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충무공의 눈물과 효심』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답사기 해암2리-게바위-곡교천제방-강청교-중방배수장-중방리 골중뱅이- 염치-석두교-방수사거리-신일아파트-충무교육원-현충사 ['이순신백의종군길'과 '아산구간1']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 행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진행 할 코스는 지도에 표기한 바와 같이 "게바위"에서 "아산 현충사"까지로서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모시러 나간 길인데 불행이도 어머니가 "여수"에서 선편으로 오는 도중 "태안 해안" 근처 선상에서 돌아 가셔서 결과적으로 "게바위"에서 "현충사"로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오간 길이 되겠습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이라는게 특별히 지정되 있는건 아니지만 편의상 구간을 호칭하는데 저는 이 구간을 "충무공의 눈물과 효심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게바위"에서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까지 "18km"를 갑니다. ['온양온천역 1번 출입구'] 2019년 3월 122일 (금) 대체로 맑음 [분당선]을 타고 [수원역]에서 8:10발 "신창행 급행"을 타고 9:17에 [온양온천역]에 내려야 했는데 전동차가 조금 지연되어 9:25분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 9:28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에서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로 가는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습니다. [620번]은 8:30 11:30 14:30...에 있고 [621번]은 9:30 12:30 15:30.... [622번]은 7:20 10:30 16:30...에 있습니다. 저는 "9시 30분"발 [621번]을 타고 약34분이 걸려 [해암2리]로 갔습니다. ['해암2리] 10:04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해암2리] 버스정류장에 내려 뒤돌아 서면 '편의점'이 있고 그 앞에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이 보입니다. 여기서 다음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해암2리'에서 '강청교'까지 상세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게바위]라고 표기한 곳이 예전엔 선착장이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 시신]이 도착한 선착장으로서 [해암리]에서 사흘간 상여를 만들고 입관식을 하여 다시 선박편으로 [곡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중방리]까지 옮기는 상세 지도이며 파란색 선은 제가 직접 걸은 루트입니다. ['게바위' 입구] 10:07 [게바위]로 가는 길은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합니다. 삼거리에는 [해암2리 안내석]이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게바위' 가는 길] [해암2리 안내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게바위]로 가는 진행방향입니다. 길 중간에 [해암리건강증진센타]가 있고... [삼거리] 10:09 [해암리건강증진센타]를 지나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 리본]이 좌측길이라고 안내 합니다. ['게바위' 쉼터] 10:10~10:14 이어서 바로 "게바위"가 있는 쉼터를 만납니다. 옛날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이곳이 선착장이었답니다. 지금은 바닷물 수위도 현저히 낮아졌는데다가 [삽교천 방조제]로 간척지가 되어 이곳으로 배가 들락날락했다는게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여하튼 [이순신장군 어머니 시신]이 선편으로 도착한 선착장이었다니 그 의미를 느낄수 있습니다. ['백의종군로 아산구간' 안내문] [안내문]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길]에 [아산]에서 1597년 4월5일부터 4월19일까지 보름간 머물렀는데 이곳 [해암리]에서 4월13일 오후부터 4월16일 오전까지 3박4일간 어머니 상여와 관을 마련하며 운구 준비를 하였답니다. ['게바위'] ['게바위' 유래] "게"는 한자로 "해 蟹"라고 하죠. "게바위"를 한자로 쓰면 "해암 蟹巖"이 되니 이 동네의 이름이 "해암리"가 된것인데 일제시대 지명 정리를 할때 어려운 한자 "蟹" 대신에 쉬운 "바다 海"를 쓰는 바람에 현재 이 동네의 이름은 "해암리 海巖里"가 되었답니다. [쉼터에서 '곡교천제방' 조망]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대규모 행군단을 모집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종주를 했답니다. 그 종주길을 이름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로 표기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순신백의종군길]이 아니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여하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을 기념하는 기념식수를 했군요. ['해암 제6 배수문'] [게바위]에서 이젠 간척지가 된 농로길을 따라 [곡교천 둑]으로 나가면 [해암 제6 배수문]을 만납니다. [뒤돌아 본 '게바위'] 10:17 [곡교천 제방]에서 뒤돌아 보면 [해암2리]와 [게바위]가 보이며 그 옛날 장군의 모습이 어렴푸시 떠 오릅니다. ['아산만' 방향 조망] [곡교천]의 하구 방향인 서쪽으로는 [아산시 인주면]이 보입니다. 현재 [서울]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복선 전철이 건설 중에 있어 조만간 이곳으로도 전철을 타고 왕래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삽교천 방조제] 건설로 바닷물을 볼수 없어서 선박이 왕래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도고산' 조망] 남쪽으로는 [곡교천]을 건너 [신창면]과 [도고산]이 조금 조망됩니다. ['영인산' 조망] 북동쪽으로는 [영인지맥]의 대표산인 "영인산"이 조망되고... [영인지맥]의 마지막 산인 [입암산]도 보이는데 [입암산] 앞에는 [공세성당]과 [아산방조제]가 있죠. ['곡교천'과 '산양제'] [곡교천]의 제방을 따라 진행합니다. [곡교천]은 [천안]과 [아산]을 관통하는 큰 개천인데도 "江"이라는 이름은 얻지 못한 개천이지요. [이순신장군]이 어머니의 시신을 [게바위]에서 다시 작은 배로 옮겨 싣고 [중방포]로 갔다는데 우리는 뱃길로 갈수 없으니 제방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7년 음력 4월 5일에 [아산 본가-현충사]에 도착한 이후 본가에서 푹 쉬며 옥살이 고문 후유증을 추스렸답니다. 그리고 조상들을 배향하고 친인척들과 반가운 조우도 하며 회포를 풀고 있다가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초계 변씨)는 [이순신장군]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자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중에 [태안반도]근처 선상에서사망하였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三日癸酉。晴。早食後。往延事。出登海汀路。路入洪察訪家。暫話間。蔚送愛壽云。 時無船到消息。又聞黃天祥來到興伯家云。與洪告別。到興伯家。有頃。奴順花至自船中。 告天只訃。奔出擗踊。天日晦暗。卽奔去于蟹巖。則船已至矣。慟裂不可盡記。追錄 [1597년 4월 13일 계유(음력)] 맑음 일찍 아침식사후 어머니를 마중하러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어 놓고 하는 말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니 잠시후 종 '순화'가 배에서 급히 와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즉시 '해암'(아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영인산 산림박물관' 조망] "영인산 靈仁山 363.5m"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운구 할때도 바라 보았을 '영험한 산' [영인산]이 오늘도 그 날의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듯... [영인지맥]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쓴 산행기를 참고하시고 ['강청교' 조망] [해암리]의 [곡교천 제방]의 이름은 "산양제"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게바위]에서 40여분 이 제방길을 걸으면 [강청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624번지방도'] 11:00 이어서 버스를 타고 [해암리]로 갔던 [624번지방도]를 다시 만나는데 안전을 위해 우측 개천갓길로 진행합니다. ['강청교'] 11:06 이어서 "강청교" 밑을 통과 합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둘쨋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四日甲戌。晴。洪察訪,李別坐入哭治棺。棺則在營備來。少無欠處云 1597년 4월 14일 갑술 (음력) 맑음.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하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차근차근 장례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강청교'에서 '염치'까지 상세 지도] [강청교]에서 장군의 어머니를 선박으로 운구했다는 [중방리 골중뱅이]를 통과하여 "염치읍내"까지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중방포]까지 선박으로 운구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중방포]가 어디 였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대략 [중방배수지]에서 [중방리 골중뱅이] 근처가 아닐지 추정합니다. [곡교천]이 제방으로 지형이 많이 바꿨다는 것을 알수 있습죠. [체육공원] [강청교]를 지나면 우측 고수부지엔 체육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영인산' 조망] 이젠 [영인산]이 뒤에 보입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셋째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五日乙亥。晴。晩入棺。吳從壽盡心護喪。粉骨難忘。 天安倅入來治行。全慶福氏連日盡心製服等事。哀感何言 1597년 4월 15일 을해 (음력) 맑음.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선장-염치간 도로공사'] 11:16 [염치]에서 [삽교천]을 건너 [당진]으로 가는 [염치-선장간 도로] 건설 현장을 지나면 ['곡교천'과 '염성제' 제방] "염성제"라고 하는 [삽교천 제방]이 이어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면... ['중방배수장'] 11:29 [삽교천 제방] 이름인 "염성제"라는 안내석이 있는 곳을 만나는데 앞에는 "중방배수장"이 있습니다. 이곳이 [이순신장군 어머니]를 [게바위]에서 선박으로 운구한 포구로 추정됩니다. 간척사업으로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틀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했습니다. ['중방배수장'] "중방배수장" 좌측에는 농수로가 "중방리 골중뱅이"로 이어지고 있어 그 옛날의 뱃길이 아니었나 추정해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진의 가운데 다리 공사중에 있는 "골중뱅이"로 갑니다. ['중방배수장'에서 '골중뱅이' 가는 길] [중방배수장]을 지나면 "중방리 골중뱅이"가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옛날엔 앞에 펼쳐진 논들이 [곡교천]이었을거라 여겨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여 [골중뱅이]로 가면... ['중방리 골중뱅이'] 11:46 [이순신장군 어머니]와 관련된 안내나 유적은 찾을수 없고 빈집들이 즐비한데 오로지 버스정류장 이름만이 "중방리 골중뱅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여기서부터 어머니의 상여를 육로를 이용해서 본가로 옮겼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六日丙子。陰雨。曳船移泊中方浦。靈柩上轝。行還本家。望里慟裂。如何可言。 至家成殯。雨勢大作。南行亦迫。呼哭呼哭。只待速死而已。天安倅還歸。 1597년 4월 16일 병자 (음력). 궂은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문상을 마치고 돌아갔다. 명제상 "율곡 이이"는 [경세유표 제15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신장군]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624번 지방도'] [중방리 골중뱅이]부터는 [624번지방도]를 따라 진행합니다. [이순신장군]도 어머니의 상여를 메고 이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 갔으리... 보행자 보도가 있어 자동차의 위험을 많이 줄일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방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중방리 마을회관'] 11:58 이어서 "3.1운동 시위현장"이었다고 알리고 있는 "중방리마을회관" 앞을 지나 갑니다. ['염치교차로'] 12:06 [중방리마을회관]에서 8분여 진행하면 "염치교차로"를 통과하는데 [39번국도]가 [평택.아산방조제]에서 [아산]으로 연결되는 도로였습니다. ['염치사거리'] 12:09 이어서 "염치사거리"를 만나는데 우회전하면 ['염치' 중심가] 12:09~12:18 "염치읍 鹽峙邑 중심지"를 통과하는데 ... 정육점식당이 여럿 있더군요.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염치'에서 '송곡초'까지 상세 지도] [염치읍내]에서 [송곡초등학교]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 하고.... ['염치면사무소' 가는 길] 12:19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염치읍내]의 이곳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구도로를 따라 [읍사무소] 방향으로 가야 하더군요. ['염치읍사무소'] 12:23 [염치읍사무소] 앞을 지나면... ['염티초등학교' 앞] ['염티초등학교'] 12:25 "염티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갑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은 [염치]인데 초등학교 이름만 [염티]여서 조금 의아스러웠습니다. [치 峙]의 순우리말이 [티]임으로 의미에는 변화가 없지만... [염치 鹽峙]는 한자로 되 있지만 [염티 鹽티]는 한자 '鹽'과 순우리말 '티'를 합친 것이니 좀 이상하죠? "족발 足발" "역전앞"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ㅎ 순우리말로 하려면 [염 鹽]도 "소금"이라고 표현하여 "소금티"라고 해야 할텐데... 그래서 "소금티초등학교"로 하는게 우리 말에 더 적합할듯합니다. ㅎ 제 생각엔 아마도 [염치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이 '염치없다'고 느껴질수 있으니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게 아닌지...그래서 [염치]보다는 [염티]가 낫다고 한듯...ㅎㅎ 물론 저의 추정입니다. ㅎ ['염치로'] ['LG전자 아산물류센타'] 12:31 보행자 보도가 잘 설치되 있는 [염치읍내]를 통과하면... ['석두교'] 12:40 "석두교"를 만납니다. 우측에 건설되고 있는 도로는 [천안]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더군요. [위험구간] 이나저나 [석두교]부터 [방수사거리]까지는 보행자 보도가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석두교]에서 5분 정도 자동차의 위험과 싸우며 진행하면... ['석두1리' 입구] 12:45 [석두1리 안내석]과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한남아파트' 조망] 잠시후 가야할 [한남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문사]라는 절간의 뒷산인 [금병산]도 조망되는군요. 6분 정도 더 진행하면.... ['석정1리'] 12:51 [석정1리] 앞 쉼터와 버스정류장을 통과합니다. 갓길이 없는 도로를 10여분 더 진행하면... ['방수사거리'] 1:00 "방수사거리"를 만나 직진합니다. 이 사거리는 좌측 [음봉]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아산]으로 가는 [45번국도]였습니다. ['방수사거리'의 '음봉-둔포-평택' 방향] [45번국도] "음봉" 방향을 바라보고 ['한남아파트' 방향] [방수사거리]를 직진하여 [한남아파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 1:04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를 지나 10여분 진행하면... ['한남아파트'] 1:14 [한남아파트] 정문 앞을 통과하고 ['여호와의 증인' '아산서광교회'] [한남아파트] 정문 옆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아산서광교회]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붙어 있어도 괜찮을려나....괜한 걱정...ㅎ ['보문사'] 1:20 이어서 [보문사]라는 절간이 또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神을 믿는 종교들이 붙어 있는데...神들끼리 싸움은 안하겠죠? ㅎ 神은 없으니 神은 없다고 서로 알려주는듯 합니다. 神이 없어야 설명이 되니까요 ~~ㅎ ['신일아파트' 조망] [보문사]를 지나면 [신일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신일아파트]만 돌아 가면 [현충사]입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송곡초등학교' 입구] 1:32 [송곡초등학교] 정문 앞을 통과하고 ['송곡초등학교' 입구에서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 [송곡초등학교]부터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하고 ['신일아파트'] 1:35 이어서 [신일아파트] 앞을 지나 갑니다. [등산로 입구] 1:39 [물한산성] [꾀꼬리성]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라고 알리는 곳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가면... ['충무교육원'] 1:49 "충무교육원"을 만나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충무공을 비롯한 성현들의 충·효 정신을 이어 받게 하고 공동생활을 통해 도덕성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인격체로 기르기 위하여 충청남도교육청 산하에 설치된 소속기관이라고 합니다. ['현충사' 경내 진입구] 1:50 [충무교육원]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이 있더군요. 알아 보기 쉽죠? ㅎ ['현충사 샛문'] 1:52 [충무교육원]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입니다. 이 문을 모르면 엄청 돌아야 할듯... ['노느매기식당'] 경내 공원이 무척 넓은데 [현충사 정문] 옆에 [노느매기]라는 식당이 있더군요. "노느매기"는 사전에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현충사' 정문] 2:02~3:00 [현충사]는 입장료가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엔 휴관한답니다. 무지 오랜만에 [현충사]를 찾았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경주나 공주의 왕릉 같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먼저 둘러 봅니다. 기념관에는 [국보 제76호]로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난중일기]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장군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언급하기엔 지면이 많이 필요해 중요한것만 언급합니다. ['조선의 화포'] ['거북선' 모형]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육지에선 승승장구 할수 있었으나 바다에선 출렁대는 파도 위에서 조총을 조준 사격 할수가 없어서 무용지물이 될 정도였으며 사정거리도 20m~50m여서 "화포"로 뻥뻥 쏘아대는 조선 수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주력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나 關船(관선: 세키부네)는 크기가 조선의 "판옥선"보다 작았고 군선의 속도나 방향전환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했답니다.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답니다.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군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해도 깨져 침몰해버렸으니 군선과 화포에서 일본군을 압도해서 연전연승을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순신장군'의 전략도 한몫 더하고... ['이순신 장검'] [이순신장군의 장검] 입니다. 장검에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이 검은 검 길이가 1,970mm, 19,68mm 이고, 무게는 4,320kg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싸움에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마을을 가다듬으려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이 검은 장군이 1594년 4월 한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장인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어 바친 칼이랍니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 작가 [김훈]은 이 칼을 보고 이렇게 서문을 장식합니다. 칼의 노래 이순신 -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충무문'] 한글로 쓰여진 "충무문"을 통과하는데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현충사'로 가는 중앙로] [충무문]을 통과하면 중앙 통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우측에는 "정려"가 있고, 좌측에는 "구 현충사"가 있습니다. 먼저 우측 "정려"로 가면... ['정려각'] [안내문]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음봉" [이순신장군의 묘] 입구에 있는 [이순신 신도비] 옆에 있었던 "이봉상 신도비"를 기억하시나요? 여기서 "이봉상"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알수 있습니다. [숙종-경종-영조] 시대에 무장으로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순신장군]의 5대 손이라는군요. ['숙종' 건립 '현충사'] [안내문] "구 현충사 舊顯忠祠" 오리지날 "현충사"를 "구 현충사"로 표기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에 아무리 크게 철근 콩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다해도 원래 "현충사"는 "원래 "현충사"가 아닐까요? 새로 지은 "현충사"를 "新 현충사"라고 표기하고, 원래 현충사는 그대로 "현충사"라고 하는게 어떨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군사정권의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밀려나서 왼쪽편에 외로이 서 있는데 그래도 [숙종]이 직접 사액한 현판이 걸려있어 오리지날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반송] "반송 盤松" 일반적으로 소나무는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지만 "반송"은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죠. [현충사] 사당 입구에 있습니다. [중앙통로] ['홍살문'] 중앙 통로를 올라 가면 [홍살문]을 지나고 ['충의문'] ['현충사'] [충의문]을 통과하면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新 현충사"에 도착합니다. 누가 쓴 현판인지 금방 알수 있죠? ㅎ ['이순신장군 영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바라보며 참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칼의 노래> 첫 문장이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러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현충사'에서 조망] [현충사]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끝까지 치르지도 못하고 쪽바리들과의 전쟁을 하러 슬픔을 뒤로하고 떠났습니다. [배방산]과 [설화산] 사잇길로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며 南으로 南으로 향했습니다. <칼의 노래>에서 다시 인용합니다. 권률은 의병장 김덕령의 혐의를 수사하지 않은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또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임금에게 의병은 뒤숭숭한 무리였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싸우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고택'과 '활터'] 사당 옆에는 [이순신장군]이 '서울 건천동'에서 이사 와 살았던 고택과 무술을 연마한 활터도 있습니다. ['충의정'] [안내문] 고택 입구에는 "충무정 忠武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순신장군]도 이 물을 마셨고 그 후손들도 1960년대까지 이 물을 마시며 살았답니다. 그래서 저도 한바가지 마시고 [고택] [고택] [안내문] [이순신장군]의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있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참고로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무척 부유한 집안이어서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었답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이곳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상주 방씨'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장군은 신혼살림을 시작한것이죠.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며 다리가 부러져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매화'와 홍매화'] 고택 앞마당에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특히 "홍매화"가 눈길을 끕니다. 사진작가들에게 인기있는 홍매화라고 하는데 많은 사진작가들이 절정기 꽃망을 터트리고 있는 홍매화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홍매화'] 그래서 똑딱이 카매라로 '파란문'도 "홍매화"를 촬영했는데... "홍매화"의 감흥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나요? ㅎㅎ ['활터'] [안내문] [이순신장군]이 활쏘기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500년이 넘는 수령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굽어 보고 있는듯... ['고택' 조망] [활터]에서 고택을 조망합니다. 다시 [이순신백의종군길]에 대해 언급합니다. 1597년 4월 16일에 [이순신장군]이 [게바위]에서 [중방포]를 거쳐 어머니 상여를 운구하여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러려는데 다음날 '금부도사 서리'인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빨리 전쟁터로 가자고 다그쳤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七日丁丑。晴。金吾書吏李壽永。自公州到來。促行。 1597년 4월 17일 정축. 맑음.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가자고 다그쳤다 ['궁술연마장'] [활터] 우측엔 일반이들이 활을 쏠수 있는 활궁장이 있고... [석교] [연못] 연못을 지나 ['충무문']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을 나서면 [주차장] 3:00 주차장과 공원이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명언인 "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뒤로 [현충사]의 진산인 "방화산 芳花山"이 [현충사]의 병풍이 되어 포근히 감싸고 있습니다. [아산1구간 지도] [거리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18.8km" 였으며, 전체적으로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칼의 노래>의 한 문장을 음미하며 답사를 마침니다. 명랑에서는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 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러 쳐밖힌 것이었다. 명랑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死地)였다. 수 만년을 거꾸러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 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의 존망의 흐름을 거꾸러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728x90

『고난과 죽음을 넘어』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 답사기 평택역-군문교-팽성읍객사-송화사거리-석근리마을쉼터-능안사거리- 둔포119안전센타-아산테크노밸리-산전교차로-봉재저수지-어르목고개- 음봉면사무소-이순신장군묘소-음봉삼거리 ['이순신백의종군길']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남태령에서 평택까지 난중일기] [이순신장군]은 4월1일 [의금부] 옥문을 나서서 이틀간 한양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머물며 여러 대신들과 친인척들을 만나며 지친 몸을 추수러며 쉬다가 4월3일 '수원'으로 말을 타고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4월3일의 일기를 보면...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 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 계해 4월 3일 (양력 1597년 5월 18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로 갔다. 나는 인덕원(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수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장군은 자신의 집이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로 출발하는데 그 날의 일기를 보면... 初四日甲子。晴。早發登程。到禿城下。則半刺趙撥。備酒設幕吾山黃天祥家以待。 由振威到。黃以卜重。出馬載送。爲謝不已。由水灘。投平澤縣李內隱孫家。則待之甚慇 갑자, 4월 4일 (양력 1597년 5월 19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 "독성"(현재 오산시 독산성)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 '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손(李內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장군이 가는 곳마다 장군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대접이 어떠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이라는게 특별히 지정되 있는건 아니지만 편의상 구간을 호칭하는데 저는 [남태령]에서 [수원]을 거쳐 [평택역]까지는 "경기옛길 삼남길"과 대부분 겹쳐서 생략하고 [평택역]에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음봉]까지 약25km를 가려고 합니다. ['평택역' 2번출입구 전경'] 2019년 3월 14일 (목) 대체로 맑은 후 흐림 이리저리 산에 다니다 보니 [평택역]을 자주 이용하게 되는군요. [금북정맥] [쌍령지맥] [영인지맥] [평택섶길]등을 다니느라고 [평택역]을 많이 이용했는데 이번엔 [이순신백의종군길] 때문에 다시 오게 되는군요. 그리고 항상 [평택역1번출입구]만 이용했는데, 처음으로 [평택역2번출구]로 나갑니다. ['평택역2번출구'] 8:55 [평택역2번출구]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 가면 정면으로 길이 쭉~ 뻗어 있는게 보입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우측 [경부선 지하도]를 통과하여 앞에 보이는 직진 도로로 연결됩니다. 오리지날 [백의종군길]에 합류하여 5분여 직진하면... ['주민교회' 앞] 9:00 좌측엔 [주민교회]가 있고 우측엔 [평택초등학교]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좌회전하여 다시 5분여 더 진행하면... ['군문교 삼거리'] ['군문교'] 9:07 [군문교삼거리]와 "군문교"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 [아산방향]으로 직진합니다. ['안성천'] 오랜만에 "안성천"에 시선을 주고, [아산방향]으로 5분 정도 직진하면... ['신궁교차로'] 9:13 "신궁교차로"를 만납니다. [45번국도]와 [38번국도]가 교차하는 곳으로, "新宮里"랍니다. 여기선 직진해야 하는데 보행자 도로가 없으니 주의해서 교차로를 통과해야 하더군요. 7분 정도 직진하면... ['평궁사거리'] 9:20 "평궁사거리"를 만나는데 [평궁리입구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平宮 사거리"를 잠시 직진하면... [삼거리] 9:22 갈림길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 [팽성읍사무소.객사리]방향으로 들어 갑니다. "팽성읍"의 중심시가지로 들어 가는 것이더군요. ['팽성읍내' 가는 길] [팽성]과 [평택]을 연결하던 구도로인데 차량들은 신도로로 대부분 다니지만 시내버스등 꽤 많은 차량들이 아직도 이 도로를 이용하고 있는데,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위험하니 조심해야겠고... 10여분 직진하면... [삼거리] 9:32 [팽성미곡처리장삼거리]를 만나는데 앞에 보이는 [KTX 고가철도]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KTX 고가철도'] 9:36 [KTX 고가철도]를 통과하여 좌측으로 4분여 진행하면... ['칠칠주유소' 삼거리] 9:40 "칠칠주유소 삼거리"를 만나는데, 길죽한 회전교차로더군요. 주유소 뒷쪽에 [자비사]라는 절간이 있는데 ['자비사'] '西湖寶宮伽藍'이라는 "자비사"가 있고... ['칠칠주유소' 앞 삼거리] "자비사"를 지나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조금 진행합니다. 5분 정도 가면... [삼거리] 9:45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길조심을 해야 합니다. [팽성읍객사]는 우측에 있는데, 객사를 다녀나와 좌측 [빽다방] 옆길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빽다방]이라는 다방 이름이 괜히 미소 짓게하는군요. ㅎ ['팽성읍객사' 입구] 9:46~9:50 [팽성읍객사] 입구 입니다. ['팽성읍객사'] [안내문] "팽성읍객사 彭城邑客舍" [평택]의 중심지는 조선시대까지 이곳 "팽성 彭城""진위 振威"였는데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할때엔 이곳 "팽성"이 행정 관아와 客舍가 있는 "평택현 平澤縣"의 중심이었답니다. [客舍]는 임금에게 '망궐례'를 하는 곳인데, 관찰사등 고위 관리들이 머물며 교지를 내리는 곳이기도해서 관아보다 더 권위있는 곳이었답니다. ['팽성읍객사'] [객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가 볼수는 없어서 담장 밖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이순신장군]이 4월4일 '수원'을 출발하여 자택이 있는 '아산 백암리'로 갈때 하룻밤 묵고 간 곳이 이 "팽성읍객사 근처 이내손의 집"이었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한번더 보면... 初四日甲子。晴。早發登程。到禿城下。則半刺趙撥。備酒設幕吾山黃天祥家以待。 由振威到。黃以卜重。出馬載送。爲謝不已。由水灘。投平澤縣李內隱孫家。則待之甚慇 갑자, 4월 4일 (양력 1597년 5월 19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 "독성"(현재 오산시 독산성)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 '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손(李內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수탄'은 현재의 '송탄 서정리' 쯤으로 여겨 집니다. 4월4일 하룻밤을 평택에서 보내고 4월5일에 '아산'으로 출발합니다. 4월5일의 일기를 보면... 初五日乙丑。晴。日出登途。直到墳山拜哭。因到蕾家拜先廟。聞南陽叔永世 을축 4월 5일 (양력 1597년 5월 20일) 맑음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에 이르러 배향하며 곡하고 나서,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배향하고 나왔는데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담중학교 사거리'] 9:52 [팽성객사]를 지나면 [청담중학교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엔 [청담중학교]가 있고 우측에는... ['팽성읍사무소'] [팽성읍사무소]와 [팽성농협]이 있습니다. ['팽성읍119안전센타'] 9:58 [청담중학교사거리]에서 5분여 진행하면 "팽성읍119안전센타"를 지나고 ['예비군훈련장사거리'] 10:02 이어서 [팽성예비군훈련장사거리]를 직진으로 통과합니다. 5분 정도 직진하면.... ['평택섶길' 지나는 곳] 10:07 앗! "평택섶길-대추리길"이 지나는 낯익은 곳을 만납니다. 햐 ~ 지나해 3월6일에 다녀 간바 있습니다. 좌측에 [용화사 입구 버스정류장]이 있고 우측으로 진행해서 미군 [K-6] 기지로 가는 길이었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그때는 우측 반사경 앞에 [섶길 안내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더군요. 그때의 사진을 보여 드리면... ['송화교차로'] 10:15 이어서 [송화교차로]를 만나는데 우측에 [팽성초등학교]가 보이고... ['송화2리' 입구] 10:19 [송화2리(신당골)] 입구 안내석을 지나면... ['송화사거리'] ['송화사거리 육교'] 10:23 "송화사거리"를 만나는데 직진하여 [석근리]로 가야 하는데 [45번국도]에 횡단보도도 없고, 교통량이 많아 육교를 건너 가야 하더군요. ['송화사거리 욱교'에서 조망] 육교 위에서 지나온 길과 [팽성읍]을 조망합니다. ['남산3리'] 10:28 [송화사거리]를 육교를 이용해 직진 통과하면 [남산3리] 표지석을 만납니다. 표지석 안내판에는 "옛적에 고을 관청 남쪽산에 있는 마을이라고 남산리"라 한다고 안내합니다. 좌측길로 4분여 진행하면... ['석근1리'입구 사거리] 10:32 [석근1리(흙다리)입구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석근리]로 가야 합니다. [석근리]는 "동네 앞에 흙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흙다리"라고도 한답니다. 후에 흙다리는 돌다리로 바뀌고... 우측으로 직진하기 쉬우니 조심해야겠고... ['능안삼거리' 가는 길] [석근1리입구]에서 7분여 왕복2차선 도로를 진행합니다.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자동차들이 저를 보고 중앙선을 넘어 비켜 가야 할 정도... ['석근리마을쉼터'] 10:39~10:49 "석근리마을쉼터"를 만나는데 여기서 10여분 쉬었다 갑니다. 이 쉼터에는 "장준. 장현근 효자 정문"이 있는데 매우 효자였답니다. "장준"은 자기 아버지가 독사에 물리자 독사를 찾아 죽이고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 내고 독사의 쓸개를 내어 환부에 발라 치유시켰다네요. ㅎ "장현근"은 "장준"의 아들인데 또한 효자였다는군요. ['능안삼거리'] 10:53 [석근리마을쉼터]에서 4분여 진행하면 "능안삼거리"를 만납니다. 앞에는 [34번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평택시 팽성읍'과 '아산시 둔포면'의 경계였습니다. 이제부터 '평택시'를 벗어나 "이순신장군의 자택"이 있는 '아산시'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안내석이 길안내를 시작합니다. 서울서 여기까지는 표지기가 가끔 길안내를 했을 뿐인데... ['둔포중심지' 가는 길] [34번국도]와 나란히 왕복2차선 도로를 따라 "둔포"로 갑니다.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걷기가 매우 불안합니다. 13분 정도 제법 먼 거리를 진행하면.... ['운용교차로;] 11:06 [운용교차로]를 만나고 "아산시 둔포" 속으로 들어 갑니다. 이 도로의 우측 지역은 아직도 "평택시 팽성읍"입니다. ['둔포119안전센타' 앞 삼거리] 11:11 길찾기에 중요한 지점인 "둔포119안전센타" 앞에 도착하는데 앞에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방향을 바꿔 골목을 조금 들어 가면... ['둔포순복음교회'] 11:13 [둔포순복음교회]를 지나갑니다. "둔포"에도 다양한 종교시설이 엄청 많으며 규모도 모두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크더군요. '빈익빈 부익부'라고 규모에서 밀리면 죽는걸로 인식하고 건물 규모를 널리는데 온 힘을 쏟는듯... ['아산전자기계고등학교'] 11:16 이어서 [아산전자기계고등학교] 앞을 지나 갑니다. 본명은 [둔포고등학교]였다는군요. ['둔포성당'] 11:17 계속해서 [둔포 성당]을 지나면... ['둔포중학교'] 11:23 [둔포중학교]를 만납니다. ['아산테크노밸리' 가는 길] 앞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랍니다. 아파트 방향으로 직진 진행하면... ['아산테크노밸리' 조망] 11:28 아파트 단지 근처에 도착하면 지나온 길이 조망되는데... 좌측을 바라보면... ['쌍령지맥' 조망] "평택시내"와 "평택시내"를 감싸고 있는 [쌍령지맥]을 이루는 "부락산"과 "덕암산"이 조망됩니다. [쌍령지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제가 쓴 [쌍령지맥 산행기]를 참고 하시고... ['둔포육교'] 11:31 [34번국도]와 [45번국도]가 지나는 "둔포육교"를 건너 직진합니다. ['34번''45번' 국도] 엄청 좋아진 도로들.... ['아산테크노밸리']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로 들어 갑니다. 이런 곳에 이런 대규모 신도시같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줄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중앙공원5교차로'] ['염작초교' 조망] 11:37 조금 올라 가면 "중앙공원5교차로"를 만나는데 좌측에는 "염작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방향을 우측으로 바꾸면.... [고개] 고개를 하나 넘어 갑니다. [중앙공원 삼거리] 11:42 그러면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둔포' 방향] 이 길은 [둔포교차로]를 지나 [삽교방조제]를 건너 [당진]으로 가는 길입니다. 50m정도 올라 가면... ['UN빌리지'] 11:46 좌측에 [UN빌리지}라고 하는 주택단지가 있습니다. 사진 속 앞에 보이는 첫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야 했나 본데 직진해서 두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갔습니다. ['UN빌리지' 통과] 두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UN빌리지] 주택들이 이렇게 줄을 서 있습니다. 이 길의 끝까지 직진해 가면... [길없음] 11:52 길이 끊겨 없어 집니다. 다행히 건너편에 표지기가 보입니다. 길없는 밭을 지나 건너 가면... [표지기] 11:53 조그만 농로 사거리를 만나는데 표지기가 있습니다. 오리지날 길은 아마도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어져 있나 봅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나 약간의 알바는 했습니다. 여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지나 온 길]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에서 오는 길이 어느 정도 그려지는군요. ['운교리' 가는 길] 직선으로 뻗은 [운교리] 농로를 통과하면....[영인지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저 산줄기를 넘어 가야만 [음봉]으로 갈수 있으며, [이순신장군묘소]로도 갈수 있습니다. ['운교2리' 입구] 12:00 [운교2리 입구 안내석]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정자 쉼터] 12:02 이어서 2층 정자 쉼터에 도착하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 안내석이 있습니다. 12분여 농로를 더 진행하면.... ['운교1교' 앞] 12:14 [운교1교]가 보이는데 [운교1교]를 건너 가야 합니다. ['운교1교' 통과] 12:15 [운교1교]를 건너 농로를 직진해서 앞에 보이는 마을까지 8분 정도 직진하면... ['원골농원' 앞 삼거리] 12:23 [원골농원]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진행하고 ['핀튜브코리아'] 폐업 한듯한 [핀튜코리아]라는 공장을 지나면... ['산전리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 12:35 버스정류장이 있는 도로를 만나는데 [산전리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이었습니다. ['산전리마을회관'] [산전리마을회관] 앞에도 [백의종군길 안내석]이 있고... ['관대초등학교' 조망] 이어서 [관대초등학교]가 조망되기 시작하며 8분여 진행하면... ['산전교차로'] ['번영식당'] 12:43~1:28 (45분간 점심식사) [산전교차로]를 만납니다. 이곳에 있는 [번영식당]이라는 곳에서 김치찌개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을 홀로 종주하는 아이디 [걷는 발]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분이 점심을 베풀어 주어서 잘 먹었습니다. 정년 퇴직을 했지만 나태해 질까봐 몸과 정신력을 배양하기 위해 [백의종군길]을 한번에 종주하기 위해 길을 나섯다고 하더군요. 또한 같은 고향 사람이더라고요. ㅎ [음봉]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봉재저수지' 가는 길] [45번국도]의 갓길을 따라 15분 정도 진행하면... ['봉재저수지 수문'] 1:43 ['봉재저수지'] 1:45 "봉재 鳳在 저수지"를 만나는데 낚시꾼들에게 인기 있다는군요. ['봉재2리' 가는 길] ['봉재2리' 입구] 1:57 계속해서 [45번국도]를 따라 12분여 더 진행하면 [봉재2리입구]를 지나고 ['구이가' 앞] 2:01 이어서 2층 초가집인 '구이가'라는 음식점을 지나는데 폐업했는지 인기척이 없고 ['아산시 음봉면' 경계] 2:04 [음봉면]이 시작된다는 안내판이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그러니가 [음봉면 신정리]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원남리 교차로'] 이어서 [음봉면 원남리]로 이어지고 ['원남리'] 2:18 ['원남리' 통과] 2:23 [원남리]를 통과하여 [45번 옛길]을 진행합니다. ['어르목고개' 오르는 길] ['어르목고개'] 2:33 [원남리]에서 10여분 고개를 오르면 "어르목고개"에 도착합니다. 이 고개는 "영인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고개로서 저는 두번째 찾게 되는군요. 다시는 못 올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 왔군요. 2013년 3월 30일에 지나 갔으며 관련 산행기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http://cafe.daum.net/paraanmoon/MeLu/2" 여기 클릭 ['음봉배수지'] [어르목고개]에는 [음봉배수지]가 있습니다. [내림길] [어르목고개]를 내려 가면.... [흑염소 음식점] 2:43 '흑염소 음식점"이 있는데 산속에 선박 모형의 흙염소 음식점이 특이 하군요. ['태산LCD' 앞] 2:46 [태산LCD공장]앞을 지나면 [백의종군 안내석]이 또 다시 길을 밝히고 ['음봉면삽=무소' 가는 길] [음봉면]의 중심지로 들어 갑니다. ['음봉삼거리'] 2:59 "음봉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엔 [음봉농협] [음봉면사무소] [음봉보건소]등 관공서가 있는 음봉의 종심지랍니다. [영인지맥]을 할때 왔었던 곳입니다. 잠시후 여기서 [500번 시내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가려 합니다. [이순신장군묘]는 앞에 보이는 [음봉면사무소] 안으로 들어 갑니다. ['음봉면사무소'] 3:03 [음봉면사무소] 안으로 들어 가서 좌측 길로 6분 정도 올라 가면... ['충무공 묘소' 입구] 3:09 [이충무공 묘소] 입구 사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엔 "충무공 신도비"가 있습니다. ['충무공 신도비'] 3:10 [충무공 신도비]는 비각 안에 있는데... 좌측에도 신도비가 하나 더 있어 혼돈 하기 쉽습니다만 좌측 신도비는 [이봉상]이라고 하는 분의 신도비인데 [이봉상선생]은 [이순신장군]의 후손이라고 합니다만 자세한 기록은 알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일대가 [난중일기]에도 언급한 [이순신장군]의 선산인듯 합니다. 신도비가 있는 입구에서 5분여 걸어 올라 가면... [주차장과 관리사무소] 3:16 묘소관리사무소와 주차장 화장실등 묘소 부대시설이 있습니다. [홍살문] 3:18 묘소로 올라 가면 홍살문을 지나고 ['충무공 묘소' 전경] 3:20 "이순신장군 묘소"를 만나게 됩니다. 우측에 보이는 전각에 [정조대왕]이 내린 "어제신도비"가 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부부' 합장묘] [이순신장군]의 부인인 [상주 방씨]와 함께 잠들고 있는 합장묘입니다. ['이순신장군 묘'] "이순신장군의 적"은 누구였을까...? 왕 본인이 국가라고 생각한 [선조]라고하는 쪼다리와 자기 나라의 병화를 모면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의 원병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으로 넘어온 왜군 모두가 충무공의 적이었다고 <칼의 노래>를 쓴 "김훈"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에 대해선 언급하고픈 말이 너무 많지만, 그 동안 여러 산행기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하고 <칼의 노래> 마지막 엔딩을 되씹으며 장군에 대한 참배를 마칩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 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충무공 신도비'] 3:43 [이순신장군 묘역]을 둘러 보고 어쩐지 허망한 슬픔을 안고 [충무공 신도비] 앞을 다시 나섭니다. ['음봉삼거리'] 3:50 바로 [음봉삼거리]로 돌아와 [500번 시내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가는데 미군 평택기지에서 건설공사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연락이 되어 [평택역]에서 한잔하고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와 [분당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25km"였으며 약7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첨부파일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gpx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gpx
0.12MB
728x90

『고난과 죽음을 넘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 이순신생가터(명보아트홀)-의금부터(종각역1번출구)-숭례문-서울역- 국립중앙박물관-동작대교-이수역-사당역-남태령역-남태령 ['이순신백의종군길']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은 '서울툭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이순신장군생가터"를 출발하여 [이순신장군]이 수감되었던 "의금부터"가 있는 '종로구 종각역앞' "제일은행 본점"으로 진행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대문"을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 "남태령"까지 "약20km"가 '서울구간'입니다. ['명보사거리'] 2019년 3월 9일 (토) 연무 대체로 맑음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 위해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명보사거리"로 갔습니다. [명보사거리]에는 "명보아트홀"이 있는데 예전엔 "명보극장"이라고 했으며 [이순신장군]이 탄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생가터'-'의금부터'-'남대문' 지도] [이순신생가터]에서 [의금부]가 있었던 [종각]으로 진행하여 [남대문], [서울역]으로 가는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중심구간"을 보여 주는 '네이버지도'입니다. ['명보아트홀' 앞] 10:25 "명보아트홀" 조선시대 이 지역은 "건천동 乾川洞"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였는데, 이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 내렸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대체로 '마른 개천'이어서 "乾川"이라 했답니다. 그래서 현재도 이 도로의 이름을 [마른내로]라고 지었답니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답니다. [단종] 때에 '김종서(金宗瑞:順天人)', '정인지(鄭麟趾:河東人)', '이계동(李季仝:平昌人)',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南原人)', '김수온(金守溫:永同人)', '이병정(李秉正:全義人)', [중종] 때 '유순정(柳順汀:晉州人'), '권민수(權敏手:安東人)', '유담년(柳聃年:文化人)', [명종] 때 '노수신(盧守愼:光州人)', '허엽(許曄:陽川人)', [선조] 때 '류성룡(柳成龍:豊山人)','허봉(許봉:陽川人)','이순신(李舜臣:德水人)','원균(元均:原州人)'이 모두 이곳에서 탄생하여 더욱 유명하답니다. 1545년 3월 8일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선생"과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장군"이 앞뒷집에 살았답니다. "유성룡선생"은 [이순신장군]보다 세살 위로서 [이순신장군]의 둘째 형인 [이요신]의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어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육군이었던 '이순신'을 6계급 특진을 시켜 [전라좌수사]로 '선조'에게 천거 하였다고 합니다. "원균장군"은 "이순신장군"보다 다섯살 위의 대고참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장군"이 요즘말로 ☆장군이 되어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 때에 "이순신"은 미관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었습니다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위상은 완전 바뀌었지요.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아버지 "德水 李씨 貞"과 어머니 "草溪 卞씨 守琳(수림)의 딸" 사이에서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1545년 3월 8일(음력)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데... [이순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는지에 대해선 확실치 않답니다.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현충사]"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서울 건천동'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8세, 13세, 16세, 18세까지 살았다는 설이 분분.. 그런데 사람 됨됨이를 확실히 알수 있을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청소년기까지는 함께 지내야 알수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류성룡선생'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6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에 그런 정황을 고려하면 16~18세까지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신뢰감을 줍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아산'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신영균' 설립자] [명보극장]의 설립자는 영화배우 "신영균씨"라고 아트홀 벽면에 동판을 부착해 놧습니다. 치과의사가 스타 영화배우가 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죠? 아흔이 넘었을텐데...어케 지네시나 [명보아트홀]에서 [종각]으로 갑니다. 먼저 [명보사거리]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울지로3가'] 10:29 [을지로3가 사거리]에 도착하며 ['을지로3가'에서 '2가' 방향] [을지로3가 사거리]에서 [을지로2가] 방향을 바라보고... 5분 정도 진행하면 ['을지로2가'] 10:35 [을지로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우측 [청계2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을지로2가'에서 '청계2가' 방향] 울창한 빌딩숲이 거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이라 한산한 거리를 잠시 진행하면... ['청계2가'] 10:39 [청계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좌측 [광교] 방향으로 건너 가면서... ['남산' 조망] [청계2가 사거리]에서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면 "남산"이 조망됩니다. ['청계천'] [청계천 淸溪川]을 구경하고 [청계2가]에서 [광교]로 올라 갑니다. ['광교'] 10:45 [광교 사거리]에 도착하여 우측 [종로1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종로1가'] [종로1가 사거리-종각사거리]를 만나며 ['보신각'] 10:47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보신각" 앞에 섭니다. ['제일은행 본점'] [보신각] 대각선 방향 건너편 [종각역1번출입구]가 있는 곳에 [제일은행 본점]이 있는데 저곳이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제가 학창시절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에는 [서울예식장]이 있었습니다. ['의금부터'] [안내문] "의금부 터 義禁府址" 오늘날 제도로 맞춰보면 "의금부"는 [대법원, 검찰청, 국가정보원]을 합친 최고의 사법기관 쯤이고, "포도청"은 [경찰청],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순신장군]에겐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던 [정유년]에 특이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지요. 하나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부하들이 부산 왜놈 진영에 불을 질러 공울 세웠는데 [이순신]이 그 공울 가로챗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 이중간첩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조]는 [이순신장군]에게 어명을 내려 그를 쳐 부수라고 했는데, [이순신장군]은 [加藤清正]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다시 절영도로 후퇴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덕도 왜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는데..(전사 1명. 포로 5명) 그 사이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는 부산진에 안착하게 되었으니 [이순신장군]은 어명을 어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진을 공략하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으로 뛰어 드는 꼴이라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 했으나 [선조]는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加藤淸正]을 잡으라고 부산에 보냈더니, 잡으라는 가토는 놓치고 애꿎은 피해만 입고 돌아와? 잡아 올려!" [선조]는 [원균장군]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어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서울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이 사건의 본질은 [선조]라는 쪼다리 왕으로부터 찾아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조]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후세가 없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선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서자 출신은 절대 관직에도 오르지도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왕위는 상상도 못하던 시대... 그래서 서자 출신인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실제 '정여립의 난' 등 반란이 많았었는데, 언제 쿠데타가 일어 날지 언제나 불안한 생활을 한 [선조]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무지 많았습니다. 특히 군인에 대해선 가혹하리 많큼 의심을 해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극형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답니다. 武將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도 두번이나 사형 당할뻔 했죠? [임진왜란]때 [선조] 자기는 의주로 몽진하고선,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장군]이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꼴은 자기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이었으니 그런 꼴을 보고 있을수만은 없었겠지요.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선조]가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형 당할 위기에 놓인 [이순신]은 기사회생 합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병조 판서 "정탁"등 시대의 흐름을 아는 인재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 어려운 전란 중에 한명의 군인도 아쉬운 마당이니 '삼도수군절도사'로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을 "백의종군"이라는 형벌로 낮추어 전장으로 내 보내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고 하니 쪼다리 [선조]도 어쩔수 없이 받아 들일수 밖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11:00 "백의종군 출발지" "백의종군 白衣從軍"은 조선시대 형벌 중에 하나이죠.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간다"라는 하급직으로 군복무를 한다는 뜻이겠지만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답니다. 사실 미미한 처벌이라고 할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기간"은 1597년 3월4일에 투옥되어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기 위해 "권율 도원수"를 찾아 가는데... 자신의 후임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진'을 치기 위해 나섯다가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 당해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는 8월3일까지를 말 합니다. 그러니까 1597년 4월1일부터 8월3일까지 약4개월간이죠. 그리고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이곳 [의금부터] 앞에서 '경북 합천 율곡리'까지 가서 "권율 도원수"를 만나는 곳까지를 의미하는데 "약670km"라고 합니다. ['시전행랑'] 우측에 나란히 솟아 있는 빌딩들이 있기 전에는 대로와 골목이 [광화문사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대로에는 "시진행락"이라는 '관설시장'이 있었던 거리이고 이 대로의 우측 뒷골목을 "피맛골"이라 했죠.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고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었다고 ['전봉준 동상' 위치] [의금부 터] 건너편 "영풍문고" 앞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있습니다. 즉, [종각역5번출입구]와 [6번출입구] 사이에 있습니다. 가는 길에 있으니 관심있게 보고 가겠습니다. ['전봉준 동상'] [안내문]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긴 "전봉준" ['전봉준'과 '종각사거리']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잎에 앉은 새야 녹두 잎이 깐닥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전봉준"은 사형선고를 받고 "운명시(殞命詩)"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광교'] 11:03 [종각사거리]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을 알현하고 [광교 사거리]를 지나면... ['청계천']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고... [뒤돌아 본 '종각사거리'] 뒤돌아 [종각사거리]를 바라봅니다. [화신백화점]이 있었던 자리엔 [종로타워]가 솟아 있습니다. 좌측엔 "의금부"가 있었던 자리에 [제일은행 본점]이 보이는군요. [이순신장군]이 [의금부 감옥]을 나와 "백의종군"을 시작한 곳입니다. 그 날의 거리 모습과 현재의 거리 모습은 무척 다르겠지만 쪽바리들의 침략행위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 정신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을지로1가'] 11:07 우리가 흔히 [을지로입구]라고 하는 [울지로1가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엔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이 서 있고, 좌측 대각선 방향엔 [한국전력 본사] 였던 건물이 이젠 빌딩 숲 속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데, 현재는 [한전 서울본부]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한전 본사]는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으로 이주했죠. ['명동입구'] 11:12 [명동입구]가 이젠 좀 초라하게 보이는군요. "밝은 동네" 明洞이 조속히 옛 밝음을 되찾기를 기원합니다. ['소공동'] [소공동] 방향으로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이고... ['옛 한국은행'] 11:16 이어서 "한국은행" 앞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서울중앙우체국'] 동쪽 건너편엔 [서울중앙우체국] 건물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서 있는데 매우 빠른 "제비"를 형상화 했다죠? ['신세계백화점'] 남쪽 건너편엔 [신세계백화점]이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가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옛 한국은행'] [옛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이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변모되 있었고, 건물 뒤에 본점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 이전했습니다. ['남대문' 방향] 11:20 [남대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좌측은 [남대문시장]이고 우측엔 [북창동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골목 입구를 지나고 [통닭집] [호떡집] 세마리에 만원하는 통닭집....무지 유명하죠? 동대문에도 비슷한 통닭집이 많이 있죠. 호떡 집엔 호떡을 사려는 행렬이 좌측 길에까지 널어서 있는데...맛이 있나 봅니다. 사 먹을까 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릴 생각을 하니 어느날에..싶어 그냥 패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서쪽 출입골목 입구를 지나면... ['남대문'과 '단암타워'] 11:27 [남대문]을 만나며 좌측에 있는 [단암타워]가 추억을 불러 일으킵니다. 40여년 전에 저 건물 꼭대기층에 있었던 커피샵에서 장모님과 상견례를 했는데...ㅎ ['남대문 수문장 교대식'] 11:30~11:40 "국보1호 숭례문"에 도착하는데 때마침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명동' 방향 조망] ['시청' 방향 조망] [남대문]에서 지나온 [명동방향]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서울시청]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도 이 문을 통해 [백의종군길]을 갔습니다. ['서울역' 방향 조망] 11:40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1일 조금전 [종각역사거리]의 [의금부] 옥문을 나서서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이틀간 쉬며 여러 관리들과 친인척들을 만나며 술을 무지 마십니다. 그 날의 상황을 장군이 직접 쓴 [亂中日記] 원문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정유년 4월1일부터 4월4일까지 일기] '이순신장군'의 친필 일기는 짧은 한자 실력으로는 읽기가 너무 어려워 일반인은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근간에 여러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보여 드리는 일기는 [정조대왕]이 펴낸 "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의 원문과 번역이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람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와 "정조대왕"이 편낸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丁酉四月初一日。晴。得出圓門。到南門外尹生侃奴家。則菶,芬及蔚與士行,遠卿同坐一室。 話久。尹知事自新來慰。備邊郞李純智來見。知事歸。夕食後。佩酒更來。耆獻亦至。 李令公純信佩壺又來。同醉致懇。領台鄭判府事琢,沈判書喜壽,金二相命元,李參判廷馨, 盧大憲稷,崔同知遠,郭同知嶸。送人問安. [1597년 4월 1일 (정유년 신유) (양력 1597년 5월 16일)]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ㆍ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ㆍ원경'과 더불어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식사를 한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이순신(李純信)-(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二相)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이순신장군]은 감옥에서 나온 첫날에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술을 많이 마시며 환담했다고 일기를 썻습니다. ['남산' 방향] 11:42 [이순신장군]은 둘쨋날에도 [남대문] 밖 "윤간의 종 집"에 머물며 음식을 포식하며 몸을 추스렀습니다. 初二日壬戌。雨雨終日。與諸姪話方業。進饌甚豐。 [1597년 4월 2일 (양력 5월 17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매우 푸짐하게 차려왔다. [이순신장군]은 셋쨋날에야 서울을 출발하여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 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 [1597년 4월 3일 (양력 5월 18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경기도 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남산육교'] 11:44 [남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남산육교]를 만나는데 육교 중간에 엘리베이트가 있습니다. 승강기 앞으로 가면... ['서울로7017' 조망] "서울로 7017"은 '1970년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 17개의 사람이 다니는 길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에서 명명된 서울역고가도로의 도시 재생 공원화 사업명이랍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를 공원화해 2017년 5월 20일에 개장하였고, 인근 보행로와 고가를 잇는 구조물을 추가 설치해 최종적으로 총 17개의 보행로와 연결했다고 하는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면... [서울역 고가도로 육교공원'] [뒤돌아 본 '남산육교']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역을 끼고 퇴계로와 만리재로, 청파로를 이어주는 총길이 938m, 폭 10.3m, 높이 17m의 고가차도로 1970년 8월 15일 개통되었는데, 노후화되어 안전성에 문제가 되어 보수를 하고 차량통행 대신에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를 모델로 삼았다고 하네요. [육교공원 옆면] 육교 위에서 육교의 옆 아랫쪽을 보는데, 육교 곳곳에 에스컬레이트와 엘리베이트를 설치했는데 17개 통로와 연결 한답니다. ['서울역' 전경] [서울역]의 전경이 조망됩니다. 그런데 [3.10 탄핵무효]라고 쓴 에드벌룬이 몇개 있고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진동을 합니다. '박근혜 석방 시위'를 하고 있는듯 시위 진압 경찰차들도 만약을 위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서울로7017'] 산책 나온 사람들과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남대문' 조망] 북쪽으로 [남대문] 방향을 조망하고 ['서소문' 방향 조망] 북서쪽으로는 [염창교] [서소문] 방향이 조망됩니다. ['용산' 방향 조망] 남쪽으로는 [용산] [한강교] 방향으로 [삼남길]이 뻗어 나가는데 [이순신장군]은 이 길로 백의종군 했으리라 ['서울역'] [서울역] 앞에서는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박근혜 3.10 탄핵무효'라는 구호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데 지나는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 당한 날이 2년전 3월 10일이어서 집회를 하는듯.... 그런데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던데, 지금은 시작 전인지... ['서서울역'] 11:58 [서울로 7017 서울역 고가도로공원]을 통과해서 [서서울역-청파로]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이 길 [청파로]를 따라 [용산]까지 이어져 [동작대교]로 가지만 유적도 없는 길이라 시간 단축을 위해 [지하철4호선]을 타고 [이촌역]까지 가기로 합니다. ['서울역 롯데아룰렛 백화점'] [서서울역]에서 [롯데아울렛.백화점]을 통과하여 [서울역광장] 방향으로 가면... [지하철 '서울역' 입구] 12:05 지하철 [서울역] 입구를 만나 지하로 내려 가는데 '태극기부대'가 설치한 반헌법적 구호의 현수막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4호선 이촌역'] [무비워크] [지하철4호선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이촌역]으로 갔더니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이촌역]에서 무빙워크로 연결되 있어 편리하더군요. 무빙워크를 타고 걸어 나가면... ['국립중앙박물관'] 12:22 [전시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 갑니다.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청파로]를 걷는 백의종군길을 지하철로 단축해서 그동안 한번도 관람하지 못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박물관 다웁게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전시관 로비] 입장료는 무료이며 설날이나 추석을 제외한 연중 무휴 관람할수 있다고 합니다. 전시관 로비에서 전시관으로 들어 가면... [금속탐지기 통과] 모든 관람객들은 휴대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는데 카메라는 그냥 들고 들어 가도 되더군요. [전시관 중앙 통로] 전시관은 3층까지 있는데 규모가 너무 커 모두 둘러 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듯하여 1층만 수박겉핡기식으로 돌아 나왔는데도 1시간10분이 걸렸습니다. 자세히 관람하려면 며칠 소요해야 할듯.... ['선사 고대관'] ['가야관'] ['신라관'] 삼국시대 유물 전시관을 둘러 보며 몇가지 인상 깊은 것들만 촬영해서 올립니다. 사진 촬영은 자유롭게 할수 있는데, 단, 플레시를 터트리면 않되더군요 최소 한번은 다녀 가야할 우리나라 역사 유물들의 집합소였습니다. ['북한산순수비'] 제가 북한산을 산행할때 자주 오르던 [비봉 碑峰]에 있는 모조품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자주 봤으나 진품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국보 제3호]이며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둘러 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의 영토확장""사냥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답니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답니다.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 "보물 제360호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라고 합니다. 이 탑비는 신라 말의 고승 "원량선사"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네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어좌] '일월오봉도'가 있는 御座 ['수표'] 서울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 水標橋""수표 水標"입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빨리 부식되니 후엔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답니다. 1773년에 청계천을 준설하였고, 1889년에는 대대적으로 준설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남산' 조망] 전시실 1층만 관람하고 전시관 뒤로 잠시 나가보니 [남산]이 조망되었습니다. [남산]에서 이곳까지 얼마 전까지만해도 미군용산기지였지요. [식당 입구]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 와 부속건물로 가면 먼저 엄청 큰 식당 푸드코트가 있었는데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냥 통과하니 ['어린이 박물관'] 어린이 박물관도 있더군요. [출구] 수박 겉핡기식으로 횡하니 전시관 1층만을 관람하고 전시관을 나서면... ['겨울못'] [겨울못]이라고 하는 호수가 펼쳐지는데 "용산가족공원"이 함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문 방향] 1:13 [국립중앙박물관]을 나서서 다시 [지하철4호선]을 [이촌역]에서 타고 [남태령역]으로 갔습니다. ['동작대교' 통과] [동작대교]를 통과하며 한컷하고 ['남태령역'] 1:38 [남태령역]에 내려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코리아트레일]과 합류하여 함께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10야분 올라 가면... ['남태령 정상부'] [남태령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우측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습니다. ['남태령'] 1:50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가 되는 큰 고개입니다. "남태령 南泰嶺"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는 "남태령의 유래"에 대해선 설명이 너무 부실합니다. '과천 이방'이 '정조대왕'에게 엉겁결에 '남태령'이라고 해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地名이란게 얼떨결에 말한다고 만들어지는게 아니죠? 제가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알려 드리면 '정조대왕'이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 "융릉"으로 이 고개를 넘어 갈때 '정조대왕'이 '과천 이방'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답니다. '과천 이방'은 얼떨결에 "여우고개"라고 아뢴것이 아니라,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여우고개"라는 말이 '여우'가 실제 많이 나타나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여우같은 놈들", 즉 '산적'들, 비리 관리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기에 "여우고개"라고 아뢰기가 조금 거시기하여,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니 "南泰嶺"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답니다. 이 고개가 "여우고개"라고 알고 있는 금위대장은 거짓 보고를 하는 '과천 이방'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느냐?"고 혼줄을 내며 처벌을 하려고 했습니다. '정조대왕'이 거짓 보고를 한 이유를 물었더니 '과천 이방'은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이지만 임금님께 이런 저질스런 이름을 아뢰기가 민망스러워 "남태령"이라고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정조대왕'은 오히려 그 뜻이 가상하다고 여겨 큰 상을 내리고, 그 이후 이 고개는 "남태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헌에 이미 "남태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책에도 이 고개가 '남태령'이라고 이미 나오고 있으니.... 이러한 지명의 유래를 과천시는 다시 조사하여 왜곡되지 않도록 하시라!~ [삼남길 안내도] [남태령]은 [경기옛길-삼남길]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이 [삼남길]은 [평택]까지 [이순신백의종군길]과 대부분 함께 겹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남길]을 이미 답사 한바 있기에 [평택]까지는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생략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또... 여기서 [평택]까지의 [삼남길]에 대해선 제가 두다리로 쓴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남태령' 서울 방향] [남태령] 정상에서 다시 [사당역]으로 내려 갑니다. [남태령]은 [관악산둘레길-관악구간]이 지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길에 대한 답사기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분들은 저의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사당 I.C.'] 2:05 [남태령]에서 [사당역]으로 15분 정도 내려 가면 [관악산]과 [우면산]을 관통하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의 [사당 I.C]를 지나 가는데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만든 도시고속도로가 엄청 막혀 효과가 반감되는듯... 특히 [서울대] 쪽에서 [사당]으로 오는 차량들이 정체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당역 3번출입구'] ['사당사거리'] 2:18 [사당역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귀가 했습니다. 일부 구간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728x90

『고난과 죽음을 넘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 이순신생가터(명보아트홀)-의금부터(종각역1번출구)-숭례문-서울역- 국립중앙박물관-동작대교-이수역-사당역-남태령역-남태령 ['이순신백의종군길']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은 '서울툭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이순신장군생가터"를 출발하여 [이순신장군]이 수감되었던 "의금부터"가 있는 '종로구 종각역앞' "제일은행 본점"으로 진행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대문"을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 "남태령"까지 "약20km"가 '서울구간'입니다. ['명보사거리'] 2019년 3월 9일 (토) 연무 대체로 맑음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 위해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명보사거리"로 갔습니다. [명보사거리]에는 "명보아트홀"이 있는데 예전엔 "명보극장"이라고 했으며 [이순신장군]이 탄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생가터'-'의금부터'-'남대문' 지도] [이순신생가터]에서 [의금부]가 있었던 [종각]으로 진행하여 [남대문], [서울역]으로 가는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중심구간"을 보여 주는 '네이버지도'입니다. ['명보아트홀' 앞] 10:25 "명보아트홀" 조선시대 이 지역은 "건천동 乾川洞"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였는데, 이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 내렸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대체로 '마른 개천'이어서 "乾川"이라 했답니다. 그래서 현재도 이 도로의 이름을 [마른내로]라고 지었답니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답니다. [단종] 때에 '김종서(金宗瑞:順天人)', '정인지(鄭麟趾:河東人)', '이계동(李季仝:平昌人)',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南原人)', '김수온(金守溫:永同人)', '이병정(李秉正:全義人)', [중종] 때 '유순정(柳順汀:晉州人'), '권민수(權敏手:安東人)', '유담년(柳聃年:文化人)', [명종] 때 '노수신(盧守愼:光州人)', '허엽(許曄:陽川人)', [선조] 때 '류성룡(柳成龍:豊山人)','허봉(許봉:陽川人)','이순신(李舜臣:德水人)','원균(元均:原州人)'이 모두 이곳에서 탄생하여 더욱 유명하답니다. 1545년 3월 8일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선생"과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장군"이 앞뒷집에 살았답니다. "유성룡선생"은 [이순신장군]보다 세살 위로서 [이순신장군]의 둘째 형인 [이요신]의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어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육군이었던 '이순신'을 6계급 특진을 시켜 [전라좌수사]로 '선조'에게 천거 하였다고 합니다. "원균장군"은 "이순신장군"보다 다섯살 위의 대고참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장군"이 요즘말로 ☆장군이 되어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 때에 "이순신"은 미관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었습니다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위상은 완전 바뀌었지요.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아버지 "德水 李씨 貞"과 어머니 "草溪 卞씨 守琳(수림)의 딸" 사이에서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1545년 3월 8일(음력)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데... [이순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는지에 대해선 확실치 않답니다.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현충사]"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서울 건천동'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8세, 13세, 16세, 18세까지 살았다는 설이 분분.. 그런데 사람 됨됨이를 확실히 알수 있을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청소년기까지는 함께 지내야 알수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류성룡선생'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6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에 그런 정황을 고려하면 16~18세까지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신뢰감을 줍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아산'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신영균' 설립자] [명보극장]의 설립자는 영화배우 "신영균씨"라고 아트홀 벽면에 동판을 부착해 놧습니다. 치과의사가 스타 영화배우가 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죠? 아흔이 넘었을텐데...어케 지네시나 [명보아트홀]에서 [종각]으로 갑니다. 먼저 [명보사거리]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울지로3가'] 10:29 [을지로3가 사거리]에 도착하며 ['을지로3가'에서 '2가' 방향] [을지로3가 사거리]에서 [을지로2가] 방향을 바라보고... 5분 정도 진행하면 ['을지로2가'] 10:35 [을지로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우측 [청계2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을지로2가'에서 '청계2가' 방향] 울창한 빌딩숲이 거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이라 한산한 거리를 잠시 진행하면... ['청계2가'] 10:39 [청계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좌측 [광교] 방향으로 건너 가면서... ['남산' 조망] [청계2가 사거리]에서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면 "남산"이 조망됩니다. ['청계천'] [청계천 淸溪川]을 구경하고 [청계2가]에서 [광교]로 올라 갑니다. ['광교'] 10:45 [광교 사거리]에 도착하여 우측 [종로1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종로1가'] [종로1가 사거리-종각사거리]를 만나며 ['보신각'] 10:47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보신각" 앞에 섭니다. ['제일은행 본점'] [보신각] 대각선 방향 건너편 [종각역1번출입구]가 있는 곳에 [제일은행 본점]이 있는데 저곳이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제가 학창시절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에는 [서울예식장]이 있었습니다. ['의금부터'] [안내문] "의금부 터 義禁府址" 오늘날 제도로 맞춰보면 "의금부"는 [대법원, 검찰청, 국가정보원]을 합친 최고의 사법기관 쯤이고, "포도청"은 [경찰청],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순신장군]에겐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던 [정유년]에 특이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지요. 하나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부하들이 부산 왜놈 진영에 불을 질러 공울 세웠는데 [이순신]이 그 공울 가로챗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 이중간첩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조]는 [이순신장군]에게 어명을 내려 그를 쳐 부수라고 했는데, [이순신장군]은 [加藤清正]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다시 절영도로 후퇴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덕도 왜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는데..(전사 1명. 포로 5명) 그 사이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는 부산진에 안착하게 되었으니 [이순신장군]은 어명을 어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진을 공략하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으로 뛰어 드는 꼴이라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 했으나 [선조]는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加藤淸正]을 잡으라고 부산에 보냈더니, 잡으라는 가토는 놓치고 애꿎은 피해만 입고 돌아와? 잡아 올려!" [선조]는 [원균장군]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어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서울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이 사건의 본질은 [선조]라는 쪼다리 왕으로부터 찾아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조]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후세가 없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선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서자 출신은 절대 관직에도 오르지도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왕위는 상상도 못하던 시대... 그래서 서자 출신인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실제 '정여립의 난' 등 반란이 많았었는데, 언제 쿠데타가 일어 날지 언제나 불안한 생활을 한 [선조]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무지 많았습니다. 특히 군인에 대해선 가혹하리 많큼 의심을 해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극형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답니다. 武將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도 두번이나 사형 당할뻔 했죠? [임진왜란]때 [선조] 자기는 의주로 몽진하고선,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장군]이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꼴은 자기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이었으니 그런 꼴을 보고 있을수만은 없었겠지요.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선조]가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형 당할 위기에 놓인 [이순신]은 기사회생 합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병조 판서 "정탁"등 시대의 흐름을 아는 인재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 어려운 전란 중에 한명의 군인도 아쉬운 마당이니 '삼도수군절도사'로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을 "백의종군"이라는 형벌로 낮추어 전장으로 내 보내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고 하니 쪼다리 [선조]도 어쩔수 없이 받아 들일수 밖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11:00 "백의종군 출발지" "백의종군 白衣從軍"은 조선시대 형벌 중에 하나이죠.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간다"라는 하급직으로 군복무를 한다는 뜻이겠지만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답니다. 사실 미미한 처벌이라고 할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기간"은 1597년 3월4일에 투옥되어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기 위해 "권율 도원수"를 찾아 가는데... 자신의 후임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진'을 치기 위해 나섯다가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 당해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는 8월3일까지를 말 합니다. 그러니까 1597년 4월1일부터 8월3일까지 약4개월간이죠. 그리고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이곳 [의금부터] 앞에서 '경북 합천 율곡리'까지 가서 "권율 도원수"를 만나는 곳까지를 의미하는데 "약670km"라고 합니다. ['시전행랑'] 우측에 나란히 솟아 있는 빌딩들이 있기 전에는 대로와 골목이 [광화문사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대로에는 "시진행락"이라는 '관설시장'이 있었던 거리이고 이 대로의 우측 뒷골목을 "피맛골"이라 했죠.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고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었다고 ['전봉준 동상' 위치] [의금부 터] 건너편 "영풍문고" 앞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있습니다. 즉, [종각역5번출입구]와 [6번출입구] 사이에 있습니다. 가는 길에 있으니 관심있게 보고 가겠습니다. ['전봉준 동상'] [안내문]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긴 "전봉준" ['전봉준'과 '종각사거리']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잎에 앉은 새야 녹두 잎이 깐닥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전봉준"은 사형선고를 받고 "운명시(殞命詩)"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광교'] 11:03 [종각사거리]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을 알현하고 [광교 사거리]를 지나면... ['청계천']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고... [뒤돌아 본 '종각사거리'] 뒤돌아 [종각사거리]를 바라봅니다. [화신백화점]이 있었던 자리엔 [종로타워]가 솟아 있습니다. 좌측엔 "의금부"가 있었던 자리에 [제일은행 본점]이 보이는군요. [이순신장군]이 [의금부 감옥]을 나와 "백의종군"을 시작한 곳입니다. 그 날의 거리 모습과 현재의 거리 모습은 무척 다르겠지만 쪽바리들의 침략행위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 정신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을지로1가'] 11:07 우리가 흔히 [을지로입구]라고 하는 [울지로1가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엔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이 서 있고, 좌측 대각선 방향엔 [한국전력 본사] 였던 건물이 이젠 빌딩 숲 속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데, 현재는 [한전 서울본부]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한전 본사]는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으로 이주했죠. ['명동입구'] 11:12 [명동입구]가 이젠 좀 초라하게 보이는군요. "밝은 동네" 明洞이 조속히 옛 밝음을 되찾기를 기원합니다. ['소공동'] [소공동] 방향으로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이고... ['옛 한국은행'] 11:16 이어서 "한국은행" 앞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서울중앙우체국'] 동쪽 건너편엔 [서울중앙우체국] 건물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서 있는데 매우 빠른 "제비"를 형상화 했다죠? ['신세계백화점'] 남쪽 건너편엔 [신세계백화점]이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가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옛 한국은행'] [옛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이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변모되 있었고, 건물 뒤에 본점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 이전했습니다. ['남대문' 방향] 11:20 [남대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좌측은 [남대문시장]이고 우측엔 [북창동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골목 입구를 지나고 [통닭집] [호떡집] 세마리에 만원하는 통닭집....무지 유명하죠? 동대문에도 비슷한 통닭집이 많이 있죠. 호떡 집엔 호떡을 사려는 행렬이 좌측 길에까지 널어서 있는데...맛이 있나 봅니다. 사 먹을까 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릴 생각을 하니 어느날에..싶어 그냥 패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서쪽 출입골목 입구를 지나면... ['남대문'과 '단암타워'] 11:27 [남대문]을 만나며 좌측에 있는 [단암타워]가 추억을 불러 일으킵니다. 40여년 전에 저 건물 꼭대기층에 있었던 커피샵에서 장모님과 상견례를 했는데...ㅎ ['남대문 수문장 교대식'] 11:30~11:40 "국보1호 숭례문"에 도착하는데 때마침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명동' 방향 조망] ['시청' 방향 조망] [남대문]에서 지나온 [명동방향]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서울시청]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도 이 문을 통해 [백의종군길]을 갔습니다. ['서울역' 방향 조망] 11:40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1일 조금전 [종각역사거리]의 [의금부] 옥문을 나서서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이틀간 쉬며 여러 관리들과 친인척들을 만나며 술을 무지 마십니다. 그 날의 상황을 장군이 직접 쓴 [亂中日記] 원문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정유년 4월1일부터 4월4일까지 일기] '이순신장군'의 친필 일기는 짧은 한자 실력으로는 읽기가 너무 어려워 일반인은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근간에 여러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보여 드리는 일기는 [정조대왕]이 펴낸 "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의 원문과 번역이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람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와 "정조대왕"이 편낸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丁酉四月初一日。晴。得出圓門。到南門外尹生侃奴家。則菶,芬及蔚與士行,遠卿同坐一室。 話久。尹知事自新來慰。備邊郞李純智來見。知事歸。夕食後。佩酒更來。耆獻亦至。 李令公純信佩壺又來。同醉致懇。領台鄭判府事琢,沈判書喜壽,金二相命元,李參判廷馨, 盧大憲稷,崔同知遠,郭同知嶸。送人問安. [1597년 4월 1일 (정유년 신유) (양력 1597년 5월 16일)]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ㆍ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ㆍ원경'과 더불어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식사를 한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이순신(李純信)-(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二相)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이순신장군]은 감옥에서 나온 첫날에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술을 많이 마시며 환담했다고 일기를 썻습니다. ['남산' 방향] 11:42 [이순신장군]은 둘쨋날에도 [남대문] 밖 "윤간의 종 집"에 머물며 음식을 포식하며 몸을 추스렀습니다. 初二日壬戌。雨雨終日。與諸姪話方業。進饌甚豐。 [1597년 4월 2일 (양력 5월 17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매우 푸짐하게 차려왔다. [이순신장군]은 셋쨋날에야 서울을 출발하여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 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 [1597년 4월 3일 (양력 5월 18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경기도 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남산육교'] 11:44 [남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남산육교]를 만나는데 육교 중간에 엘리베이트가 있습니다. 승강기 앞으로 가면... ['서울로7017' 조망] "서울로 7017"은 '1970년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 17개의 사람이 다니는 길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에서 명명된 서울역고가도로의 도시 재생 공원화 사업명이랍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를 공원화해 2017년 5월 20일에 개장하였고, 인근 보행로와 고가를 잇는 구조물을 추가 설치해 최종적으로 총 17개의 보행로와 연결했다고 하는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면... [서울역 고가도로 육교공원'] [뒤돌아 본 '남산육교']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역을 끼고 퇴계로와 만리재로, 청파로를 이어주는 총길이 938m, 폭 10.3m, 높이 17m의 고가차도로 1970년 8월 15일 개통되었는데, 노후화되어 안전성에 문제가 되어 보수를 하고 차량통행 대신에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를 모델로 삼았다고 하네요. [육교공원 옆면] 육교 위에서 육교의 옆 아랫쪽을 보는데, 육교 곳곳에 에스컬레이트와 엘리베이트를 설치했는데 17개 통로와 연결 한답니다. ['서울역' 전경] [서울역]의 전경이 조망됩니다. 그런데 [3.10 탄핵무효]라고 쓴 에드벌룬이 몇개 있고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진동을 합니다. '박근혜 석방 시위'를 하고 있는듯 시위 진압 경찰차들도 만약을 위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서울로7017'] 산책 나온 사람들과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남대문' 조망] 북쪽으로 [남대문] 방향을 조망하고 ['서소문' 방향 조망] 북서쪽으로는 [염창교] [서소문] 방향이 조망됩니다. ['용산' 방향 조망] 남쪽으로는 [용산] [한강교] 방향으로 [삼남길]이 뻗어 나가는데 [이순신장군]은 이 길로 백의종군 했으리라 ['서울역'] [서울역] 앞에서는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박근혜 3.10 탄핵무효'라는 구호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데 지나는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 당한 날이 2년전 3월 10일이어서 집회를 하는듯.... 그런데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던데, 지금은 시작 전인지... ['서서울역'] 11:58 [서울로 7017 서울역 고가도로공원]을 통과해서 [서서울역-청파로]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이 길 [청파로]를 따라 [용산]까지 이어져 [동작대교]로 가지만 유적도 없는 길이라 시간 단축을 위해 [지하철4호선]을 타고 [이촌역]까지 가기로 합니다. ['서울역 롯데아룰렛 백화점'] [서서울역]에서 [롯데아울렛.백화점]을 통과하여 [서울역광장] 방향으로 가면... [지하철 '서울역' 입구] 12:05 지하철 [서울역] 입구를 만나 지하로 내려 가는데 '태극기부대'가 설치한 반헌법적 구호의 현수막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4호선 이촌역'] [무비워크] [지하철4호선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이촌역]으로 갔더니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이촌역]에서 무빙워크로 연결되 있어 편리하더군요. 무빙워크를 타고 걸어 나가면... ['국립중앙박물관'] 12:22 [전시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 갑니다.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청파로]를 걷는 백의종군길을 지하철로 단축해서 그동안 한번도 관람하지 못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박물관 다웁게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전시관 로비] 입장료는 무료이며 설날이나 추석을 제외한 연중 무휴 관람할수 있다고 합니다. 전시관 로비에서 전시관으로 들어 가면... [금속탐지기 통과] 모든 관람객들은 휴대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는데 카메라는 그냥 들고 들어 가도 되더군요. [전시관 중앙 통로] 전시관은 3층까지 있는데 규모가 너무 커 모두 둘러 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듯하여 1층만 수박겉핡기식으로 돌아 나왔는데도 1시간10분이 걸렸습니다. 자세히 관람하려면 며칠 소요해야 할듯.... ['선사 고대관'] ['가야관'] ['신라관'] 삼국시대 유물 전시관을 둘러 보며 몇가지 인상 깊은 것들만 촬영해서 올립니다. 사진 촬영은 자유롭게 할수 있는데, 단, 플레시를 터트리면 않되더군요 최소 한번은 다녀 가야할 우리나라 역사 유물들의 집합소였습니다. ['북한산순수비'] 제가 북한산을 산행할때 자주 오르던 [비봉 碑峰]에 있는 모조품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자주 봤으나 진품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국보 제3호]이며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둘러 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의 영토확장""사냥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답니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답니다.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 "보물 제360호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라고 합니다. 이 탑비는 신라 말의 고승 "원량선사"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네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어좌] '일월오봉도'가 있는 御座 ['수표'] 서울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 水標橋""수표 水標"입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빨리 부식되니 후엔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답니다. 1773년에 청계천을 준설하였고, 1889년에는 대대적으로 준설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남산' 조망] 전시실 1층만 관람하고 전시관 뒤로 잠시 나가보니 [남산]이 조망되었습니다. [남산]에서 이곳까지 얼마 전까지만해도 미군용산기지였지요. [식당 입구]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 와 부속건물로 가면 먼저 엄청 큰 식당 푸드코트가 있었는데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냥 통과하니 ['어린이 박물관'] 어린이 박물관도 있더군요. [출구] 수박 겉핡기식으로 횡하니 전시관 1층만을 관람하고 전시관을 나서면... ['겨울못'] [겨울못]이라고 하는 호수가 펼쳐지는데 "용산가족공원"이 함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문 방향] 1:13 [국립중앙박물관]을 나서서 다시 [지하철4호선]을 [이촌역]에서 타고 [남태령역]으로 갔습니다. ['동작대교' 통과] [동작대교]를 통과하며 한컷하고 ['남태령역'] 1:38 [남태령역]에 내려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코리아트레일]과 합류하여 함께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10야분 올라 가면... ['남태령 정상부'] [남태령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우측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습니다. ['남태령'] 1:50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가 되는 큰 고개입니다. "남태령 南泰嶺"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는 "남태령의 유래"에 대해선 설명이 너무 부실합니다. '과천 이방'이 '정조대왕'에게 엉겁결에 '남태령'이라고 해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地名이란게 얼떨결에 말한다고 만들어지는게 아니죠? 제가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알려 드리면 '정조대왕'이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 "융릉"으로 이 고개를 넘어 갈때 '정조대왕'이 '과천 이방'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답니다. '과천 이방'은 얼떨결에 "여우고개"라고 아뢴것이 아니라,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여우고개"라는 말이 '여우'가 실제 많이 나타나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여우같은 놈들", 즉 '산적'들, 비리 관리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기에 "여우고개"라고 아뢰기가 조금 거시기하여,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니 "南泰嶺"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답니다. 이 고개가 "여우고개"라고 알고 있는 금위대장은 거짓 보고를 하는 '과천 이방'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느냐?"고 혼줄을 내며 처벌을 하려고 했습니다. '정조대왕'이 거짓 보고를 한 이유를 물었더니 '과천 이방'은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이지만 임금님께 이런 저질스런 이름을 아뢰기가 민망스러워 "남태령"이라고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정조대왕'은 오히려 그 뜻이 가상하다고 여겨 큰 상을 내리고, 그 이후 이 고개는 "남태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헌에 이미 "남태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책에도 이 고개가 '남태령'이라고 이미 나오고 있으니.... 이러한 지명의 유래를 과천시는 다시 조사하여 왜곡되지 않도록 하시라!~ [삼남길 안내도] [남태령]은 [경기옛길-삼남길]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이 [삼남길]은 [평택]까지 [이순신백의종군길]과 대부분 함께 겹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남길]을 이미 답사 한바 있기에 [평택]까지는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생략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또... 여기서 [평택]까지의 [삼남길]에 대해선 제가 두다리로 쓴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남태령' 서울 방향] [남태령] 정상에서 다시 [사당역]으로 내려 갑니다. [남태령]은 [관악산둘레길-관악구간]이 지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길에 대한 답사기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분들은 저의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사당 I.C.'] 2:05 [남태령]에서 [사당역]으로 15분 정도 내려 가면 [관악산]과 [우면산]을 관통하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의 [사당 I.C]를 지나 가는데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만든 도시고속도로가 엄청 막혀 효과가 반감되는듯... 특히 [서울대] 쪽에서 [사당]으로 오는 차량들이 정체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당역 3번출입구'] ['사당사거리'] 2:18 [사당역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귀가 했습니다. 일부 구간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728x90

『충무공의 눈물과 효심』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답사기 해암2리-게바위-곡교천제방-강청교-중방배수장-중방리 골중뱅이- 염치-석두교-방수사거리-신일아파트-충무교육원-현충사 ['이순신백의종군길'과 '아산구간1']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 행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진행 할 코스는 지도에 표기한 바와 같이 "게바위"에서 "아산 현충사"까지로서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모시러 나간 길인데 불행이도 어머니가 "여수"에서 선편으로 오는 도중 "태안 해안" 근처 선상에서 돌아 가셔서 결과적으로 "게바위"에서 "현충사"로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오간 길이 되겠습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이라는게 특별히 지정되 있는건 아니지만 편의상 구간을 호칭하는데 저는 이 구간을 "충무공의 눈물과 효심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게바위"에서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까지 "18km"를 갑니다. ['온양온천역 1번 출입구'] 2019년 3월 122일 (금) 대체로 맑음 [분당선]을 타고 [수원역]에서 8:10발 "신창행 급행"을 타고 9:17에 [온양온천역]에 내려야 했는데 전동차가 조금 지연되어 9:25분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 9:28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에서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로 가는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습니다. [620번]은 8:30 11:30 14:30...에 있고 [621번]은 9:30 12:30 15:30.... [622번]은 7:20 10:30 16:30...에 있습니다. 저는 "9시 30분"발 [621번]을 타고 약34분이 걸려 [해암2리]로 갔습니다. ['해암2리] 10:04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해암2리] 버스정류장에 내려 뒤돌아 서면 '편의점'이 있고 그 앞에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이 보입니다. 여기서 다음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해암2리'에서 '강청교'까지 상세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게바위]라고 표기한 곳이 예전엔 선착장이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 시신]이 도착한 선착장으로서 [해암리]에서 사흘간 상여를 만들고 입관식을 하여 다시 선박편으로 [곡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중방리]까지 옮기는 상세 지도이며 파란색 선은 제가 직접 걸은 루트입니다. ['게바위' 입구] 10:07 [게바위]로 가는 길은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합니다. 삼거리에는 [해암2리 안내석]이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게바위' 가는 길] [해암2리 안내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게바위]로 가는 진행방향입니다. 길 중간에 [해암리건강증진센타]가 있고... [삼거리] 10:09 [해암리건강증진센타]를 지나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 리본]이 좌측길이라고 안내 합니다. ['게바위' 쉼터] 10:10~10:14 이어서 바로 "게바위"가 있는 쉼터를 만납니다. 옛날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이곳이 선착장이었답니다. 지금은 바닷물 수위도 현저히 낮아졌는데다가 [삽교천 방조제]로 간척지가 되어 이곳으로 배가 들락날락했다는게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여하튼 [이순신장군 어머니 시신]이 선편으로 도착한 선착장이었다니 그 의미를 느낄수 있습니다. ['백의종군로 아산구간' 안내문] [안내문]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길]에 [아산]에서 1597년 4월5일부터 4월19일까지 보름간 머물렀는데 이곳 [해암리]에서 4월13일 오후부터 4월16일 오전까지 3박4일간 어머니 상여와 관을 마련하며 운구 준비를 하였답니다. ['게바위'] ['게바위' 유래] "게"는 한자로 "해 蟹"라고 하죠. "게바위"를 한자로 쓰면 "해암 蟹巖"이 되니 이 동네의 이름이 "해암리"가 된것인데 일제시대 지명 정리를 할때 어려운 한자 "蟹" 대신에 쉬운 "바다 海"를 쓰는 바람에 현재 이 동네의 이름은 "해암리 海巖里"가 되었답니다. [쉼터에서 '곡교천제방' 조망]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대규모 행군단을 모집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종주를 했답니다. 그 종주길을 이름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로 표기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순신백의종군길]이 아니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여하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을 기념하는 기념식수를 했군요. ['해암 제6 배수문'] [게바위]에서 이젠 간척지가 된 농로길을 따라 [곡교천 둑]으로 나가면 [해암 제6 배수문]을 만납니다. [뒤돌아 본 '게바위'] 10:17 [곡교천 제방]에서 뒤돌아 보면 [해암2리]와 [게바위]가 보이며 그 옛날 장군의 모습이 어렴푸시 떠 오릅니다. ['아산만' 방향 조망] [곡교천]의 하구 방향인 서쪽으로는 [아산시 인주면]이 보입니다. 현재 [서울]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복선 전철이 건설 중에 있어 조만간 이곳으로도 전철을 타고 왕래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삽교천 방조제] 건설로 바닷물을 볼수 없어서 선박이 왕래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도고산' 조망] 남쪽으로는 [곡교천]을 건너 [신창면]과 [도고산]이 조금 조망됩니다. ['영인산' 조망] 북동쪽으로는 [영인지맥]의 대표산인 "영인산"이 조망되고... [영인지맥]의 마지막 산인 [입암산]도 보이는데 [입암산] 앞에는 [공세성당]과 [아산방조제]가 있죠. ['곡교천'과 '산양제'] [곡교천]의 제방을 따라 진행합니다. [곡교천]은 [천안]과 [아산]을 관통하는 큰 개천인데도 "江"이라는 이름은 얻지 못한 개천이지요. [이순신장군]이 어머니의 시신을 [게바위]에서 다시 작은 배로 옮겨 싣고 [중방포]로 갔다는데 우리는 뱃길로 갈수 없으니 제방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7년 음력 4월 5일에 [아산 본가-현충사]에 도착한 이후 본가에서 푹 쉬며 옥살이 고문 후유증을 추스렸답니다. 그리고 조상들을 배향하고 친인척들과 반가운 조우도 하며 회포를 풀고 있다가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초계 변씨)는 [이순신장군]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자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중에 [태안반도]근처 선상에서사망하였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三日癸酉。晴。早食後。往延事。出登海汀路。路入洪察訪家。暫話間。蔚送愛壽云。 時無船到消息。又聞黃天祥來到興伯家云。與洪告別。到興伯家。有頃。奴順花至自船中。 告天只訃。奔出擗踊。天日晦暗。卽奔去于蟹巖。則船已至矣。慟裂不可盡記。追錄 [1597년 4월 13일 계유(음력)] 맑음 일찍 아침식사후 어머니를 마중하러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어 놓고 하는 말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니 잠시후 종 '순화'가 배에서 급히 와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즉시 '해암'(아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영인산 산림박물관' 조망] "영인산 靈仁山 363.5m"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운구 할때도 바라 보았을 '영험한 산' [영인산]이 오늘도 그 날의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듯... [영인지맥]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쓴 산행기를 참고하시고 ['강청교' 조망] [해암리]의 [곡교천 제방]의 이름은 "산양제"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게바위]에서 40여분 이 제방길을 걸으면 [강청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624번지방도'] 11:00 이어서 버스를 타고 [해암리]로 갔던 [624번지방도]를 다시 만나는데 안전을 위해 우측 개천갓길로 진행합니다. ['강청교'] 11:06 이어서 "강청교" 밑을 통과 합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둘쨋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四日甲戌。晴。洪察訪,李別坐入哭治棺。棺則在營備來。少無欠處云 1597년 4월 14일 갑술 (음력) 맑음.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하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차근차근 장례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강청교'에서 '염치'까지 상세 지도] [강청교]에서 장군의 어머니를 선박으로 운구했다는 [중방리 골중뱅이]를 통과하여 "염치읍내"까지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중방포]까지 선박으로 운구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중방포]가 어디 였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대략 [중방배수지]에서 [중방리 골중뱅이] 근처가 아닐지 추정합니다. [곡교천]이 제방으로 지형이 많이 바꿨다는 것을 알수 있습죠. [체육공원] [강청교]를 지나면 우측 고수부지엔 체육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영인산' 조망] 이젠 [영인산]이 뒤에 보입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셋째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五日乙亥。晴。晩入棺。吳從壽盡心護喪。粉骨難忘。 天安倅入來治行。全慶福氏連日盡心製服等事。哀感何言 1597년 4월 15일 을해 (음력) 맑음.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선장-염치간 도로공사'] 11:16 [염치]에서 [삽교천]을 건너 [당진]으로 가는 [염치-선장간 도로] 건설 현장을 지나면 ['곡교천'과 '염성제' 제방] "염성제"라고 하는 [삽교천 제방]이 이어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면... ['중방배수장'] 11:29 [삽교천 제방] 이름인 "염성제"라는 안내석이 있는 곳을 만나는데 앞에는 "중방배수장"이 있습니다. 이곳이 [이순신장군 어머니]를 [게바위]에서 선박으로 운구한 포구로 추정됩니다. 간척사업으로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틀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했습니다. ['중방배수장'] "중방배수장" 좌측에는 농수로가 "중방리 골중뱅이"로 이어지고 있어 그 옛날의 뱃길이 아니었나 추정해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진의 가운데 다리 공사중에 있는 "골중뱅이"로 갑니다. ['중방배수장'에서 '골중뱅이' 가는 길] [중방배수장]을 지나면 "중방리 골중뱅이"가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옛날엔 앞에 펼쳐진 논들이 [곡교천]이었을거라 여겨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여 [골중뱅이]로 가면... ['중방리 골중뱅이'] 11:46 [이순신장군 어머니]와 관련된 안내나 유적은 찾을수 없고 빈집들이 즐비한데 오로지 버스정류장 이름만이 "중방리 골중뱅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여기서부터 어머니의 상여를 육로를 이용해서 본가로 옮겼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六日丙子。陰雨。曳船移泊中方浦。靈柩上轝。行還本家。望里慟裂。如何可言。 至家成殯。雨勢大作。南行亦迫。呼哭呼哭。只待速死而已。天安倅還歸。 1597년 4월 16일 병자 (음력). 궂은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문상을 마치고 돌아갔다. 명제상 "율곡 이이"는 [경세유표 제15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신장군]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624번 지방도'] [중방리 골중뱅이]부터는 [624번지방도]를 따라 진행합니다. [이순신장군]도 어머니의 상여를 메고 이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 갔으리... 보행자 보도가 있어 자동차의 위험을 많이 줄일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방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중방리 마을회관'] 11:58 이어서 "3.1운동 시위현장"이었다고 알리고 있는 "중방리마을회관" 앞을 지나 갑니다. ['염치교차로'] 12:06 [중방리마을회관]에서 8분여 진행하면 "염치교차로"를 통과하는데 [39번국도]가 [평택.아산방조제]에서 [아산]으로 연결되는 도로였습니다. ['염치사거리'] 12:09 이어서 "염치사거리"를 만나는데 우회전하면 ['염치' 중심가] 12:09~12:18 "염치읍 鹽峙邑 중심지"를 통과하는데 ... 정육점식당이 여럿 있더군요.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염치'에서 '송곡초'까지 상세 지도] [염치읍내]에서 [송곡초등학교]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 하고.... ['염치면사무소' 가는 길] 12:19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염치읍내]의 이곳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구도로를 따라 [읍사무소] 방향으로 가야 하더군요. ['염치읍사무소'] 12:23 [염치읍사무소] 앞을 지나면... ['염티초등학교' 앞] ['염티초등학교'] 12:25 "염티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갑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은 [염치]인데 초등학교 이름만 [염티]여서 조금 의아스러웠습니다. [치 峙]의 순우리말이 [티]임으로 의미에는 변화가 없지만... [염치 鹽峙]는 한자로 되 있지만 [염티 鹽티]는 한자 '鹽'과 순우리말 '티'를 합친 것이니 좀 이상하죠? "족발 足발" "역전앞"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ㅎ 순우리말로 하려면 [염 鹽]도 "소금"이라고 표현하여 "소금티"라고 해야 할텐데... 그래서 "소금티초등학교"로 하는게 우리 말에 더 적합할듯합니다. ㅎ 제 생각엔 아마도 [염치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이 '염치없다'고 느껴질수 있으니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게 아닌지...그래서 [염치]보다는 [염티]가 낫다고 한듯...ㅎㅎ 물론 저의 추정입니다. ㅎ ['염치로'] ['LG전자 아산물류센타'] 12:31 보행자 보도가 잘 설치되 있는 [염치읍내]를 통과하면... ['석두교'] 12:40 "석두교"를 만납니다. 우측에 건설되고 있는 도로는 [천안]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더군요. [위험구간] 이나저나 [석두교]부터 [방수사거리]까지는 보행자 보도가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석두교]에서 5분 정도 자동차의 위험과 싸우며 진행하면... ['석두1리' 입구] 12:45 [석두1리 안내석]과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한남아파트' 조망] 잠시후 가야할 [한남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문사]라는 절간의 뒷산인 [금병산]도 조망되는군요. 6분 정도 더 진행하면.... ['석정1리'] 12:51 [석정1리] 앞 쉼터와 버스정류장을 통과합니다. 갓길이 없는 도로를 10여분 더 진행하면... ['방수사거리'] 1:00 "방수사거리"를 만나 직진합니다. 이 사거리는 좌측 [음봉]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아산]으로 가는 [45번국도]였습니다. ['방수사거리'의 '음봉-둔포-평택' 방향] [45번국도] "음봉" 방향을 바라보고 ['한남아파트' 방향] [방수사거리]를 직진하여 [한남아파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 1:04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를 지나 10여분 진행하면... ['한남아파트'] 1:14 [한남아파트] 정문 앞을 통과하고 ['여호와의 증인' '아산서광교회'] [한남아파트] 정문 옆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아산서광교회]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붙어 있어도 괜찮을려나....괜한 걱정...ㅎ ['보문사'] 1:20 이어서 [보문사]라는 절간이 또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神을 믿는 종교들이 붙어 있는데...神들끼리 싸움은 안하겠죠? ㅎ 神은 없으니 神은 없다고 서로 알려주는듯 합니다. 神이 없어야 설명이 되니까요 ~~ㅎ ['신일아파트' 조망] [보문사]를 지나면 [신일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신일아파트]만 돌아 가면 [현충사]입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송곡초등학교' 입구] 1:32 [송곡초등학교] 정문 앞을 통과하고 ['송곡초등학교' 입구에서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 [송곡초등학교]부터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하고 ['신일아파트'] 1:35 이어서 [신일아파트] 앞을 지나 갑니다. [등산로 입구] 1:39 [물한산성] [꾀꼬리성]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라고 알리는 곳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가면... ['충무교육원'] 1:49 "충무교육원"을 만나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충무공을 비롯한 성현들의 충·효 정신을 이어 받게 하고 공동생활을 통해 도덕성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인격체로 기르기 위하여 충청남도교육청 산하에 설치된 소속기관이라고 합니다. ['현충사' 경내 진입구] 1:50 [충무교육원]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이 있더군요. 알아 보기 쉽죠? ㅎ ['현충사 샛문'] 1:52 [충무교육원]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입니다. 이 문을 모르면 엄청 돌아야 할듯... ['노느매기식당'] 경내 공원이 무척 넓은데 [현충사 정문] 옆에 [노느매기]라는 식당이 있더군요. "노느매기"는 사전에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현충사' 정문] 2:02~3:00 [현충사]는 입장료가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엔 휴관한답니다. 무지 오랜만에 [현충사]를 찾았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경주나 공주의 왕릉 같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먼저 둘러 봅니다. 기념관에는 [국보 제76호]로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난중일기]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장군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언급하기엔 지면이 많이 필요해 중요한것만 언급합니다. ['조선의 화포'] ['거북선' 모형]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육지에선 승승장구 할수 있었으나 바다에선 출렁대는 파도 위에서 조총을 조준 사격 할수가 없어서 무용지물이 될 정도였으며 사정거리도 20m~50m여서 "화포"로 뻥뻥 쏘아대는 조선 수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주력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나 關船(관선: 세키부네)는 크기가 조선의 "판옥선"보다 작았고 군선의 속도나 방향전환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했답니다.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답니다.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군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해도 깨져 침몰해버렸으니 군선과 화포에서 일본군을 압도해서 연전연승을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순신장군'의 전략도 한몫 더하고... ['이순신 장검'] [이순신장군의 장검] 입니다. 장검에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이 검은 검 길이가 1,970mm, 19,68mm 이고, 무게는 4,320kg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싸움에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마을을 가다듬으려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이 검은 장군이 1594년 4월 한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장인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어 바친 칼이랍니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 작가 [김훈]은 이 칼을 보고 이렇게 서문을 장식합니다. 칼의 노래 이순신 -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충무문'] 한글로 쓰여진 "충무문"을 통과하는데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현충사'로 가는 중앙로] [충무문]을 통과하면 중앙 통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우측에는 "정려"가 있고, 좌측에는 "구 현충사"가 있습니다. 먼저 우측 "정려"로 가면... ['정려각'] [안내문]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음봉" [이순신장군의 묘] 입구에 있는 [이순신 신도비] 옆에 있었던 "이봉상 신도비"를 기억하시나요? 여기서 "이봉상"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알수 있습니다. [숙종-경종-영조] 시대에 무장으로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순신장군]의 5대 손이라는군요. ['숙종' 건립 '현충사'] [안내문] "구 현충사 舊顯忠祠" 오리지날 "현충사"를 "구 현충사"로 표기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에 아무리 크게 철근 콩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다해도 원래 "현충사"는 "원래 "현충사"가 아닐까요? 새로 지은 "현충사"를 "新 현충사"라고 표기하고, 원래 현충사는 그대로 "현충사"라고 하는게 어떨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군사정권의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밀려나서 왼쪽편에 외로이 서 있는데 그래도 [숙종]이 직접 사액한 현판이 걸려있어 오리지날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반송] "반송 盤松" 일반적으로 소나무는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지만 "반송"은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죠. [현충사] 사당 입구에 있습니다. [중앙통로] ['홍살문'] 중앙 통로를 올라 가면 [홍살문]을 지나고 ['충의문'] ['현충사'] [충의문]을 통과하면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新 현충사"에 도착합니다. 누가 쓴 현판인지 금방 알수 있죠? ㅎ ['이순신장군 영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바라보며 참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칼의 노래> 첫 문장이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러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현충사'에서 조망] [현충사]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끝까지 치르지도 못하고 쪽바리들과의 전쟁을 하러 슬픔을 뒤로하고 떠났습니다. [배방산]과 [설화산] 사잇길로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며 南으로 南으로 향했습니다. <칼의 노래>에서 다시 인용합니다. 권률은 의병장 김덕령의 혐의를 수사하지 않은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또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임금에게 의병은 뒤숭숭한 무리였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싸우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고택'과 '활터'] 사당 옆에는 [이순신장군]이 '서울 건천동'에서 이사 와 살았던 고택과 무술을 연마한 활터도 있습니다. ['충의정'] [안내문] 고택 입구에는 "충무정 忠武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순신장군]도 이 물을 마셨고 그 후손들도 1960년대까지 이 물을 마시며 살았답니다. 그래서 저도 한바가지 마시고 [고택] [고택] [안내문] [이순신장군]의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있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참고로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무척 부유한 집안이어서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었답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이곳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상주 방씨'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장군은 신혼살림을 시작한것이죠.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며 다리가 부러져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매화'와 홍매화'] 고택 앞마당에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특히 "홍매화"가 눈길을 끕니다. 사진작가들에게 인기있는 홍매화라고 하는데 많은 사진작가들이 절정기 꽃망을 터트리고 있는 홍매화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홍매화'] 그래서 똑딱이 카매라로 '파란문'도 "홍매화"를 촬영했는데... "홍매화"의 감흥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나요? ㅎㅎ ['활터'] [안내문] [이순신장군]이 활쏘기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500년이 넘는 수령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굽어 보고 있는듯... ['고택' 조망] [활터]에서 고택을 조망합니다. 다시 [이순신백의종군길]에 대해 언급합니다. 1597년 4월 16일에 [이순신장군]이 [게바위]에서 [중방포]를 거쳐 어머니 상여를 운구하여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러려는데 다음날 '금부도사 서리'인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빨리 전쟁터로 가자고 다그쳤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七日丁丑。晴。金吾書吏李壽永。自公州到來。促行。 1597년 4월 17일 정축. 맑음.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가자고 다그쳤다 ['궁술연마장'] [활터] 우측엔 일반이들이 활을 쏠수 있는 활궁장이 있고... [석교] [연못] 연못을 지나 ['충무문']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을 나서면 [주차장] 3:00 주차장과 공원이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명언인 "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뒤로 [현충사]의 진산인 "방화산 芳花山"이 [현충사]의 병풍이 되어 포근히 감싸고 있습니다. [아산1구간 지도] [거리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18.8km" 였으며, 전체적으로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칼의 노래>의 한 문장을 음미하며 답사를 마침니다. 명랑에서는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 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러 쳐밖힌 것이었다. 명랑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死地)였다. 수 만년을 거꾸러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 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의 존망의 흐름을 거꾸러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728x90

『고난과 죽음을 넘어』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 답사기 평택역-군문교-팽성읍객사-송화사거리-석근리마을쉼터-능안사거리- 둔포119안전센타-아산테크노밸리-산전교차로-봉재저수지-어르목고개- 음봉면사무소-이순신장군묘소-음봉삼거리 ['이순신백의종군길']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남태령에서 평택까지 난중일기] [이순신장군]은 4월1일 [의금부] 옥문을 나서서 이틀간 한양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머물며 여러 대신들과 친인척들을 만나며 지친 몸을 추수러며 쉬다가 4월3일 '수원'으로 말을 타고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4월3일의 일기를 보면...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 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 계해 4월 3일 (양력 1597년 5월 18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로 갔다. 나는 인덕원(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수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장군은 자신의 집이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로 출발하는데 그 날의 일기를 보면... 初四日甲子。晴。早發登程。到禿城下。則半刺趙撥。備酒設幕吾山黃天祥家以待。 由振威到。黃以卜重。出馬載送。爲謝不已。由水灘。投平澤縣李內隱孫家。則待之甚慇 갑자, 4월 4일 (양력 1597년 5월 19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 "독성"(현재 오산시 독산성)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 '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손(李內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장군이 가는 곳마다 장군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대접이 어떠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이라는게 특별히 지정되 있는건 아니지만 편의상 구간을 호칭하는데 저는 [남태령]에서 [수원]을 거쳐 [평택역]까지는 "경기옛길 삼남길"과 대부분 겹쳐서 생략하고 [평택역]에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음봉]까지 약25km를 가려고 합니다. ['평택역' 2번출입구 전경'] 2019년 3월 14일 (목) 대체로 맑은 후 흐림 이리저리 산에 다니다 보니 [평택역]을 자주 이용하게 되는군요. [금북정맥] [쌍령지맥] [영인지맥] [평택섶길]등을 다니느라고 [평택역]을 많이 이용했는데 이번엔 [이순신백의종군길] 때문에 다시 오게 되는군요. 그리고 항상 [평택역1번출입구]만 이용했는데, 처음으로 [평택역2번출구]로 나갑니다. ['평택역2번출구'] 8:55 [평택역2번출구]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 가면 정면으로 길이 쭉~ 뻗어 있는게 보입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우측 [경부선 지하도]를 통과하여 앞에 보이는 직진 도로로 연결됩니다. 오리지날 [백의종군길]에 합류하여 5분여 직진하면... ['주민교회' 앞] 9:00 좌측엔 [주민교회]가 있고 우측엔 [평택초등학교]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좌회전하여 다시 5분여 더 진행하면... ['군문교 삼거리'] ['군문교'] 9:07 [군문교삼거리]와 "군문교"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 [아산방향]으로 직진합니다. ['안성천'] 오랜만에 "안성천"에 시선을 주고, [아산방향]으로 5분 정도 직진하면... ['신궁교차로'] 9:13 "신궁교차로"를 만납니다. [45번국도]와 [38번국도]가 교차하는 곳으로, "新宮里"랍니다. 여기선 직진해야 하는데 보행자 도로가 없으니 주의해서 교차로를 통과해야 하더군요. 7분 정도 직진하면... ['평궁사거리'] 9:20 "평궁사거리"를 만나는데 [평궁리입구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平宮 사거리"를 잠시 직진하면... [삼거리] 9:22 갈림길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 [팽성읍사무소.객사리]방향으로 들어 갑니다. "팽성읍"의 중심시가지로 들어 가는 것이더군요. ['팽성읍내' 가는 길] [팽성]과 [평택]을 연결하던 구도로인데 차량들은 신도로로 대부분 다니지만 시내버스등 꽤 많은 차량들이 아직도 이 도로를 이용하고 있는데,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위험하니 조심해야겠고... 10여분 직진하면... [삼거리] 9:32 [팽성미곡처리장삼거리]를 만나는데 앞에 보이는 [KTX 고가철도]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KTX 고가철도'] 9:36 [KTX 고가철도]를 통과하여 좌측으로 4분여 진행하면... ['칠칠주유소' 삼거리] 9:40 "칠칠주유소 삼거리"를 만나는데, 길죽한 회전교차로더군요. 주유소 뒷쪽에 [자비사]라는 절간이 있는데 ['자비사'] '西湖寶宮伽藍'이라는 "자비사"가 있고... ['칠칠주유소' 앞 삼거리] "자비사"를 지나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조금 진행합니다. 5분 정도 가면... [삼거리] 9:45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길조심을 해야 합니다. [팽성읍객사]는 우측에 있는데, 객사를 다녀나와 좌측 [빽다방] 옆길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빽다방]이라는 다방 이름이 괜히 미소 짓게하는군요. ㅎ ['팽성읍객사' 입구] 9:46~9:50 [팽성읍객사] 입구 입니다. ['팽성읍객사'] [안내문] "팽성읍객사 彭城邑客舍" [평택]의 중심지는 조선시대까지 이곳 "팽성 彭城""진위 振威"였는데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할때엔 이곳 "팽성"이 행정 관아와 客舍가 있는 "평택현 平澤縣"의 중심이었답니다. [客舍]는 임금에게 '망궐례'를 하는 곳인데, 관찰사등 고위 관리들이 머물며 교지를 내리는 곳이기도해서 관아보다 더 권위있는 곳이었답니다. ['팽성읍객사'] [객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가 볼수는 없어서 담장 밖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이순신장군]이 4월4일 '수원'을 출발하여 자택이 있는 '아산 백암리'로 갈때 하룻밤 묵고 간 곳이 이 "팽성읍객사 근처 이내손의 집"이었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한번더 보면... 初四日甲子。晴。早發登程。到禿城下。則半刺趙撥。備酒設幕吾山黃天祥家以待。 由振威到。黃以卜重。出馬載送。爲謝不已。由水灘。投平澤縣李內隱孫家。則待之甚慇 갑자, 4월 4일 (양력 1597년 5월 19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 "독성"(현재 오산시 독산성)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 '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손(李內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수탄'은 현재의 '송탄 서정리' 쯤으로 여겨 집니다. 4월4일 하룻밤을 평택에서 보내고 4월5일에 '아산'으로 출발합니다. 4월5일의 일기를 보면... 初五日乙丑。晴。日出登途。直到墳山拜哭。因到蕾家拜先廟。聞南陽叔永世 을축 4월 5일 (양력 1597년 5월 20일) 맑음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에 이르러 배향하며 곡하고 나서,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배향하고 나왔는데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담중학교 사거리'] 9:52 [팽성객사]를 지나면 [청담중학교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엔 [청담중학교]가 있고 우측에는... ['팽성읍사무소'] [팽성읍사무소]와 [팽성농협]이 있습니다. ['팽성읍119안전센타'] 9:58 [청담중학교사거리]에서 5분여 진행하면 "팽성읍119안전센타"를 지나고 ['예비군훈련장사거리'] 10:02 이어서 [팽성예비군훈련장사거리]를 직진으로 통과합니다. 5분 정도 직진하면.... ['평택섶길' 지나는 곳] 10:07 앗! "평택섶길-대추리길"이 지나는 낯익은 곳을 만납니다. 햐 ~ 지나해 3월6일에 다녀 간바 있습니다. 좌측에 [용화사 입구 버스정류장]이 있고 우측으로 진행해서 미군 [K-6] 기지로 가는 길이었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그때는 우측 반사경 앞에 [섶길 안내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더군요. 그때의 사진을 보여 드리면... ['송화교차로'] 10:15 이어서 [송화교차로]를 만나는데 우측에 [팽성초등학교]가 보이고... ['송화2리' 입구] 10:19 [송화2리(신당골)] 입구 안내석을 지나면... ['송화사거리'] ['송화사거리 육교'] 10:23 "송화사거리"를 만나는데 직진하여 [석근리]로 가야 하는데 [45번국도]에 횡단보도도 없고, 교통량이 많아 육교를 건너 가야 하더군요. ['송화사거리 욱교'에서 조망] 육교 위에서 지나온 길과 [팽성읍]을 조망합니다. ['남산3리'] 10:28 [송화사거리]를 육교를 이용해 직진 통과하면 [남산3리] 표지석을 만납니다. 표지석 안내판에는 "옛적에 고을 관청 남쪽산에 있는 마을이라고 남산리"라 한다고 안내합니다. 좌측길로 4분여 진행하면... ['석근1리'입구 사거리] 10:32 [석근1리(흙다리)입구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석근리]로 가야 합니다. [석근리]는 "동네 앞에 흙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흙다리"라고도 한답니다. 후에 흙다리는 돌다리로 바뀌고... 우측으로 직진하기 쉬우니 조심해야겠고... ['능안삼거리' 가는 길] [석근1리입구]에서 7분여 왕복2차선 도로를 진행합니다.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자동차들이 저를 보고 중앙선을 넘어 비켜 가야 할 정도... ['석근리마을쉼터'] 10:39~10:49 "석근리마을쉼터"를 만나는데 여기서 10여분 쉬었다 갑니다. 이 쉼터에는 "장준. 장현근 효자 정문"이 있는데 매우 효자였답니다. "장준"은 자기 아버지가 독사에 물리자 독사를 찾아 죽이고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 내고 독사의 쓸개를 내어 환부에 발라 치유시켰다네요. ㅎ "장현근"은 "장준"의 아들인데 또한 효자였다는군요. ['능안삼거리'] 10:53 [석근리마을쉼터]에서 4분여 진행하면 "능안삼거리"를 만납니다. 앞에는 [34번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평택시 팽성읍'과 '아산시 둔포면'의 경계였습니다. 이제부터 '평택시'를 벗어나 "이순신장군의 자택"이 있는 '아산시'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안내석이 길안내를 시작합니다. 서울서 여기까지는 표지기가 가끔 길안내를 했을 뿐인데... ['둔포중심지' 가는 길] [34번국도]와 나란히 왕복2차선 도로를 따라 "둔포"로 갑니다. 여기도 보행자 도로가 없어 걷기가 매우 불안합니다. 13분 정도 제법 먼 거리를 진행하면.... ['운용교차로;] 11:06 [운용교차로]를 만나고 "아산시 둔포" 속으로 들어 갑니다. 이 도로의 우측 지역은 아직도 "평택시 팽성읍"입니다. ['둔포119안전센타' 앞 삼거리] 11:11 길찾기에 중요한 지점인 "둔포119안전센타" 앞에 도착하는데 앞에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방향을 바꿔 골목을 조금 들어 가면... ['둔포순복음교회'] 11:13 [둔포순복음교회]를 지나갑니다. "둔포"에도 다양한 종교시설이 엄청 많으며 규모도 모두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크더군요. '빈익빈 부익부'라고 규모에서 밀리면 죽는걸로 인식하고 건물 규모를 널리는데 온 힘을 쏟는듯... ['아산전자기계고등학교'] 11:16 이어서 [아산전자기계고등학교] 앞을 지나 갑니다. 본명은 [둔포고등학교]였다는군요. ['둔포성당'] 11:17 계속해서 [둔포 성당]을 지나면... ['둔포중학교'] 11:23 [둔포중학교]를 만납니다. ['아산테크노밸리' 가는 길] 앞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랍니다. 아파트 방향으로 직진 진행하면... ['아산테크노밸리' 조망] 11:28 아파트 단지 근처에 도착하면 지나온 길이 조망되는데... 좌측을 바라보면... ['쌍령지맥' 조망] "평택시내"와 "평택시내"를 감싸고 있는 [쌍령지맥]을 이루는 "부락산"과 "덕암산"이 조망됩니다. [쌍령지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제가 쓴 [쌍령지맥 산행기]를 참고 하시고... ['둔포육교'] 11:31 [34번국도]와 [45번국도]가 지나는 "둔포육교"를 건너 직진합니다. ['34번''45번' 국도] 엄청 좋아진 도로들.... ['아산테크노밸리']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로 들어 갑니다. 이런 곳에 이런 대규모 신도시같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줄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중앙공원5교차로'] ['염작초교' 조망] 11:37 조금 올라 가면 "중앙공원5교차로"를 만나는데 좌측에는 "염작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방향을 우측으로 바꾸면.... [고개] 고개를 하나 넘어 갑니다. [중앙공원 삼거리] 11:42 그러면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둔포' 방향] 이 길은 [둔포교차로]를 지나 [삽교방조제]를 건너 [당진]으로 가는 길입니다. 50m정도 올라 가면... ['UN빌리지'] 11:46 좌측에 [UN빌리지}라고 하는 주택단지가 있습니다. 사진 속 앞에 보이는 첫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야 했나 본데 직진해서 두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갔습니다. ['UN빌리지' 통과] 두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UN빌리지] 주택들이 이렇게 줄을 서 있습니다. 이 길의 끝까지 직진해 가면... [길없음] 11:52 길이 끊겨 없어 집니다. 다행히 건너편에 표지기가 보입니다. 길없는 밭을 지나 건너 가면... [표지기] 11:53 조그만 농로 사거리를 만나는데 표지기가 있습니다. 오리지날 길은 아마도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어져 있나 봅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나 약간의 알바는 했습니다. 여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지나 온 길] [아산테크노밸리 아파트단지]에서 오는 길이 어느 정도 그려지는군요. ['운교리' 가는 길] 직선으로 뻗은 [운교리] 농로를 통과하면....[영인지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저 산줄기를 넘어 가야만 [음봉]으로 갈수 있으며, [이순신장군묘소]로도 갈수 있습니다. ['운교2리' 입구] 12:00 [운교2리 입구 안내석]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정자 쉼터] 12:02 이어서 2층 정자 쉼터에 도착하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 안내석이 있습니다. 12분여 농로를 더 진행하면.... ['운교1교' 앞] 12:14 [운교1교]가 보이는데 [운교1교]를 건너 가야 합니다. ['운교1교' 통과] 12:15 [운교1교]를 건너 농로를 직진해서 앞에 보이는 마을까지 8분 정도 직진하면... ['원골농원' 앞 삼거리] 12:23 [원골농원]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진행하고 ['핀튜브코리아'] 폐업 한듯한 [핀튜코리아]라는 공장을 지나면... ['산전리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 12:35 버스정류장이 있는 도로를 만나는데 [산전리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이었습니다. ['산전리마을회관'] [산전리마을회관] 앞에도 [백의종군길 안내석]이 있고... ['관대초등학교' 조망] 이어서 [관대초등학교]가 조망되기 시작하며 8분여 진행하면... ['산전교차로'] ['번영식당'] 12:43~1:28 (45분간 점심식사) [산전교차로]를 만납니다. 이곳에 있는 [번영식당]이라는 곳에서 김치찌개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을 홀로 종주하는 아이디 [걷는 발]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분이 점심을 베풀어 주어서 잘 먹었습니다. 정년 퇴직을 했지만 나태해 질까봐 몸과 정신력을 배양하기 위해 [백의종군길]을 한번에 종주하기 위해 길을 나섯다고 하더군요. 또한 같은 고향 사람이더라고요. ㅎ [음봉]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봉재저수지' 가는 길] [45번국도]의 갓길을 따라 15분 정도 진행하면... ['봉재저수지 수문'] 1:43 ['봉재저수지'] 1:45 "봉재 鳳在 저수지"를 만나는데 낚시꾼들에게 인기 있다는군요. ['봉재2리' 가는 길] ['봉재2리' 입구] 1:57 계속해서 [45번국도]를 따라 12분여 더 진행하면 [봉재2리입구]를 지나고 ['구이가' 앞] 2:01 이어서 2층 초가집인 '구이가'라는 음식점을 지나는데 폐업했는지 인기척이 없고 ['아산시 음봉면' 경계] 2:04 [음봉면]이 시작된다는 안내판이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그러니가 [음봉면 신정리]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원남리 교차로'] 이어서 [음봉면 원남리]로 이어지고 ['원남리'] 2:18 ['원남리' 통과] 2:23 [원남리]를 통과하여 [45번 옛길]을 진행합니다. ['어르목고개' 오르는 길] ['어르목고개'] 2:33 [원남리]에서 10여분 고개를 오르면 "어르목고개"에 도착합니다. 이 고개는 "영인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고개로서 저는 두번째 찾게 되는군요. 다시는 못 올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 왔군요. 2013년 3월 30일에 지나 갔으며 관련 산행기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http://cafe.daum.net/paraanmoon/MeLu/2" 여기 클릭 ['음봉배수지'] [어르목고개]에는 [음봉배수지]가 있습니다. [내림길] [어르목고개]를 내려 가면.... [흑염소 음식점] 2:43 '흑염소 음식점"이 있는데 산속에 선박 모형의 흙염소 음식점이 특이 하군요. ['태산LCD' 앞] 2:46 [태산LCD공장]앞을 지나면 [백의종군 안내석]이 또 다시 길을 밝히고 ['음봉면삽=무소' 가는 길] [음봉면]의 중심지로 들어 갑니다. ['음봉삼거리'] 2:59 "음봉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엔 [음봉농협] [음봉면사무소] [음봉보건소]등 관공서가 있는 음봉의 종심지랍니다. [영인지맥]을 할때 왔었던 곳입니다. 잠시후 여기서 [500번 시내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가려 합니다. [이순신장군묘]는 앞에 보이는 [음봉면사무소] 안으로 들어 갑니다. ['음봉면사무소'] 3:03 [음봉면사무소] 안으로 들어 가서 좌측 길로 6분 정도 올라 가면... ['충무공 묘소' 입구] 3:09 [이충무공 묘소] 입구 사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엔 "충무공 신도비"가 있습니다. ['충무공 신도비'] 3:10 [충무공 신도비]는 비각 안에 있는데... 좌측에도 신도비가 하나 더 있어 혼돈 하기 쉽습니다만 좌측 신도비는 [이봉상]이라고 하는 분의 신도비인데 [이봉상선생]은 [이순신장군]의 후손이라고 합니다만 자세한 기록은 알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일대가 [난중일기]에도 언급한 [이순신장군]의 선산인듯 합니다. 신도비가 있는 입구에서 5분여 걸어 올라 가면... [주차장과 관리사무소] 3:16 묘소관리사무소와 주차장 화장실등 묘소 부대시설이 있습니다. [홍살문] 3:18 묘소로 올라 가면 홍살문을 지나고 ['충무공 묘소' 전경] 3:20 "이순신장군 묘소"를 만나게 됩니다. 우측에 보이는 전각에 [정조대왕]이 내린 "어제신도비"가 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부부' 합장묘] [이순신장군]의 부인인 [상주 방씨]와 함께 잠들고 있는 합장묘입니다. ['이순신장군 묘'] "이순신장군의 적"은 누구였을까...? 왕 본인이 국가라고 생각한 [선조]라고하는 쪼다리와 자기 나라의 병화를 모면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의 원병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으로 넘어온 왜군 모두가 충무공의 적이었다고 <<칼의 노래>>를 쓴 "김훈"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에 대해선 언급하고픈 말이 너무 많지만, 그 동안 여러 산행기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하고 <<칼의 노래>> 마지막 엔딩을 되씹으며 장군에 대한 참배를 마칩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 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충무공 신도비'] 3:43 [이순신장군 묘역]을 둘러 보고 어쩐지 허망한 슬픔을 안고 [충무공 신도비] 앞을 다시 나섭니다. ['음봉삼거리'] 3:50 바로 [음봉삼거리]로 돌아와 [500번 시내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가는데 미군 평택기지에서 건설공사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연락이 되어 [평택역]에서 한잔하고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와 [분당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25km"였으며 약7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첨부파일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gpx
이순신백의종군길 평택구간.gpx
0.12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