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29코스』
문화예술과 충절의 고장-통영 여행의 진수
충렬사-백석시비-명정샘-공덕귀여사 생가-박경리여사 생가-서피랑-피아노계단-
통영99계단-세 공주거리-통영시립박물관-윤이상기념관-해저터널-김춘수기념관-
충무교-착량묘-통영여객선터미널-한산대첩광장-강구안-거북선 승선-중앙시장
['남파랑길29코스 안내도']
<남파랑길29코스>는 <강구안>의 <김춘수 시비>에서 출발하지만, 지난번 <28코스>에서 <충렬사>까지
진행 했기에 오늘은 <충렬사 주차장>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남파랑길29코스 국토지리원 지도 실트랙']
<남파랑길29코스>는 이 지도에 '파란색선'으로 표기 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실제 진행한 루트는 '빨간색선'으로 표기 되 있는데 ...
저는 이번 기회에 여러번 방문 한바있는 "통영 여행"을 더 깊이 있게 여행하며 정리 기록하기 위해서
"통영의 여행 중심지"를 주로 여행 한것이어서 <남파랑길>을 다소 벗어나 답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파랑길29코스>와는 좀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둡니다.
<남파랑길 관계자>가 선 그어 놓았다고 그 선을 마냥 따라 걷는 것은 바른 "여행"이라 할순 없고
그 관계자가 그어 놓은 선이 남해안 여행의 완벽한 길잡이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준선이며
그 기준선을 참고하여 자기 취향에 맞게 다양한 여행을 하는 것이 더욱 값진 여행이 될것입니다.
['충렬사 주차장'] 11:40
2023년 4월 12일 (수) 맑았으나 황사 연무
서울에서 순조로운 교통흐름으로 무난히 <통영 충렬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답사를 시작합니다.
['충렬사'] 11:43~11:44
"충렬사 忠烈祠" <사적 제236호>
역대 수군통제사가 매년 제사를 올리던 "충무공 이순신장군 사당"입니다.
<7대 통제사 이운용>이 1606년에 창건했다고 하는군요.
<이순신장군 사당>은 전국에 여러곳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사당이랍니다.
['강한루']
<충렬사 홍살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 가면 "강한루 江漢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나올 때엔 "영모문 永慕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더군요.
['동백나무'] <시도기념물 제74호>
<입구에는 <동백나무>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서 있는데 400년 이상의 수령이라고...
원래 4그루였는데 2그루만 남아 있답니다.
['통영충렬묘비']
<강한루>를 지나면 <내삼문>을 다시 통과하는데 <내삼문> 우측에
"통영충렬묘비 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가 있고 해설사가 친절히 해설을 해 주었습니다.
<이 충무공>의 충절과 업적을 기록한 묘비라고 하는데
"백사 이항복 (당시 좌의정)"이 글을 지었다고합니다.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하며,그리고 <권율장군>의 사위죠.
['충렬사'와 '이순신장군']
"충렬사 정당 忠烈祠正堂"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렬사의 핵심 사당입니다.
배향하고 충렬사를 나서면....
['충렬사 광장 교차로'] 11:44
<충렬사 홍살문> 앞에는 <충렬사광장교차로>가 있는데
처음 가시는 분들은 여기서 <백석 시비>와 <명정샘>을 확인해야 합니다.
좌측 건너편 쌈지공원에 <백석 시비>가 있으며, 우측 길 건너에 유명한 <명정샘>이 있습니다.
<충렬사 입구> 이 돌계단은 <백석>이라는 시인이 낮술 먹고 이 돌계단에 주저 앉아
그 유명한 "통영2"라는 詩를 쓴 곳이어서 그냥 가면 않되는 곳입니다.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詩碑']
"백석 白石 (본명 백기행) 1912~1996"
북한 <평북 정주>가 고향인 <백석>이 어찌하여 <통영>까지 와 <통영>이라는 詩를 썻을까....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이 친구이자 동료 기자였던 <신현중>의 여동생이 결혼식을 올리는 예식장에서
<신현중> 누나의 <통영여중> 제자였던 <이화여고>를 다니는 <통영>에 사는 <박경련>이라는 소녀를
<신현중>으로 부터 소개받고 한눈에 뿅 가서 연모하게 되었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통영>까지 찾아 왔는데 길이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하고
낮술을 마시고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주저앉아 詩를 썻는데
그 詩가 "통영2"라는 詩였으며, 이 고장 사람들이 <통영>을 제대로 표현한 멋진 詩라고
이렇게 시비를 세우게 되었답니다.
통영2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이 詩에 등장하는 "난(蘭)"이 '이화여고'를 다니던 18세 <박경련>이었는데
그 후의 이야기는 .....잠시 후 언급합니다.
['명정샘' 정문] 11:49
"명정샘 明井 정문"
<백석 시비-통영2>에서 길을 건너면 가정집 출입문 같은 문을 만나는데, 알고 가야 찾을수 있습니다.
우측에 안내문과 <박경리선생>의 <김약국의 딸>에 나오는 "명정샘"에 대한 구절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통영 명정']
"통영 명정 統營明井"은 두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내문을 참고하고...
위에 있는 "부부같은 두개 우물"이 "日井"이라 하며 <이순신장군 제사> 지낼 때 제숫물로 사용하고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쓸 물울 긷는 식수용 우물이라고 합니다.
아랫쪽에 있는 크고 긴 우물이 "月井"인데,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하는 공동 우물이었답니다.
['日井']
윗쪽에 있는 "일정 日井"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 나고 있습니다.
고향이 이 근처였던 <박경리선생>이 언급한 <明井>에 대한 부분을 찾아 봤습니다.
『명정골 우물』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변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月井']
아랫쪽 우물인 "월정 月井"입니다. 주로 빨래를 하던 우물이라 하는데
현재는 깨끗하게 현대적으로 개보수되 있습니다만 옛 모습은 다음 사진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대여 김춘수의 詩와 '옛 명정샘']
이곳이 고향인 또 한분의 시인이 <대여 김춘수 시인>이죠.
이 사진은 선생의 유품전시관에 걸려 있는 <명정리 明井里>라는 詩가 있는 액자를 촬영해 온 것입니다
옛 <명정샘>의 모습을 볼수 있는 사진이어서 어렸을 때 마을 우물을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꽃의 시인-김춘수>도 <백석>이 연모한 <박경련>의 모습을 이 우물가에서 보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백석>이 연모한 <박경련>과의 이야기는 "통영의 문학"이 된듯 합니다.
['백석 詩碑'] 11:53
<명정샘>에서 다시 <백석 시비> 앞으로 돌아 왔습니다.
<백석>의 친구이자 조선일보 기자 동료였던 <신현중>의 소개로 만난 <박경련>은 <백석>을 만나주지
않았으며, 그후 바로 <백석>이 아닌 소개시켜준 <신현중>과 결혼을 했답니다. 에고 이런일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던 <백석>은 조선일보를 그만 두고 <함흥>으로 잠적해 버립니다.
다음에 기술하는 글을 남기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사진']
<백석>은 그 당시로는 매우 큰 180cm 키에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깔끔했답니다.
<백석>은 집안이 가난한것과 친구가 배신한것, 그리고 연모했던 <박경련>을 뼈져리게 생각하며
<함흥>으로 떠나 <함흥영생여고>에서 영어선생을 하며 작품활동을 하게 됩니다.
['명정리 골목']
<공덕귀여사 생가>를 찾아 가기 위해서,
<백석 시비>에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는데 옛 도시 골목의 흔적이 추억을 일깨워 줍니다
위에서 언급한 <백석>을 배신하고 결혼한 친구 <신현중>과 <박경련>의 결혼사진을 보여 드리면..
{'신현중'과 '박경련' 결혼사진]
<신현중>은 당시 <경성제대 법학부>를 나온 수재였는데 학창시절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까지 3년이나
갔다온 애국청년이었으며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들어간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백석>이 떠나자 그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통영>으로 내려와 교육계에 투신하여 경남의 여러 학교
진주여중, 통영중, 부산남중, 부산여중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답니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된 <박경련>의 선택은 좋은 선택이지 않나요? ㅎㅎ
<박경련>의 인물평은 여러분의 몫...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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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은 집안이 가난한것과 친구가 배신한것, 그리고 연모했던 <박경련>을 뼈져리게 생각하며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함흥>으로 떠나 <함흥영생여고>에서 영어선생을 하게 되는데....
<함흥>으로 잠적한 <백석>이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새로운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자야 김영환"이었습니다.
['자야 김영환']
<자야子夜>는 아버지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 眞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권번'의 일원이 되어 기생에 입적합니다.
그녀는 한국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로 여창 가곡, 궁중무 등을 전수 받아
당대의 명인기생으로 성장하며 일본 유학까지 가게 되는데, 스승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홍원형무소>에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찾아 갔으나 스승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만날 수 없어서 <함흥>의 어느 요정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백석>과 운명적 만남이
있었으며 약3년간 동거했다는 관계를 그녀가 쓴 <내가 사랑한 백석>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후 그들의 관계를 부정하는 부모님과 <백석>의 앞날을 가로막지 않겠다고 여긴 <자야>는
서울로 떠나고 <백석>은 <만주>와 <러시아>로 떠납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詩가 들은 편지 봉투 하나를 남기고...
그후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못만났다는 것입니다.
서울로 돌아 온 <자야 김영환>은 화류계의 거물로 성장하여
당시 군사정권의 요정정치시대에 발맞추어 우리나라 3대 요정 중에 하나라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차리고 때돈을 벌기 시작하며 화려한 요정 문화시대를 이끌었답니다.
거물이 된 <자야 김영환>은 노년이 된 어느날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7,000여평이 넘는 으리으리한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합니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였죠.
그리하여 밀실정치의 요람이며 화려한 요정문화를 풍미한 <대원각>은 "길상사吉祥寺"라는 절간이 되며
1997년 12월 14일은 불교사에 길이 남을 첫 법문이 펼쳐진 날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야 김영환>은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법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 吉祥花>라는 법명을 내리며 "무소유"를 실현합니다.
당시 돈으로 1,000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남긴 말이 더욱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 재산은 <백석>의 詩 한줄값도 않됩니다"
비록 수많은 똠방 남자들의 노리개였던 '기생'이었지만 그녀는 그녀 만의 숭고한 사랑을 간직했습니다.
<백석>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써 주었다는 그 유명한 詩를 읽으며 그녀의 사랑과 무소유를 생각합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詩는 <윤동주>가 <별헤는 밤>을 쓸때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노천명>도 <사슴>과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를 쓸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실토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이야기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이름으로 뮤지컬로 공연이 되기도 했죠.
<자야 김영환>은 북녁땅 어느 곳에서 살아 갈 <백석>을 그리워하며 엄청난 거금을 들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훌륭한 문학인들에게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법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뿐입니다."
<자야 김영환>은 1999년 11월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유언에 따라 하얀 눈이 내리던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지며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습니다만 그 숭고한 정신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백석>과 <박경련> <신현중>...그리고 <김영환>.....
어쩐지 그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공덕귀여사 생가'] 11:55
"공덕귀 孔德貴 1911~1997"
교육자, 사회사업가이자 여성운동가, 신학자, 종교인, 사회기관단체인, 야당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배우자로서 영부인이었습니다.
38세에 덩시 서울시장이던 윤보선과 매우 늦은 결혼으로 유명하며, 서민을 돕고 독재에 항거하며
신명을 다한 민주화운동으로도 유명하죠.
<공덕귀여사>의 생가는 옛모습을 볼수없고 일반인이 개축하여 살고 있더군요.
['명정리'에서 바라보는 '서포루']
<명정리>의 <공덕귀여사> 생가가 있는 골목을 벗어 나면 바로 <서포루>가 보입니다.
['서피랑 터널'] 11:58
<서피랑 공원>으로 올라 가면 <서피랑터널>을 먼저 만납니다.
지난 답사 때도 왔었습니다만. 다른 횐님들을 위해 <박경리선생> 생가를 한번 더 다녀 오기로 합니다.
터널을 통과해 30m쯤 진행하면....
['박경리여사 생가' 입구]
<박경리 선생 태어 난 집>이 좌측 15m 거리에 있다는 안내를 받고
['박경리여사 생가'] 12:00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소설가 중에 한분인 "박경리선생"의 생가를 찾아 봅니다.
현재는 일반인이 개축하여 살고 있어 들어 가 볼수는 없습니다.
['서피랑 터널' 위] 12:01
생가에서 나와 <서피랑터널> 위를 통과하여 <서포루>로 바로 올라 갑니다.
['서포루' 조망]
<서피랑공원>의 정점에 있는 <서포루>로 올라 가고
['서포루'] 12:05
<통영성>의 서쪽 GOP라 할수 있는 "서포루 西鋪樓"에 올라서 사위를 조망합니다.
[북쪽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됨★
북쪽으로는 <여황산 북포루>와 <세병관>이 보이고
바로 아래엔 <배수지>가 보이는데
['통영문화배수시설']
<통영 문화 배수시설>이 보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동쪽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됨★
동쪽으로는 <남망산>과 <통영시민문화회관>이 잘 보이며
<강구안>도 전체적 윤곽을 드러내는군요.
[남쪽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됨★
남쪽으로는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에 하나라는 <미륵도 미륵산>이 조망되고
<통영 시내>와 <미륵도> 사이가 "착량"이며 이곳 사투리로 "판대목"입니다.
이 곳이 <통영항>으로 옛부터 水軍사령부가 있게된 천혜의 요새를 만들었답니다.
<통영>에는 <박경리여사>의 기념관과 "묘소"가 있는데
앞에 보이는 <미륵산> 뒷쪽 '산양면 신전리'에 있습니다.
['돌아 와요 충무항에'] 12:11
"돌아 와요 충무항에"
<조용필>이 불러 국민가요가 되고 특히 일본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가
원래 <김해일 (본명 김성술)작사><황선우 작곡><김해일 노래>의 <돌아 와요 충무항>이었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김해일>이 부른 "돌아 와요 충무항에" 원곡과
<조용필>의 리메이크를 연속으로 비교하며 들어 보세요
돌아와요 충무항에 - 김해일 (본명 김성술)
꽃피는 미륵산(동백섬)엔 봄이 왔건만
님떠난 충무항(부산항)은 갈매기만 슬피우네
세병관 둥근기둥 기대여 서서 (오륙도 돌아 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소식없는 그사람
돌아와요 충무항(부산항)에 야속한 내님아
무학새 슬피우는 한산도 달밤에 (가고파 목이 메여 부르던 이 거리는)
통통배 줄을지어 웃음꽃에 잘도가네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무정한 부산배는 님실어 가고 (언제나 말없는 저 물결들도)
소리쳐 불러봐도 간곳없는 그사람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님아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강구안'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됨★
<서피랑>으로 내려 가며 조망하는 <강구안>은 "통영의 상징"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서피랑 쉼터'] 12:15
<서포루>에서 조금 내려 가면 전망대가 있는 쉼터가 있고
['서피랑' 내림길]
<남파랑길>은 이 길로 내려 가지만....
['서피랑 음악정원' 쉼터] 12:16
조금 우측 계단으로 내려 가면 "음악정원 쉼터"가 있고 그 우측에 "피아노계단"이 있습니다.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고향 다웁게 음악정원을 조성 해 놨습니다.
['피아노계단']
영상을 재생해 보세요, 계단을 내려 갈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납니다. ㅎㅎ
['서피랑 음악정원'] 12:20
<서피랑> 비탈엔 음악정원이 이어지며 반대편 <서피랑99계단>으로 연결되 있습니다.
['서피랑99계단'] 12:20
"서피랑99계단"
주민들이 가파른 벼랑길을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이지만,
<박경리선생>의 작품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통영의 풍경"과 선생의 서재를 참고하여
관광객들을 위해 리모델링 했답니다.
['서피랑99계단' 입구] 12:21
<계단을 내려와 뒤돌아 본 "서피랑99계단"입니다.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 되는 곳---"
<통영>에 가서 이런 곳을 여행하지 않는 것은 <통영 여행>을 제대로 못한거라 생각됩니다.
['명정골 세 공주 거리']
<통영 명정골>이 배출한 공주는 <박경리선생>과 <공덕귀여사>라고 자랑하며
앞으로 새로운 공주를 기다리는 거리를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명정골 세 공주 거리"....
['서호시장' 앞 사거리] 12:26
<서피랑>을 벗어나 <통영 중앙로>로 나가면 <서호시장 앞 사거리>를 만나 우회전 합니다.
앞에 보이는 <서호시장> 뒤가 <통영항여객선터미널>인데 잠시후 갈 예정입니다.
['통영 중앙로']
['통영시립박물관'] 12:32
<통영 중앙로>를 따라 서쪽으로 잠시 진행하면 "통영시립박물관"을 만납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149호>로서 이 건물은 "옛 통영군청"이었답니다.
<통영>에 대해 깊이 있게 알려면 이런 박물관을 들어가 봐야하는데
시간이 없어 생략하고 건물만 구경하고 갑니다.
['윤이상 기념관'] 12:38 .
<통영시립박물관>에서 5분 정도 <중앙로>를 진행하면 통영의 자랑이며, 한국이 자랑할수 있는
"윤이상 기념관"을 만납니다.
['베를린하우스'] .
<독일 베를린>에서 살던 집을 복원해 놨습니다.
[''윤이상 승용차']
선생이 독일에서 타던 <벤즈 승용차>가 전시되 있고
['윤이상 생가터']
"윤이상 尹伊桑 1917~1995" 선생이 태어 난 곳은 '경남 산청군 기천면 서리'입니다.
태어난지 3년후에 가족과 함께 <통영군> 이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래서 그는 늘 <통영>이 고향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지자체 간에는 <유치진>과 비슷하게 고향논쟁이 있죠.
이곳을 생가라고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러분의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ㅎ
일본에 유학 가서 서양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통영여고','부산사범학교','부산고'등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 후 <프랑스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고, 1957년 <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로
옮겨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졸업후 부터 세계적 작곡가로 호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베를린 예술대 음악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음악을 작곡했답니다
무었보다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유명하죠. 조작 날조여서 다 아는 얘기는 생략하고
['유이상 기념관']
기념관 안에는 시간 관계상 들어 가 보지 못하고
[조형물] 12:42
<윤이상> 공원에 있는 피아노 치는 조형물을 보며 <윤이상 기념관>을 나갑니다.
['통영 중앙로']
['해저터널'] 12:48
<윤이상기념관>에서 다시 <중앙로>를 따라 서쪽으로 5분정도 직진하면
유명한 "해저터널 龍門達陽"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 동양 최초라 하죠?
<龍門達陽>은 <통영>에서 <미륵도>로 가는 '용문', 즉 해저터널을 의미하는데,
<미륵도>가 <통영시 山陽邑>이어서 <陽>이 들어 간 이유랍니다.
['해저 13m 지점'] 12:52
터널에서 가장 깊은 해저13m지점에는 이 해저터널과 관련된 안내가 있어 볼거리였습니다.
예전에 왔을 때엔 물이 새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보수되어 관광지화 되었습니다.
바닷물을 양쪽에서 막고 바다를 굴착하여 터널을 만들고 터널 위를 운하로 만들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터널 위 운하는 옛날에 썰물 때엔 <미륵도>와 연결되는 육로가 있었었답니다.
['미륵도'] 12:55
해저터널을 6~7분 걸려 통과하면 <미륵도>에 도착합니다.
시간 관계로 <미륵산 케이블카>는 탈수 없어 <김춘수 유품기념관>만 답사합니다.
['김춘수 유물전시관']
['전시관 1층'] 1:05~1:10
"김춘수 유품전시관"
<통영>이 자랑하는 또 한분의 시인인 <김춘수선생> 유품기념관>을 둘러 봅니다.
['꽃']
<꽃의 시인>이라는 명성은 바로 이 詩 "꽃"에서 나왔지요.
한번 앍어 보세요~~
['통영' 조망]
<김춘수유품기념관> 앞에서 <통영 시가지>를 조망합니다.
['충무교(해저터널)' 방향 조망]
['착량묘' 조망]
잠시후 <충무교>를 건너 <착량묘>를 방문 할것입니다.
<착량묘>는 통영에 있는 또 하나의 <이순신장군 사당>입니다.
['충무교' 가는 길]
['충무교' 입구] 1:21~1:26
<충무교>로 올라 가서 휴식을 잠시 취하고
['충무교']
<해저터널> 위 <통영운하>에 설치된 <충무교>를 걸어서 건너 갑니다.
['통영대교' 조망]
서쪽으론 <통영대교>가 가까이 보이며 <남파랑길29코스>는 저 <통영대교> 우측 아래로 지나 갑니다
그런데 저는 시골 해안가를 따라 가는 <남파랑길>을 버리고 우측 <통영시내>를 더 여행하려 합니다.
[뒤 돌아 본 '미륵도'] .
<충무교> 중간에서 뒤돌아 본 <미륵산>과 <미륵도>인데 <통영중고등학교>는 저곳에 있더군요.
['통영항'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해저터널 龍門達陽"이 있는 곳이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운하>이며
앞엔 <통영항>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충무교>에 오른 것입니다.
['충무교' 북단]
[골목 내림길] 1:29
<충무교>를 건너자 마자 우측 골목으로 내려 가면...
['착량묘' 조망] 1:31
<통영운하>를 굽어 내려 보고 있는 "착량묘 鑿梁廟"를 만납니다.
['착량묘 외삼문']
"착량묘 鑿梁廟"는 국가가 아니라 수군들과 일반 백성들이 <이순신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599년에 세운 사당이라고 합니다.
장군은 <조선왕조>에겐 어명을 거역한 역적이지만 백성들에겐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당은 그 어느 곳의 사당보다 더 의미있는 뜻깊은 사당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외삼문 앞에는 "이충무공한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으며
['착량묘 내삼문']
['착량묘']
['이순신장군 영정']
<외삼문>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 가서
장군의 영정과 위폐가 모셔진 "착량묘 鑿梁廟"를 만나며 장군의 영정 앞에서 추모합니다.
['착량묘'에서 바라 보는 '통영운하'] 1:35
<착량묘 외삼문> 앞에서 <통영운하>를 조망합니다.
"착량 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뜻으로 <당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들이 쫓겨
달아나다 앞에 보이는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 좁게 이어진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도망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투리로 <판데목>이라고도 한답니다.
몇백년 후 다시 침공했을 땐 해저터널을 만들고....
['해저터널' 입구] 1:39
<착량묘>에서 내려와 시내방향으로 조금 가면 조금 전에 들어 갔던 <해저터널> 입구가 있고
['통영 해안로']
아름다운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항 해안로>를 10여분 거닐면...
['서호시장'] 1:51
<서호시장> 입구를 지나는데
<통영항>은 <강구안>을 기준으로 <동호항>과 <서호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고
['통영항 여객선터미널'] 1:51
"통영항 여객선터미널"
<한산도><매물도><욕지도><미진도>등 섬으로 갈때 이용하신 분들 많죠?
['통영해양수산사무소'] 1:53
이어서 <통영해양수산사무소>도 지나면....
['한산대첩 광장'] 1:58
"한산대첩광장"을 만납니다.
['한산대첩 전투상황' 재현]
이곳엔 <임진왜란> 때의 전투장면을 실물 크기로 모형화 해 놨더군요.
['강구안' 입구] 2:06
<한산대첩광장>을 지나면 다시 "강구안 항" 입구에 있는 관광용 다리을 만납니다.
다리 뒤에 있는 <남망산>의 <통영문화시민회관>도 잘 보입니다.
['강구안' 상가]
<강구안>에 있는 <충무중앙시장> 방향으로 들어 갑니다.
['강구안항'과 '거북선-판옥선']
<강구안>에는 <거북선>과 <판옥선>을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강구안>이 <삼도수군통제영>의 <軍港>이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수 있습니다.
['거북선-판옥선' 입구] 2:13~2:23
<거북선-판옥선>을 체험하려면 입장료를 내야는데 1,500원/어른, 경로는 무료
['거북선 1층']
먼저 <거북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말로만 듣던 <거북선>은 예상보다 훤신 크고 넓었습니다.
['총통']
1층에는 "총통"이 배열되 있는데 연전연승을 할수 있었던 조선수군의 최고 무기였죠.
['무기-탄약고'] .
아랫층으로 내려 가니 <무기와 탄약류>를 저장하는 창고들이 있고
['의무실']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의무실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판옥선' 1층']
<거북선>을 나와 <판옥선>으로 들어 가면
<판옥선>은 글자 그대로 갑판 위에 집이 있다는 뜻이죠.
<판옥선>은 3층으로 되 있는데 100여명의 병사와 200여명의 노를 젓는 노꾼들이 승선했답니다.
<거북선> 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구조는 <거북선>과 유사하고...
['통영중앙시장' 입구] 2:24
['시장 안]
"통영여행도 식후경"
<충무김밥>의 본향인 <통영중앙시장>으로 들어가 미리 알아 온 음식점 <시골밥상>을 찾아 갑니다.
['시골밥상'] 2:29~3:20
모듬생선구이 정식과 함께 한잔 걸치며 포식을 했습니다. (15,000원/인 :사진은 2인분)
['세병관' 앞 '통영중앙로'] 3:22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장날이었습니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남파랑길29코스>의 종점인 <무전해변공원>으로 갔습니다.
택시비는 4,000원정도로 몇명이 타니 버스비보다 저렴
['무전해변']
['무전해변공원'] 3:29
<무전해변공원>에 도착하여 "한국의 나폴리"라는 아름다운 <통영 여행>을 마침니다.
때론 억지로 그은 <남파랑길> 선을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도 더 큰 즐거움을 줍니다.
['남파랑길29-30코스 시종점']
<남파랑길 29-30코스 시종점>에서 여행을 마침니다.
['파란문의 실트랙']
['고도표']
오늘 진행한 거리는 13.6km였으며 3시간50분 정도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모하는 소녀 <박경련>을 찾아 <통영>을 찾았던 <시인 백석>의 시를 음미해 봅니다
<편지>
-백석-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중략)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던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