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삶, 끝 없는 그리움』 [서울 종로]"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유적 답사기 낙산공원입구-비우당-청룡사 정업원-동망봉-동망정-여인시장-영도교 [구글맵] [구글어스] ['숭인동' 안내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낙산공원입구"에서 출발하여 "단종비 정순왕후 유적"을 따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을 둘러보고, "청계천 영도교"까지 약3.3km를 갑니다. ['낙산공원' 입구] 3:05~3:09 2020년 5월 19일 (화) 맑음 구름 조금 [6호선 창신역 4번출구]에 내려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3번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좁은 마을길을 잠시 올라 [한양성곽]에 있는 "낙산공원 입구"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3번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신쌍용아파츠2단지' 조망] [낙산공원]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낙산길]을 따라 먼저 "비우당"을 찾아 갑니다. [비우당]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옆에 있으니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됩니다. 150m정도 직진하면... ['낙산삼거리 버스정류장'] 3:11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담에 붙어 있는 [낙산삼거리버스정류장] 옆에 [비우당]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길안내를 합니다. 200m 정도 아파트 담을 따라 가면...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앞]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 3:15 '창신쌍용아파트2단지 정문'을 만나는데 [비우당]은 아파트 정문 옆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내림길] ['비우당'] 3:17~3:22 3~40m 정도 내려 가면 초가집을 하나 만나는데, 이 초가집이 "비우당 庇雨堂"이더군요. 건너편에 보이는 절간은 [원각사]라는 절인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최근에 지은 절이었습니다. ['비우당' 안내문] "비우당 庇雨堂"에 대해선 위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파란문'은 "지봉 이수광선생 芝峯 李睟光"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선진외국문물을 깊이 있게 습득했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켜서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게 되었답니다. ['비우당'] ['지봉 이수광'의 글] "지봉유설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죠. 우리나라 문화 문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까지 망라하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지봉유설]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은듯 하죠? ㅎ 또한 청백리로 유명하다는건 이 집 만 봐도 알수 있죠? "비우당 庇雨堂"이라는 말의 뜻이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이 초가집은 원래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선생]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이 새서 우산을 받히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살까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는데 [지봉 이수광선생]에게 상속되어 개보수해서 "비우당 庇雨堂"이라 하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지동천'] "자지동천 紫芝洞泉" ^.^ 발음에 유의해야 하는데, 현재의 '창신동' 주변을 옛날엔 "자지동 紫芝洞"이라 했답니다. [자지 紫芝]는 '영지버섯'과 비슷한 버섯과에 속하는 버섯이랍니다. 자주색 물이 나온다고... 이 주변에 그런 버섯이 많이 자생했나본데,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로 빨래를 하니 빨래에 자주색 물이 들었답니다. 폐비가 되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순왕후]가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비단 등 천에 자주색 염색을 해주면 주변 여인들이 염색한 천을 내다 팔아 주고 채소 등 먹을거리를 담 너머로 던져 주곤하며 식생활을 이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그런 우물터라 유명해졌답니다. ['낙산길'] 3:24 ['명신초' 앞] 3:27 [비우당]과 [자지동천]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명신초등학교]와 [숭인교회]를 지나 우회전하여 잠시 더 내려 가면... ['청룡마트' 앞 사거리] 3:30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 [청룡사]와 [정업원터]를 보고 다시 이 사거리로 나와 앞에 보이는 [동망봉]으로 가야 합니다. ['청룡마트'에서 '청룡사' 조망] 3:31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룡마트]라는 가게가 있고 앞에 [청룡사]가 보입니다. ['청룡사'] 3:32~3:39 [대웅전] "삼각산 청룡사 三角山 靑龍寺"는 비구니 요람이라는데... 고려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낳은 [경순(慶順)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였으며, "세조 3년(1457)"에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출가하여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보낸 곳이어서 우리에겐 "한 많은 장소"로 알려져 있지요. ['우화루'] "우화루 雨花樓" 1457년 6월 22일 (세조3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함께헸던 곳이라 하니 "雨花"라는 말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꽃비가 내리다..." ['단종실록' 1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단종실록]도 아니고 [노산군일기]라고 나옵니다. 비극의 시작인 그 첫장을 한번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정통(正統) 6년 신유년001) 7월 23일 정사(丁巳)에 나서 무진년002) 4월 초3일 무오(戊午)에 세종(世宗)이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년003) 8월에 문종(文宗)이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신미년004) 정월에 황제(皇帝)가 칙서[勅]로 봉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았다. 3년 임신년005) 5월 14일 병오(丙午)에 문종(文宗)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정업원'] "정업원 淨業院"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청룡사" 좌측 끝에 있습니다. "정업원 淨業院"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던 곳을 의미 한답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고려 공민왕]의 "惠妃"가 폐위되어 머리 빡빡 깍고 중이 되어 산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낳은 2남1녀 중에 아들 [방번]과 [방석]이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기와 비구니로 살았고 아시다시피 [단종]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어 외롭게 한많은 삶을 산 곳이기도 하죠. ['정업원'] "前峯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 어천만년"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 - 조선 21대왕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친필 - ['정업원구기']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정업원 옛터' 신묘년(1771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떠나간지 170여년이 흐른후 [영조]가 찾아와 이곳이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친필로 세우고 그들의 넋을 기렸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13살 때에 14살의 [정순왕후]가 간택되어 부부가 되었지요. [정순왕후]를 [단종]의 王妃로 간택되도록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수양대군-세조]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단종]을 왕위에 앉힌지 1년만에 상왕으로 내밀고, 그후 2년만에 '영월'로 귀양 보내 죽여버렸죠. 졸지에 왕비에서 노비가 되어 궁궐에서 쫒겨난 [정순왕후]는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이곳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신숙주'는 요즘 같으면 '오거돈' 같은 놈 ~ ㅎ '코로나바이러스균'이 머물러 사는 곳을 "숙주 宿住"라고하죠? ㅎ 한자야 틀리지만 '신숙주'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같은 놈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ㅎ ['청룡마트' 앞 사거리] 3:40 [청룡사]와 [정업사터]를 돌아 보고 다시 [청룡마트] 앞 사거리로 돌아와 우회전 하면... ['동망봉' 조망] 3:41 [숭인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동망봉]이 조망됩니다. 좌측 너른 길로 올라 가면... ['숭인근린공원' 입구] 3:43 ['동망봉' 정상 입구] 3:45~3:51 "동망봉 정상 입구"에 도착합니다. ['숭인근린공원 안내도'] [숭인근린공원 안내도]를 숙지하고 [동망봉 정상석]을 찾아 올라 갑니다. ['동망봉' 정상 배드민튼장] [동망봉 정상]은 배드민튼장과 어린이 놀이 시설, 그리고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는데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주민들의 건강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동망봉 표지석' 위치] ['동망봉 표지석'] [동망봉 정상석]은 배드민튼장 우측 공원 둘레길에 있었습니다. "동망봉 東望峰 93.2m" [정순왕후]가 동쪽 '영월'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랍니다. 1771년 [영조]가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정순왕후]와 [단종]의 넋을 기리며 이 근처 바위에 "東望峰"이라는 친필을 새겼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낙산'과 이곳 "동망봉' 주변을 채석장으로 만들어 그 글씨는 없어졌다고... 제가 알기로는 쪽바리들이 여기서 채석한 돌로 '조선총독부'와 '서울역' 등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안내판] ['정순왕후'의 일대기]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만화로 만들어 놧습니다. 제가 읽기 쉽게 하나 하나 확대 편집해서 올렸으니 한번 읽어 보고 가세요~~ ㅎ ['아차산' 조망] 3:52 [동망봉] 정상에서 내려 가면 [아차산] [용마산]이 조망되는데...'영월'은 어디매뇨~ ['동망각']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동망각]과 쉼터 정자가 있는데 [영조]의 친필을 각인한 "東望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군요. [공원길] ['숭인제'] ['유아숲 체험장'] "숭인근린공원"은 주민들을 위해 예상보다 잘 조성된 근린공원이었습니다. '달동네'라고만 알고 있었던 '창신동'과 '숭인동'이었는데 그런 관념을 깨주는 공원이엇습니다. ['동망봉 북카페'] 3:57 [동망봉]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이어서 내려가면 다시 배드민튼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있고 특히 [동망봉 북카페]가 눈길을 끕니다. 들어 가 봤더니 비치된 책도 많고 몇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동망정'] 4:00 [안내문] "동망정 東望亭"은 근간에 공원을 조성하며 만든 정자라고 합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진정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그녀는 1440년에 태어나서 15살이 되던 해인 1454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定順王后"가 된거죠. 1년 정도 왕비로 살다가 [단종]이 上王으로 밀려나니 그녀는 "의덕왕대비 懿德王大妃"가 되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에 '왕비' '대비'까지 역임했으며, 그리곤 폐서인이 되어 '노비'로 떨어졌지요. 최단 초고속 변화였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그녀는 무지무지 오래 장수했습니다. '1521년 7월 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나이가 82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엄청 장수 한거죠. 더 실감나게 풀어 드릴까요? ㅎ 그녀는 '1440년'에 탄생했으니 그때가 [세종대왕]이 즉위 22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장남이며 자신의 시아버지인 [문종]이 1450년에 즉위하였으나 일찍 죽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지배하다가, 1468년에 [예종]이 왕이 되고, 또다시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1494년엔 [연산군]이...그리고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즉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인 "1521년 7월7일"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권력찬탈과 쿠데타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산것입니까?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세종대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시대까지 여덟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렁다면 그녀는 과연 불행한 인생이었을까... 구중궁궐 권력암투 속에서 골치 아프게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오래 살수 있었을까.... '파란문'은 [정순왕후]의 인생을 비록 과부로 살았지만 장수했으니 그렇게 슬프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래 오래 살수 있다면 그까짓 '왕비'에서 과부가 되더라도 뭔일 있겠습니까? ㅎ 권력을 쥐려고 피비린내 나게 형제 자매 죽이며 살면 뭐합니까. 허무하게 일찍 죽는걸.... ['영월 방향' 조망] [정순왕후]가 첫사랑 [단종]을 애타게 기다리며 돌아 오길 기원하던 동쪽 '영월' 방향엔 마천루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애절함은 느낄수 없고... ['한양성' 조망] 서쪽으로는 [한양성곽]이 "낙산"을 자나가고 있는데 [한양성곽]을 이루는 [인왕산]이 조망되며 그 뒤로 [안산]도 보이는군요.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은 바로 [한양성곽]과 거의 붙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가 왕비로 살던 [경복궁][창경궁]이 몇km도 않되는 너무도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았으니 그녀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비극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찾아 보기 위해서 여기서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좀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을 꼽으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세종대왕]을 꼽지요? 하지만 행복한듯 보이는 "세종대왕"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입니다. 왜냐구요? 지금부터 '세종대왕'의 어두운 사생활 부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식 福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와 아들을 여덟명이나 생산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집안과 유사한 처참한 집안입니다. 형제들 끼리 싸우고 죽이고...권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게 없는 이런 자식을 자식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형제들과 조카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도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했죠? 또한 '소헌왕후'의 친아버지, 즉 '세종대왕'의 장인까지 없는 죄를 뒤집어 쒸어 죽여버렸죠. 그가 '심온선생' "태종 이방원"이의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그런 나쁜 아들 "이방원"이를 죽일려고 수없이 시도했죠. '살인마들의 집안'이라고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는 먼저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다복하다는 것은 이런 집안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둘째, 며느리 福도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식 福'이라곤 쥐뿔도 없는 불행한 아버지였는데 거기다가 '며느리 福'까지도 지지리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세자빈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려고 '압승술'을 하다가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고...'압승술'은 남편의 성적욕구를 높이기 위한 미신행위였습니다. 뒤이어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자, 알콜 중독자였기에 쫓겨났습니다.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밤에 독수공방 시켰기에 성욕을 해결 못해 궁녀들과 레스비안을 즐긴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을 하는 등 '미친년'으로 또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요즘같으면 남편 구실 못하는 [문종]이 위자료 주고 이혼 해 줘야 하는데...ㅎ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만 해도 '며느리 복'은 정말 없는거죠? 셋째, 사위 福도 없었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위도 당연 많았는데 그 사위 복까지도 없었습니다. 한글창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하는 "정의공주"는 모두 아시죠? 우이동 근처 "연산군 묘" 건너편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안맹담"이라는 놈은 사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술을 무지 무지 무지 좋아해 요즘 말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사위인 "안맹담"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은 혼내 주기도 하며 극기야 술 함께 마시는 놈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끼리는 살인을 하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고, 사위는 알콜중독자이고....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훌륭하게 했습니다만, 자식들은 어쩔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넷째, 세종대왕 본인은 살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답니다.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하며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어 잠을 잘수도 없을 정도 였답니다. 여기에 후궁들만 다섯명이나 되었으니 상상하지 않아도 성생활은 문란 할수 밖에 없었을거고 이런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이런 와중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불행한 가정사, 건강문제를 딛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세종대왕" 聖君이 되었으니 그 아이로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동망정'에서 출구 방향] 4:03 [동망정]에서 [묘각사]로 내려 가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야만 합니다. [문종]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계유정란"을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이야기 중에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계속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세자빈', 즉 장차 王妃가 될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같은 인간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세종대왕'의 며느리들 중에 첫째 아들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수양대군'은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며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계단 내림길] [골목 내림길] 제법 가파른 계단과 비탈진 달동네 골목을 7분 정도 내려 가면...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4:10 ['숭인근린공원' 출입구] [안심건강길]이라고 안내하는 [숭인근린공원] 출입구를 만나 우회전하고 ['묘각사'] 4:11 [뒤돌아 본 '묘각사'] 이어서 "낙산 묘각사 駱山 妙角寺"를 만납니다. 전통사찰은 아니고 1930년에 개산한 "대한불교 관음종 총본산"이라고 하며 템플스테이가 좀 알려져 있는듯... [골목길] 골목길을 4분 정도 진행하는데 新舊가 비교되는군요. ['묘각사' 입구] 4:15 [뒤돌아 본 '묘각사' 입구] [1호선지하철]이 다니는 [종로]를 만납니다. [묘각사]와 [동망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동묘' 조망] 길을 건너 건너편에 보이는 [동묘]로 갑니다. ['벼룩시장'] 4:19 [동묘] 우측길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이 있죠. ['동묘' 정문] 4:21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후에 神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관우 關羽"만이 중국에서 神格化되어 지금도 중국사람들 상당수가 神으로 모시고있죠. 이곳의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로서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나라]가 [선조]에게 요구해 "관우 關羽"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을 건립했답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보수공사 중에 있습니다. ['옛 여인시장'] "옛 여인시장" [정순왕후]를 위해 주변 여인들이 [정순왕후]가 염색한 옷감 등을 내다 팔고 채소시장들을 열어 식재료를 공급하곤 했다는 남자는 출입을 금하는 禁男市場이었답니다. ['영도교'] 4:24 [안내문] "끝없는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 가는 영원한 이별...永渡僑" 우리들에겐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여러편의 영화로도 알려진 "端宗哀事"입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화양정"은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화양동'에 그 터가 현재도 남아 있지요.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보내고, 잠시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중량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살곶이교"를 건너 '화양동'의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원주'까지 이동하여, '원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4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청계천'] 4:25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며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며 '한양성' 안에 있는 유일한 개천이기도 하죠. 조선왕조 500년...27명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 중에 유일하게 힘 한번 못쓰고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라진 비운의 [단종 端宗]과 그의 비 [정순왕후]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새살림을 차리고 있으리라....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약3.3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 짧은 코스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수백년을 걸은 느낌이 드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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