <보국사> 위에는 바로 "금위영 유영지 禁衛營 留營址"가 있습니다. 요즘의 <대통령 경호실> 역활을 하던 <금위영>인데, 戰時엔 본영이 주둔 하겠지만 평시엔 <금위영 파견부대>가 상주하던 곳이랍니다. <숙종>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 조금전 <대동문 갈림길>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금뮈영이건기비'] "금위영 이건비 禁衛營 移建碑"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숙종>이 시찰 왔을 때엔 <금위영>이 <대동문> 앞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높은 곳에 있어 풍우에 무너질 위험도 있고 <행궁>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4년 후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이건비>를 여기에 세웠다고.... 그러니까 <숙종>이 시찰 왔을 왔을 때엔 이곳에 <금위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궁>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올라 가며 그 앞에 있던 <금위영>도 시찰 했을 것입니다. ['금위영 이건기 비'] <금위영 이건비>는 마모가 심하고 한자 실력도 모자라 읽을수 없어서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기록을 참고 합니다.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今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 命訓 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 置軍營御信地廋糧備械 國家 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 也其十月城役完本營等 自龍巖東南至普賢峯下 二千八百二十 一步 一千六十五垜 城門二曰大東小東 皆上設譙樓暗門二 柴壇峯爲將臺下有房屋十間 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 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 營舍倉庫九十餘間 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 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 哨官郭義賓經紀財力 把摠張友軫董領攻役至八月告成 石砌一百二十步 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四十五間山抱水深結構增固可 以永護儲胥云 乙未卽大明崇禎甲申後七十 二年也 都提調李頣命識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 숙종 37년 신묘년 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렸다. "백제의 옛 성을 개축한 뒤 각각 군영을 설치한 뒤 목적지에 군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준비하라. 국가가 변란을 맞아 다급할 때 장차 서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내린 이 요새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해 10월 성을 완축한 뒤 금위영을 설치했다. 용암(龍巖) 동남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 2,821보이고, 타(垜)는 1,065개다. 성문은 대동문(大東門)과 소동문(小東門) 둘인데 초루(譙樓)와 암문(暗門)을 설치했다. 시단봉(柴壇峯)에 장대를 짓고 그 아래 방옥(房屋) 10칸을 두니 성랑 61채에 모두 178칸이다.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巖寺), 태고사(太古寺) 네 절을 소속시켰다. 군대의 영사와 창고는 90여 칸으로 처음에는 소동문 안에 세웠는데, 지세가 높고 비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물길이 나서 무너지기 쉬워 을미년(1715년) 3월에 보국사 아래로 옮겼다. 초관 곽의빈(郭義賓)이 재력을 잘 관리하고, 파총 장우진(張友軫)이 공사를 잘 감독하여 8월에 완성하게 되었다. 돌계단 120보를 쌓고 중당은 부손(負巽:동남을 뒤로 함) 방향으로 지었는데, 중군 이하 거처할 곳과 창고, 행랑 등 모두 145칸이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 기록 ['금위영 유영지' 터] <이건비> 앞에서 등산로 우측으로 들어 가면.... ['금위영' 각자] 개울 건너편에 "禁衛營"이라는 刻字가 있다는데 찾지 못하고 참고 사진을 올립니다. ['금위영' 건물 축대] ['보국천'] ['누혈'] <금위영> 건물터 주변 석축과 <補國泉>이라는 약수터를 찾아 보고 석축에 튀어 나와 있는 엄청 큰 규모의 <누혈 漏穴 (배수구)>도 볼수 있었습니다. ['대동문' 갈림길 회귀] 1:02 <보국사터>와 <금위영터>를 둘러 보고 다시 <대동문 갈림길>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 오는데 40분 정도 걸렸군요. ['대동문' 오름길]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벌써 단풍이 지고 있었습니다. 완만한 오름길을 15분 정도 올라 가면..... ['북한산성'] 1:17 <북한산성>의 城郭을 만나는데 <금위영>을 옮기기 전까지는 이 근처에 <금위영>이 있었겠죠. ['대동문'] 1:18 "대동문 大東門"은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좌측에 있는 <시단봉>을 다녀 와 <대동문>으로 나갔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을 다녀 오기로 하고... ['시단봉' 오름길] <시단봉>으로 올라 갈 때엔 성곽을 따라 올라 가고, 내려 올땐 우회로를 이용하겠습니다. 어느 길이나 비슷비슷합니다만.... [산성] 성곽을 따라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4분여 올라 가면 ['동장대'] 1:32 "시단봉 柴丹峰 601m" "동장대 東將臺"는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한산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오는 곳에 위하고 있습니다. <금위영> 장수가 관할하며 산성 수비의 총괄 지휘를 하던 곳이어서 <숙종>은 이곳에도 올랐습니다. ['동장대'] 1:32 "동장대 東將臺" <숙종>이 올라 쓴 <숙종 御製詩 6수> 가운데 네번째 행을 음미해 보겠습니다.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등피동대약상천 천봉삭립접운연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구부비도불감근 원노역필수반연 동장대에 오르니 하늘 위에 오른 듯하고 천개 봉우리 깍아지른 듯 서서 구름에 접해있네. 도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긴 팔 원숭이도 기어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 ['삼각산' 조망] <동장대> 아래엔 현재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주변 조망이 나쁘더군요. 그래서 <백운대><만경대><인수봉> 방향 만 조망하고 [전망 안내도] . 남쪽 방향으로는 전망안내도가 있어 참고 합니다. <남장대지> 아래에 <행궁>이 보입니다. ['처녀 총각 바위'] 1:39 <동장대>에서 다시 <대동문>으로 내려 가는 길 바로 앞에는 좌측 성곽에 붙은 큰 바위 두개가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처녀 총각 바위"라고 부르더군요. ['대동문'] 1:48~1:51: 다시 "대동문 大東門"으로 돌아 왔습니다. ['대동문' 밖] 1:52 <대동문> 문 밖으로 나가면, 城에 포위 되 있던 갑갑함이 뻥 뚫리며 동북부 서울이 훤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서 <숙종>은 그의 <御製詩 6수> 가운데 다섯번째 행을 읊었습니다.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장위이선진반도 성동가출역기구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서행풍람다형승 황시청강흥불고 호위병이 이미 앞서 나아가 돌아가는 길에 늘어서 있고 성 동쪽으로 어가가 나가는데 역시 길이 험하다. 천천히 가면서 두루 살펴보니 뛰어난 경치가 많은데 더구나 맑은 물이 있어 흥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구나 ['진달래능선' 갈림길] 1:53 <대동문>에서 20m쯤 내려 가면 이정표가 있는 중요한 갈림길을 만납니다. 좌측 길은 <진달래능선>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가 <우이동>으로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구천게곡>을 경유해 <수유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아래에 편집한 <위성지도>를 보며 <숙종의 길>을 추정해 보면...... ['숙종의 길' 예상도] <숙종>은 <대동문>에서 "도성암 道成庵"으로 내려가 <우이동> → <수유리> → <미아리> → <한양도성>의 <혜화문(동소문)>을 통해 환궁 한것으로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도성암 道成庵"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세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신 할수 없는 것들이어서 학계에서도 추정만 할 뿐이더군요. 저의 생각으로는 <숙종>이 지도에 표기한 노란색 선을 따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거라고 확신이 들지만, 그 길은 전에 여러번 다닌바 있어 오늘은 가 보지 못한 <구천계곡>으로 내려 갔습니다. ['구천계곡' 내림길] 가을이 깊어 가는 "구천계곡 九天溪谷"은 처음으로 만납니다. <대동문>에서 하산 할때엔 거리로는 제일 짧은 거리지만 계곡이 가파르고 깊어 <숙종>은 이 길을 절대 이용 할수가 없었겠습니다. 왜냐 하면 <어가 御駕(임금이 타는 가마나 수레)>나 말은 도저히 통행이 불가능하겠더군요. 등산로가 발달해 있는 현재도 어려운데 300여년 전엔 더욱 불가능 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숙종>은 분명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께 분명해 보입니다. ['구천계곡 안전쉼터'] 2:13~2:25 <대동문>에서 급경사 내림길을 25여분 내려 가니 "구천계곡 안전쉼터"가 있더군요. [내림길] 처음 방문하는 <구천계곡>을 음미하며 하산합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 6수> 가운데 마지막 행을 보면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과찰도성봉탄로 풍애만목일장모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사여여림첨우모 포원개허가전소 <도성암>을 지나니 평탄한 길 나오고 바람과 먼지 눈에 가득한데 해는 저물어 가는구나. 사람들이 많아 나와 의장행렬 바라보고 원한을 품은 자 어가 앞에 나와 하소연하게 허락 하였도다 "도성암 道成庵"은 매우 유명하고 의미있는 절로 실록에 기록되 있답니다. <세종대왕>의 딸 <정희공주>가 창건한 절이서 더욱 유명하다는데 기록에만 남아 있고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만, 현재 여러 조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도성암>의 위치에 대한 세가지 설은 1. 강북구 인수동 산125번지에 있는 <본원정사>와 2. 강북구 우이동 산69번지에 이쓴 유명한 <도선사> 3. 강북구 우이동 2060-6에 있는 <선운각>이라고 하는데.... 완벽한 <숙종의 길>은 자료가 없어 하산길은 단순히 <중앙일보 안내도> 만 참고하여 다녀 왔습니다만 다녀와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가장 믿을 만한 단편소설이 있더군요. <숙종의 길> 중에 <도성암>에 대한 상세한 추정 글이어서 링크로 첨부 하오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산불장비함] 2:39 <구천게곡 안전쉼터>에서 급경사 내리림길을 다시 25분 가량 내려 가면 <산불방지 도구함>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이곳 좌측 아래가 유명한 "구천은폭포"가 있더군요. ['구천은폭포'] "구천은폭포"는 <구천계곡>의 랜드마크라고 하는데 가을이어서인지 폭포수는 볼수 없었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조망] 서울의 동북부인 <도봉구><노원구><중랑구>등이 <수락산-불암산> 아래 펼쳐 집니다. <백제 온조>는 이곳에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위례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름하여 "하북 위례성" 설이지요. 이곳에 있다가 "하남 위레성"으로 옮겼다고.... [급경사 계단] 다시 급경사 계단을 내려 가면.... ['송계별업' 터'] 2:47 [안내문] "송계별업 터"였다는 안내문과 <구천은폭포> 하단부가 반겨 줍니다. 27명의 조선 왕들 중에 제가 제일 싫어하는 왕인 <인조> 그의 아들은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그리고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있었죠. <인평대군>의 호가 <송계 松溪>인데, 이곳에 별장을 짓고 자신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풍류를 즐기며 詩畵를 남겼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구곡은폭포'] ['사릉 석물 채석장' 안내문] 또한 이곳은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가 죽고 난 다음 평민으로 강등 당했다가, <숙종>에 의해 다시 왕비로 복위 되면서 그의 무덤인 <사릉 思陵>을 축조하기 위한 石物을 채석한 채석장이었다고 ['아카데미하우스'] 2:59 짧은 거리지만 엄청 가파른 <구천계곡>을 벗어 나면 <아카데미하우스>를 만나며 ['구천계곡' 등산로 들날머리] ['아타데미하우스' 정문] 3:04 <아카데미하우스> 정문에서 <숙종의 길>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가서 지하철로 귀가 하였습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총 거리는 11.8km였으며, 5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팔도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3.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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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
     『덕흥대원군묘-도솔봉-용굴암-학림사』 


  ['산행 지도']                        .
  
  <당고개역>에서 <10-5번시내버스>를 타고 "덕릉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를 먼저 찾아 보고, "수락산 도솔봉"을 오르고, <도솔봉> 아래에 있는
  "용굴암"을 들려 "명성왕후 도피처"를 보며 역사를 뒤돌아 봅니다.
  그리고 "학림사"를 경유하여 <당고개역>으로 회귀하는 GPS 측정으로 약7km를 갑니다.
  



  ['덕능마을' 버스정류장]           11:04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
  <당고개역>에서 이곳으로 운랭하는 시내버스는 <10-5번>과 <86-1번> 뿐인데
  이 고개 아래로 <덕릉터널>이 뚫리고, <지하철 4호선>이 <진접>까지 연장되어
  이 고개를 넘는 시내버스는 완전 줄어 들어 1시간에 한대 꼴로 다니니 매우 불편했습니다.
  저는 <10-5번>을 오래 기다렸다가 타고 6~7분 걸려 <덕릉마을버스정류장>에 내렸습니다.
  바로 뒤돌아 서면.....



  ['덕능고개' 방향]                             
  버스를 타고 지나온 <덕릉고개> 방향으로 150m 정도 올라 갑니다.
  


  ['덕흥대원군묘' 입구]             11:07         . 
  <덕흥대원군묘>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나 50m 정도 들어 가면...
 


  ['하원군 신도비']                11:08      
  이렇게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위에 "하원군 이정 신도비"가 보입니다.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가면 바로 <덕흥대원군묘>로 갈수 있더군요)
  묘역 전체를 답사하려면 <하원군 신도비>로 올라 갔다가 우측으로 진행하면 되더군요.
  


  ['덕흥대원군 묘역']               11:11           .
  "경기도 기념물 제55호 덕흥대원군 묘역" 표지석이 있는데
  앞에 보이는 묘는 <하원군묘>이고 <덕흥대원군묘>는 <하원군묘> 위에 있습니다.
  


  ['하원군 묘']                11:12      .
  "하원군 이정 묘 河原君 李珵 墓"
  <덕흥대원군>은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하원군 이정>이며, 차남은 <하릉군 이인>이고
  막내가 <임진왜란> 때에 왕이었던 <하성군 이균> "14대 왕 선조"입니다.
  
  <하원군>의 부인은 <남양 홍씨>로 쌍분으로 조성되 있군요.



  ['덕흥대원군 신도비']               11:14        
  <하원군묘>에서 위로 조금 올라 가면 "덕흥대원군 신도비 德興大院君神道碑"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 대원군> 중에 <초대 大院君>으로 <14대 선조>의 아버지의 신도비입니다.
  
  <조선왕조 대원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면....



  [대원군 관련 가계도]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예우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죠.
  왜냐하면 모두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시험도 볼수 없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서자'가 왕위에 오른 후
  권위와 정통성을 억지로 만든 제도가 <대원군 제도>였던 것입니다.
  
  첫번째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며 이곳에 묘가 있습니다.
  두번째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었는데, 이 분은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추존 원종>으로 만들어 대원군이라는 대열에서 벗어 났는데, 그의 무덤이 요즘 시끄러운
           <김포시청> 뒤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문화재 문재가 불거진 "장릉"입니다.
  세번째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군>이며 <포천>에 무덤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답사기 <경기옛길-경흥길 4코스>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네번째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이죠. 
           너무 유명해 <대원군>은 이 분 한사람인 줄 아는 분들이 많죠. ㅎ
           <흥선대원군 묘>는 <남양주 마석역> 앞 건너편 동산에 묘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서리산-축령산 철죽과 흥선대원군묘 탐방기>를 참고 하세요.
           
  요약하면 <조선시대 대원군>은 네명이었는데 <인조의 아버지-정원군>이 추존왕이 되어
  결국 세명이 <대원군>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 <사도세자>도 왕이되지 못하고 죽은 <정조>의 아버지인데, <장조>로 추존되어 대원군 명단에는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세자>는 후궁에게서 태어 난게 아니라 정비에게서 태어나 대원군 얘기가
      없는 것이고...위의 대원군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대원군이라 합니다.
  


  ['덕흥대원군 묘']                  11:15

  [안내문]                    
  "덕흥대원군 이초 德興大院君 李岹"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을 두고 20명의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계도를 보면...
  

  ['중종'의 가계도]                      
  "덕흥군"은 윗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명의 자녀를 낳고 불행이도 고작 30세에 병으로 일찍 죽어서, 
  <인종><명종>이 아들을 못낳아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어부지리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아들 <선조>에 
  의해, 자기가 <대원군>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죠.
  


  [조망]                      
  <중종>의 서자 중에서도 최하위 정통성 없는 '서자'의 아들로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하성군 이균-선조>는 자기 아버지의 위상을 끌어 올리려고 엄청 수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리고 '서자' 출신 아버지의 아들인 <선조>는 컴플렉스가 쌓여 언제나 의심 많고 왕권 안위를 
  걱정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권위를 높여야 자기도 위상이 높아 지며 정통성이 생기니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의 '묘'부터 '왕의 묘'를 부를 때 쓰는 "릉 陵"으로 올려 부르도록
  술수를 썼다고 전해져 옮니다. 기록으로도 전해져 옮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건 아닌데도, 그 술수가 성공하여 "덕릉"으로 불리워지게 되었고, 
  이 고개의 이름도 "덕묘 德墓고개"가 아닌 '왕릉'을 칭하는 "덕릉 德陵고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술수를 알려 드리면....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아버지 <덕흥군>의 <묘 墓>를 <릉 陵>의 수준으로 높이고 싶었으나 
  신하들은 끝내 불가하다는 대답 뿐 이었답니다. <릉 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븥일수 있죠?
  <선조>는 할 수 없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고 대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믿을 만한 내시를 동문밖에 있는 가게로 내보내어, <별내면>에서 나무와 숯을 실은 수례를 끌고 오는 
  장사꾼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까지 왔느냐 물어서 그가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서 왔다”고 하면 
  장사를 못하게 돌려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서 왔다"고 하면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후한 값으로 쳐 모두 사들여 주도록 하였답니다. 
  이 소문은 한 사람 두 사람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불길처럼 퍼져 나갔겠지요. 
  그리하여 사방에서 나무와 숯을 끌고 온 장사꾼들이 모두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왔다고 떠들어 대니 
  정식으로 "릉 陵"이라 반포한 것보다 효과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저절로 이 묘소를 "덕릉 德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선조"를 효자라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에구~ 쪼다리라고 해야겠습니까 



  [등산로 입구]               11:17         
  <덕흥대원군묘>를 둘러 보고 <수락산> 등산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 봉분 바로 뒤에 이렇게 길이 뚫려 있더군요.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수락산>으로 올라 가려면 <덕릉마을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 가서
  <덕릉>의 원찰인 <흥국사>를 경유하여 진행해야 하는데, 많이 돌아야 해서 
  모르는 길이지만 지도를 보며 이 길로 진행 하는 것입니다.



  [일반 묘역]                     
  <덕흥대원군묘>에서 조금 올라 가면 아주 너른 묘지길을 만나며 이곳의 묘들은 일반인 묘들이더군요.
  너른 묘지길을 따라 7분여 올라 가면...



  [군부대]                11:24          
  군부대 철문을 만나는데, 지금부터 이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군부대 울타리]                      
  이 부대는 예비군 훈련장인데 10여분 이 울타리를 따라 계곡을 오르내리며 올라 가면...
  


  [군부대 울타리 끝지점]              11:34            
  군부대 울타리가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 가는 곳을 만나는데
  울타리에 여러개의 사진촬영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울타리를 버리고 직진하면....
  


  ['덕릉고개' 등산로 만남]                11:35          
  <덕릉고개>에서 올라 오는 일반등산로를 만나며 이정표도 만납니다.
  오늘이 가을의 정점을 이루는 좋은 날씨의 일요일이니 당연 등산객들도 많아 만나게 됩니다.
  
  이 길은 <서울시-경기도 경계>가 되며, 또한 <수락지맥 마루금>이기도 하죠.
  여기에 대해선 제가 예전에 쓴 산행기가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등산로]

  ['흥국사' 갈림길]                11:39              
  조금 올라 가면 "흥국사 갈림길"을 만납니다.
  "흥국사 興國寺"는 <덕흥대원군묘>의 원찰이 되는 절이죠.
  그러니까 <덕흥대원군묘>를 유지 관리하는 <묘지관리소> 역활을 하는 곳
    

 
  [오름길]                         
  제법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오름길을 15분여 오르면...
 


  [쉼터]                11:44~11:55        
  첫번째 쉼터를 만나는데 10여분 쉬어 가고
    
 
 
  [오름길]              
  다시 오름길을 7분여 더 오르면
  


  ['도솔봉' 조망]                12:02             
  조망이 트이는 쉼터봉우리에 올라 진행방향을 조망하고
  능선길 <수락지맥-서울市界>를 따라 앞에 보이는 <송전탑>으로 10여분 진행합니다.

 

  [송전탑]                12:12

  [오름길]                          
  <송전탑>을 지나 <372.6m봉>으로 올라 가면



  [조망소]              12:14~12:17      
  전망이 좋은 바위 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하고 갑니다.
  


  ['당고개' 방향 조망]            
  먼저 남쪽으로 <덕릉고개>와 <불암산>이 <수락지맥>으로 이어져 있고
  우측에는 <당고개역>이 있는 <상계동>이 펼쳐집니다.


                
  ['덕흥대원군묘' 방향 조망]                   
  고개를 돌려 약간 동남쪽을 바라보면
  출발지였던 <덕흥대원군묘> 부근이 조망되며, 
  <덕릉고개>엔 예비군훈련장이 있다는 것도 확인이 됩니다.
  


  ['남양주' 방향 조망]              
  동남쪽으로는 <별내신도시>가 펼쳐지며, <남양주시>를 감싸고 있는 <천마지맥>의 <천마산><백봉산>
  <예봉산>이  보입니다. <검단산>은 <한강> 건너편에 있고...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으로는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도솔봉 정상>으로 오르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5여분 오르면...



  ['도솔봉 정상' 갈림길]             12:51        
  <도솔봉 정상 갈림길>을 만납니다. 정상까지 170m 거리라고 알려 주는데
  오랜만에 왔으니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하고 좌측으로 4분여 올라 가면...
  


  ['도솔봉 정상']              12:55       
  "수락산 도솔봉 538.5m"에 도착합니다.
  <수락산>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죠.
 


  [조망]                    
  기암괴석들이 모여있는 <도솔봉>에서 남쪽을 조망하고
  


  [정상 갈림길 회귀]            12:58     
  정상 갈림길로 다시 회귀하여, 좌측으로 조금 가면...



  ['수락산역' 방향 갈림길]              12:5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도솔봉 삼거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직진방향은 <수락산 정상>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수락산역> 방향으로가는 길이라고 안내합니다.
  저는 오늘 <용굴암>을 찾아 가려고 하기에 좌측 <수락산역>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도솔봉 정상>을 우회하는 길이기도 한 가파른 내림길을 5분여 내려 가면...



  [조망소]           1:05       
  조망이 좋은 곳을 만나는데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한산' '도봉산' 조망]                   
  이제 <수락산>의 서쪽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 봉우리로 <三角山>이라 해던 <북한산>과 <도봉산>이 잘 보입니다.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도 잘 보이는데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코끼리바위>등이 잘 보이는군요.
  


  [뒤돌아 본 '도솔봉']                    
  뒤돌아 동쪽을 올려다 보면 조금전 <도솔봉 정상>이 보이고
  


  ['탱크바위']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탱크바위"가 있는데, 나무에 가려 전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잠시후 <용굴암>에서 다시 조망하고...
    

 
  [내림길]                       
  다시 내림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조망소]             1:16       
  또 다시 조망소를 지나고...
    


  ['용굴암' 갈림길]            1:17          
  이어서 이정표가 있는 "용굴암 갈림길"을 만납니다.
  여기서 많은 산객들이 이용하는 <수락산역 등산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내림길]                 
  <용굴암><당고개역> 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고,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 가면...
    
 

  ['관세음보살']                1:20          
  <용굴암>의 <관세음보살> 앞을 지나

 

  [내림길]   

  ['용굴암'과 '탱크바위' 조망]            1:21          
  내림길을 잠시 내려 가면 <용굴암>과 조금전 언급했던 <탱크바위>가 조망됩니다.



  ['용굴암' 입구]           1:22~1:28        
  오늘 <용굴암>을 찾아 온 이유는 <임오군란> 때에 <명성왕후>가 도피 했던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명성왕후>가 도피 한곳은 앞에 보이는 <대웅전> 좌측에 있는 <자연동굴>이었다고 예습하고 왔으니
  <대웅전> 좌측 <자연동굴>로 올라 갑니다.
  


  ['나한전']                 
  <명성왕후>가 도피해서 숨어 7일 치성을 드린 곳이 바로 이곳 <자연동굴>이었는데
  현재는 <나한전>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나한>은 <석가>의 제자들을 일컷죠.
 


  ['나한전' 내부]                    
  <명성왕후-민자영>은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필사적으로 도망쳐 숨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고...
  <명성왕후>는 <임오군란> 때에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고, 2년후 일어나는 <갑신정변> 때에
  또 도피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로부터 11년후 <을미사변> 때엔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암살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던 <명성왕후>....
  


  ['용굴암' 안내문]                        
  <용굴암 안내문>에는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황후께서 잠깐 숨어 있었던 곳"으로 알리고 있는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쓴 이런 안내문이 공공연하게 설치 되 있는데도 수정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제가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명성왕후>가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나 이곳으로 도피 한게 절대 아닙니다.
  <임오군란>이 일어 나기 훨신 전에 <명성왕후>와 <고종>은 <대원군>을 정권에서 완전 밀어내
  거의 감금 상태에 있어서 <명성왕후>를 밀어 낼 힘도 없었고 그럴 처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성왕후>와 <민씨외척세력>들의 부정부패로 1년 이상 봉급을 못 받은 구식군대들에게 
  13개월 만에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를 섞어 주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봉기하여 
  <민씨외척세력>들을 죽이며 최고 정점에 있던 <명성왕후>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던 때가 아니라 <명성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때 <임오군란>을 진화시키기 위해 <고종>이 자기 아버지 <대원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화 시켰죠. 그리하여 다시 <대원군>의 시대가 되었으나......
  <고종>과 <명성왕후>는 <청나라>를 끌어 들여 33일만에 <대원군>을 무너 뜨리고 재집권하게 되었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 가고...그 후 우리나라는 쪽바리들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죠.
  그러니 위 안내문은 잘못된 안내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용굴암'에서 조망]           
  <임오군란>과 <명성왕후>의 도피에 대해선 
  지난 <경기둘레길 37코스 명성왕후의 도피처-감곡매괴성당> 답사기에 언급 한바 있는데 
  다시 한번더 언급하면....

  <순조><철종> 때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 보다 더 추악한 부정부패가 성행했던
  "민씨 외척 세도정치 시대"의 정점에 <고종>과 <명성왕후>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선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성과 민란,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 세계 열강들이 <조선>을 잡아 먹을려고 어러렁거리는데 
  힘쎈 외국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정치자금이 필요 했던 <명성왕후 민자영>은
  자신의 <민씨 외척 세력들>을 이용하여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정축제에 여념이 없었으니
  터질게 터진 게 바로 <임오군란>이었죠.
  <창덕궁>으로 총을 쏘며 들이 닥치는 구식군대들은 <민씨세력>의 우두머리인 <민태호>를 죽이고
  <명성왕후 민자영>을 죽이기 위해 <창덕궁>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녔죠.
  
  "36계의 여왕-민자영"은 먼저 현재의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자리 근처에 있던 <윤태준>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바로 <수락산 용굴암>으로 도피하여 며칠을 숨어 지내며 부처님에게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현재 <화양동사무소>가 있는 <화양정>을 통과하여 <광나루>로 가서 뱃싹이 없어 자신의 금반지를
  주고 <한강>을 건너 <여주 민영휘>의 집으로 도피하고, 다시  <장호원(감곡)>에 있는
  자신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아흔아홉칸 대궐같은 집으로 갔지요. 
  이런 집은 도피하는 <명성왕후>에겐 좋은 도피처가 아니죠.
  그래서 <명성왕후>는 한 곳에 오래 머룰지 않았다는게 최근 발굴된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광주 치적리>에 있는 <임천구수 이근영>의 집으로 갔다가 <여주 단감 권삼주>의 집으로
  옮기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충주 노은 이시일>의 집으로 옮겨 일주일 정도 기거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다시 <지평 섬실(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의 한정옥>의 집으로 옮기고
  열흘 정도 머룰다가 다시 이곳 근처 <오봉학>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현 <감곡 매산마을>의 <민응식>의 집과 주변 집들에 머물 때에 그 유명한 "진령군-박창렬"이라는 
  이름도 남자 이름같은 여자 무속인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지는데 <삼국지>의 <관우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점쟁이였습니다.이 부분은 별도로 언급 하겠습니다.
  또한 <명성왕후-민자영>은 도피 기간 중에 인후염, 부종, 말라리아에 걸려 엄청 고생하며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일기에 나와 있습니다만, 역경을 이겨 내고 "불사조"처럼 금의환궁 하게 되죠.
  
  <명성왕후>에게 도피처를 마련해준 인물들은 후에 승승장구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윤태준>은 <명성왕후>의 <청나라 밀사>가 되어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여 <대원군>을 몰아 내는데
  공을 세워 <명성왕후>가 환궁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때에 반군들의 칼과 철퇴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으며, <민응식>도 그 후 <고금도>로 유배당하고...

  <명성왕후>의 51일간의 피난생활>은 다음을 참고 하세요.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여기 클릭 
  


  ['소원의 종']              
  <용굴암> 앞 우측에는 <소원의 종>이라는 범종이 있는데 타종을 하는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화장실]          1:28        
  <용굴암>을 나서면 화장실이 있는데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삼거리]              1:37~1:47         
  <용굴암>에서 10여분 평지성 길을 진행하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학림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학림사 등산로>는 잘 조성되 있더군요.
  17분 정도 내려 가면...
  


  ['학림사' 담장]                 2:04

  ['학림사' 내부 조망]                

  ['학림사 연혁' 안내문]                       
  "학림사 鶴林寺"를 만나는데 매우 큰 사찰이더군요.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학림사 일주문' 앞']             2:06     
  "학림사 鶴林寺" 일주문 앞에서 뒤돌아 본 <용굴암 가는 길>입니다.
  <명성왕후>는 이 길을 따라 <용굴암>으로 도피 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명성왕후>는 다리에 부종이 생기고, 인후염까지 있어 건강상태가 매우 안좋았다는데
  살기 위해선 당시엔 등산로도 없었을 이 험한 수락산을 죽기살기로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당시 그녀의 나이가 고작 31세 였는데....
    


  ['학림사' 입구]              2:07   
 <학림사>에서 <당고개역>까지는 포장도로였습니다.
 조금 내려 가면...
   


  ['서울둘레길1코스']              2:10       
  <서울둘레길 1코스>가 잠시 지나는 곳을 만나고....
    


  ['상계동']                 2:23   
  20여분 정도 더 내려 가면 <당고개역>에 도착하고....... 산행을 마침니다.
  


  ['고도표']                     
  거리는 약7km로 3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산행이라기 보단 역사탐방이었습니다.

 
 ★ 부록 ★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3> 충주 백운암 여기 클릭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예천 금당실 솔숲에 숨은 근대사의 비밀 여기 클릭 
서울市界 종주기 2코스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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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      


  ['북한지 1페이지']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조시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승려 <성능(性能)>이 
  <북한산성>에 대해 기록한 책을 1745년에 목판본으로 편찬한 책이 "북한지 北漢誌"랍니다.
  <북한산성>의 역사와 규모등을 망라하는 그야말로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이번엔 <북한지>에 나타나는 중요 지점을 중심으로 답사 겸 산행을 하려 합니다.
['북한도1'] ['북한도2'] ['북한도3']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그 첫번째 답사로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 <중성문>을 통과하여 <노적사>와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보고, <산영루>와 최근 복원 했다는 <중흥사>까지 갑니다. 거리는 짧지만 5시간 이상 걸리는 답사코스였습니다. 이제 떠나 볼까요? ^*^ ['북한산성 입구'] 2022년 1월 12일 (수) 맑음 2022년도 첫 산행 겸 답사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합니다. <북한산> 품안으로 들어 가는 입구엔 <원효봉>과 <의상봉>이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듯 합니다. ['북한산성 안내소'] <북한산국립공원>은 1985년도에 우리나라 열다섯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여의도> 면적의 26.5배가 되는 77㎢ 면적이라고 하죠? 년간 탐방객수가 천만이 넘는다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대표 건강생활공원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계곡길'과 '차도'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조금 올라 가면 <계곡등산로>와 <도로 등산로>가 나뉘는 곳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자연과 함께 걷는 <계곡길>을 주로 이용하지만, 오늘 저는 옛날 <숙종>이 행차했던 길의 흔적을 따라가기 위해 도로를 이용하여 <대서문>으로 갑니다 도로가 <옛 숙종의 길>을 확장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로] <1712년 4월 10일> <숙종 행차>를 앞두고 <대서문 길>을 정비했다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오솔길 수준이었답니다. 지금처럼 넓찍한 길이 난 것은 1958년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서문>을 찾을 때였다고 하네요. <숙종실록-숙종38년 4월 10일>의 기록을 살펴 보면 "上幸北漢。 早發由西郊, 至北漢。 自西門入, 歷覽水門, 仍欲登小釋迦峴, 周覽城內外, 以路險不治, 只上柴丹峰"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柴丹峰)까지만 올랐다." <소석가현(小釋迦峴)>은 현재의 <백운대>를 의미하는 듯 합니다. 정확치 않지만... 그러니까 <백운대>에 오를려고 했으나 어려워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까지만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는 행차 경로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에는 좀 더 세밀하게 행차 경로가 기술되 있는데 잠시 후 알아 보겠습니다. ['용암사'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용암사> 입구를 만나며 길 좌측엔 <자연보호헌장 탑>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쓸쓸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연보호헌장'] 자연보호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에 전국 곳곳에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큰 규모랍니다. <유신체재>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때 였군요. 높이 5m로 <롯데제과>가 건립비용을 내고, 당시 세종대 교수이던 <서희환씨>가 글을 썻다고... 요즘 더욱 자연보호 운동을 해야하지 않나요? [도로] <자연보호훈장탑>을 지나면 <대서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는 총6수로 되있는데 하나하나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 첫행을 먼저 살펴 보면...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계심음양행신성 효출남문고각명 효기수천분호필 풍훈일영속주명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을 거울삼아 전쟁에 대비한 심오한 계획으로 새로 세운 성을 시찰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남대문을 나서니 군악대의 북과 호각소리 울려 퍼지네 날랜 기병 수천이 나뉘어서 길을 내며 앞뒤로 따르는데 훈훈한 바람까지 불며 해가 길어지니 마침 여름이 다가 오는구나. 한자 실력이 좀 부족한 <파란문>이 나름 해석 한 것이나 이해하기 쉽게 나름 풀이해 해석했으니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그러려니 생각해 주세요. <숙종>이 <한양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서대문>으로 나가면 더 가까울 텐데 궂이 <남대문>으로 나간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요? 당시 정치상황을 이해해야 어느정도 추측 할수 있겠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왕권이 약화된 <숙종>은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등으로 당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데, 왕권은 다소 강화되었지만 오히려 당파싸움은 더욱 격화되어 나라가 더욱 시끄러웠씁니다. 그래서 <숙종>은 정치적 상황 전환이 필요하던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숙종>이 <북한산성> 건설이라는 큰일을 온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며 왕권은 건재하고,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한듯 합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왕이 백성들과 좀더 가까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 규모의 행사를 펼치며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대서문'] "대서문 大西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16개 城門 중에 가장 큰 규모랍니다. "숙종 어제시 御製詩"의 두번째 행을 읽어 보면....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서문초입일회두 기장심웅사아우 국도지척금탕고 하기오민수한주 대서문 바로 앞에 도착하여 머리 들어 둘러 보니 장대한 기상과 웅대한 마음이 솟아 나의 근심 사라지네 한양성 가까이에 이렇게 견고한 금성탕지 같은 성이 있으니 내 어찌 나의 백성 수호하지 않고 한양을 버리랴 두번째 행에서는 <대서문>에 도착하여 <북한산성> 완공에 뿌듯함을 표현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 城을 축성한 이유가 자기가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라고 하는듯...
[1900년대초 '대서문']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뎅 (Frandin)>이 1902년에 촬영하여 1905년에 펴낸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서문>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시대> 이전으로 나무들이 무성하며 사람들의 왕래도 많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 '대서문'] <일제강점기시대>로 들어 가며 우리 산하는 황폐화 되기 시작했답니다. 땔감 부족으로 <북한산>은 무분별한 벌목이 시작되어 민둥산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쪽바리들을 씹지 않을수 없는 이유는 이 사진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은 오솔길 수준으로 좁았다는 것도 알수 있는데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선 당연한거죠. <숙종>이 행차하며 올랐을 때의 길 모습을 연상해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대서문> 앞에 선 <이승만 대통령>" 현재의 <大西門>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랍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구한말 과거에 11번 도전한 한학도 였습니다만 모두 낙방했죠. 그리고 신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운 좋게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미군정과 가까워지게 되고... 영어를 잘하게 되었으니... 현판에 찍혀 있는 <낙관(落款)>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 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라고 젹혀 있는데 <우남 雩南>은 이승만대통령 호이고 뒤의 <印信>은 <도장>이라는 뜻이고 끝에 있는 <長壽>는 이 현판을 만든 사람이 대통령의 장수를 비는 것이니 '아첨'하는거죠 <두인 頭印>에는 "天地爲師 천지위사"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라는 뜻. ['대서문 문루'] <대서문 문루>는 일제강점기 말에 홰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신도면사무소'를 짓는 자재로 쓴다며 문루가 헐렸다고 하며 그나마 해방 후 <6.25전쟁>으로 완전 사라졌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당해 <북한산 상운사>에 숨어 도피생활을 해서 <북한산>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답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산>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부랴부랴 중수를 했으며 길도 불도져 등 건설 장비를 동원하여 넓히며 신작로를 냈답니다. 현재 문루 안에는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1958년에 쓴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습니다. <대서문>을 복원한 내력이 장황하게 적혀있는데 몇 부분만 읽어보면 ... "우리 민족의 영도자이신 이대통령각하의 민족문화재 보수보전의 뜻을 받들어 문루를 복원하였다" "공사기간은 5개월. 비용은 총 698만환이 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누혈'] "누혈 漏穴"... 요즘 말로 <배수구>입니다. 이 <누혈>은 홰손되지 않고 오리지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인데 배수 목적 보다도 <대서문>의 위용을 뽐내는 장식품으로 느껴지는군요. ['근총안'] "근총안 近銃眼"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쏘기 위한 총구멍을 <근총안>이라 한다는데 <평여장>에 하나씩 뚫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근총안>은 <북한산성>에만 있다고 합니다. ['수문' 방향] <북한산성> 안에 흐르는 <북한천>에는 <水門>이 두군데 있었는데 이곳 <대서문> 아래와 <중성문> 옆에 있었었답니다.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내려가 <수문>을 둘러 보고 올라 왔다고 기록에 남아 있더군요. 저는 다음번에 별도로 <수문>과 <서안사> <민지암>등 계곡 주변을 탐방하겠습니다. ['대서문'에서 조망] 이제부터 <북한산성> 안으로 들어 갑니다. 예전엔 이 주변이 온통 가게나 유락시설로 가득했었습니다만 지금은 맑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510m 높이의 <원효봉>과 835.6m의 <백운대>가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이 주변의 1980년대 옛 사진을 보여 드리면 ['대서문' 안 1986년 사진] 출처:경기문화재연구원
[옛 '별미원'] <대서문>을 지나면 기와집 한옥이 하나 아직도 남아 있는데 <별미원>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집입니다. 보존 가치가 있는 한옥이어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고... [옛 '북한산성 버스종점'] <옛 별미원>을 지나면 바로 추억의 <북한산 버스종점>이 유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저도 옛날 청춘시절에 <백운대> 산행 후 하산 할때 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세월 빠릅니다. ['석장승'] 버스정류장과 화장실을 지나면 <석장승>이 있는데 <도의원>을 지낸 <문기수>라는 사람이 세운 것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잠시후엔 이 분이 세운 <석불>도 곧 만나게 됩니다. ['무량사' 앞] <석장승>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무량사>가 나타납니다.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無量寺"는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이 없는 절이지만 잠시 올라 가 봅니다. ['무량사 약사전'과 '대웅전'] ['범종'] "무량사 無量寺"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상궁>으로 유명한 <엄귀비>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인 "영친왕"을 낳았다고 유명해진 절간입니다.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해 우리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엄상궁>은 다섯살에 궁녀로 들어가 일평생을 궁에서 보냈는데, 특히 <명성왕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을 때, 내전에 왔다 갔다 하던 <고종>의 눈에 들어 짝짜쿵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명성왕후>가 <엄상궁>을 궐 밖으로 내쫒기도 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입궐하여 <고종> 곁에서 실제 황후가 되고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된 여인이죠. ['아미타사' 조망] <무량사>에서 건너편 <원효봉> 아래에 있는 <아미타사>를 조망하고 ['무량사'에서 조망] 햐 ~~ <무량사>에서 조망하는 <북한산>은 그 어느 곳보다 색다릅니다. 특히 <기린봉>과 <시단봉>의 조망이 최고라고 생각됩니다. <기린봉>에는 <북한산성>의 "북장대 北將臺"가 있던 곳인데 출입금지 지역이라 오를수 없습니다. 또한 <시단봉>에는 <북한산성>의 "동장대 東將臺"가 복원되 있는데 <북한산성>의 방어체계를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 이곳 <무량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창마을 (북한동)' 앞] "북한동 하창마을 北漢山 下倉址" 이곳이 <북한산성>의 곡식창고인 <下倉>이 있던 곳이라고 <北漢誌>에 나와 있습니다. ['북한동역사관']
[옛 '만석정']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 <하창마을-북한동>은 음식점들이 여러곳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북한동역사관> 자리엔 <만석정>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자리이죠. <만석정>은 산성입구로 옮겨 영업을 계속하고 있더군요. [2006년 3월 이전까지 '하창마을'광경] [철거 반대 시위] <백운대등산코스>와 <대남문방향 등산코스>가 만나는 곳이어서 등산객들이 몰리는 곳이니.... 여기서 음식이나 술을 사 마시면 버스 타는 곳까지 봉고로 태워다 주며 지친 등산객들을 유혹했죠. ['새마을교'] <北漢誌>에는 이곳에서 <행궁>까지의 <북한천>에 다리가 다섯개 있었다고 표기해 놨습니다. 봉황교(鳳凰橋) 청운교(靑雲橋) 강선교(降仙橋) 환선교(喚仙橋) 언룡교(偃龍橋) 지금은 이곳의 다리를 <새마을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만 정확치는 않지만 이곳엔 "봉황교 鳳凰橋"라는 다리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창' 삼거리] <봉황교>라고 생각되는 <새마을교>를 지나면 <백운대방향>과 <대남문방향>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있는데, <숙종의 길>은 우측 <대남문방향>으로 갑니다만, 좌측에 있는 <보리사>를 잠깐 다녀 가겠습니다. ['북한산 향나무'] <새마을교> 옆에는 <북한산 향나무>가 있는데 매우 특이한 향나무입니다. <향나무>는 일반적으로 하늘로 곧게 뻗지 않고 줄기가 심하게 굴곡을 가지며 여러 갈래로 자라지만 이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이 특이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 있는 <제기동>의 <선농단 향나무>와 비슷합니다. ['보리사'] "보리사" 이 절은 아주 조그마한 절이며 <북한산성> 축성과도 관련이 없는 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절은 1957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58년에 완공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대서문>에서 언급했던 <이승만대통령>의 <북한산 방문>에 발 맞추어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대서문>을 중수 하면서 이곳에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승만대통령 별장>을 지어 올렸는데 아부도 보통 아부가 아니지요? 어용 도지사의 진면목를 보여준 건물이라서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유당> 독재시절이니 망정이지 요즘 같으면 국고 낭비로 감옥 갈 일이잖아요.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형인 "김종소(金鍾韶)"씨가 삿는지 어쨋는지 소유하게 되고 그가 별장으로 쓰다가 <보리사>라는 이름의 절로 만들었답니다. 2001년 4월 7일에 별세한 <김종소>씨의 신문 부고란을 보면 <보리사 창건주>라고 명기돼 있더군요 ['등운각'] 사진출처:공유마당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보리사>는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름의 <이승만대통령 별장>이었습니다. <5.16군사쿠데타> 그후 <김종필>의 형인 <김종소>씨 소유가 되었지만... 이런 사실 알고 <북한산> 등산 다니셨나요? ㅎ 또한 <대서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이승만대통령>은 <북한산>을 매우 좋아 했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 <북한산 상운사>로 도피하여 숨어 지냈고 또한 그의 어머니가 <대남문> 근처 <문수사>에서 백일 기도를 해서 태어 났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파주 용미리 용암사>에도 그의 탄생설화가 있습니다.
['파주 용미리 용암사의 '쌍미륵불'] ['동자상'과 '칠층석탑'] 2013년 10월 22일 <파주 용암사>에서 촬영한 사진 [설명문]
이 사진은 제가 2013년 10월 22일 <오두지맥>을 종주하며 촬영한 사진인데 사진 속의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설화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었던 <유영익씨>가 하늘로 모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 <용암사 쌍미륵불>에게 득남 발원 기도로 부터 탄생되었다는 설. ㅎㅎ <이 대통령>은 아버지 <이경선>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로 부터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 났죠. 형 둘이 어려서 천연두로 일찍 죽어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답니다. 이 산 저 산 돌아 다니지 않으면 알수 없는 사실들을 이렇게 돌아 다니며 알게 되는거죠. <이승만대통령>은 <박승선>이라는 분과 결혼을 해 아들을 한명 낳았는데 <이봉수>라고 하죠 그런데 그는 일찍 병사하고 말았답니다. 자식복도 없으셔...또한 본처와 이혼도 하고 아시다시피 <프란체스카여사>와 재혼을 했는데 후사가 없었죠. 그래서 83세에 아들을 한명 두기로 한게 <이기붕의 아들-이강석> 양자였습니다. <이강석>은 권총자살하고.... ['대남문 방향 북한천길'] <보리사>를 둘러 보고 다시 <대남문 방향>의 <북한천>을 따라 올라 갑니다.
['북한도2'] ['국토지리원 지도'에 실트랙 표기]
이곳부터 <중흥사>까지 <北漢圖>와 제가 실제 걸은 <국토지리원 지도>를 비교 하며 올라 갑니다. <도총섭 성능 스님>이 지형지물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렸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석불] <새마을교>에서 조금 올라 가면 길가에서 <석불>을 하나 만나는데 조금 전 <대서문> 안에 있었던 <북한산버스종점> 근처의 <석장승>을 세운 <도의원 문기수씨>가 이곳에 <석불>을 추가로 세웠다는 것을 알수 있고.... [오름길] ['선봉사']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름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선봉사>라는 절을 지나며 이 절도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 없는 절이라 그냥 패스합니다. ['거북암'] 이어서 <거북암>이라는 오래된 집을 만나는데 자판기는 아직도 있군요. ['범용사' 앞 삼거리] 계속해서 <범용사>라는 절 앞에서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곳이 <北漢誌>에 나오는 "청운교 靑雲橋"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범용사>도 <북한산성> 축성과 관련없는 절이어서 그냥 지나 갑니다. 단지,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북한산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녕사"가 있는데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주변을 수비하며 관리하던 절이었답니다. 이런 절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 하죠. [쉼터] <옛 청운교> 위에는 쉼터가 조성되 있어서 <숙종>도 이곳에서 좀 쉬어 갔으리라 ['북한천'] <범용사>앞 쉼터에서 부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집니다. 7분 정도 오르면.... ['중성문' 앞 바위 각자] <중성문> 앞에 도착하는데, 큰 바위에 뭔가 글자가 있었던거 같은데 지워지고 뭔 글자인지 알수 없고... 이런게 여러곳에 있더군요. ['중성문'과 '시구문'] ['시구문'] "중성문 中城門""시구문 屍口門"이 나타 납니다. ['중성문' 정면] ['중성문' 측면에서 조망] "중성문 中城門" <숙종>이 이곳에 왔었었을 땐 이 門은 없었습니다. <북한산성>의 서쪽이 낮아 적의 침입이 쉬우니 이곳에 다시 內城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숙종실록 1712년 4월 10일자>를 보면 "上以西門邊最低, 重城不可不築, 命斯速議築.上引諸臣論形便."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근총안'] "중성문 中城門"은 1998년에 복원되었답니다. 그리고 현판은 당시 <고양시장>이였던 <신동영>이라는 분이 썻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양시>가 복원공사를 했다는거겠죠. ['증취봉' 방향 조망] <의상능선>의 <증취봉>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성곽을 조망하고
['시구문' '수문' 방향 조망] ['水門'이 있던 곳] ['수문' 흔적]
북쪽 <기린봉> 방향 성곽 바로 아래에 <북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수문 水門"이 있었었답니다.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어 없어 졌는데 그 흔적만 남아 있고 ['행궁' 방향 조망] <중성문> 안으로 들어 갑니다. 지금부터 <북한산성>의 주요 시설들이 모두 있는 "山城 속의 山城" 지역이 되겠습니다. 조금만 올라 가면.... ['노적사' 입구 갈림길] "노적사 입구"를 만납니다. <노적사>는 매우 중요했던 <승영사찰 僧營寺刹>인 "진국사 眞國寺"여서 다녀 오기로 합니다. 또한 매우 중요한 軍營인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가 <노적사> 근처에 있어 반드시 돌아 보고 와야겠습니다. ['노적사 (옛 진국사)' 안내석] <北漢誌>에는 <북한산성> 안에 13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두었다고 표기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진국사 眞國寺"가 있는데 현재 <노적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오름길]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노적사'] ['노적사 보임루'] <노적사> 정문이 있는 <보임루>라는 건물을 통과합니다. ['노적봉' 조망] <보임루>를 통과하면 <노적봉>이 열열한 환영을 하는데 <北漢誌>에는 "진국사 眞國寺"가 <노적봉 露積峯> 아래에 85칸으로 승려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국사 眞國寺"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노적사 대웅전'] ['석사자상' 안내문] <대웅전> 앞에는 "석사자상"이 있는데 유일한 향토문화재라고 합니다. 익살스런 사자 모양이라네요, 사자 궁둥이가 토실토실...^*^ ['진신사리탑'] [안내문] 부처 진신사리 기증 증명서까지 설치한 사리탑이 있고 ['나한전'과 약수터] <나한전> 아래엔 약수터가 두곳 있는데 우측 <감로수>는 법당 헌공수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하고 좌측 <생명수>는 일반인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라고 하네요. ㅎ ['훈련도감 유영지' 가는 길] ★ 길조심 ★ <노적사>에서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가는게 어려웠습니다. <노적사 보임루> 앞으로 나와 우측을 바라보면 <출입제한지역 표지판>이 보입니다. 저곳으로 가면.... [출입제한 지역] <추락위험 출입제한지역>이라고 겁을 줍니다. <노적봉 암벽등반>을 하려는 산객들에게 하는 경고이니 <훈련도감유영지>를 가려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고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한>과 <금지>는 의미가 완전 다르죠? 나무 울타리를 밀면 열리도록 되 있더군요. 우측은 <노적봉 암벽>으로 가는 길이니.... <훈련도감유영지>는 울타리를 밀고 들어가 좌측으로 가야 합니다. ['훈련도감유영지' 간는 길] 처음엔 길이 선명하고 넓어 별 생각없이 두리번 거리며 진행하는데 길의 형태가 없어지며 개울을 하나 건너 가게 되더군요 ['훈국 유영지 흔적'] 개울을 건너면 바로 집터가 있었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는 흔적이 나타나며.... ['누혈'] 이어서 엄청 큰 규모의 축대가 나타나며 축대엔 "누혈 漏穴-하수구"가 보이며 아곳이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라는 것을 알수 있더군요. 이 축대 우측으로 올라 가면.... ['우물']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 <유영 留營>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파견부대"라는 의미이니 <한양>에 있는 "훈련도감 본부 訓鍊都監 本府"에서 파견한 부대가 되겠죠. <北漢誌>에는 이곳에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십여명의 정규군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전시에는 물론 많은 군인들이 오겠지만.. 산속에서 군대가 주둔하려면 우물이 없어서는 절대 않되겠죠. 그래서 <북한산성> 안에 많은 우물이 있다고 <북한지>에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주 큰 규모 앞으로 탐방하겠으나 미리 알아보면 정규군은 <북한산성>에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파견한 부대도 있었답니다. ['戊'] ['무법대 戊法臺'] <우물> 우측에는 "무 戊"라는 글자와 "무법대 戊法臺"라는 글이 세겨진 바위가 있더군요. "무 戊"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창"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이곳에서 <창검술>을 연마하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법대 戊法臺"는 창검술을 지휘 감독하던 곳으로 여겨지고.... ['무법대'에서 '우물 방향 조망] "무법대 戊法臺"에서 <우물>이 있는 <훈련도감 유영지> 방향을 바라보니 전쟁이 발발하면 더 많은 군인들이 합류하여 거주 할수 있도록 설계된듯 합니다. 이곳 병기고에는 조총 3,000자루, 중총 17정, 수철대포(水鐵大砲) 19좌, 목모포(木母砲) 40좌, 철자포(鐵字砲) 40좌등등 있었고 화약 24,929근 8냥, 연환(鉛丸) 503,100개, 수철환(水鐵丸) 4,538개 등을 보유하고 있었답니다. 어마무시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죠? ['훈련도감유영지'에서 '의상능선' 조망] <훈련도감 유영지>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건너편 <의상능선>에 안겨 있는 <행궁>이 있는 가운데 <백운계곡>을 내려다 보고.... "북장대 北將臺"는 여기서 뒤로 가까운 <기린봉>에 있는데 출입금지구역이라 다음에 <상운사>쪽에서 올라 가기로 하고..... 다시 <노적사>로 돌아 가는데 내려 가는 길을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올라 갈때 내려 올때를 생각하며 올라 가야 내려 오기 쉬운데, 길 흔적이 워낙 없고 잔설까지 계곡에 쌓여 있어 고생 좀 했으니 후답자들은 참고하기 바람니다. ['노적사' 회귀] 다시 <노적사>로 돌아와서 <보임루>로 가면... ['노적사' 앞] 올라왔던 길이 좌측으로도 연결되고 있더군요. 좌측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지 잠시 후에 알게 되고, 저는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갑니다. ['진국교'] 다시 <노적사> 입구 다리로 내려가 <대남문> 방향 주등산로를 따라 아주 조금 올라가면 "진국교 眞國橋"를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강선교 降仙橋"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국교> 자리엔 옛날 <강선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었다고 생각됩니다. ['노적사' 출입구] <진국교>를 지나면 다시 <노적사 입구>를 만나는데 조금전 <노적사 보임루> 앞에서 좌측으로 연결된 길이 이곳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고 [바위 각자] 이어서 큰 바위에 뭔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는 바위를 또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백운동문 白雲洞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데 못 찾고 지나가서 다음번 답사 때 다시 찾아 봐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곡은 "백운동 白雲洞" 계곡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부왕동 암문' 갈림길] 이어서 "부왕동 암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환선교 喚仙橋"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산영루>를 조망하고 올라 가는게 좋습니다. 우측 북한천 계곡으로 조금 들어 가면... ['산영루' 조망] <북한산성>에서 최고의 경치를 제공해 준다는 "산영루 山映樓"가 조망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영루>가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룬다고, 외국인들까지 이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산영루'와 '어제시각' 옛 사진] ['어제시각' 옛 사진]
<숙종>이 행차하면서 쓴 <어제시 御製詩>를 비석에 새겨 보관한 "어제시각 御製詩閣"이 <산영루> 건너편에 분명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 찾기 조차 어렵답니다. <어제시비 御製詩碑>는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없어 졌지만 그 글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제가 관련 장소를 탐방하며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북한산성 입구에서 음미 했음>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중성문에서 음미했음>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행궁에 가서 음미 하겠음>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동장대에 올라 음미 예정>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대동문>에서 음미해 보겠음>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어딘지 모르던 도성암터가 현재 발굴 중에 있는데 4.19묘역 근처에 가서 음미해 보겠음>
[독일인 엘러(Otto E. Ehlers)가 촬영한 1892년의 사진인 "산영루"] [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인 베버(Nobert Weber)가 찍은 "산영루"]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된 사진만 남아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사진기가 없었으니...ㅉㅉ 가운데 <산영루> 뒤로 솟아 있는 <시단봉>의 <동장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산영루'와 '용학사' 조망] 다시 주등산로로 올라와 조금 올라 가면 좌측에 <용학사>가 조금 보이고 우측엔 <산영루>가 보입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산영루> 앞에는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이 있습니다. 안내판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북한승도절목'] "북한승도절목 北漢僧徒節目" 인간이 가는 곳엔 특히 계급 사회에선 부정부패가 있기 마련이어서 이곳에 부임하는 승병대장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승병대장인 <총섭>이 지켜야할 규칙을 새겨 놓았다는데 기록에서 간추려 보면 "북한산성은 국가를 보호할 중요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최근에 승도가 없어지고 사찰이 피폐하여 조석으로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승도를 뽑을 때 공평하게 뽑고 비리가 없도록 하라" 대충 이런 내용이라고... ['산영루'] "산영루 山映樓"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느끼듯 <북한산성> 최고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건립되었다고 수많은 관리들과 시인 묵객들이 다녀 가며 많은 아름다운 글들을 남겼습니다. 유람지 역활 뿐 아니라 승병대장인 <총섭>이 회의를 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총섭>을 찾아 오는 손님들을 맞이 하고 대접을 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詩]
대표적인 詩 중에 하나가 <추사 김정희>의 詩랍니다. 뿐만 아니라 <미수 허목>, <송상기>, <성호 이익>,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유광천>, <이덕무>, <이옥>, <다산 정약용>, <이계서>, <신기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들이 글을 남겼답니다
['선정비군 현황도']
<경기도문화원>이 발굴조사한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 현황도입니다. 관심 있거나 아시는 분들 있나요? 저는 관심있는 몇 사람의 선정비를 찾아 봤습니다. ['김문근'과 '민겸호' 선정비] ['민영준' 선정비] 눈에 띄는 인물은 구한말 세도정치의 핵심들의 이름이 여럿 있었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세력>이었던 <김병기><김문근>등등등.... <민씨 세도가>의 대표주자들 중에 대표격인 <민겸호>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등등.... 이들이 이 산골짜기에서 근무한게 아니라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한양본부 수장이었기에 파견부대가 있던 이곳에도 공덕비를 세웠을 것입니다.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위치] <북한산성> 축성을 총지휘한 승려 "성능""영세불망비"도 있다고 해서 꼭 가보려고 했는데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으며 글도 알아 보기 어렵게 마모되 있어 더욱 찾기 어려웠으나 고생 고생하며 기어이 찾아 봤습니다. 앞으로 가실 후답자들은 이제 쉽게 찾아 갈수 있을 겁니다. 계곡 개천을 건너 가야 하는데 여름철엔 좀 어렵겠으나 오늘은 계곡이 얼어 건너기 쉬웠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용학사' 입구] <용학사>로 올라 가는 입구가 있는데 여기서 뒤돌아 본 <산영루>입니다. 그러니까 <산영루>에서 조금 올라와 <용학사> 입구에서 우측 계곡을 바라보면... ['용학사 용왕당 공덕비'] <용학사용왕당공덕비>가 조그마하게 있는데, 계곡 건너편 바위로 가면....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都摠攝聖能永世不忘碑" <성능 스님 영세불망비>는 바위에 새겨 놨더군요. 글자는 마모가 시작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고 이곳의 위치를 표시하는 표지판도 없어 모르고 가면 찾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축성 인력으로 승려를 동원하고, 축성 뒤에는 승려를 군인으로 삼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맡겼답니다. 이와 함께 <북한산성> 내에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를 새로 짓거나 보수해 <승군僧軍>이 주둔하는 <승영사찰僧營寺刹>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북한산성> 승군을 이끌고 <승영사찰>을 총괄했던 승군대장을 "총섭總攝"이라 했는데, <성능>은 1711년 <팔도도총섭>의 직위를 맡아 이후 30년간 <중흥사>에 머물면서 370명 내외의 승군을 통솔하였다고 합니다. <팔도도총섭>은 우리나라 <승군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니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북한산성>을 알아 보려면 먼저 <팔도도총섭 성능 스님>을 생각해야 할 정도입니다. ['산영루' 조망] <성능영세불망비>에서 내려 가며 바라보는 <산영루>입니다. ['중흥사' 입구 갈림길] <산영루>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중흥사>입구를 만납니다. ['중흥사' 입구] "중흥사 重興寺" <북한산성>을 관리하고 승군을 지휘하던 총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으니 참고하고... 『北漢誌』에 의하면 <중흥사>는 본래 30여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북한산성>이 완성된 1715년 당시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세루' 조망]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조그마한 절이었던 <중흥사>는 고려말 "태고보우국사太古普遇國師"에 의해 중수되었답니다. <태고보우국사>에 대해선 <태고사>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최영 장군>들이 이 분의 제자라고 하니 어떤 분인지 짐작 가죠? ['만세루' 밑 정문]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 대웅전' 옛 1902년 사진] 그동안 화재와 대홍수로 <중흥사>는 사라졌었습니다만 2012년에서야 <중흥사 대웅전>이 복원되었고, 2017년엔 <만세루>와 <전류전>이 복원되었답니다. 복원하는데 10여년이 걸린셈이죠. 다닐때마다 언제 완공되나 했는데 오늘 복원된 <중흥사>를 감격스럽게 만납니다.
['출토된 향로]
"중흥사 향로重興寺香爐" <현재 '강남구 봉은사' 보관> 이곳에서 출토된 <향로>인데 이 향로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하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献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將此功德用 祝皇帝萬歲國王千秋天下太平同願僉議政承蔡河中午山郡夫人梁氏徹明勸善比 "지정(至正) 4년(충혜왕 복위5, 1344) 5월에 은(銀)을 입힌 청동향로(靑銅香爐) 1좌(座)를 공경히 만들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의 부처님 앞에 봉헌(奉獻)하였다. 이 공덕(功德)에 힘입어 황제의 만수무강[皇帝萬歲]과 국왕의 장수[國王千秋] 및 천하가 태평[天下太平]하기를 기원하였다." ['종무소'] <대웅전> 좌측에는 종무소등 요사체가 있고 ['도총섭 사령부'] [도총섭 집무실] <대웅전> 우측에는 <성능 스님>이 기거하며 집무실로 사용하던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한 요사체가 복원되 있습니다. ['도총섭 집무실' 앞] ['도총섭 사령부' 옛 사진]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하던 곳이니 관련 부속실들이 있었을 것이고 <중흥사>와 별개로 <도총섭 집무실>로 직접 통하는 문이 별도로 있었다는 것을 옛 사진이 보여 줍니다. ['대남문' 방향] ['대남문' 갈림길] <중흥사>를 둘러 보고 다시 주등산로로 나가면 다리를 하나 건너고 이어서 <태고사>와 <대남문>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오늘은 거리 대비 시간이 많이 걸려 여기서 답사를 마치고 하산합니다. [뒤돌아 본 '중흥사'] 주등산로로 나와 <중흥사>를 조망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언룡교偃龍橋"라는 다리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래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과 <옛 사진>을 비교하며 추리해 봅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북한산 인수봉도']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 ~ 1759)>의 인수봉도仁壽峰圖 재질:비단에 수묵, 크기: 25x22cm -출처:마이아트옥션 이 그림은 2013년 11월에 경매에 나온 작품인데 그림의 이름이 “인수봉仁壽峰”입니다. 아마도 <백운대> 뒤에 우뚝한 바위봉우리에서 <인수봉>을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중흥사中興寺>와 중흥사 앞 계류의 <옛 항해루>가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노적봉露積峯>과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그린 것이라고 단언 할수 있는데, <겸재 정선 선생>은 중요 부분들을 나름대로 재배치해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그렸기에 <실경산수화>와는 구별해야 한다면 이 그림은 <중흥사>와 <노적봉>을 그린게 확실합니다. 그림의 하단에 <홍예교> 위에 작은 누각이 보이는데, <산영루>인지 분명치 않습니다만 <성능>의 <북한지>의 기록과 그림을 보면, 지금 복원된 산영루에 대하여 1717년(숙종 43년) <언룡교偃龍橋> 위쪽에 2층 누각을 만들었고 이를 "항해루抗瀣樓라 하였으며, 이전의 <산영루>에 대하여는 "中興寺前 舊有小橋 覆以閣卽此樓 今毁” “중흥사 앞에 옛날에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위에 지붕을 덮고 누각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 누각이였다. 지금은 헐리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제명은 <인수봉도仁壽峰圖>가 아니라 <노적봉도露積峯圖>로 불려야 하겠습니다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위의 <겸재 정선 선생>의 1600년대 그림과 1902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중흥사> 앞 집들은 "중창 中倉"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량의 곡식이 필요했기에 곡식을 비축하는 대규모 창고가 산성 내에 다섯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창지>는 <북한동역사관> 앞 부근이었으니 조금 전에 답사 했고 <중창지>가 이 곳이며 나머지 세곳은 앞으로 답사 예정입니다. [내림길] ['중성문'] ['북한동역사관' 앞] ['대서문'] ['북한산성' 입구 삼거리] 다시 <북한산성 입구>로 회귀하여 귀가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km 정도였으며 5시간이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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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山寺와 山行』
      『봉원사-안산-백련산-탕춘대성-홍지문』
                            

  [전체 답사 지도]  
  <서대문사거리>에서 <이회여대><연세대>로 넘어가는 <금화터널>을 지나면 <서대문구 봉원동>이
  <안산> 자락에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 동네 이름을 만들어준 <봉원사>에서 
  출발하여 <안산>과 <백련산>을 오르고 <녹변동 산골고개 생태통로>를 건너 <탕춘대성>으로 가서
  <홍지문>까지 가는 길입니다.
 

  ['봉원사 입구 주차장']          11:48        
  2021년 12월 22일 (수) 맑음 연무 약간      
  <서울역>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환승하여 <봉원사> 앞 주차장에 내려 산행을 시작합니다.
  조금 올라 가면 우측에 <봉원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탑들이 있고


  ['안산 정상' 조망]               
  조금 더 올라 가면 잠시후 올라 갈 <안산 정상>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봉원사' 전경]              11:51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년 고찰인 "봉원사 奉元寺"에 도착합니다.
  <일주문>은 별도로 없으며 입구엔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반겨 줍니다.
  <봉원사 奉元寺>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3년 (서기 889년)에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 있었던 나중에 "연희궁"이 되는 곳에 <반야사般若寺>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 시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답니다.
  그리하여 <태고종 총본산>이 되는 절이 탄생되었다는데 그런 안내는 보이지 않더군요.
  아마도 <조계종>과 <태고종>을 별도로 구분하고 싶지 않아서 인가 봅니다.
  <태고종>은 스님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자식을 두어도 아무 문제 없는 종파이죠.
  <태고 보우 스님>은 <고려> 말 모든 불교 종파를 통합하려고 노력한바 있어서 <조계종>과
  <태고종>에서 모두 자기들 종파의 중시조라고 모시는 스님이죠.
  (다음에 "북한산 태고사"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강남구 <봉은사>의 <보우스님>....<문정왕후>와 스캔들이 있었던 그 <보우스님>하고는 완전 다른 
  <고려시대 말> 스님이니 구별해야 합니다.
  이후 열열한 불교신자였던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이색 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태고 보우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한답니다. <태조 이성계> 5년(1396)에는 <원각사 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이성계>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연못과 송덕비]               
  <21대 영조>는 재임 24년( 1748)>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있었던 절을 이곳으로 옮기고, 
  그곳엔 "연희궁"을 지었는데,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이 탄생되는 연유이기도 하는데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 奉元寺"라 헌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22대 정조>는 재임 12년(1788)에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 八道僧風糾正所>를 이곳에 설치하며, 불교 정화운동을 했다고...
  이렇게 국가시설로 봉해지는 사찰에만 이름에 "奉"자를 붙여 준다는군요. 
  그 대표적 절이 '강남구'의 <봉은사>와 '남양주'의 <봉선사>..그리고 이곳 <봉원사>라고 하니
  이 절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수 있답니다.
  <26대 고종 21년(1884)>에 발생한 <갑신정변 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며 그들을 
  가르켜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고하니 정변의 모의처 역활도 한거군요.


  ['16나한상'과 '동종각']                       
  "16 나한 상 羅漢像" <석가>의 16 제자들 형상이 있으며
  "범종 梵鐘"이 있는 <범종각>이 끝에 보이는데
  이 <범종>은 '충남 덕산' <가야사>에 있던 종인데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때 타지 않고 있던 종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숭유억불정책>을 쓴 <흥선대원군집>과 "범종 梵鐘"이 함께 있어 야릇한 느낌을 줍니다.
  <남연군 묘>와 <가야사>에 대해선 제가 몇번이나 포스팅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 하세요.
          "<석문지맥> 가야산과 남연군 묘 탐방기"


  ['대웅전']                
  "봉원사 대웅전 奉元寺大雄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68호>
  "대웅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이 썼답니다.
  선생은 <숙종 31년(1705)>에 태어나 <영조>대에 활동한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죠. 
  또한 현대 한국학의 시조가 된다는 분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처음엔 몹씨 질시한 서예가입니다만, 선생은  중국풍의 글씨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적 <원교체>를 완성한 명필가로 유명하고, 후에 <추사 김정희>도 인정한 명필가랍니다.
  무술이 아들 <영조>가 형을 죽이고 등극했다고 하는 괴문서 사건과 함께 역모를 일으킨 혐의로 
  <영조>에 의해 유배 당하고 결국 사형 당했지요.
  한편 조선판 <로미오와 줄이엣> 같은 기구한 운명의 <이광사 선생>과 부인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선생의 부인은 역모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은 남편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먼저 자살합니다. '열녀'
  그런데 <이광사의 명필>을 아까워한 <영조>는 사형 대신 귀양을 보내며 목숨을 유지 했으니.....
  미리 자살한 부인은 조선판 <줄리엣>이 되버린 것이죠.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 너무나 많은 
  후학들이 선생으로 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몰려 들어 유배지를 <신지도>등으로 옮기며 분리시켰지만 
  백성들로부터 계속 추앙을 받자 결국 사형 시켰습니다.
  이 분의 현판 글씨는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똑 같이 걸려 있더군요.


  ['봉원사']                       
  "봉원사 奉元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원래  "아소당 我笑堂" 본채 건물이었답니다.
  이 건물은 현재 "봉원사 염불당 대방 念佛堂大房"으로 사용 되고 있는데 무지 유명한 건물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유폐 당해 살던 집의 본채인데, 철거시 <봉원사>가 구매하여 이곳에 옮겨 약간 
  축소하여 개축한 건물이어서 매우 유명한 건축물이죠.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왕후>에 의해 자택인 <운현궁>에서 쫒겨나
  현재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99칸짜리 큰집에 유폐시켰습니다.
  26세가 된 아들 <고종>과, 29세의 며느리와의 권력 투쟁에서 완전 밀려 난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였죠.
  그 집에서 유폐 당해 살던 어느 날 푸념섞인 詩 한수를 지었답니다, 
  그 詩 제목이  "아소당 我笑堂"이었는데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 되겠죠?
    
       吾負吾身任不輕  오부오신임불경
       退公閒日酒樽傾  퇴공한일주준경 
       從知往事皆吾夢  종지왕사개오몽
       惟愧餘年任世情  유괴여년임세성 
       理屐山村俚談好  리극산촌리담호
       聞蟬溪柳古詩成  문선계류고시성 
       世論百歲安排地  세론백세안배지
       我笑前生又此生  아소전생우차생
       나의 짐, 나의 몸이 맡은 것이 가볍지 않은데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이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한바탕 꿈인 것을
       오로지 남은 생애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네
       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시골 덕담이 좋아
       냇가 버들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시를 짓네
       세론은 어찌 나를 물러난 신분이라고 말하나
       전생도 이생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만 나네
   
  그래서 그 집 이름이 "아소당 我笑堂"이 되었었다는데......
  <아소당>에서 <흥선대원군>은 권불십년의 한을 느끼며 저 세상으로 갔답니다.
  그 <아소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염불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아이로니칼 하죠?
  
 
  ['청련시경']                   
  "靑蓮詩境 청련시경"
  "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라는 의미일테고...
  천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랍니다.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교 감상 할수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조금 전에 언급한 '전남 해남' <대흥사>와 이곳 등이 있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인 <완당 阮堂>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글입니다.


  ['무량수각']                        
  "無量壽閣 무량수각"
  무궁무진한 수명을 준다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랍니다.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글씨라는데.... 
  이렇게 어렵게 쓰면 누가 알아 보나요.ㅋ...누구나 보고 알수 있는 글이 좋은 글 아닌감? ㅎㅎ


  ['산호벽수']             
  "珊糊碧樹 산호벽수"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 이랍니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직접 감상 할수 있어 넘 좋았습니다.
  이 글들은 <아소당>을 이건 할때 딸려 온 것들이라고 합니다.


  ['염불대방' 내부']               
  혹시 <흥선대원군>의 흔적이 좀 남아 있을까하여 내부를 들여다 보았는데 그저 일반 절간이었습니다.
  그는 <아소당>에서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답니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상을 한 번만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어가가 거둥하였느냐" 
  <흥선대원군>이 <아소당>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리다 마지막 한 많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왕후>는 끝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종>에게 <흥선군>은 혹시 아버지로서 보다는 정적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빨리 죽어 다행이라고 생각 했을듯....


  ['관세음보살']                          
  매우 날씬한 현대판 <관세음보살 상>이 있는 곳에서 좌측에 있는 <명부전>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명부전'] 
          
                 ['정도전 글씨']                     
 "명부전 冥府殿"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이죠.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하는 보살이 <지장보살>이라죠.
 그런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천하의 역적으로 몰려 역사에서 사라진 <삼봉 정도전>의 흔적이
 여기에 편액으로 남아 있어 이채롭습니다. 왼쪽 위 끝머리에 <鄭道傳筆>이 선명하게 있는데
 500년의 세월을 거스러는 선명함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할 정도입니다.
 여튼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삼봉 정도전>의 글씨를 비교 감상 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겠군요.
  
          
                 ['이완용 글']             
  햐~~ 여기서 반민족친일매국노의 巨頭인 "일당 이완용 一堂 李完用"의 글씨를 만납니다.
  이곳 <명부전>의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이완용>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무지 영특하고 외국도 많이 다니며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죠.
  특히 그는 <조선 4대 명필> 중에 한사람으로 그의 글씨는 지금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답니다.
  그는 약간의 흘림이 있는 행서와 곡선 위주의 초서를 매우 잘 썼다고 합니다.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이 쓴것이 랍니다. <김가진선생>의 글씨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다음을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 할것입니다.
  <이완용>에 대해 매국노라는 거 빼고는 모르는게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몇가지 언급하면....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협회 회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친일파로 변절했을까? 이런건 잘 모르죠? ㅎㅎ
  격변하는 정치 외교 상황에서 그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1898년 3월 <전라북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좌천 된지 닷새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당하고, 이어서 공금횡령으로 파직되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 당했죠. 그래서 1904년까지 고향에서 두분불출 하고 있다가 다시 정계에 등장해서 
  <친미파>가 되었다가 다시 <친러파>가 되기도 하고 결국 <친일파>가 되어 반민족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하며 돌아 오지 못할 강을 건넜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워 미국 생활을 많이한 관료여서 영어를 무척 잘했는데, 
  반면에 일어는 한마디도 못했답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주로 만나 
  정치현안들을 의논하며 친했답니다.그래서 다른 쪽바리들을 만날 때엔 그에겐 일어를 잘하는 
  수행통역비서관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혈의 누>라는 소설을 쓴 <이인직>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신소설이라고 교과서에서도 배운 기억이 납니다만, 
  <이인직>도 뼈 속까지 친일파였으며 <을사늑약>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혈의 누>라는 소설도 친일소설인데, 소설 제목은 우리말로 <피눈물>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도 
  <혈루(血淚)>가 옳은 말임에도 일본식 표기인 <血の 淚>를 그대로 직역하여 <혈의 누>라고 
  표현한것이니 이런 것에서도 친일청산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글학회' 창립터]                     
  <백범 김구 선생(법명 원종)>도 이곳에 머물기도 했으며, <한글학회>를 창립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만월각']              12:20           
  <봉원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만월각> 좌측으로 <안산등산로>가 이어집니다.
  <봉원사>를 떠나며 <이완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이완용>이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친미파>, 때로는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변신하였기에 <외세론자>는 분명하며, 이익을 위해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후 귀족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다 죽었지만, 
  그의 아들 <이승구>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그의 자손 중엔 자결한 이도 
  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군 아들이라는 얘깃꺼리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조선 4대 명필> 중에 한사람이라는 평판은 간데없고 반민족행위자로만 기억되는 <이완용>이 
  불쌍하게 느껴지며, 짧은 인생을 더럽게 살다간 <이완용>을 생각하며, 
  그가 천하명필 중에 한사람이었다는 것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봉원사>를 떠나 갑니다. 
  언제 다시 오랴~~ 머리 잘 돌아 가는 놈들이 대부분 친일파 ㅠㅠ..


  ['안산 등산로' 입구]               12:22        
  <봉원사>를 벗어나면 바로 <안산등산로>를 만납니다.


  ['안산 등산안내도']                    
  현위치와  등산안내도를 참고하고 가운데 오름길로 올라 갑니다.
  제가 진행한 길은 노란색으로 추가 표기 했습니다.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올라 가면...
  

  [사거리]                  12:30          
  <안산자락길>을 만나며 또한 사거리를 만나는데 
  둘레길과 정상 등산로가 나뉘는 곳입니다.
  <안산자락길>은 2019년 7월 19일에 돌고 포스팅 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 하시고
  "서울 안산 자락길"
 

  ['전망대'와 '봉수대' 조망]                      
  오늘은 <안산>의 암릉코스로 올라 갑니다.
  먼저 중턱에 보이는 <전망대>로 8분 정도 걸려 올라 가면...


  ['전망대' 입구]              12:37~12:41   
  <전망대> 입구를 만나는데 좌측 계단으로 조금 나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전망대>로 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야 합니다.
 

  ['전망대']                      
  이곳 전망대에서의 풍광도 좋지만 잠시후 정상에 올라 다시 조망하기로 하고
 

  ['봉원사' 조망]                     
  산행 출발지였던 <봉원사>를 조망하고 정상으로 올라 갑니다.


  ['봉수대' 조망]                    
  북쪽으로는 <봉수대>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 10여분 걸려 올라 가면....


  ['봉수대' 입구]                 12:50~12:54

  ['봉수대']                      
  "동봉수대 東烽燧臺"
  <안산> 정상에는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가 있으며, 봉수대도 두개가 각 봉우리에 있었답니다.
  현재 <東峰>에만 봉수대 모형을 만들어 놨고


  ['봉원사' 조망]                   
  <동봉 봉수대>에서 산행 출발지인 <봉원사>를 먼저 조망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편>에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할때, 
  현재의 <연세대-이화여대> 주변으로 <무악도성>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현재의 <한양도성>으로 옮기자는 각료들의 찬반이 너무 격렬해 
  <동전던지기 (척전擲錢)>로 결정했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0월 6일]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
  대사헌 김희선(金希善),지신사 박석명(朴錫命),사간(司諫) 조휴(趙休)를 거느리고 묘당(廟堂)에 
  들어가, 상향(上香)하고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반중(盤中)에 척전(擲錢)하게 하니,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 
  임금이 나와 의논이 이에 정해지니, 드디어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를 상지(相地)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고, 어가를 돌이켜 광나루[廣灘]에 머물러 호종하는 대신과 더불어 말하였다.
  "나는 무악(毋岳)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경복궁>이 현재의 <북악산> 아래가 아니라 <안산> 아래 <연세대> 위치에 건설 될뻔했는데
   '동전치기'로 현재의 위치를 결정 했다는 사실..............아셨나요? ㅎㅎ


  ['서대문형무소'와 '남산' 조망]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전체적으로 조망됩니다.
  조금 전 <봉원사>에서 <독립문> 현판을 누가 썻느냐하는 얘기가 나왔으니 
  이번엔 "독립문 獨立門"에 대해 한마디 더 언급하겠습니다. 모르고 사는게 너무 많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독립"이라는 글자 때문에 <독립문>이 일제에 맞섰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독립문>은 복잡한 시대혼란과 권력다툼 속에서 세워진 "중국반대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염원하는 상징물이었던거죠.
  그리하여 백성들은 자주적인 국가를 기원하며 <독립협회>와 <독립문 건립>을 지지했습니다만, 
  어떤 놈들은 '일본'을 끌어오기 위해 '중국'을 내쫓는 목적으로 <독립문>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국민의 염원을 이용해 먹으며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행태는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이 왜 현명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인왕산' 조망]                                       
  <인왕산>과 <북악산>을 조망하는데 아랫쪽을 조금 줌인해 보면...


  ['선바위' 줌인]              
  <한양도성>이 <인왕산>을 지나는게 보이며, <범바위>와 <선바위>도 보입니다.
  <통일로>에 설치된 <생태육교>도 보이는군요.


  ['탕춘대성' 조망]                                   
  동북쪽으로는 오늘 산행의 종점이 될 <탕춘대성>과 <상명대>가 보입니다.


  ['백련산' 조망]                                             
  북쪽으로는 잠시후 오를 <백련산>이 보이며 <산골고개>를 건너 <탕춘대성>으로 갈 코스가 조망되고
 

  ['안산' 정상 조망]                       
  <봉수대>가 있는 <동봉> 앞에는 <서봉>이 가까이 있는데 
  <서봉>이 실질적으로 제일 높은 <안산 정상>인데 군부대 시설로 올라 갈수 없습니다.
  이 <동봉>과 저 <서봉 295.9m> 사이가 "말의 등허리" 처럼 생겼다고 "안산 鞍山"이라하죠.
  이곳에는 세갈래 길이 있는데 저는 우측-북쪽길로 하산합니다.
 

  [내림길]                    
  <안산 정상>에서 북쪽 길로 잠시 내려 가면
 

  [운동시설]                1:02    
  운동시설이 있는 곳을 만나고, 다시 10여분 내려 가면...
 



  ['봉화천약수터']             1:13       
  "봉화천 약수터"를 만나는데 규모가 제법 큰 공원시설이었습니다.
  특히 이 암봉 정상 부근에서 약숫물이 많이 나와 연못도 있을 정도이니 특이 합니다.


  ['너와집']                1:17       
  <봉화천약수터>에서 4분여 더 내려 가면 "너와집"을 만납니다.
  <안산>의 명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안산자락길']               1:21      
  <너와집>에서 다시 4분여 더 내려 가면 <안산둘레길>인 <안산자락길>을 만나 북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               1:22     
  "흔들바위"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흔들바위>가 흔들리는지는 확인 못했습니다. ㅎ


  ['안산자락길']                     

  ['홍제역 갈림길 전망대']              1:27       
  <흔들바위>에서 자락길 데크를 따라 5분 정도 진행하면 <전망대>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안내판>에 <인왕산>의 정상 위치표시가 잘못되 있더군요.


  ['안산자락길 출입구']             1:30        
  이어서 자락길에서 도로로 나가는 출구를 만나는데 먼지털이도 있고 운동시설도 있습니다.


  ['숲속도서관']              1:32      
  이어서 <숲속도서관>도 지나면...


  [도로]

  ['연희숲속쉼터' 입구]              1:38       
  <연희숲속쉼터>로 연결되는 곳에 제법 큰 쉼터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희숲속공원>으로 내려 가려면 이정표의 <안산방죽> 방향으로 내려 가야 하더군요.


  [내림길]   

  ['벚꽃마당']

  ['공원 쉼터']

  [내림길]                        
  음악이 흐르는 "연희숲속공원"이 펼쳐집니다.
  봄이나 가을에 와야 볼거리가 더 많겠습니다.


  ['연희숲속쉼터' 출입구]

  [안내도]                  1:49         
  <서울내부순환도로>가 지나는 <홍제천>에 도착하면 <연희숲속공원 안내도>가 있으며
 

  [물레방아]                      
  물레방아도 있고 장독대도 있더군요.


  ['홍제천' 동쪽방향]

  ['홍제천' 서쪽방향]                       
  "홍제천 弘濟川"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평창동><구기동>등을 지나
  <남가좌동>에서 <불광천>에 합류하여 <한강>으로 가는 개천이죠.
  이 개천은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고도 불리는 개천인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요.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은 수많은 인질과 소녀들을 <청나라>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정약용선생>이 쓴 <비어고>에는 6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역사이지요.
  <홍제천> 지명의 유래는 공식적으로 <의주로>로 통하는 길목에 <홍제원>이라는 공공 숙박시설에서
  유래 한다지만, 그 보다는 <병자호란>에서 인질로 끌려 갔던 여자들로 부터 나왔다는게 슬픔니다.
  <청나라>에 끌려 갔다가 정조를 유린 당하고 디시 돌아 온 소녀들을 <환향녀 還鄕女>라고 했는데
  음운을 약간 바꿔 <정조관념이 없는 여자>를 뜻하는 비천한 말로 <화냥년>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죠.
  모두 잡혀 가서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 조정은 이 <환향녀>들을 다시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었는데, 울며겨자먹기로 조건을 하나 붙여 <화냥년> 주홍글씨를 떼내 주었는데
  그 조건이 이 <홍제천>에서 그녀들의 "그곳"을 씻기만 하면 정상적 여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으니
  <환향녀>들은 모두 이곳에서 "그곳"을 씻고 <한양>으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천의 이름이 <넓게 구제 한다>라는 <弘濟川>이 되고, 그 정도의 은혜에도 감사한다는 
  <弘恩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탄생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유래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장검다리]                   1:52        
  <징검다리>를 건너며 맑게 흐르는 냇물에 비치는 듯한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들과
  일제강점기 시대 <위안부>로 고생한 여인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겠는데.....


  ['홍제천 수변길'] 

  ['홍은어린이집' 조망]                1:57            '
  <백련산>으로 가기 위해 <홍제천> 수변길을 따라 5분 정도 서쪽으로 진행하면
  우측에 <홍은어린이집>이 보입니다. 여기서 <홍은어린이집>으로 올라 가면....


  ['홍은어린이 집']                 1:58         
  <홍은어린이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나가면....


  ['홍은동']                    1:59      
  <홍은동>의 <모래내길>을 만나 건너 갑니다.
  건너편에 <백련산>이 보입니다.



  ['서대문 문화체육회관']

  ['홍연초등학교']                   
  그러면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좌측엔 <서대문 문화체육회관>과 <홍연초등학교>가 연이어 있습니다.


  ['팔각정']               2:10~2:27             
  10여분 오름길을 진행하면 "백련약숫골 팔각정"을 만나는데 <백련산 등산로> 입구가 되겠습니다.
  이곳 <팔각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오르면....


  ['백련산 능선길']                 2:35    
  <백련산 능선길>을 만나는데 첫번째 봉우리 삼각점이 있습니다.
  <백련산>은 길쭉하게 일자로 길게 누운 산이었습니다.


  ['백련사' 갈림길]                2:37        
  이어서 <백련사>와 <정원여중> 갈림길을 만나고
  계속해서 평지성 능선길을 7분여 진행하면....
 

  ['MBC응암중계소']               2:44           
  "MBC응암중계소"를 지나고
 

  [체육시설 봉우리]                2:48        
  운동시설이 밀집해 있는 봉우리를 지나면...
  

  ['백련산 정상' 조망]                       
  <백련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분 정도 진행하면....
 


  ['은평정']              2:52~2:55       
  "백련산 白蓮山 228m"
  정상에는 <은평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올라 가 조망을 하고 갑니다.


  ['한강-난지도-계양산' 조망]                      
  서쪽으로는 <한강>과 <난지도> 그리고 <인천 계양산>까지 연무 속에 비침니다.


  [봉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봉산>이 있는 산줄기가 보이는데 <서울市界>이며 <서울둘레길>이 지나는 능선이죠.


  ['앵봉산-노고산' 조망]             
  북쪽으로는 <앵봉산>이 보이는데 <서오릉>이 있는 산이고
  <한북정맥>이 지나는 <노고산>도 조망됩니다.
  <노고산> 뒤에는 <오두지맥>의 <계명산>이 있는데 연무로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군요.


  ['백련산 능선길']                 
  지금부터는 <은평둘레길5코스 산골고개생태연결로>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10여분 편안한 능선길을 진행하면....


  ['백련공원']              3:06        
  <백련공원>이라는 공원을 지나고


  [암봉]              3:09    
  이어서 암봉에 오르면 <거북이>한마리가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는데
  <북한산 비봉능선>이 성큼 다가 옵니다.
 

  [쉼터]                3:09         
  <거북바위> 바로 아래엔 조금 독특한 모양의 쉼터가 하나있고
 

  [진행방향 조망]                    
  쉼터에서 앞으로 진행할 루트를 가늠해 보고 출발합니다.
  건너편은 <은평구 녹번동>입니다. 그러니까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바라 보고 있는 것이죠.


  [데크 내림길]                 
  <산골고개 생태통로>로 내려 가는 데크길은 제법 가파른데,
  조금만 내려 가면.....


  [갈림길]               3:12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우측 <은평둘레길5코스 산골고개생태통로>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사거리']                 3:15       
  이어서 사거리를 만나는데 직진하면....
 

  ['산골고개 생태통로']                 3:18               
 <서대문구 홍은동>과 <은평구 녹번동>을 연결하는 "산골고개 생태연결로"를 만납니다.


  ['녹번동' 방향 조망]                  
  생태육교에서 북쪽 <녹번동> 방향을 조망하는데 남쪽방향은 볼수 없더군요.


  [삼거리]                3:21         
  <산골고개 생태연결로>를 건너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며
  여러 안내판과 이정표가 설치되 있습니다.
  이곳은 <은평둘레길5코스>가 끝나고 <은평둘레길4코스>가 시작되는 곳이고
  <북한산 자락길>이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북한산 자락길']                      
  지금부터는 <북한산자락길>을 따라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안산자락길>일부와 <백련산 초록길> 일부를 걷고, 
  <북한산 자락길>를 완주하게 되겠군요. <북한산둘레길>은 예전에 둘러 보았지만 <북한산 자락길>은
  처음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골마을' 안내문] <산골>의 뜻과 <녹번동>의 유래가 새롭습니다.
['북한산둘레길 합류점' 방향] <전망대><북한산둘레길합류점> 방향으로만 가면 되겠습니다. [오름길] 경사도가 제법 있는 오름길을 14분 정도 오르면..... ['은평둘레길'] 3:35 <녹번동 뒷산> 능선에 오르고 ['운동시설 쉼터'] 3:35 운동시설이 있는 쉼터를 지나면.... ['장군바위 전망대' 앞 갈림길] 3:39 <장군바위> 앞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올라 가면 ['장군바위 전망대'] 3:42~3:44 <장군바위>가 있다는 봉우리에 오르면 헬기장과 전망대가 있습니다. ['인왕산-안산' 조망] <인왕산>과 <안산>이 새로운 각도로 그림같이 조망됩니다. ['안산-백련산' 조망] 오늘 두발로 걸어 지나온 <안산>과 <백련산>이 개로운 각도로 조망되는군요. ['장군바위'] 이 봉우리 어느 곳에 <장군바위>가 있는지 찾아 봤으나 못찾고 떠나 갑니다. ['북한산둘레길 합류점'] 3:48 <장군바위 전망대>에서 10여분 진행하면 <북한산둘레길>을 만납니다. 오랜만에 다시 왔군요. ['225.9m봉' 오름길] ['225.9m봉' 정상] 3:52 "225m봉"은 우회로가 있어 잘 오르지 않는 봉우리입니다만, 오르면 후회없는 봉우리이죠. 여기서 바라보는 <북한산 비봉능선>이 압권이기에... ['북한산둘레길'] ['탕춘대성 능선' 조망] <북한산둘레길>을 20여분 진행하면.... ['탕춘대성 암문'] 4:11 [안내문] "탕춘대성 암문"을 만납니다. <연산군>이 봄을 농락하려고 지은 <탕춘대>의 이름을 따와 <숙종>때에 건설한 <한양성곽>의 외곽성으로 <인왕산 기차바위> 부근에서 <북한산 향로봉>으로 연결된 성곽입니다. <구기터널> 위에 암문이 하나 있는데 앞에 보이는 문입니다. ['탕춘대성 암문'] ['탕춘대성-홍자문' 방향] 예전 <북한사 산행>을 할때는 이 암문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갔습니다만 오늘은 남쪽으로 처음 진행해 봅니다. ['탕춘대성'] 오리지날 城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탕춘대성>을 따라 내려 가면서 뒤돌아 보면... ['구기동' 조망] <종로구 구기동>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며, <이북오도청>도 잘 보입니다. ['평창동' 조망] 약간 동쪽으로는 <종로구 평창동>이 조망됩니다. [허물어진 성곽] 4:25 암문에서 14분 정도 성곽을 따라 진행하면 성곽이 허물어진 곳을 만나는데 직진하는 곳에 철조망 문이 있고, 그 안은 <상명대>여서 우측 성밖으로 나가 걸어야 하더군요. ['상명대 부속여자고등학교''] 4:31 성밖으로 조금 진행하면 <상명대부속여자고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성곽 안으로] 4:34 이어서 <상명대 후문>으로 들어 갈수 있는 허물어진 성곽을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우측 성곽을 따라 진행합니다. ['상명대 후문' 방향] 직진해서 내려 가면 <상명대 후문>을 통과해 바로 <세검정 교차로>로 내려 갈수 있겠군요. ['탕춘대성'] 다시 <탕춘대성> 성곽 안쪽으로 진행하면... ['상명대' 조망] <상명대>가 전체적으로 조망 되고 [성곽길 끊김] 4:50 이어서 성곽으로는 더 이상 진행 할수 없는 곳을 만나는데 다행이 성곽에 성밖으로 나가는 틈새가 있더군요. 내려 가면 [내림길] <홍지문>으로 내려 가는 등산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 <인왕산> 속으로 들어 가는 <서울내부순환도로> 터널이 보이고 ['홍은동'] 5:00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니 <홍제천>의 <옥천3교>를 만나더군요. 좌측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 5:03 "홍지문 弘智門" <탕춘대성>의 유일한 대문인데 <숙종> 대에 건립하고 적을 막은 적이 한번도 없는 門입니다. <인조반정> 때에 반정세력들이 통과 했을뿐 수도방위의 역활을 거의 못한 쓸모없었던 성문이었죠 ['탕춘대성' 조망] 성곽을 따라 내려 오는 길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검정 교차로'] 5:07 <세검정교차로>에서 산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5km로 5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봉원사>에서 <흥선대원군>이 말년을 보낸 <아소당>을 만났고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삼봉 정도전> <일당 이완용>의 글씨를 만나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둘러 보고 싶었던 <인왕산-안산-백련산-탕춘대성>을 모두 돌아 밀린 숙제를 다 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북한산성의 역사> 속으로 들어 가 볼 예정입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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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추억 속의 북촌을 가다』
                        <2부>    

  [전체 답사 지도] 
 
['종로구 하천']
이번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종로구 하천>에 대해 알아 보고 가야 <北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한양도성> 안에 흐르는 유일한 개천인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동아일보>가 있는 <서린동>에서 <중량천>까지 입니다. 그 <청계천>을 만드는 지류가 여럿 있는데 그 중 대표적 지류는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입니다만, <백운동천>은 <西村>을 관통하니 <서촌 답사기>에서 언급했고 <北村>에서 내려오는 지류만을 보면 <삼청동천(중학천)>과 <안국동천> <회동천> <재생동천> <금위영천> <북영천>이 있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 알수 있는데 그 중에 <삼청동천>은 <청계천>에 직접 유입되지만, 나머지는 <청계천> 근처까지 와서 <종로>에서 우측으로 갑자기 꺽여 <동대문> 근처까지 이어지다가 <동촌>의 <창경궁옥류천>과 합류하여 비로소 <청계천>으로 들어 갑니다. 그 이유는 여름철 <청계천>이 자주 범람하여, 범람을 피하기 위해 물줄기를 도심구간을 피하도록 <종로구간>에 "인공수로"를 만들어 <한양도성 번화가>를 빠져 나가도록 한 것이니 이미 조선시대부터 <인공수로>가 있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데,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개천들은 복개된 도로 밑으로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출발하여 <안국동천>의 일부와 <제생동천>을 거슬러 올라가 <북영천>을 따라 <종로3가 단성사>까지 내려오는 <북촌 탐방>이니 '물줄기'와 '마을'을 함께 음미하며 답사하는 의미있는 답사가 될것입니다. ['첫번째구간 실트랙'] 1."탑골공원-승동교회-옛MBC터-낙원동사거리-익선동한옥마을"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북촌> 끝까지 올라 갔다가 <종로3가 단성사>로 내려 오는데 올라 가는 루트 표시는 붉은색으로 했고 내려 오는 루트는 푸른색으로 표기했습니다 ['탑골공원 정문'] 2021년 11월 28일 (일) 맑음 오전 11시경 <탑골공원>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오늘 답사하는 코스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며 학교를 다니고 대학 졸업 할 때까지 <익선동>에 거주했던 실질적으로 저의 "고향 동네"입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모르는 곳이 많았으니 이번 답사는 "고향의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ㅎㅎ ['손병희선생 동상'과 '팔각정'] <탑골공원>은 제가 어렸을 때엔 <파고다공원>으로 불렸습니다. 뭔 뜻인지도 모르며 지나 다녔는데 나중에서야 <파고다>가 "PAGODA"라는 외래어로 "탑"이라는 뜻이며 불교에서 "탑모양의 절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탑골공원>은 "삼일운동 발상지"로서 1919년 3월1일 12시에 <손병희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 각인되 있습니다. 그래서 <손병희선생 동상>이 건립되 있나 봅니다만, 예전엔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있었답니다. ['원각사 비'] [안내문] "원각사비 圓覺寺碑" 는 <우리나라 보물 제3호>입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으면 처벌까지 하며 <유교>를 믿으라고 강요했지요. 한마디로 <숭유억불 정책>이었다는 건 모두 아는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겐 <숭유억불>을 강요하면서 자기들 왕과 왕족들은 <불교>를 더 믿었습니다. 왜그런지 아시나요? 종교의 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 같은 것이어서 現在와 死後의 삶을 보장해 준다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좀 없어서, 죽은 후까지 영원한 삶을 준다는 <생활규범>이 아닌 "종교"인 <불교>를 자기들은 믿을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영원히 잘먹고 잘 살기 위해 요즘 여타 종교들은 모두 영원토록 죽지않고 잘 살수 있다고 믿고 따라 오라고 서로 주장하고 있죠? <원각사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옛 <원각사비> 사진을 보고 가겠습니다. <원각사비>는 원래 <연못>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 속에서 거북이 나오는 형상입니다. 사진 속에 벌거벗은 어린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원각사 십층석탑'] [안내문] "원각사 10층 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우리나라 國寶 제2호>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안내문에 없는 유명한 스토리를 하나 언급하면...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 그의 부인인 <정희왕후>. 즉, <세종대왕>의 둘째 며느리이죠. <예종>의 어머니이고, <성종>의 할머니가 되는데, 그러니 <연산군>의 '증조모'가 되지요.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세조>와 <정희왕후>는 <단종>의 망령에 트라우마로 살수 밖에 없어서.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전지전능한 神 부처님이 필요 했습니다. 특히 <정희왕후>는 열열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여인이 바로 <정희왕후>였으니 실제 최고 권력을 지낸 여인이라 할수 있죠. 그녀의 입김으로 지은 절간이 폐사된 <흥복사> 터에 주변 민가를 200여채 더 사들여 호화찬란한 절을 짓고 이름을 <원각사>라 하고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종교시설로 만들었답니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입니다. 하지만 인생무상...그들이 죽고 난후, 증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전국의 절간은 초토화 되었죠? 특히 <세조>와 <정희왕후>가 설립한 이곳 <원각사>는 다 때려 부수고 "기생 양성소"를 만들었죠. 전국에서 예쁜 여자들을 뽑아 올려 여기서 기생 수업을 시켜 <연산군>의 기쁨조를 만들었는데 이 여자들을 "흥청 興淸"이라 했죠. <興淸>이라는 말이 "맑은 흥취를 불러 일으킨다"는 뜻이겠지만 주색에 빠져 환락을 일삼는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듯 하여 <연산군>의 폐망에 이르는 큰 요인 중 하나였으니, 이때부터 <흥청망청 興淸亡淸>이라는 사자성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흥청망청 興淸亡淸>이라는 말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 <원각사터>인 <탑골공원>이었답니다. 실록에는 이때의 <흥청>이 일만명이 넘는 다고 기술되 있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이것은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설과 같이 <폭군 연산군>을 비하하기 위한, 반정에 성공해서 '역사의 승자'가 된 <중종반정세력>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쓴 역사 뒤집기 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원각사지 십층석탑' 사진]
탑 뒤로 <명동성당>이 보이며 <남산>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엄청 먼듯 보입니다만, 빌딩이 없는 <한양도성>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군요. [숨겨진 조각 그림] "원각사 10층 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에 새겨진 여러 조각 속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사오정><저팔계>가 세겨져 있습니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 부도 高達寺址浮屠"]
<국보1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지요? ㅎㅎ 그런데 <국보2호>를 아는 사람은 많은가요? 바로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입니다. 더구나 <국보3호>를 아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국보3호>는 <북한산순수비>입니다만 <국보4호>는 거의 대부분 모릅니다. <국보4호>는 <여주 고달사지 부도>인데 알고 계셨나요? ㅎㅎ 그 이후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은 아닌지... ['낙원주상복합아파트'] <탑골공원> 뒷문으로 나가면 <낙원상가>를 만납니다. 이 건물은 주상복합아파트인데 그냥 <낙원상가>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아파트가 함께 있죠. 15층 높이의 아파트에 430여 가구의 아파트가 있는데 단일 주상복합아파트로는 큰 규모입니다. 도로 위에 지은 아파트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지분이 없는 아파트이죠. 아파트 지을 땅이 부족한 서울 도심에서 앞으로 아파트를 지을 때 부지를 확보하는데 이처럼 도로를 활용하는 건 어떨지...단숨에 부지 확보가 될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낙원상가>엔 예전에 <허리우드극장>이 있었었는데.... ['인사동 남측 입구'] <인사동 골목 남측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좌측에 <승동교회>가 보입니다. ['승동교회'] "승동교회 勝洞敎會" <3.1독립운동>의 진원지 중에 한곳으로 주로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랍나다. 그런데 "율곡 이이 栗谷 李珥"가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할때 살던 집터라는 설이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 사진] 저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승동교회 勝洞敎會"입니다. 교회 입구 게시판에는 저의 어머니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을 정도로 어마니가 다니던 교회였습니다. 저도 이 교회를 고1 때까지 다녔습니다만.....지금은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입니다만...^.^ 특히 저는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었습니다. 잊을수 없죠? ㅎ 주례를 보신 분이 사진 속에 나오는 <박일웅목사>이신데 돌아 가신지 오래 되셨다고 하네요. (사진 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어머니, 두번째가 박일웅목사) ['인사동 사거리'] <승동교회>를 나와 다시 <인사동> 거리를 거슬러 조금 올라 가면 <인사동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 <낙원동>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인사동>이 예상외로 한산하군요. 오전 시간과 코로나 때문인듯... ['옛MBC방송국']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美術世界>라는 건물이 <옛 MBC 방송국>이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맹활약하던 시절이니...KBS에선 <이광재 아나운서>가 중계방송을 하고... ['낙원동 사거리'] <낙원동 사거리>는 <낙원상가> 북쭉에 있는 사거리인데 여기서 직진하여 <익선동 골목>을 잠깐 들렸다 돌아 옵니다. 50m쯤 직진하면.... ['파란문 집터'] <원불교>와 <서울지방국세청>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 있는데 필자인 <파란문>이 살던 집은 원래 한옥이었는데, 5층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저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세상을 먼저 떠난 <이름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가 제가 학교 간 사이에 제 방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며 작사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좌측에 있는 <종로오피스텔>은 정치깡패였던 <이정재 집>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규모였죠. 그리고 저의 집 건너편에 있는 현재 <엠배스더호텔> 자리에 유명한 요정인 <오진암>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음식점1호>로서 [남북 7.4공동선언문] 작성의 밀실이기도 했으며 북한 관리들을 접대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3공시절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밀실정치의 본거지이기도 했지요. 기존 <오진암> 건물은 <자하문> 밖 <안평대군>이 살던 집인 <무계원 터>로 옮겨 복원해 놨더군요. 다음 사진입니다. <오진암>의 건물을 옮겨 복원 해 놓았는데 이름은 <안평대군>의 집 이름인 <무계원>이라고 해 놨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윗 사진을 클릭 해 보세요 ['익선동 골목'] 요즘 <북촌>에서 가장 뜨는 골목이라는 제가 어린 시절 살던 <익선동 골목>을 조금 둘러 보고 갑니다. 현재 공사 중인 집이 <짱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의 한옥 집이었고... ['미담원'] [감꽃빵'] ['명가헌'] <미담헌>이라는 카페가 옛날 <김일ㅇ>이라는 친구 집이었는데 그 친구 현재 미국 델라스에서 살고 좌측 <감꽃빵>이라는 빵집은 <임효ㅇ>라는 친구 집이었고, <명가헌>이라는 카페는 <길원ㅇ>이라는 친구집이었는데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만 있습니다. 그외에도 <김영ㅇ>라 친구집이 우측에 있는데 그 친구와는 현재도 매주 스크린골프 같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골목이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무지 좁은 골목이라 세월의 기억이 뭔지 실감합니다. ['두번째구간-홍명희집터에서 계동공터까지 실트랙] 2. "홍명희집터-지석영집터-교동초교-조광조집터-서북학회터-천도교- 민병옥집터-박영효집터-운현궁-영로당-일본헌병초소터-계동궁터" ['홍명희 집터'] <옛 오진암>이었던 <엠배서더호텔> 뒤에는 "홍명희 선생 집터"가 있습니다. <종로구 익선동 33-6번지>인데 현재 <수 무대의상실>이라는 의상실이 있더군요. 일제시대 조선 3대 천재로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를 꼽지요. <벽초 홍명희>는 그 유명한 <임꺽정>의 저자 입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오산학교> 교장도 했는데 아쉽게도 월북하여 북한 <김일성대 총장> <부수상>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들에겐 잊혀진 사람이 되었지만 .... 아버지 <홍범식선생>은 <경술국치>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하자 뒤를 이어 자결하며 일본에 항거하는 몇 않되는 우국충정의 애국자였습니다. ['지석영 집터'] 다시 <낙원동 사거리>로 나와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교동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지석영 선생 집터"를 만납니다.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을 전파한 조선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이시죠. <서울대병원> 안에 있는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교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도 <지석영선생 집터>가 이 곳에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서울교동초등학교'] "서울 교동초등학교 校洞初等學校" 필자인 <파란문>이 다닌 초등학교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입니다. 세월도 빠릅니다. 졸업 한지가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으니....... ['서울경운학교'] [학교 변천사] 제가 다닐 땐 학생수가 많아 한 학년에 10학급이었던가 12학급인가 되었으며 한 학급에 7~80명이 바글바글 붙어 앉아 공부를 했는데, 그나마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집에서 난로에 피울 나무를 한두개씩 가지고 가서 무연탄에 불을 붙였는데 그때 온 학교가 연기로 뒤덮히며 매캐한 냄새와 연기로 오리무중이 되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래도 이 국민학교에 꼭 들어 가려고 전국에서 어린이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요즘말로 초일류 국민학교였던거죠. 지금은 학생이 거의 없어 폐교 위기에 놓였다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옛 건국대' (서북학회 터)] 다시 <낙원동 사거리>로 돌아와 길을 건너 건너편을 답사 합니다. 건너편에 있는 <건국빌딩>이 있는 자리는 주변을 합쳐 옛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가 있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교>가 이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엔 <서북학회>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 이 주변은 우리나라 교육의 중심지였던거죠. ['조광조 선생 집터'] 사거리 가운데 가로공원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 최초 최고의 진보개혁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는 선생의 집터가 여기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서북학회 터'] <건국빌딩>이 있는 옛 <건국대학교> 자리 앞에 "서북학회 터"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서북학회> 건물이면서 당시 <건국대 본관>으로 쓰였던 건물은 현재 '광진구 화양동'의 <건대 본교>로 옮겨 복원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사진을 보여 드리면... 사진을 클릭하면 제가 쓴 답사기로 바로 가 볼수 있습니다.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서북학회 터>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탑이 있습니다. <동학>의 3대 교주이며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소년회>를 1921년에 창립한 곳이고, 이듬해 <어린이날>을 선포함으로써 "어린이"라는 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무지무지 의미있는 곳입니다. ['천도교'] ['천도교 중앙대교단'] "천도교 天道敎" <천도교중앙대교단> 구한말 서양에서 물밀듯 들어온 <기독교>를 서양에서 왔다고 <서학 西學>이라고 했지요. 국내에서 <인내천 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람 중심 사상"의 종교가 탄생하는데 <예수>라는 전지전능한 神을 믿는 "하늘 중심" 사상의 <서학>에 대항하여, 우리나라에서 탄생되는 종교여서 대칭적 이름인 "동학 東學"이라 했죠. <손병희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를 확립한게 <천도교>인데...... 일제강점기 시절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화된듯합니다. ['민병옥 가옥'] [안내문] <천도교 중앙대교단> 앞에는 "민병옥 가옥"이 있습니다.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다시 그의 아들들을 위해 지어준 집인데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그런데 이 집의 사랑채 쯤 되는 별채에 제 친구가 살아서 중학교 때에 자주 놀러 가곤 했습니다만 그때엔 그 집이 <민병옥 가옥>의 일부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ㅎ 몇번 자기도 했는데... ['민병옥 가옥 주차장'']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저택은 현재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 일부 복원해 놨는데 <남산한옥마을>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는 예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집이 <민영휘>의 집입니다. ['경인미술관 입구'] ['경인미술관'] <민병옥가옥> 서쪽 <개성만두집> 골목에는 <경인미술관>이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명인 "박영효 집"이었답니다. 다시 <천도교> 정문으로 나가면... ['운현궁' 조망] ['운현궁' 정문 앞] [안내문] ['운현궁 정문'] "구름고개에 있는 궁"이라는 의미의 큰집이라는 "운현궁 雲峴宮"을 만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크고 위엄있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집이었습니다. "김동인(金東仁)"선생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의 주무대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선 "대원군'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운현궁 모형도' '] <운현궁>은 원래 규모에서 1/3 정도로 줄어 들었답니다. 지금은 <수직사>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만 남아 있으며 <유물전시관>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는 주변 <덕성여대>와 <교동초등학교> <중앙문화센타> <김승현가옥> <서울빌딩>등이 모두 <운현궁>이었답니다. 네개의 대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 뿐입니다. ['운현궁 본채' '] <운현궁> 정문으로 들어 가면 운동장 같은 마당을 지나 본채가 나타납니다. [뒤돌아 본 정문과 '수직사'] 본채로 들어 가기 전에 뒤돌아 보면 <수직사 守直舍>가 늘어서 있는데 <운현궁>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답니다. 이 마당엔 <실험극장>이 들어 서 있기도 했었죠. ['노안당' 입구] [안내문] <노안당> 입구에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노안당'] [집무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이 蘭을 치는 마네킹이 있었는데] 2018년 4월 11일 촬영 "노안당 老安堂" <추사 김정희>와 무지 친했던 <흥선 대원군>인데 <추사체>를 흉내 낸 현판이랍니다. 이곳은 구한말 <정치1번지>로 <흥선대원군>의 주 집무실 겸 거처 였답니다.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던 그러니까 현<서울디자인고등학교> 터에 있었던 <아소당>에서 임종했는데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상을 한 번만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어가가 거둥하였느냐" <흥선대원군>이 <노안당> 속방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리다 마지막 한 많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아들 <고종>은 끝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종>에게 <흥선군>은 혹시 아버지로서 보다는 정적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노안당' 앞 정원] ['노안당' 후원] ['노안당' 뒤] 수석을 무척 좋아 했던 <대원군>이어서 <노안당> 주변엔 수석이 많았습니다. <노안당> 주변을 둘러 보고.... ['노락당' 입구] [안내문] <노락당 老樂堂>으로 들어 가면.... ['노락당'] "노락당 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명성왕후"가 1866년(고종3년)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하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결혼식인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한 유서깊은 곳이죠. 당시 "고종"의 나이가 13살로 이름은 '이재황 (아명:이명복)'이었고... 왕이 가례를 왕궁이 아닌 私家에서 올린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었지만...대원군의 위력이... ['노락당'] ['노락당' 내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는 것을 가례에서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2018년 4월 11일에 촬영한 사진을 보여 드리면...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여흥 민씨"로 "대원군"의 부인이지요. 그러니까 "고종"의 어머니가 되며..또한 천주교를 믿은 광신도로서 세례까지 받은 여인이었지요.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는 남편 대원군과 완전 대비되는 여인이었는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느낄수있습니다.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민자경"이라는 소녀를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16살 소녀 "민자경"으로 "명성왕후"가 되었지요. 권력에 문외한으로 여겨 선택한 "16살 소녀 민자경"이 "대원군"의 최대 정적이 될줄이야... 햐 ~ 그리하여 조선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지요. 아 ~~ ! 역사란 무었인가.... 2018년 4월 11일에 촬영한 사진을 더 보여 드리면.. ['철종비'의 '조대비' 알현] '강화도령' "철종"의 왕비가 당시 권력 서열 1위의 "순조의 비"였던 "조대비"를 알현하는 광경을 재현 했는데 입고 있는 '당의'가 무척 화려합니다. 고종이 왕에 등극하는 데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답니다. 왕위계승서열에서 한참 멀리 있던 <강화도령>이 왕에 오른것이라든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것과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들>에 의해 똑똑한 왕위계승자들이 일찌감치 제거된 것들이 시대가 뒤를 받쳐 줬기 때문이라 본답니다. 이에 킹메이커로 등장한 인물이 <신정왕후 조 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죠. <효명세자>의 妃 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 때문에 <흥선군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죠. 그리고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아명: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 대비>는 양자로 삼은 <명복>을 등극하게 하여 <철종>의 뒤를 이으니 <제26대왕 고종>입니다. ['양관' 조망] [안내문] <운현궁>의 일부였던 <양관 洋館>이 <노락당>에서 바로 보이는데 원래 복도로 연결되 있었답니다. <양관 洋館>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이 1911년에 지은 집이랍니다. 현재는 <덕성여대> 소유가 되어 대학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대학이 <쌍문동>으로 이전 한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준용>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의 큰아들이 <이재면>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이재황>으로 <고종>이죠.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장남이 <이준용>이니까,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인물입니다. <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족 및 대한제국의 제1대 황족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준용>인 것입니다. 저 <양관 洋館>도 쪽바리들이 친일에 감사하다고 지어준 것입니다. 다행이 47세에 일찍 죽었으니 역사에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지 않지만 <고종>의 입장에선 아주 치졸한 조카였던 겁니다. ['운현궁' 변천도] 현재 <덕성여대> 소유로 되 있는 <양관 洋館>과 <고종>이 등극하기전에 살았던 <잠저>등의 위치와 없어진 자리를 알수 있는 평면도입니다. <영로당>은 현재 <김승현가옥>과 <일본공보문화관>으로 변해 분리 되었고, <고종의 잠저>는 <삼성>이 인수해 <중앙문화센타>가 되었고, <洋館>과 앞뜰은 <덕성여대>가 되었습니다. 이 평면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남쪽은 <교동초등학교>로 변했습니다. ['노락당' 뒤] <노락당>과 <이로당>은 복도로 연결되 있고 ['이로당' 입구] [안내문] <노락당> 뒤에는 "이로당 二老堂"이 있는데 <대원군 부부>가 생활하는 안채 였답니다. ['이로당'] "이로당 二老堂" 앞에는 수조가 있는데 <운하연지 雲下硯池>라고 쓰여 있는듯 한데 제가 본 한자가 맞는지 짧은 한자실력이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아마도 화재예방을 위한 수조라고 생각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1898>과 <부대부인 민씨 1818~1898>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오래 살아 결혼 60주년 기념인 <회혼례>까지 올렸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 예식을 거행 했답니다. 조선 조정은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고 있었는데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대부인 민씨>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감사 미사를 바로 이곳에서 올렸답니다.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는 남편인 <대원군>의 묵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죠. 어쩌면 <대원군>은 공처가 였을지도 모릅니다. ㅎ 또는 그도 천주교를 믿었는지 모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당시에 <운현궁>에서 천주교 미사를 올릴수 있겠습니까? ['이로당' 뒤뜰 우물] <이로당> 동쪽 뜰로 나가면 우물터가 있고, 절구도 하나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건 "무승대 茂承臺"라는 돌받침대입니다. <대원군>이 <난 蘭>을 무척 좋아했다는 건 모두 알지요. <대원군>의 <난 蘭> 그림은 유명합니다. 그는 <난 蘭>을 낮에는 <이로당 대청마루>에 두고 즐겼으며, 밤에는 이곳 <무승대 茂承臺>로 옮겨 관리 했다네요. '무성할 茂'와 '이을 承'을 쓰는 걸로 봐서 蘭이 무럭무럭 잘 자라라는 의미인듯.... <무승대 茂承臺> 뒤에는 냉장고 역활을 하는 <석빙고>같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경백비'] ' "경송비 慶松碑" <고종>이 어릴 때 오르내리며 놀던 소나무를 기리는 비석이랍니다. 왕에 오른 후에도 연을 날리다 연줄이 소나무에 걸려 올라 가곤 하던 정든 소나무여서 '정2품'의 벼슬을 소나무에 내렸는데 그 소나무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고 비석의 위치도 여기가 맞는지 어딘지 확실히 알수 없다는군요. 우측 담장 너머가 <고종>이 살던 잠저였는데 지금은 <삼성> 소유의 <중앙문화센타>로 변했고 비석 뒤 담장 밖으로 조금 보이는 집이 <영로당>으로 원래 <이로당>과 복도로 연결되 있었는데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 부부>가 거주하다가 그들의 아들 <이준용>이 <김승현>에게 넘겼다고...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이로당' 뒤 '영로당'] <이로당> 뒤에 있는 <영로당>은 원래 복도로 연결되 있었답니다. 지금은 완전 분리되어 담장 밖에 있는데 잠시후 <운현궁>을 나가서 찾아 가 보겠습니다. ['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 <이로당>에서 옆에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들어 가 보았습니다. 유물은 특별히 눈에 띄는게 없고 마네킹이 눈길을 끌더군요. <대원위대감 흥선군 이하응>과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대부인 민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기념미사를 <운현궁>에서 올렸답니다. ['대원군' 그림과 교지] <추사 김정희>와 매우 가까웠던 <대원군>은 <추사>의 글과 그림을 좋아하며 난을 치곤 했다지요. ['명성왕후'와 '고종'] ['명성왕후'와 상궁] <명성왕후>의 얼굴은 초상화나 사진으로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게 없답니다. 언제나 암살 위험에 놓여 누구인지 모르게 얼굴을 밖에 노출하지 않았다죠. <명성왕후>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수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별볼일 없는 소녀라서 며느리로 맞아드렸는데, 그녀가 <권력의 화신>이 될줄이야~~ ['야외공연'] <운현궁>을 둘러 보고 나오는데 야외공연을 하더군요. 코로나로 운신 못하다가 다시 재개한다고.... <洋館>과 <古宮>...그리고 난타공연....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어켜 30여분 관람을 했습니다. ['영로당' 입구] <운현궁>을 나와 <재동사거리>로 조금 올라 가면 <서울빌딩>과 <일본대사관공보문화원>이 보이는데 저곳까지 예전엔 <운현궁>이었답니다. 특히 <일본대사관공보문화관> 자리는 "일본헌병초소"가 있던 자리로서 일본놈들이 <대원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일본헌병초소였답니다. <운현궁 담>이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영로당' (김승현 가옥)] "김승현 가옥"이라고 안내하며 분리되 있지만, "운현궁 영로당 雲峴宮 永老堂"입니다. 이 집은 <운현궁 이로당>과 복도로 연결되 있었다는건 조금 전 도면에서 확인했습니다. 이곳에선 <흥선대원군>의 큰아들인 <이재면 부부>가 살았답니다. <고종>의 친형이 살던 집인거죠. 그후 <이재면>의 장남인 친일왕족인 <이준용>이 <김승현>에게 팔아 먹었답니다. <운현궁>은 해방후 왕족의 몰락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상당부분 분할되어 팔렸는데 <영로당>은 <이승만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씨>에게 팔려 현재는 <김승현가옥>이라고 한답니다. <김승현씨>의 아들이 <김&장법률사무소>의 창립자 <김영무씨>이죠. 그러니 현재는 <김영무씨> 소유가 되 있다는겁니다. ['재동 사거리'] <재동사거리>로 올라 가서... [뒤돌아 본 '일본홍보문화관' (헌병초소 터)] 뒤돌아 본 <일본대사관 홍보문화원>입니다. 저기까지 <운현궁>이었는데 쪽바리들이 차지하며 <일본헌병초소>를 만들어 <대원군>의 동태를 감시했다는거 아닙니까. ['세번째구간-계동궁터에서 여운형집터까지 실트랙] 3."계동궁터-관천대-휘문고터-경우궁터-한학수집터-북촌문화센타- 헌법재판소-이상재집터-박규수집터-재동백송-여운형집터-계동사거리" ['계동 골목' 입구]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용한 <계동 골목 입구>입니다. 이 골목은 <재생동천>이 흐르는 개천인데 복개되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그룹 본사'] <현대그룹 본사>가 있는 이곳이 제가 다닌 "휘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이죠. 이 터는 원래 "계동궁 桂洞宮"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宗家여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랍니다. <갑신정변> 때에 <고종>과 <명성왕후>가 피신 한 곳이기도 하죠. 또한 이곳엔 조선 초기부터 "제생원 濟生院"이라는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이 있던 자리랍니다. 여기에 있던 학교를 다녔는데도 당시엔 이런 내력을 몰랐습니다. ㅎ ['관상감 관천대'] [안내문] <현대사옥> 우측 앞에는 "관상감 관천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때 "볼재"라고 불렀고 교가에도 <볼재>는 등장합니다. 1학년8반 옆에 버려진 유물처럼 있었는데 이게 <보물 제1740호>가 되었군요. 자세한 내용은 위의 안내문을 참고 하고... 《매천야록》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전 고종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신기로운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조금전에 들렸던 <운현궁 雲峴宮>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것입니다. 〈…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여기서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으로 천문지리를 맡아 보는 관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서운관> 자리에 <운현궁>이 들어섰는데 "금상", 즉 <고종(高宗)>이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매천야록》은 이후 <안동김씨> 일족의 횡포와 그에 저항하는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옛 휘문고등학교>와 <현 현대그룹>이 있는 자리는 분명 "명당" 자리인듯합니다. ㅎ ['희중당' 터] 후문으로 들어 가면 당시 본관이었던 <희중당>이 있었던 자리는 주차장과 스포츠센타로 변하고 그 위에는 <원서공원>을 조성 해 놨군요. 좌측 건물이 <휘문중학교>가 있었던 건물이고 우측 건물이 <고등학교>가 있던 건물입니다. ['휘문중학교 터'] 중학교가 있던 자리엔 <현대엔지니어링>등 현대그룹이 자리하고 있는데 옛날 사진을 보면... [앞에 있는 3층 건물이 <희중당>으로 교무실 교장실 등이 있던 본관이었으며 뒷쪽이 <휘문중학교>입니다. <희중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3층건물이었답니다. 학교 다닐 땐 이런것도 몰랐는데..ㅎ ['휘문고 정문' 앞] <현대그룹 본사(옛 휘문고)> 정문으로 나가면 건너편의 집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데... 저 집은 <을사늑약>을 체결 할 당시 <이완용>등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려고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던 <한학수 참정대신>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또한 해방 3일후 우리나라 최초의 우익 정당인 <고려민주당>이 결성된 곳이라고, 학창시절엔 라면집, 떡볶이집 등등이 있었던 곳으로만 기억되는데 훌륭하신 분이 사시던 집이라니...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이라는데 이 곳이 주목받아 문화재로 지정되려고 하자 재산 행사권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집주인이 재빨리 집을 헐고 현재의 저 건물을 지어서 옛 모습은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휘문고 정문' 앞 '계동골목'] <제생동천>이 흐르고 있는 복개된 <계동 골목>으로 나와 <중앙고>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옛 휘문중학교> 자리는 "경우궁 經祐宮"이 있던 곳입니다. <정조>의 마지막 후궁이며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이 있던 곳인데 <경우궁>은 <고종>이 현<청와대> 옆 <칠궁>으로 이전해 놨죠. <수빈 박씨>의 무덤이 <휘경원>인데, 현재의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자락에 있는 <휘경중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이름이 <휘경동>이 되었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광릉> 근처로 이전해 놨더군요. 그래도 가끔 母校를 찾는데도 올때마다 새롭습니다. ['북촌문화센타'] [안내문] <옛 휘문중고등학교> 운동장 건너편에는 "북촌문화센타"가 있습니다. <北村 답사>를 하려면 먼저 이곳부터 들려 안내지도와 안내문을 받아 답사를 하는게 좋겠습니다. 요즘 <북촌탐방>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까지도 무지 인기있습니다. ['민형기 가옥'] <북촌문화센타>는 <민씨세도가>의 대표주자 중에 한명인 반민족친일파 <민형기>의 집이었답니다. 당시 <탁지부>의 재무관을 지냈습니다. <민형기 집> 보다는 "계동마님 댁"으로 더 알려져 있죠? <민형기>의 외아들인 <민경휘>와 결혼한 소녀 <이규숙>이 <계동마님>입니다. 유명하게 된 동기는 <이 계동 마님이 먹은 여든살>이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펴 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에서 그녀는 <민형기>의 며느리로서, <민경휘>의 아내로서 삶을 진솔하게 적어 내렸고 이 집을 짓는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집은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고... ['재동초등학교'] <북촌문화센타>를 나와 <계동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고갯마루에 <재동초등학교>가 있고... <재동초> 출신 동창들 무지 많습니다. ^.^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로 들어 갑니다. <경기여고>가 있다가 <창덕여고>가 들어 서고 이어서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았습니다. 경비실에서 출입명부를 적고 우측으로 들어 가면... ['이상재 집터'] "월남 이상재 선생 집터 月南李商在" 표지석이 있습니다. 선생은 'YMCA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장', '조선일보사 사장'등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 운동에 헌신한 민족주의자이시죠. ['헌재 소공원''] ['제중원 터'] ['박규수선생 집터'] <헌재> 우측 뒤에는 <헌재 소공원>이 있는데, <천연기념물8호>인 <백송>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제중원 터 濟衆院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제중원>은 <미국공사관>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의 영향으로 1885년 <홍영식>의 집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랍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명이었죠.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고 <제중원>까지 운영하게 되었답니다. <명성왕후>로 부터 <운산금광>등 어마어마한 툭혜를 받았답니다. <재중원>은 후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이름에도 오르게 되었습니다. "박규수선생 집터" 표지석도 있는데,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시지요. 개화사상을 앞장서 주창한 분으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선생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웠답니다. 이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과 <프랑스 파리>에서 염문을 뿌린 <3.1운동 33인> 중에 한명이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의 집도 있었었답니다. <나혜석>의 "정조유린에 대한 소해배상 소송" 유명하죠? ㅎ 궁금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여기 클릭해서 들어 가 보세요 "[덕숭산 유산기] 新女性과 女僧" ['헌법의 수호자' 상] <헌법 수호자 상>이 눈길을 끌고... ['윤보선 家'] <헌재 담장>과 맞붙어 있는 <윤보선 家>가 조금 보이는군요. <윤보선 家>에 대해선 <1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만 출입이 않되더군요. 여기서도 내부는 안보이고 <북촌> 제1의 가옥 다웁게 어마무시한 지붕만이 주변을 압도하고 ['재동 백송'] [안내문] "재동 백송 齋洞白松 (천연기념물 제8호)>" 지금까지 본 백송 중에세 제일 큰 백송인듯... ['창덕여고 터'] 들어 올때 못본 "창덕여고터" 표지석이 나갈 때에 보이는군요. 제가 학교 다닐때 학생회장 선거를 할때 에피소드 하나 들려 드리면... 어느 후보가 정경발표에서 "저를 학생회장에 당선 시켜 준다면 앞에 보이는 저 '창덕여고'로 육교를 놓고 지하도를 만들겠습니다 !!"라고 하던게 기억 납니다. ㅎ ['계동 사거리'] <헌법재판소>를 둘러 보고 다시 <계동사거리>로 돌아와 직진해서 앞 언덕에 표시된 <여운형 선생 집터>를 다녀 오도록 하겠습니다. ['여운형 집터'] "몽양 여운형 선생 집터 夢陽 呂運亨 家址" 선생의 생가는 <양수리 두물머리> 지나 있어 두어번 다녀 왔습니다만, 서울생활을 할때 이곳에서 선생이 살았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다니던 학교 뒤에 있었는데도...ㅠ 표지석은 길 건너편에 설치했는데 사시던 집은 건너편에 보이는 현재의 칼국수집이었답니다. <휘문중학교> 뒷담과 붙어 있었군요. 해방 이후 <대한민국건국준비위원회>의 첫번째 군중 집회를 <휘문중고등학교>에서 열고 첫 연설을 하셨다는군요. 그 이후 <혜화동 로타리>에서 암살 당하셨죠. ['북촌 제1경'] <여운형선생 집터> 고갯마루에서 <창덕궁>을 조망하는게 "北村八景 중에 第一景"이라는 군요. ['네번째구간-여운형집터에서 창덕궁까지 실트랙] 4."계동사거리--박흥식 옛집-김성수집-북촌구경-배렴가옥-석정보름우물- 북촌마루-고희동가옥-원서동빨래터-백홍범가옥-송진우집터-경추문" ['계동 골목'] 다시 <계동 골목>으로 돌아와 <중앙고>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휘문고> 출신 문학가 중에 <봄봄><동백꽃>등등의 단편소설을 쓴 <김유정>을 모르시는 분은 없지요? 그 <김유정> 선배가 <휘문고보> 다닐때 이 골목 어느 곳엔가 있었다는 어느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라는 기생을 보고 한눈에 뿅~가서 어마무시한 짝사랑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아시나요? ㅎ 궁금하면 여기 클릭 "ITX 청춘열차'를 타고 가는 '김유정문학촌'과 '금병산" ['달고나'] 요즘 <오징어 게임>이 유행해서인지 이 <계동골목>에 "달고나"가 등장했습니다. ㅎㅎ 어렸을 때 저는 "달고나" 도사였습니다. "달고나"는 설탕에 소다를 넣어 만들기에 열에 약해, 옷핀을 달궈서 찌르면 쉽게 모양을 짜를수 있죠. 그래서 "달고나" 장사가 저에겐 팔지 않았다는거 아시나요? ㅎㅎ ['계동교회' 앞 삼거리] 조금 올라 가면 <계동교회>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옛 박흥식 집'] "옛 화신백화점 사장이 살던 <박흥식 집>"이 있습니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에 전투기를 사주는 등 어마어마한 친일행위를 하며 富를 축적한 인물이죠. <和信百貨店>에 엘리베이트가 처음 설치되었기에 우리들에겐 신기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외부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아 좌측 앞에 있는 <계동빌라>5층으로 올라 가서 그 분이 살던 집이 어떠했는지 내부를 촬영하려고 했습니다만 [빌라5층에 올라 '옛 박흥식 집' 조망] 나무로 보이지 않음
[내부 사진] (자료사진)
<계동빌라> 5층에 올라가 촬영을 시도했습니다만 숲으로 가려있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웹써핑으로 구한 내부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이 집이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변형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선 그렇게 크고 화려하지는 않은 주택이군요. 그런데 <한보그룹> 총수 <정태수씨>를 기억하시나요? 지난해인가 중남미 에콰도르인가 어디서 죽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박흥식>이 살던 집을 인수하여 이 집에서 <한보그룹>을 일제시대 <화신백화점>처럼 일구어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정태수씨>가 살았다는거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집으로 이사하여 살았다는거 아시나요. 그리고 선거에서 낙선 한후 고작 이 집에서 1년여 살다가 이 집에서 하늘나라로 갔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특별한 주택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 이 집을 왜?좋아 했을까 잠시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올라 가 조망하며 명당 자리인지 풍수지리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 다시 <계동교회> 앞으로 내려와 조금 올라 가면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를 만납니다. 제가 학교 다닐땐 <대동상고>였는데....그러니까 <계동골목>에 있었던 3개 고등학교 중에 하나이죠. 우측으로 들어 가면.... ['김성수 집'] <대동세무고등학교> 정문 앞에 "인촌 김성수선생 고택"이 있습니다. <동아일보><경성방직><삼양사>등의 회사를 품에 안고 <고려대><중앙고>등 학교도 품고 <부통령>까지 지낸 <인촌 김성수선생>이 살던 집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일제에 국방헌금으로 내며 <박흥식>등과 함께 전투기를 사주기도 하며 친일을 독려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해서 씁쓸함을 지울수 없습니다. 여기선 집의 규모를 알수 없어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으로 올라 가서 집구경을 합니다. [정원엔 정자가 있고 <김성수선생 부부 흉상이 설치되 있군요.] [선생의 부모 동상인듯 한 동상이 보이고..]. [본채 조망] <인촌 김성수선생> 집은 저택입니다. 엄청나죠?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에선 누구나 훤히 드려다 볼수 있습니다. 더 이상 언급 않겠으니 각자 나름대로 구경하시기 바람니다. ['옛 박흥식 집' 조망] 그런데 조금 전에 <박흥식-정태수-정주영 집>에서 언급한 그들의 집이 여기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계동교회> 뒤로 ♬ 언덕 위의 하얀 집 ♬ 보이시나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산줄기에 <한양도성>의 중심부로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건물들이 있어 돋보이지 않지만 옛날 주변 건물들이 없었을 땐 ♬ 언덕 위의 하얀 집 ♬ 이었을 것이고, 한양도성을 훤히 굽어보며 호령하는 곳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풍수지리가들이 말하는 "명당" 자리였을 거라고.... 그러니 <박흥식-정태수-정주영>등 당대의 부자들이 두 다리 펴고 누웠겠죠. <정주영회장>은 현재도 그대로 있는 <청운동>에 살다가 대통령선거 때에 이리로 옮겼답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때에 이곳 <北村>으로 집을 옮긴 사례가 많죠? <이명박씨>, <이회장씨>, <정주영씨>....당선 확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군요. ㅎㅎ ['북촌구경(鏡)'] [내부]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다시 <계동골목>으로 내려오면 조금 요란한 모양의 <북촌구경(鏡)> 건물이 있어 들어 가 보는데 <거울>을 주제로 꾸며놨더군요. ['1980년대 계동골목'] <북촌구경(鏡)> 벽에는 대형 거울을 설치해 1980년대 <계동골목>을 비추고 있어 골목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는데, 거울 속에 비치는 <사진 찍는 파란문>이 보이시나요? ㅎㅎ ['배렴 가옥'] ['배렴 가옥' 내부] [안내문] "배렴 裵濂 가옥" <배렴 裵濂 선생>은 우리나라 동양화의 거봉이시죠. 특히 산수화와 화조화를 잘 그리시고 <홍대 교수>였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석정보름우물'] [안내문]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조금 못미쳐서 "석정보름우물 石井十五井"이 있습니다. 15일간 그러니까 보름 동안은 맑은 물이 잘 나오고, 나머지 보름 동안엔 흐린 물이 나왔다고... 이런게 여기 있는줄 저는 처음 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중앙고 정문'] <계동골목>의 맨 꼭대기에 있는 고등학교입니다. <휘문>은 <계동골목> 입구에 있으니 꼭대기에 있는 <중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등하교하는데 다리가 좀 아플거라고 놀리곤 했죠. 이 학교 학생 중에 권투선수 <홍수환>과 <현대중공업 회장>인 <정몽준>이 저와 같은 연배입니다. ['고하길'] ['북촌마루'] <중앙고> 정문에서 동쪽 <창덕궁> 방향으로 넘어 가는 길을 <고하길>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동창생이 살았는데 농구부 <김근ㅅ>와 체조부 <박범ㄱ>의 집이 근처에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깨끗하게 변했으며 길도 넓어졌습니다. ['북촌 제2경'] 고개를 넘어 가면 "北村八景에서 第二景"이라는 곳을 만나며 <창덕궁>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탐방하는데 유의해야 하는 곳이어서 우측으로 내려가 올려다 보면... ['송진우 집터'] 좌측 <레스빌>이라는 빌라는 "송진우 선생 살던 집"이었답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계의 거목이시죠. 선생의 호가 <고하>여서 이 길을 <고하길>이라고 한듯... 좌측 가운데 <고희동 가옥>을 둘러 보고 골목으로 올라가 <원서동 빨래터>와 <백홍범 가옥>을 둘러 보고 우측 골목으로 내려 옵니다. ['고희동 가옥']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신 "고희동 선생"이 사시던 집이랍니다. ['고희동 가옥'] [안방] [작업실] [안내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신 "고희동 선생"은 <휘문고보> 미술선생님도 하셨다는데 처음 알았습니다. 서양화를 하시다가 다시 동양화로 전향하기도 했다는군요. 이 가옥은 <서울시>가 인수하여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하고 개보수를 하여 일반에게 무료 공개하고 있더군요. 횡하니 둘러 보고...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원서동 빨래 터'] [안내문] "원서동 빨래터"에 대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원서동>인데 한자로 <苑西洞>으로 씁니다. 쪽바리들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하시키기 위해 <秘苑> <昌慶苑>으로 만들었죠. 그러면서 이 동네의 이름을 <秘苑> <昌慶苑>의 西쪽에 있다고 <苑西洞>으로 불렀답니다. <원남동 苑南洞>도 같은 맥락이고 ['빨래터'] ['창덕궁' 내부 조망] [돌다리] 빨래터에 내려 가 보았더니 <창덕궁> 안의 활터가 보이고 활터로 들어 가는 돌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발원하여 흐르는 <북영천>은 <청계천>까지 복개가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선원전 외삼문'] 빨래터 옆에는 "신선원전 新璿源殿" 정문인 <외삼문>이 있으나 굳건하게 잠겨있습니다. 역대 왕들의 <어진>이라고 하는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일반에 공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홍범 가옥'] [안내문] "원서동 백홍범 가옥 苑西洞白鴻範家屋" 이 가옥은 조선시대 말 궁에서 일하던 상궁 중에서도 지체 높은 상궁들이 살던 집이랍니다. <백홍범>이라는 사람은 이 집의 소유자일 뿐이니 자세히 알 필요는 없겠고... 한때 <장희빈>이 살던 집이었다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옥은 <한샘>이 인수해서 디자인센타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한샘 DBEW 연구소>라고 하는데, "Design Beyond East and West"라는 곳으로 국내최초의 사설 디자인 진흥기관이라고 합니다. ['신선원전 외삼문'] ['신선원전' 줌인] <백홍범 가옥> 정문 앞에서 <신선원전>을 조망하고 골목을 내려 가면... ['궁중음식연구원'] [안내문] TV에 자주 나왔던 <황혜성씨>와 며느리 <한복려씨>가 운영하는 궁중요리 학원이더군요. 학원비가 수백만원씩 하더군요. ['원서동길'] ['요금문'] "창덕궁 요금문 曜金門" 이 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 같은 궁인들이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거나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중종실록>을 보면 <인현왕후>가 이 문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쫓겨날 때 "중궁이 흰 가마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가서 친정으로 돌아가다."라고 기술되 있는데 <장희빈>이 등극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지요. 또한 <숙종 20년>엔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어 궁으로 들어 갈때 "<인현왕후>가 오시(午時)에 옥교를 타고 의장을 갖추고서 요금문(耀金門)으로부터 서궁(西宮)의 경복당에 들어갔다."라고 기록되 있는데 이때의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고... 또한 <효명세자 이영(순조의 아들)>이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요금문>을 통하여 나가 걸어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는 2살 많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를 만나러 조금전에 들렸던 <헌버재판소> 자리에 있었다는<박규수 집>으로 다니던 문이었답니다. 세자는 그를 친구 이상의 관계로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원서동길'] ['경추문'] 조금 더 내려 가면 "경추문 景秋門"을 만나는데 <창덕궁>의 <西門>이죠. 지금은 현판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은덕문화원'] ['금위영 터'] <경추문> 앞에는 "금위영 서영 禁衛營 西營"표지판이 <마고카페>라는 건물 벽에 부착되 있더군요. 요즘말로 <대통령 경호실 西館>이 <창경궁> 서쪽문인 <경추문> 앞에 있었던거겠지요. ['북촌 제1경'] [북촌8경 중에 제1경]이라는 <여운형선생 집터>가 있었던 언덕을 다시 만나고... ['원서공원' (개천절 행사 발상지)] 이어서 "원서공원"을 만나는데 "개천절행사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원서공원>은 <옛 휘문중고등학교 희중당>이 있던 곳인데 <현대그룹>이 주차장을 만들고 위에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박인환 집터'] <목마와 숙녀>라는 詩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의 집이 있었었다는 곳입니다. 훤출한 키에 양복을 즐겨 입고 백구두를 신고 명동을 활보해서 <명동 빽구두>라는 별명도 얻으며 여대생들에게 무지 인기가 있었던 <박인환 시인>...... 그는 술을 엄청 사랑하여 술병으로 이른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죠. 그래서 그의 詩에는 "술"이 무지 많이 등장합니다. <날개>를 쓴 <이상>의 장례식에서 완전 녹초가 되게 술을 퍼 마시고 드러 누웠답니다. 그의 詩들은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등 젊은 시절 <박인희>에 의해 불러져 빅힛트했죠. 마지막으로 <무교동 선술집>에서 쓴 <세월이 가면>이라는 가사가 귓전에 아른거리는군요. 이 詩를 쓰고 일주일 후 저 세상으로 가서 <망우리공동묘지>에 뭍혔죠. ['휘문중고등학교 터'] "휘문중고등학교 터 徽文中高等學校址" 표지석이 어디엔가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곳곳을 뒤져 봤지만 그동안 못 찾았는데 드디어 오늘 찾았습니다. 학교 뒤 이런 구석...사람도 다니지 못하는 화단 안에 설치해 놨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학교들은 대부분 교문이 있었던 자리에 설치했는데, 어찌 이런 구석에 설치 했을까 허~참 ['원서공원'] ['원서공원'] [옛 '휘문고 본관'이었던 '희중당'] <원서공원>은 <현대그룹>이 주차장과 스포츠센타를 만들고 그 위에 조성한 근린공원입니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옛날엔 <휘문중고등학교> 본관인 <희중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 그 학교는 강남으로 이사 갔지만 이곳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수학하던 시절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창덕궁' 조망] 주차장 위에 조성한 공원이어서 <원서공원>에선 <창덕궁>을 조망하기 쉬워졌습니다. 옛날엔 <창덕궁> 울타리가 느슨해서 무단 출입이 가능 했었는데...ㅎ ['돈화문' 조망]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주변도 무지 변했습니다. 현재 매표소가 있는 곳 앞에는 <충정공 민영환선생 동상>이 있었습니다. <고종>이 자신에게 자결을 하면서 까지 충성한 <민영환>이어서 <창덕궁> 정문에 세운 것이었죠. '백성들아 이 사람처럼 나한테 충성하라~'라고 하는드시.... 지금은 <조계사> 옆 <민영환 집터>가 있었던 <우정총국> 뒤에 세워놨더군요. ['사도시 터'] <원서공원> 정문 앞에는 "사도시 터"표지석이 있고 ['관상감 터'] "공간 사옥 空間社屋"이라는 건물 앞에는 "관상감 터"표지석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 <관상감 관천대>가 있으니 북촌을 한바퀴 돌아 내려 온 것입니다. ['공간 사옥'] "공간 사옥 空間社屋" 한국 건축 1세대의 스타, <김수근>의 사옥인데.... 논란도 많은 <김수근>입니다. 과거와 현대, 그리고 미래를 함게 아우러는 건축물이라고 세계적 관심을 받았습니다. 소극장이 또한 유명하죠. 소극장 <공간사랑>은 <공옥진의 '병신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사물놀이 등을 소개하며 문화운동의 발원지로 자리매김했답니다. ['돈화문'] 오랜만에 <돈화문>을 바라고 감회에 젖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까지만 해도 왕족들이 살며 들락거리던 문입니다. ['창경궁-종묘 연결터널'] 쪽바리들이 갈라 놓았던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연결하며 터널화 공사가 완료되었군요. ['비변사 터'] <돈화문> 건너편에 있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앞에는 "비변사 터 備邊司址" 표지석이 있는데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었답니다. ['금위영 터'] 건설업체로는 가장 오래된 <삼환기업>이 있는 곳에 "금위영 터 禁衛營址"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위해 중앙에 설치한 군영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익선동 골목길'] 요즘 <종로 북촌>에서 제일 뜨는 골목이라는 <익선동 골목>을 통과하여 ['종로3가'] ['단성사'] ['옛 단성사 극장'] 자료사진 ['단성사 터 역사'] "단성사 團成社"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는데.... 현재는 귀금속 백화점이 되었더군요.극장도 있고 "좌포도청"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고...ㅎ <단성사> 옆의 <소방서>는 서울에서 제일 높은 화재감시조망탑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에 고층건물이 들어서자 용도폐기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소방서> 좌측에 있는 빌딩은 <백궁다방>과 <백궁당구장>이 있었는데 제가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고... ['옛 피카디리 극장']
['옛 명월관']
"피카디리극장"은 옛날엔 <반도극장>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 이전엔 그 유명한 "명월관 明月館"이 있던 곳이고.... 추억의 <北村>을 걸으며 옛 정취를 느껴본 답사였습니다. 걸은 거리는 약13km였으며 5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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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삼청공원에서 북촌을 따라 광교까지』
                        <2부>
   <1부> 못 보신 분들은  [종로구]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 답사기 여기 클릭
 

  [전체 답사 지도] 

  ['여섯번째구간-삼청공원에서 김형태가옥까지 실트랙]                 
    6. "삼청공원-감사원-취운정-현상윤집터-동양차문화원-
        맹사성집터-북촌6경-이명박살던집-이준구가옥-김형태가옥"


  ['삼청공원 정문']                 
   
  2021년 11월 16일 (수) 맑음   
   "1부 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에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물이 맑고 <水淸>, 숲이 맑으며 <山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맑은 곳 <人淸>
  그래서 "삼청 三淸"이라 한다는 <삼청공원>의 정문을 통과하여 <감사원> 앞으로 가면...


  ['감사원']               
  <감사원>을 만나는데 <감사원> 앞에 <주한 베트남 대사관>이 있고


  ['취운정 터']                      
  <감사원> 정문을 지나 <삼청터널 입구>로 가면 모퉁이에
  "취운정 터 翠雲亭址" 표지판이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족벌 중에 변절하지 않고 청렴했던 몇 않되는 인물중에 한 분이 "민영익"인데
  그의 아버지 "민태호"가 지은 집이 <취운정>이며 대를 이어 살던 집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감사원> 주변이 <취운정>이었다고...
  <민씨 족벌 세도정치>의 대명사인 아버지 <민태호>는 <갑신정변> 때에 개화파에 의해 참살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은 <민영익>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나?
  그런데 이들과 비숫한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군 아들>은 또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인 <유길준>이 이 <취운정>에 유폐인지 여튼 숨어 살며 쓴 유명한 책이 
  "서유견문 西遊見聞"이라서 <취운정>이 일반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유길준>은 개화파였지만 결국 변절하여 일본으로부터 하사금까지 받아 챙겨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본은 친일에 고맙다고 작위까지 하사했지만 하사금만 받고 작위는 받지 않아 그나마 다행.
  *<유길준 묘>는 <하남 검단산 등산로>에 있지요.


  ['중앙중고교']                 
  이어서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여기도 찾아 봐야할 곳이 몇 있어 다음에 답사할 예정입니다.


  ['중앙중고' 조망]                   
  <중앙 중고등학교>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창덕궁>과 <신선원전>인데 다음에 근접 촬영 하기로 하고


  ['현상윤 집터']             
  <중앙중고>에서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면
  "기당 현상윤선생 집터 幾堂玄相允先生家址" 표지석이 있는데
  <현상윤선생>은 우리나라 제1호 박사이며 <중앙고보>의 교장을 지내고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신 교육자이자 문학가이시죠.
  <고려대> 총장 시절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북으로 가서 소식이 없었는데
  최근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 있는 <재북인사의 묘>에 안장되 있답니다.
  *<동양그룹 현재현회장>이 <현상윤선생>의 손자랍니다.


  ['북촌로']

  ['맹사성 집터' 가는 길]                
  <가회동>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 가면
  우측에 독특하게 한옥에 개업한 <이 해박는 집>이라는 치과를 만납니다.
  여기서 우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한화 김승연회장집' 입구']                          
  곧 바로 <한화그룹>의 <김승연회장집> 입구를 만납니다.
  앞에 있는 집이 경비실인듯 해서 경비원에게 <김승연회장댁>이 맞냐고 물으니 자기는 모른답니다.
  나도 아는데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이 여긴 왜 있지? ㅎ 알려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는가 봅니다만
  유튜브 검색해 보면 이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이나 노동자들 동영상 많습니다.


  ['북촌 정상]

  ['맹현']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북촌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는데 꼭대기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맹현 孟峴"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맹사성 집터>라고 분명히 표기하지는 않고 <맹고개 孟峴>로 표기해 놨습니다.
  여기서 좌측 <동양차문화관>으로 들어 가면....
  

  ['고불서당']               
  "고불서당 古佛書堂"이라는 집이 있는데 <古佛>은 <맹사성 선생의 호>지요. 
  워낙 유명한 사육신 중에 한분이니 선생에 대해선 생략하고...
  오리지날 옛집은 아닐테고  요즘 지은듯
  여기서 우측을 보면...


  ['동양차문화원']                     
  <동양차문화원>이 있습니다.
  <북촌 北村> 조망처로는 최고라고 자랑하는데 <맹사성 집터>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당연히 영업적인 안내로 여겨지는데 조망을 위해선 입장료를 5,000원 내야 한다고 하네요.
  차 한잔 써비스로 준다고....물론 카페 이용료로 차 한잔 마시며 조망하는 비용으로는 비싼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조망을 할수 있으니 시간도 없어 그냥 패스하고


  ['북촌 한옥마을']                  
  <동양차문화원> 우측 골목을 빙 돌아 가면 
  우측으로 첫번째 골목을 만나는데


  ['북촌팔경 중 6경']                       
  첫번째 우측 골목이 <북촌8경> 중에 <제6경>이라는 한옥촌이 남산을 바라보며 펼쳐져 있습니다.
  이 근처에 <북촌4~7경>이 몰려 있다는데 모두 답사하지는 못하고...
  이 한옥촌은 일제시대에 <정세권>이라는 건축업자가 지어 분양한 한옥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집 모양이 거의 같고...


  ['이명박 전대통령 살던 집']                      
  두번째 골목에는 <이명박 전대통령>이 대선 후보일때 길지 않은 기간동안 살았다는 집이 있는데
  <북촌로 11가길 39번지>로 '카카오지도'에는 <취운정스파스위츠바이락고재>라고 표기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북촌>에 살아야 한다는 점괘가 있는지 <이회창 후보><정주영후보> 등도 
  <북촌>으로 일시 이사를 했죠. 결과는...ㅎ
  뒤에 <이준구 가옥>이 보이는데...


  ['이준구 가옥']

  [안내문]                           
  "가회동 이준구 가옥 嘉會洞 李俊九 家屋"
  현재 이 집의 소유자가 <이준구>라는 사람이니 그에 대해선 알 필요 없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중요하죠? ㅎ
  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익>이 세도가의 위세를 떨치며 지은 일제시대 집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집은 원래 집의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하니 원래 이 집 규모를 짐작 할수 있겠습니다.
  일제시대에 개성에서 신돌이라는 화강암을 가져오고, 프랑스산 기와를 수입해서
  이런 프랑스식 양식에 한옥을 약간 가미한 대저택을 <가회동> 북촌 꼭대기에 지었으니....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부정축재를 한 <민씨 족벌>의 한 단면을 보는듯 해서 좀 씁슬...
  이 집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 <이명박 살던집>  윗쪽 끝에서만 보이더군요.
 

  ['가회동 북촌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김형태 가옥'] 

  [안내문]                 
  <서울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된 "김형태 가옥"을 만납니다.
  <김형태씨>도 현재 이 집 소유자여서 알아 볼 필요가 없고
  원래 소유자는 "이달용 李達鎔"이라는 놈이군요.
  이 놈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완>의 아들인데, 그러니 <고종>의 오촌 조카가 되는 놈이죠.
  왕족이면서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서며 친일행위를 한 나쁜놈 중에 나쁜놈, 치졸한 놈이죠.
 

  ['일곱번째구간-김형태가옥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실트랙]          
    7. "김형태가옥-가회동성당-가회동한씨가옥-진단학회터-손병희집터-
        백인제가옥-최승희집터-성삼문집터-김옥균집터-정독도서관"
 

  ['가회동 성당']  

  [안내문]                       
  <김형태 가옥>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가회동 성당"을 만납니다.
  "주문모 신부 周文謨"가 조선에 와서 첫 미사를 올린 곳이라는군요.
  <주문모 신부>는 <중국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랍니다.


  ['재동초교' 뒤]                    
  <가회동 성당>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좌측에 <재동초등학교> 뒷모습니 보이기 시작하는데
  조금 못미쳐 좌측에 <휘겸재>가 있습니다.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嘉會洞韓氏家屋)"
  밖에서 보기엔 좀 큰 일반 한옥 같이 보이나 안에 들어 가 보면 어마어마 크고 너른 대저택입니다.
  어찌 대저택은 거의 대부분 친일파들 중에서도 최고 악질 친일파들의 집인지...에그~~
  지금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을 해야 안으로 들어 갈수 있어 들어 가 보는 건 생략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후 방문 할 <백인제 가옥>을 지은 놈이 이 집 주인이었던 <한상룡>이기 때문입니다.
  <한상룡>은 우리나라 최초 한성은행을 설립 운영했지만 악질 고리대금업자라 할수 있습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고 할 정도...
  이 쌔끼 얼마나 친일 행위를 했는지 집 이름도 <한상룡 가옥>이라 하지 못하고 <한씨가옥>이라
  했겠습니까. 잠시 후 <백인재 가옥>에서 더 자세히 알아 보겠지만
  이곳 북촌의 대저택들은 거의 대부분 다 친일매국노들의 집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재동초' 뒷골목]                   
  <한씨가옥>을 지나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뒷골목을 만납니다.
  이 골목으로 50m 정도 조금 들어 가면...


  ['진단학회 터']                         
  "진단학회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락고재 樂古齋"라고 하는 한옥집이 <진단학회>가 일시 있었던 곳이랍니다.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라고 주장 합니다만
  일부 식민사관등에서 탈피하지 못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단체였죠.


  ['가회동 주민센터']                
  <재동초등학교> 됫골목 <진단학회 터>에서 다시 나오면, 건너편 좌측엔 <가회동주민센타>가 있고
  우측엔 <북촌박물관>이 있는데 골목 입구 <북촌박물관> 앞으로 가면...


  ['손병희선생 집터 표지석']                  
  "손병희 孫秉熙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손병희선생>이 살던 집은 이 빌딩 <북촌박물관> 뒤 골목 안에 있습니다.
  

  ['손병희선생 살던 집']                                   
  "손병희 孫秉熙 선생 살던 집"
  극열 친일파가 아닌 분으로는 아마도 유일하게 대저택에서 사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손병희선생>도 그렇게 좋게만 볼수는 없지만...
  여하튼 우리나라 <동학>의 3대 교주로 <동학>을 <천도교>로 일으켜 세우며 많은 헌금이 들어 와 
  교세가 확장되어 부유하게 된것은 틀림없는듯 합니다.


  ['백인제 가옥']                 
  <손병희선생 살던 집>에서 조금 더 들어 가면 "백인제 가옥"을 만납니다.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설립자인 <백인제>가 살던 집이었는데
  현재는 <서울시>가 매입하여 개보수 해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2호>로 지정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없으며 월요일엔 휴관이니 시간 맞춰 가야 겠습니다.
  <北村>에서 두번째로 으리으리한 한옥이 되겠습니다.
  잠시 후 들릴 <윤보선家>가 제일 크고 으리으리 한데 들어가 관람 할수는 없으니 여기가 최고.
  조금전 <휘겸재(한씨가옥)>은 세번째?    
   

  ['중문']

  ['백인제 가옥' 안내문]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중문을 만나는데 중문은 벽돌문으로 되 있군요. 
  <백인제>는 최근까지 집 소유자일 뿐이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누군인지가 중요 하겠죠?
   

  ['사랑채']                    
  이 저택의 역대 소유자는 크게 네명으로 구분된답니다.
  이 가옥을 짓고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한상룡 韓相龍 (1880~1947)"이랍니다.
  친일매국노 중에서도 첫번째 매국노인 <이완용>이 그의 외삼촌인데 그 끝빨로 우리나라 초창기 
  금융가를 지배한 인물입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 할 정도였답니다.
  친일 왕족인 <고종>의 종형 <이재완>을 내세워 설립한 <한성은행>의 총무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경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신임을 얻어 1923년에는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행장)>으로 취임하고,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이 되었으며,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찌>의 동상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며 일본에 전투기를 사 주는등 뼈빠지게 친일행위를 했죠.
  당시 은행이라는게 고리대금업자였죠. 우리 백성들의 땀과 피를 고리로 빨아 먹으며 떼부자가 되어
  지은 집이 이 집과 조금 전 <휘겸재>등 여러 채랍니다.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을 정도이니 최고급 자재를 사용 한것은 물론 고유 한옥과 현대적
   유리창문을 조화시켜 그야말로 명품 개량 한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허구한날 연회를 배풀곤 했다는군요.
 

  ['작은 사랑채']                    
  <사랑채> 좌측엔 <작은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
  두번째 이 집 주인은 "최선익 1905~?"이라고 하는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 언론인이었답니다.
  <조선일보> 주주이자 기자로 활약하다가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여운형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답니다. 매물로 나온 이 집이 더러운 친일매국노의 집이란 걸 알면서도
  한옥에 대한 애착으로 인수하여 집을 새로 수리하고 살다가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백인제>에게
  이 집을 1944년에 매각하고, 이어서 터진 <6.25 때>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수 없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작은사랑채'-'영상 상영실']                     
  <작은사랑채> 끝 방은 현재 <영상 안내실>로 이용하고 있더군요.
  영상에는 <백인제-최경진 부부>의 장녀가 여러 일화를 소개 하고 있었습니다.
  


  [기념사진]                    
  이 집의 세번째 주인이 "백인제 白麟濟 (1898~?)" 입니다.
  <백인제>에 대해선 안내문에 잘 설명 되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사진 속에 홍일점 여인이 그의 부인인 "최경진 1908~2011"이랍니다.
  <최경진여사>는 일본 <나라고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배화여고> 선생을 할때 <백인제>와 
  결혼했다는데, 남편이 납북 된 후 <백병원>을 실제 일군 사람이랍니다.
  <최경진 여사>는 103세까지 장수했는데 뉴스였지요.
  사진 속의 인물 중에 제가 확신을 갖고 알수 있는 분은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에 앉아 있는 
  <춘원 이광수>이고. 가운데 <최경진여사>의 우측에 않아 있는 <서재필>입니다.
  <백인제>는 윗줄 좌측에서 다섯번째라고 하는데 정확치 않습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가로 교과서에 까지 실리며 포장됬지만, 일찍이 <미국 국적>을 취득한 
  미국사람이며, 스스로 미국사람이고 싶어하며 조선을 우습게 본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죠.
  <갑신정변> 쿠데타의 주역 중 최연소 22살의 <서재필>은 일본으로 토꼈다가 미국에 귀화하고..
  미국에서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여튼 의사 인턴까지는 해서 <백인제>와 더 가까운척 한듯..
  여하튼 당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초대되어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틀림없네요.


  ['백인제-최경진 결혼사진']                        
  신랑 <백인제> 우측 옆에 흰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춘원 이광수>랍니다.
  사제지간이라고 하는군요.
  여튼 일제시대 무지 인기있는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는 떼돈을 벌었나 봅니다. 
  진료를 받을려는 환자들이 한달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니....
  그러니 이런 집도 사들이고, 대학도 설립하고 <백병원>이라는 종합병원도 만들고....
  <백인제>는 특히 사냥을 좋아해서 <북한산>등으로 사냥을 나가 잡은 맷돼지 등으로
  이 집 정원에서 미국국적의 <서재필>등을 초대해 바베큐 파티를 자주 열었다고 하네요.



  [안내문]                 
  <백인제-최경진 부부>가 이 집을 매입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안채와 2층]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있는데 2층이 있습니다.
  <한상룡>이 이 집을 지을 때 친일파로서 일본식 집 흉내를 낸게 아닌가 추측한답니다.


  [안채 뒤 부엌과 좌측 별채]               
  <안채> 뒤로 돌아 가 보니 부엌이 상당히 크고
  또 다시 <별채>가 상당한 규모로 있는데 <백인제>의 장인 장모가 살았다고 하네요.
  <백인제>는 이 집에서 고작 6년 정도 살다 북으로 갔으니, 아마도 부인인 <최경진>이 친정 부모를
  이곳에 모셨다고 봐야 하겠죠?
  

  ['별당']

  [안내문]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별당>입니다.
  <한상룡>이 인생 절정의 쾌락을 즐기며 영원토록 살고자 마련한 <별당>이었겠지만 
  그도 고작 67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했습니다만, 당시 하도 사람들로 부터 욕을 많이 얻어 먹어서인지
  그 당시 나이로는 제법 오래 산 것이죠? ㅎㅎ
  그 후 집주인이었던 <최선익>과 <백인제>도 인생 중반에 북으로 가 죽었으니 인생무상입니다.


  ['별당']                   
  <별당>을 나오며 뒤돌아 본 <별당>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집 자체만은 정말 멋있습니다.


  ['별당' 앞 산책로]                        
  <별당> 앞에서 담장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 있군요.
   

  ['사랑채'와 '안채' 조망']                        
  의사가 되어 돈 많이 번 <백인제>는 <6.25>때에 미처 피난을 못가 북으로 잡혀갔답니다.
  부인 <최경진여사>와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고 모두 잘 키웠다고 입시철만 되면 주목 받았죠.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백인제> 다음으로 그의 부인 <최경진여사>가 이 집의 제4대 주인이 되어 
  원형 변경없이 이 집을 잘 가꾸고 살다가 이 집은 2009년 11월에 <서울시>에 넘기고
  자신은 2011년 7월 3일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정독도서관' 조망]                        
  <백인제 가옥> 옆에는 <옛 경기고> 자리인 <정독도서관>이 붙어 있습니다.
  잠시후 도서관에 올라가 이곳을 조망하겠습니다.


  ['재동초앞 교차로']                      
  <손병희선생 집>과 <백인제가옥>이 있는 골목에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가면
  <재동초등학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인
  <옛 최승희 집>을 다녀 오도록 합니다.


  ['최승희 집' 입구]

  ['최승희 집' 입구]                                  '
  <최승희집>은 <헌법재판소> 북측 건너편에 있는데 현재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입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 가면....
   

  ['한뫼촌']                        
  <한뫼촌>이라는 음식점 입구 벽에 "최승희 집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최승희' 사진]                            
  <한뫼촌> 대문 안에는 <최승희 사진>이 두장 걸려 있더군요.
  우리나라 최초, 최대 한류스타였던 월북 무용수 <최승희의 집>이었답니다.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쓰이고 있어 어쩐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북한 애국열사 능'에 잠들고 있는 '최승희']
"최승희 (1911~1969)" 18살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25살에 <나의 자서전>을 썼고, 그의 책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조선아동무용기본>은 조선 춤의 기본 교과서가 될 만큼 무용에 대해선 천재였다고 불려진 여인이죠.
['한뫼촌' 음식점] <최승희>가 살았던 집 안을 횡하니 둘러보고 ['홍현' 조망] 다시 <재동초 사거리>로 나와 서쪽으로 올라 갑니다. 서쪽엔 나즈막한 언덕이 보이는데 언덕으로 올라 가 <정독도서관>을 둘러 보고 다시 내려와 좌측 <윤보선家>로 가는 골목으로 갈 예정입니다. ['홍현'] 붉은 흙이 고개를 뒤덮고 있어 "홍현 紅峴"이라 한답니다. 지금은 물론 아스팔트로 뒤덮혀 있지만 이 고개엔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는데 <옛 경기고등학교>의 한 건물입니다. 좌측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들어가 이리로 나올 예정입니다.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가는 내리막 길 <정독도서관 정문> 앞에는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정독도서관' 정문] "정독도서관" 정문에 도착합니다. "옛 경기고등학교"로서 도서관으로 바뀌고 나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겁니다. 정문에는 "장원서 터""성삼문 선생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역사적인 곳이라고 강조하고 ['옛 경기고'] 머리를 싸메고 이 교문을 통과하려고 공부했던 그 시절이 눈 가에 눈웃음 치게 하는 군요. ^.^ ['정독도서관'] 이제는 "정독도서관 正讀圖書館"으로 변모해 시민들의 휴식과 양식을 주는 곳이 되었군요.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도서관 중앙통로'] 본관으로 올라 가는 중앙 통로가 있는데, 예전엔 운동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해 놨습니다.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김옥균 집터 표지석' 조망] ['김옥균 집터']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려운 "김옥균 집터"표지석이 있습니다. <서재필>도 이곳 <김옥균>의 집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지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쿠데타가 모의 된 곳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요. 10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다시 집권한 <민씨 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거절했고 하지만 일본은 1886년 8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섬'에 연금시켰고 1888년에는 '홋카이도'로 이송했다가 1890년에야 풀어 주었답니다. 일본에 배신감을 느끼며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했고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습니다. 효수 사진이 있는데 처참해서 못 올리겠습니다. 같은 쿠데타 동지 였던 <박영효>가 <김옥균>에 대해 일본에 망명해서 살며 자주 언급한 말을 인용하면...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충남 아산에 있는 <김옥균 묘>에 세워진 <묘비명>에는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경근당''옥첩당' 있던 곳] 서쪽편엔 운동장이 공터로 남아 있는데 <1부>에서 언급 한바 있는 <경복궁 건춘문> 앞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을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이 그 자리에 <기무사 테니스장>을 만든다고 문화재를 지들 맘대로 이곳으로 이전 했던 곳입니다. 민주화가 되고 다시 원래 자리로 이전 했으니 망정이지만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군바리들의 행태는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정말 과관이었습니다. <경근당>과 <옥첩당>이라는 문화재가 테니스장을 위해 <전두환 패거리들>이 국민의 세금을 들여 유랑생활을 시킨 것이니...그도 그저께 저 세상으로 갔더군요. 이 공터 우측 끝 <백인제 가옥 조망>이라고 표기 한 곳으로 가 보면.... ['백인제 가옥' 조망] 조금 전에 관람했던 <백인제 가옥>이 가까이 조망되고... ['인왕제색도' 기념탑] 공원으로 조성된 운동장 가운ㄷ데로 다시 가면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인왕제색도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의 경치를 그린 국보 그림이죠. 깜박하고 여기서 바라보는 <인왕산>을 촬영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꼭 촬영해야지... ['경기고 본관 앞'] [안내문] "정독 도서관 正讀圖書館" 한자로 <正讀>이라고 쓰는데...원래 "책을 깊이 있게 읽다" 할 때는 <精讀>이라고 하죠. 여기는 <박정희 전대통령> 이름의 <正>를 넣어 지은 도서관 이름이라서 그렇게 됬다고... 또한 "Library"를 우리말로 "도서관"이라고 한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책을 많이 비치하고 그 책을 읽는 곳'에 <그림 圖>가 왜 들어 가느냐라는 것 때문입니다. 일본식 번역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치고... [물레방아] ['도서관 2관 3관 사이] 공원화 된 도서관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서울교육박물관'] <홍현 紅峴>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앞으로 나가면... ['여덜번째구간-서울교육박물관에서 안동별궁터까지 실트랙] 8.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조선어학회터- 윤보선家-감고당터-안동별궁터" ['홍현'에서 '윤보선가' 가는 길] <재동초 사거리> 방향에 우측 <윤보선家> 가는 길이 있습니다. ['윤보선家'와 '조선어학회터'] 골목으로 들어 가면...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 터 朝鮮語學會址"표지석을 만납니다. <한글학회>의 전신이죠. 이런 좋은 일 하던 사람들의 활동 공간들은 왜이리 초라한지...ㅠ ['윤보선家' 담장] ['윤보선家' 정문] <北村> 최고의 한옥 저택인 "윤보선家"를 둘러 봅니다만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들어 갈수 없어 아쉽습니다.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지며 탄생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살던 집입니다. <윤보선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는 누구인가...이런 정도는 알고 가야죠?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웅렬>과 동생 <윤영렬>....<윤영렬>의 아들이 <윤치소>이고 <윤치영>의 형이죠.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서며 <조선총독부 참의>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세째 아들인 <윤원선>은 그러니까 <윤보선>의 동생은 <흥선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하여 황실 가족이 되기도 했지요. ['감고당길'에서 '정독도서관' 조망] <윤보선家>에서 나와 <감고당길>로 들어서서 뒤돌아 보면 조금전에 들렸던 <정독도서관>이 가까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옛 경기고 학생>들의 등하교길이었습니다. ['감고당길'] 이어서 <육교>를 하나 만나는데 이 육교 유명한 육교이죠 ㅎㅎ 이 육교는 좌측 <덕성여고>와 우측 <덕성여중>을 연결하는 교내 육교인데 옛날 <서울 5대 극성> 기억하십니까? 그 중에 대표 극성 여고가 <덕성여고>라고들 했죠? ㅎㅎ 당시 농담 하나 언급하면...저 육교 위에서 <덕성여고 여학생>들 일부가 밑에 등하교하는 <경기고 남학생>들을 히야까시ㅎ 히곤 했다는...ㅎ <풍문여고>는 몸빼바지를 입었었고 <덕성여고>는 치마를 입었었는데...ㅎ ['덕성여고' 정문] ['덕성여고'] "덕성여고"는 그렇게 예전도 아닌 1966년까지 "감고당 感古堂"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숙종>의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그 유명한 <장희빈>에 의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폐서인으로 산 곳이 <감고당>이랍니다. 또한 <명성왕후>가 여덟살 때에 한양으로 올라와 이곳에서 살았는데 왕비로 간택.책봉 되는 1866년<고종3년>까지 머물렀답니다. 그런 연유로 건물은 현재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로 이전 복원되 있습니다 사진 보여 드리면...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 이전 되 있슴] 더 자세한 사항은 "여주여강길 5코스 황학산길" 답사기 여기 클릭 ['여성독립운동가길'] <감고당길>은 또한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고도 하는군요. <덕성여고>와 붙어 있는 <옛 풍문여고>로 가면... ['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만, 현재는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변모해 있군요. <명성왕후>의 <민씨 족벌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전국에서 <동학혁명><임오군란>등 여러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지요. 이 틈을 노리는 외세의 침락 그림자가 드리우고.... <고종>은 민심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 첫번째로 <부정축재 가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에 <민영휘>에게도 명령을 내려 어쩔수 없이 재산의 아주 일부를 내 놓고 설립한 학교가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 랍니다.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 다수가 그런 조치로 설립됬지만.. <고종>이 학교 이름도 지어 줬는데 돈을 낸 <민영휘>의 <휘 徽>에 <글 文>자를 붙여 <휘문 徽文>이라 하고, 또한 <민영휘>의 처인 <안유풍 安遺豊여사>의 <풍 豊>에 <글 文>을 붙여 <豊文>이라고 했답니다. 필자인 <파란문>이 <휘문高> 출신이라 잘 압니다. ㅎ 그러니까 <휘문>과 <풍문>은 같은 뿌리인거죠. 지금도 <민씨 가문>이 운영하고 있지요. 그런데 <휘문>은 일찌기 <강남>으로 이사했지만, <풍문여고>는 2017년 3월에 남녀공학학교가 되어 <자곡동>으로 이사해서 <풍문고등학교>가 되었더군요. ['풍문여고'와 '안동별궁'] [이전 복원 되 있는 '안동별궁'] [안내문] "안동별궁 安洞別宮" 이 곳은 원래 왕실의 대군들이 살던 <연경궁>이 있었는데 <고종> 때에 건물을 새로 지어 <고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의 가례를 올렸는데 <순종>의 첫번째 세자빈인 <순명효왕후 민씨>와 결혼식을 올렸고, <순명효왕후>가 죽자 두번째 <순정효왕후 윤씨>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죠. 그러다가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식>에게 넘어 가고...<풍문여고>가 설립되고.... ['풍문여고'와 주변 전경] 주변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 캡쳐해 올립니다. <北村>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데..특히 <휘문고 (현 현대그룹사옥)>와 <풍문여고 (현 서울공예박물관)>의 위치를 확연히 알수 있군요. 바로 앞 공터는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의 관사>가 있었고, 해방 후부터는 <미국대사관저>가 있던 곳인데 <대한항공>이 인수해서 호텔을 지을려다가 <땅콩 회항 사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터로 남아 있답니다. 이곳은 <경복궁> 바로 옆 동산이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한 고개였다고 <송현 松峴>이라 한데서 이 동네 이름이 <송현동>이 되었답니다. ['안동별궁 표지석'] <옛 풍문여고> 정문에 "안동별궁 安洞別宮"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안국동>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안동별궁>이라고 ['아홉번째구간-안동별궁에서 광교까지 실트랙] 9. "안동별궁터-충훈부터-우정총국-조계사-민영환자결지-태화관터- 순화궁터-한양중심점표지석-의금부터-보신각-전옥서터-광교" [''북인사 안내소'와 '충훈부 터'] <풍문여고> 정문 건너편에는 <인사동 북쪽 출입구>가 있으며 "북인사 안내소"가 있으며 그 앞에는 "충훈부 터 忠勳部址" 표지석이 있는데, 실제 터는 뒤에 별도로 있더군요. 또한 "해방병단 결단식 터 海防兵團" 표지석도 있었습니다. <해군> 창설 결단식이 있었다고 ['일획을 긋다'] <인사동 북쪽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획을 긋다>라는 조형물이 눈길을 끌고.... 이 근처에 예전 <김영삼 총재> 시절 <신민당 당사>가 있었는데... ['우정총국' 앞]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방향으로 조금 가면 "체신기념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 있었던 자리이며 <갑신정변>의 진원지이죠.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부르주아혁명>의 발화지였던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관서인 "전의감 典醫監"이 있었다고 하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다거나, 궁중의 각종 행사를 기록으로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그림을 관장하던 관청인 "도화서 圖畵署"도 있었었답니다. 또한 <민씨 세도 족벌> 중에 몇 안되는 우국충정의 "충정공 민영환"이 살던 집터가 앞 주차장 자리였답니다. ['우정총국'] [안내문] "체신기념관" 이 우체국 개원식이 당시엔 근대선진국가로 가는 큰 상징적 행사였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죠. ['민영환 동상'] "민영환 閔泳煥 (1861~1905)"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도 다른 집안이 얼마나 있을까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 閔謙鎬 (1838~1882)"가 <민씨 족벌세력>의 우두머리 격으로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이죠. 그러니까 <고종>의 외삼촌이 되는거죠. 당시 <민겸호>는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국방장관이었던거죠. 그런 그가 기존 군인들의 봉급을 13개월이나 주지 않고, 그나마 한달치를 주었는데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주어 마침내 불만이 폭발한 군인들이 <민겸호>를 죽이고 항거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죠. 군사데타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에게도 먹고 살수 있는 봉급을 달라는 단순한 요구였던 군란이었지요. 그러니까 <충정공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는 <임오군란>의 원흉으로 탐관오리의 절정이었습니다. 아들 <민영환>은 어떠 했는가.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며 나라가 식민상태로 들어가자 격렬한 저항을 했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어 다른 방법으로는 저항할 방법이 없어지자, 자결로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조선백성들에게 각성을 요청하는 내용>과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조선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며 또 다른 한통은 <고종에게 올리는 글>이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우국충정에 뒤따라 자결하는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습니까? ['조계사' 조망] <우정국>과 <조계사>는 서로 붙어 있어 경계가 없습니다. <조계사>로 넘어 가면... ['조계사 백송'] "조계사 백송 曹溪寺 白松 (천연기념물 제9호)" 가을 국화 퍼레이드 속에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없는지 여러번의 외과적 수술울 했지만 거의 죽어 가고 있는 <조게사 白松>입니다. ['조계사 회화나무'] <조계사>에는 4~500년 수령의 <회화나무>도 있습니다. ['조계사'] 국화로 뒤덮힌 <조계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총본산이지만 설립된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1911년에 <만해 한용운>과 <이회광>이 <중동중학교> 자리에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답니다. ['조계사 정문']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조계사>를 나와 ['종각' 방향 '우정국로'] <종각>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제일은행 본점'] <제일은행 본점>이 나타나는데, 옛날 이곳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의 공터는 겨울철 스케이트장이 되곤 해서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었는데....그동안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태화빌딩' 조망] <태화빙딩>이 보이는데... ['옛 세븐당구장'] 사거리에 이 건물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군요. 학창시절 이곳 2층에 <세븐당구장>이 있었는데, 가끔 원정 당구를 왔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집은 <익선동>이었으니 그리 멀지 않은데 있었지만... 미국에서 의사를 하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친구가 이 당구장 최고수였는데...그때 700을 쳤으니까... ['하나로투어빌딩''태화빌딩''하나로빌딩' 조망] ['민영환 자결터'] <하나로빌딩> 앞마당에는 앞에서 언급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자결터"가 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한 자리에서 죽순이 돋아 났다고들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 <민영환>이 자결할때 피뭍은 옷을 부인인 <박수영씨>가 집에 보관했는데 8개월 후쯤 피뭍은 그 옷이 있는 방에서 죽순이 돋아나 보관했다고 합니다. 죽순은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다가 유족들이 1962년에 <고려대>에 기증해서 <고려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또한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했빛이 잘 들어 오지 못하는 방에 흙과 수분이 없는 바닦에서 대나무가 자랄수 있는지 논란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국충정의 그 뜻을 기리며 "血竹=애국심"으로 믿고... 믿어 주고 있는거겠죠.
['태화빌딩'] ['3.1독립선언유적지' 안내문] "명월관 明月館" <명월관>은 1904년에 구한말 궁중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옛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 자리에 <궁중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했는데, 화재가 나 종로3가에 있는 <현 'CGV피카디리1958'극장> 자리로 이전하여 음식점으로 대성황을 이루기 시작 했답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실직한 궁중의 기녀들과 지방의 관기들이 모여 들어 <명월관>은 사교장으로 변모하며 새로운 유흥 문화의 장으로 승승장구 했답니다. 시간이 지나며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 흥청망청 방탕하게 노는 기생집으로 변모하고 주요 고객이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등 친일매국노들이었답니다. 장사가 잘되니 분점이 생겼는데 이곳 <태화관>도 <명월관>의 별관이었는데, 식사 술 춤과 노래를 함께하는 종합 유흥업소를 만들며 1918년 본점이 화재로 소실되자 실제 본점 보다 더 성황을 이루어서 <명월관>하면 이곳 <태화관>으로 인식되며 종합 유흥업소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태화관>은 원래 <중종>의 딸 <순화공주>가 살았던 <순화궁>이라는 宮이었는데 <이완용>이 자기 소유로 만들어 <이완용의 별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이토 히로부미>와 이곳에서 政事를 논의 하기도 했답니다. 그후 <이완용>이 <명월관>에 넘긴거죠. 이러한 내력이 있는 <태화관>에서 <삼일독립선언>이 이루어 졌다는게 의미가 남다릅니다. ['순화궁 터']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에 "순화궁 順和宮" 표지석이 있습니다. <중종>이 자신의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려졌지만 이곳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살았고 그녀 사후 사당으로 사용되었다네요. [백과사전]을 인용하면...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고,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가 태어난 저택이 있었다. 이 저택은 구수영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에는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 헌종 사후 후궁 경빈 김씨가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이후 이윤용, 이완용이 소유하였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요정 태화관이 있었다. 현재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세워져 있다." ['하나로빌딩'] ['하나로빌딩 로비'] ['한양중심점 표지석' '하마대'] [안내문] <순화궁 표지석> 좌측에 있는 <하나로빌딩> 입구에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안내석이 있는데 오리지날 표지석은 안으로 들어가 로비 끝에 있으니 알고 가야 볼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짓고 <한양의 중심점>을 표기 했다는데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좌측에 있는 돌은 <순화궁>에 있었던 <하마비> 옆에 있던 말 타고 내릴 때의 디딤돌이랍니다. ['종각역 1번출입구'] <종각역1번출입구> 앞 <'SC제일은행 본점'> 앞에는 "의금부 터 義禁府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현재의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검찰청 대법원 국정원을 한데 묶어 집행하는 무시무시한 <의금부>가 있었던 곳으로 탐관오리와 국사범들에겐 지옥같았던 곳이죠. 특히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장군>을 어명을 거역했다고 <선조>는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이곳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하지만 <원균>이 폐전하자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을 풀어 주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했죠.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지요. 그후 1년 후에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차라리 감옥에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 할수 있었을텐데...) 자세한 내용은 제가 두발로 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피맛골'의 흔적] ['피맛골' 안내문] ['피마골' 위치] 사라진 "피맛골 避馬골" <피마골>은 <종로> 양옆에 있었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이 늘어 나며 <종로> 대로변에는 난잡하게 불법 노점상들이 들어 서기 시작해 "가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1부>에서 언급 했드시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개최 하며 대내외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려고 <종로>의 난잡한 "가게"들을 철거하고 길을 넓혔답니다. 이 때 <종로>의 남쪽 <피맛골>까지 철거 했는데, 철거된 상점들을 <남대문> 근처 <선혜청> 부근으로 이전시켜 영업 할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이게 <남대문 시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대문시장>은 철거된 <종로 남측 피맛골의 가게>들이 옮겨가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현 피맛골'] [12년 전 '피맛골'] [12년 전 '청일집'] 제가 학창시절 자주 찾았던 <피맛골>의 <참새집><열차집><청일집>은 현대판 빌딩 숲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보신각'] ['6.25 때 폭격 맞은 '보신각 종'] "보신각 普信閣" 조선왕조 출범 때부터 <한양도성>과 성밖의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기 위해 4대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루였는데 지금은 년말에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으로 변했죠. <보신각 普信閣>이라는 명칭은 1895년 <고종 32년>에 처음 <보신각>이라 했다는데 그러니까 <갑신정변> 다음 해에 <종각>에서 <보신각>으로 이름이 변경된 것인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이후 새로 만들면서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편액을 썼답니다. 1979년엔 철근 콩크리트로 <보신각>을 새로 짓고 鐘도 새로 만들어 치고 있답니다. ['영풍빌딩'] 건너편엔 <영풍빌딩>이 있는데 저 자리가 <전옥서 典獄署>가 있던 자리인데 <전봉준 장군> 동상이 있는 곳입니다. ['전봉준 像'] [안내문]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고 ['전옥서 터'와 '황성신문 터'] <영풍빌딩> 앞 <전봉준 장군 동상> 좌측 <종각역6번출입구> 앞에는 "전옥서 典獄署" 표지석이 있는데 "죄인들을 수감하는 감옥"이 있던 자리이고 우측 <종각역5번출입구> 옆에는 "황성신문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광교'] 오전에 출발했던 <광교>로 돌아와서 <옛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 신한은행 광교빌딩>을 조망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화폐개혁>이 있었을 때 아버지와 돈가방을 들고 새 돈으로 바꾸러 왔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도 빠릅니다. ['광통관' 조망] [뒤돌아 본 '종각'] <청계천 광교>로 나가 출발지였던 <광통관>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1부><2부> 합쳐서 오늘 걸은 거리는 약14km였으며 6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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