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쯤이 아니라해도 운동의 필요성이야 모두 실감하고 있듯이
나도 꼭 한가지 운동을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겠다고 맘먹고 실천해 온지 십여년이 된다.
등산은 알려진것많큼 다니지 못하는데, 수영 많큼은 새벽 5시반에 일어나 꼭 하러 다닌다
등산은 알게 모르게 금수강산을 누비는 우리 동기들이 꽤있어 한편으로 그들이 부럽기도하다.

등산을 매우 좋아하는 듯한 박대현도사가 경기오악을 두루 정복하며,
遊山 도중에 만난 白沙 이항복과 蓬萊 양사언의 詩碑를 촬영해 와 친절하게도 우리 홈피에 올려주어
아득히 멀어졌던 그들의 세계속으로 잠시나마 여행할수 있어 너무도 고마웠다
그 詩碑중에 蓬萊 楊士彦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쬐끔 아는 이야기라 아는 척을 좀 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가 양사언의 시조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게 된 분들도 많을터..
楊士彦에 대해 조금더 덧붙이고

오늘의 주제인 "楊士彦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져한다.
楊士彦은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名書藝家이자 文人이란건 이미 알려드렸다.

楊士彦의 호가 蓬萊(봉래)인데 왜인가하면 楊士彦이 관직에 올라 지금의 철원사또로 부임하게되고

자연히 지척에 있는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살게 되었단다.
여름 금강산을 蓬萊(봉래)山이라 함은 모두 알터 그래서 호를 蓬萊(봉래)라 하였단다
금강산을 노래하고 그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만은 얼마나 금강산을 사랑했으면
자기의 호를 蓬萊라 했겠는가...나도 이번 가을엔 금강산을 꼭 가보고싶다..

우리 선조들 뿐 아니라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恩功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恩攻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탄생 되어질수 있었으리라...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栗谷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것이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이리라.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흔치않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펜을 끄내 들고 오백여년전으로 돌아가 양사언의 어머니 이야기를 우리 동기들에게 알려 주려한다.

하도 오래전에 읽은 여러권의 책내용이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짤막하게 주요부분만 추려 이 글을 쓴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꽃피는 삼월의 어느날 어느 촌고을을 지날즈음,

전날 부임 축하연으로 술에 쩔어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파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단다.

그러나 농번기에 집에 사람들이 있을리 없었다.

이집 저집 둘러 보는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곤 신관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수있겠냐고하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린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긴다
조반을 잘 얻어 먹은 젊은 신관 사또 ’양 민’은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신관 사또 ’양 민’은 소매에서 자기가 매우 아끼는 부채 靑扇, 紅扇 두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준다.
그냥 전달하기는 멋쩍어 농담을 섞어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참고로 ’채단’이라함은 결혼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지고 와 깔고 靑扇, 紅扇 을 내려 놓으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그러냐고 묻는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두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 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또 ’양 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몇년전 부임할때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靑扇 紅扇 두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는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한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이후로 시집을 보내려해도 어느곳으로도 시집을안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 민’사또의 머리 속엔 어떤 느낌이 스쳐 지났는지 모두 느끼리라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그냥 모른척할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그녀를 내 아내로 맞겠소"
식사 한끼 얻어 먹고 대가로 부채 두자루 선물 했으면 밥값으로 충분 할텐데,

졸지에 아내로 까지 마지하게 됫으니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축복인가!~
어디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이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사또 ’양 민’은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楊士彦과 양사기, 두 아들이 탄생한다.
사준, 사언, 사기,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체도 좋아
주변으로 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는구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양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게 되고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냐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남편 ’양 민’이 죽고 장례날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이 재주있고 총명하며 풍체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내가 죽은 후라도 양사언과 양사기 두 형제에게 서자가 아닌 적자로 친형제로 불러주기 바란다.

영감님이 죽은 날 내가 같이 죽으면 사람들이 후에 복제가 혼돈하여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될것이니....."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겨 안았을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로부터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한 한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가게 하고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사회 병리현상인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新女性
이 어머니의 죽음은 楊士彦이 더욱 훌륭한 文人이 되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楊士彦은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된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유명한 楊士彦의 "飛"


우리는 이런 글씨를 보면 글씨보다 이거 무지 비싸겠는데?하며 값으로 따질려한다..ㅎ
실제 이 글 원본은 몇억한단다..코ㅔㄱ
서예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씨를 보면 온몸에 닭살이 돋으며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빠져 든다고...




楊士彦 五言詩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고.
내가 볼쩍엔 낙서같은데...ㅎ 무지무지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더라

霜餘水反壑 서리 내린 뒤 물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고
風落木歸山 바람에 진 나무도 산으로 가누나
歲華晩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昆蟲皆閉關 벌레도 모두 숨어 움추리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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