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숙종의 길Ⅰ』대서문에서 중흥사까지
['북한지 1페이지']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조시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승려 <성능(性能)>이
<북한산성>에 대해 기록한 책을 1745년에 목판본으로 편찬한 책이 "북한지 北漢誌"랍니다.
<북한산성>의 역사와 규모등을 망라하는 그야말로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이번엔 <북한지>에 나타나는 중요 지점을 중심으로 답사 겸 산행을 하려 합니다.
['북한도1']
['북한도2']
['북한도3']
['북한도 종합'] ★ 사진 클릭하면 크게 확대 됨)
"북한지 北漢誌"에는 현대적 기법으로 그린 지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이해 할수 있더군요.
['숙종 행차도' (중앙일보 캡쳐)]
<숙종 38년 (1712년 4월 10일)>
<숙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성> 완공에 즈음하여 행차를 합니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다시 발발 할때 자신의 피신처가 될 곳을 미리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찰이었겠죠.
그리고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에 도착하여 주변 산세를 살피고,
계속해서 <수문~중성문~행궁~동장대~대동문>을 거쳐 <수유리>로 하산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는데,
<숙종>이 행차한 이 길을 현대의 사람들이 "숙종의 길"이라고 이름하여 산행을 겸한
역사 나드리코스로 만들었다고 해서 답사 겸 산행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1760년과 1772년 두번에 걸쳐 <북한산성>을 올랐는데
첫번째는 <대성문>을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남문>을 이용했답니다.
[답사 지도]
오늘은 그 첫번째 답사로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 <중성문>을 통과하여
<노적사>와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보고, <산영루>와 최근 복원 했다는 <중흥사>까지 갑니다.
거리는 짧지만 5시간 이상 걸리는 답사코스였습니다.
이제 떠나 볼까요? ^*^
['북한산성 입구']
2022년 1월 12일 (수) 맑음
2022년도 첫 산행 겸 답사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출발합니다.
<북한산> 품안으로 들어 가는 입구엔 <원효봉>과 <의상봉>이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듯 합니다.
['북한산성 안내소']
<북한산국립공원>은 1985년도에 우리나라 열다섯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여의도> 면적의 26.5배가 되는 77㎢ 면적이라고 하죠?
년간 탐방객수가 천만이 넘는다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대표 건강생활공원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계곡길'과 '차도'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조금 올라 가면 <계곡등산로>와 <도로 등산로>가 나뉘는 곳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자연과 함께 걷는 <계곡길>을 주로 이용하지만,
오늘 저는 옛날 <숙종>이 행차했던 길의 흔적을 따라가기 위해 도로를 이용하여 <대서문>으로 갑니다
도로가 <옛 숙종의 길>을 확장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로]
<1712년 4월 10일> <숙종 행차>를 앞두고 <대서문 길>을 정비했다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오솔길 수준이었답니다. 지금처럼 넓찍한 길이 난 것은 1958년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서문>을 찾을 때였다고 하네요.
<숙종실록-숙종38년 4월 10일>의 기록을 살펴 보면
"上幸北漢。 早發由西郊, 至北漢。 自西門入, 歷覽水門,
仍欲登小釋迦峴, 周覽城內外, 以路險不治, 只上柴丹峰"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柴丹峰)까지만 올랐다."
<소석가현(小釋迦峴)>은 현재의 <백운대>를 의미하는 듯 합니다. 정확치 않지만...
그러니까 <백운대>에 오를려고 했으나 어려워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까지만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는 행차 경로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에는 좀 더 세밀하게 행차 경로가 기술되 있는데 잠시 후 알아 보겠습니다.
['용암사' 갈림길]
공원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용암사> 입구를 만나며
길 좌측엔 <자연보호헌장 탑>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쓸쓸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연보호헌장']
자연보호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에 전국 곳곳에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큰 규모랍니다.
<유신체재>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때 였군요.
높이 5m로 <롯데제과>가 건립비용을 내고, 당시 세종대 교수이던 <서희환씨>가 글을 썻다고...
요즘 더욱 자연보호 운동을 해야하지 않나요?
[도로]
<자연보호훈장탑>을 지나면 <대서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시찰하고 쓴 "어제시 御製詩"는 총6수로 되있는데 하나하나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 첫행을 먼저 살펴 보면...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계심음양행신성 효출남문고각명
효기수천분호필 풍훈일영속주명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을 거울삼아 전쟁에 대비한 심오한 계획으로 새로 세운 성을 시찰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남대문을 나서니 군악대의 북과 호각소리 울려 퍼지네
날랜 기병 수천이 나뉘어서 길을 내며 앞뒤로 따르는데
훈훈한 바람까지 불며 해가 길어지니 마침 여름이 다가 오는구나.
한자 실력이 좀 부족한 <파란문>이 나름 해석 한 것이나
이해하기 쉽게 나름 풀이해 해석했으니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그러려니 생각해 주세요.
<숙종>이 <한양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서대문>으로 나가면 더 가까울 텐데 궂이 <남대문>으로 나간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요?
당시 정치상황을 이해해야 어느정도 추측 할수 있겠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왕권이 약화된 <숙종>은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등으로
당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데, 왕권은 다소 강화되었지만
오히려 당파싸움은 더욱 격화되어 나라가 더욱 시끄러웠씁니다.
그래서 <숙종>은 정치적 상황 전환이 필요하던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숙종>이 <북한산성> 건설이라는 큰일을 온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며
왕권은 건재하고,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한듯 합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왕이 백성들과 좀더 가까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 규모의 행사를 펼치며 정문인 남대문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대서문']
"대서문 大西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16개 城門 중에 가장 큰 규모랍니다.
"숙종 어제시 御製詩"의 두번째 행을 읽어 보면....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서문초입일회두 기장심웅사아우
국도지척금탕고 하기오민수한주
대서문 바로 앞에 도착하여 머리 들어 둘러 보니
장대한 기상과 웅대한 마음이 솟아 나의 근심 사라지네
한양성 가까이에 이렇게 견고한 금성탕지 같은 성이 있으니
내 어찌 나의 백성 수호하지 않고 한양을 버리랴
두번째 행에서는 <대서문>에 도착하여 <북한산성> 완공에 뿌듯함을 표현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 城을 축성한 이유가 자기가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라고 하는듯...
[1900년대초 '대서문']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뎅 (Frandin)>이 1902년에 촬영하여 1905년에 펴낸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서문>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시대> 이전으로 나무들이 무성하며
사람들의 왕래도 많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 '대서문']
<일제강점기시대>로 들어 가며 우리 산하는 황폐화 되기 시작했답니다.
땔감 부족으로 <북한산>은 무분별한 벌목이 시작되어 민둥산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쪽바리들을 씹지 않을수 없는 이유는 이 사진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은 오솔길 수준으로 좁았다는 것도 알수 있는데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선 당연한거죠.
<숙종>이 행차하며 올랐을 때의 길 모습을 연상해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대서문> 앞에 선 <이승만 대통령>"
현재의 <大西門>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랍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구한말 과거에 11번 도전한 한학도 였습니다만 모두 낙방했죠.
그리고 신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운 좋게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미군정과 가까워지게 되고...
영어를 잘하게 되었으니...
현판에 찍혀 있는 <낙관(落款)>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 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라고
젹혀 있는데 <우남 雩南>은 이승만대통령 호이고 뒤의 <印信>은 <도장>이라는 뜻이고
끝에 있는 <長壽>는 이 현판을 만든 사람이 대통령의 장수를 비는 것이니 '아첨'하는거죠
<두인 頭印>에는 "天地爲師 천지위사"라고 쓰여 있는데 "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라는 뜻.
['대서문 문루']
<대서문 문루>는 일제강점기 말에 홰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신도면사무소'를 짓는 자재로 쓴다며 문루가 헐렸다고 하며
그나마 해방 후 <6.25전쟁>으로 완전 사라졌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당해 <북한산 상운사>에 숨어 도피생활을 해서
<북한산>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답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산>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부랴부랴 중수를 했으며 길도 불도져 등 건설 장비를 동원하여 넓히며 신작로를 냈답니다.
현재 문루 안에는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1958년에 쓴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습니다.
<대서문>을 복원한 내력이 장황하게 적혀있는데 몇 부분만 읽어보면 ...
"우리 민족의 영도자이신 이대통령각하의 민족문화재 보수보전의 뜻을 받들어 문루를 복원하였다"
"공사기간은 5개월. 비용은 총 698만환이 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누혈']
"누혈 漏穴"... 요즘 말로 <배수구>입니다.
이 <누혈>은 홰손되지 않고 오리지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인데
배수 목적 보다도 <대서문>의 위용을 뽐내는 장식품으로 느껴지는군요.
['근총안']
"근총안 近銃眼"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쏘기 위한 총구멍을 <근총안>이라 한다는데 <평여장>에 하나씩 뚫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근총안>은 <북한산성>에만 있다고 합니다.
['수문' 방향]
<북한산성> 안에 흐르는 <북한천>에는 <水門>이 두군데 있었는데
이곳 <대서문> 아래와 <중성문> 옆에 있었었답니다.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내려가 <수문>을 둘러 보고 올라 왔다고 기록에 남아 있더군요.
저는 다음번에 별도로 <수문>과 <서안사> <민지암>등 계곡 주변을 탐방하겠습니다.
['대서문'에서 조망]
이제부터 <북한산성> 안으로 들어 갑니다.
예전엔 이 주변이 온통 가게나 유락시설로 가득했었습니다만 지금은 맑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510m 높이의 <원효봉>과 835.6m의 <백운대>가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이 주변의 1980년대 옛 사진을 보여 드리면
['대서문' 안 1986년 사진] 출처:경기문화재연구원
[옛 '별미원']
<대서문>을 지나면 기와집 한옥이 하나 아직도 남아 있는데
<별미원>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집입니다. 보존 가치가 있는 한옥이어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고...
[옛 '북한산성 버스종점']
<옛 별미원>을 지나면 바로 추억의 <북한산 버스종점>이 유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저도 옛날 청춘시절에 <백운대> 산행 후 하산 할때 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세월 빠릅니다.
['석장승']
버스정류장과 화장실을 지나면 <석장승>이 있는데
<도의원>을 지낸 <문기수>라는 사람이 세운 것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잠시후엔 이 분이 세운 <석불>도 곧 만나게 됩니다.
['무량사' 앞]
<석장승>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무량사>가 나타납니다.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無量寺"는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이 없는 절이지만 잠시 올라 가 봅니다.
['무량사 약사전'과 '대웅전']
['범종']
"무량사 無量寺"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상궁>으로 유명한 <엄귀비>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인 "영친왕"을 낳았다고 유명해진 절간입니다.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해 우리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엄상궁>은 다섯살에 궁녀로 들어가 일평생을
궁에서 보냈는데, 특히 <명성왕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을 때, 내전에 왔다 갔다 하던 <고종>의 눈에
들어 짝짜쿵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명성왕후>가 <엄상궁>을 궐 밖으로 내쫒기도 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입궐하여 <고종> 곁에서 실제 황후가 되고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된 여인이죠.
['아미타사' 조망]
<무량사>에서 건너편 <원효봉> 아래에 있는 <아미타사>를 조망하고
['무량사'에서 조망]
햐 ~~ <무량사>에서 조망하는 <북한산>은 그 어느 곳보다 색다릅니다.
특히 <기린봉>과 <시단봉>의 조망이 최고라고 생각됩니다.
<기린봉>에는 <북한산성>의 "북장대 北將臺"가 있던 곳인데 출입금지 지역이라 오를수 없습니다.
또한 <시단봉>에는 <북한산성>의 "동장대 東將臺"가 복원되 있는데 <북한산성>의 방어체계를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 이곳 <무량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창마을 (북한동)' 앞]
"북한동 하창마을 北漢山 下倉址"
이곳이 <북한산성>의 곡식창고인 <下倉>이 있던 곳이라고 <北漢誌>에 나와 있습니다.
['북한동역사관']
[옛 '만석정']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 <하창마을-북한동>은 음식점들이 여러곳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북한동역사관> 자리엔 <만석정>이라는 음식점이 있던 자리이죠.
<만석정>은 산성입구로 옮겨 영업을 계속하고 있더군요.
[2006년 3월 이전까지 '하창마을'광경]
[철거 반대 시위]
<백운대등산코스>와 <대남문방향 등산코스>가 만나는 곳이어서 등산객들이 몰리는 곳이니....
여기서 음식이나 술을 사 마시면 버스 타는 곳까지 봉고로 태워다 주며 지친 등산객들을 유혹했죠.
['새마을교']
<北漢誌>에는 이곳에서 <행궁>까지의 <북한천>에 다리가 다섯개 있었다고 표기해 놨습니다.
봉황교(鳳凰橋) 청운교(靑雲橋) 강선교(降仙橋) 환선교(喚仙橋) 언룡교(偃龍橋)
지금은 이곳의 다리를 <새마을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만
정확치는 않지만 이곳엔 "봉황교 鳳凰橋"라는 다리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창' 삼거리]
<봉황교>라고 생각되는 <새마을교>를 지나면 <백운대방향>과 <대남문방향>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있는데, <숙종의 길>은 우측 <대남문방향>으로 갑니다만,
좌측에 있는 <보리사>를 잠깐 다녀 가겠습니다.
['북한산 향나무']
<새마을교> 옆에는 <북한산 향나무>가 있는데 매우 특이한 향나무입니다.
<향나무>는 일반적으로 하늘로 곧게 뻗지 않고 줄기가 심하게 굴곡을 가지며 여러 갈래로 자라지만
이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이 특이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 있는 <제기동>의 <선농단 향나무>와 비슷합니다.
['보리사']
"보리사"
이 절은 아주 조그마한 절이며 <북한산성> 축성과도 관련이 없는 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절은 1957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58년에 완공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대서문>에서 언급했던 <이승만대통령>의 <북한산 방문>에 발 맞추어
당시 <경기도지사 최헌길>이 <대서문>을 중수 하면서 이곳에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승만대통령 별장>을 지어 올렸는데 아부도 보통 아부가 아니지요?
어용 도지사의 진면목를 보여준 건물이라서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유당> 독재시절이니 망정이지 요즘 같으면 국고 낭비로 감옥 갈 일이잖아요.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형인 "김종소(金鍾韶)"씨가 삿는지
어쨋는지 소유하게 되고 그가 별장으로 쓰다가 <보리사>라는 이름의 절로 만들었답니다.
2001년 4월 7일에 별세한 <김종소>씨의 신문 부고란을 보면 <보리사 창건주>라고 명기돼 있더군요
['등운각'] 사진출처:공유마당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보리사>는 "등운각 登雲閣"이라는 이름의 <이승만대통령 별장>이었습니다.
<5.16군사쿠데타> 그후 <김종필>의 형인 <김종소>씨 소유가 되었지만...
이런 사실 알고 <북한산> 등산 다니셨나요? ㅎ
또한 <대서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이승만대통령>은 <북한산>을 매우 좋아 했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 <북한산 상운사>로 도피하여 숨어 지냈고
또한 그의 어머니가 <대남문> 근처 <문수사>에서 백일 기도를 해서 태어 났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파주 용미리 용암사>에도 그의 탄생설화가 있습니다.
['파주 용미리 용암사의 '쌍미륵불']
['동자상'과 '칠층석탑'] 2013년 10월 22일 <파주 용암사>에서 촬영한 사진
[설명문]
이 사진은 제가 2013년 10월 22일 <오두지맥>을 종주하며 촬영한 사진인데
사진 속의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의 탄생설화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었던 <유영익씨>가 하늘로 모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 <용암사 쌍미륵불>에게 득남 발원 기도로 부터 탄생되었다는 설. ㅎㅎ
<이 대통령>은 아버지 <이경선>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로 부터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 났죠.
형 둘이 어려서 천연두로 일찍 죽어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답니다.
이 산 저 산 돌아 다니지 않으면 알수 없는 사실들을 이렇게 돌아 다니며 알게 되는거죠.
<이승만대통령>은 <박승선>이라는 분과 결혼을 해 아들을 한명 낳았는데 <이봉수>라고 하죠
그런데 그는 일찍 병사하고 말았답니다. 자식복도 없으셔...또한 본처와 이혼도 하고
아시다시피 <프란체스카여사>와 재혼을 했는데 후사가 없었죠.
그래서 83세에 아들을 한명 두기로 한게 <이기붕의 아들-이강석> 양자였습니다.
<이강석>은 권총자살하고....
['대남문 방향 북한천길']
<보리사>를 둘러 보고 다시 <대남문 방향>의 <북한천>을 따라 올라 갑니다.
['북한도2']
['국토지리원 지도'에 실트랙 표기]
이곳부터 <중흥사>까지 <北漢圖>와 제가 실제 걸은 <국토지리원 지도>를 비교 하며 올라 갑니다.
<도총섭 성능 스님>이 지형지물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렸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석불]
<새마을교>에서 조금 올라 가면 길가에서 <석불>을 하나 만나는데
조금 전 <대서문> 안에 있었던 <북한산버스종점> 근처의 <석장승>을 세운 <도의원 문기수씨>가
이곳에 <석불>을 추가로 세웠다는 것을 알수 있고....
[오름길]
['선봉사']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름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선봉사>라는 절을 지나며
이 절도 <북한산성> 축성과는 관련 없는 절이라 그냥 패스합니다.
['거북암']
이어서 <거북암>이라는 오래된 집을 만나는데 자판기는 아직도 있군요.
['범용사' 앞 삼거리]
계속해서 <범용사>라는 절 앞에서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곳이 <北漢誌>에 나오는 "청운교 靑雲橋"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범용사>도 <북한산성> 축성과 관련없는 절이어서 그냥 지나 갑니다.
단지,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북한산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녕사"가 있는데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주변을 수비하며 관리하던 절이었답니다.
이런 절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 하죠.
[쉼터]
<옛 청운교> 위에는 쉼터가 조성되 있어서 <숙종>도 이곳에서 좀 쉬어 갔으리라
['북한천']
<범용사>앞 쉼터에서 부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집니다.
7분 정도 오르면....
['중성문' 앞 바위 각자]
<중성문> 앞에 도착하는데, 큰 바위에 뭔가 글자가 있었던거 같은데 지워지고 뭔 글자인지
알수 없고... 이런게 여러곳에 있더군요.
['중성문'과 '시구문']
['시구문']
"중성문 中城門"과 "시구문 屍口門"이 나타 납니다.
['중성문' 정면]
['중성문' 측면에서 조망]
"중성문 中城門"
<숙종>이 이곳에 왔었었을 땐 이 門은 없었습니다.
<북한산성>의 서쪽이 낮아 적의 침입이 쉬우니 이곳에 다시 內城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숙종실록 1712년 4월 10일자>를 보면
"上以西門邊最低, 重城不可不築, 命斯速議築.上引諸臣論形便."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근총안']
"중성문 中城門"은 1998년에 복원되었답니다.
그리고 현판은 당시 <고양시장>이였던 <신동영>이라는 분이 썻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양시>가 복원공사를 했다는거겠죠.
['증취봉' 방향 조망]
<의상능선>의 <증취봉>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성곽을 조망하고
['시구문' '수문' 방향 조망]
['水門'이 있던 곳]
['수문' 흔적]
북쪽 <기린봉> 방향 성곽 바로 아래에 <북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수문 水門"이 있었었답니다.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어 없어 졌는데 그 흔적만 남아 있고
['행궁' 방향 조망]
<중성문> 안으로 들어 갑니다.
지금부터 <북한산성>의 주요 시설들이 모두 있는 "山城 속의 山城" 지역이 되겠습니다.
조금만 올라 가면....
['노적사' 입구 갈림길]
"노적사 입구"를 만납니다.
<노적사>는 매우 중요했던 <승영사찰 僧營寺刹>인 "진국사 眞國寺"여서 다녀 오기로 합니다.
또한 매우 중요한 軍營인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가 <노적사> 근처에 있어
반드시 돌아 보고 와야겠습니다.
['노적사 (옛 진국사)' 안내석]
<北漢誌>에는 <북한산성> 안에 13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두었다고 표기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진국사 眞國寺"가 있는데 현재 <노적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오름길]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노적사']
['노적사 보임루']
<노적사> 정문이 있는 <보임루>라는 건물을 통과합니다.
['노적봉' 조망]
<보임루>를 통과하면 <노적봉>이 열열한 환영을 하는데
<北漢誌>에는 "진국사 眞國寺"가 <노적봉 露積峯> 아래에 85칸으로
승려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국사 眞國寺"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노적사 대웅전']
['석사자상' 안내문]
<대웅전> 앞에는 "석사자상"이 있는데 유일한 향토문화재라고 합니다.
익살스런 사자 모양이라네요, 사자 궁둥이가 토실토실...^*^
['진신사리탑']
[안내문]
부처 진신사리 기증 증명서까지 설치한 사리탑이 있고
['나한전'과 약수터]
<나한전> 아래엔 약수터가 두곳 있는데
우측 <감로수>는 법당 헌공수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하고
좌측 <생명수>는 일반인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라고 하네요. ㅎ
['훈련도감 유영지' 가는 길] ★ 길조심 ★
<노적사>에서 <훈련도감 유영지>를 찾아 가는게 어려웠습니다.
<노적사 보임루> 앞으로 나와 우측을 바라보면 <출입제한지역 표지판>이 보입니다.
저곳으로 가면....
[출입제한 지역]
<추락위험 출입제한지역>이라고 겁을 줍니다.
<노적봉 암벽등반>을 하려는 산객들에게 하는 경고이니 <훈련도감유영지>를 가려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고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한>과 <금지>는 의미가 완전 다르죠?
나무 울타리를 밀면 열리도록 되 있더군요. 우측은 <노적봉 암벽>으로 가는 길이니....
<훈련도감유영지>는 울타리를 밀고 들어가 좌측으로 가야 합니다.
['훈련도감유영지' 간는 길]
처음엔 길이 선명하고 넓어 별 생각없이 두리번 거리며 진행하는데
길의 형태가 없어지며 개울을 하나 건너 가게 되더군요
['훈국 유영지 흔적']
개울을 건너면 바로 집터가 있었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는 흔적이 나타나며....
['누혈']
이어서 엄청 큰 규모의 축대가 나타나며 축대엔 "누혈 漏穴-하수구"가 보이며
아곳이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라는 것을 알수 있더군요.
이 축대 우측으로 올라 가면....
['우물']
"훈련도감 유영지 訓鍊都監 留營址"
<유영 留營>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파견부대"라는 의미이니
<한양>에 있는 "훈련도감 본부 訓鍊都監 本府"에서 파견한 부대가 되겠죠.
<北漢誌>에는 이곳에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십여명의 정규군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전시에는 물론 많은 군인들이 오겠지만..
산속에서 군대가 주둔하려면 우물이 없어서는 절대 않되겠죠.
그래서 <북한산성> 안에 많은 우물이 있다고 <북한지>에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주 큰 규모
앞으로 탐방하겠으나 미리 알아보면 정규군은 <북한산성>에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파견한
부대도 있었답니다.
['戊']
['무법대 戊法臺']
<우물> 우측에는 "무 戊"라는 글자와 "무법대 戊法臺"라는 글이 세겨진 바위가 있더군요.
"무 戊"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창"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이곳에서 <창검술>을 연마하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법대 戊法臺"는 창검술을 지휘 감독하던 곳으로 여겨지고....
['무법대'에서 '우물 방향 조망]
"무법대 戊法臺"에서 <우물>이 있는 <훈련도감 유영지> 방향을 바라보니
전쟁이 발발하면 더 많은 군인들이 합류하여 거주 할수 있도록 설계된듯 합니다.
이곳 병기고에는 조총 3,000자루, 중총 17정, 수철대포(水鐵大砲) 19좌, 목모포(木母砲) 40좌,
철자포(鐵字砲) 40좌등등 있었고 화약 24,929근 8냥, 연환(鉛丸) 503,100개,
수철환(水鐵丸) 4,538개 등을 보유하고 있었답니다. 어마무시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죠?
['훈련도감유영지'에서 '의상능선' 조망]
<훈련도감 유영지>에서 남쪽을 바라봅니다.
건너편 <의상능선>에 안겨 있는 <행궁>이 있는 가운데 <백운계곡>을 내려다 보고....
"북장대 北將臺"는 여기서 뒤로 가까운 <기린봉>에 있는데 출입금지구역이라
다음에 <상운사>쪽에서 올라 가기로 하고.....
다시 <노적사>로 돌아 가는데 내려 가는 길을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올라 갈때 내려 올때를 생각하며 올라 가야 내려 오기 쉬운데,
길 흔적이 워낙 없고 잔설까지 계곡에 쌓여 있어 고생 좀 했으니 후답자들은 참고하기 바람니다.
['노적사' 회귀]
다시 <노적사>로 돌아와서 <보임루>로 가면...
['노적사' 앞]
올라왔던 길이 좌측으로도 연결되고 있더군요.
좌측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지 잠시 후에 알게 되고, 저는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갑니다.
['진국교']
다시 <노적사> 입구 다리로 내려가 <대남문> 방향 주등산로를 따라 아주 조금 올라가면
"진국교 眞國橋"를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강선교 降仙橋"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국교> 자리엔 옛날 <강선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었다고 생각됩니다.
['노적사' 출입구]
<진국교>를 지나면 다시 <노적사 입구>를 만나는데
조금전 <노적사 보임루> 앞에서 좌측으로 연결된 길이 이곳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고
[바위 각자]
이어서 큰 바위에 뭔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는 바위를 또 만나는데...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백운동문 白雲洞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데
못 찾고 지나가서 다음번 답사 때 다시 찾아 봐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곡은 "백운동 白雲洞" 계곡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부왕동 암문' 갈림길]
이어서 "부왕동 암문 갈림길"을 만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환선교 喚仙橋"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산영루>를 조망하고 올라 가는게 좋습니다.
우측 북한천 계곡으로 조금 들어 가면...
['산영루' 조망]
<북한산성>에서 최고의 경치를 제공해 준다는 "산영루 山映樓"가 조망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영루>가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룬다고, 외국인들까지 이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산영루'와 '어제시각' 옛 사진]
['어제시각' 옛 사진]
<숙종>이 행차하면서 쓴 <어제시 御製詩>를 비석에 새겨 보관한 "어제시각 御製詩閣"이
<산영루> 건너편에 분명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 찾기 조차 어렵답니다.
<어제시비 御製詩碑>는 1915년 대홍수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없어 졌지만
그 글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제가 관련 장소를 탐방하며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計深陰兩幸新城 曉出南門鼓角鳴
驍騎數千分扈필 風熏日永屬朱明 <북한산성 입구에서 음미 했음>
西門初入一回頭 氣壯心雄寫我憂
國都咫尺金湯固 何棄吾民守漢州 <중성문에서 음미했음>
間關十里到行宮 줄줄柴丹卽在東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행궁에 가서 음미 하겠음>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寇賦非徒不敢近 猿노亦必愁攀緣 <동장대에 올라 음미 예정>
仗衛已先陳返途 城東駕出亦崎嶇
徐行風覽多形勝 況是淸江興不孤 <대동문>에서 음미해 보겠음>
過刹道成逢坦路 風埃滿目日將暮
士女如林瞻羽모 抱원皆許駕前訴
<어딘지 모르던 도성암터가 현재 발굴 중에 있는데 4.19묘역 근처에 가서 음미해 보겠음>
[독일인 엘러(Otto E. Ehlers)가 촬영한 1892년의 사진인 "산영루"]
[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인 베버(Nobert Weber)가 찍은 "산영루"]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된 사진만 남아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사진기가 없었으니...ㅉㅉ
가운데 <산영루> 뒤로 솟아 있는 <시단봉>의 <동장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산영루'와 '용학사' 조망]
다시 주등산로로 올라와 조금 올라 가면 좌측에 <용학사>가 조금 보이고
우측엔 <산영루>가 보입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산영루> 앞에는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이 있습니다.
안내판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북한승도절목']
"북한승도절목 北漢僧徒節目"
인간이 가는 곳엔 특히 계급 사회에선 부정부패가 있기 마련이어서 이곳에 부임하는 승병대장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승병대장인 <총섭>이 지켜야할 규칙을 새겨 놓았다는데 기록에서 간추려 보면
"북한산성은 국가를 보호할 중요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최근에 승도가 없어지고 사찰이 피폐하여 조석으로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승도를 뽑을 때 공평하게 뽑고 비리가 없도록 하라"
대충 이런 내용이라고...
['산영루']
"산영루 山映樓"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느끼듯
<북한산성> 최고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건립되었다고 수많은 관리들과 시인 묵객들이 다녀 가며
많은 아름다운 글들을 남겼습니다.
유람지 역활 뿐 아니라 승병대장인 <총섭>이 회의를 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총섭>을 찾아 오는 손님들을 맞이 하고 대접을 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詩]
대표적인 詩 중에 하나가 <추사 김정희>의 詩랍니다.
뿐만 아니라 <미수 허목>, <송상기>, <성호 이익>,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유광천>, <이덕무>,
<이옥>, <다산 정약용>, <이계서>, <신기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들이 글을 남겼답니다
['선정비군 현황도']
<경기도문화원>이 발굴조사한 "북한산성 선정비군 善政碑群" 현황도입니다.
관심 있거나 아시는 분들 있나요?
저는 관심있는 몇 사람의 선정비를 찾아 봤습니다.
['김문근'과 '민겸호' 선정비]
['민영준' 선정비]
눈에 띄는 인물은 구한말 세도정치의 핵심들의 이름이 여럿 있었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세력>이었던 <김병기><김문근>등등등....
<민씨 세도가>의 대표주자들 중에 대표격인 <민겸호>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등등....
이들이 이 산골짜기에서 근무한게 아니라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한양본부
수장이었기에 파견부대가 있던 이곳에도 공덕비를 세웠을 것입니다.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위치]
<북한산성> 축성을 총지휘한 승려 "성능"의 "영세불망비"도 있다고 해서
꼭 가보려고 했는데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으며 글도 알아 보기 어렵게 마모되 있어 더욱 찾기
어려웠으나 고생 고생하며 기어이 찾아 봤습니다.
앞으로 가실 후답자들은 이제 쉽게 찾아 갈수 있을 겁니다.
계곡 개천을 건너 가야 하는데 여름철엔 좀 어렵겠으나 오늘은 계곡이 얼어 건너기 쉬웠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용학사' 입구]
<용학사>로 올라 가는 입구가 있는데 여기서 뒤돌아 본 <산영루>입니다.
그러니까 <산영루>에서 조금 올라와 <용학사> 입구에서 우측 계곡을 바라보면...
['용학사 용왕당 공덕비']
<용학사용왕당공덕비>가 조그마하게 있는데, 계곡 건너편 바위로 가면....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都摠攝聖能永世不忘碑"
<성능 스님 영세불망비>는 바위에 새겨 놨더군요.
글자는 마모가 시작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고
이곳의 위치를 표시하는 표지판도 없어 모르고 가면 찾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축성 인력으로 승려를 동원하고, 축성 뒤에는 승려를 군인으로 삼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맡겼답니다. 이와 함께 <북한산성> 내에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를
새로 짓거나 보수해 <승군僧軍>이 주둔하는 <승영사찰僧營寺刹>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북한산성> 승군을 이끌고 <승영사찰>을 총괄했던 승군대장을 "총섭總攝"이라 했는데,
<성능>은 1711년 <팔도도총섭>의 직위를 맡아 이후 30년간 <중흥사>에 머물면서 370명 내외의
승군을 통솔하였다고 합니다. <팔도도총섭>은 우리나라 <승군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니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북한산성>을 알아 보려면 먼저 <팔도도총섭 성능 스님>을 생각해야 할 정도입니다.
['산영루' 조망]
<성능영세불망비>에서 내려 가며 바라보는 <산영루>입니다.
['중흥사' 입구 갈림길]
<산영루>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중흥사>입구를 만납니다.
['중흥사' 입구]
"중흥사 重興寺"
<북한산성>을 관리하고 승군을 지휘하던 총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으니 참고하고...
『北漢誌』에 의하면 <중흥사>는 본래 30여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북한산성>이 완성된 1715년 당시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세루' 조망]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조그마한 절이었던 <중흥사>는 고려말 "태고보우국사太古普遇國師"에 의해 중수되었답니다.
<태고보우국사>에 대해선 <태고사>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최영 장군>들이 이 분의 제자라고 하니 어떤 분인지 짐작 가죠?
['만세루' 밑 정문]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 대웅전' 옛 1902년 사진]
그동안 화재와 대홍수로 <중흥사>는 사라졌었습니다만
2012년에서야 <중흥사 대웅전>이 복원되었고, 2017년엔 <만세루>와 <전류전>이 복원되었답니다.
복원하는데 10여년이 걸린셈이죠. 다닐때마다 언제 완공되나 했는데 오늘 복원된 <중흥사>를
감격스럽게 만납니다.
['출토된 향로]
"중흥사 향로重興寺香爐" <현재 '강남구 봉은사' 보관>
이곳에서 출토된 <향로>인데 이 향로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하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献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將此功德用
祝皇帝萬歲國王千秋天下太平同願僉議政承蔡河中午山郡夫人梁氏徹明勸善比
"지정(至正) 4년(충혜왕 복위5, 1344) 5월에 은(銀)을 입힌 청동향로(靑銅香爐) 1좌(座)를
공경히 만들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의 부처님 앞에 봉헌(奉獻)하였다.
이 공덕(功德)에 힘입어 황제의 만수무강[皇帝萬歲]과 국왕의 장수[國王千秋] 및
천하가 태평[天下太平]하기를 기원하였다."
['종무소']
<대웅전> 좌측에는 종무소등 요사체가 있고
['도총섭 사령부']
[도총섭 집무실]
<대웅전> 우측에는 <성능 스님>이 기거하며 집무실로 사용하던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한 요사체가 복원되 있습니다.
['도총섭 집무실' 앞]
['도총섭 사령부' 옛 사진]
<북한산성 총사령부> 역활을 하던 곳이니 관련 부속실들이 있었을 것이고
<중흥사>와 별개로 <도총섭 집무실>로 직접 통하는 문이 별도로 있었다는 것을 옛 사진이 보여 줍니다.
['대남문' 방향]
['대남문' 갈림길]
<중흥사>를 둘러 보고 다시 주등산로로 나가면 다리를 하나 건너고
이어서 <태고사>와 <대남문>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오늘은 거리 대비 시간이 많이 걸려 여기서 답사를 마치고 하산합니다.
[뒤돌아 본 '중흥사']
주등산로로 나와 <중흥사>를 조망합니다.
<북한지>에는 이 근처에 "언룡교偃龍橋"라는 다리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래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과 <옛 사진>을 비교하며 추리해 봅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북한산 인수봉도']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 ~ 1759)>의 인수봉도仁壽峰圖
재질:비단에 수묵, 크기: 25x22cm -출처:마이아트옥션
이 그림은 2013년 11월에 경매에 나온 작품인데 그림의 이름이 “인수봉仁壽峰”입니다.
아마도 <백운대> 뒤에 우뚝한 바위봉우리에서 <인수봉>을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중흥사中興寺>와 중흥사 앞 계류의 <옛 항해루>가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노적봉露積峯>과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그린 것이라고 단언 할수
있는데, <겸재 정선 선생>은 중요 부분들을 나름대로 재배치해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그렸기에
<실경산수화>와는 구별해야 한다면 이 그림은 <중흥사>와 <노적봉>을 그린게 확실합니다.
그림의 하단에 <홍예교> 위에 작은 누각이 보이는데, <산영루>인지 분명치 않습니다만
<성능>의 <북한지>의 기록과 그림을 보면, 지금 복원된 산영루에 대하여 1717년(숙종 43년)
<언룡교偃龍橋> 위쪽에 2층 누각을 만들었고 이를 "항해루抗瀣樓라 하였으며,
이전의 <산영루>에 대하여는
"中興寺前 舊有小橋 覆以閣卽此樓 今毁”
“중흥사 앞에 옛날에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위에 지붕을 덮고 누각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 누각이였다. 지금은 헐리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제명은 <인수봉도仁壽峰圖>가 아니라 <노적봉도露積峯圖>로 불려야 하겠습니다
['중흥사' 옛 1902년 사진]
위의 <겸재 정선 선생>의 1600년대 그림과 1902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중흥사> 앞 집들은 "중창 中倉"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량의 곡식이 필요했기에 곡식을 비축하는 대규모 창고가 산성 내에 다섯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창지>는 <북한동역사관> 앞 부근이었으니 조금 전에 답사 했고
<중창지>가 이 곳이며 나머지 세곳은 앞으로 답사 예정입니다.
[내림길]
['중성문']
['북한동역사관' 앞]
['대서문']
['북한산성' 입구 삼거리]
다시 <북한산성 입구>로 회귀하여 귀가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km 정도였으며 5시간이 걸렸습니다.
* 참고문헌
1. <北漢誌> 성능 도총섭
2.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연구총서> 경기문화원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