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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경기도 도립공원" [남한산성] "인조의 길" [남한산성 서문]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 [구글어스]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마천역"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서문-북문]을 오르고 '경기도 하남시'의 "고골 古邑"을 통과하여 "광주향교"까지 약10km를 갑니다. ['거여삼거리'] 12:39 2020년 3월 18일 (수)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지하철5호선 마천역1번출구]로 나가 50m 정도 직진하면 삼거리에 있는 "거여119안전센타"를 만나 좌회전 하고, 조금 올라 가면 이곳 "거여삼거리"를 만납니다. [남한산성]이 보이는 이 도로에서 좌측은 [마천동]이고, 우측은 [거여동]이더군요. 직진해서 8분여 올라 가면... ['만남의 장소'] 12:47 [송파상운]이라는 버스회사의 버스종점을 만나는데 정면에 [남한산성]의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남의 장소"라는 등산객들의 집합소가 있는데, 이 주변을 상세한 지도로 확인하고 출발합니다. [현위치] [구글어스] "만남의 장소"라고 표기한 곳이 [현위치]입니다. 제가 이번 산행의 실트랙을 구글어스에 편집하여 보여 드리는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385년 전 [병자호란]으로 조선 16대 왕 [인조]가 항복을 하러 내려간 루트를 대략 추정하기 위해서 제가 걸어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현재의 등산로 중에 하나이며 역사적 고증을 거친 길은 아니고 추정해 본 길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인조의 길"이라고 제가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앞으로 전문가들이 확실한 역사적 고증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하남시 市界'] 12:50 [만남의 장소]에서 100m 정도 직진하면 "서울시-하남시 市界"를 지나게 되는데, '하남시 감이동 甘二洞' 속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조그마한 전통시장 같은 상가 골목을 잠시 통과하면... ['위례대로'] 12:51 현재 공사중인 [위례대로] 밑을 통과하는데, 좌측으로 가면 [성불사] 방향으로서 [연주봉옹성]으로 직접 오르는 등산로이고 직진성 우측으로 가면 [서문]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되겠습니다. [인조]는 실록에 [서문]을 통과해 [삼전도]로 내려 갔다고 쓰여 있으니 우측길로 진행합니다. 8분 정도 진행하면... [다리] 12:59 조그만 다리를 건너는데 [우익문(서문)]까지 1.3km라고 알려 줍니다. 뒤에 보이는 뾰쪽한 산이 [남한산성]의 "연주봉" 인듯 [오름길] 다리에서 완만한 오름길을 100m 정도 잠시 더 오르면... [등산로 들날머리] 1:02 먼지털이와 화장실이 있는 실질적인 [남한산성 서문 등산로]의 들날머리를 만나고 [갈림길] 1:03 [안내도] 들날머리에는 갈림길과 등산로 안내가 있습니다. 저는 [서문]으로 가장 빨리 오를수 있는 [3번등산로]를 이용합니다. [오름길] 대부분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름길을 15분여 오릅니다. 인조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14일 그날의 [인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日晩, 大駕將發, 而太僕人盡散, 內乘李星男, 牽御馬而來. 駕到崇禮門, 聞賊兵已到良鐵坪, 上御南大門樓, 令申景禛結陣于門外. 崔鳴吉請赴虜陣, 以觀變, 遂遣鳴吉, 請成於虜, 以緩其師. 上還從水溝門, 出向南漢山城。 是時, 變出倉卒, 侍臣或有步從者, 城中人父子、兄弟、 夫婦相失, 哭聲震天. 初更後, 大駕到南漢山城. 해가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실록의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기 쉽게 '파란문'이 친절하게 풀이해 드리면 [대가(大駕)]는 임금이 타는 가마를 의미하는데 요즘으로 치며 '벤즈 리무진'같은 거겠지요? ㅎ [태복인(太僕人)]은 '궁중의 말과 가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고 [내승(內乘)]은 '태복인의 직급 중에 하나' 인듯 한데 높은 지위인듯 합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현재의 [광희문]을 말하는 것인데 '을지로7가'와 '퇴계로7가'가 합류하는 현재의 [동북고] 앞 삼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삼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광희동'에 복원해 놨습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한양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환경 오물을 성밖에 내다 버리는 문으로 이용되었고,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어 [남소문]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했습죠. '왕십리'라는 지명은 이 [수구문]에서 십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往十里'라고 했는데 한양성에서 배출되는 환경 오물들을 내다 버리는 곳이어서 '똥파리'들이 들끓었다고 [왕심리똥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답니다. '초경(初更)'은 밤 9시경인데 "初更後"이니 밤 10시경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위의 실록을 알기 쉽게 제가 간단하게 풀이 하자면 청나라 군대가 쳐내려 오자 [인조]는 '한양성'의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백성들의 시선을 피해 시체나 똥물을 내다 버리는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 갔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이 비록 도망이지만 행차인데도, 가마를 메는 놈들까지 대부분 도망 가서 가마 멜 놈들이 없어 [내승(內乘)]이 가마 대신 말을 끌고 와 도망 갔다는 것 아닙니까...어휴~~쪽팔려... [갈림길] 1:18 화장실에서 15분 정도 오름짓을 하면 이런 갈림길을 만납니다. 직진성 좌측길은 조금전 안내도의 [2번등산로]이며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주등산로여서 계단과 로프등 시설이 잘 되 있으나, 저는 지형적으로 [인조]가 우측 [3번등산로]를 이용 했을거라 추정하여 우측길로 올라 갑니다. 어느 길로 가나 다시 만납니다. 우측길로 잠시 나가면... [조망처] 1:22 여기선 정확한 [서문]의 위치를 알수 없으나 [남한산성] 능선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을 15분여 더 올라 가면... [주등산로] 1:37 조금전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로프등 안전시설이 설치된 가파른 등산로를 다시 만나는데... [인조]는 평민복을 입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대동하고 자신은 백마를 타고 [서문]을 나섯다고 실록에 쓰여 있는데 가파른 산길에서 말을 타고 내려 가는 것은 걷기보다 더 위험하기에 아마도 말을 탓다가 가파른 곳에선 말에서 내려 걷다가를 반복하며 하산 했을 거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송파]로 통하는 산길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오름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러 내려 간길은 [서문]에서 [삼전도]로 갔다고 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지만 [인조]가 몽진을 하며 [남한산성]으로 올라 갈때엔 어느 길을 이용해 [남한산성]으로 올라 갔는지에 대해선 실록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 때 [수구문]을 출발하여 '초경'이 지나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정문이라 할수 있는 [남문]을 통해 올라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설화가 거의 정설화 되다시피 전해 내려 옵니다. 1636년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갔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인조실록]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살찐 비만의 [인조]를 업고 간다는 것은 무지 힘들었겠죠? 그래서 업혔다 걷다가를 반복했다는데, 현재의 [송파구 오금동] 쯤을 지날 때에는 [인조]가 다리가 아파 주저 앉았는데, 후세의 백성들은 "살찐 임금 인조는 오금이 져려 체면이고 뭐고 주저 앉았다"고 비아냥거리며, 그통에 이 동네 지명이 [오금동]으로 불리워진 사연 중 하나라고 놀려 댓답니다. [오금동]은 [오동나무 梧]와 [가야금 琴]으로 오동나무가 많아 가야금을 많이 만드는 마을에서 지명이 유래하는데도....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쪽팔리는 도망을 해서 백성들로부터 비아냥을 받은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올라 갔답니다. 현재 '송파구 도서관' 앞 마당에는 그 날의 그 상황을 동상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무꾼 "서흔남"이 [인조]를 업고 올라 가는 동상이 엄청 크게 건립되 있는 것이죠. 그 사진을 보여 드리면... ['송파구립 도서관' 앞 마당에 건립되어 있는 '서흔남'과 '인조' 동상]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 갈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임금님은 피난하는 것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무릎을 탁 치면서 "너 나보다 낫다"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무엇이던 들어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두말없이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 나뭇꾼이었는데, [인조]는 그에게 '종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관리 사무소와 역사기념관 앞 주차장 가에 있는 '서흔남 묘비'] ['서흔남 묘비'] ['인조'가 내린 '서흔남 공적비'] 산성안에 들어 가서도 서흔남은 여러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어지자, 남한산성 주변 지리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속여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답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하네요. [서흔남]은 죽을 때 자기 관 위에 [인조]로 부터 받은 '곤룡포(袞龍袍)'를 올려 달라고 하여 '곤룡포(袞龍袍)'를 덮어 쓰고 죽은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이었답니다. [인조실록]에도 밀사로 [서흔남]을 내 보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나옵니다. 1637년 1월7일자에는 ○城中居徐欣男及僧人斗淸, 應募出去, 持都元帥金自點、黃海兵使李碩達、全羅監司李時昉狀啓而來。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찮은 천민 임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서흔남에게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으며 그 공적비가 바로 위 사진입니다. 이것은 野史가 아니고 正史입니다 [주등산로] 1:49 [병자호란]은 왜? 일어 났는지를 알아야하겠죠. 제 나름 언급하자면...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후임인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세력인 훈구파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인조'를 옹립한 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나라'를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훈구파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쉼터]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서문] 앞에 있는 쉼터를 만나는데 호랑이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조망] 출발지였던 '거여동' '마천동'이 희미하게 조망됩니다. [인조]는 분명 이 길로 몽진과 항복을 하러 눈 덮힌 산길을 오르내렸을 거로 짐작 됩니다. ['서문' 입구] ['서문'] 1:52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경기도'가 지정한 도립공원 3개 중에 하나로서 정식 명칭이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이 되었죠. 또한 2014년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서문] 통과] ['서문' 안내문] 지금으로부터 385년전..그러니까 무지무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남한산성]의 문 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은 "西門-右翼門"을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통과했습니다. '청나라'에 항복하러.... [城안] 城 내부를 들여다 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 行宮이 있습니다.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어디로 갈것인지 길을 찾지 못하고 말싸움만 하다가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헤 부러지고 마는 허무한 국가의 운명이 바람 부는 날의 촛불같았을 그 날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 갑니다. ['서문'] (10분간 휴식) 본명이 "우익문 右翼門"인 "西門"을 城안에서 바라본 광경입니다. 1636년12월 14일 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유난히도 춥고 눈도 엄청 많이 내렸고 일식도 나타나는 겨울에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며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1637년 1월 30일의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남염의(藍染衣)]는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을 의미하지요. 계급장 떼고 평민복 입고 자식들을 인질로 끌고 나가는 패전보다 못한 항복, 그 치욕을 감내한 남한산성.... 아 ! 백성들이 통곡을 한것은 나라 잃은 슬픔일까 [인조]에 대한 연민일까... [옆에서 본 '서문'] '김훈'의 역사 소설 '남한산성'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합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 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바스락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 가면 눈 덮힌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 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 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 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서울' 조망] 2:17 [서문]에서 [연주봉옹성] 방향으로 조금 가면 전망명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전된 서울과 서울을 감싸고 있는 북한산 도봉산 등을 조망합니다만 저의 눈에는 1637년 1월 30일의 상황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삼전도에서의 항복" "三田渡"는 앞에 보이는 [롯데월드타워]가 있는 [석촌호수] 주변이라고 합니다. [석촌호수] 옆에 항복을 하고 충성을 맹세한 치욕의 "삼전도비"가 현재도 세워져 있죠. 제가 예전에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한 사진과 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삼전도비']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가 오리지날 이름이죠. "삼전도비"라고 하는 것은 이 비를 '삼전도'에 세워서 부르는 일반명사입니다. "삼전도"는 저곳 잠실나루터 부근인데 밀물 때에도 잠기지 않는 밭이 세곳 있었다고 "三田渡"라고 했답니다. 이 비석의 전면 좌측에는 '몽골글자'로, 우측에는 '만주글자'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놨습니다. 글의 내용을 번역하면....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 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삼전도비']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삼배고구두례'를 하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남긴 "치욕의 비석"입니다. 포로로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주축으로 수만여명을 포로로 보냈으며 여자가 대부분이라죠. 정조를 짓밟힌 여자를 "화냥년"이라 하죠? 이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라고 했는데, "환향녀"가 음운변화로 "화냥년"이 되었으니 "인조"는 자신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화냥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 오는 "환향녀"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 "홍제동"에 있는 "홍제천"에서 '여자의 그곳'을 씻기만 하면 처녀로 구제해 준다고 했으며 그래서 개천 이름이 "모두 구제헤 주는 개천"이라고 "弘濟川"이 되었다는 겁니다.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 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이 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듯 합니다. - 파란문 - ['연주봉' 조망] 전망대에서"연주봉"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연주봉"은 한자로 "連珠峰"으로 쓰는 듯 하지만, '파란문'의 생각에는 "戀主峰"으로 느껴집니다. [서문]을 통해 항복하러 가는 임금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어떤 연민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주봉]에선 [서문]에서 이어지는 행렬이 [삼전도]까지 잘 보였을 겁니다. ['서문'에서 '북문'까지 지도] [서문]에서 [연주봉옹성]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상세 지도입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 2:21 [안내문] "연주봉옹성"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남한산성]에는 네개의 옹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입니다. ['연주봉옹성' 조망] 城 밖에 돌출되 있는 [연주봉옹성]을 조망하고 [내림길] [북문]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조망] [북문]으로 가며 조망하는 [남한산성]의 동쪽 끝에 있는 [동장대]가 있었던 봉우리가 보이며 [남한산성]의 외곽성인 "봉암성"까지 잘 보이는군요. 실록에는 저 [봉암성] 근처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이 [북문] 아래에 있는 행궁까지 날아 왔는데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술되 있습니다. 대포알은 '오리알' 정도 크기였다고... ['북문'] 2:34 "全勝門-北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한 "고골-법화골"로 나가는 문입니다.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300명이 내려가 기습공격을 해? 당시엔 겨울이어서 앙상한 나무가지로 시야가 트여 성문으로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망원경이 있어 동태파악이 확실이 되었는데도 성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으니 뭔 껀수를 만들려고 한게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습니다. 조선군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던 청나라군은 문 밖에 있는 고골계곡에 없는듯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어리둥절하여 철수하는 조선군 300명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후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북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개명 하였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29일)' ○是日, 出兵北門外, 陣于平地, 賊不與之戰。 日且暮, 體察使金瑬在城上, 傳令收軍上城, 賊自後掩之, 別將申誠立等八人皆死, 士卒死傷甚多。 瑬以覆軍、(債)〔僨〕 事待罪, 上慰諭之.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수어장대' 조망] [북문]에 올라 [수어장대]를 조망하고... ['북문' 밖 조망] [북문]을 통과하여 [고골계곡]으로 내려 가서 [뒤돌아 본 '북문'] 2:39 [북문]을 뒤돌아 보고 ['북문갈림목'] 2:42 계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북문갈림목]을 만나는데, [위례둘리길]과 [고골계곡]이 나뉘는 곳이군요. [급경사 내림길] [머리 조심] 2:49 [북문]에서 내려 가는 길은 엄청 가파랏습니다. 적군을 방어하기엔 좋은 지형이지만 공격하러 내려 가기엔 부적절하겠더군요. 제가 느끼기에도 이 길로 내려가 "바위에 계란 던지기"를 한것은 자살행위가 아닌지... [데크 계단] 제법 긴 데크 계단이 10여분 이어지고 [쉼터] 2:58 데크가 끝나는 곳에 제법 너른 쉼터가 있고 이 길이 "세미길 稅米"이라고 알리고 있더군요. 한강을 통해 운송된 곡식이 [남한산성]으로 다시 올려 보내지는 길이었다고 ['고골' 계곡길] 이어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8분여 진행하면... ['토박이' 음식점] 3:06 '토박이'라는 음식점을 만나는데, 닭, 오리 백숙과 도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더군요. ['벌봉 갈림목'] 3:10 조금 더 내려 가면 "벌봉 갈림목"을 만나는데 [고골]에서 "벌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군요. ['덕풍천'] [북문]에서부터 [한강]으로 흐르는 개천이 "덕풍천"이군요. 다시 8분여 진행하면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 3:18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에 도착해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북문]에서 급격한 내리막 이후엔 바로 평지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좌측에 [연자방아]가 있다고 해서 다녀 옵니다. ['벌봉' 조망] 삼거리에서 50여m 가까운 곳에 [연자방아]가 있으며 여기선 [벌봉]과 [봉암성]이 아주 잘 조망되는군요. 그리고 "법화사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군요. "법화사" [법화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이곳에서 전사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답니다. 당시의 [법화암]은 '양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딴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고골]을 [법화골]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연자방아'] 3:20 [연자방아]를 흘깃 구경하고 다시 돌아 나갑니다. [공용주차장] 3:27 "고골 공용주차장"을 지나는데 마을버스가 다니더군요. ['고골로'] ['하남 교산 신도시'] "고골-古邑"은 [하남 교산 신도시]가 건설 될 예정이라는군요. 곳곳에 반대하는 현수막도 엄청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돈 돈 돈 때문이겠지요? ㅎ [뒤돌아 본 '남한산성'] 3:45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십만대군이 진을 치고 [남한산성]을 향해 항복을 강요하던 곳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골말' 안내석] 4:05 "고골-古邑"은 [한성백제] 초기 왕궁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아마도 [유리왕]이 살던 왕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동네 이름이 "春宮洞"이라는 곳이 있죠. 이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등으로 확장 이전 했다고 합니다. ['덕풍천' 수변길] 4:08 [덕풍천 수변길]을 잠시 통과하면 좌측에 [광주향교]를 만납니다. ['광주향교' 관리사무소] 4:13~4:20 ['광주향교 정문'] ['명륜당'] ['대성전'] "광주향교 廣州鄕校" [광주향교]가 왜 '하남시'에 있냐구요? ㅎ 예전 "廣州"는 현재의 '광주시' 뿐만 아니라 '한강' 아랫쪽 '하남시-성남시-과천시-안양시-안산시'까지 '광주현'이었답니다. 그래서 '넓을 廣'을 사용하는 "廣州"여서 "광주향교 廣州鄕校"가 이곳에 있는거죠. 매우 큰 규모의 향교입니다. ['객산' 조망] "객산'을 조망하는데 추억이 새롭군요. ['고골사거리'] 4:21 [춘궁동]의 "고골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둔촌역]으로 가 귀가했습니다. [고도표] [구글어스] 구글어스로 보는 "고골"은 풍수지리적으로 어던 느낌이 드나요 [한성백제]의 초기 왕궁이 자리 잡았다고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 않나요? 오늘 걸은 거리는 약10km였으며 3시간 40분 정도가 걸렸군요. '병자호란'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삼전도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 파란문 -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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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마천동-서문-고골.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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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서천군의 바닷가』  
   『철새나그네길 1~2코스』"붉은낭만길-해지게길"  
                             


  ['철새나그네길' 전체 코스 위치도]

  "서천군 철새나그네길"은 다섯개 코스 총37.9km로 구성되 있답니다.
  1코스(붉은낭만길) : 홍원항(0km) → 춘장대역(2.3㎞) → 춘장대해수욕장(3.3㎞) → 부사호(8.8㎞)
  2코스(해지게길) : 동백정(0km) → 성경전래지(4.2㎞) → 마량포구(5㎞)
  3코스(나그네길) : 해오름관광농원(0km) → 월하성어촌체험마을(4.5㎞) → 선도리어촌체험마을(5.5㎞) →
                      해변길 → 다사항(14㎞)
  4코스(윤슬길) : 장구만철새도래지(0km) → 송석리어촌체험마을(2㎞) → 죽산해변(매바위)(5㎞)
  5코스(해찬솔길) : 송림산림욕장 주차장(0km) → 옥남리 철새도래지(2.5km) → 송림산림욕장 주차장(5㎞)
  오늘은 그 첫번째로 [1코스~2코스]를 묶어 갑니다.


  [구글어스]

  [국토지리원 지도]

  대중교통 편의 상 [2코스 종점] 부터 역순으로 진행합니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있는 "마랑리 버스종점"에서 출발하여 "마량포-동백정-홍원항-춘장대"를
  통과하여 '충남 서면 도둔리'에 있는 "서도초등학교"까지 약11.6km를 갑니다.


  ['서천역']                    9:35

  ['서천역 버스정류장']                  

  2020년 6월 30일 (수) 흐림 
  [용산역]에서 6:21 에 출발하는 [장항선 열차]를 6:54 에 [수원역]에서 타고 [서천역]에 9:35 에 내렸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서천 땅"을 밟았습니다. 이곳이 충청남도라는 것도 새롭게 다가 옵니다.
  고정관념엔 "충주-청주" 지역이 "충청도"라고만 인식되 있었는데...오늘은 고정관념 탈출을 해야겠습니다.
  날씨는 꾸물꾸물해서 덥지 않아 좋았지만 사진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서천역] 좌측에는 [택시]와 [버스] 승강장이 있습니다.


  ['서천역' 버스시간표]
.
  [서천역]에서 [마량리]나 [춘장대해수욕장]까지 직접 가는 시내버스는 없습니다.
  여기서 "시내방면' 버스를 타고 [서천버스터미널]로 가서 환승을 해야 합니다만 버스 시간이 어중간하여
  택시를 타고 [서천버스터미널]로 갔는데 요금은 4,000원 이었습니다.


  ['서천버스터미널']                   9:45
.
  [서천역]에서 택시로 5분 정도 걸려 "서천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시외버스와 시내버스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버스터미널이었는데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았습니다.
  [서천군]의 총 인구가 55,000명 정도라고 하며 150,000명이다가 점점 줄어 1/3토막이 되었다니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듭니다.


  ['서천버스터미널 버스시간표']
.
  여기서 [철새나그네길 1~2코스]로 접근하려면 버스시간표 맨 우측에 있는 "동백 방향" 버스를 타야 합니다.
  [1코스]로 접근하려면 [동백-춘장대]라고 표기된 버스만를 타야하고, [2코스]는 모두 갑니다.
  30분을 추가로 기다리기 보다는 [2코스]부터 역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10:00"에 출발하는 [동백]방향 버스를
  타고 종점인 "마량리"로 갔습니다.


  ['마량리 버스 종점']                  10:55~11:00

  [서천버스터미널]에서 약50분이 걸려 이 버스의 종점인 "마량리"에 도착했습니다.
  간단하게 걷기 준비를 하고 [성경전래지기념관] 방향인 남쪽으로 진행합니다.
  [마량포]와 [성경전래지]를 둘러보고 다시 이리로 나와야 합니다.


  ['마량리']

  좌측에는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공원]이 있고, 이어서 [마량포 港]이 계속됩니다.



  ['성경전래기념관' 가는 길]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성경전래기념관' 조망]                 11:03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이 보이는데 뭔 펜션이나 모텔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최초성경전래지기념관' 입구]                    11:05~11:20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
  입장료가 있으며 '경노와 장애인'도 입장료를 내야 하더군요. 좀 이례적이죠? 요즘 종교는 꽁짜가 없어요.ㅎ
  이 기념관에 대해선 홈페이지의 안내문을 인용합니다.
  조선후기 1816년(순조16년) 마량진 갈곶에 일시 정박한 영국 함선 알세트호의 선장 머리 맥스웰 함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이 전해졌으며 한국최초 성경전래 기념관은 성경 전래의 역사를 연구,전시교육,
  체험하여 국가와 세대를 넘어 바른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여 2016년 9월5일 한국최초 성경전래 2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기념관 건물 연면적 1374㎡ (약415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꾸며져 있으며 
  1,2층은 전시관 3층은 전망 카페 4층 다목적실 (예배당)이 있다.


  [기념관 1층-서천의 역사]          

  기념관에 들어서면 먼저 우리나라와 세계 속에서의 서천의 역사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서천에 성경이 1816년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기록들이 <조선실록>과 
  '바실 홀'이 1818년 출간한 <한국서해안과 류큐 항해기>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내문]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히 알고 가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언급하자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 된것과 여기서 얘기하는 '성경'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이 최초로 전래 된것이 기독교가 최초로 전래 된 것으로 오해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최초라고 주장하는 성경이 전래된 것은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이지만,
  기독교와 관련 성서들은 이로부터  훨신 이전인 17세기에 들어 왔죠.
  [임진왜란] 때에 들어 왔다던가 [광해군] 때라던가 [인조] 때에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아담샬신부'에게서 기독교서적을 받아왔다던가...이후 성리학등 유교문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서양문화를
  받아 드리는 실학자들이 사신으로 갔다가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와 그들이 먼저 믿음을 갖게
  되었다던가 하는 기록들은 차고 넘침니다.
  동양 3국 중에서 중국과 일본은 비교적 빨리 기독교를 받아 드렸는데 우리나라보다 수백년 먼저 였습니다.
  우리나라만 많이 늦어졌습니다. 강력한 유교문화와 왕조체제등으로 늦어 졌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주장하는 [성경최초전래]와 기독교 최초전래가 횟갈리게 되는 이유는
  제 생각에 기독교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지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크게 나눌수 있는데 여기서는 "개신교"의 입장에서 "최초"라는 것이죠.


  [범선 모형]

  1816년(순조16년) 영국 정부는 '암허스트경'을 중국에 사절로 파견하였는데 
  이 때 사절단을 태우고 중국으로 향한 함선이 '알세스트(Alceste)호'와' 리라(Lyra)호'였다고 합니다.
  당시 두 함선의 함장은 '맥스웰(Maxwell)'과 '바실 홀(Bassil Hall)' 대령이였는데 
  이들은 사절단의 임무를 마치고 중국 광둥성 항구에 대기하던 중 영국 본국으로부터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고 약 10일간 백령도와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것은 아니라는 걸 알수 있죠?


  [상황극]

  1816년 9월 5일 서해안 탐사중 두 함선은 이곳 '비인현 [마량진] 해안가'에 정박하게 되는데 
  당시 [마량진] 참사였던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이 이들의 함선에 승선하여 조선으로 온
  내항 목적을 물었지만 서로 언어가 달라서 소통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때 침략이라던가 간첩행위를 하러 온게 아니고 탐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걸 알리며 우호적이란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주었는데, 그 선물 중에는 '술 酒'이 많았는데 '조대복'과 '이승렬'에게는 비싼
  "체리 브랜디" 몇 병을 주었고, 수행원들에겐 "럼주"를 주었답니다.
  그리고 함선에 있던 책들도 주었는데, 많은 책들 중에 "킹제임스 성경책"도 '조대복'에게 줬다고 합니다.
  여러 책들 중에 하나 선물로 준 책인데, '개신교'를 믿는 분들에겐 엄청난 의미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실물크기로 생동감 있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당시 전달된 성경은 1611년에 출간한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


  [모형 범선]

  [대포]

  '리라호'를 둘러보던 첨사 '조대복' 일행은 그 배의 대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데요.
  이에 화답하듯 '리라호' 선원들이 대포에 탄알을 장전하고 아래를 향해 발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조선의 음악]

  각각의 레버를 돌리면 조선의 음악과  영국의 행진곡을 들을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 놨습니다.
  영국의 행진곡,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가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행진곡이라 하고
  조선의 행진곡은 부는 악기인 취 악기와 때리는 악기인 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뜻에서 
  '대취타'라는 곡명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2층]

  1층을 구경하고 2층으로 올라 가면, 1층과 2층이 뻥 뚫려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성경 원본]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킹 제임스 성경"이었습니다.
  1611년 영국에서 제작된 '킹 제임스 바이블 원본'과 시기별 한국어 성경 번역본 등이 전시되 있는데
  저는 처음에 이 성경책이 "맥스웰 함장"이 "조대복"에게 준 그 성경책인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런데 옆에 무지 비싼 책이란걸 자랑이라도 하듯, "구입가 3억원"이라고 안내합니다.
  3억원을 주고 근간에 외국에서 사온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해서... 깜놀 ㅎㅎ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에는 최초 전래된 성경 원본이 전시되 있을거라고 모두 생각하지요?
  외국에서 3억원씩이나 주고 사온 성경을 전시하는 기념관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념관의 이름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3억원 주고 사온 성경 전시관"이라고... ^.^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조사를 해 봤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 또는 "흠정역 성경"은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는 왕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이에 성공회가 1604년에 번역을 시작하여 1611년에 끝마친 기독교 성경의 영어 번역본으로
  여기서 '흠정'의 뜻은 '임금이 몸소 제정함'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일성록']

  "일성록 日省錄 "은
  [영조 6년]이후 조선왕조의 정무일지로서 [국보 제153호]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기록물로서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되 있습니다. 이곳의 "일성록"은 사본인듯....
  여기에는 [순조 16년] 충청 수사 '이재홍'이 '마량진'에 도착한 영국함선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을 만나고 돌아간 사건에 대해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답니다


  [포토존]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은 첨사 '조대복' 일행이  '알세스트호'의 선실을 방문하자
  '체리 브랜디' 몇 병과 '럼주'를 주었다고 위에서 언급했죠? 특히 '조대복'에게는 성경 책을 주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조대복'과 '이승렬'은 큰 갓과 장죽, 부채 등 조선의 토산물을 선물로 주었답니다.


  ['마량 회센타']                  11:25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을 관람하고 [철새나그네길]을 계속 진행합니다.
  [마량포]로 나가면 회센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버스 문제만 아니라면 1코스부터 답사하여 이곳에서 마치고 뒷풀이 하기에 적합 할듯..ㅎ)


  ['비인항']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있는 이 漁港은 지도에 "비인항 庇仁港'이라고도 표기되 있고
  "마량진 馬梁津" "마량포 馬梁浦" "마량항 馬梁港"등으로도 표기되 있습니다. 규모가 큽니다.
  옛날엔 이 지역 전체가 "비인현"이었다가 현대에 와서 "서천군 서면 마량리"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라고


  ['마량진방파제']                   11:30

  [마량진 방파제]로 가면 "마량진 해넘이 해돋이 명소"라고 자량하고 있습니다.
  '서천군 서면'은 [안면도]의 축소판으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래서 양면이 바다여서 西海임에도 불구하고 [해넘이]와 [해돋이]를 함께 볼수 있는 곳이 되겠습니다.


  ['마량진방파제' 위]

  [마량진 방파제] 위에서 주변을 조망합니다.


  ['개야도' 조망]

  먼저 남쪽으로는 "개야도 開也島""죽도 竹島"가 조망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개야소도(開也召島)"라 하여 '충남 서천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전북 옥구군 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의 통합으로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고
  높은 봉우리가 없고 구릉으로 이루어져 마치 이끼가 피어나는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개야도라 하였다는데
  한자의 뜻대로라면 육지와 가깝고 논밭이 넓어 누구나 섬에 들어오면 잘 살 수 있다는 뜻에서 개야도라
  했다는 유래가 더 신뢰가 갑니다.
  건너편 멀리에는 "군산시내"의 건물과 아파트들이 잘 보였는데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군요.


  ['연도' 조망]

  서쪽으로는 "연도 煙島"가 조망되는데 '전북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랍니다.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중국 산동에서 화창한 맑은 날에는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연기 煙"자를 써서 부른다는 설과, 한편으로는 호수 속에 피어오르는 연꽃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고 하는군요.


  ['성경전래기념관' 조망]                  11:41

  [마량진 방파제]에서 [동백정]으로 진행하며 조금 전에 들렸던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관"를 바라 보고


  ['아펜젤라 순직기념관']

  북쪽으로는 "아펜젤라 순직기념관"이 보입니다.
  "아펜젤라"는 [배재학당]을 설립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 순직기념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아펜젤라"는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이곳에서 가까운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로 순직했다는군요.
  순직기념관을 건립했다는데, 돌아가신 분을 "기념"하는 기념관" 명칭은 좀 어색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엔 "기념관"이라고 하지 않고 "추념관" 또는 "추모관"이라 하지 않나요?




  ['마량진 성경전래기념공원']                11:43~11:48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도 많은 예산을 들여 상당한 규모로 조성해 놨는데
  당시 영국 함선과 우리나라 판옥선 모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비교 됩니다. ㅎ


  ['비인면' 조망]                  11:54

  [철새나그네길 3코스]인 [비인면] 해변이 조망되는데 다음번에 답사할 예정입니다.


  ['해돋이마을']                  11:58

  ['철새나그네길' 이정표]                  12:07

  [마량진]을 벗어나면 이곳이 "마량포 해돋이 마을"이라고 알리는 안내석이 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철새나그네길 이정표"를 만납니다.


  ['마량포' 입구]                    12:08

  [마량포 입구]를 통과하면


  ['마량진 동백정마을']                  12:10

  [마량진 동백정마을] 임을 알리고 있는데
  [동백정] 가는 길은 이곳이 아니고, 우측 [서천화력발전소] 입구로 가야 했습니다.


  ['동백정' 가는 길]                     12:14

  "서천화력발전소"는 현재 대단위 공사가 진행 중에 있더군요.
  기존 발전소는 철거하여 관광리조트로 개발하고, 새로운 친환경 화력발전소를 건설 중에 있답니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철교인데 기존 발전소에 국내산 석탄을 운송 하던 기찻길이었답니다.
  건설 공사로 주변 지형이 바뀌어 [동백정] 가는 길의 길찾기를 잘 해야 했습니다.


  ['서천화력발전소' 정문]

  "(신)서천 에너지파크 1·2호기 발전소"의 정문으로 가서 좌측 길로 5분여 도로 따라 가면...


  ['(구)서천화력발전소']                 12:21

  "(구)서천화력발전소" 정문을 만납니다.
  이 화력발전소는 폐쇠되어 앞으로 대규모 관광리조트로 개발 될 예정이라 합니다.
  현재 가동 중단 상태라는군요.


  ['(신)서찬화략빌잔소' 건설중]                  12:24

  "(신)서천화략빌전소"는 현재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전부가 "동백정해수욕장"의 일부였답니다.


  ['동백정' 입구]                   12:27~12:50

  "(구)서천화력발전소"와 붙어서 바닷가 쪽에 조그마한 동산에 "동백정"이 있더군요.


  [매표소]

  입장료를 내야 출입 할수 있는 [동백정]이었습니다. 경로.장애인 무료.


  [계단 공사중]

  [동백정]으로 바로 올라 가는 계단은 공사 중인데...
  공사가 완료 된다 하더라도 기존 길로 가는게 "동백나무숲"을 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동백정' 가는 길]

  [동백정]은 "(구)서천화력발전소"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좌측 발전소도 예전엔 [동백정해수욕장]이었답니다.


  ['동백나무 숲' 오름길]

  [안내문]

  ['천연기념물 제169호']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舒川 馬梁里 冬栢林"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동맥나무 80여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동산이랍니다.
  헤아릴수 없는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인줄 알았는데 80여 그루로 그 규모는 예상보다 너무 작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됩니다.


  ['동백정']

  해수욕장에 발전소를 건설하며 지은 "동백정 冬栢亭"이라는 2층 정자가 있습니다.
  올라 가서 조망을 하면


  [서쪽 조망]

  서쪽으로 西海와 "오력도 五歷島"라고 한다는 조그만 섬이 보이는게 볼거리입니다.


  [동쪽 조망]

  뒷쪽인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구)서천화력발전소"가 바로 앞에 보입니다.
  조만간 폐쇠하여 세계최초로 폐쇠된 해수욕장을 다시 복원한답니다.
  KBS 뉴스에 나온 영상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다음을 클릭하여 들어 가 영상을 재생해 보세요. 완벽한 설명과 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KBS : 사상 첫 해수욕장 복원…동백정 절경 부활" 여기 클릭 


  [북쪽 조망]

  북쪽을 바라보면 [당집]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내려 가 보면


  ['당집']

  풍어를 비는 제사당이랍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헌금을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천원짜리 였지만 오천원권도 몇장 보이고 만원권도 한장 보였습니다. ㅎ


  ['오력도' 조망]

  "오력도 五歷島"를 다시 조망합니다.
  이 섬에서 서쪽으로 조금전 [마량진 방파제]에서 보았던 "연도 煙島"가 보인다는데,
  옛날 장수 한 사람이 여기서 [연도]로 건너다닐 때 뛰어넘다가 신발 한 짝이 떨어져서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더군요. ㅎ



  ['동백나무 숲']

  다시 80여그루의 동백나무 숲을 통과하여 내려 갑니다.
  여긴 3월 말에서 4월 초에 와야 동백꽃도 보고 축제도 함께 할수 있다는군요.


  [발전소 내 '동백정길']                 12:52

  [동백정]에서 나와 다시 [마량리]로 나갑니다.
  이 지역이 모두 [동백정해수욕장]이었답니다.
  다시 복원하여 충남 최대의 복합 관광지를 만든다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내도마을']                   1:19

  [동백정해수욕장]이었던 [서천화력발전소]를 벗어 나서 "내도마을"을 지나고


  ['홍원항' 입구]                  1:28

  이어서 "홍원항 입구"를 만나 들어 갑니다.
  10여분 들어 가면...


  ['홍원항' 앞 삼거리]                   1:39

  "홍원항 입구 삼거리"를 만납니다.
  [홍원항]은 좌측으로 가고, [춘장대해수욕장]은 우측으로 간답니다.


  ['홍원항' 조망]

  "홍원항"
  1991년 1월 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漁港다웁게 규모가 상당하군요.
  '전어'가 가장 많이 잡힌다는 漁港이라는데 가을이면 '錢漁' 굽는 냄새가 진동 한다는군요. ㅎㅎ
  집 나간 며느리 뿐만 아니라 바람난 처녀들 까지 돌아 오게 한다는 '전어' 맛보러 다시 함 와야 겠습니다.


  ['춘장대' 가는 길]                    1:53

  이정표를 따라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갑니다.
  15분 정도 진행하면...



  ['춘장대해수욕장' 조망]                  2:08

  "춘장대해수욕장"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춘장대해수욕장' 솔밭]

  해수욕장 중심부로 가면 솔밭과 여러 유락시설들이 있고


  ['춘장대해수욕장']                    2:15

  "춘장대해수욕장 春長臺海水浴場"
  [춘장대 해수욕장]은 1980년대 초 [동백정해수욕장]에 [서천화력발전소]가 설립되자 
  그 대안으로 새롭게 부각된 곳이라고 합니다. [동백정해수욕장]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만한 해수욕장을 다시 발견하여 개발하게 된 것은 서천군민에게 퍽 다행스런일이었다군요.
  그러나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피서인파는 춘장대해수욕장에 대한 개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지만
  [춘장대]는 한 개인의 사유지가 대부분이어서 개발에 어려움이 뒤따랐다고 합니다.
  [춘장대 해수욕장]에 대한 명칭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좀 황당했습니다.
  이 해변은 거의 대부분 "민완기씨"라는 개인 소유의 토지였답니다.
  이 땅 소유자 "민완기씨"가 이곳에 서너개의 방갈로를 만들고 자신의 호(號)인 춘장(春長)을 따서
  "춘장대"라고 명명한 것이 유래되어 [춘장대 해수욕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대토지를 개인이 소유 할수 있었다면 [명성황후]시절의 "민씨 일가"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 해수욕장의 가장 큰 특징은 "아카시아 숲"이 우거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카시아가 우거진 해수욕장은 저는 처음입니다.


  ['춘장대해수욕장 주차장']                 2:20

  기차표를 4시차로 끊어 놔서 여기서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로 급히 나갑니다.


  ['요치마을']                     2:27

  [요치마을] 안내석이 있는 곳을 지나 [서도초등학교]를 찾아 가는데


  ['서도초등학교' 앞]                   2:32

  [춘장대해수욕장]에서 약12분이 걸려 "서도초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서도초' 앞 버스시간표]                   2:33

  이곳 버스정류장에 부착되 있는 버스시간표를 보니 [서천시내]로 가는 "2시35분" 도착 버스가 있군요.
  이 버스는 2시40분경에 도착했는데 서천시내에서 [서천역]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여 역으로 갔습니다.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1.6km"였으며  3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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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의 역사』  
   『금성대군신단』『소수서원』  

                             


  ['금성대군신단' 입구]              1:14

  2020년 6월 24일 (수) 흐림 
  [부석사] 답사를 마치고 [27번시내버스]를 타고 약25분 정도 걸려 [소수서원] 앞에 내렸습니다.
  [소수서원] 앞에 있는 "금성대군신단 錦城大君神壇"부터 먼저 찾아 보고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입구에는 "단종복위운동 聖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금성대군신단' 정문]

  神壇 정문으로 들어 가면...


   ['주사 廚舍']                                                 ['제청 祭廳']

  좌우에 '주사 廚舍'와 "'제청 祭廳'"이라는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데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齊室'이랍니다.
  이 건물들은 1980년에 건립되었다는군요.


  ['금성단' 정문]

  이어서 "錦城壇"이라는 현판이 달린 神壇 정문인 "일각문一角門" 으로 들어 갑니다.
  조선시대 현판글은 모두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도록 되 있는데 반대여서 특이하군요.


  ['錦城壇']

  "금성단 錦城壇"
  이곳에 대한 내용은 [영주시 홈페이지]에서 인용합니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비롯한 순절의사들을 제사드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평소 '수양대군'을 경계하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謀叛)의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관노의 밀고에 의해 관군의 습격을 받게되고,
  순흥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순흥부는 폐부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19년(숙종 45)에 순흥인 이기륭이 단소를 설치했으며,
  1742년 (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고,
  높이 140㎝, 폭 55㎝, 두께 24㎝의 크기로 순의비를 세웠답니다
  제가 느끼기엔 둘째 형으로부터 살해 당한 "금성대군"보다 그들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더 비극적 삶을 산
  최악의 불행한 아버지라고 늘 느낌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지만 "修身齊家"는 빵점 아닌가요?


  ['금성단' 앞]

  제단을 둘러보고 나가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압각수']

  [안내문]

  "압각수 鴨脚樹"라는 보호수가 있더군요.
  1,200년이 넘는 엄청 오래된 은행나무라는데 그 잎의 모양이 "오리발" 같다고 "압각수 鴨脚樹"라 부른 답니다.
  忠臣나무라고도 불린다는 이 은행나무의 내력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
  건너편에 있는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소수서원' 입구 주차장]                     1:36

  ['소수서원' 정문 앞 광장]

  ['소수서원' 정문]

  [소수서원] 정문 앞에는 주차장과 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엔 모든 관람객에게 입장료가 무료랍니다.
  우린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ㅎ


  ['학자수 學者樹']

  정문으로 들어 가면 무척 오래된 금강송 소나무들이 우거진 "학자수림 學者樹林"이 반겨 줍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 學者樹"라고 부른답니다.
  우측엔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숙수사 당간지주']

  [안내문]

  "숙수사 당간지주 宿水寺 幢竿支柱"
  [소수서원]은 서원이 되기 전엔 이 자리가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었답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은 폐사되고 그 자리에 서원이 들어 섯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불교시대에서 유교시대로 넘어 갔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소수서원' 정문 앞]          

  [당간지주]를 지나면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좌측을 보면


  ['영귀봉']

  "영귀봉 靈龜峰"이 보이는데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영귀봉]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는 "소혼대 消魂臺"가 있군요.
  이 주변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다음 안내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안내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우리나라 서원 9개소 중에 하나입니다.


  ['지도문'과 '경렴정']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과
  정문 앞엔 "경렴정 景濂亭"이 있는데 "신제 주세붕 선생"이 창건한 정자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랍니다.


  ['취한대']

  ['경자바위']

  [줌인한 '경자바위']

  [경렴정] 뒤에는 "죽계구곡 竹溪九谷"으로 유명한 "죽계천 竹溪川"이 흐르고 있는데
  "취한대 翠寒臺""敬字바위"가 보입니다.
  "취한대"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이는데,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라고
  "敬字바위"라고 한답니다.
  이 글자도 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이 새긴 글자랍니다.


  [안내문]

  이곳이 원래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 있었던 곳이란건 조금 전 당간지주에서도 확인했습니다만
  "宿水"라는 말이 '물도 자고 간다'라는 뜻일테니 흐르는 "죽계천"도 이곳에 머물며 하룻밤 자고 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걸 직간접적으로 알려 주는듯 합니다.


  ['죽계천']

  "죽계천 竹溪川"이 [소수서원]을 휘감고 흘러 갑니다.
  조금 전에 들렸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으로 친형인 [수양대군]으로부터 처참한 보복을 당해
  죽을 때에 이곳 관리들은 물론 일반 양민들까지 거의 몰살 당했답니다.
  그래서 이 [죽계천]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변했었다죠.
  이렇게 아름다운 "죽계천"과 "순흥"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피로 물들인 그런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강학당'] 보물 제1403호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을 통과하면 강의를 하던 교실인 "강학당"이 바로 나타납니다.
  강학당에는 "백운동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주세붕 선생"이 창건시에 "주자"의' 여산 백운동서원'을 본따 "백운동서원"이라고 불렀답니다.
                      


  ['강학당' 내부]

  강학당 내부로 들어 가면 제법 너른 강의실이 펼쳐집니다.
  "소수서원 紹修書院" 사액현판이 엄청난 의미로 다가 옵니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효시가 되었는데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답니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당시 [명종] 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교육기관-학교"가 탄생된 것이지요.


  ['강학당' 우측]

  ['강학당' 좌측]

  "소수서원"이 공립교육기관으로 탄생되는 배경을 알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아야하겠죠.
  그래서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정치 상황을 요약해 보겠으나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나라의 정치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꾼 '조선왕조'...
  "공자 孔子"가 세운 "유학"을 "주자 朱子"가 새로이 정립한 "성리학"으로 정치이념체계를 바꾸어 나갔죠.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까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리고 여러차례의 정변으로 인해 나라에는 공신들이 넘쳐났습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따른 공신, [중종]의 반정을 이끈 공신들이 넘쳐났는데
  왕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들이 득세했는데 이름하여 "훈구"라 하죠.
  개혁을 외치는 신진 사림세력들을 수구세력인 훈구파들이 무오, 갑자, 기묘, 을사의 네차례 사화로
  신진 사림들은 처참하게 일망타진되고 말았지요.
  이때 "퇴계 이황", "서경덕", "조식"등의 성리학자들은 왜 우리가 이렇게 참화를 당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각자 자신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 덕분에 아직까지도 완벽한 이해를
  보지 못했던 "성리학"은 이때 학문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훈구파'의 전횡에 휘둘리던 [중중]이 그들에게서 벗어 나기 위해 "신진 사림들"을 중용하게 되었지요.
  "정암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되고, "훈구파"를 몰아내고 개혁은
  시작되었지만, 또다시 막강한 수구세력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신진 사림'들은 다시 몰락하게 되었죠.
  수구세력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쥔 부와 권력을 절대 놓지 않으려교 하죠.
  그러나 [명종]대에 와선 다시 '훈구파'들의 권력독점에 제동을 걸지 않을수 없었던 상황이 다시 돌아 왔는데
  훈구파들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 왕은 견제세력으로 다시 '신진 사림'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을 수 없었죠.
  이때에 등장하는 '신진 사림'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 "성리학"을 설파한 "퇴계 이황"등 신진 사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서원"을 세워 새로운 인재 양성을 하게 해 주는 것이었죠.
  그 첫번째가 바로 "소수서원"이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서원 이름도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라는 "紹修書院"...
  "이미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인재 양성을 한다"라고 유추해석해도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 서원이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사림'들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탄압받던 사림들과 이런 사림들의 국가 질서 운영방식이
  국가로 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선배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고 학문을 교육하는 기관이 되었고
  곧 그들의 근거지가 된 것이죠. [명종]이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겠나요.
  제가 서두에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상황을 요약한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라고 언급했습니다만
  그냥 관광으로만 다녀가지 말고 그 의미도 나름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미래지향적일 것입니다.


  ['정료대'와 '관세대']

  [안내문]

  "장서각"앞에는 "정료대"와 "관세대"가 있고


  ['문성공묘']

  "문성공묘 文成公廟"는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랍니다.
  불교를 국가 이념체계로 삼은 고려시대에 이미 "성리학"은 고려에 전래되고 있었습니다.
  최초가 "회헌 안향 선생"이고 뒤이어 모두 잘 아시는 "포은 정몽주선생", "삼봉 정도전선생"등이 있었습니다.


  ['직방재']

  ['학구재'와 '지락재']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는 
  요즘 말로 쉽게 말하자면 학생들의 기숙사


  ['영정각']

  선배 '유학자'들의 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이 있는데
  "영정각" 앞에 있는 "일영대"가 눈길을 더 끄는데...


  ['일영대']

  [안내문]

  해시계이군요...ㅎ


  ['주자 선생'과 '안향 선생' 영정]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의 영정과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의 영정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안향 선생의 영정""國寶 第111號"로 지정되 있답니다.


  ['허목 선생'과 '이원익 선생'영정]

  ['주세붕 선생'과 '이덕형 선생' 영정]

  "주세붕 선생의 영정""寶物 第717號"로 지정되 있다는군요.


  ['소수서원' 후문]

  [소수서원]을 둘러 보고 [소수서원] 뒷문으로 나가면....


  ['사료관']

  "사료관"이 있고 뒤에는 "충효교육관"과 "관리사무실"이 있더군요.


  ['소수서원'에서 '선비촌' 통로문]                 2:02

  [공원]

  [소수서원]에서 [선비촌]으로 가는 통문을 통과하면 공원이 이어지고


  ['죽계교']

  ['선비촌' 연결 통로]                    2:07

  [죽계천]을 건너 [선비촌]으로 가는 [죽계교]를 건너 갑니다.







  ['선비촌' 이곳저곳]

  "선비촌"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과 비슷하여 휭하니 둘러 보고


  ['죽계루']                   2:13

  ['선비촌' 정문 광장]                         3:08

  [죽계루]로 나가면 [선비촌 광장]이 펼쳐 집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속 음식점들이 있는데, '종가집'이라는 음식점에서 식사와 안주로 한잔 걸치고...ㅎ
  경상도 음식문화를 낮게 보던 시대는 지나 갔습니다. 
  경상도 음식들도 새롭게 혁신하여 무지 좋아 졌습니다.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



  ['영주 선비상']                      3:20

  '영주시'가 자랑하고 있는 "선비"
  그리고 조선시대를 휩쓴 "유교문화-성리학"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상명대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시 저자 "김경일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로 정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 따라 지금의 제목으로 바꾸었고,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풍기역']                        3:36

  [플랫홈]                         3:55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사랑이야기』『유교문화의 得과 害』를 보고 느끼며 보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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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삶, 끝 없는 그리움』 [서울 종로]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유적 답사기 낙산공원입구-비우당-청룡사 정업원-동망봉-동망정-여인시장-영도교 [구글맵] [구글어스] ['숭인동' 안내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낙산공원입구"에서 출발하여 "단종비 정순왕후 유적"을 따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을 둘러보고, "청계천 영도교"까지 약3.3km를 갑니다. ['낙산공원' 입구] 3:05~3:09 2020년 5월 19일 (화) 맑음 구름 조금 [6호선 창신역 4번출구]에 내려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번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좁은 마을길을 잠시 올라 [한양성곽]에 있는 "낙산공원 입구"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3번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신쌍용아파츠2단지' 조망] [낙산공원]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낙산길]을 따라 먼저 "비우당"을 찾아 갑니다. [비우당]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옆에 있으니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됩니다. 150m정도 직진하면... ['낙산삼거리 버스정류장'] 3:11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담에 붙어 있는 [낙산삼거리버스정류장] 옆에 [비우당]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길안내를 합니다. 200m 정도 아파트 담을 따라 가면...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앞]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3:15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을 만나는데 [비우당]은 아파트 정문 옆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비우당'] 3:17~3:22 3~40m 정도 내려 가면 초가집을 하나 만나는데, 이 초가집이 "비우당 庇雨堂"이더군요. 건너편에 보이는 절간은 [원각사]라는 절인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최근에 지은 절이었습니다. ['비우당' 안내문] "비우당 庇雨堂"에 대해선 위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파란문'은 "지봉 이수광선생 芝峯 李睟光"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선진외국문물을 깊이 있게 습득했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켜서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게 되었답니다.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글] "지봉유설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죠. 우리나라 문화 문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망라하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지봉유설]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듯 하죠? ㅎ 또한 청백리로 유명하다는건 이 집 만 봐도 알수 있죠? "비우당 庇雨堂"이라는 말의 뜻이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 초가집은 원래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선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이 새서 우산을 받히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살까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는데 [지봉 이수광선생]에게 상속되어 개보수해서 "비우당 庇雨堂"이라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지동천'] "자지동천 紫芝洞泉" ^.^ 발음에 유의해야 하는데, 현재의 '창신동' 주변을 옛날엔 "자지동 紫芝洞"이라 했답니다. [자지 紫芝]는 '영지버섯'과 비슷한 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이랍니다. 자주색 물이 나온다고... 이 주변에 그런 버섯이 많이 자생했나본데,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로 빨래를 하니 빨래에 자주색 물이 들었답니다. 폐비가 되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비단 등 천에 자주색 염색을 해주면 주변 여인들이 염색한 천을 내다 팔아 주고 채소 등 먹을거리를 담 너머로 던져 주곤하며 식생활을 이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그런 우물터라 유명해졌답니다. ['낙산길'] 3:24 ['명신초' 앞] 3:27 [비우당]과 [자지동천]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명신초등학교]와 [숭인교회]를 지나 우회전하여 잠시 더 내려 가면... ['청룡마트' 앞 사거리] 3:30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 [청룡사]와 [정업원터]를 보고 다시 이 사거리로 나와 앞에 보이는 [동망봉]으로 가야 합니다. ['청룡마트'에서 '청룡사' 조망] 3:31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고 앞에 [청룡사]가 보입니다. ['청룡사'] 3:32~3:39 [대웅전] "삼각산 청룡사 三角山 靑龍寺"는 비구니 요람이라는데... 고려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낳은 [경순(慶順)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였으며, "세조 3년(1457)"에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출가하여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보낸 곳이어서 우리에겐 "한 많은 장소"로 알려져 있지요. ['우화루'] "우화루 雨花樓" 1457년 6월 22일 (세조3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헸던 곳이라 하니 "雨花"라는 말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꽃비가 내리다..." ['단종실록' 1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단종실록]도 아니고 [노산군일기]라고 나옵니다. 비극의 시작인 그 첫장을 한번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정통(正統) 6년 신유년001) 7월 23일 정사(丁巳)에 나서 무진년002) 4월 초3일 무오(戊午)에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년003) 8월에 문종(文宗)이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신미년004)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勅]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3년 임신년005) 5월 14일 병오(丙午)에 문종(文宗)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정업원'] "정업원 淨業院"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청룡사" 좌측 끝에 있습니다. "정업원 淨業院"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던 곳을 의미 한답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고려 공민왕]의 "惠妃"가 폐위되어 머리 빡빡 깍고 중이 되어 산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낳은 2남1녀 중에 아들 [방번]과 [방석]이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기와 비구니로 살았고 아시다시피 [단종]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어 외롭게 한많은 삶을 산 곳이기도 하죠. ['정업원'] "前峯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 어천만년"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 - 조선 21대왕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친필 - ['정업원구기']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정업원 옛터' 신묘년(1771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떠나간지 170여년이 흐른후 [영조]가 찾아와 이곳이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친필로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13살 때에 14살의 [정순왕후]가 간택되어 부부가 되었지요. [정순왕후]를 [단종]의 王妃로 간택되도록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수양대군-세조]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단종]을 왕위에 앉힌지 1년만에 상왕으로 내밀고, 그후 2년만에 '영월'로 귀양 보내 죽여버렸죠. 졸지에 왕비에서 노비가 되어 궁궐에서 쫒겨난 [정순왕후]는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이곳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요즘 같으면 '오거돈' 같은 놈 ~ ㅎ '코로나바이러스균'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숙주 宿住"라고하죠? ㅎ 한자야 틀리지만 '신숙주'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같은 놈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ㅎ ['청룡마트' 앞 사거리] 3:40 [청룡사]와 [정업사터]를 돌아 보고 다시 [청룡마트] 앞 사거리로 돌아와 우회전 하면... ['동망봉' 조망] 3:41 [숭인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동망봉]이 조망됩니다. 좌측 너른 길로 올라 가면... ['숭인근린공원' 입구] 3:43 ['동망봉' 정상 입구] 3:45~3:51 "동망봉 정상 입구"에 도착합니다. ['숭인근린공원 안내도'] [숭인근린공원 안내도]를 숙지하고 [동망봉 정상석]을 찾아 올라 갑니다. ['동망봉' 정상 배드민튼장] [동망봉 정상]은 배드민튼장과 어린이 놀이 시설, 그리고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주민들의 건강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동망봉 표지석' 위치] ['동망봉 표지석'] [동망봉 정상석]은 배드민튼장 우측 공원 둘레길에 있었습니다. "동망봉 東望峰 93.2m" [정순왕후]가 동쪽 '영월'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랍니다. 1771년 [영조]가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정순왕후]와 [단종]의 넋을 기리며 이 근처 바위에 "東望峰"이라는 친필을 새겼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낙산'과 이곳 "동망봉' 주변을 채석장으로 만들어 그 글씨는 없어졌다고... 제가 알기로는 쪽바리들이 여기서 채석한 돌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등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안내판] ['정순왕후'의 일대기]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만화로 만들어 놧습니다. 제가 읽기 쉽게 하나 하나 확대 편집해서 올렸으니 한번 읽어 보고 가세요~~ ㅎ ['아차산' 조망] 3:52 [동망봉] 정상에서 내려 가면 [아차산] [용마산]이 조망되는데...'영월'은 어디매뇨~ ['동망각']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동망각]과 쉼터 정자가 있는데 [영조]의 친필을 각인한 "東望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군요. [공원길] ['숭인제'] ['유아숲 체험장'] "숭인근린공원"은 주민들을 위해 예상보다 잘 조성된 근린공원이었습니다. '달동네'라고만 알고 있었던 '창신동'과 '숭인동'이었는데 그런 관념을 깨주는 공원이엇습니다. ['동망봉 북카페'] 3:57 [동망봉]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이어서 내려가면 다시 배드민튼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있고 특히 [동망봉 북카페]가 눈길을 끕니다. 들어 가 봤더니 비치된 책도 많고 몇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동망정'] 4:00 [안내문] "동망정 東望亭"은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정자라고 합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진정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그녀는 1440년에 태어나서 15살이 되던 해인 1454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定順王后"가 된거죠. 1년 정도 왕비로 살다가 [단종]이 上王으로 밀려나니 그녀는 "의덕왕대비 懿德王大妃"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에 '왕비' '대비'까지 역임했으며, 그리곤 폐서인이 되어 '노비'로 떨어졌지요. 최단 초고속 변화였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그녀는 무지무지 오래 장수했습니다. '1521년 7월 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나이가 82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엄청 장수 한거죠. 더 실감나게 풀어 드릴까요? ㅎ 그녀는 '1440년'에 탄생했으니 그때가 [세종대왕]이 즉위 22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장남이며 자신의 시아버지인 [문종]이 1450년에 즉위하였으나 일찍 죽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지배하다가, 1468년에 [예종]이 왕이 되고, 또다시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94년엔 [연산군]이...그리고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즉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인 "1521년 7월7일"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권력찬탈과 쿠데타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산것입니까?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세종대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시대까지 여덟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렁다면 그녀는 과연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구중궁궐 권력암투 속에서 골치 아프게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오래 살수 있었을까.... '파란문'은 [정순왕후]의 인생을 비록 과부로 살았지만 장수했으니 그렇게 슬프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수 있다면 그까짓 '왕비'에서 과부가 되더라도 뭔일 있겠습니까? ㅎ 권력을 쥐려고 피비린내 나게 형제 자매 죽이며 살면 뭐합니까. 허무하게 일찍 죽는걸.... ['영월 방향' 조망] [정순왕후]가 첫사랑 [단종]을 애타게 기다리며 돌아 오길 기원하던 동쪽 '영월' 방향엔 마천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애절함은 느낄수 없고... ['한양성' 조망] 서쪽으로는 [한양성곽]이 "낙산"을 자나가고 있는데 [한양성곽]을 이루는 [인왕산]이 조망되며 그 뒤로 [안산]도 보이는군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은 바로 [한양성곽]과 거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살던 [경복궁][창경궁]이 몇km도 않되는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았으니 그녀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비극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찾아 보기 위해서 여기서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좀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을 꼽으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종대왕]을 꼽지요? 하지만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입니다. 왜냐구요? 지금부터 '세종대왕'의 어두운 사생활 부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식 福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자식을 자식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또한 '소헌왕후'의 친아버지, 즉 '세종대왕'의 장인까지 없는 죄를 뒤집어 쒸어 죽여버렸죠. 그가 '심온선생'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둘째, 며느리 福도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식 福'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福'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압승술'은 남편의 성적욕구를 높이기 위한 미신행위였습니다.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밤에 독수공방 시켰기에 성욕을 해결 못해 궁녀들과 레스비안을 즐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요즘같으면 남편 구실 못하는 [문종]이 위자료 주고 이혼 해 줘야 하는데...ㅎ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셋째, 사위 福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놈은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사위인 "안맹담"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자식들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넷째, 세종대왕 본인은 살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으니 그 아이로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망정'에서 출구 방향] 4:03 [동망정]에서 [묘각사]로 내려 가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야만 합니다. [문종]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계유정란"을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중에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세자빈', 즉 장차 王妃가 될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은 인간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수양대군'은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며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계단 내림길] [골목 내림길] 제법 가파른 계단과 비탈진 달동네 골목을 7분 정도 내려 가면...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4:10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안심건강길]이라고 안내하는 [숭인근린공원] 출입구를 만나 우회전하고 ['묘각사'] 4:11 [뒤돌아 본 '묘각사'] 이어서 "낙산 묘각사 駱山 妙角寺"를 만납니다. 전통사찰은 아니고 1930년에 개산한 "대한불교 관음종 총본산"이라고 하며 템플스테이가 좀 알려져 있는듯... [골목길] 골목길을 4분 정도 진행하는데 新舊가 비교되는군요. ['묘각사' 입구] 4:15 [뒤돌아 본 '묘각사' 입구] [1호선지하철]이 다니는 [종로]를 만납니다. [묘각사]와 [동망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동묘' 조망] 길을 건너 건너편에 보이는 [동묘]로 갑니다. ['벼룩시장'] 4:19 [동묘] 우측길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죠. ['동묘' 정문] 4:21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후에 神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관우 關羽"만이 중국에서 神格化되어 지금도 중국사람들 상당수가 神으로 모시고있죠. 이곳의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로서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나라]가 [선조]에게 요구해 "관우 關羽"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했답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보수공사 중에 있습니다. ['옛 여인시장'] "옛 여인시장" [정순왕후]를 위해 주변 여인들이 [정순왕후]가 염색한 옷감 등을 내다 팔고 채소시장들을 열어 식재료를 공급하곤 했다는 남자는 출입을 금하는 禁男市場이었답니다. ['영도교'] 4:24 [안내문]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 가는 영원한 이별...永渡僑" 우리들에겐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여러편의 영화로도 알려진 "端宗哀事"입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화양정"은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화양동'에 그 터가 현재도 남아 있지요.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보내고, 잠시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살곶이교"를 건너 '화양동'의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까지 이동하여, '원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4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청계천'] 4:25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며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며 '한양성' 안에 있는 유일한 개천이기도 하죠. 조선왕조 500년...27명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 중에 유일하게 힘 한번 못쓰고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라진 비운의 [단종 端宗]과 그의 비 [정순왕후]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새살림을 차리고 있으리라....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3.3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 짧은 코스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수백년을 걸은 느낌이 드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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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공룡알화석산지 2019년 5월 5일 (일) 1억년 전 공룡들이 종족보전을 하며 살아 가던 서식지. [천연기념물 제414호]라는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를 찾아 갑니다 [방문자센타] 오래전부터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와이프와 함께 나드리 겸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에 있는 "화성 공룡알화석산지"의 [방문자센타]로 갔습니다. '어린이날'이어서인지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방문자센타]에는 공룡화석과 관련된 화석등을 전시하고 있었고 2층 영상관에선 관련 영상물도 보여주고 [방문자센타 전망대에서 남쪽 조망] [방문자센타] 전망대에 올라가 주변을 조망합니다. 먼저 남쪽을 보면 우측에 [시흥-평택간 서해안고속도로]가 "시화호"를 관통하고 있고 [북쪽 조망] 북쪽으로는 "안산시"와 "시흥시"가 조망되며 공룡알 화석을 찾아 본 후 들릴 예정인 [우음도]의 "송산그린시티전망대"도 보이는군요. [동쪽 조망] 동쪽에 오늘 찾아 보려고 하는 "공룡알화석산지"가 있습니다. 드넓은 '시화호'에서 모르고 가면 도저히 찾을수 없는 '공룡알'인데 [누드바위]라고 표기한 곳에서만 '공룡알'을 직접 볼수 있었으니 알고 가면 간단합니다. ㅎ 그러니까 [누드바위]까지 왕복하는게 오늘 탐방의 전부라고도 할수 있겠습니다. [화석산지 입구] 입구를 통과하면 [공룡 모형] 공룡 모형이 하나 딸랑 있고... [데크] 이어서 [누드바위]와 [무명섬]까지 데크로 연결되 있었습니다. 시화호 바닥 위를 걸을수도 있습니다. 소금이 표면에 아직도 남아있어 흰색을 띄고 있으며 갯벌이 굳어서 매우 딱딱했습니다. [뒤돌아 본 '방문자센타'] [방문자센타]를 뒤돌아 보고 [전망데크] 중간에 있는 전망대를 지나 가면 [학습관] [학습관]이라고 하는데 천막만 하나 덩그러이 있고 [화석이 있는 위치] [학습관]에는 안내판만 하나 있는데 ... 이 안내판 만으로는 공룡알이 어디에 있는지...감을 잡을수가 없었습니다. ['누드바위']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의 핵심인 "누드바위"입니다. 왜? '누드바위'인지에 대해선 안내가 없어서 모르겠는데...아마도 나무가 자라지 않는 바위여서? ㅎ 제 눈에는... 공룡알은 이곳 [누드바위]에서만 몇개 볼수 있었습니다. ['누드바위'] 공룡알 화석이 있다는 안내문이 있지만 찾을수가 없었는데... [공룡알 위치] 다행이 옆에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어 간신히 볼수 있었습니다. [공룡알] 공룡알이라고해서 엄청 클줄 알았는데 그렇게 크지는 않군요. 흐르는 시간을 뭘로 설명할수 있을까 보이는 이 공룡알은 약1억년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공룡들이 낳았다고하니... 고작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의 시간으로는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공룡알의 표면에는 다른 알들에 비해 숨구멍이 많이 있다는데 당시의 지구 기후는 무지 덥고 습해서 원활한 산소호흡을 위해서 숨구멍이 발달했다네요 이곳의 공룡알 화석은 지금까지 9개 지점에서 30여개의 알둥지와 200여개의 공룡알이 발견되었는데 갯벌 속에 뭍혀있을 공룡알까지 확인된다면 세계 최대 규모의 공룡알 화석산지가 될거라고... [누드바위 '노두'] 갯벌이 퇴적되어 바위가 되고... 그 갯벌에 뭍혀 있던 공룡알들이 화석이 되고... 또 다시 그 위에 갯벌과 모래 자갈등이 쌓이고... 그것들이 다시 굳어 바위가 되고... ['해식동굴'] [해식동굴]이라는 바위섬에도 공룡알이 있다고 안내하지만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명섬'] [무명섬]이라는 퇴적 바위에도 공룡알이 있다는데 찾을수 없었습니다만 수억년을 살아온 바위들을 보며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나가는 길] "화성 공룡알화석산지"는 좀 단순하여 볼거리는 별루여서 좀 허무하지만 어디서부터인지...어디까지인지...모르는 時間을 생각해 보는 時間이었습니다. "시간 時間"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무한히 연속되는 흐름"이라고 [전망데크] ['어린이날'] 1억년전 공룡보다는 장난감 자동차가 더 좋은 어린이들... [나가는 길] [방문자센타]로 돌아 갈때엔 時間의 흐름이 더욱 야속해 졌습니다. 이 "시화호"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였는데... [공룡 모형] 그들도 時間을 벗어나 다시 자유로운 삶을 달라고 부르짖는듯...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홍어와 무인도☆
Eleni Karaindrou - 안개 속의 풍경 주제가 -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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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회룡사-석굴암" 답사기 회룡역-태조 태종 상봉지-회룡탐방센타-회룡사-석굴암-회룡역 '왕의 귀환'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집념의 기도 '함흥차사'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과의 재상봉 - "龍의 回歸"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선생"의 흔적을 찾아 ['지형도'] [구글어스]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에 있는 "회룡역"에서 "회룡사-석굴암"을 다녀 오는 "6.7km" 코스입니다. ['회룡역'] 11:15 2018년 6월 9일 (토) 맑음 '의정부시'에 있는 "회룡역 回龍驛"에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이 역은 [의정부경전철]과 환승할수 있는 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의정부경전철]은 적자 누적으로 사업자가 부도를 내고 파산한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잘 운행된다네요. 뉴스를 검색해 보니 요즘 [의정부경전철]은 하루 5만명 이상이 이용하며 지난해와 비교해 엄청 활성화 되어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으로 제몫을 하고 있어 새로운 사업자를 물색하고 있다네요. 5만명이 경전철을 이용하면 3만4000㎏의 CO₂와 1600㎏의 CO₂의 탄소배출 저감 효과가 있다는군요. ['회룡역' 앞] [회룡역3번출입구] 앞으로는 "의정부시 호원동"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잠시후 다시 언급하겠지만,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와 아들 "태종 이방원"이와 재상봉하고 이곳에서 '의정부' 3정승들과 정사를 논했다고 하여 『전좌 展座』마을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의정부시」라는 지명이 실제로 탄생된 진원지라고 합니다. ['호원동 사거리'] 11:19 [회룡역 3번출입구]에서 200m쯤 직진하면 첫번째 사거리를 만나는데 정면에는 "회룡사"의 뒷산인 "범골능선의 392m봉"이 조망됩니다. [회룡사]로 가는 길은 여기서 길을 건너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한블록을 진행합니다. ['회룡사입구 사거리'] 11:22 이어서 [회룡사입구사거리]를 만나는데, 꼭~ 보고 가야하는 안내석이 우측 길가에 있는데 바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의 상봉지" 안내석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현재의 "의정부시"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하니 매우 의미있는 곳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태조-태종 상봉지' 안내문] 윗 사진의 안내석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가 목숨걸고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의 권력을 쥐기 위해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극악무도한 인간 '이방원'... 그런 배은망덕한 불효자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죽여버리려한 아버지 '이성계'의 분노... 이미 실권을 장악한 아들 '이방원'이가 하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수 없어 고향인 '함흥'으로의 귀향. 그리고 '함흥차사'... 마지막 '함흥차사'였던 "무학대사"의 설득이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방원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사랑하는 아들들은 모두 죽고 오로지 방원만이 남았습니다. 만약 이마저 끊어버리면 평생 애써 이룬 왕업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혈족에게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무학 無學"의 설득에 넘어 가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 그리하여 '한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선 아버지 '이성계'. 극악무도한 불효를 저지른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를 환영하며 마중 나온곳이 바로 이곳이었답니다. 아무리 그렇다쳐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치까 떨려 아들 '이방원'이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아버지 '이성계'.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로 '神弓'이라는 칭호를 가진 아버지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이를 만나자마자 그를 향해 "분노의 화살"을 날린곳도 이곳.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은 이렇게 "분노의 화살"로 시작되었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은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버지는 이 근처에 머무르며 '의정부 3정승'들의 政事에 대한 결재를 하며 태상왕권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議政府"가 되었다고 현재의 "議政府市"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는 유래가 되었다는 곳도 이곳. ['회룡탐방센타' 가는 길] "태조 이성계"가 머무르며 정사를 보았다고 이 지역을 "전좌마을 展座마을"이라고 했답니다. 실질적인 궁전이 자리한 마을이라는 의미이죠. "龍의 回歸"를 의미하는 "回龍寺"로 가는 길입니다. '호원동' 마을을 7분여 통과하면... ['회화나무'] 11:30 보호수로 지정되 관리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를 만나며 [북한산둘레길]로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을 만납니다. "회화나무"는 한자로 "槐木"이라고 쓰죠. 느티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충북 괴산군'에는 산에 '회화나무'가 많다고 "槐山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槐"를 파자해 보면 "나무 木"에 "귀신 鬼"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귀신이 붙어있는 나무여서 마을의 안녕을 지켜 준다고 마을 어귀에는 "회화나무 槐木"이 주로 서 있지요. "回龍寺"로 올라가는 어귀에 서있는 "회화나무"가 새롭습니다. ['회룡탐방지원센타'] 11:33 '호원동' 마을을 벗어 나면 "북한산국립공원 회룡탐방지원센타"가 산객들을 맞아 줍니다. [북한산국립공원]에는 山이라는 칭호가 붙은 산이 셋 있는데, [북한산-도봉산-사패산]입니다. 그러니끼 [북한산국립공원]은 [북한산-도봉산-사패산]으로 이루어진 국립공원이지요. 위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그리고 [북한산둘레길]의 한 구간인 [안골길]과 [보루길]의 시종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회룡계곡길'] 탐방지원센타를 지나면 "회룡계곡"이 이어지며 ['북한산둘레길 보루길' 입구] 11:37 이어서 [북한산둘레길-보루길] 입구를 지나 갑니다. [북한산둘레길]을 다녀 간지가 벌써 8여년이나 되었군요. 세월 빠름니다. 조만간 한번 더 다녀 갈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 [삼거리] 11:41 [북한산둘레길-보루길] 입구에서 2~300m 진행하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우측으로 가면 "석굴암"으로 가고, 좌측길은 "사패능선-회룡사" 간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룡사]에 갔다가 [석굴암]으로 가려면 [회룡사]에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우측 [석굴암]으로 가야 한다고 선답자들의 답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제법 먼 거리를 왕복해야 하는데... 저는 먼저 좌측 [회룡사]로 올라 갑니다. ['회룡폭포'] 11:45 계곡 중간 중간엔 자그마한 폭포들이 몇개 있는데 어느 폭포가 "회룡폭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략 이 폭포가 지도에 나와 있는 "회룡폭포"가 아닐지 추정하며 조금 더 올라 가면... ['회룡사' 입구] 11:48~12:34 [사패산 계곡등산로]와 [회룡사]가 헤어지는 곳을 만나는데... [사패산 계곡등산로]는 직진하여 올라 가고 [회룡사] 정문은 우측 다리이더군요. ['회룡사' 정문] "대한불교 조계종 회룡사" 일주문이 없는 다리 정문으로 들어 가면... ['회룡사'] "회룡사 回龍寺"는 제법 규모가 있으면서도 아담하고 이쁘게 단장되 있었습니다. "龍의 回歸"라는 의미의 "回龍寺"여서 강건한 의미의 "비구" 절간인줄 알았더니 女僧들이 수도하며 살아가는 "비구니 절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단장되 있는듯... ['회룡사 연혁'] [회룡사 연혁]을 제가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회룡사]는 신라시대 "의상"이 개산한 절로 이름이 "법성사 法性寺"였는데... 고려 말에 "무학대사"가 중창을 하여 "이성계"와 함께 新王祖 창업을 위한 기도를 3년간 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回龍寺"라고 했다는 설과... '함흥'에 가 있던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 이방원'이의 간절한 歸京 요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와 "무학대사"를 찾은 곳이어서 "회란용가 回鸞龍駕"라고 "무학대사"가 기뻐하여 "回龍寺"라고 했다고... 연혁안내문의 내용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는 전후설정과 주체가 약간 다르군요. 제가 알기로는 "무학대사"가 "삼봉 정도전"과의 '유교-불교 싸움'에서 지고 '이성계' 마저 '함흥'으로 귀향하자,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수도하였다고 하는게 믿을만 하다고 생각되며... 또한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의 간청으로 '함흥'에서 돌아 올때 이곳 '의정부'에 오래 머문 이유는 '한양'으로 가기 싫어서기도 했지만 "무학대사"가 "회룡사"에 있어서라고 하는게 더 앞뒤가 맞을듯... 그리고 1630년 (인조때)에 "비구니 예순"이 중건한 이후 "비구니 절"로 이어져 온다고... ['범종각'] ['관세음보살'] ['대웅전' '삼성각' '극락보전'] 여느 절간과 별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절이었습니다.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절간이어서인지 깨끗하게 단장되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생각됩니다. "비구니"는 女僧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語'이죠. ['삼성각'에서 조망] '삼성각'에서 [회룡사] 내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시 정문으로 내려 갑니다. ['회룡사'에서 '석굴암' 가는 길] 12:34 다리 정문에는 [회룡사 연혁 안내판]이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앞 계단에 제 배낭이 보이죠? ㅎ [회룡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샛길이 분명 있을텐데 둘러 보아도 그런 길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 계단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빵을 먹고 있는데... 우측 "부도탑"이 있는 곳에서 여승 두분이 내려 오는게 아니겠습니까? 우측 "부도탑"으로 연결된 계단은 철문으로 잠겨 있고 사람들의 통행흔적이 거의 없었습니다만... "이제 알았다 ! ~" 집에서 모든 선답자들의 답사기를 웹써핑 해봤지만 [회룡사]에서 [석굴암]으로 바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 주는 답사기는 없었습니다. 모두 조금전 삼거리로 내려가 돌아 가는 길만 있다고 쓰여 있더군요. 스님들만 오르내리는 지름길이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에 아무도 모르게 우측 철문 옆으로 "부도탑"으로 올라 갔습니다. [부도] 12:35 "부도탑"으로 올라 가니 길은 없어 보였는데... 앞의 철조망 울타리로 가보니 [철조망 울타리] 쨘 ~~ 울타리를 따라 선명한 길이 열렸습니다. 조금전 여승들이 통과했을 그 길이 틀림없다고 느끼고 20m쯤 올라가보니... [개구멍] 12:36 철조망 울타리에 개구멍이 뚤려 있었습니다. 햐 ~ 기어서 철조망을 통과해 20m 쯤 나아가니... [등산로] 12:37 나무가지로 길을 막은 능선길을 만나는데 일반등산로를 만나는 것이였습니다.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철조망 울타리] [회룡사]가 보이며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잠시 50m 쯤 올라 갑니다. [포장도로 만남] 12:39 그러면 [석굴암]으로 올라 가는 포장도로를 만나며... 조금 올라 가면 ['석굴암' 입구] 12:42~12:57 "석굴암 石窟庵"을 [회룡사]에서 지름길을 이용하여 쉽게 찾아 왔습니다. 저의 이 글이 인터넷에 올려지면 이 길이 앞으로 온전 할지 모르겠습니다. ㅎ 그래서 이 길을 알릴지 말지를 두고 고민을 했습니다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회룡사]에서 이 길을 정상적 길로 개방하는게 [회룡사]에 큰 피해를 줄걸로 예상되지는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회룡사]와 [석굴암]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도움이 될거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알리기로 하였는데 오로지 제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것도 첨언합니다. 앞으로 [회룡사]가 철조망 울타리를 개방 할것인지, 오히려 철조망 울타리 개구멍을 철벽 봉쇄할지는 [회룡사]가 판단할 몫입니다. 스님들만 다니지 마시고 많은 후답자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개방해 주시길 바람니다. ㅎ ['불이문'] "석굴암의 정문 - 불이문 不二門"입니다. 암자의 정문으로는 독특한 정문이죠? ㅎ 정문 바위에는 요즘 사고로는 자연홰손인 글자를 새겨 놨는데... "서울 중구 예관동'에 산다는 "수암 김창진"이라는 사람이 [不二門 祝福記念]과 가족 이름을 새겨 놨는데...축복 받을 일인지 저주 받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석굴암' 앞마당] [不二門]을 통과하면 [석굴암] 앞마당이 아담하게 펼쳐지며 정면 큰 바위 아래엔 우물이 있더군요. 이런 山寺에 거주하기 위해선 우물이 필수이죠.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이더군요. 정면에 보이는 산은 [범골능선]에 있는 [392m봉] ['석굴암'과 '산신각' 조망] 쨔~ㄴ ~~ 오늘 답사의 하일라이트인 "석굴암"입니다. 뒤에는 "산신각"이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에만 "석굴암"이 있는게 아니죠. "석굴암"이라는 이름은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곳 [북한산국립공원]에만도 세군데나 있지요. 이곳 "석굴암"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하기전 고려 말에 "무학대사"와 함께 [회룡사]를 찾아와 "태조 이성계"는 이곳 "석굴암"에서 조선건국을 기원하며 3년 동안이나 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무학대사"는 근처 '무학굴'이라는 곳에서 기도를 했다네요.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이 근처 "도봉산 우이암" 아래에 있는 "원통사"에서도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마치던 어느날 "天上의 相公[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 후 그는 실제 조선왕조의 太祖가 되지요? 그래서 "원통사 藥師殿" 앞 바위에 "相公岩"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도 있습니다. 이렇듯 "이성계"는 기돗빨이 좋다는 전국의 절간을 찾아 왕국건설을 기원하는 기도를 많이 했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곳 중에 한곳인 "남해의 보리암"도 있지요. ['석굴암' 내부] "석굴암" 내부의 모습입니다. 세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굴이어서 우측엔 창문이 있어 햇빛이 들어 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군요. ['석굴암 암각문'] [암각문 안내문] 석굴암에서 나와 방향을 약간 바꿔 바라보니 세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고 "백범 김구선생 白凡 金九先生"의 필적암각문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김구선생"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라고만 알고 있지 않나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 중에 이곳과 관계있는 이야기 하나 알려 드리면... "백범 김구선생"은 일본놈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중에 탈옥을 하여 여러 山寺에 은신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주지스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곳도 선생이 도망다니던 곳 중에 한곳이었으며, 나중 해방되어 '상해'에서 돌아 왔을 때 산수 좋고 추억 어린 이곳을 자주 찾아 왔었는데, 1948년 가을에 찾아 왔을 때엔 이 지역 언론인들에게 바위에 새겨져 있는 "石窟庵, 佛, 戊子仲秋遊此 金九"라는 친필을 써 주었는데 이듬해인 1949년 봄에 '남상도씨'등이 3개월에 걸쳐 조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각을 완료하고 선생을 초대해 명문제막식을 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날-1949년 6월 26일 선생의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지요. 민족의 지도자 한분이 사라지고 조국을 위해 싸움 한번 한적없는 미군정의 앞잡이인 '이승만'에게 나라를 넘기며 기나긴 분단의 아픔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유당'의 시대로 이어져 갔습죠. 이때부터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갔죠. ['극락전'] 조금 더 전체적 구경을 위해 "극락전"으로 올라 가서 ['극락전'에서 '물이문' 조망] [不二門]과 앞마당을 조망하는데 기도하거나 은신하기에 좋은 장소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약간 돌리면... ['극락전'에서 '산신각' 조망] [산신각]이 보이고 [석굴암] 상단 바위가 보입니다. [산신각]으로 올라 가면... ['산신각'과 '석굴암' 바위] [석굴암] 상단 바위가 보여서 바위로 올라 가면... ['원도봉'과 '포대능선' 조망] 정면으로 "원도봉"과 "포대능선"이 조망되고... ['불이문' 조망] 아래엔 [不二門]이 새로운 각도로 보입니다. ['산신각'과 '극락전' 조망] 바위 위에서 [산신각]과 [극락전]을 조망하고 [산신각]으로 다시 내려 가면... ['범공능선 등산로'] [석굴암]에서 "범골능선"으로 가는 등산로를 찾을려고 집에서부터 조사를 했는데 알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굴암]에서도 여기저기 찾아 봤는데 이곳에서 찾았습니다. ㅎ 등산로는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산신각] 옆으로 희미하게 나 있었습니다. 이 등산로도 인터넷에 최초로 알려지는 것일 겁니다. 조만간 이 길로 [범골능선]으로 올라 [사패산]으로 갈 예정입니다. ['불이문' 통과] 12:57 [석굴암]을 둘러보고 [불이문]을 통과해 나가면 정면으로 "수락산"이 조망되고 ['회룡사' 가는 길] 1:00 잠시 내려 가면 조금전에 올라 왔던 [회룡사] 지름길을 다시 만납니다.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가도 되지만, 포장도로는 꼬불꼬불하고 경사도가 높을듯해서 등산로 능선을 이용하기로 하고 [회룡사] 지름길로 들어 갔습니다. ['회룡사' 뒷길] [회룡사] 철조망 울타리를 잠시 지나면... ['회룡사' 갈림길] 1:02 [회룡사]로 들어 가는 갈림길을 다시 만나는데 이번에는 직진합니다. [등산로] 능선 등산로를 조금 더 진행하면... [포장도로 만남] 1:08 [석굴암]으로 연결되는 포장도로를 다시 만나고 조금 더 내려 가면... [삼거리] 1:09 [회룡사]와 [석굴암]이 나뉘는 삼거리에 다시 왔습니다. [회룡사]와 [석굴암]을 한꺼번에 답사하려면, 앞에서 알려드린 지름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제법 먼길을 한번 더 돌아야 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북한산둘레길 보루길입구'] 1:13 [북한산둘레길-보루길] 입구를 다시 지나면... ['북한산둘레길 안골길입구'] 1:15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만나며 다리 좌측에 [북한산둘레길-안골길] 입구도 보입니다. ['회룡탐방지원센타'] 1:16 이어서 [북한산국립공원 회룡탐방지원센타]를 지나고 [회화나무] 1:18 귀신이 붙어 살아 외부의 적들을 물리친다는 "회화나무 槐木"을 지납니다. 계속해서 '호원동' 마을을 지나면... ['태조-태종 상붕지'] 1:26 앞에서도 언급랬던 "태조-태종 상봉지" 안내석을 다시 지나가며 그 옛날을 그려봅니다. 권력을 향한 집념 아버지를 배척하고 형제들과 친인척, 아들인 '세종대왕'의 장인어른까지 모조리 죽이며 잡은 권력. 배은망덕한 불효자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화살. 권력이 그렇게 좋은가!~ 그들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회룡역'] 1:31 [회룡역]에 돌아 와 [회룡사-석굴암] 답사를 마칩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6.7km"였으며, 2시간 1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다니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ㅎ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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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작은 소인은 숭재요, 큰 소인은 사홍이라.                                             小任崇載大任洪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千古姦兇是最雄
천도(天道)는 돌고 돌아 마땅히 보복이 있으리니,                                天道好還應有報
알겠느냐.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從知汝骨赤飄風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이 간흉(奸凶: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으로 지목되었음과 함께 간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준엄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흔히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모자로 알려진 임사홍은 두 아들과 함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처형을 당했고,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후에도 연산군의 악행과 패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간신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잠시간의 정치적 출세와 영원한 간신의 낙인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임사홍의 행적을 통해 찾아보기로 한다.

부마(駙馬) 집안의 빛과 그늘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이의(而毅)이다. 좌리공신(佐理功臣)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자,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였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여 풍성군(豊城君)에 올랐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가 되게 했다. 첫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왕)의 딸인 현숙공주(顯肅公主)에게 장가들어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셋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여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왕실과의 지나친 혼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임사홍의 셋째 아들인 임숭재가 휘숙옹주와 혼인한 것에 대해 사관(史官)이 부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 날 밤 임사홍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사관은 이것을 복이 지나쳐 재앙이 발생한 것으로 논평하였다.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다. 불의로써 부귀를 누렸는데, 그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가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여 불이 그 집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니, 천도(天道)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1)고 하여 임사홍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임사홍은 1465년(세조 11)에는 알성문과에, 1466년(세조 12)에는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ㆍ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총애 했던 성종은 임사홍이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문관으로 등용하여, 홍문관교리ㆍ승지ㆍ도승지ㆍ이조판서ㆍ대사간ㆍ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하게 했다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은 그러나 1478년(성종 9년) ‘흙비’로 빚어진 사건 때문에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흙비는 지금의 황사비를 말하는데, 1478년 4월 초하루에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하여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의 의견은 달랐다. 임사홍은 흙비를 재이(災異)로 여기지 않았으며,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2)

이에 삼사(三司) 등에서는 임사홍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그들은 임사홍을 소인(小人)으로 일컬으며, 그가 말한 바가 모두 아첨에서 나온 음험하고 간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인 임원준까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정의 교훈이 바르지 못했고 임사홍의 간사함은 내력이 있는 것이라고 몰아갔다. 이처럼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탄핵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대간들은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던 임사홍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왕실과 혼인을 맺은 연줄로 권력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성종은 처음에 대간들의 탄핵을 저지하며 임사홍에게 잘못이 없다고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간들의 탄핵이 격렬해지자, 성종은 대간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손녀인 임사홍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상소했다. 3) 그리고 첫째 며느리인 현숙공주(당시에는 정숙공주라 함)는 아버지 예종이 돌아가신 후로 임사홍을 친아버지와 같이 의지했다며, 음식을 먹지 않으며 울기만 하였다. 4)이처럼 왕실의 여인들이 만류하려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사홍의 당인이었던 유자광(柳子光, 1439~1512)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5)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대에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 사후 마침내 그들은 연산군의 폭정에 구미를 맞추면서 재기를 했고, 각각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주도하는 데에 이르렀다.

갑자사화, 복수의 칼을 겨누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였다. 연산군은 많은 이복 여동생 가운데 휘숙옹주를 유난히 아꼈고, 그녀의 남편인 임숭재를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이것은 연산군이 임숭재가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 승지를 한강까지 보내 마중하게 하고, 잔치를 벌이거나 사냥을 할 때 꼭 그를 불렀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들이 왕의 총애를 얻자, 임사홍은 그 연줄로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처음에 폐주(廢主, 연산군)가 임숭재의 집에 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한창 어울렸을 때 숭재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 또한 신의 집에 왔습니다.’ 하였다. 폐주가 빨리 불러 들어오게 하니, 사홍이 입시하여 추연히 근심하는 듯하였다. 폐주가 괴이하게 여기어 그 까닭을 물으니, 사홍이 말하기를, “폐비한 일이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이는 실로 대내에 엄(嚴)ㆍ정(鄭) 두 궁인이 있어 화를 얽었으나, 실제로는 이세좌ㆍ윤필상 등이 성사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즉시 일어나 궁궐에 들어가서 엄씨ㆍ정씨를 쳐 죽이고, 두 왕자를 거제에 안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죽여 버리니, 두 왕자는 정씨의 아들이다.

- [중종실록] 1506년(중종 1) 10월 22일(정묘)

자신의 생모가 참소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광분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 연산군은 잔혹한 형벌들을 자행하였는데, [연려실기술]에는 “윤필상ㆍ한치형ㆍ한명회ㆍ정창손ㆍ어세겸ㆍ심회ㆍ이파ㆍ김승경ㆍ이세좌ㆍ권주ㆍ이극균ㆍ성준을 십이간(十二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坐罪: 연좌되어 벌을 받음)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윤필상ㆍ이극균ㆍ이세좌ㆍ권주ㆍ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연좌되어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杖刑)을 집행하였으며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 보내고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고 하여 그날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천하의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광기는 극에 달하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러한 잔인한 일들이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평가했다.6)

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의 오빠들)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그에게 쪽지로 통지하고, 임사홍은 곧 들어가 지도하여 명령이 내려지니, 그가 부도(不道)한 것을 유도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다.7)

아들과 바꾼 권력, 그러나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임을 잃지 않으려고, 둘째 아들인 임희재(任熙載)를 희생양으로 삼기까지 했는데, 그 일화가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실려 있다.8)임희재는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 때는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秦皇何事苦蒼生
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不知禍起所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虛築防胡萬里城

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이었는데,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누가 쓴 것인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임사홍과 임희재의 관계는 제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권력의 핵심 자제 중에서 운동권 학생이 배출된 사례와도 유사하다.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라고도 했다.9)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 더욱 경계하였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은 아들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구미에 맞는 측근이 되어 전대미문의 관직에 올랐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처음에 임사홍은 기생을 뽑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여러 사류(士類)에게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 년에, 내가 특별히 들어 써서 마치 물에서 구원하고 불에서 건져 준 것과 같으니,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어야 하거늘, 만약 두터운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임금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참으로 소인이다.” 10)하면서 임사홍을 압박했다. 결국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 기생)과 흥청(興淸: 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권력의 최측근 임사홍은 체포된 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실록에서 대간(大奸: 매우 간사함)ㆍ대탐(大貪: 매우 탐학함)ㆍ대폭(大暴: 매우 포악함)ㆍ대사(大詐:큰 사기꾼)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전형적인 간신의 최후였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 의금부에서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 관대한 은전)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하고 가산(家産)을 적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11) 자신이 주도했던 부관참시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 것이다. 적몰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는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임사홍은 권력을 위해 뭇 선비와 아들까지 죽였지만, 권력의 부메랑은 임사홍 자신의 처형으로 날아왔다. 그에게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라는 불명예가 더해졌고, 이 낙인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2013년은 새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가는 첫 해이다. ‘권력의 유혹’이라는 순간의 향략보다는 영원한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최향미, [조선 공주의 사생활], 북성재, 2011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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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이상 군복무를 한 대한민국 남자 치고 아마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노랫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가사내용이 몹시 저속해 대놓고 부르기에 민망스러운 노래이다.
하지만 비속어가 통용(?)되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내에선
6·25 이후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이었다.
군인들은 「우스개 말」이 담긴 이 노래를 부르며 피곤한 심신을 잠시 달래기도 했다.
털이 다 타버려 white가 됬다는 얘기는 혈기 왕성한 젊은 군바리들에겐 카타르시스적인 큰 위안이었겠지

'성냥'은 마치 우리 고유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자어이다
즉 '석뉴황<石硫黃>'이 음운변화를 거쳐 '성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냥이 들어온 것은 1880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으나, 일반인에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인천에 '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 성냥공장"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후 수원, 군산, 부산 등 전국 각지에 성냥공장을 잇달아 설립했는데,
우리에게는 제조기술을 숨기고 일본인들끼리만 시장을 독점,
성냥 한 통에 쌀 한 되라는 비싼 값을 받아 착취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매일 성냥을 만들면서도 성냥 하나 살 수 없었던 가난한 조선의 여직공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빼내고자 했던 것도 당연했을 성싶다.
"무슨 수"에 대해선 모두 잘 알지? 치마 밑에 감춰 가지고 공장 문을 나서다...X가 다 타지?ㅎㅎ

사실 조선시대에도 성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소나무 가지에 유황을 찍어서 딱딱하게 말린 "석류황(石硫黃)"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화로 속에 집어넣어야 불이 붙는 것이어서
사실상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선조들은 성냥에 대한 말의 표현이나마
일본식 표현인 '인촌(燐寸)' 대신에 "석류황" 을 고집했고,
바로 이 말이 빨리 발음되다 보니 오늘날의 '성냥'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라이터에 밀려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성냥의 발명은 사실 인류에게 진정한 의미의 불을 가져다 준 셈이다.
성냥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이 일단 꺼지면
부싯돌을 수차례 두드리고 나뭇가지를 힘들게 비벼대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랐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를 내쫓기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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