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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역사문화 탐방』
 『부침바위-세검정-탕춘대-총융청-평창-백석동천』

 

  ['구글맵']

  ['구글어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부침바위터"를 알아 보고
  "홍지문-이광수별장터"를 들리고, "세검정-탕춘대터"를 찾아 봅니다.
  그리고 "조지서터-장의사 당간지주"를 확인하고 "총융청터-평창터"를 둘러 보고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부암동 백석동천"을 탐방합니다.


  ['윤동주문학관'앞]              11:10         
  2021년 1월 25일 (월) 맑음 
  지난번 <북악산 신규개방코스> 탐방 때에도 왔었던 "윤동주문학관-자하문고개"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창의문']

  [안내문]                      
  <창의문 안내문>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잠시후 방문하는 "세검정 洗劍亭"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조반정"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가장 명분없이 쓸데없는 나라 걱정으로 일으킨 쿠데타라고 볼수있죠.
  쿠데타로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직접 인솔하는 쿠데타 군들이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이 <창의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쳐들어가는데, <창덕궁> 경비훈련대장인 <이흥립>이 
  방어하는 대신 미리 찐대로 대문을 활짝 열어 주고 동조해 쉽게 쿠데타에 성공했죠.
  그때의 핵심 쿠데타 멤버들의 명단을 현판으로 만들어 이 <창의문> 안에 기념으로 걸어 놨습니다.


  ['부암동']                      
  <창의문>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를 지나면 <부암동>을 만나는데
  이번엔 좌측으로 진행합니다. 지난번 <북악산 신규개방코스>는 우측으로 갔죠.


  [1900년대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1900년경에 <창의문 주변>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해 놨습니다.
  당시 초가집들과 북악산이 인상 깊습니다.


  ['부암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이 펼쳐 집니다.
  이 고개가 옛날 [인조반정] 쿠데타군 7~800여명도 올라 <창의문>을 통과했던 "자하문 고개"입니다.
  현재는 이 고개 밑으로 <자하문터널>이 뚫려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나 차량들은 한산해 졌습니다.
  여기 우측에 있는 <'부빙'-부암동 빙수>라는 빙수집이 유명하죠. 월화요일은 휴업.
 

  ['부암동주민센타']                  11:13           
  <창의문>에서 <자하문고개>를 3분여 내려 가면 <부암동주민센타>를 만나며
  주민센타 뒤로 "인왕산 기차바위"가 조망됩니다.
  그리고  주민센타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세종대왕 3남 안평대군"이 살던 집인 "무계원"과
  친일파 "윤웅렬 별장"이 친일파 다운 크기의 별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다가 어려운 삶을 살다 간 '운수 더럽게 없는' "현진건" 선생이
  그 유명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쓰며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표지석만 있습니다.
  친일파와 항일파의 빛과 그림자가 있는 골목입니다.
  이곳에 대한 포스팅은 이 글 마지막에 부록으로 첨부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가 쓴 탐방기를 참고하시고..


  ['세검정' 가는 길]

  ['석파정 서울미술관']                    11:18           
  <부암동주민센타>에서 5분여 고개를 내려 가면 우측엔 <자하문터널> 출입구가 있는데
  앞에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있고, <이중섭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석파정']                                
  <흥선대원군>의 별서인 <석파정>의 정문인 <삼계동 三溪洞>이 있습니다.
  현재 <유니온약품그룹의 안병광 회장> 개인 소유가 되어 <서울미술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입장료 11,000원을 내야 들어가 볼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제가 탐방기를 포스팅 했으니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가 볼 필요 없이
  첨부 부록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AW 컨벤션센타' 앞]                 11:21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100m 정도 더 내려 가면 좌측에 "AW컨벤션센타"가 있고
  건너편엔 "부암동경노당"이 있는데, "부침바위 표지석"이 보입니다. 
  사진에 노란색 원으로 표시했는데 관심 가지지 않으면 찾기 어렵습니다.


  ['부암동 경노당']                 
  "AW컨벤션센타" 앞에서 "부암동경노당"을 바라보며 "부침바위 표지석"을 확인합니다.
  "부침바위"는 도시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백석동천> 탐방을 마치고 경노당 우측 골목으로 다시 내려올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백석동천>은 앞에 보이는 산줄기 뒤 계곡에 있었습니다.


  ['부침바위터']                   11:25          
  "부침바위터 付岩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던 바위랍니다.
  바위 크기는 약2m 정도였다는데 바위 표면에 벌집같은 구멍이 뚫린 자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돌을 대고 비벼서 돌이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고....
  이 바위 덕분으로 이 지역의 이름이 "부암동 付岩洞"이 되었답니다.


  ['세검정 삼거리']                 11:34        
  <부침바위터 付岩址>에서 10여분 더 내려 가면 "세검정 삼거리"를 만납니다.
  사실 <세검정동>이라는 행정구역은 없는데도, 이 지역 일대를 모두 <세검정>이라고 통칭하고 있습죠.
  이 삼거리는 <홍지동>인데도 <세검정삼거리><세검정파출소><세검정우체국>등등등 모두 <세검정>이
  이런 지명과 관공서 이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에 있는 <탕춘대성 홍지문>과 정면 <상명대 입구>에 있는 <이광수 별장>을 다녀와 
  우측에 있는 <세검정>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홍지문']                        11:37

  [안내문]                             
  "홍지문 弘智門"
  여러 古지도에는 "한북문 漢北門"으로 나오는 城門으로 "탕춘대성 蕩春臺城"의 유일한 大門.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은 우리나라 城 중에서 효용성 등에서 최하 城으로 왜 건설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城입니다. <인조반정> 때에 쿠데타 군이 이 문을 통해 들어와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창의문>을 통과해 <창덕궁>으로 돌진하는데 이용 했을 뿐....
  적군을 막는데 이용한 城門이 아니라 등잔 밑 쿠데타군이 이용한 城門이니....
 

  ['홍지문']                 
  "홍제천 弘濟川"에 붙어 있는 城門으로 "오간수문 五間水門"과 함께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 옆에도 <청계천 오간수문>이 있죠.
  <홍지문>을 둘러 보고 <홍제천>을 따라 <상명대 입구>로 돌아 가면...
 

  ['상명대' 입구]               11:44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대>로 올라 가는 입구에 "청와 설렁탕집" 좌측으로 골목이 이어 집니다.
  전봇대에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 가는 길이라는 명칭도 긴 이정표가 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 가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1:45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바로 만납니다.
  우리나라 미술교과서 등 관련 서적들, 미술학회지, 미술이론 관련 논문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이광수 별장터']                         11:46

  [안내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이광수 별장 터"를 만납니다.
  <춘원 이광수>가 '조선일보' 부사장이었을때 풍경이 좋은 이곳에 별장을 지었답니다.
  관련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별장']           
  현재는 개인 소유여서 들어 가 볼수 없어서 우측 돌출부로 기어 올라가 집 안을 촬영했습니다.
  남의 집안에 카메라를 들이 대는건 실례가 됩니다만,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집이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촬영을 했으니 주인장이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930년대 일제시대에 지은 집으로는 꽤 괜찮죠? 
  여기는 별장이고 그가 살던 집은 '효자동'에 있었으며 현재는 음식점이더군요.
  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조사를 받을 때엔 '남양주 사릉' 근처에 은거하다가, <봉선사>에 기거하기도
  제가 안내문에는 없는 이야기를 추가하여 언급하고 싶은 내용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인 <허영숙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3대 천재 중에 하나라는 <춘원 이광수>
  그는 19살에 [박혜순]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지요. 그 당시엔 집안에서 정해 주는대로 조혼을 하던 시대였죠.
  일본에서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중 운명의 여인을 만나는데 그녀가 바로 <허영숙>.
  그녀는 '진명소학교'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최초로 여의사가 개업한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죠.
  그야말로 '新女性'이었지요. 
  당시 소설 <무정>으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던 유부남 <이광수>를 차지하려는 신여성들이 많았죠.
  <랜의 애가>라는 시집까지 발표하며 구애를 했던 <모윤숙>..'랜'은 당연 <이광수>를 흠모하는 <모윤숙>.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한 <일엽스님>이 된 <김원주> 등등등...
  유부남인 <이광수>와 염문을 뿌린 여성들이 어디 한두명이 아니라고 알려져있지만...
  정작 <이광수>는 동경 유학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정월 나혜석"을 사랑했다고...
  그런 와중에서 <이광수>를 차지하려는 <허영숙>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모두 아시리라...
  <이광수>와 <허영숙>이 낳은 막내 딸 <이정화씨>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 미국에서 [분자생화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죠. 현재 86세쯤 될듯...
  "아버님(춘원 이광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다." 
  2014년 기자회견을 하며 친일파 낙인을 받은 아버지에 대해 딸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북악산' 조망]                    11:40         
  <이광수 별장>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입니다.
  <춘원 이광수>를 친일파라고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요? 물론 나중에 갑자기 변절했지만...
  애초 그는 열혈 독립군파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을 운영하기도 했죠.
  [상해임시정부]로 떠난 <이광수>를 찾아 <허영숙>은 엄청 부잣집이었던 자기 집 금고를 털어 가출을 했죠.
  "나의 상속 분을 미리 갖고 갑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비행기도 없던 그 시절 '상해'까지 여자 혼자서
  사랑 찾아 나선 여인.....<허영숙>
  그녀는 <이광수>를 설득하여 귀국하고... '산부인과'를 개원하고...남편은 독립운동가에서
  갑자기 친일행위를 하게 되고...<이광수>는 본처 <박혜순>과 이혼하고, 결국 결혼에 꼴인 ~~
  그렇게까지 하면서 쟁취한 사랑이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연애 할때와 결혼생활 할때의 남녀간의 사랑 감정은 이상과 현실로 바뀌는거죠.
  결혼 후 <허영숙>은 남편 <이광수>를 엄처시하로 만들어 꼼짝 못하게 했답니다.
  허구한 날 바가지를 박박 긁어 댓답니다. 딸 <이정화씨>의 인터뷰에는 '구박했다'라고 표현했더군요.
  <이광수>의 명작 소설 <유정>은 이런 아내 <허영숙>으로부터 탈출 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라고...
  바이칼 호수 인근 시베리아의 산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유정>의 주인공 '최석'. 
  그가 가출한 이유는 히스테릭한 부인 때문이었죠. 
  '최석'의 가출과 죽음은 아내 '소피야'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에서 죽음을 맞는 '톨스토이'의 최후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자는 정말 알수 없어요....
  <이광수>가 오죽하면 다음과 같은 시를 썻을까요.
  
                 아내의 설교
                               이광수
                『당신은 악인(惡人)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나는 손이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라도 돼 주소서』
  
  그렇게 집착적 사랑으로 본처와 이혼하고 <허영숙>과 재혼한 <이광수>이지만
  처음부터 예정된 것인양 1946년 <허영숙>과도 이혼하고 세상에서 사라지지요.



  ['세검1교'와 '세검정']                11:57~12:06        
  <북한산>과 <북악산>이 만들어 낸 계곡에 흐르는 "홍제천" 암반 위에 서 있는 
  "세검정 洗劍亭" [서울시 지방 기념물 제4호]
  현재야 철근콩크리트로 중무장한 건축물들이 주변 자연경관을 변형시켰지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긴 명승지였답니다.
  특히 <인조반정> 쿠데타군들의 "세검입의 洗劍立義", 즉 '칼을 씻어 정의를 세우겠다"는 유래를 가진것이
  어쩐지 그렇게 좋은 느낌 만을 주지는 않지만, 여하튼 우리들 어린 시절 소풍도 가고 여름철 피서지로도
  인기 있는 명승지 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한양진경도'에 나오는 '세검정' - '권섭'그림']
['세검정' 주변]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이라는 정자만 보면 <세검정>을 헛보는 것이죠. 앞에 있는 큰 암반 바위가 바로 "차일암 遮日巖"이고 물이 흐르며 고여 있는 곳이 "세초연 洗草淵"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롯데캐슬빌라>가 있는 곳에 "탕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도영'이 1925년에 그린 '세검정']
['홍제천'] "세초연 洗草淵" 역대 왕들의 실록 편찬이 끝나면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들고 세검정 일대의 맑은 개울에서 종이의 먹물을 씻어 내렸다고 합니다. 철저히 대외비인 문서이기 때문이었죠. 종이에 먹물로 쓴 글을 씻어내는 것을 "세초 洗草"라 하고..종이가 귀하던 시절 재활용을 위해서이기도.. 잠시후 들리게 될 종이를 제조하는 관립 공장을 종합관리하는 관청인 "조지서 터 造紙署址"가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1941년에 이 근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세검정>까지 불타버렸답니다. 현재의 정자는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아래 그림을 보고 복원한것이라고 합니다.
['겸재 정선'이 1748년에 그린 "세검정"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윗 그림의 '세검정'만 확대 촬영한 사진]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유세검정기 遊洗劍亭記"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세검정(洗劍亭)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 뿐이다... 비 개고 나면 산골 물도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 ” 다산이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明禮坊) 집에서 모임을 가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돈 끝에,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었다. 세검정의 물 구경을 보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다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벌주 열병을 내라고 했다. 우루루 뒤따라왔다. 그가 간곳은 소나기 쏟아지는 세검정. 산골짝에서는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다. 정자 난간의 나무는 뒤집힐 듯 미친 듯 흔들렸다. 폭풍이 몰아쳐 산골 물이 콸콸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가 물바다가 됐다. 황토 물살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렀다. 하얀 모래가 일어났고 돌멩이들이 구르면서 떠밀려 왔다. 잠시 후 소나기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천지는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친구들이 서로 엉켜 베개 삼고 기대고 누워 시를 읊조렸다. [안내문] "세검정 洗劍亭"에 대한 공식적 안내는 안내문을 참고 합니다. ['차일암'] "차일암 遮日巖" 바위에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구멍 두군데만 표시를 했습니다만 연속해서 있습니다. 史草를 세척해 없애는 일은 극비 사항이어서 洗草를 할때 이 구멍에 막대를 세우고 차일을 쳐 외부인들이 볼수 없도록 해서 이 암반을 <차일암>이라 한답니다. 또한 명문세도가들이 여기서 술을 마시며 놀때 외부인들이 못 보도록 차일을 치기도 했다는군요. ['탕춘대터' 조망] 12:06 <세검정>에서 <탕춘대>가 있었다고 하는곳을 바라봅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탕춘대터'] 12:07 "탕춘대터 蕩春臺址" 좌우에 있었던 산줄기는 도로 개설과 빌라 건설로 완전 절개되어 없어지고... 그래도 약간은 그 절경의 흔적은 느낄수 있도록 조금은 남겨 놓은듯 합니다. ㅎ <연산군>의 놀이터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어 군비를 든든히 한 임금 [영조]도 다녀갔고, 손자 [정조]도 다녀 갔답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기록에 전해지는데 [정조실록 정조14년(1790) 9월] 기록에는 <정조>가 이곳에 납신 기록이 보입니다. “임금께서 연융대(鍊戎臺)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활쏘기 시험이 끝난 다음 편여(便輿)를 타고 사정(射亭)에 나아가서 시위한 제신과 장신, 군교와 군사, 그리고 승장(僧將)과 승군에게 음식을 내리고 돌아오다가 세검정(洗劍亭)에 이르렀는데, 정자에는 영종(英宗: 영조의 초기 묘호는 영종이었음)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다. 임금이 차운하여 칠언 절구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幸鍊戎臺, 行瑞葱臺試射. 試射訖, 上仍以便輿, 御射亭, 宣饌于侍衛諸臣、將臣 校卒及僧將、僧軍. 還至洗劒亭, 亭上有英宗御製詩板, 上次韻爲七言絶句, 命諸臣賡進)” ['탕춘대터 표지석'] 12:08 "탕춘대터 蕩春臺址" 화려한 봄날을 완전 접수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죠? <연산군>이 전국에서 이쁘다는 기생들을 모아 문란한 환락행각을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죠. 특히 <연산군>은 기생들 등에 올라타고 노는 '말타기'를 즐겼다죠? ㅎ 그러다 잼없으면 자기 등에 기생들을 올려 태우기도 하며...한마디로 개판? ㅎ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서 이곳 <세검정><탕춘대>에서 발생한 성범죄가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청춘남녀들의 그런그런 장소였나 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육교로 갑니다. ['신영교' 앞] 12:10 이곳은 길찾기에 중요한 곳입니다. <평창터>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우측에 있는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계곡>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에 보이는 육교를 건너 <세검정초등학교>로 갑니다. [육교에서 조망] 12:12 육교를 건너며 앞으로 가야할 곳들을 미리 확인 할수 있어 좋았습니다. 먼저 좌측 아래 [세검정초등학교 버스정류장] 뒤에 있는 <조지서터>를 보고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장의사 당간지주>를 탐방합니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또 다른 육교가 있는 [신영삼거리]로 올라 가야 합니다. ['조지서터' 표지석] 12:13 "조지서터 造紙署址" <세검정> 주변에는 수백 가구가 종이를 만드는 일로 생업을 이어갔었고 종이 공장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던 관청이 있었다는 곳입니다. 조정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품질도 좋아야하고 지질도 일정해야 해서 공장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답니다. ['세검정초등학교'] 12:15 <세검정초등학교> 후문으로 먼저 올라 가면 운동장 한켠에 돌기둥 두개가 보이는데... [보물 제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랍니다. 그러니까 이 운동장은 "장의사"라는 절간이 있던 곳이란거죠. 또한 이곳은 <장의사>가 폐사되고 난 후 "총융청"이 있던 곳이라고... ['장의사 당간지주']
[안내문]
"장의사 당간지주" [보물 제235호]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통일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특히 '황산벌전투' 때에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에 "장의사 壯義寺"를 지었다는데..'황산벌 근처가 아닌 먼 이곳에 지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연산군] 즉위 12년(1506) '연산군'은 <무열왕>이 만든 <장의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들었다고 ['세검정초교 옹벽 벽화'] 12:17 <세검정초등학교>에서 다시 도로로 나가 학교 옹벽을 따라 올라 가면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역사와 생활상을 요약한듯... ['총융청터 표지석'] 12:18 <세검정초등학교> 정문 방향으로 올라 가면 담장에 "총융청터 摠戎廳址"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연산군 시대를 만나 쇠락하고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624년 인조2년에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이다. 그후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고종21년인 1884년에 폐지되었다." ['신영삼거리 육교'에서 조망] <신영삼거리 육교>에 올라 뒤돌아 본 <세검정초등학교> 정문과 <총융청터 표지석>입니다. 이 동네의 이름이 "신영동 新營洞"이 된 유래가 "軍營"인 <총융청>이 새로 들어서서랍니다. ['화정박물관'] 12:27 <세검정초등학교>에서 <평창터>를 찾아 가기 위해 <평창동> 방향으로 올라 가면 "화정박물관"을 지나며 앞에 <서울예술고등학교>가 보입니다. "화정박물관"은 포르노 보다 더 야한 "춘화도"를 전시 하는 곳으로 유명하죠. ['서울예고' 앞 삼거리] 12:29 <서울예고>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평창동'] <평창동>의 중앙통로라고 할수 있는 상가 거리가 이어지는데 앞에 보이는 [럭키평창빌라]로 가면... ['럭키평창빌라'] 12:30 ['평창터 표지석'] <럭키평창빌라> 정문 화단에 "평창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군량미를 보관 관리하는 "평창 平倉"이라는 창고가 이곳에 있었답니다. 이 고을이 <평창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유래가 되었다고... ['조지서터'] 12:40 <평창터>에서 다시 <조지서터>가 있는 <세검정초등학교>로 내려 가면 <탕춘대터> 못미쳐 [신영교]를 만납니다. ['신영정 소공원'과 '신영교'] 12:41~12:45 [신영교] 입구에는 <신영정 소공원>이 있고 ['신영교'에서 '백사실계곡' 가는 길] <백사실계곡>을 가기 위해선 [신영교]를 건너 직진해 올라 가야 하더군요. [갈림길 1] 12:48 [신영교]에서 골목을 잠깐 올라 가면 첫번째 갈림길을 만나는데 길안내가 없습니다. 주민에게 물어 좌회전 하여 올라 가면... [갈림길 2] 12:50 두번째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번엔 이정표가 있고 [갈림길 3] 12:51 이어서 세번째 갈림길을 만나 이정표가 시키는데로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갑니다. [뒤돌아 본 '세검정' 동네] 12:53~12:55 그러면 <백사실계곡 산책로 안내도>를 만나는데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고 ['백사실계곡 안내도'] [현위치]와 <백사실계곡 안내도>를 확인하고 ['현통사' 앞 갈림길] 12:56 ['현통사' 조망] 직진해 올라 가면 <현통사>라는 절간을 지나게 됩니다. ['백사실계곡 생태보전지역' 안내도] <현통사>를 지나면 다시 안내도가 길안내를 하는데 이 계곡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군요. 그러니 투기꾼들이 개발을 못하는거군요. [계곡 오름길] 12:58 계곡 오름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백사실 별서터' 전경] 1:02~ "백사실 별서 터"가 아담하면서도 은밀하게 다가 옵니다. 햐~~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이런 경승지가 아직도 이렇게 보전되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현위치' 안내도] [현위치]를 확인하고 ['별서 터'] [주춧돌] ['별서 터' 전경] [안내문] "백석동천 별서 터 白石洞天 別墅 址"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는데 제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추사 김정희"가 매입하여 그의 <별서 別墅>였다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집>은 현재 [경복궁역3번출입구] 근처에 있었다고 하지요. <창의문>만 벗어나면 바로 이곳이며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할수 있는 곳이니 자주 이용했을듯.. 그리고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내 역사를 정립시킨 업적도 여기서 이루어진듯... ['별서' 앞 연못] <백석정>이라는 정자 앞에 있는 연못입니다. 물이 말라 있지만 옛날엔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연못이었을듯... 이런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우리나라 좋은 나라 ['월암' 조망] 1:08 안내도에는 있지만 어디인지 잘 모르는 "월암 月巖"이라는 각자가 세겨진 바위가 봉우리에 있는데 가는 길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차 올라 가 봅니다. ['월암' 각자'] 1:11 "월암 月巖" 달맞이 바위? ['월암'에서 '별서터' 조망] <월암>에서 <별서터>를 조망하고 ['북악산' 조망] 고개를 들어 <북악산>을 조망합니다. 이곳은 <북악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시내물이 계곡을 이루는 곳이군요. 현재는 <북악스카이웨이>가 가로지르며 계곡의 허리를 끊어 놓고 있는데도 여기는 여전히 조용한 별천지 같습니다. ['능금마을' 방향 오름길] [삼거리] 1:18 <별서 터>에서 <북악산>을 향해 조금 더 올라 가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좌측길은 <능금마을>로 가는 길이고, 우측길은 <백석동천> 각자가 있는 바위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좌측 <능금마을>을 먼저 다녀와 우측 <백석동천>을 지나 하산 하도록 하겠습니다. ['능금마을 계곡'] 1:22 [안내문] 계곡으로 올라 가면 곳곳에 <도룡룡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자연보호를 외치고 있으며 <능금마을>에 대한 안내도 있습니다. ['능금마을'] 6분여 더 올라 가면 <능금마을> 가옥들이 있는데 특징없는 농촌마을 같았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이런 농촌이 아직도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 ['능금마을' 진출입 차로] 1:28 <능금마을> 끝에는 <북악스카이웨이>와 연결되는 진출입 도로가 있더군요. 지도를 보니 이 길로 나가면 바로 <북악스카이웨이>를 만나 <창의문>으로 가겠더군요.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전경] <백사실계곡 능금마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시 내려 갑니다. 왔던 길을 다시 8분여 내려 가면 ['백석동천' 삼거리 회귀] 1:36 다시 <백석동천> 삼거리에 도착하고 100m 정도 직진하면... ['백석동천' 각자] 1:38 [안내문]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를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백석동천 각자' 앞 전경]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에서 펼쳐지는 "白石洞天"을 조망하는데 그렇게 인상 깊지는 않군요. ['부암동' 주택가] 1:41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를 지나면 바로 <부암동 주택가>를 만나더군요. [현위치 안내도] 이곳에 설치된 현위치를 확인하고 주택가로 나가면.... ['백석동천' 출입구] 1:42 2층집 옥상에 정자와 소나무가 있는 집 옆으로 나오게 되더군요. 2층집 옥상에 있는 정자는 <관송루 觀松樓>라고 현판을 달아 놨습니다. [갈림길] <관송루 觀松樓>에서 조금 더 나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창의문>으로 가고, 직진하면 <부침바위>로 갑니다. ['부암동'] 1:45 <인왕산 기차바위>를 바라보며 제법 가파른 <부암동> 내림길을 8분 정도 내려 가면... ['AW 컨벤션센타' 앞] ['부침바위'] 1:53 출발지였던 [AW컨벤션센타] 건너편 <부침바위 표지석>이 있는 <부암동 경노당>에 도착하여 오늘의 역사문화 탐방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걸은 거리는 7.6km였으며 2시간 45분 정도 걸렸습니다. 고도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간단한 등산코스였습니다. [부록] 1. 부암동 "무계원-윤웅렬별서-석파정" 답사기 https://cafe.daum.net/paraanmoon/NcQ5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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