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삼청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 1부』
『삼청공원에서 北村을 따라 청계천 광교까지 2부』
[전체 답사 지도]
['첫구간:청계광장'에서 '종로구청'까지 실트랙]
1."광통관-광교-청계광장-우포도청-기념비전-
혜정교-중학천-정도전집터(종로구청)"
['광통관']
2021년 11월 16일 (수) 맑음
오늘은 <광교>와 <을지로입구역> 사이에 있는 "광통관"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광통관']
[안내문]
"광통관 廣通館"
현존하는 국내 은행 건물 중에 제일 오래된 은행건물이랍니다.
지금도 <우리은행 종로 금융센타>로 사용되고 있는데 <광통교> 앞에 있다고 <광통관>이라 했답니다.
112년전 <대한제국>시기 일본의 경제침탈에 맞서고자 국가재정을 담당하던 <탁지부>에서 세운
금융기관인데, <탁지부>는 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정부기관이었죠.
여하튼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하늘 아래 최고'라는 <天一銀行>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프랑스 바로크풍"의 건물을 지어 선진국 다운 면모를 갖추고자 했답니다.
현존하는 <대한제국 건축물>을 참고 하면 <광통관>의 위상을 알수 있고...
['회동서관 터']
<광통관>에서 <광교>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현 신한은행 광교빌딩> 옆에
"회동서관 터 匯東書館址"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이 서점 겸 출판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업을 했던 서점을 겸한 출판사였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을 이 출판사가 간행 했다고
['광교'에서 조망]
<청계천>에 건설된 "광교 廣橋"에서 <종각 사거리>를 조망합니다.
<광교> 자리엔 원래 잠시후 만나게 될 "광통교 廣通橋"가 있었습니다만,
도로 확장으로 <광교>를 설치하고 오리지날 <광통교>는 보존을 위해 좌측 위로 옮겨놨지요.
['청계천' 상류방향 조망]
['광통교']
[안내문]
<청계천> 상류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복원해 놓은 오리지날 "광통교 廣通橋"를 만납니다.
197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등으로 매몰되었던 <광통교>를 이곳으로 옮겨 복원해 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광통교 廣通橋"의 석물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의 석물을 가져와 다리를 만들어. <태조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이며 후에 왕비로 추존된
<신의왕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복수심에 부관참시하듯 만든 다리가 바로 이 다리이죠.
누구나 <신덕왕후>를 밟고 다니라고....
['모전교']
"모전교 毛廛橋"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청계천>에 합류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설치한 <청계천>의 다리인데
<무교동>과 <서린동>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청계천> 최상류에 있는 다리랍니다.
다리 모퉁이에서 과일을 파는 가게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모전 毛廛>은 "과일가게"를 의미하죠.
<모전교>는 일제시대까진 있었으나 개발과정에서 완전 없어져, 현재 이 다리는 이름만 <모전교>랍니다.
['일제강점기시대 모전교 사진']
양산을 쓴 여인과 전봇대가 인상적입니다.
['청계광장 폭포']
<백운동천> <삼청동천>등 지류들이 합쳐져 "청계천 淸溪川"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폭포입니다.
원래 모습은 찾을수 없고 완전 현대화 공원화 되었습니다.
<한강>의 물을 정수하여 이곳으로 끌어 당겨 흘려 보내고 있는데 유지.관리비가 1년에 약74억원이
든다고 지난 2021년 국정감사 자료에 나와 있더군요.
['청계광장']
<청계광장 폭포> 위에는 완전 복개되어 물줄기를 볼수 없는데, <백운동천 白雲洞川>이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 가고 있다는 의미의 홈을 파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측에는 "中學川入水之源"이라는 표석이 있는데....
['중학천입수지원']
"中學川入水之源"이라는 말은 "중학천 中學川"이라는 개천이 흘러 들어 오는 곳이란 뜻인데
<북악산> 동남쪽 기슭 <삼청공원>등에서 발원하여 <경복궁>의 동쪽으로 흘러
이곳으로 오는 "삼청동천 三淸洞川"에 있는 개천의 일부분 이름인데
"중부학당" 앞에서 이곳까지 구간 개천의 이름을 "중학천 中學川"이라 한답니다.
['종로'에서 뒤돌아 본 '중학천']
<청계광장>에 있는 "中學川入水之源"에서 <서린동>을 통과하여 <종로>에서 뒤돌아 본
"중학천 中學川"의 흔적입니다.
<두물머리>를 한자로 "兩水" 또는 "열수 洌水"라고 쓰는데 여기선 뭔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리지날 <중학천>과 나란히 있는 <모형 중학천>을 의미하는건아닌지...
['종로']
50여m 정도의 짧은 <서린동 구간 중학천>을 통과하면 <종로>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옛날엔 이곳에 좌우로 "혜정교 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었답니다.
좌측 <세종대로사거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우포도청' 터]
<광화문우체국> 앞에 "우포도청 터 右捕盜廳址"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도둑놈들을 체포하는 즉, 치안업무를 하는 관청이 좌우에 있었다는 것이고
['세종대로 사거리']
<세종대로사거리>, 즉 <조선시대 육조거리>에서 <교보빌딩> 앞에 있는 <기념비전>을 조망하고
['기념비전']
[안내문]
<기념비전>의 비석에는 "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頌"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들은 이 건물을 근냥 <비각>이라고만 합니다만....
<고종황제> 즉위 40년이 된 것(어극사십년)과 51세 생일(망육순:60을 바라본다는 뜻)을 기념해
세운 것이 랍니다. 그리고 이 글은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썼는데,
현판에는 간략하게 "기념비전 記念碑殿"이라고만 적혀 있지만 이것이 건립된 1902년 전후의
우리나라 상황을 돌아보면 <고종황제>의 꿈과 좌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고종>은 곧 있을 자신의 즉위 40주년 행사를 이용해 대규모 '칭경'(稱慶,경사를 치르는) 예식을
하기로 준비한 것이 바로 이 "기념비전 記念碑殿"입니다.
외빈들에게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 주기 위해,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종로에
전차를 놓았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온갖 가게들로 난잡했던 종로를 깨끗이 확장 정리했습니다.
이와같이 몰락하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을 무지무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조선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으나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죠.
<칭경식>을 위한 <기념비전>이 완공된 1902년 '함경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행사를 1903년 4월로 1년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영친왕>의 두창으로 또다시 9월로 연기했고,
그나마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위기의 고조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이 <기념비전>을 짓기만 하고 기념식은 올리지 못한 슬픈 <기념비전>인거죠.
이후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은 사실상 식민상태에 들어갔고,
이를 벗어나려는 <고종>의 몸부림은 <헤이그밀사사건(1907)>을 마지막으로 왕위에서 마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곳 <기념비전>은 <대한제국>의 희망과 좌절을 한꺼번에 껴안고
있는 역사적 장소인데...사람들은 무심히 그 앞을 오가고 있습니다.
[<기념비각>의 변천 모습]
[완성 당시의 모습]
<기념비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과 출입문인 <만세문>은 일제시대 쪽바리가 가지고 가
자기집 대문과 담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만세문>만 되찾아 와 복원했답니다.
그래서 옛날엔 있던 담장이 현재는 없습니다.
['도로원표']
그리고 이 기념비각에는 "도로원표 道路元標"가 있습니다.
지난번 <백운동천 답사기>에서 본 바와 같이 건너편 <세종로파출소> 앞에 <新도로원표>가 있는데...
원래 <세종대로사거리> 가운데에 있었는데 교통상황등으로 이전되었답니다.
<도로원표>가 어디에 있던 우리나라 <도로법 시행령 제50조>에
"서울에서 각 도시간 거리를 따지는 <기준점>의 위치는 <광화문광장의 중앙>으로 한다'고 규정되
있으니 혼동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종각' 방향]
['염상섭 像']
[안내문]
<기념비전>에서 종로 방향으로 <염상섭선생 상>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혜정교 터' 조망]
"혜정교 惠政橋"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종로>를 통과하는 <중학천>을 건너는 다리였는데 현재는 흔적 조차 보이지 않게 복개되었습니다.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청다리>라고도 불렀다는데 특히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나 중범죄자들의 사형을 집행하곤 했답니다. 그래서 <혜정교>인데...
<惠政>이라는 말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최고로 많이 통행하는 이곳에서 처형을 함으로서 전시효과를 노렸다고...
['시전행랑' 유구 전시관]
['시전행랑 유구']
[안내문]
<혜정교> 터 옆에는 <시전행랑>이라는 가게들의 유구를 전시해 놨고
['중학천 석축 유구']
<혜정교>에서 북쪽으로 <중학천>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중학천 석축 유구"가 있습니다.
<중학천>은 완전 복개되어 그 모습을 볼수 없는데, 이곳에서만 <중학천 석축> 10m를 볼수 있어
그나마 <중학천>이 있었었다는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삼봉로 회전교차로']
좌측 [교보빌딩]과 [KT본사빌딩] 뒤를 따라 복개된 <중학천>을 진행하면
<미대사관>과 <종로구청> 사이의 회전교차로를 만나는데
<중학천 복개 흔적>은 여기까지 조성해 놨으며 이후 부터는 조성된 <모형 중학천> 조차도 없어집니다.
앞에 보이는 <옛 수송초등학교>는 현재 철거 중에 있으며 <종로구청> 신관을 짓는 답니다.
저 자리는 "정도전 집터"라고 하는데 우측으로 돌아 갑니다.
[뒤돌아 본 '중학천 흔적']
['중학천' 안내문]
<청계광장>에서 이곳까지 <중학천>의 흔적을 복개된 도로 위에 조성해 놧습니다.
<洌上眞源>은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고...
<중학천>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데, <북악산의 남서쪽>에서 흘러내려 온다고 해 놨습니다만
<북악산의 남동쪽>에서 흘러 내려 오는 개천이라고 고쳐야 할듯....
['두번째 구간 지도']
2."정도전집터(종로구청)-수송목-이색영당-사복시터-
의정부터-중부학당터-제용감터-사포서터-소녀상-동십자각"
[철거 중인 "옛 수송초등학교"]
철거공사 중인 <옛 수송초등학교>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 나갑니다.
<종로구청 신관>을 짓는다고 합니다.
우측에는...
['수송목']
<코리안리재보험회사> 앞에 <수송목 壽松木>이라고 이름지은 소나무가 있는데
이 지역이 <수송동 壽松洞>이여서 붙인듯...
['정도전 집터' 조망]
좌측이 공사중인 <옛 수송초등학교>이고 가운데가 <현 종로구청>이며, 우측이 <이마빌딩 利馬빌딩>
여기서 "정도전 집터"를 개념도를 통해 알아 보면....
['정도전 집터' 위치도]
상당한 규모의 집터 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국의 당사자인 자기 집을 <경복궁> 바로 앞에 위세당당하게 지은듯...
<정도전>은 이곳에서 4년밖에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역적이 되어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철저하게 역적으로 뭍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역적이라는 주홍글씨를 떼고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 한것은 <흥선 대원군> 때였죠.
<대원군>이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조선>을 실제 건국하며 <경복궁>을 건설한
<정도전>을 소환해서 <경복궁>을 다시 복원해야만 했던 <대원군>의 정치적 필요성 때문인거였죠.
우측 <利馬빌딩> 자리엔 <정도전 집 마굿간>이 있었었다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기마경찰서로 사용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 서울기마경찰대로 이름만 바뀐 채 지속되다가 1972년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했답니다
그 후 이곳에는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이름은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마(利馬)빌딩>이어서
그래도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 작명하여, 옛 정취를 조금은 나타내고 있는 듯 합니다.
['목은 이색 영당' 홍살문]
['영당 삼문']
['影堂]
[안내문]
<종로구청> 건너편엔 "이색 영당 李穡 影堂"이 있습니다.
<이색선생>은 <정몽주>와 <정도전>의 스승이었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정도전>을 좋아했답니다.
이러한 관계로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기본 틀을 세우는데 지침서 역할을 했던 <맹자>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정몽주>였답니다.
<정도전>은 이 책을 읽으며 "민심은 곧 하늘"이라는 <민본주의>를 깨우쳤고,
민심을 잃은 왕조는 혁명을 일으켜 바꾸어야 한다는 사상을 터득한 것이었죠.
이로써 그토록 가까웠던 <정도전>과 <정몽주>는 망해가는 <고려>에 대한 "혁명"과 "개혁"으로 뜻을
달리하게 되었는데, 결국 "혁명"을 주장한 <정도전>의 역성혁명이 성공함으로써
"개혁"으로 보다 좋은 <고려>를 만들려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칼에 의해 선죽교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며 <고려>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스승이었던 "牧隱 李穡 先生"의 影堂이 <정도전>의 집 바로 앞에 있어 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보성사 터'-'중동학교 옛터']
['신흥대학 터'-'숙명여고 터']
<이색선생 영당> 뒤에는 <수송공원>이 있는데 이 일대는 여러 학교들이 있었던 학교터 였답니다.
그 중에서 "신흥대학" 터가 이곳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이곳에서 다시 꽃피웠었군요.
<문재인 대통령>의 출신학교인 <경희대학교>가 <신흥대학>의 이름만 바꾼 대학인데...
['종로구청' 회귀]
['사복시 터' 표지석]
다시 <종로구청>으로 돌아와 구청 로비를 통과하여 서쪽문으로 나가면
<말 馬>와 관계되는 모든 업무를 총괄하던 "사복시 司僕寺"가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데
당시의 馬는 지금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 역활을 했으니 정치 경제 군사분야에서 엄청 중요해서
그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을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둔 듯 합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광화문육조거리>에 있는 <교보빌딩><'KT본사'><미대사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는
일제시대까지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지질조사서>,<경관강습소>가
<호조><한성부><이조>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었답니다.
<6,25전쟁>으로 이 건물들은 폭격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는데 1960년 2월에 새로운 정부청사를
미국의 원조로 짓기 시작했는데, 어쩔수 없이 가운데 중요 건물은 <미대사관>이 되고....
원조 금액이 남아 옆에 <미대사관>과 모양이 같은 빌딩을 지었는데 이 건물이 현재의 박물관입니다.
한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데타세력은 육사 5기와 8기를 주축으로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이틀 뒤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을 모두 장악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 건물에 설치하고 군사정권시대로 들어 갔지요.
참고로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의 집무실은 북동쪽방향(경복궁 쪽)으로 끝 방이었으니
역사지리적으로 바로 이곳이 쿠데타세력의 수뇌부였던 곳이랍니다.
['의정부 터'-'중부학당 터']
['중부학당' 안내문]
현재 <광화문시민열린광장> 공사를 하고 있는 건너편 좌측 자리는 "의정부 議政府"가 있었고
우측엔 "중부학당 中部學堂"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삼청동천 三淸洞川"은 이곳 <중부학당>에서부터 <청계천>까지를 "중학천 中學川"이라고
별도로 名命했답니다. 지금까지 복개된 흔적을 걸었던 길이 <중학천 복개도로>였습니다.
['제용감 터'-'사포서 터']
<중부학당 터>에서 우측으로 가면 "제용감터 濟用監址"가 있고
우측 길 건너편엔 "사포서터 司圃署址"가 있습니다.
['소녀상']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원조 "소녀상"이 오늘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운성.김서경 부부작가>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으로, 높이 130cm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와 손을 웅켜쥔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소녀상>에 깃든 의미를 조금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1.“조형물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꽃,고무신,빈 의자,나비를 만들자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때 아내가 '할머니보다 소녀상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열서너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소녀의 슬픈 사연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할머니가 가졌던 과거 꿈 많던 소녀시절을 돌려 주자는 의미에서였다.”
2. 소녀상은 쌍꺼풀이 없고 코가 높지 않으며 얼굴이 둥글고 사랑스럽다. 머리카락은 단발인데
자세히 보면 거칠게 뜯겨진 모습이다. 원래는 댕기머리였는데 일본군이 잘랐다. 단발로 할까,
댕기머리로 할까 고민이 있었는데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단발로 결정했다.
스님이 속세를 떠날 때 머리를 깎는 것처럼 단발은 인연이 끊김을 상징한다.
3. 제작 기간은 약 6개월이 걸렸다. 전쟁과 인권이라는 명제에다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이입했다.
작업에 몰입하면서 많이 아팠다. 소녀가 한복을 입은 모습은 조선을 상징한다. 어린 여자이지만
다부지고 의연한 모습을 형상화시키고 싶었다. 한창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일본 측에서 조형물제작을
중단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서 원 설계엔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주먹으로 바꿨다. 소녀의 눈빛에도 신경을 썼다. 일본대사관 건물을 뚫어지게 보며 '너희들이
한 짓을 봐라' 사죄를 하지 않은 데 대한 꾸짖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잔잔한 감동을 주고 싶었다.
['소녀와 나비']
<소녀상>이 갖는 가장 의미있는 의미는 저는 네번째라고 생각됩니다.
4. 소녀상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면서 자유와 평화의 의미가 담겨있다. 뜯겨진 머리는 타의에 의해 가족과 조국을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표현했다.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의자다.
수요집회 때 강제위안부 할머니가 앉는 자리다.
그러면서 우리가 앉아 공감하는 자리이고 우리와 다음 세대가 풀어가야 할 자리다.
소녀의 맨발은 험난한 삶과 여정을 의미한다.
소녀는 발뒤꿈치가 들려 있다.
이는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까봐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의미한다.
강제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아직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음이다.
뒤에 그림자는 소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할머니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 속에 하얀 나비가 있다. 하얀 나비는 환생을 의미한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아이가 뭔가 허전하다면서 그림자를 만들자고 제안해 수용했다
['동십자각' 앞]
<소녀상>에서 <경복궁>으로 가면 먼저 "동십자각 東十字閣"을 만납니다.
<경복궁>의 동남쪽 <궁담 宮墻> 모서리에 있는 <망루>이죠.
담장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
['정도전 피살지']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수립했지만,
역성혁명 6년 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지요.
<민본주의>.... 요즘으로 치자면 <내각책임제>를 국가의 정치질서로 확립하려한 <정도전>이었지만
<봉건왕조국가>에선 도저히 용납 될수 없었던 <왕조>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이방원>이는 분노하며
<정도전>을 죽였습니다.
당시 정도전은 측근들과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다가 피습 당했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앞에 보이는 현 <일본대사관> 뒤 <트윈트리타워> 일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숨진 <정도전>은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과 더불어 복권이 되기까지 500여년 동안
그저 육신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역적이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었습니다.
['세번째 구간 지도']
3."동십자각-법련사-두가현-한성부북부관아터-건춘문-
국립현대미술관-경근당-옥첩당-장생전교터-국립민속박물관
['법련사']
<동십자각>을 지나 <경복궁 담장>을 따라 올라 갑니다.
이 도로는 복개된 "삼청동천 三淸洞川"인데 그 어디에서도 개천이란걸 알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복개되어 옛모습을 추측 조차 할수 없습니다.
<법련사> 다음에 있는 하얀 건물(미술관) 뒤로 돌아 들어 가면...
['두가헌' 입구 주차장']
['두가헌']
"두가헌"이라는 좀 독특한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한옥에서 양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인데 메뉴는 단1개로 138,000원/1인 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 집은 1910년대 지은 집으로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가 살던 곳이라고
<경복궁>에서 <고종>이 부르면 언제나 재빨리 갈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건춘문> 앞에 있습니다.
<고종>이 부르기만 기다리고 있는 <후궁>인지 <매춘부>인지 모르는 여인들의 대기소였던거죠.
['한성부 북부 관아 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의 <두가헌>을 지나면 "한성북부관아터" 표지석을 만나는데
앞에는 <경복궁>의 동쪽 대문인 "건춘문 建春門"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동쪽은 "봄 春"을 의미하기에 <건춘문 建春門>으로 짓고,
서쪽 문은 <영추문 迎秋門>으로 "가을 秋"를 의미하며 지은 이름.
현재는 옛 풍광을 알수 없어 일제시대 옛 사진을 보여 드리면...
['경복궁' 동쪽 '삼청동천']
바로 앞에 보이는 대문이 "광화문 光化門"이고 그 뒤에 보이는 문이 "건춘문 建春門"입니다.
<광화문>이 왠? <삼청동천> 옆 동북쪽에 있어? 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은 세심한 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광화문>은 쪽바리들이 <조선총독부>를 지으며 <경복궁 옆구리>로 이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건춘문> 북쪽으로 옮긴거죠. 죽일놈들...
더 자세한 사진을 보면
['광화문' 앞 '삼청동천'에서 빨래하는 광경]
옮겨 놓은 <광화문> 앞 <삼청동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춘문> 건너편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벽돌 건물은 본래 1932년 <경성의학전문대학의 외래진료소>로 지었으나,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며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쓰여 오다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모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그런데 이곳 <국군서울지구병원>엔 1971년부터 <보안사령부(기무사)>가 함께 있었지요.
<전두환>이가 <박대통령> 곁에서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대통령>을 보위 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활동하던 곳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1979년 <10·26사건> 때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옮겨진 곳이 바로 이곳 <국군서울지구병원>이었습니다.
당시 외부에 있던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있던 동생 <전경환>으로부터
급변 사태에 대한 전화와 이곳 <보안사1처장 정도영>의 급보를 듣고 <10·26사태>를 제일 먼저
파악하고 군부를 장악하며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며 실세로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빠른 정보 입수와 이미 짜여져 있었던 치밀한 계획으로 그의 <12·12 쿠데타>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볼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역사의 현장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재탄생되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 와 기쁨니다.
그런데 미술관 관람은 코로나사태로 인터넷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 관람은 할수 없었습니다.
['경근당' '옥첩당' 가는 길]
미술관 본관을 지나면 미술관 뒤에 <경근당><옥첩당>이 보입니다.
[안내문]
<경근당>과 <옥첩당>은 조선 시대 국왕의 친가 쪽 종친을 관리했던 <종친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이 건물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한가지 덧부치자면 이 건물은
1981년 <전두환정권>의 <기무사(보안사)>가 테니스장을 만들기 위해 이 건물을
2부에서 답사하는 <정독도서관> 운동장으로 이전했었습니다.
군바리 쿠데타 정권들의 안하무인 격인 무식한 전횡의 상징이었죠.
이런 놈들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을 칭송한 야당 대권후보도 있더군요.
그후 <기무사>와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하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종친부 건물>입니다.
['인왕산 조망 포토존']
['경복궁'과 '인왕산 치마바위']
<기무사(보안사)>가 있었던 자리엔 <인왕산 포토존>이 있습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서려있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얘기...
제가 몇번 언급 한바 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더 짧게 알려 드리면....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쿠데타 세력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단경왕후"를 눈물로 떠나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종"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 앞에 나와
그녀가 산다는 "인왕산"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폐서인이 되어 쌩과부로 홀로 사는 '단경왕후'는 그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입던 자신의 다홍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쳐 놓아 자신의 입지를
알리곤 하였답니다. 왕이여~~ 날 보러 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사랑......"치마바위"의 내력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 가는 정문 앞에 <말타기> 조형물이 있습니다.
요즘 유명한 <오징어게임>에 이 <말타기 게임>은 왜 없는지...ㅎ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에 대해 뭘 좀 알아야 관람하는 의미가 있는데 아는게 없으니 <민속박물관>은 횅하니 둘러 보고....
['장생전교']
<민속박물관> 정문 앞에는 "장생전교 長生殿橋"가 <삼청동천>에 있었답니다.
이 앞엔 궁중의 장례에 쓰이는 棺槨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長生殿>이 있었는데
그 관청 앞에 있는 다리라고 <장생전교>가 되었다고...
['네번째 구간 지도']
4."장생전교-소격서터-복정-화기도감터-기기국번사창-삼청동삼거리
['팔판동 삼거리']
<민속박물관> 정문 앞 <장생전교>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팔판동 삼거리>를 만납니다.
<팔판동 八判洞>은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하는 이름이라죠? ㅎ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답니다.
여기서 좌측은 <청와대> 가는 길이고, 우측이 <삼청동>으로 올라 가는 길인데
우측으로 조금만 더 올라 가면....
['소격서 터']
<삼청파출소> 우측 옆구리에 "소격서 터 昭格署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소격서>는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에게 지내는 초제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답니다.
['복정우물터' 조망]
<소격서 터>가 있는 <삼청파출소>를 50m쯤 지나면 주차장 우측에 목욕탕 굴뚝이 보입니다.
저곳에 <복정우물>이 잇다고 해서 찾아 가는데, 앞에 있는 주차장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복정']
"복정 福井"
조선시대엔 궁중에서만 이 우물을 이용 할수 있었다네요.
그많큼 수질이 좋다는 얘기여서 <코리아사우나>라는 목욕탕도 생겼나 본데 현재는 폐업한듯합니다.
['북촌로5나길']
<복정>에서 위로 올라 가면 <북촌로>를 만나는데 조망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안산' '인왕산' 조망]
['인왕산' '청와대' '북악산' 조망]
설명이 필요 없는 경치를 보여주고...
['삼청공원' 조망']
오늘 <성제우물>이라고 표기 한 곳까지 올라 갈 예정입니다.
['총리공관' 조망]
바로 아래엔 <총리공관>이 보이는데 공관 안에는 수령 약300년의 <삼청동 측백나무>와
수령 약 900년인 <삼청동 등나무>가 함께 있는데, 측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54호>로
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55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등나무는 <고려시대>에 심은 것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등나무>랍니다.
현재의 <국무총리공관>은 조선시대에는 <태화궁(太和宮)> 자리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완용>의 이복형인 <이윤용>의 집으로
또한 <민씨 족벌정치>의 대명사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민규식 자택>으로,
또한 쪽바리들이 설립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관사로 쓰였던 곳이랍니다
[내림길]
[급경사 내림길]
<북촌로>에서 다시 <삼청동길>로 내려 가는 급경사 계단길입니다.
['삼청동거리']
지금도 흐르고 있을 <삼청동천>의 복개된 거리를 잠시 거닐면...
['화기도감 터']
"한국금융연수원"정문을 만납니다.
정문 좌측에 "화기도감터 火器都監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처절한 아픔으로 남은 <조총>을 우리도 만들자고 설립한 총포 제작소로
그 중요성 때문에 <영의정> 직속으로 운영되었답니다.
['금융연수원 정문']
['기기국 번사창']
[안내문]
<금융연수원> 정문으로 들어 가 좌측 <관리동> 방향으로 올라 가면
"기기국 번사창 機器局 飜沙廠"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모래 뒤치는 곳>, <나무 비계 만드는 곳>, <금속 주형 제조소>, <창고> 등 여러 동(棟)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번사창>은 그 건물들 중의 하나로 추정된답니다.
1885년 부터 무기를 제조하던 곳. 더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 참조
['단팥죽집']
<금융연수원> 정문에서 <삼청동길> 방향으로 "단팥죽집"이 있는데 상호가 독특합니다.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
['삼청동 삼거리']
이어서 <삼청동 삼거리>를 만나는데 직진성 좌측길에 <옥호정 표지석>이 있습니다.
['다섯번째 구간 지도']
5."삼청동삼거리-옥호정-운용대-성제정-기천석-삼청공원-감사원
['옥호정 터']
"옥호정터玉壺亭址" 표지석
'세도정치'의 원조 <김조순>의 第宅이 있었던 자리라는군요. 第宅은 살림집과 정자가 함께 있는 집.
옛날엔 이 근처의 경치가 엄청 좋은 <경복궁> 바로 뒤 三淸地域이었으니
당대 제일의 세도가인 <김조순>의 왕궁같은 대저택이 있을만 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조순의 저택>은 어디로 언제 사라진걸까.....
['옥호정도']
"옥호정도 玉壺亭圖"는 <효명세자>가 <도화서(圖畵署)>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외할아버지 <김조순>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원흉인 <김조순>의 저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그림으로
<중앙박물관>에 소장되 있답니다.
['심청동 마을버스 종점']
<옥호정>을 지나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으로 <종로11번마을버스> 종점인데
좌측 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칠보사']
절 같지도 않은 <칠보사>라는 절을 지나면...
[갈림길]
골목 샛길을 만나는데 직진하면 바로 <성제정>으로 갈수 있지만
먼저 <운용대 터>를 둘러 보고 <성제정>으로 갑니다.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운용대 터']
"운용대 雲龍臺"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찾을수 없었습니다.
집 안 뒷담 밑 바위에 있다는데...
"운용정 雲龍亭"
"서촌 5사정(射亭)" 중의 하나인데 <서촌 5사정>은 활쏘기 연습장 다섯곳을 말하는데
<삼청동의 운용정><옥인동의 등룡정><사직동의 등과정.대송정><누상동의 백호정>이죠.
대부분 이미 제가 답사 했습니다.
['운용대 터']
집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알고 가지 않으면 알수 없겠습니다.
남의 집안에 카메라 들이 대기도 좀 그렇죠? ㅎ 집주인께 죄송....
['삼청공원' 방향 조망]
<운용대 터>에서 <삼청공원> 방향을 조망하는데, 가운데 엄청 큰 학교 건물 같은게 새로이 들어 섯는데
아마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 했나 봅니다.
뒤에 보이는 산줄기는 <한양성곽>이 지나는 <북악산 능선>
['성제우물' 조망]
['성제우물']
<운용대>에서 조금 내려 가면 "성제정 星祭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된 우물 물이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삼청파출소> 옆에 있었던 <소격서>의 <삼청전 三淸殿> 初祭 때에 사용했던 물이라고 하며
민간에서 발음이 잘못 전해져 <형제정 兄弟井>이라 불리워 졌답니다.
<한양도성도 漢陽都城圖>엔 <형제정 兄弟井>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삼청전 三淸殿>의 三淸은 <玉淸><上淸><太淸>으로서 하늘에 있는 <별의 세계>를 일컷는
<도교 道敎>의 용어랍니다.
[오름길]
['도교' 흔적]
"삼청동 기천석 三淸洞 紀天石"
<성제정>에서 위로 조금 올라 가면 '道敎의 흔적'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기천석 紀天石>이 있는데
여기가 혹시 <삼청전 三淸殿>의 기천석이 아닌지......
紀天石
康日菴
徐月堂
"하늘에 소원을 비는 바위"라는 뜻일테고 밑에는 사람 이름인듯....
['감사원' 조망]
<성제정>에서 다시 <삼청동마을버스정류장>으로 내려 가며 <감사원>을 조망하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
다시 <삼청동마을버스종점>으로 내려와 좌측 <삼청터널>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삼청공원 산책로']
현재는 <교육평가원>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었던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해 있던 건물의
뒤에 있는 <삼청테니스장> 옆에 <삼청공원 산책로>가 데크로 조성되 있습니다.
['삼청동천']
여기까지 올라 온 이유는 <삼청동천>이 복개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찾은 것입니다.
이곳 100여m 구간이 자연 상태를 유지 한다는데....이렇게 아름다운 <삼청동천>은 복개되어 시내를
통과하고 있으니 좀 아쉽지만, 여기서라도 <삼청동천>을 흠뻑 감상합니다.
['삼청공원 안내도']
['일청교']
데크 산책로를 잠시 지나면 <삼청공원 후문>을 만나는데 <삼청동천>을 건너는 <일청교 一淸橋>가
가을을 뒤집어 쓰고 나그네를 반깁니다. 어디엔가 <二淸橋><三淸橋>도 있겠지만 공원 속으로...
[공원길]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제가 고교 학창시절에 가끔 찾았던 <삼청공원>을 횡하니 통과하면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을 만나는데 이 도서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이더군요.
카페와 도서관을 함께 운영하는 도서관인데 <뉴욕타임즈>에도 소개된 도서관이라는군요.
기사 내용 중에 일부를 소개하면...
“필자는 1년 전 서울에 있는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에서 혁신의 미래를 보았다.
숲이 우거진 공원 안에는 간결한 디자인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훌륭한 책들과 함께
중앙에는 카페와 작은 안뜰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쿠션에 기대
창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카피 한 잔과 치즈 케이크를 먹으며 창밖의
단풍을 감상하고 있었다.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 하나이며,
최신 기술로 가득한 곳이다. 이 도서관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힐링의 장소로 특별히 설계된 곳이다.
(중략)
이러한 혁신은 과거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철저하게 미래에 집중된 솔루션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길을 개척하는 기술 중심적인 혁신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반영한 ‘사람 중심의 미래’에
중점을 둔 혁신인 것이다. 혁신이 공원에 더 많은 도서관을 짓는 것이라면,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아숲체험장']
['삼청공원 정문']
<삼청공원> 정문을 나서며 1부 답사기를 마치고 <2부 북촌을 걷다>가 이어 집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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