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삼백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불교를 국교로하여 佛國을 세우려했던 新羅시대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있는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으로 너무나 유명하신
혜초스님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시로는 거의 불가능한 머나먼 인도의 다섯나라를 여행하고 ...
원효스님과 義湘스님은 다소 가까운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러 지금말로 하자면 유학을 떠납니다
신라 진평왕때의 이야기입니다.
원효와 義湘이 의주, 압록강을 지나 요동반도 쯤 갔을때,
당나라 수비병들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죄명은 간첩죄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우리의 삼국을 독립국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속국으로 보았는데,
삼국중 특히 고구려가 당나라에 맞짱뜨고 있을 때여서 국경수비가 삼엄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몇달간의 옥살이 끝에 간신히 탈출한 원효와 의상은 고향인 신라로 돌아 옵니다.
1차 유학길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낼 인물들이 아닌건 다 아시죠?
학구열에 불타는 원효와 義湘은 기필코 더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2차 유학길에 오릅니다.
지난 1차 유학길은 陸路를 이용하는 바람에 곤혹스런 감옥살이를 했으므로 이번에 뱃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지금의 수원을 지나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지금의 송산 사강쯤(여기서 옛날에 내가 영어 선생을 한적이 있음) 갔을때 밤이 어두워져
어느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는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모두들 아시고 계시죠?
그리고 원효가 잠자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해골 바가지에 시체 썩은 물을
마신 것을 알고 토하고 난리법석을 떨지요?.
그러나 이 하나의 헤프닝이 원효에겐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사는 집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죠?
즉,'세상만사 마음 먹기 달렸을 뿐'이라는 의미의 말이겠죠.
그러면서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義湘은 한번 먹은 마음 변할수 있겠는가..꼭 많은 것을 배워 돌아 오겠다는 의지를
꺽지않고 홀로 배를 타고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산동반도의 양주에 도착하게 되는데 지금의 봉래시 등주(登州)가 됩니다.
당시엔 바닷길이 우리나라의 남양반도(끝의 마산포)와 중국의 산동반도가 가장 가까워 그 길을 많이 이용했다합니다.
배멀미에 감기 몸살까지 겹친 義湘은 심신이 매우 피로했을 것입니다.
머나먼 낯선 중국에서 비실거리는 외국인 '義湘'을 한눈에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알아 차린
중국인은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이라는 벼슬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단번에 자기 관사로 모시고 의상을 간호해 줬습니다.
나중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눈엔 똥만 보이나 부처의 눈에는 모든중생이 부처로 보인다는 대화말입니다.
유지인(劉至仁)의 눈에 義湘이 부처로 보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으나 아마 틀림없이
부처로 보였을꺼라 확신합니다.
실질적으로 극진한 간호를 직접 맡은 이가 바로 이 '부석사의 밤'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선묘(善妙)"라는 아가씨였으며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善妙낭자는 극진히 의상을 간호하며 범상치 않은 훌륭한 의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라는 말이 오천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佛子의 길을 걷는 義湘에겐 사랑은 한낱 사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義湘은 善妙낭자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해 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스님과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모체로 화엄학(華嚴學)을 탐구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와
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종(華嚴宗)을 開宗하게 되며 시발점이 되는 장소가
바로 "부석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개인적 여담 하나 들려 드릴까합니다
원효와 義湘의 인간 내면의 세계를 제 개인적 각도에서 바라 보았는데 그냥 흘려 들어 주세요.
남양반도 무덤에서 해골 바가지에 담긴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일방적 선언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 간 원효.....이 원효를 조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의 사생활 몇가지를 아는대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효가 유학을 포기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1차 유학 길에서 간첩으로 오인 받아
요동에서 감옥살이까지 하며 고생해서 실제 마음 속으로는 유학을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義湘은 기필코 간다고 하니 가지 않을 명분을 찾아야 했는데
그것이 해골물 사건의 "깨달음"으로 술수를 쓴게 아닌가하는 개인적 의구심이 듭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떻게 들리세여?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아리송송하지만 저 같은 범생은 그저 핑개를 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유명한 원효의 "깨달음"이 유학 기피용 술수?
원효 좋아 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저를 혼낼려 할텐데...ㅎㅎㅎ..
그냥 개인적 생각쯤으로 받아 드려 주소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얘기입니다만, 원효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性(SEX)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의상과는 완전히 분별되는 사람이었지요?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유명한 얘기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알려 드립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를 시쳇말로 따먹은 사건은 유명타 못해 음담패설로 술집에서의
한잔 할때의 단골 메뉴이지요?
원효는 요석궁에서 독수공방하고 있는 요석공주를 따먹기 위해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요즘 개그콘써트의 유행어식으로 말 하자면
"도끼가 도끼 다울려면, 도끼 구멍에 도끼 자루를 끼워야 도끼지~~, 도끼 자루 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라고
일찍이 홀로 된 요석공주를 빗대어 떠들고 다니죠.
무열왕이 무슨 의미인가를 알고 홀로된 요석공주를 위해 당대의 큰스님으로 명성이 어느 정도 있던 원효를 불러 요석궁으로 들여 보내는데,
원효는 어떻게던 요석공주를 따먹을려고 일부러 비를 맞고 옷을 적셔서 들어 갑니다. 들어 가선 당연히 젓은 옷을 벗고 ....히히히히......
이 전술은 대성공을 거두어 한방으로 요석공주와 원효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탄생합니다.
바로 신라시대에 최고의 학자이며 어려운 한문을 쉽게 누구나 쓸수 있도록 만든 "이두문자"의
창시자 "설총"이지요. 참고로 원효의 원래 이름은 '설 서당'이었습니다.
중이 간통을 한다는건 불교에선 있어선 안되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원효는 스스로 양아치라 칭하며
그후 저잣거리로 나가 서민들의 佛心을 키우는데 매진합니다.
대승불교를 실천하는것이죠.
여하튼 당시엔 왕실을 주축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승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義湘은 정통성있는 귀족불교 쪽이라 할수 있고, 원효는 서민불교라 할수 있겠지요.
저의 윗글들만 읽으면 원효는 땡중처럼 보일려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업적은 어마어마하죠?
많은 집필 활동을 하여 지금까지 그의 불교철학은 유구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義湘과 선묘낭자의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상해 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몇년만에 화엄학을 설파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몇년전, 배멀미 감기 몸살로 초죽음이 되있던 자기를 사랑이 함께하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 선묘낭자를 마지막으로 만나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 주고 떠나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양주의 '선묘낭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 그들에게 다가왔을까요
불행이도 '선묘낭자'는 집에 없었고, 신라로 떠나는 여객선은 기다려주지 않고......
그 사실을 안 '선묘낭자'가 죽을 힘을 다해 뛰어와 부두에 섰을때에는 이미 그 배는 두둥실
망망 황해 바다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나 보내는 선묘낭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 않아도 얼마던지 헤아릴수 있겠지요.
님이 떠나 가실 날에 드릴려고 몇년동안 정성으로 만든 법복과 행장을 싼 보자기를
떠나는 배를 향해 던집니다. 그 순간 바다에 일진광풍이 불어 그 선물보자기가 '義湘'에게로
전달되어집니다. 따뜻한 선묘낭자의 마음을 하늘도 알아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義湘圖'의 권 말미 畵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의상도'에 대해 아래에 자세한 설명 올리겠습니다)
“재가(在家)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선묘낭자'는 바다로 뛰어 듭니다.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라며
바다에 뛰어들어 용으로 변하여 배를 수호합니다.
그녀는 참으로 솔직하면서도 대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그림이 그 때의 그 광경입니다. 이 그림 어렵게 구했습니다. 별도 설명드리겠습니다.
龍으로 변한 선묘낭자는 義湘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며 그리운 고국 신라까지 안전하게 갑니다.
그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와 우리가 지금 볼수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만 의상이 중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머물렀던 산동반도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선묘낭자가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묘낭자의 모습입니다.
예쁘게 생겼어요? 별루라고요? 인물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세요. ㅎㅎ 당시의 미인상은 이랬나 봅니다
여기서 윗 그림들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일본 교토의 명승지 고산사에는 ‘화엄종조사회전(일명 화엄연기華嚴緣起)’이라는
긴 두루마리 그림(에마키繪卷)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 그림 입니다.
이 그림과 글은 일본의 명혜(明慧·묘에쇼닌 1173~1232) 스님이 작성한 것으로
이는 사찰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자 일본의 國寶입니다.
이 그림(에마키)에는 위에서 설명한 신라시대 두 명승 義湘과 원효의 전기가 그림설명(詞書)과 더불어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래 6권의 그림으로 되있었는데 2권은 홰손되고 4권만이 남아 國寶로 지정되어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이런 국보가 일본에 있는 이유는 원효와 義湘의 화엄종이 일본 불교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수있는 지랫대입니다. 자랑스럽죠?
실제로 의상과 원효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지도 모릅니다.
일본 불교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또한,일본이 우리와 틀린 것은 남의 나라 일이라해도 숭고한 사랑과 사상은 깊이있게 연구해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 많큼은 되지 않지만 물론 우리나라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잘 아시는 고려시대의 일연(1206~1289) 스님이 1282년경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송나라의 찬녕(919~1002)이 982년부터 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에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요약하자면
송나라의 찬녕(919~1002)이 982년부터 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과
고려의 일연(1206~1289) 스님이 1282년경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와
일본의 명혜(明慧·1173~1232) 스님이 1228년경에 쓴 <화엄종조사회전>(일명‘화엄연기' 日本國寶)
이 있습니다..
신라로 돌아 온 義湘은 화엄학을 전파할 사찰을 지어야했습니다
전국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으나 가장 적합한 곳이 지금의 부석사 자리라고 판단합니다.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건축반대 데모대들이 머리에 '결사반대'붉은 띠를
두르고 모여들어 홰방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요즘 말로 하자면 님비(not in my back yard의 약자로 자기 집 근처에서는 않된다는 이기주의자들)집단들인데
보수 수구 세력들로서 토속신앙등 타종교 집단들이었습니다.
날로 격화되는 데모대들로 공사를 할수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義湘대사를 사랑하여 국경을 초월하고 만경창파에 몸을 던져 龍이 된 선묘낭자는
사랑하는 님 곁에서 언제나 맴돌고 있었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를 명분없이 하는 데모대를 혼내서 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 줄수 밖에 없었을 겄입니다.
그래서 선묘낭자는 어마어마한 바위로 변신하여 데모대 위로 위협사격을 가했습니다.
얼마나 놀랬는지 혼비백산한 데모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답니다.
義湘이 이 절을 부석사로 이름 지은 것도 바위가 하늘로 떠 올랐다는데에서 뜰浮 돌石자를 쓰서
浮石寺라 했다는건 모두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또한 선묘낭자는 울진 불영계곡의 불영사를 지을 때에도 연못의 큰 나무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엔 짝퉁 浮石寺도 몇곳 있읍니다.
충청도 서산과 서울 근교에도 똑같은 이름과 내력의 부석사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서산 쪽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꼭 한번 들려 보세요.
의상은 부석사를 짓고 화엄학의 전파에 매진합니다
양양의 낙산사, 동래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울진의 불영사가 의상대사의 혼이 담긴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부석사를 완공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설법하고 있는 의상대사의 모습이
일본의 國寶로 지정 되어 있으니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외쳐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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