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숙종의 길Ⅱ』중흥사-행궁지-금위영-동장대
"[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여기 클릭
먼저 Ⅰ부를 보고 Ⅱ부를 읽으면 도움되겠습니다
['북한도1']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지난 <Ⅰ부>의 종점이었던 "중흥사"에서 부터 답사기를 쓰며 출발합니다.
이어지는 코스는 Ⅱ부로 마지막 코스가 되겠습니다.
['중흥사' 입구] 11:25
2022년 11월 2일 (수) 맑음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지난 <Ⅰ부>에서 답사기를 쓴 <중흥사>까지는 <Ⅰ부>를 참고하고
<Ⅱ부>를 "중흥사 重興寺" 입구에서 부터 답사기를 시작합니다.
우측 길로 조금 올라 가면....
['태고사' 갈림길] 11:2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숙종>은 <팔도도총섭-성능스님>이 상주하며 근무하고 잇는 <중흥사>를 지나 <행궁>으로 갔답니다.
[안내표지]
이곳 삼거리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행궁지>는 우측길로 "0.7km"만 가면 있다고 알려 줍니다.
['대남문' 오름길]
<중흥사>부터 <대남문> 방향으로 <행궁> 가는 길은 갑자기 좁아 지며 험해지는데
<행궁> 근처의 길이 넓으면 적군이 침입하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길을 이렇게 좁고 험하게 했답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를 보면 여기서부터 <행궁>까지 걸어 올라 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길을 넓게 닦지 않은 이유를 그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걸어 올라 갔겠죠?
[건물터]
300여년전 왕조시대 임금의 피난처가 있을 <행궁>을 머릿 속으로 그리지 않으면
이어지며 나타나는 석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없겠죠.
허물어져 황폐해졌지만 이 석축들을 보면 의미심장한 건축물들이 있었을거라는 상상은
벌써부터 웅장한 王宮을 연상케하며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호조창지'] 11:38
아니나 다를까 "호조창지 戶曺倉址"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납니다.
전쟁이 터지면 이 산속으로 도피할 "왕과 왕을 보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어마 무시한 크기로 지어져 있었답니다.
<북한산성>에는 7개의 대형 식량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식량창고였겠죠?
군사들은 물론이고 아무리 왕이라해도 안 먹고 싸울수 없고, 살수도 없으니....
최소 6개월 정도를 버틸수 있는 50만석 이상의 식량 확보는 당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청수동암문' 갈림길] 11:39
<호조창 터>를 지나자마자 바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매우 중요한 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성 좌측길은 <대남문>방향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우측 <청수동암문>방향으로는 <행궁>과 <남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북한산성>의 핵심 중심부가
되겠습니다.
['행궁권역']
이 주변을 "행궁권역 行宮圈域"이라고 별도 안내판을 설치했더군요.
<행궁>과 주변 경호, 병영시설들의 위치를 잘 알수 있습니다.
[건물터]
삼거리에서 우측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행궁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건물터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행궁' 입구] 11:47
이어서 "행궁 行宮"입구에 도착하는데, 현재는 복원공사 중으로 출입이 금지되 있습니다.
['행궁' 복원 공사중]
[안내문]
그래서 우측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서 <행궁터>를 내려다 봅니다.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건물은 임금이 먹고 자는 <내전 內展>과 업무를 보는 <외전 外展>이더군요.
오리지날 <행궁>은 1915년 대홍수와 특히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었답니다.
그래서 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며 오리지날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1902년 사진]
일본놈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02년에 찍었다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한국건축조사보고>(1904)에 실려 있습니다.
['1893년경 사진]
1893년경에 촬영 되었다는 사진을 하나 더 보면 <행궁>의 전체적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한국사 전문 작가인 "로버트 네프(Robert Neff)의 소장품"이라고 합니다.
<숙종>은 위기시에 자신이 도피할 이곳 <행궁>에 도착하여 詩 한수를 읊었습니다.
<숙종>이 읊은 <御製詩 6수> 가운데 세번째 행을 읽어 보면 그의 감회를 잘 느낄수 있습니다.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간관십리도행궁 줄줄시단즉재동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노적봉두운미권 백운대상무유몽
험한 길 10리를 걸어 행궁에 이르니
험한 시단봉이 동쪽 가까이 있네 (시단봉에 동장대가 있음)
노적봉 머리위의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아니하고
백운대 위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네.
['청수동암문' 갈림길 회귀] 11:58
20여분이 걸려 <행궁>을 둘러 보고 다시 <청수동암문 갈림길>로 돌아 와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대남문' 방향]
<행궁> 앞 삼거리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개울을 하나 건너면
건너편에 바로 <경리청 상창 터>가 보입니다.
['경리청 상창지'] 12:01~11:09
"경리청 상창지 經理廳 上倉址"가 상당한 규모로 있어 올라 가 봅니다.
<북한산성>의 관리와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보던 관청이 있었던 곳이며
또한 관리와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니 그 규모를 알수 있습니다.
[오름길]
다시 7분여 오름길을 올라 가면....
[갈림길] 12:16
<숙종의 길>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길은 <대동문>으로 올라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금위영 유영지>와 <어영청 유영지>로 올라 가는 <대남문 방향>입니다.
<숙종>은 1772년 4월 12일에 환궁하기 위해 <동장대>와 <대동문>을 경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숙종>은 여기서 좌측 <대동문>으로 올라 갔을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이곳엔 이정표가 없고, 우측으로 30m쯤 올라가서야 나타나더군요.
['대동문' 갈림길] 12:17
조금전 갈림길에서 30m쯤 올라 가면 <대동문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여기선 좌측 <대동문 방향>길로는 사람들의 통행 흔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정표의 위치를 조금전 삼거리로 옮기던지 해야 겠습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가 <금위영 유영지>를 돌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숙종의 길>인 <대동문>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보국문' 갈림길] 12:20
<대동문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 가면 이번엔 <보국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우측 <대남문> 방향으로 50m쯤 올라 가면...
['보국사지'] 12:21
"보국사 터 補國寺址"를 만납니다.
<북한산성> 13개 僧營 가운데 제일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절간이라기 보단 무기고와 식량창고등
군수지원 시설의 역활이 더 컷답니다.
['보국사지' 흔적]
<보국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 규모도 상당 했다는 것을 느낄수 있더군요.
['금위영 유영지'] 12:27~12:58
<보국사> 위에는 바로 "금위영 유영지 禁衛營 留營址"가 있습니다.
요즘의 <대통령 경호실> 역활을 하던 <금위영>인데, 戰時엔 본영이 주둔 하겠지만
평시엔 <금위영 파견부대>가 상주하던 곳이랍니다.
<숙종>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 조금전 <대동문 갈림길>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금뮈영이건기비']
"금위영 이건비 禁衛營 移建碑"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숙종>이 시찰 왔을 때엔 <금위영>이 <대동문> 앞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높은 곳에 있어 풍우에 무너질 위험도 있고 <행궁>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4년 후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이건비>를 여기에 세웠다고....
그러니까 <숙종>이 시찰 왔을 왔을 때엔 이곳에 <금위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궁>에서 바로 <대동문>으로 올라 가며 그 앞에 있던 <금위영>도 시찰 했을 것입니다.
['금위영 이건기 비']
<금위영 이건비>는 마모가 심하고 한자 실력도 모자라 읽을수 없어서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기록을 참고 합니다.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今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 命訓 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 置軍營御信地廋糧備械
國家 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 也其十月城役完本營等 自龍巖東南至普賢峯下
二千八百二十 一步 一千六十五垜 城門二曰大東小東 皆上設譙樓暗門二
柴壇峯爲將臺下有房屋十間 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 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
營舍倉庫九十餘間 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
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 哨官郭義賓經紀財力 把摠張友軫董領攻役至八月告成
石砌一百二十步 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四十五間山抱水深結構增固可
以永護儲胥云 乙未卽大明崇禎甲申後七十 二年也 都提調李頣命識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
숙종 37년 신묘년 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렸다.
"백제의 옛 성을 개축한 뒤 각각 군영을 설치한 뒤 목적지에 군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준비하라.
국가가 변란을 맞아 다급할 때 장차 서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내린 이 요새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해 10월 성을 완축한 뒤 금위영을 설치했다.
용암(龍巖) 동남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 2,821보이고, 타(垜)는 1,065개다.
성문은 대동문(大東門)과 소동문(小東門) 둘인데 초루(譙樓)와 암문(暗門)을 설치했다.
시단봉(柴壇峯)에 장대를 짓고 그 아래 방옥(房屋) 10칸을 두니 성랑 61채에 모두 178칸이다.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巖寺), 태고사(太古寺) 네 절을 소속시켰다.
군대의 영사와 창고는 90여 칸으로 처음에는 소동문 안에 세웠는데,
지세가 높고 비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물길이 나서 무너지기 쉬워
을미년(1715년) 3월에 보국사 아래로 옮겼다. 초관 곽의빈(郭義賓)이 재력을 잘 관리하고,
파총 장우진(張友軫)이 공사를 잘 감독하여 8월에 완성하게 되었다.
돌계단 120보를 쌓고 중당은 부손(負巽:동남을 뒤로 함) 방향으로 지었는데,
중군 이하 거처할 곳과 창고, 행랑 등 모두 145칸이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 기록
['금위영 유영지' 터]
<이건비> 앞에서 등산로 우측으로 들어 가면....
['금위영' 각자]
개울 건너편에 "禁衛營"이라는 刻字가 있다는데 찾지 못하고 참고 사진을 올립니다.
['금위영' 건물 축대]
['보국천'] ['누혈']
<금위영> 건물터 주변 석축과 <補國泉>이라는 약수터를 찾아 보고
석축에 튀어 나와 있는 엄청 큰 규모의 <누혈 漏穴 (배수구)>도 볼수 있었습니다.
['대동문' 갈림길 회귀] 1:02
<보국사터>와 <금위영터>를 둘러 보고 다시 <대동문 갈림길>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 오는데 40분 정도 걸렸군요.
['대동문' 오름길]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벌써 단풍이 지고 있었습니다.
완만한 오름길을 15분 정도 올라 가면.....
['북한산성'] 1:17
<북한산성>의 城郭을 만나는데
<금위영>을 옮기기 전까지는 이 근처에 <금위영>이 있었겠죠.
['대동문'] 1:18
"대동문 大東門"은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좌측에 있는 <시단봉>을 다녀 와 <대동문>으로 나갔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을 다녀 오기로 하고...
['시단봉' 오름길]
<시단봉>으로 올라 갈 때엔 성곽을 따라 올라 가고, 내려 올땐 우회로를 이용하겠습니다.
어느 길이나 비슷비슷합니다만....
[산성]
성곽을 따라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4분여 올라 가면
['동장대'] 1:32
"시단봉 柴丹峰 601m"
"동장대 東將臺"는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한산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오는 곳에 위하고 있습니다.
<금위영> 장수가 관할하며 산성 수비의 총괄 지휘를 하던 곳이어서 <숙종>은 이곳에도 올랐습니다.
['동장대'] 1:32
"동장대 東將臺"
<숙종>이 올라 쓴 <숙종 御製詩 6수> 가운데 네번째 행을 음미해 보겠습니다.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등피동대약상천 천봉삭립접운연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구부비도불감근 원노역필수반연
동장대에 오르니 하늘 위에 오른 듯하고
천개 봉우리 깍아지른 듯 서서 구름에 접해있네.
도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긴 팔 원숭이도 기어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
['삼각산' 조망]
<동장대> 아래엔 현재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주변 조망이 나쁘더군요.
그래서 <백운대><만경대><인수봉> 방향 만 조망하고
[전망 안내도] .
남쪽 방향으로는 전망안내도가 있어 참고 합니다.
<남장대지> 아래에 <행궁>이 보입니다.
['처녀 총각 바위'] 1:39
<동장대>에서 다시 <대동문>으로 내려 가는 길 바로 앞에는 좌측 성곽에 붙은 큰 바위 두개가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처녀 총각 바위"라고 부르더군요.
['대동문'] 1:48~1:51:
다시 "대동문 大東門"으로 돌아 왔습니다.
['대동문' 밖] 1:52
<대동문> 문 밖으로 나가면, 城에 포위 되 있던 갑갑함이 뻥 뚫리며 동북부 서울이 훤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서 <숙종>은 그의 <御製詩 6수> 가운데 다섯번째 행을 읊었습니다.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장위이선진반도 성동가출역기구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서행풍람다형승 황시청강흥불고
호위병이 이미 앞서 나아가 돌아가는 길에 늘어서 있고
성 동쪽으로 어가가 나가는데 역시 길이 험하다.
천천히 가면서 두루 살펴보니 뛰어난 경치가 많은데
더구나 맑은 물이 있어 흥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구나
['진달래능선' 갈림길] 1:53
<대동문>에서 20m쯤 내려 가면 이정표가 있는 중요한 갈림길을 만납니다.
좌측 길은 <진달래능선>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가 <우이동>으로 가는 길이며
직진성 우측길은 <구천게곡>을 경유해 <수유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아래에 편집한 <위성지도>를 보며 <숙종의 길>을 추정해 보면......
['숙종의 길' 예상도]
<숙종>은 <대동문>에서 "도성암 道成庵"으로 내려가
<우이동> → <수유리> → <미아리> → <한양도성>의 <혜화문(동소문)>을 통해 환궁 한것으로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도성암 道成庵"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세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신 할수 없는 것들이어서 학계에서도 추정만 할 뿐이더군요.
저의 생각으로는 <숙종>이 지도에 표기한 노란색 선을 따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거라고
확신이 들지만, 그 길은 전에 여러번 다닌바 있어 오늘은 가 보지 못한 <구천계곡>으로 내려 갔습니다.
['구천계곡' 내림길]
가을이 깊어 가는 "구천계곡 九天溪谷"은 처음으로 만납니다.
<대동문>에서 하산 할때엔 거리로는 제일 짧은 거리지만
계곡이 가파르고 깊어 <숙종>은 이 길을 절대 이용 할수가 없었겠습니다.
왜냐 하면 <어가 御駕(임금이 타는 가마나 수레)>나 말은 도저히 통행이 불가능하겠더군요.
등산로가 발달해 있는 현재도 어려운데 300여년 전엔 더욱 불가능 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숙종>은 분명 <소귀천계곡>으로 내려 갔을께 분명해 보입니다.
['구천계곡 안전쉼터'] 2:13~2:25
<대동문>에서 급경사 내림길을 25여분 내려 가니 "구천계곡 안전쉼터"가 있더군요.
[내림길]
처음 방문하는 <구천계곡>을 음미하며 하산합니다.
<숙종>이 쓴 <御製詩 6수> 가운데 마지막 행을 보면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과찰도성봉탄로 풍애만목일장모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사여여림첨우모 포원개허가전소
<도성암>을 지나니 평탄한 길 나오고
바람과 먼지 눈에 가득한데 해는 저물어 가는구나.
사람들이 많아 나와 의장행렬 바라보고
원한을 품은 자 어가 앞에 나와 하소연하게 허락 하였도다
"도성암 道成庵"은 매우 유명하고 의미있는 절로 실록에 기록되 있답니다.
<세종대왕>의 딸 <정희공주>가 창건한 절이서 더욱 유명하다는데 기록에만 남아 있고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만, 현재 여러 조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도성암>의 위치에 대한 세가지 설은
1. 강북구 인수동 산125번지에 있는 <본원정사>와
2. 강북구 우이동 산69번지에 이쓴 유명한 <도선사>
3. 강북구 우이동 2060-6에 있는 <선운각>이라고 하는데....
완벽한 <숙종의 길>은 자료가 없어 하산길은 단순히 <중앙일보 안내도> 만 참고하여 다녀 왔습니다만
다녀와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니 가장 믿을 만한 단편소설이 있더군요.
<숙종의 길> 중에 <도성암>에 대한 상세한 추정 글이어서 링크로 첨부 하오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산불장비함] 2:39
<구천게곡 안전쉼터>에서 급경사 내리림길을 다시 25분 가량 내려 가면
<산불방지 도구함>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이곳 좌측 아래가 유명한 "구천은폭포"가 있더군요.
['구천은폭포']
"구천은폭포"는 <구천계곡>의 랜드마크라고 하는데 가을이어서인지 폭포수는 볼수 없었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조망]
서울의 동북부인 <도봉구><노원구><중랑구>등이 <수락산-불암산> 아래 펼쳐 집니다.
<백제 온조>는 이곳에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위례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름하여 "하북 위례성" 설이지요. 이곳에 있다가 "하남 위레성"으로 옮겼다고....
[급경사 계단]
다시 급경사 계단을 내려 가면....
['송계별업' 터'] 2:47
[안내문]
"송계별업 터"였다는 안내문과 <구천은폭포> 하단부가 반겨 줍니다.
27명의 조선 왕들 중에 제가 제일 싫어하는 왕인 <인조>
그의 아들은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그리고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있었죠.
<인평대군>의 호가 <송계 松溪>인데, 이곳에 별장을 짓고 자신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풍류를 즐기며 詩畵를 남겼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구곡은폭포']
['사릉 석물 채석장' 안내문]
또한 이곳은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가 죽고 난 다음 평민으로 강등 당했다가, <숙종>에 의해 다시
왕비로 복위 되면서 그의 무덤인 <사릉 思陵>을 축조하기 위한 石物을 채석한 채석장이었다고
['아카데미하우스'] 2:59
짧은 거리지만 엄청 가파른 <구천계곡>을 벗어 나면 <아카데미하우스>를 만나며
['구천계곡' 등산로 들날머리]
['아타데미하우스' 정문] 3:04
<아카데미하우스> 정문에서 <숙종의 길>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가서
지하철로 귀가 하였습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총 거리는 11.8km였으며, 5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팔도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3. --"도성암을 찾아서"-현해당 지음--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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