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덕흥대원군묘-도솔봉-용굴암-학림사』
['산행 지도'] .
<당고개역>에서 <10-5번시내버스>를 타고 "덕릉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를 먼저 찾아 보고, "수락산 도솔봉"을 오르고, <도솔봉> 아래에 있는
"용굴암"을 들려 "명성왕후 도피처"를 보며 역사를 뒤돌아 봅니다.
그리고 "학림사"를 경유하여 <당고개역>으로 회귀하는 GPS 측정으로 약7km를 갑니다.
['덕능마을' 버스정류장] 11:04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
<당고개역>에서 이곳으로 운랭하는 시내버스는 <10-5번>과 <86-1번> 뿐인데
이 고개 아래로 <덕릉터널>이 뚫리고, <지하철 4호선>이 <진접>까지 연장되어
이 고개를 넘는 시내버스는 완전 줄어 들어 1시간에 한대 꼴로 다니니 매우 불편했습니다.
저는 <10-5번>을 오래 기다렸다가 타고 6~7분 걸려 <덕릉마을버스정류장>에 내렸습니다.
바로 뒤돌아 서면.....
['덕능고개' 방향]
버스를 타고 지나온 <덕릉고개> 방향으로 150m 정도 올라 갑니다.
['덕흥대원군묘' 입구] 11:07 .
<덕흥대원군묘>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나 50m 정도 들어 가면...
['하원군 신도비'] 11:08
이렇게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위에 "하원군 이정 신도비"가 보입니다.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가면 바로 <덕흥대원군묘>로 갈수 있더군요)
묘역 전체를 답사하려면 <하원군 신도비>로 올라 갔다가 우측으로 진행하면 되더군요.
['덕흥대원군 묘역'] 11:11 .
"경기도 기념물 제55호 덕흥대원군 묘역" 표지석이 있는데
앞에 보이는 묘는 <하원군묘>이고 <덕흥대원군묘>는 <하원군묘> 위에 있습니다.
['하원군 묘'] 11:12 .
"하원군 이정 묘 河原君 李珵 墓"
<덕흥대원군>은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하원군 이정>이며, 차남은 <하릉군 이인>이고
막내가 <임진왜란> 때에 왕이었던 <하성군 이균> "14대 왕 선조"입니다.
<하원군>의 부인은 <남양 홍씨>로 쌍분으로 조성되 있군요.
['덕흥대원군 신도비'] 11:14
<하원군묘>에서 위로 조금 올라 가면 "덕흥대원군 신도비 德興大院君神道碑"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 대원군> 중에 <초대 大院君>으로 <14대 선조>의 아버지의 신도비입니다.
<조선왕조 대원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면....
[대원군 관련 가계도]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예우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죠.
왜냐하면 모두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시험도 볼수 없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없는 '서자'가 왕위에 오른 후
권위와 정통성을 억지로 만든 제도가 <대원군 제도>였던 것입니다.
첫번째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며 이곳에 묘가 있습니다.
두번째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었는데, 이 분은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추존 원종>으로 만들어 대원군이라는 대열에서 벗어 났는데, 그의 무덤이 요즘 시끄러운
<김포시청> 뒤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문화재 문재가 불거진 "장릉"입니다.
세번째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군>이며 <포천>에 무덤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답사기 <경기옛길-경흥길 4코스>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네번째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이죠.
너무 유명해 <대원군>은 이 분 한사람인 줄 아는 분들이 많죠. ㅎ
<흥선대원군 묘>는 <남양주 마석역> 앞 건너편 동산에 묘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서리산-축령산 철죽과 흥선대원군묘 탐방기>를 참고 하세요.
요약하면 <조선시대 대원군>은 네명이었는데 <인조의 아버지-정원군>이 추존왕이 되어
결국 세명이 <대원군>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 <사도세자>도 왕이되지 못하고 죽은 <정조>의 아버지인데, <장조>로 추존되어 대원군 명단에는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세자>는 후궁에게서 태어 난게 아니라 정비에게서 태어나 대원군 얘기가
없는 것이고...위의 대원군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대원군이라 합니다.
['덕흥대원군 묘'] 11:15
[안내문]
"덕흥대원군 이초 德興大院君 李岹"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을 두고 20명의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계도를 보면...
['중종'의 가계도]
"덕흥군"은 윗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명의 자녀를 낳고 불행이도 고작 30세에 병으로 일찍 죽어서,
<인종><명종>이 아들을 못낳아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어부지리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아들 <선조>에
의해, 자기가 <대원군>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죠.
[조망]
<중종>의 서자 중에서도 최하위 정통성 없는 '서자'의 아들로 붕당정치세력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하성군 이균-선조>는 자기 아버지의 위상을 끌어 올리려고 엄청 수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리고 '서자' 출신 아버지의 아들인 <선조>는 컴플렉스가 쌓여 언제나 의심 많고 왕권 안위를
걱정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권위를 높여야 자기도 위상이 높아 지며 정통성이 생기니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의 '묘'부터 '왕의 묘'를 부를 때 쓰는 "릉 陵"으로 올려 부르도록
술수를 썼다고 전해져 옮니다. 기록으로도 전해져 옮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건 아닌데도, 그 술수가 성공하여 "덕릉"으로 불리워지게 되었고,
이 고개의 이름도 "덕묘 德墓고개"가 아닌 '왕릉'을 칭하는 "덕릉 德陵고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술수를 알려 드리면....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아버지 <덕흥군>의 <묘 墓>를 <릉 陵>의 수준으로 높이고 싶었으나
신하들은 끝내 불가하다는 대답 뿐 이었답니다. <릉 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븥일수 있죠?
<선조>는 할 수 없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고 대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믿을 만한 내시를 동문밖에 있는 가게로 내보내어, <별내면>에서 나무와 숯을 실은 수례를 끌고 오는
장사꾼에게 어디를 지나서 이곳까지 왔느냐 물어서 그가 “덕흥대원군의 '묘'를 지나서 왔다”고 하면
장사를 못하게 돌려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서 왔다"고 하면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후한 값으로 쳐 모두 사들여 주도록 하였답니다.
이 소문은 한 사람 두 사람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불길처럼 퍼져 나갔겠지요.
그리하여 사방에서 나무와 숯을 끌고 온 장사꾼들이 모두 덕흥대원군의 "릉"을 지나왔다고 떠들어 대니
정식으로 "릉 陵"이라 반포한 것보다 효과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저절로 이 묘소를 "덕릉 德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선조"를 효자라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에구~ 쪼다리라고 해야겠습니까
[등산로 입구] 11:17
<덕흥대원군묘>를 둘러 보고 <수락산> 등산을 시작합니다.
<덕흥대원군묘> 봉분 바로 뒤에 이렇게 길이 뚫려 있더군요.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수락산>으로 올라 가려면 <덕릉마을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 가서
<덕릉>의 원찰인 <흥국사>를 경유하여 진행해야 하는데, 많이 돌아야 해서
모르는 길이지만 지도를 보며 이 길로 진행 하는 것입니다.
[일반 묘역]
<덕흥대원군묘>에서 조금 올라 가면 아주 너른 묘지길을 만나며 이곳의 묘들은 일반인 묘들이더군요.
너른 묘지길을 따라 7분여 올라 가면...
[군부대] 11:24
군부대 철문을 만나는데, 지금부터 이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군부대 울타리]
이 부대는 예비군 훈련장인데 10여분 이 울타리를 따라 계곡을 오르내리며 올라 가면...
[군부대 울타리 끝지점] 11:34
군부대 울타리가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 가는 곳을 만나는데
울타리에 여러개의 사진촬영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울타리를 버리고 직진하면....
['덕릉고개' 등산로 만남] 11:35
<덕릉고개>에서 올라 오는 일반등산로를 만나며 이정표도 만납니다.
오늘이 가을의 정점을 이루는 좋은 날씨의 일요일이니 당연 등산객들도 많아 만나게 됩니다.
이 길은 <서울시-경기도 경계>가 되며, 또한 <수락지맥 마루금>이기도 하죠.
여기에 대해선 제가 예전에 쓴 산행기가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등산로]
['흥국사' 갈림길] 11:39
조금 올라 가면 "흥국사 갈림길"을 만납니다.
"흥국사 興國寺"는 <덕흥대원군묘>의 원찰이 되는 절이죠.
그러니까 <덕흥대원군묘>를 유지 관리하는 <묘지관리소> 역활을 하는 곳
[오름길]
제법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오름길을 15분여 오르면...
[쉼터] 11:44~11:55
첫번째 쉼터를 만나는데 10여분 쉬어 가고
[오름길]
다시 오름길을 7분여 더 오르면
['도솔봉' 조망] 12:02
조망이 트이는 쉼터봉우리에 올라 진행방향을 조망하고
능선길 <수락지맥-서울市界>를 따라 앞에 보이는 <송전탑>으로 10여분 진행합니다.
[송전탑] 12:12
[오름길]
<송전탑>을 지나 <372.6m봉>으로 올라 가면
[조망소] 12:14~12:17
전망이 좋은 바위 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하고 갑니다.
['당고개' 방향 조망]
먼저 남쪽으로 <덕릉고개>와 <불암산>이 <수락지맥>으로 이어져 있고
우측에는 <당고개역>이 있는 <상계동>이 펼쳐집니다.
['덕흥대원군묘' 방향 조망]
고개를 돌려 약간 동남쪽을 바라보면
출발지였던 <덕흥대원군묘> 부근이 조망되며,
<덕릉고개>엔 예비군훈련장이 있다는 것도 확인이 됩니다.
['남양주' 방향 조망]
동남쪽으로는 <별내신도시>가 펼쳐지며, <남양주시>를 감싸고 있는 <천마지맥>의 <천마산><백봉산>
<예봉산>이 보입니다. <검단산>은 <한강> 건너편에 있고...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으로는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도솔봉 정상>으로 오르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5여분 오르면...
['도솔봉 정상' 갈림길] 12:51
<도솔봉 정상 갈림길>을 만납니다. 정상까지 170m 거리라고 알려 주는데
오랜만에 왔으니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하고 좌측으로 4분여 올라 가면...
['도솔봉 정상'] 12:55
"수락산 도솔봉 538.5m"에 도착합니다.
<수락산>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죠.
[조망]
기암괴석들이 모여있는 <도솔봉>에서 남쪽을 조망하고
[정상 갈림길 회귀] 12:58
정상 갈림길로 다시 회귀하여, 좌측으로 조금 가면...
['수락산역' 방향 갈림길] 12:59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도솔봉 삼거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직진방향은 <수락산 정상>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수락산역> 방향으로가는 길이라고 안내합니다.
저는 오늘 <용굴암>을 찾아 가려고 하기에 좌측 <수락산역>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도솔봉 정상>을 우회하는 길이기도 한 가파른 내림길을 5분여 내려 가면...
[조망소] 1:05
조망이 좋은 곳을 만나는데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한산' '도봉산' 조망]
이제 <수락산>의 서쪽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 봉우리로 <三角山>이라 해던 <북한산>과 <도봉산>이 잘 보입니다.
['수락산' 정상 방향 조망]
북쪽도 잘 보이는데 <수락산 정상>과 <하강바위><코끼리바위>등이 잘 보이는군요.
[뒤돌아 본 '도솔봉']
뒤돌아 동쪽을 올려다 보면 조금전 <도솔봉 정상>이 보이고
['탱크바위']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탱크바위"가 있는데, 나무에 가려 전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잠시후 <용굴암>에서 다시 조망하고...
[내림길]
다시 내림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조망소] 1:16
또 다시 조망소를 지나고...
['용굴암' 갈림길] 1:17
이어서 이정표가 있는 "용굴암 갈림길"을 만납니다.
여기서 많은 산객들이 이용하는 <수락산역 등산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잠시 내려 가면...
[내림길]
<용굴암><당고개역> 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고,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 가면...
['관세음보살'] 1:20
<용굴암>의 <관세음보살> 앞을 지나
[내림길]
['용굴암'과 '탱크바위' 조망] 1:21
내림길을 잠시 내려 가면 <용굴암>과 조금전 언급했던 <탱크바위>가 조망됩니다.
['용굴암' 입구] 1:22~1:28
오늘 <용굴암>을 찾아 온 이유는 <임오군란> 때에 <명성왕후>가 도피 했던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명성왕후>가 도피 한곳은 앞에 보이는 <대웅전> 좌측에 있는 <자연동굴>이었다고 예습하고 왔으니
<대웅전> 좌측 <자연동굴>로 올라 갑니다.
['나한전']
<명성왕후>가 도피해서 숨어 7일 치성을 드린 곳이 바로 이곳 <자연동굴>이었는데
현재는 <나한전>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나한>은 <석가>의 제자들을 일컷죠.
['나한전' 내부]
<명성왕후-민자영>은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필사적으로 도망쳐 숨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고...
<명성왕후>는 <임오군란> 때에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고, 2년후 일어나는 <갑신정변> 때에
또 도피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로부터 11년후 <을미사변> 때엔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암살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던 <명성왕후>....
['용굴암' 안내문]
<용굴암 안내문>에는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황후께서 잠깐 숨어 있었던 곳"으로 알리고 있는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쓴 이런 안내문이 공공연하게 설치 되 있는데도 수정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제가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명성왕후>가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나 이곳으로 도피 한게 절대 아닙니다.
<임오군란>이 일어 나기 훨신 전에 <명성왕후>와 <고종>은 <대원군>을 정권에서 완전 밀어내
거의 감금 상태에 있어서 <명성왕후>를 밀어 낼 힘도 없었고 그럴 처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성왕후>와 <민씨외척세력>들의 부정부패로 1년 이상 봉급을 못 받은 구식군대들에게
13개월 만에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를 섞어 주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봉기하여
<민씨외척세력>들을 죽이며 최고 정점에 있던 <명성왕후>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던 때가 아니라 <명성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때 <임오군란>을 진화시키기 위해 <고종>이 자기 아버지 <대원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화 시켰죠. 그리하여 다시 <대원군>의 시대가 되었으나......
<고종>과 <명성왕후>는 <청나라>를 끌어 들여 33일만에 <대원군>을 무너 뜨리고 재집권하게 되었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 가고...그 후 우리나라는 쪽바리들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죠.
그러니 위 안내문은 잘못된 안내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용굴암'에서 조망]
<임오군란>과 <명성왕후>의 도피에 대해선
지난 <경기둘레길 37코스 명성왕후의 도피처-감곡매괴성당> 답사기에 언급 한바 있는데
다시 한번더 언급하면....
<순조><철종> 때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 보다 더 추악한 부정부패가 성행했던
"민씨 외척 세도정치 시대"의 정점에 <고종>과 <명성왕후>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선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성과 민란,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 세계 열강들이 <조선>을 잡아 먹을려고 어러렁거리는데
힘쎈 외국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정치자금이 필요 했던 <명성왕후 민자영>은
자신의 <민씨 외척 세력들>을 이용하여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정축제에 여념이 없었으니
터질게 터진 게 바로 <임오군란>이었죠.
<창덕궁>으로 총을 쏘며 들이 닥치는 구식군대들은 <민씨세력>의 우두머리인 <민태호>를 죽이고
<명성왕후 민자영>을 죽이기 위해 <창덕궁>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녔죠.
"36계의 여왕-민자영"은 먼저 현재의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자리 근처에 있던 <윤태준>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바로 <수락산 용굴암>으로 도피하여 며칠을 숨어 지내며 부처님에게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현재 <화양동사무소>가 있는 <화양정>을 통과하여 <광나루>로 가서 뱃싹이 없어 자신의 금반지를
주고 <한강>을 건너 <여주 민영휘>의 집으로 도피하고, 다시 <장호원(감곡)>에 있는
자신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아흔아홉칸 대궐같은 집으로 갔지요.
이런 집은 도피하는 <명성왕후>에겐 좋은 도피처가 아니죠.
그래서 <명성왕후>는 한 곳에 오래 머룰지 않았다는게 최근 발굴된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광주 치적리>에 있는 <임천구수 이근영>의 집으로 갔다가 <여주 단감 권삼주>의 집으로
옮기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충주 노은 이시일>의 집으로 옮겨 일주일 정도 기거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가 다시 <지평 섬실(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의 한정옥>의 집으로 옮기고
열흘 정도 머룰다가 다시 이곳 근처 <오봉학>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현 <감곡 매산마을>의 <민응식>의 집과 주변 집들에 머물 때에 그 유명한 "진령군-박창렬"이라는
이름도 남자 이름같은 여자 무속인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지는데 <삼국지>의 <관우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점쟁이였습니다.이 부분은 별도로 언급 하겠습니다.
또한 <명성왕후-민자영>은 도피 기간 중에 인후염, 부종, 말라리아에 걸려 엄청 고생하며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일기에 나와 있습니다만, 역경을 이겨 내고 "불사조"처럼 금의환궁 하게 되죠.
<명성왕후>에게 도피처를 마련해준 인물들은 후에 승승장구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윤태준>은 <명성왕후>의 <청나라 밀사>가 되어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여 <대원군>을 몰아 내는데
공을 세워 <명성왕후>가 환궁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때에 반군들의 칼과 철퇴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으며, <민응식>도 그 후 <고금도>로 유배당하고...
<명성왕후>의 51일간의 피난생활>은 다음을 참고 하세요.
"임오유월일기 壬午六月日記"여기 클릭
['소원의 종']
<용굴암> 앞 우측에는 <소원의 종>이라는 범종이 있는데 타종을 하는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화장실] 1:28
<용굴암>을 나서면 화장실이 있는데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삼거리] 1:37~1:47
<용굴암>에서 10여분 평지성 길을 진행하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학림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학림사 등산로>는 잘 조성되 있더군요.
17분 정도 내려 가면...
['학림사' 담장] 2:04
['학림사' 내부 조망]
['학림사 연혁' 안내문]
"학림사 鶴林寺"를 만나는데 매우 큰 사찰이더군요.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학림사 일주문' 앞'] 2:06
"학림사 鶴林寺" 일주문 앞에서 뒤돌아 본 <용굴암 가는 길>입니다.
<명성왕후>는 이 길을 따라 <용굴암>으로 도피 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명성왕후>는 다리에 부종이 생기고, 인후염까지 있어 건강상태가 매우 안좋았다는데
살기 위해선 당시엔 등산로도 없었을 이 험한 수락산을 죽기살기로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당시 그녀의 나이가 고작 31세 였는데....
['학림사' 입구] 2:07
<학림사>에서 <당고개역>까지는 포장도로였습니다.
조금 내려 가면...
['서울둘레길1코스'] 2:10
<서울둘레길 1코스>가 잠시 지나는 곳을 만나고....
['상계동'] 2:23
20여분 정도 더 내려 가면 <당고개역>에 도착하고....... 산행을 마침니다.
['고도표']
거리는 약7km로 3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산행이라기 보단 역사탐방이었습니다.
★ 부록 ★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3> 충주 백운암 여기 클릭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예천 금당실 솔숲에 숨은 근대사의 비밀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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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