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눈물과 효심』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답사기
해암2리-게바위-곡교천제방-강청교-중방배수장-중방리 골중뱅이-
염치-석두교-방수사거리-신일아파트-충무교육원-현충사
['이순신백의종군길'과 '아산구간1']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 행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진행 할 코스는 지도에 표기한 바와 같이 "게바위"에서 "아산 현충사"까지로서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모시러 나간 길인데 불행이도 어머니가 "여수"에서 선편으로 오는 도중 "태안 해안" 근처 선상에서
돌아 가셔서 결과적으로 "게바위"에서 "현충사"로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오간 길이 되겠습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이순신백의종군길 아산구간 1" 이라는게 특별히 지정되 있는건 아니지만 편의상 구간을 호칭하는데
저는 이 구간을 "충무공의 눈물과 효심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게바위"에서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까지 "18km"를 갑니다.
['온양온천역 1번 출입구']
2019년 3월 122일 (금) 대체로 맑음
[분당선]을 타고 [수원역]에서 8:10발 "신창행 급행"을 타고 9:17에 [온양온천역]에 내려야 했는데
전동차가 조금 지연되어 9:25분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 9:28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에서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로 가는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습니다.
[620번]은 8:30 11:30 14:30...에 있고
[621번]은 9:30 12:30 15:30....
[622번]은 7:20 10:30 16:30...에 있습니다.
저는 "9시 30분"발 [621번]을 타고 약34분이 걸려 [해암2리]로 갔습니다.
['해암2리] 10:04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에 있는 [해암2리] 버스정류장에 내려 뒤돌아 서면 '편의점'이 있고
그 앞에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이 보입니다.
여기서 다음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해암2리'에서 '강청교'까지 상세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게바위]라고 표기한 곳이 예전엔 선착장이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 시신]이 도착한 선착장으로서 [해암리]에서 사흘간 상여를 만들고 입관식을 하여
다시 선박편으로 [곡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중방리]까지 옮기는 상세 지도이며
파란색 선은 제가 직접 걸은 루트입니다.
['게바위' 입구] 10:07
[게바위]로 가는 길은 [아산방향 해암2리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합니다.
삼거리에는 [해암2리 안내석]이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게바위' 가는 길]
[해암2리 안내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게바위]로 가는 진행방향입니다.
길 중간에 [해암리건강증진센타]가 있고...
[삼거리] 10:09
[해암리건강증진센타]를 지나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순신백의종군길 리본]이 좌측길이라고 안내 합니다.
['게바위' 쉼터] 10:10~10:14
이어서 바로 "게바위"가 있는 쉼터를 만납니다.
옛날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이곳이 선착장이었답니다.
지금은 바닷물 수위도 현저히 낮아졌는데다가 [삽교천 방조제]로 간척지가 되어
이곳으로 배가 들락날락했다는게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여하튼 [이순신장군 어머니 시신]이 선편으로 도착한 선착장이었다니 그 의미를 느낄수 있습니다.
['백의종군로 아산구간' 안내문]
[안내문]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길]에 [아산]에서 1597년 4월5일부터 4월19일까지 보름간 머물렀는데
이곳 [해암리]에서 4월13일 오후부터 4월16일 오전까지 3박4일간 어머니 상여와 관을 마련하며
운구 준비를 하였답니다.
['게바위']
['게바위' 유래]
"게"는 한자로 "해 蟹"라고 하죠.
"게바위"를 한자로 쓰면 "해암 蟹巖"이 되니 이 동네의 이름이 "해암리"가 된것인데
일제시대 지명 정리를 할때 어려운 한자 "蟹" 대신에 쉬운 "바다 海"를 쓰는 바람에
현재 이 동네의 이름은 "해암리 海巖里"가 되었답니다.
[쉼터에서 '곡교천제방' 조망]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대규모 행군단을 모집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종주를 했답니다. 그 종주길을 이름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로 표기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순신백의종군길]이 아니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여하튼 [한국체육진흥회의 이순신백의종군길의 행군 행사길]을 기념하는 기념식수를 했군요.
['해암 제6 배수문']
[게바위]에서 이젠 간척지가 된 농로길을 따라 [곡교천 둑]으로 나가면
[해암 제6 배수문]을 만납니다.
[뒤돌아 본 '게바위'] 10:17
[곡교천 제방]에서 뒤돌아 보면 [해암2리]와 [게바위]가 보이며
그 옛날 장군의 모습이 어렴푸시 떠 오릅니다.
['아산만' 방향 조망]
[곡교천]의 하구 방향인 서쪽으로는 [아산시 인주면]이 보입니다.
현재 [서울]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복선 전철이 건설 중에 있어 조만간 이곳으로도
전철을 타고 왕래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삽교천 방조제] 건설로 바닷물을 볼수 없어서 선박이 왕래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도고산' 조망]
남쪽으로는 [곡교천]을 건너 [신창면]과 [도고산]이 조금 조망됩니다.
['영인산' 조망]
북동쪽으로는 [영인지맥]의 대표산인 "영인산"이 조망되고...
[영인지맥]의 마지막 산인 [입암산]도 보이는데 [입암산] 앞에는 [공세성당]과 [아산방조제]가 있죠.
['곡교천'과 '산양제']
[곡교천]의 제방을 따라 진행합니다.
[곡교천]은 [천안]과 [아산]을 관통하는 큰 개천인데도 "江"이라는 이름은 얻지 못한 개천이지요.
[이순신장군]이 어머니의 시신을 [게바위]에서 다시 작은 배로 옮겨 싣고 [중방포]로 갔다는데
우리는 뱃길로 갈수 없으니 제방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7년 음력 4월 5일에 [아산 본가-현충사]에 도착한 이후 본가에서 푹 쉬며
옥살이 고문 후유증을 추스렸답니다. 그리고 조상들을 배향하고 친인척들과 반가운 조우도 하며 회포를
풀고 있다가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었답니다.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초계 변씨)는 [이순신장군]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자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중에 [태안반도]근처 선상에서사망하였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三日癸酉。晴。早食後。往延事。出登海汀路。路入洪察訪家。暫話間。蔚送愛壽云。
時無船到消息。又聞黃天祥來到興伯家云。與洪告別。到興伯家。有頃。奴順花至自船中。
告天只訃。奔出擗踊。天日晦暗。卽奔去于蟹巖。則船已至矣。慟裂不可盡記。追錄
[1597년 4월 13일 계유(음력)] 맑음
일찍 아침식사후 어머니를 마중하러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어 놓고 하는 말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니
잠시후 종 '순화'가 배에서 급히 와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즉시 '해암'(아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영인산 산림박물관' 조망]
"영인산 靈仁山 363.5m"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어머니를 운구 할때도 바라 보았을 '영험한 산' [영인산]이 오늘도 그 날의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듯...
[영인지맥]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쓴 산행기를 참고하시고
['강청교' 조망]
[해암리]의 [곡교천 제방]의 이름은 "산양제"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게바위]에서 40여분 이 제방길을 걸으면 [강청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624번지방도'] 11:00
이어서 버스를 타고 [해암리]로 갔던 [624번지방도]를 다시 만나는데
안전을 위해 우측 개천갓길로 진행합니다.
['강청교'] 11:06
이어서 "강청교" 밑을 통과 합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둘쨋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四日甲戌。晴。洪察訪,李別坐入哭治棺。棺則在營備來。少無欠處云
1597년 4월 14일 갑술 (음력) 맑음.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하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차근차근 장례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강청교'에서 '염치'까지 상세 지도]
[강청교]에서 장군의 어머니를 선박으로 운구했다는 [중방리 골중뱅이]를 통과하여
"염치읍내"까지 상세 지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중방포]까지 선박으로 운구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중방포]가 어디 였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대략 [중방배수지]에서 [중방리 골중뱅이] 근처가
아닐지 추정합니다.
[곡교천]이 제방으로 지형이 많이 바꿨다는 것을 알수 있습죠.
[체육공원]
[강청교]를 지나면 우측 고수부지엔 체육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영인산' 조망]
이젠 [영인산]이 뒤에 보입니다.
[해암리]에서 머물던 셋째날 [난중일기]를 보면...
十五日乙亥。晴。晩入棺。吳從壽盡心護喪。粉骨難忘。
天安倅入來治行。全慶福氏連日盡心製服等事。哀感何言
1597년 4월 15일 을해 (음력) 맑음.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선장-염치간 도로공사'] 11:16
[염치]에서 [삽교천]을 건너 [당진]으로 가는 [염치-선장간 도로] 건설 현장을 지나면
['곡교천'과 '염성제' 제방]
"염성제"라고 하는 [삽교천 제방]이 이어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면...
['중방배수장'] 11:29
[삽교천 제방] 이름인 "염성제"라는 안내석이 있는 곳을 만나는데
앞에는 "중방배수장"이 있습니다.
이곳이 [이순신장군 어머니]를 [게바위]에서 선박으로 운구한 포구로 추정됩니다.
간척사업으로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틀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했습니다.
['중방배수장']
"중방배수장" 좌측에는 농수로가 "중방리 골중뱅이"로 이어지고 있어
그 옛날의 뱃길이 아니었나 추정해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진의 가운데 다리 공사중에 있는 "골중뱅이"로 갑니다.
['중방배수장'에서 '골중뱅이' 가는 길]
[중방배수장]을 지나면 "중방리 골중뱅이"가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옛날엔 앞에 펼쳐진 논들이 [곡교천]이었을거라 여겨집니다.
17분 정도 진행하여 [골중뱅이]로 가면...
['중방리 골중뱅이'] 11:46
[이순신장군 어머니]와 관련된 안내나 유적은 찾을수 없고 빈집들이 즐비한데
오로지 버스정류장 이름만이 "중방리 골중뱅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여기서부터 어머니의 상여를 육로를 이용해서 본가로 옮겼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六日丙子。陰雨。曳船移泊中方浦。靈柩上轝。行還本家。望里慟裂。如何可言。
至家成殯。雨勢大作。南行亦迫。呼哭呼哭。只待速死而已。天安倅還歸。
1597년 4월 16일 병자 (음력). 궂은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문상을 마치고 돌아갔다.
명제상 "율곡 이이"는 [경세유표 제15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신장군]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624번 지방도']
[중방리 골중뱅이]부터는 [624번지방도]를 따라 진행합니다.
[이순신장군]도 어머니의 상여를 메고 이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 갔으리...
보행자 보도가 있어 자동차의 위험을 많이 줄일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방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중방리 마을회관'] 11:58
이어서 "3.1운동 시위현장"이었다고 알리고 있는 "중방리마을회관" 앞을 지나 갑니다.
['염치교차로'] 12:06
[중방리마을회관]에서 8분여 진행하면 "염치교차로"를 통과하는데
[39번국도]가 [평택.아산방조제]에서 [아산]으로 연결되는 도로였습니다.
['염치사거리'] 12:09
이어서 "염치사거리"를 만나는데 우회전하면
['염치' 중심가] 12:09~12:18
"염치읍 鹽峙邑 중심지"를 통과하는데 ...
정육점식당이 여럿 있더군요.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염치'에서 '송곡초'까지 상세 지도]
[염치읍내]에서 [송곡초등학교]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 하고....
['염치면사무소' 가는 길] 12:19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염치읍내]의 이곳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구도로를 따라 [읍사무소] 방향으로 가야 하더군요.
['염치읍사무소'] 12:23
[염치읍사무소] 앞을 지나면...
['염티초등학교' 앞]
['염티초등학교'] 12:25
"염티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 갑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은 [염치]인데 초등학교 이름만 [염티]여서 조금 의아스러웠습니다.
[치 峙]의 순우리말이 [티]임으로 의미에는 변화가 없지만...
[염치 鹽峙]는 한자로 되 있지만 [염티 鹽티]는 한자 '鹽'과 순우리말 '티'를 합친 것이니 좀 이상하죠?
"족발 足발" "역전앞"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ㅎ
순우리말로 하려면 [염 鹽]도 "소금"이라고 표현하여 "소금티"라고 해야 할텐데...
그래서 "소금티초등학교"로 하는게 우리 말에 더 적합할듯합니다. ㅎ
제 생각엔 아마도 [염치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이 '염치없다'고 느껴질수 있으니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게 아닌지...그래서 [염치]보다는 [염티]가 낫다고 한듯...ㅎㅎ
물론 저의 추정입니다. ㅎ
['염치로']
['LG전자 아산물류센타'] 12:31
보행자 보도가 잘 설치되 있는 [염치읍내]를 통과하면...
['석두교'] 12:40
"석두교"를 만납니다.
우측에 건설되고 있는 도로는 [천안]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더군요.
[위험구간]
이나저나 [석두교]부터 [방수사거리]까지는 보행자 보도가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석두교]에서 5분 정도 자동차의 위험과 싸우며 진행하면...
['석두1리' 입구] 12:45
[석두1리 안내석]과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한남아파트' 조망]
잠시후 가야할 [한남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문사]라는 절간의 뒷산인 [금병산]도 조망되는군요.
6분 정도 더 진행하면....
['석정1리'] 12:51
[석정1리] 앞 쉼터와 버스정류장을 통과합니다.
갓길이 없는 도로를 10여분 더 진행하면...
['방수사거리'] 1:00
"방수사거리"를 만나 직진합니다.
이 사거리는 좌측 [음봉]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아산]으로 가는 [45번국도]였습니다.
['방수사거리'의 '음봉-둔포-평택' 방향]
[45번국도] "음봉" 방향을 바라보고
['한남아파트' 방향]
[방수사거리]를 직진하여 [한남아파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 1:04
[아산농협원예유통센타]를 지나 10여분 진행하면...
['한남아파트'] 1:14
[한남아파트] 정문 앞을 통과하고
['여호와의 증인' '아산서광교회']
[한남아파트] 정문 옆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아산서광교회]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붙어 있어도 괜찮을려나....괜한 걱정...ㅎ
['보문사'] 1:20
이어서 [보문사]라는 절간이 또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神을 믿는 종교들이 붙어 있는데...神들끼리 싸움은 안하겠죠? ㅎ
神은 없으니 神은 없다고 서로 알려주는듯 합니다. 神이 없어야 설명이 되니까요 ~~ㅎ
['신일아파트' 조망]
[보문사]를 지나면 [신일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신일아파트]만 돌아 가면 [현충사]입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송곡초등학교' 입구] 1:32
[송곡초등학교] 정문 앞을 통과하고
['송곡초등학교' 입구에서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
[송곡초등학교]부터 [현충사]까지 상세 지도를 참고하고
['신일아파트'] 1:35
이어서 [신일아파트] 앞을 지나 갑니다.
[등산로 입구] 1:39
[물한산성] [꾀꼬리성]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라고 알리는 곳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가면...
['충무교육원'] 1:49
"충무교육원"을 만나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충무공을 비롯한 성현들의 충·효 정신을 이어 받게 하고
공동생활을 통해 도덕성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인격체로 기르기 위하여
충청남도교육청 산하에 설치된 소속기관이라고 합니다.
['현충사' 경내 진입구] 1:50
[충무교육원]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이 있더군요.
알아 보기 쉽죠? ㅎ
['현충사 샛문'] 1:52
[충무교육원]에서 [현충사]로 들어 가는 샛문입니다.
이 문을 모르면 엄청 돌아야 할듯...
['노느매기식당']
경내 공원이 무척 넓은데 [현충사 정문] 옆에 [노느매기]라는 식당이 있더군요.
"노느매기"는 사전에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현충사' 정문] 2:02~3:00
[현충사]는 입장료가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엔 휴관한답니다.
무지 오랜만에 [현충사]를 찾았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경주나 공주의 왕릉 같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먼저 둘러 봅니다.
기념관에는 [국보 제76호]로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난중일기]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장군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언급하기엔 지면이 많이 필요해 중요한것만 언급합니다.
['조선의 화포']
['거북선' 모형]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육지에선 승승장구 할수 있었으나
바다에선 출렁대는 파도 위에서 조총을 조준 사격 할수가 없어서 무용지물이 될 정도였으며
사정거리도 20m~50m여서 "화포"로 뻥뻥 쏘아대는 조선 수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주력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나 關船(관선: 세키부네)는 크기가 조선의 "판옥선"보다 작았고
군선의 속도나 방향전환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했답니다.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답니다.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군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해도 깨져 침몰해버렸으니
군선과 화포에서 일본군을 압도해서 연전연승을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이순신장군'의 전략도 한몫 더하고...
['이순신 장검']
[이순신장군의 장검] 입니다.
장검에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이 검은 검 길이가 1,970mm, 19,68mm 이고, 무게는 4,320kg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싸움에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마을을 가다듬으려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이 검은 장군이 1594년 4월 한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장인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어 바친 칼이랍니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 작가 [김훈]은 이 칼을 보고 이렇게 서문을 장식합니다.
칼의 노래
이순신 -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충무문']
한글로 쓰여진 "충무문"을 통과하는데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현충사'로 가는 중앙로]
[충무문]을 통과하면 중앙 통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우측에는 "정려"가 있고, 좌측에는 "구 현충사"가 있습니다.
먼저 우측 "정려"로 가면...
['정려각']
[안내문]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음봉" [이순신장군의 묘] 입구에 있는 [이순신 신도비] 옆에 있었던 "이봉상 신도비"를 기억하시나요?
여기서 "이봉상"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알수 있습니다.
[숙종-경종-영조] 시대에 무장으로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순신장군]의 5대 손이라는군요.
['숙종' 건립 '현충사']
[안내문]
"구 현충사 舊顯忠祠"
오리지날 "현충사"를 "구 현충사"로 표기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에 아무리 크게 철근 콩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다해도 원래 "현충사"는 "원래 "현충사"가 아닐까요?
새로 지은 "현충사"를 "新 현충사"라고 표기하고, 원래 현충사는 그대로 "현충사"라고 하는게 어떨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군사정권의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밀려나서 왼쪽편에 외로이 서 있는데
그래도 [숙종]이 직접 사액한 현판이 걸려있어 오리지날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반송]
"반송 盤松"
일반적으로 소나무는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지만
"반송"은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죠.
[현충사] 사당 입구에 있습니다.
[중앙통로]
['홍살문']
중앙 통로를 올라 가면 [홍살문]을 지나고
['충의문']
['현충사']
[충의문]을 통과하면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新 현충사"에 도착합니다.
누가 쓴 현판인지 금방 알수 있죠? ㅎ
['이순신장군 영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바라보며 참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칼의 노래> 첫 문장이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러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현충사'에서 조망]
[현충사]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끝까지 치르지도 못하고 쪽바리들과의 전쟁을 하러 슬픔을 뒤로하고 떠났습니다.
[배방산]과 [설화산] 사잇길로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며 南으로 南으로 향했습니다.
<칼의 노래>에서 다시 인용합니다.
권률은 의병장 김덕령의 혐의를 수사하지 않은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또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임금에게 의병은 뒤숭숭한 무리였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싸우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고택'과 '활터']
사당 옆에는 [이순신장군]이 '서울 건천동'에서 이사 와 살았던 고택과 무술을 연마한 활터도 있습니다.
['충의정']
[안내문]
고택 입구에는 "충무정 忠武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순신장군]도 이 물을 마셨고
그 후손들도 1960년대까지 이 물을 마시며 살았답니다.
그래서 저도 한바가지 마시고
[고택]
[고택]
[안내문]
[이순신장군]의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있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참고로 [이순신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무척 부유한 집안이어서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었답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이곳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상주 방씨'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장군은 신혼살림을 시작한것이죠.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며 다리가 부러져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매화'와 홍매화']
고택 앞마당에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특히 "홍매화"가 눈길을 끕니다.
사진작가들에게 인기있는 홍매화라고 하는데 많은 사진작가들이 절정기 꽃망을 터트리고 있는
홍매화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홍매화']
그래서 똑딱이 카매라로 '파란문'도 "홍매화"를 촬영했는데...
"홍매화"의 감흥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나요? ㅎㅎ
['활터']
[안내문]
[이순신장군]이 활쏘기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500년이 넘는 수령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굽어 보고 있는듯...
['고택' 조망]
[활터]에서 고택을 조망합니다.
다시 [이순신백의종군길]에 대해 언급합니다.
1597년 4월 16일에
[이순신장군]이 [게바위]에서 [중방포]를 거쳐 어머니 상여를 운구하여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러려는데
다음날 '금부도사 서리'인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빨리 전쟁터로 가자고 다그쳤습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十七日丁丑。晴。金吾書吏李壽永。自公州到來。促行。
1597년 4월 17일 정축. 맑음.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가자고 다그쳤다
['궁술연마장']
[활터] 우측엔 일반이들이 활을 쏠수 있는 활궁장이 있고...
[석교]
[연못]
연못을 지나
['충무문']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을 나서면
[주차장] 3:00
주차장과 공원이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명언인 "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뒤로 [현충사]의 진산인 "방화산 芳花山"이 [현충사]의 병풍이 되어 포근히 감싸고 있습니다.
[아산1구간 지도]
[거리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18.8km" 였으며, 전체적으로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칼의 노래>의 한 문장을 음미하며 답사를 마침니다.
명랑에서는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 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러 쳐밖힌 것이었다.
명랑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死地)였다.
수 만년을 거꾸러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 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의 존망의 흐름을 거꾸러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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