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가는
금북정맥 여섯번째구간 산행기
각흘고개-구만봉-봉수산-천방산-부엉산-
극정봉-명우산-절대봉-서재-차동고개
길을 가다....
깊은 산골에서 만나는 것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폭풍우도 아닌 人間이라고 합니다.
人間 !
많은 불행은 人과 人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속이고 위협하고 뺏고 죽이고.....
만나지 말아야 할 인간들이 우굴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또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인간들이 모두 惡緣이 되는 것은 아니죠
더불어 더 많은 즐거움도 人과 人사이에서 만들어 집니다
"錦北正脈"
그 끝에 닿으면 여름이려나~ 가을이려나~눈이 내릴려나~
산길따라 바람따라 세월따라 흘러 가는 산행길
[금북정맥 전체구간]
"금북정맥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이 세개의 정맥이 분기하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칠장산"에서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안흥리'까지 약280km의 산줄기인 "금북정맥"을 갑니다.
[6구간 산행개념도]
2012년 6월 27일 (수) 맑음
'금북정맥'의 여섯번째 구간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거산리'와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를 잇는 "각흘고개"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와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를 잇는
"차동고개"까지 도상거리 약 18.3km를 갑니다.
['전철1호선'을 타고 '온양온천역'으로 ]
[전철 1호선]의 첫차에 대해 알면 '금북정맥'을 다니는데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온양온천역'으로 가는 첫차는 오전 5시에 "구로역"과 "병점역"에서 동시에 출발합니다.
'병점역'에서 출발하는 5시 첫차를 타면 여유있게 '온양온천역'에서 '각흘고개'로 가는
[100번 시내버스]첫차를 탈수 있고, 두번째 5시 30분 전동차를 타면 '온양온천역'에 6시 36분에
도착하여 무척 바쁘게 뛰어야 [100번 시내버스] 첫차를 탈수 있습니다.
('구로역'등에서 출발하는 첫차등은 각자 검색하여 시간에 맞추어 가면 됩니다)
저는 '병점역'에서 두번째 5시 30분 전동차를 타고 가는데 손님은 거의 없었으며,
'온양온천역'에 내리자마자 뛸 준비를 하고 갑니다.
[온양온천역 1번출구] 6:40
전철에서 내리자 마자 뛰는데도 규모가 큰 '온양온천역' 때문에 시간은 급합니다.
[1번출구]로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가, 앞에 보이는 큰 도로 좌측으로 30여m 가면...
[온양온천역 버스정류장] 6:41
'온양온천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6시 41분이었고, 시간표를 촬영하고 있으니
[100번 시내버스] 첫차는 6시 42분에 바로 도착하고 급히 출발했습니다.
종점인 '용화동생활관'에서 6시 40분 출발인데 2분여만에 '온양온천역'에 도착했습니다.
한시간에 한번씩 매시간 40분에 계속 출발하고 있으니 편리한 시간의 버스를 타면 됩니다.
[버스 시간표]
[100번] [101번] [102번]이 합쳐서 매시 40분에 출발하니 어느 버스를 타도 됩니다.
이 버스시간표를 참고해서 전철시간을 역으로 맞추면 됩니다.
종점에서 '온양온천역'은 매우 가까워서 2분이면 도착하니 참고해야겠죠?
[각흘고개 버스정거장] 7:27
'온양온천역'을 6시 42분에 출발한 [100번 시내버스]는 45분이 걸려 '각흘고개'에 도착합니다.
이 버스 정거장의 이름은 "거산2리-금계령"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각흘고개'라는 안내는 어느 곳에도 없으니 "거산2리-금계령"정류장에서 내려야 합니다.
[각흘고개]
'금북정맥'의 여섯번째 구간인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거산리'와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를 잇는 "각흘고개"에 다시 돌아 왔습니다.
"빨래판구간"이라는 지난구간의 날머리가 미풍에 날라간 하룻밤의 꿈처럼 옛일로 멀어집니다
여섯번째구간의 들머리는 해태상 옆으로 나 있습니다.
[각흘고개 산행 들머리] 7:30
오늘도 단 한명의 산객도 만날수 없었던 산길로 홀로 떠납니다.
먼저 이 지역에선 그나마 이름있는 "봉수산"까지 4km라는 안내가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山路의 우측은 "아산시"이고, 좌측은 "공주시"라는 것입니다.
[묘지에서 포스트 송전탑 조망] 7:36
'각흘고개' 들머리에서 다소 가파른 등로를 오르면 먼저 묘지가 나타나고,
묘지에 서면 '금북정맥' 능선에 있는 송전탑이 보입니다.
송전탑을 포스트로 삼으며 자연 속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각흘고개'에서 '부엉산'까지 구글어스]
출발을 하며 이 주변의 山勢를 구글어스를 통해 전체적 상황을 파악하고 갑니다.
눈여겨 볼 점은 '봉수산 갈림봉'에서부터는 "예산군"과 접경을 이루며 간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안성'에서 출발했는데 벌써 '충남 예산'으로 진입합니다.
['119 구조목 01-01번']
묘지를 지나 된비알 숲속으로 들어서면 "119 구조목 01-01번"을 만납니다.
이 "119구조목"은 "봉수산 정상"까지 11개가 세워져 있으니 거리 측정에 도움이 됩니다.
[된비알]
초장부터 급경사 오르막을 13분 정도 오르면.....
['351m봉' 능선 삼거리] 7:49
"351m봉-능선 삼거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정표가 반기며 오른쪽 방향으로 길안내를 합니다.
['봉수산'으로 가는 길]
정맥길은 다시 평온을 되찾으며 완만한 오름길을 갑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살이 오늘의 기온을 가늠케 해 줍니다.
104년만의 가뭄이라는 뜨거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안개가 없어 가시거리는 매우 좋아 사진 촬영에는 도움이 됩니다.
['385m봉'에서 조망] 8:03
"351m봉-능선삼거리"에서 14분 진행하면 "385m봉"에 오르며 시야가 처음으로 트입니다.
먼저 서남쪽으로 건너편 "천방산"이 방긋 웃고, 서쪽 멀리 "예산군"이 조망됩니다.
['385m봉'에서 '봉수산' 조망]
북쪽으로는 가야할 "봉수산"이 조망되는데, 그 앞에 있는 "정맥 갈림봉"에서 "봉수산"을
갔다가 되돌아와 "460m봉"으로 가야합니다.
['385m봉' 이정표]
"385m봉"을 지나면 [119 구조목 01-04번]을 만나며 계속 완만한 흐름을 보이는 길을 갑니다.
['구만봉' 갈림길]
"385m봉"에서 10여분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며, 직진 오르막으로 올라 갑니다.
이곳이 "구만봉"으로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구만봉' 정상] 8:21
"구만봉 392m"
'진혁진씨 개념도'에는 "390m"로 표기된 곳인듯합니다.
이정표의 거리표시는 이정표 마다 애매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금북정맥'은 어디를 말하는 곳인고?
[숲길]
"구만봉"에서 부터는 길섶에 바위들도 제법 보였습니다.
'아산시 온양'에 오면 생각나는 인물은 뭐니 누구니 해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전국민이 존경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물 중 한분이란거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위대한 영웅이십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며, 특히 영화나 드라마로 여러번
방영되어 그의 생과 업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어서
오늘은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번 생각 해 볼까 합니다.
이 글은 제가 2009년 1월 24일(토) 설명절 첫날에 "광덕산-망경산-설화산"을 종주하면서
산행기에 한번 쓴 글입니다만, 못 보신 분들을 위해 한번 더 올려 드림니다.
['380m봉' 정상] 8:30
"봉수산"까지 1.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380m봉"을 지나 갑니다.
봉우리라는 느낌은 거의 없는 봉우리입니다.
"이순신장군의 죽음"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맞아
戰死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이 1598년 11월 19일이며 이순신장군의 나이가 54세였던 해입니다.
그러나 세간에는 이런 저런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으며, 이순신장군에 대한 평가도
임진왜란이 끝난후 200여년이 지난 1792년에 정조대왕이 공식적으로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지시하고, 장군을 영의정에 추증하며 '어제신도비'를 세우고 나서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고 나서야 장군은 정조대왕에 의해 새로운 빛으로 우리 역사 속에 우뚝 서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위대한 영웅이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에 와서는 '5.16 군사정권'에 의해 "軍人 이순신장군"으로 더욱 영웅화 됩니다.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세종대왕 동상"이 어느 날에 갑자기 없어지고, "충무로"에 있어야 할
"충무공 동상"이 "세종로"에 우뚝 서는 일이 생겨난것도 군사정권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이 없고, 충무로에는 충무공이 없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것이지요
그러한 과정에서 "이순신장군의 죽음"은 영웅적 죽음인 戰死로 굳어 졌습니다.
그러나......의문은 1598년 11월19일부터 계속되 오고 있습니다
저는 영웅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누가 되게하려는 취지가 아니고
오로지 수많은 세월 속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의 내용을 간추려서 알려 드리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림니다.
[오르막]
"380m봉"을 지나면 된비알이 시작됩니다.
25분 정도 된비알을 오르면.....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戰死했다는 공식적 죽음 이외에 크게 두가지의 說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살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은둔설"입니다
이순신장군이 戰死했던 자살했던, 또 은둔했던 그것이 뭔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괜히 까발려
문제없이 존경 받는 이순신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고 항변하시는 분들도
있을것입니다만, 한번쯤 그러한 설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길상사' 갈림길] 8:55
['길상사' 갈림길 이정표]
"길상사 갈림길"
'길상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간은 전국에 무지 많지요?
저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법정스님"의 "길상사"를 제일로 인정하는데....
['봉수산'으로 오르는 된비알]
"길상사 갈림길"에서 잠시 된비알을 오르면....
"이순신 장군 자살설"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장군은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당시 우연히 戰死한 것이 아니라, 戰死의 형식을
빌어서 갑옷마저 벗어 두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일부러 장열하게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살설"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200여년에 걸쳐 많은 이들에 의해 끈임없이
설왕설래 된바 있으며 아직까지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봉수산' 갈림봉] 8:59
"봉수산-정맥 갈림봉"
이 봉우리는 큰 의미를 주는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먼저 '금북정맥'에서 "봉수산"으로 가는 갈림봉이기도 하지만,
"공주시-아산시-예산군"의 행정구역이 갈리는 市郡界 갈림봉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주시'의 최북단이랍니다.
정맥길은 이곳에서 부터 "예산군"을 만나, "공주시-예산군"의 경계를 따라 갑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으니 "봉수산 정상"을 다녀 와야겠지요?
(사진 속의 "봉화산"은 "봉수산"입니다. 죄송~ ^.^)
['봉수산' 갈림봉 이정표]
갈림봉에서 '봉수산 정상'까지는 100m라는데 4~5분 걸렸습니다.
['봉수산' 정상 갈림길]
'봉수산 정상'으로 가는 길 앞에는 갈림길이 있습니다만, 직진해서 올라 갑니다.
[봉수산 정상] 9:05
[봉수산 정상석] [이정표]
"봉수산 鳳首山 536m"
따가운 아침 햇살이 범상치 않은 더위를 예고하는 "봉수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봉수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들은 전국에 수없이 많습니다.
대부분 한자로는 "烽燧山"으로 쓰며 "봉화 烽 봉"과 "부싯돌 燧 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봉수산"은 "봉황의 머리 - 鳳首"라고 하는 것이 다소 이채롭습니다.
['광덕산' 조망]
"봉수산"에서 동쪽으로 "광덕산 廣德山"이 조망됩니다.
"광덕산"은 천안시의 산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아산시의 진산"입니다.
높이가 699.3m로 이 주변에선 가장 높은 산입니다.
[아침식사] 9:05~9:30
새벽 4시에 일어나 멀리 '봉수산 정상'에서 이제서야 아침을 먹습니다.
아침식사라 해 봐야 빵쪼가리와 삶은 계란과 물이지만 먹어야 걸을수 있으니...
이때에 SBS 오국장의 격려 문자가 왔습니다. 더운 날씨에 무탈하게 다녀 오시라고...
오늘 단 한명의 산객도 산길에서 만나지 못했지만, 수 많은 분들이 저를 보고 있어 외롭지
않다고 생각되는 건 이런 격려 문자나 전화 한통입니다. 감사~
['봉수산 갈림봉' 우횟길] 9:33
"봉수산 정상"에서 약25분간 식사와 휴식, 조망을 한후에 다시 "정맥갈림봉"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맥갈림봉"으로 올라 갈 필요없이 우측으로 지름길이 있군요.
아주 짧은 우횟길이지만 오늘 갈길이 멀어 체력 비축을 위해 우측길로 갑니다.
[금북정맥길]
"정맥갈림봉"에서 5분 정도 숲길을 내려 갑니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이 계속됩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사천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 조끼 '환삼'도
있었는데, 노량해전에는 방탄쪼끼 '환삼'은 커녕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이른 아침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사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라니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詩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
"공로 커도 상 못탈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전쟁에서 이겨도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政派들과 백성들의 우상이 된 이순신으로 인해
왕권의 위협을 느끼는 선조(宣祖)로 부터 분명 '토사구팽(狡兎死良狗)' 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이순신장군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논거입니다
[송전탑에서 지나온 길 조망] 9:38
송전탑이 지나는 곳에서 조망이 트입니다.
동남쪽으로 오늘 지나온 정맥능선이 나열된 송전탑과 함께 보이며,
그 뒤로 지난 구간에 올랐던 "무성지맥분기점봉"이 조망됩니다.
(사진속의 "탑골리"는 "탑곡리"입니다. 죄송~ ^.^)
[송전탑에서 가야할 길 조망]
가운데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를 두고, 우측 능선을 따라 정맥길은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내려 가는 정맥길에 가야할 "천방산"과 "부엉산"이 보이며, 그 뒤로 계속 정맥은 이어지고...
[내림길]
송전탑에서 13분 정도 내림길을 내려 갑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
이순신장군은 戰死한것도 아니고, 더더욱 자살한 것도 아니며,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우연히 맞아 죽은 것도 아니며
그 이후 70세가 될때까지 약16년간 은둔하며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은둔설"을 믿는 편입니다. 오로지 개인적 생각임을 강조합니다
[내림길에서 뒤돌아 본 '봉수산'] 9:51
내림길에서 뒤돌아 보니 조금전 조망을 했던 송전탑이 보이고,
그 뒤로 "봉수산"과 "정맥갈림봉"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또한 "광덕산"도 조화를 이루며 멋을 풍깁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야기 하기 전에 당시 상황과 조선의 제14대 왕인 宣祖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산행기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나쁘게 평가하는 조선의 왕인 "宣祖".
'宣祖'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입니다.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종'은 누구입니까? 연산군을 무력으로 내몰고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정권 아닙니까?
그러한 대물림으로 오를수 없는 왕위에 오른 宣祖는 언제나 왕권에 대해 불안해 하였습니다
원래 宣祖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배경으로 항상 불안에 떨었고
정통성 없는 왕이었기에 항상 정적에 대해 의심을 많이 가지며, 조금만 의심이 가도
의심이 가는 놈은 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 당시 백성들의 민심은 흉작과 무리한 세금 징수등으로 무척 흉흉해서
"이괄의 난"등 반란이나, 농민 봉기등 民亂이 왕권을 무수히 위협했고, 극기야 '임진왜란'까지
터지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아야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백성들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순신장군'을 '宣祖'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460m봉'으로 오르는 길]
내려 가면 다시 오르는게 정맥길...이번 구간도 엄청 많은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이 끊임없이 제기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宣祖實錄"만이 유일하게 "수정宣祖實錄"이 다시 쓰여지고
두개의 판이하게 다른 내용의 實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기록도 다르게 기록되 있습니다. 희안하죠?
지금부터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에 대해 하나 하나 근거가 되는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구여
['460m봉' 정상] 9:55
"460m봉"
잠시 오름짓을 하니 금새 "460m봉" 정상입니다.
여기서부터 봉우리의 정상엔 이런 벤치가 있으니, 벤치가 있는 곳은 봉우리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460m봉" 정상에서 정맥길은 우측으로 90도 꺽여 서쪽방향으로 내림질을 합니다.
['460m봉'에서 '천방산' 조망]
이번 구간에는 지난 구간과 달리 산이름이 있는 산들이 많아 地名을 표기하기 쉽습니다.
오늘 가야할 산들이 "천방산" "부엉산" 뒤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데,
"천방산-부엉산" 이외에는 여기선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460m봉' 내림길에서 보이는 '예산']
"460m봉"에서 내려 가는 길에선
서쪽으로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의 "방산저수지"가 보입니다.
['460m봉' 내림길]
"460m봉" 내림길은 잡목과 잡풀들이 길을 덮고 있어 길이 잘 보이지 않으며,
급경사 내림길인데, 요즘 가뭄으로 흙이 메말라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특히 가시나무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을 잘 뜯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일어 나는 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미 죽어 조선 침략 전쟁을 포기하고
철군의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으며 조선과 明나라에 의해 이미 패배한 일본군은 대부분 도망갔는데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도 전라도 순천에서 그 근처의 해안 지역인 왜교(倭橋)로 이동하여
해상 경로를 통해 철수하려 하였는데, 퇴각하는 적을 노량 앞바다에서 섬멸작전을 벌이던
이순신장군은 불행이도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며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아주짧은 말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마지막 말은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되 있읍니다.
그러나 이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고, 유언 속에 "은둔설"의 실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천방산'으로 가는 길]
"천방산"으로 가는 능선으로 내려 가니 지난 구간에 올랐던 "무성지맥 분기점봉"과
가야 할 "천방산"이 보입니다.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과 위치가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퇴각하는 적군들이 도망 가기도 바쁜데, 사정거리가 10m도 않되는 조총에 맞아 죽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조총에 맞았다면 정말로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도져히 있을수 없는 상황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김이(金伊)'
이 세명 이외에는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순신장군은 그 동안의 전투에서 데리고 다니지 않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을 데리고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까지 데리고 이미 끝난 전쟁터로 나가 싸웠을까요?
그리고 왜 친족인 맏아들과 조카, 몸종 김이(金伊)만이 장군의 죽음을 보았을까요?
[뒤돌아 본 '460m봉'] 10:12
"460m봉"을 내려가 "천방산"으로 가는 능선에서 지나온 "460m봉"을 뒤돌아 봅니다.
'금북정맥 마루금'을 경계로 '공주시' 땅에는 벌목을 해서 경계가 분명해 보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투구처럼...
노량해전에 나갈 때 이순신장군은 이미 마지막 전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조선이 왜놈들에게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가는 마지막 놈들을 소탕하러 갔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있었답니다
왜일까?
그 동안 宣祖는 이순신장군을 두번이나 죽일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이순신장군이 육군일때 모함으로 그렇게 된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부산항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들을 쳐 부수라는 宣祖의 어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장군은 부산항에 쳐들어 가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에
뛰어 드는 것과 같다고 어명을 어겼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 해군이 몽땅 자멸한다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을 했지만 그러한 하소연이 항명이라 여기는 宣祖는 더더욱 뿔따구를
내며 이순신장군을 잡아 들여 국문을 하며, 쫄병으로 강등시키고 고문으로 반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 대신에 '원균'에게 부산항을 공격하라는 어명을 내리지요.
'원균'은 어명을 받들어 부산항을 공격하다가 조선 해군 모두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이순신장군 대신에 어명을 받든 '원균'이 부산항을 공격하다가 조선 해군 모두와 함께 작살이
나 버리니, 조선 해군을 복원시키는데 없어서는 않될 인물은 오로지 '이순신장군' 밖에 없다는 것을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수 없이 인정하며, 사형을 시키려던 이순신장군을 감옥에서 석방하지요
모두 알다시피 그래서 '白衣從軍'을 두번이나 하게 된것입니다.
이때에 '이순신장군'은 宣祖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저 '파란문'같으면 적군은 '쪽바리들'이 아니라 '宣祖'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355m봉'으로 가는 길]
산길은 다시 평온을 되찾으며 완만한 길을 갑니다.
노량해전이 끝나면 전쟁이 완전히 끝나므로
이순신장군은 살아서 육지에 올라 가나, 죽어서 올라 가나
결국 宣祖와 붕당세력들에 의해 다시 죽임을 당할것이란 사실을 똑똑한 이순신장군은
스스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어명을 따른 '원균'에 의해 초토화되버린 조선해군에 남아있는 배 겨우 13척으로 승리를 하면
이순신을 반대했던 인간들로부터 다가 올 위험은 불을 보듯 더욱 뻔한것이었답니다.
이순신에게 적군은 왜놈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왕과 붕당세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戰死"라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노량해전 선상에서 만들어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만들고, 자신은 몰래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알리바이를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깊은 뜻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마지막 말은 이순신장군이 직접 말한것이 아니고,
장군의 아들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것 뿐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옆에는 많은 참모들이 항상 명령을 기다리며 함께 있어야하는데도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오로지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김이(金伊)' 이외에는 없었다는
이 묘한 사실을 미루어 이해하시겠습니까?
['355m봉' 정상] 10:15
"355m봉"
벤치가 있으면 봉우리 정상이라고 앞에서 언급했죠?
위에서 제가 언급한 이야기들은 "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장군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에 나오는데 장군의 최후의 상황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장군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아들 '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는데도
그것을 단지 가족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 해야하겠습니까?
더더욱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권이 고참 부하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극히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도 들춰냅니다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져 새벽에 끝나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충무공 전서"의 "행록(行錄)"을 미루어 보며
결국 이순신장군은 은둔을 위해 "戰死"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러한 설은 믿던 말든 생각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이라는 것을 밝혀 둡니다.
['340m봉'으로 가는 길]
다시 거의 평지 수준의 길을 10여분 갑니다.
이순신장군의 죽음에서부터 그 이후의 상황을 날짜별로 정리를 하면....
이순신장군은 1598년 11월 19일에 노량해전 선상에서 "공식적으로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국가가 삼도수군통제사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룰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지며 "가묘"에 장군을 모십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정식으로 묘를 만들어 장군을 안치합니다.
이것은 이순신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 선상에서 알리바이를 위해 "戰死"한 이후
宣祖와 붕당세력들을 피해 은둔하며 살다가, 16년 후 장군의 나이 70세인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라고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순신장군은 그렇게 쉽사리 죽을 하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40m봉' 정상] 10:25
이번엔 벤치도 없는 봉우리 같지도 않은 "340m봉"을 지나게 되고....
이순신장군이 쓴 詩 한수 속에서 장군의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가 때를 잘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 이전에 이런 詩를 지었습니다.
이미 장군은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의 계획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천방산' 조망]
"천방산" 정상이 가까워져 옵니다.
'이순신장군' 이야기는 여기쯤에서 끝내고 "천방산"으로 올라 갑니다.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임도]
"340m봉"을 내려 가니 우측에 임도가 나타나 함께 동행합니다.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산군'에서 오르는 "천방산 등산로 입구"인듯...
10여m 전진하니....
[임도-탑곡리 여섯갈랫길] 10:34
"임도-탑곡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섯갈래로 길이 난 갈림길이었습니다.
정맥길은 직진입니다. 이곳이 우측 "예산 임도"에서 올라오는 "천방산 등산로 입구"인듯
[임도-탑곡리 여섯갈래길 이정표]
이정표엔 "천방산 방향" 표시는 없습니다.
아무 표시가 없는 직진방향으로 갑니다.
['천방산'으로 가는 길]
"임도-탑곡리 갈림길"에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 가면....
['ㅏ' 갈림길] 10:41
이정표가 있는 "ㅏ"자 갈림길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도 우측 "예산 임도"에서 오르는
'천방산 등산로 입구"인듯 합니다.
['천방산'으로 오르는 된비알]
"천방산 정상"으로 약23분 된비알을 치고 오릅니다.
물론 중간에 전위봉들이 있습니다.
[갈림길] 11:02
된비알을 20여분 치고 오르면 갈림길을 만납니다.
좌측길은 "천방산 정상"으로 가는 지름길 인듯한데, 확신할수가 없어 직진해서 오릅니다.
쬐끔 편할려고 하다가 왕창 알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ㅎ
[천방산 갈림길] 11:04
정맥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천방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을 곧 바로 만납니다.
여기서 "천방산 정상"을 갔다가 되돌아 와 우측길로 가야합니다.
['천방산' 정상으로 가는 길]
갈림길에서 '천방산 정상'까지는 100m로 3분 정도 걸렸습니다.
[천방산 정상] 11:07
"천방산 千方山 479m"
글자대로 하자면 조망이 좋아야 하는데 숲으로 갑갑했습니다.
멀리서 볼때는 제법 멋진 조망이 있을걸로 예상했는데....
[천방산 정상 이정표와 표지판] 11:07~11:20
"대구 비실이 부부" 표지기가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정맥길을 걸으며 이제까지도 많이 보며 왔습니다만, 오늘 특별히 눈에 들어 오는 것은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 이신 "聖本님"이 "대구 비실이부부산악회"와 함께 산행을 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일것입니다. ㅎ
[천방산 갈림길 회귀] 11:23
"천방산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정맥길을 갑니다.
베낭을 이곳에 두고 "천방산 정상"을 다녀 왔는데 그대로 잘 있군요. ㅎ
['385m봉'으로 가는 길] ['385m봉' 정상] 11:38
'천방산 갈림길'에서 15분 정도 진행하면 벤치가 있는 "385m봉"을 지나고...
['탑곡리-이치리' 갈림길] 11:42
['탑곡리-이치리' 갈림길 이정표]
"385m봉"에서 5분여 내림질을 하면 갈림길을 만납니다.
이름하여 "탑곡리-이치리 갈림길"
좌측은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이고, 우측은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랍니다.
정맥길은 "극정봉"을 향해 직진합니다.
['부엉산' 정상] 11:49
['부엉산' 정상 표지판]
"탑곡리-이치리 갈림길"에서 7분 정도 오름짓을 하니 바로 "부엉산"이었습니다.
"부엉산 403m"
지명의 유래는 알수 없었습니다.
부엉이가 많이 서식해서일까? ㅎ
'진혁진씨'의 개념도에는 이곳이 "403m봉"으로만 표기되 있고,
다음 봉우리인 "400m봉"을 "부엉산"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의미는 없는 私的인 표기인듯하여 그냥 지나칩니다.
['400m봉'으로 가는 길]
"403m봉 부엉산"에서 10여분 진행하면 바로 "400m봉"이 나옵니다.
['400m봉' 정상] 11:59
벤치가 두개 있는 400m봉"을 지나갑니다.
'진혁진씨의 개념도'에는 "부엉산"이라고 표기한 곳입니다.
[이정표] 12:08
개념도 상으로 볼때엔 이곳 근처가 "억새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방향이 우측으로 급하게 꺽인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이정표 외에는 특징없는 곳입니다.
['350m봉'으로 가는 길]
무성하게 자란 수풀로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헤치고 나갑니다.
그러면 길은 다시 안정을 찾고....
['유구읍 덕곡리' 조망] 12:21
좌측으로 오늘 산행을 시작했던 "각흘고개"방향으로 지난 구간에 올랐던 '무성지맥분기점봉'과
계곡 사이로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가 보입니다.
['350m봉'] 12:23
"350m봉"
이번엔 벤치는 없고 이정표만 있는 "350m봉"을 지나 갑니다.
"극정봉" 까지 1.3km가 남았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지재'로 내려 가는 길]
울창한 리기다 소나무 숲을 10여분 지나며 "오지재"로 내려 갑니다.
[오지재] 12:34
[오지재]
"오지재"
좌측 계곡에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에 "머그네미"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우측 계곡에는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에 "소거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군요.
누군가 "오지재"라고 써붙여 놨으니 우리는 그냥 그렇게 알고 지납니다.
[벌목지대로 오르는 길]
"오지재"에서 오름길을 10여분 올라 갑니다.
[벌목지대] 12:44
갑자기 시야가 트이는데 그 이유는 우측 '예산'지역에 벌목을 해 놨기 때문입니다.
"봉수산" 아래에는 '공주시'지역에 벌목을 해 놨더니, 이번엔 '예산'지역입니다.
['가야산' 조망]
이나저나 벌목 때문에 조망이 확 트입니다.
무었보다도 서쪽으로 "가야산"이 조망되는군요.
'금북정맥'은 다시 저 "가야산"으로 이어집니다.
몇구간 후에 올라야하는 "가야산"이며, 충청남도 도립공원이기도 합니다.
[오서산 조망]
남서쪽으로는 '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오서산"이 조망됩니다.
정맥길은 남쪽으로 충남 보령시 "백월산"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북진해야 합니다.
[극정봉 조망] 12:52
벌목지대를 지나 내려 가니 "극정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극정봉'으로 오르는 길]
20여분 오름짓을 하면....
['극정봉' 정상] 13:09
['극정봉' 삼각점]
[극정봉 표지기] 13:09~13:25
"극정봉 極頂峰 424m"
"극정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높이가 "424m"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삼각점에는
"421m"로 표기해 놨군요. 그 동안에 산의 키가 줄어 들었나 봅니다.
이곳에서 또 휴식을 취하며,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입맛도 없어서 꾸역꾸역...
물만 마십니다. 아무리 마셔도 소변은 안나옵니다. 땀으로 다 나가니....
물 3L를 준비했는데 아직 갈길이 먼데 벌써 1L도 남지 않아서 물을 아껴 마시기 시작합니다.
['400m봉'으로 가는 길]
낙엽이 푹신푹신하게 해주는 편안한 산길을 15분 정도 진행하니...
['400m봉'으로 가는 갈림길] 13:41 ★길조심★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산행을 시작한지 6시간이 지났기에 피로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길을 만나면 직진하는 길이 "우횟길"인 경우가 99%입니다.
그리고 올라 가 봐야 별거도 없는 단순한 봉우리가 또한 99%입니다.
그래서 "휴~ 힘도 든데 우회 할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올라 가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우측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깁니다.
['400m봉' 오르는 된비알]
오르는 길은 짧은 거리이지만 무척 가파랐습니다.
['400m봉' 정상] 13:44
봉우리에 오르니 "400m봉"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맥길이 이 봉우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완전히 바꿔 가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전 갈림길에서 직진길이 우횟길인줄 알고 우회 했더라면....생각만 해도 끔직합니다.
아마 엄청난 알바를 할뻔 한것이었습니다. ㅎㅎ
"君子大路" "君子正路"로 가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곳이었습니다.
이렇듯 홀로 가는 적막한 산길에서 "휴~큰일 날뻔 했군!~"이라는 독백을 자주 하며 갑니다
['명우산'으로 가는 길]
"400m봉"을 내려가고...다시 오르고....
[공터봉] 13:53
10여분 오르면 공터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명우산' 조망]
앞에 "명우산 鳴牛山 368m"이 조망됩니다.
그런데 "명우산" 정상을 얼떨결에 옆으로 우회하여 정상 촬영은 못했습니다.
['절대봉'으로 가는 길]
무심결에 "명우산"을 통과하여 오르락 내리락하며 "절대봉"으로 갑니다.
[벌목지대] 14:03
"오지재"에서 "극정봉"을 오를 때 있었던 벌목지대와 아주 비슷한 벌목지대가 나오고
다시 시야가 트입니다.
[길없는 길]
"절대봉"으로 가는 길은 무성한 수풀로 길을 알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풀 속으로 나있는 길의 윤곽을 찾으며 헤메며 올라 갑니다.
수풀 속에 있는 뭔 괴물이라도 밟으면 어쩌지?라고 독백하며 조심조심 오릅니다.
어휴~~무서워....
가시나무를 비롯해 잡목가지들이 뒤에서 잡아 당깁니다.
['절대봉' 조망] 14:11
수풀 속에서 헤집고 나오니 "절대봉"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불문리고개'와 중요한 '340m봉'도 보였습니다.
['절대봉' 오르는 길]
肉山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바위들도 제법 있는 구간을 지나 "절대봉"으로 갑니다.
[절대봉 정상] 14:24
[절대봉 표지판] 14:24~14:40
"절대봉 353m"
휴식시간은 점점 더 잦아지며 시간은 길어 집니다.
제가 걸음도 느리기도 하지만 사진촬영과 감상문을 쓰느라 시간이 다른 분들보다
훨씬 더 걸립니다. 이번 구간도 다른 분들은 평규 7시간 정도에 완주를 하지만
저는 8시간 40분 정도 걸렸으니 알만 하죠? ㅎㅎ
하지만 저는 빨리 걷는데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다 아시죠? ㅎ
이 산길과 이에 얽힌 사연들을 얼마나 더 깊이있게 느끼며 공부하며 가느냐가 중요하다는거..
아무 관찰없이 빨리 가기만 한다면 저도 빨리 갈수 있어요~~ ㅎ
에휴~ 그건 변명이고 세월 가며 점점 더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절대봉' 정상에 있는 굴]
"절대봉" 정상에는 엄청나게 큰 굴이 하나 있습니다.
거의 직각으로 뚫어 파 내려간 굴이었습니다.
많은 선답자들이 이 굴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다는 후기를 보았습니다.
다음 구간에서 아주 자세하게 알려 드릴 예정입니다.
미리 먼저 조금 알려 드리자면, 이 지역 금북정맥 산줄기에 우리나라 최대의 金鑛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일제침략시대에 다 파먹고 폐광이 되었지만, 당시 금광을 찾기위해
이 지역 산줄기를 뚫고 파헤치며 곳곳에 흉터를 남겼는데, 이 굴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불문리고개'로 내려 가는 길]
"절대봉"에서 휴식을 취하고 "불문리고개"를 찾아 내려 갑니다.
['불문리고개'로 추정] 14:55
"절대봉"에서 15분 정도 내려 가니 "불문리고개"로 추정되는 안부가 나옵니다.
이곳 이외에는 고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40m봉'으로 오르는 길]
다시 10여분 오름짓을 합니다.
오늘도 지긋지긋하게 오르고... 내려 가고...또 오르고...또 내려 가고...를 반복합니다.
['340m봉' 정상] 15:05
['340m봉' 표지기]
봉우리 같지 않은 봉우리에 올랐는데
어느 선답자가 표지기에 매직으로 표기한 "340m봉"이 없었다면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벌목지대] 15:13
"340m봉"을 벗어나니 다시 벌목지대가 나타나며 시야가 트입니다.
['명곡저수지' 조망] 15:14
동쪽으로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에 있는 "명곡저수지"가 가까이 보이며,
뒤로 멀리 "무성산"이 조망됩니다.
['서재'로 가는 길]
완전 벌거숭이가 된 벌목지대를 지나고, 다시 리기다소나무 숲을 지나
"서재"로 갑니다.
[서재] 15:26
"서재"에는 실제 차량이 다니는 비포장도로급 임도가 지나고 있으며,
간이화장실이 하나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차동고개"로 가는 정맥길은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서재]
"서재"로 내려와 "차동고개"로 가는 길을 반대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불모골고개(?)] 15:29
"서재"에서 조그만 둔덕을 하나 잠깐 넘어 가니 "불모골고개"로 추정되는
고개를 지나고...
[임도]
잠시 편안한 임도를 만나 따라 올라 갑니다.
[임도 갈림길] 15:36
편안한 임도도 잠깐...다시 산길로 올라 가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근처가 "275m봉"인듯 합니다.
['260m봉'으로 가는 길]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어 어디인지도 모를 "서낭당고개"를 지납니다.
"서낭당고개"는 무성하게 자란 수풀로 흔적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260m봉'] 15:38
"260m봉"은 우회하여 진행하고....
[묘지] 15:40
묘지를 지나 갑니다.
[길 없는 길]
묘지를 지나니 무성하게 자란 수풀로 또다시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수풀을 헤치며 땅바닥에 난 길을 찾으며 헤집고 올라 갑니다.
숲 속에서 모르고 뱀이라도 밟으면.... 와락 덤벼 들것같아 심히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낌니다
그래서 뱀이 제일 싫어 한다는 꽃냄새가 나는 "봉숭아"라는 곡을 배경음악으로 올렸습니다.
봉숭아를 "禁蛇花"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런 연유라고 합니다.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붉게 물들이던 풍습도 붉은 빛을 귀신이 싫어하기 때문에
못된 귀신이나 질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 이 민속의 본디 뜻이었다는 것이랍니다.
노래가 너무 좋아 올렸다는 것은 말 안해도 다 아시져? ㅎㅎ
야하튼 "뭐 해먹고 살일 있다고 이런 위험한 고생을 하고 있는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집에 돌아 가면 다시 다음 구간으로 갈 생각 뿐입니다. ㅎㅎ
[산불 난 지역] 15:46
수풀을 헤치고 산꼭대기로 올라 가니 어느 정도 길은 열리는데....
산불이 났었던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뒤돌아 본 '절대봉' '극정봉' '봉수산']
산불이 났었던 봉우리를 지나며 뒤돌아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지나온 정맥길이 조망됩니다.
먼저 오전 9시경에 올랐던 "봉수산"이 삐쭉 쬐끔 보이는데 무척 반갑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오후 1시경에 올랐던 "극정봉"과 오후 2시경에 올랐던 "절대봉"이 조망됩니다
['294.2m봉'으로 가는 길]
조망을 끝내고 다시 막바지 오름짓을 합니다.
[정맥 마루금 같지 않은 길] 15:56
"294.2m봉"으로 가는 길엔 마루금 같지 않은 길도 있고...
[뒤돌아 본 '절대봉' '극정봉' '봉수산'] 15:58
다시 한번 지나온 산봉우리들을 뒤돌아 보며 홀로 감개무량 해 합니다.
[294.2m봉'으로 가는 길]
다시 수풀로 뒤덮힌 길없는 길을 헤치고 올라 갑니다.
이제까지의 금북정맥길 중에 이번 구간이 제일 더럽습니다.
무셔버~~ㅎ
['294.2m봉' 정상] 16:09
['294.2m봉]
"294.2m봉"
이번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별다른 특징은 없으며 수풀로 조망도 없었습니다.
['차동고개'로 가는 길]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하산 합니다.
차량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묘지에서 '당진-대전 고속도로' 조망] 16:16
잠시 내려 가니 묘지가 나오며 "당진-대전 고속도로"가 조망됩니다.
"차동고개"에 거의 다 온 것입니다.
[갈림길] 16:17
묘지 상단을 따라 내려 가는데 갈림길이 있습니다.
선답자들의 표지기도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직진합니다.
다행이 바른 길이었습니다.
[차동고개 들날머리]
숲속을 빠져 나오니 "차동고개"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음 구간 들머리] 16:23
[32번 국도]로 나오니 건너편에 다음 구간 들머리가 보이고....
[차동고개]
"차동고개 車東고개 해발 215m"
대간 정맥꾼들의 지침서인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는 "차유령 車踰嶺"으로 나옵니다
순수 우리말로 해석하면 "수레넘이 고개"가 되며, 이런 고개 이름은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즉, 수레가 넘어 갈수 있는 넓은 고갯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산"과 "공주"를 넘나드는 대표 고개가 이 "차유령 車踰嶺"이었고 현재도 대표 고개입니다.
다만, 이 "차유령 車踰嶺" 밑으로 고속도로 터널이 뚫려 "차유령 車踰嶺"의 역활이 없어졌습니다.
아주 옛날에 '차서방'이 산삼을 동쪽 산에서 찾아 노모에게 먹여 병환을 낳게했다는 설화에서
"차동고개"라고 했다는 설화는 단순히 효도 설화일뿐....
['차동고개' 예산 방향]
터널화로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쓸쓸한 "차동고개"에는
수레를 끌고 힘겹게 오르내리던 옛 선조들의 거치른 숨소리만 적막 속에 감도는듯....
['차동고개' 공주 방향]
"공주 公州"
백제의 수도로 64년간 다섯명의 왕이 즉위했던 천혜의 요새였답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방어벽이 되고, 남으로는 '금강'이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곳이라서...
옛날에는 "웅주 熊州"였다죠? "웅 熊"을 우리말로 하면 "곰"입니다.
이 "곰"이 세월따라 음운변화를 이르으켜 "공"이 되어 "공주"가 되었다는 설이
공식적인 '공주시 홈피'에 나와 있어 재미있어 첨언합니다.
[차동휴게소] [새로산 아쿠아 샌달]
폐업한 "차동휴게소" 옆 평상에서 옷을 갈아 입고,
무겁고 갑갑한 등산화도 새로 산 '아쿠아샌달'로 갈아 신었습니다. 워~ 시원해~ ^*^
'아쿠아샌달'은 39,800원에 삿는데 잘 삿다고 생각됩니다.
(이것 보고 사시는 분들 무지 많겠내요~ㅎㅎ)
[유구 택시] 16:44
유구터미날로 가려고 히치를 시도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이 휴게소에 들려 잠시 쉬고 가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태워 주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금북정맥을 하며 충청남도 지역을 몇달째 다니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충청도 사람들...특히 운전기사분들은 무척 불친절하고 배타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됫습니다.
길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일언지하에 퉁명스런 부정어가 한마디 튀어 나올 뿐....
제가 그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여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나에게만 일어 난 나 만의
문제였기를 기대하며, '유구택시'를 불렀습니다.
'유구택시'는 호출 6분만에 도착하여, 6분이 걸려 "유구버스터미날"에 내려 주었습니다.
메타요금이 6,400원이 나왔는데 6,000원만 받겠다고 합니다. 웬일? ^.^
충청도 사람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ㅎㅎ
제가 사전에 이 개인택시 기사분의 전화번호를 미리 알아서 호출한게 적중한것이었습니다.
다음에 가실 분들은 꼭 적어 가세요 ☏ 041-841-5959
[유구 터미날] 16:50
"차동고개"에서 6분만에 "유구터미날"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온양온천역"으로 가는 [100번 시내버스]의 종점입니다.
앞으로 다음 구간을 위해 한번 더 이곳에 와야 하겠습니다.
[100번 버스 시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7:00 7:40 8:20 9:20 10:10 11:10 12:10 13:10
14:10 15:10 16:10 17:10 18:10 19:10 20:10
참고로 '온양온천역'까지 버스요금은 3,000원이었으며, 카드로 2,950원이었습니다.
'공주시'와 '아산시'의 경계인 '각흘고개'를 기준으로 추가요금을 무려 1,800원을 더 받습니다.
배 보다 배꼽이 더 큰 요금체계인데, 전철 환승 요금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유구읍내]
"유구읍 維鳩邑"
한자를 풀이 해 보면 "밧줄로 동여 맬 維 유"에 "비둘기 鳩 구"입니다.
비둘기가 날아 가지 못하게 밧줄을 든든하게 매어 둔다는 뜻이겠습니다.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관련있는 전설이 있는데 알 필요 없는 전설이라 생략합니다.
'유구읍내'를 휘 둘러 보고 5시10분 차를 타고 1시간5분이 걸려 '온양온천역'에 내려
급히 뛰어 6시 26분 전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