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후백제의 王都

조선왕조의 産室

전주 원도심 여행 <2부>

 

태조로-전동성당-경기전-학인당-청연루-한국무형유산원-한벽당-

이목대-오목대-한옥마을-승광재-최명희문학관-동학혁명기념관-동부시장

 

[태조로]         12:26

<1부>에 이어 계속해서 <전주여행>을 진행한다.

<풍남문> 동쪽으로 <태조로>가 이어지는데, <전주여행>의 핵심지로 가는 것이다.

 

[전동성당]       사적 제288호

<전동성당>은 건너편에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이 있어, 이 동내의 이름이 "전동 殿洞"이 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당'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지역 이름을 붙인다.

예를 들면 <명동성당><경동성당><전동성당> 등....

 

<전동성당>도 다른 성당들처럼 '결혼식장'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결혼하려면 조건도 까다롭고 엄청 기다려야하니 미리미리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프랑스 보두네 신부]

<전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였으며 이 성당의 터를 마련한 신부로서

한국명은 "윤사물"이란다.

 

[우리나라 최초 순교 장면]

1791년(정조15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순교 하는 장면을 형상화 해 놨다.

종교는 자기 종교를 믿다가 사형 당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가 보다.

종교는 그 목적이 영원히 살기 위해 믿는 것인데도....

자기 목숨까지 바쳐 믿을 만 한게 종교인가

 

사형 당하는 사람은 "윤지충"이라는 신도와 "권상연"이라는 신도란다.

"윤지충"씨는 우리가 잘 아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서양종교에 빠져들어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단지를 불태우는 등 논란을 일으켜 체포되어 사형 당한것이다.

이 사건을 이렇게 형상화하여 전시 하는게 적절한 것인지...

이 사람들 처럼 되라고?

 

<전동성당> 건너편에 바로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 정문]               12:35

<하마비>부터 규모가 남다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당"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국보 제317호이며 어진을 봉안한 정전은 보물제1578호이다.

 

[홍살문]

정문을 통과해 들어 가면 "경기전"으로 들어 가는 홍살문이 이어지고

 

"경기전 慶基殿"

"경사스러움(慶)이 터잡은(基) 곳"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라고 이름도 거창한 "경기전慶基殿"이다

현재 개보수공사 중이라 들어 가 볼수 없었다.

<경기전> 우측엔 "예종태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예종 태실> 북쪽으로 조금 진행하면...

[실록각]

"조선왕조실록 전주 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은 처음엔 <창덕궁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4곳에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다른 곳의 사고는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등 100여명이 "내장산"으로 옮기고,

이어서 "묘향산사고"로 옮기고, 다시 "강화도 마니산 사고"로 옮겼다가,

또 다시 "강화도 전등사 사고"로 옮기며 살아 남았다.

일제강점기시절 서울로 옮겨져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관리되고 있다.

전세계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기록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죠?

 

<경기전> 뒤엔 "조경묘"와 "어진박물관"이 있다.

<경기전>은 예상외로 넓다.

[조경묘]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李翰"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李翰"은 713년에 태어나 754년 죽은 <신라시대> 인물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 때에 '사공 司空'이라는 벼슬에 올라 활동 했단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 분의 21대 후손이 된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 李安社>는 <시조 이한>의 18세손으로 

<고려시대>까지 대를 이으며 이 근처 마을에서 살다가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태조실록>에 따르면 원래 <이안사>는 20대초반까지 본관인 <전주>에서 살았다.

이 지역의 한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 났는데,

문제는 이 별감이 고을현감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는 몽골과의 혹독한 전란기였고, 호족들은 재산과 인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가병들이 버티고 있어 안렴사는 직접 체포하지 못해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움직이기 전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과 자신을 따르는 백성170여호를이끌고 <강원삼척>으로 떠났다.

백성 170호가 기꺼이 그를 따라 나섰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리더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삼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에 싸웠던 그 별감이

삼척의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결국 어쩔수 없이 <이안사>는 그를 따른 170여호를 데리고 다시 북쪽으로 더 이동하게 되었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 해당되는 "동북면 의주"였다.

고려조정에서는 원래부터 어느정도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에

임명하고, 몽골군대와 싸울 것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이안사>는 <원산>등 함경북도 지방에서 '다루가치'라는 벼슬를 얻고 대를 이어 나갔는데

<이안사>는 <이행리>를 낳고 <이행리>는 <이춘>을, <이춘>은 <이자춘>으로 이어지는데

<이자춘>이 <태조 이성계>를 낳으며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세습했단다.

당시는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몽골의 벼슬 중에 하나가 '다루가치'였다.

그래서 "종묘 영녕전"에 "이안사→목조대왕", "이행리→익조대왕", "이춘→도조대왕",

"이자춘→환조대왕"으로 모시고 제례를 올리고 있다.

 

<어진박물관>에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볼수 있었다.

<어진박물관>엔 다른 왕들의 어진도 봉안하고 있었다.

원본은 아니었다.

영상으로 안내해 주는 영상실에서 설명을 보고 듣고...

 

부속 건물이 본 건물보다 훨신 더 많다.

"조선왕조의 뿌리"가 있는 곳이라고 예상보다 큰 규모의 "경기전"이었다.

 

<경기전>을 둘러 보고 나가 우측 앞에 보이는 <전주비빔밥집>으로 가서

<전주>에 와서 "전주비빔밥"을 안먹고 갈순 없죠?      12:58~1:20

13,000원 하던데....서울이랑 큰 차이는 없는듯...

 

<한옥마을>의 남쪽 한옥 거리로 가면...

너무 많은 유명 한옥들이 줄을 서 있어      1:24

그 중 대표 한옥인 "학인당"을 포스팅한다.

해방 후에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국가 요인들이 묵어 간 곳이라는군요.

 

<학인당>에서 <전주천>으로 나가면....

"남천교"와 "청연루"를 만난다.       1:30

"청연루 晴煙樓"

'갤 청晴' '연기 연煙' '다락 루樓'

<전주천>의 맑고 푸른 물에서 피어 오르는 물안개가 부서지며 사라지는 곳이라고 하면 될까?

우리나라 최초의 다리 위 누각이란다.

 

"청연루"에서 바라보는 <한옥마을>과 <오목대>

 

"청연루에서 바라보는 승암산"

<후백제>의 王都인 <전주>에 <후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여러곳 있지만

그 대표적인 곳인 <승암산>의 <동고산성>과 "견훤왕궁"이란다.

<견훤>은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사방에 산성을 쌓았는데 <동고산성><남고산성>등 이란다.

올라 가 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ㅠㅠ

 

"청연루" 옆에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청연루"와 "남천교"에 대한 중수 기록이 적혀 있는 "기적비 紀蹟碑"였다.

홍수 등으로 수난을 많이 겪었더군요.

 

<청연루>에서 <오목교>로 가며 뒤돌아 본 <남천교>와 <청연루>다.

<경주>의 <월정교>가 생각난다.

 

"오목교 梧木橋"를 지나면....       1:39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무형유산원"이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 있다.

판소리등 무형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 전승하는 기관이라고...

 

<국립무형유산원>을 지나면 <전주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한벽교"가 있고      1:44

"전주8경"중에 하나라는 "한벽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벽당 寒碧堂" 전경인데 콘크리트 다리가 운치를 망가뜨린다.

"한벽당" 뒤에는 <옛 잔라선> 철길이 있다.

일명 "한벽굴 寒碧窟"이라고 불린다는 "옛 전라선"이 지나던 터널이란다.   1:47

터널은 '바람통'이었다. 엄청 시원하게 바람이 통과해서 좋았다.

"한벽당"은 터널 바로 앞에서 우회전 하면 된다.

 

[전주천 생태문화 안내도]

"한벽당"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한벽굴>을 나와 "한벽당"으로 가는 길

 

"한벽당"을 올려다 보고...

"한벽당" 입구에는 '기적비'가 있고...      1:50~2:00

"한벽당 寒碧堂"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이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단다.

"한벽당 寒碧堂"은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흐르는 <전주천>의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하얗게 흐트지며

물이 시리도록 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면에는 <남고산>이 솟아 있는데 <남고산성>이 있단다.

<동고산성>과 함께 "견훤"의 후백제 도성인 <전주>를 지키는 성 중에 하나라고....

 

<전주천>은 <만경강>으로 흘러가 "새만금"으로 간다.

 

"기린대로"

<전주 원도심>을 관통하는 도로가 <기린대로>란다.

<기린대로>를 따라 북쪽 도심으로 잠시 진행하면....

 

"자만벽화마을" 입구를 만나는데 벽화마을로 유명하단다.       2:06

그런데 "자만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살았던 마을이란다.

 

이어서 "이목대" 입구를 만나는데, 바로 우측이 "이목대"고         2:09

화살표 방향으로 앞에 보이는 구름다리를 건너 "오목대"로 간다.

 

"이목대 梨木臺"

"목조대왕구거유지 穆祖大王舊居遺地"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태어나 살던 곳이란다.

<이목대>는 27명의 조선왕 중에 누구도 세우지 않았는데 <26대 고종>이 세운 것이다.

망해 가는 <이씨왕조>인 <조선>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는 <이목대>다.

<고종>의 친필이란다.

 

<기린대로> 위로 구름다리가 놓여 있고 건너편에 "오목대"가 보인다.      2:12

"이목대"는 원래 이 다리가 있는 곳 쯤에 있었는데, 도로확장으로 조금 전 위치로 옮겼다고

 

<기린대로> 확장공사로 <오목대> 산봉우리를 절개하던 중에 발견한

"후백제 도성"의 성벽을 찾았다고 안내하고 있다.

<승암산>의 <견훤왕궁>에서 연결되는 <동고산성>이라고 추정한다고...

 

"오목대 梧木臺"   2:15

자세한 설명은 아래 안내문에 나와 있다.

"황산대첩"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에 달해 나라가 온통 시끄럽던 시절에

쪽바리 대장 <아기발도>가 이끄는 왜구들이 500여척의 함정으로 지금의 <군산>으로 처들어 왔는데

이때 활약한 장군이 "화약과 대포"로 유명한 <최무선>이었다. <진포대첩>이다.

<군산>에서 <최무선>에게 된통 당한 왜구들은 내륙으로 흩어져 도망치면서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지리산> 자락의 <운봉>까지 숨어 들어 저항을 이어 갔는데

이 때 <이성계 장군>이 이들을 토벌하러 나선 전투가 <황산대첩>이다.

<운봉> 옆 <인월>에 "황산"이라는 조그만 산이 있는데, 거기서 화살로 <아기발도>를 쏘아 죽이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돌아 오는 길에 <전주이씨의 관향>인 <전주>에 들려, 이곳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단다.

 

<계백장군>의 "황산벌전투"로 생각하면 큰 오해, 전혀 다른 전투다.

"太組高皇帝駐畢遺址碑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

"높으신 황제 태조가 잠시 머물다 간 곳"

이 비석도 <26대 고종>이 망해가는 <조선>을 부흥 시키겠다는 염원으로 세운것이다.

<고종>의 친필이란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전주한옥마을>이다.     2:20

지금의 <전주>와 비교하니 무지 애처롭다.

 

조망을 마치고 <오목대>를 내려 가면...

"태조로 쉼터 (한옥마을 쉼터)"       2:23

<오목대> 아래엔 매우 큰 쉼터가 조성되 있다.

쉼터 앞으로 "전주한옥마을"이 열린다.

평일인데도 외국인 관광객들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다.

한옥마을의 중심도로가 "은행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좌우로 한옥들이 서로 맵씨를 뽐내고 있다.

전주는 두말이 필요없는 고도(古都)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며 도읍으로 삼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본향인 전주가 조선왕조의 뿌리가 됐다.

한옥마을은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지만, 이처럼 깊은 전주의 역사에 비하면

그리 오래된 동네는 아니다.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양곡을 군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해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개설되면서 <전주부성>은 <풍남문>을 제외하고 자취를 잃었단다.

그러면서 성밖에 머물던 일본인이 성안으로 진출해 상권을 형성했단다

이에 반발한 전주사람들이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한옥촌"을 조성했단다.

이것이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이란다.

 

서울의 "북촌한옥마을"이나 "익선동한옥마을"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요즘 들어 관광객들은 무지무지 늘었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다.

 

"황손의 집"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석"씨가 거주하는 집이다.

<이씨조선>의 마지막 혈통이라고 <전주>에서 이 집을 내 주었나 보다.

<고종>의 셋째 아들인 <의친왕>의 열번째 아들이다. 물론 후처에게서 낳은 서자이다.

<의친왕>은 <명성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고종>의 후궁인 <귀인 장씨>의 아들이다.

<이석>씨의 아버지는 <의친왕 이강>이고 호적상 어머니는 <의친왕비 김덕수>이지만

생모는 <홍정순>이라는 전화 교환수였단다.

<의친왕 이강>이 전화 걸다 전화 교환 해주는 아가씨 목소리에 반해 불러 들여 후처로 삼았다고..

<이석>씨가 TV에 나와 증언한 이야기다. ㅎㅎ

"대한황실 승광재"는 게스트하우스로도 운영하고 있어, 예약하면 숙박을 할수 있단다.

 

"최명희 문학관"

그 유명한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를 기억하는 문학관이다.

<전주>가 낳은 최고의 문학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주>에서 다녔으니...

그녀가 쓴 "혼불"은 17년의 산고를 겪고 탄생해 우리나라 문학사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녀는 지병인 난소암으로 고통을 격으면서도 집필을 완료하고,

너무도 이른 51세에 생을 마감했으니 더욱 안타까운데

그녀의 장례를 <전주 시민장>으로 치뤘을 만큼 전주를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그래서 <전주한옥마을>에 문학관을 세웠으리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을 닫고 있어 들어 가 볼수 없었다.

다시 <은행로>를 진행하면....

<전주한옥마을>의 중앙로의 이름을 <은행로>라고 만든 '은행나무'가 나그네들을 바닌다.

이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 "전주 최씨 종가집"이란다.

"경주 최씨"는 "최치원" 때문에 알지만 "전주 최씨"는 처음 알았다.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전주 최씨라네요.

 

"전주동학혁명기념관"

<천도교>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선생"과 <동학농민군>의 "전봉준 녹두장군"등....

"소파 방정환선생"도 <천도교>를 믿었고 "손병희선생"의 사위가 되었죠.

"방정환선생"의 어린이 사랑도 <천도교> 교리에서 나왔답니다.

이런 기념관을 깊이 있게 관람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지나친다.

 

[동부시장 사거리]

<한옥마을 은행로>의 끝에 도착하면 "동부시장사거리"를 만나는데      2:55

"책 탑"이 특이하게 서 있다.

이 거리에 책방이 밀집해 있었다는군요.책방들은 다 어디 갔노~~

 

[동부시장 버스정류장]         2:56

여기서 <119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역>으로 갔다.

 

[전주역 첫마중길 버스정류장]        3:25

<전주역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전주역>으로 간다.

[전주역]

갈 때는 < ITX >를 타고 간다. 오후3시44분 열차다.

5시간 40분의 <전주여행>을 마친다.

 

 

 

 

 

 

 

 

 

 

 

 

728x90

'전라도여행 > 전주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 당일치기 전주 여행 <1부>  (1) 2026.10.20
728x90

후백제의 王都

조선왕조의 産室

전주 원도심 여행 <1부>

 

전주첫마중길-선미촌-전주시청-한국전통문화광장-전주부성북문지-

영화의 거리-창극골목-풍패지관-전라감영-공익질옥-풍남문-풍남문광장

 

[진행한 트랙킹 실제 코스]

[전주역]     10:15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7:43 KTX를 타고 갔는데, 이 열차는 <서대전역>을 경유하여 가는

열차여서 요금이 10% 싸고, 경로 우대 30%까지 혜택을 받으니 ITX요금이었다.

다만, 일반KTX보다 시간이 약40분 더 걸린다. 여행인데 급할건 없으니 이 열차를 이용했다. ㅎ

열차는 정확히 10:04에 도착하여 10여분 걸을 준비를 하고 나가면

옛 전주역사가 신축 중인 역사에 가려 초라하게 서 있다.

 

[전주역]

뒤돌아 본 <전주역>인데 신역사를 신축 중에 있다.

 

[백제대로]

<전주역> 앞으로 <백제대로>가 펼쳐지는데 도로 중앙에  <전주첫마중길>이라는 가로공원이

<전주>를 찾는 방문객들을 환영하며 맞이하고 있다.

 

[전주첫마중길]

안내문을 참고하고...

 

[첫마중길 버스정류장]     10:20

<전주역 버스정류장>의 이름이 <첫마중길 버스정류장>이다.

길 가운데 있는 공원 안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119번>시내버스를 타고...

<119번 시내버스>는 자주 있는데 배차시간이 10~15분이었다.

 

[전주 대우빌딩]       10:35

<119번시내버스>를 타고 약15분 걸려 <전주시청> 바로 전 정류장인

<전주 대우빌딩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건너편을 바라보면....

 

건너편엔 <SK브로드밴드> 빌딩이 있는데 빌딩 뒷쪽으로 가면....

 

[씨티공원]           10:40~10:48

"선미촌"

일제강점기시절에 쪽바리들이 우리나라 '성매매'를 합법화시키며 발생된 창녀촌이었단다.

그런 와중에 <6.25전쟁>을 거치면서는 호남의 대표 집창촌으로 성장했단다.

예절의 도시 '전주' 한 복판에  홍등가가 있다는 것이 어쩌면 <전주>의 수치였겠죠.

그래서 이곳을 폐쇄하고 "도시재생 프로잭트"를 시행했다고 해서 찾아 봤다.

 

[씨티공원]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에 집창촌의 이름이 "선미촌"으로 불려졌단다.

그중심부에 "씨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재생 프로잭트를 시행한 곳 입구이다.

 

[뜻밖의 미술관]

"선미촌"이라는 집창촌에 도시재생사업으로 만들어진 대표 건물이 "뜻밖의 미술관"이란다.

들어 가 보니

 

[미술관 내부]

"선미촌"과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들이 전시되 있는 줄 알았는데

장애인들이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관리인 한분이 계셨는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라고 물으니 "원래 찾는이 없는 조용한 곳이에요"

"도시재생사업으로 활성화 시킨다고 들었는데..."

"글쎄...처음엔 좀 활성화 되는 줄 알았는데...보시다시피..."

 

[옛 선미촌의 흔적]

화려한 불빛 아래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술취한 남성들을 유혹하던 홍등가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쓸쓸한 "선미촌"을 잠시 돌아 보고 다시 <기린대로>로 나가면...

[전주시청]

건너편엔 "전주시청"이 자리하고 있다.

 

"전주시청"

1. <전주시청> 자리는 원래 옛 "전주역"이 있던 자리란다.

2. <전주>의 인구는 약630,000명 정도라고 하고, 매년 인구는 감소한다고...

3. <전주 全州>의 옛 이름은 <삼국사기>에 "완산 完山"으로 나온단다.

그러므로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뜻을 지닌 글자로

"온전하고 흠이 없다"는 뜻이라고

 

시청에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잠시 이동하면....

"한국전통문화전당"을 만난다.          11:05~11:16

한식, 한복, 한지, 수공예를 중심으로 놀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전통문화시설이란다.

한지산업지원센터와 한식창의센터, 한복문화창작소 중심으로 각종 체험· 교육· 전시· 공연 등

누구나 손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단다. 

 

"한국전통문화전당"은 <조선왕조실록>이 최초로 봉안된 "숭의사"가 있었던 곳이란다.   

<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이 봉안되었단다.

 

"옛 전주옥 全州獄"

또한 "한국전통문화전당"은 "옛 전주 감옥"이 있었던 곳이란다.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었다고...

 

"전주부성 안내도"

<전주>의 옛 정식 명칭은 "전주부 全州府"였고, <전주부>의 행정관청이 자리한 곳이

"전주부성 全州府城"이란다.

이번 답사는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진행 한것이다.

(답사코스는 붉은색 선으로 표기했다)

<전주부성>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고

 

다시 <전주시청>으로 올라 가 서쪽 <문화광장로>를 잠시 진행하면...

"오거리 문화광장"을 만난다.       11:21

"오거리 문화광장"에는 "전주부성 북문지"가 있었던 곳이란다.

 

<북문터> 오거리는 지금은 좀 초라한데....

"영화의 거리"가 시작된다.

 

"영화의 거리 입구"       11:26

"영화의 거리"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라고 하는데

'서울의 명동'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단다.

이 거리는 <북문터>에서 <풍패지관>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거리>에서 첫번째 사거리를 만나는데        11:28

여기서 우측 골목을 바라보면...

'FOOT MART' 우측 골목으로 "창극골목"이 이어지는데

우측에 있는 "베니키아 전주한성호텔"은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옛 한성여관"이란다.

골목으로 들어 가면....

 

"창극골목"과 "한성여관"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고...

 

"창극골목"은 이렇게 변했다.

 

다시 영화의 거리로 나가 조금 더 진행하면

우측에 "풍패지관"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의 거리>가 끝나는 곳에 도착하면 정면에 "풍남문"이 가까이 보이고...

우측을 보면...

"풍패지관 豊沛之館"       11:47~11:50

<전주부성>을 찾는 조정의 고위 관리나 외국사신들의 숙소인 "전주객사"란다.

<풍패 豊沛>는 '중국 한나라'의 초대 황제인 "유방 劉邦"의 고향 지명이란다.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 전주여서...격을 높이기 위해서겠죠?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풍패지관>이 일제강점기시대를 거치며 더욱 황패화 되었고

도로 확장공사 등으로 규모가 축소되었었는데....

다시 복원하여 전주시민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풍패지관>에서 다시 <풍남문>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체국사거리>를 만나는데    11:52

우측엔 <전주비빔밥>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가족회관>이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예전 <전라북도 공보관>이 있었던 곳으로

그후 공연장과 극장으로 활용되었단다.

개관기념 첫 상영된 영화가 <장미의 곡>이라는 영화였는데 추억 속의 배우이자 희극인

<김희갑><허장강>씨가 주연이었단다.

<옛 공보관>을 지나면 "전라감영" 돌담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복개공사한 곳으로 개천이 흐른다고 한다.

 

길 중간 '화살표' 표기 한 곳으로 가면...

옛날 <전라감영> 앞에 흐르는 개울에 돌다리가 있었고

<전라감영 정문>인 <포정루>가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동판으로 설치 해 놨다.

"전라감영 全羅監營"     11:57~12:08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관활하는 도청이었단다.

이 글은 <정조>가 펴낸 <이충무공전서>에 기술되 있는 글이다.

 

"전라감영 내삼문"

정문인 외삼문은 "포정루"로 조금 전 개울 사진에서 본 2층 규모로 큰 문이었지만

도로 확장 공사 등으로 없어지고, "중삼문"도 사라지고, "내삼문"이 정문 역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 원래 <전라감영>의 규모는 엄청난 규모였을 것이다.

 

<내삼문>을 들어 서면 <선화당>과 <관풍루>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전라감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 앞에는 비석같은게 서있는데

"가석과 폐석"이란다.

아래 안내판을 참고하고...

 

"전라감영"은 일제강점기 시절 1921년에 허물어 버리고 "전라북도 도청"을 신축했단다.

그 도청을 다시 허물어트리고 복원하며 흔적을 남겼단다.

1921년에 신축한 도청 건물은 다음 사진이다.

"전라감영" 자리에 신축된 "전북도청"

2005년 신도심으로 신축 이전 할때까지 80여년간 "전북도청"이 있었던 자리란다.

 

"관풍각"

 

"선정비"

 

"연신당"과 "내아,행랑"

"연신당"은 전라감사의 사택이었고, 

옆에는 "내아와 행랑"이 있는데 부속시설이었다고...

 

"선화당"에서 남쪽 정면을 바라보면 <전주완산경찰서>가 보이는데

경찰서 좌측 골목으로 가면...

 

<전주완산경찰서> 건물 옆면에

"전주부성" 조감도가 그려져 있다.

고지도를 참고한것이라고

 

<전라감영>에서 <풍남문>으로 향하는 골목인 <전주부성 중앙통>에는

"공익질옥 公益質屋"이 있었던 거리란다.

"국가나 공공기관이 운영하며, 담보물을 맡기고 돈을 빌려주는 공공전당포"라고 생가하면 된단다.

고리대금업자인 전당포가 아니라 국가가 '공익公益'을 위해 최악의 상황에 놓인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 주던 그런 '숨구멍' 같은 곳이었단다.

 

이 자리에서 좌측을 보면...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쌍화차'가 좋다고 하는데

'당일로 가는 전주여행'이라 시간이 없어 쉬어 가지 못하는게 아쉽다.

 

"전주부성 남문"       12:19

성문 안쪽 현판은 "호남제일성 湖南第一城"이라고 쓰여있고

<남문시장>입구에서 바라보는 <풍남문>과 <전동성당>

그리고 <이성계>가 놀다 간 <오목대>가 조망된다.

"풍남문 豊南門"

성 밖 문루에는 남문을 "풍남문"이라는 현판을 걸어 놨는데

앞에서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豊沛之館 >에서 알아 보았던 "한나라 유방의 고향"인

豊沛에서 남문은 ' 豊'南門(풍남문)이라 하고, 서문은 '沛'西門(패서문)이라 이름 지었단다.

 

<풍남문> 옆에는 광장이 있으며 <소녀상>이 설치되 있다.

<경기전> 방향으로 "태조로"가 이어지는데        12:26

여기서 <1부>를 마치고 <2부>로 이어진다.

 

<2부>에는 "전동성당"과 "경기전", 그리고 "학인당"과 "청연루",

계속해서 "한벽당"과 "이목대-오목대", 마지막으로 "한옥마을"을 탐방한다.

 

 

 

 

728x90

'전라도여행 > 전주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 당일치기 전주 여행 <2부>  (0) 2026.10.23
728x90

대중교통으로 가는 섬트랙킹

신도-시도-모도

신도평화대교-신도선착장-모도공영주차장-박주기-배미꾸미조각공원-암행어사이건창불망비-

시모도연도교-노루메기-화살탑-북도면사무소-신시도연도교-신도1리-신도선착장

[트랙킹코스]

파란색선이 농어촌버스1번을 타고 <모도 종점>까지 이동한 루트이고

빨강색선이 실제 트랙킹한 루트이다.

 

[운서역]    9:56

2026년 10월 10일 (토)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를 이용해 <영종도 운서역>까지 이동하여 <1번출구>로 나가면...

 

[운서역1번출구 앞 광장]에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운서역 버스정류장]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야하는데...

<운서역>에서 <신도선착장>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는 <2251번>이 유일하다.

<신도평화대교>가 개통하고 나서부터 새롭게 <신도>를 운행하는 버스란다.

나는 <운서역 버스정류장>에서 "10시 11분"에 출발하는 버스 시간에 맞춰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공항열차>를 "9시 2분"에 타고 <운서역>에 9시 56분에 내렸다.

<신도선착장행>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으며, 지체없이 출발했다.

 

<운서역>에서 <신도선착장>까지는 버스로 약20분이 걸렸다.

그러니 나올 때 버스시간도 알아 두고 가는게 좋겠죠?

<신도선착장>에서 출발시간은 <운서역> 출발시간에서 "20분"을 더하면 된다.

예를 들면 <운서역>에서 13시 44분 출발버스는 <신도선착장>에서 오후2시5분에 출발한다.

(나올때 나는 이 버스를 이용했다.)

꼭 기억해 두고 가야 융통성 있는 트랙킹을 할수 있겠다.

 

[신도평화대교]

<운서역버스정류장>을 출발한 버스는

2026년 7월 14일 개통한 "신도평화대교"를 단숨에 건너고....

예전에 <삼목항>에서 배를 타고 한번 건너 갔었는데 배를 타고도 10분만에 바다를 건넜으니

1~2분만에 바다를 건넜다. 세상 좋아졌죠?

 

"신도선착장 (신도바다역)"   10:30

<2251번> 시내버스는 여기까지만 운행하고, 바로 <신시모도 농어촌공용버스>에 인계한다.

버스요금은 환승요금이 적용되어 아무른 불만이 없다.

<운서역>에서 10시 11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바로 농어촌버스로 환승 할수 있지만

다른 시간대에는 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울땐 여기서 바로 트랙킹을 시작하여 <모도>로 가면 되겠다.

<신시도 농어촌공용버스 시간표> 2026년 10월 10일 현재

<2번 버스>는 섬의 우측방향으로 돌고, <1번버스>는 섬의 좌측 방향으로 돈다.

<모도>로 갈 사람들은 어느 버스를 타도 상관없다.

"옛 신도선착장 (신도바다역)"

배가 도착하면 왁자지껄하던 선착장이 이젠 섬나들이를 하는 나드리객들의 주차장이 되어

승용차를 타고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섬구경에 나서는데

주로 '전동바이크' '전동카트'등을 빌려 타고 돌아 다닌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

 

 

"모도 茅島"

[모도 공영주차장(박주기)]      11:00

<신도선착장>에서 약25분이 걸려 <모도>에서 유일한 공영주차장인 <박주기주차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도선착장>으로 출발하는 버스시간은 맨 위 시간표를 참고하면 되겠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트랙킹을 시작한다.

뒤돌아 서면...

[배미꾸미 삼거리]

여기서 먼저 좌측 <박주기>로 간다.

저 앞에 <박주기>가 보인다.

 

[박주기 체험어장]       11:06

<모도>의 모양이 "박쥐"를 닮았는데, 박쥐의 끝부분이라는 설명인듯한데...

안내판의 설명은 내가 문해력이 낮아서인지 뭔말인지 모르겠다.

문해력 낮은 사람이 봐도 알수 있게 안내 할수는 없는가?

"박주기"

온통 갯벌인 서해 바다에서 "갯바위"가 제법 그럴듯하게 소나무 한그루를 이고 있다.

안내판에는 <모도>의 모양이 '박쥐'를 닮아서라고 하는 듯한데

이 갯바위의 모양이 '박쥐'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은 아닐까

 

<박주기>에서 바라보는 광경인데 썰물때라 갯벌만 드러나고 있고

건너편에 <영종도>와 <용유도>를 이어 만든 <인천국제공항>이 쉴새없이 항공기를 이착륙시킨다.

<박주기>에서 바라보는 북쪽

<시도>와 <모도>를 잇는 연도교가 조망되며, 그 뒤로 <강화도 마니산>까지 가까이 보인다

 

<박주기>에서 바라보는 <모도>의 남쪽 끝이다.

체험어장 안내소와 화장실이 있다.

 

<박주기>에서 <배미꾸미 조각공원>으로 가는 공식적인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동산만 넘으면 바로 <배미꾸미>인데.....

<배미꾸미조각공원>은 입장료 2,000원을 내야 들어 갈수 있다.

여기서 좌측 해변을 따라 가면 입장료를 세이브 할수 있으니 참고 하기 바란다.

단, 밀물 때엔 해변을 걷기 어려우니 피해야 하겠고...

나는 직진한다.

 

숲길을 잠시 진행하면...

새로운 건축물을 지을려는지 공사중인 둔덕에 오르는데

바로 아래 <배미꾸미해변>이 보이고, 그 뒤로 <장봉도>가 조망된다.

'인천시 웅진군 북도면'은 <장봉도-모도-시도-신도>로 이루어져 있단다.

앞으로 <장봉도>도 다리로 연결되리라

 

예전엔 없었던 "타이거비치 리조트"가 <배미꾸미해변>에 우뚝 솟아 있다.

 

"타이거비치 리조트"에는 엄청 큰 카페가 바닷가에 있는데 들어 가 보면...

규모가 장난이 아닌데

한글날 연휴를 맞아 손님이 많았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배미꾸미 해변>이다.

여기서 해변으로 나갈려면 카페를 이용했다는 영수증이 있어야 바로 나갈수 있단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배미꾸미 조각공원>으로 간다.

 

카페 정문으로 나가 리조트 건물을 돌아 나가면

"배미꾸미 조각공원" 입구

입장료를 2,000원 받는다.

볼만한 조각작품도 많지 않은데 입장료를 받아 기분이 언짢은데,

특히 해변은 국공유지여서 출입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입장료를 받을 수 없는데

교묘한 곳에 출입구를 만들어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박주기>에서 언급 했드시 해변길로 진행하면 입장료를 세이브 할수있다.

 

그래도 여기 언제 또 다시 올지 오르니 들어 가면....

"배미꾸미 조각공원"

홍대 출신 조각가 "이일호"씨의 작업장이었는데 운도 좋아 <신도평화대교>가 건설되어

땅값도 엄청 오르고, 작업실은 조금 전에 본 카페로 변신시켜 부자가 된듯...현재 80세

 

<이일호>씨는 性愛를 주로 다루는 작품을 남겼단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카페가 <이일호>씨의 허럼한 작업실이었는데 리조트로 변모했다고...

작품도 그리 많지 않다.

예술을 잘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에로틱한 性愛장면을 연상하며 떠난다.

"배미꾸미"는 '배미→배밑', '꾸미→구멍'이라는 방언이란다.

한마디로 "배밑구멍"이라는 뜻

 

간단하게 <배미꾸미 조각공원>과 해변을 구경하고 나가면...

11:40

<박주기 주차장>에서 출발했던 삼거리에 다시 도착한다.

<박주기>와 <배미꾸미해변>을 돌아 나오는데 40분이 걸렸다.

 

<모도주차장(박주기)>에서 <모도-시도-신도> 트랙킹을 시작한다.

"해당화 꽃길"

<박주기>에서 <시모도 연도교>까지 "해당화 꽃길"이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7분여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모도 茅島"

"모도리 마을회관"을 만나는데 옆에 쉼터가 있는데

쉼터에 "암행어시 이건창 불망비"가 있다.

 

<모도>의 거주 인구는 120여명이란다.

'모 茅'는 '띠'라는 풀 이름이란다.

고기잡이를 나가면 고기는 잡이지 않고, '띠'라는 풀만 걸려 올라 온다고 지명의 유래가 된단다.

 

"이건창"은 '강화도' 출신으로 구한말 <철종> 때인 1852년에 태어나 1898년까지 살았단다.

<조선왕조 600여년>에서 <고종 3년>에 최연소 과거 합격(15세 합격)자로서 유명하고

너무 어려서 18세에 관직을 맡기 시작하여, 승승장구하여 20대부터

<충청도-경기도 암행어사><황해도 관찰사> <한성부소윤><함경도 안핵사>까지 역임했단다.

1884년 갑오경장에 반발해 강화도로 낙향하여 지내다 4년후 46세에 죽었단다.

26세부터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했는데, 이곳 <모도>에 들렸을때 악덕 관리를 혼내주고

백성들의 세 부담을 줄여 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해 주민들이 그의 공덕비를 세웠단다.

<이건창 공덕비>는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앞에 있는 <비석공원>에도 있고,

그외에도 여러군데 공덕비가 세워졌단다.

그 많큼 "대쪽같은 암행어사"였단다.

 

"옛 모도선착장"을 지나면...

"시모도 연도교 矢茅島 連島橋"

<모도>와 <시도>를 여결하는 다리를 건너가며 좌측을 바라보면...

<강화도>의 "마니산"이 지척에 보인다.

<마니산>은 남북을 통털어 서해안에선 최고의 산이란다.

그래서인지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는 <참성단>이 있고,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룰 채취하는 곳이기도한 성스런 곳이다.

 

<신도평화대교>는 앞으로 <강화도>까지 연결되고 통일이 되면 북한까지 잇는다고...

 

남쪽을 바라보면

지나온 <박주기>와 <배미꾸미>가 조망되고...

 

<시도>에 다가 가면 <모도의 박주기>같은 갯바위가 보이는데

조각품이 갯바위에 있는데 숨은 그림찾기다.

다음 사진을 보면 찾을수 있다.

약간 줌인한 조각 작품

갯바위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달려 가는 듯...

 

12:02

<시모도 연도교>를 지나면 "노루메기"라는 마을인데

우측에 "화살탑"이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유의해야 볼수 있다.

"화살탑"

"시도 矢島"는 '화살 시矢'를 사용하는 섬인데 그 유래를 새겨 놓은 탑이었다.

"시도 矢島"라는 지명은 "화살섬"이라는 뜻으로,

고려 말에 "최영장군"과 "이성계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강화도 마니산> 기슭에서

이 섬을 과녁 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단다.

그래서 화살이 발견된 지점에 화살탑을 세웠단다.

탑 모양이 화살이 땅에 꽂혀있는 모양으로 되어있다.

 

10여분 나즈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 가면...

12:13

<시도 문화광장> 입구를 지나고...

 

12:17

이어서 "북도면사무소"를 만난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은 <장봉도-모도-시도-신도>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여기가 중심이다

"시도"의 인구는 약300명이란다.

 

'북도면'의 중심지여서인지 공설운동장도 있는데 <축구K리그>가 열리기도 했단다.

그리고 국립요양원, 농협 하나로마트등 편의 시설도 있다.

 

12:23~12:42 (20여분 휴식)

<시도>의 중심지역을 통과하면 <신시도 연도교> 앞에 쉼터가 있다.

 

"신시도 연도교"를 건너며 <신도>의 <구봉산>을 조망한다.

사실 오늘 <구봉산>도 오를려고 했는데....

 

<신시도 연도교>를 지나며 <강화도 마니산>을 다시 조망하고

<시도>에서 가장 명소로 꼽히는 "수기해변"을 먼 발치에서 보며 지나고...

 

12:48

<신시도 연도교>가 <신도>에 닿는 곳에 삼거리가 있다.

오전에 <1번버스>를 타고 <모도>로 갈때 좌측 길로 나왔다.

갈 때는 우측길로 간다.

 

<신도선착장>까지는 "2.6km"가 남았다고 알려 준다.

해안길을 잠시 진행해서 뒤돌아 보면...

지나온 <신시도 연도교>가 멀어져 가고...

 

남쪽으로는 <신도>와 <시도> 사이에 "거북이"가 해협을 건너고 있다.

바닷물이 들어 오기 시작한다.

 

25분여 보행로가 없는 위험한 도로를 진행하면...

"신도 信島"

'믿을 신信'을 쓰는 섬으로 

"섬 주민들의 정직하고 후한 인심으로 서로 믿고 살아간다는 의미로 신도信島로 불리게 되었단다"

거주 인구는 약400명이란다.

1:12

"신도선착장입구 삼거리"에 도착한다.

가족끼리 전동카트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구봉산 등산로입구>가 이곳에 있는데

 

<신도>에서 가 볼만한 곳은 <구봉산> 밖에 없다고 할 정도다.

 

10여분 황금 들판을 감상하며 진행하면...

 

전동카트와 전동바이크등을 대여해 주는 업소를 만난다.

대여 업소는 두군데가 있었다.

주말엔 미리 예약없인 대여 할수 없을 정도란다.

 

오전엔 텅텅 비었던 <신도선착장 주차장>이 오후엔 만원이다.

"신도선착장 대합실"   1:25

마을버스는 35분에 출발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2251번 시내버스>는 <운서역>에서 1시 44분에 출발함으로

이곳에는 20분이 걸려 "2시5분"에 도착하여 바로 출발한다.

버스 도착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주변을 구경하면...

텅 빈 "신도선착장 대합실"

섬에 다리가 놓이면 선착장은 사라진다.

표를 사고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고 썰렁하다.

 

부두에 나가 <신도평화대교>와 <영종도 백운산>을 조망하고...

부두엔 배는 없고 그 흔한 갈매기도 없고, 낚시꾼들만이 움집해 있고

하늘로 솟아 오르는 <인천국제공항>의 비행기들만이 괭음을 울리고 있었다.

 

<운서역> 2:25

오후2시5분에 <신도선착장>을 출발한 <2251번> 시내버스는 20분만에 <운서역>에 도착하고

근처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귀가 했다.

 

 

 

 

 

 

 

 

 

 

 

 

 

 

728x90
728x90

이태원터-해방촌-신흥시장-남산-남대문시장

 

[탐방로]

2026년 10월 6일(화)

<남영동대공분실>을 관람하고, 이어서 "해방촌"을  탐방한다.

그리고 <남산공원>을 지나 <남대문시장>으로 간다.

 

[지하철4호선 숙대입구역3번출입구]

<남영동대공분실>을 관람하고, <숙대입구역 3번출입구>로 이동하여

"해방촌"으로 간다.

 

<숙대입구역3번출입구>에서 <남산>방향으로  들어 가면,

좌측은 <갈월동>이고, 우측은 <남영동>인데, 행정구역이 좀 복잡하다.

조금 더 진행하면...

 

좌측은 <후암동>이고, 우측은 <미군부대>인데 <용산동>이다.

좌측에 보이는 흰건물은 <후암동주민센터>이고, 그 뒷 건물은...

 

<서울시 교육청>이 여기에 있군요. <서대문>의 <경희궁> 옆에 있었는데...

<남산>이 점점 다가 온다.

 

"용산고등학교"

"이태원터 梨泰院址"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이곳이 옛 "이태원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알아 보면, 좌측은 <후암동>이고 우측은 <용산2동>이다

즉, <이태원동>과는 거리가 먼 곳에 오리지날  "이태원 梨泰院"이 있었다.

'배꽃이 엄청 많이 피는 곳"에 "한양"과 "삼남지방"을 오가는  <남대문> 밖 "역원 驛院"이었다.

[대동여지도 한양도성 지도]

<한양도성>의 3대 정문 밖에는 "역원 驛院"이 엄청 큰 규모로 있었다.

(<북대문(숙정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니 역원이 없었다)

지방을 오가는 관리들이나 상인들, 나그네, 짐꾼들이 쉬며 숙식도 하고, 우마차도 쉬며

<한양>으로 들어 갈 준비, 지방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곳이었다.

 

<동대문> 밖에는 관동지방으로 통하는 "보제원 普濟院"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암오거리"에 있었다.

<서대문> 밖에는 중국과 북쪽지방으로 통하는 "홍제원 弘濟院"이 있었는데,

현재의 "홍제동 사거리"와 "무악재" 사이 <홍제역2번출입구 근처>에 있었다.

<남대문> 밖에는 삼남지방과 통하는 "이태원 梨泰院"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 <용산고등학교>자리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이곳 "역원"에서 비롯됬는데도 현재의 <이태원동>은 여기서 좀 멀리있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할때 통과한 곳이기도 한데,

<남대문> 밖에서 <한강>을 건너 <남태령>을 넘고 <인덕원>에서 다시 쉬며

말에 여물을 먹이고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리고,

저녁 늦게 <수원>으로 갔다고 <난중일기>에 나온다.

 

[후암동 종점]

<용산중고등학교>를 지나면 <한국에너지재단>이 있는 로터리를 만난다.

좌측은 "후암동 厚岩洞"인데 의미가 '두텁바위 마을'이라는 것이군요. 

난 이제까지 <남산 뒤에 있는 바위마을>로 알았는데, "두터운 바위"? 크다는 거여? 뭐여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108계단 입구]

유명하다면 유명한 "108하늘계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해방촌 解放村"이 시작된다.

<해방촌>과 <현위치>를 참고하고

"108하늘계단"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시대>에 일본놈들이 설립한 "경성호국신사 京城護國神社"로 올라 가는

계단이었단다.

"108하늘계단 경사형 엘리베이트"

<해방촌>엔 해방후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데

지금은 고령화 사회로 주로 노인들이 이 곳에 살아 그들의 편의를 위해 엘리베이트를 설치했단다.

 

[안내문]

이 안내문은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래야 이 지역의 의미를 느낄수 있고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알수 있다.

[당시 항공사진]

붉은색 원 표시 부분이 <108계단>이며

좌측부터 아래로 현<용산미군기지>인 당시 <일본군기지>가 어마무시하게 펼쳐져 있다.

이 기지가 <조선> 침략통치와 대륙침공의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이 엘리베이트는 중간 중간에 승강장이 설치되 있는데, 4층으로 되있었다.

즉, 중간 중간에 골목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엘리베이트에서 내리면 <해방촌녹색골목길>이 이어진다.

 <6.25전란> 때에 주로 <북한 선천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다는데

해방후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구제품들을 많이 거래 하며 끈질긴 생활력을 보여준

한맺힌 '서울의 달동네'였던 것이다.

 

지금은 달동네 정비사업으로 많이 좋아졌죠?

그런데 일제시대엔 이 근처가 <일본군 사격훈련장>이었단다.

 

[해방타워]

"옛 숭실학교 터"

<숭실학교>는 <평양>에 있었는데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가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단다,

신사참배를 거절 했다는 이유로 폐교되었단다.

<6.25전쟁>후 북한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 피난민들이 모금하여 학교를 다시 세웠단다.

그 <숭실 중고등학교>는 지금은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전했다.

유명한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인데, "시인 윤동주"와 함께 다녔단다.

물론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 출신 중에 유명 인사가 무지무지 많다.

<장준하 선생>, '가고파'등을 작곡한 <김동진>, 참고로 <김동진>선생은 내 친구 아버지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도 이 학교 출신이며

박통시절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백인엽>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 정치인 <조만식선생><조병옥선생>

'소나기'라는 소설을 쓴 소설가 <황순원선생>...셀수 없을 정도다.

현 민주당 대표인 <김민석>은 서울숭실고를 졸업했단다.

 

"경성호국신사 京城護國神社"

옛 <서울숭실학교터"인 현 "해방타워" 부근이 "경성호국신사 京城護國神社"가 있었던 곳이란다

그러니까 <서울숭실학교>는 일본신사를 깨부수고 그 자리에 민족학교를 세운 것이다.

 

"해방촌 신흥시장"

<해방타워>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요즘 국내외적으로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해방촌 신흥시장>을 만난다.

<신흥시장>은 이 문으로 들어 가지 말고 위에 있는 문으로 들어 가는게 좋단다.

그래서 위로 조금 더 올라 가면....

"해방촌 오거리"를 만난다. "해방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번화가다.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용산2가동주민센타>인데, 이곳은 공식적 행정구역으로는 <용산2가동>이다.

여기서 핫플레이스라고 하는 <신흥시장>으로 들어 가려면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러면 앞에 "해방교회"가 보이는데 저 교회 앞으로 간다.

<신흥시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재래시장이 아니고

우측 상가들의 지하에 형성된 젊은이들의 향연장이란다.

<해방교회> 앞에는 <신흥시장> 윗쪽 출입구가 있다

여기로 내려가 첫번째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신흥시장>이 시작된다.

조금 더 들어 가면...

<신흥시장> 중심부

지금 시간이 오후 4시경이라 한산한데 저녁시간이나 주말에 가면 북새통을 이룬단다.

주로 퓨젼음식, 카페, 술집등이 있는데 젊은들의 데이트 장소로 급부상했단다.

천장을 보면 투명 가림막으로 비를 막아주며 햇빛도 들게 했단다.

이곳 <신흥시장>은 채소나 생선등을 장보는 그런 재래시장이 아니고 카페와 술집촌이니

나이 드신분들은 갈 필요가 없는 곳이더군요.

여하튼 달동네 리모델링으로 '이태원클럽'을 드나들던 젊은이들을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고

 

<신흥시장>을 나와 <해방촌 오거리>로 다시 돌아 가서

[해방촌 오거리]를 직진해 <남산>방향으로 올라 간다.

그러면 <남산>을 돌아 가는 <소월로>를 만나는데

여기서 뒤돌아 본 <해방촌>인데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확연히 구분된다.

 

[소원로]

<남산>자락을 휘도는 <소월로>를 따라 <서울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COMFORT"라는 카페 옥상을 만나는데 뷰가 무지 좋다.

나가 보면...

"해방촌"이 펼쳐지는데 밤에 가면 더욱 아름다운 뷰가 펼쳐진다니

저녁에 <신흥시장>에 들어가 한잔하고 나와 감상하면 좋겠다.

<옛 정수장학회>였던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보이고

그 앞에 있는 <남산도서관>으로 간다.

 

"남산도서관" 앞 <남산공원 입구>를 만나고...

<남산도서관> 아래엔 "퇴계 이황선생 동상"이 있다.

<퇴계로> 쪽에서 <남산>은 많이 올라 봤어도 이쪽에선 처음 올라 보는데

<퇴계로>가 왜 <퇴계로>인지 알려 주는 듯 하다.

 

"남산도서관"

학창시절 이 근처는 여학생들 꽁무니따라 와본 적은 있지만 들어가 공부해본 적은 없는데...

그때 공부 좀 더 하는건데...^.^

 

도서관 옆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우측에 "한양성곽 전시관"이 있고...

"옛 정수장학회"인 "교육정보연구원" 앞 남산광장에 도착하고...

[안중근 의사 상]

나는 언제나 이 분께 빚지고 산다는 생각을 한다.

 

이곳엔 일제강점기시절 "조선신궁"이 있었죠.

해방후 깨부수고 "우남공원"을 만들어 <우남 이승만 동상>을 세웠었죠.

아래 사진들 참고 하셈

 

<서울역> 뒤 <만리동>에서 바라 보는 남산 <옛 조선신궁>

바로 앞이 <서울역>이다.

[조선신궁]

[우남 이승만 동상]

해방후에는 80세의 <이승만대통령>을 우상화 시키며 <조선신궁> 자리에 동상을 세우고

전국의 학생들이 참배하도록 했었단다.

<남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의 이름도 <우남정>이었다.

<박정희대통령>시절엔 <조선신궁> 자리에 <식물원>을 만들었죠.

고등학교 다닐때 나도 와 본적이 있다.

조금 내려 가면....

<백범광장>을 만나고

"백범 김구선생"의 동상과

"이시영 선생 동상"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이신데 구한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오르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신 분이죠.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남산공원"을 뒤로 하고...

 

<남대문시장>을 들려 호떡 좀 사먹고 귀가했다.

 

 

 

 

 

 

 

 

 

 

 

 

 

728x90
728x90

군부독재정권의 국가폭력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

그 아픔의 기억

민주화운동기념관

<남영동 대공분실 위치도>

<경부선>이 지나는 <지하철1호선 남영역>에 붙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행정구역상 실제는 <용산구 갈원동>이다.

그런데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남영역>에 붙어 있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칭한 것으로 보인다.

 

2026년 10월 6일 (화)

<남영동 대공분실>로 가려면 <지하철1호선 남영역 1번 출입구>로 나가는게 가장 가깝고

또는 <지하철4호선 숙대입구역 7번 출입구>에서 약450m 정도 걸으면 된다.

나는 <숙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남영삼거리>를 경유해 접근한다.

 

앞에 보이는 철교에 있는 역은 <지하철1호선 남영역1번출입구>가 있는 곳이다.

<남영역>에서 엄청 가깝다는 것을 알수 있다.

좌측 골목으로 방향을 바꾸면...

 

<롯데캐슬헤리티지아파트>가 가까이 보이는데 저 아파트 바로 뒤에 <대공분실>이 있다.

이 골목에 있는

<롯데캐슬헤리티지아파트>는 <롯데그룹>의 최초 탄생지로 <신격호회장>이 <롯데제과>를

설립한 곳이란다.

추억의 껌 "롯데 후레시민트껌" "롯데 스피아민트껌"...을 기억하시나요?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 주고 싶어요~ ♬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가수 윤형주>가 작곡해서 더욱 유명한 그 CM송이 기억 납니다.

껌, 과자 장사로 떼돈을 벌어 재벌이 된 "롯데그룹"인데 요즘 좀 시원찮다죠? ㅎ

 

<롯데제과 구 사옥 터>를 지나면....

"남영동 대공분실"의 정문

지금은 리모델링을 하여 산뜻한 정문이지만 옛날엔 무시무시한 철문인 '죽음의 문'이었단다.

이곳을 관람하기 위해선 좌측으로 조금 더 올라가 "민주화운동기념관" 정문으로 가야한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먼저 관람하고 잠시후 <대공분실>을 해설사와 함께 관람 할 예정이다.

좌측으로 50m 정도 가면...

 

"민주화운동기념관" 정문

<남영동 대공분실>은 두곳으로 분리되 있는데 민주화운동 기념관을 "M1"이라 하고,

대공분실 건물을 "M2"라고 한다.

"M1"은 언제나 관람 할수 있고, "M2"는 예약하여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관람 할수 있다.

모두 무료다.

예약 방법은 다음 클릭하여 들어 가 예약하면 된다.

https://www.kdemo.or.kr/exhibit/visitReservation.do

 

 

[안내데스크]

예약한 시간 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안내데스크에 <2시 예약>이라고 하니

목에 거는 패용증을 준다.

그리고 먼저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자유롭게 관람하고 <2시>까지 돌아 오라고 한다.

 

[1층 민주화의 어제와 오늘]

1층에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자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연대순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데,

4·19 혁명, 유신 반대 시위,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주요 사건들을 다룬다.

시국선언문, 체포영장, 시위현장 사진, 당시 참여자 육성 기록, 인터뷰 영상도 소개한다.

 

[지하1층으로 내려 가는 통로]

"기억의 통로"라고 한다.

[지하1층 입구]

"한국민주화"를 위해 시간순으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민주화운동 전시실"

지하1층과 지하2층은 가운데가 터여 있어 어두운 그림자가 싹 걷히는 듯하다.

이곳에선 특별공연도 정기적으로 한단다.

정치 경제 노동 등등 ...민주화운동의 역사기록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여러 자료를 읽으며 쉴수 있는 공간도 있다.

'민주화운동기념관" 지하층에서  지상으로 올라 가면...

 

"테니스코트와 민주화운동기념관"이 펼쳐지는데

이 테니스코트가 역사적 아이로니를 말해 주는 곳이라고...

왜냐하면 옛 남영동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피곤해진 경찰들이 체력회복을 위해서라는데

잠시후 <대공분실>에 올라 가 다시 언급한다.

테니스코트 우측으로 올라 가면....

"치유의 길"이라는 통로가 있는데

<남영역>이 바로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치유의 길"에서 내려자 본 테니스코트와 정문, 안내데스크 방향이다.

여기서 "M1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자유 관람하고 안내데스크로 돌아 간다.

 

 

지금부터 해설사와 함께 "M2 남영동대공분실"을 관람한다.

[남영동 대공분실]

<박정희정권>의 <유신시대> 내무부 장관이던 <김치열>이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인 <김수근>에 의뢰해 설계하고 건축한 건물이란다.

이런 <대공분실>은 전국에 44개소가 있었다는데 대표적인 곳이 이곳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대공분실>은 이곳 외에

<홍제동 대공분실 (현 경찰청 세검정로 별관)>, <옥인동 대공분실 (현 서울경찰청 자하문로 별관)>

<장안동 대공분실 (현 서울경찰청 풍속범죄수사팀)>이 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더 악날한 곳은 <국정원 대공분실>, <방첩사 대공수사대>도 있다.

<국정원>이 만들어 낸 간첩조작사건 중에 대표적인 게 박통시절 <동백림간첩사건>이죠.

 

[옛 남영동대공분실]

<남영동대공분실>은 <부속동><AMD동><분실동>등 세개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단다.

좌측 <부속동>은 보일러시설, 전기시설, 직원식당으로 사용되었고

가운데 2층 건물은 <AMD동>으로 '통신암호 분석'을 주 업무로 하며 사진실등이 있었단다.

우측 7층짜리 건물이 <분실동>으로 간첩 시국사범등을 심문하는 조사실이 있었던 곳이란다.

 

**<분실동> 뒤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 <롯데제과 최초 사옥>이었단다.

 

{남영동 대공분실]

특히 5층의 창문을 주의 깊게 봐야한다.

왜냐하면 저곳이 조사실로 각종 고문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피의자들의 탈출이나

투신을 막기 위해 창문의 폭이 30cm로 만들어 졌단다.

보기만 해도 기이하고 무시무시하죠?

<김근태> <박종철>등 시국사범들을 비롯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반국가세력으로 조작된 곳이란다.

 

해설사와 함께 "M2 대공분실"을 관람한다.

관람의 시작은 옛 정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지금은 맑끔하게 단장된 어느 회사의 정문 같지만

옛날엔 어마무시한 육중한 철문으로 닫혀있었는데....

실제 이곳은 "부국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고 운영했단다.

 

정문으로 들어 가 우측을 보면...

[옛 정문 철문]

이 철문이 정문을 막고 있었는데, 피의자들이 잡혀오면 이 철문이 열릴때

탱크 지나 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고 한다.

눈이 가려지고 묶여져 잡혀온 피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것은 

"어딘지는 알수 없었지만 탱크 지나 가는 소리가 났다"라고 증언한다.

바로 이 철문이 열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안내판의 버튼을 누르면 그 때의 그 탱크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나도록

"철문소리" 써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잡혀온 피해자들은 건물 현관으로 들어 가지 않고 건물 뒤로 끌려 가는데...

건물 뒤에는 피해자들이 조사실로 올라 가는 별도의 출입구가 있다.

묘하게 설계되었다.

 

건물 뒤 출입구 위 건물의 뒷모습인데 30cm 넓이의 창문이 어쩐지 무시무시하다.

 

뒷문 출입구로 들어 가면 5층 조사실로 올라 가는 엘리베이트와 철계단이 있는데

피의자들은 모두 이 철계단으로 걸어 올라 갔었단다.

뱅글뱅글 돌아 올라 가기에 방향성을 잃게하고, 몇층으로 가는 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란다.

오늘 해설사와 함께하기 위해 온 관람객은 2명 뿐이었지만

해설사는 친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2층부터 관람 하였지만, 2층은 모니터링실,통신실, 휴게실등과 직원 사무실로

사용되어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곳이어서 포스팅을 생략하고

3층으로 올라 간다.

 

<자료전시실>

3층은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위계가 가장 높은 대공분실 책임자의 업무공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료 전시실로 탈바꿈 했단다.

수많은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자료가 디지털화 해 있는데

특히 '어부'들이 간첩으로 많이 조작되었단다.

어로활동을 하다가 일시적으로 북쪽 지역을 침범 할수도 있었던 것을

그걸 꼬투리로 고문하여 간첩으로 조작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로 할용하며 정치적으로 국민을

겁주며 정권연장 수단으로 사용 했던 것이란다.

또한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는 애국시민들을 용공분자로 조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3층 특수조사실"

"칠성판"이 있는 조사실로 사회적으로 직위가 높은 중요인사들을 조사하던 조사실이란다.

<칠성판>은 '시체를 안치하는 관의 바닦판'인데

이 <칠성판>에 묶어 고문을 가하며 진술을 조작했단다.

그리고 벽엔 특수유리와 카메라가 부착되 있어 외부에서 조사 현장을 고위 간부가 직관했단다

영화에서 많이 봤죠? 영화 장면이 진짜 현실이었던 것을 확인한다.

<칠성판>에 묶어 놓고 이런 몽둥이와 야구배트로 두둘겨 패며 물을 뿌리고 전기고문을 했단다.

천인공노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만 기억한다.

이런 고문을 하도록 지시하고 부축인 고위급...중정부장, 내무장관, 대통령까지 간다고 봐야죠?

<특수조사실> 옆에는 제법 너른 욕실과 화장실이 별도로 붙어 있어 

고문으로 기진맥진한 피해자들을 정신차리게 하고 다시 고문을 했다고...

 

3층에는 <대공분실 반장실>이 있는데 고문하다 지친 반장과 요원들이 들어와 쉬며

창밖에 펼쳐지는 테니스코트장을 바라보며 체력을 회복하는 곳이라니 치가 떨린다

또한 <분실동>과 옆 건물인 <AMD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반장실>에서 바라 보는 테니스코트.

지금은 사방에 마천루들이 솟아 있지만 옛날엔 낮은 건물과 우측 <경부선 철도>가 펼쳐지고

<지하철1호선 남영역>이 이 아지트를 단순한 건물로 숨겨주고 있었단다.

 

4층에는 현재 민주인사들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데

벽에 귀를 대면 당시 고문 받는 소리가 들린디.

4층엔 별도로 "박종철 기념관"이 설치되 있다.

당시 같이 데모를 하던 주동자 선배의 행방을 대라고 고문을 했지만

"나는 모른다"고 했다는이유로 욕조에 머리를 집어 넣어며 물고문을 하던 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죽은 <서울대생 박종철>군....

[박종철군 사망 진단서]

당시 <중앙대 법의학 교수>였던 "오연상 의사"가 쓴 <사망진단서>인데

<사망진단서>를 지우고 <시체검안서>라고 표기하였다.

왜일까?

<대공분실>에서 고문 하던 중 <박종철>은 이미 죽었는데,

요원들이 <대공분실>이 아니라 병원에서 죽은 것으로 꾸미기 위해 당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의

응급실로 화급히 이송했는데 <오연상 의사>가 이미 죽은 시체를 응급실에서 받을수 없다고 하며

<시체검안서>로 고쳐 발급했고, 또한 이런 사실을 민주화단체들에게 알렸다.

죽게 된 원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세상은 뒤집어 지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죠.

이 나쁜놈들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죠?

 

*참고로 <오연상의사>는 '동작구 흑석동'에서 "오연상내과"를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 69세

 

"이부영의 옥중서신"

<박종철 사건>이 터지자 당시 시국사범으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씨가

<박종철 사건>으로 잡혀 들어 온 경찰관들로 부터 자신들은 진범이 아니라는 호소를 듣고

사건이 은폐조작 되었다는 사실을 편지로 내보냈고

이를 기초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신부>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조작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하게 되었다.

독재정권이 총칼이나 고문으로 국민을 아무리 억눌러도 민주화의 열망은 총칼을 뛰어 넘는다.

 

"5층 조사실"

지금은 형광등이 켜져 밝지만

예전엔 저 끝에 있는 창문에서만 햇빛이 들어 오는 어두침침한 곳이었단다.

먼저 저 끝에 있는 창문으로 가 보면...

<남영역>이 바로 아래에 붙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잡혀왔던 피해자들은 조사실에서 "기차소리"를 들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어딘지 모르지만 "기차소리"는 들렸다고 하는 말에서 무한한 공포와 아픔을 느낀다.

 

[조사실]

조사실은 방마다 색깔이 달랐단다.

안내문을 참고하고...

 

[마이크 방]

조사실 천장에는 "ITV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되 있다.

또한 방문에는 안에서 밖을 볼수는 없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수 있는 구멍이 있다.

 

"김근태 선생 조사실"

<515호실>은 다른 조사실보다 넓이가 두배 이상되는 너른 방이다.

이방에서 전기고문등 악날한 고문이 진행되었기에 방이 너른 것이라고...

<김근태선생>은 이 방에서 당한 끔찍한 고문을 세상에 폭로했고,

나중에 국회의원도 되죠.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종철 조사실"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군"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위에 참여 했다는 이유로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끌려와 "주동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라고 다그치며

고문을 했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말 한게 전부인 "박종철군"인데....

진짜로 몰라서 모른다고 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고문에 "알면 불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이죠?

 

<남영동 대공분실>을 나서며 착잡한 마음을 가눌길 없었다.

설립 목적이야 남파공작원과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취조하여 가려내는 것이지만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상 보장된 먹고 살기 위한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을 하거나, 정권 입장에서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던 악명 높은 장소로,

검거된 사람들은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차단된 밀실에서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는 좋아졌지만 아직도 그런 잔재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남영동 대공분실 4-5층 설계도면]

[건축가 김수근]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는 유명한 "김수근씨"다.

우리나라 제1세대 건축가다.

경기고를 거쳐 1950년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그해 바로 <6,25전쟁>이 터지며

통역병으로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게 되는데, 휴가를 얻어 부산에 갔다가 누나의 도움으로

탈영하고, 밀항하여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본에서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을 다니며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건축설계" 공모에 당선되며 귀국했다.

탈영병이 어찌하여 무사 귀국하게 됬는지 오리무중이지만

당시 우리나라엔 '건축학개론서' 한권도 없던 시절이라 <김수근>은 건축계의 샛별이어서

귀국 후 바로 젊은 나이에 <홍익대><건국대><국민대>등의 교수로 재직하며 

<5.16군사정권>의 개발계획의 설계에 앞장선다.

<여의도개발계획 설계> 그래서 <여의도>에 <5.16광장>이 설계되고 실제 만들어 졌었다.

특히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깊은 관계를 맺어 4대의혹사건 중에 하나인 <워커힐>을 설계하고

<경부고속도로 기본계획><김포공항 종합개발계획><종로3가 개발계획-세운상가>

<장충동>에 있는 <타워호텔과 자유총연맹>을 설계하고, 

<잠실 88올림픽스타디움>까지 수많은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선구자라고 아니 말할수 없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6.25 전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탈영하여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피하고

귀국 후에는 군사독재정권과 밀착하여 군사독재정권의 이념과 사상을 구현하는데 앞장섰다.

더더욱 위에서 본 <남영동 대공분실>을 철저한 고문 취조실로 세밀하게 설계하여 의도적이던

비의도적이던 그는 인권유린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치안본부 본관><중앙정보부 본관>등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래서

"천재가 악마를 만들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평한다.

우리나라 제1세대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를 간직한 <남영동대공분실>을 설계한 <김수근>인데

천재는 단명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아쉽게도 그는 55세에 저 세상으로 갔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조심스럽다

- 파란문 -

 

 

 

 

 

728x90
728x90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사유의 방> 입구로 들어 서면 먼저 어두침침한 조명과 함께 장엄한 분위기를 느낀다.

먼저 "사유 思惟"의 의미부터 알아 보자

"생각 할 사思, 생각 할 유惟"로 '생각 하고, 또 생각한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선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짐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유의 방" 

무지 큰 "국중박"의 전시실의 2층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중박"의 대표 전시실이란다.

어쩐지 세상만사와 자신을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듯 엄숙해진다.

 

더널븐 전시실에 두기의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사용치 않는 말이라 불교의 불상 이름 중 하나라고 생가하기 쉬운데

불교는 맞지만 그런 불상 이름에서 나온 명칭은 전혀 아니다.

"사유 思惟"의 의미는 위에서 언급했고,

그 보다 먼저 "반가 半跏"의 의미를 알아야 이 유물의 명칭을 쉽게 이해 할수 있겠다.

"반 半"에 "책상다리 가跏"인데 "가跏"를 파자해 보면 "跏 = 다리 足 + 더할 가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像"을 의미하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다리를 반쯤 꼬고 책상다리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像"이라는 의미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의미인데 "반가사유상"은 "다리를 반쯤 꼬고 앉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국보 제78호"

요즘은 <국보 제 몇호>라고 국보의 호수를 적시 않는다. 국보는 모두 국보이기 때문이란다.

필자가 특별히 <국보 제78호>라고 표기 한것은 '구 표기 제78호 국보'이기도 하지만

비숫하게 생긴 <반가사유상> 두점이 함께 있어 구별하기 위해 표기 했다.

아래에 있는 <구 표기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엔 믾은 <반가사유상>들이 남아 있지만

<78호>와 <83호>가 '금동 金銅'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예술성이 특별해서란다.

 

 

아래 사진의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이 <국보 제78호>보다 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이 더욱 극찬한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석가여래의 미소인가~ 모나리자의 미소인가~"

세상만사를 초월한 천상의 미소인가~

 

삼국시대 쯤에 제작된 사유상이라는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신라'인지 '백제'인지

또 어디에 있던 것인지도 아직 확실히 모른단다.

학자들의 설에 따르면 <78호>는 신라, <83호>는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국보제1호>가 뭔지 아시나요?

놀랍게도 다음 사진의 <반가사유상>이다.

"일본 국보 제1호 목제미륵반가사유상"

윗 사진의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보시라 ~

<일본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광륭사>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 반가사유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재질이 "金銅"인데, 일본은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에 조각하는 것보다 "金銅"으로 주조하는 것이 몇백배 더 어렵다. 그 옛날엔 더욱 더...

일본 사유상도 우리나라 <백제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백제와 관계가 아주 밀접해서 유명한 "칠지도"등이

우리나라에서 전래 된 것으로 보아, 이 <반가사유상>도 우리나라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무지 많단다. 일본 학자들까지도...

그런게 "일본 국보 제1호"라니...놀랍죠?

 

1912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입해서

당시 우리나라 총독이던 <데라우치>에게 상납했는데,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박물관(현 국중박)>에 기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간다면 <국중박>의 시그니쳐인 "반가사유상"은 꼭 관람해야 하겠다.

 

728x90
728x90

용산미군기지의 변모

국립중앙박물관-용산가족공원-미군장교숙소

2026년 9월 15일 (화)

 

1. 용산 미군장교 숙소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에서 바라보는 묭산미군장교숙소5단지]

오늘 탐방은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에서 출발하여 <미군장교숙소5단지>를 둘러 보고

이어서 <용산가족공원>을 통과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간다.

 

[용산미군장교숙소5단지 정문]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접근이 불가능했던 치외법권지역인 미군기지였는데 

평택에 어마무시한 세계최대 미군기지를 지어주고 반환받은 곳이다.

그래도 막상 들어 가려니 무서워 정문 경비한테 들어 가도 되느냐고 물어 보니

다행이 친절하게 들어 가서 마음껏 관람하라고 한다.

입장료 없고 누구나 들어 갈수 있다.

 

정문을 통과하면 먼저 <안내라운지>로 들어 간다.

<안내라운지>에는 <장교숙소5단지>에 대한 안내도와 간단한 안내가 있다.

 

[용산미군기지 전체 안내도 속 "장교숙소" 위치]

용산미군기지 내에서 <장교숙소5단지>의 위치를 알려 준다.

전체 미군기지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경의중안선 서빙고역 1번출입구> 앞이다.

 

[장교숙소 안내도]

<미군장교숙소5단지>를 관람 하려면 먼저 이 안내도를 숙지하고 들어 가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있으니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안내를 해주는 안내원이나 안내표지판이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주차장]

<안내라운지>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 가면 제일먼저 주차장을 만난다.

그런데 이 주차장은 오로지 장애인 만을 위한 주차장이어서 일반인 차량은 주차 할수 없다.

관람을 위해선 오로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한다.

 

[야외갤러리]

장애인 주차장을 지나면 옛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야외갤러리가 있다.

옛 사진들을 잠시 감상하며 옛날을 회고하고 간다.

 

[옛 용산역]

<용산역>과 <미군기지>는 서로 붙어 있었단다.

<미군기지> 이전엔 <일본군기지>였기에 <용산역>은 쪽바리 냄새가 물씬물씬 풍긴다.

 

<당인리발전소> 아시나요? 지금은 <서울LNG화력발전소>라고 하지만...

<당나라> 시대부터 중국놈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라 <당인리 唐人里>가 되었다는데

이 일대 지역은 옛부터 외국놈들의 거주지였단다.

구한말 쪽바리들의 대륙 침공 전초기지화 되었던 <용산>

그래서 <청일전쟁><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전초기지가 <용산기지>였던 것이다.

세계2차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자 <일본용산기지>는 <미군기지>로 탈바꿈하고...

 

숙박시설과 부속시설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타운을 이루고 있다.

사람은 단 한명도 살지 않고...

 

자료실과 영상 안내실이 있어 들어 가 봤다.

 

폐허가 된 시설이 뭔 <기념물>인지 별도로 남겨져 있고...

뒤에는 <파크골프장>이 있다.

 

카페도 운영하는데 손님은 거의 없었다.

 

어린이들의 단체 관람이 많았는데 놀이터가 있어서인듯....

<장교숙소>를 나와 서쪽으로 몇백m 진행하면....

 

 

2. 용산가족공원

"용산가족공원" 입구를 만난다.

안내도를 클릭하여 크게 확대해서 보고 들어 간다.

 

"용산가족공원" 입구로 들어 가면 먼저 주차장이 있고 뒤로 공원이 시작된다.

연못이 먼저 반기고...

 

[장미정원]

철 지난 "장미정원"으로 들어 가면....

 

조각품이 하나 반기고...

 

아직도 장미는 끈질긴 생명력을 뽐내고...

 

<용산가족공원>은 미군 골프장이었다.

군기지 안에 골프장이 있을 정도이니 <미군사령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수 있다.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

 

어린이들의 소풍지

어린이 놀이터에서 서쪽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가는 길이 안내된다.

조금 올라 가면...

 

[미르폭포]

"용산 龍山"이 "용"으로부터 지명이 유래된다고 "龍"의 순우리말인 "미르"를 사용하여

"미르폭포"라는 조그만 폭포를 만들어 놨다.

 

<미르폭포>를 지나면 탑들이 즐비한 곳을 만나는데

"국립한글박물관" 앞마당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언젠가 불이 났나 보다.

그래서 2028년 하반기까지 시설복구와 증축을 위해 공사한다고 휴관하고 있었다.

 

 

 

3.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

<국립한글박물관>을 지나면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있는 호수같은 연못을 만나는데

거울같다고 이름하여 "거울 못"이란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 전시실]

몇번 관람한적있기에 오늘은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는 "추사 김정희 특별전"과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사유의 방"을 중점적으로 관람하고 가련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듯한 "국중박" 전시실 앞

 

 

"국중박" 입장료는 무료이다.

주말엔 관람객이 너무 많아 입장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왜냐하면 소지품 검사를 하기 때문인데

"가방"을 가져 가면 검사를 해야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오래 줄을 서야 한단다

앞으로 가실 분들은 "가방"은 집에 두고 가시면 간단하게 입장 할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휴대폰, 카메라는 소지해도 관계없이 무사 통과 할수 있다.

 

1층엔 고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역사유물들이 전시되 있다.

나는 몇번 관람 하고 포스팅 한바 있어 오늘은 포스팅을 생략하고 ...

 

해섷사들이 해설도 해 주니 시간 맞춰 해설을 듣는 것도 유익하다.

 

내용과 의미를 모르고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은 노동이라 할 정도로 사실 피곤하다.

그런 와중에 박물관 정중앙에 쉬어 갈수 있는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소위 "뮷즈"라고 하는 "박물관 기념품"을 판매하는데 입장료 없는 "국중박"의 경비로 쓴단다.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박물관 1층에서 압도적 위상을 차지하는 석탑이 바로 대리석으로 만든 이 탑이다.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건립된 대리석탑으로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터'에 있었단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미쓰아키[田中光顯]'가 해체하여 불법반출했으나

1918년 반환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었단다. 1960년 복원 후 경복궁에 세워졌다가

1995년 해체되어 정밀 보존 처리 작업을 진행했으며,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실내 전시 되었단다.

 

이 탑은 고려가 <원나라> 지배하에 있었을 때 <원 황제>와 <고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게 좀 그렇다...

 

2층에 올라가 내려다 본 <경천사십층탑>이다.

대리석에 조각한 섬세한 문양은 과히 천하명품임을 확인 시켜준다.

 

 

4, 추사 김정희 특별전

오늘 국중박 방문 주목적은 바로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라는 특별전이다.

 

<추사 김정희>와 주고 받은 글들이 전시되 있다.

내용을 모르면 이런 특별전은 오리무중을 걷는 것과 같다.

 

[추사가 제자 유치전에게 쓴 글]

큰 글씨

(우) 無雙彩筆珊瑚架. 무쌍채필산호가. (둘도 없는 붓이 걸린 산호 필가)

(좌) 第一名花翡翠甁. 제일명화비취병. (제일가는 꽃이 피는 비취 화병)

​

말년의 김정희는 불교에 깊게 귀의해 봉은사(奉恩寺)에 머물렀고, 이곳에서 걸작을 많이 남겼다.

이 행서 대련은 북청 유배 시절의 제자 요선(堯仙) 유치전(兪致佺)을 위해 어느 절에서 쓴 것이다.

붓과 산호 붓걸이, 꽃과 비취색 꽃병과 같은 귀한 기물 관련 문구를 행서로 썼다.

말년 아픈 상황이었음에도 글씨가 힘차고 자유롭다.

필획의 굵기 차이가 크고 조화로운 말년 추사체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

생애 마지막을 자유롭고 화려하게 수놓은 걸작이다.

​

작은 글씨

외진 절에서 바라보는 산 풍경이 매우 기이하여 마치

미우인(米友仁)의 <청효도,淸曉圖>를 보는 듯하다.

정신은 왕성해지고 기운이 상쾌하게 트여 마치 신령한 도움을 받고 있는 기분이다.

이러한 기운이 붓을 쥔 손목의 놀림에 발현되니 요선(堯仙)을 위해 글씨를 쓴다.

 

<추사가 청나라 화가 주학련에게 써준 글씨>

 

"古木曾嶸雅去後(고목증영아거후) 

가파르게 우뚝 솟은 고목위 까마귀 날자

夕陽迢遞客來初(석양초체객래초) 

아득한 석양빛 안고 비로소 손님이 찾아오네"

 

두 점의 글만 감상해도 본전 뽑을 <추사 김정희 특별전>이라 생각된다.

 

 

 

 

5. 사유의 방

<사유의 방> 입구로 들어 서면 먼저 어두침침한 조명과 함께 장엄한 분위기를 느낀다.

먼저 "사유 思惟"의 의미부터 알아 보자

"생각 할 사思, 생각 할 유惟"로 '생각 하고, 또 생각한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선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짐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유의 방" 

무지 큰 "국중박"의 전시실의 2층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중박"의 대표 전시실이란다.

어쩐지 세상만사와 자신을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듯 엄숙해진다.

 

더널븐 전시실에 두기의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사용치 않는 말이라 불교의 불상 이름 중 하나라고 생가하기 쉬운데

불교는 맞지만 그런 불상 이름에서 나온 명칭은 전혀 아니다.

"사유 思惟"의 의미는 위에서 언급했고,

그 보다 먼저 "반가 半跏"의 의미를 알아야 이 유물의 명칭을 쉽게 이해 할수 있겠다.

"반 半"에 "책상다리 가跏"인데 "가跏"를 파자해 보면 "跏 = 다리 足 + 더할 가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像"을 의미하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다리를 반쯤 꼬고 책상다리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像"이라는 의미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의미인데 "반가사유상"은 "다리를 반쯤 꼬고 앉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국보 제78호"

요즘은 <국보 제 몇호>라고 국보의 호수를 적시 않는다. 국보는 모두 국보이기 때문이란다.

필자가 특별히 <국보 제78호>라고 표기 한것은 '구 표기 제78호 국보'이기도 하지만

비숫하게 생긴 <반가사유상> 두점이 함께 있어 구별하기 위해 표기 했다.

아래에 있는 <구 표기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엔 믾은 <반가사유상>들이 남아 있지만

<78호>와 <83호>가 '금동 金銅'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예술성이 특별해서란다.

 

 

아래 사진의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이 <국보 제78호>보다 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이 더욱 극찬한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석가여래의 미소인가~ 모나리자의 미소인가~"

세상만사를 초월한 천상의 미소인가~

 

삼국시대 쯤에 제작된 사유상이라는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신라'인지 '백제'인지

또 어디에 있던 것인지도 아직 확실히 모른단다.

학자들의 설에 따르면 <78호>는 신라, <83호>는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국보제1호>가 뭔지 아시나요?

놀랍게도 다음 사진의 <반가사유상>이다.

"일본 국보 제1호 목제미륵반가사유상"

윗 사진의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보시라 ~

<일본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광륭사>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 반가사유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재질이 "金銅"인데, 일본은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에 조각하는 것보다 "金銅"으로 주조하는 것이 몇백배 더 어렵다. 그 옛날엔 더욱 더...

일본 사유상도 우리나라 <백제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백제와 관계가 아주 밀접해서 유명한 "칠지도"등이

우리나라에서 전래 된 것으로 보아, 이 <반가사유상>도 우리나라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무지 많단다. 일본 학자들까지도...

그런게 "일본 국보 제1호"라니...놀랍죠?

 

1912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입해서

당시 우리나라 총독이던 <데라우치>에게 상납했는데,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박물관(현 국중박)>에 기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간다면 <국중박>의 시그니쳐인 "반가사유상"은 꼭 관람해야 하겠다.

 

2층에 있는 <반가사유상>을 관람하고 나가 내려 가면....

"국중박 상품관"

엄청난 매출을 올린다는 "국중박 굿츠샾"이다.

에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헌터스" 영향도 크게 받아 굿츠샾은 인산인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어린이박물관> 앞에 있는 후드코트에서 돈까스 하나 먹고...

가격은 12,500원...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00원 하더니 그새 올랐다.

 

전시실을 나와 윗층 테라스로 꼭 올라 가 보아야 한다.

통로에 있는 전광판 앞에 서면 자기의 모습이 자동 인식되어 합성된 화면에 나타난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 가면...

 

테라스에 올라 가면 <옛 미군기지>와 <남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용산미군기지와 남산"  사진을 클릭하면 큰 롸면으로 볼수 있다.

좌측에 <윤석렬 정권의 대통령실(현 국방부)>가 조망되며 미군기지와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훤히 보인다.

요즘 이곳에 공공임대주택을 짓느니 마느니 말이 많죠?

여기 몇만가구 짓는다 해도 또 '롯또' 당첨같은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 가는건 아닌지...

그래도 청년들의 주거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니 짓긴 지어야 할텐데....

 

<단원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선셍이 그린

"옥후북조도 屋後北眺圖" <강세황>의 집에서 뒤 북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라는데

이곳 "국중박"터가 <강세황의 집터>라는 것을 알수 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수 있음)

 

"반가사유상"과 "추사 김정희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찾은 "국중박"을 나서서

 

"국중박" 정문에 붙어있는 <경의중앙선 이촌역 4번출입구>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조심스럽다

- 파란문 -

728x90
728x90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조선 제11대왕 중의 후궁

창빈 안씨의 묘

 

2026년 8월 23일 (월)

[국립서울현충원 안내도]

오늘 답사 하고자 하는 "창빈 안씨 묘"는 "ㅁ"으로 표기한 곳에 있다.

 

현충원 정문 안으로 들어 가면 먼저 분수대가 반기고

"국립서울현충원"의 전체 지형을 느낄수 있는데,

<서달산>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현충원"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또한 <한강>을 굽어 보며...

그래서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천하명당"이라는 소문이 돌던 곳이다.

 

분수대를 지나면 넓은 잔디광장이 나타나며 정중앙에 "현충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 뒤에 보이는 산이 "서달산"으로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칭해지는

유명한 "달마사"가 있다.

 

"현충문"

현충일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이 문으로 참배하러 들어 가는 문인데

TV에 중계되기 시작하는 곳이다.

 

"현충탑"

조국을 위해 목숨바친 영령들을 배향하는 곳이다.

충혼탑에는 '노산 이은상'선생이 지은 글을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현충시'가 있다.

 

현충원에는 전사자들만 안장된 것은 아니고,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의로운 일을 한 일반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안장되 있는데,

하물며 친일파들까지 안장되 있어 가끔 문제시 된다.

 

"무명용사의 탑"

<현충문> 동쪽엔 "무명용사의 탑"이 있는데, 지금부터 오늘의 테마인 "창빈 안씨묘"를 찾아간다.

"무명용사의 탑" 좌측으로 가면....

<현충원 순환로>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몇백미터 올라 가면....

 

"수충교 앞 오거리"를 만난다.

좌측 <수충교>를 건너 우측으로 들어 가면 되는데

이곳은 다음 지도의 <현위치> 표기 지점이니 참고하고...

<현위치>라고 표기한 곳이 <수충교> 앞이다.

이제 길찾기는 너무 쉽다

"창빈 안씨 묘" 좌우에 <이승만-김대중 전대통령 묘>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죠?

좀 놀랍죠? 어찌 된거야?

대통령들의 묘와 후궁의 묘가 함께 있어?

 

<이승만전대통령 묘>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서

"이승만 전대통령 묘"를 잠시 둘러 보고 나와 조금 내려 가면...

 

"창빈 안씨 묘" 입구를 만나는데,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고

숲으로 들어 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안내판만 있어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렵다.

 

"창빈 안씨 묘" 입구

<국립서울현충원>은 1956년에 설립됬지만 

"창빈 안씨 묘"는 400여년 전인 1551년 <명종 5년> 때부터 있었으니

<현충원>은 "창빈 안씨 묘"로 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공동묘지>가 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 묘지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임꺽정"이라는 도둑놈이 의적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인기 만점이었을 때이다

얼마나 오래된 묘역인지 알수 있죠?

 

또한 서양에선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 여왕>시절에 <무적함대>의 <스페인>을 치던 시절이다.

 

입구에는 "창빈 안씨"에 대한 간략한 안내문이 설치되 있다

안내문의 핵심 내용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라는 것이다.

20m쯤 올라 가면....

 

"창빈 안씨 신도비 昌嬪安氏 神道碑"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도 "후궁"인 "창빈 안씨"에게 神道碑를 세워 준 것이 궁금하지 않나요?

<제11대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는 <중중>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후궁 중에서도 낮은 계급 '13세에 상궁→22세에 숙원→36세 숙용→42세 소용"까지 올랐단다.

9살에 궁녀로 궁에 들어 가 13년이 지나 <중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 "영양군"을 낳고

22살에 "숙원"이 되며, 32세에 "덕흥군"을 낳고, 36살에 "숙용"에 오르고

42세에 정3품인 "소용"까지 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왕비에 준하는 정1품 "빈 嬪"에는 오르지 못했단다.

그녀가 "빈 嬪"에 오른 것은, 그녀가 죽고 10여년 후에야 손자인 <13대 선조>에 의해

"창빈 昌嬪"으로 추존 된 것이다.

그녀의 아들 "덕흥군"이 낳은 셋째 아들 "하성군"이 <제13대 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의 정통 혈통이 아닌 서자의 아들이 왕이 된 첫 사례였다.

그 이후 모든 조선의 왕들, 즉 <13대 선조~27대 순종>까지 360여년 동안

이 여인의 핏줄을 이어 받았기에 이 여인이 그 왕들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여인이 없었다면 <12대 명종> 이후 "조선이씨왕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여인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여인인지 놀라울 정도...

 

그리고 이 "신도비"는 그녀가 죽은 후 130여년 후 <제19대 숙종>이 건립한 것이란다.

이 신도비에는 그녀의 성품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고운 덕을 닦아 모든 덕을 갖추었으며 임금을 모시어 사랑 받았고

음전한 몸가짐으로 경사를 열었다.

어진 임금이 이어 나와 복을 내리니 선을 쌓은 끝에 경사가 온다는 이치가 분명하도다"

 

 

"창빈 안씨 묘 昌嬪安氏墓"

1499년 당시 연산군이 폐악질을 하던 시대에

지금의 '시흥 금천' 근처의 어느 작은 고을에서 아버지 "안탄대"의 딸로 태어났단다.

"안탄대"는 정7품의 미관말직의 무신이었는데, <중종반정> 때 참여해서 공로가 인정되

원종공신에 책록되지만 여전히 미미한 존재였단다.

그런 와중에  소녀는 8살에 궁녀 선발에 합격해 궁으로 들어 갔는데,

<성종>의 왕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대비" 밑으로 들어 가게 된 것이 운명의 시작...

소녀가 너무 이쁘고 착하며 영특해 <정현왕대비>의 마음에 쏘~옥 들었단다.

그래서 <정현왕대비>가 '경서'와 '사기'를 내려 주며 공부를 시켰고,

왕실의 예법도를 직접 가르치며 마치 딸을 키우듯 정성을 다했단다.

그렇게 왕대비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 소녀가 20살의 아릿다운 처녀가 되었을 때

왕대비가 47세인 자신의 아들인 <중종>에게 후궁으로 삼으라고 소개팅을 했단다.

<중종>의 정식 왕비 <장경왕후>가 후에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일찍 죽었기에...

그러자 1515년에 문제의 <문정왕후>가 새로운 왕비로 들어 왔는데도,

왕의 엄마가 아들 왕에게 이런 불륜 소개팅을??  ㅎㅎ

그리하여 1520년 정5품 상궁이 되고 아들이 태어 납니다. 

그 이후 1530년 조선왕조의 운명을 바꿀 아들이 태어 나는데

바로 "덕흥군"이 태어 나는데 <제13대 선조>의 아버지가 되며

우리나라 첫번째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다.

그런데 철의 여인 <문정왕후>가  이 여인을 씹지 않고 잘 받아 주며 우호적이었단다.

성품이 워낙 온화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공손하였기 때문이란다.

 

<제10대 성종>은 <폐비 윤씨>로 부터 <연산군>을 낳고,

이어 <정현왕후>로 부터 <제11대 중종>을 낳았다.

 

<중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는 즉위 일주일만에 폐위당하고

두번째 부인인 <장경왕후>가 <중종반정> 공신들의 후광을 안고 왕비가 되어

<인종>을 낳고 일찍 죽어버리고,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가 새왕비가 된다.

이때 <중종>이 가장 사랑스러워 했다는 "경빈 박씨"가 <중종>의 장남 <복성군>을 낳아

정치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했는데

<장경왕후>가 낳은 후에 <인종>이 되는 적통 아들을 등에 업은 "대윤파 大尹派"와

후에 <명종>이 되는 <문정왕후>의 아들을 등에 업은 "소윤파 小尹派"...

그리고 <중종>의 장남 <복성군>을 등에 업은 <경빈 박씨>..

이들 사이에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권력 다툼의 시대를 우리는

"여인천하 시대"라고 한다.

이런 여인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다툼을 멀리하며 조용히 살았던 여인이 "창빈 안씨"란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그녀의 것이 되었다.

 

<인종> <명종>이 후사 없이 죽어 버리자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14대 선조"이며 이후 탄생되는 <14대~27대>까지 왕들은

모두 "창빈 안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니, 그녀는 그들의 시조가 되는 것이고

"최후의 승자"라고 아니 말할수 없다.

 

1549년 가을 "창빈안씨"는 친정을 방문하기 위해 궁을 나섯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줄이야~

어찌된 일인지 뭔일인지 51세의 나이로 친정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단다

"창빈 안씨"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안장되었는데, 이듬해 <덕흥군>은 풍수가들의 조언을

받아 "천하명당"이라는 이곳으로 묘를 이장했단다.

놀라운 일들은 그 후부터 일어 나기 시작했다.

1567년 <제13대 명종>이 승하한다.

<명종>은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순회세자"가 있었는데 13세에 일찍 죽는다.

이렇게 되어 왕조의 대를 이을 적통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은 난리가 났는데 이때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각별하게 지내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조선왕조 최초로 서자 출신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16세의 <하성군>이 "제14대 선조"가 되는 것이었다.

 

<중종의 가계도>를 보면 "창빈 안씨"의 지위와 위상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수많은 왕들을 배출시키는 그런 "천하명당"이라고 할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선조>가 왕에 등극하자 치욕의 <임진왜란>이 일어 나고

<광해군>은 이복동생 <인조>로부터 반정을 당하여 유배 가고

이어서 <인조>는 더더욱 치욕의 <병자호란>을 당하며 굴욕을 당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수난의 날들을 생각하면 과연 "천하명당"이라고 할수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 묘소]

[김영삼 대통령 묘소]

"창빈 안씨 묘"는 우리나라 근현대의 대통령 네분의 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대통령들 까지 후손으로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우연일까~

 

<국립서울현충원>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꼽힌단다.

주변 산줄기가 "말발굽 모양"으로 묘소를 포근히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한강>이 시원한 청량감을 준단다.

풍수가들은 이곳이 여성 성기와 같은 모양으로 <창빈 안씨>의 묫자리가 "여성의 클리토스"란다

인간 절정의 순간에 찾아 오는 오르가즘이 느껴 진다나 뭐래나...

 

<덕흥군>이 어머니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아들이 <제14대 선조>가 되고

이후 계속 왕들을 배출했으니 그런 측면에선 "천하명당"이 틀림 없겠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풍수지리"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단다.

도성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사대부들이 무지 많이 이곳을 찾아 봤단다.

 

후에 <흥선대원군>도 풍수지리가 <정만인>이 "二代天子之地"라고 추천한 곳으로

자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 연천'에서 '충남 예산'의

<가야산 계곡>으로 이장하며 <제26대 고종><제27대 순종>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후 실제로 두명의 왕을 탄생시켰으니 풍수지리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겸재 정선의 동작진"

<겸재 정선 선생>이 다행이도 1800년대에 현재의 <현충원>이 있는 "동작진"을

진경산수화로 남겨 놨기에 그 옛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수 있다.

 

뒤로는 <관악산>이 王冠을 쓰고 불꽃같은 위엄을 뽐내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는 풍수가들이 주장하는 진짜 명당터란걸 알려 주는 듯 하다.

<한강>에 붙어 있는 좌측 산줄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현재의 <동작대교>가 연결되어 있고

<지하철 4호선>이 저 산 옆구리를 뚫고 지나간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728x90
728x90

종로의 명소

서순라길-서울소리박물관-익선동

 

2026년 8월 12일 (수)

[종묘 입구]

"종묘 宗廟" 답사에 이어 "서순라길"을 진행한다.

"서순라길"은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에서 출발한다.

 

<종묘 외대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좌측 <종묘시민공원>에

<이상재 선생 동상>이 보인다.

"월남 이상제 月南李商在 선생"

<경술국치> 이후 대부분의 국가관리들이 친일파로 변절했지만,

선생은 충절을 지키며 고향 <충남 서천>으로 가 은거 했다.

일제강점기의 강력한 독립운동가로 거듭 나며, 대한제국 시절엔 개화파 정치인으로

미국 공사관 등을 역임하셨다.

 

"서순라길 西巡邏路"

"순라巡邏"는 요즘말로 하면 "순찰巡察"이라 할수 있다.

 조선시대엔 <한양도성>에 "밤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왕궁이나 중요시설을 보호하고 방범을 위해 권역별로 "경비"를 서며 순찰을 했단다.

그렇게 순찰을 도는 군인이나 포졸들을 "순라군巡邏軍"이라 하는데

우리에겐 발음상 "순라꾼"으로 익숙하다

 

"순라"를 도는 여러 곳 중에 "종묘"의 서쪽 권역을 "서순라길"이라 하는데

'순라길'의 흔적이 그런데로 명확히 남아 있는 <종묘 서쪽 외곽 담장길>을 탐방코스로 개발하여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이곳은 <경복궁> 보다 더 실질적 왕궁인 <창덕궁> 앞길이며 <종묘> 옆길이다.

예전 이 지역엔 집창촌이 있었는데 말끔히 정리되고 카페와 음식점들이 줄을 서 있다.

 

"순라군 巡邏軍"  (자료사진)

"술래잡기"의 어원

백성들의 통행을 단속하고, 도둑들을 잡고 시설을 보호하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돌던 "순라"

"순라군"은 환한 등을 밝히며 나무 널판지를 "딱탁" 치며 "내가 순찰 돈다~!"라고 알리며

순찰을 돌았단다.

아니~ 도둑을 잡을려면 도둑들 모르게 몰래 숨어 놈들의 동태를 살펴야 잡을 수 있지요~?

그런데 불을 밝히고 소리를 내며 "나 여기 간다아~!"라고 알리며 돌아 다니면 

잡힐 도둑이 어디 있겠나요?

어린시절에 많이 했던 "술래잡기 놀이"가 "순라군의 순라"에서 나왔다는 것 아시나요.

'술래잡기 놀이'는 술래(순라군)가 눈을 감고 있을 때 놀이친구(도둑)들이 조금씩 움직여 도망가는 거죠?

한마디로 "눈 감고 아웅!"하는 놀이이며 "순라군을 놀리며 풍자하는 놀이"라 여겨진다.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라는 노래 가사도 "순라군의 순라"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수 있다.

"순라꾼의 순라"는 '보여 주기 위한 전시행정'으로 볼수도 있으니

"순라꾼"은 도둑이나 통행금지자들을  어차피 잡을 의도도 없었으니 못잡았을 때

"못 찾겠다~ 에이 꽥!"이라 하며 근무를 마쳤을 것이다. 오로지 추정이다. ㅎㅎ

"꽥"이 "고상하게 "꾀꼬리~"로 발전되어 현대에 이르렀다고 강력 추정한다.

순라꾼의 행위와 견주어 보면

믿거나 말거나 인데 그럴듯 하지 않나요? ㅎㅎ

 

 

"못찾겠다 꾀꼬리"가 나온 결정적 추정은

당시 높은 놈들, 즉 고위 관리나 그들의 아들들이 밤 늦게 술쳐먹고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단속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죠?

지금도 검사 판사까지 술쳐먹고 음주운전하며 사고치는 인간들 많지요

 

당시엔 고위관료나 방귀깨나 뀌는 놈들이 더 많았다는 것은 모두 안다.

하급직인  "순라꾼"이 그들을 단속했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짤리는 결과를 가져 왔으니

위법행위를 하는 그들을 검거 단속하기보다는 "못본척~"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못찾겠다 에이 꽥~꾀꼴~"이였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묘 정문"에서 "창덕궁 돈화문" 앞 공원까지 <종묘 담장>을 따라 "순라길"을 진행하면

<창덕궁-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있는 "율곡터널"을 만난다.

 

쪽바리들이 갈라놓은 길을 터널화 해서 위에 공원으로 만들어 놨다.

계단으로 올라 가면....

복원사업을 했다는 안내판을 참고하고...

조금 들어 가면

허물어진 <종묘담장>의 유구를 전시해 놨고

 

'원남동' 쪽으로 조금 더 내려 가면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종묘>의 "신북문 神北門"을 만난다.

평일엔 개방하지 않고...

 

"창경궁"으로 들어 가는 문인데 여기도 평일엔 개방하지 않는다.

개방일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다시 <돈화문> 앞 <율곡터널> 앞으로 돌아 와서

 

보수 중이라 볼수 없는 "창덕궁의 돈화문" 앞에 선다.

좌측엔 "옛 휘문고" 자리에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 있다

필자는 <익선동>에 살며 <교동국민학교><휘문>을 다녔는데 지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너는 엎어지면 코가 닿는게 아니고 배꼽이 닿는데도 지각을

밥 먹듯이 하냐?"라고 하던 기억이 미소짓게 한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까지만해도 왕족들이 마차를 타고 이 문을 들락거렸다.

<창덕궁>에서 왕족들을 위해 일하던 관리원들도 당연 출퇴근했다.

이런 얘기를 하니 나도 이젠 오래된 사람이군~ ^*^

 

"서울우리소리박물관" -비변사 터-

<돈화문> 건너편 "옛 비변사 터"엔 "서울우리소리박물관"이 있다.

이런 기회에 방문헤 보는것도 좋은 추억이 될것이다.

 

소리박물관 좌측 뒤 현대식건물이 있는 곳엔 예전에 "신혼예식장"이라고 있었고

나의 누님이 저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는데 없어져 아쉽다.

 

"서울토리박물관"은 옛날 우리집 같은 꽤 큰 한옥인데 겉만 그렇고

내부는 모두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해놨다.

 

박물관의 주요 시설은 지하에 설치되 있다.

여느 박물관과 비슷하지만....

여기는 서울-경기지방의 민요를 직접 들을수 있도록 한것이 독특하다.

사진에 보이는<이어폰>을 위로 떼어내 귀에 대고 민요 감상을 한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민요는 "한강 시선뱃노래"다

이 노래는  헤드폰을 양쪽 귀에 쓰고 의자에 앉아 들을 수 있는데

<종묘>와 <서순례길>을 걸은 후 휴식을 취하며 감상하기에 무척 좋았다.

이 노래는 '서해'에서 잡은 "조기"를 싣고 <강화도>에서 <마포>로 가는 과정을 읊은 민요였다.

앞으로 <종묘-서순라길>을 가실 분들에게 강추한다.

 

<돈화문>에서 <종로3가>로 뻗은 길이다.

좌측이 '와룡동-권농동'등이고 우측이 '운니동-익선동'등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도 길가 건물들 뒤 뒷골목에 "피맛골"이 있었다.

그러니까 "피맛골"은 여기서부터 "종로3가, 종각"을 지나 "광화문사거리"

현재의 "교보문고"있는 곳까지 이어 있었다.

 

조금 내려가면 제법 너른 사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들어 가면 "익선동"이 시작된다.

 

"필자인 파란문의 옛집터"

<인생식물가게>가 있는 건물이 "필자의 옛 집터"다.

내가 살땐 한옥이었는데 부수고 건물을 올려 옛날이 그립다.

 

좌측에 있는 <이비스 엠버스더 호텔>은 옛날 "오진암"이라는 무지 유명한 요정이었다.

당시 3대 요정인 <삼청각.대원각.청운각>등 보다 더한 1급 요정이었다.

<7.4남북회담>등 남북관계 회담의 실무책임자들을 접대할 정도의 1급 요정이었다.

당시 밤문화 "요정 정치"의 요람 중에 대표 요정.

 

한옥이었던 "오진암" 건물은 뜯어서 현재 <부암동>으로 옮겨 복원해 놨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이었던 "무계원"터에 옮겨 복원해 "무계원"이라 부른다.

"오진암"을 뜯어 <부암동 안평대군 집터>에 옮겨 복원해 놓은 "오진암"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요정이라는 걸 알수 있다.

 

<종로오피스텔>

필자의 집터 뒤-종로세무서 앞에 있는 <종로오피스텔>이 있는 자리는

옛 정치 깡패 두목이었던 "이정재의 집"이 당시에도 양옥으로 있었는데 차고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 차고를 필자 아버지가 빌려 창고로 이용했었다.

 

그리고 이 빌딩 뒷쪽엔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 선생"의 집도 있었다.

필자가 살때엔 "홍명희선생"은 북으로 월북해 북한 김일성대학교 총장-북한 수상을 했단다.

 

옛 우리집과종로세무서 사이로 요즘 핫하다는 "익선동 골목"이 시작된다.

왼쪽 2층으로 된 카페가 옛날 친구 "유0규"가 살던 한옥이었고

건너편에 보이는 한옥 뒤에 "이름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가 살던 집이다.

모두 필자와 <교동국민학교> 동기 동창이다.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인데 엄마가 국악인으로 명창이어서 "오진암"등 요정에서

판소리를 하며 사는 미혼모였다.

"김정호"의 노래를 자세히 들어 보면 한이 서려있는 듯한 '서편제'등 판소리 느낌이 드는데...

엄마의 피를 이어 받은 듯하다고 우린 말했다.

 

저 앞에서 좌측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에 "낙원떡집"의 본가가 있는데 지금은 미국 달라스에 살고 있는 친구 "김0동"의 집이었다.

<익선동>에는 <창덕궁>에 근무하던 예술인, 요리사 등이 주로 살던 곳이다.

친구 "김0동"의 할머니가 <창덕궁>에서 주로 떡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왕조가 멸망하자

궁에서 나와 떡집을 차렸는데 이게 대힛트를 쳤다.

그래서 이 큰 한옥집에서 새벽4시면 엄청난 량의 떡을 만들어 '낙원동'의 가게로 날랐다.

지금은 <익선요록>이라는 음식점이 성업 중에 있다.

 

조금 더 들어 가면 파스타점이 있는데, 이 집인지 다음 집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친구 "임효0"이 살던 집이다.

이 친구 어케 사는지 궁금하다.

 

골목 끝에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엔 "비나이다"라는 "AI가 사주 봐 주는 곳"이라는데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친구 "길0종"이 살던 집이다.

이 친구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 때 캐나다 대표팀을 이끌고 왔었다고 하는데

졸업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만 간혹 듣는다.

 

내가 살던 곳이 "AI점집"과 "궁중떡집"....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다양한 카페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는데 주말이면 발 붙일 곳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평일에도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익선동 골목길"을 벗어 나면 <지하철5호선 종로3가역> 주변이 나타나는데

주말 밤이면 이 거리는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룬단다.

 

<종로삼가 사거리>로 나가면

좌측에 <단성사 극장>이 있었던 <단성사 쥬얼리 빌딩>이 있다.

원래 이곳에 <포도청>이 있었고, <동학농민운동>의 주역 중에 한분인

천도교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이 사거리에서 공개 처형 당한곳이다.

외세의 침입과 조정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독립을 주창한 애국자들은 처형 당하고...

 

<단성사> 건물 좌측에 소방서가 있는데 옛날엔 서울에서 가장 높은 망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사고 난 곳을 신속히 신고하지만, 옛날엔 높은 망루에 올라가

주변을 눈으로 살피며 불이 난 곳을 알아 냈다.

소방서 좌측엔 <백궁다방>과 당구장이 있었는데....

 

<단성사> 건너편엔 "피카디리극장"이 있었다.

 <피카디리극장> 이전에는 <반도극장>이었는데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전에는 그 유명한 "명월관 明月館"이 있었다.

원래 "명월관"은 현재의 광화문사거리 <동아일보>가 있는 자리 근처에 있었는데 여기로 이전하고,

<이완용>이가 인수해 현재의 <태화관>으로 옮겼다가 사라졌다.

구한말 방귀 깨나 뀌던 놈들의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후 "종삼"이라고 대변되는 집창촌이 난무했던 곳이다.

 

이 근쳐에 우리나라 개봉관이 몰려 있었다. 을지로 방향에는 <서울극장>이 있었고,

을지로엔 <국도극장> 계속해서 지금도 있는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충무로엔 <대한극장>이 있었다.

 

<지하철 1호선 1번출입구>에서 답사를 마치고 종로2가 쪽으로 조금 가면...

<낙원동> 올라 가는 길 입구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송해길"이란다.

"송해선생"의 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어서 이 주변 음실점들에서 식사와 술잔을 기우렸다고 ㅎ

 

오랜만에 추억의 길을 둘러 보았다

728x90
728x90

조선왕조의 국가사당

종묘 宗廟

 

2026년 8월 12일 (수)

[종합안내도]

관람순서는 편한대로 하면 되지만 추천 코스는

외대문-향대청(망묘루,공민왕신당,향대청)-재궁-정전-전사청-영녕전-악공청-외대문

 

<종묘 입구>에서 뒤돌아 본 <세운상가>

<종묘>로 들어 가기 전에 먼저 <세운상가>로 올라가 <종묘 전경>을 조망하고 가는게 좋다.

<세운상가>를 재개발하여 초고층 빌딩을 세운다는 계획이 큰 이슈가 되기도했죠

먼저 <세운상가>로 간다.

 

<종묘 전경 조망처>

<세운상가 5층>에 원래 전망대가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시설안전문제로 폐쇄하여

엘리베이트가 4층까지만 운행해서 4층 난간 ★표시한 곳에서 조망했다.

이런 조망처를 찾는 것은 누가 알려 주지 않으면 알수 없는 알토란 같은 정보죠? ㅎ

 

1960년대 서울의 명소였던 "세운상가"였는데 아마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였을거다.

난 익선동 한옥에 살았지만, 내 친구가 이곳에 입주해 놀러 갔는데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파트라고 하는 곳을 처음 가 본 것이었기에 ㅎ

2층 베란다에는 생맥주집이 파라솔을 펴고 성업했었는데 이젠 폐허 비슷하게 변하고

 

[종묘 전경 조망]   ★사진 클릭하면 더욱 확대 됨★

북악산(백악산) 앞에는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있는데

"좌묘우직 左廟右稷"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엔 "종묘 宗廟"를 두고

우측엔 "사직 社稷"을 두어

국가의 평안과 번성을 비는 최고 성전으로 삼았다.

특히 "종묘"는 국가권력 정통성의 상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이라 할수 있다.

 

조망을 마치고 <종묘 입구>로 내려 가면...

 

[하마비와 종묘전교]

<종묘입구>에는 "下馬碑"가 있고, 그 뒤에 "종묘전교 宗廟前橋"가 있다.

왕이 <종묘>를 방문 할때 왕도 이곳부터는 걸어서 들어 가야한단다.

'하마비' 뒤에 울타리 쳐진 곳 가운데에 <종묘전교>가 있고, 우측 뒤에 "어정 御井"이 있다.

 

<종묘전교>는 다리로 궁궐입구에 있는 <금천교>와 비슷한 역활이고

<어정>은 왕이 물을 마시던 우물이라는데 현재 <서울유형유산>으로 지정되 있단다.

 

[외대문]

"외대문 外大門"은 <종묘>의 정문인데 궁궐 정문과 다르게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게 특징이란다.

 

 

<외대문>을 들어 서면 바로 "신로 神路"가 <정전>을 향해 뻗어 있는데

<신로>는 가운데 길이 "혼령"이 지나는 길이고 우측은 "왕", 좌측은 "세자"가 걷는 길이란다.

"유교" 사회에선 조상을 섬기는 법도가 엄청 엄격하죠?

 

이곳은 삼거리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온 왕은 먼저 우측길로 들어 가는데...

우측에 "향대청-망묘루"가 보인다.

가운데 안내판 뒤에 "연지 蓮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저곳에서 먼저 "망묘루"를 조망하면...

 

[향대청 망묘루 조망]

"연지 蓮池"라는 연못 뒤로 <망묘루>와 <향대청>이 보인다.

 

[향대청-망묘루-공민왕 신당 조감도]

조감도를 참고하고 <망묘루>로 들어 가면...

 

"망묘루 望廟樓"

임금이 "종묘제례"를 위해 <종묘>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망묘루>로 들어 가 잠시 쉬며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 先王'들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며

국가와 백성들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며 상념에 잠기는 곳이란다.

정면 7칸, 옆면 2칸으로 되 있는 건물인데 가운데 2칸은 '누마루'로 되 있다.

평시에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았던 '종묘관리사무소'였다 한다.

 

이름 학력 경력...주가조작, 얼굴까지도 개조해 영부인까지 오른 Vo "김건희"가

2024년 9월 3일...그러니까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석달전에 이곳을 사적 목적으로

'코바나콘텐츠' 관련 사람들과 지극히 사적인 외국인, 종교인, 지인 등과 

휴관일에 문화재청 직원들을 불러내 문을 열고 출입해 큰 비난을 받은바 있죠?

<12.3 쿠데타>의 성공을 빌었나?

하물며 <망묘루>에 냉장고 운반 설치, 조명시설 교체, CCTV폐쇠하고 차를 마시며 즐겼다죠

그리곤 골프장에서 쓰는 골프카트를 여러대 가져와 타고 종묘 경내를 돌아 다녀

비난을 더욱 받았죠.. 근데 아직도 반성 안하니..ㅉㅉ

 

 

 

[공민왕 신당]

<망묘루> 뒷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고려>를 쿠데타로 뒤업고 건국한 <조선>

그 <조선>의 정통성을 알리는 <종묘>에 왠 고려 왕의 신당이 있어? 의아하죠?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모른단다.

 

<종묘 공식 홈페이지>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은 고려 31대 왕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종묘를 창건할 때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날아와 종묘 경내로 떨어졌는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영정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고려해 나름 살펴 보자면,

조선 왕조에서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이 <공민왕>임을 내세우려 만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며 정통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라고 강조 하는 <태조 이성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 받아 새로운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조선>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신당>을 설치하여 멸망한 <고려>의 <조선>에 대한 악감정을 무마 시키려 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신하였으며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따라 요동정벌을 하며 공을 세우고

<왜구>들의 침략을 격퇴시킨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공민왕 신당"

신당 안에는 정면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좌측에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가 걸려 있다.

그림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고, 이 그림들은 모작품이란다.

 

<고려 왕씨왕조>는 제18대 <의종>에서 끝나고 "무신정권 시대"로 들어간다.

<무신정권> 하에 있던 <제23대 고종> 때에는 몽골의 침입으로<강화도>로 천도를 하고

<제24대 원종> 때에 '몽골'과 화친(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며 '몽골'의 지배하에 놓인다.

왕의 이름은 모두 "충성"을 의미하는 "忠"자를 앞에 붙이고 속국의 예를 다했다.

<공민왕>은 <제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 10년간 볼모생활을 했다.

'몽골'에서 인질생활을 할때 <노국대장공주>와 전략결혼을 했는데 금슬이 보통이 아니었단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딸이자 몽골 제국의 초대 카간칭기즈 칸의 직계 7대손이다.

원나라 출신의 마지막 고려 왕후이며,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외국인 및 이민족 출신 왕후였다

 

인질생활을 할때 <몽골 원나라>는 쇠락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고려>로 돌아 온 <공민왕>은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무신정권>과 <몽골지배시대>를 타파하고 <고려왕씨왕조>를 다시 중흥 시키기 위해 나선 왕이

"제31대 공민왕"이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 초상화'

(필자가 신당에 있는 그림을 줌인하여 촬영해 뽀샵한 사진이다.)

 

사랑과 개혁의 동반자-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무지무지 사랑했단다.

사랑해도 이렇게 사랑한 왕과 왕비는 세계 역사에도 없을 것이다.

불행은 너무 심한 "사랑" 때문에 일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사랑스런 부부 사이에 결혼 10여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한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왕이 후사가 없자 왕실에선 후궁을 들이라고 아우성치는데 <공민왕>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어머니와 왕실이 강력 권고 하자 어쩔수 없이 <혜비 이씨>를 후궁으로 들였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허락을 받고 후궁을 들여 후궁을 본체만체 하는데도

<노국공주>의 투기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러다 <노국공주>가 10여년 만에 임신을 하니 <공민왕>은 기분이 무지 좋아서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들을 사면 할 정도로 기뻐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하지만 기쁨도 잠깐, 이듬해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아이와 함께 죽어 버리고만다.

이 슬픔은 <공민왕>에겐 청천벽력이었다.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공민왕>은 공주 사후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고려왕조>의 운명도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았단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자 모든 정치활동에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몽골의 정치적 배경까지 잃게 되자 왕권도 급작스레 약화되고

 

"노국대장공주"

태어난 <몽골>보다 시집 온 <고려>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몽골인 왕후로서

남편 <공민왕>과의 불멸의 순애와 러브스토리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왕비 중 한명이 되었다. 

 남편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조국 <원나라>를 사실상 배신했다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

<공민왕>은 감성이 풍부한 대단한 아티스트였단다.

특히 그림에 능숙했는데 비교하자면 조선시대 <김홍도>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려>를 대표 할수 있을 정도의 화가였단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여럿 남아 있으며 <국립고궁박물관>등에 소장되 있단다.

또한 대단한 서예가이며 뮤지션이기도 해서 예술을 사랑한 아티스트라고 일컷는다.

그래서 <노국공주>를 사로 잡았나? ㅎ

 

"향대청 香大廳"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란다 

현재는 <종묘 박물관>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 할수 있다.

 

<향대청>을 나가면....

"재실 齋室"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재실 齋室"은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 정문으로 들어 가면

 "어재실 御齋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위해 대기하는 곳

 "세자재실 世子齋室"

세자가 제례를 올리기 위해 대기 하는 곳

 "어목욕청 御沐浴廳"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개하고 옷차림을 하는 곳

<종묘제례>가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이루어지는지 느낄수 있다.

 

목욕하고 옷매무새를 차린 왕은 우측 뒤에 보이는 문으로 나간다.

 

<재실>을 나서면 종묘제례를 올리는 "정전"이 나타난다.

왕은 여기서 좌측 에 있는 정문인 <신문 神門>으로 가지 않고

우측 <동문 東門>으로 가 <정전>으로 입장했단다.

 

관람객들은 좌측 정문으로 가는게 좋다.

"신문 神門"

"정전 正殿"의 정문으로 "선조들의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그러므로 왕도 이 문을 이용 하지 않고 <동문>으로 간 것이란다

 

<정전 조감도>를 참고하고 들어 가면...

 

"종묘 정전 宗廟正殿" 국보 제227호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27개월)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단다

<정전>의 길이는 101m로서 우리나라 건물로는 제일 길고 세계적으로도 긴 건물이란다.

그래서 건물을 한장의 사진으로 촬영하기는 어려워 전경을 두장으로 찍어 붙인 사진이다.

"월대 月臺" 는 제례악을 연주하고 무용을 하는 곳으로

동서 109m, 남북 69m로서 높이도 1m 정도 되게 웅장하게 만들어져 있다.

 

"정전 正殿"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들 신주가 모셔져 있단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는 위 호실을 참고하면 된다.

조선왕조 27명의 왕들중에 19명만 있는 이유는

중요한 치적을 남긴 우등생 왕들만 "정전 正殿"에 모시고

B급 왕들은 잠시 후 들릴 "영녕전"에 모시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정전 19실>에 <순종>이 있는게 좀 야릇하다. <순종>이 우등생 왕?

멸망하는 왕조의 마지막 왕이고, 일제치하에서 왕도 아닌 왕이었는데...

 

<정전>의 동쪽에 있는 <동문 東門>으로 먼저 가 문 밖의 <전사청>을 구경하고 다시 들어 온다.

왕은 <재실 목욕청>에서 저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 왔단다.

 

"전사청 典祀廳"

<동문> 밖에는 <전사청>이 있는데 제례에 쓰일 음식을 만들던 조리실이라고 보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전사청 조감도>를 참고하고

<전사청> 앞마당에는 "찬막단 饌幕壇"이 있는데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검사하는 곳"이란다.

그리고 우측 뒤에는 "성생위 省牲位"가 있는데

"제례에 쓰일 희생물인 '소.양.돼지'를 검사하는곳이라 한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건물은 "수복방 守僕房"이라 하는데 "종묘를 지키고, 청소를 하며,

제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제정 祭井"

제수음식을 만들 때 쓰던 물을 긷는 우물이 <전사청> 우측 옆에 있다.

 

왕이 출입하던 <동문 東門>을 통과해 <정전>으로 들어 간다.

세계적 건축가들이 "단순함의 극치로 최대 웅장함을 표현한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극찬을 하는 건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다.

"한국의 파르테논 신전"

 

<정전> 안으로는 들어 갈수 없다.

그래서 <정전 내부> 참고 사진을 첨부한다.

왕과 왕비의 "신주 神主"를 모시는 방.

이런 감실이 19개가 있다.

 

"신주 神主"는 

죽은 사람의 이름, 친족 관계, 관직등을 쓴 나무 조각으로

신주는 죽은 조상을 상징하며 사당에 안치하였다.

 

일반인들에겐 비슷하지만 <신주> 대신 간략하게 만든 "위패 位牌"라는 것을 쓴다.

그리고 신주를 모실 사당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일회용 신주격인 지방(紙榜)도 쓴다.

"지방"은 사용 후 불태우죠?

 

<임진왜란> 때에 쪽바리들이 물밀듯 올라 오자 쪼다리 <선조>가 북으로 도망치면서도

이 <신주>만큼은 모두 챙겨 갔다죠?

 

<정전> 내부에서 제례를 올리는 모습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

우리나라 궁중 음악으로, 조선 왕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진행할 때 사용한

음악, 성악, 춤의 일체를 말한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데 행하는 음악과 춤이므로

일반인들에겐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궁중음악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의미를 느끼며 감상하면 엄청 장엄하다고 하는데

나같은 속물은 잼없어 끝까지 들어 본적이 없다.

<세종대왕>이 작곡했다죠?

 

"신로 神路"

<정전> 정중앙에서 바라보는 "神路"와 "神門"이다.

여기는 왕도 다닐수 없어 "어로御路"와 "세자로世子路"가 없고 "신로神路"만 있다.

그래서 왕과 세자도 <동문>으로 다니는 것이란다.

<정전> 앞에 펼쳐지는 "월대 月臺"도 단순하면서 웅장한데

마당에 박은 '박석'은 '석모도'에서 모두 가져왔다고 한다.

돌맹이 하나 하나에도 지극정성이 느껴진다.

 

앞 좌측에 "공신당"과 우측엔 "칠사당"이 있다.

 

"공신당 功臣堂"

각 왕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功臣들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83명의 공신들이 배향되 있단다.

공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많지요?

<한명회> <신숙주>도 보이고...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이 <숙종>의 배향공신이란 것도 처음 알고...

'세도정치'의 두목 <김조순>이가 <정조>의 배향공신이란 것도 괴이하고...

 

한가지 더 언급하면

<순종>의 배향공신 중에 <친일파의 대두>인 <이완용>이 포함되 그의 신주가 모셔져 왔었는데

해방 후 제거 했단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권력에 빌붙어 산 인간들의 행로가 눈물겹다.

 

<정전> 앞 우측에는 "칠사당 七祀堂"이 있다.

<유교>에 "토속신앙"을 가미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란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정전>의 "서문 西門"을 통해 나가면...

 

"영녕전 永寧殿"이 바로 나타난다.

<정전>보다 규모는 약간 작아 덜 웅장하지만, 더 아름답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영녕전 신문 永寧殿 神門 (정문)"

<영녕전>도 <정전>과 같은 의미의 사당인데

단지 B급으로 분류되는 왕들과 추존왕이 모셔졌다는 것 뿐이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나와 있다.

 

"영녕전 전경"

가운데 4칸은 <태조 이성계>의 "4대 조부"를 모시고

좌우에 7명의 왕과 4명의 추존왕, 그리고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도표를 참고하면 된다.

 중요하거나 독특한 분들에 대해선 제가 약간의 설명을 첨부 해 놨으니 참고하시고...

 

<1실~4실>까지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할아버지들이 모셔져 있다.

<1실>에 있는 <목조>는 <이안사>로 '고조부'가 되며 <전주> 출신이지만 '함경도 경흥'으로 이주해

당시 몽골의 관리인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내려 받아 4대까지 세습되었다.

<4실>에 있는 <환조>가 <이성계>의 아버지로 당시 '경흥부'의 '다루가치'였기에

<이성계>가 고향이 <전주>가 아니라 <경흥부 함흥>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8실>에 있는 <덕종>은 <의경세자>로 <세조>의 장남인데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예종>이 되며 그는 추존왕이 된다.

<성종>의 형이기도 해 <예종>까지 일찍 죽자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의 왕비들과 대비들의 권력다툼이 <여인천하>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냈고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위한 <연산군>의 한서린 복수로 이어졌다.

 

<13실>에 있는 <경종>이 <장희빈>의 아들이고

<15실>의 <장조>가 그 유명한 <사도세자>로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이다.

 

<16실>의 <의민황태자>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다.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영녕전"을 뒤돌아 보며

<영녕전>의 <서문>으로 나가면....

 

"영녕전 악공청 永寧殿樂工廳"이 있는데

<영녕전>에서 <종묘제례악>을 하는 뮤지션들과 무용수등이 대기하는 곳이란다.

 

<김건희>가 골프카터를 타고 여기까지 와 테이블을 펴고 차를 마셨단다.

 

"영녕전 정문" 앞을 지나면...

 

"정전 악공청 正殿樂工廳"을 만난다.

여기는 <정전>에서 <종묘제례악>을 하는 뮤지션들과 무용수등이 대기하는 장소라고...

 

"정전 신문 正殿神門" 앞을 지나 우회전 하면...

 

<외대문>으로 나가는 神路를 통과하여 <외대문>을 나서면...

 

<종묘시민광장>이 펼쳐지며 <종묘> 탐방을 마친다.

이 광장 아래엔 지하공용주차장이 있다.

 

<종묘>탐방에 이어 계속해서 우측 "서순라길" "익선동"을 탐방한다

답사기는 별도로 계속된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