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경기도 도립공원" [남한산성] "인조의 길" [남한산성 서문]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 [구글어스]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마천역"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 서문-북문]을 오르고 '경기도 하남시'의 "고골 古邑"을 통과하여 "광주향교"까지 약10km를 갑니다. ['거여삼거리'] 12:39 2020년 3월 18일 (수)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있는 [지하철5호선 마천역1번출구]로 나가 50m 정도 직진하면 삼거리에 있는 "거여119안전센타"를 만나 좌회전 하고, 조금 올라 가면 이곳 "거여삼거리"를 만납니다. [남한산성]이 보이는 이 도로에서 좌측은 [마천동]이고, 우측은 [거여동]이더군요. 직진해서 8분여 올라 가면... ['만남의 장소'] 12:47 [송파상운]이라는 버스회사의 버스종점을 만나는데 정면에 [남한산성]의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남의 장소"라는 등산객들의 집합소가 있는데, 이 주변을 상세한 지도로 확인하고 출발합니다. [현위치] [구글어스] "만남의 장소"라고 표기한 곳이 [현위치]입니다. 제가 이번 산행의 실트랙을 구글어스에 편집하여 보여 드리는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385년 전 [병자호란]으로 조선 16대 왕 [인조]가 항복을 하러 내려간 루트를 대략 추정하기 위해서 제가 걸어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현재의 등산로 중에 하나이며 역사적 고증을 거친 길은 아니고 추정해 본 길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인조의 길"이라고 제가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앞으로 전문가들이 확실한 역사적 고증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하남시 市界'] 12:50 [만남의 장소]에서 100m 정도 직진하면 "서울시-하남시 市界"를 지나게 되는데, '하남시 감이동 甘二洞' 속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조그마한 전통시장 같은 상가 골목을 잠시 통과하면... ['위례대로'] 12:51 현재 공사중인 [위례대로] 밑을 통과하는데, 좌측으로 가면 [성불사] 방향으로서 [연주봉옹성]으로 직접 오르는 등산로이고 직진성 우측으로 가면 [서문]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되겠습니다. [인조]는 실록에 [서문]을 통과해 [삼전도]로 내려 갔다고 쓰여 있으니 우측길로 진행합니다. 8분 정도 진행하면... [다리] 12:59 조그만 다리를 건너는데 [우익문(서문)]까지 1.3km라고 알려 줍니다. 뒤에 보이는 뾰쪽한 산이 [남한산성]의 "연주봉" 인듯 [오름길] 다리에서 완만한 오름길을 100m 정도 잠시 더 오르면... [등산로 들날머리] 1:02 먼지털이와 화장실이 있는 실질적인 [남한산성 서문 등산로]의 들날머리를 만나고 [갈림길] 1:03 [안내도] 들날머리에는 갈림길과 등산로 안내가 있습니다. 저는 [서문]으로 가장 빨리 오를수 있는 [3번등산로]를 이용합니다. [오름길] 대부분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름길을 15분여 오릅니다. 인조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14일 그날의 [인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日晩, 大駕將發, 而太僕人盡散, 內乘李星男, 牽御馬而來. 駕到崇禮門, 聞賊兵已到良鐵坪, 上御南大門樓, 令申景禛結陣于門外. 崔鳴吉請赴虜陣, 以觀變, 遂遣鳴吉, 請成於虜, 以緩其師. 上還從水溝門, 出向南漢山城。 是時, 變出倉卒, 侍臣或有步從者, 城中人父子、兄弟、 夫婦相失, 哭聲震天. 初更後, 大駕到南漢山城. 해가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실록의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기 쉽게 '파란문'이 친절하게 풀이해 드리면 [대가(大駕)]는 임금이 타는 가마를 의미하는데 요즘으로 치며 '벤즈 리무진'같은 거겠지요? ㅎ [태복인(太僕人)]은 '궁중의 말과 가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고 [내승(內乘)]은 '태복인의 직급 중에 하나' 인듯 한데 높은 지위인듯 합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현재의 [광희문]을 말하는 것인데 '을지로7가'와 '퇴계로7가'가 합류하는 현재의 [동북고] 앞 삼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삼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광희동'에 복원해 놨습니다. [수구문(水溝門)]은 한양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환경 오물을 성밖에 내다 버리는 문으로 이용되었고,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어 [남소문]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했습죠. '왕십리'라는 지명은 이 [수구문]에서 십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往十里'라고 했는데 한양성에서 배출되는 환경 오물들을 내다 버리는 곳이어서 '똥파리'들이 들끓었다고 [왕심리똥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답니다. '초경(初更)'은 밤 9시경인데 "初更後"이니 밤 10시경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위의 실록을 알기 쉽게 제가 간단하게 풀이 하자면 청나라 군대가 쳐내려 오자 [인조]는 '한양성'의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백성들의 시선을 피해 시체나 똥물을 내다 버리는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 갔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이 비록 도망이지만 행차인데도, 가마를 메는 놈들까지 대부분 도망 가서 가마 멜 놈들이 없어 [내승(內乘)]이 가마 대신 말을 끌고 와 도망 갔다는 것 아닙니까...어휴~~쪽팔려... [갈림길] 1:18 화장실에서 15분 정도 오름짓을 하면 이런 갈림길을 만납니다. 직진성 좌측길은 조금전 안내도의 [2번등산로]이며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주등산로여서 계단과 로프등 시설이 잘 되 있으나, 저는 지형적으로 [인조]가 우측 [3번등산로]를 이용 했을거라 추정하여 우측길로 올라 갑니다. 어느 길로 가나 다시 만납니다. 우측길로 잠시 나가면... [조망처] 1:22 여기선 정확한 [서문]의 위치를 알수 없으나 [남한산성] 능선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을 15분여 더 올라 가면... [주등산로] 1:37 조금전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로프등 안전시설이 설치된 가파른 등산로를 다시 만나는데... [인조]는 평민복을 입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대동하고 자신은 백마를 타고 [서문]을 나섯다고 실록에 쓰여 있는데 가파른 산길에서 말을 타고 내려 가는 것은 걷기보다 더 위험하기에 아마도 말을 탓다가 가파른 곳에선 말에서 내려 걷다가를 반복하며 하산 했을 거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송파]로 통하는 산길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오름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러 내려 간길은 [서문]에서 [삼전도]로 갔다고 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지만 [인조]가 몽진을 하며 [남한산성]으로 올라 갈때엔 어느 길을 이용해 [남한산성]으로 올라 갔는지에 대해선 실록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 때 [수구문]을 출발하여 '초경'이 지나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정문이라 할수 있는 [남문]을 통해 올라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설화가 거의 정설화 되다시피 전해 내려 옵니다. 1636년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갔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인조실록]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살찐 비만의 [인조]를 업고 간다는 것은 무지 힘들었겠죠? 그래서 업혔다 걷다가를 반복했다는데, 현재의 [송파구 오금동] 쯤을 지날 때에는 [인조]가 다리가 아파 주저 앉았는데, 후세의 백성들은 "살찐 임금 인조는 오금이 져려 체면이고 뭐고 주저 앉았다"고 비아냥거리며, 그통에 이 동네 지명이 [오금동]으로 불리워진 사연 중 하나라고 놀려 댓답니다. [오금동]은 [오동나무 梧]와 [가야금 琴]으로 오동나무가 많아 가야금을 많이 만드는 마을에서 지명이 유래하는데도....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쪽팔리는 도망을 해서 백성들로부터 비아냥을 받은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올라 갔답니다. 현재 '송파구 도서관' 앞 마당에는 그 날의 그 상황을 동상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무꾼 "서흔남"이 [인조]를 업고 올라 가는 동상이 엄청 크게 건립되 있는 것이죠. 그 사진을 보여 드리면... ['송파구립 도서관' 앞 마당에 건립되어 있는 '서흔남'과 '인조' 동상]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 갈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임금님은 피난하는 것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무릎을 탁 치면서 "너 나보다 낫다"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무엇이던 들어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두말없이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 나뭇꾼이었는데, [인조]는 그에게 '종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관리 사무소와 역사기념관 앞 주차장 가에 있는 '서흔남 묘비'] ['서흔남 묘비'] ['인조'가 내린 '서흔남 공적비'] 산성안에 들어 가서도 서흔남은 여러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어지자, 남한산성 주변 지리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속여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답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하네요. [서흔남]은 죽을 때 자기 관 위에 [인조]로 부터 받은 '곤룡포(袞龍袍)'를 올려 달라고 하여 '곤룡포(袞龍袍)'를 덮어 쓰고 죽은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이었답니다. [인조실록]에도 밀사로 [서흔남]을 내 보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나옵니다. 1637년 1월7일자에는 ○城中居徐欣男及僧人斗淸, 應募出去, 持都元帥金自點、黃海兵使李碩達、全羅監司李時昉狀啓而來。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찮은 천민 임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서흔남에게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으며 그 공적비가 바로 위 사진입니다. 이것은 野史가 아니고 正史입니다 [주등산로] 1:49 [병자호란]은 왜? 일어 났는지를 알아야하겠죠. 제 나름 언급하자면...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후임인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세력인 훈구파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인조'를 옹립한 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나라'를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훈구파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쉼터]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서문] 앞에 있는 쉼터를 만나는데 호랑이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면.... [조망] 출발지였던 '거여동' '마천동'이 희미하게 조망됩니다. [인조]는 분명 이 길로 몽진과 항복을 하러 눈 덮힌 산길을 오르내렸을 거로 짐작 됩니다. ['서문' 입구] ['서문'] 1:52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경기도'가 지정한 도립공원 3개 중에 하나로서 정식 명칭이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이 되었죠. 또한 2014년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서문] 통과] ['서문' 안내문] 지금으로부터 385년전..그러니까 무지무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남한산성]의 문 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은 "西門-右翼門"을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통과했습니다. '청나라'에 항복하러.... [城안] 城 내부를 들여다 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 行宮이 있습니다.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어디로 갈것인지 길을 찾지 못하고 말싸움만 하다가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헤 부러지고 마는 허무한 국가의 운명이 바람 부는 날의 촛불같았을 그 날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 갑니다. ['서문'] (10분간 휴식) 본명이 "우익문 右翼門"인 "西門"을 城안에서 바라본 광경입니다. 1636년12월 14일 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유난히도 춥고 눈도 엄청 많이 내렸고 일식도 나타나는 겨울에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며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1637년 1월 30일의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남염의(藍染衣)]는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을 의미하지요. 계급장 떼고 평민복 입고 자식들을 인질로 끌고 나가는 패전보다 못한 항복, 그 치욕을 감내한 남한산성.... 아 ! 백성들이 통곡을 한것은 나라 잃은 슬픔일까 [인조]에 대한 연민일까... [옆에서 본 '서문'] '김훈'의 역사 소설 '남한산성'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합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 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바스락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 가면 눈 덮힌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 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 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 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서울' 조망] 2:17 [서문]에서 [연주봉옹성] 방향으로 조금 가면 전망명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전된 서울과 서울을 감싸고 있는 북한산 도봉산 등을 조망합니다만 저의 눈에는 1637년 1월 30일의 상황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삼전도에서의 항복" "三田渡"는 앞에 보이는 [롯데월드타워]가 있는 [석촌호수] 주변이라고 합니다. [석촌호수] 옆에 항복을 하고 충성을 맹세한 치욕의 "삼전도비"가 현재도 세워져 있죠. 제가 예전에 답사를 하고 촬영을 한 사진과 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삼전도비']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가 오리지날 이름이죠. "삼전도비"라고 하는 것은 이 비를 '삼전도'에 세워서 부르는 일반명사입니다. "삼전도"는 저곳 잠실나루터 부근인데 밀물 때에도 잠기지 않는 밭이 세곳 있었다고 "三田渡"라고 했답니다. 이 비석의 전면 좌측에는 '몽골글자'로, 우측에는 '만주글자'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놨습니다. 글의 내용을 번역하면....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 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삼전도비']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삼배고구두례'를 하며 목숨만 살려 달라고 남긴 "치욕의 비석"입니다. 포로로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주축으로 수만여명을 포로로 보냈으며 여자가 대부분이라죠. 정조를 짓밟힌 여자를 "화냥년"이라 하죠? 이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라고 했는데, "환향녀"가 음운변화로 "화냥년"이 되었으니 "인조"는 자신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화냥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 오는 "환향녀"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 "홍제동"에 있는 "홍제천"에서 '여자의 그곳'을 씻기만 하면 처녀로 구제해 준다고 했으며 그래서 개천 이름이 "모두 구제헤 주는 개천"이라고 "弘濟川"이 되었다는 겁니다.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 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이 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듯 합니다. - 파란문 - ['연주봉' 조망] 전망대에서"연주봉"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연주봉"은 한자로 "連珠峰"으로 쓰는 듯 하지만, '파란문'의 생각에는 "戀主峰"으로 느껴집니다. [서문]을 통해 항복하러 가는 임금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어떤 연민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주봉]에선 [서문]에서 이어지는 행렬이 [삼전도]까지 잘 보였을 겁니다. ['서문'에서 '북문'까지 지도] [서문]에서 [연주봉옹성]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상세 지도입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 2:21 [안내문] "연주봉옹성"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남한산성]에는 네개의 옹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입니다. ['연주봉옹성' 조망] 城 밖에 돌출되 있는 [연주봉옹성]을 조망하고 [내림길] [북문]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조망] [북문]으로 가며 조망하는 [남한산성]의 동쪽 끝에 있는 [동장대]가 있었던 봉우리가 보이며 [남한산성]의 외곽성인 "봉암성"까지 잘 보이는군요. 실록에는 저 [봉암성] 근처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이 [북문] 아래에 있는 행궁까지 날아 왔는데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술되 있습니다. 대포알은 '오리알' 정도 크기였다고... ['북문'] 2:34 "全勝門-北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한 "고골-법화골"로 나가는 문입니다.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300명이 내려가 기습공격을 해? 당시엔 겨울이어서 앙상한 나무가지로 시야가 트여 성문으로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망원경이 있어 동태파악이 확실이 되었는데도 성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으니 뭔 껀수를 만들려고 한게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습니다. 조선군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던 청나라군은 문 밖에 있는 고골계곡에 없는듯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어리둥절하여 철수하는 조선군 300명을 거의 전멸시키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후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북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개명 하였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29일)' ○是日, 出兵北門外, 陣于平地, 賊不與之戰。 日且暮, 體察使金瑬在城上, 傳令收軍上城, 賊自後掩之, 別將申誠立等八人皆死, 士卒死傷甚多。 瑬以覆軍、(債)〔僨〕 事待罪, 上慰諭之.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수어장대' 조망] [북문]에 올라 [수어장대]를 조망하고... ['북문' 밖 조망] [북문]을 통과하여 [고골계곡]으로 내려 가서 [뒤돌아 본 '북문'] 2:39 [북문]을 뒤돌아 보고 ['북문갈림목'] 2:42 계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북문갈림목]을 만나는데, [위례둘리길]과 [고골계곡]이 나뉘는 곳이군요. [급경사 내림길] [머리 조심] 2:49 [북문]에서 내려 가는 길은 엄청 가파랏습니다. 적군을 방어하기엔 좋은 지형이지만 공격하러 내려 가기엔 부적절하겠더군요. 제가 느끼기에도 이 길로 내려가 "바위에 계란 던지기"를 한것은 자살행위가 아닌지... [데크 계단] 제법 긴 데크 계단이 10여분 이어지고 [쉼터] 2:58 데크가 끝나는 곳에 제법 너른 쉼터가 있고 이 길이 "세미길 稅米"이라고 알리고 있더군요. 한강을 통해 운송된 곡식이 [남한산성]으로 다시 올려 보내지는 길이었다고 ['고골' 계곡길] 이어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8분여 진행하면... ['토박이' 음식점] 3:06 '토박이'라는 음식점을 만나는데, 닭, 오리 백숙과 도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더군요. ['벌봉 갈림목'] 3:10 조금 더 내려 가면 "벌봉 갈림목"을 만나는데 [고골]에서 "벌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군요. ['덕풍천'] [북문]에서부터 [한강]으로 흐르는 개천이 "덕풍천"이군요. 다시 8분여 진행하면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 3:18 "연자방아 입구 삼거리"에 도착해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북문]에서 급격한 내리막 이후엔 바로 평지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좌측에 [연자방아]가 있다고 해서 다녀 옵니다. ['벌봉' 조망] 삼거리에서 50여m 가까운 곳에 [연자방아]가 있으며 여기선 [벌봉]과 [봉암성]이 아주 잘 조망되는군요. 그리고 "법화사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군요. "법화사" [법화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이곳에서 전사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답니다. 당시의 [법화암]은 '양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딴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고골]을 [법화골]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연자방아'] 3:20 [연자방아]를 흘깃 구경하고 다시 돌아 나갑니다. [공용주차장] 3:27 "고골 공용주차장"을 지나는데 마을버스가 다니더군요. ['고골로'] ['하남 교산 신도시'] "고골-古邑"은 [하남 교산 신도시]가 건설 될 예정이라는군요. 곳곳에 반대하는 현수막도 엄청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돈 돈 돈 때문이겠지요? ㅎ [뒤돌아 본 '남한산성'] 3:45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십만대군이 진을 치고 [남한산성]을 향해 항복을 강요하던 곳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골말' 안내석] 4:05 "고골-古邑"은 [한성백제] 초기 왕궁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아마도 [유리왕]이 살던 왕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동네 이름이 "春宮洞"이라는 곳이 있죠. 이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등으로 확장 이전 했다고 합니다. ['덕풍천' 수변길] 4:08 [덕풍천 수변길]을 잠시 통과하면 좌측에 [광주향교]를 만납니다. ['광주향교' 관리사무소] 4:13~4:20 ['광주향교 정문'] ['명륜당'] ['대성전'] "광주향교 廣州鄕校" [광주향교]가 왜 '하남시'에 있냐구요? ㅎ 예전 "廣州"는 현재의 '광주시' 뿐만 아니라 '한강' 아랫쪽 '하남시-성남시-과천시-안양시-안산시'까지 '광주현'이었답니다. 그래서 '넓을 廣'을 사용하는 "廣州"여서 "광주향교 廣州鄕校"가 이곳에 있는거죠. 매우 큰 규모의 향교입니다. ['객산' 조망] "객산'을 조망하는데 추억이 새롭군요. ['고골사거리'] 4:21 [춘궁동]의 "고골사거리"에서 답사를 마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둔촌역]으로 가 귀가했습니다. [고도표] [구글어스] 구글어스로 보는 "고골"은 풍수지리적으로 어던 느낌이 드나요 [한성백제]의 초기 왕궁이 자리 잡았다고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 않나요? 오늘 걸은 거리는 약10km였으며 3시간 40분 정도가 걸렸군요. '병자호란' 비극의 역사...치욕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입니다. 역사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는다고 해서 가릴수도 없고, 파괴한다고해서 지울수도 없습니다 삼전도비를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 파란문 -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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