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배봉산과 '영우원터' '휘경원터'』

                             - 배봉산 정상 -       

  ['구글어스']

  ['구글맵']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과 '전농동'에 걸쳐 있는 "배봉산 拜峰山 108.9m"을 찾아 가서 산행도 하고
  그 주변에 있는 역사유적도 둘러 보며 기울어 가는 2020년을 음미 해 보았습니다.


  ['휘경2동 주민센터']

  2020년 12월 26일 (토) 맑음 연무
  '동대문구' 두번째 역사탐방으로 잡은 "배봉산과 영우원터, 휘경원터"를 둘러 보기 위해 길을 나섯습니다.
  오늘은 요즘 3차 코로나팬데믹 사태로 대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모처럼 승용차를 이용해서 애견과 함께 갔는데
  먼저 "휘경원터"가 있는 "휘경중학교"를 찾아 보고, "영우원터"가 있었다는 "삼육보건대학교"를 다녀 와서
  "휘경2동 주민센타"에 주차를 하고 "배봉산"을 오릅니다.


  ['배봉산 둘레길' 입구]

  "배봉산 둘레길"의 들머리는 "휘경2동주민센타" 옆에 있었습니다.


  [안내도]

  둘레길 입구에는 친절하게 [배봉산 둘레길 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전체 거리는 4.5km라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 저는 산행보단 역사유적탐방에 있으니 오를 때엔 능선길을 이용하고, 돌아 올 땐 둘레길을 이용했습니다.


  [뒤돌아 본 '휘경2동주민센터']

  둘레길에 들어 서서 뒤돌아 본 "휘경2동주민센터"입니다.
  처음 가시는 분들은 '휘경2동주민센터'만 찾아 가면 어렵지 않게 접근 할수 있겠죠?
  이곳 이외에도 둘레길 출입구는 곳곳에 있었으니 편리한 곳을 이용하면 되겠습니다.


  [무장애 데크길]

  [배봉산 둘레길]은 데크로 꾸며져 생활산책길로 언제나 누구나 이용 할수 있도록 '무장애길'로 만들었더군요.
  남녀노소 장애인들까지 누구나 안전하게 이용 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사도를 낮추기 위해 지그재그로 설치된 데크길을 잠시 오르면...


  ['휘경관장' 갈림길]

  진짜 둘레길에 접속하는 데크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진짜 둘레길을 만나는데, 코로나사태로 우측으로 일방통행을 하라고 곳곳에 안내를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가운데엔 계단이 있는데 "휘경광장"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둘레길 보다 [배방산]을 오르기 위해 왔으니 가운데 계단을 이용해 올라 갑니다.


  ['휘경관장']

  계단을 40m 정도 오르니 "휘경광장"이라고 하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공원이 있었습니다.


  ['배봉산의 유래' 안내문]

  [휘경광장]에는 '배봉산의 유래'라는 안내판이 있어 한번 읽어 보고
  [휘경광장]을 둘러보고 직진해 나가면...


  [둘레길 합류]                   

  조금전에 헤어졌던 둘레길을 다시 만나더군요.
  둘레길을 잠시 진행하면...


  ['삼육보건대' 조망]

  우측 바로 아래에 산행 전에 탐방했던 "삼육보건대학 건물"이 보입니다.
  이곳이 "사도세자의 초장지-영우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오늘 역사탐방의 핵심이기에 잠시 후 상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육병원' 갈림길]

  우측 아래 [삼육보건대학교]를 보며 잠시 진행하면
  "삼육서울병원"과 통하는 갈림길을 만납니다.
  [배봉산] 좌우에는 많은 접속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휘경동' '전농동' '답십리동' '장안동'등 주변에서 쉽게 이용 할수 있겠더군요.


  ['히어리광장' 앞 갈림길]

  [삼육서울병원] 갈림길을 지나면 "히어리광장" 앞 갈림길을 만나는데...
  [둘레길]은 우측으로 가고,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가운데 길인데 
  저는 먼저 우측으로 가서 "영우원터 안내석"을 보고 가운데 "히어리광장"으로 돌아 올라 갑니다.
  먼저 우측 [둘레길]로 회전하면...


  ['영우원' 안내석이 있는 쉼터]

  [안내석 뒤]

  쉼터 정자가 보이며 앞에 "영우원터 안내석"이 보입니다.
  안내석 뒤로 올라가 내려다 보면 쉼터 정자는 코로나사태로 모두 사용금지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안내석 앞면]

  [안내석 뒷면]

  ['영우원' 위치도]

  "영우원터 안내석"을 먼저 읽어 봅니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으면 이곳 쉼터가 [영우원터]로 오해 될수도 있습니다.
  안내석 내용은 [배봉산] 중턱에 [영우원]이 있었었다는 이야기이고 이곳이 그곳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용도 제가 조사한 내용과는 조금 다름니다. [영우원터]가 [삼육병원본관자리]라고 표기해서..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오르기 바로 전에 "영우원터"라고 추정하는 곳을 직접 탐방하고 왔습니다.
  그곳으로 저와 함께 가 볼까요?

      첫번째 답사 "영우원 터 永祐園址"를 찾아서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기사]

  오리지날 [영우원터]를 찾기 위해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찾아 갔습니다.
  신문기사의 제목에 <永佑園>으로 표기된 것은 잘못 표기한 것이고 <永祐園>이 정확한 한자 표기이더군요.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서울위생병원 뒷산> "간호학교 신축부지" 공사중에 
  지하 5m 지점에서 <돌상자 두개-길이1m 폭50cm 높이75cm>를 발견하여 열어 보니
  납석으로 된 상자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상아 쪽에 쓰인 천릉문(遷陵文)이 적혀 있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신문기사를 제가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보면
  <서울위생병원>은 현재의 <삼육서울병원>이고, <간호학교>는 현재의 <삼육보건대학교>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부장품 중에 <묘지명 墓誌銘>도 나왔는데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묘지에 죽은 사람의
  덕이나 공로 따위를 새겨넣은 글'을 일컷지요.
  그 묘지명은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가 친히 쓴 것인데 다섯장의 청화백자에 기록되 있었고
  출토 된 <묘지명 墓誌銘>의 실물 사진이 다음 사진입니다. 


  ['사도세자 묘지명']

  "사도세자 묘지명 思悼世子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 38년 윤5월 21일-1762년>에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살해된 [사도세자]의 <묘지명> 입니다.
  이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1762년(영조38년)음력 7월에 썻다고 적혀 있군요.
  임금이 직접 쓴 묘지명이라고 이런걸 <어제 묘지명 御製墓誌銘>이라 하죠.
  청화백자에 기록되있는데 이 <묘지명>이 간호학교 신축공사 하다가 발견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살해 당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울며불며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했지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그리곤 아버지의 묘에 참배 조차 할수 없도록 할아버지로 부터 엄명이 내려져 제사를 지내며 절 조차 할수 없었죠.
  [영조]는 이 묘를 "수은묘 垂恩墓"로 낮추어 묘를 썻지만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묘를
  "영우원 永祐園"으로 격상하고 이곳에 14년간 원행하며 아버지를 추모했답니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이 <배봉산 拜峰山>이 된 유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곤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이 있던 [정조]는 천하명당이라는 "현륭원 -수원 화산"으로 천장을 결심하게 되지요.
  27년만에 아버지의 묘를 천장 할때 [영우원 묘]를 파 보니 묘에서 윗 사진의 문제의 <묘지명>이 나왔는데
  [정조]가 읽어 보니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에 대해 할아버지 [영조]는 "죽일수 밖에 없었다"라는 변명들이
  가득 쓰여 있어 기분이 더욱 나빠진 [정조]는 폐기된 묘에 이 <묘지명>을 파뭍고 덮어 버려 폐기했는데
  그것이 간호학교 신축공사하다가 땅 속 5m 지점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우원터>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다녀 온 <영우원터>를 저와 함께 가 보실까요? ^*^


  ['삼육보건대-병원' 입구]

  "삼육서울병원""삼육보건대학교" 정문으로 들어 가면 "삼육중앙교회"가 있는데
  [그린어린이집] 옆으로 난 길로 올라 갑니다. 50m 쯤 올라 가면...


  ['에덴동산' 앞]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공원앞에 도착하는데 학교 안내도가 있습니다.


  [안내도]

  먼저 학교 안내도를 보고 [삼육보건대]를 찾아 갑니다.


  ['에덴동산']

  ['에덴동산']

  [에덴동산]이라고하는 조그마한 공원이 "혹시 [영우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공원을 통과하여 조금 더 올라 가면...


  ['삼육보건대']
 
  신문 기사에 나온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에 있는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하는
  "삼육보건대학교 건물"이 나타납니다.
  [에덴동산]이라는 공원 위 이 곳이 "영우원 터" 였을 가능성이 커다고 '파란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조금전 [히어리광장]에 있는 안내석에는 "삼육병원 본관 자리"가 [영우원터]라고 하지만
  신문 기사엔 <서울시립병원 뒤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하며 주소까지 <휘경동 29-1번지>라고
  구체적으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저의 주장이니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만...
  [정조실록]에는 "왕은 부장품들을 정자각 동쪽에 나아가 모조리 태우도록 명하고
  '증옥함'을 비롯한 <묘지명>과 석물들은 '내청룡' 밖에다 묻어버리고 따로 표시하라 명령하였다"고
  기록되 있습니다..이때 묻은 부장품들이 1968년에 <간호학교 신축공사 중>에 출토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장품이 나온 곳과 묘터는 좀 다를 수 있다고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으니 
  [에덴동산] 위 이곳 둔덕이 아닐까?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현 지도]와 [옛 지도]를 보면 더욱 확신이 갑니다.


  ['네이버위성지도']

  첨단 과학 기술로 촬영한 위성 사진에는 그 옛날의 모습은 도시화로 신기루 같기만 하지만
  그래도 [배봉산 산줄기]의 흔적은 그런대로 남아 있는듯 합니다. 다행이죠?
  신문 기사에 나온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에 있는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추정되는
  "영우원터"가 있었다고 하는 <삼육보건대>에 제가 빨간색 점으로 표기했습니다.
  이 지도를 보고 다음 옛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을 보면...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

  [정조]가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상황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지요.
  이백여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들에게 나타난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을 보면 
  [영우원]의 위치를 풍수지리적으로 어떻게 해석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한자 실력이 짧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주변 山은 확실히 알수 있군요.
  이 지도는 원래 남북이 반대로 되 있는데.남북을 바꿔 윗 위성지도와 비교해 보면 
  [배봉산]과 [아차산] [천장산]에 둘러 쌓인 [영우원]의 풍수지리적 위치를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나저나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같나요? 도시화로 흔적 없이 사라진게 너무 아쉽기도 한데
  [아차산] [천장산] [봉화산]에 둘러 쌓인 "배방산"의 혈과 기가 흐른다는 "영우원"...
  하지만 [정조]는 이 터가 명당이 절대 아니라고 하며 <수원 현륭원>으로 천장을 했는데
  천장을 위해 묘를 파 보니 묘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정조]는 또 울었답니다
  "아버지를 물 속에 가두어 두었으니 어찌 불효가 아니었는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항변이라도 하는 듯...
  그리고 명당이 아니어서 천장을 결정한 자신이 백번 올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답니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계속 슬퍼하며 아들의 시호를 [사도세자 思悼世子]라고 까지 추모 했지만
  여기서 나온 <묘지명>에는 죽일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 놓은 것을 확인 할수 있어서
  [정조]는 할아버지의 교활함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영조]는 자기 아들의 <묘지명>에서도 아들에 대해 원색적 비난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조]가 직접 쓴 <묘지명>의 일부를 알려 드리면...
  "어찌 어리석은 행동을 하여 늙은 아비로 하여금 '못쓸 짓'(살해)를 하게 하였냐"는 자기변명의 글과 
  "세자 때부터 이처럼 무도한 자는 내 일찍이 보지 못했다. 풍족한 곳에서 태어나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마침내 미치기에 이르고 말았구나~'"라는 등의 비판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세자의 시호처럼 영조가 아들을 그리워하거나 죽인 걸 후회했다고 하지만
  <묘지명>만 봐도 [영조]는 절대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세자를 죽인 후 '개선가'를 연주했다는 <이재난고>의 기록과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유명한 <한중록>에도 세자의 장례에 무지 인색했다고 기록되 있죠..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 천인공노 할 인간이었다고 생각케하는 대목입니다.
  '탕평정책'을 쓴 위대한 왕? 웃기는 소리.....
  무술이의 아들이라는 트라우마...아들에게 쏠리는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과 똑똑한 아들에 대한 열등감..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27살의 세자를 죽이기 까지 하며 강화한 왕권을 향유하지도 못하고 죽인지 13여년 더 살다 그도 갔습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히어리광장']

  다시 [배봉산 산행]을 계속 합니다.
  [영우원터 안내석] 뒤에 있는 "히어리광장"입니다.
  '히어리'가 뭔 듯인가 했더니 식물 이름이군요. 식물에 대해 워낙 문외한이라서...ㅎ
  그런데 둘레길로 가면 이곳을 만날수 없습니다. 그러니 꼭 들려야 하는데...그 이유는


  ['히어리광장']

    ['휘경원' 안내판]

  "히어리 광장"에는 "휘경원터"라는 안내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보면 이곳 공원이 [휘경원터]였다고 오해 할수도 있는 안내판입니다.
  이곳엔 안내판만 있고 실제 [휘경원터]는 이곳이 아니어서 제가 산행 출발 전에 [휘경원터]도 다녀 왔습니다.
  저와 함께 [휘경원터]로 가 볼가요?

      두번째 답사 "휘경원터 徽慶園址"를 찾아서

  ['휘경2동' 골목]

  [휘경원터]는 [영우원터]와 달리 국가에서 그 터를 확인하여 표지판을 세워 놨기에 
  조사하고 뭐고 할거 없이 위치를 확인하고 그냥 찾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위치는...<동대문구 휘경2동 286-66번지>에 있는 [휘경중학교]입니다.


  ['휘경중학교 정문']

  "휘경원터 徽慶園址""휘경중학교 정문"만 찾아 가면 됩니다.
  오늘이 토요일인데다가 '코로나사태'로 학교 문은 철통방어로 잠겨 있습니다.
  들어 갈수는 없어서 정문 너머로 들여다 보면....


  ['휘경원터 안내판']

  우측 앞에 "휘경원터"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휘경원터 徽慶園址
               휘경원은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23년) 조성 되었다가 1863년(철종14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휘경원>에 대해선 제가 여러번 다른 답사기에서도 언급 한바 있습니다만, 한번 더 언급하면...
  이 묘터의 주인을 알기 위해선 [정조대왕]과 그의 여인들에 대해 알아야 
  이 묘의 주인을 쉽게 알수 있으니 제가 나름대로 아는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정조대왕]은 여성편력이 거의 없는 걸로 알려졌지만 그도 한명의 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었죠.
  정비인 "효의왕후"와는 세손 때인 9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14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했답니다.
  왕자를 생산해야만 하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로 상상 임신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죠.
  결국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어 [정조대왕]의 릉인 [건릉]에 합장되었습니다.
  비운의 왕비 "효의왕후"는 [정조]와 가례를 올리려고 할때 홍역을 앓아 곰보가 된 여인이죠.
  홍역 때문에 가례를 1년이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효의왕후"를 [정조]는 따뜻하게 배려했다는거 아시나요.
  [정조]보다 훨씬 더 오래살고 [정조]의 릉인 화성 [건릉]에 합장되어 남편 곁에서 지금까지 잠들고 있죠.
  다음으로 지난번 탐방한 [고려대 이공대] 교내에 있었던 <인명원>의 주인공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인데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치적 책략으로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정조]는 어쩔수 없이 당시 최고 정치세력인 "홍국영"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그녀가 "원빈 홍씨"입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후궁이 된지 1년도 않되 죽어버렸는데 
  그때 나이가 고작 14살이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현재의 [고려대 이공대] 안에 묘를 만들어 안장했는데...
  "개운산" 산줄기가 '성북천'과 '정릉천'을 분리시키고 있는 "개운산의 끝자락"인 곳에 
  "인명원 仁明園"이라는 이름의 묘소를 마련 했던 것이랍니다.
  그래서 14살에 죽은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여서 "<애기능>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고려대 이공대]를 [애기능캠퍼스]라고 부르게 되는 유래가 되겠습니다.
  [정조]는 정치적 가례를 몹시 싫어했죠.
  두번째 "원빈 홍씨"도 일찍 죽자, 다시 정치적으로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를 세번째 후궁으로 들이는데...
  "화빈 윤씨" 거소에 드나 들다가 "화빈 윤씨"를 시중드는 무술이와 눈이 마주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창녕 성씨"로서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 져 있죠.
  진정 사랑해서 얻은 여인으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남 "문효세자"를 얻는데,
  뭔 운명의 장난인가,, 간신히 얻은 장남 "문효세자"는 불행이도 5살에 죽어버리고 그녀도 죽어버렸죠.
  [정조]는 유일한 아들 장남이 죽자 엄청 슬퍼하며 "문효세자"의 묘를 썻는데 [효창원 孝昌園]이었고, 
  현재 "백범 김구선생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은 원래 [효창원 孝昌園]에서 유래한다는거 아시나요.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였으니 세자와 그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답니다.
  [영조] 때부터 완전 금기시되던 무술이와 무술이가 낳은 세자의 배척이 정적들로부터 표적이었던 때이니..
  [정조]까지 암살 당할뻔 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독살설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요.
  
  여자 福도 지지리도 없는 [정조]는 다시 마지막 후궁을 들이는데 
  그녀가 바로 "휘경원 徽慶園"에서 잠자고 있는 "수빈 박씨"이며, 
  그녀는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23대 순조"가 되니 "수빈 박씨"는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릉"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하죠.
  그래서 "휘경원 徽慶園"으로 명명된 "23대 순조의 어머니 묘"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대왕]의 마지막 아내였습니다.
  
  현재 "휘경동"이라는 洞名을 만든 "휘경원터"가 바로 이곳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옮겨간 실제 "휘경원"은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7번지'에 있는데
  제가 직접 방문하여 답사기를 쓰기도 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해 가 보세요.
   http://cafe.daum.net/paraanmoon/NdEA/1 [남양주] 광릉 수목원길 - 휘경원 봉선사 광릉


  ['배봉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

  <영우원터>와 <휘경원터>를 답사하며 왕조시대의 삶과 죽음을 쬐끔 느끼고
  다시 [배방산] 산행을 계속합니다.
  <히어리광장>에서 능선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쉼터]

  코로나사태로 온통 묶여 있는 쉼터 정자를 다시 만나는데 [배봉산]의 서쪽을 조망 할수 있는 곳이더군요.


  ['서울시립대' 조망]

  [안내문]

  [배봉산] 서쪽 아래엔 "서울시립대"가 자리하고 있고


  ['천장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지난번에 탐방했던 "천장산"과 <경희대>가 조망됩니다.


  ['운동시설']

  ['배봉산' 정상부]

  능선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정상부에 도착하고


  ['정상부 보루 축성']

  [안내문]

  [배봉산 정상부]는 '결속토낭공법'으로 축성했다고 안내하며


  ['배봉산' 정상]

  "배봉산 拜峰山 108.9m"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정조대왕]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 참배에서 유래하는 산 이름이죠.
  [동대문구]가 매년 정초에 해맞이 행사를 하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산 이름이 조금 독특하죠?
  <拜峰>에 다시 <山>을 붙였죠. <峰우리> 정도의 작은 산이지만 높이기 위해 다시 <山>을 예의로 붙여준듯
  <도봉산>도 같은 맥락이지요,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서 벗어나 <道峰>에 더시 <山>을 붙이드시
  지난 "살곶이목장"을 답사 할때 목장의 북쪽 울타리 역활을 한 산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이 정상엔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 되었었는데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고...
  제가 돌아 보니 생활건강걷기코스로 넘 알맞더군요. 그래서인지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보루 유구]

  [유구 현황도]

  "배봉산 보루 拜峰山 堡壘"
  배봉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성 "보루"의 기저부 유구랍니다.
  2017년 2월 9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고...


  [서쪽 '서울시내' 조망]

  ['서울시내' 조망]

  서쪽을 조망하는데 맑은 날씨지만 연무와 미세먼지로 조망이 시원치 않아 아쉽습니다.
  '踏十里'니 '往十里'니 하는 이름 때문에 <한양성>과 많이 떨어진 변방 인줄 알았는데 넘 가깝지요?
  <한양성>을 둘러 싸고 있는 內四山이 지척입니다.


  [서북쪽 조망]

  서북쪽으로는 [북한산]까지 조망되고  


  ['천장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홍릉터>가 있는 {천장산}이 보입니다.


  [동쪽 '용마산' 방향 조망]

  ['봉화산' 조망]

  동북쪽으로는 '신내동'의 [봉화산]이 조망 되는데 곧 탐방 할 예정입니다.


  [ 동쪽 '망우산-용마산' 조망]

  동쪽으로는 [수락지맥]의 <망우산><용마산><아차산>이 지척에 보이는데
  저 산줄기 아래엔 "면목동 面牧洞"이 자리하고 있죠.
  <살곶이목장>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面牧洞"이라 했답니다.
  저는 <살곶이목장>을 알기 전까지는 "사람 볼 면목이 없는 동네"라서 '면목동'이라 하는 줄ㅎㅎ


  [남쪽 조망]

  [배봉산]에서 바라보는 "화양동" 방향인 옛 "살곶이목장"입니다.
  이젠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아니라 빌딩을 키우는 곳이 되었군요.


  ['전농동' 방향 내림길]

  [배봉산] 정상에서 남쪽인 '전농동'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제 집사람이 [전농초등학교] 나왔다는데...^.^ 요즘도 초딩 동창회 한다고 열성이더군요.
  저는 초딩 동창회 해봤는지 기억도 안납니다.


  ['배봉정']

  잠시 내려 가니 "배봉정"이라는 정자 쉼터가 있어 쉬어 갑니다.
  오늘 저와 함께 [배봉산]을 등산한 저의 애완견 "우리"입니다. 종자는 "씨츄"이구요.
  집에 가니 골아 떨어져 종일 자더군요. ㅎ




  [생활체육시설]

  [휘경2동주민센터]로 돌아 갈때엔 [배방산둘레길] 동쪽 둘레길을 이용했습니다.
  이곳에는 가는 곳마다 생활체육시설이 상당한 규모로 여러곳 있더군요.
  현재는 코로나사태로 모두 폐장하고 있었고


  [무장애데크둘레길]

  ['배봉산 숲속광장']

  데크로 만들어진 무장애길에는 [숲속광장]도 있었는데 해맞이 명소라고 하네요.



  [둘레길]

  무장애숲길을 다시 통과하여 내려 가면....


  ['휘경2동 주민센터']

  "휘경2동주민센터"로 회귀하여 산행과 답사를 마쳤습니다.


  ['구글맵 실트랙']

  제가 걸은 실트랙입니다.
  [배방산]에서 거리는 3.7km였으며 1시간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영우원터>와 <휘경원터>가 있는 "삼육보건대"와 "휘경중학교"는 승용차로 다녀 왔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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