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山寺와 山行』
      『봉원사-안산-백련산-탕춘대성-홍지문』
                            

  [전체 답사 지도]  
  <서대문사거리>에서 <이회여대><연세대>로 넘어가는 <금화터널>을 지나면 <서대문구 봉원동>이
  <안산> 자락에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 동네 이름을 만들어준 <봉원사>에서 
  출발하여 <안산>과 <백련산>을 오르고 <녹변동 산골고개 생태통로>를 건너 <탕춘대성>으로 가서
  <홍지문>까지 가는 길입니다.
 

  ['봉원사 입구 주차장']          11:48        
  2021년 12월 22일 (수) 맑음 연무 약간      
  <서울역>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환승하여 <봉원사> 앞 주차장에 내려 산행을 시작합니다.
  조금 올라 가면 우측에 <봉원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탑들이 있고


  ['안산 정상' 조망]               
  조금 더 올라 가면 잠시후 올라 갈 <안산 정상>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봉원사' 전경]              11:51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년 고찰인 "봉원사 奉元寺"에 도착합니다.
  <일주문>은 별도로 없으며 입구엔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반겨 줍니다.
  <봉원사 奉元寺>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3년 (서기 889년)에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 있었던 나중에 "연희궁"이 되는 곳에 <반야사般若寺>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 시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답니다.
  그리하여 <태고종 총본산>이 되는 절이 탄생되었다는데 그런 안내는 보이지 않더군요.
  아마도 <조계종>과 <태고종>을 별도로 구분하고 싶지 않아서 인가 봅니다.
  <태고종>은 스님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자식을 두어도 아무 문제 없는 종파이죠.
  <태고 보우 스님>은 <고려> 말 모든 불교 종파를 통합하려고 노력한바 있어서 <조계종>과
  <태고종>에서 모두 자기들 종파의 중시조라고 모시는 스님이죠.
  (다음에 "북한산 태고사"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강남구 <봉은사>의 <보우스님>....<문정왕후>와 스캔들이 있었던 그 <보우스님>하고는 완전 다른 
  <고려시대 말> 스님이니 구별해야 합니다.
  이후 열열한 불교신자였던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이색 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태고 보우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한답니다. <태조 이성계> 5년(1396)에는 <원각사 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이성계>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연못과 송덕비]               
  <21대 영조>는 재임 24년( 1748)>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있었던 절을 이곳으로 옮기고, 
  그곳엔 "연희궁"을 지었는데,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이 탄생되는 연유이기도 하는데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 奉元寺"라 헌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22대 정조>는 재임 12년(1788)에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 八道僧風糾正所>를 이곳에 설치하며, 불교 정화운동을 했다고...
  이렇게 국가시설로 봉해지는 사찰에만 이름에 "奉"자를 붙여 준다는군요. 
  그 대표적 절이 '강남구'의 <봉은사>와 '남양주'의 <봉선사>..그리고 이곳 <봉원사>라고 하니
  이 절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수 있답니다.
  <26대 고종 21년(1884)>에 발생한 <갑신정변 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며 그들을 
  가르켜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고하니 정변의 모의처 역활도 한거군요.


  ['16나한상'과 '동종각']                       
  "16 나한 상 羅漢像" <석가>의 16 제자들 형상이 있으며
  "범종 梵鐘"이 있는 <범종각>이 끝에 보이는데
  이 <범종>은 '충남 덕산' <가야사>에 있던 종인데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때 타지 않고 있던 종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숭유억불정책>을 쓴 <흥선대원군집>과 "범종 梵鐘"이 함께 있어 야릇한 느낌을 줍니다.
  <남연군 묘>와 <가야사>에 대해선 제가 몇번이나 포스팅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 하세요.
          "<석문지맥> 가야산과 남연군 묘 탐방기"


  ['대웅전']                
  "봉원사 대웅전 奉元寺大雄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68호>
  "대웅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이 썼답니다.
  선생은 <숙종 31년(1705)>에 태어나 <영조>대에 활동한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죠. 
  또한 현대 한국학의 시조가 된다는 분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처음엔 몹씨 질시한 서예가입니다만, 선생은  중국풍의 글씨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적 <원교체>를 완성한 명필가로 유명하고, 후에 <추사 김정희>도 인정한 명필가랍니다.
  무술이 아들 <영조>가 형을 죽이고 등극했다고 하는 괴문서 사건과 함께 역모를 일으킨 혐의로 
  <영조>에 의해 유배 당하고 결국 사형 당했지요.
  한편 조선판 <로미오와 줄이엣> 같은 기구한 운명의 <이광사 선생>과 부인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선생의 부인은 역모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은 남편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먼저 자살합니다. '열녀'
  그런데 <이광사의 명필>을 아까워한 <영조>는 사형 대신 귀양을 보내며 목숨을 유지 했으니.....
  미리 자살한 부인은 조선판 <줄리엣>이 되버린 것이죠.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 너무나 많은 
  후학들이 선생으로 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몰려 들어 유배지를 <신지도>등으로 옮기며 분리시켰지만 
  백성들로부터 계속 추앙을 받자 결국 사형 시켰습니다.
  이 분의 현판 글씨는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똑 같이 걸려 있더군요.


  ['봉원사']                       
  "봉원사 奉元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원래  "아소당 我笑堂" 본채 건물이었답니다.
  이 건물은 현재 "봉원사 염불당 대방 念佛堂大房"으로 사용 되고 있는데 무지 유명한 건물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유폐 당해 살던 집의 본채인데, 철거시 <봉원사>가 구매하여 이곳에 옮겨 약간 
  축소하여 개축한 건물이어서 매우 유명한 건축물이죠.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왕후>에 의해 자택인 <운현궁>에서 쫒겨나
  현재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99칸짜리 큰집에 유폐시켰습니다.
  26세가 된 아들 <고종>과, 29세의 며느리와의 권력 투쟁에서 완전 밀려 난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였죠.
  그 집에서 유폐 당해 살던 어느 날 푸념섞인 詩 한수를 지었답니다, 
  그 詩 제목이  "아소당 我笑堂"이었는데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 되겠죠?
    
       吾負吾身任不輕  오부오신임불경
       退公閒日酒樽傾  퇴공한일주준경 
       從知往事皆吾夢  종지왕사개오몽
       惟愧餘年任世情  유괴여년임세성 
       理屐山村俚談好  리극산촌리담호
       聞蟬溪柳古詩成  문선계류고시성 
       世論百歲安排地  세론백세안배지
       我笑前生又此生  아소전생우차생
       나의 짐, 나의 몸이 맡은 것이 가볍지 않은데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이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한바탕 꿈인 것을
       오로지 남은 생애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네
       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시골 덕담이 좋아
       냇가 버들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시를 짓네
       세론은 어찌 나를 물러난 신분이라고 말하나
       전생도 이생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만 나네
   
  그래서 그 집 이름이 "아소당 我笑堂"이 되었었다는데......
  <아소당>에서 <흥선대원군>은 권불십년의 한을 느끼며 저 세상으로 갔답니다.
  그 <아소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염불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아이로니칼 하죠?
  
 
  ['청련시경']                   
  "靑蓮詩境 청련시경"
  "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라는 의미일테고...
  천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랍니다.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교 감상 할수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조금 전에 언급한 '전남 해남' <대흥사>와 이곳 등이 있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인 <완당 阮堂>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글입니다.


  ['무량수각']                        
  "無量壽閣 무량수각"
  무궁무진한 수명을 준다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랍니다.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글씨라는데.... 
  이렇게 어렵게 쓰면 누가 알아 보나요.ㅋ...누구나 보고 알수 있는 글이 좋은 글 아닌감? ㅎㅎ


  ['산호벽수']             
  "珊糊碧樹 산호벽수"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 이랍니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직접 감상 할수 있어 넘 좋았습니다.
  이 글들은 <아소당>을 이건 할때 딸려 온 것들이라고 합니다.


  ['염불대방' 내부']               
  혹시 <흥선대원군>의 흔적이 좀 남아 있을까하여 내부를 들여다 보았는데 그저 일반 절간이었습니다.
  그는 <아소당>에서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답니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상을 한 번만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어가가 거둥하였느냐" 
  <흥선대원군>이 <아소당>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리다 마지막 한 많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왕후>는 끝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종>에게 <흥선군>은 혹시 아버지로서 보다는 정적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빨리 죽어 다행이라고 생각 했을듯....


  ['관세음보살']                          
  매우 날씬한 현대판 <관세음보살 상>이 있는 곳에서 좌측에 있는 <명부전>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명부전'] 
          
                 ['정도전 글씨']                     
 "명부전 冥府殿"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이죠.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하는 보살이 <지장보살>이라죠.
 그런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천하의 역적으로 몰려 역사에서 사라진 <삼봉 정도전>의 흔적이
 여기에 편액으로 남아 있어 이채롭습니다. 왼쪽 위 끝머리에 <鄭道傳筆>이 선명하게 있는데
 500년의 세월을 거스러는 선명함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할 정도입니다.
 여튼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삼봉 정도전>의 글씨를 비교 감상 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겠군요.
  
          
                 ['이완용 글']             
  햐~~ 여기서 반민족친일매국노의 巨頭인 "일당 이완용 一堂 李完用"의 글씨를 만납니다.
  이곳 <명부전>의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이완용>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무지 영특하고 외국도 많이 다니며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죠.
  특히 그는 <조선 4대 명필> 중에 한사람으로 그의 글씨는 지금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답니다.
  그는 약간의 흘림이 있는 행서와 곡선 위주의 초서를 매우 잘 썼다고 합니다.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이 쓴것이 랍니다. <김가진선생>의 글씨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다음을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 할것입니다.
  <이완용>에 대해 매국노라는 거 빼고는 모르는게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몇가지 언급하면....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협회 회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친일파로 변절했을까? 이런건 잘 모르죠? ㅎㅎ
  격변하는 정치 외교 상황에서 그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1898년 3월 <전라북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좌천 된지 닷새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당하고, 이어서 공금횡령으로 파직되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 당했죠. 그래서 1904년까지 고향에서 두분불출 하고 있다가 다시 정계에 등장해서 
  <친미파>가 되었다가 다시 <친러파>가 되기도 하고 결국 <친일파>가 되어 반민족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하며 돌아 오지 못할 강을 건넜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워 미국 생활을 많이한 관료여서 영어를 무척 잘했는데, 
  반면에 일어는 한마디도 못했답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주로 만나 
  정치현안들을 의논하며 친했답니다.그래서 다른 쪽바리들을 만날 때엔 그에겐 일어를 잘하는 
  수행통역비서관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혈의 누>라는 소설을 쓴 <이인직>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신소설이라고 교과서에서도 배운 기억이 납니다만, 
  <이인직>도 뼈 속까지 친일파였으며 <을사늑약>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혈의 누>라는 소설도 친일소설인데, 소설 제목은 우리말로 <피눈물>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도 
  <혈루(血淚)>가 옳은 말임에도 일본식 표기인 <血の 淚>를 그대로 직역하여 <혈의 누>라고 
  표현한것이니 이런 것에서도 친일청산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글학회' 창립터]                     
  <백범 김구 선생(법명 원종)>도 이곳에 머물기도 했으며, <한글학회>를 창립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만월각']              12:20           
  <봉원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만월각> 좌측으로 <안산등산로>가 이어집니다.
  <봉원사>를 떠나며 <이완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이완용>이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친미파>, 때로는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변신하였기에 <외세론자>는 분명하며, 이익을 위해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후 귀족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다 죽었지만, 
  그의 아들 <이승구>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그의 자손 중엔 자결한 이도 
  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군 아들이라는 얘깃꺼리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조선 4대 명필> 중에 한사람이라는 평판은 간데없고 반민족행위자로만 기억되는 <이완용>이 
  불쌍하게 느껴지며, 짧은 인생을 더럽게 살다간 <이완용>을 생각하며, 
  그가 천하명필 중에 한사람이었다는 것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봉원사>를 떠나 갑니다. 
  언제 다시 오랴~~ 머리 잘 돌아 가는 놈들이 대부분 친일파 ㅠㅠ..


  ['안산 등산로' 입구]               12:22        
  <봉원사>를 벗어나면 바로 <안산등산로>를 만납니다.


  ['안산 등산안내도']                    
  현위치와  등산안내도를 참고하고 가운데 오름길로 올라 갑니다.
  제가 진행한 길은 노란색으로 추가 표기 했습니다.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올라 가면...
  

  [사거리]                  12:30          
  <안산자락길>을 만나며 또한 사거리를 만나는데 
  둘레길과 정상 등산로가 나뉘는 곳입니다.
  <안산자락길>은 2019년 7월 19일에 돌고 포스팅 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 하시고
  "서울 안산 자락길"
 

  ['전망대'와 '봉수대' 조망]                      
  오늘은 <안산>의 암릉코스로 올라 갑니다.
  먼저 중턱에 보이는 <전망대>로 8분 정도 걸려 올라 가면...


  ['전망대' 입구]              12:37~12:41   
  <전망대> 입구를 만나는데 좌측 계단으로 조금 나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전망대>로 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야 합니다.
 

  ['전망대']                      
  이곳 전망대에서의 풍광도 좋지만 잠시후 정상에 올라 다시 조망하기로 하고
 

  ['봉원사' 조망]                     
  산행 출발지였던 <봉원사>를 조망하고 정상으로 올라 갑니다.


  ['봉수대' 조망]                    
  북쪽으로는 <봉수대>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 10여분 걸려 올라 가면....


  ['봉수대' 입구]                 12:50~12:54

  ['봉수대']                      
  "동봉수대 東烽燧臺"
  <안산> 정상에는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가 있으며, 봉수대도 두개가 각 봉우리에 있었답니다.
  현재 <東峰>에만 봉수대 모형을 만들어 놨고


  ['봉원사' 조망]                   
  <동봉 봉수대>에서 산행 출발지인 <봉원사>를 먼저 조망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편>에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할때, 
  현재의 <연세대-이화여대> 주변으로 <무악도성>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현재의 <한양도성>으로 옮기자는 각료들의 찬반이 너무 격렬해 
  <동전던지기 (척전擲錢)>로 결정했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0월 6일]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
  대사헌 김희선(金希善),지신사 박석명(朴錫命),사간(司諫) 조휴(趙休)를 거느리고 묘당(廟堂)에 
  들어가, 상향(上香)하고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반중(盤中)에 척전(擲錢)하게 하니,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 
  임금이 나와 의논이 이에 정해지니, 드디어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를 상지(相地)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고, 어가를 돌이켜 광나루[廣灘]에 머물러 호종하는 대신과 더불어 말하였다.
  "나는 무악(毋岳)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경복궁>이 현재의 <북악산> 아래가 아니라 <안산> 아래 <연세대> 위치에 건설 될뻔했는데
   '동전치기'로 현재의 위치를 결정 했다는 사실..............아셨나요? ㅎㅎ


  ['서대문형무소'와 '남산' 조망]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전체적으로 조망됩니다.
  조금 전 <봉원사>에서 <독립문> 현판을 누가 썻느냐하는 얘기가 나왔으니 
  이번엔 "독립문 獨立門"에 대해 한마디 더 언급하겠습니다. 모르고 사는게 너무 많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독립"이라는 글자 때문에 <독립문>이 일제에 맞섰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독립문>은 복잡한 시대혼란과 권력다툼 속에서 세워진 "중국반대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염원하는 상징물이었던거죠.
  그리하여 백성들은 자주적인 국가를 기원하며 <독립협회>와 <독립문 건립>을 지지했습니다만, 
  어떤 놈들은 '일본'을 끌어오기 위해 '중국'을 내쫓는 목적으로 <독립문>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국민의 염원을 이용해 먹으며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행태는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이 왜 현명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인왕산' 조망]                                       
  <인왕산>과 <북악산>을 조망하는데 아랫쪽을 조금 줌인해 보면...


  ['선바위' 줌인]              
  <한양도성>이 <인왕산>을 지나는게 보이며, <범바위>와 <선바위>도 보입니다.
  <통일로>에 설치된 <생태육교>도 보이는군요.


  ['탕춘대성' 조망]                                   
  동북쪽으로는 오늘 산행의 종점이 될 <탕춘대성>과 <상명대>가 보입니다.


  ['백련산' 조망]                                             
  북쪽으로는 잠시후 오를 <백련산>이 보이며 <산골고개>를 건너 <탕춘대성>으로 갈 코스가 조망되고
 

  ['안산' 정상 조망]                       
  <봉수대>가 있는 <동봉> 앞에는 <서봉>이 가까이 있는데 
  <서봉>이 실질적으로 제일 높은 <안산 정상>인데 군부대 시설로 올라 갈수 없습니다.
  이 <동봉>과 저 <서봉 295.9m> 사이가 "말의 등허리" 처럼 생겼다고 "안산 鞍山"이라하죠.
  이곳에는 세갈래 길이 있는데 저는 우측-북쪽길로 하산합니다.
 

  [내림길]                    
  <안산 정상>에서 북쪽 길로 잠시 내려 가면
 

  [운동시설]                1:02    
  운동시설이 있는 곳을 만나고, 다시 10여분 내려 가면...
 



  ['봉화천약수터']             1:13       
  "봉화천 약수터"를 만나는데 규모가 제법 큰 공원시설이었습니다.
  특히 이 암봉 정상 부근에서 약숫물이 많이 나와 연못도 있을 정도이니 특이 합니다.


  ['너와집']                1:17       
  <봉화천약수터>에서 4분여 더 내려 가면 "너와집"을 만납니다.
  <안산>의 명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안산자락길']               1:21      
  <너와집>에서 다시 4분여 더 내려 가면 <안산둘레길>인 <안산자락길>을 만나 북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               1:22     
  "흔들바위"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흔들바위>가 흔들리는지는 확인 못했습니다. ㅎ


  ['안산자락길']                     

  ['홍제역 갈림길 전망대']              1:27       
  <흔들바위>에서 자락길 데크를 따라 5분 정도 진행하면 <전망대>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안내판>에 <인왕산>의 정상 위치표시가 잘못되 있더군요.


  ['안산자락길 출입구']             1:30        
  이어서 자락길에서 도로로 나가는 출구를 만나는데 먼지털이도 있고 운동시설도 있습니다.


  ['숲속도서관']              1:32      
  이어서 <숲속도서관>도 지나면...


  [도로]

  ['연희숲속쉼터' 입구]              1:38       
  <연희숲속쉼터>로 연결되는 곳에 제법 큰 쉼터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희숲속공원>으로 내려 가려면 이정표의 <안산방죽> 방향으로 내려 가야 하더군요.


  [내림길]   

  ['벚꽃마당']

  ['공원 쉼터']

  [내림길]                        
  음악이 흐르는 "연희숲속공원"이 펼쳐집니다.
  봄이나 가을에 와야 볼거리가 더 많겠습니다.


  ['연희숲속쉼터' 출입구]

  [안내도]                  1:49         
  <서울내부순환도로>가 지나는 <홍제천>에 도착하면 <연희숲속공원 안내도>가 있으며
 

  [물레방아]                      
  물레방아도 있고 장독대도 있더군요.


  ['홍제천' 동쪽방향]

  ['홍제천' 서쪽방향]                       
  "홍제천 弘濟川"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평창동><구기동>등을 지나
  <남가좌동>에서 <불광천>에 합류하여 <한강>으로 가는 개천이죠.
  이 개천은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고도 불리는 개천인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요.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은 수많은 인질과 소녀들을 <청나라>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정약용선생>이 쓴 <비어고>에는 6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역사이지요.
  <홍제천> 지명의 유래는 공식적으로 <의주로>로 통하는 길목에 <홍제원>이라는 공공 숙박시설에서
  유래 한다지만, 그 보다는 <병자호란>에서 인질로 끌려 갔던 여자들로 부터 나왔다는게 슬픔니다.
  <청나라>에 끌려 갔다가 정조를 유린 당하고 디시 돌아 온 소녀들을 <환향녀 還鄕女>라고 했는데
  음운을 약간 바꿔 <정조관념이 없는 여자>를 뜻하는 비천한 말로 <화냥년>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죠.
  모두 잡혀 가서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 조정은 이 <환향녀>들을 다시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었는데, 울며겨자먹기로 조건을 하나 붙여 <화냥년> 주홍글씨를 떼내 주었는데
  그 조건이 이 <홍제천>에서 그녀들의 "그곳"을 씻기만 하면 정상적 여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으니
  <환향녀>들은 모두 이곳에서 "그곳"을 씻고 <한양>으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천의 이름이 <넓게 구제 한다>라는 <弘濟川>이 되고, 그 정도의 은혜에도 감사한다는 
  <弘恩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탄생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유래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장검다리]                   1:52        
  <징검다리>를 건너며 맑게 흐르는 냇물에 비치는 듯한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들과
  일제강점기 시대 <위안부>로 고생한 여인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겠는데.....


  ['홍제천 수변길'] 

  ['홍은어린이집' 조망]                1:57            '
  <백련산>으로 가기 위해 <홍제천> 수변길을 따라 5분 정도 서쪽으로 진행하면
  우측에 <홍은어린이집>이 보입니다. 여기서 <홍은어린이집>으로 올라 가면....


  ['홍은어린이 집']                 1:58         
  <홍은어린이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나가면....


  ['홍은동']                    1:59      
  <홍은동>의 <모래내길>을 만나 건너 갑니다.
  건너편에 <백련산>이 보입니다.



  ['서대문 문화체육회관']

  ['홍연초등학교']                   
  그러면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좌측엔 <서대문 문화체육회관>과 <홍연초등학교>가 연이어 있습니다.


  ['팔각정']               2:10~2:27             
  10여분 오름길을 진행하면 "백련약숫골 팔각정"을 만나는데 <백련산 등산로> 입구가 되겠습니다.
  이곳 <팔각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오르면....


  ['백련산 능선길']                 2:35    
  <백련산 능선길>을 만나는데 첫번째 봉우리 삼각점이 있습니다.
  <백련산>은 길쭉하게 일자로 길게 누운 산이었습니다.


  ['백련사' 갈림길]                2:37        
  이어서 <백련사>와 <정원여중> 갈림길을 만나고
  계속해서 평지성 능선길을 7분여 진행하면....
 

  ['MBC응암중계소']               2:44           
  "MBC응암중계소"를 지나고
 

  [체육시설 봉우리]                2:48        
  운동시설이 밀집해 있는 봉우리를 지나면...
  

  ['백련산 정상' 조망]                       
  <백련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분 정도 진행하면....
 


  ['은평정']              2:52~2:55       
  "백련산 白蓮山 228m"
  정상에는 <은평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올라 가 조망을 하고 갑니다.


  ['한강-난지도-계양산' 조망]                      
  서쪽으로는 <한강>과 <난지도> 그리고 <인천 계양산>까지 연무 속에 비침니다.


  [봉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봉산>이 있는 산줄기가 보이는데 <서울市界>이며 <서울둘레길>이 지나는 능선이죠.


  ['앵봉산-노고산' 조망]             
  북쪽으로는 <앵봉산>이 보이는데 <서오릉>이 있는 산이고
  <한북정맥>이 지나는 <노고산>도 조망됩니다.
  <노고산> 뒤에는 <오두지맥>의 <계명산>이 있는데 연무로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군요.


  ['백련산 능선길']                 
  지금부터는 <은평둘레길5코스 산골고개생태연결로>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10여분 편안한 능선길을 진행하면....


  ['백련공원']              3:06        
  <백련공원>이라는 공원을 지나고


  [암봉]              3:09    
  이어서 암봉에 오르면 <거북이>한마리가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는데
  <북한산 비봉능선>이 성큼 다가 옵니다.
 

  [쉼터]                3:09         
  <거북바위> 바로 아래엔 조금 독특한 모양의 쉼터가 하나있고
 

  [진행방향 조망]                    
  쉼터에서 앞으로 진행할 루트를 가늠해 보고 출발합니다.
  건너편은 <은평구 녹번동>입니다. 그러니까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바라 보고 있는 것이죠.


  [데크 내림길]                 
  <산골고개 생태통로>로 내려 가는 데크길은 제법 가파른데,
  조금만 내려 가면.....


  [갈림길]               3:12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우측 <은평둘레길5코스 산골고개생태통로>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사거리']                 3:15       
  이어서 사거리를 만나는데 직진하면....
 

  ['산골고개 생태통로']                 3:18               
 <서대문구 홍은동>과 <은평구 녹번동>을 연결하는 "산골고개 생태연결로"를 만납니다.


  ['녹번동' 방향 조망]                  
  생태육교에서 북쪽 <녹번동> 방향을 조망하는데 남쪽방향은 볼수 없더군요.


  [삼거리]                3:21         
  <산골고개 생태연결로>를 건너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며
  여러 안내판과 이정표가 설치되 있습니다.
  이곳은 <은평둘레길5코스>가 끝나고 <은평둘레길4코스>가 시작되는 곳이고
  <북한산 자락길>이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북한산 자락길']                      
  지금부터는 <북한산자락길>을 따라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안산자락길>일부와 <백련산 초록길> 일부를 걷고, 
  <북한산 자락길>를 완주하게 되겠군요. <북한산둘레길>은 예전에 둘러 보았지만 <북한산 자락길>은
  처음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골마을' 안내문] <산골>의 뜻과 <녹번동>의 유래가 새롭습니다.
['북한산둘레길 합류점' 방향] <전망대><북한산둘레길합류점> 방향으로만 가면 되겠습니다. [오름길] 경사도가 제법 있는 오름길을 14분 정도 오르면..... ['은평둘레길'] 3:35 <녹번동 뒷산> 능선에 오르고 ['운동시설 쉼터'] 3:35 운동시설이 있는 쉼터를 지나면.... ['장군바위 전망대' 앞 갈림길] 3:39 <장군바위> 앞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올라 가면 ['장군바위 전망대'] 3:42~3:44 <장군바위>가 있다는 봉우리에 오르면 헬기장과 전망대가 있습니다. ['인왕산-안산' 조망] <인왕산>과 <안산>이 새로운 각도로 그림같이 조망됩니다. ['안산-백련산' 조망] 오늘 두발로 걸어 지나온 <안산>과 <백련산>이 개로운 각도로 조망되는군요. ['장군바위'] 이 봉우리 어느 곳에 <장군바위>가 있는지 찾아 봤으나 못찾고 떠나 갑니다. ['북한산둘레길 합류점'] 3:48 <장군바위 전망대>에서 10여분 진행하면 <북한산둘레길>을 만납니다. 오랜만에 다시 왔군요. ['225.9m봉' 오름길] ['225.9m봉' 정상] 3:52 "225m봉"은 우회로가 있어 잘 오르지 않는 봉우리입니다만, 오르면 후회없는 봉우리이죠. 여기서 바라보는 <북한산 비봉능선>이 압권이기에... ['북한산둘레길'] ['탕춘대성 능선' 조망] <북한산둘레길>을 20여분 진행하면.... ['탕춘대성 암문'] 4:11 [안내문] "탕춘대성 암문"을 만납니다. <연산군>이 봄을 농락하려고 지은 <탕춘대>의 이름을 따와 <숙종>때에 건설한 <한양성곽>의 외곽성으로 <인왕산 기차바위> 부근에서 <북한산 향로봉>으로 연결된 성곽입니다. <구기터널> 위에 암문이 하나 있는데 앞에 보이는 문입니다. ['탕춘대성 암문'] ['탕춘대성-홍자문' 방향] 예전 <북한사 산행>을 할때는 이 암문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갔습니다만 오늘은 남쪽으로 처음 진행해 봅니다. ['탕춘대성'] 오리지날 城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탕춘대성>을 따라 내려 가면서 뒤돌아 보면... ['구기동' 조망] <종로구 구기동>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며, <이북오도청>도 잘 보입니다. ['평창동' 조망] 약간 동쪽으로는 <종로구 평창동>이 조망됩니다. [허물어진 성곽] 4:25 암문에서 14분 정도 성곽을 따라 진행하면 성곽이 허물어진 곳을 만나는데 직진하는 곳에 철조망 문이 있고, 그 안은 <상명대>여서 우측 성밖으로 나가 걸어야 하더군요. ['상명대 부속여자고등학교''] 4:31 성밖으로 조금 진행하면 <상명대부속여자고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성곽 안으로] 4:34 이어서 <상명대 후문>으로 들어 갈수 있는 허물어진 성곽을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우측 성곽을 따라 진행합니다. ['상명대 후문' 방향] 직진해서 내려 가면 <상명대 후문>을 통과해 바로 <세검정 교차로>로 내려 갈수 있겠군요. ['탕춘대성'] 다시 <탕춘대성> 성곽 안쪽으로 진행하면... ['상명대' 조망] <상명대>가 전체적으로 조망 되고 [성곽길 끊김] 4:50 이어서 성곽으로는 더 이상 진행 할수 없는 곳을 만나는데 다행이 성곽에 성밖으로 나가는 틈새가 있더군요. 내려 가면 [내림길] <홍지문>으로 내려 가는 등산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 <인왕산> 속으로 들어 가는 <서울내부순환도로> 터널이 보이고 ['홍은동'] 5:00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니 <홍제천>의 <옥천3교>를 만나더군요. 좌측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 5:03 "홍지문 弘智門" <탕춘대성>의 유일한 대문인데 <숙종> 대에 건립하고 적을 막은 적이 한번도 없는 門입니다. <인조반정> 때에 반정세력들이 통과 했을뿐 수도방위의 역활을 거의 못한 쓸모없었던 성문이었죠 ['탕춘대성' 조망] 성곽을 따라 내려 오는 길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검정 교차로'] 5:07 <세검정교차로>에서 산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5km로 5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봉원사>에서 <흥선대원군>이 말년을 보낸 <아소당>을 만났고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삼봉 정도전> <일당 이완용>의 글씨를 만나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둘러 보고 싶었던 <인왕산-안산-백련산-탕춘대성>을 모두 돌아 밀린 숙제를 다 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북한산성의 역사> 속으로 들어 가 볼 예정입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