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2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성균관' 주변 실트랙]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 터>와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최고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 <함춘원>과 <창경궁> 답사기"  에 이어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에 있는 <성균관>과 <흥덕사터><장면가옥>등을 갑니다.


  ['창경궁 월근문' 앞]               2:22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창경궁 월근문>에서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터>로 갑니다.


  ['국립어린이과학관']                    
  <창경궁 월근문> 바로 옆에는 <국립어린이과학관>이 있고.
  그 뒤에는 <서울특별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창경궁> 담장에 붙어 있더군요.
  도로를 따라 <어린이과학관>을 지나면...


  ['명륜동' 골목 입구']

  ['명륜동 골목길']                            
  <어린이과학관> 옆으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5~6분 진행하면....


  ['성균관 담장']                   2:30               
  <성균관> 담장을 만나는데, <창경궁 집춘문>을 다녀 오기 위해 여기로 왔습니다.
  사진에 표기한 [뜸들이다]라는 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음식점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집춘문' 입구]                    
  [뜸들이다]라는 음식점 옆 골목은 "막다른 길"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길 끝까지 올라 가야 합니다.
  골목 끝에 <창경궁 집춘문>이 보입니다. 


  [계단]

  ['집춘문']                     2:32                   
  "창경궁 집춘문 集春門"
  이 門은 일반인이나 관리들이 통용하는 문이 아니라,
  임금이 <성균관>내 <대성전(공자사당)>에 "작헌례"를 올릴 때 가기 위해 이용하던 문이랍니다.
  "작헌례"는 "능이나 사당을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말하는데 <문묘대제>라고 한답니다.
  <유교>를 국교로 나라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가 매우 중시하는 일이 <성균관 제례> 였으니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제례를 올리는 일은 국가의 큰 행사여서, 반드시 참석해야 했답니다.
  그런 "작헌례"를 위해 왕궁에서 가장 가까운 문과 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을 "거둥길"이라 한답니다.
  이 길이 100여년 동안 폐쇠 되 있어서 <종로구>는 <종묘>와 <창경궁>을 지나 <성균관>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도보 코스를 한번에 관광할 수 있도록 예산을 들여 "거둥길"을 2008년에 
  조성하였다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되고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제가 이 문을 기필코 찾은 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모시고 자문을 구했던 '비선실세'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은 것입니다. 임금이 거둥 할때 이용하던 문을 최근의 <최순실> 같은 '비선실세'였던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들었을 걸로 추정되어 그녀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함입니다.
  나라의 운명과 중대한 정책을 무속인의 예언에 의지한 <고종>과 <명성왕후>..특히 <명성왕후>....
  잠시후 <흥덕사 터>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대학' 정문]                    2:37                 
  <집춘문>에서 <성균관 문묘> 정문까지는 200m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도 사용되는 정문을 들어서면...



  ['하마비와 탕평비각']                2:38     
  <성균관> 정문에는 "탕평비 蕩平碑"가 세워져 있으며 <하마비>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을 손에 쥐려고 피터지게 싸우는 정치집단들....
  <탕평책>을 시행하여 좋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 <영조>가 1742년에 세운 碑라고 합니다.
  <영조>가 친필로 비각에 세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신삼문']                    2:39

  [안내문]                 
  "신삼문 神三門"
  "문묘 文廟"의 정문으로서 "성현들의 혼령이 드나드는 세칸짜리 문"이어서 <神三門>이라 하는데
  현재는 닽혀 있어서, <성균관 문묘>로 들어 가려면 <동삼문>을 이용해야 합니다.


  ['동삼문']                   2:4             
  <신삼문>에서 다시 교문 옆에 있는 <성균관웨딩홀>로 돌아 와 웨딩홀 앞에 있는 <동삼문>을 
  이용해야 <성균관> 안으로 들어가 구경 할수 있습니다.
  "동삼문 東三門"은 <어삼문 御三門>이라고도 하는데 임금이 드나드는 門'
  우측에 보이는 門은 <향문>으로 유생들이 드나드는 문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를 숙지하고 들어가야 관람이 용이합니다.
  건물수와 규모가 그렇게 많거나 크지 않아 꼼꼼이 둘러 볼수 있더군요.


  ['대성전']

  ['문묘'와 '석전대제' 안네문]                
  <동삼문>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가면
  "대성전 大成殿""문묘 文廟"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4호>
  <유교>의 창시자 <공자 孔子>와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 랍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릴 때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이 제례행사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하며 이 행사를 할때 연주하는 음악을
  "문묘제례악 文廟祭禮樂"이라고 하지요. 
  <세종실록>과 <악학괘범>에 실려 있으며 제사를 올리며 <성균관 유생>들의 입학축하식을 할때도
  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답니다. <중요 무형문화제 85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명륜당']

  ['명륜당' 내부]

  [안내문]                           
  "명륜당 明倫堂"
  "인간의 사회 윤리를 밝힌다"라는 의미의 <명륜당>은 <성균관>의 메인 강의실이라 할수 있겠죠.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 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에서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동재' 조망]

  ['대성전' 은행나무 조망]

  ['서재' 조망]                            
  <명륜당> 앞에는 유생들의 공부방이자 기숙사인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가 좌우에 20여칸씩 있고
  가운데엔 은행나무 두그루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성균관>의 살아 있는 역사랍니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에는 방 마다 각 4~6명씩 기거하며 공부했다는데, 환경이 열악해서
  부잣집 자재들은 빆으로 나가 <반촌 伴村>의 하숙집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대학 주변엔 하숙집 자취집이 번창했는데 특히 이곳 <명륜동(반촌)>은 
  <성균관 유생들>로 인해 엄청 북적거리는 곳이었답니다.
  

  ['존경각']

  ['향관청']                 
  <명륜당> 뒤로 나가면...
  "존경각 尊經閣 "과 "육일각 六一閣", "향관청 享官廳"등 부속 건물들이 있습니다.
  <명륜당> 우측 뒤에는 <존경각 尊經閣 >이 있는데 <성균관>의 <도서관>이었다고 하며
  그  우측 뒤에 있는 <육일각 六一閣>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이라 하며,
  <향관청 享官廳>은 문묘의 행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두는 곳이었다고


  ['비천당' 입구]                         
  <명륜당> 좌측 뒤에는 <비천당>으로 가는 문이 있는데 모르고 가면 놓치는 곳입니다.
  뒤로는 <성균관대학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문 밖으로 나가면



  ['비천당']                    
  "비천당 丕闡堂"이 있습니다.
  "丕闡大猷"라는 말에서 <송시열>이 따온 말이라는데 "큰 도를 크게 밝힌다"라는 뜻이라고...
  <클 비丕>와 <열 천闡>이라는 어려운 한자 이군요.
  이곳은 강의나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라고 합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 進士食堂"
  수백명의 유생들이 동시에 식사를 하는 식당이었답니다.
  밥 먹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 이 식당에 납품되는 식자재가 엄청 많아 여러 일들이 발생했다는데...
  <세조 4년> 실록에는 <성균관> 학생 200명이 1년간 소비하는 식량이 960석인데 
  <양현고>의 수입은 600석으로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짐작 할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양현고 터>에 가서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 관람을 마치고 나가면....


  ['성균관 컨벤웨딩홀' 정문]                3:14             
  <성균관>에서 운영하는 <성균관컨베션웨딩홀> 정문 앞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바로 <양현고 터 표지석>을 만납니다.
 

  ['양현고' 터 표지석]                    3:18               
  "양현고 터 養賢庫址"
  <성균관>의 유생들이 워낙 많았으니 매일 매일 식자재를 조달하는 일이 큰 문제여서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 기관이 <양현고>였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成均館>과 그 주변의 마을 <반촌 泮村>에 대해 알아 보면
  <반 泮>이란 글자는 <국립학교>라는 뜻으로, <반궁 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며 
  <반궁 泮宮>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 泮水>,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 泮村>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반민 泮民>이라 했답니다.
  특히 <성균관>에 납품하는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도살 납품하는 권한을 천민인 <반민 泮民>들이 갖게
  되면서 <반촌 泮村>은 富村이 되며 특권을 누리는 마을이 되었답니다.


  ['흥덕사 터' 답사 실트랙]                  
  <성균관 양현고터>에서 <흥덕사>가 있었던 <옛 보성고등학교>를 돌아 나오는 실트랙 지도입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옛 '보성고' 정문]                      3:23                  
  <양현고터>에서 <혜화동>방향 북쪽으로 5분 정도 진행하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을 만납니다.
  이 자리는 "옛 보성중고등학교 터"입니다만 그 이전엔 무지 중요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흥덕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며, <우암 송시열>이 집을 짓고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며
  <임오군란> 후에는 <북묘 北廟>라는 <관우 사당>이 <고종>에 의해 지어져, <진령군>이란 무당이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요즘의 <최순실>이 하던 국정농단을 일삼은 곳입니다.
 

  ['아이들극장']                  
  <옛 보성중고> 자리 한켠엔 <아이들극장>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골목을 따라 올라 가면....


  ['흥덕사' 터]

  ['흥덕사 터 표지석'과 '하마비']              3:26        
  "흥덕사 터 興德寺址"
  <흥덕사터>는 윗 지도의 <서울과학고>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자리인 <옛 보성중고> 자리에 
  엄청나게 큰 터를 차지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석은 골목에 세워놨군요.
  <태종1년(140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가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흥덕사>를 창건하게 하였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 절을 지어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며, 
  위로는 선조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자 이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열열한 불교 신봉자여서 언제나 <무학대사>를 멘토로 삼으며 함께 했죠.
  하지만 <흥덕사>는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운영하며 <불교>는 쇄퇴하는 가운데
  <연산군> 시절에는 '숭유억불 정책'이 극에 달하며 사원철폐령으로 완전 폐사 되어 사라 졌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우암 송시열>의 저택이 들어 서고
  <고종> 때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북묘 北廟>로 재 등장하고,
  그 이후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되고, 다시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되었다가 <보성중고등학교>가 되고 다시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로 변신했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 자리는 "흥덕사"라는 절이 있다가
  <고종>과 <명성왕후> 때에는 "북묘 北廟"가 설립되어 "진령군"이라는 무속인이 국정을 농단한
  곳으로 <최순실>이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국정농단 한것과 같이 <창경궁 집춘문>을 들락 거리며
  국정을 농단하며 <조선왕조>는 몰락 해 갔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이 지어준  "북묘 北廟""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최순실>보다 더했던 <진령군> 이야기"  여기 클릭
    "[北廟] 북묘묘정비 北廟廟庭碑  여기 클릭
 

  ['증주벽립']                      3:29

  ['증주벽립' 위치]

  ['송시열 집터' 안내문]                       
  <흥덕사 터 표지석>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증주벽립 曾朱壁立"이라는 암벽 각자를 만나며, 
  옆에는 "우암 송시열 집터"라고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의 집은 <흥덕사> 터에 지었기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면적이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조금전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에서 부터 
  뒷쪽 <북악산 자락 한양도성>까지 이 근처 계곡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옛날엔 <송시열>의 집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송동 宋洞"이라고 했답니다.
  이곳은 <송시열 집>의 뒷쪽 끝이라고 추정되는 <북악산 자락 한양성곽> 근처 입니다만
  완전 변모된 요즘에 표지석을 마땅히 세울 곳이 없어 그 흔적이 쪼끔이라도 남아 있는 곳에 세운듯....
  <송시열>은 이 바위에 앉아 경치를 즐기며 <증자 曾子>와 <주자 朱子>의 뜻을 높이 세우려 했을 테지만
  현재는 어느 빌라의 축대가 되어 화려했던 옛날을 곱씹으며 쓸쓸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도 무상하고 인생도 무상하단걸 느낌니다.
  <조선왕조실로>에 무려 3,000번 이상 이름이 등장하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곧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계속해서 <숙종> 때까지 장수하며 노론의 영수로 막강한 권세를 누린 <우암 송시열>.
  물론 <숙종> 때에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숙종>의 반감을 사서
  유배를 가고 그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 했지만 8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는 <大老>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는듯 합니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샛길]                       3:33

  ['한양도성' 쉼터]              3:36            
  <증자벽립 각자>에서 직진하여 샛길로 조금 올라 가면 <한양도성>을 바로 만납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한양성곽>이 뒷 담장이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성북동 별서' 조망]                   
  <한양도성>에서 <성북동>을 조망하면 먼저 "간송미술관"이 가까이 조망되고
  그뒤로 "성북동 별서"라고 표기 한곳이 <갑신정변> 때에 <명성왕후>가 피신 한 곳인데
  무속인 <진령군>이 거주하는 <혜화동> "북묘 北廟"로 먼저 피신했다가 
  다시 더 먼 곳으로 피신 한곳이 "성북동 별서"였답니다.
  <명성왕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를 죽이고 궁으로 쳐들어간 구식군대의 반란을 <임오군란>이라 하죠
  이때에 도피 한 곳은 <장호원>이었고....   36계의 명수인 <명성왕후>였습니다.
  이렇게 살해 위험에 시달리며 산 <명성왕후>여서 위혐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노출 한 적이 거의 없어
  사진이나 초상화 등 분명한 얼굴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얼굴이 알려지면 피살의 위험을 더 받기에...
  하지만 <을미사변> 때에는 쪽바리들의 칼부림에 결국은 시해 당했다고 합니다만,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과 러시아의 비밀외교문서에서 <명성왕후>는 그때도 또 도피해서 
  즉, <을미사변> 때에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도피해서 살아 있었다는게 밣혀지고 있습니다.


  ['한양성곽']

  ['혜화동-성북동 고개']                 3:46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 가면 <혜화동>과 <성북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만나는데
  이곳 <돈까스>가 유명하죠. ㅎㅎ


  ['경신고' '서울과학고' 사잇길]                
  <경신고>와 <서울과학고> 사잇길을 내려 가며


  ['서울과학고']                     
  <옛 송시열의 집터> 였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신임을 얻은 무속인 <진령군>이 국정농단을 하던
  "북묘 北廟"가 있었던 <옛 보성고> 자리에 <서울과학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曾朱壁立>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의 위치를 보면 <우암 송시열>의 저택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 보성고' 앞 로터리]                     3:51                   
  <흥덕사>와 <북묘>....<옛 보성고>가 있었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 로터리를 지나
  <혜화동 로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혜화초등학교']                  3:54                 
  "혜화초등학교"를 만납니다.
  이 초등학교 자리에는 원래 <혜화여고>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에 초등학교가 들어 섯답니다.
  <성균관>에 독점적으로 소를 도살하여 쇠고기를 납품하며 높은 소득으로 부자가 된 <반촌>의 
  <반민 泮民>들이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가 "숭정의숙"이었는데, 
  쇠고기 판매 금액 일부를 학교 운영비로 내놓으며 학교를 운영 했답니다.
  천민에서 벗어 나고자 교육을 장려했던게죠.
  <혜화초등학교>는 원래 <성균관> 옆에 있었던 <숭정의숙> 터에 세워 졌었는데 여기로 이전했다고
   

  ['장면 가옥' 조망]                      3:55

  ['장면 선생' 동상]

  ['장면 가옥' 정문]

  [안내문]                            
  <혜화조등학교> 건너편에는 "장면 총리 가옥"이 있습니다.
  주미 한국 대사-국무총리-부통령 등을 지냈는데,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였으니 당시 국무총리였던 그는 실제 대통령이었다 해도 되는 정치가이며, 
  대학 교수 출신이자 <동성상고> 교장등을 지낸 교육자였습니다.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주화>. <친일 논란>. <5.16쿠데타 방관>등에 대해 아직 정립 된바가 
  없어 제가 언급하기엔 부적절하여 생략합니다.


  ['혜화동 로터리']                  4:03            
  "혜화동 로터리"
  <조선중앙일보 사장>이기도 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테러 당한 곳이어서 맘 아픈 곳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 선생>은 우익의 <이승만>, 좌익의 <박헌영>,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등이
  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발로 뛰고 또 뛴 분이죠.
  테러리스트 <한지근>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미군정>과 결탁한 극우세력의 테러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직도 없습니다.
  <여운형 선생> 테러의 최고 수혜자는 누구? 김일성? 이승만? 미국?  
   1947년 7월 19일
  12번의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는데, 당시 <조선체육회장>이던 선생은
  <"IOC" 가입 축하 축구경기>가 열리는 <동대문운동장>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으로 부터 <민정장관(국무총리)>를 제안 받고 임명장 받으로 가다가 
  피살 당했으니....그리고 이어서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도 피살 당하고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세력을 잃고 사라지며 남북분단으로 가고 말았지요.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로, 좌익으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매도 당하면서도
  좌우익의 협력을 도모했던 <여운형 선생>은 2008년 2월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에 
  <대한민국장(독립운동 서훈 1급)>으로 추서되었습니다.


  ['혜화역3번 출입구']                4:12        
  <함춘원 터>와 <창경궁>, <성균관>과 <흥덕사 터>를 둘러 보고
  다시 <혜화역3번출입구>로 돌아 와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10.5km로 약4시간이 걸렸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을 답사하고 한번 쓴 내용을 한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성균관과 유교문화』에 대한 생각.....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에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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