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서울역사탐방』  
 『성동구-광진구』"살곶이목장과 모진여인을 찾아서"



  [구글맵]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지하철2호선 한양대역]에서 출발하여 [한양대] 안에 있는 "마조단"을
  찾아 보고 "전관원"을 지나 "살곶이다리"를 건너 "살곶이목장" 이었던 현재의 "뚝섬"을 둘러 봅니다.
  그리고 [단종]과 [명성왕후]가 다녀 간 "화양정""어린이대공원"을 답사하고, "광나루"까지 갑니다.


  ['한양대역' 2번출입구]                   11:20

  2020년 12월 2일 (수) 흐림 
  이번 서울 "살곶이목장-뚝섬" 역사 탐방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던 지난 세월이 한스러웠습니다.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러 현장으로 도보여행을 떠납니다.
  "살곶이목장-뚝섬" 역사 탐방은 <지하철2호선 한양대역>의 [2번출입구]에서 시작합니다.
  [2번출입구]는 [한양대] 교정 안으로 직접 연결되 있더군요.


  ['성동구 안내지도']
  
     [실트랙]

  지도에 표기된 [마조단 터]와 [전관원 터] [살곶이다리] [살곶이목장 터] [성덕정 터]를 찾아 볼 예정이니
  미리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2번출구 앞']

  <한양대역2번출입구> 앞엔 [학생복지관]과 [신본관], [역사관]이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에 [한양대 캠퍼스]를 다녀 간 이후 엄청나게 변한 [한양대] 속으로...go go
  먼저 "마조단"을 가기 위해서 우측으로 올라 가는데......50m 쯤 가면...


  ['노천극장']

  ['정몽구미래자동차연구센터']                 11:21

  대단한 규모의 <노천극장>을 만나고, 그 위에 세워진 "정몽구 미래자동차 연구센터"가 환영합니다.
  연구센터 뒤로 "마조단"이 있다는 "백남학술정보원"이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마조단"은 [한양대 캠퍼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백남학술정보관']                      11:23~11:28

  ['마조단 터']

  ['마조단 터' 표지석]

  "백남학술정보원" 앞 동쪽 끝 화단으로 가면
  "마조단 馬祖壇" 표지석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는 곳입니다.
  자동차가 생기기 전까지 예전엔 가장 빠른 교통수단으로 "말 馬"이 독보적 지위를 누렸죠.
  관리들의 출장 등 사람들의 빠른 이동, 곡물등 물품의 이동, 전쟁 등등 말은 모든 분야에서 현재의 자동차와
  같은 역활을 했으니 엄청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래서 조정에선 전국 각지에 <말 목장>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최고의 말목장이 "살곶이목장"이었다는데
  현재의 "뚝섬 지역"이었다는군요.  이런 내용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으니 ㅉㅉ
  [한양대] 북쪽에 있는 '마장동'의 "馬場"은 '말을 훈련시키는 곳'이었고, 
  '말을 양육시키는 곳'은 앞으로 답사하게 될 "뚝섬"-"살곶이목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곶이목장"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마조단 馬祖壇"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한양대] 학교 건물로 [살곶이목장]에 대한 조망이 막혔지만....
  개인적 생각을 덧붙이자면...
  조금전에 올라 오면서 본 "정몽구 미래자동차 연구센터"가 이곳에 세워진게 우연은 아닌듯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말목장'은 현재의 '자동차 공장'과 같은 역활이었기 때문이죠. "교통수단을 생산하는 곳"이기에...
                               "옛 말목장 = 현재 자동차공장"
  "말의 조상"은 "천사성 天駟星"이라고 한다는데, "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라고 한답니다.
  빠르고 튼튼한 말과 같은 성능 좋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천사성 天駟星"에게 제사를 올리며 기원합니다.


  ['한양대역2번출입구' 앞]                11:32

  ['4번출입구']

  ['4번출입구'에서 조망]

  "마조단 馬祖壇"을 찾아보고 다시 <한양대역2번출입구>로 돌아와 [4번출입구]로 나가면 육교를 지나게 되는데
  육교 위에서 [성동교] 방향을 바라보면, <덕수고>와 <행당중학교>가 나란히 보입니다.
  <행당중학교> 앞으로 가면...


  ['전관원 터' 표지석]                    11:36

  "전관원 箭串院" 터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행당중학교> 교문 앞에 있습니다.
  "원 院"은 조선시대까지 전국 곳곳 주요 고개나 나룻터 등에 설치한 "공용 여관"이었죠.
  요즘 말로 '게스트하우스'라고 해도 될런지...
  "전 箭"은 "화살"이라는 뜻이고, "관 串"은 "곶"으로도 발음하는데 해안이나 강 어귀등 "돌출부"를 의미하죠.
  그러니까 "箭串"은 "화살 촉 모양으로 뾰쪽 돌출된 곳"을 의미하겠지요.
  즉, 현재의 "뚝섬""살곶이"라는 곳의 지형이 <중량천>이 <한강>에 합수하는 곳이며
  그 모양이 "화살 촉 모양"의 삼각주라는 데에서 탄생된 지명이라고도 한답니다.
  그래서 [한양]에서 <중량천>을 건너 [강원도]나 [강남]을 갈때 반드시 건너야 할 "살곶이다리 箭串橋"가 있는
  이곳에 쉬어 갈수 있는 "공용 여관"인 "전관원 箭串院"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동교']                 11:37

  [강변로]

  <중량천>과 <한강>이 합수하는 이곳 <중량천>엔 지금은 [성동교]가 있고 [2호선 전철교]등 여러 다리가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이용했던 "살곶이다리 箭串橋"로 가기 위해 [성동교] 아래로 돌아 내려 가면...


  ['성동교' 밑 통과]

  ['살곶이다리' 조망]                 11:43

  [성동교] 밑을 통과하여 강변로를 쬐끔 진행하면 "살곶이다리 箭串橋"가 펼쳐집니다.
  <중량천> 하구의 모습도 함께 감상하게 됩니다.
  [한양]에서 [강원도]나 [강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용해야 했던 다리였기에
  '조선시대'에 건설된 돌다리로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고 큰 고속도로 다리였다는 다리입니다.
  지난번 "청계천-살곶이다리-서울숲 답사기"에서도 자세히 알아 본 다리입니다만
  오늘은 "살곶이목장"을 답사하기 위해 다시 온 것입니다.
  이 다리는 조선 최고의 석조토목건설기술자라는 "박자청"이라는 분이 설계 시공했다는데
  조선 "석조예술의 꽃"이라고 극찬한답니다.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되 있습니다.


  ['살곶이다리']

  [안내문]

  [지명의 유래]

  "살곶이다리 箭串橋"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설명되 있습니다.
  단, [태조 이성계]와 아들 [태종 이방원]이 다시 만나 아들에게 화살을 쏜 곳이라는 내용에 대해선 고증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함흥'에서 돌아 온 [태조 이성계]는 "함흥"에서 현재의 "의정부"를
  통과해 한양으로 갔는데, 기록에도 나오드시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맞이하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마련한
  환영장은 현재의 "의정부"였고, 화살을 쏜 환영장과 父子간의 첫 상봉 장소는 "의정부시 호원동"에 있는
  <회룡사 입구>로서 그곳에 가보면 공식적으로 표지석을 세워 놨습니다. 
  "의정부시"라는 지명이 탄생되게 되었다는 유래와 함께...
  제가 직접 방문하고 쓴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http://cafe.daum.net/paraanmoon/NYWT/1"

  신빙성이 더 있다고 생각되는 지명의 유래는 앞서 "전관원 箭串院"에서도 언급한 유래라고 생각됩니다.
  "전 箭"은 "화살"이라는 뜻이고, "관 串"은 "곶"으로도 발음하는데 해안이나 강 어귀등 "돌출부"를 의미하죠.
  그러니까 "箭串"은 "화살 촉 모양으로 뾰쪽 돌출된 곳"을 의미하지요.
  즉, 현재의 "뚝섬""살곶이"라는 곳의 지형이 <중량천>이 <한강>에 합수하는 곳이며
  그 모양이 "화살 촉 모양"의 삼각주라는 데에서 탄생된 지명의 유래가 더 와 닫습니다.
  생각은 자유...


  ['옛 살곶이다리' 모습과 '중량천']

  [1926년 6월 10일 살곶이 다리를 지나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대여 행렬]

  '조선'의 마지막 왕..[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여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가 뭍혀있는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 洪陵"으로 가기 위해
  [살곶이다리]를 건너고 있는 상여 행렬 사진입니다.
  [순종]은 아버지 어머니가 잠자는 "홍릉" 옆 "유릉 裕陵"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다리를 먼저 건너간 비운의 여인이 있습죠.
  1905년 [순종]의 첫 부인인 "순명효왕후 민씨"의 상여 행열도 이 다리를 건너 "유강원"으로 갔지요.
  "유강원"은 현재의 <어린이대공원>에 있었는데 그 흔적을 찾아 잠시후 답사 할 예정입니다.


  [뒤돌아 본 '마조단']                  11:47

  <살곶이다리>를 건너 뒤돌아 본 [한양대]입니다.
  "마조단 馬祖壇"이 있었던 터는 [한양대]가 있는 동산의 꼭대기에 있어서 주변 광활한 말목장을
  굽어 볼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동산 꼭대기 보다 높은 건물들로 감옥생활을 하는듯...ㅠㅠ
  조선 초기 대표적 정치인인 "서거정 선생"이 <살곶이 주변>을 돌아 보고 쓴 시조 한수....

            손바닥처럼 판판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
            맑게 갠 날 따뜻한 바람이 사람을 훈훈케 하네.
            아침에 푸른 적삼 잡히어 술을 사서 삼삼오오 벗을 지어
            봄놀이를 나가서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술잔을 속속히 돌리다보니,
            고래처럼 마셔대다 술병은 쉬 말라버리네.
            밝은 달밤에 준마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옥피리 소리 잦아들 제 살구꽃은 떨어지네. 
               - 서거정, <전교심방(箭郊尋芳)>에서 -


  ['살곶이지하보도']                  11:47

  다리를 건너면 <살곶이지하보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지하보도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살곶이목장"의 과거 속으로 안내됩니다.


  ['성수동둑방길']

  지하육교를 통과해 나가면 지난번 [서울숲]으로 진행했던 <성수동둑방길>이 우측으로 연결되지만
  오늘은 이 길로 가지 않고


 [도로 건넘]                   11:49

  둑방길 아래에 있는 도로를 건너 갑니다.


  ['상원 버스정류장']                 11:52

  "상원 버스정류장"이 있는곳에 "GS주유소"가 있고 주유소 앞에 사진 속에 있는 
  "살곶이목장터"라는 표지판이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주유소와 안내판은 찾을수 없었습니다.
  주유소를 없애고 신축건물을 짓고 있어서인가 봅니다.
  여하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뚝섬"이 예전에 "살곶이목장"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성동교 남단 사거리']

  ['뚝섬역 사거리']

  ['서울숲 입구']

  "살곶이목장터"라는 표지판이 있었다는 [상원버스정류장]에서 "성덕정 터"를 찾아 갑니다.
  [성동교남단 사거리]에서 좌틀하여 계속 직진합니다.
  그러면 [서울숲 입구]를 지나 "수도박물관"을 만나는데, 좌측에 있는 [강변건영아파트]를 끼고 좌회전하여
  조금 진행하면....


  ['성수동 성당']                     12:12~12:40

  ['성수동 성당 입구']

  "성수동 성당"을 만납니다.
  철저한 무신론자가 왜 성당을 찾아 왔느냐고요? ㅎ
  이곳이 "성덕정 聖德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찾아 온 것입니다.
  "뚝섬"은 왜 뚝섬이라고 명칭이 붙게 되었을까?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둑섬", "둑도纛島"라 불렸다고 합니다. 
  [둑도→뚝도→독도(纛島)] 이후 "뚝섬"으로 발음이 바뀌었다네요.


  ['성덕정 터']

  바로 이곳이 그 "둑기 纛旗"를 세우고, 국왕이 군대를 사열 했다는 요즘 말로 사열대였답니다.
                 
                    ['정조대왕' 화성 행차시 "둑기 纛旗 "]
  기록에는 [태종]과 [세종대왕]이 주로 이곳을 자주 찾아와 군인들의 훈련상황과 사열을 받았다고 합니다.
  옛날엔 한강물이 이곳 바로 아래까지 들어 와서 경치가 무척 좋았답니다.
  그러나 현재는 한강 개발로 제방이 들어 서고, 하늘 높이 건물들이 앞을 가려 한강은 볼수 없군요.
  긴 세월을 가늠케하는 느티나무는 홍수가 날때마다 떠 내려 가는 사람들이 붙잡고 살아 나는 생명줄 같은
  역활이어서 '사람 살리는 나무'라고 했다는데, 이 지역은 홍수가 날때마다 피해를 입는 지역이어서
  홍수가 나면 이곳은 항상 섬처럼 되었는데, 특히, 모두 잘 아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지형이
  완전 섬 모양이 되어, 1927년에서 1938년까지 12년간  5,712m의 제방을 쌓아 한강에 잠기지 않게 해서
  현재의 "뚝섬"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게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느티나무]

  이 자리는 옛날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였답니다.
  그런데 자유당 시절 '이기붕(李起鵬)'이 면사무소 터를 천주교회에 매도함으로써 "성덕정"이라는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고, 네 그루였던 느티나무 두그루는 베여지고 두그루 느티나무 만이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세월을 짐작케 해 주고 있습니다.
  "성수동(聖水洞)"이라는 동명(洞名)의 유래도 
  이 "성덕정"의 "성(聖)"자와 "뚝도수원지(水源池)"의 "수(水)"자를 따서 지었다고...


  ['건대입구역']                1:06

  [성덕정 터]였던 [성수동성당]에서 이곳 [건대입구역]까지는 편의상 시내버스 [2224번]을 타고 이동 했습니다.
  거리는 4~5km정도 되는데 갈길이 멀어 시간 단축을 한것입니다.
  [건대입구역] 사거리를 건너 [건국대]로 들어 갑니다.


  ['건국대 상허문']                 1:09

  [건국대 안내도]

  "건대병원" 옆에 있는 "건대 상허문"이라는 문으로 들어 갑니다.
  위치는 안내도를 참고하여 다녀야 합니다. 너무 넓기 때문에....


  ['상허 유석창박사 동상']                 1:12

  [상허문]을 통과하여 직진하면 '건대 설립자'인 "상허 유창석 박사 동상"이 있고...
  우측으로 나가면



  ['건국대 일감호']

  [건국대]의 상징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감호 一鑑湖"를 만납니다.
  오랜만에 찾은 "一鑑湖"인데 "거울같이 맑은 호수"란 뜻이랍니다.
  제가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겨울이면 이 호수에서 스케이트 빙상경기가 열렸고, 저는 낙원동에서 여기까지
  스케이트를 타러 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살곶이목장"의 흔적을 찾아 온 것입니다.
  [살곶이목장]은 앞에 보이는 [용마산]과 [아차산], 그리고 북쪽의 [배봉산]까지 엄청 너른 목장이었답니다.
  조선시대 국립말목장으로는 최고 최대 목장이란게 확실히 느껴집니다.
  "모진여인의 유래"
  이 인공호수는 원래 매우 큰 습지였는데 [건국대]를 세우며 습지를 아름다운 호수로 변모시켰답니다.
  뚝섬 제방이 건설되기 전까지 '성수동''자양동''화양동' 일대는 비가 좀 많이 내리면 잠기는 홍수 주위
  지역이었으니 습지가 많이 광활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호수는 "살곶이목장"의 말들이 뛰어 놀다 갈증이 나면 와서 물을 마시던 습지-늪지 였다는거죠.
  당시는 말들이 물을 먹다가 이 습지-늪지에 빠져 죽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 동네 여인들이 널판지를 깔고 늪지에 들어가 말을 건져 내어 말을 잡아 고기를 나눠 먹었다는데
  이런 억척스런 여인들을 다른 동네 사람들이 "모진여인들"이라고 불렀고,
  "모진여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자연스레 동네 이름이 "모진동 毛陳洞"이 되었답니다. 
  현재 '건국대' '세종대'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지역이 원래 "모진동"이었는데, 
  2009년 4월 20일에 동네 이름이 좀 그렇다고 "화양동"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바꾼지도 얼마 안되었군요.


  [뒤돌아 본 '자양동']

  ['홍예교']                   1:25

  '무지개다리'를 의미하는 "홍얘교 虹霓橋"는 옆에 있는 작은 습지와 연결되는 수로 위 였는데
  그 작은 습지는 매립되어 없어 지고 그 자리에 학교건물이 들어 서고...


  ['서북학회회관' 조망]

  ['구 서북학회회관']                    1:29

  [안내문]

  "구 서북학회 회관"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제가 학창시절 살았던 [운현궁] [교동국민학교]가 있는 "낙원동 사거리"에 있던 건물인데...


  ['황소 상']                  1:32

  [건국대]의 상징인 "황소 상"과 "박목월시인"의 "황소예찬" 詩를 흘깃 보고


  ['건국대 건국문']                 1:36

  예전엔 [건국대 정문]이었던 [건국문]을 통과해 나가면


  ['화양정' 가는 길]                    1:38

  바로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만나는데, [화양정]으로 가기 위해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골목]

  건대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골목인듯....
  골목을 4분 정도 진행하면...


  ['능동로']                    1:42

  [7호선 지하철]이 다니는 [능동로]를 만나 건너,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화양정' 가는 길]                 1:43

  [화양정]으로 들어 가는 골목 입구에선 [용마산]이 보이고


  ['화양정' 조망]

  ['화양동주민센터']                  1:45~1:50

  바로 "화양동주민센터"를 만납니다.
  이 주민센터 앞에 "화양정 터"가 있었답니다.


  ['화양동느티나무공원']

  [화양동 주민센터] 앞에는 "화양동느티나무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이 우리 역사에서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어서 찾아 왔습니다.
  공원 입구 우측에는 특이하게 야외도서관이 설치되 있군요.


  ['화양정 터' 표지석]

  "화양정 華陽亭"
  "화양정"이 세워진 때는 [세종 14년(1432)]이며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정자라고 합니다.
  "살곶이목장""마장원 馬長院"에 있는 정자로 '군사훈련' '사냥' '계회 契會'에 이용 되었다고 합니다.



  ['화양동 느티나무']

  [안내문]

  [서울특별시 제2호 기념물]로 지정되 있다는 700여년 나이의 느티나무가 기나긴 세월을 굽어 보고 있습니다.
  여기엔 "화양정 華陽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마장원 馬場院"이라는 말목장 관리 사무소와 축사가 있었답니다.
  제가 웹써핑으로 구한 옛 그림을 보여 드리면 더욱 실감 납니다.


  ['마장원' 그림]

  [안내문]

  이곳 馬場院의 규모와 위치를 알려주는 옛 그림입니다. 작가는 미상이라고 하네요.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제가 지금까지 지나오며 언급한 내용을 어느정도 알수있습니다.

  "중종반정과 화양정"
  이 이야기는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에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의
  "화양정"에 관한 회고담입니다. 이 회고담은 [연산군]이 행한 수많은 기행 중 "화양정"에서 행한 기행에
  관하여 알 수 있게 하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는 것을 퍼 온 것입니다.

  나는 7세에 군보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 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 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 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진헌마정색도 進獻馬正色圖']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되 있다는 '진헌마정색도 進獻馬正色圖'"살곶이목장"의 전체 규모를 더욱 확실히 알려 줍니다.
  제가 [한양대 마조단]에서 [성덕정]을 지나 [건국대]등을 지나온 지역과 '용마산' '배봉산'까지 펼쳐지는
  목장이 한눈에 감지 됩니다.


  ['화양정' 확대]

  위의 '진헌마정색도 進獻馬正色圖'에서 "화양정 華陽亭"을 확대 캡쳐했습니다.
  불행이도 華陽亭은 1911년에 큰 벼락을 맞아 불타고 무너져 없어 졌다는군요.
  [조선 제5대왕 단종]의 '슬픈 귀양길"에 "화양정"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합니다.
  먼저 [단종]의 유배길 루트를 알아 보겠습니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1451년 6월 21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降封爲魯山君, 俾出居寧越, 厚奉衣食, 以保終始, 以定國心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
  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1451년 6월 22일]에 실려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魯山君發向寧越, 上命宦官安璐, 餞于華陽亭, 魯山謂璐曰: "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 是吾罪也"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노산군]은 1451년 6월 21일 한밤중에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북대문인 [숙정문]으로 나가 '성북동'을 거쳐
  [낙산] 城밖에 았는 "청룡사 우화루 雨花樓"로 가서 [정순왕후]와 마지막 하룻밤을 보냈답니다.
  그래서 '꽃비가 내렸다'는 "우화루 雨花樓"랍니다.
  그리곤 "청계천 영도교"로 가서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곧바로 '왕십리'를 지나  조금전 오전에 들렸던 [행당중학교]에 있었다는 공용 여관인 [전관원]에 도착하고...
  당시엔 [살곶이다리]가 건설 중이어서 배를 타고 [중량천]을 건너 이곳 "화양정"에 도착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손톱끝 많큼의 마안함은 남아 있었는지 [수양대군-세조]는 "화양정"으로 내시인 "안노"를 보내 전송했다고
  [세조실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날 [세조]가 보낸 내시 "안노"의 전송을 받으며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이동하여, '여주'에서 '영월'로는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갔다고 하는데....
  제가 [양평물소리길3코스]를 답사 할때 '양평군 양평읍 회현2리' 마을회관에 있는 "가소정 可巢亭"에서
  뜻하지 않게 [단종 유배]에 대한 색다른 내용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제6대왕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귀양 갈때에 남한강을 따라
  배로 압송되었는데, 그런데 운항 중에 홍수를 만나 이곳 "회현나룻터"에 피해있다가 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양평 회현리'는 [남한강]과 [흑천]이 합류하는 곳이더군요.
  '한강'에서 [여주] [단양]등 상류로 배가 운항하는 시기는 대체로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이었다고 합니다.
  수심이 어느 정도 되야 배가 운항할수 있겠고, 1451년 6월 23일이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또한 [임오군란] 때에 피신을 가던 [명성왕후]도 이 "화양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광나루]를 건너
  [장호원]으로 갔다고 하는데...


  ['세종대' 조망]                 1:51

  ['어린이대공원사거리'-'광진광장']                  1:55

  ['세종대' 방향]                   1:57

  "화양정 華陽亭"을 둘러 보고 <어린이대공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자꾸 머릿 속에 남는 아쉬움 속에는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임오군란과 명성왕후, 그라고 화양정"
  조선 말 [임오군란]이 터지자 당시 [명성왕후]가 피신을 할 때 한강을 향하다가 화양정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그 때 동네여인들이 가마문을 열고 [명성왕후]를 보며,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저토록 젊은 여자가 장안에 제 집 두고 민비라는 못된 왕비 때문에 일어난
  북새통으로 피난 가는 가 본데,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니 언제 다시 돌아올 날 있을라구?" 
  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왕후가 다시 환궁하자, 당시 사람들이 단종의 일화를 생각해 내고는 
  "화양정"이 정말 "회행정 回行亭"이 되었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환궁한 [명성왕후 민비]는 "화양정"에서 자신을 경멸한 그 여자를 찾아 죽여 버릴려고 했는데
  그 말을 한 그 여자를 찾아 낼려고 조사를 했건만 모두 서로 짜고 그런 말 한 여자는 없다고들 하니
  [명성왕후 민비]는 그 동네 여자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설화도 전해 내려 오고 있답니다.



  ['세종대']                   1:59

  [화양정]을 뒤로하고 "세종대" 정문 앞으로 가서 건너편을 보면...


  ['어린이대공원' 정문]                 2:00

  [세종대] 정문과 비슷한 "어린이대공원 정문"이 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은 원래 [용마산 자락]에 위치한 "유강원"이 있었던 곳인데, [순종]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빼앗아 골프장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인 "경성골프장"이 탄생되고
  그후 우여곡절을 격으며 [서울컨트리구락부]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골프장으로 재탄생되었답니다.
  <어린이대공원>으로 변모한 때는 1973년으로 제가 대학 때였습니다.


  ['유강원 터' 가는 길]

  제가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이유는 공원 구경이 아니라 "유강원 터"를 찾아 보기 위함입니다.
  <어린이대공원>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위치를 모르고 가면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렵게 찾은 [유강원 터]를 [네이버 위성지도]를 캡쳐해 편집해서 알려 드림니다.
  의외로 공원 정문 가까이에 있었고, 정문 가까이에 있는 "열린무대"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열린무대']                     2:03

  <어린이대공원> 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열린무대"가 나타나는데 우측으로 들어 가면...



  ['유강원 터']                     2:04~2:20

  [안내문]

  "유강원 터"를 만납니다.
  [조선] 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의 초장지입니다.
  "순명효황후 (1872~1904)"의 본관은 여흥(驪興). 좌찬성 증 영의정 여은부원군 충문공 "민태호(閔台鎬)"의
  딸인데, "민태호"는 [명성왕후 민비]의 오빠죠? 촌수는 좀 되지만...
  [명성왕후 민비]가 만든 "閔氏나라"의 대표 인물이 [명성왕후]의 친척 오빠인 "민태호"죠.
  그러니까 "순명효왕후"는 외가 인척하고 결혼한것.."민씨 가문"이 다 해먹던 시절이니

 
  [남겨진 석물]

  ['순명효왕후 민씨']

  1895년 10월 8일 쪽바리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왕후]를 시해 하던 날...[을미사변]이라고 하죠.
  그날 쪽바리들이 [명성왕후]를 살해 할때 그 참상을 똑똑히 보라고 당시 세자빈이였던 [순명효왕후]를 끌고
  나와 목격하게 해서 "너도 까불면 훗날 이런 꼴 당한다"는 경고를 날렸답니다. 
  그후 살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비운의 세자빈입니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황제에 오르기 전 33세에 일찍 죽어서 이곳에 "릉"이라는 묘호는 사용 못하고
  "유강원"이라는 묘호를 사용한것인데, 나중에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고 난 후 [순명효황후]로
  추존되고, 21년 후 [순종]이 죽어 [살곶이다리]를 건너 [남양주 금곡동]에 있는 "유릉"에 안장 될때
  그녀도 이곳에서 천장되어 "유릉"에 합장하게 되며 "유강원"은 없어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곳엔 "유강원"에서 사용했던 석물들만 남아 있는 것이랍니다.
  "유릉"에는 [순종]과 그의 비 두명, 즉 [순명효황후 민씨]와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 세명이 합장된
  조선왕조 유일의 "동봉 삼실 합장릉"이 되어 있고....



  [어린이대공원 산책로]

  <어린이대공원>은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활용되고 있더군요. 입장료는 무료.


  [식물원]                  2:26

  [동물원]                  2:27


  [동물원 이곳저곳]

  식물원과 동물원을 힐긋힐긋 통과하여


  ['맹수마을']                    2:29~2:40

  [코끼리]

  [맹수 우리]
 
  [사자]                                                [호랑이]
 
  [표범]                                                [하이에나]

  "맹수마을"은 조금 관심을 가지고 둘러 보았습니다.
  유리창 축사 속에 맹수들을 가두어서 사진 촬영 하기가 빛반사로 어려웠지만
  대표 맹수 네 종류만 올리고...


  ['팔각정']

  ['용마산' '아차산' 조망]                 2:41

  휴게소인 팔각정을 지나 후문 방향으로 나가면 [용마산]과 [아차산]이 성큼 다가와 있으며


  ['어린이대공원 후문']                     2:47

  ['선화예술중고등학교']                   2:48

  <어린이대공원> 후문을 나서면 [선화예술중고등학교]가 있고


  ['아차산역4번출입구']                  2:51

  이어서 [지하철5호선 아차산역] 4번출입구를 만납니다.
  계속해서 [광나루]를 가야 하는데, 여기서 지하철을 한정거장 타고 [광나루역]으로 갑니다.


  ['광나루 표지석' 가는 길]

  [광나루역]에서 오리지날 [광나루터]로 가는 길을 미리 학습하고 출발합니다.


  ['광나루역2번출입구']                   3:06

  ['구리시' 방향]

  ['광진청소년회관']

  [광나루역2번출구]에서 길을 건너 [워커힐]방향으로 진행하면 <광진청소년센터>를 만나며


  ['광진교' 입구]                    3:10

  [안내문]

  이어서 [광진교] 입구에서 "광나루 안내석"을 만나는데
  이곳은 오리지날 [광나루]가 아니어서 오리지날 [광나루터]를 찾아 가야 합니다.


  ['광나루' 가는 길]

  [광나루 안내석] 좌측 골목 입구에 [주님의 교회]가 보입니다.
  오리지날 [광나루터]는 저 골목으로 들어가 직진해야 하더군요.


  [폐업한 '한강호텔']                    3:16

  [강변데크길]                     3:18

  [주님의 교회]에서 5분 정도 골목을 직진하면 폐업한 [한강호텔]을 지나고
  이어서 한강변 데크를 만나는데, 데크를 따라 조금 가면....


  ['광나루 터' 표지석]                    3:19

  "광나루 터" 표지석을 만납니다.
  이곳이 오리지날 "광나루"가 있었던 자리라는거죠.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갈때 이용했던 나룻터였으며
  [임오군란]으로 피난을 간 [명성왕후 민비]도 이용한 나룻터랍니다.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의 중요 피난 루트를 알아 보면
  [창덕궁]의 뒷문을 빠져 나가 [수락산 용굴암]으로 피신하여 7일간 기도를 올리며 숨어 지내다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 [여주 민영위의 집]으로 피신 했다고 하고, 
  이어서 [장호원 (현재의 '감곡')]의 [민응식의 집]으로 내려가 두어달 숨어 지냈답니다.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가 [수락산 용굴암]에서 '장호원'으로 피신 할때 이 나루를 이용했다는데
  그때의 일화를 소개해 드리면...
  [명성왕후]가 헐레벌떡 도망가는 중이라 뱃삯이 없어서 광나루를 건널수가 없었답니다.
  배삯을 내지 않으면 누구도 태워 줄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뱃사공...
  도망치는 중이라 자기의 신분을 밝힐수 없었던 [명성왕후]는 준비한 돈이 없어 자기 금반지를 가마 밑으로
  슬쩍 떨어뜨려 뱃사공에게 주니 뱃사공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며 배를 태워 주었답니다.
  왕비의 금반지를 고작 배삯으로 지불한 [명성왕후]는 그렇게라도 해서 이 '광나루'를 건너 여주로 도망을
  갈수 밖에 없었으니 지체높은 [명성왕후]도 돈없고 권력 잃으면 그냥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란걸 증명해 줍니다
  뱃사공에게도 쩔쩔 멧으니...ㅠㅠ
  이나 저나 그 금반지를 지금도 소지하고 있다면, 소지한 그 사람이 [KBS 진품명품]에 감정 의뢰하면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감정평가를 받아 때부자가 될텐데... ^.^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광나루' - '간송미술관' 소장]

  여기서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廣津 광나루" 그림을 보며 옛 정취를 느껴 봅니다.
  시루떡 같은 뒷산은 [아차산]이고 나룻터에 있는 집은 공용 여관인 "광진원"이라고 합니다.
  산중턱에 있는 집들이 눈길을 끄는데 세도가의 별장이라고 하는데
  현재 [워커힐]이 들어서 있는 곳 쯤 되겠으니 설명 필요없이 절경을 이루었던 곳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겸재 정선선생]의 그림이 '진경산수화'로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알수 있게 되었으니
  선생께 감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광진정보도서관']

  오리지날 [광나루]는 [광진정보도서관] 앞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근처에 있다는 "상부암 석불입상"을 찾아 나서는데 
  위치를 몰라 한참 왔다리 갔다리 했는데, 여기서 가는 길을 쉽게 정리해서 알려 드리면...
  저 앞에 보이는 하늘색 건물인 [현대골든텔2오피스텔] 앞으로 갑니다.


  ['상부암 석불입상' 가는 길]                3:25

  ['광장동 제2경로당']

  [현대골든텔2오피스텔] 앞에 [상부암 석불입상] 가는 길안내 표지판이 있습니다.
  안내표지를 따라 좌측으로 올라 가면 [광장동 제2경로당]이 보입니다.


  ['광장동 제2경로당']

  ['상부관음전']                        3:30~3:35

  ['상부암 석불입상']

  [안내문]

  "광장동 제2경로당" 우측 위에 "상부암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이곳은 [광진구 문화생태탐방로]인 [아차산 고구려 역사길]에 있는 유적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됩니다. 


  ['광나루역 2번출입구']                    3:48

  오리지날 [광나루 터]와 [상부암 석불입상]을 둘러 보고 다시 [광나루역]으로 돌아 와 귀가했습니다.
  오늘 답사한 거리는 총16km 정도 되는데, 그 중에 [성덕정]에서 [건대역]까지 약4.5km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실제 걸은 거리는 11.5km 정도 되겠군요. 걸린 시간은 약4시간30분이었습니다.
  미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갔는데도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역사 유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다니는 거리에도 선조들의 흔적은 무지 많아서 의미있는 하루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 font="">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