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죽음을 넘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 이순신생가터(명보아트홀)-의금부터(종각역1번출구)-숭례문-서울역- 국립중앙박물관-동작대교-이수역-사당역-남태령역-남태령 ['이순신백의종군길'] 윗 안내도에서 안내하는 "이순신백의종군길""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군본부고증자료]와 [각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길을 종합하여 2017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24일간 행군한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코스로 만들어 일반인들도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을 기리며 걸을수 있도록 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은 '서울툭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이순신장군생가터"를 출발하여 [이순신장군]이 수감되었던 "의금부터"가 있는 '종로구 종각역앞' "제일은행 본점"으로 진행하여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대문"을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 "남태령"까지 "약20km"가 '서울구간'입니다. ['명보사거리'] 2019년 3월 9일 (토) 연무 대체로 맑음 "이순신백의종군길"을 걷기 위해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명보사거리"로 갔습니다. [명보사거리]에는 "명보아트홀"이 있는데 예전엔 "명보극장"이라고 했으며 [이순신장군]이 탄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생가터'-'의금부터'-'남대문' 지도] [이순신생가터]에서 [의금부]가 있었던 [종각]으로 진행하여 [남대문], [서울역]으로 가는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중심구간"을 보여 주는 '네이버지도'입니다. ['명보아트홀' 앞] 10:25 "명보아트홀" 조선시대 이 지역은 "건천동 乾川洞"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였는데, 이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 내렸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대체로 '마른 개천'이어서 "乾川"이라 했답니다. 그래서 현재도 이 도로의 이름을 [마른내로]라고 지었답니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답니다. [단종] 때에 '김종서(金宗瑞:順天人)', '정인지(鄭麟趾:河東人)', '이계동(李季仝:平昌人)',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南原人)', '김수온(金守溫:永同人)', '이병정(李秉正:全義人)', [중종] 때 '유순정(柳順汀:晉州人'), '권민수(權敏手:安東人)', '유담년(柳聃年:文化人)', [명종] 때 '노수신(盧守愼:光州人)', '허엽(許曄:陽川人)', [선조] 때 '류성룡(柳成龍:豊山人)','허봉(許봉:陽川人)','이순신(李舜臣:德水人)','원균(元均:原州人)'이 모두 이곳에서 탄생하여 더욱 유명하답니다. 1545년 3월 8일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선생"과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장군"이 앞뒷집에 살았답니다. "유성룡선생"은 [이순신장군]보다 세살 위로서 [이순신장군]의 둘째 형인 [이요신]의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어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육군이었던 '이순신'을 6계급 특진을 시켜 [전라좌수사]로 '선조'에게 천거 하였다고 합니다. "원균장군"은 "이순신장군"보다 다섯살 위의 대고참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장군"이 요즘말로 ☆장군이 되어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 때에 "이순신"은 미관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었습니다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위상은 완전 바뀌었지요.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아버지 "德水 李씨 貞"과 어머니 "草溪 卞씨 守琳(수림)의 딸" 사이에서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1545년 3월 8일(음력)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데... [이순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는지에 대해선 확실치 않답니다. 할아버지 "李白祿"은 깨끗한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는데, [中宗]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 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민으로 지내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의 친정이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현충사]"로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순신]에게는 외갓집이 제2의 고향이 되는데... '서울 건천동'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8세, 13세, 16세, 18세까지 살았다는 설이 분분.. 그런데 사람 됨됨이를 확실히 알수 있을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청소년기까지는 함께 지내야 알수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류성룡선생'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6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에 그런 정황을 고려하면 16~18세까지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신뢰감을 줍니다. [이순신]은 21세에 '아산'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방 진"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어른 "방 진"은 武班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이 무예에 뜻을 두고 무술연마와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이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7년후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훈련원 別科] 과거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그는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지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신영균' 설립자] [명보극장]의 설립자는 영화배우 "신영균씨"라고 아트홀 벽면에 동판을 부착해 놧습니다. 치과의사가 스타 영화배우가 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죠? 아흔이 넘었을텐데...어케 지네시나 [명보아트홀]에서 [종각]으로 갑니다. 먼저 [명보사거리]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울지로3가'] 10:29 [을지로3가 사거리]에 도착하며 ['을지로3가'에서 '2가' 방향] [을지로3가 사거리]에서 [을지로2가] 방향을 바라보고... 5분 정도 진행하면 ['을지로2가'] 10:35 [을지로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우측 [청계2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을지로2가'에서 '청계2가' 방향] 울창한 빌딩숲이 거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이라 한산한 거리를 잠시 진행하면... ['청계2가'] 10:39 [청계2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좌측 [광교] 방향으로 건너 가면서... ['남산' 조망] [청계2가 사거리]에서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면 "남산"이 조망됩니다. ['청계천'] [청계천 淸溪川]을 구경하고 [청계2가]에서 [광교]로 올라 갑니다. ['광교'] 10:45 [광교 사거리]에 도착하여 우측 [종로1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 ['종로1가'] [종로1가 사거리-종각사거리]를 만나며 ['보신각'] 10:47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보신각" 앞에 섭니다. ['제일은행 본점'] [보신각] 대각선 방향 건너편 [종각역1번출입구]가 있는 곳에 [제일은행 본점]이 있는데 저곳이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제가 학창시절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에는 [서울예식장]이 있었습니다. ['의금부터'] [안내문] "의금부 터 義禁府址" 오늘날 제도로 맞춰보면 "의금부"는 [대법원, 검찰청, 국가정보원]을 합친 최고의 사법기관 쯤이고, "포도청"은 [경찰청],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순신장군]에겐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던 [정유년]에 특이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지요. 하나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부하들이 부산 왜놈 진영에 불을 질러 공울 세웠는데 [이순신]이 그 공울 가로챗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 이중간첩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조]는 [이순신장군]에게 어명을 내려 그를 쳐 부수라고 했는데, [이순신장군]은 [加藤清正]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부산에서 다시 절영도로 후퇴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덕도 왜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는데..(전사 1명. 포로 5명) 그 사이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는 부산진에 안착하게 되었으니 [이순신장군]은 어명을 어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진을 공략하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으로 뛰어 드는 꼴이라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 했으나 [선조]는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加藤淸正]을 잡으라고 부산에 보냈더니, 잡으라는 가토는 놓치고 애꿎은 피해만 입고 돌아와? 잡아 올려!" [선조]는 [원균장군]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어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서울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이 사건의 본질은 [선조]라는 쪼다리 왕으로부터 찾아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조]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후세가 없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선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서자 출신은 절대 관직에도 오르지도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왕위는 상상도 못하던 시대... 그래서 서자 출신인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실제 '정여립의 난' 등 반란이 많았었는데, 언제 쿠데타가 일어 날지 언제나 불안한 생활을 한 [선조]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무지 많았습니다. 특히 군인에 대해선 가혹하리 많큼 의심을 해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극형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답니다. 武將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도 두번이나 사형 당할뻔 했죠? [임진왜란]때 [선조] 자기는 의주로 몽진하고선,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장군]이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꼴은 자기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이었으니 그런 꼴을 보고 있을수만은 없었겠지요.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선조]가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형 당할 위기에 놓인 [이순신]은 기사회생 합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병조 판서 "정탁"등 시대의 흐름을 아는 인재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 어려운 전란 중에 한명의 군인도 아쉬운 마당이니 '삼도수군절도사'로 엄청난 공을 세운 [이순신]을 "백의종군"이라는 형벌로 낮추어 전장으로 내 보내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고 하니 쪼다리 [선조]도 어쩔수 없이 받아 들일수 밖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11:00 "백의종군 출발지" "백의종군 白衣從軍"은 조선시대 형벌 중에 하나이죠.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간다"라는 하급직으로 군복무를 한다는 뜻이겠지만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답니다. 사실 미미한 처벌이라고 할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기간"은 1597년 3월4일에 투옥되어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기 위해 "권율 도원수"를 찾아 가는데... 자신의 후임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진'을 치기 위해 나섯다가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 당해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는 8월3일까지를 말 합니다. 그러니까 1597년 4월1일부터 8월3일까지 약4개월간이죠. 그리고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이곳 [의금부터] 앞에서 '경북 합천 율곡리'까지 가서 "권율 도원수"를 만나는 곳까지를 의미하는데 "약670km"라고 합니다. ['시전행랑'] 우측에 나란히 솟아 있는 빌딩들이 있기 전에는 대로와 골목이 [광화문사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대로에는 "시진행락"이라는 '관설시장'이 있었던 거리이고 이 대로의 우측 뒷골목을 "피맛골"이라 했죠.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고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었다고 ['전봉준 동상' 위치] [의금부 터] 건너편 "영풍문고" 앞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있습니다. 즉, [종각역5번출입구]와 [6번출입구] 사이에 있습니다. 가는 길에 있으니 관심있게 보고 가겠습니다. ['전봉준 동상'] [안내문]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긴 "전봉준" ['전봉준'과 '종각사거리']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잎에 앉은 새야 녹두 잎이 깐닥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전봉준"은 사형선고를 받고 "운명시(殞命詩)"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광교'] 11:03 [종각사거리]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을 알현하고 [광교 사거리]를 지나면... ['청계천']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고... [뒤돌아 본 '종각사거리'] 뒤돌아 [종각사거리]를 바라봅니다. [화신백화점]이 있었던 자리엔 [종로타워]가 솟아 있습니다. 좌측엔 "의금부"가 있었던 자리에 [제일은행 본점]이 보이는군요. [이순신장군]이 [의금부 감옥]을 나와 "백의종군"을 시작한 곳입니다. 그 날의 거리 모습과 현재의 거리 모습은 무척 다르겠지만 쪽바리들의 침략행위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 정신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을지로1가'] 11:07 우리가 흔히 [을지로입구]라고 하는 [울지로1가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엔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이 서 있고, 좌측 대각선 방향엔 [한국전력 본사] 였던 건물이 이젠 빌딩 숲 속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데, 현재는 [한전 서울본부]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한전 본사]는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으로 이주했죠. ['명동입구'] 11:12 [명동입구]가 이젠 좀 초라하게 보이는군요. "밝은 동네" 明洞이 조속히 옛 밝음을 되찾기를 기원합니다. ['소공동'] [소공동] 방향으로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이고... ['옛 한국은행'] 11:16 이어서 "한국은행" 앞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서울중앙우체국'] 동쪽 건너편엔 [서울중앙우체국] 건물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서 있는데 매우 빠른 "제비"를 형상화 했다죠? ['신세계백화점'] 남쪽 건너편엔 [신세계백화점]이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가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옛 한국은행'] [옛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이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변모되 있었고, 건물 뒤에 본점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 이전했습니다. ['남대문' 방향] 11:20 [남대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좌측은 [남대문시장]이고 우측엔 [북창동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골목 입구를 지나고 [통닭집] [호떡집] 세마리에 만원하는 통닭집....무지 유명하죠? 동대문에도 비슷한 통닭집이 많이 있죠. 호떡 집엔 호떡을 사려는 행렬이 좌측 길에까지 널어서 있는데...맛이 있나 봅니다. 사 먹을까 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릴 생각을 하니 어느날에..싶어 그냥 패스 ['남대문시장골목'] [남대문시장] 서쪽 출입골목 입구를 지나면... ['남대문'과 '단암타워'] 11:27 [남대문]을 만나며 좌측에 있는 [단암타워]가 추억을 불러 일으킵니다. 40여년 전에 저 건물 꼭대기층에 있었던 커피샵에서 장모님과 상견례를 했는데...ㅎ ['남대문 수문장 교대식'] 11:30~11:40 "국보1호 숭례문"에 도착하는데 때마침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명동' 방향 조망] ['시청' 방향 조망] [남대문]에서 지나온 [명동방향]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서울시청]이 조망됩니다. [이순신장군]도 이 문을 통해 [백의종군길]을 갔습니다. ['서울역' 방향 조망] 11:40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1일 조금전 [종각역사거리]의 [의금부] 옥문을 나서서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이틀간 쉬며 여러 관리들과 친인척들을 만나며 술을 무지 마십니다. 그 날의 상황을 장군이 직접 쓴 [亂中日記] 원문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정유년 4월1일부터 4월4일까지 일기] '이순신장군'의 친필 일기는 짧은 한자 실력으로는 읽기가 너무 어려워 일반인은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근간에 여러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보여 드리는 일기는 [정조대왕]이 펴낸 "李忠武公全書卷之八 / 亂中日記四"의 원문과 번역이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람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장군 친필 일기]와 "정조대왕"이 편낸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丁酉四月初一日。晴。得出圓門。到南門外尹生侃奴家。則菶,芬及蔚與士行,遠卿同坐一室。 話久。尹知事自新來慰。備邊郞李純智來見。知事歸。夕食後。佩酒更來。耆獻亦至。 李令公純信佩壺又來。同醉致懇。領台鄭判府事琢,沈判書喜壽,金二相命元,李參判廷馨, 盧大憲稷,崔同知遠,郭同知嶸。送人問安. [1597년 4월 1일 (정유년 신유) (양력 1597년 5월 16일)]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ㆍ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ㆍ원경'과 더불어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식사를 한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이순신(李純信)-(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二相)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이순신장군]은 감옥에서 나온 첫날에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서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술을 많이 마시며 환담했다고 일기를 썻습니다. ['남산' 방향] 11:42 [이순신장군]은 둘쨋날에도 [남대문] 밖 "윤간의 종 집"에 머물며 음식을 포식하며 몸을 추스렀습니다. 初二日壬戌。雨雨終日。與諸姪話方業。進饌甚豐。 [1597년 4월 2일 (양력 5월 17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매우 푸짐하게 차려왔다. [이순신장군]은 셋쨋날에야 서울을 출발하여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 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 [1597년 4월 3일 (양력 5월 18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경기도 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남산육교'] 11:44 [남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남산육교]를 만나는데 육교 중간에 엘리베이트가 있습니다. 승강기 앞으로 가면... ['서울로7017' 조망] "서울로 7017"은 '1970년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 17개의 사람이 다니는 길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에서 명명된 서울역고가도로의 도시 재생 공원화 사업명이랍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를 공원화해 2017년 5월 20일에 개장하였고, 인근 보행로와 고가를 잇는 구조물을 추가 설치해 최종적으로 총 17개의 보행로와 연결했다고 하는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면... [서울역 고가도로 육교공원'] [뒤돌아 본 '남산육교']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역을 끼고 퇴계로와 만리재로, 청파로를 이어주는 총길이 938m, 폭 10.3m, 높이 17m의 고가차도로 1970년 8월 15일 개통되었는데, 노후화되어 안전성에 문제가 되어 보수를 하고 차량통행 대신에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를 모델로 삼았다고 하네요. [육교공원 옆면] 육교 위에서 육교의 옆 아랫쪽을 보는데, 육교 곳곳에 에스컬레이트와 엘리베이트를 설치했는데 17개 통로와 연결 한답니다. ['서울역' 전경] [서울역]의 전경이 조망됩니다. 그런데 [3.10 탄핵무효]라고 쓴 에드벌룬이 몇개 있고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진동을 합니다. '박근혜 석방 시위'를 하고 있는듯 시위 진압 경찰차들도 만약을 위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서울로7017'] 산책 나온 사람들과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남대문' 조망] 북쪽으로 [남대문] 방향을 조망하고 ['서소문' 방향 조망] 북서쪽으로는 [염창교] [서소문] 방향이 조망됩니다. ['용산' 방향 조망] 남쪽으로는 [용산] [한강교] 방향으로 [삼남길]이 뻗어 나가는데 [이순신장군]은 이 길로 백의종군 했으리라 ['서울역'] [서울역] 앞에서는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박근혜 3.10 탄핵무효'라는 구호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데 지나는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 당한 날이 2년전 3월 10일이어서 집회를 하는듯.... 그런데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던데, 지금은 시작 전인지... ['서서울역'] 11:58 [서울로 7017 서울역 고가도로공원]을 통과해서 [서서울역-청파로]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이 길 [청파로]를 따라 [용산]까지 이어져 [동작대교]로 가지만 유적도 없는 길이라 시간 단축을 위해 [지하철4호선]을 타고 [이촌역]까지 가기로 합니다. ['서울역 롯데아룰렛 백화점'] [서서울역]에서 [롯데아울렛.백화점]을 통과하여 [서울역광장] 방향으로 가면... [지하철 '서울역' 입구] 12:05 지하철 [서울역] 입구를 만나 지하로 내려 가는데 '태극기부대'가 설치한 반헌법적 구호의 현수막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4호선 이촌역'] [무비워크] [지하철4호선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이촌역]으로 갔더니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이촌역]에서 무빙워크로 연결되 있어 편리하더군요. 무빙워크를 타고 걸어 나가면... ['국립중앙박물관'] 12:22 [전시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 갑니다.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청파로]를 걷는 백의종군길을 지하철로 단축해서 그동안 한번도 관람하지 못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박물관 다웁게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전시관 로비] 입장료는 무료이며 설날이나 추석을 제외한 연중 무휴 관람할수 있다고 합니다. 전시관 로비에서 전시관으로 들어 가면... [금속탐지기 통과] 모든 관람객들은 휴대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는데 카메라는 그냥 들고 들어 가도 되더군요. [전시관 중앙 통로] 전시관은 3층까지 있는데 규모가 너무 커 모두 둘러 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듯하여 1층만 수박겉핡기식으로 돌아 나왔는데도 1시간10분이 걸렸습니다. 자세히 관람하려면 며칠 소요해야 할듯.... ['선사 고대관'] ['가야관'] ['신라관'] 삼국시대 유물 전시관을 둘러 보며 몇가지 인상 깊은 것들만 촬영해서 올립니다. 사진 촬영은 자유롭게 할수 있는데, 단, 플레시를 터트리면 않되더군요 최소 한번은 다녀 가야할 우리나라 역사 유물들의 집합소였습니다. ['북한산순수비'] 제가 북한산을 산행할때 자주 오르던 [비봉 碑峰]에 있는 모조품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자주 봤으나 진품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국보 제3호]이며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둘러 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의 영토확장""사냥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답니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답니다.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 "보물 제360호 '월광사 월랑선사 탑비'라고 합니다. 이 탑비는 신라 말의 고승 "원량선사"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네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의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어좌] '일월오봉도'가 있는 御座 ['수표'] 서울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 水標橋""수표 水標"입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빨리 부식되니 후엔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답니다. 1773년에 청계천을 준설하였고, 1889년에는 대대적으로 준설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남산' 조망] 전시실 1층만 관람하고 전시관 뒤로 잠시 나가보니 [남산]이 조망되었습니다. [남산]에서 이곳까지 얼마 전까지만해도 미군용산기지였지요. [식당 입구]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 와 부속건물로 가면 먼저 엄청 큰 식당 푸드코트가 있었는데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냥 통과하니 ['어린이 박물관'] 어린이 박물관도 있더군요. [출구] 수박 겉핡기식으로 횡하니 전시관 1층만을 관람하고 전시관을 나서면... ['겨울못'] [겨울못]이라고 하는 호수가 펼쳐지는데 "용산가족공원"이 함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문 방향] 1:13 [국립중앙박물관]을 나서서 다시 [지하철4호선]을 [이촌역]에서 타고 [남태령역]으로 갔습니다. ['동작대교' 통과] [동작대교]를 통과하며 한컷하고 ['남태령역'] 1:38 [남태령역]에 내려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코리아트레일]과 합류하여 함께 [남태령]으로 올라 갑니다. 10야분 올라 가면... ['남태령 정상부'] [남태령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우측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습니다. ['남태령'] 1:50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가 되는 큰 고개입니다. "남태령 南泰嶺"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는 "남태령의 유래"에 대해선 설명이 너무 부실합니다. '과천 이방'이 '정조대왕'에게 엉겁결에 '남태령'이라고 해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地名이란게 얼떨결에 말한다고 만들어지는게 아니죠? 제가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알려 드리면 '정조대왕'이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 "융릉"으로 이 고개를 넘어 갈때 '정조대왕'이 '과천 이방'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답니다. '과천 이방'은 얼떨결에 "여우고개"라고 아뢴것이 아니라,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여우고개"라는 말이 '여우'가 실제 많이 나타나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여우같은 놈들", 즉 '산적'들, 비리 관리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기에 "여우고개"라고 아뢰기가 조금 거시기하여, '남쪽에 있는 큰 고개'이니 "南泰嶺"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답니다. 이 고개가 "여우고개"라고 알고 있는 금위대장은 거짓 보고를 하는 '과천 이방'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느냐?"고 혼줄을 내며 처벌을 하려고 했습니다. '정조대왕'이 거짓 보고를 한 이유를 물었더니 '과천 이방'은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이지만 임금님께 이런 저질스런 이름을 아뢰기가 민망스러워 "남태령"이라고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정조대왕'은 오히려 그 뜻이 가상하다고 여겨 큰 상을 내리고, 그 이후 이 고개는 "남태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헌에 이미 "남태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책에도 이 고개가 '남태령'이라고 이미 나오고 있으니.... 이러한 지명의 유래를 과천시는 다시 조사하여 왜곡되지 않도록 하시라!~ [삼남길 안내도] [남태령]은 [경기옛길-삼남길]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이 [삼남길]은 [평택]까지 [이순신백의종군길]과 대부분 함께 겹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남길]을 이미 답사 한바 있기에 [평택]까지는 [이순신백의종군길]을 생략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또... 여기서 [평택]까지의 [삼남길]에 대해선 제가 두다리로 쓴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남태령' 서울 방향] [남태령] 정상에서 다시 [사당역]으로 내려 갑니다. [남태령]은 [관악산둘레길-관악구간]이 지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길에 대한 답사기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분들은 저의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사당 I.C.'] 2:05 [남태령]에서 [사당역]으로 15분 정도 내려 가면 [관악산]과 [우면산]을 관통하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의 [사당 I.C]를 지나 가는데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만든 도시고속도로가 엄청 막혀 효과가 반감되는듯... 특히 [서울대] 쪽에서 [사당]으로 오는 차량들이 정체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당역 3번출입구'] ['사당사거리'] 2:18 [사당역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귀가 했습니다. 일부 구간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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