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기맥 10구간] 춘전치-692m봉-683m봉-숙지령- 망설봉-611m봉-관술령-웅곡리 고향을 떠난지 언제인지 모르게 오래 됫지만 그래도 언제나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운 곳입니다. 고향땅을 감싸고 도는 산줄기를 걸어서 돌아 본다는 것은 그 동안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진양기맥 마루금을 걸을수 있는 기회가 그런 어머니의 품속을 찾아 드는 것과 같은 감회에 젖어 들게 했습니다. [춘전치에서 관술령까지 지도] 유명한 산은 없으나 사람들의 발자취가 거의 없는 처녀림은 청정지역의 상쾌함을 듬북 안겨 주는 긴 거리였습니다. [춘전치 春田峙]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과 "함양군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春田峙입니다 서울에서 어젯밤 10시경에 출발하여 밤1시경 함양읍내 어느 찜질방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맛없는순두부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春田峙"에 도착하니 오전 6시 35분쯤이었습니다. [산행 들머리] 산행준비를 하고 오전 6시 50분경에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바람과 한층 시원해진 가을 날씨로 쾌적한 산행을 시작합니다. [뒤돌아 본 '春田峙'] 산행 들머리로 올라서 "春田峙"를 뒤 돌아 봤습니다. "진양기맥9구간"이 계속 이어져 있으며 "1084"지방도로가 보입니다. 광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88고속도로"가 春田峙를 "1084"지방도로와 함께 나란히 지나고 있는데 "88고속도로"는 숲에 가려 잘 보이지않는군요 [마루금] "88고속도로"는 전두환 군사쿠데타 정권이 東西和合을 하겠다는 즉흥적 발상으로 요즘 지방도로보다 못한 '편도1차선' 도로를 후다닥 광주에서 대구까지 건설했습니다. 어떤 경제적 환경적 타당성 조사도 없이 東西和合이라는 전시적 행정을 펼친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용하는 차량들이 별로입니다. 왜냐하면 통행할 차량들도 많지 않지만, '고속도로'라고 할수 없는 1차선 꼬불꼬불 지방도보다 못하니 차라리 일반국도를 이용하는게 더 편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고속도로가 아니라 즉흥적으로 만든 이상한 도로인것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제서야 토지보상을 하고 고속도로 다운 고속도로 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진양기맥 마루금에서 바라 보는 "지리산"] 함양 咸陽은 백두대간의 德裕山과 智異山 사이에 있는 마을로서 西部慶南地域의 최고 淸淨地域이라 할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잘 보였는데, 사진에는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그래서.... [줌인해서 본 '지리산 천왕봉'] 智異山 天王峰을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도 智異山은 頭流山이라고 했습니다. 김종직선생의 산행기 이름도 遊頭流山記이며 智異山 산행기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白頭大間의 시발점인 白頭山에서 흘러와 만들어진 산이라고 頭流山이라했답니다 白에서 頭하여.....이제 頭流山의 진정한 의미를 아시겠나요? [635m봉] '춘전치'에서 20여분 오르니 "635m봉'이 나왔으며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이른 아침 햇살이 제법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 내는군요. ['3면 경계봉'으로 오르는 등로] 오늘 산행구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692m봉으로 오릅니다. '692m봉'은 함양군 수동면과 안의면, 그리고 거창군 남상면이 함께 만나는 봉우리입니다. ['3면 경계봉 - 692m']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692m로 세개의 面이 분기하는 봉우리입니다. 좌측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가면 "골무산"이 나오는데 제 고향 "安義"의 앞산이 되겠습니다. '골무'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숲으로 잘 보이이지 않는군요 [669.2m봉] 三面경계봉인 692m봉을 지나 30여분 오르니 669.2m봉이 나왔습니다. 이곳 마루금에서는 울창한 숲으로 외부 조망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660m봉] '669.2m봉'에서 갑갑한 숲을 뚫고 20여분 진행하니 처음으로 외부가 조금 조망되는 전망대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안의면 황곡리"로 생각 됩니다. [660m봉 전망대에 뒤 돌아 본 지나온 마루금]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갈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두 아시죠? 네, 바로 無病長壽입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겠죠. 바로 無病長壽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이곳 咸陽 山靑입니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자랑하는 咸陽 山靑.. 너무 자랑하나요? ㅎㅎ [660m봉에서 바라 보는 가야할 '683m봉'] 조선시대 우리나라 백성들의 평균수명이 얼마이었는지 아십니까? "25세"였습니다. 평균수명이 이렇게 낮을수가 있나라고 의아해 하신다구요? 파란문이 잘못 알고 있다구요? 아닙니다. 틀림없이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25세였습니다. 물론 태어 날 때와 어렸을 때에 절반은 죽었기에, 태어날 때와 어렸을 때 죽지 않으면, 대략 50세까지는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이해가 가시죠? "평균수명 25세" [683m봉] 특별한 산도 없고 이름있는 산도 없습니다. 그러니 산에 대해 쓸만한 이야기꺼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계속됩니다. [기백산] 숲 사이로 "기백산 箕白山"이 보입니다. 진양기맥의 대표산이기도 하며 다음구간에 오를 산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은 조선시대-일제시대 "25세"에서 1960년에는 52.4세로 두배로 늘어 납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75.9세로 세계적 장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某事在人(모사재인), 成事在天(성사재천) 인간의 수명도 노력하면 얼마던지 늘어 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咸陽 山靑의 "맑은 물, 께끗한 공기, 조용하고 안락한 환경"이 無病長壽를 만든다고 자랑하고 있답니다. 고향 자랑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객관적으로도 실제 좋은 곳입니다. [683m봉] 인적없는 산봉우리엔 삼각점만 외로이 박혀있고 누굴 기다리나 헤아릴수 없는 나무들은.... 남쪽지방인데도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安義 조망] 다시 安義가 조망됩니다. 제가 安義를 떠난지가 꽤 오래 됩니다. 安義國民學校 4학년을 마치고, 서울 교동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으니.... 그 당시 安義國民學校는 西部慶南에선 제일 학생수가 많았던 큰 학교였습니다. 당시 安義面의 인구가 2만5천을 넘었다던가 그런데 현재는 5천명 정도라고 하네요. 산간오지라 농업도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고 상공업은 전무였으니 모두 도시로 떠났던 것이죠 그런데 요즈음 歸鄕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군요 대전-통영고속도로, 88고속도로가 교차하고, 청정지역으로 소문 나면서 생활이 편리해져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찾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어려운 세계경제 때문에 어쩔수 없이 되돌아 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 너무나 맑고 깨끗합니다 맑은 공기를 마구 퍼 마시고 싶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安義를 찾아 왔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잠자면 제일 그리고 규칙적으로 등산하고.... 매일 한시간씩 수영하고.... [기백산 조망] "기백산 箕白山"이 확실히 조망됩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旗白山"으로 표기되 있는데 旗→箕로 바뀐것은 아마도 일제강점시대에 새로운 지도를 만들때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사실 우리나라 地名은 그때에 무지하게 많은 지명이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인상적인 마루금] "변강쇠" "옹녀"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로 에로영화를 떠올리며, 특히 '이대근'과 '원미경'이 주연한 영화 "변강쇠"가 먼저 생각나시죠? 그리고 막연하게 정력이 무지하게 쎄고, 쌕스를 무지 좋아하는 남녀로 생각 할것입니다. 그러나 "변강쇠"는 우리나라 전래음담설화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판소리"입니다 오늘은 산행을 하며 판소리 "변강쇠가"를 심층적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왜 느닷없이 "변강쇠 타령"이냐구요? ㅎㅎ 천하의 음남(淫男)과 음녀(淫女)의 육욕(肉慾) 탐닉(眈溺)의 대명사인 '변강쇠'와 '옹녀'가 개성에서 만나 한바탕 천지가 진동하게 떡을 치고 肉慾眈溺하다가..... 그 이후 깨달은바 있어 인간답게 살자고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 간곳이 바로 이곳 "함양 咸陽"이기 때문입니다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곳이 이곳 함양이라는 것 처음 알았죠? [거창 감악산] 동쪽으로는 거창의 감악산(紺岳山 951m)이 보입니다 거창의 감악산(紺岳山 951m)은 남상면 무촌리와 신원면 과정리를 안고 있는 거창의 안산입니다. 본디 이름은 대덕산(大德山)인데 거창분지의 남쪽에서 서쪽 대용산과 동쪽 대덕산, 돌마장산, 매봉산들을 거느리고, 한 일자 용릉으로 흐르고 있답니다. 사진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산 고스락 감악평전에는 KBS, MBC TV 중계탑이 보이고 있습니다 [황매산과 자굴산] 남쪽으로는 합천과 산청에 걸쳐있는 "황매산"과 그 뒤로 "자굴산"이 보입니다 "황매산 구간"과 "자굴산-한우산 구간"은 이미 종주한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들이었습니다. 특히 '황매산'에서 "고추 말리기"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 납니다. ㅎㅎ [安義 황곡리] "변강쇠"를 알려면 판소리를 알아야합니다 "판소리"가 무었인지 정확히 아십니까? 그저 唱하는거라고 정도 아시죠? "판소리"는 소리꾼이 북치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아니리(사설)·발림(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입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 내려 오는 판소리는 12가지 있습니다.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장끼타령〉·〈가짜신선타령〉〈변강쇠타령〉 그러나 현재는 12마당의 판소리 중에 여섯마당만 판소리로 전하고 있는데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申在孝:1812~84)선생에 의해 정립된 것입니다. 여섯마당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변강쇠가〉입니다 이 여섯마당 중에서도 〈변강쇠가>는 음난하다고 잘 불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로 유명한 박동진선생에 의해 完唱된바 있습니다. 박동진 명창도 6년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신재효(申在孝)선생이 개작한 판소리로 6마당 중의 하나인 "변강쇠가"는 일명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하지요. 우선 "변강쇠가"의 주제를 알려 드리면 천하의 음남(淫男)인 변강쇠와, 천하의 음녀(淫女)인 옹녀가 육욕(肉慾)만을 탐닉(眈溺)하다가 스스로 응징된다는 내용입니다. 性文化와 도덕을 중시해야한다는 권선징악이 깔려있는 교육적인 것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신재효선생이 개작한 "변강쇠가"를 주요부분만 감상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옹녀'에 대해 설명합니다 "중년(中年)에 비상(非常)한 일이 있던 것이었다.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 있으되, 얼굴로 볼작시면 춘이월(春二月) 반개도화(半開桃花) 옥빈(玉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蛾眉間)에 비치었다. 앵도순(櫻桃脣) 고운 입은 빛난 당채(唐彩) 주홍필(朱紅筆)로 떡 들입다 꾹 찍은 듯, 세류(細柳)같이 가는 허리 봄바람에 흐늘흐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태도 서시(西施)와 포사(포사)라도 따를 수가 없건마는, 사주(四柱)에 청상살(靑孀煞)이 겹겹이 쌓인 고로 상부(喪夫)를 하여도 징글징글하고 지긋지긋하게 단콩 주어 먹듯 하것다." 윗 판소리를 알기 쉽게, 간단하게, 제가 요약해 드리면....친절하죠? ㅎㅎ 옹녀의 고향은 평안도 월경촌이고, 얼굴은 무지무지 예쁘고, 몸매는 요즘 말로 날씬한 S라인이며, 웃는 모습과 걷는 모양도 妖邪스럽고, 특히 남편이 죽어도 아무른 개념없이, 만나는 남자들을 단콩 주어 먹듯이 먹어치웠다니.... [기암괴석] '옹녀'는 결혼을 몇번이나 하고 남편을 몇명이나 쌕스로 죽였을까요? "열다섯에 얻은 서방(書房)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急傷寒)에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 당창병(唐瘡病)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천하에 대적(大賊)으로 포청(捕廳)에 떨어지고, 스무 살에 얻은 서방 비상(砒霜) 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 치기 신물난다" 그리고 월경촌에는 옹녀 때문에 죽는 남편 이외에도 남아 나는 남정네가 없었답니다 옹녀를 한번보면 상사병이 들어 죽거나, 앙탈이 나 죽어갔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옹녀를 동네에서 추방시킵니다. [安義 중심가] 평안도 월경촌에서 추방 당한 옹녀는 南쪽이 살기 좋다고 南쪽으로 내려 오다가 南쪽에서 北쪽으로 올라 가는 천하 잡놈 변강쇠를 '개성 청석관'에서 만남니다 이들이 만나는 광경을 판소리 '변강쇠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청석골 좁은 길에서 둘이 서로 만나거든, 간악(姦惡)한 계집년이 힐끗 보고 지나가니 의뭉한 강쇠놈이 다정히 말을 묻기를, "여보시오, 저 마누라 어디로 가시는 거요." 숫처녀 같으면 핀잔을 하든지 못 들은 체 가련마는, 이 자지간나희가 훌림목을 곱게 써서, "삼남으로 가오." 강쇠가 연거푸 물어, "혼자 가시오?" "혼자 가오." "고운 얼굴 젊은 나이인데 혼자 가기 무섭겠소." "내 팔자 무상(無常)하여 상부(喪夫)하고 자식없어, 나와 함께 갈 사람은 그림자뿐이라오." "어허, 불상하오. 당신은 과부요, 나는 홀애비니 둘이 살면 어떻겠소." "내가 상부(喪夫) 지질하여 다시 낭군(郞君) 얻자 하면 궁합(宮合)을 먼저 볼 것이오."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하니, 마누라 성씨가 누구시오." "옹(雍)가요." "예, 나는 변서방인데 궁합을 잘 보기로 삼남에 유명하니, 마누라 무슨 생이요." "갑자생(甲子生)이오." 이렇게 만나 곧바로 바위에 올라가 서로 궁합을 보고 대사(大事)를 치룹니다 [줌인한 安義 중심가] 변강쇠와 옹녀가 정사를 하는 장면을 판소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둘이 손길 마주 잡고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지내는데, 신랑 신부 두 년놈이 이력(履歷)이 찬 것이라 이런 야단(惹端) 없겠구나. 멀끔한 대낮에 년놈이 홀딱 벗고 매사니 뽄 장난할 때, 천생음골(天生陰骨) 강쇠놈이 여인의 양각(陽刻) 번쩍 들고 옥문관(玉門關)을 굽어보며,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였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노. 천리행룡(千里行龍)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神通)하다. 만경창파(萬頃蒼波) 조개인지 혀를 삐쭘 빼였으며 임실(任實) 곶감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물(臟物)이요, 만첩산중(萬疊山中) 으름인지 제가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軟鷄湯)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 비치였다. 파명당(破明堂)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상은 걱정 없다." ㅎㅎ 옹녀의 거시기玉門關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있죠? ㅎㅎ ["서울 陽川 沈熔輔" 표지기] 4,000산을 등정한 "서울 陽川 沈熔輔"선생의 표지기가 이곳에도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산 4,000개 이상을 등정한 산객은 별로 없습니다. 대단한 산객인 沈熔輔"선생과 몇번 함께 산행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연세가 칠십을 넘었는데도 저보다 무지 잘 걷습니다. [거창군 남상면] 변강쇠가 자신의 거시시玉門關을 보고 묘하게 표현하는 말을 듣고 옹녀는 미소를 지으며 앙갚음을 하려고, 변강쇠의 거시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이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 서려는지 쌍걸낭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五軍門) 군뇌(軍牢)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인고. 성정(性情)도 혹독(酷毒)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구멍이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대인지 검붉기는 무슨 일인고.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이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낭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옹녀와 강쇠가 서로의 성기를 보며 절묘한 표현을 하고는 하루 종일 서로 업어 가며 정사를 벌입니다 [숙지령] 강쇠와 옹녀는 서로 업고 사랑가를 부르는데, 그 중에서 옹녀의 사랑가를 들려드림니다. 옹녀가 강쇠를 업고, 실금실금 까불면서 사랑가를 하는구나. "사랑 사랑 사랑이야. 태산같이 높은 사랑. 해하(海河)같이 깊은 사랑. 남창(南倉) 북창(北倉) 노적(露積)같이 다물다물 쌓인 사랑. 은하직녀(銀河織女) 직금(織錦)같이 올올이 맺힌 사랑. 모란화 송이같이 펑퍼져버린 사랑. 세곡선(稅穀船) 닷줄같이 타래타래 꼬인 사랑. 내가 만일 없었으면 풍류남자(風流男子) 우리 낭군 황 없는 봉이 되고, 임을 만일 못 봤으면 군자호구(君子好逑) 이내 신세 원 잃은 앙이로다. 기러기가 물을 보고, 꽃이 나비 만났으니 웅비종자요림간(雄飛從雌繞林間) 좋을씨고 좋을씨고. 동방화촉(洞房華燭) 무엇하게, 백일향락(白日享樂) 더욱 좋다. 황금옥(黃金屋) 내사 싫으이. 청석관이 신방(新房)이네." 이렇게 사랑가를 부르며 大事를 계속 치룹니다. ㅎㅎ [숙지령] 강쇠와 옹녀는 혼인 후에도 유랑을 한동안 계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옹녀는 생활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데 반해, 강쇠는 도리어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며 놈팽이가 되어 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옹녀는 강쇠의 놈팽이 꼬라지를 보지 못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집의 성기(性氣) 가지고서 도방 살림 하다가는 돈을 모으기 고사(姑捨)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심산궁곡(深山窮谷) 찾아 가서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산전(山田)이나 파서 먹고, 시초(柴草)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테요, 강짜도 안 할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강쇠가 대답하되, "그 말이 장히 좋의. 십 년을 곧 굶어도 남의 계집 바라보며, 눈웃음하는 놈만 다시 아니 보거드면 내일 죽어 한이 없네." 결국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 할 곳을 찾습니다. 강쇠와 옹녀가 어느 곳으로 가 정착할것인지를 의논하는 대목입니다. "동 금강(金剛) 석산(石山)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香山) 찬 곳이라, 눈 쌓이어 살 수 없고, 서 구월(九月) 좋다 하나 적굴(賊窟)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智里) 토후(土厚)하여 생리(生利)가 좋다하니 그리로 찾아가세." 이리하여 강쇠와 옹녀는 지리산이 있는 "함양군 마천면"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함양이 얼마나 생리(生利)가 좋은 곳인지 판소리 '변강쇠가'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望雪峰 등로] 오늘 산행로에서 유일하게 산이름이 있는 "망설봉 望雪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왠일인지 등산로를 꾸며 놨습니다. 아마 거창군에서 만들어 놓은듯합니다. [望雪峰을 오르며 뒤돌아 본 636m봉] 강쇠와 옹녀는 '함양 마천'에 정착했는데, 옹녀는 어떻게던 잘 살아 보려고 열심히 일 하는데 강쇠는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니 옹녀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대목을 판소리에서... 부엌에 토정(土鼎) 걸고, 방 쓸어 공석(空石) 펴고, 낙엽을 긁어다가 저녁밥 지어 먹고, 터 누르기 삼삼구(三三九)를 밤새도록 한 연후에 강쇠의 평생 행세(行勢)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할 수 없어 애긍히 정설(情說)한다. "굶어 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소." 옹녀는 강쇠에게 나무라도 열심히 해 오라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望雪峰 등로] 옹녀의 바가지에 어쩔수 없이 강쇠는 나무하러 갑니다. 강쇠가 나무하러 가는 곳이 판소리에 나오는데..... "'등구 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등구 마천 백모촌" ‘등구’는 현재 함양군 마천면 "등구마을" 일대를 지칭하고, ‘마천’은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가흥리,군자리 일대를 지칭하며 ‘백모촌’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의 옛 명칭이라는 것이랍니다. 함양군 마천면이 강쇠와 옹녀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한 곳이란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望雪峰 등로] 그러나 나무 하러 간 강쇠는 나무는 하지 않고 신세 타령을 하며 벨 나무가 없다고 노래 합니다. "오동나무 베자 하니 순(舜)임금의 오현금(五弦琴). 살구나무 베자 하니 공부자(孔夫子)의 강단(講壇). 소나무 좋다마는 진시황(秦始皇)의 오대부(五大夫). 잣나무 좋다마는 한 고조 덮은 그늘, 어주축수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 홍도(紅桃)나무 사랑옵고.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邑輕塵) 버드나무 좋을씨고. 밤나무 신주(神主)감, 전나무 돗대 재목(材木). 가시목 단단하니 각 영문(營門) 곤장(棍杖)감. 참나무 꼿꼿하나 배 짓는 데 못감. 중나무, 오시목(烏枾木)과 산유자(山柚子), 용목(榕木), 검팽은 목물방(木物房)에 긴(緊)한 문목(紋木)이니 화목(火木)되기 아깝도다." 결국 벨 나무가 없다고 핑개를 대며 나무를 하지 않고 내려 옵니다. 일 하기 싫은 놈은 핑개꺼리도 많지요? ㅎㅎ [望雪峰 정상] 나무를 해 가지 않으면 또 옹녀에게 바가지를 긁힐테니 강쇠는 잔꾀를 부립니다. 나무를 하는 대신 부리는 잔꾀는 다름아니 '장승'을 뽑아 집으로 가져 가는 것입니다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지게를 찾아 지고 장승 선 데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낯에 핏기 올리고서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號令)하여, "너 이놈, 누구 앞에다 색기(色氣)하여 눈망울 부릅뜨니. 삼남(三南)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科擧), 마전(馬廛), 파시평(波市坪)과 사당(寺黨) 노름,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제 선취(先取) 복장(腹腸) 후취(後取) 덜미, 가래딴죽, 열 두 권법(拳法). 범강(范彊), 장달(張達), 허저(許저)라도 모두 다 둑 안에 떨어지니 수족(手足) 없는 너만 놈이 생심(生心)이나 방울쏘냐."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둘음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유대군(留待軍) 소리 하며 제 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豪氣)를 장히 핀다. 강쇠는 이렇게 장승을 뽑아 짊어 지고 돌아 옵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望雪峰 정상에서 바라 본 安義 도곡리] 강쇠의 도끼에 산산히 부셔져 부엌 속에 잔재가 된 "장승"은 억울해 하며 장승의 대빵(大方)을 찾아 가서 복수 해 줄것을 요청합니다. 장승 목신 무죄(無罪)히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 나고 부엌 속에 잔 재 되니 오죽이 원통(寃通)하겠나. 의지(依持)할 곳이 없어 중천(中天)에 떠서 울며,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값겠다. 대방(大方)전에 찾아가서 억울함 원정(原情) 하오리라 [줌인한 望雪峰 정상에서 바라 본 安義 도곡리] 장승의 원통함을 들은 대방(大方)은 다음과 같이 전국의 장승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냅니다 "우통유사(右通喩事)는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고, 지초(芝草)에 불이 타면 난초가 탄식(歎息)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환란상구(患難相救) 떳떳한 이치로다.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斫破) 화장하였으니 만과유경(萬과猶輕) 이 놈 죄상 경홀 작처할 수 없어 각도 동관전에 일체(一切)로 발통(發通)하니 금월 초 삼경야에 노강 선창으로 일제취회(一齊聚會)하여 함양 동관 조상(弔喪)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의견(各出意見)하옵소서" [望雪峰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 전국의 장승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강쇠를 죽일 여러 의견들을 내 놓습니다 그 중에서 채택되는 해남 관머리 장승의 복수극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한 흉한 놈을 쉽사리 죽여서는 설치(雪恥)가 못 될 테니 고생을 실컷 시켜, 죽자해도 썩 못 죽고, 살자해도 살 수 없어 칠칠이 사십구 한달 열 아흐레 밤낮으로 볶이다가 험사(險死) 악사(惡死)하게 하면, 장승 화장한 죄인 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懲戒)될 테니, 우리의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를 찾아가서 신문(신門)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五臟六腑) 내외없이 새 집에 앙토(仰土)하듯, 지소방(祗所房)에 부벽(付壁)하듯, 각장(角壯) 장판(壯版) 기름 결듯, 왜관(倭館) 목물(木物) 칠살같이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 하오." 아주 처절한 방법으로 강쇠를 죽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복수극案이 채택되어 실행되는데 강쇠는 수만가지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望雪峰 정상석] 변강쇠 남편을 살리기 위해 옹녀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물며 강쇠를 살려 주면 몸을 주겠다고 하면서 까지 노력을 하지만 장승들의 복수는 계속 됩니다. 결국 옹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쇠는 "동티"로 죽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치우려는데 시체를 치우는 사람들도 죽습니다 *동티: 動土 : 건드려서는 안될 것을 건드려 그것을 관장하는 地神의 노여움을 사서 받게 되는 재앙 [望雪峰에서 관술령으로 하산] 판소리 "변강쇠가"는 비극적 삶의 종말이 희극적으로 표현되며, 이에 따라 이 작품의 비극적 구조는 희극적 요소에 차단당합니다.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가 희극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유랑 광대패가 청중이나 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비참하고 불행한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 작품은 판소리로 불렸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문학적 형상력을 보이고 있답니다. 특히 남녀의 성기를 묘사하는 기물타령(奇物打令)에서는 놀라운 상상력과 다양한 비유로써 남녀 성기의 묘사와 유랑민들의 현실적 욕구를 교묘히 묶어놓은 언어적 형상력이 나타나 있다는군요. [알바] "망설봉"에서 "관술령"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들어 알바를 했습니다. 알바를 한시간이나 했으니..... [알바] "관술령"인줄 알고 내려 갔으나..... [위치 파악] 지도를 펴고 자세히 살펴 보니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망설봉"으로 올라 갔습니다. '망설봉"을 거의 두번 오른 셈이 되었습니다. [望雪峰에서 관술령으로 가는 갈림길] 望雪峰으로 다시 올라 오다 보니 좌측으로 희미한 갈림길이 보였습니다. 다음에 가실 분들은 이곳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거의 직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갈림길 이후로는 "서울 陽川 沈熔輔"선생의 표지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거창 둔동리로 내려가 다시 오르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간듯...ㅎㅎ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관동고개] 처음에는 이 고개가 "관술령"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이름이 관동마을이더군요. [安義 관동마을] 판소리 "변강쇠가"를 테마로 공원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는 곳이 安義에서 가까운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에 있습니다. "오도재 정상 지리산조망공원" 그곳에 가면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인 박찬수(58)씨가 변강쇠와 옹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그곳에 있는 목조각품 몇점 보여 드리겠습니다 [611m봉으로 오르는 등로에 있는 송전철탑] [거창읍내 전경] [관술령] "춘전치"에 승용차를 세워 두었기에 "춘전치"로 돌아 가야합니다. 관술령에서 오전에 출발지인 "춘전치"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경제적이었습니다 [관술령] 관술령에서 왼쪽으로 가면 安義面 초동리로 갑니다 ['관술령'에서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로 하산하는 길] 관술령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이 되겠습니다 ['관술령'에서 거창읍 장팔리 웅곡마을로 하산하는 길] 웅곡마을로 내려 가는 길에서 보이는 거창읍내 [거창읍 장팔리 웅곡 마을] 오후 4시 20분에 웅곡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웅곡마을에서 '춘전재'까지 거창택시를 불러 갔는데 2만원이었습니다 거창택시는 전화 하자 10분만에 오더군요. [구글어스로 본 진양기맥 安義區間] 오늘도 많이 걸었습니다. 총산행 시간 : 9시간 30분 (알바 포함)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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