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금북정맥에서 분기하는" "석문지맥" 1회차 산행기 가야산과 남연군 묘 탐방기 남연군 묘-석문봉-옥양봉-서원산-388m봉-수창봉-실티재 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 원효 - [석문지맥 위치도] "석문지맥 石門枝脈"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등 3개면이 만나는 "가야산 석문봉"에서 북동쪽으로 가지를 쳐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의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서 도상거리 48.3km 정도 되는 지맥이라고 합니다. 주요 산으로는 "석문봉(石門峰.653m).옥양봉(玉洋峰 621.4m).서원산(書院山 472.7m.-0.4km). 오봉산(五峰山 225.3m.-0.8km),몽산(夢山 290m),135.2m봉.국사봉(國賜峰 148m), 오룡산(五龍山 114m).철마산(91.8m),망객산(望客山 64m).아굴산(42.1m), 석화산(石花山 46.4m)이 있답니다. ['석문지맥' 산행괘적 구글어스] 오늘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에서 출발하여 "석문지맥 분기봉"인 "가야산 석문봉"에 오르고, 이어서 "옥양봉"을 지나 "서원산"을 오르고, '서산시'와 '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실티재"까지 갑니다. GPS 측정거리로 12.6km [삽교역] 2014년 4월 20일 (일) 맑음 박무 '용산역'에서 오전 6시 23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는 영등포-안양-수원-평택-천안을 지나 "삽교역"에 오전 8시 19분 정시에 도착했습니다. "삽교역"에서 "덕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열차 도착시간에 맞춰 8시 30분경에 도착하여 8시 40분 정시에 출발하였고, "덕산"에 10여분만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덕산"에서 택시를 타고 "남연군 묘"로 이동합니다. 택시요금 6,700원 ['남연군 묘' 입구] 9:00~9:20 '충청남도 도립공원'인 "가야산" 산행을 하려면 그 출발지를 대부분 이곳으로 하지요 "남연군 묘" 저는 이곳을 두번째 방문합니다. 그때는 오로지 "가야산"과 "남연군 묘"를 탐방하러 방문했었고, 오늘은 "석문지맥"을 산행하기 위해서 찾아 왔습니다. "석문지맥"의 분기점인 "가야산 석문봉"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우측길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먼저 "남연군 묘"를 둘러 보고 산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남연군 묘"는 좌우측 어느 곳으로 가나 만납니다. 가운데에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50M쯤 올라 가면.... [남연군 묘] "남연군 묘"가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조성되 있습니다. "남연군 南延君"이 누구입니까? 구한말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실제 통치자가 누구인지는 모두 아시져? "고종황제"의 아버지였던 "大元位大監 흥선군 이하응"입니다. "남연군 南延君"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흥선대원군"이라고 부르는 "이하응"의 아버지입니다 '大元位大監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李 球'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까요? '남연군 李 球'는 인조(16대)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랍니다 그런데 '남연군 李 球'는 운좋게 영조(21대)의 아들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이 아들을 못 낳아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아들이 되었답니다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이 '정조대왕'이니, 정조대왕의 조카가 되는 것이죠. '정조대왕'의 조카가 '남연군'이고,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 하응"이 되는 것이니 '흥선대원군 이 하응'의 큰할아버지가 '정조대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씨조선의 王族의 혈통을 이어받은 王族인 것입니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한낱 하나의 왕족의 무덤이 아니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남연군 묘'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보고 가겠습니다.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한번 쓴 글을 조금 더 다듬어서 씁니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알아야 '남연군 묘'가 왜 유명한지를 잘 이해 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여러 산행기에서 '정조대왕'에 대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최고의 진보 개혁적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대왕'은 수구 꼴통세력들을 몰아 내고, 西洋文化와 實學을 받아들여 봉건사회인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改革 發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구꼴통세력들의 저항도 엄청 거세였습니다. 그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정조대왕'을 여러번 암살하려고 까지 했지요? '정조대왕'은 암살 당한것인지 아닌지 역사에 의문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전체가 불행한 '정조대왕'의 죽음이었습니다.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수구꼴통세력이 기고만장하며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고려 말의 무신정권에 버금가는 '勢道정치'가 등장하여 우리나라를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가지요. 그 세도정치의 주축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세력들이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수장 '김조순'은 어린 '순조'를 왕위에 앉히고, 자기 딸과 결혼 시킵니다 그러니까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는거죠. '세조''성종'때 '한명회'와 유사한 인물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조선 순조'의 나라가 아니고 실제 개인 '김조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을 빼고는 못 할 일이 없다”로 대변되는 세도정치 - - - - - - -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김좌근의 양아들 '김병기'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이후 60년간 계속됩니다. 절대권력은 부정부폐로 이어진다는거 모두 아시죠? 일본 쪽바리들에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헌납하는 기초를 착실히 닦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크게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들추기도 싫은 부끄러운 역사라 그런가요? 현재는 어떤지 역사를 뒤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연군 묘] 그 당시 '세도정치' 하에서 王權의 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고 부정부폐로 정치기강이 문란해지면서 民心은 흉흉해지고...백성들은 먹고 살기 어려워지고... 그리하여 "홍경래의 난(순조 11년)"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깨부시고 다시 정통성있는 王權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王族 李氏들에 의해서도 암암리에 시도되었지만 '안동 김씨'들에 의해 처참하게 짖밟혔습니다 그래서 王族인 '흥선군 이하응'은 거지꼴을 하고 바보 행세를 하며 암중모색하였던것입니다 개혁만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한 야심찬 왕족출신 "흥선군 이하응"은 그의 뜻을 이루려면 먼저 王權을 회복하여 권력을 잡아야 했겠죠. 王權을 회복하기 위해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名堂자리로 이장해야 한다고 결심했답니다 그래서 전국의 명당자리를 찾아 헤메이기를 십여년..... '흥선군 이하응'은 운좋게 풍수지리가 "정만인(鄭萬仁)"을 이 지역에서 만났답니다 [남연군 묘] '남연군'의 묫자리가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天下名堂'으로, "二代天子之地"라 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서 보는 "가야산 자락"에 있는 묘터를 말합니다. 풍수가 '정만인(鄭萬仁)'은 '흥선군 이하응'에게 두곳을 추천하며 말합니다 "한곳은 '광천 오서산'에 있는데 萬代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萬代榮華之地"가 있어 자손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릴수 있으며.... 그리고 또 한곳은 '덕산 가야산' 동쪽에 二代에 걸쳐 天子가 나올 "二代天子之地"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두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흥선군 이하응'은 귀가 번쩍하고 하늘이 열리는듯하였다하며 "二代天子之地"인 이곳 "德山 伽倻山 자락"을 선택하였답니다 이 때가 '흥선군 이하응'의 나이가 26세였다는군요 王權을 향한 엄청난 암중모색... 기어코 王權을 손에 쥐고 망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려고 했습니다. 미친 놈 행세를 하며 거지꼴을 하고 다니며 권력을 향한 암중모색... 아시다시피 그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왕권을 회복하지요? 대단한 집념의 "흥선군 이 하응"입니다. 어렵고 어렵게 잡은 王權을 나중에 며느리 閔妃에게 뺏기니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황후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수 있었겠는지 이해되는지요 [남연군 묘] 사진의 바로 앞에 있는 岩盤이 옥새 玉璽를 닮았다고 왕이 나올것이라 믿었다는 암반입니다. 그런데 '흥선군'이 지관 '정만인'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답니다.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갑니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 南松亭'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겼답니다. 이때가 1844년이랍니다 다음 일은 가야사(伽倻寺)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화재로 폐사(廢寺)되고 탑의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남연군'의 유해를 다음해인 1845년에 현재의 이곳으로 '남연군 묘'를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이장을 하며 새로 묘를 만들때 풍수지리가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棺槨)을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여 '흥선군 이하응'은 석회 3백 부대를 다져 넣어 강력한 묘를 만들었답니다. '정만인'의 예언은 후에 적중했습니다. 이곳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시킨 '흥선군 이하응'은 아들 '명복'이를 낳는데 이 '명복'이가 후에 조선의 26대 '고종황제'이며,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되니 풍수가 '정만인'의 "二代天子之地" 예언이 맞은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묫자리 때문에 2대에 걸쳐 왕을 탄생시켰다는 설은 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대선주자들도 거의 대부분 자기 아버지의 묘를 소위 명당자리라고하는 곳으로 이장했지요? 그 결과는 김대중씨만 성공했나요? ㅎㅎ 이회창씨는 두번이나 실패했으니 명당설을 과연 믿어야하나요? 이런것도 미신이라고하는 일종의 종교적인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의 주산(主山)은 "伽倻山 石門峰(653m)"입니다. 오늘 진행하는 "석문지맥"의 분기봉이기도 하지요. "석문봉"의 좌우에는 "옥양봉 玉洋峰(621.2m)"과 "가야봉 伽倻峰(677.6m)"이 연이어 시립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풍수에서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호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천을, 태을이라 함은 '天皇大帝星인 북극성' 주변의 별로서 天皇大帝星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별을 말한답니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천을, 태을로 3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힌 형태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큰 봉황의 머리와 양쪽 날개를 연상시키게 하여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답니다. 특히 서쪽 봉우리인 '가야봉' 너머로 석양이 질 때 그러한 분위기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답니다 어느 풍수지리가가 이곳에 대해 쓴 글을 인용해 드립니다 '남연군 묘'의 좌향(坐向)은 亥입수룡에 따라 해좌사향(亥坐巳向)을 하였다. 좌향이란 등을 대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혈의 뒤쪽 방위를 좌, 혈의 정면을 향이라 한다 결국 좌와 향은 180도로 대칭 되는 방향이 된다. 풍수의 좌향법은 일차적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의하여 좋은 혈처를 결정했더라도 그 좌향을 파구의 방위와 양기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 법에 따라 적법하게 적용했을 때만이 생물체가 가장 좋은 생기를 취할 수 있는데 이곳이 그런 곳이다" "남연군묘의 청룡과 백호를 이루는 산줄기를 살펴보면, 청룡줄기는 옥양봉에서 길게 뻗어 목성(木星)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수구(水口)를 막아준다. 백호줄기는 가야봉에서 뻗어 금성과 목성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청룡끝자락의 안쪽으로 그 끝자락을 오므려 역시 수구를 막아준다. 청룡은 길고 백호는 짧은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수구를 관쇄(關鎖)해주고 있고,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물을 역수(逆水)시키니 길격 형상이다. 또한 청룡, 백호의 여러 줄기가 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이 산자락을 맞대고 있어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가히 天子之地라 할 만하다" [남연군 喪輿 보관 전시관] '남연군 묘' 좌측 아래엔 '연천 남송정'에서 이곳으로 운구를 할때 사용했다는 '상여 喪輿 '가 보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오리지날은 없어졌고 재현품이 전시되고 있다는군요. ['석문봉' 가는 길] 9:20 20여분간 '남연군 묘'를 둘러 보고 산행길로 떠납니다. "권력" 얼마나 좋길래 권력을 잡을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나... 요즘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을려고 혈안이 되 있습니다. "大元位大監 흥선군 이하응" '안동 김씨 세력'들의 세도정치를 깨부시고 정통성 있는 왕권을 확립했는데도 역사는 그를 여전히 좋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듯 합니다. "쇄국정책"이라는 앞뒤가 꽉 막힌 "대원군"으로만 그려지고 있는듯... [삼거리] 9:25 '남연군 묘'에서 5분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 가면 첫번째 삼거리를 만납니다. "가야산"을 찾는 산객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우측 '옥양봉'으로 갑니다. 저도 몇년전에 산행을 한 코스인 "남연군 묘-옥양봉-석문봉-가야봉-남연군 묘"로 원점회귀하는 산행코스를 선택하지만, 오늘 저는 "석문지맥"을 가기 때문에 "석문지맥 분기봉"인 "석문봉"으로 바로 올라 갑니다. 좌측 길로 올라 갑니다. [석문봉 가는 길] 삼거리에서 주택을 하나 지나 산길로 접어 들어 가면... [오름길]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설치한 시설들을 지나는데 설치 하지 않아도 등산에 아무른 문제가 없는 곳에 돈을 발라 놨습니다. 오히려 자연만 홰손하고 있습니다. "예산군은 예산이 많은가 봅니다" [쉼터] 9:58~10:10 삼거리에서 33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쉼터가 나오더군요. 여기서 10여분 휴식을 취하고.... 계절은 바야흐로 봄을 뒤로하고 여름으로 치닺고 있는듯 일주일 사이에 강산은 푸르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기온도 올라 가고.... [된비알] 사각정자가 있는 쉼터에서부터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거리는 길지 않아 18분 정도 오름짖을 하면 되더군요. 여튼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오름길이 되겠습니다. [마지막 된비알] "가야산 주능선"이 보이는 된비알을 오르면.... [석문지맥] 10:28 이정표가 있는 "가야산 주능선-석문지맥"에 올라 탑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석문지맥 분기봉"인 "석문봉"을 다녀 옵니다. 이정표에는 100m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50m정도 되는듯.... [현위치] "가야산"을 찾는 일반 등산객들은 "남연군 묘-옥양봉-석문봉-가야봉-남연군 묘"로 이어지는 일반산행코스를 이용하세요 가장 좋은 코스가 되겠습니다. 이 일반 등산코스에 대해선 제가 쓴 "예산 가야산 산행기"를 참고 하시고.... ★여기서 "서원산" 아래에 있는 "보덕사"의 위치를 기억해 두세요....★ [석문봉 정상부] "석문봉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1시간 12분이 걸렸군요. [ 석문봉 정상] 10:32~10:42 "가야산 석문봉 伽倻山 石門峰 653m" "가야산"에선 "가야봉 678.2m"이 제일 높습니다만 군부대와 통신시설이 점령하고 있어 등산객들에게 실제 "가야산 정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봉우리는 이곳 "석문봉"입니다. 특히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있으며, "석문지맥"을 分岐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서산시 운산면"의 面경계이기도 하답니다. ['석문봉'에서 '가야봉' 조망] "석문봉"은 앞에서 언급한 "남연군 묘" 명당자리의 핵심을 이루는 산봉우리입니다. 봉황鳳凰의 머리부분이 이곳 "石門峰"이고, 별자리로는 "북극성"에 해당한답니다. 앞에 보이는 "가야봉"이 "천을天乙"이고, 뒷쪽에 보일 "옥양봉"이 "태을太乙"로서 '봉황의 날개'에 해당하며 별자리로는 "북두칠성"에 해당한다고....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서 뻗어 오는 "금북정맥"이 우렁찹니다. 바로 앞에 있는 봉우리인 "656.8m봉"은 이곳 "석문봉 653m"보다 높습니다만 '금북정맥'과 '석문지맥'이 분기하는 이곳 "석문봉"에 이름을 빼앗겼습니다. ['석문봉'에서 '한서대' 조망] 남서쪽으로는 "한서대학교"가 조망되며 '산수저수지'까지 뚜렷하게 보이는군요. 박무 속에 "천수만"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석문봉'에서 '해미' '서산' 조망] 서쪽으로는 "서산시 해미면 海美面"이 예전엔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추억을 더덤고 천주교 신도들을 처형시키며 악명을 높인 "해미읍성"이 피눈물을 흘리는듯... 예전엔 "해미海美" 주변은 온통 바다였다는데 간척사업으로 바다는 멀어졌다고... 앞에 뻗어 가고 있는 산줄기는 "일락산"으로 가는 "금북정맥" ['석문봉'에서 '일락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금북정맥"이 "일락산" "상왕산"으로 뻗어 가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석문지맥"이 "옥양봉"으로 뻗어 가고 있습니다. "금북정맥"과 "석문지맥" 사이 계곡에 "국립용현휴양림"이 있습니다. ['석문봉'에서 가야할 '옥양봉' '서원산' 조망] 북쪽으로는 "석문지맥"이 "옥양봉"을 지나 "593.4m봉-지맥갈림봉"에서 우측 "서원산"으로 뻗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가야할 코스가 되겠습니다. ['석문봉'에서 '남연군 묘' 조망] 동쪽으로는 조금 전에 들렸던 "남연군 묘"가 조망됩니다. "석문봉"에서 혈맥이 "남연군 묘"로 뻗어 내리고 있죠? "남연군 묘" 앞에 보이는 "서원산" 아래에 "보덕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아버지 묘 이장의 성공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이랍니다. 그래서 절 이름이 "보덕사 報德寺"인데 "서원산"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삼거리] 10:43 "석문봉"에서 조망을 마치고 지맥을 갑니다. 조금전에 올랐던 삼거리를 지나면... [무선통신시설] 10:44 무선통신시설이라고 팻말을 달고 있는 시설을 지나가면.... ['옥양봉' 조망] "옥양봉"이 "태을太乙"이라고 강력 주장하는듯 솟아 있습니다. 능선으로 이어진게 아니고 "석문봉"을 하산했다가 다시 올라야 합니다. 10여분 내려 가면.... [삼거리] 10:54 '남연군 묘'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고... 10여분 더 진행하면.... [삼거리] 11:04 다시 '남연군 묘'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를 지납니다. [현위치] 현위치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안내판입니다. "가야산 등산코스 안내판"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안내판이군요. 앞으로 "가야산"을 가실 분들에게 좋은 안내도가 되겠습니다. ['옥양봉' 가는 길] 삼거리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옥양봉"을 오르는 등로가 시작됩니다. [오름길] 전위봉을 하나 오르면.... ['옥양봉' 가는 길] "太乙 玉洋峰"이 설금설금 다가 옵니다. '남연군 묘'를 연상하면 생각에 따라 天氣가 느껴지기도... [계단] 몇년전에 왔을때엔 없었던 철계단이 설치되 있군요. "옥양봉"으로 오르는 길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계단] 우측에 전망대가 있는데, '남연군 묘'가 가장 인상적으로 조망되는 곳아라고 합니다. 지맥은 저곳으로 가지 않아서 오늘 가보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몇년전에 쓴 산행기 "예산 가야산 산행기"를 보시면 저곳에서 촬영한 '남연군 묘'가 천하명당인지 아닌지 알려 줍니다. ㅎ ['남연군 묘' 조망] 이곳에서도 "남연군 묘"는 멋지게 조망되는군요. 좌측 "서원산 산줄기"와 우측 "원효봉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를 가리킨다고... 그래서 "남연군"이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듯한 모습이라고 한다는데 과연 "天子之地"라 할 만 한가요? 남연군묘는 二代天子之地라는 '명당설'로도 유명하지만, 이 묘의 명당설 때문에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여 우리나라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더욱 유명합니다.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거 다 아시죠? 죽은 놈이 후손을 위해 뭔 큰일을 해준다야~~!! 산 놈도 살며 자기 위하기도 바쁜데 하물며 죽은 놈이 산 놈을 위해 뭘 한디야~ 오늘 하루 하루를 중요시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내가 서있는 곳이 天下名堂이니라. - 파란문 말씀 - ㅎㅎ [구글어스] "남연군 묘" 주변 지형을 구글어스를 통해 알아 볼까요? 최첨단 과학의 도움을 받아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남연군 묘" 주변 地形입니다. 풍수지리와 구글어스.... 감상은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가 되버린 '행담도'는 "남연군 묘 도굴사건"의 역사를 간직한 섬이었습니다. "행담도"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구요? ㅎ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의 가운데에 있는 섬입니다. 이제 모두 아시겠죠? ㅎ 휴게소가 있는 "행담도"에는 지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있더군요. 그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곳 행담도는 1868년 흥선대원군 시절 '남연군묘 도굴사건'의 주역인 '오페르트'가 '차이나호'를 타고 와서 상륙했던 역사적인 섬이다. 오페르트는(oppret.E.J)는 독일 상인으로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돌아간 후 고종 5년인 1868년 4월에 세 번째로 조선의 답사를 계획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통상 문제를 흥정하려는 의도로 사건을 계획하고, 미국인 젠킨스를 자본주로 하여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삼고, 묄러(Moeller)와 조선인 모리배 2명,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교인 약간 명, 말레지아인 20명과 유럽, 필리핀, 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여,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에 소중기선 8톤급 그레타호를 달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4월 18일 당시 홍주목 신평현(현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行淡島)에 북독일 연방의 국기를 계양하고 정박했다. 여기서 그들은 그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현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며 어둠을 틈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주민들의 저항으로 쉽게 도굴작업을 할수 없었기에 새벽녘에야 겨우 석회로 다져진 무덤의 한부분만을 파낼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밝아오고 주민들이 운집하고 감조하천인 삽교천의 퇴조시간도 다가오게 되어,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현 예산군 고덕면)로 퇴각했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에서는 물론 상해 주재 외국인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한 행동의 피고인으로 체포기소 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고 말았으며 해적의 무모한 소행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우리국민에게 악감정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뒤돌아 본 '석문봉' '가야봉'] "가야산 주능선"을 뒤돌아 보고... ['옥양봉' 정상부] "옥양봉" 정상부근에 오릅니다. 제법 유명한 산행지여서 산악회 단체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옥양봉 정상] 11:19 "옥양봉 玉洋峰 621.1m" 지도에 따라 "옥양봉"의 위치를 다르게 표기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이 정상이라고 생각됩니다. 天乙이니 太乙이니 의미 부여를 하지만 올라 보니 여느 산과 다를바 없습니다. [옥양봉 정상부] "옥양봉 정상부"는 약50m 정도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삼거리] 11:20 이정목이 서있는 삼거리를 지나 직진합니다. 이곳이 "남연군 묘"에서 "옥양봉"으로 오르는 주등산로가 올라와 만나는 곳입니다. [현위치] 이곳 현위치를 확인하고... 붉은색으로 표시한 선이 제가 이동한 루트가 되겠습니다. ['593.4m봉' 가는 길] "593.4m봉"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여기서 미리 알고 가면 좋은 길안내입니다. '석문지맥'은 앞에 보이는 "593.5m봉"에 올라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우측으로 내려 가는 길이 없더군요. 봉우리 오르기 전에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내려 가는것이 좋았습니다. 진달래가 아직까지 산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길을 15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11:36 앞에서 설면한 삼거리를 만납니다. 앞에 보이는 "593.4m봉"을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우측 길로 내려 가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더군요. 이정표엔 [덕산하산로]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593.4m봉' 정상] 11:37~11:49 "593.4m봉" 국토지리원 25,000분의 1 지도에는 이곳을 "옥양봉 玉洋峰"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좌측길은 "용현리 수정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리지날 지맥은 여기서 우측으로갑니다만..... ['593.4m봉' 전망소] 우측으로 나가면 전망바위가 있으며 앞은 낭떨어지 입니다. 오리지날 지맥이 이어지는 곳이지만 길도 없고 위험해서 갈수가 없었습니다. 좌측으로 선명한 등산로가 있어 내려 갔는데 다른 산줄기로 가서 알바를 했습니다. 짧은 알바를 하고 되돌아 와 삼거리로 우회했습니다. [서원산 조망] 이곳 전망바위에선 가야할 "서원산"이 정면에 보이더군요. "서원산"은 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만 '삼거리'에서 다녀와야겠죠? [뒤돌아 본 '가야산 주능선'] "가야산 주능선"을 다시 한번더 디돌아 보고....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와 볼까....... [삼거리] 11:50 삼거리로 돌아와 좌측 [덕산하산로]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제법 넓고 선명한 내림길을 8분 정도 내려 가면.... [갈림길] 11:58 갈림길을 만나는데 오른쪽 길은 "남연군 묘"로 이어지는 일반등산로이고 지맥은 직진합니다. [뒤돌아 본 '593.4m봉'] 갈림길에서 뒤돌아 본 "593.4m봉"입니다. 우회로가 이해 되지요? ['서원산' 조망] 갈림길에선 올라야 할 "서원산"이 정면에 조망됩니다. [내림길] 23분 정도 외줄기 선명한 내림길을 내려 가면.... ['서원산' 조망] 12:16 "서원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 나오고... ['원효깨달음길'-비포장도로] 12:17~12:41 점심식사 이어서 바로 비포장도로를 만납니다. "원효깨달음길"이라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러 유학을 갈때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갈때엔 이곳 태안반도나 남양반도를 경유하여 배를 타고 갔답니다. 경주에서 출발하여 여러 날을 보내며 걸어서 태안반도인지 남양반도인지 모르는 곳으로 가던 중, 어느날 날이 어두워져 어느 무덤 근처에서 노숙을 하게되지요? 그리고 '원효'는 밤중에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물이 해골에 담겨있는 물이었다는거...ㅎ 토하고 난리부르스를 떨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가 있는 길이라고 예산군과 서산시가 주장하하며 이 길 이름을 "원효깨달음길"이라고 한듯합니다. 저는 화성시에 있는 '남양반도'를 통해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간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로 자기 지역을 통과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군요. 그 "깨달음"이 저의 산행기 서두에 올린 글입니다. 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모르고 마실 때엔 해골물이 꿀맛이었는데... 그 물이 해골물이라는걸 알고 나니 토하고 난리부르스를 떨고... 여기서 나온 깨달음이 "유심조일체 有心造一體"라는 "원효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깨달음이죠. 간단하게 풀이 하자면 "세상만사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ㅎ ['서산시 운산면' 넘어 가는 길] 이곳은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의 경계가 되는 곳인데 "남연군 묘"에서 "개심사"로 이어지는 "원효깨달음길"이라는 둘레길이군요 ['남연군 묘' 가는 길] 지맥은 "남연군 묘" 방향으로 50m쯤 내려 갑니다. ['서원산' 입구 - 쉼터] 12:43 사각정자와 돌탑이 있는 "서원산 입구"가 나옵니다. ['서원산 등산로 입구'] 예산군에서 예산을 많이 투입해서 시설은 좋았습니다. "원효깨달음길"을 걷는 탐방객들도 많더군요. ['서원산' 가는 길] "서원산"으로 가는 등산로도 선명하고 넓었습니다. 4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12:47 ★길조심★ 삼거리가 나옵니다. 느낌으로는 우측으로 올라 가야 할듯 하지만 좌측으로 내려가야 하더군요. [오름길] 삼거리를 지나 잠시 진행하면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8분 정도 오름짓을 하면.... [산불지역] 12:55 산불 흔적이 있었던 지역을 지나고.... [서원산 조망] "서원산"이 삐쭉 보이는 곳도 지나면.... [갈림길] 1:00 ★길조심★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서원산"을 다녀 오려면 먼저 우측 "지맥갈림봉"으로 올라 가야 합니다. 4분 정도 올라 가면.... [지맥 갈림봉] 1:04 "지맥갈림봉"에 오르면 "서원산"은 직진해서 다녀 와야하고 다녀 와서는 좌측으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서원산 조망] "지맥갈림봉"에서 "서원산"이 가까운줄 알았는데 제법 멀군요. [서원산 오름길] 10분 정도 진행하면.... [서원산 정상부] "서원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갈림길에 도착하고 좌측 옆이 정상입니다. [서원산 정상] 1:14~1:24 "서원산 書院山 473.2m" 이 산 아래에 書院이 있었다고 붙여진 산 이름이랍니다. ['서원산 정상'에서 '가야산' 조망] '흥선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저 '가야산' 자락에 이장한 그후 '정만인'이 예언한대로 그는 대원군 大元君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는 '고종'과 '순종'으로 2대에 걸쳐 황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황제였을 망정 황제는 황제였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가야산과 가야사의 음덕에 보답하는 의미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이 지나첬음을 뉘우치는 의미였는지는 모르지만 '고종'이 등극한 2년째 되던 해에 '남연군의 묘' 맞은편 이곳 "서원산" 산기슭에 "보덕사 報德寺"란 절을 짓고 원당사찰로 삼았답니다. 이 절은 '토목금벽'으로 치장하여 대단히 화려하였으며, 많은 전토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전하는데 6.25때 소실되었고, 근래에 중창되어 수덕사의 여승들이 정진하는 도량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야사' 터가 광할한 느낌의 도량이었다면 '보덕사'는 이와 대조적으로 산중턱에 감춰진 듯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답니다. [지맥 갈림봉] 1:34 "서원산 정상"을 다녀와 다시 "지맥 갈림봉"에 돌아 왔습니다. 여기선 우측으로 갑니다. [지름길 삼거리] 1:35 잠시 가면 지름길을 만나 직진하고... [내림길] "서원산"을 내려 가는 내림길을 내려 갑니다. [안부] 5분 정도 내려 가면 안부를 지나고... [삼거리] 1:46 ★길조심★ 길조심을 해야하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선명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 산속으로 들어 갑니다. ['맨발님' 응원] 1:49 "맨발님"의 응원 안내판을 지나고.... ['387.9m봉' 가는 길] 길찾기가 필요없는 선명한 외줄기 길을 10여분 진행합니다. [우회로] 오리지날 지맥은 좌측 능선이겠지만 선명한 길은 산허리를 돌아 갑니다. ['387.9m봉' 정상] 1:59 "387.9m봉" 조망이 제법 좋은 곳이었습니다. [뒤돌아 본 '서원산'] "387.9m봉"에서 뒤돌아 보니 지나온 "서원산"이 분명하게 조망되고 멀리 "가야봉"과 "원효봉"도 보입니다. ['351.8m봉' 가는 길] 이제부턴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지성 지맥을 갑니다. 100m쯤 진행하면.... [삼거리] 2:02 ★길조심★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서산 괜차뉴님"의 표지기가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갑니다. ['351.8m봉' 가는 길] 여름이 다가오는듯 나무들은 앞다투며 잎파리를 넓히고 있습니다. 호젓한 숲길을 10여분 진행합니다. ['351.8m봉' 우회] 좌측에 "351.8m봉"이 있는데 선명한 길은 우회로로 안내 합니다. [숲길] 숲길을 따라 약간의 오름짓을 하면.... [억새밭 봉우리] 2:12 억새밭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 섭니다.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송전탑] 송전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송전탑 옆으로 가면.... [한전길] 2:14 "한전길"이 나옵니다. 송전탑 공사를 위해 산속에 길을 낸 길을 우리는 "한전길"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산객들이 "임도"라고 하는데 "임도 林道"는 숲길이라는 뜻이고 벌목한 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길을 낸 길을 "임도"라고 하니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수정봉' 조망] "한전길"은 우리같은 산객들에겐 편의를 제공해 주지만 자연 홰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석문지맥'과는 관계가 없는 "수정봉"이 보이는군요. ['268.1m봉' 우회] 2:26 "한전길"을 따라 가면 "268.1m봉"이 우측에 있는데 그냥 한전길을 따라 직진합니다. 100m쯤 진행하면... [해묵은 묘지] 2:29 '한전길'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 가는 곳에서 지맥은 해묵은 묘가 있는 곳으로 직진합니다 [숲길] 숲길을 8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2:37 '한전길'이 내려와 만나는 비포장도로 삼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서 앞에 보이는 "수창봉"을 다녀와 우측 비포장도로로 내려 갑니다. [수창봉 정상] 2:38 "수창봉 237m" 오리지날 지맥은 여기서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길이 없더군요. '맨발님'의 "수창봉 안내판"을 간신히 찾아 촬영했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더군요. [다음구간 지맥 조망] "수창봉"에서 다음에 진행할 "석문지맥"을 조망합니다. 오리지날 지맥은 여기서 앞으로 직진하지만 길이 없더군요. 다음 구간을 언제 진행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구간부터는 산 다운 산도 없고 도로를 걷는 구간이 많아서 산행으로서의 의미가 없기에 앞으로 시간이 나면 진행 할 예정입니다. [삼거리 회귀] 삼거리로 다시 돌아와 "실티재"로 내려 갑니다. [갈림길] 비포장도로를 따라 50m쯤 내려 가면 갈림길을 만나는데 오리지날 지맥은 우측으로 가는듯 한데..... 도로를 따라 그냥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실티재' 내림길] 50m 쯤 내려 가면.... ['609번 지방도'] 2:47 사각정자가 있는 [609번지방도]를 만납니다. 우측으로 가면... [실티재] 2:47 "실티재"가 "예산군"과 "서산시"의 경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 산행을 종료하고 덕산택시를 불러 '덕산"으로 갔습니다. 택시비 10,000원 [예산역] 3:30 '덕산'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예산역"으로 가서 '새마을호' 입석을 타고 '천안역'에 내려 다시 "용산행 급행전철"로 귀가했습니다. [예산역] 역사와 산행.... 그리고 기차여행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구글어스] 산행거리는 GPS 측정으로 12.6km 였으며 5시간 47분이 걸렸습니다. 제가 다녀온 GPS트랙은 "카페 홍어와 무인도"에 가면 퍼 갈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