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평해길』
『제3길 정약용길(마재옛길)』
['평해길 좀합안내도']
['평해길 남양주구간' 종합안내도]
['두물머리' 부근 지도]
['3코스 실트랙']
<남양주시의 예봉산(천마지맥)> <양평군의 청계산(한강기맥)> <광주시의 정암산{앵자지맥)>
<하남시의 검단산(검단지맥)>이 주축을 이루는 산줄기들이 그 맥을 다하고 한곳에 모여
고개 숙여 인사하며 서로 지난 얘기 조잘대는 "팔당호 八堂湖"로 <평해로>는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평해로 3코스>는 <남양주시 다산길>과 함께 가는 길이며, 우리 민족의 자랑인 불세출의 지식인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生家마을을 돌아 가는 길이어서 더욱 의미있는 <평해길>이 되겠습니다.
['팔당역'] 10:51
2021년 4월 14일 (수) 맑음
<경의중앙선 팔당역>에서 <평해길 제3길 정약용길(마재옛길)>을 시작합니다.
역 뒤로 "예빈산 禮賓山 589m"이 조망되는데 "견우봉" "직녀봉"으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잠시후 예전 저 봉우리에 올라 바라보는 <능내마을 다산유적지> 사진을 보여 드립니다.
['제3길 정약용길(마재옛길) 안내도']
<팔당역> 앞에 있는 <평해길 제3길 안내도>를 확인하고 바로 출발합니다.
['팔당역' 앞] 10:52
<팔당역> 앞 광장에는 <다산길 안내판>도 함께있습니다.
<검단산>을 바라보며 좌측으로 진행하면
['남양주시립박물관 입구'] 10:54
곧바로 <남양주시립박물관> 정문 앞을 지나고
['예봉산' 조망]
"예봉산 禮峰山 683m"을 조망하는데 축구공 모양의 기상레이다가 보이고
['예봉산 등산로 입구'] 10:56
이어서 <팔당2리 입구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예봉산 등산로 입구>입니다.
<평해길>과 <다산길>은 직진합니다.
[삼거리] 11:00
진행하는 이 길은 [옛6번국도]이고 우측에 [新6번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서로 옮겨 탈수 있는 곳인데
<평해길>은 [옛6번국도]로 진행합니다.
[뒤돌아 본 '팔당대교']
<옛 팔당역>이 있던 곳에서 지나온 <新팔당역>이 있는 곳을 뒤돌아 보면
<팔당댸교>와 <하남시>가 보이고...
8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11:08
[옛6번국도]에서 좌측에 있는 <옛 중앙선 철길>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에 <남원추어탕집>이 있습니다.
['옛 중앙선 철길'] 11:09
<남원추어탕집>에서 <도께비박물관> 방향으로 50m 정도 올라 가면
"옛 중앙선 철길-현 국토종주자전거길"을 만나 <평해길-다산길>은 이어 집니다.
{옛 철길]
[쉼터] 11:24
<옛중앙선-자전거길>을 15분 정도 진행하면 <팔당댐>이 조망되기 시작하는 곳에 쉼터가 있습니다.
"팔당리 八堂里" 지명의 유래를 모르고 가면 감흥이 없습니다.
'팔땅 구땅 장땡'...이런 걸로 알고 있지는 않나요? ㅎㅎ
'북한강'과 '남한강'이 '경안천'과 합류하여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의 협곡인 "두미협 斗尾峽"으로
흐르는데 강 양쪽의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하여, 여덟명의 <선녀 仙女>가 내려와 놀던 명당자리가
여덟 곳이나 있었답니다. 그 자리에 <仙女>들이 여덟 개의 堂을 지어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팔당리>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내용을 알고 보면 이곳 한강변의 경치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현재는 <팔당댐> 건설로 의미가 빛을 바랬지만....
['팔당댐과 팔당호' 안내문]
댐 건설하기엔 최적의 장소로 <팔당호>를 만들어 우리나라 인구의 반 이상이 사용 할수 있는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상수원이며, 홍수 조절, 수력발전등 없어서는 절대 않될 <팔당댐> 입니다.
['검단산' 조망]
['팔당댐' 조망] 11:42
지금의 <팔당댐>부터 <팔당대교> 사이를 "두미협 斗尾峽"이라고 한다고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협곡을 지나는 한강의 거센 물쌀은 큰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답니다.
이곳의 팔당 마을 사람들은 겨울이면 전부 모여 긴 쇠사슬을 가로치고 큰 민물고기를 몰아서 잡았다는군요.
이 물고기 잡는 광경은 겨울의 큰 구경거리였답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기 고향의 사계절을 읊은 <소천사시사> 중에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두미협(斗尾峽)의 고기 구경"
수정 물결 만 구멍 깊이 뚫린 곳 俯鑿玻瓈萬孔
일천 길 쇠사슬이 가로로 쳐져 橫施鐵銷千尋
날씨 추워 두건에 눈이 쌓이고 天寒綠帽盈雲
햇살 쏘아 고기들 금빛 빛나네 日射紅鱗耀金
['팔당댐' '봉안터널'] 11:46
<팔당댐> 옆으로 <옛중앙선>이 통과하던 터널이 있습니다.
['팔당댐']
"팔당댐"
1966년에 착공하여 1973년에 완공되었다는데, 댐의 높이는 29m, 제방의 길이는 575m,
총저수용량은 2억4,400만t이며, 유역면적은 2만3,800㎢라고 합니다
수력발전으로 년간 2억5,600만kW의 전력을 생산하여 공급한다고...
['봉안터널' 입구]
['봉안터널'] 11:48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에 있어서 <봉안터널>이라 하는듯,,,,
길이는 250m 정도 되는 <옛중안선> 철길이었지만 지금은 자전거 도로
['봉안마을'] 11:52
<봉안터널>을 통과하면 "봉안마을"이라고 안내합니다.
<정약용 선생 집>에서 서쪽으로 <봉안역> 부근은 '청주 한씨'가 대대로 세거하던 곳이었답니다.
한수, 임숙영, 서유구, 여운형 선생등이 전후로 은거하던 곳으로도 알려졌다하며
<정약용 선생>은 여름날 석양이 물들면 이곳의 매미 노래 소리 듣기를 좋아해서 시를 지었답니다.
"유곡(酉谷)의 매미 소리"
동으론 맑은 못물 내려다 보고 東壓澄潭止水
서로는 숲 속 매미 소리를 듣네 西臨碧樹涼蟬
새벽엔 듬성듬성 노래 박자요 曉日疏歌緩節
석양엔 시끌시끌 피리 거문고 斜陽促管繁絃
['팔당호']
<팔당호>가 펼쳐지며
['팔당댐'] 11:58
뒤돌아 보는 <팔당댐>과 좌측 <검단산>과 우측 <예빈산>입니다.
가운데 계곡 "두미협 斗尾峽"이 댐 건설하기에 최적지로 모르는 제가 봐도 그렇게 보입니다.
우측 <예빈산> 아랫마을이 <봉안마을>이라는군요.
['봉쥬르' 음식점] 12:04
<봉안터널>에서 12분여 <팔당호>를 진행하면 <봉쥬르>라는 한식당 앞을 지나는데
음식점 입구에 좀 재미있는 조형물이 서 있고...
5분 정도 더 진행하면....
['정약용유적지' 입구 쉼터]
['정약용유적지' 입구 사거리] 12:09
<옛6번국도>에서 <정약용유적지>로 들어 가는 길 입구를 만나는데, 자전거길과 교차하는 사거리입니다.
자전거도로를 직진하면 <능내역>입니다만 <정약용 유적지>를 돌아 보고 <능내역>으로 갈 예정입니다.
여기서 자전거길을 버리고 우측 도로를 이용합니다.
['정약용유적지' 가는 도로]
<정약용 유적지>로 가는 도로를 잠시 진행하면....
['스탬프함'] 12:11~12:17
<평해길>과 <다산길>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 둘레길로 안내되며 "스탬프함"이 있습니다.
여기 <스탬프함>은 좌측 옆에서 열더군요. ㅎ <합수머리세월교>에 있는 스탬프함은 뒤에서 열어
여기는 위에서 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ㅎ
['현위치' 안내도]
[현위치'와 '다산유적지' 상세지도]
이곳에 설치된 안내도를 보면 여기서부터 "쇠말산 鐵馬山 79.4m"을 중심으로 <팔당호>에 뻗어 있는
<능내리>의 "다산유적지" 위치를 잘 알수 있군요.
['머루터널']
['연꽃마을' 유래]
<연꽃마을의 유래>를 알리는 별 의미없는 안내판은 건너 뛰고
<머루터널>이라고 하는 꽃길을 통과하면
[호반둘레길]
['아조타농원'] 12:23
호수 옆으로 낸 산길을 잠시 통과해 나가면
<아조타농원>이 보입니다. 이름이 재미있는데 잠시후 우측 동산을 빙 돌아 <아조타농원 정문>앞으로
<평해길>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뒤돌아 보면...
['팔당댐'과 '예빈산' 조망]
<팔당댐>과 <예빈산>이 기가 막히게 좋은 경관을 보여 주는군요.
[둘레길]
다시 호수 옆을 통과하면 <조류관찰소>가 있고
[철문] 12:32
이어서 철문을 통과합니다.
['아조타농원' 정문] 12:34
그러면 조금 전에 보았던 <아조타농원>의 정문 앞을 통과하고
[내림길] 12:36
이어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 내림길로 내려 갑니다.
이곳 좌측 산이 "쇠말산 鐵馬山"인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마을 유래에 대해
이 산에서 부터 유래한다고 기록으로 남겨 놨더군요.
['조류생태습지' 앞]
다시 팔당호 호변으로 나가면 <조류생태습지>와 음식점들을 만나며
['다산생태공원' 후문 입구] 12:42
"다산생태공원 후문 입구"를 만납니다.
<남양주시 八景> 중에 으뜸이라는 곳이 이곳 "정약용유적지"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다산생태공원']
공원 안에서는 <평해길>이나 <다산길>이거나 트랙을 따라 움직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곳저곳 자유롭게 둘러 보고 정문으로 나가면 되니까요.
저는 호숫가를 따라 진행합니다.
[생태공원']
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공원 남단 끝으로 나가면....
[공원 남단 끝] 12:52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가 조망되며 "경안천 京(慶)安川"이 <한강>과 합수하는 "팔당호"가 펼쳐지는데
앞으로 나가 조망하면...
['소내섬'과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조망]
<팔당호> 가운데에 "소내섬"이 조망됩니다.
이곳 <팔당호>에는 세개의 섬이 있는데 앞에 보이는 <소내섬>과 잠시후 보게될 <족자섬>,
그리고 <큰섬>이 <양수리 남한강> 방향에 있는데 <소내섬>이 제일 크고 <큰섬>이 제일 작습니다. ^.^
이렇게 수평으로 보면 잘 알수 없으니 제가 예전 2009년 5월 24일에 <천마지맥> 마지막 구간을 진행하며
<예빈산>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주변 지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 사진을 보여 드리면....
['2009년 5월 24일 '천마지맥' 마지막구간 "예빈산 견우봉"에서 찍은 사진]
더 설명이 필요 없죠? ㅎ
"경안천 京(慶)安川"은 예전에 "우천 牛川"이라고 했고 우리말로 "소내"였답니다.
<경안천>이 <한강>과 합수하는 지점에 생겨난 섬이 "소내섬"이라는 걸 개천 이름에서 알수 있습니다.
이곳에 대한 <국토지리원> 상세지도를 참고 하면...
[이 곳 상세지도]
[현위치]에서 <소내섬>과 <분원리>, 그리고 <족자섬>의 위치를 기억해 두고 다음 사진으로 넘어 가면...
['소내섬'과 '분원리' 약간 줌인 해 조망]
윗 지도의 [현위치]에서 약간 줌인하여 <소내섬>과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왜 이 사진을 촬영했냐하면 그 유명한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 <분원리>의 어느 곳을 <진경산수화>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우천 牛川']
우리나라 <보물 1950호>로 지정된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우천 牛川"이라는 그림입니다.
예전엔 <경안천>을 <우천>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 그림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 보이는 기와집은 "사옹원 분원"이랍니다.
조선시대엔 국가에서 도자기 생산을 관활하는 "사옹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답니다.
이곳은 그 유명한 <조선 백자>의 핵심 생산 기지인 <광주 관요>가 있어 그 관요를 관리하는
"사옹원"의 "분원 分院"까지 있었는데 바로 그림 속의 큰 기와집이랍니다.
우측이 현재의 <경안천>인 <우천>이고...<팔당댐>이 없던 시절이니 감안해서 그림을 감상해야 합니다.
<팔당댐>으로 이 그림의 상당부분 지역은 수몰되었답니다.
현재 <분원리>라는 동네 이름까지 만들어 준 <分院>은 폐교된 <분원초등학교>에 자료관으로 남아 있고
<조선백자>를 만들던 화려한 동네는 아시다시피 <붕어찜 음식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공원]
주차장으로 나가는 공원에는 주차장이 가까워서인지 관광객들이 이쪽에 많이 있더군요. ㅎ
[정자] 1:02
['김훈'의 '흑산' 소설에서 인용]
<정약용 선생>은 형제 자매와 함께 천주교를 공부했죠.
자신은 천주교를 공부만 했지 믿지는 않았다고 국가의 탄압에 항거 했지만 결국 유배길에 올랐지요.
그들 형제들은 앞에 보이는 <한강>을 건너 건너편 <퇴촌 천진암>으로 가 <서학>, 즉 <천주교>를 공부했죠.
<팔당댐>이 없던 옛날엔 겨울철에 이 강을 걸어서 건널수 있었답니다.
소설가 <김훈>의 <흑산>이라는 소설에 언급된 이곳은 윗글을 참고하고
['정약용유적지 주차장'] 1:07
<다산생태공원>을 둘러 보고 <다산 생가>로 가는 길에 있는 주차장을 지나면...
['정약용유적지' 입구] 1:09
"정약용 유적지"
여길 다녀 간 적이 없는 분은 안 계시죠? ㅎ
그런데 깊이 있게 선생의 인생을 들여다 보신 분은 많지 않겠죠?
르네상스시대를 이끈 <레오날드 다빈치>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우리나라의 <정약용 선생>을 꼽습니다.
저는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정약용 선생>을 생각하고 닮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림자 끝도 따라 가지 못했습니다.
['다산 유적지' 정문]
선생의 생가 안으로 들어 가면...
['여유당' '묘' '문도사' 전경]
우측에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있고, 생가 뒤에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그리고 좌측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문도사 文度祠"가 있습니다.
['여유당']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생가를 복원한 "여유당 與猶堂"입니다.
<남양주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인용합니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 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여유당 與猶堂"이라고 지은 이유를 조금 쉽게 해석하자면
"與猶"의 <與>는 <머뭇거릴 '여'>이며, <猶>는 <망서릴 '유'>로
즉, 주변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라 할수 있죠.
정적들이 자신을 죽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지은 의미있는 집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여유당' 안채]
<정약용 선생>의 심정을 조금 더 알기 위해선 당시 정치상황을 알아 봐야 하겠죠.
선생이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老論)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는 선생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영의정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는데, 이 무렵 <정조>는 <다산>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광경으로 <다산>이 판서(判書)가 되고 재상(宰相)이 되어
<제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노론>에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고 꼬투리를 잡아 보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꼬투리 하나를 부상시키는데,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정약전>을 <서학>을 믿는다는 꼬투리로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 가 <자산어보>라는 우리나라 최초 최고의
해양 생태계 학술지를 집필하고 그곳에서 죽었지요.
<정약용 선생>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습니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관직을 그만 두기를 청하였습니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해 7월 26일 이를 허락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1800년(정조24년) 봄에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門楣)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습니다.
그 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을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하니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답니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으나
2주 후인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지요.
이로써 선생은 지은 죄도 없이 정치보복인 정적으로 몰려 마흔살에 18년간의 귀양길에 오르며
나라를 개혁하여 발전시키려던 꿈은 <정조대왕>과 함께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 시기에 세계는 <르네상스시대>와 <산업혁명>의 새 시대로 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시대"로 직행하며, 식민지 시대를 여는 암흑시대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묘지 입구]
선생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집 뒤 동산에 뭍어 달라고 유언했기에 <여유당> 바로 뒤에 묘를 썻습니다.
선생의 아버지는 진주부사라는 관직까지 한 <정재원>이라는 분이며, 본부인은 <정약현>을 낳고 일찍 죽어
세칸드인 <海南 尹氏>에게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그리고 누이 까지 네명이 태어 납니다.
물론 다른 여러 형제가 있으나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어머니 <海南 尹氏>는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6세손이고,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詩·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입니다.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약용선생은 어려서 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곱살 때에 선생의 최초의 漢詩인 "山"이라는 詩를 지었으니 천재임을 입증해 줍니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
그 옛날 어린 나이에 벌써 원근법을 깨우쳐서 천재라 했고 한자 실력이 장난이 아니죠.
['정약용선생' 요약 일대기]
선생의 일대기를 요약하여 알기 쉽게 만든 삽화가 있어 첨부했으니 읽어 보시고
['다산 정약용선생 묘']
<茶山 정약용선생>은 1762년에 이곳 <능내리 마재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5살이 되던 해에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는데 4남 2녀는 일찍 죽고
2남 1녀만 살아 남았는데 장남이 <농가월령가>을 지은 <정학유>이고 동생이 <정학연>이며
딸은 <이승훈>에게 시집가서 우리나라 천주교 개척에 큰 역활을 한 신여성이지요.
정약용선생의 가족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18년간의 유배생활
유배지에서 그리워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 표현은 극치를 이룹니다
<如夢令寄內>라는 사랑 詩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如夢令寄內 - 꿈속에서 본 아내에게
하룻밤 사이에 지는 꽃이 헤아릴수 없는데
산비둘기와 어미제비가 지붕을 맴도네.
외로운 나그네 돌아간다 말 못하니
언제나 침실에서 아름다운 인연 맺을까나.
그리워 말자 그리워 말자.
슬프고 서글픈 표정의 꿈속에서 본 아내 얼굴을
58세에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75세가 될때까지 다시 아내와 잉꼬부부로 살았답니다.
75세까지 사는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 한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60주년까지 사시는데 이런 것을 <회혼 回巹>이라고 하지요.
부부가 함께 결혼60주년까지 살아야 하니 매우 어려운 경우입니다
결혼 60주년에 "회혼례식"을 올리는게 가문의 영광이죠.
요즘은 결혼도 늦게해서 부부가 동시에 결혼 60주년까지 살기도 어려워 "회혼례식"을 하는 부부는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만, 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회혼례식"을 하였고 동네 잔치를 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불행이도 <회혼례 回巹禮>를 올리려는 날 아침에 돌아 가십니다.
드라마도 이렇게 극적인 드라마는 없죠.
선생은 돌아 가시기 전에 <회혼시 回巹詩>를 남겼습니다.
回巹詩
六十風輪轉眼翩 穠桃春色似新婚
生離死別催人老 戚短歡長感主恩
此夜蘭詞聲更好 舊時霞帔墨猶痕
剖而復合眞吾象 留取雙瓢付子孫
회혼시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 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자찬묘지명']
선생은 죽기 전에 자신의 묘에 넣을 <묘비명>을 스스로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자신의 일대기를 스스로 거짓없이 기술했습니다.
너무 길어 생략하고 일부분만 사진으로 소개 합니다.
[묘소에서 '여유당' 조망]
[묘소에서 내려 가는 길]
[묘소에서 '문도사' 조망]
저는 선생이 쓴 글중에서 <유산 遺産>에 대해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자식에게 <유산 遺産>을 남겨 주는데 현금이나 부동산등을 남겨 주지 않고
"글자"를 <遺産>으로 남겨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마도 <정약용선생> 뿐일 것입니다
그 유명한 선생의 <遺産> 전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 만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근(勤) 부지런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늦추어서는 안된다.
집안 식구들이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순간도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부지런함>이라 한다.
또 <검(儉) 검소함>이란 무엇인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이 옷을 먼 훗날까지 입을 수 있는지 헤아려 보라.
가는 베로 만들면 머지않아 해어지고 말테니 질박한 천으로 만들어 입으라.
음식도 목숨을 이어가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거라.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면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조건을 극복하는 일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여유있는 가정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항구적인 생활 규범이다.
그러니 가슴깊이 새겨 두라고 거듭 당부한다."
<정약용선생>의 아들 <정학유>와 <정학연>은
아버님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후에 조선시대 大學者가 되지요?
위에서도 언급 했드시 선생의 아들 "정학유 丁學游"는 그 유명한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지었지요
['문도사']
[영정]
선생의 영정은 유리 액자 속에 있어 빛반사로 사진이 좋지 않습니다만 제 카메라 성능은 좋지요?ㅎ
선생은 자신을 "삼미자 三眉子"라고도 하고 10살 이전에 쓴 시를 모아 <三眉子集>를 냈답니다.
"三眉"라는 말에서 "眉"는 눈섶이라는 뜻이죠. 눈섶이 세개라는 의미이니,
선생은 자신을 "三眉子"라고도 했던 것입니다. 속칭으로 '눈섶이 세개인 놈"이라는 말이지요
선생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눈섶 사이에 흉터가 생겨 눈섶이 떨어져
눈섶이 세개로 보여 해학적으로 스스로를 "三眉子" '눈섶이 세개인 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은 천연두로 곰보 였던 모양입니다.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천연두로 곰보가 된 사람이 많았지요?
그후 천연두가 요즘 <코로나19>보다 더 무섭게 번지자 <천연두 예방과 치료법>을 책으로 펴냈는데
그 책의 이름이 <마과회통 麻科會通>이니 의학까지 섭렵했습니다.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은 밖에서만 흘깃 보고 유적지를 떠납니다.
[시내버스] 1:30
<운길산역>에서 <다산유적지>를 운행하는 좀 독특한 모양의 시내버스가 여전히 다니고
[고개 오름길]
['마재고개'] 1:37
유적지 입구에서 7분여 고개를 오르면 <마재고개>에 오르는데
<평해길>과 <다산길>은 좌측으로 가라고 합니다.
[지명의 유래]
지명의 유래 안내판이 있고
['마재성지' 앞 갈림길] 1:42
<마재고개>에서 잠시 내려 가면 "마재성지"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내려 가면..
['마재성지' 정문] 1:43
[성지 안 조형물]
"마재성지" 정문을 만나 들어 가 보고
5분여 골목을 빠져 나가면...
[자전거도로] 1:48
['능내역' 앞 음식점]
<다산유적지 입구 사거리> 스탬프함이 있던 곳에서 헤어졌던 <옛 중앙선-자전거도로>를 다시 만나며
<능내역> 앞 음식점에 도착합니다.
['능내역'] 1:48
"능내역 陵內驛"
마을 뒤에 작은 언덕이 있어 <능내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고 이 마을에 기차역이 들어 섯는데
이젠 폐역이 되어 그 옛날의 추억만 서려 있답니다.
['능내역' 안]
폐역이 된 역 안엔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을 뿐....
['행복행 추억 열차'] 1:53
낡아서 페인트 껍질이 더덕더덕 일어나 흉물스런 기차 카페가 외롭게 "행복"을 추억하고...
이 기차 옆 자전거 도로를 따라 7분여 진행하면...
['다산유적지' 들날머리'] 2:00~2:18 (조망및 휴식)
<옛6번국도>에서 <다산유적지>로 통하는 동쪽 들날머리를 만나는데
['쉼터']
['족자섬' 조망]
이곳에 쉼터가 있으며 유명한 "족자섬"이 조망됩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며 여울치는 물쌀에 의해 형성된 섬으로 <두물머리>에 있는 섬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소내섬> 다음으로 큰 이 지역 섬이죠.
<정약용 선생>은 이곳 앞에서 물고기를 잡고,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형제들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곳이라고 그 내용을 시로 남겼습니다.
<남자주 藍子洲>는 <족자섬>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남자주에 당도하여 [行次藍子洲] (다산시문집 제2권)
맑은 골짝 강물에 배 저어 오니 移舟汎淸壑
좋은 누대 그 모양 처량도 하다 惆悵好亭臺
환하게 핀 꽃가지 숨어 있다면 故故花枝隱
하늘하늘 버들 언덕 감돌았구나 輕輕柳岸廻
물가의 고을이라 송별이 많고 水鄕多送別
인간의 세상이라 설움도 많다 人世足悲哀
지난 옛날 어머님 사시던 문 밖 舊倚門閭外
지금 이 몸 쓸쓸히 오락가락해 於今自去來
[약간 줌인한 사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만 사진의 한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약간 줌인해 봅니다.
<정약용선생>도 올라 산행기를 남긴 <용문산 백운봉>이 <한국의 마테호른> 답게 솟아 있습니다.
선생은 등산을 무척 좋아한 메니아였죠. 전국 각지의 산행기가 남아 있습니다.
['족자섬' 안내문]
['겸재 정선 선생'의 '독백탄']
<족자섬> 주변에 대한 진경산수화를 <겸재 정선 선생>이 남겼습니다.
제목은 "독백탄 獨柏灘"으로 <보물 제1950호>로 지정된 그림입니다.
<겸재 선생>이 그린 그림으로는 <한강> 최상류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모두 <양천현감>일 때 그렸죠.
<독백탄>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족자섬> 옆으로 급하게 흐르는 여울을 일컷는 답니다.
그리고 우측 제일 높은 산이 <운길산>이며 <수종사>도 그려놨습니다.
가운데 마을이 '새들도 편안하게 쉬어 간다'는 <조안리>이며
강 가운데 섬이 <족자섬>이랍니다.
이 그림을 그린 위치는 이곳이 아니고 다음 사진을 보면서 추측해 보면....
['2005년 5월 24일 천마지맥을 하며 '예빈산(직녀봉)'에서 찍은 사진]
<족자섬>의 위치와 모양이 알기 쉽게 보이죠? ㅎ
윗 그림 <독백탄>은 <족자섬> 뒤에 있는 <앵자지맥의 끝-정암산>이 있는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에서
이쪽을 보고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야 <운길산>과 <수종사>의 각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운길산' 조망] 2:18
쉼터에서 <족자섬>을 조망하고 다시 길을 나서니 <운길산>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운길산 雲吉山 610m"은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는 구름이 많아 구름도 쉬어 가는 吉地"라고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
이 지역의 지명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많다고 여러번 언급한바 있습니다.
[자전거도로]
['신양수대교'로 가는 6번국도] 2:24
['조안1리 사거리] 2:32
쉼터에서 15분여 진행하면 <조안면 면사무소>가 있는 <조안1리 사거리>를 지나고
['양수대교' 조망] 2:38
<양수대교>가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조안2리' 입구] 2:45
['예봉산' 조망]
이어서 <조안2리> 입구를 지나며 <조안2리>와 <예빈산> <예봉산>을 조망하고
['청계산' 조망] 2:49
<양수대교> 뒤로 <한강기맥>이 지나는 <청계산>과 <평해길4코스>와 <양평물소리길1코스>가 지나는
<부용산>이 조망되는군요.
['운길산' 조망]
['다산'의 정원이었던 '수종사' 조망]
<운길산역>에 다가가면 <운길산>과 <수종사>가 아주 가까이 보입니다.
<수종사>는 <정약용선생>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 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즐겨 찾아 그림과 시 등을 남긴 곳이기도 하지요.
<정약용선생>은 <수종사기>를 지어 <수종사>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는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운길산역'] 3:07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 도착하며 <평해길 제3길 정약용길>과 <남양주 다산길>을 함께 마침니다.
['다산길']
['제3길 정약용길' 안내도]
안내도에는 12.9km라고 하지만 저는 지그재그로 둘러 보며 걸어 13.6km를 걸었고
4시간 15분 정도가 걸렸군요.
<다산 정약용선생>의 발자취를 살펴 보며, <겸재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화 속으로 여행하여
뜻 깊은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 걷는 것과 사는 것 | 걷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한 팔이 앞으로 가면 다른 팔은 뒤로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면 다른 발은 뒤에 남는다
두 팔의 어긋남과 두 발의 어긋남의 연속이 걷는 모습이다
그래, 어긋남의 반복이 삶이었구나
흔들리면서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구나
- <걸으면서 눈치 챈 것> 신광철 지음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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