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기맥 5구간]
자굴산-한우산-산성산 산행기
4월 11일(토) 경남 의령군과 합천군에 걸쳐있는
자굴산 - 한우산 - 산성산을 종주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봄향기 흩날리는 고속도로를 달려 갑니다
["금산" 휴게소]
대전-통영 고속도로에 있는 "금산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인삼의 고장 다웁게 인삼제품을 파는 코너가 많았고...
["금산" 휴게소]
금산 휴게소에는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되있어 휴게소로는 좀 독특했습니다
아랫층에는 전통식당과 분수대등 휴게시설이 시골 풍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금산 휴게소를 가면 아랫층도 한번 내려가 보세요
[머릿재]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단성 I.C.'로 나와
경상남도 진주시와 의령군의 경계인 "머릿재"에 10시 10분에 도착했습니다
'진양기맥 5구간'의 산행 들머리입니다
[머릿재]
"머릿재"는 의령군 七谷面에서 大義面으로 넘어 가는 고갯길입니다
[구글어스 산행괘적도]
편리한 시대 -
위성의 신호를 받아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을 표시해 주는 GPS 산행 괘적도입니다
[진양기맥 5구간 산행 들머리]
"머릿재"는 頭峴을 우리말로 풀어 쓴것이라 하는데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豆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마라 地名을 새로이 지정할때 아마도 같은 발음이라고
오리지날 고개 이름을 콩 豆에서 머리 頭로 잘못 표기하고
순수 우리말로 고쳐 쓸때 다시 머리 頭를 그대로 "머릿재"로 표기하게 된듯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흔히 볼수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다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지방자치 단체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사료됩니다
[머릿재]
산행 들머리로 올라와 "머릿재"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머릿재" 건너편 진주시를 뒤로하고 의령군으로 갑니다
[머릿재]
의령군 칠곡면이 내려다 보입니다.
지금부터 그 유명한 "호암 이병철"씨가 태어나 자라고 때돈을 버는 밑거름이 된
"정미소"를 경영했던 곳 - 의령 宜寧땅을 밟으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된비알]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는 野山이 몇개 있으며 1시간 45분이 걸렸으니
워밍업으로 제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산행을 시작할때는 힘이 듭니다
[자굴산]
427m봉을 오르니 왼쪽으로 "자굴산"이 아득히 보입니다
오늘 진양기맥 5구간의 하일라이트 山입니다
"자굴산"은 의령의 진산이며, 높이가 거의 900m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조그만 안부를 지나고 봄냄새 풍기는 산길을 유유자적하며 걷습니다.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에는 높은 봉우리가 세개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평범한 산행길입니다
진주, 의령 지방은 이미 진달래는 지기도 했겠지만
이 구간에는 꽃 구경하기가 어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깁니다
[좌골재 가는 길]
오늘은 우리나라 경제 이야기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인물 - "호암 이병철선생"과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장군"에 대해 생각해 보며 산행을 하겠습니다
이병철선생에 대해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이가 없겠지만.....
[자굴산]
384m봉, 500.9m봉 을 차례로 오르니 "자굴산'이 점점 더 가까이 오는 듯 합니다
湖巖 李秉喆先生
대한민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부러워한 "돈 병철"로 대변 되었던 李秉喆先生.
李秉喆先生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합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과 저수지가 보이는 풍경 - 아름답습니다
이병철선생은 정규 학교를 온전히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와서,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다니고,
중동중학교 2년 중퇴,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도 갔으나 졸업까지는 못한 걸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돈병철"이 되고 난 이후엔 명예박사학위는 대학들이 서로 주려고 했습니다
에구~ 인간 대접 받을려면 돈 벌고 잘되고 봐야지요. 특히 돈을 많이 벌고 봐야합니다
[좌골재]
의령에서 합천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 "좌골재"입니다
이런 저런 지도에 "좌골티재"로 표기 되있습니다.
"티"가 "재, 고개"라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두번 사용하는 것이니 "역전앞"과 같은 것입니다.
'좌골고개'. '좌골재', '좌골티', 좌골치'등으로 표기해야합니다
[자굴산]
'좌골재'에 오니 자굴산'이 그 일부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병철선생은 의령에서 '정미소' 사업으로 재벌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지요
옛날엔 시골에서 정미소와,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제사공장'이 기계가 돌아 가는
유일한 "공장"이었지요.
"제사공장"이 製絲工場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됫습니다만.....
[좌골재]
'좌골재'와 건너편 '자굴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입니다.
이병철선생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쌀가마를 운반하는 것에서 부터 運輸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갑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벌써 부동산을 알고 부동산 사업도 하지요.
그리고는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의령은 좁아서 대구로 진출하고 "삼성상회"를 대구에 설립하며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섭니다
[좌골재]
우리를 "머릿재"에 내려 놓았던 버스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성상회'로 돈을 벌어 대구에서 "조선양조"를 인수하며 최초로 제조업에 뛰어듭니다.
'조선양조'가 실질적인 "삼성그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조선양조'에서는 막걸리, 청주, 소주는 물론 사이다까지 만들어 팔았습니다
6.25 전쟁통에 피난민으로 '조선양조'의 술은 더 잘 팔렸답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에서 대의면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의 고갯길입니다
해방이 되자 부산에 설립한 "삼성물산"을 넓은 서울로 사업장을 옮김니다
그리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지요
홍콩과의 직교역을 하며 무역이라는 글자를 조선엽전들에게 알려 줍니다.
하지만 6.25라는 복병을 만나 재산을 상당량 날려버림니다
[GPS 산행 괘적도]
[자굴산 산행 들머리]
자굴산 들머리에는 오늘 따라 '산불예방'을 위한 통제관이 나와 입산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령군청에 가 입산허가를 받아 자굴산을 올랐습니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뒤 돌아 본 좌골재]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가난한 나라 백성의 입맛을 달콤하게 만들며 돈을 벌기 시작하고
영국 신사들이 입는 양모로 만드는 신사복지 "골덴텍스" 기억하시나요?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을 입는게 출세의 상징 같았던 때를 연세가 조금이라도 되는 분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떠 오를 것입니다.
저도 울 아버지가 제가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하면서 맞춰준 양복이 "골덴텍스"로 만든
쪼끼가 있는 양복이었답니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습죠. ㅎㅎ
제일모직의 "골덴텍스"가 성공하자 뒤따라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기억 나시죠?
[자굴산 오르는 등로]
이병철선생이 6.25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사업자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전쟁이 터지자 그 동안 번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산에서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궤짝 두 개에 3억원 가량의 돈을 담고 서류뭉치로 위장해
조선양조의 자동차에 실어 보냅니다. 당시 3억원이면 어마 어마한 돈이지요.
그런데 그 차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돈 궤짝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답니다.
전쟁 통에 알아볼 길이 없는 직원들은 돈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운전기사가 돌아 옵니다. 짜~잔~ 클린트 이스트 우드처럼...
그는 경북 영천에서 미군에게 강제 징집되었고 급한 김에 길가의 정미소에 돈 궤짝을 감춰두었던 것입니다.
직원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영천의 궤짝을 숨겨두었다는 정미소로 달려갔으나
정미소는 불에 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답니다.
않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지만, 되는 놈은 죽은 고목나무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
잿더미를 헤치자 다행스럽게도 궤짝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궤짝 안의 돈도 그대로 있었답니다. 나하고는 왜이리 반대일까~ 닝기리~
전쟁 통에 사업자금을 모두 잃어버린 호암선생은 이 돈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수가 있었답니다.
[자굴산]
자굴산이 다가 옵니다.
"이병철선생의 매년 정초 사업 구상"
이병철선생은 매년 정초가 되면 사업구상을 하러 일본 동경으로 간것 기억나시죠?
가난하고 별 볼일없는 우리나라에선 새로운 구상을 할 건덕지가 없어서
선진국 일본으로 가 일본의 TV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세계의 변화하는 경제상황을 느끼며 사업구상을 한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 오면 새로운 사업이 하나씩 시작되었지요
[594m봉 오르는 길]
'좌골재'에서 '594m봉'까지 심한 된비알입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594m봉' 근처에 오르니 바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594m봉]
'594m봉'에 올랐습니다. 자굴산 정상이 가까워 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경사이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수 있습니다
독립투사 김좌진장군의 아들 "김두한"
깡패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그의 딸 '김을동여사'도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국무총리석으로 똥물을 투척한 사건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실겁니다.
당시 국무총리가 '정일권'씨였고, '장기영' 부총리등 각료들이 똥물을 뒤집어 썻지요
이 똥물은 종로2가에 있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 온것이라 더 유명했죠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1966년의 國會汚物投擲事件
그런데 왜? 똥물을 국회에 퍼 부었는지는 아십니까?
[암릉구간]
594m봉에서 자굴산 정상까지는 암릉구간이었습니다.
"한국비료공장'과 "사카린 밀수 사건"
삼성 재벌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폭로되면서 언론계와 정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발전을 하려는 가난한 대한민국에 밀수는 민족적 범죄였습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캐치프레이저로 군사 쿠데타 정권이라는 오명을 경제발전으로 덮으려했던
개발독재정권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는 반민족적 범죄였지요
그러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달 뒤 벌금 좀 물고 유야무야되자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원이 더러운 놈들에게
국회에서 똥물을 퍼붓게되는 것입니다.
"에라잇!~ 똥물보다 못한 놈들아!!~~ 똥이나 쳐 먹어라~!!"
요즘도 똥물을 쳐 먹을 놈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암릉구간]
당시 김두한의원이 똥물을 투척하면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다!!~"
"사카린 좋아하는 피고인들에게 사카린을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온 똥물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한 것입니다.
그 이후 국회에는 석달 이상 똥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씨가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군사정권과 야합을 한것이지요
그래서 좋은 일 많이 한 '호암 이병철선생'이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치욕스런 이미지가
바로 '사카린 밀수'와 같은 방법으로 富를 국민들로부터 착취했다는 멍에를 쓴것이었습니다
[GPS 산행 괘적도]
[바람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모양새가 있는 암릉이 나왔는데 바로 "바람덤"이었습니다
"바람덤"의 덤이 무슨 뜻인지 경상남도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모를것입니다
덤은 경남지방 특히 경남 내륙지방의 사투리로 바위라는 말입니다
제가 경남 함양이 고향이라 이것은 확실히 압니다. ㅎㅎ
[바람덤]
특히 이곳은 "자굴산 주 등산로"로서 칠곡면 내조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좌굴재'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가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바람덤]
"바람덤"은 바람이 바위 사이로 많이 분다고 붙여진 이름인듯합니다.
실제로 이곳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의령으로 부터 많이 불어 옵니다.
펼쳐지는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바람덤"의 의미를 확실히 아시겠지요?
이곳 "바람덕"을 설명한 사람은 모든 인터넷에서 "파란문" 밖에 없습니다. ㅎㅎ
[바람덤 이정표]
"바람덤"에 오면 정상까지 약 15분 정도면 갈수 있더군요.
'절터샘'에는 石間水가 흘러 나온다는데....
[바람덤에 올라 내려다 본 지나온 504m봉]
우리나라 근대사에 경제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을 세 사람 꼽으라면
삼성그룹 "이병철씨"
현대그룹 "정주영씨"
대우그룹 "김우중씨"를 꼽는데 반대 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고급직원을 배치하라고 한다면
'경리부장 이병철', '공장장 정주영', '무역부장 김우중'이 제격이다"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바람덤에서 내려다 본 내조리 小溜池]
그 많은 재산과 돈을 단 한푼도 못가지고 떠난 이병철씨와 정주영씨,
아직 살아 남은 김우중씨는 12조원이 넘는 빚을 지고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것을 두고 人生無常이라고 하지요?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삽시다.
갈때 주머니 없는 수의 입고 한푼도 못가지고 떠나갑니다.
[바람덤에서 바라보는 "한우산"과 "자굴산순환관광도로"]
의령군에서 어마 어마한 자금을 들여 "자굴산순환관광도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의령읍에서 자굴산과 한우산을 직접 오를수 있도록 도로를 만들어 포장했다고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와야 할텐데 도로에서 자동차 구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례면에서 오르는 자굴산 능선 등산로]
자굴산의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입니다.
이 능선은 조금있다가 만납니다
[산행 괘적도]
[써래봉 갈림길]
자굴산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자굴산 정상에는 그늘이 없어 여기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병철회장의 세가지 불가사의가 있었지요.
"미풍이 미원을 못 꺽는 것"
"자식 마음대로 못하는것"
"골프 뜻대로 않되는 것"
이외에도 "백설표 식용유가 해표 식용유를 못 이기는 것"이 있었고
"중앙일보가 동아일보를 넘지 못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써래봉 갈림길]
조선초 단종 복위 운동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
그 "사육신" 중에 박팽년이 있지요?
그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와 이병철회장이 결혼하여 이건희씨를 낳았으니
자식 농사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병철회장의 가업 계승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와 비슷하지요?
태종 이방원이는 장남 양녕대군에게 왕권을 물려 주려고 세자 책봉까지 했지만
여러 이유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지요.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병철회장도 장남 이맹희씨에게 물려 주려했으나 능력이 없다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씨에게 삼성그룹을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이건희씨는 삼성그룹을 세계 제1의 IT기업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건희씨의 후계자 '이재용'이는 좀 아닌것 같은데.....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써래봉 갈림길에서 정상까지는 잠깐이면 갑니다
여기서 부터 일반 산객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좌굴재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며
머릿재에서 3시간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 정상은 매우 넓은 공간이 있으며, 의령에서 직접 오른 산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사방이 확 터여 조망하기에 좋았습니다만, 오늘은 운무로 가시거리가 짧아
지리산 천왕봉과 황매산, 집현산등을 조망할수 없었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온다고..에구 아쉬웠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을 한자로 표기해야하는데 컴퓨터 자판에는 없는 한자이라 쓸수가 없네요
"자"는 門 속에 者가 들어가 있는 글자인데 , 성곽의 망루를 뜻한다고합니다
"굴"은 山변에 屈이 합쳐진 글자인데 산 우뚝 솟을 "굴"이라합니다
이것은 제가 인터넷에 올리려고 어렵게 찾아 온 闍崛山 漢文입니다
[자굴산 정상석과 이정표]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자굴산 闍崛山"이라는 산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산경표'에는 혼굴산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혼"의 한자가 또 컴퓨터에는 없습니다
"혼"의 한자는 門 속에 昏이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자굴산 闍崛山"의 "자闍"와 매우 유사하지요?
혼굴산 의 "굴"은 "자굴산 闍崛山"의 "굴" 山변에 屈과 같습니다
틀림없이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혼굴산을 자굴산으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큼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를 한번이라도 들여다 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굴산 안내]
어느 누가 이 산 이름을 "자굴산 闍崛山"이라고 지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옛 선인들이 "혼굴산"이라고 한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바꾼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설명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묘한 생각이 듭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의령읍']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는 지금 우리가 임의로 "진양기맥"이라고 하는 산줄기를
다음과 같이 표기해 놨습니다. 간단합니다
鳳凰山 - 月峯 - 金遠山 - 旗白山 -鳥嶺 - 官述峙 - 鳥谷嶺 - 鳥谷山 - 密岾 -黃梅山
葛項山 - 馬壯山 - 花旨山 - "혼굴산" - 德山 - 豆峴 - 道峴 - 集賢山 - 廣濟山 - 飛鳳山
이렇게 간단 단순하게 표기해 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다니는 소위 "진양기맥"이라는
산줄기가 맞는 것인지 틀리는 것인지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해석 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알수 없는 산이름과 고개도 있습니다.
모두 유추 해석해서 주로 각 고을 경계선을 따라 다닌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한우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한우산과 산성산이 조망됩니다
산경표에 나오는 산이름과 현재 지도상에 나오는 이름을 중요한 것들만 대조해 보겠습니다
산경표에 鳳凰山이라고 되있는 산이 현재는 南德裕山입니다
月峯은 月峰山이고
金遠山은 현재도 같은 이름인 金遠山입니다
旗白山은 현재는 箕白山으로 旗 → 箕로 바뀌어있습니다
鳥嶺은 안의에서 거창 넘어 가는 고개 초동리에 새재 마을이 있습니다
안의가 제 고향이라 잘압니다
[자굴산 하산]
자굴산에서 하산 하는 길에는 진달래가 아직도 활짝 피어 있으며
많은 산객들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 가는 길]
관술치(官述峙)는 삼각점이 있는 관술령(官述嶺 :606.1m)이고
조곡령(鳥谷嶺)으로 표기되었다가 뒷장에서 조곡산((鳥谷山)으로 나오는 지명은
지형도에는 비슷한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함양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춘전재'와
그 동쪽으로 올라간 덕갈산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밀점(密岾)은 거창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1006 지방도 고개가 '밀치(密峙)'로
표기되어 있어 혼돈되지 않습니다
황매산(黃梅山)은 지금의 이름과 변함 없이 같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이 마을이 매우 유명한 마을입니다.
"가례면 甲乙里"
자굴산과 '우봉분맥'이 감싸고 안고 있는 듯한 甲乙里는 아무리 쎈 태풍이 불어와도
안전할듯합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로 하산 하는 계단]
경상남도 중앙에 자리한 '의령군'은 사실 크게 자랑할만한 産業이나 농업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은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이 대단한데
대표적인 인물이 "紅依將軍 곽재우"와 "이병철회장"이랍니다.
이병철회장에 대해선 앞에서 아는대로 알려드렸으니 "곽재우 장군"에 대해
나름대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진주 남강댐에서 내려 오는 강이 의령읍 앞으로 흘러 삼랑진으로 가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합쳐져 남해 바다로 흘러 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남강"은 일본군 병력과 군량미등을 운반하는 중요한 運送路였습니다
의병인 곽재우를 '임진왜란 3대 名將" 중에 한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바탕이 "남강"이라고하는
일본군 運送路가 있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곽재우 의병은 "남강"을 통행하는 일본군들을 주로 무찔렀으니까요.
[진양기맥 마루금]
자굴산과 한우산을 연결하는 진양기맥 마루금이 선명합니다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을 떠 올리면 누가 생각납니까?
아마도 모두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떠 오를것입니다
23전 23승. 不敗의 신화를 만들어 낸 "이순신장군" -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海戰歷史에 최고의 勝戰을 이룬 불가사의한 인물이지요.
"이순신장군" 위대합니다.
그러나......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임진왜란 3대 명장"에는 이순신장군 뿐만 아니라
일본 쪽바리들로부터 직접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이 있습니다
또한 전라도 광주지방에서 맹활약한 "감덕령 장군"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한결같이 오로지 求國의 一念으로 적과 싸웠는데
조선 왕조에서 최고 의심 많은 쪼다리 王인 "宣祖"로부터 그 功을 높이 평가 받기는 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뤄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번의 옥고와 백의종군을 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김덕령 장군은 감옥에서 처참한 고문으로 옥사했습니다(제가 쓴 '무등산 산행기'를 찾아 읽어보세요)
곽재우장군은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이곳 의령의 "望憂堂"에서 生食을 하며 조용히 은거하며 살다
갔습니다. "임진왜란 3대 명장"은 이렇듯 쓸쓸한 최후를 보냈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郭再祐 將軍을 우리는 紅依將軍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곽재우장군이 전쟁을 할때에 '붉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붙여진 별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곽재우장군이 '붉은 옷'을 입게 되는 동기를 알려 주고 있는 기록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야사 이야기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野史이기에 그냥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 책으로 만들어
재미로 읽도록 한것이기에 믿어도 그만 않믿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 임을 미리 알려드림니다
그리고 필자인 '파란문'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가 가미될수 있도록 조금 꾸몄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니다
[쇠목재]
조선 선조시대 어느날.....
郭再祐는 문경에서부터 밤새 호랑이를 잡으려 좇아서나 한없이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불현듯 호랑이가어느 굴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郭再祐는 남감해 졌습니다.
지금 까지 좇아 온것이 아쉬어 굴 속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워낙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호랑이에게 당할까싶어 더이상 굴속을 들어갈수도 없었습니다.
"아 이썅~ 밤새 이곳까지 쫒아 왔는데 그냥 가야 한단 말인가?"
郭再祐는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선 급한 것은 산을 내려가 고단한 몸을 쉴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곽재우는 거져 호랑이를 좇아 정신없이 이곳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었답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산을 내려가던 곽재우는 산골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발견하고 무작정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쇠목재' 가는 길]
다 쓰러저가는 초가집에서는 아침 밥을 짓는지 여전히 매운 연기가 눈을 찔렀습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계시요?"
잠시후 부엌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처자가 나오더니 조심스럽게 밖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밖에 누가 오셨는가?"
처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집이 거대한 사내가 나오며 말했습니다.
곽재우는 사내가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사내에게 지난 밤 일을 설명하고는 잠시 쉬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호랑이가 문경에서 이곳 울진까지 좇아 오다니 형씨의 재주가 비상 하구려."
사내의 말에 곽재우는 잠시 아연질색했습니다.
조금은 뻥이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울진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놈은 원래 중국 산동성의 태산에서 살다가 이곳까지 온 백년묵은 백호지요."
그 사내는 원래 중국 사람으로 자신의 아비가 유명한 포수였는데 그만 백호에게 목숨을 잃었답니다.
그래서 선친의 원수를 갚고자 백호를 잡으러 좇아다니다가 백호가 울진에 있는 이 산속의 동굴에
자리를 잡자, 그 또한 산골짝에 집을 지어 그 놈을 잡기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산행 괘적도]
[쇠목재]
'자굴산'과 '한우산' 사이에 잇는 "쇠목재"에 왔습니다
사내는 그동안 수차례 백호와 겨루었으나 서로의 힘이 비슷하여
어느 한쪽도 승부가 나지 않아 지금까지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불현듯 곽재우에게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곽재우는 겸손하게 사내의 청을 사양 하였습니다.
"허허 형씨같은 분도 이기지 못하는 백호를 어찌 제가 상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저 내가 백호와 싸우고 있을 때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한번만 큰소리로 호통을 쳐주시면 됩니다."
곽재우는 사내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쇠목재]
"쇠목재"는 '자굴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등산객과 관광객을 위한
펴의시설의 대명사 화장실을 잘 지어 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해서인지 깨끗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고 백호가 있는 동굴로 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 숨어서 사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굴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백호가 성큼 뛰쳐나오더니 사정없이 사내를 향해 덤벼들었습니다.
사내는 연신 창을 휘둘러 댔고
백호는 날렵하게 몸을 굴려 자신을 찌르는 창을 잇발로 물고 흔들어 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호통 칠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싸우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잠시후 백호가 지쳤는지 어슬렁 어슬렁 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곽재우는 그때서야 사내가 부탁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곽재우는 사내에게 달려갔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그만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호통 치는것을 잊었소."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신경질을 낼줄 알았는데 점잖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소. 그러나 내일은 꼭 호통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다음날 곽재우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내와 백호가 싸우는 싸움을 지켜 보았습니다.
싸움이 어느정도 진척될 무렵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뛰쳐나와 백호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그러자 백호는 곽재우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사내는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창으로 힘껏 백호의 뒷통수를 찔렀습니다.
백호가 괴로워 몸을 뒤트는 사이 사내가 백호의 목에 한번더 일격을 가하자
백호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었소 이모두가 형씨의덕이오.!!"
사내는 곽재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처자를 옆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형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수 있었겠소?
사실 이 아이의 모친도 백호한테 목숨을 잃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소이다.
이 아이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평생 형씨를 모시고져 하니
거절 하지말고 거두어주길 바라오. 그럼 난 이만 갈 길을 가야겠소."
곽재우는 사내에게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다시 보게 될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굴산 입구 안내석]
곽재우는 처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호랑이 잡으러 갔다가 예쁜 아가씨를 얻어 왔군요. 오히려 더 좋은거 아닌가요?
그후 몇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함안에서 적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전경험도 없거니와 군사 훈련도 받지않아 왜병들과 싸우기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곽재우가 더이상 왜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후퇴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장수가 어디선가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왜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황야의 무법자들을 연발 따발총으로 쑥대밭을 만들때처럼
왜병들의 목이 가랑잎처럼 하나 둘 땅에 떨어졌습니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위로 건너 갑니다]
그 전투로 인해 왜병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결국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붉은 옷'의 장수는 후퇴하는 것을 보고서는 곽재우에게 다가왔습니다.
"오래만이구려"
곽재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자세히 보았더니 백호를 잡았던 그 사내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뉘시오..!! 참으로 오래만이외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 곽재우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왜 내게 주시오?"
"이것을 입고 전쟁을 치러면 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외다."
사내는 그렇게 말한 다음 곽재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곽재우는 사내가준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면 매번 승리했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곽재우를 일러 "紅依將軍 홍의장군"이라 부르게되었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나라에서 부르는 것도 사양하고 자신의 식솔을 데리고
의령으로 가서 그곳에 "望憂堂"을 지어 거취하며 초야에 뭍혀 여생을 보냈습니다.
- 끝 -
[쇠목재 정상에 있는 쉼터 정자]
의령군은 자굴산과 한우산을 관광지화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리는 듯합니다
곳곳에 편의 시설을 만들고, 관광객과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어야 할텐데......
아직까지는 '쇠목재'에서 차량과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된비알]
'쇠목재'에서 한우산 방향으로 오르는 곳이 가파른 급경사 지역이었습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갑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에겐
몇가지 특별한 일화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의심 많은 쪼다王 "宣祖"가 내용이 너무 비판적이라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졌었지요. 아 무슨 X같은 경우입니까?
요즘 같았으면 王이 탄핵을 받을 일이었지만 당시엔 御命이 헌법이었으니 어쩔수 없었지요
그 일로 郭再祐는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낙담한 郭再祐는 고향에서 백수 생활을 하며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마당바위에서 바라 본 '쇠목재'와 자굴산]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不敗神話를 만들었다면
육지에선 유일하게 "의병대장 郭再祐"만이 백전백승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의병"으로서 단 한번도 敗하지 않은 유일한 將軍이 郭再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적군인 일본놈들에게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입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세번째 일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宣祖"가 벼슬을 내립니다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한 자신을 직권으로 낙방시킨 "宣祖"가 내리는 벼슬을
郭再祐가 받겠습니까? "쪼다리 王인 너나 잘 먹고 잘살아라~!! 난 니가 주는 벼슬은 싫다!"
무려 29번이나 벼슬을 내렸는데 모두 거절한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열 받은 宣祖가 곽재우를 귀양까지 보내 3년 동안 귀양살이를 시켜도 벼슬을 받지 않았습니다
벼슬의 내용 중에는 많은 높은 벼슬이 있었습니다만,
이순신장군이 맡았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까지도 있었습니다
[페러글라이딩]
의령군 공식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이곳에 있더군요.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이 부릅습니다.
[우봉지맥 갈림길]
"진양기맥"에서 분기하는 "우봉지맥"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진양기맥 종주자들이 '우봉지맥'으로 가 알바를 한다는군요.
[우봉지맥 갈림길]
이곳에서 알바를 하는 종주자들은 대부분 北에서 南으로 종주하는 사람들이겠지요
갈림길 표지판이 있으니 "우봉지맥"으로 가지 마시고 우측 '진양기맥'으로 가세요~
[한우산 오르는 길]
"한우산" 오르는 길은 평이합니다.
무슨 O.K목장을 가는듯합니다
[한우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지나온 길]
서울의 공동묘지 - 망우리
망우리에 대한 글을 예전에 쓴적이 있는데.....
망우리는 그뜻이 공동묘지로 느껴질 정도로 죽음 같은 것을 연상시킴니다
하지만 '망우리'는 무척 의미있는 뜻이지요
"望憂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곳에 누워 잠들면 아무도 깨우지 않습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더러운 아웅다웅 싸우며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편히 누워 한줌의 흙으로 변해 갑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쇠목재'와 '자굴산']
제가 새삼스럽게 한우산을 오르며 "望憂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郭再祐 將軍의 호가 "望憂堂"입니다
자신의 아호를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望憂堂"이라고 지었으니
그는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현상이 얼마나 잊어버리고 싶도록 더럽게 느껴지는 세상이었는지
그의 처신에서도 가늠해 볼수 있겠습니다
어명을 여겨 귀양을 갈 지언정 29번의 벼슬도 사양하고, 生家를 "望憂堂"이라고 이름짓고
자신의 호 까지도 "望憂堂"이라고 칭하며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
정규군이 무참히 패배 할때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우산 주차장에서 바라 본 "찰비골"]
'한우산'은 韓牛山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소와 관계있는게 아니냐고 뭍습니다만
한 여름에도 찬 비가 내린다고 차가울 寒과 비 雨를 사용하여
寒雨山입니다
寒雨山에서 흘러 내리는 차가운 물이 계곡을 이룬다고 "찰비계곡"이라 한답니다
이 계곡에서는 여름에도 계곡물에 5분 이상 발을 담구고 있지 못한다고 하니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라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한우산 주차장']
'우봉지맥'이 분기하여 나가는 산줄기가 뚜렷이 보입니다
[한우산 정상]
한우산 정상으로 유유히 올라 갑니다
[한우산 정상석]
836m - 상당히 높은 산인데도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山勢가 둥글고 나무나 암릉이 없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듯합니다
차가울 寒과 비 雨가 합쳐진 寒雨山입니다
자굴산이 의령의 형님산이고, 한우산이 동생산이라 하는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양기맥 마루금]
지나온 마루금 좌측으로도 "자굴산관광도로"가 깨끗하게 포장되어
벽계리 까지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과 자굴산은 이제 쉽게 오를수 있게 되었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자굴산']
자굴산이 897m이고 한우산이 836m이니 자굴산이 61m 더 높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
평온한 산골 마을이 산줄기를 병풍 삼아 길게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산성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산성산'입니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 하고 버스를 타고 하산합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한우산에서 내려와 의령군에서 합천군으로 들어 왔습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바라 보는 산성산이 岩山으로 보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쌍백면 외초리는 고향의 멋을 한껏 풍기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 정돈이 된 산골 마을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지킴목]
언제 다시 와 볼려나~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를......
이곳에서 뒷풀이를 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서울백두클럽 회장님과 외초리 이장님]
이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산객들이라하더라도
우리 마을을 찾아 주어 반갑다고 이장님이 나와 반겨 주었습니다
산행기에 우리 외초리 마을을 잘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아는 자료가 없어
사진 몇장 올렸습니다.
이장님 연세가 1945년생이라니 나이에 비해 무척 젊게 보이시죠?
감사합니다. 이장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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