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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1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과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는 <연건동>과 <창경궁>이고,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입니다.


  ['혜화역3번출구']              12:16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지난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답사를 하고 마친 <4호선 혜화역>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혜화역3번출구>에서 50m쯤 직진하면...


  ['서울의대 정문']                 12:17
  
  <서울대 의대 정문>을 만납니다.
  여기서 <경모궁 터>를 가기 위해선 학교로 들어가 우측으로 돌아 들어 갑니다.


  ['학교 내']
  
  <융합관> 앞으로 올라 가면...


  ['경모궁' 터']                     12:20
  
   "경모궁 景慕宮" 터
  좌측엔 <서울대병원 본관>이 있고 우측엔 <의과학관>이 있는데, 
  그 사이에  "경모궁 景慕宮" 터가 복원을 오래도록 기다리며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대부분이
  예전엔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 含春園"이라는 정원이었답니다.
  <인조> 때엔 <함춘원>의 절반 이상을 방목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는군요.
  현재는 이 지역을 <서울대 병원>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함춘원>에 설립했던 
  "경모궁 景慕宮" 터가 마지막 안간 힘을 쓰며 남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경모궁터' 1930년대 사진)
  
   "경모궁 景慕宮"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 자락에 <영우원>
   이라는 墓에 안장하고, 1764년 3월 1일 이곳에는 "수은묘 垂恩廟"라는 사당을 마련했는데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이름을 <경모궁 景慕宮>으로 격상하고 크게 중건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까지 남아 있었던 <경모궁>이 사진으로 그 규모를 알려 주며 <정조>의 효심을 알수 
   있게 해 줍니다.


  ['경모궁 터' 전경]                     12:26

  ['안내문']
  
  "경모궁 景慕宮"은 현재 정문만 남아 있을 뿐 일제강점기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라졌답니다
  "봄을 흠뻑 머금고 있다"는 "함춘원 含春園" 터에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서울대병원>이 자리하고
  있어 그나마 좀 위안이 됩니다.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병동터']               12:33
  
  <경모궁 景慕宮> 터에서 "서울대병원 본관"앞으로 나가면
  <서울대병원>의 모태인 "대한의원 병동 터"가 유물로 남아 있는데
  그 동안 관심없이 스쳐 지나 다니다가 이번에 관심을 갖고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안내문에 "설립자:대한제국(고종황제)"라는 글귀가 새삼스럽군요. 국립 병원이란 의미겠죠?


  ['대한의원' (현 의학박물관}]                 12:37

  [안내문]
  
  "대한의원"
  조선시대의 <광혜원><광제원>등의 의료기관의 맥을 잇는 근대 의학의 효시로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지는 국립의료기관이었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이 건물은 건축학적 史料로도 중요헤서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지석영 선생' 동상]
  
  <대한의원> 앞에는 "지석영 선생 동상"이 눈길을 끕니다.


  ['원남동 로터리']                       12:43
  
  <함춘원>이 있었던 자리에 설립된 <경모궁>과 <서울대의대병원>을 둘러 보고
  서남쪽 문으로 나가면 <원남동 로터리>를 만나며 <창경궁>이 건너편에 보입니다.
  <원남동 苑南洞>은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의 횡포가 마을 이름에서도 남아 있는 곳이죠.
  <창경궁>을 희화화 해서 <동물원.식물원>등으로 개조해 <창경원>으로 만들고
  동네 이름도 <창경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원남동 苑南洞>이라 하고, 
  <창경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은 <원서동 苑西洞>으로 바꾸었죠.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바꾸자고 기안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쪽바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서로 뒤질세라 앞장서서 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게 합니다.



  ['선인문']                    12:44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가는 길에 "선인문 宣人門"이 먼저 보입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너무나 많은 역사 인물들이 살아서 또는 죽어서 나간 門이기 때문이죠.
  <선인문>은 <동궁(東宮)>의 정문으로서 조정의 신하들이 주로 출입하였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 <사도세자>등의 시체가 나간 문이라는데 잠시 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홍화문']                     12:47
  
  "홍화문 弘化門" <보물 제384호>
  "홍화 弘化"라는 단어의 뜻은 "조화를 넓힌다, 德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
  <조선왕조>의 궁궐 대문 중에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정문이랍니다.
  그 이유는 <왕의 거처>가 아니라 <왕비의 거처>로 만들어진 궁궐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정치를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왕이 <영조>이죠.


  ['창경궁' 안내문]

  [안내도]
  
  수많은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중요한 건물들만 복원되 있는 <창경궁>입니다.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해 있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답니다. 그 이후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창경궁>으로 재탄생 되었답니다.


  ['옥천교'와 '명정문']                   12:51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옥천교 玉川橋"를 만나며, 이어 "명정문 明政門"이 기다립니다.
  다른 궁궐에서는 "금천교 禁川橋"라고 하여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창경궁>은 왕비들이 주로 거처했기에, 좀 이쁜 이름인 "옥구슬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곳 다리라고 
  "玉川橋"라 한듯합니다. <보물 제386호>


  ['외행각' 안내도]

  [안내문]
   
  <영조>는 <균역밥> 시행에 앞서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과 만났다고...
  

  ['玉川']
  
  <옥천교> 위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천>을 조망하고 갑니다.


  ['명전전' 앞 박석마당]

  ['명정전']
  
  "명정전 明政殿"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법전 法殿"입니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죠.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 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 <광해군>이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正殿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랍니다.. 국보로 지정 되었고...


  ['명정전 어좌']

  ['명정전' 앞 '내행각']
  
  품계석이 나열되 있는 <명정전> 앞 마당입니다. 
  이곳에서 치뤄진 기억에 남는 제일 유명한 행사는 
  66세의 <영조>가 15살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식이 1759년(영조35) 6월에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어, 현대에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재현된 장소여서 더욱 유명해졌지요..
  이 결혼식으로 졸지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할머니가 된 15살의 어린 소녀 <정순왕후>....
  그러니까 <정순왕후>는 아들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적은 엄마가 되고, 
  손자가 되는 <정조>보다 7살 많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죠.
  그 이후 <정순왕후>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흘러 가며 <조선왕조>는 멸망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정전' 뒷문]
  
  <명정전>에서 좌측으로 돌아 가면 "문정전 文政殿"이 <명정전>과 연결되 있고


  ['숭문당']

  ['빈양문']                  
  
  <명정전>에서 내전으로 통하는 <빈양문 賓陽門> 옆에는 "숭문당 崇文堂"이 있습니다.
  국왕이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도 한 곳이랍니다.
 

  ['문정전' 내부]

  ['문정전']
  
  "문정전 文政殿" 
  <사도세자>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을 내리는 역사의 현장이라 별도로 언급하기로 하고
 

  ['문정전' 일원 안내도]
            
    ['동궐도'의 '문정전']

  [안내문]
  
  <문정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영화 '사도' 포스터]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화를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수 없지만 <영화 '사도'>는 그런데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 했다는 평가가 내려졌는지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였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직접 뚜껑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장면인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조금전에 지나온 <명정전> 앞 마당 답도 앞에서 촬영을 했습니다만
  역사에는 이곳 <문정전> 앞에서 행해 졌답니다.
  아들에게 칼을 주고 스스로 자결하라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애원으로 실패하자 
  뒤주에 가둬 죽였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쳐 죽어 갈때 아들인 왕세손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세손의 애원도 무시하고, 뒤주는 잠시후 찾아 볼 <선인문> 근처로 옮겨져 
  8일간이나 접근 금지로 방치 된채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죽었습니다.
  아들까지 죽이며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영조>는 그후 고작 13년 더 살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조선왕조 최장수 왕으로 82세까지 살았으니...
  노망 들어 가는 <영조>가 죽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며 복수에 나섯지요.
  <영조>의 후계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계라는 선언은 정적들의 가슴을 써늘하게 한 것이죠
 

  [뒤돌아 본 '문정전']
  
  <문정전>을 나와 뒤돌아 본 <문정전>입니다.
  <사도세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듯 하며, 어린 <정조>의 입술 깨무는 역사의 현장이 연상 됩니다.


  ['관천대' 조망]                   1:06
  
  <문정전> 앞에는 "관천대"가 보입니다.
  <관천대>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동궁전>이 있었고, 좌측에는 <궐내각사>가 있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엔 이곳에 <동물원>을 만들어 왕궁을 놀이터로 전락시켜 희화화했죠.
  우측으로 조금 가면...


  ['동궁' 일원]

  ['동궐도'의 '동궁 일원']
            
                ['동궁' 위치도]
  
  이 주변이 "동궁 터 일원"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세자>가 거처하며 13년간 대리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한 곳이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장희빈>이 <왕비>에서 강등 당해 <희빈>으로 머물던 <취선당>이
  <동궁> 근처였다는데 확실한 위치는 알수 없답니다.
  그 유명한 <취선당> 저주 사건.... <취선당>에 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죽기를 
  빌었다는 곳이 바로 이 근처 <취선당>이였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장희빈>의 저주로 <인현왕후>가 죽은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표독한 악녀 <장희빈>이라는 여인에 대해선 실록에 기록이 제법 많습니다.
  <장옥정 (훗날 희빈장씨禧嬪 張氏)>는 1659년 음력 9월 9일 
  '한성부 연은방(현재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역관으로 중인 출신 집안이였으나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 만큼 막대한 재산가였으니,
  그 부가 막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권력까지 누릴 수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수백억대의 자산가 집안의 막내 딸이였습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에 "역관 <장현>은 國中의 巨富다."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장옥정>은 <숙종(1661년)>보다는 2살 연상의 여인이였고 
  피비린내 나는 왕비 쟁탈전을 벌인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년)>와는 무려 8살이 많은 
  나이로 나이 차이가 컷습니다.
  "장옥정의 미모"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의 외모'를 언급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고 딱 한번 나타나는데
  바로 <숙종>이 <장옥정>을 보고 한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숙종 13년 6월 16일>에 기록 된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말한 것이 유일무이합니다.
  그 이후에도 <장옥정>의 미모를 조심하라는 서인들의 견제가 담긴 상소가 여러번이나 올라 갔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장옥정>의 미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현왕후 저주사건>에 연루되 <취선당>에서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고 죽어 사라졌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죽을 때 오만 발악을 하며 사약을 받지 않았다고 묘사 되지만
  실록에는 <숙종 27년 (1701년 10월 8일)>에 "장씨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틀 후 <숙종 27년(1701년 10월 10일)>엔 "임금이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다고 하교했다"
  <숙종실록>에 "<희빈 장씨>가 자진하였다"라고 기록되고 더 이상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 많은 드라마들 처럼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오만 발악을 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을 메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정적들이 쓴 <사씨남정기>등 야사에는
  <장희빈>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로 그녀를 악녀로 표현 했다고 보는 것이죠.



  ['관천대']                     1:10
  
  "관천대" <보물 제851호>
  요즘으로 보면 <천문대> 역활을 한 곳이고, 
  이 근처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었답니다.


  ['관천대'에서 '문정전' 조망]
  
  <관천대>에서 역사의 현장인 <문정전>을 조망하고 우측 <선인문> 방향으로 나가면



  ['궐내각사' 터]
  
  대궐 내에 있었던 여러 행정기관인 <궐내각사>가 빼곡히 있었던 자리가 펼쳐집니다만
  그런 <궐내각사>는 오간데 없고 그저 쪽바리들이 만든 <옛 동물원>이 떠 오릅니다.
  이곳에 있던 <동물원>은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1983년 10월에 옮겼답니다.
  

  ['선인문']                      1:14
  
  <궐내각사>와 <동물원>이 있었던 숲을 지나면 "선인문 宣仁門"을 만납니다.
  <배풀 宣> <어질 仁>자를 사용하는 門.
  하지만 이 문은 <창경궁>에서 일어난 비극을 모두 목격한 門이랍니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쫒겨나 추방 당한 門이며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그의 세자빈인 <세자빈 강씨>가 그의 아들인 세손 셋을 데리고
  영문도 모른체 궐밖으로 내쳐져 <제주도>로 귀양을 간 門이며
  미모로 왕을 사로 잡고 무술이에서 왕비까지 올랐던 <장희빈>이 죽어 시신이 나간 門이며....



  ['회화나무']
  
  <선인문 宣仁門> 앞에는 400여년 동안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지켜본 <회화나무>가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비틀며 땅바닦으로 주저 앉을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나
  인간들이 떠받쳐 주며 보호하고 있어 어쩐지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회화나무>가 목격한 사건 중에 가장 처절 했을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가 이 門 근처에서
  뒤주에 갇쳐 오뉴월 땡볕을 맞으며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8일간 사투를 벌이다 죽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애절 하게 느껴 집니다.
   

  ['문정문']

  ['빈양문']                 1:22
  
  <선인문>에서 다시 <문정전>으로 돌아와 "빈양문 賓陽門"을 통과해 내전으로 들어 갑니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
  정치행위를 하는 政殿에서 사생활 영역인 내전으로 통하는 門이랍니다.


  ['창경궁 내전']
  
  <빈양문>을 통과하면 내전이 펼쳐지는데


  ['함인정']

  [안내문]
  
  먼저 "함인정 含仁亭"을 만나는데 임금과 신하가 소통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데
  <영조>가 과거 급제자들에게 하사주를 내린 곳으로 기록에 나와 있고


  ['환경전']
  
  <함인정> 뒤편엔 "환경전 歡慶殿"이 있습니다.
  이곳은 국왕이 주로 생활하던 침전이라는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중종>이 이곳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내의녀였던 유명한 <대장금>이 진료와 간호를 했다고 
  드라마에 나오는데, 실제 <중종>은 <대장금>을 신뢰하여 자신의 진료와 대비전 동궁전까지도 
  진료를 의뢰하고 그 공로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아버지 <인조>와 장남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세손>들의 죽음에 대해선 
  다른 답사기에서 여러번 언급 했기에 생략하고.


  ['환경전'에서 바라보는 '경춘전']
  
  "경춘전 景春殿"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으로 주로 대비들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왕의 침전인 <환경전>을 대비의 침전인 <경춘전>이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게 특이합니다.
  <경춘전 景春殿>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다고 하며,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 하였답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는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환경전'과 '경춘전' 안내문]
  
  <환경전>과 <경춘전>에 대한 공식 안내문을 참고 하고
  뒤로 나가면...


  ['영춘헌'과 '집복헌']


  [안내문]
  
  "영춘헌 迎春軒"과 "집복헌 集福軒"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면서,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기도
  한데,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다가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11년1월)에 <사도세자>가 태어 나고, 
  1790년(정조14년6월)에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정조>가 무척 아끼고 사랑한 후궁인 <수빈 박씨>가 이곳에 거처하며 낳은 유일한 아들이 
  <순조>여서 <정조>는 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를 <휘경원>에 모셔 그곳에  잠들게 하고 있죠.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 암반]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에는 독특한 암반이 있고, 그 뒤로 계단은 후원으로 가는 길인데
  계단 윗 자리에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 준 곳이라고
 

  ['통명전'과 '양화당']

  [안내도]

  [안내문]
  
  "통명전 通明殿"과 "양화당 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데...


  ['양화당']
  
  "양화당 養和堂"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양화당>은 옆에 있는 <통명전>의 내전이었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로 도망 갔던 <선조>는 돌아 와 보니 <경복궁>은 불타 없어져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거쳐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어서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결국 항복을 하고 돌아와
  장기간 생활 한 곳이 바로 이곳 <양화당>이었답니다. 또한 이곳에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했다고
  쪽바리들에게 깨지고, 때놈들 한테 피터지면서도 살아 남아 백성들의 세금을 축낸 인간들의 
  모습이 어슬렁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통명전']
  
   "통명전 通明殿" <보물 제816호>
   "통달하여 밝다"라는 의미의 <통명전>은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그 동안 수많은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 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에는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게 특징이며
   앞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연회나 의례를 할수 있도록 해서 왕실 내전의 각종 행사를 했답니다.
   <명정전> 앞 마당이 정치적 행사를 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왕실 내전의 행사를 하던 곳이란 걸 알수
   있으니 <창경궁>의 최고 내전 임이 틀림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인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인현왕후>가 결국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옥정>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 꼭두각시>에 화살을 쏘고
   이곳 <통명전> 일대에 <꼭두각시와 동물 사체>등 흉물을 파묻고 저주를 하며 죽기를 기원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답사를 하면 답사하는 재미가 배가 될 것입니다.
   "<장희빈>의 <인형왕후> 저주사건"으로 <인현왕후>가 실제 저주를 받아 죽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현왕후>는 원래 약골이어서 아기도 낳지 못하며 여러 병을 앓고 
   있었다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2,000여번이나 언급 되 있고, 
   병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450번 정도 언급 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인현왕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관절 부근 환도 혈>에 종기가 심해 고름이 
   나오고, 그 종기가 다른 곳에 번져 <복막염>으로 이어지고 복통, 설사, 구토등으로 1년반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저승으로 갔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의학적 사망 원인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인현왕후>는 <숙종>에 의해 강제 이혼 당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어려운 서민 생활을 하며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마무시 했답니다.
   5년간의 폐서인 생활 후 <갑술환국>으로 환궁 혰을 때엔 이미 몸과 마음도 폐인이 되다시피 
   된 상태 였다니....
   <장희빈>은 그러한 낌새를 알고 <인현왕후>의 병세를 보며 저주를 퍼부었었고, 
   그 저주가 우연히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었으나, 
   저주에 의해 <인현왕후>가 죽었다고 믿는 분은 없겠지요? ^*^


  ['蓮池']
  
  <통명전> 옆에는 "열천 冽泉"이라는 샘과 "연지 蓮池"라는 연못이 있어
  여인들의 공간 다웁게 예쁘게 정원을 만들어 놨습니다.
  <열천 冽泉>에서 매우 찬 물이 흘러 나왔나 본데, 
  기록에는 <영조>가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였다고 


  ['함양문' 조망]
  
  <통명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蓮池> 뒤로 <함양문>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함양문>으로 올라 가면...


  ['함양문']                   1:37
  
  "함양문 咸陽門"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門으로 현재는 별도의 입장권을 구매 해야 통과 할수 있고


  ['통명전' 뒷길]

  ['자경전' 터]                    1:38

  [안내문]
  
  <함양문>에서 <통명전> 뒷길을 조금 걸으면 "자경전 터 慈慶殿址"를 만납니다.
  <정조>는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이곳에 내전을 지어 주었는데
  조금 전에 들렸던 <서울의대> 안에 있던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마주하며 매일 바라 볼수
  있도록 이곳 높은 곳에 동향으로 지었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정조>가 이곳에 <자경원>을 세운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아내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수수방관 했다고 느낀 <정조>는
  지금이라도 매일 <사도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며 반성하라고 이곳에 지어 준게 아닐까?라고 추측...
  여하튼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며 어머니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고 알고 있었으니....
  하여튼 <혜경궁 홍씨>는 여기서 그의 자서전이라 할수 있는 "한중록 閑中錄"을 썻답니다.
  <한중록 閑中錄>은 '한가한 시간에 쓴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태어나서 어린시절과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50여년간의 궁중생활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선 차마 얘기 할수 없다고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죠.


  ['창경궁 내전' 조망]
  
  <자경전>이 있었던 곳에서 바라보는 남쪽 <창경궁 내전>입니다.
  이렇게 내전이 전체적으로 조망 되는 곳은 이곳 뿐이랍니다.
  <남산>이 바로 조망되는군요
   
          

  [안내문]                 1:41
  
  "풍기대 風旗臺"는 <보물 제846호>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는 거고
  "앙부일구 仰釜日晷"는 <보물 제845호>로 "해시계"


  ['성종 태실' 조망]



  ['성종 태실'과 안내문]              1:45
  
  <풍기대>에서 북쪽으로 잠시 가면 좌측에 "성종 태실과 태실비"가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나와 있고



  ['내전 터' 일원]                    1:48
  
  <성종 태실>에서 동산을 내려 가면 <내전 터 일원>이 있는데 
  수많은 궁녀들이 거쳐 했을 내전은 없고, 숲만 우거져 있습니다.


  ['춘당지' 앞]                   1:49
  
  <춘당지>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여기서 우측에 있는 "월근문"을 다녀와 <춘당지>로 갑니다.


  ['월근문' 입구]

  ['월근문']               1:51
  
  "월근문 月覲門"은 <창경궁 관리사무소> 앞에 있더군요.
  孝子인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廟)인 건너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3년)에 건립하였는데,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 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답니다.



  [안내문]                    
  
  "춘당지 春塘池"
  안내문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춘당지' 전경]                  1:54
  
 이곳의  "대 춘당지 大春塘池"는 원래 연못이 아니라 논이었답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하며 체험 할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위로 케이블카를 설치한 유락시설로 만들어
 완전히 놀이터로 만들었죠. 제가 국민학교 시절 소풍을 이곳으로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많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칠층석탑' 조망]
  
  <춘당지> 가운데에 있는 섬은 옛날엔 없었고 
  겨울이면 이곳이 스케이트장이 되어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던 기억이 먼저 떠 오르는군요.
   


  ['팔각칠층석탑']                  1:56
  
  안내문을 참고 하고 조금 더 올라 가면...
   

  ['대온실']                      1:57
  
  "대온실"을 만납니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쪽바리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답니다. 쪽바리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2004년 우리나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관덕정' 앞 공터]                  1:58
  
  <대온실> 우측에 <관덕정>과 <집춘문>이 있어 다녀 옵니다.


  ['집춘문' 입구]
  
   <집춘문>으로 올라 가는 길 좌측에 <관덕정>이 보입니다.
   <관덕정>으로 올라 가면....
    

  ['관덕정']

  [안내문]
  
  임금이 활을 쏘던 정자였다고


  ['집춘문' 입구]


  ['집춘문']                  2:04
  
  <관덕정>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집춘문 集春門"을 만납니다.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성균관> 서쪽과 제일 가까워 국왕들이 <성균관>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잠시후 <성균관>을 갈때 이 문의 바같쪽으로 접근 해 보겠습니다.


  ['백송']                      2:10

  ]안내문]
  
  <집춘문>에서 돌아와 <홍화문>으로 내려 가는 중간에 
  우리나라에선 보긴 어려운 "백송 白松"을 만납니다.
  우리나라에 생존하는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 있지요.
  

  ['내전' 앞길]
  
  <백송>에서 <홍화문> 쪽으로 조금 더 가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2:14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는 광경을 
  <혜경궁 홍씨>와 <정조>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해 표현하는 듯한 안내판이 보입니다.
   

  ['홍화문']                    2:16

  ['홍화문' 앞]                2:17
  
  약 2시간반 동안의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홍화문>을 통과해 나가면 
  <서울대암병원>이 정면에 보이는데,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명륜동' 방향]
  
  <명륜동> 방향으로 우측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 보이고
  그 앞에는


  ['월근문']                   2:20

  [안내문]
  
  조금 전 궁 안에서 보았던 <창경궁관리사무소> 앞에 있었던  "월근문 月覲門"을 밖에서 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廟>인 <경모궁>으로 갈 때 매월 초하루에 이용했다는 문입니다.
  이 문 건너편에는


  ['경모궁' 조망]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가 있으며 그 너머에 <경모궁>이 지척에 있습니다.
  장례식장 옆에는 <현충탑>이 하나 있는데 <이름 모를 자유전사 비>라고 하는데
  <6.25전쟁> 때에 싸우다 부상 당해 이 병원으로 이송됬지만 안타깝게 전사한 이름 모를 전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충혼탑이랍니다.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1부 함춘원-창경궁 답사>는 이곳 <월근문>에서 마치고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답사기>가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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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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