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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 코스']

  "북악산 신규개방코스"는 2시간 정도 걸리는 짧은 거리이고, 탈출로는 <성북동>이 가장 적합하기에
  계속해서 이번 기회에 <성북동의 이모저모>를 탐방하기로 하고, 미리 조사를 하여 답사에 나섭니다.
  코스는
  "삼청각-외국대사관저거리-성북우정의 공원-한용운공원-심우장-비둘기공원-
   북정마을-수연산방-이종석별장-복자사랑 피정의 집-간송미술관-마전터-선잠단-
   성북동별서(성락원)-최순우옛집-방우산장-김광섭옛집-한성대역" 까지 약6km 입니다.


  ['성북천 발원지']                 1:41                
  2021년 1월 15일 (목) 맑음 
  "북악산 신규개방코스"에 이어 하산길에 "성북동의 이곳저곳"을 둘러 보기로 합니다.
  "성북천 발원지"를 먼저 다시 보여 드리는 이유는 <성북동>이 <성북천> 계곡에 있기 때문입니다.


  ['삼청터널']                  1:52         
  "북악팔각정"에서 "성북동"으로 하산하면 "삼청터널"을 만나며
  터널 우측에는


  ['삼청각']                      
  "삼청각 三淸閣"
  1972년에 개관하여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던 최고급 요정이었죠.
  그후 민주화로 요정정치가 종말을 고하니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2000년에 서울시가 인수하여 문화시설로
  지정하여 리모델링해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새로 열었지만...
  현재 예식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을 운영하는데 '세종문화회관'이 경영한다고 하네요.
  결혼식 때문에 한번 가 봤는데 한정식 음료 차등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현재 리모델링 공사로 휴업 중이었습니다.


  ['외국대사관저 거리']                 1:54              
  <삼청각>을 지나면 '외국대사관 대사관저'가 밀집해 있는 <대사관저 거리>가 이어집니다.
  [일본대사관저]가 가장 크고 그외 수많은 나라 대사관저와 직원사택들이 있었습니다.
  <삼청터널>만 지나면 [광화문]이고  경비하기가 쉬운 지형이어서 밀집해 있는듯...  


  ['수월암']               2:04             
  <대사관저 거리>의 끝에는 "수월암"이라는 절간이 있고, 
  입구 좌측엔 "외교관사택단지"가 대단한 규모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알려 드릴 "성북동 비둘기"라는 詩가 더욱 감명을 주며 비교되는 <외교관저거리>였습니다.
 

  ['성북우정의 공원']                         
  삼거리엔 "성북 우정의 공원"이라는 근린공원이 있는데 
  <외국대사관저와 직원사택단지> 입주 나라들의 국기가 펄럭이는데 얼마나 많은 나라인지 알수 있고


  ['한용운 선사 공원']                    2:08              
  이어서 "만해 한용운 선사 소공원"을 만납니다.
  오가는 사람도 별루지만 궂이 찾는 사람도 없는 조그만 공원에
  <한용운 선사>가 추운 겨울에 쓸쓸히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한용운선사 동상']

  ['안내문]                        
  "님의 침묵"만이 휩싸고 도는 이곳에서 
  님은 '코로나사태' 방역수칙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며 계시는군요. ^*^


  ['심우장' 오름길]                   2:10                 
  소공원에서 선생이 살던 <심우장>까지는 비탈길을 좀 올라 가야 합니다.


  ['심우장' 정문]                  2:13~2:15                 
  <한양성곽>의 북사면에 있는 이곳 [북정마을]은 언제나 음지여서 고급주택은 거의 없고 '달동네'로 남아
  있는데, 가파른 달동네 골목 중턱에서 "심우장 尋牛莊" 정문을 만납니다.
  꼴도 보기싫은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 <한양성곽>의 북사면에 북향 집을 지었다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이 이런 골목에서 사시다가
  가셨다니 왠지 세상은 여전히 기득권자들의 세상이 분명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550호]로 지정되었다는데 집 앞에 주차장도 없는 비탈 골목이 안스럽습니다.
  <심우장>은 '코로나사태'로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갈수없어 대문 사이로 사진만 몇커트 간신히 찍었습니다.


  ['심우장' 앞마당]

  ['심우장']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1879~1944"
  '호'가 "만해 萬海"이고 이름은 "한용운 韓龍雲"이라고 아시는 분이 대부분이죠? 아닙니다. 
  본명은 "한유천 韓裕天"이고, 法名이 "용운 龍雲"이며, '호'가  "만해 萬海"인데
  우리는 왠일인지 무조건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이라고 호칭합니다.
  선생은 16세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2년정도 고용(雇傭)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18세에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출가 했는데, 
  그때 스승인 <김연곡스님>이 法名으로 "용운 龍雲"을 '호'로 "만해 萬海"를 주었답니다.
  그후 치열한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도 두번이나 하시고,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장편소설도 쓰셨죠.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계속해서 불교를 개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죠.
  역동적으로 치열하게 사신 선생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이곳 <심우장>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만해 한용운선사' 이력과 글]            
  "심우 尋牛"의 뜻을 알아야 선생이 자기 집 이름을 왜 "심우장 尋牛莊"이라 했는지 알수 있겠죠.
  제가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ㅎ
  
  "심우 尋牛"
  "찾을 심 尋" "소 牛" -- 한마디로 "소를 찾는다"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이 집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 아니면 외양간? ㅎ
  "심우 尋牛"는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니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 등에 벽화가 그려져 있죠?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열폭의 그림이 벽면이나 법당 안에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이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십단계 과정"을 그린 "십우도 十牛圖"입니다.
  마지막 단계 그림이 "어린 스님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 가는 그림"인데 본 기억이 있죠?
  그냥 건성으로 힐긋 봤는데 그 그림이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고요? ㅎ.
  한마디로 "십우도 十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불교가 추구하는 내용이지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대체로 <소>에 비유하지요.
  <선을 닦는 수련>의 그 첫번째가 "심우 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선다>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집 이름 <심우장>이 지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다음엔 "견적見迹", <소의 자취를 보았다>는 뜻이고,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는 뜻이구요.
  그리곤 "득우得牛", <소를 얻구요>. 그 다음은 "목우牧牛", <소를 기르지요>.
  그리고 다음 것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기만 존재>해요.
  그러다가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기와 소를 다 잊어요>.
  그리곤 "반복환원返本還源", <본디 자리로 돌아가고>....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침내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든다>는 거예요.
  "기우귀가 騎牛歸家", 즉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이죠
  결국 <십우도>는 마음을 찾고 얻는 순서와 얻은 뒤에 회향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
  
    "소는 마음이라고?"
    "그래요. 소는 마음을 뜻해요"
    
  "만해 선생"은 자기 집 마당에 크게 써붙인 글에선
  "잃을 '소'가 없는데, '소'를 찾을려고 하는게 우습도다.
   만일 '소'를 잃을게 분명하다면, 그 '소'를 찾은들 계속 지닐수 있겠냐
   차라리 찾지 못하면 잃지나 않지..."


  ['북정마을 방문 안내문']                    
  <심우장> 정문 앞에는 '우리마을'도 꼭 구경하고 가라고 안내문을 붙여 놨습니다.
  "북정마을 안보고 가면 평생 후회한다고"  ㅎㅎ
  아직도 오르내리기 힘든 이 비탈에서 온통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열악한 집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우리마을을 구경하고 가라'고 안내하는데 그냥 갈순 없죠.
  또한 이 마을에 <비둘기공원>이라는 공원이 있다고 하여 이미 탐방할 계획을 갖고 왔습니다.
 

  [갈림길]               2:18                  
  조금 올라 가니 벽면에 비둘기 조형물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내려 옵니다.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비둘기공원']                
  "비둘기 공원"이라는 쬐끄만 쉼터를 만나는데 이곳을 찾아 볼려고 집에서부터 계획했습니다.
  이런 조그만 특징없는 쉼터를 왜? 찾을려고 했냐고요? ㅎ
  좌측 벽에 붙어 있는 새들 보입니까?
  바로 <비둘기>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왔던 詩  "성북동 비둘기" 라는 詩가 쓰여 있는 공원이어서 찾은겁니다.
   

  ['성북동 비둘기' 詩]                             
  <북정마을> 진출입로 옹벽에 붙어 있는 <비둘기>와 詩.....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 김광섭 195년~1977년"
  '중동고등학교' 출신이죠. 공부 무지 잘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동고'에서 학교가 비용을 대고 보내는 '교비유학'으로 일본에 유학 가게 된 분이죠.
  '일본 애지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색맹으로 최종 단계에서 불합격하여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니고 졸업하신걸로도 유명하시죠. '교비유학'을 가면 졸업후 모교로 돌아와 일정 기간 후학을 위해
  복무해야 해서 '중동고 영어선생님'을 한동안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 영어를 잘 했으니 해방후 "미군정청 공보국장"도 하시고, '이승만대통령 초대공보비서관'을 하기도..
  60세이던 때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경희대와 고려대 야구경기"를 보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행활을 하시다가 어느정도 회복되어 그때부터 잠시후 탐방하게 될 <성북동집>에서 문학활동을
  하게되어 뇌졸중이 문학적 측면에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회고담이 있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 구상하고 쓰신 대표작이기에 <성북동>은 <성북동 비둘기>로 대변되기도 합니다.


  ['비둘기공원'에서 '성북동' 조망]                         
  자연의 파괴로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린 비둘기...
  인간 문명에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둘기...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평화를 잃어버린 비둘기...
  그 <비둘기>는 우리 자신이리라...
  공원 앞에는 완전 폐허가 된 달동네 집들이 <한양성곽> 북사면에 지쳐 쓰러질듯 쭈구려 앉아 있는데
  건너편 <성북동> 양지바른 곳엔 <외국대사관저>들이 즐비하고,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들의 저택이
  화려한 외모와 엄청난 규모로 둥지를 틀고 있는 양극화의 대명사 동네 <성북동>으로 펼쳐집니다.


  ['북정마을']                  2:20             
  <비둘기공원> 위로 올라 가면 "북정마을"이 <한양성곽> 북사면에서 삶을 부르짓고 있습니다.
  마을버스 종점인 이곳엔 작은 마을버스가 주민들을 시내와 내통하게 하고 있을 뿐 흔해빠진 마트 하나 없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를 연상케하는 집들이 여기가 '서울특별시 성북동'이 맞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북정마을 화장실']                          
  새로지은 건물이라곤 앞에 보이는 공중화장실인듯하고 <한양성곽>과 키높이를 재고 있는 마을인데
  조금전 <심우장> 앞에 "아름다운 우리마을 안보고 가면 평생 후회한다"는 안내문은 무얼 의미하고 싶었을까
  자연의 파괴로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린 비둘기...
  인간 문명에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둘기...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평화를 잃어버린 비둘기...
  <성북동 비둘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 옵니다.


  ['북정마을 진출입로']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의 마을은 전국에 여러곳 있습니다만, 대부분 [北亭마을]이라고 하는 마을인데
  이곳은 <한양성곽>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고 亭子도 없으니 [北頂마을]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봅니다.


  ['심우장']                 2:25               
  [북정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 가며 <심우장>을 조망하고

  ['만해공원' 조망]                  2:27               
  아직도 추운 겨울에 쓸쓸히 홀로 앉아 계시는 "만해 선생 동상"을 내려 다 보고



  ['성북구립도서관']               2:33                 
  <성북초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성북구립 도서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만들고 운영하는 미술관이랍니다.
  <성북2동사무소>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을 만들었다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 특성상
  1층은 <성북글로벌빌리지센타>로 조성하여 외국인들의 사랑방 역활을 한다고 하네요.
  도서관 뒤에 <수연산방>이 보입니다.


  ['수연산방']

    [안내문]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常虛 李泰俊" 선생은 [파란문]의 학교 선배님이고 해서 이 분에 대해선 좀 압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홍사용"
  <금삼의 피><임진왜란><세종대왕>등 역사소설의 대가 "월탄 박종화"
  <모란이 피기 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
  <아무일 없소> 등 소설의 대가 "상허 이태준"
  <향수><고향>의 시인 "정지용"
  <동백꽃><봄봄>등 단편소설의 "김유정"
  모두 "휘문고보"의 1~3년 차이의 선후배 사이로 함께 문학의 꿈을 키우며 학창시절부터 문학활동을 한
  우리나라 신문학의 선두 주자들이시죠.
  이 당시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이 이들의 국어선생님이셨죠.
  "상허 이태준" 선생이 다른 분들에 비해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이유는 <월북 작가>이기 때문이죠.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학예부장을 지냈던 선생은 이곳 <성북동 수연산방>에서 13여년을 살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그후의 삶은 정확히 알기 어렵답니다.
  문학적 관점에선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생인데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 그와 그의 작품들은
  언급조차 할수 없어 왔습니다.
  <아리랑>의 "나도향"과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배재고 출신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경기고 출신. <날개>의 "이상"은 보성고 출신....
  [수연산방]은 현재 선생의 손녀딸이 주택을 약간 개조하여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답니다.
  매우 유명해서 주말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 갈수 없다는데
  제가 방문한 오늘은 코로나사태로 휴업중이어서 구경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와서 차도 한잔


  ['덕수교회' 조망]                    2:35~2:42        
  [수연산방]에서 돌아 나와 건너편을 바라보면 [덕수교회]가 보입니다.
  제가 화살표 표시를 한곳으로 들어 가면....
  

  ['이종석 별장' 입구]                    
  좌측은 [덕수교회]고 우측은 [덕수교회수련관]인데 이 길 앞 우측에는


  ['이종석 별장']

  [안내문]                       
  "이종석 별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
  먼저 "이종석 선생 1875~!1952"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안내문을 보면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이종석선생"은 집안이 원래 엄청 부자였는데 9,900석을 소출하던 집안이었다나 뭐래나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유명한 <엄귀비>로부터 엄청난 하사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튼 엄청 부자였던건 확실한데 그는 자기의 富를 후학들을 위해 [보인학원]을 설립하는등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직접 이사장을 하기도 했답니다.


  ['일관정']

  [안내문]                          
  당시 <성북동>에 살던 문학인들과 그외 관련 문학인들과도 교류를 활발하게 해서
  자기의 별장을 그들과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며 그들을 위해 흔쾌히 개방해 주기도 했답니다. 


  ['이종석 별장' 전경]                         
  코로나사태로 휴관 중이어서 언덕배기 전망대에서 [이종석 별장]을 조망 하고 갑니다.
  이 별장은 [대림산업]  소유였다가 현재는 [덕수교회]가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답니다.


  ['복자사랑 피정의 집']                2:44               
  [이종석 별장]을 나와 [덕수교회] 건너편을 보면 "복자사랑 피정의 집"이라는 수도원이 있고


  ['성북초교앞 삼거리']                   2:48              
  다시 조금 더 내려 가면 <성북초교 앞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곳은 "성북천"을 복개해서 도로가 되었지만 예전엔 맑은 개천이 흐르던 곳이었답니다.
  좌측 <성북초등학교> 정문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가면...


  ['간송미술관 정문'과 '성북초교 정문']                 2:49        
  "간송미술관""성북초등학교" 정문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실제 문을 닫은지 오래 되고 전시회는 대부분 다른 곳에서 가끔 하고 있죠.
  오늘도 공사로 출입할수 없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1906년~1962년"
  이 분도 필자인 '파란문'의 학교 선배님이십니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대'를 나왔으며, 고종사촌 형이 앞에서도 언급한 "월탄 박종화선생"입니다.
  정지용 김영랑 김유정 이태준 등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앞의 "이종석"의 집안이 엄청난 부잣집이라지만 "전형필선생"의 집안에 비하면 조족지혈 정도로
  전형필 선생의 집안은 10만석 규모 이상으로 당시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했답니다.
  집안의 富를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에 사용하고,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셨는데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도 지내는등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사업도 하셨습니다.


  ['성북초교 삼거리']                 2:51       
  "성북동 삼거리"
  이 도로 밑에는 "城北川"이 흐르는 개천입니다. 복개공사로 개천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개천 바닦은 암반으로 맑고 풍부한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계곡이었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이 한양 시장에서 거래되는 포목을 깨끗이 빨아 널어 말리는 장소로 
  조정으로부터 독점권을 얻어 "세탁 일"을 하였는데, 이름하여 "마전터 麻田址"였으며 , 
  <성북동>의 옛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앞에 화살표로 표기한 곳이 "마전터 麻田址"라는 표지석이 있는 곳입니다.


  ['마전터 표지석']                    2:53

  [안내문]                      
  "마전터 麻田址"
  <한양성>을 건설 할때 전국에서 착출된 일꾼들이 이 근처에서 일하고 살았는데
  <성북천>의 물이 맑고 깨끗하나 계곡이 암반이고 좁아 농사를 지을수 없어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했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이들이 먹고 살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게 되는데 그것이 "마전 麻田"이었답니다.
  한양의 시장에서 팔리는 옷감을 깨끗이 빨아 햇볕에 말리기 좋은 장소여서 이곳이 세탁소가 된 것이지요.
  [영조] 때에 구축된 한양의 '자연 건조 세탁소'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려나? ㅎ


  ['선잠단' 조망]

  ['선잠단' 입구]

  [안내문]                            

  ['선잠단']                           
  <마전터> 건너편에는 "선잠단 先蠶壇"이 있습니다.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 先農壇"은 王이 "농사의 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농사 시범을
  보이는 곳이며, 이곳은 王妃가 "양잠의 神"에게 제사를 드리고 양잠 시범을 보이는 중요한 제단이죠.
  먹고 입는 문제의 중요성은 농경사회에서 필수조건이었으니 제사를 올리는 제단의 의미는 엄청 크지요.


  ['선잠단' 옆길]                    3:00       
  <선잠단> 좌측 옆길로 5분여 골목을 올라 가면...


  ['성락원']                       3:05~3:14

  ['성락원' 정문]

  [안내문]                              
  "성북동 별서 城北洞 別墅"
  안내문에는 "성락원 城樂園"이라고 되 있습니다만 얼마전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어 변경했답니다.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한 별서랍니다. 
  육교시사(六橋詩社)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고,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별궁으로 사용한 역사적 가치도 있는 곳이라는데
  명승지로 재 지정되었는데도 문은 잠겨 있어 들어 가 볼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의친왕 이강 李堈>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낳은 [고종]의 다섯번째 아들이고 
  <의친왕>의 친아들은 없고 후실이 13명으로 서자만 12명 서녀를 9명이나 두었는데
  마지막 열세번째 후실인 "홍정순"이 19살에 62세의 <의친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노래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석"씨이죠. 요즘 '전주 한옥마을'에 산다죠?


  ['성북동 별서']                            
  정문에서 우측 길로 올라 가면 <성북동 별서>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알수 있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쿠데타세력들이 들이 닥치자 <명성왕후>는 부랴부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 당시 "성북동 별서"였던 것이었습니다.
  도피의 명수인 <명성왕후>는 <임오군란>때엔 '여주 장호원'으로 가 숨어 지내다가 돌아 오고....
  두번씩이나 도피를 하면서도 살아 남은 왕비는 결국은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저승으로 갔죠.
  <명성왕후>의 도피행각에 대해선 앞으로 별도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홍대부고' 버스정류장']                  3:22

  ['최순우 옛집' 조망]                               
  <성북동 별서>를 둘러 보고 다시 <선잠단>으로 나와 길을 따라 내려 가면
  [홍대부고버스정류장]을 만나는데, 골목 안쪽으로 "최순우 옛집"이 보입니다.
  ♥ ♥표시 한곳압니다.



  ['최순우 옛집']                      3:24

  [안내문]                           
  "최순우 1916~1984"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시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선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안내문에 없는 이야기 하나 언급하자면...
  이 분은 조금 전에 방문했던 <간송미술관>의 [간송 전형필선생]과의 관계가 유명하죠.
  '6.25전쟁' 때에 <간송미술관>의 국보급 미술품들을 괴뢰군들이 북으로 반출하려 할때 재치로 막아주어
  [간송 전형필] 선생이 엄청 고마워하며 지어준 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우산장' 조망]                   3:27       
  <최순우 옛집>에서 나와 건너편 [홍대부고버스정류장]을 바라보면 보행로에 쉼터 같은게 보입니다.
  저 쉼터가 "방우산장 기념조형물"입니다.
  저곳으로 건너 가면....


  ['방우산장' 조형물]                       3:28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 안내문]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이 있는데, 이 근처에 "조지훈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군요.
  선생이 살던 집 이름이 "방우산장 放牛山莊"이라는데 조금전 <심우장>의 의미와 유사하죠.
  "放牛即牧牛" '마음 속에 소를 한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카우는 것과 같다."
  선생도 불교신자로서 어려운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큰 역활을 하셨죠.


 ['조지훈 기념 조형물']                   
  <조지훈선생>은 "술"을 무지 무지 좋아한 술꾼으로 유명하시지요? ㅎㅎ
  선생이 애주가의 등급을 바둑 단수처럼 메김한게 유명하죠.
     趙芝薰선생은 음주가 초짜에서 어느 경지로 올라 가면 급에서 단으로 간다고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悟達)한 사람 
     초단:애주(愛酒)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2단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3단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4단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한번 넘어서 임운자적(任運自適)하는 사람 
      5단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6단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7단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8단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
     趙芝薰선생은 마지막으로 9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열반주(涅槃酒)(술의 명인)
      9단 폐주(廢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9단이면 이미 술과 함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이니까 
      불교적 관점에서 열반주(涅槃酒)가 되며 
      바둑으로 치면 "入神의 경지,명인 名人"이 되는 것이죠. 死했다는 말 ㅎㅎㅎ
     그런데 선생도 술을 너무 마셔 결국 <9단 열반주(涅槃酒)(술의 명인)>의 경지를 48세의 젊은 나이에
     올라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스스로<술의 명인>임을 증명하며.....


  ['방우산장' 조형물]      
  <조지훈 선생>은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교수도 하셨지만
  '경기여고' 국어선생을 할때가 있었는데 그때 유명한 일화가 있죠.
     趙芝薰 詩人의 본명은 "조 동탁 趙東卓"입니다. "지훈(芝薰)"은 그의 雅號입니다.
     '동탁'이라니까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를 떠 올리시는 분 계십니까? 거기는 '마동탁'이죠? ㅎ
     趙芝薰 詩人은 처음에 자신의 아호(雅號)가 지훈(芝薰)이 아니라 "지타(芝陀)"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본인이 스스로 밝힌 아호(雅號)인 지훈(芝薰)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
     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내 호를 말했더니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더군.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니 "지타"라는 아호가 뜻이야 아주 고상하지만
     성과 합성하니까 발음이 "조지타"가 되는데
     걔네들이 내 호에서 다른 무엇(?)을 연상했나 봐. ^-^
     그래서 할 수 없이 "지훈" 으로 고쳤어."

  요즘 같으면 성희롱으로 문제 될만한 유머입니다만....ㅎ
  여하튼 술과 유머가 남달랐던 선생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라는 <승무 僧舞>를 쓴 불교신자였으며, 
  술을 너무 사랑하여 너무나 일찍 '열반주 涅槃酒'의 경지로 가신 애주가였습니다.


  ['김광섭 옛집' 입구]                3:34         
  <북정마을 비둘기공원>에서도 언급했던 "김광섭 시인의 집"을 찾아 올라 갑니다.
  <으뜸부동산>에서 앞에 보이는 언뎍으로 100m 정도 올라 가면....


  ['김광섭 옛집 터']                      3:36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 비둘기>를 보며 시감정을 불러 일으키며 살던 집이 있던곳을 만납니다.
  '성북동 168-34번지'
  지금은 [원익스카이빌]이라는 빌라로 그가 살던 집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번지만 남아있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며 기울어 가는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며 <성북동 비둘기>를 썻겠죠


  ['성북동 비둘기' 조망]                         
  외국대사관저와 사택단지...대기업 회장들의 저택...왕년에 한끗빨 했다는 사람들의 저택들이 즐비하지만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 중에 마지막 달동네 쯤 되는 판잣집들이 상존하는 <성북동>....
  건너편에 <북정마을>이 조망됩니다.


  [뒤돌아 본 '성북동']                   3:40      
  복개되어 도로가 된 <성북천>으로 다시 내려와 지나온 <성북동>을 뒤돌아 보면서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갑니다.


  [벽화]                3:42     
  <한성대입구역>으로 가는 중에 벽화가 눈길을 끕니다.
  지금까지 탐방한 곳들을 벽화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한성대입구역']                   3:48       
  <한성대입구역-삼선교역>에서 "북악산 신규개방코스와 성북동" 답사를 마침니다.


  [성북동 투어 실트랙]                               
  <성북동 투어>는 약 6km로 대략 2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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