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역사』
『금성대군신단』『소수서원』
['금성대군신단' 입구] 1:14
2020년 6월 24일 (수) 흐림
[부석사] 답사를 마치고 [27번시내버스]를 타고 약25분 정도 걸려 [소수서원] 앞에 내렸습니다.
[소수서원] 앞에 있는 "금성대군신단 錦城大君神壇"부터 먼저 찾아 보고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입구에는 "단종복위운동 聖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금성대군신단' 정문]
神壇 정문으로 들어 가면...
['주사 廚舍'] ['제청 祭廳']
좌우에 '주사 廚舍'와 "'제청 祭廳'"이라는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데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齊室'이랍니다.
이 건물들은 1980년에 건립되었다는군요.
['금성단' 정문]
이어서 "錦城壇"이라는 현판이 달린 神壇 정문인 "일각문一角門" 으로 들어 갑니다.
조선시대 현판글은 모두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도록 되 있는데 반대여서 특이하군요.
['錦城壇']
"금성단 錦城壇"
이곳에 대한 내용은 [영주시 홈페이지]에서 인용합니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비롯한 순절의사들을 제사드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평소 '수양대군'을 경계하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謀叛)의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관노의 밀고에 의해 관군의 습격을 받게되고,
순흥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순흥부는 폐부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19년(숙종 45)에 순흥인 이기륭이 단소를 설치했으며,
1742년 (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고,
높이 140㎝, 폭 55㎝, 두께 24㎝의 크기로 순의비를 세웠답니다
제가 느끼기엔 둘째 형으로부터 살해 당한 "금성대군"보다 그들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더 비극적 삶을 산
최악의 불행한 아버지라고 늘 느낌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지만 "修身齊家"는 빵점 아닌가요?
['금성단' 앞]
제단을 둘러보고 나가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압각수']
[안내문]
"압각수 鴨脚樹"라는 보호수가 있더군요.
1,200년이 넘는 엄청 오래된 은행나무라는데 그 잎의 모양이 "오리발" 같다고 "압각수 鴨脚樹"라 부른 답니다.
忠臣나무라고도 불린다는 이 은행나무의 내력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세요. ~
건너편에 있는 [소수서원]으로 갑니다.
['소수서원' 입구 주차장] 1:36
['소수서원' 정문 앞 광장]
['소수서원' 정문]
[소수서원] 정문 앞에는 주차장과 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엔 모든 관람객에게 입장료가 무료랍니다.
우린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ㅎ
['학자수 學者樹']
정문으로 들어 가면 무척 오래된 금강송 소나무들이 우거진 "학자수림 學者樹林"이 반겨 줍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 學者樹"라고 부른답니다.
우측엔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숙수사 당간지주']
[안내문]
"숙수사 당간지주 宿水寺 幢竿支柱"
[소수서원]은 서원이 되기 전엔 이 자리가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었답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은 폐사되고 그 자리에 서원이 들어 섯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불교시대에서 유교시대로 넘어 갔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소수서원' 정문 앞]
[당간지주]를 지나면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좌측을 보면
['영귀봉']
"영귀봉 靈龜峰"이 보이는데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영귀봉]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는 "소혼대 消魂臺"가 있군요.
이 주변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다음 안내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안내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우리나라 서원 9개소 중에 하나입니다.
['지도문'과 '경렴정']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과
정문 앞엔 "경렴정 景濂亭"이 있는데 "신제 주세붕 선생"이 창건한 정자로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랍니다.
['취한대']
['경자바위']
[줌인한 '경자바위']
[경렴정] 뒤에는 "죽계구곡 竹溪九谷"으로 유명한 "죽계천 竹溪川"이 흐르고 있는데
"취한대 翠寒臺"와 "敬字바위"가 보입니다.
"취한대"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이는데, "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라고
"敬字바위"라고 한답니다.
이 글자도 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이 새긴 글자랍니다.
[안내문]
이곳이 원래 "숙수사 宿水寺"라는 절간이 있었던 곳이란건 조금 전 당간지주에서도 확인했습니다만
"宿水"라는 말이 '물도 자고 간다'라는 뜻일테니 흐르는 "죽계천"도 이곳에 머물며 하룻밤 자고 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걸 직간접적으로 알려 주는듯 합니다.
['죽계천']
"죽계천 竹溪川"이 [소수서원]을 휘감고 흘러 갑니다.
조금 전에 들렸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으로 친형인 [수양대군]으로부터 처참한 보복을 당해
죽을 때에 이곳 관리들은 물론 일반 양민들까지 거의 몰살 당했답니다.
그래서 이 [죽계천]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변했었다죠.
이렇게 아름다운 "죽계천"과 "순흥"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피로 물들인 그런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강학당'] 보물 제1403호
정문인 [지도문 志道門]을 통과하면 강의를 하던 교실인 "강학당"이 바로 나타납니다.
강학당에는 "백운동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주세붕 선생"이 창건시에 "주자"의' 여산 백운동서원'을 본따 "백운동서원"이라고 불렀답니다.
['강학당' 내부]
강학당 내부로 들어 가면 제법 너른 강의실이 펼쳐집니다.
"소수서원 紹修書院" 사액현판이 엄청난 의미로 다가 옵니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효시가 되었는데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답니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당시 [명종] 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교육기관-학교"가 탄생된 것이지요.
['강학당' 우측]
['강학당' 좌측]
"소수서원"이 공립교육기관으로 탄생되는 배경을 알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아야하겠죠.
그래서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정치 상황을 요약해 보겠으나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나라의 정치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꾼 '조선왕조'...
"공자 孔子"가 세운 "유학"을 "주자 朱子"가 새로이 정립한 "성리학"으로 정치이념체계를 바꾸어 나갔죠.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까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리고 여러차례의 정변으로 인해 나라에는 공신들이 넘쳐났습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따른 공신, [중종]의 반정을 이끈 공신들이 넘쳐났는데
왕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들이 득세했는데 이름하여 "훈구"라 하죠.
개혁을 외치는 신진 사림세력들을 수구세력인 훈구파들이 무오, 갑자, 기묘, 을사의 네차례 사화로
신진 사림들은 처참하게 일망타진되고 말았지요.
이때 "퇴계 이황", "서경덕", "조식"등의 성리학자들은 왜 우리가 이렇게 참화를 당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각자 자신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 덕분에 아직까지도 완벽한 이해를
보지 못했던 "성리학"은 이때 학문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훈구파'의 전횡에 휘둘리던 [중중]이 그들에게서 벗어 나기 위해 "신진 사림들"을 중용하게 되었지요.
"정암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되고, "훈구파"를 몰아내고 개혁은
시작되었지만, 또다시 막강한 수구세력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신진 사림'들은 다시 몰락하게 되었죠.
수구세력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쥔 부와 권력을 절대 놓지 않으려교 하죠.
그러나 [명종]대에 와선 다시 '훈구파'들의 권력독점에 제동을 걸지 않을수 없었던 상황이 다시 돌아 왔는데
훈구파들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 왕은 견제세력으로 다시 '신진 사림'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을 수 없었죠.
이때에 등장하는 '신진 사림'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 "성리학"을 설파한 "퇴계 이황"등 신진 사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서원"을 세워 새로운 인재 양성을 하게 해 주는 것이었죠.
그 첫번째가 바로 "소수서원"이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서원 이름도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라는 "紹修書院"...
"이미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인재 양성을 한다"라고 유추해석해도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 서원이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사림'들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탄압받던 사림들과 이런 사림들의 국가 질서 운영방식이
국가로 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선배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고 학문을 교육하는 기관이 되었고
곧 그들의 근거지가 된 것이죠. [명종]이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겠나요.
제가 서두에 "[파란문]이 나름대로 당시 상황을 요약한 개인적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라고 언급했습니다만
그냥 관광으로만 다녀가지 말고 그 의미도 나름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미래지향적일 것입니다.
['정료대'와 '관세대']
[안내문]
"장서각"앞에는 "정료대"와 "관세대"가 있고
['문성공묘']
"문성공묘 文成公廟"는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랍니다.
불교를 국가 이념체계로 삼은 고려시대에 이미 "성리학"은 고려에 전래되고 있었습니다.
최초가 "회헌 안향 선생"이고 뒤이어 모두 잘 아시는 "포은 정몽주선생", "삼봉 정도전선생"등이 있었습니다.
['직방재']
['학구재'와 '지락재']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는
요즘 말로 쉽게 말하자면 학생들의 기숙사
['영정각']
선배 '유학자'들의 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이 있는데
"영정각" 앞에 있는 "일영대"가 눈길을 더 끄는데...
['일영대']
[안내문]
해시계이군요...ㅎ
['주자 선생'과 '안향 선생' 영정]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의 영정과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의 영정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안향 선생의 영정"은 "國寶 第111號"로 지정되 있답니다.
['허목 선생'과 '이원익 선생'영정]
['주세붕 선생'과 '이덕형 선생' 영정]
"주세붕 선생의 영정"은 "寶物 第717號"로 지정되 있다는군요.
['소수서원' 후문]
[소수서원]을 둘러 보고 [소수서원] 뒷문으로 나가면....
['사료관']
"사료관"이 있고 뒤에는 "충효교육관"과 "관리사무실"이 있더군요.
['소수서원'에서 '선비촌' 통로문] 2:02
[공원]
[소수서원]에서 [선비촌]으로 가는 통문을 통과하면 공원이 이어지고
['죽계교']
['선비촌' 연결 통로] 2:07
[죽계천]을 건너 [선비촌]으로 가는 [죽계교]를 건너 갑니다.
['선비촌' 이곳저곳]
"선비촌"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과 비슷하여 휭하니 둘러 보고
['죽계루'] 2:13
['선비촌' 정문 광장] 3:08
[죽계루]로 나가면 [선비촌 광장]이 펼쳐 집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속 음식점들이 있는데, '종가집'이라는 음식점에서 식사와 안주로 한잔 걸치고...ㅎ
경상도 음식문화를 낮게 보던 시대는 지나 갔습니다.
경상도 음식들도 새롭게 혁신하여 무지 좋아 졌습니다.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
['영주 선비상'] 3:20
'영주시'가 자랑하고 있는 "선비"
그리고 조선시대를 휩쓴 "유교문화-성리학"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상명대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시 저자 "김경일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로 정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 따라 지금의 제목으로 바꾸었고,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풍기역'] 3:36
[플랫홈] 3:55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사랑이야기』『유교문화의 得과 害』를 보고 느끼며 보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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