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역사탐방』
     『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영휘원-
       세종기념관-홍릉터-천장산-의릉』

       

  ['구글맵']

  ['구글어스']

  오늘은 주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청량리동-회기동-이문동'을 탐방 할 예정입니다.
  주요 탐방지는 "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영휘원-홍릉터-천장산-회묘터-의릉"입니다.


  ['안암역 4번출입구']                    11:42

  2020년 12월 12일 (토) 맑음 
  <안암역4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고대병원' 앞 사거리]

  <안암역4번출구> 정면에 "고대 병원"이 보이며 
  병원 앞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 가면...

      제1부 "인명원터 仁明園址"를 찾아서 


  ['고대 이공대']                     11:44

  [고대병원] 앞 사거리에서 "고대 이공대" 캠퍼스 정문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진입로 끝에 전기밥솥같이 생긴 건물이 보이는데, 저 건물 앞으로 갑니다.


  ['애기능생활관']                      11:46

  전기밥솥처럼 생긴 동그란 건물이 "고대 이공대 애기능생활관"이라는 학생들 편의시설인데
  오늘 첫번째 역사탐방지의 랜드마크가 되겠습니다.


  [안내도]

  <애기능생활관> 앞에 [이공대안내도]가 있어 길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찾는 곳이 바로 제가 표기한 "인명원터"이기 때문입니다.
  추가로 [보제원터]와 [선농단]의 위치도 표기했으니 이 안내도를 참고하여 가면 되겠습니다.
  먼저 <애기능생활관>과 <과학도서관> 사이로 들어 가면....


  [육교]

  <애기능생활관> 정문을 지나면 다시 육교를 지나게 되는데 
  앞에 보이는 조그만 동산이 "인명원터"가 되겠습니다. 동산으로 올라 가면...


  [쉼터]                      11:49

  "인명원"이 있었던 동산의 정상에는 학생들을 위한 쉼터가 조성되 있군요.
  이곳이 옛날 [정조대왕]의 세컨드인 "원빈 홍씨"의 묘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외국인이 만들었다는 조각작품 하나가 학생들에게 "꿈을 향한 기다림"을 알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만, [이공대]가 아닌 [문과대]를 다녀 [이공대] 쪽은 거의 가본적이 없고
  또 워낙 옛날이라 기억도 가물가물 한데 특히 이런 유적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커진 캠퍼스가 생소하기만 하군요.
  <인명원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좌측으로 내려 가면...


  ['인명원터' 표지석]

  "인명원터 仁明園址" 표지석이 동산 아래 <애기능생활관> 옆에 다소곳이 서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어디서 알았냐구요? ㅎㅎ 문체부의 "한국문화유산포털"에서 알았습니다.

                     인명원터 
                     仁明園址
           인명원은 조선 후기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소이다
          1950년 6월 13일 서삼릉(西三陵) 내의
           귀인 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6.25가 발발하기 열흘 전 쯤에 이장했군요)
                
   이 묘터의 주인을 알기 위해선 [정조대왕]과 그의 여인들에 대해 알아야 
   이 묘의 주인을 쉽게 알수 있으니 제가 나름대로 아는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정조대왕]은 여성편력이 거의 없는 걸로 알려졌지만 그도 한명의 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었죠.
  정비인 "효의왕후"와는 세손 때인 9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14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했답니다.
  왕자를 생산해야만 하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로 상상 임신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죠.
  결국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어 [정조대왕]의 릉인 [건릉]에 합장되었습니다.
  비운의 왕비 "효의왕후"는 [정조]와 가례를 올리려고 할때 홍역을 앓아 곰보가 된 여인이죠.
  홍역 때문에 가례를 1년이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효의왕후"를 [정조]는 따뜻하게 배려했다는거 아시나요.
  [정조]보다 훨씬 더 오래살고 [정조]의 릉인 화성 [건릉]에 합장되어 남편 곁에서 지금까지 잠들고 있죠.

  다음으로 여기 <인명원>의 주인공인 "원빈(元嬪) 홍씨(洪氏)"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치적 책략으로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정조]는 어쩔수 없이 당시 최고 정치세력인 "홍국영"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그녀가 "원빈 홍씨"입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후궁이 된지 1년도 않되 죽어버렸는데 
  그때 나이가 고작 14살이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묘를 만들어 안장했는데...
  "개운산" 산줄기가 '성북천'과 '정릉천'을 분리시키고 있는 "개운산의 끝자락"인 이곳에 
  "인명원 仁明園"이라는 이름의 묘소를 마련 했던 것이랍니다.
  그래서 14살에 죽은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여서 "<애기능>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이 [고대 이공대]를 [애기능캠퍼스]라고 부르게 되는 유래가 되겠습니다.
  
  다시 정치적으로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들이는데...[정조]는 정치적 가례를 몹시 싫어했죠.
  "화빈 윤씨" 거소에 드나 들다가 "화빈 윤씨"를 시중드는 무술이와 눈이 마주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창녕 성씨"로서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 져 있죠.
  진정 사랑해서 얻은 여인으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남 "문효세자"를 얻는데,
  뭔 운명의 장난인가,, 간신히 얻은 장남 "문효세자"는 불행이도 5살에 죽어버리고 그녀도 죽어버렸죠.
  [정조]는유일한 아들 장남이 죽자 엄청 슬퍼하며 "문효세자"의 묘를 썻는데 [효창원 孝昌園]이었고, 
  현재 "백범 김구선생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은 원래 [효창원 孝昌園]에서 유래한다는거 아시나요.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였으니 세자와 그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답니다.
  [영조] 때부터 완전 금기시되던 무술이와 무술이가 낳은 세자의 배척이 정적들로부터 표적이었던 때이니..
  [정조]까지 암살 당할뻔 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독살설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요.
  여자 福도 지지리도 없는 [정조]는 다시 마지막 후궁을 들이는데 
  그녀가 바로 "휘경원 徽慶園"에서 잠자고 있는 "수빈 박씨"이며, 
  그녀는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23대 순조"가 되니 "수빈 박씨"는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릉"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하죠.
  그래서 "휘경원 徽慶園"으로 명명된 "23대 순조의 어머니 묘"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대왕]의 마지막 아내였습니다.
  현재 "휘경동"이라는 洞名을 만든 "휘경원터"는 다음 역사 탐방지가 되겠습니다. 기대하시라


  ['인명원 묘터' 전경]

  주차장으로 나가 "인명원 묘터"를 조망합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이곳은 "개운산 開運山" 산줄기가 [청계천] 방향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인데,
  현재는 이 산줄기를 [고려대]가 몽땅 까뭉개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정조대왕]의 첫번째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인  "인명원터 仁明園址"만
  조그마한 동산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봄에는 철쭉동산으로 가을엔 단풍으로 유명하다는군요.


  ['인명원터' 좌측]                       11:54                       

  "인명원터" 좌측으로는 [이공대] 건물들이 학교의 명성을 뒷받침하고 있군요.
  제가 다니던 시절과는 너무 다르게 규모면에서 엄청 발전했습니다.
  
      제2부 "보제원터 普濟院址"를 찾아서 


  ['안암오거리']                       11:57

  [인명원터]가 있는 [고대 이공대] 남쪽문을 통해 나가면 추억의 "안암오거리"를 만납니다.
  [안암오거리]는 '성북구 안암동'과 '동대문구 제기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옛날에 "보제원 普濟院"이라는 공공여관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그 흔적은 오거리 건너편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번호 06-177] 옆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북구'에서 '동대문구'로 들어 가게 됩니다.


  [개운산' 조망]

  [안암오거리]에서 뒤돌아 보면 "개운산 開運山 130.5m" 정상이 쬐끔 보입니다.
  저 산 아래 "개운사 開運寺"라는 제법 유명한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은 조금 전에 탐방했던 "인명원터" 근처에 있었는데 묘가 들어 서며 옮겨 갔답니다.
  그런데 저 절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죠.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암중모색하던 <대원군 이하응>이 나중에 [고종]이 되는 아들 '명복이'를
  안전하게 숨기며 저 절의 '벽담스님'에게 맡겨 스님에 의해 자랐는데, 그후 '명복이'가 [고종]으로 왕위에
  오른 후 "운명을 여는 사찰"이라는 의미인 "開運寺"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죠.
  한마디로 "왕을 탄생시킨 대박 터진 절"이라는 닉네임을 얻었죠.
  "개운산 開運山 130.5m"은 [북한산]의 [보현봉]에서 뻗치는 [형제봉능선]에서 이어지는 산인데
  [북악터널]과 [미아리고개]를 지나 [성신여대],  [고려대]를 통과하여 이곳으로 이어지죠.
  그러니까 이 산줄기의 좌측은 [성북천]이 흐르고 우측엔 [정릉천]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암동 安巖洞"이라는 지명은 이 산줄기 어느 곳에 "앉으면 편안한 바위"가 있어서
  쉽게 표현하자면 "안락의자바위"에서 유래 한다는거 아셨나요? ㅎ [고종]이 어릴 때 앉은 자리? ㅎ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번호:06-177']

   ['보제원터' 표지석]                     12:00

  "보제원터 普濟院址" 표지석이 [안암오거리]에 행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쓸쓸히 있습니다.
  
                     보제원 普濟院 터  
                             1393년~1895년
                             여행자의 무료 숙박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국 각지에는 '공공여관'인 "원 院"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규모가 가장 큰 "院"은  "한양성의 4대문" 중에 3대문 밖에 있었던 '공공여관'인 "원 院"이었는데...
  확실히 알기 위해 옛 지도를 보며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보제원'과 '이태원' '홍제원' 위치]

  [서대문] 밖에는 "홍제원 洪濟院"이 있었는데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관리들이 이용했고
  [남대문] 밖에는 "이태원 梨泰院"이 있었는데 현재 [용산고등학교] 자리랍니다.
  그리고 [동대문] 밖 3리 쯤에 "보제원 普濟院"이라는 '강원도-함경도 방향' 역원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특히 [동대문] 밖 "보제원 普濟院"은 '공공여관'의 성격 보다 '공공병원'의 역활이 컷답니다.
  역병이 돌거나 가난과 질환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휼해 주던 의미있는 병원역활과 구휼역활을 했다는거죠.
  그래서인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한약재 시장인 "제기동 약령시장"이 발달 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오늘 <경동시장>과 붙어 있는 <한약재 약령시장>을 둘러 보려고 했는데 시간상 다음으로 미루고

      제3부 "선농단 先農壇"을 찾아서


  ['선농단' 가는 길]

  [보제원터]에서 남쪽방향인 [용두동] 방향으로 50m쯤 내려 가면 
  첫번째 좌측에 제법 너른 골목으로 들어 가는 골목 입구를 만나는데 
  [선농단]으로 가는 이정표가 100m 거리에 있다고 알려 줍니다.
 

  ['종암초' 가는 골목]

  ['종암초등학교']                     12:04

  [보제원터]에서 골목을 100m 정도 진행하면 [종암초등학교] 정문을 만나며


  ['선농단역사문화관']

  [종암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엔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있습니다.
  몇번 왔다 갔으나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은 꼭 관람을 하려 했으나 코로나사태로 휴관...ㅠ


  ['선농단' 입구]                   12:05~12:15

  [안내문]

  "선농단 先農壇"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
  조선시대 농사 잘 지어 풍년들라고 왕이 제사를 지내고 농사 시범을 보이던 곳이랍니다.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일이야말로 왕이 꼭 해야 할 의무같은거죠.
  한편 이와 같은 의미로 '성북동'에 가면 "선잠단 先蠶壇"이 있죠.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곧 다시 탐방 할 예정입니다.
  [선농단]은 왕이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고
  [선잠단]은 왕비가 '누에고치를 잘 길러 비단을 많이 만들게 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죠.
  먹고 입는 衣食문제 해결이 최고의 善이었던 농경사회에서 빼 놓을수 없는 중요한 일이니...


  ['향나무'와 '청량대 표석' 위치]

  '코로나사태'로 문을 잠가 놨지만 그냥 지나칠순 없어 월담을 해서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오로지 코로나 예방 차원으로 문을 닫았으니 혼자 들어 가면 코로나 문제는 없으니...ㅎ
  [천연기념물 향나무]와 [청량대] 위치를 확인하고 가까이 가면...


  ['천연기념물 '향나무']

  [안내문]

  "천연기념물 제240호 향나무"
  [선농단]이 만들어 질때 심은 나무라고 하는데 600여년 묵은 고목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향나무라고 합니다.


  ['청량대' 표석]

  "청량대 淸凉臺"
  일제강점기시절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선농단]을 없애고 일반 공원을 만들었다는 
  그 흔적인 "청량대 淸凉臺"라는 표석이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민족문화말살정책은 쪽바리들이 계획해서 한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앞장 서서 했습니다.
  쪽바리들이 우리나라 민족문화와 국토 정기가 흐르는 기와 맥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면 우리나라 문화와 민족정기를 상세히 알수 없는 사항입니다.
  백두대간 등 주요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고 중요 민족문화시설을 없애는데 먼저 나서서
  일제에 아부하며 자신만 잘 살기 위해 민족을 팔아 먹으며 실행에 옮긴 인간들은 
  쪽바리들이 아니라 친일파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그 인간들을 일일이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중지를 모아 친일파들의 행태를 
  지금이라도 알리고 청산해야겠습니다.


  ['제단' 입구]

  ['선농단 제단']
 
   [안내문]

   "선농단 先農壇" 제단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기동 祭基洞" 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이곳 [선농단]에서 탄생되었답니다.
   "제기 祭基"라는 말의 뜻이 "제사 지내는 터"라는 것이니까...
   풍년을 비는 제사가 끝나고 나면 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고
   행사에 참석한 관리들과 농민들이 행사가 길어져 배가 고파지면 농사 시범을 보일 때 이용한
   소를 잡아 많은 사람이 먹을수 있도록 큰 솥에 국을 끓여 국밥을 말아 먹게 했답니다.
   이 국밥을 "선농탕"이라고 했는데 훗날 음운변화로 "설렁탕"이 되었다고
   그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안내문의 내용에 대해 쬐끔 첨언하자면....
   "설렁탕"의 유래는 여럿 있습니다.
   제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기원은 이런것입니다.
   설렁탕은 주로 소의 뼈다구를 푹 끓여 고와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죠.
   그래서 옛부터 국물이 하얗다고 "설(雪)농탕"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는게 저는 더 믿음이 갑니다.
   어느 쪽을 믿느냐는 자기 판단...ㅎ

      제4부 "영휘원 永徽園"을 찾아서


  ['성일중학교']                     12:18

  [선농단]을 무단침입하여 둘러 보고 나와 [종암초등학교] 앞 골목을 따라 나가
  [성일중학교] 뒷골목으로 100m 정도 나갑니다.


  ['정릉천'과 '서울내부순환도로']                     12:20

  ['정릉천변 산책로']
 
  [성일중학교] 골목을 빠져 나가면 "정릉천"과, 그 위에 건설된 "내부순환도로"를 만납니다.
  [정릉천] 수변산책길로 북진합니다. 12분 정도 진행하면...


  ['개운산' 조망]                       12:32

  [제기1교]를 만나 도로로 올라 가서 [개운산]을 조망하고


  ['제기1교' 앞 이정표]

  ['영휘원 사거리']                      12:39

  [제기1교]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떡전교사거리] 방향으로 7분 정도 진행해서
  [영휘원사거리]를 만나면 좌회전 합니다.
  *<떡전>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 오거나 내려 갈때 떡 사먹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인데
  한자로 쓰면 '병점 餠店"이고 '수원' 남쪽에 "병점"이라는 동네도 있죠?
  동대문 밖에도 '청량리'에 "떡전"이 있었답니다.


  ['영휘원' 입구]                     12:42~12:56

  ['영휘원' 정문]

  이어서 유명한 "영휘원 永徽園" 정문에 도착합니다.
  입장료 1,000원, 노인들 무료
  코로나사태로 문을 닫았을거라 예상 했는데 다행이 열었고 발열체크를 하고 입장시켰습니다.


  ['영휘원' '숭인원' 전경]

  정문을 통과해 들어 가면 [숭인원]과 [영휘원]이 전체적으로 함께 보이는데


  ['가계도']

  먼저 이 무덤의 주인들 족보를 좀 살펴보고 들어 갑니다.
  "고종"의 정비인 '명성왕후"가 낳은 아들이 [27대 순종]이 되고
  "고종"의 세컨드인 "엄상궁"이 낳은 아들이 [영친왕]이죠.
  그러니까 [순종]과 [영친왕]은 이복형제지간인거죠.
  [영친왕]은 일본여자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우리 이름으로 [이방자]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이 지금 이곳 [숭인원]에서 잠자고 있는 "이진"인데...


  ['숭인원']

   [안내문]

  "숭인원 崇仁園"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고종"의 세컨드인 "엄상궁"이 낳은 아들인 [영친왕]과 
  '이토히로부미'가 애지중지 했다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이진"의 무덤이 되겠습니다. 일본여인의 피가 좀 섞인 황손 원자인데...
  2살 때 죽어 인생행로는 없으니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영휘원 홍살문']

  [비각과 묘]

  [안내문]

  "영휘원 永徽園"-"순헌황귀비 엄씨 묘 純獻皇貴妃 嚴氏墓"
  "고종"이 진짜로 사랑했던 여인은 [명성왕후]라기 보다 [명성왕후]를 뫼시는 [엄상궁]이었다고 하죠?
  이런 상궁을 '시위상궁'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명성왕후의 몸종'이라고 표현해도 되지요.
  [명성왕후]가 [엄상궁]보다 세살 많아 나이 차이도 거의 없었는데....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로도 많이 알려진 두 여인...
  [엄상궁]이 [고종]의 총애를 받자 [명성왕후]는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고 하죠?
  누구보다 미더웠고 가까웠던 엄상궁이었기에 배신감은 더했고, 
  차라리 자기보다 무지 어리고 예쁜 여자였다면 그래서라고 이해라도 했을 텐데
  인물도 나이도 별루인 [엄상궁]을 [고종]이 가까이 했다는 사실에 여자로서 크게 상처를 입었다죠.
  (하여간 남자나 여자나 왕이나 천민이나 사랑엔 장벽이 없나봐요~ㅎㅎ)
  그리하여 [명성왕후]에 의해 대궐 밖으로 쫓겨났던 [엄상궁]은 10년 후 을미사변(1896년)으로
  다시 대궐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됐답니다.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아관파천'은 그녀의 기지로 성사됐다고 하죠?
  이후 [고종]을 모신 [엄상궁]은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되니 [상궁]에서 졸지에 왕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 - "영원히 아름다워라~" 라는 '永徽園'입니다.


  ['어정' 위치]

   ['어정']

  [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는 "어정 御井"이 있고


  ['산사나무' 고사목]

  [천연기념물 해제 안내문]

  태풍 '볼라벤' 때에 피해를 입고 수명도 다해 고사목이 된 "산사나무"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것을 지정해제 한다고 알리고 있는데...
  멸망한 왕조의 그림자를 보는듯 합니다.

      제5부 "세종대왕 기념관"을 찾아서


  ['영휘원' 돌담길]                   12:57

  [영휘원]과 [숭인원]을 둘러 보고
  [영휘원] 돌담길을 따라 [세종대왕기념관]으로 가는데, 
  길바닥에 [동대문구 힐링산책길]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완 기념관' 입구]                   1:00~1:10

  [영휘원]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세종대왕기념관"이 붙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신도비 비각']

  ['세종대왕 신도비']

  [안내문]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된 "세종대왕 신도비"라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

  비각에서 조금 올라 가면 "세종대왕기념관"이 있는데 좀 초라합니다.
  그 이유는 "구 영릉터"에서 나온 유물들만 모아 놨고
  중요한 것들은 "여주 영릉"에 가 있기 때문이라고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동상>은 [덕수궁]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겼다고...


  ['구 영릉 석물']

  [안내문]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릉인 [헌릉]....'서초구 내곡동'에 있죠.
  [세종대왕]은 엄청 효자로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아버지 무덤 옆에 뭍어 달라고 어명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신하들도 어쩔수 없이 '내곡동 구룡산'과 '대모산' 사이에 있는 [헌릉] 옆에 릉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 [예종] 때에 자리가 나쁘다고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천장했답니다.
  그래서 [구 영릉]에 남아 있던 석물이 우연히 발굴되어 석물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게 됬다고...
  [여주 영릉]으로 천장 할때 석물들을 모두 새로 만들었기에 [구 영릉 석물]은 필요 없게 된 것.
  이곳이 [세종대왕기념관]이 된 사연이랍니다.


  ['주시경 선생 묘비']

  [안내문]

  "주시경 선생의 묘비"도 이곳에 있는데...
  선생의 묘가 국립묘지로 이장 될때 남겨진 비석을 이곳에 모셨다고...
  한글사랑이 남달라 한글 연구에 전념했기에 [세종대왕기념관]에 모신 사연이랍니다.
  이런 훌륭하신 분들은 대체로 너무 일찍 돌아 가셨지요. 선생도 39세에 급사하셨습니다.


  ['수표']

  "수표 水標 보물838호"
  <청계천 수표교>에 있다가 [장춘단공원]으로 옮기고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네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던데...어느게 진짜인지

      제6부 "홍릉터 洪陵址"를 찾아서


  ['산림과학원 정문' 조망]                        1:10

  <세종대왕기념관>의 정문으로 나가면 건너편에 "국립산림과학원" 정문이 보입니다.
  정문 앞으로 건너 갑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휘원-숭인원"을 [홍릉]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아니올씨다...ㅎ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숲) 정문']                     1:11~1:40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숲"
  "국립산림과학원"은 옛 "홍릉터"를 까뭉개고 설립한 우리나라 산림과학원이랍니다.
  그러니까 산림과학원 전체가 "옛 홍릉 터"라는거죠.
  [국가문화유산]이라는 싸이트에는 "홍릉터 표지판"을 정문 좌측 숲속에 세웠다고 나와 있는데
  숲속을 모조리 뒤져봐도 그런 표지판은 없었고, 정문 경비에게 물어봐도 그런 얘기는 처음이라고
  모른다고해서 미리 조사한 "홍릉터"를 찾아 들어 갑니다.


  ['홍릉 터' 찾아 가는 길]

  먼저 제가 답사하고 집에 와서 만든 '카카오위성지도'를 편집한 "홍릉터 위치도"를 보여 드림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자세한 안내도가 없었는데 이제 제가 처음으로 만들어 올립니다.
  앞으로 찾아 가실 분들에겐 무지 도움이 될것이며 찾아 갈 용기도 생길 것입니다.


  ['산림과학원 본관' 앞]

  정문에서 직진하면 [본관] 건물을 만나는데 [본관] 좌측이나 우측으로 가면 되는데
  저는 좌측으로 [본관]을 돌아 갔습니다.


  ['산림보존연구관']

  [본관] 건물 좌측으로 돌아 갔는데, 뒤에 [산림보조연구부동]이라는 건물이 또 있습니다.
  이 건물이 있는 자리는 앞으로 알게 되지만 [홍릉]에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 바로 뒤가 "홍릉"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우측으로 돌아 가면...


  ['침엽수원'']

  ['어정' 앞]

  [본관] 뒤 [연구부동]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 가면 <침엽수원>이라는 숲길이 있고
  이어서 [연구부동] 건물의 우측 옆에 "어정 御井"이 있습니다.


  ['어정']

  [안내문]

  [고종]은 당뇨등 질환이 있었는지 가는 곳마다 우물을 만들었군요.


  [갈림길]

  [오름길]

  [어정]을 지나면 바로 이런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으로 나무 계단이 있습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 가면....


  ['홍릉 터']

  예상보다 넘 초라한 "홍릉터 洪陵址"를 만납니다.
  봉분이 있었던 자리엔 밧줄로 둘러 그 흔적을 표시했고 표지석이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안내판에 안내문과 옛 사진이 빛바랜 모습을 하고 옛날을 추억하고 있어서 어쩐지 찐~했습니다.
  [명성왕후 민비]에 대해선 모두 잘 알기에 생략하고...
  안내판에 있는 사진들을 촬영해 확대하여 보여 드림니다.


  [안내문]

  워낙 유명해 모두 아는 분이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명성왕후]는 쪽바리들이 시해해 시신을 토막내고 이불을 덮어 석유를 뿌려 화장했기에 실제 시신은 없지요.


  ['옛 홍릉' 사진]

  ['옛 홍릉' 전경 사진]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촬영해서 포토샾으로 좀 밝고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조금전에 올라 오면서 본 [산림과학원 본관]과 [연구부동] 건물이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터]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천장산" 산줄기가 인상 깊은데 나무가 없는 돌산이었군요.
  지금은 [산림과학원]이 [홍릉숲]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잠시 후 저 산을 등산 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 洪陵"을 예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보면 


  [현재 '남영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제7부 "천장산 하늘길"를 찾아서


  ['천장산 하늘길' 가는 길]                     1:40

  [홍릉터]를 둘러 보고 다시 [산림과학원 정문]으로 나와 좌측 <경희대> 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산림과학원] 울타리를 따라 울타리 끝까지 가면....


  ['천장산 숲길' 입구]                         1:43

  [산림과학원] 울타리가 끝나는 곳에
  "천장산 숲길입구"가 나타 납니다.
  좌측은 [산림과학원]이고 우측은 [KAIST서울캠퍼스]였습니다.


  [안내도]

  이 안내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특히 기억하고 가야 할 장소는 "경희여자중고등학교""연화사"입니다.
  왜냐하면 [경희여고] 자리가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의 묘>였던 "회묘터"이기 때문입니다.
  [천장산]에 올라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데크길]

  [첫번째 쉼터-홍릉터 조망처]

  "천장산 하늘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길엔 데크로 길을 만들어 이용하기 쉽고
  좌측엔 [산림과학원-홍릉터]가 있으며 우측엔 [KAIST서울캠퍼스]가 있더군요.
  5분여 데크길을 오르면....


  ['홍릉터' 조망]                      1:48

  첫번째 쉼터가 있는데 "홍릉터"를 조망 할수 있다고 안내하는데
  숲으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데크 내림길]

  [두번째 쉼터]                       1:54

  다시 5분 정도 데크를 더 진행하면 두번째 쉼터를 만나는데


  ['천장산' 안내문]

  "천장산 天藏山 140m"에 대한 설명 안내판이 있더군요.
  "하늘이 숨겨둔 산"이라는 의미의 산이어서 이 산 곳곳에 왕실의 묘를 썻다고...
  "홍릉" "회릉" "의릉" "영휘원.숭인원"등의 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의릉"과 "영휘원.숭인원"만 남았다고


  ['KAIST' 기숙사]

  두번째 쉼터를 지나니까 우측에 "KAIST 서울캠퍼스 기숙사"가 아주 가까이 있더군요.


  [데크길 끝-군사도로 만남]                       1:58

  [천장산 하늘길] 입구에서 데크길을 10분 정도 진행하니 데크길이 끝나고 군사도로를 만납니다.
  [천장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상당한 규모로 현재 있고, 예전엔 [중앙정보부]가 우측 아래에 있어서
  "숨겨진 산"이라는 이름처럼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 당했는데
  최근인 2020년 1월 17일에 [동대문구]가 길을 새로이 만들고 닦아 산책로로 개통했답니다.


  ['홍릉시험림']

  [군사도로]

  데크길이 끝나면 군부대 진출입로인 군사도로가 이어집니다.
  100m 정도 진행하면 어느 이름모를 봉우리에 오르는데 조망이 트입니다.


  ['경희대' 조망]                    2:00

  [천장산]의 오른쪽에 있는 [KAIST서울캠퍼스]를 벗어나 이제부턴 [경희대]가 산 아래에 펼쳐집니다.
  다시 150m 정도 더 진행하면....


  ['천장산 하늘길']        

  ['회묘 터' 조망]                         2:03

  우측 아래에 "경희여고""연화사"가 보입니다. 모르고 가면 당연 모르고 지나 치겠죠? ㅎ
  [경희여고] 자리가 옛날에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의 릉""회릉 懷陵"이 있던 자리.
  [조선 제9대 성종]의 계비로 <연산군>을 낳은 [제헌왕후]였지만 정적들의 공격으로 폐위돤 "폐비 윤씨"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피의 보복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며 [회릉]은 [회묘]로 격하되고 ....
  여러 영화나 드라마로 무지무지 울궈먹은 "여인천하"의 주제가 된 이야기여서 생략하고...
  잘 모르는 거 두가지 덧붙이자면...
  가수 '김영임씨'가 불러 히트했던 "회심가 懷心歌"가 "폐비 윤씨"를 노래한 '恨많은 노래'라는거...
  또 하나는 현재 "회기동 回基洞"이라고 하는 지명은 원래 "회묘동 懷墓洞"이었답니다.
  [제헌왕후]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懷墓"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것인데 
  "회묘 懷墓"가 "한 많은 무덤"이라는 의미까지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기분 나쁘다고
  한자를 "회기 回基"로 바꿧는데 "묘 墓""터 기基"가 비슷하죠?
  '한 많은 의미'의 "懷"도 "돌아 올 回"로 바꿔 "회기동 回基洞"으로 바꿨다고...^*^ ^.^
  "연화사"는 "의릉의 원찰"인데, "회묘" 바로 옆에 있어 "회묘의 원찰"로 오해 받기도 한답니다.
  "의릉"은 잠시 후 탐방합니다.


  ['천장산 하늘길']

  ['북한산 보현봉'-'개운산' 조망]                   2:09

  조금 더 진행하면 좌측 북서쪽으로 "북한산 보현봉""개운산"이 조망됩니다.
  아래에 펼쳐지는 동네는 [월곡동]이며 산 아래 붙어 있는 건물들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더군요.


  [군사도로]

  ['천장산' 정상부]                      2:11

  조금 더 진행하면 "천장산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군부대 출입문이 있으며, [천장산 하늘길]은 우측으로 내려 가야 하더군요.
  [천장산 하늘길]이 [천장산 능선]을 관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군부대 때문...


  ['천장산 정상']

  "천장산 140m 정상"은 좌측 군부대 안에 있지만 등산객들을 위한 정상은 이곳이랍니다.


  ['천장산' 허릿길]

  [데크 내림길]

  [천장산] 정상부에서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다시 데크길을 조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천장산 경사면'에만 데크를 설치했군요.
  첫번째 데크 계단을 내려 가면....


  ['봉화산' 조망]                      2:15

  [이문동]이 조망되며 '중량구 신내동'에 있는 "봉화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잠시후에 알아 보기로 하고


  [내림길]

  [전망대]                     2:20~2:25

  10여분 내림길을 내려 가면 전망명소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조망을 하고 갑니다.


  ['용마산-망우산' 조망]

  먼저 동남쪽으로 [망우리공동묘지]가 있는 "망우산"과 "살곶이목장"의 울타리 역활을 했다는 "용마산"이 보이고
  그 아랫 동네가 "면목동 面牧洞"인데 "살곶이목장과 마주 보고 있는 동네"라고 "面牧洞"이 되었다고


  ['불암산' '봉화산' 조망]

  동쪽으로는 "봉화산"과 "불암산"이 조망되는데....
  바로 아래엔 "옛 중앙정보부" 건물이 보입니다.
  이 부분은 줌인해서  보겠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줌인]

  "불암산과 수락산"은 [서울-경기도 市界]가 지나는 산줄기로 [수락지맥]입니다.
  저 지맥은 [한북정맥]의 <축석령> 근처에서 분기하여
  "용암산-수락산-불암산-구릉산-망우산-용마산-아차산"으로 이어져 "광나루"에서 그 맥을 다 합니다.
  "수락산" 정상 부근에 "용굴암"이라는 절 암자가 있다는거 아시나요?
  [임오군란] 때에 [명성왕후 민비]가 피난 가서 기도하며 며칠 숨어 지냈다는 절간입니다.


  ['옛 중앙정보부' 줌인]

  "옛 중앙정보부"가 숨어 있습니다.
  옛날 '유신시대'에 여기 끌려 가면 멀쩡한 사람도 간첩이 되었다죠? 무시 어시한 곳이었는데...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하여 발표한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미술관 음악실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네요.
  [의릉]과 [옛 중앙정보부 강당]을 기억해 두세요. 잠시후 방문합니다.


  ['경희대']

  [내림길]

  내림길을 5분 정도 내려 가면...


  ['경희대 본관']                         2:30

  [경희대 본관]이 보입니다.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라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답니다.


  ['천장산 들날머리']                       2:32

  정상에서 20여분 내려 가면 날머리를 만나는데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어린이도서관이 있습니다.


  ['숲속 작은 도서관']

  "숲속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문동어린이도서관' 앞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나갑니다.


  [안내도]

  여기도 [천장산 하늘길] 안내도가 있고


  ['이문동' 골목]                     2:33

  [어린이도서관]에서 직선으로 뻗은 골목길을 내려 갑니다.
  5분 정도 걸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계속 직진해 가면


  ['GS25편의점']                     2:38

  ['한예종' 가는 길]

  골목의 끝에는 [GS25편의점]이 있는데 여기서 좌회전 하여 4분 정도 직진하면...


  ['한예종 미술원' 후문]                    2:42

  [옛 중앙정보부]였던 [한국예술종합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이 문을 통과해 [의릉]으로 가야 합니다.
  이 문을 통해 몇백m만 가면 [의릉]인데 문을 걸어 잠거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코로나사태와 입시때문이라고...ㅠㅠㅠ
  이곳을 통과 못하여 '이문동'을 한바퀴 돌아 [의릉]으로 가야 했습니다.
  2~3분이면 갈길을 30여분을 돌아야 했으니.... 에구 ~ㅎ
  코로나사태가 끝나고 나면 통과 할수 있으니 후답자들은 참고 하시길


  ['GD25편의점' 회귀]                     2:46

  어쩔수 없이 다시 [GS25편의점]으로 돌아와 사이다 한캔 사먹고 '이문동'을 한바퀴 돕니다.

 
  ['이문동' 한바퀴]

  '이문동'은 현재 대단위 재개발 사업을 하고 있더군요.


  ['이문동 삼거리']                    3:02

  [이문동 삼거리]에 도착해서 좌측 [의릉]을 다녀와 우측 [신이문역]으로 갈 예정입니다.


  ['의릉' 앞 거리]

  ['의릉' 입구]                        3:07

  30여분을 빙 돌아 [의릉] 입구에 도착 했는데 [의릉 입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의 입구와 함께 있는데....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한예종 미술원' 정문]

  <옛 중앙정보부>인 조금전 후문에서 오는 정문이 있는데....속이 쓰립니다.
  잠깐이면 될껄 30여분을 돌았으니...


  ['의릉' 입구]                      3:09~3:40

  [의릉]으로 들어 갑니다. 입장료 1,000원, 노인들 무료



  ['의릉 조감도']

  "의릉"의 전체적 규모를 조감도를 통해 알아 보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왕과 왕비의 봉분이 좌우로 배열된게 아니라
  앞뒤로 배열 되었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의릉']

  [안내문]

  "의릉 懿陵"
  어려운 한자 "의 懿"는 '아름답다'라는 뜻. <영휘원>의 "徽"와 비슷한 뜻.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릉입니다.
  재위 기간이 고작 4년이고 병약하여 일찍 죽어 이렇다할 업적이 없어 잘 모르는 왕이죠.
  하지만 "장희빈의 아들"이라면 금방 쉽게 알수 있죠? ㅎ



  ['의릉']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세자인 아들을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해
  [숙종]도 그것마져 불허 할수 없어 세자를 만나게 해 주는 순간 아들의 성기를 붙잡고 잡아 당기며
  "내가 낳은 이씨 가문의 아들을 두고 죽을 순 없다"고 발악을 하며 아들 성기를 놓지 않았다죠.
  그통에 아들은 기절하고, [숙종]은 "저 요물을 한칼에 베지 못할까?”라고 분노하며 사약을 강제로
  먹이라고 "입을 벌려 사약을 넣어라! 천하의 요망된 것!" 호령하여 죽였다죠..
  그래서 아들 [경종]은 성불구자가 되어 후사 없이 일찍 죽게 되었다는게 일반적인 통설이죠.
  '함께 죽으면 죽었지 혼자는 못 죽겠다'는 독한 여자의 보복이었다는거고...ㅎ


  ['의릉' 좌측 숲길]

  ['구 중앙정보부 강당']

  [안내문]

  [의릉]의 좌측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구 중앙정보부 강당"이 있는데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곳이라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답니다.


  ['한예종 미술원']

  강당 바로 옆에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이 붙어 있습니다.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강당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사용되고


  ['이문동삼거리']                  3:43

  ['신이문역']                         3:50

  [의릉]과 [옛 중정]을 둘러보고 [이문동삼거리]로 돌아가 [신이문역]에서 귀가 했습니다.


  [실트랙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km였으며, 4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역사유적과 정릉천, 천장산등을 걸었는데 역사 공부도 하며 걷는 즐거운 도보여행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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