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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조선 제11대왕 중의 후궁

창빈 안씨의 묘

 

2026년 8월 23일 (월)

[국립서울현충원 안내도]

오늘 답사 하고자 하는 "창빈 안씨 묘"는 "ㅁ"으로 표기한 곳에 있다.

 

현충원 정문 안으로 들어 가면 먼저 분수대가 반기고

"국립서울현충원"의 전체 지형을 느낄수 있는데,

<서달산>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현충원"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또한 <한강>을 굽어 보며...

그래서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천하명당"이라는 소문이 돌던 곳이다.

 

분수대를 지나면 넓은 잔디광장이 나타나며 정중앙에 "현충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 뒤에 보이는 산이 "서달산"으로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칭해지는

유명한 "달마사"가 있다.

 

"현충문"

현충일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이 문으로 참배하러 들어 가는 문인데

TV에 중계되기 시작하는 곳이다.

 

"현충탑"

조국을 위해 목숨바친 영령들을 배향하는 곳이다.

충혼탑에는 '노산 이은상'선생이 지은 글을 '박정희 전대통령'이  '현충시'가 있다.

 

현충원에는 전사자들만 안장된 것은 아니고,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의로운 일을 한 일반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안장되 있는데,

하물며 친일파들까지 안장되 있어 가끔 문제시 된다.

 

"무명용사의 탑"

<현충문> 동쪽엔 "무명용사의 탑"이 있는데, 지금부터 오늘의 테마인 "창빈 안씨묘" 찾아간다.

"무명용사의 탑" 좌측으로 가면....

<현충원 순환로>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몇백미터 올라 가면....

 

"수충교 앞 오거리"를 만난다.

좌측 <수충교>를 건너 우측으로 들어 가면 되는데

이곳은 다음 지도의 <현위치> 표기 지점이니 참고하고...

<현위치>라고 표기한 곳이 <수충교> 앞이다.

이제 길찾기는 너무 쉽다

"창빈 안씨 묘" 좌우에 <이승만-김대중 전대통령 묘>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죠?

좀 놀랍죠? 어찌 된거야?

대통령들의 묘와 후궁의 묘가 함께 있어?

 

<이승만전대통령 묘>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서

"이승만 전대통령 묘"를 잠시 둘러 보고 나와 조금 내려 가면...

 

"창빈 안씨 묘" 입구를 만나는데,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고

숲으로 들어 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안내판만 있어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렵다.

 

"창빈 안씨 묘" 입구

<국립서울현충원>은 1956년에 설립됬지만 

"창빈 안씨 묘"는 400여년 전인 1551년 <명종 5년> 때부터 있었으니

<현충원>은 "창빈 안씨 묘"로 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공동묘지>가 되었다고 볼수 있다.

 

 묘지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임꺽정"이라는 도둑놈이 의적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인기 만점이었을 때이다

얼마나 오래된 묘역인지 알수 있죠?

 

또한 서양에선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 여왕>시절에 <무적함대>의 <스페인>을 치던 시절이다.

 

입구에는 "창빈 안씨"에 대한 간략한 안내문이 설치되 있다

안내문의 핵심 내용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라는 것이다.

20m쯤 올라 가면....

 

"창빈 안씨 신도비 昌嬪安氏 神道碑"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도 "후궁"인 "창빈 안씨"에게 神道碑를 세워 준 것이 궁금하지 않나요?

<제11대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는 <중중>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후궁 중에서도 낮은 계급 '13세에 상궁→22세에 숙원→36세 숙용→42세 소용"까지 올랐단다.

9살에 궁녀로 궁에 들어 가 13년이 지나 <중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 "영양군"을 낳고

22살에 "숙원"이 되며, 32세에 "덕흥군"을 낳고, 36살에 "숙용"에 오르고

42세에 정3품인 "소용"까지 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왕비에 준하는 정1품 "빈 嬪"에는 오르지 못했단다.

그녀가 "빈 嬪"에 오른 것은, 그녀가 죽고 10여년 후에야 손자인 <13대 선조>에 의해

"창빈 昌嬪"으로 추존 된 것이다.

그녀의 아들 "덕흥군"이 낳은 셋째 아들 "하성군"이 <제13대 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의 정통 혈통이 아닌 서자의 아들이 왕이 된 첫 사례였다.

그 이후 모든 조선의 왕들, 즉 <13대 선조~27대 순종>까지 360여년 동안

이 여인의 핏줄을 이어 받았기에 이 여인이 그 왕들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여인이 없었다면 <12대 명종> 이후 "조선이씨왕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여인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여인인지 놀라울 정도...

 

그리고 이 "신도비"는 그녀가 죽은 후 130여년 후 <제19대 숙종>이 건립한 것이란다.

이 신도비에는 그녀의 성품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고운 덕을 닦아 모든 덕을 갖추었으며 임금을 모시어 사랑 받았고

음전한 몸가짐으로 경사를 열었다.

어진 임금이 이어 나와 복을 내리니 선을 쌓은 끝에 경사가 온다는 이치가 분명하도다"

 

 

"창빈 안씨  昌嬪安氏墓"

1499년 당시 연산군이 폐악질을 하던 시대에

지금의 '시흥 금천' 근처의 어느 작은 고을에서 아버지 "안탄대"의 딸로 태어났단다.

"안탄대"는 정7품의 미관말직의 무신이었는데, <중종반정> 때 참여해서 공로가 인정되

원종공신에 책록되지만 여전히 미미한 존재였단다.

그런 와중에  소녀는 8살에 궁녀 선발에 합격해 궁으로 들어 갔는데,

<성종>의 왕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대비" 밑으로 들어 가게 된 것이 운명의 시작...

소녀가 너무 이쁘고 착하며 영특해 <정현왕대비>의 마음에 쏘~옥 들었단다.

그래서 <정현왕대비>가 '경서'와 '사기'를 내려 주며 공부를 시켰고,

왕실의 예법도를 직접 가르치며 마치 딸을 키우듯 정성을 다했단다.

그렇게 왕대비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 소녀가 20살의 아릿다운 처녀가 되었을 때

왕대비가 47세인 자신의 아들인 <중종>에게 후궁으로 삼으라고 소개팅을 했단다.

<중종>의 정식 왕비 <장경왕후>가 후에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일찍 죽었기에...

그러자 1515년에 문제의 <문정왕후>가 새로운 왕비로 들어 왔는데도,

왕의 엄마가 아들 왕에게 이런 불륜 소개팅을??  ㅎㅎ

그리하여 1520년 정5품 상궁이 되고 아들이 태어 납니다. 

그 이후 1530년 조선왕조의 운명을 바꿀 아들이 태어 나는데

바로 "덕흥군"이 태어 나는데 <제13대 선조>의 아버지가 되며

우리나라 첫번째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다.

그런데 철의 여인 <문정왕후>가  이 여인을 씹지 않고 잘 받아 주며 우호적이었단다.

성품이 워낙 온화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공손하였기 때문이란다.

 

<제10대 성종>은 <폐비 윤씨>로 부터 <연산군>을 낳고,

이어 <정현왕후>로 부터 <제11대 중종>을 낳았다.

 

<중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는 즉위 일주일만에 폐위당하고

두번째 부인인 <장경왕후>가 <중종반정> 공신들의 후광을 안고 왕비가 되어

<인종>을 낳고 일찍 죽어버리고,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가 새왕비가 된다.

이때 <중종>이 가장 사랑스러워 했다는 "경빈 박씨"가 <중종>의 장남 <복성군>을 낳아

정치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했는데

<장경왕후>가 낳은 후에 <인종>이 되는 적통 아들을 등에 업은 "대윤파 大尹派"와

후에 <명종>이 되는 <문정왕후>의 아들을 등에 업은 "소윤파 小尹派"...

그리고 <중종>의 장남 <복성군>을 등에 업은 <경빈 박씨>..

이들 사이에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권력 다툼의 시대를 우리는

"여인천하 시대"라고 한다.

이런 여인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다툼을 멀리하며 조용히 살았던 여인이 "창빈 안씨"란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그녀의 것이 되었다.

 

<인종> <명종>이 후사 없이 죽어 버리자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14대 선조"이며 이후 탄생되는 <14대~27대>까지 왕들은

모두 "창빈 안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니, 그녀는 그들의 시조가 되는 것이고

"최후의 승자"라고 아니 말할수 없다.

 

1549년 가을 "창빈안씨"는 친정을 방문하기 위해 궁을 나섯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줄이야~

어찌된 일인지 뭔일인지 51세의 나이로 친정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단다

"창빈 안씨"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안장되었는데, 이듬해 <덕흥군>은 풍수가들의 조언을

받아 "천하명당"이라는 이곳으로 묘를 이장했단다.

놀라운 일들은 그 후부터 일어 나기 시작했다.

1567년 <제13대 명종>이 승하한다.

<명종>은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순회세자"가 있었는데 13세에 일찍 죽는다.

이렇게 되어 왕조의 대를 이을 적통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은 난리가 났는데 이때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각별하게 지내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조선왕조 최초로 서자 출신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16세의 <하성군>이 "제14대 선조"가 되는 것이었다.

 

<중종의 가계도>를 보면 "창빈 안씨"의 지위와 위상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수많은 왕들을 배출시키는 그런 "천하명당"이라고 할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선조>가 왕에 등극하자 치욕의 <임진왜란>이 일어 나고

<광해군>은 이복동생 <인조>로부터 반정을 당하여 유배 가고

이어서 <인조>는 더더욱 치욕의 <병자호란>을 당하며 굴욕을 당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수난의 날들을 생각하면 과연 "천하명당"이라고 할수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 묘소]

[김영삼 대통령 묘소]

"창빈 안씨 묘"는 우리나라 근현대의 대통령 네분의 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대통령들 까지 후손으로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우연일까~

 

<국립서울현충원>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꼽힌단다.

주변 산줄기가 "말발굽 모양"으로 묘소를 포근히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한강>이 시원한 청량감을 준단다.

풍수가들은 이곳이 여성 성기와 같은 모양으로 <창빈 안씨>의 묫자리가 "여성의 클리토스"란다

인간 절정의 순간에 찾아 오는 오르가즘이 느껴 진다나 뭐래나...

 

<덕흥군>이 어머니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아들이 <제14대 선조>가 되고

이후 계속 왕들을 배출했으니 그런 측면에선 "천하명당"이 틀림 없겠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풍수지리"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단다.

도성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사대부들이 무지 많이 이곳을 찾아 봤단다.

 

후에 <흥선대원군>도 풍수지리가 <정만인>이 "二代天子之地"라고 추천한 곳으로

자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 연천'에서 '충남 예산'의

<가야산 계곡>으로 이장하며 <제26대 고종><제27대 순종>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후 실제로 두명의 왕을 탄생시켰으니 풍수지리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겸재 정선의 동작진"

<겸재 정선 선생>이 다행이도 1800년대에 현재의 <현충원>이 있는 "동작진"을

진경산수화로 남겨 놨기에 그 옛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수 있다.

 

뒤로는 <관악산>이 王冠을 쓰고 불꽃같은 위엄을 뽐내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는 풍수가들이 주장하는 진짜 명당터란걸 알려 주는 듯 하다.

<한강>에 붙어 있는 좌측 산줄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현재의 <동작대교>가 연결되어 있고

<지하철 4호선>이 저 산 옆구리를 뚫고 지나간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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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명소

서순라길-서울소리박물관-익선동

 

2026년 8월 12일 (수)

[종묘 입구]

"종묘 宗廟" 답사에 이어 "서순라길"을 진행한다.

"서순라길"은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에서 출발한다.

 

<종묘 외대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좌측 <종묘시민공원>에

<이상재 선생 동상>이 보인다.

"월남 이상제 月南李商在 선생"

<경술국치> 이후 대부분의 국가관리들이 친일파로 변절했지만,

선생은 충절을 지키며 고향 <충남 서천>으로 가 은거 했다.

일제강점기의 강력한 독립운동가로 거듭 나며, 대한제국 시절엔 개화파 정치인으로

미국 공사관 등을 역임하셨다.

 

"서순라길 西巡邏路"

"순라巡邏"는 요즘말로 하면 "순찰巡察"이라 할수 있다.

 조선시대엔 <한양도성>에 "밤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있었다.

왕궁이나 중요시설을 보호하고 방범을 위해 권역별로 "경비"를 서며 순찰을 했단다.

그렇게 순찰을 도는 군인이나 포졸들을 "순라군巡邏軍"이라 하는데

우리에겐 발음상 "순라꾼"으로 익숙하다

 

"순라"를 도는 여러 곳 중에 "종묘"의 서쪽 권역을 "서순라길"이라 하는데

'순라길'의 흔적이 그런데로 명확히 남아 있는 <종묘 서쪽 외곽 담장길>을 탐방코스로 개발하여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이곳은 <경복궁> 보다 더 실질적 왕궁인 <창덕궁> 앞길이며 <종묘> 옆길이다.

예전 이 지역엔 집창촌이 있었는데 말끔히 정리되고 카페와 음식점들이 줄을 서 있다.

 

"순라군 巡邏軍"  (자료사진)

"술래잡기"의 어원

백성들의 통행을 단속하고, 도둑들을 잡고 시설을 보호하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돌던 "순라"

"순라군"은 환한 등을 밝히며 나무 널판지를 "딱탁" 치며 "내가 순찰 돈다~!"라고 알리며

순찰을 돌았단다.

아니~ 도둑을 잡을려면 도둑들 모르게 몰래 숨어 놈들의 동태를 살펴야 잡을 수 있지요~?

그런데 불을 밝히고 소리를 내며 "나 여기 간다아~!"라고 알리며 돌아 다니면 

잡힐 도둑이 어디 있겠나요?

어린시절에 많이 했던 "술래잡기 놀이" "순라군의 순라"에서 나왔다는  아시나요.

'술래잡기 놀이'는 술래(순라군)가 눈을 감고 있을  놀이친구(도둑)들이 조금씩 움직여 도망가는 거죠?

한마디로 "눈 감고 아웅!"하는 놀이이며 "순라군을 놀리며 풍자하는 놀이"라 여겨진다.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라는 노래 가사도 "순라군의 순라"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수 있다.

"순라꾼의 순라"는 '보여 주기 위한 전시행정'으로 볼수도 있으니

"순라꾼"은 도둑이나 통행금지자들을  어차피 잡을 의도도 없었으니 못잡았을 때

"못 찾겠다~ 에이 꽥!"이라 하며 근무를 마쳤을 것이다. 오로지 추정이다. ㅎㅎ

"꽥"이 "고상하게 "꾀꼬리~"로 발전되어 현대에 이르렀다고 강력 추정한다.

순라꾼의 행위와 견주어 보면

믿거나 말거나 인데 그럴듯 하지 않나요? ㅎㅎ

 

 

"못찾겠다 꾀꼬리"가 나온 결정적 추정은

당시 높은 놈들,  고위 관리나 그들의 아들들이  늦게 술쳐먹고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단속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죠?

지금도 검사 판사까지 술쳐먹고 음주운전하며 사고치는 인간들 많지요

 

당시엔 고위관료나 방귀깨나 뀌는 놈들이 더 많았다는 것은 모두 안다.

하급직인  "순라꾼"이 그들을 단속했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짤리는 결과를 가져 왔으니

위법행위를 하는 그들을 검거 단속하기보다는 "못본척~"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못찾겠다 에이 꽥~꾀꼴~"였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묘 정문"에서 "창덕궁 돈화문" 앞 공원까지 <종묘 담장>을 따라 "순라길"을 진행하면

<창덕궁-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있는 "율곡터널"을 만난다.

 

쪽바리들이 갈라놓은 길을 터널화 해서 위에 공원으로 만들어 놨다.

계단으로 올라 가면....

복원사업을 했다는 안내판을 참고하고...

조금 들어 가면

허물어진 <종묘담장>의 유구를 전시해 놨고

 

'원남동' 쪽으로 조금 더 내려 가면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종묘>의 "신북문 神北門"을 만난다.

평일엔 개방하지 않고...

 

"창경궁"으로 들어 가는 문인데 여기도 평일엔 개방하지 않는다.

개방일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다시 <돈화문> 앞 <율곡터널> 앞으로 돌아 와서

 

보수 중이라 볼수 없는 "창덕궁의 돈화문" 앞에 선다.

좌측엔 "옛 휘문고" 자리에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 있다

필자는 <익선동>에 살며 <교동국민학교><휘문>을 다녔는데 지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너는 엎어지면 코가 닿는게 아니고 배꼽이 닿는데도 지각을

밥 먹듯이 하냐?"라고 하던 기억이 미소짓게 한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까지만해도 왕족들이 마차를 타고 이 문을 들락거렸다.

<창덕궁>에서 왕족들을 위해 일하던 관리원들도 당연 출퇴근했다.

이런 얘기를 하니 나도 이젠 오래된 사람이군~ ^*^

 

"서울우리소리박물관" -비변사 터-

<돈화문> 건너편 "옛 비변사 터"엔 "서울우리소리박물관"이 있다.

이런 기회에 방문헤 보는것도 좋은 추억이 될것이다.

 

소리박물관 좌측 뒤 현대식건물이 있는 곳엔 예전에 "신혼예식장"이라고 있었고

나의 누님이 저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는데 없어져 아쉽다.

 

"서울토리박물관"은 옛날 우리집 같은 꽤 큰 한옥인데 겉만 그렇고

내부는 모두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해놨다.

 

박물관의 주요 시설은 지하에 설치되 있다.

여느 박물관과 비슷하지만....

여기는 서울-경기지방의 민요를 직접 들을수 있도록 한것이 독특하다.

사진에 보이는<이어폰>을 위로 떼어내 귀에 대고 민요 감상을 한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민요는 "한강 시선뱃노래"

 노래는  헤드폰을 양쪽 귀에 쓰고 의자에 앉아 들을  있는데

<종묘>와 <서순례길>을 걸은  휴식을 취하며 감상하기에 무척 좋았다.

이 노래는 '서해'에서 잡은 "조기"를 싣고 <강화도>에서 <마포>로 가는 과정을 읊은 민요였다.

앞으로 <종묘-서순라길>을 가실 분들에게 강추한다.

 

<돈화문>에서 <종로3가>로 뻗은 길이다.

좌측이 '와룡동-권농동'등이고 우측이 '운니동-익선동'등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도 길가 건물들 뒤 뒷골목에 "피맛골"이 있었다.

그러니까 "피맛골"은 여기서부터 "종로3가, 종각"을 지나 "광화문사거리"

현재의 "교보문고"있는 곳까지 이어 있었다.

 

조금 내려가면 제법 너른 사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들어 가면 "익선동"이 시작된다.

 

"필자인 파란문의 옛집터"

<인생식물가게>가 있는 건물이 "필자의 옛 집터"다.

내가 살땐 한옥이었는데 부수고 건물을 올려 옛날이 그립다.

 

좌측에 있는 <이비스 엠버스더 호텔>은 옛날 "오진암"이라는 무지 유명한 요정이었다.

당시 3대 요정인 <삼청각.대원각.청운각>등 보다 더한 1급 요정이었다.

<7.4남북회담>등 남북관계 회담의 실무책임자들을 접대할 정도의 1급 요정이었다.

당시 밤문화 "요정 정치"의 요람 중에 대표 요정.

 

한옥이었던 "오진암" 건물은 뜯어서 현재 <부암동>으로 옮겨 복원해 놨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이었던 "무계원"터에 옮겨 복원해 "무계원"이라 부른다.

"오진암"을 뜯어 <부암동 안평대군 집터>에 옮겨 복원해 놓은 "오진암"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요정이라는 걸 알수 있다.

 

<종로오피스텔>

필자의 집터 뒤-종로세무서 앞에 있는 <종로오피스텔>이 있는 자리는

옛 정치 깡패 두목이었던 "이정재의 집"이 당시에도 양옥으로 있었는데 차고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 차고를 필자 아버지가 빌려 창고로 이용했었다.

 

그리고 이 빌딩 뒷쪽엔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 선생"의 집도 있었다.

필자가 살때엔 "홍명희선생"은 북으로 월북해 북한 김일성대학교 총장-북한 수상을 했단다.

 

옛 우리집과종로세무서 사이로 요즘 핫하다는 "익선동 골목"이 시작된다.

왼쪽 2층으로  카페가 옛날 친구 "유0규"가 살던 한옥이었고

건너편에 보이는 한옥 뒤에 "이름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가 살던 집이다.

모두 필자와 <교동국민학교> 동기 동창이다.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인데 엄마가 국악인으로 명창이어서 "오진암"등 요정에서

판소리를 하며 사는 미혼모였다.

"김정호"의 노래를 자세히 들어 보면 한이 서려있는 듯한 '서편제'등 판소리 느낌이 드는데...

엄마의 피를 이어 받은 듯하다고 우린 말했다.

 

 앞에서 좌측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에 "낙원떡집"의 본가가 있는데 지금은 미국 달라스에 살고 있는 친구 "김0동"의 집이었다.

<익선동>에는 <창덕궁>에 근무하던 예술인, 요리사 등이 주로 살던 곳이다.

친구 "김0동"의 할머니가 <창덕궁>에서 주로 떡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왕조가 멸망하자

궁에서 나와 떡집을 차렸는데 이게 대힛트를 쳤다.

그래서 이 큰 한옥집에서 새벽4시면 엄청난 량의 떡을 만들어 '낙원동'의 가게로 날랐다.

지금은 <익선요록>이라는 음식점이 성업 중에 있다.

 

조금 더 들어 가면 파스타점이 있는데, 이 집인지 다음 집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친구 "임효0"이 살던 집이다.

이 친구 어케 사는지 궁금하다.

 

골목 끝에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엔 "비나이다"라는 "AI가 사주 봐 주는 곳"이라는데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친구 "길0종"이 살던 집이다.

이 친구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 때 캐나다 대표팀을 이끌고 왔었다고 하는데

졸업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만 간혹 듣는다.

 

내가 살던 곳이 "AI점집"과 "궁중떡집"....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다양한 카페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는데 주말이면 발 붙일 곳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평일에도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익선동 골목길"을 벗어 나면 <지하철5호선 종로3가역> 주변이 나타나는데

주말 밤이면 이 거리는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룬단다.

 

<종로삼가 사거리>로 나가면

좌측에 <단성사 극장>이 있었던 <단성사 쥬얼리 빌딩>이 있다.

원래 이곳에 <포도청>이 있었고, <동학농민운동>의 주역 중에 한분인

천도교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이 사거리에서 공개 처형 당한곳이다.

외세의 침입과 조정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독립을 주창한 애국자들은 처형 당하고...

 

<단성사> 건물 좌측에 소방서가 있는데 옛날엔 서울에서 가장 높은 망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사고  곳을 신속히 신고하지만, 옛날엔 높은 망루에 올라가

주변을 눈으로 살피며 불이  곳을 알아 냈다.

소방서 좌측엔 <백궁다방>과 당구장이 있었는데....

 

<단성사> 건너편엔 "피카디리극장"이 있었다.

 <피카디리극장> 이전에는 <반도극장>이었는데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전에는 그 유명한 "명월관 明月館"이 있었다.

원래 "명월관"은 현재의 광화문사거리 <동아일보>가 있는 자리 근처에 있었는데 여기로 이전하고,

<이완용>이가 인수해 현재의 <태화관>으로 옮겼다가 사라졌다.

구한말 방귀 깨나 뀌던 놈들의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후 "종삼"이라고 대변되는 집창촌이 난무했던 곳이다.

 

 근쳐에 우리나라 개봉관이 몰려 있었다. 을지로 방향에는 <서울극장>이 있었고,

지로엔 <국도극장> 계속해서 지금도 있는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충무로엔 <대한극장>이 있었다.

 

<지하철 1호선 1번출입구>에서 답사를 마치고 종로2가 쪽으로 조금 가면...

<낙원동> 올라 가는 길 입구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송해길"이란다.

"송해선생"의 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어서 이 주변 음실점들에서 식사와 술잔을 기우렸다고 ㅎ

 

오랜만에 추억의 길을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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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국가사당

종묘 宗廟

 

2026년 8월 12일 (수)

[종합안내도]

관람순서는 편한대로 하면 되지만 추천 코스는

외대문-향대청(망묘루,공민왕신당,향대청)-재궁-정전-전사청-영녕전-악공청-외대문

 

<종묘 입구>에서 뒤돌아 본 <세운상가>

<종묘>로 들어 가기 전에 먼저 <세운상가>로 올라가 <종묘 전경>을 조망하고 가는게 좋다.

<세운상가>를 재개발하여 초고층 빌딩을 세운다는 계획이 큰 이슈가 되기도했죠

먼저 <세운상가>로 간다.

 

<종묘 전경 조망처>

<세운상가 5층>에 원래 전망대가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시설안전문제로 폐쇄하여

엘리베이트가 4층까지만 운행해서 4층 난간 표시한 곳에서 조망했다.

이런 조망처를 찾는 것은 누가 알려 주지 않으면 알수 없는 알토란 같은 정보죠? ㅎ

 

1960년대 서울의 명소였던 "세운상가"였는데 아마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였을거다.

난 익선동 한옥에 살았지만, 내 친구가 이곳에 입주해 놀러 갔는데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파트라고 하는 곳을 처음 가 본 것이었기에 ㅎ

2층 베란다에는 생맥주집이 파라솔을 펴고 성업했었는데 이젠 폐허 비슷하게 변하고

 

[종묘 전경 조망]   ★사진 클릭하면 더욱 확대 됨★

북악산(백악산) 앞에는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있는데

"좌묘우직 左廟右稷"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엔 "종묘 宗廟"를 두고

우측엔 "사직 社稷"을 두어

국가의 평안과 번성을 비는 최고 성전으로 삼았다.

특히 "종묘"는 국가권력 정통성의 상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이라 할수 있다.

 

조망을 마치고 <종묘 입구>로 내려 가면...

 

[하마비와 종묘전교]

<종묘입구>에는 "下馬碑"가 있고, 그 뒤에 "종묘전교 宗廟前橋"가 있다.

왕이 <종묘>를 방문 할때 왕도 이곳부터는 걸어서 들어 가야한단다.

'하마비' 뒤에 울타리 쳐진 곳 가운데에 <종묘전교>가 있고, 우측 뒤에 "어정 御井"이 있다.

 

<종묘전교>는 다리로 궁궐입구에 있는 <금천교>와 비슷한 역활이고

<어정>은 왕이 물을 마시던 우물이라는데 현재 <서울유형유산>으로 지정되 있단다.

 

[외대문]

"외대문 外大門"은 <종묘>의 정문인데 궁궐 정문과 다르게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게 특징이란다.

 

 

<외대문>을 들어 서면 바로 "신로 神路" <정전>을 향해 뻗어 있는데

<신로>는 가운데 길이 "혼령"이 지나는 길이고 우측은 "왕", 좌측은 "세자"가 걷는 길이란다.

"유교" 사회에선 조상을 섬기는 법도가 엄청 엄격하죠?

 

이곳은 삼거리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온 왕은 먼저 우측길로 들어 가는데...

우측에 "향대청-망묘루"가 보인다.

가운데 안내판 뒤에 "연지 蓮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저곳에서 먼저 "망묘루"를 조망하면...

 

[향대청 망묘루 조망]

"연지 蓮池"라는 연못 뒤로 <망묘루>와 <향대청>이 보인다.

 

[향대청-망묘루-공민왕 신당 조감도]

조감도를 참고하고 <망묘루>로 들어 가면...

 

"망묘루 望廟樓"

임금이 "종묘제례"를 위해 <종묘>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망묘루>로 들어 가 잠시 쉬며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 先王'들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며

국가와 백성들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며 상념에 잠기는 곳이란다.

정면 7칸, 옆면 2칸으로 되 있는 건물인데 가운데 2칸은 '누마루'로 되 있다.

평시에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았던 '종묘관리사무소'였다 한다.

 

이름 학력 경력...주가조작, 얼굴까지도 개조해 영부인까지 오른 Vo "김건희"가

2024년 9월 3일...그러니까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석달전에 이곳을 사적 목적으로

'코바나콘텐츠' 관련 사람들과 지극히 사적인 외국인, 종교인, 지인 등과 

휴관일에 문화재청 직원들을 불러내 문을 열고 출입해 큰 비난을 받은바 있죠?

<12.3 쿠데타>의 성공을 빌었나?

하물며 <망묘루>에 냉장고 운반 설치, 조명시설 교체, CCTV폐쇠하고 차를 마시며 즐겼다죠

그리곤 골프장에서 쓰는 골프카트를 여러대 가져와 타고 종묘 경내를 돌아 다녀

비난을 더욱 받았죠.. 근데 아직도 반성 안하니..ㅉㅉ

 

 

 

[공민왕 신당]

<망묘루> 뒷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고려>를 쿠데타로 뒤업고 건국한 <조선>

그 <조선>의 정통성을 알리는 <종묘>에 왠 고려 왕의 신당이 있어? 의아하죠?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모른단다.

 

<종묘 공식 홈페이지>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은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종묘를 창건할 때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종묘를 창건할  공민왕의 영정이 날아와 종묘 경내로 떨어졌는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영정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고려해 나름 살펴 보자면,

조선 왕조에서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이 <공민왕>임을 내세우려 만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 자손이라며 정통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라고 강조 하는 <태조 이성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 받아 새로운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조선>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신당>을 설치하여 멸망한 <고려>의 <조선>에 대한 악감정을 무마 시키려 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신하였으며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따라 요동정벌을 하며 공을 세우고

<왜구>들의 침략을 격퇴시킨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공민왕 신당"

신당 안에는 정면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좌측에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가 걸려 있다.

그림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고, 이 그림들은 모작품이란다.

 

<고려 왕씨왕조>는 제18대 <의종>에서 끝나고 "무신정권 시대"로 들어간다.

<무신정권> 하에 있던 <제23대 고종> 때에는 몽골의 침입으로<강화도>로 천도를 하고

<제24대 원종> 때에 '몽골'과 화친(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며 '몽골'의 지배하에 놓인다.

왕의 이름은 모두 "충성"을 의미하는 "忠"자를 앞에 붙이고 속국의 예를 다했다.

<공민왕>은 <제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 10년간 볼모생활을 했다.

'몽골'에서 인질생활을 할때 <노국대장공주>와 전략결혼을 했는데 금슬이 보통이 아니었단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베이르테무르의 딸이자 몽골 제국의 초대 카간칭기즈 칸의 직계 7대손이다.

원나라 출신의 마지막 고려 왕후이며,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외국인 및 이민족 출신 왕후였다

 

인질생활을 할때 <몽골 원나라>는 쇠락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고려>로 돌아 온 <공민왕>은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무신정권>과 <몽골지배시대>를 타파하고 <고려왕씨왕조>를 다시 중흥 시키기 위해 나선 왕이

"제31대 공민왕"이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 초상화'

(필자가 신당에 있는 그림을 줌인하여 촬영해 뽀샵한 사진이다.)

 

사랑과 개혁의 동반자-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무지무지 사랑했단다.

사랑해도 이렇게 사랑한 왕과 왕비는 세계 역사에도 없을 것이다.

불행은 너무 심한 "사랑" 때문에 일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사랑스런 부부 사이에 결혼 10여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한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왕이 후사가 없자 왕실에선 후궁을 들이라고 아우성치는데 <공민왕>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어머니와 왕실이 강력 권고 하자 어쩔수 없이 <혜비 이씨>를 후궁으로 들였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허락을 받고 후궁을 들여 후궁을 본체만체 하는데도

<노국공주>의 투기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러다 <노국공주>가 10여년 만에 임신을 하니 <공민왕>은 기분이 무지 좋아서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들을 사면 할 정도로 기뻐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하지만 기쁨도 잠깐, 이듬해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아이와 함께 죽어 버리고만다.

이 슬픔은 <공민왕>에겐 청천벽력이었다.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공민왕>은 공주 사후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고려왕조>의 운명도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았단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자 모든 정치활동에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몽골의 정치적 배경까지 잃게 되자 왕권도 급작스레 약화되고

 

"노국대장공주"

태어난 <몽골>보다 시집 온 <고려>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몽골인 왕후로서

남편 <공민왕>과의 불멸의 순애와 러브스토리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왕비 중 한명이 되었다. 

 남편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조국 <원나라>를 사실상 배신했다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

<공민왕>은 감성이 풍부한 대단한 아티스트였단다.

특히 그림에 능숙했는데 비교하자면 조선시대 <김홍도>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려>를 대표 할수 있을 정도의 화가였단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여럿 남아 있으며 <국립고궁박물관>등에 소장되 있단다.

또한 대단한 서예가이며 뮤지션이기도 해서 예술을 사랑한 아티스트라고 일컷는다.

그래서 <노국공주>를 사로 잡았나? ㅎ

 

"향대청 香大廳"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란다 

현재는 <종묘 박물관>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 할수 있다.

 

<향대청>을 나가면....

"재실 齋室"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재실 齋室"은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 정문으로 들어 가면

 "어재실 御齋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위해 대기하는 곳

 "세자재실 世子齋室"

세자가 제례를 올리기 위해 대기 하는 곳

 "어목욕청 御沐浴廳"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개하고 옷차림을 하는 곳

<종묘제례>가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이루어지는지 느낄수 있다.

 

목욕하고 옷매무새를 차린 왕은 우측 뒤에 보이는 문으로 나간다.

 

<재실>을 나서면 종묘제례를 올리는 "정전"이 나타난다.

왕은 여기서 좌측 에 있는 정문인 <신문 神門>으로 가지 않고

우측 <동문 東門>으로 가 <정전>으로 입장했단다.

 

관람객들은 좌측 정문으로 가는게 좋다.

"신문 神門"

"정전 正殿"의 정문으로 "선조들의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그러므로 왕도 이 문을 이용 하지 않고 <동문>으로 간 것이란다

 

<정전 조감도>를 참고하고 들어 가면...

 

"종묘 정전 宗廟正殿" 국보 제227호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궁궐에서 삼년상(27개월)을 치른 다음에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단다

<정전>의 길이는 101m로서 우리나라 건물로는 제일 길고 세계적으로도 긴 건물이란다.

그래서 건물을 한장의 사진으로 촬영하기는 어려워 전경을 두장으로 찍어 붙인 사진이다.

"월대 月臺" 는 제례악을 연주하고 무용을 하는 곳으로

동서 109m, 남북 69m로서 높이도 1m 정도 되게 웅장하게 만들어져 있다.

 

"정전 正殿"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들 신주가 모셔져 있단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는 위 호실을 참고하면 된다.

조선왕조 27명의 왕들중에 19명만 있는 이유는

중요한 치적을 남긴 우등생 왕들만 "정전 正殿"에 모시고

B급 왕들은 잠시 후 들릴 "영녕전"에 모시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정전 19실>에 <순종>이 있는게 좀 야릇하다. <순종>이 우등생 왕?

멸망하는 왕조의 마지막 왕이고, 일제치하에서 왕도 아닌 왕이었는데...

 

<정전>의 동쪽에 있는 <동문 東門>으로 먼저 가 문 밖의 <전사청>을 구경하고 다시 들어 온다.

왕은 <재실 목욕청>에서 저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 왔단다.

 

"전사청 典祀廳"

<동문> 밖에는 <전사청>이 있는데 제례에 쓰일 음식을 만들던 조리실이라고 보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전사청 조감도>를 참고하고

<전사청> 앞마당에는 "찬막단 饌幕壇"이 있는데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검사하는 곳"이란다.

그리고 우측 뒤에는 "성생위 省牲位"가 있는데

"제례에 쓰일 희생물인 '소.양.돼지'를 검사하는곳이라 한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건물은 "수복방 守僕房"이라 하는데 "종묘를 지키고, 청소를 하며,

제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제정 祭井"

제수음식을 만들 때 쓰던 물을 긷는 우물이 <전사청> 우측 옆에 있다.

 

왕이 출입하던 <동문 東門>을 통과해 <정전>으로 들어 간다.

세계적 건축가들이 "단순함의 극치로 최대 웅장함을 표현한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극찬을 하는 건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다.

"한국의 파르테논 신전"

 

<정전> 안으로는 들어 갈수 없다.

그래서 <정전 내부> 참고 사진을 첨부한다.

왕과 왕비의 "신주 神主"를 모시는 방.

이런 감실이 19개가 있다.

 

"신주 神主"는 

죽은 사람의 이름, 친족 관계, 관직등을  나무 조각으로

신주는 죽은 조상을 상징하며 사당에 안치하였다.

 

일반인들에겐 비슷하지만 <신주> 대신 간략하게 만든 "위패 位牌"라는 것을 쓴다.

그리고 신주를 모실 사당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일회용 신주격인 지방(紙榜) 다.

"지방"은 사용 후 불태우죠?

 

<임진왜란> 때에 쪽바리들이 물밀듯 올라 오자 쪼다리 <선조>가 북으로 도망치면서도

이 <신주>만큼은 모두 챙겨 갔다죠?

 

<정전> 내부에서 제례를 올리는 모습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

우리나라 궁중 음악으로, 조선 왕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진행할 때 사용한

음악, 성악, 춤의 일체 말한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데 행하는 음악과 춤이므로

일반인들에겐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궁중음악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의미를 느끼며 감상하면 엄청 장엄하다고 하는데

나같은 속물은 잼없어 끝까지 들어 본적이 없다.

<세종대왕>이 작곡했다죠?

 

"신로 神路"

<정전> 정중앙에서 바라보는 "神路"와 "神門"이다.

여기는 왕도 다닐수 없어 "어로御路"와 "세자로世子路"가 없고 "신로神路"만 있다.

그래서 왕과 세자도 <동문>으로 다니는 것이란다.

<정전> 앞에 펼쳐지는 "월대 月臺"도 단순하면서 웅장한데

마당에 박은 '박석'은 '석모도'에서 모두 가져왔다고 한다.

돌맹이 하나 하나에도 지극정성이 느껴진다.

 

 좌측에 "공신당"과 우측엔 "칠사당"이 있다.

 

"공신당 功臣堂"

각 왕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功臣들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83명의 공신들이 배향되 있단다.

공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많지요?

<한명회> <신숙주>도 보이고...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 <숙종>의 배향공신이란 것도 처음 알고...

'세도정치'의 두목 <김조순>이가 <정조>의 배향공신이란 것도 괴이하고...

 

한가지 더 언급하면

<순종>의 배향공신 중에 <친일파의 대두>인 <이완용>이 포함되 그의 신주가 모셔져 왔었는데

해방  제거 했단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권력에 빌붙어  인간들의 행로가 눈물겹다.

 

<정전> 앞 우측에는 "칠사당 七祀堂"이 있다.

<유교>에 "토속신앙"을 가미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란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정전>의 "서문 西門"을 통해 나가면...

 

"영녕전 永寧殿"이 바로 나타난다.

<정전>보다 규모는 약간 작아 덜 웅장하지만, 더 아름답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영녕전 신문 永寧殿 神門 (정문)"

<영녕전>도 <정전>과 같은 의미의 사당인데

단지 B급으로 분류되는 왕들과 추존왕이 모셔졌다는 것 뿐이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나와 있다.

 

"영녕전 전경"

가운데 4칸은 <태조 이성계>의 "4대 조부"를 모시고

좌우에 7명의 왕과 4명의 추존왕, 그리고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도표를 참고하면 된다.

 중요하거나 독특한 분들에 대해선 제가 약간의 설명을 첨부 해 놨으니 참고하시고...

 

<1실~4실>까지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할아버지들이 모셔져 있다.

<1실>에 있는 <목조>는 <이안사>로 '고조부'가 되며 <전주> 출신이지만 '함경도 경흥'으로 이주해

당시 몽골의 관리인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내려 받아 4대까지 세습되었다.

<4실>에 있는 <환조>가 <이성계>의 아버지로 당시 '경흥부'의 '다루가치'였기에

<이성계>가 고향이 <전주>가 아니라 <경흥부 함흥>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8실>에 있는 <덕종>은 <의경세자>로 <세조>의 장남인데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예종>이 되며 그는 추존왕이 된다.

<성종>의 형이기도 해 <예종>까지 일찍 죽자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의 왕비들과 대비들의 권력다툼이 <여인천하>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냈고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위한 <연산군>의 한서린 복수로 이어졌다.

 

<13실>에 있는 <경종>이 <장희빈>의 아들이고

<15실>의 <장조>가 그 유명한 <사도세자>로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이다.

 

<16실>의 <의민황태자>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다.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영녕전"을 뒤돌아 보며

<영녕전>의 <서문>으로 나가면....

 

"영녕전 악공청 永寧殿樂工廳"이 있는데

<영녕전>에서 <종묘제례악>을 하는 뮤지션들과 무용수등이 대기하는 곳이란다.

 

<김건희>가 골프카터를 타고 여기까지 와 테이블을 펴고 차를 마셨단다.

 

"영녕전 정문" 앞을 지나면...

 

"정전 악공청 正殿樂工廳"을 만난다.

여기는 <정전>에서 <종묘제례악>을 하는 뮤지션들과 무용수등이 대기하는 장소라고...

 

"정전 신문 正殿神門" 앞을 지나 우회전 하면...

 

<외대문>으로 나가는 神路를 통과하여 <외대문>을 나서면...

 

<종묘시민광장>이 펼쳐지며 <종묘> 탐방을 마친다.

이 광장 아래엔 지하공용주차장이 있다.

 

<종묘>탐방에 이어 계속해서 우측 "서순라길" "익선동"을 탐방한다

답사기는 별도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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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여강길 11코스

동학의 길

주록리마을회관-물구름교-이야기소-성혈사-최시형묘-광금사입구-물구름교-주록리

2026년 6월 28일 (일) 맑음

 

[여강길 종합 안내도]

<11코스>는 추가로 조성한 코스라 한다.

안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강길>은 대부분 <남한강변>을 따라 조성되었지만 

<11코스>는 '이천시'와 '광주시' 사이 <원적산> 계곡에 만들어 진것이 특이하다.

 

[이천역]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를 가는 방법은 자가용을 타고 가는게 제일 좋다. ㅎ

대중교통도 시간만 잘 맞추면 별 문제 없이 싸고 편리하게 다녀 올수 있는데....

[주록리 가는 시내버스]

가장 좋은 방법은 <이천역>에서 "09:05"에 출발하는 <2803번 이천시내버스>를 타는 것이다.

<주록리>까지는 약1시간이 걸린다.

<여주역>에서도 시내버스를 이용 할수 있는데 적당한 시간엔 없고 시간도 1시간반이나 걸린다.

 

<경강선> 전철운행시간을 참고하여 각자 편리한 시간에 맞춰 다녀 오면 되겠다.

나는 <이매역>에서 "08:13" 전철을 이용했으며 <이천역>까지 31분이 걸렸고, 이어서

<2803번 이천시내버스>를 "09:05"에 타고 <주록리 종점>에 "10:00"에 내렸다.

 

★버스 시간은 가끔 바뀌니 가기전에 '이천시홈페이지'를 확인하기 바란다.

 

[주록리 버스종점]   10:03

[여강길11코스 시종점]

<스탬프함>이 있는 "주록리 버스종점"에 도착해서 답사를 시작한다.

[여강길11코스 안내도]

<천덕봉>과 <원적봉>이 이루는 계곡을 휘돌아 오는 "9.5km"의 짧은 코스로

<해월 최시형선생 묘소>를 다녀 오는 단순 코스여서 구경거리는 없었다.

 

[주록슈퍼 앞 삼거리]     10:08

좌측 길은 <금사저수지> 방향이고, 직진길은 <이천역>에서 왔던 길이며,

뒤로는 <곤지암>으로 가는 길이다.

"주록리 走鹿里"는 한자로 봐야 의미를 알수 있다.

'달릴 주走'에 '사슴 록鹿'이니 "사슴이 뛰며 노닐던 마을"이란 의미

 

이어서 "靑松公園"을 지나는데 "여강길 리본"이 길안내를 한다.

 

[삼거리]     11:11

우측 <성혈사>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 간다.

<여강길 안내서>에는 이 다리가 "수운교 水雲橋"라고 안내하는데

<안내도>에는 다음에 만나는 다리가 "수운교"라고 한다.

 

[주록리 계곡 조망]

"원적산"의 "천덕봉"과 "원적봉"에서 분기하는 산줄기가 '말발굽' 형태의 계곡을 만드는데

좌측 산줄기 뒤는 <이천시>이고 우측 산줄기 뒤는 <경기 광주시>이다.

묘하게 <여주시>가 이 계곡안으로 꼽사리로 들어가 있다.

 

[수운교]      10:17

오리지날 여강길11코스는 직진했다가 좌측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이 다리를 건너 온다.

나는 직진해서 <최시형선생묘>를 찾아 보고 다시 계곡길로 내려 오려 한다.

그 이유는 오늘 날씨가 장난이 아니게 덮고, 좌측 산줄기는 구경거리 없는 단순 등산코스이며

버스 시간을 맞춰 일찍 돌아 가기 위함이다.

 

[수운교]

"동학 東學"의 창시자 "최제우선생"의 호가 "수운 水雲-물구름"이다.

 계곡에 잠들고 있는 "최시형선생"은 2대 교주가 되는데 뭔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별이' 안내판]

오늘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료를 미리 찾아 보던 중에 "별이"에 대한 얘기를 많이 보았다.

"별이"는 이곳에 사는 개인데 <동학의 길>을 자청하여 무료로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었다.

신통방통하게...

그래서 나도 오늘 만날수 있을 것 같아 맛있는 빵도 여러개 준비 했는데

아쉽게도 "별이"를 만날수 없었다.

오늘은 너무 더워 집에서 쉬나? ㅎㅎ

 

외줄기 마을 계곡길을 거의 직진해 올라 간다.

<주록리 계곡>은 여름 피서지로 제법 유명한가 보다

주거지 주택은 거의 없고 민박이나 펜션이 대부분이었다.

계곡물이 좋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괜찮겠다.

 

<수운교>에서 25분 가량 완만한 계곡길을 올라가면....

 

[이야기소]      10:41

볼거리 없는 계곡에서 만나는 유일한 쉼터인 <얘기소>를 만난다.

"이야기소"는 계곡물이 흐르다 바위들을 만나 도란도란 속삭이며 졸졸 흘러 간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벤치와 운동시설도 있다.

 

<이야기소>에서 10여분 더 올라 가면...

 

[갈림길]      10:50

<최시형선생 묘소> 입구를 알리는 삼거리를 만나 우측으로 올라 간다.

나는 오늘 우측으로 올라 갔다가 가운데 길로 내려 오려 한다.

 

삼거리부터 <최시형선생묘>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다.

 

별장같은 주택을 지나면...

[성혈사]      10:57

"성혈사 聖穴寺"를 만난다.

전통 사찰은 아닌듯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끝까지 직진해 올라 가면 '화장실'이 보인다.

[화장실 앞]     11:03~11:15  (휴식)

화장실 우측으로 "천덕봉 등산로"가 열리며 <최시형선생 묘소> 가는 길이기도 하다

 

[갈림길]      11:17

화장실에서 잠시 올라 가면 <최시형선생>의 장남인 "최동희의 묘"와

"최동희의 장남", 즉 <최시형선생>의 손자인 "최익환의 묘"가 있는 갈림길을 만난다.

<최시형선생>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선생>의 여동생인 <손조의>와 결혼하여 "최동희"를 낳았단다

 

<최시형선생 묘>는 직진해 조금 더 올라 간다.

 

[스탬프함과 쉼터]      11:23

묘소 가기 전에 스탬프함과 쉼터가 있는데 안내판도 있다.

[안내판]

"동학혁명"으로 외세에 저항하다가 원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선생은

<서울 송파나루> 건너 산에 안장되어 있다가,

1900년 3월 12일에 이곳 <천덕봉> 아래로 이장했단다.

 

"해월신사 최시형 묘 海月神師崔時亨墓"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등 서양의 "기독교", 즉 "서학西學"이 물밀듯 침투하자

"人乃天" 사상을 주축으로하는 "천도교 天道敎"를 창시한 <최제우선생>의 대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선생"이 외세와 싸우다 처형된 후 안장된 묘소이다.

'기독교', 즉 "西學"에 대항하는 우리 동양의 종교라는 의미로 '天道敎'를 우리는 "東學"이라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멸망해 가는 우리나라에 서양세력들과 쪽바리들이 물밀듯 침입하며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나라는 망해 갈때 이를 바로 세우고자 일어난 '혁명'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으며 그 중심에 선생과 같은 先師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하고 식민지시대로 들어 갔으니....

선생은 <최치원>을 중시조로 부잣집으로 유명한 <경주 최씨>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제지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머슴살이를 하던 중 

제1대 교주인 <최제우선생>에 의해 '천도교'에 입교하게 되는데

<최제우교주>가 조정에 붙잡혀 사형을 당하자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전북에서 <전봉준-손병희>등이 "동학농민운동"을 계획하자 합세하여 전투에 임했지만

<우금치전투>에서 '조-일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도피하다가 모두 붙잡혀 처형 당했다.

선생의 사진은 두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제2대 교주로 있을 때 촬영한 사진인듯하고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선생은 '반역죄'라는 죄명으로 붙잡혀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 사진은 주한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마튜닌>이 사형 전날 촬영한 사진이란다.

서울 종로3가 <단성사극장>이 있었던 <단성사빌딩> 앞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단다. 당시 연세가 71세였다고....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은 <동학농민운동>을 발발시킨 원흉인 <정읍군수 조병갑>이

어느새 출세하여 법원으로 들어가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였다는 것이다.

 

친일파들은 우리 백성들을 죽임으로서 승승장구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처절하게 싸우다 돌아 가신 先師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이런 애국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추모해야 할까

선생의 묘에서 바라보는 남쪽방향이다.

선생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 억울함을 어디에 토로해야 할지 몰라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최시형묘>에서 5분정도 산허릿길을 진행하면 계곡을 만나는데 세수 좀 하고...

[쉼터]       11:34

<최시형선생묘>에서 400m 거리에 이정표와 쉼터가 있으며 너른 임도를 만난다.

천도교의 이념이 적힌 푯말이 있다.

 

너른 임도를 12분여 진행하면...

[삼거리]     11:46

현위치를 알리는 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현위치 안내도]

오리지날 <여강길11코스>는 산길로 들어 가지만, 나는 여기서 계곡길로 바로 내려 간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다.

 

12분정도 내림길을 진행하면....

[성혈사 입구 삼거리]     11:58

조금전 <성혈사>와 <최시형선생묘>로 갔던 갈림길에 도착한다.

4분여 더 내려 가면...

 

[이야기소]      12:02

"이야기소"를 다시 지나고....

 

20여분 더 내려 가면....

[수운교]     12:22

"수운교 水雲橋"를 다시 지나고...

 

[주록리 마을 입구]     12:28

<주록리마을회관>이 있는 <주록리> 중심지에 도착한다.

건너편에 기념비가 하나 있는데...

 

<제4회 깨끗하고 아름다운 농촌마을 가꾸기 전국경진대회>에서

<주록리>가 "은상"을 수상했다고 기념비와 함께 '사슴' 모형을 설치해 놨다.

 

[주록천]

<주록리슈퍼> 옆 "주록천"에는 오후가 되니 벌써 피서객들이 모여 들고 있다.

 

[주록리버스정류장]       12:30

2시간 25분만에 원점회귀했다.

갈때는 <140번 여주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세종대왕릉역>으로 간다.

<140번>버스는 종점인 <상품리>에서 "12:50"에 출발하는데 여기까지 약6분이 걸려

"12:56"에 도착했다.

 

<140번> 시내버스엔 승객이라곤 나 하나 뿐이었다.

[세종대왕릉역>    1:50

원래 <여주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버스가 <세종대왕릉역>을 들려 가서

<세종대왕릉역>에 내려 전철로 환승하여 <이매역>으로 가며 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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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5코스

고려 고종과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서

강화내성 서문-석수문-국화저수지-고종 홍릉-고비고개-오상리고인돌-

고려저수지-내가면고천리-외포리선착장-삼별초항몽유허비

2026년 6월 7일 (일) 흐림

[강화나들길 5코스 안내도]

<강화나들길 5코스>는 '강화도'를 동-서로 횡단하는 코스로 20.2km란다.

<강화지맥>이 지나는 <고려산>과 <혈구산> 사이의 "고비고개"의 "옛 고개"를 넘는 코스여서 제법 어려운 코스다.

오늘 나는 <강화나들길 5코스>에 있는 <고려 제23대 고종>이 <무신정권> 하에서 휘둘리며 살다 사라져 간 흔적인

<홍릉>과 <무신정권>의 마지막 아우성인 <삼별초의 난>의 흔적을 찾아 간다.

 

[강화내성 서문]      9:20

<신논현역 버스정류장>에서 <M6427 광역버스>를 타고 <김포 구례역>에 내려 <70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강화버스터미널>에 내려 지난 <강화나들길 1코스>와 중복되는 <남문>에서 <서문>까지는 건너 뛰고

<서문 첨화루 西門瞻華樓>에서 출발한다.

 

['석수문 방향]

<서문>에서 <석수문>으로 건너 가면...

 

[석수문]

<나들길1코스>에서 만났던 "석수문 石水門"을 다시 만나고

 

[석수문에서 서문 조망]

<석수문>에서 <서문>을 뒤돌아 보고 

 

[고려산 조망]

"동락천 東洛川"을 따라 조금 올라 간다.

"고려산 高麗山"을 확실히 알아 두어야 방향 잡기가 쉽다.

<고려산> 정상엔 미군 레이더기지가 있기 때문에 <강화도> 어느 곳에서나 확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강화공설운동장]       9:24

<석수문>에서 50m쯤 올라 가면 좌측에 "강화공설운동장"이 있고

그 뒤로 <덕신고등학교>가 보인다.

 

<동락천>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덕신고 사거리]         9:27

<덕신고사거리> 만나는데 우측 <동락천>을 따라 올라 간다

 

<동락천>을 따라 7분여 올라 가면....

[국화저수지]           9:34

"국화저수지 菊花貯水池" 둑에 올라 선다.

1978년에 조성된 저수지로 '강화읍'과 주변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국화저수지]

저수지의 수면적은 약70,000평으로 예전엔 강화도민의 식수로 사용되었단다.

<강화나들길5코스>는 "옛고비고개길"로 넘어 간다.

<고려산> 중턱에 <고려 제23대 고종>의 무덤인 "홍릉"이 자신이 살다 간 <강화도성>을 바라보며 있다.

좌측 <혈구산>은 <연개소문>의 전설이 담겨있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산이다.

무었보다 <강화지맥>이 남북으로 길게 가로 지르는 산줄기 이다.     2013년에 종주 한바 있다.

 

[강화내성 조망]

<국화저수지>에서 "강화읍내"를 바라본다.

몽고의 침입시대 때 옛 고려의 도성이었던 "강화내성"이 있던 자리다.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세자인 아들을 화친을 위해 <몽고>로 보내며 바라 보았던 <견자산 見子山>도 새롭다.

<몽고>를 다녀온 아들 세자는 후에 <제24대 원종>이 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며 "강도시대 江都時代"를 끝낸다.

"강도시대"가 끝나며 "무신정권"도 몰락하며 <몽고 지배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첫번째가 마빡에 "忠"字를 박은 <충렬왕>이며 왕비인 <정화궁주>를 밀어 내고 <몽고 제국대장공주>가 왕비로 앉으며 

실질적인 '女王'이 되어 "몽고 지배"의 시대로 가는 것이었다. '몽고반점'의 시작이기도 하었다.

 

 

[국화리 마을 조망]          9:45

<국화저수지>를 좌측으로 돌아 '강화읍 국화리'로 들어 가고

 

[동락천 상류]          9:47

<고려산>과 <혈구산>에서 내려오는 "동락천"이 <국화저수지>에 유입되는 곳을 지나면...

 

[고비고갯길 입구]       9:48

<고비고개길>의 입구가 반긴다.

5분여 <동락천>을 따라 직진하면....

 

[국화리 농촌체험마을]          9:53

"국화리농촌체험마을" 입구를 지나고...

 

5분여 마을길을 진행하면...

[적석사 방향]           9:58

갈림길을 만나는데 "적석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        10:00

이어서 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정표가 길안내를 한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12분여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지고...

[갈림길] (길조심)         10:12

마을길에서 샛길로 꺽어지는 곳을 만나는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쉼터]      10:21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10여분 진행하면...

 

[강화학생야영장]         10:22

<인천시 강화국화리 학생 야영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삼거리]            10:23

이어서 <국화리학생야영장 정문>과 <홍릉>으로 가는 도로를 만난다. 길조심을 해야한다.

<강화나들길>은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 우측으로 간다.

다만, <고려 홍릉>을 다녀 가려면 우측으로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 와야한다.

나는 오늘 답사의 하일라이트가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무덤인 <홍릉>이라고 생각하기에 다녀 오기로 한다.

 

[홍릉 방향]

<홍릉>까지는 왕북 1,1km 정도 되는데 약간 가파르다.

조금 올라 가면...

 

[홍릉 입구]          10:25

<학생야영장 정문>과 <홍릉입구>를 만난다.

우측을 바라보면...

 

[학생야영장 정문]

"인천시 강화국화리 학생야영장 정문"이 있는데 야영장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야영장 후문]

<홍릉>으로 올라 가다 만난 야영장 후문에서 바라본 야영장 내부.

5분여 더 올라 가면....

 

[홍릉 재실]        10:30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재실을 만난다.

<고려왕>들의 왕릉은 거의 대부분 북한 <개성> 근처에 있어 가 볼수 없다.

하지만 <강화도>엔 2기의 고려 왕릉이 있는데 바로 <23대 고종-홍릉>과 <21대 희종-석릉>이 있다.

<23대 고종-홍릉>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 살다 <개성>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고

<21데 희종-석릉>은 <무신정권>을 깨 부실려고 하다가 자기가 되레 부셔져 유배 왔다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홍릉 재실 조망]

<재실> 안으로는 들어 가볼수 없게 잠겨있어 <홍릉>으로 올라 가며 들여다 본 <재실>이다.

재실엔 "만녕재 萬寧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을 뿐 왕릉 재실로는 초라하다.

 

[홍릉 가는 길]

<재실>에서 <홍릉>으로 올라 가는 길은 공사중이라고 막아놨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다시 올리도 없기에 무시하고 올라 간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올라 가면...

 

[홍릉 입구]         10:38

도로는 사라지고 돌계단이 왕릉의 입구임을 알려 주고...

 

[홍릉 하단]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과는 달리 너무 초라한 <고려 왕릉>을 만난다.

 

[안내문]

"홍릉 洪陵"에 대해선 안내문을 꼭 읽어 보시라

 

[홍릉] 

"홍릉 洪陵" "고려 제23대 고종의 릉"

봉분을 수리하느라 공사 중이다. 관리자가 공사 중인데 왔다고 지랄한다.

공사하는데 아무른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공사 우선인가? 관람 우선인가. 공사하는게 뭔 끝빨인가.

묘비에는 "高麗高宗洪陵"이라고 쓰여 있다.

 

[고려 왕조 계보]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서기918년에 통일 왕국을 탄생시켜

<이성계>에 의해 왕국이 무너 질 때까지 474년간 유지 되었던 전제군주정 국가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고려"는 <태조 왕건>대부터 <제17대 인종>대까지 였고

그 이후 <무신정권>과 <몽고침탈시대>가 이어져 "고려왕씨왕조"는 실제 <17대 인종>까지 220여년 뿐이였다.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시 "왕씨왕조" 재건을 도모한 <제31대 공민왕>이 있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성계>에 의해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 朝鮮"으로 갔다.

 

<무신정권> 치하에서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무덤이

고향으로 돌아 가지도 못하고 쓸쓸히 외로이 남아 있다.

 

[갈림길]           11:02

<홍릉>에서 다시 내려가면 이정목이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차단기]        11:14

"옛고비고개"로 넘어가는 오르막 고갯길을 올라 간다.

 

점점 가파라지는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면....

[고개]         11:19

"옛고비고개"

옛날 보부상과 짐꾼들이 넘나들던 고개였으며

강화도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강화지맥"이 지나는 고개이다.

측 계단으로는 <고려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新고비고개>와 <혈구산>으로 가는 길이다.

2013년에 종주한바 있다.

<강화나들길5코스>는 직진해 내려 간다.

 

[내림길]

완만한 내림길을 15분여 내려 가면....

 

[흑석사 입구]          11:34

<흑석사 입구>라는 임도를 만나는데 좌회전하고

 

[갈림길]          11:35

이어서 길 안내 리본이 펄럭이는 갈림길을 만나 다시 우측 숲으로 들어 간다.

 

10여분 숲길을 진행하면...

[고천4리 마을]         11:45

<내가면 고천4리 마을>을 만나고..

 

[고천리고인돌 입구]         11:48

이어서 <고천리 고인돌 입구>를 지난다.

<강화나들길 14코스>에 있는고인돌로 너무 멀어 생략하고 뒤돌아 보면...

 

[고려산 조망]

<고려산>이 가까이 조망되는데 <강화지맥 마루금>을 넘어 왔다는 것을 실감 할수 있다.

 

[혈구산 조망]

남동쪽으로는 <新고비고개>와 <혈구산>이 가까이 보이고...

 

[고천리 조망]

진행해야할 서쪽으로는 <고천리 마을>이 평화롭게 펼쳐지며

그 뒤로 <석모도>의 <해명산>이 조망된다.

<고천리>를 15분여 통과하면...

 

[고개]      12:14

이름 모를 고개를 넘게 되는데...

 

[삼거리]        12:15

이어서 삼거리를 만난다.

<강화나들길5코스>는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 가고, 우측으로는 <강화나들길17코스>가 이어진다.

 

16분 정도 조용한 길을 따라 내려 가면...

[길조심]           12:31

느닺없이 좌측으로 길이 꺽어지는데 이정표가 위에 있어 지나치기 쉽다. 길조심 해야 하는 곳이다.

계단을 올라 가면...

 

"오상리 고인돌군 鰲上里支石墓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낙조봉 조망]

<오상리 지석묘>에서 <강화나들길17코스>가 지나는 <적석사><낙조봉>을 조망한다.

"적석사"는 "강화8경" 중에 하나로 "낙조봉"과 함께 명승지로 꼽힌단다.

강화홈피에서 인용하면...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합니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입니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습니다.

 

10여분 숲길을 진행하면...

[오상리 마을]        12:44

<내가면 오상리 마을>을 만나고...

 

[저수지 관리소 앞]         12:45

이어서 <고려저수지 관리소> 앞을 지나면...

 

[고려저수지]

"고려저수지 (내가저수지)"에 도착한다.

화도에서 두번째로 큰 저수지인데,

이곳에 저수지가 1950년대초에 신축되기 전까지 "고천"이라는 "강화에서 두번째로  마을"이었단다.

<강화읍>에서 <고천리>로 넘는 고개 이름인 "고비고개"의 어원이 되는 마을이란다.

 

[저수지댐]

"금계국"이 만발하기 시작하는 <고려저수지 제방>을 지나며....

 

[고려저수지 조망]

동쪽을 바라보면

<고려산>과 <혈구산>이 조망되며 저수지 변으로 주택들이 평온하고 아름답다.

 

[오상리 조망]

서쪽으로는 <오상리>가 펼쳐지며

그 뒤로 <석모도 상주산>과 다시 그 뒤로 <교동도 화개산>이 조망된다.

 

[수문]

수문이 있는 곳에선 더 이상 수변길을 진행할수 없고

 

[고천리]         1:03

제방 아래로 내려가면...

 

[잘못된 이정목]

이정목이 길안내를 하는데 잘못된 이정목이다.

<강화나들길>이 생긴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렇게 서 있나

여기선 좌측으로 진행해야 한다.

 

[고려저수지 입구]        1:08

<고려저수지 입구 삼거리>로 나가서 좌회전 하면...

 

[내가초등학교 앞]         1:09~1:24

"내가초등학교"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내가면사무소 앞]        1:27~1:35

이제 체력이 달리고 발바닦도 아프다.

때마침 <외포리>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어 남은 구간은 볼거리도 없고 해서 버스로 이동한다.

<49번시내버스>를 9분 정도 타고 가면...

 

[외포리 버스정류장]         1:44

<외포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외포리 선착장"으로 나가면....

 

[외포리 수산물직판장]

 

[외포리선착장]         1:46

"외포리 선착장"은 <석모도>를 오갈때 이용하던 선착장이었지만 현재는 <석모대교>가 건설되 배는 끊겼다.

그런데도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삼별초비 조망]         1:46

오늘 답사의 두번째 하일라이트인 <삼별초 기념비>가 있는 곳을 조망한다.

<외포리 선착장>을 가도 <삼별초비>가 어디 있는지 잘모르기에 알려 드린다.

 

[삼별초비 앞]         1:51

<외포리 선착장 상가> 끝 지점인 <망양돈대> 아래에 <삼별초>의 흔적이 있다.

 

[삼별초비와 조형물]

<삼별초>가 <몽고>와의 화친을 거부하고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 받는다는 명목으로

<무신정권>의 <삼별초> 우두머리인 <배중손>등이

<고려의 왕손>인 "왕온"을 추대하여 왕으로 모시고 항거하자, <고려왕실>과 <몽고군>이 합세해 진압하려하자

이곳 <외포리>에서 천여척의 배를 타고

<삼별초>가 <전라남도 진도>로 도망치고, 그곳도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도망쳤다.

이러한 사건을 우리 역사에선 "삼별초의 난"이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성공한 쿠데타"를 "혁명" 또는 "반정"이라하고, 실패한 쿠데타를 "난 亂"이라 한다.

그러므로 <삼별초의 난>은 "실패한 쿠데타"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외세와 맞서 싸운 호국정신은 다른 각도가 아닐까

 

 "진돗개"와 "돌하루방" 조형물이 지역간 관련이 있다고 세워졌단다. 좀 웃긴다. ㅎ

 

[삼별초비]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 三別抄軍護國抗夢遺墟碑"

"삼별초의 난"은 정말 몽고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행위 였을까....

<무신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권력욕에서 나온 쿠데타였을까....

 

 

 

[제주도를 향해]

<진도>로 이동해 성을 쌓고 저항하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패배 당하자

살아 남은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도망간다.

<제주도>에서 마저 처참한 꼴을 당하자 이번엔 <일본 오까나와>로 도망쳤다고 한다.

 

[진도를 향해]            1:55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제24대 원종>은 <몽고>와 화친하고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한다.

이에 반발한 <무신정권>의 잔당인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군>은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향한다.

<진도>에 도착한 <배중손>의 <삼별초>는 <진도>에 "용장성 龍藏城"을 쌓고 <왕온>을 왕으로 모시며

고려의 재건을 도모했지만 1년도 못가 패배하고 <배중손>과 <왕온>은 죽었다.

그곳을 다녀 온바 있어 <용장성> 사진을 첨부한다.

[진도 고려항몽충혼비]  (참고자료)

[진도 용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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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역사박물관-강화도

전등사와 온수리성공회, 그리고 이규보 묘

이규보 묘-길정저수지- 온수리성공회-전등사

2026년 5월 16일 (토) 약간 흐림

[목비고개]      9:10

<강남역>에서 <M6427 광역버스>를 타고 <김포 구래역>에 내려 다시 <70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목비고개" 버스정류장에서 내린다.

"목비"는 '불사를 행할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쓰는 도구'란다.

그런 지명의 유래를 가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름이 특이해서 사전을 찾아 봤다.

 

<이규보묘>는 여기서 뒤돌아 가야 한다. 뒤돌아 보면...

[삼거리]

바로 앞에 "별토리"라는 꽃집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한다.

 

[길직리 마을]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마을을 10여분 통과하면....

 

[이규보 묘역]      9:23~9:33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 묘역" 이 나타나는데 '고려시대' 인물의 묘역으로는 상당한 규모이다.

"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 "神道碑"가 세워져 있으며 우측엔 재실이 있고, 좌측엔 "유영각"이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정치 전력과 상관없이 순수 문학인으로 최고의 인물을 내가 꼽는다면

고려시대엔 단연 "백운 이규보선생"을 첫손가락에 꼽고, 조선시대엔 "송강 정철"을 꼽지 않을수 없다.

신라시대 뗀 "고운 최치원"

 

<고려 고종 시대>, 즉 <무신정권 강화도 도피시대>에 최고의 문장가로서 왕실의 거의 모든 중요 서류,

즉 외교문서까지 작성하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한국 문학사에도 찬란히 빛나는 최고 文學作家로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재실]

<이규보선생>은 '경기도 여주'에서 1169년에 태어나

1241년 <고려 고종> '江都시대' 때 강화도에서 당시로는 엄청 장수인 만72세로 생을 마감했단다.

 

그는 엄청난 애주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그가 술을 마시며 취해 산 이유는 "똑똑한 나를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다"라는 자기 체념적 사고였단다.

그의 원래 이름은 <李仁低>였는데, 천재가 술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 해 과거시험에 여러번 떨어졌고

22세 때 4번째로 과거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전날 밤 에서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奎星)'의 화신이 나타나서 "합격이요"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결국 과거에서 '규성'의 말대로 장원으로 합격했는데 이후 "규성이 결과를 알려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규보(奎報)'로 바꾸었다고 한다.

*참고로 "규성(奎星)"은 요즘 천문학에선 "안드로메다"라고 한다.

 

유영각 遺影閣

후손들이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영정각이란다.

"문충공 이규보 상"

선생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면

그는 어려서 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특출한 인물이었는데도 그는 과거시험에 계속 떨어지자

당시 만연하던 뇌물을 <무신정권> 관리에게 주지 않아서 떨어진걸로 변명을 늘어 놓았다.

스무살도 되기 전부터 자기 재능을 과신하며 오만해져 공부는 않고 술만 마시며 시험 준비를 소홀히 했는데

합격한 후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인정했다고 한다.

관직에 오르고 난 후

그는 <무신정권>에 극한적 '아부'를 하며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 가기 시작했단다.

그리곤 '아부'를 위해 수많은 뇌물을 긁어 모으는 비리관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부'를 하며 손바닥을 얼마나 비볐는지 "손금없는 인간"으로 까지 비하된 인물이다.

말빨, 글빨, 아부빨, 머리 회전력,

조선시대 <송강 정철>과 닮은 점이 너무 많은 인물이다.

 

<이규보선생>이 마지막으로 오른 관직은 <문하시랑평장사>로 요즘으로 치면 '부총리'쯤 된다.

 

[이규보 묘]

<이규보선생>이 남긴 작품들은 많은데 무지 유명한 것들만 몇개 언급하자면

<고구려>를 탄생 시킨 "고주몽"을 영웅으로 묘사한 영웅 서사시 "동명성왕편"이 있는데

우리나라 最古의 기록 역사 서사시로 이 작품을 쓸때가 26세였단다.

그리고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상국 相國'은 '재상'이라는 뜻이니 "고려의 재상인 이규보선생의 작품집"이라는 뜻이다.

詩, 소설, 수필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필자인 <파란문>이 가장 좋아하는 詩 하나를 소개 한다.

 

                                      "端午見鞦韆女戱" 단오견추천녀희 (단오에 그네 뛰며 노는 여자들을 보고)

               推似神娥奔月去(추사신아분월거) : 밀어 올릴 때는 항아(姮娥)가 달나라로 달아나는 듯 같더니

               返如仙女下天來(반여선여하천래) : 돌아올 땐 선녀가 하늘에서 오는 듯하네

               仰看跳上方流汗(앙간도상방유한) : 솟구처 오르는 것 바라보면 온 몸에 땀이 나는 듯하지만

               頃刻飄然又却廻(경각표연우각회) : 순식간에 치마자락 펄럭이며 다시 또 돌아오누나

               莫言仙女下從天(막언선여하종천) :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막연히 말을 마소

               來往如梭定不然(래왕여사정불연) : 베틀의 북처럼 쉬지않고 왔다갔다 하네.

               應是黃鸎擇佳樹(응시황앵택가수) : 아마도 꾀꼬리가 아름답고 좋은 나무에 앉을려고

               飛來飛去自翩翩(비래비거자편편) : 날고 날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항아(姮娥)*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다)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은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술과 詩, 거문고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그많큼 술과 여인 음악등 풍류를 즐긴 당대 최고의 문장가다.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그렇듯...

술과 거문고, 그리고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다 간 선생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기록으로 남겨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감명 깊은 문학작품으로 읽혀질수 있으며 선생을 느낄수 있게 했다.

기록이 그 많큼 중요하다

선생은 일본에서 더욱 유명한데 <동경대학> 입시문제 중에 <동국이상국집>에 대한 문제가 출제 됫을 정도다.

 

[조망]

선생의 묘 정면으로는 <정족산>이 조망된다.

<단군>의 세 아들이 城을 쌓았다고 <정족산성>을 <삼랑성 三郞城>이라고 하는데

선생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의 작품은 아직도 우리를 감명시킨다.

 

[길직리 통과]

<이규보선생 묘>에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마을을 23분 정도 걸려 통과하면...

 

[버스정류장]      9:56

<신촌마을입구 버스정류장>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 직진하고

 

[길직1리]

다시 '길직1리 마을'을 15분여 더 통과하면...

 

[길정저수지]       10:12

"길정저수지"를 만나는데 <정족산>이 다가오며 우측 멀리 <마니산>이 조망된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척사업을 한곳이 <강화도>라는거 아시나요?

<몽골>의 침략으로 <개성>에서 <강화도>로 도피한 <고려왕실과 무신정권>은 장기 체류에 대비하며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앞에 보이는 <마니산>은 원래 섬이었는데 간척사업으로 <강화도>와 붙어 버린것이다.

인천국제공항 사업으로 <영종도>와 <용유도>가 붙어버린것 처럼....

농사와 생활용수를 위한 저수지도 필요해서 대규모 저수지들이 만들어 졌는데

그 중에 <길정저수지>가 제일 큰 저수지 중 하나다.

지금은 '인천최초 태양광발전소'가 저수지 가운데에 설치되 있다.

 

[조망]      10:17

<길정저수지> 남단까지 가서 뒤돌아 본 <진강산>과 <덕정산>이다.

 

<진강산> 기슭에는 고려 제21대 왕 "희종"의 릉이 있고 - "석릉 碩陵"

고려 제22대 왕 "강종"의 왕비인 "원덕태후"의 릉이 있다. -곤릉 坤陵-

또한 고려 제24대 왕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릉도 있다. -가릉 嘉陵-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39년여를 살았기에 강화도엔

<고려산> 기슭에 있는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릉(홍릉)>과 함께 2기의 왕릉과

2기의 왕비릉이 있는 것이다.

 

우측에 보이는 <덕정산>은 <강화지맥>이 지나는 산으로 2013년에 종주 한바있다.

<진강산>과 <덕정산> 사이엔 '해병대 포 사격장'이 있다.

 

[보리밭]

요즘 보리밭 보기 어려운데 여기서 보리밭을 감명 깊게 바라본다.

괜히 맥주 생각이 나넹? ㅎ

 

[강남중학교]     10:25

<길정저수지>를 지나면 <강남중학교>를 만나고...

 

[강화노인문화센타]      10:34

이어서 <강화남부노인문화센터>를 만나게 된다.

 

[해란길]      10:35

<강화남부노인문화센타> 정문 앞 도로를 지나면

 

[온수리 성공회 조망]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보이는데 먼저 저곳을 찾아 간다.

 

[성공회 정문]        10:40~10:52

<온수리 성공회 정문>으로 들어 가면....

 

[온수리 성공회 성당]

<강화읍내>에 있는 <성공회 성당> 다음 건축된 "강화온수리 성공회 성당"이다.

<강화도>는 <병인양요><신미양요>등 무력 외세침략의 전초지였을 뿐만아니라

외국 종교의 침투가 시작 된 곳이기도 하다.

 

[사제관]

초기 <온수리 성당>의 사제들이 살던 사제관이 있고

 

[외삼문-종루]

"성공회 온수리성당"의 정문인데 조선식 "외삼문"으로 만들어 외국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종교 침투는 치밀했던 것이다.

"외삼문"은 종루로도 사용했단다.

 

[구 성당]

"외삼문"을 지나면 성당이 한옥처럼 건축되었지만 내부는 <강화읍내 성공회>와 같이 서양식으로 되 있었다.

 

[신 성당]

새로 지은 신축 성당은 '바실리아양식'으로 2004년에 준공했단다.

[신 성당 내부]

<성공회>는 '영국 교회' 임으로 내부는 영국교회와 같단다.

 

[정족산 조망]

<성공회 성당>에서 오늘 마지막 방문지인 <정족산>을 조망하는데

바로 앞에는 '이탈리아 교회'인 "천주교 온수리 성당"이 보인다.

강화도엔 여러 나라 여러 종류의 교회들이 많다.

이렇듯 <강화도>는 '서양 종교침투의 전초기지 각축장'이었던 것이다.

서울로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위한...

이런 서양 종교를 "서학 西學"이라고 했는데

이런 종교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선 "人乃天 사상"을 기치로 내건 토속 종교 "天道敎"가 등장하는데

이를 "서학"과 대비되는 동양의 종교라고  "동학 東學"이라 한것이다.

하지만 "동학"은 "서학"에 밀려 처참하게 쇠퇴하고 말았다.

 

[온수리]      10:54

<성공회 온수리성당>에서 나가면 <강화도>에서 두번째로 번화한 <온수리> 중심지를 지나고...

 

[동문 입구]       11:04

이어서 <전등사 동문 입구>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올라 가면...

 

[동문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12분 정도 이어진다.

<전등사>는 대부분 정문인 <남문>으로 올라 가기에 <동문> 코스는 한적하다.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데도

 

[동문 앞 상가]

<동문>앞 상가도 한적하다.

 

[동문]        11:16

"삼랑성 동문 三郞城東門"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고

[동문 안]으로 들어 가면 우측에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양헌수 승전비]

"양헌수 전승비"

<양헌수 장군>이 없었다면 프랑스놈들이 강화도 전등사를 짓밟았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전등사 가는 길]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때에 <고려 고종>과 <무신정권 >은 강화도로 천도를 해 이곳에 임시 왕궁을 지었단다.

<부처님 오신 날> 전날이라 연등이 내방객들을 반긴다.

그리고 오래된 소나무가 울창한데, 하지만 소나무 옆구리엔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이 송진 체취를 한 흔적이라고...

 

[동문-남문 합류지점]        11:22

<동문>에서 공원같은 산사를 6분여 진행하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가 <남문>에서 올라 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었다.

나는 예전에 두어번 온적이 있으나 <남문>으로 왔고, <강화지맥>을 할 때는 <북문>으로 방문 한적이 있다.

오늘은 <동문>으로 올라 왔으니 <삼랑성>의 모든 문을 통과했다.

 

[은행나무]

삼거리엔 유명한 <은행나무>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죽림다원]        11:23~11:35

<은행나무>를 지나면 찻집인 <죽림다원>이 쉼터 역활을 하며 

 

[전등사 입구]       11:37

"전등사 傳燈寺"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즉 서기381년에 "아도화상"이 우리나라 최초로 창건한 절이란다.

<아도화상>은 이 절의 이름을 "진종사 眞宗寺"라고 했는데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왕비였던 "정화궁주"가 이 절에 '대장경'과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절이름을 "전등사 傳燈寺"로 바꿨단다.

 

참고로 " 정화궁주" 본래 충렬왕의 첫번째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공주 출신의 왕비인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

즉 "석가모니 생일"이다.

 

[대웅보전]

절간에 가면 절간에 따라 <대웅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차이는 뭘까?

"大雄-큰 영웅"이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를 의미한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모시고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등 "一佛과 二보살"을 모신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와 '아미타불' '약사불'과 함께 "三佛"을 신다.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4개의 추녀 밑에 표기한 "나부상"을 주의 깊게 보시라~

<대웅보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고

 

"나부상 裸婦像"

-옷 벗은 여인 상-

[나부상 1]

<대웅보전> 추녀 밑에는 필자가 보기엔 좀 괴상한 목조각이 4개의 추녀를 떠밭치고 있다

그런데 이 목조각을 "나부상 裸婦像"이라 한다

"옷 벗은 여인 상"이라는 의미일진데 필자인 <파란문>의 눈엔 '여인'으로 보이진 않는다

여하튼 이 "나부상"에 대해선 여러 설이 전해 오고 있다는데...

[나부상 2]

가장 알려진 설화로는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축하던 목수가 절 아래의 주막 주모와 눈이 맞아 돈을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돈을 들고 튀었고, 이에 목수가 "주모는 영원히 무거운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면서 속죄하라,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여색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 넣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단다.

[나부상 3]

전설은 전설이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조각상들은 “불교 외호 신 중에 하나인 "나찰"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며 불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조각되었다는 것이다.

[나부상 4]

또 다른 설화는

앞에서도 언급한 법등을 전달해 "전등사"라는 이름을 갖게 한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를

모질게 괴롭힌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나체상 이라는 설도 있다.

<정화궁주>가 자신을 괴롭힌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옷벗겨 지붕을 떠 받치게 했다는 것이다.

 

전설은 전설이고 난 학자들의 의견을 믿을련다~ ㅎ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5호

<대웅보전>이기에 <석가불>과 좌우에 <아미타불> <약사불>이 함께 있는데 나무를 조각한 불상이란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기둥에 쓴 이름들]

<대웅보전> 안 기둥엔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하나 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란다. 367명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후 전쟁에서 이기고 모두 살아 남았단다.

 

[사고지 가는 길]

<대웅보전> 좌측으로 <약사전>과 <정족산 사고지> 가는 길이 이어진다.

아주 잠시 올라 가면....

 

[정족산 사고지]        11:52

"강화 정족산 사고지"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고...

 

[장사각]과 선원보각]

史庫地 안으로는 들어 갈수 없어 정문 문틈으로 촬영한 史庫地인데

왼쪽이 <조선왕조실록>를 보관했던 "장사각 藏史閣"이고

오른쪽이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 璿源寶閣"이다.

 

[사고지 앞]

<사고지> 주변엔 <사고지>를 지키는 군사들의 진지가 있었단다.

 

[전등사 앞]

다시 <전등사> 정문 앞으로 내려가 <남문>으로 절간을 벗어나면

 

[남문]        12:19

<전등사>의 울타리 같은, 아니 실제 울타리인 <삼랑성>의 정문인 "남문 南門"을 만난다.

<몽골> 침략으로 피란을 왔던 <고려왕실>과 <무신정권>은 임시 거처로 이곳에 왕궁을 세우고 당분간 살았단다.

 

[남문]       12:21

"종해루 宗海樓 (남문)"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에 나와 있다.

 

[병인양요 전투 상황]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 참전군인인 <쥐베르>가 당시 상황을 묘사해 기고한  기사 중에 <삼랑성>을 침공하는 삽화다.

당시로는 신형 무기인 대포를 쏘며 <남문>으로 진격하는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때 우리나라 "양헌수 장군"과 367명의 군인들이 게릴라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유일한 승리였다.

 

{남문 밖]      12:23

'구 한말' <안동김씨 세도정치세력>이 붕괴되며 새로운 <고종>과 <대원군> 정치세력이 들어 서는 혼란한 <조선>을

잡아 먹어려 덤벼드는 서양 세력과 일본세력....

그들의 교두보였던 <강화도>

암울하고 씁쓸한 역사를 뒤로 하며 오늘 답사를 마친다.

 

갈 때의 교통편은 올 때의 역순이다.

 

 

 

전등사-이규보묘.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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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강화외성과 호국돈대길 <2부>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손돌목돈대-용두돈대-광성포대-덕진진-

덕진돈대-강화척화비-초지항-초지진-초지대교

 

2026년 5월 13일(수) 맑음

 

[강화나들길 2-A코스 종점]      12:56

"강화나들길 1-A코스"를 끝내고 계속해서 "강화나들길 2-B코스"를 진행한다.

 

[강화나들길 2-B코스 시점]     12:57

<2-B코스> 출발지에도 출입문이 설치되 있고 쉼터도 있다.

 

[오두돈대 광성보 조망]

해안길을 진행하며 앞으로 진행할 <강화외성>의 유적들을 조망한다.

"오두돈대"가 먼저 보이는데 '자라 머리 모양 지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봐야 알수 있다.

27분 정도 진행하면...

 

[오두돈대]      1:24

"오두돈대 鰲頭墩臺"에 도착한다

"자라 오鰲, 머리 두頭" 즉 "자라 머리" 형태 지형에 설치된 돈대란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돈대 내부]

텅 빈 돈대 내부를 둘러 보고 나가면...

 

[강화외성 전성 유적지]      1:29

<오두돈대> 옆에는 <강화외성>의 흔적을 복원해 놓은 곳을 만난다, 

 

[강화외성과 오두돈대]

여기에 복원된 <강화외성>은 좀 독특한 형태의 城인데 

"벽돌"로 城을 쌓았는데 이는 <영조> 때에 쌓은 것으로 이런 城을 "전성 塼城"이라 한단다.

'벽돌 전塼'자이다.

 

[해안길]  사진을 클릭하면 더 확대 할수 있음

<오두돈대>를 지나면 <강화외성>의 최대 진지인 "광성보"가 조망되기 시작한다.

<염하>에 핀 갈대를 벗 삼아 시간을 잊고, 세상을 잊고,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면....

 

[광성보]      2:00

"광성보 廣城堡"

<광성보> 입구에 도착한다

<강화도> 유적 중에 입장료를 받는 세곳 중에 한곳이고 입장료도 가장 비싸다.

성인 1,400원으로, 70세 이상만 무료다.

 

[안해루]

"안해루 按海樓"

'누를 안按, 바다 해海'를 사용 하니 "바다를 제압한다"라는 의미인듯 하다.

<강화외성>에 있는 문루 6개는 모두 바다와 관련이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 미군의 침공을 받아 쑥대밭이 되고, <어재연장군>등 거의 전원의 조선군이 전사한 곳이다.

 

<안해루> 좌측엔 <광성돈대>가 있다.

 

[광성돈대]

"광성돈대 廣城墩臺"

"보堡"는 요즘 군대식으론 "대대급 부대"이고 "진鎭"은 "중대급 부대" 쯤 될것이며

"돈대墩臺"는 "소대급 부대" 정도 될 것이라 한다.

이곳 <광성돈대>는 <광성보 안해루>의 핵심 방어 기지가 되겠단다.

 

 

[안해루 밖]

<안해루>에서 바라본 바깥 광경이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신미양요>의 포성과 화약연기는 전혀 없고 한가롭기만 하다.

 

[광성보 공원]

<안해루>에서 '소나무들이 받들어 총'을 하고 있는 듯한 공원길을 잠시 진행하면...

 

[무명용사비와 쌍충비]     2:10~2:30

"쌍충비각 雙忠碑閣"

<신미양요> 때에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장군"과 "어재순장군" 순절비와

함께 전사한 "59명의 무명 용사 순절비"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면 된다.

 

[쌍충비 비문 해설]   사진을 클릭하여 확대하면 작은 글도 읽을수 있다.

 

[어재연장군]

<어재연장군 생가>를 다녀 온적이 있는데, <경기옛길-영남길>의 끝에 있다.

'경기도 이천'과 '충북 음성군'의 경계에 있는데 생가를 복원해 놨다. (아래 사진)

[어재연 장군 생가]  2016년 1월 촬영

[신미순의총]

<쌍충비각> 앞에는 전사자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고...

 

[삼거리]       2:35

이어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 <손돌목돈대>를 다녀와 좌측 <용두돈대>로 간다.

 

[손돌목 돈대]     

"손돌목 돈대"

<신미양요> 때에 치열한 <덕진진>에 상류한 미군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백병전이 벌어졌던 곳이란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이 전사하고...

 

<신미양요 전사자수>

미군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2명이라고 밝혔는데

조선측 피해에 대해선 미군측 집계와 조선측 집계가 틀린다.

미군측 집계: 전사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명

조선측 집계: 전사 53명, 부상 24명 (고종실록)

[<어재연 장군>이 전사한 <손돌목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   (미군 기록물)

우리 군인 거의 모두가 몰살 당한 처참한 현장을 미국놈들이 찰영해 전쟁 전리품이라고 자랑하는 사진이다.

 

"수자기 帥字旗"

"수 帥"는 "장수", 요즘말로 부대 대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수자기"는 "수 帥"라는 글자가 세겨진 부대 대장의 깃발을 의미한다.

<신미양요> 당시 우리나라 이 지역 대장 장수였던 "어재연 장군"의 깃발이었다.

미군의 전리품으로 이 깃발을 빼앗아 자기 함선인 <콜로라도호>에 걸어 놓고 기념촬영들을 했고 미국으로 가져 갔다.

2007년 우리나라의 반환 촉구에 영구임대형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 왔으나

16년만에 자기들 행사에 전시한다고 다시 돌려 달라고 해 돌려 줬단다.

현재 우리나라엔 없고 모조품이 있단다.

{푸에블로호]

북한 대동강변에 전시되 있는 <푸에블로호>이다.

1866년 무장한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올라 가 평양까지 가서 함포를 쏘며 개항 할것을

요구하며 개지랄을 떨었는데, 보다 못한 <평양감사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작살내 축출한 사건이 있었다.

<남북전쟁>을 끝내고 세계 세력확장에 나선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5년후 침공을 하는데

이것이 1871년 <辛未年>에 일어 났다고 <신미양요 辛未洋擾>라 한다.

 

1968년 북한은 미국 정보수집함이던 <푸에블로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해

현재 <평양> 대동강에 전시하고 자랑거리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 자리가 바로 <제너럴 셔먼호>를 파괴시킨 자리라고 한다.

 

<손돌목돈대>에서 <신미양요>의 포성이 바다와 하늘을 뒤흔들고

불을 뿜던 '강같은 바다'는 이제 여유있게 흐르고 있다.

 

[용두돈대 입구]      2:44~2:50 

"용두돈대 龍頭墩臺"

좁은 <강화해협>에 '용 머리'처럼 내밀고 있는 돌출된 돈대이다.

<강화해협>을 통과하려면 이 돈대의 허락 없이는 통과가 어렵겠다.

 

[용두돈대]

<용두돈대>에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江華戰跡地淨化記念碑"가 있다.

 

"손돌목 蓀乭項"

건너편인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인데 이곳 <용두돈대>와 사이 해협이 좁고 수심이 앝아 물살이 쎄다고 하는데

이 해협을 "손돌목"이라 한단다.

여기엔 전해 오는 설화가 있는데 인용하면...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 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설화는 설화일뿐이고 <진도>를 잇는 "울돌목"처럼 "물이 솟구치며 흘러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물길의 물 색깔이 틀리죠?

 

[광성포대 조망]

<용두돈대>에서 잠시 후 들릴 <광성포대>를 조망한다.

<광성보>를 방어하는 포대가 <용두돈대>를 호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광성포대]       2:52

[광성포대]

<광성포대를 지나면....

[갈림길]       3:08

다시 <해안도로>를 만나는데 <나들길>은 해안으로 안내하고...

 

[덕진진 조망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확대 할수 있음

해안 방파제를 따라 <덕진진>으로 진행한다

<초지대교>와 건너편 <대명항>이 보이기 시작한다.

<광성포대>에서 35분 정도 진행하면....

 

[덕진진]         3:30~4:00

<덕진진>에 도착하는데 입장료는 무료다.

 

[공조루]

"덕진진 공조루 德津鎭拱潮樓"

'공拱'은 '두 손 맞잡을 拱'이니 '조潮'와 합치면 "바닷와 손 잡는 문"이라는 의미이리~~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뒤돌아 본 바다 방향 <공조루>이다.

 

[남장포대]         4:03

[남장포대]

<덕진진>의 포대는 <광성보>의 포대보다 규모가 훨신 크다.

포대를 지나면 둔덕으로 올라 가는데

[덕진돈대]      4:07

"덕진돈대 德津墩臺"를 만난다.

<신미양요> 때에 미군이 <초지진>으로 상륙하여 이곳으로 침략하고 점령한 돈대다.

   

<덕진돈대> 성벽을 따라 바닷가로 나가면....

 

[강화척화비]     4:09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門防守他船愼勿過"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들은 통과할수 없다"라는 의미란다.

 

   

[초지진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더 확대 할수 있음

<척화비>에서 <초지진>을 조망한다.

<신미양요> 때 미군은 <초지진>으로 상륙해 <덕진진>으로 침략했다.

 

[덕진교]      4:17

<덕진돈대>에서 내려 가면 <온수천>이 흐르는 <덕진교>를 만나 건너 돌아 다시 해안으로 돌아 나간다.

 

<온수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덕진돈대>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바닷가로 나가 <덕진돈대>를 바라보면....

 

[덕진돈대 조망]       4:26

<덕진돈대>가 조망되는데

[신미양요 때 미군 사진]

미군 기록 사진에서 그날 <덕진돈대>의 상황을 생생히 볼수 있다.

놈들은 <덕진돈대>를 점령하고 만세를 부르며 승리의 기쁨을 표출하고 있는데

우리 조선군은 수없이 죽었다.

미군은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로 돌격해 갔다.

공격루트를 알아 보면....

 

 

<덕진돈대>에서 <초지진>으로 향한다.

20여분 진행하면....

[초지항]      4:47

"초지항 草芝港"을 만나는데 '횟집'이 많았다.

 

<초지항>에서 <초지진>은 가깝다.    사진을 클릭하면 더 확대 할수 있음

[초지진]       4:53~5:00

"초지진 草芝鎭"

안내문을 참고하고...

[홍이포 누각]

<초지진> 안에는 <홍이포>가 있는 누각이 있다.

[하늘에서 본 초지진]

 

[대명항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더 확대 할수 있음

건너편 <대명항>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정족산-길상산-마니산 조망]

서쪽으로는 <정족산>과 <길상산>, 그리고 <마니산>까지 보인다.

<강화지맥>을 종주했던 때가 벌써 13년이나 흘렀구나~

<길상산>의 끝이며 <동검도> 앞 <거꾸러된 집> 근처가 <강화지맥>의 끝이었는데...

 

[초지대교 조망]

<초지대교> 입구로 버스를 타러 간다.

 

[초지대교 입구 버스정류장]      5:13

여기서 <70번> 또는 <71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래역>으로 가 < M4723번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역>에서 환승하여 귀가

(구래역에서 '김포골드라인'을 이용하여 서울로 갈수도 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20km이며, 7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박물관 관람이라던가 휴식시간등을 포함한 시간이지만 느림보가 된건 어쩔수 없다 ^*^

 

 

강화외성.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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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강화외성과 호국돈대길 <1부>

 

갑곶나룻터-진해루-통제영학당옛터-갑곶돈대-강화전쟁박물관-

더리미돈대-용진진 좌강돈대-용당돈대-화도돈대

 

2026년 5월 13일(수) 맑음

[강화나들길2코스-호국돈대길]

<강화산성>은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으로 구축되 있었는데

이번 답사는 <강화산성>의 "외성外城"이다.

<강화외성>은  <강화도>의 동쪽 '강화해협 해안선'을 따라 쌓은 23km의 성城인데, 현재 그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 있다.

 

<강화외성>은 <강화나들길2코스>로 단장되어 '역사유적답사' 뿐만아니라 <걷기코스>로도 좋게 조성되 있다.

 

[강화현대아파트 앞 버스정류장]     9:38

<3000번광역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지나 첫번째 버스정류장인 <강화현대아파트 버스정류장>에 내려

답사를 시작한다.

버스 진행방향 뒷쪽 <강화대교>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용정교차로]       9:42

<교동도>로 바로 연결되는 <용정교차로>를 만나 직진하여 다음에 만나는 <강화역사박물관 교차로>에서

좌측 <연미정> 방향으로 진행하면...

 

[갑곶진 삼거리]     9:55

버스정류장에서 17분 가량 진행하면 "염하"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 DMZ평화의길><강화나들길1코스>가 지나는 곳이다.  우회전 하면   

 

[평화의길-강화나들길]

<강화해협>을 '짠 바닷물이 흐르는 큰 강'이라고 "염하 鹽河"라고 하지요?

"DMZ평화의길"과 "강화나들길1코스"가 지나는 곳이라고 길안내를 하는 리본이 흔들리며 반긴다.

앞에 보이는 막다른 골목같은 <강화대교> 아래로 가면...

 

[강화대교밑]       9:57

이곳이 "옛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가 있었던 곳이라고 표지석이 설치되 있고

그 뒤로 <강화외성>의 정문인 "진해루"가 보인다.

 

[갑곶나룻터]

"갑곶나루 선착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세종 원년 1419년>에 "박신"이라는 분이 사재를 털어 나루터 다운 나루터로 돌로 축조하였다고...

 

<병자호란> 바로 전에 있었던 <정묘호란> 때엔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치며이용했던 나룻터라고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안내문]

 

[갑곶순교성지 후문]     9:58   

<갑곶나루터 표지석> 뒤에 "갑곶순교성지" 후문이 있는데 차량은 통행금지 지만 사람은 통행 가능하다

안으로 들어 가면...

 

[성모상과 진해루]

순교성지라고 성모상이 먼저 인사하며 

뒤에 <진해루>가 보인다.

 

"진해루 鎭海樓"

<강화외성 江華外城>의 정문 격인 <진해루>다.

'제압 할 진鎭'과 '바다 해海'를 사용하는 문루인데, 바다를 품에 안아 지키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진해루]       10:00

<강화외성>에는 6개의 문루가 있단다.

"갑곶나루 甲串津"엔 "진해루 鎭海樓"

"연미정"이 있는 "월곶진 月串津"엔 "조해루 朝海樓"

"복파루 伏派樓"  

"용진나루 龍津鎭"에는 "참경루 斬鯨樓"

"광성보"에는 "안해루 按海樓"

"덕진진"에는 "공조루 拱朝樓"

 

 

[진해루 옛 사진]

<김포>에서 "염하"를 건너 <갑곶나루>에 도착하여 <강화읍내>로 들어 가기 위해선 <진해루>를 통과해야 했다.

교통의 요지였으니 노점상들도 있고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나그네도 많았으리...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며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요즘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세월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알수 있다.

 

[진해루 문밖]

<진해루> 밖으로 나가면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그 옛날 나룻배가 다니던 풍경은 찾을수 없다.

이젠 좌측에 <강화대교>, 우측엔 <구 강화대교>가 "염하 鹽河"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진해루>는 그 역사의 추억을 외롭게 곱씹고 있는듯 하다.

 

[갑곶나루 옛 사진]

옛 사진엔 <진해루> 문밖엔 주막도 있고 요즘말로 '터미널'도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바다와 만나는 곳에 "석축 石築"이 눈길을 끈다.

 

<병자호란> 바로 앞에 있었던 1622년 <정묘호란> 때에 우리나라 최악의 왕이었던 <인조>가 자기만 살겠다고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쳐 이 곳을 통해 <강화내성>으로 들어 간 곳이기도 하단다.

또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촌놈<이원범>이를 <제25대 철종>으로 옹립하기 위해

드나든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 행렬도]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나뭇꾼이자 농사꾼이었던 <이원범>을 왕으로 추대하러 행차하는 행렬도인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 총지휘했다.

이 그림은 <강화산성 외성>의 정문인 <갑곶나루>의 <진해루>를 통과하여 <내성의 남문>으로 가는 행렬도이다

지난 <강화내성> 탐방에서 자세히 언급 한 바 있다.

 

[진해루 앞 마당]

<진해루> 안에는 너른 마당이 있는데 <통제영 학당터>가 있던 곳이란다.

앞에 보이는 표지석으로 가면...

 

[통제영학당 옛터]

"통제영 학당지 統制營學堂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어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단다.

"세계대항해시대"에 계속되는 외침으로 해군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영국 장교들을 교관으로 부임시켜

우리 군인을 교육시키게 했단다

지난번에 답사한 <성공회 성당>을 영국에게 짓도록 허가해 주고 우리 해군 교육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있다. .

 

[옛 통제영학당과 진해루]

[옛 통제영학당 훈련사진]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와 비교된다.

[통재영학당터에서 조망]

지금은 찾는이 거의 없는 <갑곶나루 진해루>가 <강화대교>로 연결된 "염하" 건너편 <문수산>을 바라보며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강화해협-염하>를 물끄러미 역사를 회고하듯 바라보고 있다

 

지난번에 상세히 알아봤던 1866년 "병인양요"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이었던 "쥐베르"가 당시 상황을 스케치 형식의 그림으로 남기며

신문 기사로 기고 해서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알수 있다

<갑곶진>의 정문인 <진해루 鎭海樓>와  이어지는 <강화산성 중성 中城>이 선명하게 보인다.

<프랑스 함대>는 이렇게 <진해루>를 통과하여 <강화도>에 상륙하며...

<병인양요> 때에 <강화산성 외성>의 정문인 "진해루 鎭海樓"로 침공하는 프랑스 함대의 모습이다.

프랑스놈들이 이런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여기까지 온게 신기한데

'영국산업혁명'의 대부인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으로 운항하였기에 가능했겠다.

군함에서 함포사격을 하며 <진해루>를 침공하고 있는 <프랑스군>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내성>을 점령하고 <외규장각 왕실의괘>를 약탈하고, <정족산  전등사>를 침공하다가

우리나라 <양헌수장군>의 게릴라작전으로 패하며 퇴각했다.

 

[갑곶순교성지의 예수상]      10:08   

"갑곶순교성지" 

<갑곶진 진해루>는 수많은 서양 종교인들이 <한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종교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입국한 곳이란다.

우리나라의 서학 배척과 탄압으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순교한 곳이라고 '순교성역화' 한 곳이란다.

 

자기 종교를 남에게 전파하다가 죽은 사람을 순교자라 하여 그런 사람을 무지무지 칭송하는데

난 그렇게 생가하지 않고 오히려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목적이 자기 영생을 얻기 위함인데, 남에게 선교하다 죽어? 자기라도 명대로 살아야지....

순교를 최고의 가치로 부각시켜 자기들 종교를 확장 번성시키기 위함이 아닌가..결국 돈 벌기 위해

 

[구 강화대교 가는 길]

둘레길 데크를 따라 <구 강화대교>로 올라 가면....

 

[구 강화대교]       10:12

"구 강화대교"

대교라 할수 없는 육교 수준의 <구 강화대교>

1970년까지 이 좀은 다리에 어떻게 자동차가 다녔을까?

"DMZ평화의길"은 이 다리를 건너 <문수산>을 오르고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간다.

 

[갑곶돈대 입구]      10:13

<구 강화대교> 입구에는 "갑곶돈대 甲串墩臺"가 있는데 여기선 들어갈수 없다.

입장료를 내고 <강화전쟁박물관>으로 들어 가야 볼수 있다.

 

[갑곶돈대 포대]

"갑곶돈대 甲串墩臺" 대포 포대

[갑곶돈대 소포대]

 

[구 강화대교 도로]

<구 강화대교>에서 <강화읍내>로 통하는 길인데

우측엔 <갑곶순교성지>가 있고, 좌측엔 <강화전쟁박물관>이 있다.

[갑곶순교성지 성당]        10:17

<갑곶순교성지>를 단체로 순례하는 신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

<강화전쟁박물관> 앞 주차장을 지나서

[강화전쟁박물관 정문]        10:21~10:50 (약30분간 관람)

박물간 정문에 도착했다.

'강화도 유적' 중에 입장료를 받는 곳은 세곳이 있으니 알고 가면 도움 된다.

지난번에 갔었던 <고려궁지>와 이곳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이고 잠시 후 갈 <광성보>이다

특이한 것은 "경로 우대"의 기준이 "만70세 이상"으로 변경된 것이니 참조하시라~

 

[금속활자 기념비]

박물관 정문을 통과하면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가 있다.

 

[비석군]

<금속활자기념비> 뒤에는 "비석군 碑石群"이 있는데

강화도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던 각 고을 수령들의 공적비를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고...

 

[전쟁박물관]

"강화전쟁박물관" 정문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에서 일어난 각종 전쟁 유물 120점을 전시하고  있다

역사에 관심 없으신 분들은 입장료 내고 들어 갈 필요 없겠다

 

[박물관 내부]

[강화중성 축조] 조형물

[삼별초]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 탄생한 무신정권 친위대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총칭이다

<강화도>로 천도하여 39년여를 잘 먹고 잘 살던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 최우>등은 <몽골>과 합의하여

<개경>으로 다시 한도하려 하자, <삼별초>의 대장인 <배중손>등이 반대하며 끝까지 <몽골>과 싸워야 한다고 우기자

무신정권의 우두머리 <최우>가 <원종>을 통해 <배중손의 삼별초>를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에 반발해서 쿠데타를 이르키는데 이것이 <삼별초의 난>이다.

이에 <배중손>은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내려가 항쟁하다가 '려몽연합군'에 의해 패퇴하고

<배중손>이 죽은 후 <제주도>로 도망 갔다가 <대마도>에 까지 도망 갔다고 한다

<강화도>가 <삼별초의 난>이 시작된 곳이라고 알리고 있다.

 

[강화나들길2코스 출발지]       10:51

<역사박물관 정문>에서 <강화나들길2코스>가 시작된다.

 

[강화나들길 2-A코스 시점]       10:53

<강화나들길 1-A코스>의 시점을 출발하여

 

[동락천]

<고려산>에서 부터 발원하여 <강화산성 내성>을 관통하여 "염하"로 나가는 "동락천 東洛川"을 건너

다시 "염하"로 나가면

 

[갑곶돈대 조망]       10:55

동락천 東洛川"이 "염하"와 만나는 곳에 "갑곶돈대 甲串墩臺"가 조망된다.

 

[강화산성 외성]        10:58

<갑곶돈대>에서 <해안도로>로 나가면 "강화외성 江華外城"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각길을 걷게 된다.

저 앞에 보이는 "더리미마을"까지 10여분 걸려 진행하면....

 

[더리미 장어마을]       11:09

"더리미 장어마을" 앞을 통과하는데 앞에 보이는 조그만 둔덕이 "더리미돈대"란다.

이 마을엔 장어구이 음식점이 많았다.

 

[더리미돈대에서 조망]

다음 답사 장소인 <용진진>과 <용당돈대>가 보인다.

 

[해변길]

35분 정도 해변길을 진행하면....

 

[용진진의 좌강돈대 조망]        11:34

<용진진의 좌강돈대>를 만나고

 

[참경루]        11:36~12:01

"용진진 참경루 龍津鎭 斬鯨樓"

<용진나루>에 있는 <강화외성>의 문루인 어려운 한자의 <참경루>다.

"斬鯨"은 '벨 참'에 '고래 경'이니 "고래를 베어 죽인다"라는 의미 같은데...

여기서 '고래'는 외적을 의미 하는듯

 

[용진진]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참경루에서 좌강돈대로 가는 성곽길]

<참경루>에서 돈대로 올라가면...

 

[좌강돈대 左岡墩臺]   

[하늘에서 바라보는 좌강돈대]

"좌강돈대 左岡燉臺"

좌측 언덕에 있는 돈대라는 뜻인듯 하다.

 

[좌강돈대에서 용당돈대 조망]

다음 방문지인 <용당돈대>가 조망된다.

 

[용당돈대로 가는 길]      12:13

해안도로를 잠시 진행하면 <용당돈대> 뒷문으로 가는 둘레길이 이어지고

6분여 해안길을 진행하면...

 

[용당돈대 龍堂墩臺]       12:19

"용당돈대 龍堂墩臺"

조금전 <용진진>이 관할하는 돈대 중에 하나인 돈대란다.

 

[용당돈대 내부]

<용당돈대>의 특징은 돈대 안에 나무 한그루가 있다는 것이다.

 

[용당돈대 외부]

돈대에서 내려 가며 뒤돌아 보니 제법 城같은 돈대로 규모가 제법이다.

 

[화도돈대 조망]

<강하나들길 2-A코스>의 종점인 <화도돈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33분 정도 진행하면....

 

"화도돈대 花島墩臺"에 도착한다

 이 지역이 "꽃섬"이었던가 보다. 강화도는 간척사업이 워낙 많은 곳이라 육지와 섬의 구별이 어렵다. 

[화도돈대 花島墩臺]        12:52

[하늘에서 본 화도돈대]

<화도돈대>는 원형이 아니라 정방형이다.

 

[삼동암천]       12:54

<화도돈대>에서 내려 가면 <화도교>를 만나는데 <삼동암천>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염하"의 바닷물과 <삼동암천>의 민물을 조절하는 수문이 옛부터 있었는데 유실되어 다시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했단다.

이름하여 "화도수문 花島水門"

 

[강화나들길 2-A코스 종점]       12:56

<화도교>를 건너면 <강화나들길 1-A코스> 종점에 도착한다

7km정도 거리를 3시간 15분 정도 걸렸다

박물관 등 유적을 둘러 보는 시간이 많아서이다.

 

계속 2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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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박물관

강화산성과 고려왕궁지 2부

2026년 5월 1일 (금) 맑음

[강화산성 조감도]

<1부>에서 <남문>을 통과하여 <연무당지>와 <서문>을 둘러보고

<감상용순절비>와 <경흥궁>, 그리고 <성공회 강화성당>을 답사하였다.

<2부>에서는 <1부>에 이어 <고려궁지>와 <강화향교>를 답사하고

<북문>과 <동문>을 산성을 따라 트렉킹하고 다시 <남문>으로 돌아 간다.

 

 

高麗宮

[고려궁 정문]      12:50~1:10

<강화초등학교>와 <천주교강화성당> 바로 뒤에 "고려궁지"가 있다.

말이 <고려궁지>이지 실제 고려시대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고려의 도성>으로 39년간의 <강화도 고려궁>을 <몽골>이 접수하고 <개경>으로 환도 시키며

모든 <고려궁지>와 <산성>을 다시는 사용 할수 없도록 완전 파괴시켰기 때문이란다.

그후 

현재의 모습들은 모두 <조선 인조> 때와 <숙종>때에 개축되거나 신축된 것이란다.

"승평 昇平"이라는 말은 "나라가 태평하다"라는 의미로 우리는 잘 사용않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볼것도 없는 조그만 왕궁터에 입장료를 받는다. 성인 1,200원/인

[그땐 그랬지]

<강화초등학교> 울타리에 걸려 있는 <고려궁지>의 옛 사진을 보면...

1960~70년대 <고려궁>은 왕궁이라기 보다는 좀 잘 사는 부잣집 정도로 보인다.

[고려궁지 조감도]

<고려궁지>에는 6개의 건물이 관람자들에게 관심을 주는데

정문인 <승평문>과 조선시대 관청이던 <명위헌>이라는 '동헌'이 있으며

유명한 <외규장각>이 있고 <동종>과 <이방청>이 있을 뿐이다.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고...

[궁 내부]

정문인 <승평문>을 통과하면 정원이 펼쳐지며 혹시 <고려 23대왕 고종>이 나와 반겨 줄것같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동헌]

<고려시대>와 관계없이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강화도 군청>같은 <동헌>이다.

특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쪼다리 왕 <인조>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가족이 피신한 핵심지이다.

 

현판에는 뭔 글자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명위헌 明威軒"이라고 쓰여 있는데

"위엄을 밝히는 관청"이라는 의미란다.

[동헌 조형물]

<동헌> 안에는 업무를 보는 '사또'와 관리들의 조형물이 관람자들을 위해 설치되 있다.

 

[외규장각 전경]

"高麗宮址"에 "高麗의 흔적은 없고 朝鮮의 흔적만 복원되 있다"

<동헌>의 좌측 뒤에는 <외규장각>이 자그마하게 쓸쓸히 서 있다.

<고려시대> 건축물은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하나도 없고 <조선시대> 건축물만 복원되어 서있다.

 

[외규장각]

"외규장각 外奎章閣"

1782년 <정조대왕>은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국가의 중요한 자료와 서적을 비치하고

 자신의 도서실로 이용히였다.

또한 중요 서적과 자료들의 소실을 우려해 <강화도> 이곳에 제2의 "규장각"을 설치하고 "외규장각"이라 했단다.

<창덕궁 규장각>에 있는 원본과 같은 원본을 이곳에 별도 보관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단다.

그런데도 <병인양요> 때 <프랑스>놈들이 "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 원본을 약탈해 갔는데....

"의괘"는 조선왕실의 각종 행사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매우 중요한 국가기록물이다.

[외규장각 내부]

원본 서적과 자료들은 없고 사본 일부가 전시 되고 있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였다.

 

[외규장각 조감도]

오리지날 "외규장각"은 이런 모습이었다는데....

현재는 일부만 복원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의괘]

[어람용-분상용 의괘 안내문]

"의괘"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고...

[의괘 귀환 일지 안내]

"박병선 박사 1923~2011"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인>들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괘>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오게 한 분이 바로

<박병선 박사>이시다. 여성이시다.

<진명여고> 출신으로 <서울대>를 나와 <벨기에 루뱅 카토릭 대학>에서 "동양사학 학사" 학위를 받고

<프랑스 파리제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열혈 학자이시다.

그리고 <프랑스 고등교육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종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병선 박사>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귀국을 종용하자

중앙정보부의 의도를 파악하고 프랑스로 귀화하며 <프랑스인>이 되어 화를 면했단다.

<동백림사건>은 당시 독일,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학생들과 예술가들을 간첩으로 몰아 국내정치에 이용했던

간첩조작사건인데 후에 모두 무죄를 받아 조작이란게 밣혀졌다

 

뜻하지 않게 <프랑스인>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랑은 변함이 없어 <병인양요> 때에 약탈 당한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의 행방을 찾아야 하겠다는 역사학자로서의 열정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입사해 13년간 엄청난 각종 역사자료를 하나 하나 조사해 찾아 냈다.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고종 3년) 당시 약탈한 도서인 ‘외규장각 의궤’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1975년에 발견하였다.

또한 '의괘'를 찾던 중 < 직지심체요절>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임을 입증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과거 프랑스가 행했던 약탈행위를 까발린 것에 불편해 하며 사표를 강요했단다.

박병선선생은 결국 사표를 냈지만, 방문객 신분으로 도서관에 매일매일 10여년간 드나들며,

도서관 관계자가 책을 치울까봐 밥도 먹지 않고 열람하며 연구에만 매진하였단다.

이 때 도서관에서의 별명은 "파란 책만 들여다보는 여자"였는데, 외규장각 의궤의 표지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에서도 <주불한국대사관>에 사무실 하나를 연구실로 내주는 방식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박병선>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조선의 의괘"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프랑스>로 부터 이 의괘를 돌려 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절대 불가였다.

 

<프랑스>를 약탈자로 마냥 욕 할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병인양요>의 원인을 돌아 보면 알수있다.

<병인양요>는 <대원군>의 조선 조정이 '종교를 전파하여 백성들을 회유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문민정부> 때에 지금의 "KTX고속열차", 당시 "프랑스 떼재배"를 도입 할때

도입 조건 중에 하나로 "조선왕실의괘 반환"을 강력 요구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리하여 2011년 5월 말, 영구 대여 형식으로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145년 만에 돌려받았다

 

<박병선 박사>는 귀국하여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88세까지 장수 하셨지만 미혼이어서 후손이 없는게 너무 가슴 아프다.

오로지 역사 바로세우기에 일생을 보냈다. 감사와 함께 명복을 빈다.

생전의 박병선박사

 

[가례도감의괘]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

66세의 <영조>와 15세의 <정순왕후>가 혼례를 하는 의괘가 벽면에 그려져 있다.

 

15세의 <정순왕후>는 자신의 친할아버지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66세의 <영조>와 결혼했는데

<영조>의 아들, 즉 <정순왕후>의 아들이 될 <사도세자>와 며느리가 될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엄마가 아들-며느리보다 10살이나 어린 엄마 보셨나요?  ㅎㅎ 비록 계모라 할지라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정조>는 그러니까 <정순왕후>가 "15살 짜리 할머니"가 되는데

15살 할머니와 7살 차이이니 골때리죠? 

여하튼 <정조>는 자기 할아버지 <영조>와 15살짜리 할머니 <정순왕후>의 혼례식을 의괘로 남겼다.

 

[병인양요 안내문]

[병인양요 침략 과정도]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이었던 "쥐베르"가 당시 상황을 스케치 형식의 그림으로 남기며

신문 기사로 기고 해서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알수 있다.

지금은 알수 없는 <강화산성 외성>을 확실히 알수 있게 해 주는 사진같은 그림이다.

<갑곶진>의 정문인 <진해루 鎭海樓>와  이어지는 <강화산성 중성 中城>이 좌우에 선명하게 보인다.

<프랑스 함대>는 이렇게 <강화도>에 상륙하며...

(프랑스놈들이 이런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여기까지 온게 신기하다)

<강화산성 외성>의 정문인 "진해루 鎭海樓"로 침공하는 프랑스 함대의 모습이다.

 

[정족

[정족산성]

<강화산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을 침공하는 모습이다.

이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게릴라 전술에 의해 프랑스군은 퇴각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양헌수 장군>에 의해 더 이상 침공 못하도록 하며 프랑스군을 퇴각케 하는 동기가 되었다.

<남산>방향에서 진을 치고 있는 듯한 <프랑스군>이 대포로 위협하고 있는데

<강화산성 내성>이 전체적으로 조망된다.

아래 현재 사진과 비교해 보시라~

[조망]

<고려시대> 땐 <23대 고종>이 천도하였던 곳이고

<조선시대> 땐 쪼다리 <인조>가 몽진한 <강화도> 중심부인 <강화읍내>가 조망되는데

구한말에는 <신미양요><병인양요><강화도조약>의 굴욕을 겪은 처절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모두 외세에 짓눌려 굴욕을 당한 <강화도>의 모습과 <프랑스 쥐베르>가 그린 윗 사진을 비교해 보시라~

그렇게 변한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강화동종]

<강화 동종>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고

 

[이방청]

<이방청>은 <동헌>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집무실이었단다.

 

[고려궁 정문 앞]      1:09

<고려궁지>를 둘러 보고 정문인 <승평루>에서 바라보는 '강화 중심지'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돌리면..

 

[갈림길]     1:11

<북문>으로 바로 갈수 있는 도로와 <강화향교>를 둘러보고 가는 길이 나뉘는 갈림길을 만난다.

<향교>를 둘러 보고 가련다.

 

[관청리 통과]

옛날 관청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관청리>라고하는 마을울 11분여 통과하면...

 

[강화여고]      1:19

<강화여자고등학교>를 만난다.

전국 기숙형고교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숙사를 가진 학교로 학생수가 480명 정도라고...

 

[강화향교]       1:21

<강화향교>는 <강화여고>와 붙어 있는데 문을 잠궈놔 들어가 볼수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강화산성 가는 길]       1:23

<강화향교> 옆으로 길은 이어진다.

화살표 방향으로 들어 가면....

[약수터와 강화여고 기숙사]       1:24

규모가 제법 큰 약수터를 만나고 뒤엔 <강화여고 기숙사>가 있다.

 

[강화여고 기숙사 뒤 통과]

<강화여고 기숙사> 뒤를 통과하는데 기숙사의 규모가 상당하다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기숙사라고 한다.

기숙형 학교여서 강화지역보다 타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많다고...

 

[강화산성 성곽]      1:30

<강화여고 기숙사>를 지나면 바로 <강화산성>이 지나는 고개을 만난다.

우회전 하면...

[성곽길]

성곽길이 잠시 이어지고

[갈림길]       1:31

이어서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어느 길로 가나 <북문>으로 갈수 있는데

<북문>까지 900m이고 뒤로 <서문>까지도 900m라고 알리고 있다. 우측 지름길을 이용한다.

 

[숲길]

평지 같은 숲길을 10여분 진행하면...

 

[북문 앞]

<북문> 옆에 도착하고

[북문(진송루)]       1:52

"북문 鎭松樓"

<북문>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면 된다.

 

[북문 밖]

<북문> 밖의 모습인데 <연미정>이 있는 <월곳리>로 가는 길이다.

 

[성곽길]

<북문>에서 성곽을 따라 <북장대>가 있었던 <북산 北山>으로 올라 가면....

 

[북장대 터]       2:05

빈터만 있는 황량한 "북장대터 北將臺址"에 도착한다.

아무것도 없다.

 

[고려산 조망]

뒤돌아 보면 <고려산>이 조망되고...

 

[북한 조망]

북쪽으로는 <월곳리>와 건너편 <북한 개풍군>이 아주 가까이 조망된다.

<개성>에서 <강화도>까지는 직선 거리로 20km 정도이고, <서울>에서 <강화도>까지는 40km가 넘는다.

 

[강화나들길 갈림길]       2:09

<북장대터>에서 200m 정도 동진하면 <강화나들길 1코스>의 갈림길을 만난다.

좌측으로 가면 <월곳리>의 <연미정>으로 가서 <갑곶진>으로 가는데

오늘은 <강화산성>을 답사하는 날이어서 산성을 따라 직진한다.

 

[남쪽 방향]

산성의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강화산성 남장대>가 있는 <남산>과 멀리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혈구산>이 보인다.

<강화지맥>을 완주하던 때가 언제이던가~ 세월도 빠르지...벌써 13년이 지났군

<강화지맥>에 대해선 제가 두발로 쓴 산행기를 참고하시라

 

[쉼터]       2:17

쉼터도 있는데 이용객은 거의 없는듯...

 

[갈림길]       2:19

이어서 <바위정원 갈림길>을 지나면...

 

[견자산 조망]

<고려 고종>이 아들을 <개경>으로 보내며 올라 바라봤다는 <견자산 見子山>이 가운데 보이고...

 

[양봉장]       2:26

산성이 끊어지며 <양봉장>을 만나는데 우측으로 마을길을 5분 정도 통과하면...

 

[원불교 앞]        2:32~2:35

<원불교 강화교당>앞에 도착하는데 느티나무 그늘 평상에서 잠시 쉬고

골목을 빠져 나가면...

 

[동문 옆]

[동문(망한루)]        2:38

"동문 望漢樓"에 도착한다.

<동문>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고...

 

[동문 밖]

<동문> 밖에는 <강화중학교>가 있다.

 

[견자산 방향]

서쪽으로 산성이 이어지는데 <견자산 見子山> 정상이 보인다.

정상에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동문 안]       2:40

<동문> 남쪽으로 <관청리>가 펼쳐지는데 우측에 <성공회 성당>과 <용흥궁>이 있다.

직진해 내려 가면...

 

[강화경찰서]      2:44

<강화경찰서>가 있고

[강화군청]       2:50~3:20

이어서 <강화군청>을 만나는데 이 앞에서 조금 늦은 점심식서를 하고

 

[강화대로]        3:22

군청에서 조금 나가면 <강화대로>를 만나며

길을 건너 <남문>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남문]       3:28

<강화산성>의 출발지였던 <남문>에 도착하고

 

[강화버스터미널]         3:35

<강화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88번시내버스>를 타고 <한강로사거리>에서 내려 조금 이동하여 <김포대학앞 버스정류장>에서

< M6427번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역>에서 환승하여 귀가했다.

 

 

강화고려궁지.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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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박물관

강화산성과 고려왕궁지 1부

2026년 5월 1일 (금) 맑음

 

[강화산성 내성]      

<강화산성 江華山城>은 <내성 內城> <중성 中城> <외성 外城>으로 구성되 있었는데,

현재는 <내성 內城>만 남아 있다.

<외성 外城>은 <강화대교>가 있는 동쪽 해안에 있었으며, <중성 中城>은 <갑곶진>에서 <내성>으로 통하는

연결 통로 좌우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복원되어 그 형체를 느낄수 있는 "내성 內城"과 역사유적을 답사한다.

 

[강화버스터미널]      10:55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서울에서 강화가는 방법 중에 가장 편리한 것은 <신촌>에서 이곳까지 운행하는 <3000번 광역버스>다.

 

[강화문화원]      11:03  

<버스터미널>에서 <남문>을 향해 서쪽으로 8분여 진행하면 <강화문화원>과 <강화미술관>을 지나고

 

[남문(안파루)]     11:05

<강화산성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에 도착한다.

<남문>은 산성의 남쪽에서 남쪽을 향하는게 아니고, 산성의 동쪽에서 육지 방향인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윗 지도를 참고하면 더욱 확실하다.

 

[남문(안파루)]

<강화산성>의 '정문'격인 <남문 南門>에는 "강도남문 江都南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강화 도읍지의 남문'이라는 의미인듯 하다.

또한 문루 안쪽에는 "안파루 晏波樓"라는 현판이 있다.

'험난한 파도를 막아내는 문루'가 되길 염원하는듯 하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대문과 비밀통로인 4개의 암문이 있으며, <동락천>에 2개의 수문이 있단다.

대문은 <남문-안파루 晏波樓>,<서문-첨화루 瞻華樓>,<북문-진송루 鎭松樓>,<동문-望漢樓>

[남산(남장대) 방향]

[동문(망한루) 방향]

치욕의 역사인 <병자호란> 때 <인조>는 원손을 비롯한 가족을 먼저 <강화도>로 피신시켰는데,

이때  종묘를 모시고 <봉림대군>과 빈궁,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한 사람이 <김상용 선생>이었다.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김상용선생>은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올랐다가

연로하여 눈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판영돈녕부사로 옮겼고,

<병자호란>이 터지자 수행대장으로 강화도로 먼저 들어가 침입하는 청나라 군대에 대비 했단다.

 

['남문안'-서문 방향] 

<강화도>의 관문이었던 <갑곶진>에서 왕궁으로 들어 가는 길이었던 <남문안길>이 이어진다.

 

이 길로 <몽골군> 뿐만 아니라 <청나라군>이 침입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25대 왕-철종>이 하잘것 없는 어린 농부에서  졸지에 왕이 되어 행차한 길이기도 하다.

 

['왕의 길']     11:12

"조선 25대 왕-철종" "이원범"이 18살에 졸지에 왕으로 추대되어 한양으로 행차한 길이라고

"왕의 길"이라는 길을 조성해 놨다.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알아 보면...

[강화도 행렬도]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이원범>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강화도 남문으로 들어 가는 행렬도이다.

 

<영의정 정원용>이 이끄는 엄청난 규모의 행렬이 그때의 상황을 웅변으로 대변해 준다.

거의 모든 "이씨 왕족"을 말살해 버린 <안동김씨 세도정치세력>이 갑자기 허수아비 왕을 만들기 위해

간신히 찾아낸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멀고 먼 족보상 왕족인 <이원범>을 뫼시러 가는 위선적 행렬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 총 지휘하며 행렬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 행렬이 다가오자 <이원범>은 자신을 잡아 가기 위해 오는 줄 알고 산 속으로 숨었다는거 아시나요.

<영의정 정원용>이 간신히 설득하여 한양으로 뫼시고 왔다고 기적같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서문 근린공원]      11:30

강화읍내 남산 자락의 마을을 20여분 통과하면 <서문> 근처에 있는 절개된 서쪽 끝 <강화산성>에 도착한다.

서쪽 방향 정면에 <강화도의 진산>인 <고려산>이 조망된다.

 

[남산(남장대) 방향]

[서문 방향]

가까운 곳에 있는 <서문>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석수문과 서문]      11:30

<동락천>이 <강화내성>을 통과하는 <석수문>에 도착한다.

<석수문> 뒤에는 <연무당>이 있고, 좌측엔 <서문>이 보인다.

 

[고려산 조망]

<동락천> 상류에는 <고려산>이 가까이 조망되는데, <고려산 정상>에는 미군 레이더 시설이 있어

<강화도> 어느 곳에서나 <고려산>을 알수 있다.

 

[석수문]

"동락천 東洛川"은 <혈구산-고려산>에서 내려 오는 개천으로 <강화읍성>을 관통하는 젖줄이자 생명수다.

<강화산성>에는 <석수문>이 동쪽과 서쪽 두군데에 설치되 있다.

 

[연무당지]      11:37

<석수문> 뒤편에는 <연무당지>가 있는데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연무당 옛터]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이다.

<강화도조약>은 겉으로는 자주국 선언과 근대적 외교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본격적인 <조선>침략의 출발점이 되었다 

 

 

[서문(첨화루)]       11:41

"西門-瞻華樓"

<첨화루>는 "아름다운 누각을 바라본다"라는 의미란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서문의 옛모습]

<강화초등학교> 담장에 설치된 "그땐 그랬지!"라는 안내사진을 첨부한다.

옛 <서문>과 현재의 <서문>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문에서 바라보는 남장대(남산)]       11:43

<서문> 안쪽에서 바라보는 <남산>의 <남장대>이다.

 

[강화읍내-관청리]

<강화읍내>를 관통하는 <강화대로>를 따라 10여분 진행하면...

 

[강화 중앙시장-고려궁지 입구]       11:54

<강화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용흥궁><고려궁지> 입구를 만나 좌회전하면...

 

[고려궁지 가는 길]

<고려궁지>와 <강화초등학교>로 올라 가는 길이 이어지며, 잠시 올라 가면...

 

[김상용 순의비]       11:56

<용흥궁공원> 입구에 "선원김선생순의비"가 있는데

<남문>에서 언급했던 "선원 김상용선생"의 충절을 추모하고 기리는 비각이다.

[안내문]

<김상용선생>은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올랐다가

연로하여 눈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판영돈녕부사로 옮겼고,

<병자호란>이 터지자 수행대장으로 <병자호란> 때에 <봉림대군>과 왕손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강화산성 남문>에서 적군이 침입하자 화약을 터트려 자폭했다고 충절의 상징으로 추모하고 기린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적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고자 했다면,

성이 함락된 후 적군이 몰려들 때 최대한 많은 적군들과 싸우다 자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폭발 시점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경)이고, 정작 강화성은 날이 저문 후에야 함락되었다.

적군이 오기 전에 화약고가 폭발한 것인데 실수로 발화되어 터졌다는 기록이 많다

적군은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고 미리 자결 했다는 것이니

결론적으로, 순절이라고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당시 연세가 75세로 노안이 와 중요 관직에서도 물러난 상황이어서

사고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학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강 척화파인 <김상헌선생>의 친형이다.

<김상헌>의 형은 세명이었는데 제일 큰형이 <김상용>이어서 학문을 큰형으로 부터 배웠다고한다.

그리고 <김상용선생>은 75세, <김상헌선생>은 82세까지 사셨는데 당시로는 무지 장수한 형제들이었다.

 

<김상용선생>과 <김상헌선생>은 의리와 충절의 화신으로 우리들에게 각인되 있지만

타협과 현실을 모르는 수구꼴통으로 더 알려졌었다.

그렇다면 <김상용> <김상헌>이 어찌하여 충절과 의리의 화신이 되었을까?

후에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들이 자기들의 맨토로 이들을 우상화 하면서 부터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김상용-김상헌>이 <안동김씨>로서 <안동김씨> 중에서도 극우에 속하는 <장동김씨>이기 때문이다.

 

 

[심도직물 유적]

<심도직물> <조양방직>등 섬유산업이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강화도에 번성했다.

 

[용흥궁 가는 길]

<김상용 순절비>에서 <용흥궁공원>이 펼쳐지는데 <성공회 성당>과 우측에 <용흥궁>이 보인다.

 

[용흥궁 입구]         12:03

<용흥궁>을 먼저 갔다가 다시 나와 <성공회 성당>으로 간다.

 

용흥궁 龍興宮

[용흥궁 정문 앞]        12:05

<용흥궁> 정문 앞에는 "문충공 정원용"과 그의 아들 "정기세"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정원용>은 당시 영의정으로 <철종>을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대규모 왕립행차대를 이끌고 왔던 인물이고

<정기세>는 <정원용의 아들>로서 <강화유수(군수)>로 임명되어 초가집이던 <용흥궁>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했단다.

그리하여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고...

 

[용흥궁 정문]

"용흥궁 龍興宮"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란다.

"龍(王)"으로 승천(興)하기 전에 살던 집인데,

임금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 潛邸"라고하죠?

 

사대부 집 정문은 대부분 '솟을 대문'인데 이건 '솟을 대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 대문도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용흥문 안내문]

 

[사랑채]

[행랑채]

[안채]

이 기와집은 <이원범>이 <철종>이 된 이후에 새로 지은 집이기에

초가집이던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졸지에 王이 되어 한양 <창덕궁>으로 들어가 즉위하고 살다  죽었기에

이 집 주인이었던 <철종-이원범>이는 새로 지은 이 집에선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했다.

 

 

[철종 어진]

"철종 哲宗 1831~1863. 재위:1849년7월28일(18세)~1864년1월16일(32세) 창덕궁

[철종과 고종 가계도]

<사도세자>의 적장자인 <정조>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그의 서자인 <이원범>이 <조선 제25대 철종>이다.

왕족의 씨가 말라 찾고 찾아낸 왕족이 서자의 서자, 다시 서자인 <철종>이다.

<안동김씨 세도세력>들이 씨를 말렸기 때문이다.

<고종>도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위에 도저히 오를수 없는 멀고 먼 왕족이었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묘는 포천에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클릭해 보세요

https://cafe.daum.net/paraanmoon/Nhwe/4

 

 

[철종 옛집터]        12:10

"철종조잠저구기 哲宗朝潛邸舊基"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옛집터를 표기하는 비석이 있는 비각이다.

 

[강화도 행렬도]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나뭇꾼이자 농사꾼이었던 <이원범>이 하루 아침에 왕이 되어 행차하는 행렬도인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 총지휘했다.

<강화산성 외성>의 정문인 <갑곶진>의 <진해루>를 통과하여 <내성의 남문>으로 가는 행렬도이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 성공회 성당]        12:12~12:32

<성공회 강화성당>은 우리나라 절간과 거의 똑 같이 지었단다.

정문부터 <외삼문>이고 절에 심는 <보리수>가 먼저 반긴다.

 

<예수의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아닌 <유럽>에서 먼저 만들어 지고 번성했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1세>에 의해 <신약 성경>이 만들어 지고 <기독교>를 국교로 자리매김 했는데

<카토릭>이며 <천주교>로 <프랑스>로 이어졌다.

<독일>에서는 <장로교>로 재탄생되고, <영국>에선 <청교도 성공회>로 개신교가 되었다.

 

이들이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세계 전역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는데

선교활동을 할때 각국의 토속신앙의 저항을 막기 위해 토속신앙 친화정책을 썻기 때문에 조선식 건물화이다.

당시 우리나엔 <불교>와 <유교>가 성행했기 때문에 불교-유교와 친화적 건물을 지은 것이란다.

[안내문]

[교회 종]

<외삼문>을 들어 서면 절의 <내삼문>인 <천왕문>과 비슷한 <종루>가 있다

 

[교회의 종]

교회 종을 절의 범종과 같은 모형으로 설치해 놨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군수물자로 종이 공출 당하는 바람에 새로 만들었단다.

 

[성당 본채]

성당은 <노아의 방주>처럼 세상을 구원하는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데

서양식이 아닌 한국식 건물이란걸 알수 있다.

 

[천주성당]

<조선의 문화>와 <서양의 종교>가 낯설고 어색한 만남과 그리고 또 다른 조화.

기둥에는 우리나라 절간이나 서원처럼 "주련"이 걸려 있는 것도 완전 한국식이다.

한자로 쓰여진 주련의 내용은 기독교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신도들]

 

[성당 내부]

 <고요한 (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단다.

내부 건축양식은 한국식이 아니라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 졌다고 하고.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단다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고 하며

현재도 예배를 보며 사용하고 있단다.

하지만 신도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 명맥만 이어 간다고....

 

[보리수]

앞마당에 있는 <보리수>는 불교의 상징 나무인데 토착화를 위해 인도에서 묘목을 직접 가져와 심었다고...

[안내문]

안내문을 참고하고

 

[알마수녀 기념비]

우측 샛문 앞에는 1906년에 새워진 기념비가 하나 서 있는데 

"대영국알마슈녀기념비 大英國謁瑪修女記念碑"라고 쓰여 있다.

<알마수녀>는 '수녀'면서 '간호사'였는데 1896년에 와 1906년에 여기서 10년간 활동하다 젊은 나이에 별세했는데

당시 이 지역에 전염병이 나돌아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었단다.

그레서 강화도 신도들이 그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옛 사진]

당시 <알마수녀>와 함께 총6명의 수녀가 왔었단다.

 

[남산(남장대) 조망]

성당은 강화읍내에서 모두 조망되는 높은 곳에 있어 조망이 좋다.

남쪽으로는 <남산-남장대>가 조망되며

 

[고려산 조망]

서쪽으로는 <고려산>이 보이는데

<개경>에서 이곳으로 천도를 한 <고려 고종>이 잠들고 있는 <홍릉>이 보일듯 말듯하고...

 

[옛 사진]

<동문>쪽에서 바라보는 <성공회성당>과 <용흥궁>의 옛 사진.

 

[북산 조망]

북쪽으로는 <고려궁>이 있었던 <고려궁지>와 <북산>이 조망된다.

 

[용흥궁 공원]       12:32~12:42

<성공회 성당> 아랫쪽엔 <용흥궁공원>이 조성되 있는데

이 자리엔 옛날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라고....

우리나라 섬유공업의 핵심지가 강화도였다.

 

[용흥궁 공원 포토존]

<용흥궁공원> 포토존에서 쉬었다 간다.

[옛 사진]

북문 가는 길에서 바라 본 <성공회성당>의 옛 사진이다.

 

[고려궁지 가는 길]        12:43

<용흥궁공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천주교 강화성당]     12:44

"천주교 강화성당"이 있는데 <진무영 순교성지>란다.

<강화도>는 세계 종교의 각축장이었단다.

선박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옛날엔 <한양>을 가려면 먼저 <강화도>를 거쳐야 했기에

<강화도>에 먼저 진을 치고 난 다음 육지로 선교 폭을 넓히려 했기 때문이란다.

 

[강화초등학교]       12:45

[그땐 그랬지]

"강화초등학교"

1896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소학교 38개 중에 하나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한다.

가수 <방실이>가 이 학교 출신이며, 이승만과 대척점에 있었던 진보주의 정치인 <조봉암 선생>이 이 학교 출신이란다.

 

 

 

- 2부로 이어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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