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
        "세종대왕의 빛과 그림자를 생각하며" 
      
            세종대왕릉역-이인손묘-번도5리-영릉-세종산림욕장-대로사-한글시장-여주역
['7코스 세종효종길' 안내도] "경기옛길-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의 전체 안내도입니다. <7코스>는 <세종대왕릉역>에서 <한글시장>까지는 <여강길 4코스>와 함께 하더군요.
['국토지리원 지도 실트랙'] "경기옛길-봉화길 제7코스""세종개왕릉역"에서 "세종대왕 영릉"을 돌아 보지 않고 "여주역"까지 "11km"거리라고 안내합니다만, 필자는 두 왕릉을 돌아 보고 "옛 수여선 여주역 터"를 찾며 보고 걸은 거리는 "14.4km"였습니다. 지도에 <빨간색선>은 <파란문>이 직접 걸은 코스이고, <파란색선>은 <경기문화원>의 정규코스입니다. <파란문>이 가는 길은 정규코스 주변 관심지역을 둘러 보고 가기 때문에 정규코스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세세종대왕릉역'] 10:45 2024년 2월 29일 목요일 흐림 <분당 이매역>에서 <경강선>을 타고 "세종대왕릉역 1번출구"로 나가 우측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세종대왕면 世宗大王面" 이 지역은 <세종대왕 영릉>의 서쪽에 있는 고을이라고 "여주시 능서면 陵西面" 이었는데 지지난해 2022년 1월1일부로 <세종대왕면 世宗大王面>으로로 개명했답니다. ['역전사거리'] <세종대왕릉역 1번출입구>에서 나와 우측으로 돌아 서면 <역전사거리>가 있으며 "경기옛길-봉화길 제7코스 세종효종길" 안내판과 "이인손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역전사거리>를 건너 가면... ['아파트 예정지 입구'] 10:50 "여주 능서역세권 도시개발구역" 입구를 만나는데 <여주 여강길>과 <봉화길> 이정표가 여럿 길안내를 합니다. 특히 <여주 여강길 4코스>의 시종점인데, <여강길>과 <봉화길>은 <한글시장>까지는 함께 가는군요. 예전 제가 <여강길 4코스>를 할 때엔 <영릉>이 시종점이었는데 코스가 이곳까지 연장되었군요. 이번 기회에 답사하지 못했던 <여강길 4코스 연장코스>를 <봉화길>을 하면서 함께 진행하게 됩니다. '일거양득' ㅎ ['여주 능서역세권 도시개발구역'] <성남시 분당>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세종대왕릉역>이어서 주변에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루어 지고 있군요. 하지만 요즘 부동산 경기 악화로 중단 된듯.... <경강선> 철로 옆으로 10여분 진행하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는 굴다리를 만나고 [굴다리] 11:00 굴다리엔 <세종대왕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앞으로 만나는 굴다리엔 모두 이런 벽화가 있더군요. ['이인손묘' 가는길] <중부내륙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하면 바로 <이인손 묘>로 가는 길이 열리는데 250m 정도 진행하면.... ['이인손묘' 앞 갈림길] 11:04 <이인손 묘> 앞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봉화길>은 우측으로 가라고 안내 합니다만 좌측 뒤에 있는 <이인손 묘>를 보고 우측 <이인손 재실>로 나가는게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인손>은 좋던 싫던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이기도 하며 더더욱 <세종대왕릉>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들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이인손 묘'] [안내문] "이인손 李仁孫, 1395(태조 4년)∼1463(세조 9년)" <세종대왕> 시절 지금의 <서울시장>급의 <한성부윤>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란>에 참여한 쿠데타 세력으로 <2등 원종공신>이 되어 <우의정>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한명회><신숙주>등이 <1등공신>이고 <이인손>은 그 뒤를 잇습니다. 하지만 <이인손>은 <수양대군-세조>로 부터 결국엔 토사구팽 당하며 씁쓸하게 퇴장했습니다. [이이인손 재실'] 11:11 <이인손의 묘>가 유명하게 된 이유가 단연 토픽감입니다. 1.<이인손의 묘>는 원래 잠시후 들릴 <세종대왕릉=英陵> 자리에 있었습니다. <세조>가 죽고 뒤이어 오른 <예종> 때에 <세종대왕릉=英陵>을 천장해야 한다는 이슈가 강력하게 떠오릅니다. <세종대왕릉>은 현재 <서울 내곡동 대모산> 기슭에 있는 자기 아버지 <태종릉=헌릉> 옆에 있었는데, <세종>이 죽고 왕실이 <계유정란>등으로 풍지박살이 나자 <세종대왕 왕릉>을 잘못써서 그런거라는 루머가 돌며 천장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새로운 왕릉 물색에 나섯던 것입니다. 2.<이인손>은 <경기광주 이씨>로 엄청 화려한 조상과 자손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서울 둔촌동>의 지명을 만들어준 <둔촌 이집>이 그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인손>은 아들을 다섯 두었는데 모두 지금의 장관급 이상의 관직까지 올랐습니다. <이극배-영의정>, <이극감-형조판서>, <이극증-병조판서>, <이극돈-우의정>, <이극균-좌의정> 이 당시 <조선>은 <전주이씨 왕조>가 아니라 <경기광주이씨 왕조>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3.<이인손의 묘>가 있던 현재의 <세종대왕릉=영릉>에서 이곳으로 묘를 옮길 때 유명한 일화가 있죠. <예종>의 어명으로 묫자릴 찾아 나선 <지관 안효래>가 찾아 낸 곳이 바로 현재의 <여주 영릉>인데 <이인손의 묘>를 파 내자 유해 아래에 비단에 쓰여진 글이 있었답니다. "이 자리의 주인이 새로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를 옮겨라"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글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려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그곳이 바로 이곳이랍니다. '연이 떨어졌다'고 <연당> 혹은 <연주리>라고 부르며 현재의 <세종대왕면 신지리>가 되었답니다 <파란문 생각> 당시 <이인손 가문>이 요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으니 왕릉 천장지 물색에 대한 어명을 받은 <지관 안효례>는 <이인손>이 <묘>를 잘 써서 가문이 번성 한다고 느끼고 <이인손의 묘>가 명당자리라고 확신하고, <한양>에서 멀고 먼 <여주>까지 찾아와 <이인손의 묘>를 점지 했다고 봅니다. <조선왕조> 27명의 왕릉은 모두 서울근교에 있는데 <세종대왕릉>만 멀고 먼 <여주>에 있는 이유라고 <파란문>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장남>인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 시키고, 후엔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 것으로 보아 <예종>이 묫자리를 위력으로 빼앗았다고 생각됩니다. ['영릉' 가는 길] 11:11 <이인손 재실> 앞에 <봉화길>과 <여강길>이 조그만 동산을 넘어 갑니다. 100m쯤 넘어 가면... ['번도5리' 가는 길] 11:13 도로를 만나며 도로를 건너 가면.... ['신지리' 조망] '세종대왕면 신지리'가 펼쳐지는데, "서여주IC"라고 표기 한곳까지 진행합니다. ['서여주IC' 굴다리] 11:22 그러면 "서여주IC"의 날개부분 굴다리를 만나는데 ['세종' 관련 벽화들] "서여주IC" 날개부분 굴다리 세개를 통과 합니다. 모두 <세종대왕> 관련 벽화들이 <영릉>을 찾는 분들을 친근하게 맞이합니다. ['번도4리' 조망] 11:27 굴다리를 통과하면 '세종대왕면 번도리 番都里'가 시작되는데 보이는 마을은 <번도4리>더군요. <번도4리>를 통과하여 우측 "고개"라고 표기한 곳으로 진행하면... [고개] 11:34 <여강길-세종대왕릉 걸어 가는 길>은 좌측 숲 속으로 가라고 하며, <봉화길>은 직진하라고 안내합니다. 진행 해 본 결과 어디로 가나 곧 다시 만나게 됩니다. 좌측길이 약간 지름길이더군요. ['번도5리' 조망] 고개를 넘어 가면 <번도5리 番都里>가 펼쳐지는데 조금만 더 내려 가면... ['보말칼국수' 앞'] 11:38 <보말 칼국수>라는 제법 유명한듯한 음식점 앞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더군요. "보말"은 제주도에 많이 서식하는 바다 고등으로 "팽이고등"의 방언이랍니다. 양식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본듯한데.... ['여강길'과 만나는 곳] 11:41 <보말칼국수>에서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이 조금전 고개에서 헤어졌던 <여강길>과 다시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영릉전원마을'] "영릉전원마을"이라고 하는데 <영릉>은 여기서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전원마을을 잠시 통과하면... ['여여사'] 11:48 <여여사 驪如寺> 앞에 있는 <여강길 쉼터>를 지나고 ['번도5리'] 5분 정도 <번도5리>를 통과하면... [사거리] 11:53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200m쯤 가면 <영릉>인데 우측으로 돌아 가라고 합니다. 알고보니 <영릉>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여 이쪽 출입구는 폐쇄했더군요. ['영릉' 가는 길] 약1.2km를 우회하며 고개를 넘어 가면... ['영릉' 입구 교차로] 12"07 <영릉입구교차로>를 만나며 좌측으로 들어 가면... ['세종대왕역사문화관'] 12:08 <영릉 입구>와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습니다. 입구와 문화관의 위치가 많이 바뀌었군요. ['역사문화관' 옆문 입구] 먼저 <역사문화관>부터 관람을 합니다. <'세종대왕'> .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을 알현합니다.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정치 경제 문화 국방의 정치지도자. 과학, 음악, 문학, 인문사회학의 천재적 자질을 가진 훌륭한 학자. 무엇보다 백성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려고 혼신을 다한 따뜻한 사람. 어서 빨리 제2 제3의 "세종대왕"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며 감사와 사랑의 참배를 올립니다. [생애] "세종대왕 世宗大王"의 공적에 대해선 한국인이면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조선왕조 최악의 불행한 왕일수 밖에 없었던 그 분의 "그림자"에 대해선 모르는 분들이 많아 이번엔 "그림자"에 대해 알아 보려고 합니다.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마이너스 백점입니다. 왜냐구요? 먼저 후궁들에게서 낳은 서자들은 빼고 정통파 "소헌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살펴 볼까요? 첫째 아들 : 문종 (외아들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일찍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 수양대군 → '세조' (삼촌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셋째 아들 : 안평대군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계유정란'때 형한테 사형당했습니다) 넷째 아들 : 임영대군 ('수양대군'의 편으로 왕위찬탈에 협조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었고) 다섯째 아들 : 광평대군 (스무살에 요절) 여섯째 아들 : 금성대군 ('수양대군' 반대파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형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일곱째 아들 : 평원대군 (천연두로 어려서 사망) 여덟번째 아들 : 영응대군 ('수양대군'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보좌하여 천수를 누렸고)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형제를 형제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그리고나선 아들 '세종'의 장인어른 (소헌왕후 아버지)와 외가집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악기 전시실'] 예전 <역사문화관>과는 많이 달라져 대부분 디지털화 해서 실물보다 영상물이 많았습니다. 음악을 엄청 좋아했던 <세종대왕>은 악기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실물이 전시되 있었습니다..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세종대왕>은 부인 <소헌왕후>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는 글을 짓게 했는데 그 글이 <월인천강지곡>이죠.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한글로 지은 두번째 작품이죠. 첫번째가 <용비어천가> ['영릉' 입구] 12:20 입장료는 500원으로 팜플릿값도 않되는 거의 공짜. 2015년도에 왔었는데 그 때도 500원이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12:23 <세종대왕>의 위대함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도 없으니 생략하고 앞에서 <세종대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 이야기들을 알려 드린다고 했죠? ㅎ 먼저 <세종대왕>의 술 마시는 실력이 어떠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려 드릴까요? ㅎ "술을 좀 마실줄 알았던 충녕대군"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장남인 <양녕대군>과 차남인 <효령대군> 대신에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제4대 왕에 앉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술을 좀 마실 줄 알아서.."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ㅎ [태종실록]에서 인용합니다. "중국의 사신을 대해 주인으로서 술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해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 또한 불가하다. 그런면에서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양녕대군>은 술을 너무 마시며 저잣거리에서 깽판을 쳐서 불가하고, <효령대군>은 술을 전혀 못마셔 않되고, 술을 적당히 마시는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이유를 "태종 이방원"이 직접 설명했습니다. 이제 "세종대왕"의 술 실력을 아시겠죠? ㅎ ['재실'] 12:27 새로 복원한 "재실"을 지나 갑니다. 10여년 전엔 이곳에 매표소가 있었습니다. ['연지' 앞] <재실>을 지나면 경내로 들어 가는데 먼저 좌측에 <연못>이 있습니다. ['금천교'] 12:33 "금천교 禁川橋"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며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참배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홍살문' 앞] "홍살문"은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문"이고 우측 옆에는 "판위 版位"라는 돌 디딤판이 있는데 임금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는 디딤판이랍니다. "향로 香路"는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고 "어로 御路"는 임금이 다니는 길 ['정자각'과 '비각'] "정자각 丁字閣"은 "제향을 지내는 중심 건물로 건물 모양이 "丁"자를 달았다"고... 우측에 있는 "비각 碑閣"은 "세종대왕의 표석"을 세워 둔 곳입니다. <세종대왕릉>을 좌측으로 올라 갔다가 내려와 우측으로 <효종릉>으로 갈 예정입니다. *이인손의 묘 터* 앞서 <이인손의 묘>에서 언급 했습니다만 <영릉>은 <이인손의 묘>가 있었던 곳인데 <예종>이 빼앗아 자기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릉을 '서울 내곡동'에서 이곳으로 천장했습니다. 앞에서도 조금 언급랬습니다만 당시 상황을 조금 깊이 있게 알아 보겠습니다. <세종대왕>은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우리 아버지 <태종릉=헌릉> 곁에 뭍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형이 두명이나 있었는데도 자기를 왕으로 등극시켜준 아버지에 대한 충효였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죽자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조카까지 죽이는 난장판이 되며 집구석은 풍지박살나며 콩가루 집안이 되었죠. 단연 주인공은 <수양대군=세조>가 살육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많은 충신들은 이러한 변란이 모두 <세종대왕의 릉>을 잘못써 일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육의 중심 인물 <수양대군=세조>가 살아 있었을 때엔 이 "천장 문제"를 입 한번 뻥긋 못하다가 <세조>가 죽고 그의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바로 "세종대왕릉 천장문제"를 꺼내 상소를 올리며 천장을 추진한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파란문 생각> 당시 <이인손 가문>이 요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으니 왕릉 천장지 물색에 대한 어명을 받은 <지관 안효례>는 <이인손>이 <묘>를 잘 써서 가문이 번성 한다고 느끼고 <이인손의 묘>가 명당자리라고 확신하고, <한양>에서 멀고 먼 <여주>까지 찾아와 <이인손의 묘>를 점지 했다고 봅니다. <조선왕조> 27명의 왕릉은 모두 한양근교에 있는데 <세종대왕릉>만 멀고 먼 <여주>에 있는 이유라고 <파란문>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英陵"은 조선왕조가 500여년 지속 될수 있었던 "옴파로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릉'] 12:42 "영릉 英陵" 조선왕조 최초의 왕-왕비 합장묘로서 "소헌왕후"와 함께 영원히 평안히 잠들고 있습니다 조선왕조 왕비들 중에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왕비가 "소헌왕후"입니다. '청송 심씨'이지요. 8남2녀. 세종대왕과 금술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만하죠? ㅎ 또한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이외의 여섯명의 후궁들로부터도 열명의 아들을 더 낳았는데...총 18명 세종대왕은 낮일뿐만 아니라 밤일도 무지 잘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ㅎ 그러니까 '세종대왕'은 政事도 잘 보았지만 情事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영릉'에서 조망] 예전과 달리 출입금지 구역이 대부분이라 근접해서 촬영하기가 어려웟습니다. 그래서 10여년전에 촬영한 사진을 보여 드림니다. ['영릉' 뒤에서 조망] 2015년 9월 15일에 촬영한 사진 <英陵> 뒤에서 조망합니다. 풍수지리를 모른다 해도 이 자리가 왜 명당자리인지 느낄수 있나요? 앞에 보이는 산이 <6~7코스>를 걸으며 보아 왔던 "북성산 北城山257.6m"입니다. 영의정까지 올랐던 <이인손의 묘>를 만든지 불과 몇년만에 국가가 빼앗아 <세종대왕릉>을 조성했는데 천하명당 같나요? ['비각'] ['세종대왕 표석'] ['표석' 번역문] <비각>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설명되 있습니다. ['왕의 숲길'] 12:48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릉>으로 가는 숲길 입구입니다. <세종대왕>은 앞에서도 언급한 '자식 복'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복' '사위 복'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에 대해 알아 보면.... 그 중에서 "동성애-레즈비안" 이야기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훨 많으실테니까...ㅎㅎ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여자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 對食>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봉씨'는 '김씨'처럼 "압승술"을 쓰는 대신 동성애에 빠져 궁녀들과 성욕을 불태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노발 대발 난리가 났고 결국 폐서인을 시켜 추방합니다. 쫏겨난 '봉씨'는 반성은 커녕 성욕을 해결한게 뭔 죄가 되냐고 항변하다가 결국 자기 친아버지로 부터 비참하게 목 졸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큰며느리들은 성욕을 해결하지 못해 "압승술" "동성애"를 하다 쫏겨나고 "모락산"이라는 산 이름을 만든 "임영대군"의 와이프는 정신질환자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 막말을 하는 등 '미친년'이었으니 지지리도 '며느리 복'이 없는 '세종대왕'이었던 것입니다. ['효종릉' 가는 길]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있었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선비였는데,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이 놈은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안맹담" 사위와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집안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살아 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습니다. ['효종릉 寧陵'] 12:58 <세종대왕릉>에서 10여분 <왕의 숲길>을 진행하면 "효종릉 寧陵"에 도착합니다. "효종 1619(광해군11)~1659(효종10)(재위 1649∼1659)" "북벌정책" '김상헌' '송시열'등 강경 북벌파들을 중용하여 '청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았던 왕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하멜의 조선 표류기" 아시지요? '효종'시대인 이때에 제주도 남단 '가파도'에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표류하게 되었지요. "효종"은 "하멜"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신식 총기를 제작하게 하며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불테우기도 했죠. 그런데 이 총기의 개발로 청나라를 친게 아니라 러시아를 치게 되죠? ㅎ 청나라가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 파견 요청이 왔는데 거절할수 없어 파병하는데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벌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지요. 하지만 청나라에 대한 북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엄청난 군사비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며 특히 "우암 송시열"과의 견해차이로 북벌계획은 유야무야되어 갔습니다. "효종"은 오로지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우리가 먼저 수련을 한후에 하자는 것이었는데....
['효종릉' 안내문]
[효종릉 재실] <효종릉>에선 꼭 들려야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재실>입니다. 그 이유는... ['회양목'] [안내문] 바로 "천연기념물 회양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회양목>은 찾을수 없다고 ['효종릉' 정문] 1:07 <효종릉> 정문을 나서면.... ['효종릉교차로'] 1:10 <효종릉교차로>를 만나는데 길을 건너 안쪽 길로 진행해야 하고 ['여주천후양궁훈련장'] 1:15 "여주 전천후 양궁훈련장"을 지나면... ['세종산림욕장 입구 공원'] 1:16~1:18 화장실도 있는 "세종산림욕장 소공원"을 만나며 ['세종산림욕장' 입구] "세종산림욕장" 정문으로 들어 가 조금 올라 가면... [갈림길] 1:19 갈림길을 만나는데 직진길은 <여강길 6코스>이고 <여강길 4코스>와 <봉화길 7코스>는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여주양궁훈련장' 조망] <여주 전천후 양궁훈련장>이 전체적으로 조망되고 [오름길] 약 8분간 산림욕장을 통과하며 올라 가면... [산림욕장 정상] 1:27 정상에 도착합니다. <해발 92.53m>라는 삼각점이 있는 산림욕장 정상입니다. [조망 1] <세종대교> 아래에 있는 "양섬 羊島"이 서울 <여의도> 축소판처럼 보이는데 야구장등 운동장이 여럿 있습니다. <남한강> 건너편 <여주시>의 <현암동><오학동><천송동>등이 조망되며 <신륵사>까지 보이는군요. ['여주시내' 조망] <여주시내>가 한눈에 들어 오는군요. [내림길]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잠시 내려 가면 소공원을 만나는데 길조심을 해야 합니다. 좌측 정자 뒤로 내려 가야 합니다. 옛 <여강길>은 우측으로 그냥 나갔는데.... ['한강종주자전거길'] 1:38 <한강종주자전거길>로 내려 서서 7분여 직진하면.... ['하리보도교'] 1:45 <소양천 昭陽川>을 건너는 <하리보도교>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갑니다. ['여강 산책로'] <여주시 하동>의 <남한강 산책로>를 15분여 진행하는데.... 이곳의 <남한강>을 "여강 驪江"이라고 하죠 ['대로사' 입구] 2:00 . <대로사> 갈림길을 만나면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고 ['대로사'] 2:02~2:07 "대로사 大老祠"를 구경하고 갑니다. ['추양재'] 좌측에 <추양재>라는 관리실이 있고 가운데 작은 문으로 들어 가면 ['대로사'] 우측에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대로사 大老祠"가 있는데 출입할수 없고 ['강한사'] [안내문] "대로서원 大老書院"이 있는데 "강한사 江漢祠"라고도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강한사'에서 조망] "大老"는 큰 어른을 의미하는데 <우암 송시열>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대원군>이 서원철폐를 할때 이 서원은 남겨 두었답니다. 그러면서 "大老"는 <대원군> 자신이지 <송시열>이 아니라고 <대로사>를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었답니다. ['여주성당'] 2:10 <대로사>를 나와 <한글시장>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여주성당"을 지나고 ['한글시장' 출입구 앞] 2:11 이어서 <한글시장 입구>를 만나는데 <여강길>은 좌측 <한글시장> 안으로 진행하고, <봉화길>은 직진합니다. 저는 <옛 수여선 여주역터>를 찾아 보기 위해 <한글시장> 안으로 진행합니다. ['한글시장' 출입구] "여주 한글시장" 5일장으로 매월 5일. 10일에 장이 얼림니다. 장날 와야 좋은데.... 올때마다 들리는 꽈배기집에서 찹살도넛과 꽈배기를 만원어치 사들고 갑니다. [어린시절 '세종'] <충녕대군> 시절 <이 도>의 앳띤 모습도 볼수 있는데 잼있죠? ㅎ 들고 있는 책은 천자문이더군요. ['여주시청' 조망] 2:18 <한글시장>을 나가면 <여강길>이 가는 북쪽방향에 <여주시청>이 보이며 ['세종로'] 남쪽으로 <여주 세종로>가 이어집니다. <여주시민회관>으로 표기한 곳으로 가면.... ['여주시민회관'] 2:21 "옛 수여선 여주역 터"였던 곳엔 "여주시민회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옛 "여주역"의 흔적은 찾을수 없습니다.
['옛 여주역'] 수여선 열차의 종착역인 <여주역>은 유감스럽지만 현재 주택지에 덮여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며, 단지 지금의 <여주시민회관>에 자리했다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현재는 남은 게 없지만, 수운교통을 밀어내고 지역사회에 큰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하여 영동고속국도에 배턴을 넘겨주기까지 약 40년간 기적소리를 울렸던 곳입니다.
['여주경찰서'] ['옛 수여선 철길] 2:23 시민회관 건너편에 있는 <여주경찰서> 뒷골목으로 <옛 수여선 철길>이 이어졌었답니다. 이 골목이 그 철길이었답니다. 5분여 골목을 진행하면.... ['문화교'] 2:28 <옛 수여선>의 철교가 있었던 다리를 만나는데 이름은 "상리철교"였답니다. 지금은 "문화교"라고 하는군요. ['봉화길' 재회] <문화교>를 건너면 다시 <한글시장 입구>에서 직진하여 오는 <봉화길> 정규코스를 만납니다. <옛 수여선>은 직진하는데, <봉화길>은 좌측 <소양천>을 따라 진행하게 되겠습니다. ['소양천변길'] <소양천변길>을 15분 정도 진행하면.... ['향교교'] 2:44 "향교교 鄕校橋"를 만납니다. <봉화길>은 우측에 있는 <향교>를 다녀 오라고 합니다. ['여주향교' 조망] ['여주향교' 줌인] <향교교>에서 바라보는 "여주향교"입니다. 여느 향교와 큰 차이가 없어 괜히 시간 낭비 할 필요없이 줌인한 사진만 찍고 <여주역>으로 갑니다. ['향교교'] 2:47 <향교교>에서 <여주역> 방향으로 7분여 진행하면... ['봉화길' 안내판] 2:54 <경강선> 다리 밑에 <봉화길 7코스 안내판>이 서 있고 우측으로 들어 가면 ['여주역'] 2:55 "여주"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조형물이 나그네를 반기며 "경기옛길-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을 마침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14.4km였으며, 왕릉과 문화역사관등을 돌아 보느라 4시간 10분이 걸렸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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