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추억 속의 북촌을 가다』
<2부>
[전체 답사 지도]
['종로구 하천']
이번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종로구 하천>에 대해 알아 보고 가야 <北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한양도성> 안에 흐르는 유일한 개천인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동아일보>가 있는 <서린동>에서
<중량천>까지 입니다. 그 <청계천>을 만드는 지류가 여럿 있는데 그 중 대표적 지류는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입니다만, <백운동천>은 <西村>을 관통하니 <서촌 답사기>에서 언급했고
<北村>에서 내려오는 지류만을 보면 <삼청동천(중학천)>과 <안국동천> <회동천> <재생동천>
<금위영천> <북영천>이 있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 알수 있는데
그 중에 <삼청동천>은 <청계천>에 직접 유입되지만, 나머지는 <청계천> 근처까지 와서 <종로>에서
우측으로 갑자기 꺽여 <동대문> 근처까지 이어지다가 <동촌>의 <창경궁옥류천>과 합류하여
비로소 <청계천>으로 들어 갑니다.
그 이유는 여름철 <청계천>이 자주 범람하여, 범람을 피하기 위해 물줄기를 도심구간을 피하도록
<종로구간>에 "인공수로"를 만들어 <한양도성 번화가>를 빠져 나가도록 한 것이니 이미 조선시대부터
<인공수로>가 있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데,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개천들은 복개된 도로 밑으로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출발하여 <안국동천>의 일부와 <제생동천>을 거슬러 올라가
<북영천>을 따라 <종로3가 단성사>까지 내려오는 <북촌 탐방>이니 '물줄기'와 '마을'을 함께 음미하며
답사하는 의미있는 답사가 될것입니다.
['첫번째구간 실트랙']
1."탑골공원-승동교회-옛MBC터-낙원동사거리-익선동한옥마을"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북촌> 끝까지 올라 갔다가 <종로3가 단성사>로 내려 오는데
올라 가는 루트 표시는 붉은색으로 했고 내려 오는 루트는 푸른색으로 표기했습니다
['탑골공원 정문']
2021년 11월 28일 (일) 맑음
오전 11시경 <탑골공원>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오늘 답사하는 코스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며 학교를 다니고
대학 졸업 할 때까지 <익선동>에 거주했던 실질적으로 저의 "고향 동네"입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모르는 곳이 많았으니 이번 답사는 "고향의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ㅎㅎ
['손병희선생 동상'과 '팔각정']
<탑골공원>은 제가 어렸을 때엔 <파고다공원>으로 불렸습니다.
뭔 뜻인지도 모르며 지나 다녔는데 나중에서야 <파고다>가 "PAGODA"라는 외래어로 "탑"이라는 뜻이며
불교에서 "탑모양의 절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탑골공원>은 "삼일운동 발상지"로서 1919년 3월1일 12시에 <손병희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 각인되 있습니다.
그래서 <손병희선생 동상>이 건립되 있나 봅니다만, 예전엔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있었답니다.
['원각사 비']
[안내문]
"원각사비 圓覺寺碑" 는 <우리나라 보물 제3호>입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으면 처벌까지 하며
<유교>를 믿으라고 강요했지요. 한마디로 <숭유억불 정책>이었다는 건 모두 아는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겐 <숭유억불>을 강요하면서 자기들 왕과 왕족들은 <불교>를 더 믿었습니다.
왜그런지 아시나요?
종교의 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 같은 것이어서 現在와 死後의 삶을 보장해 준다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좀 없어서, 죽은 후까지 영원한 삶을 준다는 <생활규범>이 아닌 "종교"인 <불교>를
자기들은 믿을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영원히 잘먹고 잘 살기 위해
요즘 여타 종교들은 모두 영원토록 죽지않고 잘 살수 있다고 믿고 따라 오라고 서로 주장하고 있죠?
<원각사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옛 <원각사비> 사진을 보고 가겠습니다.
<원각사비>는 원래 <연못>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 속에서 거북이 나오는 형상입니다. 사진 속에 벌거벗은 어린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원각사 십층석탑']
[안내문]
"원각사 10층 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우리나라 國寶 제2호>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안내문에 없는 유명한 스토리를 하나 언급하면...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 그의 부인인 <정희왕후>. 즉, <세종대왕>의 둘째 며느리이죠.
<예종>의 어머니이고, <성종>의 할머니가 되는데, 그러니 <연산군>의 '증조모'가 되지요.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세조>와 <정희왕후>는 <단종>의 망령에 트라우마로 살수 밖에 없어서.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전지전능한 神 부처님이 필요 했습니다. 특히 <정희왕후>는 열열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여인이 바로 <정희왕후>였으니 실제 최고 권력을 지낸 여인이라 할수 있죠.
그녀의 입김으로 지은 절간이 폐사된 <흥복사> 터에 주변 민가를 200여채 더 사들여 호화찬란한 절을 짓고
이름을 <원각사>라 하고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종교시설로 만들었답니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입니다.
하지만 인생무상...그들이 죽고 난후, 증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전국의 절간은 초토화 되었죠?
특히 <세조>와 <정희왕후>가 설립한 이곳 <원각사>는 다 때려 부수고 "기생 양성소"를 만들었죠.
전국에서 예쁜 여자들을 뽑아 올려 여기서 기생 수업을 시켜 <연산군>의 기쁨조를 만들었는데
이 여자들을 "흥청 興淸"이라 했죠. <興淸>이라는 말이 "맑은 흥취를 불러 일으킨다"는 뜻이겠지만
주색에 빠져 환락을 일삼는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듯 하여 <연산군>의 폐망에 이르는
큰 요인 중 하나였으니, 이때부터 <흥청망청 興淸亡淸>이라는 사자성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흥청망청 興淸亡淸>이라는 말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 <원각사터>인 <탑골공원>이었답니다.
실록에는 이때의 <흥청>이 일만명이 넘는 다고 기술되 있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이것은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설과 같이 <폭군 연산군>을 비하하기 위한, 반정에 성공해서
'역사의 승자'가 된 <중종반정세력>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쓴 역사 뒤집기 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원각사지 십층석탑' 사진]
탑 뒤로 <명동성당>이 보이며 <남산>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엄청 먼듯 보입니다만, 빌딩이 없는 <한양도성>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군요.
[숨겨진 조각 그림]
"원각사 10층 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에 새겨진 여러 조각 속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사오정><저팔계>가 세겨져 있습니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 부도 高達寺址浮屠"]
<국보1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지요? ㅎㅎ
그런데 <국보2호>를 아는 사람은 많은가요? 바로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입니다.
더구나 <국보3호>를 아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국보3호>는 <북한산순수비>입니다만
<국보4호>는 거의 대부분 모릅니다. <국보4호>는 <여주 고달사지 부도>인데 알고 계셨나요? ㅎㅎ
그 이후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은 아닌지...
['낙원주상복합아파트']
<탑골공원> 뒷문으로 나가면 <낙원상가>를 만납니다.
이 건물은 주상복합아파트인데 그냥 <낙원상가>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아파트가 함께 있죠.
15층 높이의 아파트에 430여 가구의 아파트가 있는데 단일 주상복합아파트로는 큰 규모입니다.
도로 위에 지은 아파트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지분이 없는 아파트이죠.
아파트 지을 땅이 부족한 서울 도심에서 앞으로 아파트를 지을 때
부지를 확보하는데 이처럼 도로를 활용하는 건 어떨지...단숨에 부지 확보가 될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낙원상가>엔 예전에 <허리우드극장>이 있었었는데....
['인사동 남측 입구']
<인사동 골목 남측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좌측에 <승동교회>가 보입니다.
['승동교회']
"승동교회 勝洞敎會"
<3.1독립운동>의 진원지 중에 한곳으로 주로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랍나다.
그런데 "율곡 이이 栗谷 李珥"가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할때 살던 집터라는 설이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 사진]
저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승동교회 勝洞敎會"입니다.
교회 입구 게시판에는 저의 어머니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을 정도로 어마니가 다니던 교회였습니다.
저도 이 교회를 고1 때까지 다녔습니다만.....지금은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입니다만...^.^
특히 저는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었습니다. 잊을수 없죠? ㅎ
주례를 보신 분이 사진 속에 나오는 <박일웅목사>이신데 돌아 가신지 오래 되셨다고 하네요.
(사진 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어머니, 두번째가 박일웅목사)
['인사동 사거리']
<승동교회>를 나와 다시 <인사동> 거리를 거슬러 조금 올라 가면 <인사동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 <낙원동>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인사동>이 예상외로 한산하군요. 오전 시간과 코로나 때문인듯...
['옛MBC방송국']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美術世界>라는 건물이 <옛 MBC 방송국>이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맹활약하던 시절이니...KBS에선 <이광재 아나운서>가 중계방송을 하고...
['낙원동 사거리']
<낙원동 사거리>는 <낙원상가> 북쭉에 있는 사거리인데
여기서 직진하여 <익선동 골목>을 잠깐 들렸다 돌아 옵니다.
50m쯤 직진하면....
['파란문 집터']
<원불교>와 <서울지방국세청>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 있는데
필자인 <파란문>이 살던 집은 원래 한옥이었는데, 5층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저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세상을 먼저 떠난 <이름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가
제가 학교 간 사이에 제 방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며 작사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좌측에 있는 <종로오피스텔>은 정치깡패였던 <이정재 집>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규모였죠.
그리고 저의 집 건너편에 있는 현재 <엠배스더호텔> 자리에 유명한 요정인 <오진암>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음식점1호>로서 [남북 7.4공동선언문] 작성의 밀실이기도 했으며 북한 관리들을
접대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3공시절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밀실정치의 본거지이기도 했지요.
기존 <오진암> 건물은 <자하문> 밖 <안평대군>이 살던 집인 <무계원 터>로 옮겨 복원해 놨더군요.
다음 사진입니다.
<오진암>의 건물을 옮겨 복원 해 놓았는데
이름은 <안평대군>의 집 이름인 <무계원>이라고 해 놨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윗 사진을 클릭 해 보세요
['익선동 골목']
요즘 <북촌>에서 가장 뜨는 골목이라는 제가 어린 시절 살던 <익선동 골목>을 조금 둘러 보고 갑니다.
현재 공사 중인 집이 <짱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의 한옥 집이었고...
['미담원']
[감꽃빵']
['명가헌']
<미담헌>이라는 카페가 옛날 <김일ㅇ>이라는 친구 집이었는데 그 친구 현재 미국 델라스에서 살고
좌측 <감꽃빵>이라는 빵집은 <임효ㅇ>라는 친구 집이었고, <명가헌>이라는 카페는 <길원ㅇ>이라는
친구집이었는데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만 있습니다. 그외에도 <김영ㅇ>라 친구집이 우측에
있는데 그 친구와는 현재도 매주 스크린골프 같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골목이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무지 좁은 골목이라 세월의 기억이 뭔지 실감합니다.
['두번째구간-홍명희집터에서 계동공터까지 실트랙]
2. "홍명희집터-지석영집터-교동초교-조광조집터-서북학회터-천도교-
민병옥집터-박영효집터-운현궁-영로당-일본헌병초소터-계동궁터"
['홍명희 집터']
<옛 오진암>이었던 <엠배서더호텔> 뒤에는 "홍명희 선생 집터"가 있습니다.
<종로구 익선동 33-6번지>인데 현재 <수 무대의상실>이라는 의상실이 있더군요.
일제시대 조선 3대 천재로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를 꼽지요.
<벽초 홍명희>는 그 유명한 <임꺽정>의 저자 입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오산학교> 교장도 했는데 아쉽게도 월북하여 북한 <김일성대 총장> <부수상>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들에겐 잊혀진 사람이 되었지만 ....
아버지 <홍범식선생>은 <경술국치>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하자 뒤를 이어 자결하며
일본에 항거하는 몇 않되는 우국충정의 애국자였습니다.
['지석영 집터']
다시 <낙원동 사거리>로 나와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교동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지석영 선생 집터"를 만납니다.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을 전파한 조선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이시죠.
<서울대병원> 안에 있는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교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도 <지석영선생 집터>가 이 곳에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서울교동초등학교']
"서울 교동초등학교 校洞初等學校"
필자인 <파란문>이 다닌 초등학교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입니다.
세월도 빠릅니다. 졸업 한지가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으니.......
['서울경운학교']
[학교 변천사]
제가 다닐 땐 학생수가 많아 한 학년에 10학급이었던가 12학급인가 되었으며
한 학급에 7~80명이 바글바글 붙어 앉아 공부를 했는데, 그나마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집에서 난로에 피울 나무를 한두개씩 가지고 가서 무연탄에 불을 붙였는데
그때 온 학교가 연기로 뒤덮히며 매캐한 냄새와 연기로 오리무중이 되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래도 이 국민학교에 꼭 들어 가려고 전국에서 어린이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요즘말로 초일류 국민학교였던거죠.
지금은 학생이 거의 없어 폐교 위기에 놓였다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옛 건국대' (서북학회 터)]
다시 <낙원동 사거리>로 돌아와 길을 건너 건너편을 답사 합니다.
건너편에 있는 <건국빌딩>이 있는 자리는 주변을 합쳐 옛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가 있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교>가 이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엔 <서북학회>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 이 주변은 우리나라 교육의 중심지였던거죠.
['조광조 선생 집터']
사거리 가운데 가로공원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 최초 최고의 진보개혁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는 선생의 집터가 여기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서북학회 터']
<건국빌딩>이 있는 옛 <건국대학교> 자리 앞에 "서북학회 터"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서북학회> 건물이면서 당시 <건국대 본관>으로 쓰였던 건물은 현재 '광진구 화양동'의 <건대 본교>로
옮겨 복원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사진을 보여 드리면...
사진을 클릭하면 제가 쓴 답사기로 바로 가 볼수 있습니다.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서북학회 터>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탑이 있습니다.
<동학>의 3대 교주이며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소년회>를 1921년에 창립한 곳이고, 이듬해 <어린이날>을 선포함으로써
"어린이"라는 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무지무지 의미있는 곳입니다.
['천도교']
['천도교 중앙대교단']
"천도교 天道敎" <천도교중앙대교단>
구한말 서양에서 물밀듯 들어온 <기독교>를 서양에서 왔다고 <서학 西學>이라고 했지요.
국내에서 <인내천 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람 중심 사상"의 종교가 탄생하는데
<예수>라는 전지전능한 神을 믿는 "하늘 중심" 사상의 <서학>에 대항하여,
우리나라에서 탄생되는 종교여서 대칭적 이름인 "동학 東學"이라 했죠.
<손병희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를 확립한게 <천도교>인데......
일제강점기 시절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화된듯합니다.
['민병옥 가옥']
[안내문]
<천도교 중앙대교단> 앞에는 "민병옥 가옥"이 있습니다.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다시 그의 아들들을 위해 지어준 집인데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그런데 이 집의 사랑채 쯤 되는 별채에 제 친구가 살아서 중학교 때에 자주 놀러 가곤 했습니다만
그때엔 그 집이 <민병옥 가옥>의 일부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ㅎ 몇번 자기도 했는데...
['민병옥 가옥 주차장'']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저택은 현재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 일부 복원해 놨는데
<남산한옥마을>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는 예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집이 <민영휘>의 집입니다.
['경인미술관 입구']
['경인미술관']
<민병옥가옥> 서쪽 <개성만두집> 골목에는 <경인미술관>이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명인 "박영효 집"이었답니다.
다시 <천도교> 정문으로 나가면...
['운현궁' 조망]
['운현궁' 정문 앞]
[안내문]
['운현궁 정문']
"구름고개에 있는 궁"이라는 의미의 큰집이라는 "운현궁 雲峴宮"을 만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크고 위엄있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집이었습니다.
"김동인(金東仁)"선생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의 주무대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선 "대원군'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운현궁 모형도' ']
<운현궁>은 원래 규모에서 1/3 정도로 줄어 들었답니다.
지금은 <수직사>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만 남아 있으며 <유물전시관>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는 주변 <덕성여대>와 <교동초등학교> <중앙문화센타> <김승현가옥> <서울빌딩>등이
모두 <운현궁>이었답니다. 네개의 대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 뿐입니다.
['운현궁 본채' ']
<운현궁> 정문으로 들어 가면 운동장 같은 마당을 지나 본채가 나타납니다.
[뒤돌아 본 정문과 '수직사']
본채로 들어 가기 전에 뒤돌아 보면 <수직사 守直舍>가 늘어서 있는데
<운현궁>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답니다.
이 마당엔 <실험극장>이 들어 서 있기도 했었죠.
['노안당' 입구]
[안내문]
<노안당> 입구에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노안당']
[집무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이 蘭을 치는 마네킹이 있었는데] 2018년 4월 11일 촬영
"노안당 老安堂"
<추사 김정희>와 무지 친했던 <흥선 대원군>인데 <추사체>를 흉내 낸 현판이랍니다.
이곳은 구한말 <정치1번지>로 <흥선대원군>의 주 집무실 겸 거처 였답니다.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던 그러니까 현<서울디자인고등학교> 터에 있었던 <아소당>에서 임종했는데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상을 한 번만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어가가 거둥하였느냐"
<흥선대원군>이 <노안당> 속방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리다 마지막 한 많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아들 <고종>은 끝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종>에게 <흥선군>은 혹시 아버지로서 보다는 정적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노안당' 앞 정원]
['노안당' 후원]
['노안당' 뒤]
수석을 무척 좋아 했던 <대원군>이어서 <노안당> 주변엔 수석이 많았습니다.
<노안당> 주변을 둘러 보고....
['노락당' 입구]
[안내문]
<노락당 老樂堂>으로 들어 가면....
['노락당']
"노락당 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명성왕후"가 1866년(고종3년)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하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결혼식인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한 유서깊은 곳이죠.
당시 "고종"의 나이가 13살로 이름은 '이재황 (아명:이명복)'이었고...
왕이 가례를 왕궁이 아닌 私家에서 올린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었지만...대원군의 위력이...
['노락당']
['노락당' 내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는 것을 가례에서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2018년 4월 11일에 촬영한 사진을 보여 드리면...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여흥 민씨"로 "대원군"의 부인이지요.
그러니까 "고종"의 어머니가 되며..또한 천주교를 믿은 광신도로서 세례까지 받은 여인이었지요.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는 남편 대원군과 완전 대비되는 여인이었는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느낄수있습니다.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민자경"이라는 소녀를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16살 소녀 "민자경"으로 "명성왕후"가 되었지요.
권력에 문외한으로 여겨 선택한 "16살 소녀 민자경"이 "대원군"의 최대 정적이 될줄이야... 햐 ~
그리하여 조선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지요.
아 ~~ ! 역사란 무었인가....
2018년 4월 11일에 촬영한 사진을 더 보여 드리면..
['철종비'의 '조대비' 알현]
'강화도령' "철종"의 왕비가 당시 권력 서열 1위의 "순조의 비"였던 "조대비"를 알현하는 광경을
재현 했는데 입고 있는 '당의'가 무척 화려합니다.
고종이 왕에 등극하는 데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답니다.
왕위계승서열에서 한참 멀리 있던 <강화도령>이 왕에 오른것이라든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것과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들>에 의해 똑똑한 왕위계승자들이 일찌감치 제거된 것들이 시대가 뒤를
받쳐 줬기 때문이라 본답니다.
이에 킹메이커로 등장한 인물이 <신정왕후 조 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죠.
<효명세자>의 妃 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 때문에 <흥선군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죠.
그리고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아명: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 대비>는 양자로 삼은 <명복>을 등극하게 하여 <철종>의 뒤를
이으니 <제26대왕 고종>입니다.
['양관' 조망]
[안내문]
<운현궁>의 일부였던 <양관 洋館>이 <노락당>에서 바로 보이는데 원래 복도로 연결되 있었답니다.
<양관 洋館>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이 1911년에 지은 집이랍니다.
현재는 <덕성여대> 소유가 되어 대학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대학이 <쌍문동>으로 이전 한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준용>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의 큰아들이 <이재면>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이재황>으로 <고종>이죠.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장남이 <이준용>이니까,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인물입니다.
<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족 및 대한제국의 제1대 황족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준용>인 것입니다.
저 <양관 洋館>도 쪽바리들이 친일에 감사하다고 지어준 것입니다.
다행이 47세에 일찍 죽었으니 역사에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지 않지만
<고종>의 입장에선 아주 치졸한 조카였던 겁니다.
['운현궁' 변천도]
현재 <덕성여대> 소유로 되 있는 <양관 洋館>과 <고종>이 등극하기전에 살았던 <잠저>등의 위치와
없어진 자리를 알수 있는 평면도입니다.
<영로당>은 현재 <김승현가옥>과 <일본공보문화관>으로 변해 분리 되었고,
<고종의 잠저>는 <삼성>이 인수해 <중앙문화센타>가 되었고, <洋館>과 앞뜰은 <덕성여대>가 되었습니다.
이 평면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남쪽은 <교동초등학교>로 변했습니다.
['노락당' 뒤]
<노락당>과 <이로당>은 복도로 연결되 있고
['이로당' 입구]
[안내문]
<노락당> 뒤에는 "이로당 二老堂"이 있는데
<대원군 부부>가 생활하는 안채 였답니다.
['이로당']
"이로당 二老堂"
앞에는 수조가 있는데 <운하연지 雲下硯池>라고 쓰여 있는듯 한데
제가 본 한자가 맞는지 짧은 한자실력이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아마도 화재예방을 위한 수조라고 생각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1898>과 <부대부인 민씨 1818~1898>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오래 살아 결혼 60주년 기념인 <회혼례>까지 올렸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 예식을 거행 했답니다.
조선 조정은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고 있었는데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대부인 민씨>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감사 미사를 바로 이곳에서 올렸답니다.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는 남편인 <대원군>의 묵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죠.
어쩌면 <대원군>은 공처가 였을지도 모릅니다. ㅎ 또는 그도 천주교를 믿었는지 모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당시에 <운현궁>에서 천주교 미사를 올릴수 있겠습니까?
['이로당' 뒤뜰 우물]
<이로당> 동쪽 뜰로 나가면 우물터가 있고, 절구도 하나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건 "무승대 茂承臺"라는 돌받침대입니다.
<대원군>이 <난 蘭>을 무척 좋아했다는 건 모두 알지요. <대원군>의 <난 蘭> 그림은 유명합니다.
그는 <난 蘭>을 낮에는 <이로당 대청마루>에 두고 즐겼으며,
밤에는 이곳 <무승대 茂承臺>로 옮겨 관리 했다네요. '무성할 茂'와 '이을 承'을 쓰는 걸로 봐서
蘭이 무럭무럭 잘 자라라는 의미인듯....
<무승대 茂承臺> 뒤에는 냉장고 역활을 하는 <석빙고>같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경백비'] '
"경송비 慶松碑"
<고종>이 어릴 때 오르내리며 놀던 소나무를 기리는 비석이랍니다.
왕에 오른 후에도 연을 날리다 연줄이 소나무에 걸려 올라 가곤 하던 정든 소나무여서
'정2품'의 벼슬을 소나무에 내렸는데 그 소나무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고
비석의 위치도 여기가 맞는지 어딘지 확실히 알수 없다는군요.
우측 담장 너머가 <고종>이 살던 잠저였는데 지금은 <삼성> 소유의 <중앙문화센타>로 변했고
비석 뒤 담장 밖으로 조금 보이는 집이 <영로당>으로 원래 <이로당>과 복도로 연결되 있었는데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 부부>가 거주하다가 그들의 아들 <이준용>이 <김승현>에게 넘겼다고...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이로당' 뒤 '영로당']
<이로당> 뒤에 있는 <영로당>은 원래 복도로 연결되 있었답니다.
지금은 완전 분리되어 담장 밖에 있는데 잠시후 <운현궁>을 나가서 찾아 가 보겠습니다.
['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
<이로당>에서 옆에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들어 가 보았습니다.
유물은 특별히 눈에 띄는게 없고 마네킹이 눈길을 끌더군요.
<대원위대감 흥선군 이하응>과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대부인 민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기념미사를 <운현궁>에서 올렸답니다.
['대원군' 그림과 교지]
<추사 김정희>와 매우 가까웠던 <대원군>은 <추사>의 글과 그림을 좋아하며 난을 치곤 했다지요.
['명성왕후'와 '고종']
['명성왕후'와 상궁]
<명성왕후>의 얼굴은 초상화나 사진으로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게 없답니다.
언제나 암살 위험에 놓여 누구인지 모르게 얼굴을 밖에 노출하지 않았다죠.
<명성왕후>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수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별볼일 없는 소녀라서
며느리로 맞아드렸는데, 그녀가 <권력의 화신>이 될줄이야~~
['야외공연']
<운현궁>을 둘러 보고 나오는데 야외공연을 하더군요.
코로나로 운신 못하다가 다시 재개한다고....
<洋館>과 <古宮>...그리고 난타공연....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어켜 30여분 관람을 했습니다.
['영로당' 입구]
<운현궁>을 나와 <재동사거리>로 조금 올라 가면 <서울빌딩>과 <일본대사관공보문화원>이 보이는데
저곳까지 예전엔 <운현궁>이었답니다. 특히 <일본대사관공보문화관> 자리는 "일본헌병초소"가 있던
자리로서 일본놈들이 <대원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일본헌병초소였답니다.
<운현궁 담>이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영로당' (김승현 가옥)]
"김승현 가옥"이라고 안내하며 분리되 있지만, "운현궁 영로당 雲峴宮 永老堂"입니다.
이 집은 <운현궁 이로당>과 복도로 연결되 있었다는건 조금 전 도면에서 확인했습니다.
이곳에선 <흥선대원군>의 큰아들인 <이재면 부부>가 살았답니다. <고종>의 친형이 살던 집인거죠.
그후 <이재면>의 장남인 친일왕족인 <이준용>이 <김승현>에게 팔아 먹었답니다.
<운현궁>은 해방후 왕족의 몰락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상당부분 분할되어 팔렸는데
<영로당>은 <이승만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씨>에게 팔려 현재는 <김승현가옥>이라고 한답니다.
<김승현씨>의 아들이 <김&장법률사무소>의 창립자 <김영무씨>이죠.
그러니 현재는 <김영무씨> 소유가 되 있다는겁니다.
['재동 사거리']
<재동사거리>로 올라 가서...
[뒤돌아 본 '일본홍보문화관' (헌병초소 터)]
뒤돌아 본 <일본대사관 홍보문화원>입니다.
저기까지 <운현궁>이었는데 쪽바리들이 차지하며 <일본헌병초소>를 만들어 <대원군>의 동태를
감시했다는거 아닙니까.
['세번째구간-계동궁터에서 여운형집터까지 실트랙]
3."계동궁터-관천대-휘문고터-경우궁터-한학수집터-북촌문화센타-
헌법재판소-이상재집터-박규수집터-재동백송-여운형집터-계동사거리"
['계동 골목' 입구]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용한 <계동 골목 입구>입니다.
이 골목은 <재생동천>이 흐르는 개천인데 복개되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그룹 본사']
<현대그룹 본사>가 있는 이곳이 제가 다닌 "휘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이죠.
이 터는 원래 "계동궁 桂洞宮"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宗家여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랍니다.
<갑신정변> 때에 <고종>과 <명성왕후>가 피신 한 곳이기도 하죠.
또한 이곳엔 조선 초기부터 "제생원 濟生院"이라는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이 있던 자리랍니다.
여기에 있던 학교를 다녔는데도 당시엔 이런 내력을 몰랐습니다. ㅎ
['관상감 관천대']
[안내문]
<현대사옥> 우측 앞에는 "관상감 관천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때 "볼재"라고 불렀고 교가에도 <볼재>는 등장합니다.
1학년8반 옆에 버려진 유물처럼 있었는데 이게 <보물 제1740호>가 되었군요.
자세한 내용은 위의 안내문을 참고 하고...
《매천야록》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전 고종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신기로운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조금전에 들렸던 <운현궁 雲峴宮>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것입니다.
〈…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여기서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으로 천문지리를 맡아 보는 관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서운관> 자리에 <운현궁>이 들어섰는데 "금상", 즉 <고종(高宗)>이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매천야록》은 이후 <안동김씨> 일족의 횡포와 그에 저항하는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옛 휘문고등학교>와 <현 현대그룹>이 있는 자리는 분명 "명당" 자리인듯합니다. ㅎ
['희중당' 터]
후문으로 들어 가면 당시 본관이었던 <희중당>이 있었던 자리는 주차장과 스포츠센타로 변하고
그 위에는 <원서공원>을 조성 해 놨군요.
좌측 건물이 <휘문중학교>가 있었던 건물이고 우측 건물이 <고등학교>가 있던 건물입니다.
['휘문중학교 터']
중학교가 있던 자리엔 <현대엔지니어링>등 현대그룹이 자리하고 있는데 옛날 사진을 보면...
[앞에 있는 3층 건물이 <희중당>으로 교무실 교장실 등이 있던 본관이었으며
뒷쪽이 <휘문중학교>입니다.
<희중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3층건물이었답니다. 학교 다닐 땐 이런것도 몰랐는데..ㅎ
['휘문고 정문' 앞]
<현대그룹 본사(옛 휘문고)> 정문으로 나가면 건너편의 집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데...
저 집은 <을사늑약>을 체결 할 당시 <이완용>등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려고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던 <한학수 참정대신>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또한 해방 3일후 우리나라 최초의 우익 정당인 <고려민주당>이 결성된 곳이라고,
학창시절엔 라면집, 떡볶이집 등등이 있었던 곳으로만 기억되는데 훌륭하신 분이 사시던 집이라니...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이라는데
이 곳이 주목받아 문화재로 지정되려고 하자 재산 행사권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집주인이
재빨리 집을 헐고 현재의 저 건물을 지어서 옛 모습은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휘문고 정문' 앞 '계동골목']
<제생동천>이 흐르고 있는 복개된 <계동 골목>으로 나와 <중앙고>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옛 휘문중학교> 자리는 "경우궁 經祐宮"이 있던 곳입니다.
<정조>의 마지막 후궁이며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이 있던 곳인데
<경우궁>은 <고종>이 현<청와대> 옆 <칠궁>으로 이전해 놨죠.
<수빈 박씨>의 무덤이 <휘경원>인데, 현재의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자락에 있는
<휘경중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이름이 <휘경동>이 되었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광릉> 근처로 이전해 놨더군요.
그래도 가끔 母校를 찾는데도 올때마다 새롭습니다.
['북촌문화센타']
[안내문]
<옛 휘문중고등학교> 운동장 건너편에는 "북촌문화센타"가 있습니다.
<北村 답사>를 하려면 먼저 이곳부터 들려 안내지도와 안내문을 받아 답사를 하는게 좋겠습니다.
요즘 <북촌탐방>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까지도 무지 인기있습니다.
['민형기 가옥']
<북촌문화센타>는 <민씨세도가>의 대표주자 중에 한명인 반민족친일파 <민형기>의 집이었답니다.
당시 <탁지부>의 재무관을 지냈습니다.
<민형기 집> 보다는 "계동마님 댁"으로 더 알려져 있죠?
<민형기>의 외아들인 <민경휘>와 결혼한 소녀 <이규숙>이 <계동마님>입니다.
유명하게 된 동기는 <이 계동 마님이 먹은 여든살>이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펴 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에서 그녀는 <민형기>의 며느리로서, <민경휘>의 아내로서 삶을 진솔하게 적어 내렸고
이 집을 짓는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집은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고...
['재동초등학교']
<북촌문화센타>를 나와 <계동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고갯마루에 <재동초등학교>가 있고...
<재동초> 출신 동창들 무지 많습니다. ^.^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로 들어 갑니다.
<경기여고>가 있다가 <창덕여고>가 들어 서고 이어서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았습니다.
경비실에서 출입명부를 적고 우측으로 들어 가면...
['이상재 집터']
"월남 이상재 선생 집터 月南李商在" 표지석이 있습니다.
선생은 'YMCA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장', '조선일보사 사장'등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 운동에 헌신한 민족주의자이시죠.
['헌재 소공원'']
['제중원 터'] ['박규수선생 집터']
<헌재> 우측 뒤에는 <헌재 소공원>이 있는데, <천연기념물8호>인 <백송>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제중원 터 濟衆院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제중원>은 <미국공사관>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의 영향으로 1885년 <홍영식>의 집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랍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명이었죠.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고 <제중원>까지 운영하게 되었답니다.
<명성왕후>로 부터 <운산금광>등 어마어마한 툭혜를 받았답니다.
<재중원>은 후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이름에도 오르게 되었습니다.
"박규수선생 집터" 표지석도 있는데,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시지요.
개화사상을 앞장서 주창한 분으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선생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웠답니다.
이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과 <프랑스 파리>에서 염문을 뿌린
<3.1운동 33인> 중에 한명이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의 집도 있었었답니다.
<나혜석>의 "정조유린에 대한 소해배상 소송" 유명하죠? ㅎ
궁금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여기 클릭해서 들어 가 보세요
"[덕숭산 유산기] 新女性과 女僧"
['헌법의 수호자' 상]
<헌법 수호자 상>이 눈길을 끌고...
['윤보선 家']
<헌재 담장>과 맞붙어 있는 <윤보선 家>가 조금 보이는군요.
<윤보선 家>에 대해선 <1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만 출입이 않되더군요.
여기서도 내부는 안보이고 <북촌> 제1의 가옥 다웁게 어마무시한 지붕만이 주변을 압도하고
['재동 백송']
[안내문]
"재동 백송 齋洞白松 (천연기념물 제8호)>"
지금까지 본 백송 중에세 제일 큰 백송인듯...
['창덕여고 터']
들어 올때 못본 "창덕여고터" 표지석이 나갈 때에 보이는군요.
제가 학교 다닐때 학생회장 선거를 할때 에피소드 하나 들려 드리면...
어느 후보가 정경발표에서 "저를 학생회장에 당선 시켜 준다면 앞에 보이는 저 '창덕여고'로
육교를 놓고 지하도를 만들겠습니다 !!"라고 하던게 기억 납니다. ㅎ
['계동 사거리']
<헌법재판소>를 둘러 보고 다시 <계동사거리>로 돌아와
직진해서 앞 언덕에 표시된 <여운형 선생 집터>를 다녀 오도록 하겠습니다.
['여운형 집터']
"몽양 여운형 선생 집터 夢陽 呂運亨 家址"
선생의 생가는 <양수리 두물머리> 지나 있어 두어번 다녀 왔습니다만,
서울생활을 할때 이곳에서 선생이 살았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다니던 학교 뒤에 있었는데도...ㅠ
표지석은 길 건너편에 설치했는데 사시던 집은 건너편에 보이는 현재의 칼국수집이었답니다.
<휘문중학교> 뒷담과 붙어 있었군요.
해방 이후 <대한민국건국준비위원회>의 첫번째 군중 집회를 <휘문중고등학교>에서 열고
첫 연설을 하셨다는군요. 그 이후 <혜화동 로타리>에서 암살 당하셨죠.
['북촌 제1경']
<여운형선생 집터> 고갯마루에서 <창덕궁>을 조망하는게 "北村八景 중에 第一景"이라는 군요.
['네번째구간-여운형집터에서 창덕궁까지 실트랙]
4."계동사거리--박흥식 옛집-김성수집-북촌구경-배렴가옥-석정보름우물-
북촌마루-고희동가옥-원서동빨래터-백홍범가옥-송진우집터-경추문"
['계동 골목']
다시 <계동 골목>으로 돌아와 <중앙고>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휘문고> 출신 문학가 중에 <봄봄><동백꽃>등등의 단편소설을 쓴 <김유정>을 모르시는 분은 없지요?
그 <김유정> 선배가 <휘문고보> 다닐때 이 골목 어느 곳엔가 있었다는 어느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라는 기생을 보고 한눈에 뿅~가서 어마무시한 짝사랑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아시나요? ㅎ
궁금하면 여기 클릭 "ITX 청춘열차'를 타고 가는 '김유정문학촌'과 '금병산"
['달고나']
요즘 <오징어 게임>이 유행해서인지 이 <계동골목>에 "달고나"가 등장했습니다. ㅎㅎ
어렸을 때 저는 "달고나" 도사였습니다.
"달고나"는 설탕에 소다를 넣어 만들기에 열에 약해, 옷핀을 달궈서 찌르면 쉽게 모양을 짜를수 있죠.
그래서 "달고나" 장사가 저에겐 팔지 않았다는거 아시나요? ㅎㅎ
['계동교회' 앞 삼거리]
조금 올라 가면 <계동교회>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옛 박흥식 집']
"옛 화신백화점 사장이 살던 <박흥식 집>"이 있습니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에 전투기를 사주는 등 어마어마한 친일행위를 하며 富를 축적한 인물이죠.
<和信百貨店>에 엘리베이트가 처음 설치되었기에 우리들에겐 신기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외부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아 좌측 앞에 있는 <계동빌라>5층으로 올라 가서
그 분이 살던 집이 어떠했는지 내부를 촬영하려고 했습니다만
[빌라5층에 올라 '옛 박흥식 집' 조망] 나무로 보이지 않음
[내부 사진] (자료사진)
<계동빌라> 5층에 올라가 촬영을 시도했습니다만 숲으로 가려있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웹써핑으로 구한 내부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이 집이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변형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선 그렇게 크고 화려하지는 않은 주택이군요.
그런데 <한보그룹> 총수 <정태수씨>를 기억하시나요?
지난해인가 중남미 에콰도르인가 어디서 죽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박흥식>이 살던 집을 인수하여 이 집에서 <한보그룹>을 일제시대 <화신백화점>처럼 일구어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정태수씨>가 살았다는거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집으로 이사하여 살았다는거 아시나요.
그리고 선거에서 낙선 한후 고작 이 집에서 1년여 살다가 이 집에서 하늘나라로 갔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특별한 주택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 이 집을 왜?좋아 했을까
잠시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올라 가 조망하며 명당 자리인지 풍수지리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
다시 <계동교회> 앞으로 내려와 조금 올라 가면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를 만납니다.
제가 학교 다닐땐 <대동상고>였는데....그러니까 <계동골목>에 있었던 3개 고등학교 중에 하나이죠.
우측으로 들어 가면....
['김성수 집']
<대동세무고등학교> 정문 앞에 "인촌 김성수선생 고택"이 있습니다.
<동아일보><경성방직><삼양사>등의 회사를 품에 안고 <고려대><중앙고>등 학교도 품고
<부통령>까지 지낸 <인촌 김성수선생>이 살던 집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일제에 국방헌금으로 내며 <박흥식>등과 함께 전투기를 사주기도 하며
친일을 독려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해서 씁쓸함을 지울수 없습니다.
여기선 집의 규모를 알수 없어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으로 올라 가서 집구경을 합니다.
[정원엔 정자가 있고 <김성수선생 부부 흉상이 설치되 있군요.]
[선생의 부모 동상인듯 한 동상이 보이고..].
[본채 조망]
<인촌 김성수선생> 집은 저택입니다. 엄청나죠?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에선 누구나 훤히 드려다 볼수 있습니다.
더 이상 언급 않겠으니 각자 나름대로 구경하시기 바람니다.
['옛 박흥식 집' 조망]
그런데 조금 전에 <박흥식-정태수-정주영 집>에서 언급한 그들의 집이 여기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계동교회> 뒤로 ♬ 언덕 위의 하얀 집 ♬ 보이시나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산줄기에 <한양도성>의 중심부로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건물들이 있어 돋보이지 않지만 옛날 주변 건물들이 없었을 땐 ♬ 언덕 위의 하얀 집 ♬
이었을 것이고, 한양도성을 훤히 굽어보며 호령하는 곳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풍수지리가들이 말하는 "명당" 자리였을 거라고....
그러니 <박흥식-정태수-정주영>등 당대의 부자들이 두 다리 펴고 누웠겠죠.
<정주영회장>은 현재도 그대로 있는 <청운동>에 살다가 대통령선거 때에 이리로 옮겼답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때에 이곳 <北村>으로 집을 옮긴 사례가 많죠?
<이명박씨>, <이회장씨>, <정주영씨>....당선 확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군요. ㅎㅎ
['북촌구경(鏡)']
[내부]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다시 <계동골목>으로 내려오면
조금 요란한 모양의 <북촌구경(鏡)> 건물이 있어 들어 가 보는데 <거울>을 주제로 꾸며놨더군요.
['1980년대 계동골목']
<북촌구경(鏡)> 벽에는 대형 거울을 설치해 1980년대 <계동골목>을 비추고 있어 골목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는데, 거울 속에 비치는 <사진 찍는 파란문>이 보이시나요? ㅎㅎ
['배렴 가옥']
['배렴 가옥' 내부]
[안내문]
"배렴 裵濂 가옥"
<배렴 裵濂 선생>은 우리나라 동양화의 거봉이시죠.
특히 산수화와 화조화를 잘 그리시고 <홍대 교수>였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석정보름우물']
[안내문]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조금 못미쳐서 "석정보름우물 石井十五井"이 있습니다.
15일간 그러니까 보름 동안은 맑은 물이 잘 나오고, 나머지 보름 동안엔 흐린 물이 나왔다고...
이런게 여기 있는줄 저는 처음 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중앙고 정문']
<계동골목>의 맨 꼭대기에 있는 고등학교입니다. <휘문>은 <계동골목> 입구에 있으니 꼭대기에
있는 <중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등하교하는데 다리가 좀 아플거라고 놀리곤 했죠.
이 학교 학생 중에 권투선수 <홍수환>과 <현대중공업 회장>인 <정몽준>이 저와 같은 연배입니다.
['고하길']
['북촌마루']
<중앙고> 정문에서 동쪽 <창덕궁> 방향으로 넘어 가는 길을 <고하길>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동창생이 살았는데 농구부 <김근ㅅ>와 체조부 <박범ㄱ>의 집이 근처에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깨끗하게 변했으며 길도 넓어졌습니다.
['북촌 제2경']
고개를 넘어 가면 "北村八景에서 第二景"이라는 곳을 만나며 <창덕궁>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탐방하는데 유의해야 하는 곳이어서 우측으로 내려가 올려다 보면...
['송진우 집터']
좌측 <레스빌>이라는 빌라는 "송진우 선생 살던 집"이었답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계의 거목이시죠. 선생의 호가 <고하>여서 이 길을 <고하길>이라고 한듯...
좌측 가운데 <고희동 가옥>을 둘러 보고 골목으로 올라가 <원서동 빨래터>와 <백홍범 가옥>을 둘러 보고
우측 골목으로 내려 옵니다.
['고희동 가옥']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신 "고희동 선생"이 사시던 집이랍니다.
['고희동 가옥']
[안방]
[작업실]
[안내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신 "고희동 선생"은 <휘문고보> 미술선생님도 하셨다는데 처음 알았습니다.
서양화를 하시다가 다시 동양화로 전향하기도 했다는군요.
이 가옥은 <서울시>가 인수하여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하고 개보수를 하여
일반에게 무료 공개하고 있더군요.
횡하니 둘러 보고...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원서동 빨래 터']
[안내문]
"원서동 빨래터"에 대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원서동>인데 한자로 <苑西洞>으로 씁니다.
쪽바리들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하시키기 위해 <秘苑> <昌慶苑>으로 만들었죠.
그러면서 이 동네의 이름을 <秘苑> <昌慶苑>의 西쪽에 있다고 <苑西洞>으로 불렀답니다.
<원남동 苑南洞>도 같은 맥락이고
['빨래터']
['창덕궁' 내부 조망]
[돌다리]
빨래터에 내려 가 보았더니 <창덕궁> 안의 활터가 보이고
활터로 들어 가는 돌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발원하여 흐르는 <북영천>은 <청계천>까지 복개가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선원전 외삼문']
빨래터 옆에는 "신선원전 新璿源殿" 정문인 <외삼문>이 있으나 굳건하게 잠겨있습니다.
역대 왕들의 <어진>이라고 하는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일반에 공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홍범 가옥']
[안내문]
"원서동 백홍범 가옥 苑西洞白鴻範家屋"
이 가옥은 조선시대 말 궁에서 일하던 상궁 중에서도 지체 높은 상궁들이 살던 집이랍니다.
<백홍범>이라는 사람은 이 집의 소유자일 뿐이니 자세히 알 필요는 없겠고...
한때 <장희빈>이 살던 집이었다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옥은 <한샘>이 인수해서 디자인센타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한샘 DBEW 연구소>라고 하는데, "Design Beyond East and West"라는 곳으로
국내최초의 사설 디자인 진흥기관이라고 합니다.
['신선원전 외삼문']
['신선원전' 줌인]
<백홍범 가옥> 정문 앞에서 <신선원전>을 조망하고 골목을 내려 가면...
['궁중음식연구원']
[안내문]
TV에 자주 나왔던 <황혜성씨>와 며느리 <한복려씨>가 운영하는 궁중요리 학원이더군요.
학원비가 수백만원씩 하더군요.
['원서동길']
['요금문']
"창덕궁 요금문 曜金門"
이 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 같은 궁인들이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거나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중종실록>을 보면 <인현왕후>가 이 문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쫓겨날 때
"중궁이 흰 가마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가서 친정으로 돌아가다."라고 기술되 있는데
<장희빈>이 등극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지요.
또한 <숙종 20년>엔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어 궁으로 들어 갈때
"<인현왕후>가 오시(午時)에 옥교를 타고 의장을 갖추고서 요금문(耀金門)으로부터
서궁(西宮)의 경복당에 들어갔다."라고 기록되 있는데 이때의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고...
또한 <효명세자 이영(순조의 아들)>이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요금문>을 통하여 나가
걸어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는 2살 많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를 만나러
조금전에 들렸던 <헌버재판소> 자리에 있었다는<박규수 집>으로 다니던 문이었답니다.
세자는 그를 친구 이상의 관계로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원서동길']
['경추문']
조금 더 내려 가면 "경추문 景秋門"을 만나는데 <창덕궁>의 <西門>이죠.
지금은 현판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은덕문화원']
['금위영 터']
<경추문> 앞에는 "금위영 서영 禁衛營 西營"표지판이 <마고카페>라는 건물 벽에 부착되 있더군요.
요즘말로 <대통령 경호실 西館>이 <창경궁> 서쪽문인 <경추문> 앞에 있었던거겠지요.
['북촌 제1경']
[북촌8경 중에 제1경]이라는 <여운형선생 집터>가 있었던 언덕을 다시 만나고...
['원서공원' (개천절 행사 발상지)]
이어서 "원서공원"을 만나는데 "개천절행사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원서공원>은 <옛 휘문중고등학교 희중당>이 있던 곳인데 <현대그룹>이 주차장을 만들고
위에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박인환 집터']
<목마와 숙녀>라는 詩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의 집이 있었었다는 곳입니다.
훤출한 키에 양복을 즐겨 입고 백구두를 신고 명동을 활보해서 <명동 빽구두>라는 별명도 얻으며
여대생들에게 무지 인기가 있었던 <박인환 시인>......
그는 술을 엄청 사랑하여 술병으로 이른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죠.
그래서 그의 詩에는 "술"이 무지 많이 등장합니다.
<날개>를 쓴 <이상>의 장례식에서 완전 녹초가 되게 술을 퍼 마시고 드러 누웠답니다.
그의 詩들은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등 젊은 시절 <박인희>에 의해 불러져 빅힛트했죠.
마지막으로 <무교동 선술집>에서 쓴 <세월이 가면>이라는 가사가 귓전에 아른거리는군요.
이 詩를 쓰고 일주일 후 저 세상으로 가서 <망우리공동묘지>에 뭍혔죠.
['휘문중고등학교 터']
"휘문중고등학교 터 徽文中高等學校址" 표지석이 어디엔가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곳곳을 뒤져 봤지만 그동안 못 찾았는데 드디어 오늘 찾았습니다.
학교 뒤 이런 구석...사람도 다니지 못하는 화단 안에 설치해 놨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학교들은 대부분 교문이 있었던 자리에 설치했는데, 어찌 이런 구석에 설치 했을까 허~참
['원서공원']
['원서공원']
[옛 '휘문고 본관'이었던 '희중당']
<원서공원>은 <현대그룹>이 주차장과 스포츠센타를 만들고 그 위에 조성한 근린공원입니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옛날엔 <휘문중고등학교> 본관인 <희중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 그 학교는 강남으로 이사 갔지만 이곳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수학하던 시절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창덕궁' 조망]
주차장 위에 조성한 공원이어서 <원서공원>에선 <창덕궁>을 조망하기 쉬워졌습니다.
옛날엔 <창덕궁> 울타리가 느슨해서 무단 출입이 가능 했었는데...ㅎ
['돈화문' 조망]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주변도 무지 변했습니다.
현재 매표소가 있는 곳 앞에는 <충정공 민영환선생 동상>이 있었습니다.
<고종>이 자신에게 자결을 하면서 까지 충성한 <민영환>이어서 <창덕궁> 정문에 세운 것이었죠.
'백성들아 이 사람처럼 나한테 충성하라~'라고 하는드시....
지금은 <조계사> 옆 <민영환 집터>가 있었던 <우정총국> 뒤에 세워놨더군요.
['사도시 터']
<원서공원> 정문 앞에는 "사도시 터"표지석이 있고
['관상감 터']
"공간 사옥 空間社屋"이라는 건물 앞에는 "관상감 터"표지석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 <관상감 관천대>가 있으니 북촌을 한바퀴 돌아 내려 온 것입니다.
['공간 사옥']
"공간 사옥 空間社屋"
한국 건축 1세대의 스타, <김수근>의 사옥인데.... 논란도 많은 <김수근>입니다.
과거와 현대, 그리고 미래를 함게 아우러는 건축물이라고 세계적 관심을 받았습니다.
소극장이 또한 유명하죠.
소극장 <공간사랑>은 <공옥진의 '병신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사물놀이 등을 소개하며
문화운동의 발원지로 자리매김했답니다.
['돈화문']
오랜만에 <돈화문>을 바라고 감회에 젖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까지만 해도 왕족들이 살며 들락거리던 문입니다.
['창경궁-종묘 연결터널']
쪽바리들이 갈라 놓았던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연결하며 터널화 공사가 완료되었군요.
['비변사 터']
<돈화문> 건너편에 있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앞에는 "비변사 터 備邊司址" 표지석이 있는데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었답니다.
['금위영 터']
건설업체로는 가장 오래된 <삼환기업>이 있는 곳에 "금위영 터 禁衛營址"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위해 중앙에 설치한 군영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익선동 골목길']
요즘 <종로 북촌>에서 제일 뜨는 골목이라는 <익선동 골목>을 통과하여
['종로3가']
['단성사']
['옛 단성사 극장'] 자료사진
['단성사 터 역사']
"단성사 團成社"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는데.... 현재는 귀금속 백화점이 되었더군요.극장도 있고
"좌포도청"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고...ㅎ
<단성사> 옆의 <소방서>는 서울에서 제일 높은 화재감시조망탑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에 고층건물이 들어서자 용도폐기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소방서> 좌측에 있는 빌딩은 <백궁다방>과 <백궁당구장>이 있었는데 제가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고...
['옛 피카디리 극장']
['옛 명월관']
"피카디리극장"은 옛날엔 <반도극장>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 이전엔 그 유명한 "명월관 明月館"이 있던 곳이고....
추억의 <北村>을 걸으며 옛 정취를 느껴본 답사였습니다.
걸은 거리는 약13km였으며 5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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