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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여주 여강길 4코스-5일장터길" 도보여행기
영릉입구버스정류장-세종대왕릉-효종릉-세종삼림욕장-대로사-
여주시장-여주시청-영월루-여주대교-신륵사-신륵사관광지버스정류장
완화삼(玩花衫)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 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여강길 4코스 공식안내도]
[여강길 4코스 구글맵]
[여강길 4코스 구글어스]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 - 여강길"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는 "여강길 4코스"를 갑니다.
공식안내도에는 거리가 8km라고 알리고 있습니다만, 제가 직접 걸으며 측정된 GPS 거리는 11.5km였습니다.
더구나 "영릉입구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영릉 정문"까지의 접속거리 1.6km와
"신륵사"에서 "신륵사관광지 버스정류장"까지의 접속거리 0.9km를 합치면 "14km"였으니
공식안내도 8km만 믿고 가면 무척 지루한 거리감을 느낄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여강길 4코스"는 "세종대왕릉"과 "여주시내를 관통"하는 길이 되겠습니다.
[영릉 주차장] 9:50
2015년 9월 18일 (금) 맑음
"여강길 2코스"와 "3코스"는 특별함이 없고 그늘도 없는 강변길을 걸어야 해서 생략하고
다음에 기회 있을때 하기로 하고 "여강길 4코스-5일장터길"을 갑니다.
"여강길4코스"는 "신륵사"에서 출발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저는 "세종대왕릉"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릉"과 "효종릉"을 효과적으로 탐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영릉"은 두곳이 있는데 "세종대왕릉"은 "영릉 英陵"이고,
그 옆에 있는 "효종릉"은 "영릉 寧陵"이어서 한자로 구별해야 혼동이 없겠습니다.
"세종대왕릉"을 가는 시내버스는 '여주터미널'에서 오전 9시30분에 한대 있습니다.
하지만 "영릉입구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111번 좌석버스]는 자주 있어 편리한데,
단점은 "영릉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영릉"까지 약1.6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건 택시 타면 됩니다. 시내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ㅎ
저는 "영릉입구 버스정류장"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약15분만에 "영릉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영릉 앞 공원]
"세종대왕릉" 정문 앞에는 주차장과 공원이 큰 규모를 자랑하며 깔끔하게 조성되 있습니다.
[영릉 정문] 10:00
"세종대왕릉"으로 들어 가는 정문입니다.
입장료를 받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수없는 특이한 입장료 징수 대상자였습니다.
입장료는 "25세~64세"까지 성인에 대해서만 500원의 입장료를 받고, 그외는 모두 무료였습니다.
안내 팜플렛등을 무료로 나누어 주기 때문에 그런 가치를 합치면 모두 무료라고 해도 되겠죠? ㅎ
"효종릉"까지 두군데를 동시에 관람 할수 있으니 더욱 저렴하다 할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한 "세종대왕"의 마음을 아는듯...ㅎ
[영릉 정문에서 바라보는 전경]
"英陵"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 때에 발명된 천체관측기기와 해시계 물시계등 발명품 모형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세종전"이라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우측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있고....
[세종대왕]
먼저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을 알현합니다.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정치 경제 문화 국방의 정치지도자.
과학, 음악, 문학, 인문사회학의 천재적 자질을 가진 훌륭한 학자.
무엇보다 백성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려고 혼신을 다한 따뜻한 사람.
어서 빨리 제2 제3의 "세종대왕"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며 감사와 사랑의 참배를 올립니다.
[영릉 공식 안내판]
"영릉" 공식 안내판을 읽어보고... 참배를 올리러 들어 갑니다.
'새종대왕'에 대해선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제가 만난 분들은 의외로 '세종대왕'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더군요.
"훌륭한 왕이다!~" "한글을 만들지 않았느냐!"등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만 그 이상은 모르더군요.
"세종대왕"도 빛과 그림자는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빛"에 대해선 모두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으며 언급을 피하고
오늘은 "세종대왕의 그림자"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져 합니다.
그늘진 부분도 알아야 "인간 세종대왕"의 깊이를 느낄수 있으리라 생각 되기 때문입니다.
[정문 좌측 발명품들 전시]
먼저 정문 좌측에 설치되 있는 발명품들의 모형을 감상하고 가겠습니다.
[혼상-별자리 표시기]
[간의-천문관측기]
[현주일구-해시계] [정남일구-해시계]
[혼천의-천문관측기-국보230호]
요거이 우리가 매일 만지고 건네는 "만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나오는 "혼천의"라는 천문관측기기라는데
만원짜리 그렇게 만지면서도 이 그림을 유심히 본적이 없어서 머썩하더군요. ㅎㅎ
[자격루-물시계-국보229호]
"자격루"는 자동 알람 장치가 있는 물시계이죠.
[세종전]
"세종전"에 들어가 보면....
[세종전 내부]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들과 유품들을 전시해 놨더군요.
[정문 우측-재실]
"세종전" 건너편엔 "재실 齋室"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탄신 618돌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훈민문] 10:14
"훈민문"을 들어 가면 "세종대왕릉-英陵"을 만나게 됩니다.
앞에서 '세종대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 이야기들을 알려 드린다고 했죠? ㅎ
먼저 '세종대왕'의 술 마시는 실력이 어떠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려 드릴까요? ㅎ
"술을 좀 마실줄 알았던 충녕대군"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장남인 "양녕대군"과 차남인 "효령대군" 대신에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제4대 왕에 앉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술을 좀 마실 줄 알아서.."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ㅎ
[태종실록]에서 인용합니다.
"중국의 사신을 대해 주인으로서 술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해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 또한 불가하다.
그런면에서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양녕대군'은 술을 너무 마시며 저잣거리에서 깽판을 쳐서 불가하고, '효령대군'은 술을 전혀 못마셔
않되고, 술을 적당히 마시는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이유를 "태종 이방원"이 직접 설명했습니다.
이제 "세종대왕"의 술 실력을 아시겠죠? ㅎ
[연못]
"훈민문"을 들어 가면 먼저 좌측에 큰 연못을 만나는데, 유치원 어린이들이 현장학습을 나왔나 봅니다.
연못에는 꽃잉어를 비롯한 물고기들이 우굴대고 있었습니다,
[능으로 가는 길]
"영릉"으로 들어 가는 길입니다.
깔끔 상큼하게 조경된 "영릉"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수학여행인지 현장학습인지 다녀 가고 있습니다.
[금천교와 홍살문]
조선시대에는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 날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아버지인 '태종'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태종 18년(1418), '태종'은 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충녕대군'에게 옥새를 주고 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충녕대군'이 울면서 "선왕이 살아 계신데 어찌 제가 왕위에 오를수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하자
태종은 결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종실록"에서 인용합니다.
"어찌 나에게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왕의 자리를 유지 한다면 나는 장차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다시 복위 않기로 북두칠성에 맹세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사흘 뒤 '충녕대군'은 22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조 제4대 왕-세종대왕에 즉위했습니다
[英陵 전경]
우리 역사에서..아니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지도자-세종대왕의 릉이 펼쳐집니다.
저는 30여년 전에 한번 다녀 간적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잘 가꾸어진 "英陵"을 다시 접하니 감개무량합니다.
"英陵"은 원래 서울 내곡동 대모산의 남쪽방향 서편에 있었는데, 아버지 "태종의 헌릉" 옆이었답니다.
신하들과 지관들이 그곳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고 다른 곳에 릉을 쓸려고 했습니다만
'세종대왕'은 "다른 곳에서 福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아버지 "태종"의 '헌릉' 곁에 뭍히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헌릉' 곁에 "세종릉"을 조성했습니다만, 그 이후 천장을 해야한다고 신하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예종 1년"에 이곳으로 천장을 하게 되었답니다.
조선왕조 최초의 왕-왕비 합장묘로서 "소헌왕후"와 함께 영원히 평안히 잠들고 있습니다.
[정자각]
[영릉비각]
[英陵碑]
[세종대왕-소헌왕후 합장릉]
조선왕조 왕비들 중에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왕비가 "소헌왕후"입니다. '청송 심씨'이지요. 8남2녀.
세종대왕과 금술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만하죠? ㅎ
또한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이외의 여섯명의 후궁들로부터도 열명의 아들을 더 낳았는데...총 18명
조선왕들 중에선 아들을 가장 많이 낳은 왕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습니다.
세종대왕은 낮일뿐만 아니라 밤일도 무지 잘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ㅎ
그러니까 '세종대왕'은 政事도 잘 보았지만 情事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영릉에서 조망]
이 한장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왕릉 지킴이와 실랑이를 많이 했습니다.
"왕릉 뒤로는 올라 갈수 없다!"라고 하는 관리인과 한장만 찍자는 "파란문" 사이에...
'세종대왕릉' 뒤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많은 애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으니 30초 이내에 돌아 올테니
허락해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천하의 명당 같나요?
저 앞에 보이는 산은 "북성산"이라고 하는 높이 257.5m의 산이었습니다.
"英陵"은 조선왕조가 500여년 지속 될수 있었던 "옴파로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효종릉 가는 길]
"세종대왕릉"에서 왼쪽 계단을 내려가서 "영릉비각"이 있는 곳 앞에서 좌측으로
"효종대왕릉" 가는 길이 이어 집니다.
[효종릉 가는 길] 10:36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은 길안내가 잘 되있어 찾기 쉽더군요.
더구나 길에서 느껴지는 풍경은 진정 옛 고갯길을 넘는듯하여 더욱 살갑더군요.
"세종대왕"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조금 더 알아 볼까요?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마이너스 백점입니다.
왜냐구요?
먼저 후궁들에게서 낳은 서자들은 빼고 정통파 "소헌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살펴 볼까요?
첫째 아들 : 문종 (외아들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일찍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 수양대군 → '세조' (삼촌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셋째 아들 : 안평대군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계유정란'때 형한테 사형당했습니다)
넷째 아들 : 임영대군 ('수양대군'의 편으로 왕위찬탈에 협조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었고)
다섯째 아들 : 광평대군 (스무살에 요절)
여섯째 아들 : 금성대군 ('수양대군' 반대파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형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일곱째 아들 : 평원대군 (천연두로 어려서 사망)
여덟번째 아들 : 영응대군 ('수양대군'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보좌하여 천수를 누렸고)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형제를 형제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숲길]
'세종대왕'은 '자식 복'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복'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문종)의 첫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 ....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이 부분은 자세히 별도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친절하죠? ㅎㅎ)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고개] 10:40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선비였는데,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이 놈은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안맹담" 사위와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집안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내림길]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동성애-레즈비안"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훨 많으실테니까...ㅎㅎ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여자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다만 '봉씨'는 '김씨'처럼 "압승술"을 쓰는 대신 동성애에
빠져 궁녀들과 성욕을 불태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노발 대발 난리가 났고 결국 폐서인을 시켜 추방합니다.
쫏겨난 '봉씨'는 반성은 커녕 성욕을 해결한게 뭔 죄가 되냐고 항변하다가
결국 자기 친아버지로 부터 비참하게 목 졸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큰며느리들은 성욕을 해결하지 못해 "압승술" "동성애"를 하다 쫏겨나고
"모락산"이라는 산 이름을 만든 "임영대군"의 와이프는 정신질환자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 막말을 하는 등 '미친년'이었으니 지지리도 '며느리 복'이 없는
'세종대왕'이었던 것입니다.
[효종릉 입구 삼거리] 10:46
세종대왕은 살아 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습니다.
[寧陵 홍살문] 10:46
"세종대왕릉"에서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산책하며 걸으면 바로 "효종대왕릉"이 나옵니다.
'효종릉'도 "영릉"인데 한자로는 "寧陵"이니 구별해야 합니다.
['인선왕후릉과 효종릉]
저는 조선왕조의 왕들 중에 가장 저질의 왕은 "선조"와 "인조"라고 생각 합니다.
물론 그들도 빛과 그림자는 있겠습니다만, 인간성 문제에서 인간답지 못한 인간으로 여겨저서 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조"의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이고, 둘째 아들이 "봉림대군-효종"이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항복하고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중국에 보내지요.
자식을 볼모로 왕권을 유지한 "인조"를 치졸한 인간이라고 평하는 이유입니다.
중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처신은 그 후 매우 달랐습니다.
"소현세자"는 선진화된 청나라 문화와 서구문화를 받아 드리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귀국하여서는
중국에서 보고 배운 선진화된 문명을 우리나라에 접목 시키려고 노력하며,
청나라와 친해져야 한다고 '친청정책'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간 자신의 처지와 함께 잡혀와 고생하는 조선백성들의 참상을 보며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 오로지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 갔습니다.
청나라에서 8년만에 돌아 온 "소현세자"는 건강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죽게 되는데...
이미 세자에 책봉된 "소현세자"를 밀어내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기 위해
아버지인 "인조"가 아들을 암살했다고 세상 사람들은 믿고 있지요?
여하튼 "봉림대군"은 이렇게 "인조"에 의해 "인조"에 이어 "조선 제17대 왕"에 올랐습니다.
[효종릉-寧陵]
"효종 1619(광해군11)~1659(효종10)(재위 1649∼1659)"
"북벌정책"
'김상헌' '송시열'등 강경 북벌파들을 중용하여 '청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았던 왕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하멜의 조선 표류기" 아시지요?
'효종'시대인 이때에 제주도 남단 '가파도'에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표류하게 되었지요.
"효종"은 "하멜"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신식 총기를 제작하게 하며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불테우기도 했죠.
그런데 이 총기의 개발로 청나라를 친게 아니라 러시아를 치게 되죠? ㅎ
청나라가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 파견 요청이 왔는데 거절할수 없어 파병하는데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벌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지요.
하지만 청나라에 대한 북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엄청난 군사비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며
특히 "우암 송시열"과의 견해차이로 북벌계획은 유야무야되어 갔습니다.
"효종"은 오로지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우리가 먼저 수련을 한후에 하자는
것이었는데....
[효종릉에서 '인선왕후릉' 조망]
1659년(효종 10) 5월 4일, 그러니까 "우암 송시열"과 독대를 하며 의견차이를 보인 후 두달만에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던 중에 의원이 침을 잘못 놓아 손 쓸 틈도 없이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숨을 거두었답니다.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그와 함께 밤낮으로 꿈꾸던 북벌 계획도 무산되었는데,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재실]
"효종릉"에서 정문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재실이 상당한 규모로 있는데
[재실]
[재실 안내-보물1532호]
"효종 재실"은 보물 제1532호"이군요.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재실 앞 마당에는 '회양목'과 엄청 키가 큰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회양목"은 특이한 회양목이라 천연기념물 제359호로 지정되 있더군요.
[寧陵 정문 통과] 10:58
"효종릉" 정문을 나서서
[효종릉 정문]
뒤돌아 본 "효종릉" 정문입니다.
[여강길 4코스 가는 길] 11:00
"효종릉" 정문에서부터 "여주 여강길 제4코스-5일장터길"를 찾아 가야 합니다.
'여강길'에 대한 안내는 잘 보이지 않앗습니다만, 저 앞에 보이는 사거리까지 직진해 갑니다.
그러면...
['333번지방도' 사거리] 11:04
[333번지방도] 도로 안내판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하는데
[←세종산림욕장] 방향으로 직진해 갑니다.
[세종산림욕장 가는 길]
길안내 리본들도 잘 보이지 않아 불안해 하면서
미리 예습한 "양궁장"이 나올때까지 도로를 따라 갑니다.
7분여 진행하면....
[여주시청 양궁장] 11:11
"여주시청 양궁장"을 만나고...
[세종산림욕장 입구] 11:12
이어서 화장실과 이정표가 있는 "세종산림욕장 입구"를 만납니다.
[쉼터]
"세종산림욕장 입구"에는 쉼터가 조성되 있으며, 음용불가 수돗물도 있는데
양궁장과 함께 사용하는듯....
[세종산림욕장]
"세종산림욕장"으로 들어 가서 조금 올라 가면...
[갈림길] 11:15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 우측 오름길로 올라 가고...
4분여 산림욕장을 진행하면....
[운동시설] 11:19
운동시설이 있는 삼거리를 다시 만나는데 좌측 [전망대]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계단과 샛길]
샛길로 다니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지시대로 계단을 이용해 올라 갑니다.
많은 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다니지 말라는 샛길만이 통행 흔적이 많았습니다.
돈 들인 계단은 애물단지가 되 있더군요.
산에 돈 들여서 일부러 인공시설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더군요.
자연을 보호 한다는 명분으로 공사를 한것이 오히려 자연을 더 파괴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는 말입니다만,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최고의 개발"입니다.
계단으로 잠시 오르면....
['92m봉'-팔각정] 11:23~11:30
팔각정이 있고 "92m봉"임을 알리는 삼각점과 이정표가 있는
"세종산림욕장" 산꼭대기에 도착합니다.
[팔각정] ★ 길조심 ★
"세종산림욕장 팔각정"에서 내려 가는 길에 유의해야겠더군요.
팔각정 바로 옆길로 내려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측 능선길이 더 선명하게 유혹하고 있으니까요.
[팔각정에서 조망]
[여주 중심가 조망]
"세종산림욕장 팔각정"에서는 진행해야할 "여강길 4코스"가 한눈에 조망되는데
'여주시내'와 '여강', 그리고 '신륵사' 방향이 한폭의 동양화 같습니다.
날씨까지 이렇게 도와주는군요.
그런데 제 눈에는 "여주"가 "서울의 축소판"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앞에 보이는 섬이 "양섬"이라는 섬인데 강 가운데 있으며 '서울의 여의도'와 비슷합니다.
저의 눈에는 "서울의 축소판" 같이 보이며, 그래서 한양에서 거리가 멀지만 "세종대왕릉"을 이곳으로
옮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로만 보이는가요? ㅎㅎ
[세종대교 조망]
'세종대교'가 북동쪽으로 조망되며...
강 건너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여주 법원 검찰청"인듯....
[세종산림욕장 내림길]
내림길은 제법 가파랏습니다.
5분여 내려 가면....
[세종산림욕장 들날머리] 11:35
"세종산림욕장 들날머리"에 내려 서고....
직진해 나가면...
[세종대교 밑 통과]
포장도로를 만나 "세종대교" 밑을 통과하고...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11:40
이어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대로사 →]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여주환경사업소 통과]
도로 우측은 "여주환경사업소"로 오폐수를 처리하는 곳이었고
앞에 보이는 다리로 가서 건너 갑니다.
[하리보도교] 11:42
이 다리는 "하리보도교"로서 4대강종주 자전거길이며....
이 동네가 '여주시 하리'이더군요.
[뒤돌아 본 '하리보도교']
다리를 건너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우측 "세종산림욕장"에 있는 팔각정이 보이는군요.
[여강길]
지금부터 강둑길을 따라 "대로사"가 나올때까지 직진합니다.
[용문산 조망]
[약간 줌인한 용문산 방향]
'세종대교' 넘어 "용문산" 방향을 조망하고....
[강 건너편 '현암동' 방향 조망]
강 건너편 '여주시 현암동' 방향을 조망합니다.
좌측 건물은 앞에서도 언급한 "여주 법원 검찰청"인듯...
[여주고려병원 뒤] 11:50
'팔당대교'에서 63km지점이며, '충주댐'까지 73km라는 팻말을 지나는데
우측에는 여주에서 제일 크다는 "여주고려병원"이 있습니다.
[황려-이규보 詩碑]
강변을 따라 가면 중간 중간에 詩碑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이규보"의 詩 "황려"라는 시비가 눈에 띄는군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고려시대엔 "이규보". 조선시대엔 "정철"을 ...
['대로사' 뒤 삼거리] 11:59
우측에 "대로사"가 보이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5일장터길 →]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대로사' 옆길]
좌측에 "대로사"를 두고 '중앙로'가 나올때까지 진행해서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대로사' 앞길]
"대로사" 앞 [여주 중앙로]를 만나는데 앞에 "대로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대로사' 정문] 12:02~12:10
"대로사"로 들어 가면 먼저 좌측에 "추양재"라는 건물이 있고,
앞에 보이는 가운데 문으로 들어 가면 "대로서원"과 그 우측에 "대로사"가 있습니다.
[추양재] [대로사]
"추양재 秋陽齋"와 "대로사 大老祠" 입니다.
[대로서원-강한사]
"우암 송시열"의 사당입니다.
"정조대왕"이 "영릉"에 행차했다가 이곳을 들리게 되었는데
"우암 송시열"이 "효종"의 북벌계획에 충직하지 못해 통곡하며 머물렀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주고 사액을 내려 주었답니다.
원래 "강한사 江漢祠"라고 사액을 내렸는데 후에 "송시열"을 '대단한 늙은이'로 높여 "대로사 大老祠"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효종릉"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효종"의 북벌계획에 강경파인 "송시열"을 중용하였으나
세부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서로 방향이 달랐습니다.
[대로서원에서 여강 조망]
1659년(효종 10)에 '효종'은 '송시열'과의 독대에서 자신의 북벌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습니다.
"저 오랑캐들은 이미 망할 형세에 있다. 10년을 기한으로 군사훈련과 군장비, 군량을 비축해 조정 신하들과
백성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 명을 양성해 틈을 타서 명과 내통해 기습하고자 한다"
- 《송자대전》 송서습유, 권 7, 악대설화
그러나 '효종'의 이러한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여전히 북벌을 위해서는 내수(內修)가
중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수했습니다. 효종은 "옛날에 '마음을 같이하는 신하가 한둘만 되어도
도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라며 이루지 못한 꿈을 탄식했답니다.
이런 연유로 '송시열'은 '효종'의 뜻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불충에 마음 아파하며 "효종릉"을 찾아 배향하고
'여강'이 흐르는 이곳에서 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대로사 마당]
"우암 송시열"은 누구인가.
바로 "효종" "현종"의 가정교사였습니다. 요즘 말로...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송시열"입니다만
82세까지 무지 무지 오래 살며
그는 관직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되지 않고 주로 자기 제자들을 움직여 정국을 흔들었습니다.
당파싸움의 대표주자로 우리들에겐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지요.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형 당했습니다.
"송시열의 묘"는 충북 괴산의 "화양계곡에 있죠.
['5일장터길' 갈림길] 12:11
"대로사"를 둘러보고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 가야 합니다.
나왔던 골목 삼거리엔 이정표와 [5일장터길 안내도]가 있습니다.
['5일장터' 안내도]
이 안내도를 보면 [5일장터길]과 "대로사" 진행하는 길을 이해 할수 있고...
[삼거리] 12:13
"대로사"에서 [중앙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면
[5일장터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는 시장입구가 나오는데
좌측 "장터마트"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시장]
"여주시장"이 시작되는데 오늘은 장날이 아니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군요.
3분여 직진하면....
['여주농협' 앞 사거리] 12:16
"여주농협"이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하고...
[여주시장]
'여주시장'은 5일 마다 열린다는데 5일 10일 15일...이런 식으로 열린답니다.
[시장 사거리]
'여주시장'은 옛 시장모습 그대로인 곳과
[문화의 거리]라고 명명된 새로 단장된 곳 두곳으로 나눌수 있더군요.
앞에 보이는 곳부터 [문화의 거리]가 시작되는데....
도너츠집이라고 표기한 도너츠집에서 도너츠 네개를 사서 챙기고...(한개에 500원)
[문화의 거리]
장날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앞으로 가실 분들은 5일 10일에 맞춰 가면 좋겠습니다.
[시장 들날머리] 12:27
13분 정도 시장을 둘러보고 나가면 이정표가 있는 [여주 중앙로]를 만나서 좌회전합니다.
[←여주시청] 방향으로 갑니다.
[여주시청 조망]
그러면 "여주시청"이 정면에 조망되는데
시청 앞으로 갑니다
[여주시청] 12:29
시청 삼거리 좌측 횡단보도에 이정표가 좌측으로 가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행해 보니 좌측으로 '여주시청'을 한바퀴 돌아 갈 필요까지는 없겠더군요.
여기서 그냥 우측으로 '여주시청'을 돌아 가면 거리가 많이 단축 되겠더군요.
[여강길 가는 '여주초등학교' 옆 골목]
모르니까 이정표가 지시하는데로 가면...
다시 '여주시청'을 빙 돌아 강변으로 나가라고 알려 줍니다.
[여주시청 뒤]
'여주시청' 뒤로 나가면 "여강 강변둑길"이 펼쳐집니다.
이 길을 따라 "여주대교(연인교)"가 나올때까지 직진합니다.
제법 긴 거리인 15분 정도 진행하면....
['영월루' 조망] 12:47
"여주대교(연인교)"가 나오며 "영월루"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주대교 통과]
'여주대교' 좌측 나무 계단길로 다리를 통과하면 바로 "영월루공원"입니다.
[영월루 공원] 12:49~1:03
"영월루공원"으로 들어 가면 사각정자가 '여주대교' 옆에 있어 쉬면서
'여주시장'에서 산 도너츠를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영월루"에 대해선 "여강길 1코스 답사기"에서 탐방하였기에 생략하고...
[여주대교 조망]
진행해야할 "여주대교"가 멋지게 조망됩니다.
[여주대교]
"여주대교"를 지나는데...
이 길을 걸어서 갈줄은 예전엔 미처 몰랏습니다. ㅎ
[서쪽방향 조망]
"세종산림욕장"에서 진행해온 방향을 조망하고...
[동쪽방향 조망]
동쪽방향 "신륵사"와 [1코스]에 있었던 "썬벨리호텔"이 "여강"과 어울립니다.
바람 한점 없는 가을날입니다.
파랑개비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군요.
['馬巖' 조망]
"영월루"와 "마암 馬巖"을 조망합니다.
태극기가 그려진 파랑개비가 바람을 기다리고 있군요.
제법 멋진 풍경이지요?
'여주대교'를 걸어서 가지 않고는 볼수 없는 광경입니다.
[신륵사 가는 길] 1:13
'여주대교'를 구경하며 10여분 진행하면 다리 끝에 도착하는데
이정표는 다리 아랫쪽 강변으로 안내하지 않고 도로를 따라 직진하라고 합니다.
도로를 따라 조금 직진하면...
[여주도서관 통과]
"여주도서관"을 통과하고...
[여주박물관 갈림길] 1:18
이어서 음식점들이 나열하고 있는 곳을 지나는데...
점심시간인데도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군요.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여주신륵사관광지"라고 합니다.
좌측으로 가면 "여주박물관"이 있다고 알리고 있고...
[강변공원] 1:22
음식점 거리를 지나면 공원이 나오고...
['원호장군 전승비']
"원호장군 전승비"를 지나면 "신륵사" 일주문이 나타납니다.
"원호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민병대를 구성하여 왜군을 무찌른 여주의 장군이라는군요.
[신륵사 일주문] 1:28~2:08
"봉미산 신륵사"
"봉미산"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뒤져보니 여기서 상당히 먼곳에 있더군요.
한자로 鳳尾이니 "봉황의 꼬리" 부분이 이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나저나 여기도 문화재 관람료를 받고 있는데...
[세계문화유산]인 "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도 합쳐 500원이었는데
볼거리도 없는 절간 구경하는데 2,200원은 정말 아까워~~
예전에 두어번 다녀 간적이 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고, 답사기를 쓰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신륵사'로 들어 갑니다.
[불교용품 판매소]
공원화 되어 있는 곳을 지나서....
[신륵사]
"신륵사 神勒寺"
신라시대 '원효'가 개산했다는 설이 있다지만 스스로도 정확한 유래는 알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옹선사"가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더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곳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는데....
[극락보전]
"신륵사"의 중심인 "극락보전"을 좌측으로 돌아 가면....
['나옹선사' 부도로 올라 가는 길]
"나옹선사(보제존자) 석종부도"로 올라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신륵사"에 가면 다른 곳 보단 이곳을 찾아보고 가야 하는데
대부분 모르니까 강변의 "강월헌" 정자나 들려 보고 경치가 좋다는 감탄사만 쏟아내고 가더군요.
[나옹선사 부도]
"나옹선사의 부도"입니다. 사리탑이고, 요즘 말로 납골당인거죠.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1376"
고려 말 '공민왕'의 王師였으니 요즘 말로 대통령의 멘토였던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인디안 "지공선사"의 제자이고,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경북 영덕 출신으로 출생설화도 유명하지요.
혼탁한 부정부폐 가렴주구의 고려말에 아버지가 세금을 내지 못해 도망가 버려서
어머니가 대신 관헌에 끌려 가다가 개울가에서 그만 애를 낳고 관헌으로 가지요.
치마에 피를 본 사또가 연유를 알고는 빨리 가서 애기를 구하라고 하는데, 가 보니 수백마리 까치들이
'나옹선사'를 에워싸고 보호하고 있었다는 탄생설화는 유명하다면 유명합니다. ㅎ
"나옹선사"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에도 있지요?
[양주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 부도] 자료사진
"나옹선사"의 부도가 이곳 여주 "신륵사"에도 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제가 "왕방지맥 첫구간"에서 "양주 회암사"를 방문하여 쓴 산행기에서 이미 언급 한바있습니다만
못 보신 분들을 위해 한번 더 알려 드리면...
"나옹선사"의 설법은 매우 유명했답니다.
"양주 회암사"에서 불법을 강론하면 인근 부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는데,
부녀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몰려 들 정도여서 남편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그런 과정에서 특히 부녀자들이 "나옹선사"와 성관계를 가진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답니다.
이런 "나옹선사"의 설법이 사화문제로까지 번지자 이곳 저곳에서 "나옹선사"를 탄핵하라는 상소가
'공민왕'에게 수없이 올라 가니 '공민왕'도 자신의 왕사였지만 어쩔수 없이 "밀양 영원사"로 내려
가 은거하라고 어명을 내리지요. 요즘 '대통령 비서실장'을 탄핵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명을 받은 "나옹선사"는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통해 밀양으로 가야 하는데,
지병이 있던 "나옹선사"는 스스로 입적의 시기를 알고는 뱃머리를 여주로 돌려 "여주 신륵사"로 올라가
입적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여주 신륵사"에도 부도가 있는 것입니다.
두곳에 부도가 있는 이유를 아시겠나요?
요즘 말로 "대통령의 멘토"가 당시 王師였으니 "나옹선사"의 위상을 알수 있는데
패가망신의 발단은 언제나처럼 여자관계였던 것입니다. 특히 스님인 "나옹선사"에게는....
스님들의 여자관계는 그들이 멘토로 삼는 "원효"에서부터 계속되었죠.
[김병익 송덕비]
"김병익 송덕비"
"김병익"이는 "세도정치 안동김씨파"의 후예로 '고종'때 고위 관직을 맡은 사람이고
일제시대에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친일 명부에 올라 있는 인물인데....
['다층전탑']
현존하는 고려시대 전탑으로는 유일한 "다층전탑"이라고 합니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 탑을 쌓은 탑을 말한다고 하며, 남한강의 등대 같은 역활을 했다는군요.
보물 제226호.
[신륵사대장각기비]
"신륵사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 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적은 비문이랍니다.
보물 제230호.
['삼층석탑'과 "강월헌"]
"신륵사"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이곳 "삼층탑"과 "강월헌"이지요.
"신륵사" 갔다 오면 기억 나는건 "강월헌"뿐...ㅎ
강가에 있는 희귀한 절간인 "신륵사"를 상징하는 누각이 되겠습니다.
[강월헌]
"강월헌"이 있는 자리가 "나옹선사"의 다비장소 였다고 하는군요.
"나옹선사"의 생전 당호가 "강월헌"이어서 정자 이름을 "강월헌"이라고 했다는데
1972년 대홍수로 유실되고 새로 지은 정각이랍니다.
이나저나 "나옹선사"의 유명한 詩를 원문으로 감상해 보세요
부녀자들의 인기를 독점하다가 어명으로 귀양을 가게된 "나옹선사"이지만
그래서인지 그가 쓴 詩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줍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동쪽방향 조망]
4대강 사업으로 "여주보"가 만들어져 물을 막아 가두어 호수가 된 "여강"입니다.
멀리 "성지지맥"의 끝자락이 보이는군요. 저 너머가 '강원도 원주'입니다.
[남쪽방향 조망]
남쪽 강 건너편엔 "황포돗대"가 보이며 "썬벨리호텔"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신륵사 일주문] 2:08
"신륵사"를 40여분 둘러 보고 일주문을 나섭니다.
버스를 탈수 있는 정류장은 일주문 오른편으로 나가면 되더군요.
[여주도자쇼핑몰]
"신륵사관광단지" 안에는 여러 시설들이 움집해 있었는데
그 중에 "도자세상"이라는 도자기 쇼핑몰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단한 규모였는데 대부분 폐점 상태였으며, 몇개있는 상점들도 손님이 없어 개점휴업인듯...
경제 불황이 심각한듯.....
[신륵사관광지 출입문] 2:15
"신륵사관광지 정문"을 나가서
건너편 [신륵사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여주터미널"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귀가했습니다.
[구글어스]
접속거리 "영릉입구버스정류장"에서 "영릉"까지 거리를 포함해서 14km였으며,
걸린 시간은 4시간 45분이 걸렸습니다.
"영릉"에서부터 "신륵사입구 버스정류장"까지는 12.4km였으며 4시간 30분.
걸리는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식사도 식당 가서 하고...
나름 이곳 저곳 세밀하게 구경하며 다니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수 있겠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하신 "세종대왕"을 알현하고 돌아 올수 있어서 의미있는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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