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남원 도보여행』
『남원시내 역사유적 도보여행Ⅱ』
구 남원역-북문터-유애묘-남원석돈-용성관터-남원관아터-남문터-남원예촌-
살풀이명무관-황희유배지-관서당 남성재-예촌the이음-예루원 화인당-광한루
['실트랙']
『1부』에 이어 『2부』는 <구 남원역>에서 <남원읍성>의 중앙부를 지나 <광한루>까지 갑니다.
『남원시내 역사유적 도보여행Ⅱ』
['구 남원역'] 12:39
2024년 5월 23일 (목) 대체로 맑음
"구 남원역"
1931년 10월 15일에 개통되었는데, 1950년 10월 15일에 미군의 폭격으로 남원역사는 소실되었고,
1956년 7월 27일에 새 역사를 준공하였답니다. 1986년 12월 8일에 새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그 건물이 바로 앞에 보이는 "구 남원역사"랍니다.
<전라선>이 복선 전철화 하면서 2004년 8월 5일에 새로 현재의 "남원역"으로 옮겼다는군요.
['구역전 로터리'] 12:40
약40,00여평의 <구 남원역사>는 현재 공원화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름이 <만인공원>이라고
['향단로 입구'] 12:41
<구 남원역> 뒤에 <남원읍성 북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원읍성>의 정문은 <남문>이 아니라 <북문>이었답니다. <한양>과 바로 통하는 문이니까...
<정유년 4월 1일 (양력 1597년 5월16일)>
<이순신장군>이 어명을 거역한 죄로 한양 의금부에서 사형까지 당할뻔 하다가 감형되어 풀려나
<백의종군>을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도중 고향 <아산 현충사>를 들렸는데
그 때 어머니가 돌아 가시어 장례를 치루고, 말을 타고 계속 남하하여
<정유년 4월 24일 (양력 6월 8일)>에 <남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남원읍성 북문>을 통과하여 사진 속의 이 길로 출장 온 관리들이 머무는 <용성관>으로
간 길이 바로 이 길이라고 알리고 있는듯 합니다만, <난중일기>에는 "이희경의 종 집"에서 잦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다녀간 3개월 후 음력 1597년 7월 16일에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해군은 완패하고, 남해안 해상군사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전라도>를 드디어 침공하게 되었으며
음력 1597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남원성>을 침공하여 남원백성 6,000여명, 명나라 군사 3,000여명,
조선군 약1,000여명...총10,000여명이 몰살 당하며 <남원성>은 피바다를 이루며 점령 당했답니다.
<남원>에 가면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이야기"보다
더 기억해야 할 일은 "쪽바리들의 잔악무도한 침공"일 것입니다.
['동충동행정복지센터'] 12:44
저는 <용성관>으로 바로 가지 않고 <유애묘>를 들리고 <용성관>으로 가려 합니다.
"동충동 행정복센터"를 만나면 건너편에 "KT남원지사"가 있는데, <유애묘>는 "KT" 뒤로 가서
['남원교육문화원'] 12:46
"남원교육문화회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유애묘' 위치]
<교육문화회관>과 <수영장> 사이에 <유애묘>가 조금 보이는데 들어 가면...
['유애묘' 입구] 12:48
<남원교육문화원> 한귀퉁이에 <유애묘> 문이 있군요.
['유애묘']
"유애묘 遺愛廟"
조선 전기 <세종> 때 초대 "남원부사 김희 金凞"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라고 합니다.
이 양반 엄청 선정을 베풀었다고 남원 백성들이 그를 추모하는 사당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세요~
['항일운동기념탑'] 12:51
<정유재란>의 최대 피해자는 <남원백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놈이라면 치가 더 떨릴 곳은 <남원>이겠으니 "항일정신"은 "남원정신"이리라
['원불교 남원교당'] 12:52
<항일운동기념탑> 옆에는 <원불교 남원교당>이 있고
['남원우체국'] 12:53
이어서 "남원우체국"을 만나는데 노거수 밑에 <남원석돈>이 있으니 유의 해야 볼수 있습니다.
['남원석돈']
"남원석돈 南原石墩"
<남원읍성>을 지키는 수호신(당산신)을 섬기는 제단이랍니다.
['남원용성초등학교' 조망]
<남원석돈> 대각선 앞에는 <용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옛 용성관 터>라고 해서 들어 가 봅니다.
['남원용성초등학교']
<한양>이나 타 지역에서 오는 관리들이 투숙하는 '국립여관'인 "용성관"이 있던 곳이랍니다.
<용성관>은 <정유재란> 때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는데
본관 입구 계단에 남아 있다고 해서 가 보면...
['용성관' 흔적] 12:58
<용성관의 흔적>은 초등학교 본관 입구 계단에 남아 있었더군요.
옛날 <남원 3대 건축물> 중에 하나였던 <용성관>은 <용성초등학교>를 보며 추측해야 겠습니다.
['남원읍성 중앙로']
<용성초등학교>에서 나와 다시 <서문>을 향해 조금 내려 가면...
['남원부 관아터'] 1:02
"남원부 관아 터"를 만납니다.
<옛 남원성 중심지>인 <관아 터>는 <남원군청>이 자리하다가 市로 승격되어 <남원시청>을 새로
지어 이사가고, <남원문화원> 등으로 사용되고 있군요.
['광한루원로']
<남원의 명동>이라 할수 있는 <하정동>을 잠시 지나면
['남문사거리'] 1:07
"남문 사거리"를 지나 갑니다.
<남원읍성>을 빠져 나가는 것이죠.
['광한루원로']
이어서 <광한루>가 보이기 시작하며
['남원예촌' 앞] 1:10
"남원예촌" 정문 앞에 도착하는데 <이몽룡과 성춘향 동상>이 "춘향이의 고장"이란걸 알립니다.
['이몽룡과 성춘향' 동상]
"이몽룡과 성춘향 동상"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 사랑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 이히 내사랑이로다 ♬
['남원예촌']
"남원예촌"
<남원>을 대표하는 "한옥호텔"이랍니다.
[도랑]
<광한루 북문>으로 통하는 길엔 <포석정> 같은 도랑이 멋을 풍기고
['조갑녀 살풀이명무관' 입구] 1:14
<남원예촌> 건너편에는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이 있어 들어 가면...
['조갑녀 살풀이명무관']
"조갑녀 살풀이명무관"
<故 조갑녀 명인>은 1923년 남원시 금동에서 태어난 분으로 수건을 들지 않고 소매와 손끝으로 추는
살풀이춤인 '민살풀이춤'의 대가로 불린답니다. 1931년 제1회 춘향제를 시작으로 1941년까지 매년
승무와 검무, 살풀이춤을 춰 명무(名舞)라는 칭호를 받으며 이름을 날렸다고...
['안안숙선 명창의 여정']
"안숙선 명창의 여정"도 있는데
<안숙선 명창>은 49년생으로 현재 살아 계시며 "판소리 명창"으로 특히 <춘향가>등을 잘 부른다죠
여러 대학 교수로도 활동했으며 <은관문화훈장>도 받으셨더라구요.
['황희 유배지'] 1:17
"황희 정승의 초당과 광한루"
조선 역사상 최고의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 정승"이 유배 생활을 한 집이랍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광한루>를 지었다는데, 당시엔 <광통루>라 했다는군요.
그런데 천하의 청백리가 왜 유배를 가? 라고 의문이 들텐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어서 제가 언급합니다.
<황희선생>은 <고려말 공민왕> 시절에 등과하여 <고려>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죠.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으로 72명의 관료와 함께 은거 했는데
<신군부 조선>에는 절대 협조 할수 없다고 은거한 것인데 이때부터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탄생되었죠.
<이방원>이가 <두문동>을 찾아가 협조 할것을 최후통첩했는데....이 때 변절하여 <조선>으로 옮긴
사람이 <황희>였고, 변절하지 않은 나머지 관료들은 <이방원>이 불을 질러 모두 불타 죽었습니다.
<황희>는 정치적 변절자의 대명사인데 우리에겐 "청백리 정승"으로만 알려져 있죠?
<조선>으로 전향한 <황희>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유배를 당했을까...아곳으로 유배를 온 이유를 설명하자면....
<태종 이방원>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봉하려 하자
이에 극구 반대하자 <이방원>이가 <황희>를 이곳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걸거적거리면 바로 없애는 인간이 <이방원>이었죠.
그런데 아버지 <이방원>이 죽자 <세종>은 자신의 왕위계승을 극구 반대했던 <황희>를 유배에서 풀어
자신을 보필하는 영의정으로 발탁하여 국정을 이끌며 역사에 남는 황금기를 만들어서 유명해졌죠.
['항희와 소 이야기']
젊은 <황희>가 <개성 두문동>에서 변절하여 나와 길을 가다가 어느 농부와 나눈 대화가 유명한데
유명한 <황희와 농부의 대화>를 조각작품으로 설치해 놨군요. 내용을 알아야 알수 있습니다.
두문동을 나와 강원도로 가던 젊은 <황희>는
어느 날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몰고 밭을 가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황희가 노인에게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는지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 중에서 누가 더 일을 잘하는지요?"
노인은 밭에서 나와 귓속말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누런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윗 사진이 이 대목입니다)
황희는 이에 대해 밭에서 해도 될 말을 왜 굳이 나와서 하느냐고 노인에게 물었더니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두 마리가 다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더 잘한다고 하면
못한다고 하는 쪽의 소는 기분 나빠 할 것이 아니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소?"
<황희>는 농부의 대답을 듣고 부끄러움을 깨닫고,
이후 죽을 때까지 남의 단점이라곤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한루원 북문'] 1:21
<황희 초가집> 바로 앞에 <광한루 북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광한루>로 바로 들어 갈수 있지만, 좌측 담장을 따라 있는 유적을 더 답사하고
점심을 먹고 <광한루>로 들어 가야겠습니다.
['광한루원 북쪽길]
<광한루원> 북쪽 담장길로 조금 진행하면...
['관서당 남성재'] 1:22
관리들의 자제들만 다닐수 있었던 서당인 "관서당 남성재"가 있고
['예촌the이음'] 1:24
이어서 야외공연장 인듯한 <예촌the이음>이 있으며
['광한루원' 동쪽길]
<광한루원> 동쪽 담장길을 진행합니다.
['예루원'과 '화인당'] 1:27
한옥 카페인 "예루원"과
한복을 입으면 무료로 <광한루>등을 관람 할수 있다는데, 한복을 대여 해 주는 "화인당"이 있고
['추어향'] 1:28~1:52
<남원>에 가면 "추어탕"이라고 해서 <광한루 동문> 옆에 있는 <추어향>에 들어 갔는데....
남의 영업집의 음식맛에 대해선 취향이 다르기에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하지만
잔득 기대를 하고 들어 갔는데 저는 좋은 점수를 줄수는 없군요.. 값은 12,000원/인
['광한루원' 정문] 1:53
<광한루원 동문> 앞에서 <Ⅱ부>를 마치고....
『남원시내 역사유적 도보여행』은 <Ⅲ부>로 이어 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