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기맥 10구간] 춘전치-692m봉-683m봉-숙지령- 망설봉-611m봉-관술령-웅곡리 고향을 떠난지 언제인지 모르게 오래 됫지만 그래도 언제나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운 곳입니다. 고향땅을 감싸고 도는 산줄기를 걸어서 돌아 본다는 것은 그 동안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진양기맥 마루금을 걸을수 있는 기회가 그런 어머니의 품속을 찾아 드는 것과 같은 감회에 젖어 들게 했습니다. [춘전치에서 관술령까지 지도] 유명한 산은 없으나 사람들의 발자취가 거의 없는 처녀림은 청정지역의 상쾌함을 듬북 안겨 주는 긴 거리였습니다. [춘전치 春田峙]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과 "함양군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春田峙입니다 서울에서 어젯밤 10시경에 출발하여 밤1시경 함양읍내 어느 찜질방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맛없는순두부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春田峙"에 도착하니 오전 6시 35분쯤이었습니다. [산행 들머리] 산행준비를 하고 오전 6시 50분경에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바람과 한층 시원해진 가을 날씨로 쾌적한 산행을 시작합니다. [뒤돌아 본 '春田峙'] 산행 들머리로 올라서 "春田峙"를 뒤 돌아 봤습니다. "진양기맥9구간"이 계속 이어져 있으며 "1084"지방도로가 보입니다. 광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88고속도로"가 春田峙를 "1084"지방도로와 함께 나란히 지나고 있는데 "88고속도로"는 숲에 가려 잘 보이지않는군요 [마루금] "88고속도로"는 전두환 군사쿠데타 정권이 東西和合을 하겠다는 즉흥적 발상으로 요즘 지방도로보다 못한 '편도1차선' 도로를 후다닥 광주에서 대구까지 건설했습니다. 어떤 경제적 환경적 타당성 조사도 없이 東西和合이라는 전시적 행정을 펼친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용하는 차량들이 별로입니다. 왜냐하면 통행할 차량들도 많지 않지만, '고속도로'라고 할수 없는 1차선 꼬불꼬불 지방도보다 못하니 차라리 일반국도를 이용하는게 더 편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고속도로가 아니라 즉흥적으로 만든 이상한 도로인것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제서야 토지보상을 하고 고속도로 다운 고속도로 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진양기맥 마루금에서 바라 보는 "지리산"] 함양 咸陽은 백두대간의 德裕山과 智異山 사이에 있는 마을로서 西部慶南地域의 최고 淸淨地域이라 할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잘 보였는데, 사진에는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그래서.... [줌인해서 본 '지리산 천왕봉'] 智異山 天王峰을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도 智異山은 頭流山이라고 했습니다. 김종직선생의 산행기 이름도 遊頭流山記이며 智異山 산행기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白頭大間의 시발점인 白頭山에서 흘러와 만들어진 산이라고 頭流山이라했답니다 白에서 頭하여.....이제 頭流山의 진정한 의미를 아시겠나요? [635m봉] '춘전치'에서 20여분 오르니 "635m봉'이 나왔으며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이른 아침 햇살이 제법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 내는군요. ['3면 경계봉'으로 오르는 등로] 오늘 산행구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692m봉으로 오릅니다. '692m봉'은 함양군 수동면과 안의면, 그리고 거창군 남상면이 함께 만나는 봉우리입니다. ['3면 경계봉 - 692m']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692m로 세개의 面이 분기하는 봉우리입니다. 좌측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가면 "골무산"이 나오는데 제 고향 "安義"의 앞산이 되겠습니다. '골무'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숲으로 잘 보이이지 않는군요 [669.2m봉] 三面경계봉인 692m봉을 지나 30여분 오르니 669.2m봉이 나왔습니다. 이곳 마루금에서는 울창한 숲으로 외부 조망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660m봉] '669.2m봉'에서 갑갑한 숲을 뚫고 20여분 진행하니 처음으로 외부가 조금 조망되는 전망대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안의면 황곡리"로 생각 됩니다. [660m봉 전망대에 뒤 돌아 본 지나온 마루금]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갈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두 아시죠? 네, 바로 無病長壽입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겠죠. 바로 無病長壽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이곳 咸陽 山靑입니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자랑하는 咸陽 山靑.. 너무 자랑하나요? ㅎㅎ [660m봉에서 바라 보는 가야할 '683m봉'] 조선시대 우리나라 백성들의 평균수명이 얼마이었는지 아십니까? "25세"였습니다. 평균수명이 이렇게 낮을수가 있나라고 의아해 하신다구요? 파란문이 잘못 알고 있다구요? 아닙니다. 틀림없이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25세였습니다. 물론 태어 날 때와 어렸을 때에 절반은 죽었기에, 태어날 때와 어렸을 때 죽지 않으면, 대략 50세까지는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이해가 가시죠? "평균수명 25세" [683m봉] 특별한 산도 없고 이름있는 산도 없습니다. 그러니 산에 대해 쓸만한 이야기꺼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계속됩니다. [기백산] 숲 사이로 "기백산 箕白山"이 보입니다. 진양기맥의 대표산이기도 하며 다음구간에 오를 산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은 조선시대-일제시대 "25세"에서 1960년에는 52.4세로 두배로 늘어 납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75.9세로 세계적 장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某事在人(모사재인), 成事在天(성사재천) 인간의 수명도 노력하면 얼마던지 늘어 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咸陽 山靑의 "맑은 물, 께끗한 공기, 조용하고 안락한 환경"이 無病長壽를 만든다고 자랑하고 있답니다. 고향 자랑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객관적으로도 실제 좋은 곳입니다. [683m봉] 인적없는 산봉우리엔 삼각점만 외로이 박혀있고 누굴 기다리나 헤아릴수 없는 나무들은.... 남쪽지방인데도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安義 조망] 다시 安義가 조망됩니다. 제가 安義를 떠난지가 꽤 오래 됩니다. 安義國民學校 4학년을 마치고, 서울 교동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으니.... 그 당시 安義國民學校는 西部慶南에선 제일 학생수가 많았던 큰 학교였습니다. 당시 安義面의 인구가 2만5천을 넘었다던가 그런데 현재는 5천명 정도라고 하네요. 산간오지라 농업도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고 상공업은 전무였으니 모두 도시로 떠났던 것이죠 그런데 요즈음 歸鄕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군요 대전-통영고속도로, 88고속도로가 교차하고, 청정지역으로 소문 나면서 생활이 편리해져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찾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어려운 세계경제 때문에 어쩔수 없이 되돌아 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 너무나 맑고 깨끗합니다 맑은 공기를 마구 퍼 마시고 싶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安義를 찾아 왔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잠자면 제일 그리고 규칙적으로 등산하고.... 매일 한시간씩 수영하고.... [기백산 조망] "기백산 箕白山"이 확실히 조망됩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旗白山"으로 표기되 있는데 旗→箕로 바뀐것은 아마도 일제강점시대에 새로운 지도를 만들때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사실 우리나라 地名은 그때에 무지하게 많은 지명이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인상적인 마루금] "변강쇠" "옹녀"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로 에로영화를 떠올리며, 특히 '이대근'과 '원미경'이 주연한 영화 "변강쇠"가 먼저 생각나시죠? 그리고 막연하게 정력이 무지하게 쎄고, 쌕스를 무지 좋아하는 남녀로 생각 할것입니다. 그러나 "변강쇠"는 우리나라 전래음담설화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판소리"입니다 오늘은 산행을 하며 판소리 "변강쇠가"를 심층적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왜 느닷없이 "변강쇠 타령"이냐구요? ㅎㅎ 천하의 음남(淫男)과 음녀(淫女)의 육욕(肉慾) 탐닉(眈溺)의 대명사인 '변강쇠'와 '옹녀'가 개성에서 만나 한바탕 천지가 진동하게 떡을 치고 肉慾眈溺하다가..... 그 이후 깨달은바 있어 인간답게 살자고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 간곳이 바로 이곳 "함양 咸陽"이기 때문입니다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곳이 이곳 함양이라는 것 처음 알았죠? [거창 감악산] 동쪽으로는 거창의 감악산(紺岳山 951m)이 보입니다 거창의 감악산(紺岳山 951m)은 남상면 무촌리와 신원면 과정리를 안고 있는 거창의 안산입니다. 본디 이름은 대덕산(大德山)인데 거창분지의 남쪽에서 서쪽 대용산과 동쪽 대덕산, 돌마장산, 매봉산들을 거느리고, 한 일자 용릉으로 흐르고 있답니다. 사진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산 고스락 감악평전에는 KBS, MBC TV 중계탑이 보이고 있습니다 [황매산과 자굴산] 남쪽으로는 합천과 산청에 걸쳐있는 "황매산"과 그 뒤로 "자굴산"이 보입니다 "황매산 구간"과 "자굴산-한우산 구간"은 이미 종주한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들이었습니다. 특히 '황매산'에서 "고추 말리기"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 납니다. ㅎㅎ [安義 황곡리] "변강쇠"를 알려면 판소리를 알아야합니다 "판소리"가 무었인지 정확히 아십니까? 그저 唱하는거라고 정도 아시죠? "판소리"는 소리꾼이 북치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아니리(사설)·발림(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입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 내려 오는 판소리는 12가지 있습니다.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장끼타령〉·〈가짜신선타령〉〈변강쇠타령〉 그러나 현재는 12마당의 판소리 중에 여섯마당만 판소리로 전하고 있는데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申在孝:1812~84)선생에 의해 정립된 것입니다. 여섯마당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변강쇠가〉입니다 이 여섯마당 중에서도 〈변강쇠가>는 음난하다고 잘 불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로 유명한 박동진선생에 의해 完唱된바 있습니다. 박동진 명창도 6년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신재효(申在孝)선생이 개작한 판소리로 6마당 중의 하나인 "변강쇠가"는 일명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하지요. 우선 "변강쇠가"의 주제를 알려 드리면 천하의 음남(淫男)인 변강쇠와, 천하의 음녀(淫女)인 옹녀가 육욕(肉慾)만을 탐닉(眈溺)하다가 스스로 응징된다는 내용입니다. 性文化와 도덕을 중시해야한다는 권선징악이 깔려있는 교육적인 것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신재효선생이 개작한 "변강쇠가"를 주요부분만 감상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옹녀'에 대해 설명합니다 "중년(中年)에 비상(非常)한 일이 있던 것이었다.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 있으되, 얼굴로 볼작시면 춘이월(春二月) 반개도화(半開桃花) 옥빈(玉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蛾眉間)에 비치었다. 앵도순(櫻桃脣) 고운 입은 빛난 당채(唐彩) 주홍필(朱紅筆)로 떡 들입다 꾹 찍은 듯, 세류(細柳)같이 가는 허리 봄바람에 흐늘흐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태도 서시(西施)와 포사(포사)라도 따를 수가 없건마는, 사주(四柱)에 청상살(靑孀煞)이 겹겹이 쌓인 고로 상부(喪夫)를 하여도 징글징글하고 지긋지긋하게 단콩 주어 먹듯 하것다." 윗 판소리를 알기 쉽게, 간단하게, 제가 요약해 드리면....친절하죠? ㅎㅎ 옹녀의 고향은 평안도 월경촌이고, 얼굴은 무지무지 예쁘고, 몸매는 요즘 말로 날씬한 S라인이며, 웃는 모습과 걷는 모양도 妖邪스럽고, 특히 남편이 죽어도 아무른 개념없이, 만나는 남자들을 단콩 주어 먹듯이 먹어치웠다니.... [기암괴석] '옹녀'는 결혼을 몇번이나 하고 남편을 몇명이나 쌕스로 죽였을까요? "열다섯에 얻은 서방(書房)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急傷寒)에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 당창병(唐瘡病)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천하에 대적(大賊)으로 포청(捕廳)에 떨어지고, 스무 살에 얻은 서방 비상(砒霜) 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 치기 신물난다" 그리고 월경촌에는 옹녀 때문에 죽는 남편 이외에도 남아 나는 남정네가 없었답니다 옹녀를 한번보면 상사병이 들어 죽거나, 앙탈이 나 죽어갔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옹녀를 동네에서 추방시킵니다. [安義 중심가] 평안도 월경촌에서 추방 당한 옹녀는 南쪽이 살기 좋다고 南쪽으로 내려 오다가 南쪽에서 北쪽으로 올라 가는 천하 잡놈 변강쇠를 '개성 청석관'에서 만남니다 이들이 만나는 광경을 판소리 '변강쇠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청석골 좁은 길에서 둘이 서로 만나거든, 간악(姦惡)한 계집년이 힐끗 보고 지나가니 의뭉한 강쇠놈이 다정히 말을 묻기를, "여보시오, 저 마누라 어디로 가시는 거요." 숫처녀 같으면 핀잔을 하든지 못 들은 체 가련마는, 이 자지간나희가 훌림목을 곱게 써서, "삼남으로 가오." 강쇠가 연거푸 물어, "혼자 가시오?" "혼자 가오." "고운 얼굴 젊은 나이인데 혼자 가기 무섭겠소." "내 팔자 무상(無常)하여 상부(喪夫)하고 자식없어, 나와 함께 갈 사람은 그림자뿐이라오." "어허, 불상하오. 당신은 과부요, 나는 홀애비니 둘이 살면 어떻겠소." "내가 상부(喪夫) 지질하여 다시 낭군(郞君) 얻자 하면 궁합(宮合)을 먼저 볼 것이오."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하니, 마누라 성씨가 누구시오." "옹(雍)가요." "예, 나는 변서방인데 궁합을 잘 보기로 삼남에 유명하니, 마누라 무슨 생이요." "갑자생(甲子生)이오." 이렇게 만나 곧바로 바위에 올라가 서로 궁합을 보고 대사(大事)를 치룹니다 [줌인한 安義 중심가] 변강쇠와 옹녀가 정사를 하는 장면을 판소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둘이 손길 마주 잡고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지내는데, 신랑 신부 두 년놈이 이력(履歷)이 찬 것이라 이런 야단(惹端) 없겠구나. 멀끔한 대낮에 년놈이 홀딱 벗고 매사니 뽄 장난할 때, 천생음골(天生陰骨) 강쇠놈이 여인의 양각(陽刻) 번쩍 들고 옥문관(玉門關)을 굽어보며,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였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노. 천리행룡(千里行龍)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神通)하다. 만경창파(萬頃蒼波) 조개인지 혀를 삐쭘 빼였으며 임실(任實) 곶감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물(臟物)이요, 만첩산중(萬疊山中) 으름인지 제가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軟鷄湯)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 비치였다. 파명당(破明堂)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상은 걱정 없다." ㅎㅎ 옹녀의 거시기玉門關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있죠? ㅎㅎ ["서울 陽川 沈熔輔" 표지기] 4,000산을 등정한 "서울 陽川 沈熔輔"선생의 표지기가 이곳에도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산 4,000개 이상을 등정한 산객은 별로 없습니다. 대단한 산객인 沈熔輔"선생과 몇번 함께 산행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연세가 칠십을 넘었는데도 저보다 무지 잘 걷습니다. [거창군 남상면] 변강쇠가 자신의 거시시玉門關을 보고 묘하게 표현하는 말을 듣고 옹녀는 미소를 지으며 앙갚음을 하려고, 변강쇠의 거시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이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 서려는지 쌍걸낭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五軍門) 군뇌(軍牢)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인고. 성정(性情)도 혹독(酷毒)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구멍이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대인지 검붉기는 무슨 일인고.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이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낭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옹녀와 강쇠가 서로의 성기를 보며 절묘한 표현을 하고는 하루 종일 서로 업어 가며 정사를 벌입니다 [숙지령] 강쇠와 옹녀는 서로 업고 사랑가를 부르는데, 그 중에서 옹녀의 사랑가를 들려드림니다. 옹녀가 강쇠를 업고, 실금실금 까불면서 사랑가를 하는구나. "사랑 사랑 사랑이야. 태산같이 높은 사랑. 해하(海河)같이 깊은 사랑. 남창(南倉) 북창(北倉) 노적(露積)같이 다물다물 쌓인 사랑. 은하직녀(銀河織女) 직금(織錦)같이 올올이 맺힌 사랑. 모란화 송이같이 펑퍼져버린 사랑. 세곡선(稅穀船) 닷줄같이 타래타래 꼬인 사랑. 내가 만일 없었으면 풍류남자(風流男子) 우리 낭군 황 없는 봉이 되고, 임을 만일 못 봤으면 군자호구(君子好逑) 이내 신세 원 잃은 앙이로다. 기러기가 물을 보고, 꽃이 나비 만났으니 웅비종자요림간(雄飛從雌繞林間) 좋을씨고 좋을씨고. 동방화촉(洞房華燭) 무엇하게, 백일향락(白日享樂) 더욱 좋다. 황금옥(黃金屋) 내사 싫으이. 청석관이 신방(新房)이네." 이렇게 사랑가를 부르며 大事를 계속 치룹니다. ㅎㅎ [숙지령] 강쇠와 옹녀는 혼인 후에도 유랑을 한동안 계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옹녀는 생활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데 반해, 강쇠는 도리어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며 놈팽이가 되어 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옹녀는 강쇠의 놈팽이 꼬라지를 보지 못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집의 성기(性氣) 가지고서 도방 살림 하다가는 돈을 모으기 고사(姑捨)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심산궁곡(深山窮谷) 찾아 가서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산전(山田)이나 파서 먹고, 시초(柴草)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테요, 강짜도 안 할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강쇠가 대답하되, "그 말이 장히 좋의. 십 년을 곧 굶어도 남의 계집 바라보며, 눈웃음하는 놈만 다시 아니 보거드면 내일 죽어 한이 없네." 결국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 할 곳을 찾습니다. 강쇠와 옹녀가 어느 곳으로 가 정착할것인지를 의논하는 대목입니다. "동 금강(金剛) 석산(石山)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香山) 찬 곳이라, 눈 쌓이어 살 수 없고, 서 구월(九月) 좋다 하나 적굴(賊窟)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智里) 토후(土厚)하여 생리(生利)가 좋다하니 그리로 찾아가세." 이리하여 강쇠와 옹녀는 지리산이 있는 "함양군 마천면"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함양이 얼마나 생리(生利)가 좋은 곳인지 판소리 '변강쇠가'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望雪峰 등로] 오늘 산행로에서 유일하게 산이름이 있는 "망설봉 望雪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왠일인지 등산로를 꾸며 놨습니다. 아마 거창군에서 만들어 놓은듯합니다. [望雪峰을 오르며 뒤돌아 본 636m봉] 강쇠와 옹녀는 '함양 마천'에 정착했는데, 옹녀는 어떻게던 잘 살아 보려고 열심히 일 하는데 강쇠는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니 옹녀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대목을 판소리에서... 부엌에 토정(土鼎) 걸고, 방 쓸어 공석(空石) 펴고, 낙엽을 긁어다가 저녁밥 지어 먹고, 터 누르기 삼삼구(三三九)를 밤새도록 한 연후에 강쇠의 평생 행세(行勢)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할 수 없어 애긍히 정설(情說)한다. "굶어 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소." 옹녀는 강쇠에게 나무라도 열심히 해 오라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望雪峰 등로] 옹녀의 바가지에 어쩔수 없이 강쇠는 나무하러 갑니다. 강쇠가 나무하러 가는 곳이 판소리에 나오는데..... "'등구 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등구 마천 백모촌" ‘등구’는 현재 함양군 마천면 "등구마을" 일대를 지칭하고, ‘마천’은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가흥리,군자리 일대를 지칭하며 ‘백모촌’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의 옛 명칭이라는 것이랍니다. 함양군 마천면이 강쇠와 옹녀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한 곳이란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望雪峰 등로] 그러나 나무 하러 간 강쇠는 나무는 하지 않고 신세 타령을 하며 벨 나무가 없다고 노래 합니다. "오동나무 베자 하니 순(舜)임금의 오현금(五弦琴). 살구나무 베자 하니 공부자(孔夫子)의 강단(講壇). 소나무 좋다마는 진시황(秦始皇)의 오대부(五大夫). 잣나무 좋다마는 한 고조 덮은 그늘, 어주축수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 홍도(紅桃)나무 사랑옵고.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邑輕塵) 버드나무 좋을씨고. 밤나무 신주(神主)감, 전나무 돗대 재목(材木). 가시목 단단하니 각 영문(營門) 곤장(棍杖)감. 참나무 꼿꼿하나 배 짓는 데 못감. 중나무, 오시목(烏枾木)과 산유자(山柚子), 용목(榕木), 검팽은 목물방(木物房)에 긴(緊)한 문목(紋木)이니 화목(火木)되기 아깝도다." 결국 벨 나무가 없다고 핑개를 대며 나무를 하지 않고 내려 옵니다. 일 하기 싫은 놈은 핑개꺼리도 많지요? ㅎㅎ [望雪峰 정상] 나무를 해 가지 않으면 또 옹녀에게 바가지를 긁힐테니 강쇠는 잔꾀를 부립니다. 나무를 하는 대신 부리는 잔꾀는 다름아니 '장승'을 뽑아 집으로 가져 가는 것입니다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지게를 찾아 지고 장승 선 데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낯에 핏기 올리고서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號令)하여, "너 이놈, 누구 앞에다 색기(色氣)하여 눈망울 부릅뜨니. 삼남(三南)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科擧), 마전(馬廛), 파시평(波市坪)과 사당(寺黨) 노름,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제 선취(先取) 복장(腹腸) 후취(後取) 덜미, 가래딴죽, 열 두 권법(拳法). 범강(范彊), 장달(張達), 허저(許저)라도 모두 다 둑 안에 떨어지니 수족(手足) 없는 너만 놈이 생심(生心)이나 방울쏘냐."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둘음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유대군(留待軍) 소리 하며 제 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豪氣)를 장히 핀다. 강쇠는 이렇게 장승을 뽑아 짊어 지고 돌아 옵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望雪峰 정상에서 바라 본 安義 도곡리] 강쇠의 도끼에 산산히 부셔져 부엌 속에 잔재가 된 "장승"은 억울해 하며 장승의 대빵(大方)을 찾아 가서 복수 해 줄것을 요청합니다. 장승 목신 무죄(無罪)히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 나고 부엌 속에 잔 재 되니 오죽이 원통(寃通)하겠나. 의지(依持)할 곳이 없어 중천(中天)에 떠서 울며,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값겠다. 대방(大方)전에 찾아가서 억울함 원정(原情) 하오리라 [줌인한 望雪峰 정상에서 바라 본 安義 도곡리] 장승의 원통함을 들은 대방(大方)은 다음과 같이 전국의 장승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냅니다 "우통유사(右通喩事)는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고, 지초(芝草)에 불이 타면 난초가 탄식(歎息)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환란상구(患難相救) 떳떳한 이치로다.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斫破) 화장하였으니 만과유경(萬과猶輕) 이 놈 죄상 경홀 작처할 수 없어 각도 동관전에 일체(一切)로 발통(發通)하니 금월 초 삼경야에 노강 선창으로 일제취회(一齊聚會)하여 함양 동관 조상(弔喪)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의견(各出意見)하옵소서" [望雪峰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 전국의 장승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강쇠를 죽일 여러 의견들을 내 놓습니다 그 중에서 채택되는 해남 관머리 장승의 복수극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한 흉한 놈을 쉽사리 죽여서는 설치(雪恥)가 못 될 테니 고생을 실컷 시켜, 죽자해도 썩 못 죽고, 살자해도 살 수 없어 칠칠이 사십구 한달 열 아흐레 밤낮으로 볶이다가 험사(險死) 악사(惡死)하게 하면, 장승 화장한 죄인 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懲戒)될 테니, 우리의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를 찾아가서 신문(신門)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五臟六腑) 내외없이 새 집에 앙토(仰土)하듯, 지소방(祗所房)에 부벽(付壁)하듯, 각장(角壯) 장판(壯版) 기름 결듯, 왜관(倭館) 목물(木物) 칠살같이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 하오." 아주 처절한 방법으로 강쇠를 죽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복수극案이 채택되어 실행되는데 강쇠는 수만가지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望雪峰 정상석] 변강쇠 남편을 살리기 위해 옹녀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물며 강쇠를 살려 주면 몸을 주겠다고 하면서 까지 노력을 하지만 장승들의 복수는 계속 됩니다. 결국 옹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쇠는 "동티"로 죽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치우려는데 시체를 치우는 사람들도 죽습니다 *동티: 動土 : 건드려서는 안될 것을 건드려 그것을 관장하는 地神의 노여움을 사서 받게 되는 재앙 [望雪峰에서 관술령으로 하산] 판소리 "변강쇠가"는 비극적 삶의 종말이 희극적으로 표현되며, 이에 따라 이 작품의 비극적 구조는 희극적 요소에 차단당합니다.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가 희극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유랑 광대패가 청중이나 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비참하고 불행한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 작품은 판소리로 불렸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문학적 형상력을 보이고 있답니다. 특히 남녀의 성기를 묘사하는 기물타령(奇物打令)에서는 놀라운 상상력과 다양한 비유로써 남녀 성기의 묘사와 유랑민들의 현실적 욕구를 교묘히 묶어놓은 언어적 형상력이 나타나 있다는군요. [알바] "망설봉"에서 "관술령"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들어 알바를 했습니다. 알바를 한시간이나 했으니..... [알바] "관술령"인줄 알고 내려 갔으나..... [위치 파악] 지도를 펴고 자세히 살펴 보니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망설봉"으로 올라 갔습니다. '망설봉"을 거의 두번 오른 셈이 되었습니다. [望雪峰에서 관술령으로 가는 갈림길] 望雪峰으로 다시 올라 오다 보니 좌측으로 희미한 갈림길이 보였습니다. 다음에 가실 분들은 이곳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거의 직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갈림길 이후로는 "서울 陽川 沈熔輔"선생의 표지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거창 둔동리로 내려가 다시 오르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간듯...ㅎㅎ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관동고개] 처음에는 이 고개가 "관술령"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이름이 관동마을이더군요. [安義 관동마을] 판소리 "변강쇠가"를 테마로 공원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는 곳이 安義에서 가까운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에 있습니다. "오도재 정상 지리산조망공원" 그곳에 가면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인 박찬수(58)씨가 변강쇠와 옹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그곳에 있는 목조각품 몇점 보여 드리겠습니다 [611m봉으로 오르는 등로에 있는 송전철탑] [거창읍내 전경] [관술령] "춘전치"에 승용차를 세워 두었기에 "춘전치"로 돌아 가야합니다. 관술령에서 오전에 출발지인 "춘전치"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경제적이었습니다 [관술령] 관술령에서 왼쪽으로 가면 安義面 초동리로 갑니다 ['관술령'에서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로 하산하는 길] 관술령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이 되겠습니다 ['관술령'에서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로 하산하는 길] 웅곡마을로 내려 가는 길에서 보이는 거창읍내 [거창읍 장팔리 웅곡 마을] 오후 4시 20분에 웅곡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웅곡마을에서 '춘전재'까지 거창택시를 불러 갔는데 2만원이었습니다 거창택시는 전화 하자 10분만에 오더군요. [구글어스로 본 진양기맥 安義區間] 오늘도 많이 걸었습니다. 총산행 시간 : 9시간 30분 (알바 포함)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진양기맥 黃梅山 區間 山行記 구름재-박덤-삼봉-하봉-중봉-황매삼봉-황매봉-떡갈재-작은황매산-소야리 집중호우가 퍼붓는 장마철 7월17일(금) 밤 10시 30분경 경부고속도로 죽전 버스정류장에는 굵은 빗줄기가 차량들의 전조등에 더욱 빛을 토하며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장마철 산행에 대해 많은 주윗분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진양기맥8구간 黃梅山 區間" 을 종주하기 위해 무박으로 길을 떠납니다.

             
             [산행 개념도]
             이 지도를 잘 봐둬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합천댐 앞 "합천댐 관광단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
     합천댐 바로 앞에 있는 "합천댐 관광단지"에서 바라보는 합천호 주변 경관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악견산"이며 옆 계곡에 '합천댐'이 있습니다
     이 주변 地理는 황매산에 오르며 사진으로 자세히 보여 드림니다.
     이 사진을 찍은 시간이 오전 6시30분경이었습니다
  
      [송옥가든]
     합천관광단지에 있는 전망이 가장 좋은 음식점인 "송옥가든"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식사도 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산 이름이 지도에도 나오는 "금성산"이라고 주인이 알려주었답니다
    
     [송옥가든]
     서울에서 빗길을 뚫고 이곳까지 약 4시간이 걸려 도착하니 밤 2시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송옥가든에서 무료로 방을 빌려 주었고, 아침식사비만 받았습니다.
     서너시간 잘수 있어서 황매산을 종주 할수 있었고, 따뜻한 된장찌개 아침식사가
     산행에 큰 도움을 준것은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무박산행시에는 민박이나 펜션을 예약해 전날 미리 내려가 이런식으로
     숙식을 하고 이른 아침 산행을 하는 방법을 적극 활용하면 더 많은 회원님들이 참여 할듯..
     
     [송옥가든 앞 "합천댐 관광단지 축구장"]
     이곳에는 합천군이 설치한 축구장이 있었는데 제법 유명한 축구대회가 열리고,
     각급학교 축구부들의 합숙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을 끄는 방법 중에 하나이라고 하며 이곳의 명소라고하네요
     
     [황매산 만남의 광장]
     승용차로 약 10분정도 이동하여 "황매산 만남의 광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황매산은 산청군과 합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등산코스도 산청군과 합천군에
     각각 있는데 이곳은 합천군 대병면에 있는 황매산 들머리입니다.
     
     [기념촬영]
 
     [황매산 만남의 광장]
     오전 7시에 도착하여 약 10분 정도 주변 사진을 찍고 산행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 등산로로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진양기맥" 마루금을 따라 산행을 하므로 마루금을 찾아 마루금으로 이동해야합니다.
     
     [구름재]
     "진양기맥 황매산 구간 마루금"이 지나는 "구름재"에서 정식으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황매산 만남의 광장"에서 황매산 등산로로 들어 오는 중간에 마루금이 지나 갑니다.
     일반 등산로로 황매산을 오르실 분들은 이 길로 더 들어 가서 쉽게 오를수 있습니다.
     황매산은 앞으로 아시겠지만 거의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잘 나 있습니다.
     
     [산행시작]
     진양기맥을 걷는 우리는 "구름재"에서 숲속으로 들어 갑니다.
     오전 7시 10분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좋은 등산로를 놔두고 길도 없는 마루금으로 들어 가는 특이한 사람들
     
     [헬기장]
     '구름재"에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조금 오르니 헬기장이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일반등산로 "박덤 갈림길"까지 길없는 길을 갔습니다.
     가시덤불과 숲을 헤치고 약 30분을 악전고투하며 오릅니다.
     너무 험한 길이라 숲속 사진은 한장도 찍을수 없었습니다
  
     [박덤]
     "구름재"에서 약30분 정도 숲을 헤치고 나아가면 임도를 만남니다.
     다시 임도를 따라 약15분 정도 오르면 "박덤 이정표"를 만남니다.
     여기서부터 황매산을 지나 "떡갈재"까지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좋은
     산행길이었습니다.
     "삼봉"방향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삼봉으로 가는 갈림길]
     넓직한 임도를 따라 오르면 길안내를 잘해 놓은 이정표를 수시로 만납니다.
     황매산 등산은 합천군 대병면 "황매산 만남의 광장"에서 시작하여
     "박덤-삼봉-하봉-중봉-황매삼봉-황매봉"코스를 강력 추천합니다
     황매산의 모든 것이 이 코스에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삼봉 오르는 길]
     합천군 대병면 만남의 광장에서 오르는 등산코스에는 지도에 "삼봉"이 두개 있습니다.
     "박덤'에서 오르면 첫번째 봉우리가 "삼봉"인데, 사실 표지석이 없어 어느 봉우리가
     "삼봉"인지 잘 알수 없었고, 대략 그러려니하고 올랐습니다.
     하지만 "하봉"과 "중봉"을 지나 나타나는 "삼봉"은 표지판도 있고 설명 안내판도 있어
     확실히 알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삼봉"은 "황매삼봉"으로서 "황매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황매산의 하일라이트였습니다
     
     [무명봉]
     하늘이 열리는 봉우리로 처음 올라서니 "황매산"이 장엄하게 나타납니다.
     "황매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이 봉우리에서 진정한 황매산 산행이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부터 황매봉까지 화려한 산행코스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전혀 지루하지 않게 황매산을 遊山합니다.
     
     [황매산의 주 능선]
     펼쳐지는 저 산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하고 대자연과 함께 하리라~~
     지난 밤까지 퍼붓던 장대비는 언제였는지 더욱 맑아진 공기와 하늘은
     가을 날씨같았으니 우리는 너무 행운이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산행 개념도]
     "삼봉 - 하봉 - 중봉 - 황매삼봉 - 떡갈재 갈림봉 - 황매봉"
     순서를 알고 산행기를 읽으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삼봉 오르는 길]                                                   [삼봉 입구]
     합천 대병면에서 오른 코스에서 처음으로 맞는 봉우리가 "삼봉"인데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봉우리의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하며 암릉구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삼봉 오르는 암릉]
     처음으로 암릉을 오릅니다.
     
     [삼봉]
     아마도 아랫쪽 "삼봉"이라고 생각되는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처음으로 황매산의 안쪽 바깥쪽을 두루 살펴 볼수 있는 전망이 좋은 봉우리였습니다.
     구름이 수시로 황매산을 덮었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구름 이외에는 좋은 날씨입니다.
     
     [삼봉에서 내려다 보는 "합천호"]
     처음으로 "합천호"가 보입니다.
     합천호는 합천댐이 준공되면서 생긴 호수로 면적이 785만 평, 댐 높이 96m, 길이 472m, 
     총 저수량이 7억 9천만 톤의 인공 호수로 1988년 12월 준공된 다목적 댐이라고 합니다
  
     [하봉 가는 능선]
     오늘은 합천군 대병면과 산청군 가회면의 경계인  "구름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실제 "황매산"은 산청군의 산이라고 말하는데 무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면적에서 산청군이 훨씬 많이 차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봉]
     실제 "하봉"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상표지석도 없고, 대략 알아서 생각하면 됩니다
     돌무덤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중봉]
     드디어 봉우리 다운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아마도 이곳이 "중봉"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는 돌탑이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뚝 솟아있고, 안내판도 있습니다.
     이 능선은 山城이었답니다.
     山城의 이름은 "黃梅山城"이었는데 구전되어 오면서 음운변화를 거쳐 "할미산성"으로
     변형되어 지금까지 전해 진다고 합니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황매봉"]
     황매산의 정상인 "황매봉"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름 위에 떠있는 "황매봉"이 글자 그대로 梅花같습니다.
     주변의 풍광이 활짝 핀 매화꽃잎 모양을 닮아 마치 매화꽃 속에 홀로 떠 있는 듯 신비한 
     느낌을 주어 "황매산"이라 부른다고 산청군은 자랑하고 있습니다.
     
     [할미산성과 "치마 덤" 내력]
     이 "할미산성" 아래에 넓은 바위가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치마 덤"이라고 한다는데 그곳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고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군요.
     "덤"이 무슨 뜻인지 경상남도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잘 모를것입니다
     "덤"은 경남지방 특히 경남 내륙지방의 사투리로 "바위"라는 말입니다
     제 고향이 이쪽이라 확실합니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황매삼봉"]
     "황매산"은 효의 산이며 3무(無)의 산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아 보니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군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가 황매산에서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무학대사가 수련을 할 때 무학대사의 어머니가 뒷바라지를 위해 산을 오르내렸는데
     오르내릴때에 칡덩굴과 땅가시에 발등이 긁혀 넘어져 상처가 나고 뱀에 놀라는 것을 본 뒤 
     황매산 산신령에게 지극 정성으로 100일 기도를 드렸다고합니다.
     무학대사의 기도가 산신령을 감동 시켰는지 그 이후 지금까지 "뱀"과 "땅가시",
     그리고 "칡덩굴"이 자라지 않아 "3무(無)의 산"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무학대사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의 실천과 사랑은 천년의 시공(時空)을 넘어 전설로 
     이어져 오고있답니다.
      불교를 믿는 무학대사가 석가에게 기도를 해야지,
      '산신령'에게 기도를 했다는게 조금 이상하군요. 맘대로 놀아라~~ㅎㅎ
     
     [중봉에서 내려다 보는 "합천호"]
     "황매산"에서 "합천호"를 바라 보는 광경이 압권입니다.
     요즘 장맛비가 많이 내렸는데도 합천호의 水位는 중간 정도를 보여주고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가물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황매삼봉 오르는 길에 있는 삼거리]
     "중봉"과 "황매삼봉" 사이에 있는 삼거리입니다.
     이 산줄기의 좌우에서 올라 오는 등산코스와 만나는 곳입니다.
     
     [황매삼봉으로 가는 길]
     人類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을 꼽으라면 무슨 말을 꼽으시겠습니까?
     사람들에 따라 꼽고 싶은 말이 다소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쏘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를 꼽으면 크게 반대 하실 분은 없을듯합니다.
     그런데 우리같은 산객들에겐 "너 자신을 알라~"보다
     '쟝 쟈크 루쏘'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 가라!~"가 더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산꾼은 아무래도 "山"이 대표로 지칭되는 "自然"이 더 마음에 와 닿을겁니다.
     이런 산행기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조금 있으면 알게 될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 가라!~"
  
     [황매삼봉 오르는 길]
     우선 "쟝 자크 루쏘"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면....
     18세기 계몽사상가요,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루쏘(Jean Jacques Rousseau)는
     "자연은 인간을 선량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사회는 인간을 죄악에 젖게 하고 노예로 만들어 불행을 초래케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 가라~!"고 외치며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의 먼 원동력이 되고, 
     근대 민주주의에 이론적 터전을 마련해 준 세계 역사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황매삼봉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합천호"]
     쏘크라테스에 버금가는 출중한 인물인 "쟝 자크 루쏘"가 웃기는 짜장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쟝 쟈크 루쏘"는 노출증(exhibitionism) 환자였습니다
     노출증(exhibitionism)이란 육체의 일부, 특히 성기를 일부러... 특히 여성 앞에다 노출시키는 
     충동적 행위를 말하는데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황매 삼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 본 "황매평전"]
     드디어 황매산의 대명사인 "황매평전"이 시야에 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매년 5월 하순이면 저 앞에 보이는 도로를 따라 수많은 자동차들이 행렬을 이루고
     철죽이 뒤덮은 "황매평전"이 인간들의 화려한 등산복으로 더욱 붉게 물들이는 곳이
     저 "황매평전"입니다.
     자동차가 황매산의 정상부까지 올라 올수 있어 날나리 산객들이 산행이 아닌 관광을
     전국에서 오기 때문에 엄청난 人山人海를 이룬다고 합니다.
     
     [황매삼봉]
     수년 전 홍대 앞 카페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젊은 연예인 두 명이 
     공연 도중 갑자기 성기를 드러내는 바람에 생중계방송 중이던 방송사가 
     시청자 앞에 사과성명을 내는 등 해프닝이 있었다는것 기억하실겁니다
     정열적인 음악 삼매경에 도취돼 정신이 좀 느슨해졌던 것 아닌가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 성기를 내 보이고 그것으로 쾌감을 얻는 "노출증"인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노출증의 대명사로 곳곳에서 나타났던 '바바리맨'이 있었던것도 기억하실겁니다
     요즘은 포르노 수준의 영화들이 케이블 TV의 채널을 주름 잡아 '바바리맨'이 쌕수얼한 이슈가
     되지 못하고 개그프로의 개그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노출증"이 변태적인 성행위에서 벗어나 있는 듯도 하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호기심 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ㅎㅎ
     
     [황매삼봉 오르는 계단]
     노출증(exhibitionism)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유치한 노출증 충동이 고학력군 젠틀맨들에게 많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저는 저학력군에 속하기에 '노출증' 환자는 절대 아닙니다. ㅎㅎ
     전세계 역사에서 알려져 있는 '노출증 환자'는 그 대표적 인물이 다름아닌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지주인 "자연으로 돌아 가라~"라고 한 "쟝 자크 루소"입니다
     그는 노출증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수 있는 "참회록"에 상세히 고백해 놓았습니다. 
     그 이후 의학계에서는 노출증이 속칭 ‘가방 끈 긴 사람이 주로 걸리는 질병'이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고학력군에서 이런 노출증 환자가 나타난답니다
     재미있나요? ㅎㅎ 이 이야기는 '황악산 산행기'에서 이미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
  
     [갈림길 - 가회덕만 주차장에서 오르는 길]
     젊은 시절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용서를 비는 루소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조명이 안 된 컴컴한 골목이나 행인이 드문 곳에 대기하다 
     지나가는 여인을 만나면 그 여성들 앞에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키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그 여성들의 당황한 모습을 즐겼다고 분명하게 써놨습니다. 
     또 자신의 페니스를 여성에게 보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한 쾌감이 전신을 엄습했다는 사실도 고백해 놓았습니다.    
     이런 등산로는 노출증 환자들에게 더욱 좋은 장소가 될수 있겠습니다. ㅎㅎ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들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도 그런 충동은 느끼지 않나요?
   
     [삼봉 정상부 갈림길]
     드디어 "황매삼봉"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중봉", "하봉" 아래에 있던 "삼봉"과는 구별해야합니다.
     이미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등산코스에는 "삼봉"이 두군데에 있는데
     "박덤"에서 오르면 처음 만나는 "삼봉"과 "하봉","중봉"을 지나 만나는 "삼봉"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황매산의 정상인 "황매봉"까지 펼쳐지는 능선에 있는 세개의 봉우리를 "삼봉"이라
     하는데, 구별하기 위해 "黃梅三峰"이라 한답니다.
     
     [삼봉 정상부 갈림길]
     루소의 솔직한 젊은 날의 참회처럼 
     노출증 환자는 자기의 성기를 보였을 때 여성이 당황해 쩔쩔매는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성적 만족을 느끼며 그러한 희열을 맛보는 것으로 그 여성을 직접 범한 것과 같은, 
     즉 그 여성과 섹스를 한 것 같은 흡족한 기분이 든다고 하는 군요.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쟝 쟈크 루쏘'가 노출증 환자였다니.......
     제가 이 "노출증" 이야기를 왜 하는지 잠시 뒤에 알게 됩니다.
     
     [황매삼봉 정상에 있는 팔각정]
     "黃梅三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는 "팔각정"이 벼랑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황매평전"에서 불어 오는 하늬바람이 오장육부를 써늘케 합니다.
     먼저 도착한 횐님들은 팔각정 안에서 午睡를 늘어지게 즐기고 있습니다.
     절묘한 위치에 팔각정을 지어놨습니다.
     
     [황매삼봉 팔각정에서 내려다 보는 "황매평전"]
     "黃梅坪田"
     봄이었으면 더 좋았을 "黃梅坪田"을 내려다 보며 오늘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아!~~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 -
     천하가 모두 내 발 아래에 있습니다.
     정말 장쾌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황매 삼봉 팔각정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이 주로 한다는 exhibition 노출을 했습니다. ㅎㅎㅎ
     팬티를 내리고 불어 오는 하늬바람에 땀으로 쩔은 '거시기'를 말렸습니다.
     黃梅山의 정기를 받아 더욱 솟아나는 정력!!~~
     그리고 집에 전화를 걸어 와이프에게 "지금 황매산에서 황매산 정기를 받고 있다"라고 전했습니다
     뭔 말인지 모르고 그져 조심해서 다녀 오라는 말만 남겼지만 속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장마철이라 이 코스로 오늘 산행을 한 사람들은 우리 뿐이었습니다.
     혹시.......
     가운데 '파란문'의 팬티를 보고 여성분들이 울 남푠도 저 팬티 사입혀야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혹시 '파란문' 비슷한 그런 ..그런 쎈 사람이 되지 않을까?해서...ㅎㅎㅎ
     이나저나 '파란문' 날씬하죠?
     
     [황매 삼봉 팔각정에서............]
     우웩? ㅎㅎ
     단체로 아예 홀라당 벗고 黃梅山의 정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인터넷에 올려지면 문제가 될까요?
     음란물 유포로 감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다소 문제는 될수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만
     그져 재미로 봐 주시기 바람니다.
     요즘 영화나 케이블 TV에는 진짜 완전 홀라당 아닙니까?
     그리고 "장 쟈크 루쏘"처럼 '노출증 환자'도 아니고 그저 '거시기'를 좀 말렸을 뿐입니다.
     황매산을 오르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ㅎㅎ
     그리고 여성분들 진정하세요~~
     
     [황매 삼봉 팔각정에서 황매봉까지 능선]
     이제부터 가야할 "黃梅三峰" 능선이 펼쳐집니다.
     다소 쉬운 코스이지만 이 능선에 "황매산"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팬티를 올리고 반바지를 입고 황매산 정상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납니다.
     
     [황매 삼봉 능선]
     아기자기한   "黃梅三峰" 능선이 가는 길을 즐겁게 해 줍니다.
     
     [황매삼봉에 있는 다른 한 봉우리]  
     황매산의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며 
     전체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한 누구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1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여 
     예로부터 뜻 있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산청군과 합천군은 홍보하고 있습니다.
     
     [황매삼봉 능선에 있는 한 봉우리에서 바라 본 황매봉] 
     황매산의 정상인 "황매봉"이 가까워 옵니다.
     요소 요소에는 휴식 시설이 설치되 있습니다.
     
     [황매 봉 능선] 
       "黃梅三峰" 
     이곳을 이미 다녀 가신 분들은 저의 산행기를 보며 기억이 더욱 새로울 것입니다.
     정말 멋진 곳입니다.
     
     [황매삼봉 안내]
     황매산의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며 
     전체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富)귀(貴)山"이라해도 뭐라 할 사람 없겠습니다.
     
     [황매 삼봉 능선] 
     "黃梅三峰"을 이곳 사람들은 설악산의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한답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肉山이 많은 남쪽지방에서는 그런 느낌도 ...
     
     [황매 삼봉 능선]  
     "黃梅三峰"능선을 걸을때엔 전혀 지루함을 느낄수 없었습니다.
     변화무쌍한 암릉길이 산행의 묘미를 더욱 느끼게 해 줍니다
     
     [황매삼봉 능선에서 뒤돌아 본 "황매삼봉"]
     "黃梅三峰"능선을 모두 지나와 뒤돌아 봤습니다.
     이렇게 "黃梅三峰"은 세개의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팬티를 내린곳이 끝에 있는 봉우리의 팔각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황매 삼봉 능선에서 뒤돌아 본 "황매삼봉"의 팔각정 - 줌인한 사진]
     나도 "쟝 자크 루쏘"처럼 노출을 해 봤던 팔각정이 있는 "黃梅三峰" 봉우리를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이제 어디에서 팬티를 벗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이 갑니까? ㅎㅎ
     '거시기' 말리기에는 최고의 명당이었습니다.
     
     [황매삼봉 끝에서 바라 본 "황매산 정상-황매봉"]
     방향에 따라 보이는 황매봉이 변화무쌍합니다
     
     [황매산 정상으로 가며 뒤 돌아 본 황매삼봉의 끝봉]
     봉우리 세개가 모두 巖峰입니다.
     
     [황매산 정상과 "떡갈재" 갈림길 봉우리 - 무지개터]
     앞에 보이는 평평한 봉우리가 "진양기맥"을 종주 하실 분들에게는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저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진양기맥 마루금"은 나있습니다.
     황매산의 정상인 '황매봉'은 왼쪽으로 갔다가 되돌아 와야합니다.
     그리고 저 봉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당자리 "무지개터"라고 하는군요.
     오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황매산 만남의 광장" 앞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무지개터"라고 명당을 소개하는 글이 있어서 그런가보다하고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황매산 정상과 "떡갈재" 갈림길 봉우리로 가는 중턱에서 바라 본 "황매산 정상"]
     이제 황매산의 정상인 '황매봉'과 키 높이가 같아졌습니다.
     모든 산행이 끝난 기분이었습니다.
     
     ["황매봉"과 "떡갈재" 갈림길 봉우리]
     '진양기맥'을 종주하시는 분들은 여기에 베낭을 두고 "황매봉"을 갔다가 돌아 와야합니다.
     "떡갈재"는 우측으로 내려 가고,
     "황매봉"은 왼쪽으로 갔다 와야합니다.
  
     ["황매봉"과 "떡갈재" 갈림길 이정표]
     이곳이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떡갈재" 가는 길]
     '진양기맥'을 종주 하실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해 드림니다.
     이 사진은 오른쪽이 "황매삼봉"에서 올라온 길입니다.
     왼쪽이 "떡갈재" 가는 길인데, 왜 다시 소개해 드리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바로 V字로 꺽어지기 때문에 길 찾기에 혼동이 올수 있어서 친절하게 알려 드림니다.
     
     ["떡갈재" 갈림길에서 바라 본 "황매산 정상"]
     약100m쯤 앞에 있는 "황매산 정상"을 밟아 보고 가야겠지요
     
     [황매산 정상인 "황매봉" 가는 길]
     잠깐이면 "황매산의 정상"인 "黃梅峰"을 갔다 올수 있습니다.
     
     [황매산 정상인 "황매봉" 가는 길]
     먼저 간 횐님들이 벌써 올라 가 있습니다
     
     [황매산 정상인 "황매봉"]
     우리 횐님 중에 '솔개'라는 닉을 가진 산꾼이 있는데 
     이 분은 "황매봉" 이곳에서도 '거시기'를 건조 시키고 있더군요. ㅎㅎ
     이 분은 오늘 이곳을 산행하고 다시 이어 "호남정맥"으로 달려가 3일간을 무박으로
     등산을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체력입니다. 그래서 거시기도 말리나? ㅎㅎㅎ
     부인한테는 꼼짝도 못하는거 같던데......켁켁켁
               
               [황매산 정상석]
               오전 11시 10분에 黃梅山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구름재"에서 4시간이 걸렸습니다. (중간에 너무 많이 쉬었지요..말리느라구 ㅎㅎ)
               "태백산맥(太白山脈)의 마지막 준봉인 山"
               1,108m 높이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서 인기 순위 약20위 정도를 하는 인기있는 산이랍니다.
               오르기 쉽고, 아기자기해서 초보 산객들에게 더욱 추억에 남는 산이랍니다
     
     [황매봉에서 뒤 돌아 본 "황매삼봉"]
     지나온 "黃梅三峰"을 뒤 돌아 보니 왜 "黃梅三峰"이라 하는지 실감납니다.
     
     [황매봉에서 바라 본 서쪽 방향]
     일반 등산객들이 황매산 중턱 이상까지 차를 타고 와 오르는 코스입니다.
     아주 쉽게 오를수 있는 코스여서 등산객들 보다는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코스랍니다
     오른쪽 계곡이 '산청군 차황면'이며 "단적비연수", "임꺽정"등 영화를 촬영했던
     "황매산영화주제공원"이 보입니다
     
     ['단적비연수'등 영화 촬영장]
     그래서 "황매산영화주제공원"을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계절 따라 번갈아 가며 수십만평의 고원에 깔리는 철쭉의 융단과 억새 
     그리고 다섯 남여의 애절한 사랑이 남아 있는 영화 ‘단적비연수’의 촬영장은 
     또 다른 환상을 느끼게 해주어 줌인하여 촬영을 하였습니다.
     
     [황매평전]
     "黃梅坪田"에는 목장도 있으나, 봄에는 철쭉이 화려한 불꽃쑈를 하여
     전국의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모여 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가을에는 들국화가 아가씨들의 마음을 설래이게 하며,
     또한 억새가 석양에 흔들리며 감상을 자아 내는 곳이랍니다.
     
     [황매봉에서 바라 본 "떡갈재 갈림길"]
     이제 黃梅山 등정을 마치고 '진양기맥'을 따라 가야합니다.
     하지만 黃梅山은 많은 볼거리와 감명을 주어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떡갈재 갈림길"에서 점심 식사]
     점심식사를 이곳에서 했습니다.
     
     ["떡갈재"로 가는 "진양기맥 마루금"]
     황매산 산줄기를 뒤로하고 "떡갈재"로 하산합니다.
     하지만 "떡갈재"에서 다시 843m 높이의 "작은황매산"을 올라야 합니다.
     산 하나를 오르고 다시 다음 산을 오를때가 힘이 들기 시작합니다.
     "작은황매산"을 오르고 난 다음에 엄청난 알바를 했습니다.
     '작은황매산'에 가서  알려 드림니다.
     여기까지는 '고속도로'였습니다.
     
     ["떡갈재"로 가는 마루금에서 뒤 돌아 본 "황매산"]
     합천군에서 바라 보는 "黃梅山"은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합니다.
     
     ["떡갈재"로 가는 마루금에서 뒤 돌아 본 "황매삼봉"]
     이쪽에서 올려다 보는 "黃梅三峰"이 또 다른 모양으로 다가 옵니다.
     
     [영화마을로 가는 갈림길]
     山靑郡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류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 시켜 잘입고 잘살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숨겨온 역사적 인물인 "문익점선생"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며,
     근현대에서 가장 존망받은 스님인 "성철스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균 보다도 더욱 빛나는 인물 - 허균의 스승으로 나오는 
     神醫 유의태선생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저의 고향이 산청 바로 위 함양이기도 하니 이 일대에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온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山水가 좋아 깨끗한 대자연 속에서 살기에
     머리 좋은 훌륭한 분들이 많이 나온것입니다. ㅎㅎㅎ
     
     [영화마을로 가는 갈림길 - 이정표]
     문익점선생을 단순히 목화씨를 훔쳐온 도둑놈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즁국 원나라 입장에서는 나쁜 도둑놈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구세주입니다.
     신념있는 테러리스트 안중근 의사와 같은 맥락입니다.
     오히려 안중근의사보다 더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인 파란문은 생각합니다
     천박한 의류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 시킬수 있었으니 그 공로는 계산 할수 없습니다
     그 동안 주로 삼베옷으로 여름 겨울을 모두 견뎠는데 더운 봄-여름에는 시원한
     삼베옷을 입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면옷을 입을수 있게 되었으니 의류문화를
     완전히 변화 시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으니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고마운 분입니다
     당시에는 부유층만 중국에서 광목을 수입해서 입었었습니다.
  
     [문익점선생 생가와 목화 시배지 - 자료사진]
     문익점선생은 1331년 고려 충혜왕 원년에 이곳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 가고 1363년 공민왕 13년에는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로 사신이 되어 갑니다.
     이때 고려에는 쿠데타가 일어나지요. 최유등 무신정권들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하는 모사를 벌이는데, 이런 모사를 바로 잡기 위해 날조된 관련 서류들을
     불태우고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알리며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다가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에 억류되 있다가 돌아 오는 길에 문제의 "목화씨"를 훔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고려를 깨부수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쿠데타정권에 빌붙어 일할수 없다고 영원히 벼슬을 그만 둔 충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두문동 72현"과 같이 이성계와 이방원이의 부름을 여러번 받았으나 끝끝내 관직을 사양한것입니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실수 없다"라고 하면서....
     목화씨 훔쳐 온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세요
     생육신 - 사육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충신이었다고....
  
     [활타기 - 씨아기 작업]                                      [고치말기]
     1364년 공민왕 13년에 원나라에서 돌아 올때 잘 아시다시피 붓뚜껑에 목화씨 10개를 
     숨겨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退軒 장천익선생"에게 주었습니다.
     "退軒 장천익선생"이 재배를 했는데 오로지 하나의 씨에서 꽃을 피웠고, 우리나라에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목화씨를 훔쳐온 사람은 문익점선생이고 재배를 한 사람은 그의 장인인 "퇴헌 장천익선생"인것입니다.
  
     [실뽑기]                                                          [베짜기]  
     '퇴헌 장천익선생'은 재배에 성공한 이후 목화씨를 전국으로 나눠져 대량생산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베를 짤수 있는 기계들을 발명해냈는데 바로 목화씨를 분리시키는 "씨아"와 
     실을 쉽게 굵게 감을수 있는"물레"등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태종과 세종대왕은 문익점선생과 장천익선생에게 각별한 예우를 해 주었으며
     특히 세종대왕은 문익점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富民候로 追封하였답니다
     세종대왕은 大王소리를 들을 만하지요? 인재를 알아보고 예우를 해 줄줄 아는 王이었으니까요
     요즘 정치하는 인간들하고는 완전히 틀림니다.
     요즘 넘들은 백성들을 위해서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밥그릇 채우기를 위해 정치를 하니까 
     자기보다 똑똑한 인재를 추겨 세우는게 아니라 깔아 뭉개 죽일려고 하니 완전히 틀림니다.
     
     [황매산 등산로]
     
     [영화마을 갈림길에서 뒤 돌아 본 "황매산"]
     "황매산"을 뒤돌아 보는 기분이 조금 야릇합니다.
     문익점선생에 대해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쓴 詩가 있는데....

     우리나라 열린지 몇천년인가
     백성이 옷입는것 다 이유있네
     선생이 가져온 그 물건
     재화되어 오래도록 영원하다


     
     [영화마을 갈림길에서 내려다 본 "합천호"]
     오늘 '합천호'는 확실히 감상했습니다.
     동쪽에는 "합천호', 서쪽에는 '황매평전'을 두고 진양기맥 마루금을 걸었습니다.
     
     [영화마을 갈림길에서 너백이재 가는 길로 가는 마지막 봉우리]
     황매산에서는 마지막으로 주변 경관을 구경했습니다.
     
     [너백이재 - 쉼터]
     '영화마을'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갑니다
  
     [너백이재 이정표]
     '장박마을' 옆으로 '영화마을'이 있더군요
  
     [떡갈재로 하산]
     '떡갈재'로 내려 가는 길은 숲터널이었습니다.
     
     [떡갈재]
     우리들 이외에는 사람 구경할수 없는 조용한 '떡갈재'에 왔습니다.
     
     [떡갈재]
     '떡갈재'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45분경이었으니 
     오늘은 일찍 산행을 시작해서 일찍 서울로 올라 갈수 있겠다고
     여유를 부리며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나.......닝기리~~ 오후 6시30분이 되서야 서울로 출발했으니....
     이제부터 얼마나 산속을 헤메는지 알만하지요? 
     
     [떡갈재에서 작은황매산 오르는 마루금]
     오늘은 빨리 집으로 갈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843m 높이의 작은황매산"을 힘차게 오릅니다.
  
     [작은황매산 가는 길]
     "작은황매산"은 뾰쪽한 삼각형의 산이라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작은황매산]
     대략 800m 정도 되는 한 봉우리를 올라 가니, 다시 올라야 할 "작은황매산"이 나타납니다.
     이때부터는 힘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작은황매산"인줄 알았는데 또 올라야하니 맥이 빠집니다.
     
     [뒤돌아 본 "황매산"]
     '작은황매산'을 오르며 뒤돌아본 "黃梅山"
     잘있거라 ~~ 이제 언제 다시 오겠는가~
     하지만 나의 산행기 속에서 언제나 함께 할것이니라~~
     
     [작은황매산]
     '작은황매산' 정상이 다가 옵니다.
     
     [작은황매산 정상]
     '작은황매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산객들의 흔적이 별로 없었으나, '진양기맥' 종주자들의 표지기가 많이 걸려있었습니다
     힘들이며 오른 댓가가 너무 초라합니다.
     하지만 이제 2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오늘 산행이 끝나므로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알바를 하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좌측 서쪽으로 완전히 틀어 내려 가야하는데, 선답자들의 표지기가 많이 달려있는 북쪽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알바를 했습니다.
     앞으로 '진양기맥'을 종주 하실 분들은 이곳에서 독도를 조심해야합니다
               
               [작은황매산 정상석] 
               843m 높이라는 정상석이 외롭게 서있는데
               오늘 "843m 높이의 작은황매산"을 두번 오릅니다. 에고~
               북쪽으로 완전히 하산했다가 마루금을 잃고 다른 산봉우리들을 넘고
               몇개의 계곡을 건너 다시 이곳으로 올라 오게 됩니다.
     
     [산행 개념도]
     얼마나 알바를 했는지 상상만 해 보시라..
     두시간 이상 헛다리 짚고 다니다 결국 되돌아 왔으니 에구~~
     연두색 선이 알바한 코스입니다.
     
     [작은황매산에서.....]
     '작은황매산'에서 직진하여 산속을 헤메이며 정신없이 다니느라고 사진도 못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특이한 곳을 발견 할수도 없었습니다. 
     온통 잡풀과 나무, 계곡, 봉우리들 뿐이었으니...
     그래서 알바코스에서는 사진이 없습니다. 
     
     [작은황매산 정상에 되 돌아 오다]
     '작은황매산'에 되 돌아 왔습니다
     이때가 이미 오후 3시 50분이었습니다.
     오후 1시 45분에 떡갈재에서 이곳에 올랐으니 약 2시간 정도 알바를 했습니다.
     
     [작은황매산에서 "밀치" 가는 길]
     '작은황매산'에서 '밀치' 가는 길도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는 '길없는 길'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을수 없을 정도로 잡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枝脈을 가면 보통 이런 길이지만 ...그리고 이런 길을 각오하고 가지만.....
     이번에는 "황매산 구간"이 너무 쉽고 아름다운 길이어서, "작은황매산 구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안이하게 준비도 하지않고 독도도 하지 않으며 진행한것이 큰 오산이었습니다
     枝脈길을 갈때엔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하면서도 큰 실수를 했습니다.
     
     [밀치 아래 개울에서]
     거창군 신원면 소야리로 내려와 어느 계곡에서 알탕을 하고
     거창 시내에서 오리로스로 저녁 식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 집에 들어 가니
     밤 2시였습니다.
     
     
     [산행 개념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진양기맥 5구간] 자굴산-한우산-산성산 산행기 4월 11일(토) 경남 의령군과 합천군에 걸쳐있는 자굴산 - 한우산 - 산성산을 종주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봄향기 흩날리는 고속도로를 달려 갑니다 ["금산" 휴게소] 대전-통영 고속도로에 있는 "금산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인삼의 고장 다웁게 인삼제품을 파는 코너가 많았고... ["금산" 휴게소] 금산 휴게소에는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되있어 휴게소로는 좀 독특했습니다 아랫층에는 전통식당과 분수대등 휴게시설이 시골 풍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금산 휴게소를 가면 아랫층도 한번 내려가 보세요 [머릿재]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단성 I.C.'로 나와 경상남도 진주시와 의령군의 경계인 "머릿재"에 10시 10분에 도착했습니다 '진양기맥 5구간'의 산행 들머리입니다 [머릿재] "머릿재"는 의령군 七谷面에서 大義面으로 넘어 가는 고갯길입니다 [구글어스 산행괘적도] 편리한 시대 - 위성의 신호를 받아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을 표시해 주는 GPS 산행 괘적도입니다 [진양기맥 5구간 산행 들머리] "머릿재"는 頭峴을 우리말로 풀어 쓴것이라 하는데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豆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마라 地名을 새로이 지정할때 아마도 같은 발음이라고 오리지날 고개 이름을 콩 豆에서 머리 頭로 잘못 표기하고 순수 우리말로 고쳐 쓸때 다시 머리 頭를 그대로 "머릿재"로 표기하게 된듯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흔히 볼수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다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지방자치 단체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사료됩니다 [머릿재] 산행 들머리로 올라와 "머릿재"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머릿재" 건너편 진주시를 뒤로하고 의령군으로 갑니다 [머릿재] 의령군 칠곡면이 내려다 보입니다. 지금부터 그 유명한 "호암 이병철"씨가 태어나 자라고 때돈을 버는 밑거름이 된 "정미소"를 경영했던 곳 - 의령 宜寧땅을 밟으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된비알]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는 野山이 몇개 있으며 1시간 45분이 걸렸으니 워밍업으로 제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산행을 시작할때는 힘이 듭니다 [자굴산] 427m봉을 오르니 왼쪽으로 "자굴산"이 아득히 보입니다 오늘 진양기맥 5구간의 하일라이트 山입니다 "자굴산"은 의령의 진산이며, 높이가 거의 900m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조그만 안부를 지나고 봄냄새 풍기는 산길을 유유자적하며 걷습니다.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에는 높은 봉우리가 세개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평범한 산행길입니다 진주, 의령 지방은 이미 진달래는 지기도 했겠지만 이 구간에는 꽃 구경하기가 어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깁니다 [좌골재 가는 길] 오늘은 우리나라 경제 이야기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인물 - "호암 이병철선생""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장군"에 대해 생각해 보며 산행을 하겠습니다 이병철선생에 대해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이가 없겠지만..... [자굴산] 384m봉, 500.9m봉 을 차례로 오르니 "자굴산'이 점점 더 가까이 오는 듯 합니다 湖巖 李秉喆先生 대한민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부러워한 "돈 병철"로 대변 되었던 李秉喆先生. 李秉喆先生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합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과 저수지가 보이는 풍경 - 아름답습니다 이병철선생은 정규 학교를 온전히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와서,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다니고, 중동중학교 2년 중퇴,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도 갔으나 졸업까지는 못한 걸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돈병철"이 되고 난 이후엔 명예박사학위는 대학들이 서로 주려고 했습니다 에구~ 인간 대접 받을려면 돈 벌고 잘되고 봐야지요. 특히 돈을 많이 벌고 봐야합니다 [좌골재] 의령에서 합천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 "좌골재"입니다 이런 저런 지도에 "좌골티재"로 표기 되있습니다. "티"가 "재, 고개"라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두번 사용하는 것이니 "역전앞"과 같은 것입니다. '좌골고개'. '좌골재', '좌골티', 좌골치'등으로 표기해야합니다 [자굴산] '좌골재'에 오니 자굴산'이 그 일부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병철선생은 의령에서 '정미소' 사업으로 재벌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지요 옛날엔 시골에서 정미소와,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제사공장'이 기계가 돌아 가는 유일한 "공장"이었지요. "제사공장"이 製絲工場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됫습니다만..... [좌골재] '좌골재'와 건너편 '자굴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입니다. 이병철선생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쌀가마를 운반하는 것에서 부터 運輸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갑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벌써 부동산을 알고 부동산 사업도 하지요. 그리고는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의령은 좁아서 대구로 진출하고 "삼성상회"를 대구에 설립하며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섭니다 [좌골재] 우리를 "머릿재"에 내려 놓았던 버스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성상회'로 돈을 벌어 대구에서 "조선양조"를 인수하며 최초로 제조업에 뛰어듭니다. '조선양조'가 실질적인 "삼성그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조선양조'에서는 막걸리, 청주, 소주는 물론 사이다까지 만들어 팔았습니다 6.25 전쟁통에 피난민으로 '조선양조'의 술은 더 잘 팔렸답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에서 대의면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의 고갯길입니다 해방이 되자 부산에 설립한 "삼성물산"을 넓은 서울로 사업장을 옮김니다 그리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지요 홍콩과의 직교역을 하며 무역이라는 글자를 조선엽전들에게 알려 줍니다. 하지만 6.25라는 복병을 만나 재산을 상당량 날려버림니다 [GPS 산행 괘적도] [자굴산 산행 들머리] 자굴산 들머리에는 오늘 따라 '산불예방'을 위한 통제관이 나와 입산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령군청에 가 입산허가를 받아 자굴산을 올랐습니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뒤 돌아 본 좌골재]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가난한 나라 백성의 입맛을 달콤하게 만들며 돈을 벌기 시작하고 영국 신사들이 입는 양모로 만드는 신사복지 "골덴텍스" 기억하시나요?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을 입는게 출세의 상징 같았던 때를 연세가 조금이라도 되는 분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떠 오를 것입니다. 저도 울 아버지가 제가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하면서 맞춰준 양복이 "골덴텍스"로 만든 쪼끼가 있는 양복이었답니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습죠. ㅎㅎ 제일모직의 "골덴텍스"가 성공하자 뒤따라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기억 나시죠? [자굴산 오르는 등로] 이병철선생이 6.25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사업자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전쟁이 터지자 그 동안 번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산에서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궤짝 두 개에 3억원 가량의 돈을 담고 서류뭉치로 위장해 조선양조의 자동차에 실어 보냅니다. 당시 3억원이면 어마 어마한 돈이지요. 그런데 그 차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돈 궤짝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답니다. 전쟁 통에 알아볼 길이 없는 직원들은 돈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운전기사가 돌아 옵니다. 짜~잔~ 클린트 이스트 우드처럼... 그는 경북 영천에서 미군에게 강제 징집되었고 급한 김에 길가의 정미소에 돈 궤짝을 감춰두었던 것입니다. 직원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영천의 궤짝을 숨겨두었다는 정미소로 달려갔으나 정미소는 불에 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답니다. 않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지만, 되는 놈은 죽은 고목나무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 잿더미를 헤치자 다행스럽게도 궤짝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궤짝 안의 돈도 그대로 있었답니다. 나하고는 왜이리 반대일까~ 닝기리~ 전쟁 통에 사업자금을 모두 잃어버린 호암선생은 이 돈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수가 있었답니다. [자굴산] 자굴산이 다가 옵니다. "이병철선생의 매년 정초 사업 구상" 이병철선생은 매년 정초가 되면 사업구상을 하러 일본 동경으로 간것 기억나시죠? 가난하고 별 볼일없는 우리나라에선 새로운 구상을 할 건덕지가 없어서 선진국 일본으로 가 일본의 TV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세계의 변화하는 경제상황을 느끼며 사업구상을 한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 오면 새로운 사업이 하나씩 시작되었지요 [594m봉 오르는 길] '좌골재'에서 '594m봉'까지 심한 된비알입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594m봉' 근처에 오르니 바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594m봉] '594m봉'에 올랐습니다. 자굴산 정상이 가까워 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경사이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수 있습니다 독립투사 김좌진장군의 아들 "김두한" 깡패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그의 딸 '김을동여사'도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국무총리석으로 똥물을 투척한 사건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실겁니다. 당시 국무총리가 '정일권'씨였고, '장기영' 부총리등 각료들이 똥물을 뒤집어 썻지요 이 똥물은 종로2가에 있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 온것이라 더 유명했죠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1966년의 國會汚物投擲事件 그런데 왜? 똥물을 국회에 퍼 부었는지는 아십니까? [암릉구간] 594m봉에서 자굴산 정상까지는 암릉구간이었습니다. "한국비료공장'과 "사카린 밀수 사건" 삼성 재벌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폭로되면서 언론계와 정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발전을 하려는 가난한 대한민국에 밀수는 민족적 범죄였습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캐치프레이저로 군사 쿠데타 정권이라는 오명을 경제발전으로 덮으려했던 개발독재정권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는 반민족적 범죄였지요 그러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달 뒤 벌금 좀 물고 유야무야되자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원이 더러운 놈들에게 국회에서 똥물을 퍼붓게되는 것입니다. "에라잇!~ 똥물보다 못한 놈들아!!~~ 똥이나 쳐 먹어라~!!" 요즘도 똥물을 쳐 먹을 놈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암릉구간] 당시 김두한의원이 똥물을 투척하면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다!!~" "사카린 좋아하는 피고인들에게 사카린을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온 똥물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한 것입니다. 그 이후 국회에는 석달 이상 똥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씨가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군사정권과 야합을 한것이지요 그래서 좋은 일 많이 한 '호암 이병철선생'이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치욕스런 이미지가 바로 '사카린 밀수'와 같은 방법으로 富를 국민들로부터 착취했다는 멍에를 쓴것이었습니다 [GPS 산행 괘적도] [바람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모양새가 있는 암릉이 나왔는데 바로 "바람덤"이었습니다 "바람덤"의 이 무슨 뜻인지 경상남도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모를것입니다 은 경남지방 특히 경남 내륙지방의 사투리로 바위라는 말입니다 제가 경남 함양이 고향이라 이것은 확실히 압니다. ㅎㅎ [바람덤] 특히 이곳은 "자굴산 주 등산로"로서 칠곡면 내조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좌굴재'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가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바람덤] "바람덤"은 바람이 바위 사이로 많이 분다고 붙여진 이름인듯합니다. 실제로 이곳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의령으로 부터 많이 불어 옵니다. 펼쳐지는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바람덤"의 의미를 확실히 아시겠지요? 이곳 "바람덕"을 설명한 사람은 모든 인터넷에서 "파란문" 밖에 없습니다. ㅎㅎ [바람덤 이정표] "바람덤"에 오면 정상까지 약 15분 정도면 갈수 있더군요. '절터샘'에는 石間水가 흘러 나온다는데.... [바람덤에 올라 내려다 본 지나온 504m봉] 우리나라 근대사에 경제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을 세 사람 꼽으라면 삼성그룹 "이병철씨" 현대그룹 "정주영씨" 대우그룹 "김우중씨"를 꼽는데 반대 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고급직원을 배치하라고 한다면 '경리부장 이병철', '공장장 정주영', '무역부장 김우중'이 제격이다"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바람덤에서 내려다 본 내조리 小溜池] 그 많은 재산과 돈을 단 한푼도 못가지고 떠난 이병철씨와 정주영씨, 아직 살아 남은 김우중씨는 12조원이 넘는 빚을 지고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것을 두고 人生無常이라고 하지요?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삽시다. 갈때 주머니 없는 수의 입고 한푼도 못가지고 떠나갑니다. [바람덤에서 바라보는 "한우산"과 "자굴산순환관광도로"] 의령군에서 어마 어마한 자금을 들여 "자굴산순환관광도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의령읍에서 자굴산과 한우산을 직접 오를수 있도록 도로를 만들어 포장했다고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와야 할텐데 도로에서 자동차 구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례면에서 오르는 자굴산 능선 등산로] 자굴산의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입니다. 이 능선은 조금있다가 만납니다 [산행 괘적도] [써래봉 갈림길] 자굴산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자굴산 정상에는 그늘이 없어 여기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병철회장의 세가지 불가사의가 있었지요. "미풍이 미원을 못 꺽는 것" "자식 마음대로 못하는것" "골프 뜻대로 않되는 것" 이외에도 "백설표 식용유가 해표 식용유를 못 이기는 것"이 있었고 "중앙일보가 동아일보를 넘지 못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써래봉 갈림길] 조선초 단종 복위 운동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 그 "사육신" 중에 박팽년이 있지요? 그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와 이병철회장이 결혼하여 이건희씨를 낳았으니 자식 농사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병철회장의 가업 계승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와 비슷하지요? 태종 이방원이는 장남 양녕대군에게 왕권을 물려 주려고 세자 책봉까지 했지만 여러 이유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지요.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병철회장도 장남 이맹희씨에게 물려 주려했으나 능력이 없다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씨에게 삼성그룹을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이건희씨는 삼성그룹을 세계 제1의 IT기업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건희씨의 후계자 '이재용'이는 좀 아닌것 같은데.....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써래봉 갈림길에서 정상까지는 잠깐이면 갑니다 여기서 부터 일반 산객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좌굴재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며 머릿재에서 3시간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 정상은 매우 넓은 공간이 있으며, 의령에서 직접 오른 산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사방이 확 터여 조망하기에 좋았습니다만, 오늘은 운무로 가시거리가 짧아 지리산 천왕봉과 황매산, 집현산등을 조망할수 없었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온다고..에구 아쉬웠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을 한자로 표기해야하는데 컴퓨터 자판에는 없는 한자이라 쓸수가 없네요 "자"는 門 속에 者가 들어가 있는 글자인데 , 성곽의 망루를 뜻한다고합니다 "굴"은 山변에 屈이 합쳐진 글자인데 산 우뚝 솟을 "굴"이라합니다 이것은 제가 인터넷에 올리려고 어렵게 찾아 온 闍崛山 漢文입니다 [자굴산 정상석과 이정표]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자굴산 闍崛山"이라는 산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산경표'에는 혼굴산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혼"의 한자가 또 컴퓨터에는 없습니다 "혼"의 한자는 門 속에 昏이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자굴산 闍崛山"의 "자闍"와 매우 유사하지요? 혼굴산 의 "굴"은 "자굴산 闍崛山"의 "굴" 山변에 屈과 같습니다 틀림없이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혼굴산을 자굴산으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큼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를 한번이라도 들여다 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굴산 안내] 어느 누가 이 산 이름을 "자굴산 闍崛山"이라고 지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옛 선인들이 "혼굴산"이라고 한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바꾼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설명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묘한 생각이 듭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의령읍']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는 지금 우리가 임의로 "진양기맥"이라고 하는 산줄기를 다음과 같이 표기해 놨습니다. 간단합니다 鳳凰山 - 月峯 - 金遠山 - 旗白山 -鳥嶺 - 官述峙 - 鳥谷嶺 - 鳥谷山 - 密岾 -黃梅山 葛項山 - 馬壯山 - 花旨山 - "혼굴산" - 德山 - 豆峴 - 道峴 - 集賢山 - 廣濟山 - 飛鳳山 이렇게 간단 단순하게 표기해 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다니는 소위 "진양기맥"이라는 산줄기가 맞는 것인지 틀리는 것인지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해석 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알수 없는 산이름과 고개도 있습니다. 모두 유추 해석해서 주로 각 고을 경계선을 따라 다닌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한우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한우산과 산성산이 조망됩니다 산경표에 나오는 산이름과 현재 지도상에 나오는 이름을 중요한 것들만 대조해 보겠습니다 산경표에 鳳凰山이라고 되있는 산이 현재는 南德裕山입니다 月峯月峰山이고 金遠山은 현재도 같은 이름인 金遠山입니다 旗白山은 현재는 箕白山으로 旗 → 箕로 바뀌어있습니다 鳥嶺은 안의에서 거창 넘어 가는 고개 초동리에 새재 마을이 있습니다 안의가 제 고향이라 잘압니다 [자굴산 하산] 자굴산에서 하산 하는 길에는 진달래가 아직도 활짝 피어 있으며 많은 산객들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 가는 길] 관술치(官述峙)는 삼각점이 있는 관술령(官述嶺 :606.1m)이고 조곡령(鳥谷嶺)으로 표기되었다가 뒷장에서 조곡산((鳥谷山)으로 나오는 지명은 지형도에는 비슷한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함양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춘전재'와 그 동쪽으로 올라간 덕갈산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밀점(密岾)은 거창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1006 지방도 고개가 '밀치(密峙)'로 표기되어 있어 혼돈되지 않습니다 황매산(黃梅山)은 지금의 이름과 변함 없이 같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이 마을이 매우 유명한 마을입니다. "가례면 甲乙里" 자굴산과 '우봉분맥'이 감싸고 안고 있는 듯한 甲乙里는 아무리 쎈 태풍이 불어와도 안전할듯합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로 하산 하는 계단] 경상남도 중앙에 자리한 '의령군'은 사실 크게 자랑할만한 産業이나 농업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은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이 대단한데 대표적인 인물이 "紅依將軍 곽재우"와 "이병철회장"이랍니다. 이병철회장에 대해선 앞에서 아는대로 알려드렸으니 "곽재우 장군"에 대해 나름대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진주 남강댐에서 내려 오는 강이 의령읍 앞으로 흘러 삼랑진으로 가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합쳐져 남해 바다로 흘러 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남강"은 일본군 병력과 군량미등을 운반하는 중요한 運送路였습니다 의병인 곽재우를 '임진왜란 3대 名將" 중에 한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바탕이 "남강"이라고하는 일본군 運送路가 있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곽재우 의병은 "남강"을 통행하는 일본군들을 주로 무찔렀으니까요. [진양기맥 마루금] 자굴산과 한우산을 연결하는 진양기맥 마루금이 선명합니다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을 떠 올리면 누가 생각납니까? 아마도 모두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떠 오를것입니다 23전 23승. 不敗의 신화를 만들어 낸 "이순신장군" -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海戰歷史에 최고의 勝戰을 이룬 불가사의한 인물이지요. "이순신장군" 위대합니다. 그러나......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임진왜란 3대 명장"에는 이순신장군 뿐만 아니라 일본 쪽바리들로부터 직접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이 있습니다 또한 전라도 광주지방에서 맹활약한 "감덕령 장군"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한결같이 오로지 求國의 一念으로 적과 싸웠는데 조선 왕조에서 최고 의심 많은 쪼다리 王인 "宣祖"로부터 그 功을 높이 평가 받기는 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뤄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번의 옥고와 백의종군을 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김덕령 장군은 감옥에서 처참한 고문으로 옥사했습니다(제가 쓴 '무등산 산행기'를 찾아 읽어보세요) 곽재우장군은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이곳 의령의 "望憂堂"에서 生食을 하며 조용히 은거하며 살다 갔습니다. "임진왜란 3대 명장"은 이렇듯 쓸쓸한 최후를 보냈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郭再祐 將軍을 우리는 紅依將軍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곽재우장군이 전쟁을 할때에 '붉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붙여진 별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곽재우장군이 '붉은 옷'을 입게 되는 동기를 알려 주고 있는 기록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야사 이야기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野史이기에 그냥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 책으로 만들어 재미로 읽도록 한것이기에 믿어도 그만 않믿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 임을 미리 알려드림니다 그리고 필자인 '파란문'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가 가미될수 있도록 조금 꾸몄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니다 [쇠목재] 조선 선조시대 어느날..... 郭再祐는 문경에서부터 밤새 호랑이를 잡으려 좇아서나 한없이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불현듯 호랑이가어느 굴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郭再祐는 남감해 졌습니다. 지금 까지 좇아 온것이 아쉬어 굴 속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워낙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호랑이에게 당할까싶어 더이상 굴속을 들어갈수도 없었습니다. "아 이썅~ 밤새 이곳까지 쫒아 왔는데 그냥 가야 한단 말인가?" 郭再祐는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선 급한 것은 산을 내려가 고단한 몸을 쉴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곽재우는 거져 호랑이를 좇아 정신없이 이곳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었답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산을 내려가던 곽재우는 산골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발견하고 무작정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쇠목재' 가는 길] 다 쓰러저가는 초가집에서는 아침 밥을 짓는지 여전히 매운 연기가 눈을 찔렀습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계시요?" 잠시후 부엌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처자가 나오더니 조심스럽게 밖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밖에 누가 오셨는가?" 처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집이 거대한 사내가 나오며 말했습니다. 곽재우는 사내가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사내에게 지난 밤 일을 설명하고는 잠시 쉬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호랑이가 문경에서 이곳 울진까지 좇아 오다니 형씨의 재주가 비상 하구려." 사내의 말에 곽재우는 잠시 아연질색했습니다. 조금은 뻥이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울진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놈은 원래 중국 산동성의 태산에서 살다가 이곳까지 온 백년묵은 백호지요." 그 사내는 원래 중국 사람으로 자신의 아비가 유명한 포수였는데 그만 백호에게 목숨을 잃었답니다. 그래서 선친의 원수를 갚고자 백호를 잡으러 좇아다니다가 백호가 울진에 있는 이 산속의 동굴에 자리를 잡자, 그 또한 산골짝에 집을 지어 그 놈을 잡기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산행 괘적도] [쇠목재] '자굴산'과 '한우산' 사이에 잇는 "쇠목재"에 왔습니다 사내는 그동안 수차례 백호와 겨루었으나 서로의 힘이 비슷하여 어느 한쪽도 승부가 나지 않아 지금까지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불현듯 곽재우에게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곽재우는 겸손하게 사내의 청을 사양 하였습니다. "허허 형씨같은 분도 이기지 못하는 백호를 어찌 제가 상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저 내가 백호와 싸우고 있을 때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한번만 큰소리로 호통을 쳐주시면 됩니다." 곽재우는 사내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쇠목재] "쇠목재"는 '자굴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등산객과 관광객을 위한 펴의시설의 대명사 화장실을 잘 지어 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해서인지 깨끗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고 백호가 있는 동굴로 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 숨어서 사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굴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백호가 성큼 뛰쳐나오더니 사정없이 사내를 향해 덤벼들었습니다. 사내는 연신 창을 휘둘러 댔고 백호는 날렵하게 몸을 굴려 자신을 찌르는 창을 잇발로 물고 흔들어 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호통 칠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싸우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잠시후 백호가 지쳤는지 어슬렁 어슬렁 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곽재우는 그때서야 사내가 부탁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곽재우는 사내에게 달려갔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그만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호통 치는것을 잊었소."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신경질을 낼줄 알았는데 점잖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소. 그러나 내일은 꼭 호통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다음날 곽재우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내와 백호가 싸우는 싸움을 지켜 보았습니다. 싸움이 어느정도 진척될 무렵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뛰쳐나와 백호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그러자 백호는 곽재우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사내는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창으로 힘껏 백호의 뒷통수를 찔렀습니다. 백호가 괴로워 몸을 뒤트는 사이 사내가 백호의 목에 한번더 일격을 가하자 백호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었소 이모두가 형씨의덕이오.!!" 사내는 곽재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처자를 옆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형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수 있었겠소? 사실 이 아이의 모친도 백호한테 목숨을 잃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소이다. 이 아이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평생 형씨를 모시고져 하니 거절 하지말고 거두어주길 바라오. 그럼 난 이만 갈 길을 가야겠소." 곽재우는 사내에게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다시 보게 될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굴산 입구 안내석] 곽재우는 처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호랑이 잡으러 갔다가 예쁜 아가씨를 얻어 왔군요. 오히려 더 좋은거 아닌가요? 그후 몇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함안에서 적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전경험도 없거니와 군사 훈련도 받지않아 왜병들과 싸우기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곽재우가 더이상 왜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후퇴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장수가 어디선가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왜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황야의 무법자들을 연발 따발총으로 쑥대밭을 만들때처럼 왜병들의 목이 가랑잎처럼 하나 둘 땅에 떨어졌습니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위로 건너 갑니다] 그 전투로 인해 왜병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결국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붉은 옷'의 장수는 후퇴하는 것을 보고서는 곽재우에게 다가왔습니다. "오래만이구려" 곽재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자세히 보았더니 백호를 잡았던 그 사내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뉘시오..!! 참으로 오래만이외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 곽재우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왜 내게 주시오?" "이것을 입고 전쟁을 치러면 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외다." 사내는 그렇게 말한 다음 곽재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곽재우는 사내가준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면 매번 승리했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곽재우를 일러 "紅依將軍 홍의장군"이라 부르게되었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나라에서 부르는 것도 사양하고 자신의 식솔을 데리고 의령으로 가서 그곳에 "望憂堂"을 지어 거취하며 초야에 뭍혀 여생을 보냈습니다. - 끝 - [쇠목재 정상에 있는 쉼터 정자] 의령군은 자굴산과 한우산을 관광지화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리는 듯합니다 곳곳에 편의 시설을 만들고, 관광객과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어야 할텐데...... 아직까지는 '쇠목재'에서 차량과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된비알] '쇠목재'에서 한우산 방향으로 오르는 곳이 가파른 급경사 지역이었습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갑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에겐 몇가지 특별한 일화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의심 많은 쪼다王 "宣祖"가 내용이 너무 비판적이라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졌었지요. 아 무슨 X같은 경우입니까? 요즘 같았으면 王이 탄핵을 받을 일이었지만 당시엔 御命이 헌법이었으니 어쩔수 없었지요 그 일로 郭再祐는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낙담한 郭再祐는 고향에서 백수 생활을 하며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마당바위에서 바라 본 '쇠목재'와 자굴산]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不敗神話를 만들었다면 육지에선 유일하게 "의병대장 郭再祐"만이 백전백승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의병"으로서 단 한번도 敗하지 않은 유일한 將軍이 郭再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적군인 일본놈들에게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입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세번째 일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宣祖"가 벼슬을 내립니다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한 자신을 직권으로 낙방시킨 "宣祖"가 내리는 벼슬을 郭再祐가 받겠습니까? "쪼다리 王인 너나 잘 먹고 잘살아라~!! 난 니가 주는 벼슬은 싫다!" 무려 29번이나 벼슬을 내렸는데 모두 거절한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열 받은 宣祖가 곽재우를 귀양까지 보내 3년 동안 귀양살이를 시켜도 벼슬을 받지 않았습니다 벼슬의 내용 중에는 많은 높은 벼슬이 있었습니다만, 이순신장군이 맡았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까지도 있었습니다 [페러글라이딩] 의령군 공식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이곳에 있더군요.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이 부릅습니다. [우봉지맥 갈림길] "진양기맥"에서 분기하는 "우봉지맥"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진양기맥 종주자들이 '우봉지맥'으로 가 알바를 한다는군요. [우봉지맥 갈림길] 이곳에서 알바를 하는 종주자들은 대부분 北에서 南으로 종주하는 사람들이겠지요 갈림길 표지판이 있으니 "우봉지맥"으로 가지 마시고 우측 '진양기맥'으로 가세요~ [한우산 오르는 길] "한우산" 오르는 길은 평이합니다. 무슨 O.K목장을 가는듯합니다 [한우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지나온 길] 서울의 공동묘지 - 망우리 망우리에 대한 글을 예전에 쓴적이 있는데..... 망우리는 그뜻이 공동묘지로 느껴질 정도로 죽음 같은 것을 연상시킴니다 하지만 '망우리'는 무척 의미있는 뜻이지요 "望憂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곳에 누워 잠들면 아무도 깨우지 않습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더러운 아웅다웅 싸우며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편히 누워 한줌의 흙으로 변해 갑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쇠목재'와 '자굴산'] 제가 새삼스럽게 한우산을 오르며 "望憂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郭再祐 將軍의 호가 "望憂堂"입니다 자신의 아호를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望憂堂"이라고 지었으니 그는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현상이 얼마나 잊어버리고 싶도록 더럽게 느껴지는 세상이었는지 그의 처신에서도 가늠해 볼수 있겠습니다 어명을 여겨 귀양을 갈 지언정 29번의 벼슬도 사양하고, 生家를 "望憂堂"이라고 이름짓고 자신의 호 까지도 "望憂堂"이라고 칭하며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 정규군이 무참히 패배 할때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우산 주차장에서 바라 본 "찰비골"] '한우산'은 韓牛山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소와 관계있는게 아니냐고 뭍습니다만 한 여름에도 찬 비가 내린다고 차가울 寒비 雨를 사용하여 寒雨山입니다 寒雨山에서 흘러 내리는 차가운 물이 계곡을 이룬다고 "찰비계곡"이라 한답니다 이 계곡에서는 여름에도 계곡물에 5분 이상 발을 담구고 있지 못한다고 하니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라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한우산 주차장'] '우봉지맥'이 분기하여 나가는 산줄기가 뚜렷이 보입니다 [한우산 정상] 한우산 정상으로 유유히 올라 갑니다 [한우산 정상석] 836m - 상당히 높은 산인데도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山勢가 둥글고 나무나 암릉이 없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듯합니다 차가울 寒비 雨가 합쳐진 寒雨山입니다 자굴산이 의령의 형님산이고, 한우산이 동생산이라 하는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양기맥 마루금] 지나온 마루금 좌측으로도 "자굴산관광도로"가 깨끗하게 포장되어 벽계리 까지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과 자굴산은 이제 쉽게 오를수 있게 되었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자굴산'] 자굴산이 897m이고 한우산이 836m이니 자굴산이 61m 더 높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 평온한 산골 마을이 산줄기를 병풍 삼아 길게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산성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산성산'입니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 하고 버스를 타고 하산합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한우산에서 내려와 의령군에서 합천군으로 들어 왔습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바라 보는 산성산이 岩山으로 보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쌍백면 외초리는 고향의 멋을 한껏 풍기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 정돈이 된 산골 마을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지킴목] 언제 다시 와 볼려나~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를...... 이곳에서 뒷풀이를 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서울백두클럽 회장님과 외초리 이장님] 이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산객들이라하더라도 우리 마을을 찾아 주어 반갑다고 이장님이 나와 반겨 주었습니다 산행기에 우리 외초리 마을을 잘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아는 자료가 없어 사진 몇장 올렸습니다. 이장님 연세가 1945년생이라니 나이에 비해 무척 젊게 보이시죠? 감사합니다. 이장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진양기맥3구간]晋州 集賢山을 가다 청현고개-삼면봉-집현산-삼면봉-무너미고개-진주 집현산- 내리실고개-서낭재-동현고개-막고개

晋州라 天里길 - 이천구년 봄바람이 급하게 불어 오는 晋州라 天里길을 달려 갔습니다 晋州의 鎭山 "集賢山"을 정점으로 [진양기맥3구간]을 찾아 보고 '길없는 길'에서 봄향기와 함께 남쪽나라 晋州에 안기고 왔습니다

     
     [대전-통영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
     2009년 3월28일(토)
     꽃 소식과 함께 봄향기 불어 오는 南쪽 나라 晋州를 향해 떠났습니다
     대전과 통영을 잇는 고속도로 휴게소 "덕유산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진양기맥3구간"으로 신나게 달렸습니다
     
     [서울백두클럽]
     오늘도 "진양기맥"을 종주하고 있는 "서울백두클럽"과 함께 합니다
     오늘이 진양기맥의 3구간이라 1 - 2구간은 참여하지 못하고 3구간부터 참여합니다
     앞으로도 모든 구간은 참여하지 못하고 몇 구간은 빠질수 밖에 없으며
     가지 못하는 몇구간은 다음에 시간을 내어 별도로 가야하겠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오지 산행을 주특기로 하는 "서울백두클럽"은
     정말 특징있는 산악동호회입니다.
     산객들로 뒤범벅이 된 유명한 산으로 산행을 하는 것보다 오지 지맥길을 더욱 사랑하며
     산행의 즐거움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진짜 산 나그네 들이지요 
     
     [靑峴 고개]
     서울에서 약4시간을 달려서 진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서,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로 넘어 가는 고개인
     靑峴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오전 11시 30분경 출발~~!! 산으로~
     
     [靑峴 고개]
     靑峴 고개는 진주의 산악마라톤코스의 반환점이 되는 곳이더군요
     晋州에서 가장 높은 山인 集賢山의 고갯길  靑峴으로 마라톤 건강달리기를 하는 곳
     
     [靑峴 고개]
     '靑峴'의 이 '고개'라는 뜻이므로 "靑峴고개"라 하는 것은 "驛前앞"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냥 '靑峴'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峴, 峙. 재, 坡등의 고개를 의미하는
     단어에 다시 '고개'를 붙이는 습관이 생겨 이제는 일반화 되었습니다
     문헌을 찾아 보니 靑峴은 임진왜란 때에 큰 승리를 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더군요
     임진년 10월 9일 김준민장군이 이끄는 500여 군사가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진군하는 길에 
     이곳에서 커다란 승전고를 올렸더군요
     임진왜란하면 이순신장군의 海戰만 생각나는데, 陸地에서도 곳곳에서 피흘리며 싸웠습니다
     진주 근처에 와 봐야 그 때 그 처절했던 임진왜란을  상기하기 쉽습니다
     
     [첨단양돈연구소]
     청현고개 아래 계곡에는 경상남도 첨단양돈연구소가 83ha 넓이의 면적에 개설되어 
     이 지역 양축농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경상남도는 국내 최초로 지방자치 단체가 125억원을 투입하여 관내 양돈농가들의 품종개량, 
     유전자 및 생명공학연구, 냉장육 중심의 고품질 돼지고기 생산과 선진기술보급 등을 목적으로 
     첨단 양돈연구소를 2001년 10월 26일 준공하고, 주로 지리산 흙돼지 종자의 보존과 증식으로
     일본으로 수출을 지원하고 있다는군요
     오른쪽 능선이 집현산 정상에서 내리 뻗은 줄기입니다
  
     [靑峴고개 '진양기맥3구간' 들머리]
     진양기맥2구간 '광제산'에서 흘러온 산줄기는 이곳 "청현"에서 집현산으로 옮겨갑니다
          
          [송전철탑]
           급한 된비알을 잠시 치고 오르면 송전철탑이 앞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송전탑에서 바라보는 '광제산']
     '진양기맥2구간'의 대표산인 "광제산 廣濟山"이 조망됩니다
     
     [송전탑에서 바라보는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
     조금전 '청현'에서 보았던 '첨단양돈연구소'와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가 보이며
     오른쪽 멀리 아득히 "황매산"이 보이는군요.
     앞으로 저 '황매산'을 통과하여 남덕유산으로 갈것입니다
     '남덕유산'에는 아마 가을쯤 도착할것입니다
  
     [集賢山 오르는 된비알]
     오늘 산행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된비알을 30분정도 치고 오릅니다.
          
          [쉼터 무덤]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되니 무덤이 있는 쉼터가 나옵니다
          죽으란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쉼터는 나옵니다. ㅎㅎ
  
     [集賢山 오르는 된비알]
     무덤에서 약15분정도 다시 된비알을 오릅니다
       
     [三面峰]
     '靑峴'에서 45분정도 급한 경사면을 오르니 "삼면봉 三面峰"이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12시 15분경에 도착했으니 '청현'에서 45분 걸렸습니다
     集賢山은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七峰山이라고도 한답니다.
     이 三面峰 봉우리도 7개 봉우리 중에 하나입니다.
     이 봉우리는 553m봉우리로서,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군 생비량면, 산청군 신안면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라고 일명 三面峰이라고한답니다
  
     [三面峰 이정표]
     集賢山 정상은 좌측으로 500m 지점에 있어, 集賢山 정상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와야합니다. 약 10분정도 걸리더군요. (왕복 20분)
     集賢山 정상은 진양기맥 마루금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集賢山에 와서 集賢山정상을
     밟아 보지 않고 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集賢山 정상 가는 길]
     集賢山 정상 가는 길은 오솔길 같았습니다.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기에 갔다 옵니다
     
     [集賢山 정상]
     集賢山 정상이 신선한 모양으로 다가 옵니다
     神仙이 앉아 놀기 쉽도록 친절하게 암봉 위에 평상까지 만들어 놨습니다
     
     [集賢山 정상]
     老松이 그늘을 이루고 集賢山 일곱봉우리가 뱅그르 보이는 集賢山 정상의 모습입니다
     남쪽지방에 소나무 숲이 인상적입니다
          
          [集賢山 정상석]
          集賢山의 높이가 577m라고 큼지막하게 표기해 놨습니다
          集賢山의 높이는 572.2m인데 577m라고 표기한 이유가 있더군요.
          集賢山은 산청군과 진주시에 걸쳐 있는 산인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이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산청군에 있습니다.
          진주시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앞으로 갈 集賢山의 진주集賢山이 가장 높은 산인데, 
          그 봉우리의 높이는 실제 548m입니다. 그런데 진주시에서 그곳의 정상석에 572,2m로
          표기해 놨습니다. 진주의 鎭山을 더 돋보이게 하고 싶어서 허위 표기를 한것이죠
          기분이 나빠진 산청군은 진짜 集賢山의 최고봉인 이곳의 높이를 "진주集賢山"의
          거짓 높이 보다도 높은 577m로 또 거짓으로 표기하게 됬다고합니다.
          지방자치단체 끼리 감정싸움으로 산높이가 허위로 표기된 사연이랍니다
     
     [集賢山 정상]
     '三面峰'에서 후미 그룹이 올라 오고 있습니다
     
     [集賢山 정상에 바라 보는 集賢山 봉우리들]
     集賢山은 말발굽 모양으로 생겻습니다.
     가운데 분지를 뱅그르 돌아 가면서 일곱개의 봉우리가 솟아있습니다
     우측의 봉우리가 진주사람들이 우기고 높이까지 548m를 572.2m로 표기하며 자랑하는
     "진주 집현산"입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집현산 東峰"입니다
     
     [集賢山 정상에서 점심 식사]
     集賢山 정상은 점심식사 장소로는 최고 神仙名堂이더군요
     
     [三面峰으로 회귀]
     진양기맥 다음 길을 가기 위해 三面峰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무너미 고개]
     '진주 집현산'으로 가는 고갯길의 이름이 "무너미 고개"입니다
     무너미에 대해 혹시 아시나요?.
     '무너미'라는 단어는 실제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입니다
     논에 물을 데고 일정 水位가 되면 넘쳐 흘러 나가도록 논뚝보다 약간 낮게
     만들어 놓은 '물빼는 곳'이 있지요?. 즉 "물 넘어 가는 곳".
     물 넘어 가는 곳이 순수 우리말로 "물넘이"입니다.
     "물넘이"가 지방에 따라 음운변화를 거쳐 "무너미"로 불리워 진것입니다.
     "무너미"는 전국의 곳곳에 있는 일반명사인것이죠.
     이곳 "무너미"는 천지개벽 당시에 물이 넘나 들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무너미 고개]
     '무너미'를 지나 가파른 526m봉 된비알을 치고 오릅니다
     
     [526m봉을 오르며 뒤돌아 본 集賢山과 三面峰]
     526m봉을 오르며 뒤돌아 보니 지나온 좌측의 三面峰과 우측의 集賢山정상이 보입니다
  
     [526m봉 삼거리]
     526m봉 봉우리는 집현산의 五峰이라 부리워진다는데,
     특별히 봉우리라고 느껴지지않고, "진주 집현산 등산로" 삼거리가
     526m봉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 오르는 길]
     526m봉에서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 오르는 길은 아름다웠습니다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 정상]
     12시 25분경 "晋州集賢山" 정상에 올랐습니다
     산불감시초소에 감시원 아저씨가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동서남북이 확터여
     주변 경치를 모두 감상할수 있었습니다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 정상석과 안내도]
     "晋州集賢山"의 실제 높이는 548m입니다. 
     조금전, 진짜 572.2m 높이의 집현산 정상에서 설명 드린바와 같이 높이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지방자치단체들간의 감정싸움의 결과입니다
  
     [晋州의 眞山 "晋州集賢山"  제단]
     晋州集賢山 정상은 옛부터 "기우제"를 주로 지내던 곳이었답니다.
     전설도 있었는데 '기우제'에 관한 소설같은 말도 않되는 이야기들이라 생략합니다
     제단은 헬기로 최근에 옮겨와 설치했다고 산불감시원이 알려줬습니다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 전망도]
     晋州의 산객들이 즐겨찾는 등산코스라고 하는데 등산객은 몇명 정도만 보였습니다
     
     [晋州의 眞山 "集賢山"에서 바라 본 南쪽 "晋州"]
     아주 희미하게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사천의 와룡산"이라고 합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南海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晋州에 왔는데 논개가 생각 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촉석루로 유명한 晋州城에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의기사(義妓祠)"에서 많은 사람들이
     '논개'의 영정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논개'를 기생으로 알고있을 것이며, 좋게 말해 "義妓" 정도로 알고 있을것입니다
     오늘은 "논개"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며 산행을 하겠습니다 
     
     [晋州의 鎭山 "晋州集賢山"에서 바라 본 東쪽 "의령 자굴산"]
     "자굴산"은 앞으로 가야할 산입니다.
     "논개"에 대해선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593(선조 26).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1593년(선조 26)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晋州의 鎭山 "진주集賢山"에서 바라 본 北쪽 "산청 황매산"]
     황매산도 지척에 보입니다. 앞으로 넘어야할 산입니다

     論介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論介는 경상도 진주 여자가 아닌 전라도 덕유산 밑에 있는 장수에서 태어난 전라도 여자입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여자도 아니고 소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죽은 나이가 18살이었으니까요. 물론 옛날엔 일찍 시집을 갔지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나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성장발육을 함으로 같다고 봐야합니다
     백과사전에 까지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만, "KBS역사스페샬"과 모 대학교수의 논문을
     참고하여 제가 요약 정리를 하여 論介의 삶을 간략히 알려드리겠습니다

     
     [晋州의 鎭山 "진주集賢山"에서 바라 본 西쪽 "지리산 천왕봉"]
     아~~!!
     지리산~!! 천왕봉~!! (반드시 "천왕봉"이라고 해야합니다. 쪽바리들이 '천황봉'이라한것입니다)
     똑똑한 산이라고 智理山이라고 하며,
     白頭山에서 부터 흘러 왔다고 頭流山이라고도 한다지요?
     
     [晋州의 鎭山 "集賢山"에서 바라 본 東쪽 "集賢山 東峰"]

     논개가 1574년 9월 태어나 1593년 7월 죽었으니 18살에 남강 의암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論介의 성은 氏이므로 이름은 朱 論介입니다. 
     논개의 성을 처음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 달문"이고 어머니가 "함양 박씨"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천민이라는 설이 난무하지만 아버지 "주달문"은 漢學에 능통해서
     장수에서 청년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훈장이어서 천민이 아니라는것입니다
     논개는 양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천민도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더더욱 기생은 아니였답니다

     
     [集賢山 東峰으로 가는 길에 있는 헬기장]
     멀리 '의령의 진산 자굴산'이 보입니다

     論介가  진주 촉석루에서 임진왜란 때에 쪽바리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은 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論介가 14살 나던해 1587년, 아버지가 돌아 갔습니다.
     집안 살림이 당연히 어려워졌지요. 
     논개의 작은 아버지 - 주문달이라는 천하건달이 있었는데
     이 틈을 이용해 숙부인 주문달이 논개를 부자집에 팔아 먹었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논개의 어머니가 관아에 고발을 했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 사건을 맡은 현감이 다름아닌 당시 무주-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이었습니다
     최경회가 논개의 사건 전말을 알아보고, 가정생활이 어려운 '논개'를 찾아 자신의 집에서
     병약하여 병상에 누어있는 자기 부인의 병 간호를 맡게했다고 합니다

  
     [集賢山 東峰으로 오르는 길]

     논개는 열심히 일하고 부인의 병간호를 정성껏 하였답니다
     최경회의 부인이 논개의 외모와 마음 씀슴이에 감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병으로 목숨이 다해 가는 부인은 남편인 현감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을 것을 제안하였고,
     부인이 죽고 난 다음 최경회는 논개를 소실로 맞아 들였답니다
     소녀는 졸지에 현감의 와이프가 되었으니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밀물처럼 몰려와 썰물처럼 사라지는 것이란 말인가~ 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로 떠나는데 논개도 함께 따라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말이 승진이지 전장터로 가는 것이 승진이겠습니까?
     전라도 장수의 시골 소녀가 경상도 진주로 가게 되는 사연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쪽바리들의 戰力은 陸地에서 막강하여
     임진왜란 3대 大戰인 진주성전투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등이 이끄는 쪽바리軍에게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논개의 남편인 최경회도  전사합니다.
     에구~ 슬퍼라~

     
     [중요한 갈림길]
     集賢山 東峰으로 오르면 集賢山 東峰정상으로 가는 길과 하산하는 길 - 갈림길이 나옵니다
     集賢山 東峰정상은 직진하지만, 진양지맥길은 오른쪽으로 90도 꺽어 내려 가야합니다 
  
     [集賢山 하산하는 길]

     남편을 잃은 論介는 슬픔을 넘어 분노로 변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쪽바리들에게 짖밟힌 조국과 비참하게 죽어 간 남편의 복수를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여 촉석루 연회장에 참석한답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외장 "게야무라 후미스케 (主谷村六助)"를 껴안고
     강낭콩꽃 보다도 더 푸른 남강에 몸을 던집니다
     몸 바쳐서~

  
     [集賢山 하산하는 길]
     논개의 행동은
     핵교 때 모두 열심히 읽고 외우고 했던 "변영로 시인"의 詩를 탄생 시킵니다

            논개  
                      변 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集賢山 하산하는 길에서 내려다 본 '응석 저수지]

     논개의 행동을 후세에 "義妓"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당시 논개의 나이가 18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수 있는 애국심을 가졌었단 말인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처절하게 할 정도의 무서운 집념의 괴기 소녀였단 말인가!~
     사실이라면 꿈에서도 생각하기 싫은 섬짓한 소녀이지만
     여하튼 좋게 해석한 후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복수심과 진정한 애국심으로 믿겠습니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林道]
     집현산을 벗어나니 林道를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갑니다
     
     [월명암 갈림길]

     우리나라의 '논개'와 비슷한 여인으로는 이스라엘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우리나라의 논개와 같이 추앙을 받는 여인이 있습니다
     "유디트"
     무척 유명한 여인이지요?
     특히 신정아 사건 기억 나시나요? 
     미국 예일대 박사학위 받았다고 허위 학력으로 동국대 교수까지 된 처녀.
     청와대 정책기획실장 변양균과의 연애 편지 속에 등장해서 저도 알게 됬습니다만....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저도 그에 대한 글을 쓰기도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The Kis"와 같이 당신과 키스하고 싶고, "유디트"와 같은 정사를
     하고 싶어요"
     제가 쓴 글 "신정아가 하고 싶었던 그 키스"라는 글을 제 블로그에서 찾아 볼수있습니다
     신정아의 편지 속에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라는 그림 속의 인물 "유디트"
     '유디트'라는 여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태인 과부로 
     아시리아군(軍)에 포위되었던 페르시아의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적장인 호로페르네스에게 접근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호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연회에 초대했답니다. 
     연회가 끝나고 단둘이 있게 되자 유디트는 호로페르네스를 술 취하게 하고 
     그의 목을 짤라 포대에 넣어서 페르시아로 가져왔다고합니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섬짓한 이런 여자를 유태인들은 
     '유디트'를 충성스럽고 고귀한 여성으로 여기고있답니다.
     우리나라 '논개'와 같은 맥락으로 봐도 되겠죠?
     하기사 "안중근"도 일본놈들 입장에서는 한낱 비겁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선 "義士"로 불리워 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信念있는 테러리스트는 義士"라고 하지요
.
          
          지난 2005년 5월 진주 촉석루 의기사에 있던 논개영정이 시민단체들에 의해 떼내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정을 그린 화가가 친일파 "김은호 화백"이 그렸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일본놈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산화해간 "논개"의 영정을 친일파가 그렸다는 것은
          논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참지 못할 수치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18살의 소녀치고는 성숙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윤여환 화백"이 그린 영정이 걸려 있다는군요

  
     [월명암 갈림길 이정표] 
     이곳이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진양기맥 마루금은 정수리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집현산의 명소라는 "月明庵"이 있다고 해서 올라가 보고 다시 이곳으로 옵니다  
     
     [月明庵]
     月明庵은 조그마한 암자였습니다
  
     [진양기맥 마루금 가는 길]
     마루금은 '정수리 가는 길'인 林道를 따라 갑니다
     
     [진양기맥 마루금에서 뒤 돌아 본 '月明庵']
     마루금 비포장로를 따라 가다가 뒤 돌아 보았습니다
     
     [진양기맥 마루금 중요한 갈림길]
     길찾기 어려운 '진양기맥 마루금'이 이곳에서 좌측 조그마한 능선으로 가야하기에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가면 진주 집현면으로 가버립니다
     좌측 능선을 따라 내려 가야 미천면 "내리실 고개"로 갈수 있으니 매우 유의 해야할 곳입니다
     
    [길 없는 길 - 진양기맥 마루금]
     길없는 길을 헤치고 나아 갑니다
     이번 진양기맥3구간에서 지도의 필요성을 매우 느꼈습니다
     앞으로 독도법을 공부하여 이런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최소한 나침판과 지도는 필수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진양기맥 마루금 - '내리실 고개' 가는 길]
     좌측 임도를 아래에 두고 계속 가야합니다
     결국 '내리실고개'에서 이 임도와 만나더군요.
 
     [진양기맥 마루금 - '내리실 고개' 가는 길]
     산객들의 자취가 거의 없는 마루금을 따라 
     길을 찾으며 가야합니다
     
     ['내리실 고개' - 33번 국도]
     내리실고개가 드디어 보입니다.
     
     ['내리곡 고개' - 33번 국도]
     잡풀숲을 헤치고 고개로 내려 갑니다
     
     ['내리실 고개' - 33번 국도]
     33번 국도는 아직 공사중에 있었으며, 차량들은 아직 구도로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곧 개통을 하겠더군요.
     
     ['내리실 고개' - 33번 국도]
     내리실고개 구도로와 공사중인 신도로를 건너 건너편 210m봉으로 갑니다
           
          [210m봉 오르는 길]
          벌써 몇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다리가 힘들어 지기 시작합니다
     
     [210m봉 오르는 길]
     
     [210m봉에 오르며 뒤 돌아 본 '내리실 고개'와 지나온 마루금]
        
     ['서낭재'와 210m봉 오르는 길]
     
     [서낭재]
     '서낭재'라고 하기에 제법 멋있는 곳인줄 알았더니 이런 쬐끄만 고개였습니다.
     실망~
     
     [서낭재에서 바라 본 "33번국도"와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경상남도 중앙부에 자리 잡은 오지입니다.
     정말 아주 시골이지요.
     경상도는 이렇게 지형이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먹을 게 항상 부족하여 옛부터 전라도를 쳐들어 갔나 봅니다
     
    [가야할 221m봉]
     
     [東向고개와 가양할 221m봉]
     
     [東向고개]
     東向고개는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개였으며 마을 이름이 東向里여서 붙여진 이름인듯합니다
     
     [東向 저수지]
     221m봉을 오르며 내려다 본 東向 저수지
     
     [221m봉 부근]
     이곳에서 휴식과 쇠주 한잔했습니다.
     이제 한 고개만 넘으면 종착지이기 때문입니다
     
     [막고개 가는 길]
     오른쪽 '250m봉'을 넘어야 합니다
     
     [250m봉 정상]
     이곳에서 알바하기 쉽습니다.
     왼쪽으로 가야 "막고개"로 갈수 있습니다.
     우리 일행 일부도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려 가 알바를 했으니 유의 해야합니다
     
     [막고개 - 1007번 지방도]
     드디어 막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싣고온 관광버스가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습니다.
     
     [뒷풀이]
     
     [뒷풀이]
     "서울백두클럽"의 독특한 뒷풀이는 오늘따라 더욱 독특했습니다.
     여느 산악회에서는 느껴 볼수 없는 따뜻한 사랑이 뭍어있는 뒷풀이이니까요
     오늘은  산거북님과 봉자언냐가 맛있는 육계장 20명분을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진주 미천면 "막고개"에서 펼치는 육계장 뒷풀이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서울백두클럽"만의 자랑이겠습니다.
     
     [생일 축하 파티]
     또한 오늘이 산거북님 생일이라 생일 축하 파티도 함께 열였습니다.
     어둠이 깊어 가는 "막고개"에서 생일 축하를 받는 "산거북님"은 무척 즐거워 보였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 이런곳에서의 생일파티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색다른 생일파티까지 함께한 "산거북님과 봉자언냐님" 앞으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산을 아끼시고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 파란문 올림-

 
    [구글어스 산행 괘적도]
     총산행 거리 : 약 14km
     총산행 시간 : 약 6시간 40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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