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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시청에서 창의문까지 역사탐방』
              - 1부 -


  ['시청'에서 '경희궁'까지 실트랙]                 
    
  1. "시청-서울시의회-도로원표-훈련도감터-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경교장-4.19기념도서관-한글가온길 입구" 
  
  <시청역>에서 <세종대로>를 따라 <세종대로 사거리>로 가서 좌회전하여 <새문안로>로 갑니다.
  <서대문사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와 <한글가온길>을 이용하여 <육조거리뒷골목>으로


  ['시청역3번출구']                           
  2021년 11월 2일 (화) 구름 약간 맑음   
  서울지역에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1월초에 길을 나섭니다.
  <시청역3번출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서울시의회']                   
        
          [안내문]                            
   "서울특별시 의회"를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요약하면 일제시대 경성시민들을 위한 공연장인 <부민관 府民館>이었는데 
   해방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시민회관>이 되고, 현재는 <서울시의회>가 이용하고 있답니다.
   이 건물이 <부민관>일때, 그러니까 일제시대 1945년 7월 24일 
   대한애국청년단원 강윤국(康潤國)·조문기(趙文紀)·유만수(柳萬秀) 등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동남아, 일본 괴뢰정부의 대표가 참석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대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이곳을 폭파한 사건이 일어 났답니다.
   제가 기억하는건 대학 때에 <"MBC 10대 가수 가요제">가 여기서 열렸는데....
   당시 최고 인기 코메디언이었던 <구봉서.곽규석씨>와 인기 가수였던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하춘화와 김세환, 정미조, 김추자등이 경연을 벌이고 상을 주는 자리였는데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해 난장판이 된 기억이 납니다.
   이 때 일화로, 당시 '맹인 가수'로 유명했던 가수 이용복씨는 화재가 발생하기 직전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도우미와 함께 행사장을 나왔는데, 이용복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화재가 발생했다고
   그리고 제가 학창시정 <국회의사당>이었을 때 <김두한의 오물투척사건>이 기억 납니다.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켰을때 당시 여당인 <자유당>이 옹호하자
   더러운 인간들이라고 <탑골공원 변소>에서 똥물을 퍼와 국무위원석에 왕창 투척한 사건이
   새록새록합니다. 요즘 국회에도 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죠? ㅎㅎ


  ['광화문원표공원']

  ['도로 원표'] 

  [안내문]                 
  "도로 원표 道路元標 Zeromilestone"
  <서울>에서 <부산>을 갈때 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잰 것일까? 평상시 매우 궁금했죠?
  <서울>이나 <부산>등 각 지역의 면적이 장난이 아닌데, 도로 거리를 이정표에 표시 할때 기준점이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요. 그 기준점이 바로 이곳  "도로 원표 道路元標 Zeromilestone"랍니다.
  가끔 다니면서도 이런게 여기 있는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에휴~


  ['청계천' 시작지점]                       
  <도로원표> 건너편에는
  <한양도성> 안을 흐르는 유일한 개천인 "청계천"이 자기 이름을 갖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청계천>으로 흘러 드는 枝川에 대해선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고...


  ['광화문빌딩']                    
  <도로원표>를 지나면 <동아면세점>이 있는 "광화문빌딩"을 만납니다.
  이 자리엔 "국제극장"이 있었었죠.

        
          ['국제극장']
        
          ['국제극장' 앞 분수대와 '구 동아일보' 조망]                  
         <국제극장>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 개봉관이었던 서울의 대표적 극장이었죠.
         사진에는 <장희빈>이 상영되고 있는 걸로 보아 1961년도에 찍은 사진인듯
         김진규, 김지미, 조미령, 주증녀 등 당시 최고 인기 배우들이 등장 했던걸로 기억됩니다.
         건너편엔 <옛 동아일보 사옥>이 보이는군요. 현재 <일민 김상만 미술관>
         <일민 김상만>은 <인촌 김성수>의 장남이죠.
         <피맛골>은 빌딩숲으로 변모했군요.


  ['종로' 방향 조망]               
  <옛 국제극장>에서 <종로> 방향을 촬영했습니다.
  우측 <일민미술관>이 윗 사진의 <옛 동아일보 사옥>이란걸 알수 있고...


  ['경복궁' 방향 조망]                      
    <옛 국제극장> 앞에서 길을 건너며 북쪽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현재 <광화문 광장>은 대규모 공사 중이라 대부분 출입금지이군요.
  <육조거리>가 있었던 거리인데 앞으로 하나 하나 답사할 예정인데
  윗 사진에 빨간색 화살표는 <백운동천>이 <청계천>으로 가는 물줄기를 표시 한것입니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복개공사로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육조거리']                       


  ['백운동천']
               

  ['수선전도 首善全圖']                 
  <경복궁> 서북지역에서 <청계천>으로 흘러 가는 개천들에 대한 개념도와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首善全圖>입니다.
  <수서전도>에 노란색으로 표기한 원이 현위치입니다.
  이렇듯 <청계천>을 만드는 지천 중에 가장 큰 지천이 <백운동천>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은 <백운동천>을 따라 <청계천 발원지>인 <창의문>까지 올라 갈 예정입니다.


  ['아주개']                        
  "야주개 夜珠峴"
  잠시후 들리게 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빛이 나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비친다고
  붙여진 고개 이름이라고...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가 엄청 크고 화려한 모양으로 재탄생했군요. 번창하는 곳은 교회등 종교시설이 대표적..
  이 지역이 옛날부터 "새로 만들어진 문 안쪽"이라고 <새문 안>이라고 했는데 <새문>은 <돈의문>을
  의미하죠. 서대문은 원래 현재의 <사직터널> 위 쯤에 있었던 <서전문 西箭門>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 지역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동네가 <새문안>이 되었고
  교회 이름까지 <새문안 교회>라고 짓게 되었답니다. 
  또한 <새문안로>를 <신문로>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표기했을 때 <新門路>가 되니


  ['훈련도감' 터]                 
  <새문안교회>를 지나면 "훈련도감"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을 만납니다.


  ['한글가온길' 입구]                          
  <훈련도감터>를 지나면 "한글가온길 입구"를 만나는데
  직진해서 <경희궁>과 <경교장>, <돈의문 터>, 그리고 <4.19혁명기념도서관>을 둘러 보고 
  다시 돌아와 우측 <한글가온길>로 갈 예정입니다.


  ['흥화문' 터]                         
  이어서 <구세군회관> 건물 모퉁이에 "흥화문 원래 자리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부터 <경희궁>이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현재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여기서
  제법 먼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작성 된 <서궐도안>을 먼저 보고 답사를 시작하면
  <경희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서궐도안']                         
  1820년 <순조> 때에 그려진 "서궐도안" <보물 제1534호>입니다. <경희궁>을 <서궐 西闕>이라고 했죠.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인 <흥화문>이 우측 아래 동쪽을 향하고 있고 (현재 구세군회관 자리)
  <궐내각사> 자리가 현재의 <서울역사박물관>이란 걸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궐도 일직선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건물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수 있죠. 
  

  ['서울역사박물관' 입구']

  ['금천교']                 
  모든 궁궐의 정문을 지나면 반드시 "금천교 禁川橋"가 있죠.
  궁궐을 출입하는 관리들은 몸과 마을을 깨긋이 하고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나쁜 기운을 모두 씻어 내고 통과하라는 의미조 있겠죠.
  여기엔 정문인 <흥화문>은 없지만 <금천교>는 흔적이 남아 복원을 해 놨습니다.
  <금천교>를 지나면 궁궐이 시작되는게 아니라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시작됩니다. 
  옛날 <궐내각사>가 있던 자리인거죠.


  ['옛 다리 표지석']  

  ['복청교'와 '소의교']                
                                         
          [안내문]                        
  <서울>이 개발되면서 사라진 다리들의 표석을 찾아 몇개 전시해 놨고



  ['광화문 콘크리트 구조 부재']                    
  <박정희정권> 시절에 <광화문>을 복원하며서 무식하게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했죠. 1968년도에...
  그리고 현판을 <박정희대통령>이 써서 붙였었죠. 
  <김영삼정권> 때에 철거 복원 하면서 부재를 몇점 전시 해 놨습니다.


  ['종루 주춧돌']                       
  지하철 공사 하다가 발굴된 오리지날 <보신각>의 종루 주춧돌을 전시해 놨습니다.
  <보신각>이라고 부르게 된게 <고종> 이후부터라는거 처음 알았습니다. ㅎ


        

  [추억의 '전차']            
  교복 입고 등교하는 아들에게 보자기에 싼 벤또(도시락)을 급히 가져와 전달하는 엄마의 모정이
  맘 찡하게 하는 광경이 추억 속에...
 

  ['경희궁공원']              
  <경희궁공원>을 지나면...


  ['흥화문']                  
        
          [안내문]                  
        
          ['옛 흥화문']
                  
                    [1930년대 폐허가 된 '경희궁']                   
  흥망성쇄...질곡 많은 "흥화문 興化門"이 자기 자리도 아닌 곳에서 옛날을 그리워 하며 서 있습니다.
  이 문은 <이또 히로부미 伊藤博文>의 사당인 <박문사 博文寺>의 정문으로 옮겨 사용되었는데
  그 자리가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입니다.
  그러니까 이 <흥화문>은 <신라호텔>로 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죠.
 

  ['서울중고등학교' 터]                      
  "서울중고등학교 터"
  1910년 5월에 일본인 거류민단에 의해 <경희궁터>에 설립된 <경성중학교>가 광복 후 일본인의 
  철수로 폐교되자 서울시에서 이를 인수하여 <서울공립중학교>로 개교하였답니다
  지금은 <서초동>으로 이전했고...
 

  ['서울시 교육청' 조망]                  
  <서울시 교육청>이 옆에 보이고, <기상청>도 그 옆에 있었는데....


  ['경희궁']
        
          [안내문]

  [안내도]                    
  "경희궁 慶熙宮"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왕조 건물들은 쪽바리들이 불태운게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 화가 나서
  <경복궁> 등에 불질렀다고도 합니다. 백성들을 두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간 <선조>가 더 적군이란거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조선왕조>를 재건하기 시작하며 이 궁궐을 새로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그도 기득권세력들에 의해 사라지고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병자호란>으로 갔지요.
 

  ['숭정문']

  ['숭정전']

  [안내문]                       
  <숭정문>을 들어 서면 "숭정전 崇政殿"이 펼쳐집니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유명한 <조대비>의 아들 <헌종>이 즉위식을 올린 곳이랍니다.
  특히 <사도세장>의 아들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보수기득권세력인 훈구파들에 대한 선전포고 였습니다.
  이 건물 오리지날은 현재 <동국대학교>에 이전 되 있는데 <정각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이 건물은 새로 만들어 복원한 건물이랍니다.


  ['자정전']

  [안내문]                          
  <숭정전> 뒤에는 "자정전 資政殿"이 있습니다.


  ['옛 서울고' 터]                   
  <숭정전>을 둘러 보고 <숭정문>으로 다시 나와 바라보는 <옛 서울고 터>입니다.
  윗 사진에서 본 폐허가 되었던 <경희궁>과 현재 모습을 비교하면 진짜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할수도


  ['서대문' 방향]

  ['돈의문 박물관 마을']                          
  <경희궁>을 나가 <서대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서대문>의 본명인 <돈의문>의 역사 박물관 마을이 있고


  ['돈의문 터']                
  "돈의문 敦義門址"
  우리가 일반적으로 西大門이라고 부르는 <돈의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 졌고 
  복원하려니 도로 사정등도 있고 특히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복원도 할수 없답니다.
  사진 속에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보여 드리면....
  
        
        

           ['돈의문']                
          시대별로 <돈의문>의 주변 모습이 확연히 다릅니다.
          전차가 <돈의문>을 통과하고 있는게 재미 있습니다.


  ['경교장']
        
          [안내문]                    
  "경교장 京橋莊"
  <백범 김구선생>이 기거 한 곳으로 여러번 담사 한바 있어 오늘은 생락하고
  <경교장>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잠시 후 답사할 <이기붕 저택 터>와 비교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교장>을 나서서 <서대문로터리>로 향하면...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기념도서관"을 만납니다.
  이곳이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만송 이기붕 晩松 李起鵬"이 살던 집터입니다.
  <충남 괴산> 출신으로 8·15 광복 이후 <이승만>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한 대한만국 역사를 뒤 흔든 인물인데....
  <보성고>를 졸업하고 <연세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접시닦기를 하며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한 의지의 한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권력 욕심은 그를 인생 나락으로 곤두박질
  독재 영구 집권욕에서 치뤄진<3,15부정선거>로........


  ['서울적십자병원']
             
  [좌측에서부터 '장남 이강석' 프란체스카여사' '이승만' '이기붕' '박마라아여사' 차남' 이강욱'] 
  <이기붕>의 저택은 <4.19혁명기념도서관> 뒤 <서울적십자병원>에 까지 걸쳐 있었었답니다.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을 아들이 없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양시키고 차기 대권을 노렸습니다만...
  <3.15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은 되었지만 <4.19혁명>이 일어나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하던 찰라에 당시 <경무대> 육군 소위로 근무 중이던 장남 <이강석>이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지요.
  권력욕이 낳은 비극의 반대급부는 총살이었습니다. 그 이후 정권도.....
   

  ['한글가온길' 입구]                        
  <경희궁>과 <이기붕 집터>를 돌아 보고 다시 <한글가온길> 입구로 돌아 갔습니다.
  <가온길>은 <가운데 길>이라는 순수 우리말이라네요.
   

  ['한글가온길'에서 '창의궁터' 까지 실트랙]    
                         
  2. 한글회관-육군무관학교터-봉상시터-방정환탄생지-한성전보총국너-사역원터-
     주시경집터-종침교터-내자호텔터-장흥고터-금천교터-창의궁터
      
  <한글가온길>에서 <육조거리 뒷골목>을 지나 <광화문역사거리>를 통과하여
  <창의궁터>까지 가는 지도입니다.


  ['한글회관']                        
  <한글가온길>로 들어 가면 먼저 <한글회관>을 만나고


  ['육군무관학교' 터]                 
  <한글회관> 건너편 <신문로빌딩> 앞에 "육군무관학교 터" 표지석이 있으며


  [봉상시터' 조망]

  ['봉상시' 터]                
  이어서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려운 "봉상시 터"가 있습니다.


  ['로얄빌딩' 앞 '방정환선생 탄생지' 조망]

  ['방정환 선생 탄생지']                   
  <봉상시 터>에서 우화전하면 <로양빌딩>을 만나는데 <세종문화회관> 뒤 입니다.
  이곳에 <소파 방정환선생 탄신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말에 대칭되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어린이들의 대부이시죠.
  

  ['세종문화회관' 뒤 삼거리]                               
  <방정환선생탄신지>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먼저 우측 <세종문화회관> 뒤 울타리에 설치된 <사역원터>를 확인하고 좌측 골목으로 진행합니다.
  그 이유는 좌측 골목이 복개된 <백운동천>이 흘러 <청계천>으로 가는 물줄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원 터' '한성전보총국' '양정학교 터']                   
  <세종문화회관> 뒤 울타리에는 세개의 표지가 있는데
  먼저 "한성전보총국"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1885년 6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여 서로 전보를 주고받았던 곳
  그 옆에는 "사역원 터 司譯院址"
  외국어 통역관의 양성과 번역 통역을 담당하던 곳
  "양정 창학터 養正創學址"
  <양정학교>가 원래 이곳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했군요.
   

  ['용비어천家' 빌딩]                        
  <용비어천家>라는 오피스텔은 "주시경선생 집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앞뒤 구석구석 찾아 봤는데도 별도의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고...


  ['종교교회'] 

  ['종교교회' 정문 앞]                        
  "종교교회 琮橋敎會"
  독특한 이름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종교 宗敎 religion>을 의미하는 <종교교회>가 아니라
  이 앞에 흐르는 <백운동천>에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종침교 琮琛橋><종교 琮橋>여서
  교회 이름도 다리 이름 <종교 琮橋>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네요. ㅎㅎ
  이 교회는 <배화학당>을 설립한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세운 교회 중에 하나랍니다.
  <조세핀 캠벨>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교회 이름을 만들게 한 <종침교>는 여기서 대각선 방향 건너편 <김&장법률사무소> 빌딩 옆에 있습니다.


  ['종교교회' 앞에서 '종침교 표석' 조망] 

  ['종침교 터']                          
  "종침교 琮琛橋"
  <백운동천>은 완전 복개되어 흔적을 찾을수 없지만 지금도 이 도로 밑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에 다리가 있었다는 것인데 무지 무지 유명한 역사적 에피소드가 있는 다리랍니다.
  조선 <성종>대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형제였던 <충정공 허종 許琮>과 <문정공 허침 許琛>은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음을 걱정해, 고민 끝에 사직동에 사는 누이를 찾아 조언을 구했답니다. 이에 그 누이는 꾀를 내어,
  훗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화를 면키 어려우니 어전회의에 가지 말라고 했답니다.
  이런 누이의 조언에 따라 그들은 궁궐로 가는 이 다리 위에서 일부러 낙마해 다리를 다침으로써 
  어전회의에 참석 못할 구실을 만들었다고.....
  이로써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1504)> 때, 이 형제는 살아남았고, <허종>과 <허침>의 목숨을 구해준 다리라 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종침교>라 했고, 세월이 흐르며 <종교>로 이름이 줄었다고...
  <종.침 琮.琛>한자의 의미를 옥편에서 찾아보니
  <종琮>은 '옥으로 만든 홀대'를 의미하고, <침琛>은 '보배'라는 뜻으로 좋은 뜻이더군요.
   

  ['서울경찰청']                        
  <종침교>를 지나면 "서울경찰청"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내자호텔"이 있던 자리이죠?
  일제시대 <미쿠니(三國)석탄회사>의 사원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내자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재 탄생해 주한 미군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일반호텔이 되었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는 호텔이었죠
  <10.26사건>으로 <김재규 정보부장>이 재판을 받던 재판장에서 나온 이야기 하나 언급하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음주 가무에 동원된 여성들이 <궁정동 안가>로 가기 직전 
  이곳 <내자호텔> 1층 커피숍으로 호출되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기다리며 유의사항을
  교육받던 곳이었는데, 그때 동원 관리되던 여성들의 수가 200여명이었다네요.
. 특히 <10.26사건> 때에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의 현장검증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이 둘은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죠. <심수봉>도 대학생 시절...
  그이후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힛트를 쳤고....


  ['장흥고 터']                        
  <서울경찰청> 자리는 조선시대 "장흥고 터 長興庫址" 였군요.


  ['경복궁역교차로']                          
  <내자동>을 지나면 <경복궁역 교차로>를 만납니다.
  길 건너 좌측은 <경복궁역1번출입구>가 있는데 저곳에는 <한성정부유적표지석>이 있고
  그 뒤에 <금천(교)시장>이 있었는데 <청계천> 이북에선 매우 큰 시장었다는군요.
  그런데 도로 확장 공사로 쪼그라 들었다는데....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               
  <금천(교)시장>이라는 명칭은 이젠 찾아 볼수 없고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서 <백운동천>를 건너 <경복궁>으로 가는 다리가 있었었다는데


  ['적선골음식문화거리']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는 <금천(교)시장> 건너편에는 <적선골음식문화거리>가 <경복궁>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고려 충숙왕> 때 만든 당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금천교>가 있었었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1928년 물길이 도로로 변하며 매몰되고 말았다는군요.


  ['금천교'의 옛 모습]               
  <백운동천>이 제법 큰 물길이었군요.


  ['경복궁']                    
  <적선골음식문화거리>를 통과하면 <경복궁>을 만나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이 담 너머 보입니다.
  <적선동 積善洞>은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에서 따온 말이라는데
  "이웃에 선을 베풀며 살자"라는 의미를 가진 동네 지명의 유래라고..


  ['창의궁 터']                 
  <효자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창의궁 터"를 만나는데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집..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여기서 『1부』답사기를 마치고 계속해서 『2부』답사기로 이어 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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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2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성균관' 주변 실트랙]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 터>와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최고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 <함춘원>과 <창경궁> 답사기"  에 이어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에 있는 <성균관>과 <흥덕사터><장면가옥>등을 갑니다.


  ['창경궁 월근문' 앞]               2:22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창경궁 월근문>에서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터>로 갑니다.


  ['국립어린이과학관']                    
  <창경궁 월근문> 바로 옆에는 <국립어린이과학관>이 있고.
  그 뒤에는 <서울특별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창경궁> 담장에 붙어 있더군요.
  도로를 따라 <어린이과학관>을 지나면...


  ['명륜동' 골목 입구']

  ['명륜동 골목길']                            
  <어린이과학관> 옆으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5~6분 진행하면....


  ['성균관 담장']                   2:30               
  <성균관> 담장을 만나는데, <창경궁 집춘문>을 다녀 오기 위해 여기로 왔습니다.
  사진에 표기한 [뜸들이다]라는 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음식점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집춘문' 입구]                    
  [뜸들이다]라는 음식점 옆 골목은 "막다른 길"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길 끝까지 올라 가야 합니다.
  골목 끝에 <창경궁 집춘문>이 보입니다. 


  [계단]

  ['집춘문']                     2:32                   
  "창경궁 집춘문 集春門"
  이 門은 일반인이나 관리들이 통용하는 문이 아니라,
  임금이 <성균관>내 <대성전(공자사당)>에 "작헌례"를 올릴 때 가기 위해 이용하던 문이랍니다.
  "작헌례"는 "능이나 사당을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말하는데 <문묘대제>라고 한답니다.
  <유교>를 국교로 나라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가 매우 중시하는 일이 <성균관 제례> 였으니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제례를 올리는 일은 국가의 큰 행사여서, 반드시 참석해야 했답니다.
  그런 "작헌례"를 위해 왕궁에서 가장 가까운 문과 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을 "거둥길"이라 한답니다.
  이 길이 100여년 동안 폐쇠 되 있어서 <종로구>는 <종묘>와 <창경궁>을 지나 <성균관>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도보 코스를 한번에 관광할 수 있도록 예산을 들여 "거둥길"을 2008년에 
  조성하였다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되고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제가 이 문을 기필코 찾은 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모시고 자문을 구했던 '비선실세'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은 것입니다. 임금이 거둥 할때 이용하던 문을 최근의 <최순실> 같은 '비선실세'였던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들었을 걸로 추정되어 그녀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함입니다.
  나라의 운명과 중대한 정책을 무속인의 예언에 의지한 <고종>과 <명성왕후>..특히 <명성왕후>....
  잠시후 <흥덕사 터>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대학' 정문]                    2:37                 
  <집춘문>에서 <성균관 문묘> 정문까지는 200m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도 사용되는 정문을 들어서면...



  ['하마비와 탕평비각']                2:38     
  <성균관> 정문에는 "탕평비 蕩平碑"가 세워져 있으며 <하마비>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을 손에 쥐려고 피터지게 싸우는 정치집단들....
  <탕평책>을 시행하여 좋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 <영조>가 1742년에 세운 碑라고 합니다.
  <영조>가 친필로 비각에 세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신삼문']                    2:39

  [안내문]                 
  "신삼문 神三門"
  "문묘 文廟"의 정문으로서 "성현들의 혼령이 드나드는 세칸짜리 문"이어서 <神三門>이라 하는데
  현재는 닽혀 있어서, <성균관 문묘>로 들어 가려면 <동삼문>을 이용해야 합니다.


  ['동삼문']                   2:4             
  <신삼문>에서 다시 교문 옆에 있는 <성균관웨딩홀>로 돌아 와 웨딩홀 앞에 있는 <동삼문>을 
  이용해야 <성균관> 안으로 들어가 구경 할수 있습니다.
  "동삼문 東三門"은 <어삼문 御三門>이라고도 하는데 임금이 드나드는 門'
  우측에 보이는 門은 <향문>으로 유생들이 드나드는 문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를 숙지하고 들어가야 관람이 용이합니다.
  건물수와 규모가 그렇게 많거나 크지 않아 꼼꼼이 둘러 볼수 있더군요.


  ['대성전']

  ['문묘'와 '석전대제' 안네문]                
  <동삼문>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가면
  "대성전 大成殿""문묘 文廟"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4호>
  <유교>의 창시자 <공자 孔子>와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 랍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릴 때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이 제례행사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하며 이 행사를 할때 연주하는 음악을
  "문묘제례악 文廟祭禮樂"이라고 하지요. 
  <세종실록>과 <악학괘범>에 실려 있으며 제사를 올리며 <성균관 유생>들의 입학축하식을 할때도
  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답니다. <중요 무형문화제 85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명륜당']

  ['명륜당' 내부]

  [안내문]                           
  "명륜당 明倫堂"
  "인간의 사회 윤리를 밝힌다"라는 의미의 <명륜당>은 <성균관>의 메인 강의실이라 할수 있겠죠.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 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에서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동재' 조망]

  ['대성전' 은행나무 조망]

  ['서재' 조망]                            
  <명륜당> 앞에는 유생들의 공부방이자 기숙사인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가 좌우에 20여칸씩 있고
  가운데엔 은행나무 두그루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성균관>의 살아 있는 역사랍니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에는 방 마다 각 4~6명씩 기거하며 공부했다는데, 환경이 열악해서
  부잣집 자재들은 빆으로 나가 <반촌 伴村>의 하숙집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대학 주변엔 하숙집 자취집이 번창했는데 특히 이곳 <명륜동(반촌)>은 
  <성균관 유생들>로 인해 엄청 북적거리는 곳이었답니다.
  

  ['존경각']

  ['향관청']                 
  <명륜당> 뒤로 나가면...
  "존경각 尊經閣 "과 "육일각 六一閣", "향관청 享官廳"등 부속 건물들이 있습니다.
  <명륜당> 우측 뒤에는 <존경각 尊經閣 >이 있는데 <성균관>의 <도서관>이었다고 하며
  그  우측 뒤에 있는 <육일각 六一閣>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이라 하며,
  <향관청 享官廳>은 문묘의 행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두는 곳이었다고


  ['비천당' 입구]                         
  <명륜당> 좌측 뒤에는 <비천당>으로 가는 문이 있는데 모르고 가면 놓치는 곳입니다.
  뒤로는 <성균관대학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문 밖으로 나가면



  ['비천당']                    
  "비천당 丕闡堂"이 있습니다.
  "丕闡大猷"라는 말에서 <송시열>이 따온 말이라는데 "큰 도를 크게 밝힌다"라는 뜻이라고...
  <클 비丕>와 <열 천闡>이라는 어려운 한자 이군요.
  이곳은 강의나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라고 합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 進士食堂"
  수백명의 유생들이 동시에 식사를 하는 식당이었답니다.
  밥 먹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 이 식당에 납품되는 식자재가 엄청 많아 여러 일들이 발생했다는데...
  <세조 4년> 실록에는 <성균관> 학생 200명이 1년간 소비하는 식량이 960석인데 
  <양현고>의 수입은 600석으로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짐작 할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양현고 터>에 가서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 관람을 마치고 나가면....


  ['성균관 컨벤웨딩홀' 정문]                3:14             
  <성균관>에서 운영하는 <성균관컨베션웨딩홀> 정문 앞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바로 <양현고 터 표지석>을 만납니다.
 

  ['양현고' 터 표지석]                    3:18               
  "양현고 터 養賢庫址"
  <성균관>의 유생들이 워낙 많았으니 매일 매일 식자재를 조달하는 일이 큰 문제여서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 기관이 <양현고>였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成均館>과 그 주변의 마을 <반촌 泮村>에 대해 알아 보면
  <반 泮>이란 글자는 <국립학교>라는 뜻으로, <반궁 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며 
  <반궁 泮宮>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 泮水>,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 泮村>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반민 泮民>이라 했답니다.
  특히 <성균관>에 납품하는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도살 납품하는 권한을 천민인 <반민 泮民>들이 갖게
  되면서 <반촌 泮村>은 富村이 되며 특권을 누리는 마을이 되었답니다.


  ['흥덕사 터' 답사 실트랙]                  
  <성균관 양현고터>에서 <흥덕사>가 있었던 <옛 보성고등학교>를 돌아 나오는 실트랙 지도입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옛 '보성고' 정문]                      3:23                  
  <양현고터>에서 <혜화동>방향 북쪽으로 5분 정도 진행하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을 만납니다.
  이 자리는 "옛 보성중고등학교 터"입니다만 그 이전엔 무지 중요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흥덕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며, <우암 송시열>이 집을 짓고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며
  <임오군란> 후에는 <북묘 北廟>라는 <관우 사당>이 <고종>에 의해 지어져, <진령군>이란 무당이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요즘의 <최순실>이 하던 국정농단을 일삼은 곳입니다.
 

  ['아이들극장']                  
  <옛 보성중고> 자리 한켠엔 <아이들극장>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골목을 따라 올라 가면....


  ['흥덕사' 터]

  ['흥덕사 터 표지석'과 '하마비']              3:26        
  "흥덕사 터 興德寺址"
  <흥덕사터>는 윗 지도의 <서울과학고>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자리인 <옛 보성중고> 자리에 
  엄청나게 큰 터를 차지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석은 골목에 세워놨군요.
  <태종1년(140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가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흥덕사>를 창건하게 하였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 절을 지어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며, 
  위로는 선조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자 이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열열한 불교 신봉자여서 언제나 <무학대사>를 멘토로 삼으며 함께 했죠.
  하지만 <흥덕사>는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운영하며 <불교>는 쇄퇴하는 가운데
  <연산군> 시절에는 '숭유억불 정책'이 극에 달하며 사원철폐령으로 완전 폐사 되어 사라 졌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우암 송시열>의 저택이 들어 서고
  <고종> 때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북묘 北廟>로 재 등장하고,
  그 이후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되고, 다시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되었다가 <보성중고등학교>가 되고 다시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로 변신했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 자리는 "흥덕사"라는 절이 있다가
  <고종>과 <명성왕후> 때에는 "북묘 北廟"가 설립되어 "진령군"이라는 무속인이 국정을 농단한
  곳으로 <최순실>이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국정농단 한것과 같이 <창경궁 집춘문>을 들락 거리며
  국정을 농단하며 <조선왕조>는 몰락 해 갔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이 지어준  "북묘 北廟""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최순실>보다 더했던 <진령군> 이야기"  여기 클릭
    "[北廟] 북묘묘정비 北廟廟庭碑  여기 클릭
 

  ['증주벽립']                      3:29

  ['증주벽립' 위치]

  ['송시열 집터' 안내문]                       
  <흥덕사 터 표지석>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증주벽립 曾朱壁立"이라는 암벽 각자를 만나며, 
  옆에는 "우암 송시열 집터"라고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의 집은 <흥덕사> 터에 지었기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면적이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조금전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에서 부터 
  뒷쪽 <북악산 자락 한양도성>까지 이 근처 계곡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옛날엔 <송시열>의 집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송동 宋洞"이라고 했답니다.
  이곳은 <송시열 집>의 뒷쪽 끝이라고 추정되는 <북악산 자락 한양성곽> 근처 입니다만
  완전 변모된 요즘에 표지석을 마땅히 세울 곳이 없어 그 흔적이 쪼끔이라도 남아 있는 곳에 세운듯....
  <송시열>은 이 바위에 앉아 경치를 즐기며 <증자 曾子>와 <주자 朱子>의 뜻을 높이 세우려 했을 테지만
  현재는 어느 빌라의 축대가 되어 화려했던 옛날을 곱씹으며 쓸쓸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도 무상하고 인생도 무상하단걸 느낌니다.
  <조선왕조실로>에 무려 3,000번 이상 이름이 등장하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곧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계속해서 <숙종> 때까지 장수하며 노론의 영수로 막강한 권세를 누린 <우암 송시열>.
  물론 <숙종> 때에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숙종>의 반감을 사서
  유배를 가고 그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 했지만 8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는 <大老>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는듯 합니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샛길]                       3:33

  ['한양도성' 쉼터]              3:36            
  <증자벽립 각자>에서 직진하여 샛길로 조금 올라 가면 <한양도성>을 바로 만납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한양성곽>이 뒷 담장이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성북동 별서' 조망]                   
  <한양도성>에서 <성북동>을 조망하면 먼저 "간송미술관"이 가까이 조망되고
  그뒤로 "성북동 별서"라고 표기 한곳이 <갑신정변> 때에 <명성왕후>가 피신 한 곳인데
  무속인 <진령군>이 거주하는 <혜화동> "북묘 北廟"로 먼저 피신했다가 
  다시 더 먼 곳으로 피신 한곳이 "성북동 별서"였답니다.
  <명성왕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를 죽이고 궁으로 쳐들어간 구식군대의 반란을 <임오군란>이라 하죠
  이때에 도피 한 곳은 <장호원>이었고....   36계의 명수인 <명성왕후>였습니다.
  이렇게 살해 위험에 시달리며 산 <명성왕후>여서 위혐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노출 한 적이 거의 없어
  사진이나 초상화 등 분명한 얼굴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얼굴이 알려지면 피살의 위험을 더 받기에...
  하지만 <을미사변> 때에는 쪽바리들의 칼부림에 결국은 시해 당했다고 합니다만,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과 러시아의 비밀외교문서에서 <명성왕후>는 그때도 또 도피해서 
  즉, <을미사변> 때에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도피해서 살아 있었다는게 밣혀지고 있습니다.


  ['한양성곽']

  ['혜화동-성북동 고개']                 3:46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 가면 <혜화동>과 <성북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만나는데
  이곳 <돈까스>가 유명하죠. ㅎㅎ


  ['경신고' '서울과학고' 사잇길]                
  <경신고>와 <서울과학고> 사잇길을 내려 가며


  ['서울과학고']                     
  <옛 송시열의 집터> 였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신임을 얻은 무속인 <진령군>이 국정농단을 하던
  "북묘 北廟"가 있었던 <옛 보성고> 자리에 <서울과학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曾朱壁立>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의 위치를 보면 <우암 송시열>의 저택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 보성고' 앞 로터리]                     3:51                   
  <흥덕사>와 <북묘>....<옛 보성고>가 있었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 로터리를 지나
  <혜화동 로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혜화초등학교']                  3:54                 
  "혜화초등학교"를 만납니다.
  이 초등학교 자리에는 원래 <혜화여고>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에 초등학교가 들어 섯답니다.
  <성균관>에 독점적으로 소를 도살하여 쇠고기를 납품하며 높은 소득으로 부자가 된 <반촌>의 
  <반민 泮民>들이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가 "숭정의숙"이었는데, 
  쇠고기 판매 금액 일부를 학교 운영비로 내놓으며 학교를 운영 했답니다.
  천민에서 벗어 나고자 교육을 장려했던게죠.
  <혜화초등학교>는 원래 <성균관> 옆에 있었던 <숭정의숙> 터에 세워 졌었는데 여기로 이전했다고
   

  ['장면 가옥' 조망]                      3:55

  ['장면 선생' 동상]

  ['장면 가옥' 정문]

  [안내문]                            
  <혜화조등학교> 건너편에는 "장면 총리 가옥"이 있습니다.
  주미 한국 대사-국무총리-부통령 등을 지냈는데,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였으니 당시 국무총리였던 그는 실제 대통령이었다 해도 되는 정치가이며, 
  대학 교수 출신이자 <동성상고> 교장등을 지낸 교육자였습니다.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주화>. <친일 논란>. <5.16쿠데타 방관>등에 대해 아직 정립 된바가 
  없어 제가 언급하기엔 부적절하여 생략합니다.


  ['혜화동 로터리']                  4:03            
  "혜화동 로터리"
  <조선중앙일보 사장>이기도 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테러 당한 곳이어서 맘 아픈 곳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 선생>은 우익의 <이승만>, 좌익의 <박헌영>,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등이
  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발로 뛰고 또 뛴 분이죠.
  테러리스트 <한지근>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미군정>과 결탁한 극우세력의 테러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직도 없습니다.
  <여운형 선생> 테러의 최고 수혜자는 누구? 김일성? 이승만? 미국?  
   1947년 7월 19일
  12번의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는데, 당시 <조선체육회장>이던 선생은
  <"IOC" 가입 축하 축구경기>가 열리는 <동대문운동장>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으로 부터 <민정장관(국무총리)>를 제안 받고 임명장 받으로 가다가 
  피살 당했으니....그리고 이어서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도 피살 당하고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세력을 잃고 사라지며 남북분단으로 가고 말았지요.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로, 좌익으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매도 당하면서도
  좌우익의 협력을 도모했던 <여운형 선생>은 2008년 2월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에 
  <대한민국장(독립운동 서훈 1급)>으로 추서되었습니다.


  ['혜화역3번 출입구']                4:12        
  <함춘원 터>와 <창경궁>, <성균관>과 <흥덕사 터>를 둘러 보고
  다시 <혜화역3번출입구>로 돌아 와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10.5km로 약4시간이 걸렸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을 답사하고 한번 쓴 내용을 한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성균관과 유교문화』에 대한 생각.....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에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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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1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과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는 <연건동>과 <창경궁>이고,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입니다.


  ['혜화역3번출구']              12:16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지난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답사를 하고 마친 <4호선 혜화역>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혜화역3번출구>에서 50m쯤 직진하면...


  ['서울의대 정문']                 12:17
  
  <서울대 의대 정문>을 만납니다.
  여기서 <경모궁 터>를 가기 위해선 학교로 들어가 우측으로 돌아 들어 갑니다.


  ['학교 내']
  
  <융합관> 앞으로 올라 가면...


  ['경모궁' 터']                     12:20
  
   "경모궁 景慕宮" 터
  좌측엔 <서울대병원 본관>이 있고 우측엔 <의과학관>이 있는데, 
  그 사이에  "경모궁 景慕宮" 터가 복원을 오래도록 기다리며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대부분이
  예전엔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 含春園"이라는 정원이었답니다.
  <인조> 때엔 <함춘원>의 절반 이상을 방목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는군요.
  현재는 이 지역을 <서울대 병원>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함춘원>에 설립했던 
  "경모궁 景慕宮" 터가 마지막 안간 힘을 쓰며 남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경모궁터' 1930년대 사진)
  
   "경모궁 景慕宮"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 자락에 <영우원>
   이라는 墓에 안장하고, 1764년 3월 1일 이곳에는 "수은묘 垂恩廟"라는 사당을 마련했는데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이름을 <경모궁 景慕宮>으로 격상하고 크게 중건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까지 남아 있었던 <경모궁>이 사진으로 그 규모를 알려 주며 <정조>의 효심을 알수 
   있게 해 줍니다.


  ['경모궁 터' 전경]                     12:26

  ['안내문']
  
  "경모궁 景慕宮"은 현재 정문만 남아 있을 뿐 일제강점기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라졌답니다
  "봄을 흠뻑 머금고 있다"는 "함춘원 含春園" 터에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서울대병원>이 자리하고
  있어 그나마 좀 위안이 됩니다.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병동터']               12:33
  
  <경모궁 景慕宮> 터에서 "서울대병원 본관"앞으로 나가면
  <서울대병원>의 모태인 "대한의원 병동 터"가 유물로 남아 있는데
  그 동안 관심없이 스쳐 지나 다니다가 이번에 관심을 갖고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안내문에 "설립자:대한제국(고종황제)"라는 글귀가 새삼스럽군요. 국립 병원이란 의미겠죠?


  ['대한의원' (현 의학박물관}]                 12:37

  [안내문]
  
  "대한의원"
  조선시대의 <광혜원><광제원>등의 의료기관의 맥을 잇는 근대 의학의 효시로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지는 국립의료기관이었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이 건물은 건축학적 史料로도 중요헤서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지석영 선생' 동상]
  
  <대한의원> 앞에는 "지석영 선생 동상"이 눈길을 끕니다.


  ['원남동 로터리']                       12:43
  
  <함춘원>이 있었던 자리에 설립된 <경모궁>과 <서울대의대병원>을 둘러 보고
  서남쪽 문으로 나가면 <원남동 로터리>를 만나며 <창경궁>이 건너편에 보입니다.
  <원남동 苑南洞>은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의 횡포가 마을 이름에서도 남아 있는 곳이죠.
  <창경궁>을 희화화 해서 <동물원.식물원>등으로 개조해 <창경원>으로 만들고
  동네 이름도 <창경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원남동 苑南洞>이라 하고, 
  <창경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은 <원서동 苑西洞>으로 바꾸었죠.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바꾸자고 기안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쪽바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서로 뒤질세라 앞장서서 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게 합니다.



  ['선인문']                    12:44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가는 길에 "선인문 宣人門"이 먼저 보입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너무나 많은 역사 인물들이 살아서 또는 죽어서 나간 門이기 때문이죠.
  <선인문>은 <동궁(東宮)>의 정문으로서 조정의 신하들이 주로 출입하였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 <사도세자>등의 시체가 나간 문이라는데 잠시 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홍화문']                     12:47
  
  "홍화문 弘化門" <보물 제384호>
  "홍화 弘化"라는 단어의 뜻은 "조화를 넓힌다, 德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
  <조선왕조>의 궁궐 대문 중에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정문이랍니다.
  그 이유는 <왕의 거처>가 아니라 <왕비의 거처>로 만들어진 궁궐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정치를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왕이 <영조>이죠.


  ['창경궁' 안내문]

  [안내도]
  
  수많은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중요한 건물들만 복원되 있는 <창경궁>입니다.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해 있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답니다. 그 이후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창경궁>으로 재탄생 되었답니다.


  ['옥천교'와 '명정문']                   12:51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옥천교 玉川橋"를 만나며, 이어 "명정문 明政門"이 기다립니다.
  다른 궁궐에서는 "금천교 禁川橋"라고 하여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창경궁>은 왕비들이 주로 거처했기에, 좀 이쁜 이름인 "옥구슬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곳 다리라고 
  "玉川橋"라 한듯합니다. <보물 제386호>


  ['외행각' 안내도]

  [안내문]
   
  <영조>는 <균역밥> 시행에 앞서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과 만났다고...
  

  ['玉川']
  
  <옥천교> 위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천>을 조망하고 갑니다.


  ['명전전' 앞 박석마당]

  ['명정전']
  
  "명정전 明政殿"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법전 法殿"입니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죠.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 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 <광해군>이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正殿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랍니다.. 국보로 지정 되었고...


  ['명정전 어좌']

  ['명정전' 앞 '내행각']
  
  품계석이 나열되 있는 <명정전> 앞 마당입니다. 
  이곳에서 치뤄진 기억에 남는 제일 유명한 행사는 
  66세의 <영조>가 15살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식이 1759년(영조35) 6월에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어, 현대에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재현된 장소여서 더욱 유명해졌지요..
  이 결혼식으로 졸지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할머니가 된 15살의 어린 소녀 <정순왕후>....
  그러니까 <정순왕후>는 아들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적은 엄마가 되고, 
  손자가 되는 <정조>보다 7살 많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죠.
  그 이후 <정순왕후>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흘러 가며 <조선왕조>는 멸망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정전' 뒷문]
  
  <명정전>에서 좌측으로 돌아 가면 "문정전 文政殿"이 <명정전>과 연결되 있고


  ['숭문당']

  ['빈양문']                  
  
  <명정전>에서 내전으로 통하는 <빈양문 賓陽門> 옆에는 "숭문당 崇文堂"이 있습니다.
  국왕이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도 한 곳이랍니다.
 

  ['문정전' 내부]

  ['문정전']
  
  "문정전 文政殿" 
  <사도세자>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을 내리는 역사의 현장이라 별도로 언급하기로 하고
 

  ['문정전' 일원 안내도]
            
    ['동궐도'의 '문정전']

  [안내문]
  
  <문정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영화 '사도' 포스터]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화를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수 없지만 <영화 '사도'>는 그런데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 했다는 평가가 내려졌는지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였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직접 뚜껑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장면인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조금전에 지나온 <명정전> 앞 마당 답도 앞에서 촬영을 했습니다만
  역사에는 이곳 <문정전> 앞에서 행해 졌답니다.
  아들에게 칼을 주고 스스로 자결하라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애원으로 실패하자 
  뒤주에 가둬 죽였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쳐 죽어 갈때 아들인 왕세손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세손의 애원도 무시하고, 뒤주는 잠시후 찾아 볼 <선인문> 근처로 옮겨져 
  8일간이나 접근 금지로 방치 된채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죽었습니다.
  아들까지 죽이며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영조>는 그후 고작 13년 더 살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조선왕조 최장수 왕으로 82세까지 살았으니...
  노망 들어 가는 <영조>가 죽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며 복수에 나섯지요.
  <영조>의 후계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계라는 선언은 정적들의 가슴을 써늘하게 한 것이죠
 

  [뒤돌아 본 '문정전']
  
  <문정전>을 나와 뒤돌아 본 <문정전>입니다.
  <사도세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듯 하며, 어린 <정조>의 입술 깨무는 역사의 현장이 연상 됩니다.


  ['관천대' 조망]                   1:06
  
  <문정전> 앞에는 "관천대"가 보입니다.
  <관천대>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동궁전>이 있었고, 좌측에는 <궐내각사>가 있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엔 이곳에 <동물원>을 만들어 왕궁을 놀이터로 전락시켜 희화화했죠.
  우측으로 조금 가면...


  ['동궁' 일원]

  ['동궐도'의 '동궁 일원']
            
                ['동궁' 위치도]
  
  이 주변이 "동궁 터 일원"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세자>가 거처하며 13년간 대리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한 곳이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장희빈>이 <왕비>에서 강등 당해 <희빈>으로 머물던 <취선당>이
  <동궁> 근처였다는데 확실한 위치는 알수 없답니다.
  그 유명한 <취선당> 저주 사건.... <취선당>에 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죽기를 
  빌었다는 곳이 바로 이 근처 <취선당>이였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장희빈>의 저주로 <인현왕후>가 죽은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표독한 악녀 <장희빈>이라는 여인에 대해선 실록에 기록이 제법 많습니다.
  <장옥정 (훗날 희빈장씨禧嬪 張氏)>는 1659년 음력 9월 9일 
  '한성부 연은방(현재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역관으로 중인 출신 집안이였으나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 만큼 막대한 재산가였으니,
  그 부가 막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권력까지 누릴 수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수백억대의 자산가 집안의 막내 딸이였습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에 "역관 <장현>은 國中의 巨富다."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장옥정>은 <숙종(1661년)>보다는 2살 연상의 여인이였고 
  피비린내 나는 왕비 쟁탈전을 벌인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년)>와는 무려 8살이 많은 
  나이로 나이 차이가 컷습니다.
  "장옥정의 미모"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의 외모'를 언급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고 딱 한번 나타나는데
  바로 <숙종>이 <장옥정>을 보고 한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숙종 13년 6월 16일>에 기록 된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말한 것이 유일무이합니다.
  그 이후에도 <장옥정>의 미모를 조심하라는 서인들의 견제가 담긴 상소가 여러번이나 올라 갔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장옥정>의 미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현왕후 저주사건>에 연루되 <취선당>에서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고 죽어 사라졌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죽을 때 오만 발악을 하며 사약을 받지 않았다고 묘사 되지만
  실록에는 <숙종 27년 (1701년 10월 8일)>에 "장씨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틀 후 <숙종 27년(1701년 10월 10일)>엔 "임금이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다고 하교했다"
  <숙종실록>에 "<희빈 장씨>가 자진하였다"라고 기록되고 더 이상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 많은 드라마들 처럼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오만 발악을 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을 메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정적들이 쓴 <사씨남정기>등 야사에는
  <장희빈>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로 그녀를 악녀로 표현 했다고 보는 것이죠.



  ['관천대']                     1:10
  
  "관천대" <보물 제851호>
  요즘으로 보면 <천문대> 역활을 한 곳이고, 
  이 근처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었답니다.


  ['관천대'에서 '문정전' 조망]
  
  <관천대>에서 역사의 현장인 <문정전>을 조망하고 우측 <선인문> 방향으로 나가면



  ['궐내각사' 터]
  
  대궐 내에 있었던 여러 행정기관인 <궐내각사>가 빼곡히 있었던 자리가 펼쳐집니다만
  그런 <궐내각사>는 오간데 없고 그저 쪽바리들이 만든 <옛 동물원>이 떠 오릅니다.
  이곳에 있던 <동물원>은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1983년 10월에 옮겼답니다.
  

  ['선인문']                      1:14
  
  <궐내각사>와 <동물원>이 있었던 숲을 지나면 "선인문 宣仁門"을 만납니다.
  <배풀 宣> <어질 仁>자를 사용하는 門.
  하지만 이 문은 <창경궁>에서 일어난 비극을 모두 목격한 門이랍니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쫒겨나 추방 당한 門이며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그의 세자빈인 <세자빈 강씨>가 그의 아들인 세손 셋을 데리고
  영문도 모른체 궐밖으로 내쳐져 <제주도>로 귀양을 간 門이며
  미모로 왕을 사로 잡고 무술이에서 왕비까지 올랐던 <장희빈>이 죽어 시신이 나간 門이며....



  ['회화나무']
  
  <선인문 宣仁門> 앞에는 400여년 동안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지켜본 <회화나무>가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비틀며 땅바닦으로 주저 앉을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나
  인간들이 떠받쳐 주며 보호하고 있어 어쩐지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회화나무>가 목격한 사건 중에 가장 처절 했을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가 이 門 근처에서
  뒤주에 갇쳐 오뉴월 땡볕을 맞으며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8일간 사투를 벌이다 죽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애절 하게 느껴 집니다.
   

  ['문정문']

  ['빈양문']                 1:22
  
  <선인문>에서 다시 <문정전>으로 돌아와 "빈양문 賓陽門"을 통과해 내전으로 들어 갑니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
  정치행위를 하는 政殿에서 사생활 영역인 내전으로 통하는 門이랍니다.


  ['창경궁 내전']
  
  <빈양문>을 통과하면 내전이 펼쳐지는데


  ['함인정']

  [안내문]
  
  먼저 "함인정 含仁亭"을 만나는데 임금과 신하가 소통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데
  <영조>가 과거 급제자들에게 하사주를 내린 곳으로 기록에 나와 있고


  ['환경전']
  
  <함인정> 뒤편엔 "환경전 歡慶殿"이 있습니다.
  이곳은 국왕이 주로 생활하던 침전이라는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중종>이 이곳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내의녀였던 유명한 <대장금>이 진료와 간호를 했다고 
  드라마에 나오는데, 실제 <중종>은 <대장금>을 신뢰하여 자신의 진료와 대비전 동궁전까지도 
  진료를 의뢰하고 그 공로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아버지 <인조>와 장남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세손>들의 죽음에 대해선 
  다른 답사기에서 여러번 언급 했기에 생략하고.


  ['환경전'에서 바라보는 '경춘전']
  
  "경춘전 景春殿"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으로 주로 대비들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왕의 침전인 <환경전>을 대비의 침전인 <경춘전>이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게 특이합니다.
  <경춘전 景春殿>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다고 하며,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 하였답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는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환경전'과 '경춘전' 안내문]
  
  <환경전>과 <경춘전>에 대한 공식 안내문을 참고 하고
  뒤로 나가면...


  ['영춘헌'과 '집복헌']


  [안내문]
  
  "영춘헌 迎春軒"과 "집복헌 集福軒"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면서,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기도
  한데,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다가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11년1월)에 <사도세자>가 태어 나고, 
  1790년(정조14년6월)에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정조>가 무척 아끼고 사랑한 후궁인 <수빈 박씨>가 이곳에 거처하며 낳은 유일한 아들이 
  <순조>여서 <정조>는 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를 <휘경원>에 모셔 그곳에  잠들게 하고 있죠.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 암반]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에는 독특한 암반이 있고, 그 뒤로 계단은 후원으로 가는 길인데
  계단 윗 자리에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 준 곳이라고
 

  ['통명전'과 '양화당']

  [안내도]

  [안내문]
  
  "통명전 通明殿"과 "양화당 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데...


  ['양화당']
  
  "양화당 養和堂"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양화당>은 옆에 있는 <통명전>의 내전이었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로 도망 갔던 <선조>는 돌아 와 보니 <경복궁>은 불타 없어져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거쳐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어서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결국 항복을 하고 돌아와
  장기간 생활 한 곳이 바로 이곳 <양화당>이었답니다. 또한 이곳에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했다고
  쪽바리들에게 깨지고, 때놈들 한테 피터지면서도 살아 남아 백성들의 세금을 축낸 인간들의 
  모습이 어슬렁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통명전']
  
   "통명전 通明殿" <보물 제816호>
   "통달하여 밝다"라는 의미의 <통명전>은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그 동안 수많은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 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에는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게 특징이며
   앞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연회나 의례를 할수 있도록 해서 왕실 내전의 각종 행사를 했답니다.
   <명정전> 앞 마당이 정치적 행사를 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왕실 내전의 행사를 하던 곳이란 걸 알수
   있으니 <창경궁>의 최고 내전 임이 틀림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인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인현왕후>가 결국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옥정>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 꼭두각시>에 화살을 쏘고
   이곳 <통명전> 일대에 <꼭두각시와 동물 사체>등 흉물을 파묻고 저주를 하며 죽기를 기원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답사를 하면 답사하는 재미가 배가 될 것입니다.
   "<장희빈>의 <인형왕후> 저주사건"으로 <인현왕후>가 실제 저주를 받아 죽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현왕후>는 원래 약골이어서 아기도 낳지 못하며 여러 병을 앓고 
   있었다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2,000여번이나 언급 되 있고, 
   병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450번 정도 언급 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인현왕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관절 부근 환도 혈>에 종기가 심해 고름이 
   나오고, 그 종기가 다른 곳에 번져 <복막염>으로 이어지고 복통, 설사, 구토등으로 1년반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저승으로 갔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의학적 사망 원인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인현왕후>는 <숙종>에 의해 강제 이혼 당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어려운 서민 생활을 하며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마무시 했답니다.
   5년간의 폐서인 생활 후 <갑술환국>으로 환궁 혰을 때엔 이미 몸과 마음도 폐인이 되다시피 
   된 상태 였다니....
   <장희빈>은 그러한 낌새를 알고 <인현왕후>의 병세를 보며 저주를 퍼부었었고, 
   그 저주가 우연히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었으나, 
   저주에 의해 <인현왕후>가 죽었다고 믿는 분은 없겠지요? ^*^


  ['蓮池']
  
  <통명전> 옆에는 "열천 冽泉"이라는 샘과 "연지 蓮池"라는 연못이 있어
  여인들의 공간 다웁게 예쁘게 정원을 만들어 놨습니다.
  <열천 冽泉>에서 매우 찬 물이 흘러 나왔나 본데, 
  기록에는 <영조>가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였다고 


  ['함양문' 조망]
  
  <통명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蓮池> 뒤로 <함양문>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함양문>으로 올라 가면...


  ['함양문']                   1:37
  
  "함양문 咸陽門"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門으로 현재는 별도의 입장권을 구매 해야 통과 할수 있고


  ['통명전' 뒷길]

  ['자경전' 터]                    1:38

  [안내문]
  
  <함양문>에서 <통명전> 뒷길을 조금 걸으면 "자경전 터 慈慶殿址"를 만납니다.
  <정조>는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이곳에 내전을 지어 주었는데
  조금 전에 들렸던 <서울의대> 안에 있던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마주하며 매일 바라 볼수
  있도록 이곳 높은 곳에 동향으로 지었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정조>가 이곳에 <자경원>을 세운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아내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수수방관 했다고 느낀 <정조>는
  지금이라도 매일 <사도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며 반성하라고 이곳에 지어 준게 아닐까?라고 추측...
  여하튼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며 어머니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고 알고 있었으니....
  하여튼 <혜경궁 홍씨>는 여기서 그의 자서전이라 할수 있는 "한중록 閑中錄"을 썻답니다.
  <한중록 閑中錄>은 '한가한 시간에 쓴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태어나서 어린시절과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50여년간의 궁중생활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선 차마 얘기 할수 없다고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죠.


  ['창경궁 내전' 조망]
  
  <자경전>이 있었던 곳에서 바라보는 남쪽 <창경궁 내전>입니다.
  이렇게 내전이 전체적으로 조망 되는 곳은 이곳 뿐이랍니다.
  <남산>이 바로 조망되는군요
   
          

  [안내문]                 1:41
  
  "풍기대 風旗臺"는 <보물 제846호>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는 거고
  "앙부일구 仰釜日晷"는 <보물 제845호>로 "해시계"


  ['성종 태실' 조망]



  ['성종 태실'과 안내문]              1:45
  
  <풍기대>에서 북쪽으로 잠시 가면 좌측에 "성종 태실과 태실비"가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나와 있고



  ['내전 터' 일원]                    1:48
  
  <성종 태실>에서 동산을 내려 가면 <내전 터 일원>이 있는데 
  수많은 궁녀들이 거쳐 했을 내전은 없고, 숲만 우거져 있습니다.


  ['춘당지' 앞]                   1:49
  
  <춘당지>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여기서 우측에 있는 "월근문"을 다녀와 <춘당지>로 갑니다.


  ['월근문' 입구]

  ['월근문']               1:51
  
  "월근문 月覲門"은 <창경궁 관리사무소> 앞에 있더군요.
  孝子인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廟)인 건너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3년)에 건립하였는데,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 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답니다.



  [안내문]                    
  
  "춘당지 春塘池"
  안내문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춘당지' 전경]                  1:54
  
 이곳의  "대 춘당지 大春塘池"는 원래 연못이 아니라 논이었답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하며 체험 할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위로 케이블카를 설치한 유락시설로 만들어
 완전히 놀이터로 만들었죠. 제가 국민학교 시절 소풍을 이곳으로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많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칠층석탑' 조망]
  
  <춘당지> 가운데에 있는 섬은 옛날엔 없었고 
  겨울이면 이곳이 스케이트장이 되어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던 기억이 먼저 떠 오르는군요.
   


  ['팔각칠층석탑']                  1:56
  
  안내문을 참고 하고 조금 더 올라 가면...
   

  ['대온실']                      1:57
  
  "대온실"을 만납니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쪽바리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답니다. 쪽바리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2004년 우리나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관덕정' 앞 공터]                  1:58
  
  <대온실> 우측에 <관덕정>과 <집춘문>이 있어 다녀 옵니다.


  ['집춘문' 입구]
  
   <집춘문>으로 올라 가는 길 좌측에 <관덕정>이 보입니다.
   <관덕정>으로 올라 가면....
    

  ['관덕정']

  [안내문]
  
  임금이 활을 쏘던 정자였다고


  ['집춘문' 입구]


  ['집춘문']                  2:04
  
  <관덕정>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집춘문 集春門"을 만납니다.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성균관> 서쪽과 제일 가까워 국왕들이 <성균관>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잠시후 <성균관>을 갈때 이 문의 바같쪽으로 접근 해 보겠습니다.


  ['백송']                      2:10

  ]안내문]
  
  <집춘문>에서 돌아와 <홍화문>으로 내려 가는 중간에 
  우리나라에선 보긴 어려운 "백송 白松"을 만납니다.
  우리나라에 생존하는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 있지요.
  

  ['내전' 앞길]
  
  <백송>에서 <홍화문> 쪽으로 조금 더 가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2:14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는 광경을 
  <혜경궁 홍씨>와 <정조>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해 표현하는 듯한 안내판이 보입니다.
   

  ['홍화문']                    2:16

  ['홍화문' 앞]                2:17
  
  약 2시간반 동안의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홍화문>을 통과해 나가면 
  <서울대암병원>이 정면에 보이는데,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명륜동' 방향]
  
  <명륜동> 방향으로 우측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 보이고
  그 앞에는


  ['월근문']                   2:20

  [안내문]
  
  조금 전 궁 안에서 보았던 <창경궁관리사무소> 앞에 있었던  "월근문 月覲門"을 밖에서 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廟>인 <경모궁>으로 갈 때 매월 초하루에 이용했다는 문입니다.
  이 문 건너편에는


  ['경모궁' 조망]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가 있으며 그 너머에 <경모궁>이 지척에 있습니다.
  장례식장 옆에는 <현충탑>이 하나 있는데 <이름 모를 자유전사 비>라고 하는데
  <6.25전쟁> 때에 싸우다 부상 당해 이 병원으로 이송됬지만 안타깝게 전사한 이름 모를 전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충혼탑이랍니다.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1부 함춘원-창경궁 답사>는 이곳 <월근문>에서 마치고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답사기>가 이어 집니다.
   "배봉산 영우원-휘경원을 찾아서"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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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종로구』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역사유적』


  ['동대문문화역사공원역'에서 '동대문'까지 실트랙]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출발하여 <훈련원터> <미육군공병단터> <성제묘> <염초청터>를 둘러
  보고, <전태일 분신터>와 <동대문전차차고터>를 지나 <북평관터> <한양성곽박물관>을 통과하여
  <낙산 정상>에 오르고, <창신채석장전망대>와 <총무당>을 답사하고 <이화장>과 <대학로>를 갑니다.


  ['동재문역사문화공원역' 1번출입구]              12:14       
  2021년 10월 13일 (수) 구름 약간 맑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는 <옛 동대문운동장>에 2014년에 건축한 복합문화공간이랍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라는 건축설계가가 설계한 '환유의 풍경'을 담은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동대문야구장 유구' 전시]
  
  <옛 동대문운동장 터>는 역사적으로 군대와 관련이 많습니다.
  <조선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이 1594년에 설치되여 400여년을 군사훈련으로 운영하다가
  <구 한말>에는 <하도감>을 신식군대인 <별기군>으로 바꿔 훈련원으로 사용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하도감>을 폐지하고, 이곳에 <청나라> 제독 <오장경>이 주둔했고
 그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쪽바리들이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건설했다는데...
  1925년 일본의 왕세자였던 "히로히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 군사역사가 살아 있는 <하도감 터>를 매립하여 운동장을 만들었다는거 아닙니까. 에휴~~
  '히로히또'는 일본 최장 군주가 되고 세계2차대전을 벌여 최후에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일왕인데
  1989년에 아들 '아키히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으니 죽은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때 매립되어 흔적을 찾을수 없다가 2008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복원 공사를 할때 
  땅 속에 뭍혀있던 유구들을 찾아 모아 이곳에 전시 했답니다.


  [사거리에서 '동대문' 방향 조망]                12:22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거리>에서 잠시 후 방문할 <동대문> 방향을 조망하고


  [사거리에서 '을지로5가' 방향]
  
  먼저 <을지로5가> 방향으로 100m 정도 조금 진행하면....



  ['중앙의료원']                       12:25
  
  "국립중앙의료원"을 만납니다. 두번째 방문입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한국전쟁> 후 부상병과 환자 진료와 의료요원 교육을 목적으로 
  스칸디나비아 3국, 즉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 한국정부가 함께 설치한 
  공공의료원이랍니다.
  요즘 '코로나19사태'로 눈코 뜰새 없다는 "국립중앙의료원" 안으로 들어 가면
  정면으로 보이는 의료원 본관 앞에 "훈련원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무술훈련과 "무과 과거시험"을 보던 "훈련원"이 있었던 곳이란거죠.
  그러니까 조금전 <동대문운동장 터>의 <하도감>의 본부가 이꼿 <훈련원>이었던거죠.
  "훈련원 訓鍊院"은 1392년(태조1년)에 설치하여 조선왕조가 멸망 할때까지 존속된
  <조선왕조 500여년>을 지탱하는 군대의 핵심 군인을 뽑고 훈련했던 곳이어서 그 의미는 무척 큽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총칼로 무장한 막강한 무력을 가진 군사집단의 중심지였으니
  <중종반정>등 쿠데타의 핵심 거처이기도 했답니다.


  ['훈련원공원']                     12:29
        
          ['윤관장군 동상']

  ['훈현원공원 광장']

  ['안내문']
  
  <중앙의료원> 옆에는 "훈련원공원"이 조성되 있습니다.
  <옛 훈련원>은 이 공원과 <중앙의료원>을 중심으로 <을지로6가>와 <청계천6가> 사이 모두가
  <훈련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이순신 장군"이 처음 무과 과거를 본 곳이기도 한데, 말타기 시험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져 낙방한 곳이어서 역사의 현장을 찾는 느낌이 새롭습니다.
  낙방한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이곳엔 조선시대 장군들의 동상은 없고, 고려시대의 <윤관장군> 동상이 설치되 있어 좀 그렇군요.
  왜냐하면 고려시대엔 <개성>에 <훈련원>이 있었으니 조선시대와는 관계없는 곳이니까요.


  ['훈련원공원 종합체육관']                   12:32
  
  <훈련원공원> 서쪽에는 <훈련원공원 종합체육관>이 있는데, 그 앞에 표지석이 하나 있습니다.
  "경성사범학교 교지비 京城師範學校 校址碑"
  쪽바리들이 1921년 4월에 일본인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설치했던 <조선총독부사범학교>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로 개편하여 교사 양성을 한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훈련원>을 해산하고 그 터에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그 이후 <농업협동조합중앙회>가 있다가 
  다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던 것이죠.
  <헌법재판소>는 <종로구 재동>에 있었던 <옛 창덕여고> 자리로 이사했습니다.
  <훈련원>→<경성사범학교>→<서울사범대>→<농협중앙회>→<헌법재판소>→<훈령원공원>으로
  변모한 역사의 흔적


  ['동호로']                       12:34
  
  <훈련원공원>에서 서쪽 골목으로 나가면 <동호로>를 만납니다.
  <동호로>는 <종로5가>에서 <청계천5가>를 지나 <장충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랍니다.
  50m 정도 <청계천> 방향으로 가면...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                    12:35
  
  <경성사범학교>가 있었던 <훈련원공원> 뒤에는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가 폐가가 되며 쓸쓸히 있습니다.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는 조금전 <훈련원공원>에 있었던 <경성사범학교> 뒤에 딸려 있던 
  3개의 부속학교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1922년 설립된 이 학교는 일본인 학동들을 위한 학교였다는군요.
  <6,25전쟁>을 격으며 이 학교는 "미육군 극동공병단(FED)"이 주둔해 오다가
  현재는 <국방부 소관 국유재산>이니 출입을 제한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을 뿐
  앞으로 월 하려는지 이렇게 방치되 있습니다.


  ['청계5가 지하상가 4번출입구']                  12:39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서 조금 진행하면 <청계5가 지하상가 4번출입구>를 만나는데
   건너편에 "성제묘"가 있다고 해서 찾아 가야 하는데 길찾기에 유의 해야 하더군요.
   <←성제묘>라고 표기 한곳을 자세히 보면....


  ['성제묘' 조망]
  
  <코리아 못>이라는 가게와 <경북수출포장>이라는 가게 사이 골목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
  지하상가를 통과해 건너 가면....



  ['성제묘']

  ['현성전']

  [안내문]
  
  "성제묘 聖帝廟"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삼국지>의 <관우 關羽>를 神으로 모시는 사당으로 민간인이 세운 私廟랍니다.
  참고로 국가가 세운 <성제묘 聖帝廟>는 "동묘 東廟"가 있지요.
  사진 촬영을 위해 간신히 담벼락을 타고 올라 <관우 부부>를 모신 전각인 <현성전 顯聖殿>을 찍고
  골목을 나와 <청계천>으로 조금 가면...


  ['염초청 터']                   12:45
  
  "염초청 터 焰硝廳址"
  <염초청焰硝廳>은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관아로서 임진왜란 때 이곳에 본청이 설치되었답니다. 
  관아의 규모는 112칸으로 비교적 큰 것이었는데, 고려시대 말부터 이어온 화약제조 기술이 이어져 
  <염초청>은 조선의 국방기술의 중심에 있었던 관청이었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 폐지 되고 이 자리에 <방산시장>이 들어 서게 되었다고...
  조선시대 <염초청>은 도성에 2곳이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하나는 이곳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서울역 근처 <염천교(鹽川橋)>에 위치하고 있었답니다. 
  <염천교>라는 이름의 유래부터가 <염초청> 앞에 있다고 하여 <염청교焰廳橋>,<염초청교焰硝廳橋>라 
  불리다가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마전교']
  
  <염초청터> 표지석 건너편엔 "마전교 馬廛橋"가 <청계천>을 건너게 해 줍니다.
  <마전교>는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5가>와 <을지로6가(방산동)> 사이의 <청계천>에 놓여진 다리인데.
  건립시기는 <태종> 때 쯤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 <마전교>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다리 주변에서 말을 사고 파는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말전다리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고


  ['청계천 평화시장']
   
  <마전교> 앞 <염초청 터>에서 <청계천>을 따라 내려 가면
  우측엔 <평화시장>의 <헌책방 서점>들이 좀 보이는데 예전엔 엄청 많았던 <헌책방거리>였었죠.
  

  ['전태일다리']                  12:58~1:06
  
  <평화시장 헌책방거리>를 지나면 <평화시장> 중심부에 도착하는데
  "전태일다리"라고 하는 "버들다리"를 만납니다.
  이곳이 또한 근대 노동운동 역사의 현장이죠.


  ['버들다리' 위의 '전태일']

  ['전태일']
  
  <버들다리> 위에는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1970년 11월 13일)" 像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더 얘기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아는 얘기이니....


  ['전태일' 분신 장소]

  [분신장소 표시판']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이곳에서 스물둘의 나이로 노동착취에 항거하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한 장소가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지판 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뒤로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 속에서도 많은 노동관련 이슈들이 터져 나왔고,
  분신사건 이후로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세번째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공약에 
  <노동문제해결>을 넣어서 처리를 천명했으나, 당선된 후에는 이를 뒤집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서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지요.
  그리고 1년뒤 10월엔 <유신>으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여사>는 아들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을 계속 하다가 
  <전두환> 정권 시절 계엄포고 위반으로 감옥생활을 했는데, 최근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 신청을 해서
  곧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오겠습니다만, 그 어머니는 별세하신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오간수문교']                       1:08
  
  <전태일다리>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오간수문교>를 만나는데 좌회전하면...


  ['흥인지문']                  1:10

  [안내문]
  
  "보물 제1호 흥인지문 興仁之門>
  <동대문역 7번출입구> 앞에는 "경성괘도회사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요즘 말로 <서울 외곽 전철역>이 있었습니다.
  시내에는 <전차>가 다녔지만 <동대문>에서 <왕십리-뚝섬-광나루>까지는 <괘도전차>가 다녔지요.
  철길 옆에는 무수한 판잣집들이 나열되 있어 주택난을 실감하게 했으며, 많은 어린이들이 위험하게
  철길에서 놀던 광경이 희미하게 스쳐 갑니다.
  

  ['전차 차고 터']                  

  [안내문]
  
  <동대문> 앞 시내 방향에는 "전차 차고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상영지인 <한성전기회사>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그 후엔 <동대문시장>이 자리 잡고 특히 현재의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서울 호텔"이 있는 자리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죠.
 

  ['1955년도 사진']
  
  1955년도에 촬영한 <동대문 전차 차고지> 사진입니다.
  <전차 차고지>와 주변을 확실히 알수 있죠?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
 

  ['흥인지문공원' 조망]
  
  <동대문> 옆 <흥인지문공원>을 바라보며 <이화동> 방향으로 건너 가면...
 

  ['북평관 터']                    1:16
  
  <서울게임아카데미>라는 건물 앞에서 "북평관 터 北平館址" 표지석을 만납니다.
  조선 초기 농경생활이 미진했던 <여진족>들이 말,산삼, 모피 등을 가져와 
  의류와 쌀 등 먹거리와 물물교환을 해 가곤 했다는데, 당시 <여진족>의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국영의 <객관(客館)>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없어 졌답니다.


  ['디자인재단' '한양도성박물관']
  
  건너편에는 "한양도성박물관""디자인재단"이 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화여대부속병원>이었지요.
  <한양도성박물관> 뒤로 올라 가서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낙산> 정상 방향으로올라 가면...


  ['창신 채석장전망대' 조망]                    1:28
  
  <창신동>에 있는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가 조망됩니다.
  잠시후 <채석장전망대>를 답사 할 예정이어서 어디인지 미리 확인하는 겁니다.


  ['이화동']
  
  <한양성곽> 정상부까지 나름대로 개성을 뽐내는 <이화동 카페>들이 즐비하게 널어서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 가면...


  [쉼터 전망대]                     1:38
  
  <서울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곳에 쉼터가 있어 쉬며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쪽 조망]
  
  북쪽으로는 <북한산>의 <보현봉>과 그 뒤로 <백운대 인수봉>등이 보이고


  [서쪽 조망]
  
  서쪽으로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과 <서울대병원>이 보입니다.
  여기서 <서울대병원>을 조금 줌인해 보면...
   

  ['서울대병원' 조망]
  
  앞으로 찾아 갈 <마로니에공원>과 <서울대병원> <창경궁>이 지척에 있습니다.


  [남쪽 조망]
  
  남쪽을 바라보면 역시 <남산>이 확실히 조망됩니다.


  ['낙산' 정상]                       1:43
  
  좌청룡 우백호라는 풍수지리에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낙산 駱山 124.3m" 정상에 올랐습니다.


  ['창신 채석장전망대' 조망]
  
  <낙산>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잠시 후 다녀올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 위치를 가늠해 보고


  ['한성대' 조망]
  
  북쪽으로는 <한성대> 좌측 아래에 있는 <삼군부 총무당>의 위치를 가늠 해 보고 
  잠시 후 다녀 올 예정입니다.


  ['낙산공원' 주변 지도]
  
  <낙산> 정상에서 앞으로 진행 하게 될 코스를 지도를 통해 알아 보고 출발합니다.
  먼저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를 다녀와 <삼군부 총무당>을 들리고 <낙산공원 중앙광장>으로 돌아와
  <이화장>을 거쳐 <대학로>로 갈 예정입니다.


  ['낙산공원' 출입문]                       1:45
  
  <한양성곽>의 <낙산공원>을 빠져 나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02동>으로 가서
  우측으로 <채석장>을 다녀 옵니다.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                   1:53~2:05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
  <일제강점기> 시절에 여러 공공기관의 건물을 짓기 위해 채석을 한 채석장이 바로 <낙산>의 동쪽에
  있어서 그 파괴된 <창신동 숭인동>의 흔적을 조망 하도록 전망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사정상 오후4시부터 오픈한다고 문을 잠궈 놨더군요. 휴~
  카페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무료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조망 할수 있다는데...
 

  [근린공원]
  
  할수 없이 아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내려 가니 채석장 90도 절벽이 바로 앞에 있고


  ['동망봉 채석장' 조망]
  
  <단종 비>인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를 간 <단종>을 그리워 하며 한없이 울었다는 <동망봉>이
  건너편에 보입니다.
  <서울역> <시청> <구 조선총독부> <한국은행>등 근대 서울을 대표하는 일제시대 건축물들을 짓는데
  이곳에서 채석한 돌을 사용 했답니다.
  바위의 질도 좋고, 거리가 가까워 운반이 쉬워서 <낙산>과 <동망봉>등을 폭파 했답니다.
  <창신동>이 '달동네'라는 빈촌이 된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하니 볼수록 애처롭습니다.
  <동망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서" 여기 클릭 


  ['낙산 삼거리' 회귀]                     2:09
  
  <채석장 전망대>에서 다시 <창신쌍용아파트202동> 앞으로 와 <낙산삼거리>라는 버스정류장에서
  계단으로 내려 갑니다.


  [계단 내림길]
  
  이 계단은 <한성대>로 내려 가는 계단인데 제법 긴 계단이었습니다.
  계단을 3분여 내려 가면...


  ['한성대' 옆골목]                    2:12
  
  <한성대> 담장 옆 골목길을 만나는데 <삼군부 총무당>을 다녀와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100m 정도 골목을 내려 가면...


  ['삼선어린이집' 출입구]                     2:14
  
  <삼선어린이집> 입구를 만나는데 여기가 <삼선공원>이기도 하더군요.


  ['삼선공원']
  
  <삼선어린이집> 앞에는 <삼선공원>이 펼쳐지는데 조금 내려 가면...
   

  ['총무당' 뒷면]                     2:16~2:18

  ['총무당']

  [안내문]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總武堂"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이 건물은 현재의 <광화문> 앞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대원군>이 설치한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 三軍府"의 중심 건물이랍니다.
  <총무당總武堂>은 <청헌당淸憲堂>·<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원래 삼군부 내에 있었던 건물인데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고하고, <덕의당>은 언젠가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 <정부종합청사>가 건립될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졌답니다.
  요즘같으면 '국방부' 건물인데 쪽바리들이 이 구석진 곳으로 옮긴 이유야 짐작하겠지만
  해방이 된 후 지금까지도 인적이 드문 이곳에 두고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낙산' 정상 회귀]                      2:29
  
  <채석장 전망대>와 <삼군부 총무당>을 둘러 보고 다시 <낙산공원>으로 돌아 와서


  ['낙산공원']                    2:31~2:39
  
  <낙산공원>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 가면



  [계단 내림길]
  
  계단 내림길이 <낙산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데
  내려 가서 뒤돌아 보면...


  ['낙산중앙광장']                    2:44
  
  "낙산중앙공원"에는 "낙산전시관"이 있고, 공연장과 편의점도 있더군요.
  여기서 남쪽 방향으로 조금 가면...


  ['동숭어린이집']                  2:48~2:53

  ['이화장' 조망]                    
  
  <동숭어린이집>을 만나 우회전 하면 <이화장>이 보입니다.
  우측으로 돌아 <이화장>으로 가면...


  [이화장' 후문]                   2:59

  ['이화장' 정문]                  2:01

  [안내문]
  
  "이화장 梨花莊"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가 살던 집이란건 다 알지만...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안내문 내용이 좀 그렇군요.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답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다는데, 
  거기에 "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는 구절이 나온답니다.
  해석하면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뜻
   

  ['이화사거리']                       3:09
  
  <이화장>에서 <이화사거리>로 나가면 <대학로>가 이어 집니다.


  ['서울사대부국' '서울사대부여중']
  
  <이화사거리>에는 <서울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와 여자중학교>가 있습니다.
  <훈련원터> 뒤에 있던 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한듯합니다.


  ['대학로']
  
  <대학로>가 펼쳐집니다.
  1975년도 까지 <서울대학교>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


  ['흥덕동천']
  
  "흥덕동천 興德洞川"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산 곳이 현재의 '혜화동' <옛 보성중고> 자리었답니다.
  말년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자신이 살았던 집터를 절터로 희사하여 <흥덕사>가
  세워 졌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이 <유교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자신은 끝까지 불교를 신봉한 열열한 불교신자였지요. 그후 <흥덕사>라는 절이 있어 <흥덕동>이
  되었다는데 그곳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천이어서 <흥덕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 보는 이 <대학로>는 <흥덕동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개천이었답니다. 
  <구 서울대>와 <대학로> 사이에 흐르던 <흥덕동천>을 서울대생들이 <세느강>이라 부르고
  <서울대 본관> 앞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하며 <흥덕동천>을 건너 다녔다는데 
  현재는 <지하철4호선> 공사를 할때 완전 복개되어 지표면에 이렇게 흔적 모양만 남겨 놓고 
  사라 졌지만, <흥덕동천>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마 복개된 이 거리 밑으로 현재도 흐르고 있답니다.


  ['한국방송통신대' 정문]                   3:13~3:18

  ]'한국방송통신대' 본관]
  
  이어서 "한국방송통신대"를 만납니다.
  <구 서울대> 자리를 이어 받아 평생학습사회 교육 메카로 올라 섯다고...
  


  ['방송대 역사관'']

  [안내문]
  
  "방송대 역사관" 
  <대한제국> 때의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건물로서 <사적 제279호>로 지정 됬답니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였다는군요.
  후에 이 시험소는 <서울대 공대>로 이어 졌다고


  {'마로니에 공원']

  ['마로니에 공원 야외 공연장']                    3:19~3:30
  
  "마로니에 공원"
  <구 서울대 본관> 앞에 있었던 공간을 활용하여 공원을 만들었는데 <동아그룹>이 건설 기부했다는군요.
  <마로니에 공원>엔 진짜 <마로니에 나무>는 세 그루 밖게 없고, 대부분 일본칠엽수라고 하는군요.
  <경성제국대학>으로 시작된 학교이기에 일본칠엽수가...
   

  ['예술가의 집']

  [안내문]
  
  "구 서울대 본관"
  현재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 건물이 
  <옛 서울대 본관>으로서 이곳에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울대 건물이라고


  ['이상옥 열사']
  
  <마로니에공원>엔 "이상옥 열사상"이 있는데 저에게는 좀 생소한 독립애국지사이군요.


  ['서울대터 표지석']

  ['옛 서울대 모형도']

  [안내문]
  
  <마로니에 공원> 가운데엔 <옛 서울대 터> 표지석과 <옛 캠퍼스 모형>이 설치되 있고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문화>와 <예술생산의 심장부>로서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아 2013년에 <서울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아르코>가 뭔 뜻인지 사전을 찾아 봐도 알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웃음이 나더군요. ㅎㅎ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영어 표기로 "Arts Council Korea"라고 하는데 이것의 약자라고 하는데
  "arko"를 음역 한것이라고...ㅎㅎ 이런것도 예술인가? 


  ['이음']                    3:31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이곳 "이음"에서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뭔 뜻인지 뭐하는 곳인지 궁금했는데 그냥 지나치기만 했기에 이번 기회에 실체가 뭔지 알아 봣습니다.
  이곳 "이음""한국장애인 문화 예술원"이 2015년도에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어주는 공간이며, 누구에게나 열린 문화예술 창작 발표와 교육의 장이랍니다
  한마디로 <장애인 문화예술의 장>이라고 할수 있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어 주는 곳>이라고
  

  ['파랑새극장']
  
  "파랑새극장"
  1984년에 문을 연 대학로 최초의 민간 소극장으로 <김광석>, <동물원>, <들국화>, <신촌블루스> 등 
  다양한 뮤지션들이 <파랑새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고, 관객과 만나 음악세계를 만들어 왔답니다.
  코로나사태로 이곳의 예술문화 극장들은 개점 휴업....빨리 정상을 되 찾아야 할텐데


  ['학림다방']                      3:32
  
  <파랑새극장> 건너편에는 유명한 "학림다방"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군요.
  "학림사건"
  1981년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학생운동단체를 국가전복세력으로 몰아
  일망타진 했다는 사건이 <학림사건>이었는데,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한 곳이 바로 저 <학림다방>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죠. <전두환 세력>은 학생들을 안기부가 불법체포하여 장기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을 
  통하여 사건을 조작하여 최대 무기징역까지 때렸지요.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재심판결에서  "사법부의 과오로 인해 피고인들이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이 판결이 조그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며 모두 무죄 판결을 다시 내렸습니다.


  [조형물]
  
  <파랑새극장> 앞에 있는 뭔 뜻인지 모를 조형물을 보며 답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동대문' 주변 지도]

  ['낙산공원' 주변 지도]
  
  오늘 걸은 거리는 약8km이며, 3시간 1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점점 깊어 가는 가을 속에서 찾아본 역사 문화 유적이었는데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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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대학로.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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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대학로까지(오룩스).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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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서구 역사문화 탐방』
 『이수정터-염창터-증미산-광주바위-허준박물관-공암나루터-허가바위-
   하마비-양천현아지-양천향교-궁산-소악루-겸재미술관-궁산땅굴』
 

  ['구글맵']                              
  <9호선 염창역>에서 출발하여 <이수정>이 있었던 터를 찾아 보고, 
  소금 창고였던 <염창 터>를 지나 <증산>을 올라 주변을 조망하고, 
  우리민족의 자랑 <동의보감>이 집필된 <허준공원><허준박물관><탑산><공암나루터><허가바위>를 탐방하며
  계속해서 <양천관아터><양천향교>와 <궁산>에 올라 <소악루>에서 한강하구를 감상합니다.
  마지막으로 <겸재 정선 미술관>과 <궁산땅굴>을 탐방하는 10.5km를 갑니다.


  ['염창역 3반출입구']                  11:55           
  2021년 3월 3일 (수) 맑음 연무     
  <9호선 염창역 3번출구>로 나가 동쪽으로 직진합니다.


  ['염창역'에서 '증산'까지]                      
  먼저 주변 상세 지도를 숙지하고 출발합니다.
  <양화교>에서 <안양천>으로 내려가서 [한강-안양천 합수부]를 확인하고
  <이수정>으로 올라 가 주변을 조망하고, <염창 터>를 지나 [염창공원]이 있는 <증산>으로 갑니다.


  ['양화교 입구']                      
  <9호선 염창역 3번출구>에서 직진하면 [양화교] 입구를 만나는데 [양화교]로 가는 보도가 보이지 않지만
  우측 [목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양화교]로 가는 횡단보도를 만날수 있고


  ['양화교']               12:03         
  [양화교]에 올라 조금만 진행하면...
  (<양화교>와 <양화대교>는 구별해야 합니다.)


  ['안양천 진입로']              
  <안양천>으로 내려가는 진입로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가서


  ['안양천 수변길']            
  계단을 내려가 <안양천 수변길>을 만나면 <한강> 방향으로 [양화교] 밑을 통과해 진행합니다.
  이 계단은 근간에 새로 만들었나 봅니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더군요.
 

  ['안양천-염창동 진출입로']             12:14         
  [양화교]를 통과해 10여분 진행하면 <안양천>이 <한강>과 합수하는 곳을 만나는데 
  [올림픽대로]가 지나는 [염창교] 앞에 좌측으로 올라 가는 <안양천-염창동 진출입길>이 있습니다.


  ['안양천-염창동 진출입 계단']                          
  <안양천-염창동 진출입길>로 올라 가면 앞에 빨간색 건물이 보이는데 [경인양행]이라는 회사 건물이더군요.


  ['염창동둘레길' 입구]                    12:17            
  <이수정>으로 가는 길은 [경인양행] 건물 우측에 자동차 도로 사이에 있는데
  [염창동둘레길] 입구이기도 했습니다.


  ['염창동둘레길']                        
  [염창동둘레길]를 따라 조그만 동산으로 올라 정상에 도착하는데 옛날엔 "도당산"이라는 동산이었답니다.
  여기서 뒤돌아 조망을 하면...


  ['안양천-한강 합수부' 조망]               12:21        
  "안양천-한강 합수부"가 보이는데 합수부를 <올림픽대로-염창교>가 뒤덮고 있습니다.
  이 광경은 잠시 후 탐방하게 될 <이수정 二水亭>과 절대적 관계가 있으니 관심 가져야 하겠고...
  <이수 二水>는 <양수 兩水>와 같이 '두물머리'라는 의미이니...
  건너편엔 동양 최대 인공폭포라는 <양화인공폭포>가 있는 "쥐산"이 정수장 건설로 산높이가 낮아져 있고
  <쥐산> 뒤에는 <고양이산>이 있었다는데 개발로 흔적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지명들이 재미있죠?
  또한 저 <쥐산>은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분기하는 "관악지맥"의 마지막 봉우리로서
  좌우에 <탄천>과 <안양천>의 경계를 이루며 뻗어와 그 맥을 다하는 곳이 되겠습니다.
  [관악지맥]이 궁금하시면 제가 쓴 <관악지맥 산행기>를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염창정']              12:22~12:27        
  봉우리를 지나면 바로 "염창정 鹽倉亭"이러는 정자를 만나는데, 안타갑게도 코로나사태로 꽁꽁 묶여 있는데
  현재는 아파트 단지 쉼터로 주민들이 <염창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수정"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정자 우측 뒤로 그 흔적을 증명하는 표지석이 숨어 있는데 쬐끔 보이죠? ㅎ


  ['이수정 터']      
  "이수정터 二水亭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숨어 있는 표지석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이곳에 <임정 林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경치를 즐기다가
  <광해군> 시대의 [한흥군 이덕연]과 그의 동생 [충숙공 이덕형]이 물려 받아 수리하여 <이수정>이라 했답니다.
  [충숙공 이덕형]은 '한산 이씨'로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과는 다른 인물인데 
  이 분들은 '한산 이씨'이고, [한음 이덕형] 선생은 '광주 이씨'입니다.
  .
  "충숙공 이덕형"..이 분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인물이어서 저도 아는 분이니 알아 보고 가겠습니다.
  이 분은 [인조반정] 당시 도승지로서 <광해군>의 최측근이었습니다. 
  그러니 [인조반정]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제거 되야할 제거 대상 1호였습니다만
  그런데 자신이야 죽어도 좋으니 자신이 섬기던 옛 임금 <광해군> 많큼은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강력 요구헤서
  쿠데타 세력들에게도 그 충성심이 돋보였으니, 오히려 반정 주역들이 권력안정을 위해 포섭한 인물이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호도 <충숙공>을 받은 인물이니 인물 됨됨이를 짐작 할수 있죠?
  그러나 이들 형제가 서인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것 같았을 것이란건 당연지사...
  그래서 <이수정>을 고쳐 짓고 언제라도 물러날 준비를 해 두었고 물러나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시간을...
  <이덕연 이덕형> 형제는 두분다  80세 이상 사셨는데 당시로는 엄청난 장수를 누렸고
  <이덕연 선생>은 말년에 호를 <이수옹 二水翁>이라 했다고도 합니다.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이수정']      
  <겸재 정선 선생>은 <이수정>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소중한 우리나라 문화 유산이 되었습니다.
  옛날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진경산수화로서 <이수정>의 아름다움을 음미 할수 있습니다.
  <이수정>은 정자라기보다 주거 주택으로 보이는군요.
  이 산수화와 현재의 <안양천-한강 합수부>인 [二水]는 너무나 변해 있어 옛날이 그리워지는군요.


  ['치성단']                             
  <염창정> 앞에는 치성을 드리는 <치성단 致誠壇>이 있고
 

  ['염창정' 앞 아파트단지]

  [안내판]

  ['염창정' 전경]                    
  <한흥군 이덕연>과 <충숙공 이덕형>이 집과 정자를 짓고 살았을 터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 서 있어
  사람 살기 좋아진 시대를 대변해 주지만 옛 그림이 더 친근감이 가는 것은 무었 때문일까...
 


  ['염창동둘레길']           
  <이수정 터>에서 아파트단지와 <올림픽대로> 사이로 난 [염창동둘레길]을 따라  7분여 진행하면....
 

  ['염창나들목']                  12:34       
  아파트단지와 <한강>을 잇는 "염창나들목"을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염창초등학교>로 잠시 가면


  ['염창 터']                    12:37        
  <한강우성아파트 103동> 정문 경비실 옆에 "염창터 鹽倉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동네 이름을 <염창동>이라고 만들어준 "국립 소금 창고"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염창길훈아파트 102동']

  ['증산' 입구]                 12:42       
  <우성아파트 103동>에서 <201동> 방향으로 올라 가면 <염창길훈아파트 102동>을 만나며
  <염창공원>이 있는 <증산>으로 올라 가는 입구를 만납니다.


  ['증산' 오름길]

  [화장실과 운동시설]                              

  ['전망대']                    
  <염창산><증미산>이라고도 하는 <증산>을 10여분 올라 가면 전망대를 만나고


  ['염창산 전망대']                          12:51~12:56

  [안내문]

  ['염창동 이야기']       
  "증산 拯山 54.6m
  세금으로 곡식을 실어오던 세곡선(稅穀船)이 강화만(灣)을 통해 한강으로 들어와 용산으로 가던 도중에
  이 산 근처에서 자주 좌초되어서 이 산 아래 한강변에서 곡식을 건지려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답니다.
  그래서 <건질 '증(拯)'>자를 써서 <증산(拯山)> 또는 쌀을 건진다고 <증미산(拯米山)>이라 하였는데,
  후에 한자가 바뀌어 <증산(曾山)>이 되었다가, 산 아래에 한양으로 운반할 소금을 보관하는 소금창고가
  있었다 하여 다시 <염창산(鹽倉山)>으로 산 이름이 바뀌었답니다.


  ['이수정' 조망]              
  전망대에서 지나온 <이수정>과 <염창터> 방향을 조망하는데...
  옛 정취는 오간데 없고..
  바로 아래 보이는 골프연습장은 제가 [목동아파트]에 살 때에 골프를 시작하여 연습하던 곳이였는데
  지금은 폐장을 했군요.


  ['난지도 하늘공원' 조망]                  
  북쪽으로는 늪지대였던 <난지도>가 <쓰레기산>이 되어 <북한산>과 <인왕산><안산>을 가로 막고...


  ['염창동둘레길' 출입구]

  [계단]

  [내림길]                 
  <증산 전망대>에서 한강변으로 난 [염창동둘레길]을 따라 6분여 내려 가면....


  ['염창동-가양동 洞界']                1:02                
  <염창동>과 <가양동>의 행정구역 경계를 이루는 도로를 만납니다.
  화살표로 표시한 골목으로 들어 가면...


  ['염강 나들목']        
  "황금내근린공원"이 이어집니다.
  <가양3동>의 [올림픽대로]를 따라 700미터 동서로 이어진 근린공원이랍니다. 
  [올림픽대로]를 건설하기 전에는 갈대와 억새가 가득한 작은 내천(內川), 즉 "샛강"이 있었답니다. 
  <한강> 상류에서 침식작용으로 잘게 부서진 '사금(砂金)'이 떠내려 오다가 강폭이 넓은 이곳에서 유속이 
  느려져 '사금(砂金)'이 내천의 점토층에 쌓였었는데, 이에 주민들이 사금을 채취하면서부터 
  이 內川을 "황금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한강 제방을 쌓아 육지를 만들고 아파트와 공원을 건설해서 그 흔적을 찾을수 없습니다만 
  현재는 공원 이름으로만 남아 이곳이 옛날 "沙金鑛"이었음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황금내근린공원>을 7분여 진행하면 [서울둘레길]이 지나는  "염강나들목"을 만납니다.


  ['서울둘레길 스템프함']                1:09         
   "염강나들목" 앞에는 [서울둘레길 스템프함]이 있군요.
   제가 서울둘레길을 답사한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 때와는 비교 할수 없이 여러 시설들이 생겨났고 코스도 좀 바뀌었더군요.
   조만간 새로이 <서울둘레길>을 답사 해 볼까 합니다.


  ['염강나들목 지하도']

  ['한강변 자전거도로']                1:12           
  <염강나들목>을 통과해 나가면 한강변 자전거 도로를 만나 <가양대교> 방향으로 진행헤서


  ['가양대교' 남단 밑 통과]                  1:20        
  <가양대교> 밑을 지나고...


  ['구암나들목']                    1:28        
  이어서 <구암나들목>을 만나는데 [허준공원]으로 연결되는 나들목으로 이곳엔 육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구암 龜巖>은 <허준 선생>의 호이죠.
  엘리베이트를 타고 육교로 올라 갈수도 있고 계단을 이용 할수도 있습니다.
  저는 걸어서 올라 갔습니다.


  ['허준공원'에서 '궁산땅굴'까지]                      
  <구암나들목>에서 앞으로 진행해야할 명소들의 위치를 미리 예습하고 갑니다.
  "구암나들목-허준공원-허준박물관-공암나루터-공암바위(허가바위)-양천향교역-하마비-양천관아-
  양천향교-소악루-양천고성-겸재 정선 미술관-궁산땅굴-양천향교역" 순서로 진행합니다.


  ['88올림픽대로 육교']                     
  <구암나들목>인 육교로 올라 가면 전망대가 있습니다.
  먼저 조망을 하면....


  ['증산' 조망]                         
  동쪽으로는 조금 전에 올랐던 <증산>이 <가양대교> 뒤에 보이고


  ['북한산' 조망]                    
  북쪽으로는 <대덕산>과 <난지도 노을공원>이 건너편에 있는데 <북한산>이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연무가 좀 사라져 가시거리가 좀 길어 지는군요.


  ['궁산''덕양산' 조망]          
  서쪽으로는 <덕양산>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한양성]은 <內四山>과 <外四山>이 감싸고 있는데
  <內四山>은 [북악산-인왕산-목멱산(남산)-낙산]이고 <外四山>은 [북한산-덕양산-관악산-용마산]이죠.
  <덕양산>에는 [행주산성]이 있으며 <한양>의 <外四山> 중에 하나라는거 아시고 계셨나요? ㅎ


  ['허준공원' 조망]                    1:35         
  육교 남쪽에서는 <구암공원>이라고도 하는 "허준공원"이 조망됩니다.


  ['공암나루근린공원']                   
  <구암나들목 육교>를 건너 내려 가면 먼저 [공암나루근린공원]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허준공원']               1:37~1:51       
  이어서 "허준공원 (구암공원)"이 펼쳐지며, 건너편엔 "대한한의사협회"가 붙어 있습니다.


  ['허준 선생 동상']

  [안내문]                         
  공원에는 "구암 허준 龜巖 許浚" 선생 동상이 있습니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名醫이자 <동의보감>의 저자이시죠.
  병에 걸려 치료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을 강조하셨죠
  그래도 병에 걸리면 치료하는 방법을 누구나 알기 쉽게 쓴 책이 <동의보감>이죠.
  <동의보감>의 서문을 요약 하면...
  
       "옛날 뛰어난 의사는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의사는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람의 마음은 다스릴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쫒으며 원천을 캐지않고 지류만 찾는 것이니
       병 낫기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

  요즘 의사들이 더 귀 기우려야 할듯...
  국민이 있어 의사도 학교 때 외운거 갖고 벌어 먹고 사는데, 
  자기들이 국민의 위에 있는줄 아는 세태를 <허준 선생>은 개탄 할겁니다.


  ['광주바위']                        
  "광주바위"
  공원에는 연못이 하나 있고 연못 가운데 <광주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바위는 공원의 조형물로서 오리지날 <광주바위>는 아니랍니다.
  한강 개발로 흔적없이 사라진 명승지 <탑산과 광주바위>를 추억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광주바위>에 대한 전설은 허무맹랑 하지만 재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단양>의 <단양팔경> 중에 제1경인 <도담삼봉>의 전설과 거의 같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게시해 놨더군요.


  ['광주바위' 모형]     
  이쪽에 있는 바위들을 자세히 보니 천연바위가 아니라 시멘트로 만든 인공바위더군요.
  <겸재 정선 선생>이 <광주바위>와 <탑산의 공암바위> 주변 경관을 그림으로 남겨 놨으니
  아래에 첨부한 그림과 이곳 연못의 바위를 비교 해 보면 인공적이란게 분명 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광주바위>는 한강 개발로 없어진지 오래랍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공암층탑(孔巖層塔)']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진경산수화이며 우리나라 <보물 제1950호>로 지정된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공암층탑 孔巖層塔"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에 대해 줏어 들은 내용을 기술하면....
  우측 산이 잠시후 방문할 <탑산>이며 산에 <탑>이 보입니다.
  <탑산> 아래에 있는 절벽에 구멍이 있는데 이 동굴이 "공암 孔巖 (구멍바위)"로 잠시후 방문 하는데
  <허준 선생>이 <동의보감>을 집필했다는 동굴이고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탄생한 굴이라고
  "허가바위"라고도 하더군요.
  그리고 <한강>에 솟아 있는 두개의 바위가 <광주바위>랍니다.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는 선비의 모습이 여유롭습니다.
  뒷쪽 산인 <증산> <쥐산> <선유봉>이랍니다. 지금은 대부분 까뭉개진 산들입니다.


  ['허준공원' 정문]                       
  <허준공원> 정문으로 나가면 <가양2동주민센타>가 있고


  ['대한한의사협회'와 '허준박물관']                      
  이어서 [대한한의사협회]와 [허준박물관]이 붙어 있습니다.
  대한한의사협회 제34~35대 회장 <안재규>가 <파란문>의 친구입니다. ㅎㅎ
  현재 <군산>에서 <지산한의원>을 하고 있고...골프 핸디캡이 "0"으로 프로급  ^*^



 [ '허준박물관' 정문]        
  "허준박물관"을 관람하고 갑니다.
  이 박물관 개관식 할때 왔다 갔는데 벌써 7~8년 된듯 하군요.


  [박물관 내부]       
  박물관은 세개층과 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옥상엔 정원과 약초원이 <탑산>에 연결되 있었습니다.
  한의학에 대해 아는게 별루여서 관람이 시원찬았습니다.
  뭘 알아야 관람도 재미있는데....ㅎㅎ


  ['구암 허준 선생 像']

  ['허준 선생 가계도']

  ['허준선생'에 대한 진실과 오해]                      
  <허준선생>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는데....
  <허준선생>에 대해 잘못된 내용이 판치는 것은 저는 <소설 동의보감>과 
  이것을 기초로 드라마한 <집념>이라는 드라마라 할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은성씨>가 쓴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들 때문에 소설과 드라마의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 오해하게 했죠.
  <소설 동의보감>은 저도 재미 있게 읽은 소설입니다만, <이은성씨>가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4권 중 3권까지만 쓰고 도중에 돌아 가셨죠. 물론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지만 소설은 소설입니다.
  <소설 동의보감>의 대표적인 허구가 <허준선생>의 스승이 <산청의 유의태 柳義泰>라는거죠.
  <산청>에는 <유이태 劉以泰>라는 명의가 실제 있었는데 소설에서 교묘하게 <산청의 유의태 柳義泰>로
  변모시켜 소설에 <허준의 스승>으로 설정한것으로 보입니다.
  <유이태  劉以泰>는 [숙종]의 어의를 한 분이니 <허준선생>의 100년쯤 후배 되는 분을 스승으로 만든 것입니다.


  ['동의보감' 집필]                            

  "동의보감 東醫寶鑑 - 국보 제319호"
  중국의 한의학과는 태동이 다른 우리나라에 맞는... 우리나라 기준의 의학서여서 더욱 값진 책이죠.
  그래서 <유네스코>가 세계 최초 유일의 의학서로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책입니다.
  자랑스럽죠?
  그런데 이 책을 <허준선생>이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알고 계시지는 않나요?
  <허준선생>이 집필한 모든 책은 모두 <14대 왕 선조>의 지시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쓰여 진 것입니다.
  윗 사진이 집필 장면을 모형화 한 것인데 집필 장소는 잠시후 방문하게 될 <공암-허가바위>라고 합니다.
  <동의보감>은 1596년 <선조>의 어명으로 "양예수" "정작" "허준"등이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중단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허준이 다시 편찬하여 1610년 완성하였는데
  이 때는 1608년 [14대 왕 선조}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게 했다는 죄명으로 유배 생활을 할때 였습니다.
  <광해군>이 즉위 2년에 <동의보감>을 받아보고 무지무지 기뻐하며 유배에서 해제하고 다시 정1품 어의에
  올려 자신을 보필하게 하며 馬 한필도 하사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고급 중형승용차를 하사 한거죠.
  그러나 선생은 5년 정도 보필하다가 아쉽게도 <광해군 7년> 1615년에 76세를 일기로 타개했습니다.

  ['동의보감 속 동물약재']

  ['1층 로비']                        
  박물관을 횡하니 둘러 보고 나가서 <공암바위>로 갑니다.


  ['탑산' 옆 통과]

  ['가양동 성당']                       

  ['탑산' 들머리]                     1:32           
  박물관 정문으로 나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우측엔 <탑산>이라는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끝까지 가면
  앞에 <천주교 가양동 성당>이 있고 그 앞에 <탑산> 들머리가 있습니다.
  정상엔 정자가 하나 보입니다.
  <탑산>의 높이가 3~40m 정도로 보이는데. 앞에서 본 <겸재선생>의 그림 [공암층탑]에 나타난 <탑산> 모습은
  한강 개발로 강물의 수위도 달라졌고 주변을 온통 매립하여 산 중턱까지 한강이 육지가 되버렸습니다만
  그래도 그림 속의 <탑산> 느낌은 조금 남아 있는듯 합니다.


  ['영등포공고' 앞 '공암나루터 공원']

  ['공암나루터']                               
  <탑산 입구> 옆에는 "공암나루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앞에는 <영등포공고>가 언제 떠내려왔는지 <강서구 공암나루터>에 있습니다.
  이 나루터에는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과 고려 태조 <왕건>의 얘기가 전해 오고 있더군요.
  왕건이 개성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치러 내려 갈때 배가 없어 한강을 건널수 없어 고심하고 있을때
  당시 90세이던 <허선문>이 이 동네 소유 배들을 모아 왕건에 제공하여 강을 건너 후백제를 칠수 있었답니다.
  후에 왕건이 <허선문>에게 고마움으로 <삼한공신 양천촌주 三韓功臣 陽川村主>로 삼고
  이 지역 땅을 하사하여 대대로 자손이 살도록해 주었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또한 <공암나루>에는 <이억년>과 <이조년>의 형제애가 서려 있는 나루라고 만화로 이해하기 쉽게 해 놨습니다.
  여기에서 현재의 "김포 金浦"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1963년까지는 여기도 '김포군'이었다고..
  자세한 내용은 만화를 읽어 보시고, 만화에 없는 얘기를 추가하면....
  <이억년> <이조년>이라는 이름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이들 형제의 제일 큰형의 이름은 <이백년> 둘째가 <이천년> 셌째가 <이만년> 넷째가 <이억년>이고
  막내가 <이조년>입니다.  특히 <이조년>은 고려말 예문관 대제학등 높은 관직에 오랫동안 올랐는데
  그가 쓴 [다정가 多情歌]라는 시조가 유명하죠. 읽어보면 이 시조를 그가 썻다고?라고 하실겁니다. ㅎ
  
                    梨花(이화)에 月白(월백)하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 제, 
                    一枝春心(일지 춘심)을 子規(자규)ㅣ야 알냐마는, 
                    多情(다정)도 病(병)인 양하여 잠 못 드러 하노라.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꽃 한 가지에 서린 봄날의 정서를 자규가 알고 저리 우는 것일까마는,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하노라


  ['공암바위']

  ['공암바위']                         
  <공암나루> 바로 옆에는 "공암바위 孔巖"가 있습니다.한마디로 <구멍바위>라는 뜻이죠.
  <양천 허씨 시조>인 <허선문 許宣文>이 탄생 된 곳이라고 하며
  그의 20대 손인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 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허가바위>라고도 하는군요.


  ['허가바위' 입구]                 
  앞에서 본 <겸제선생>이 그린 "공암층탑 孔巖層塔"에는 이 바위 아래에 한강이 흐르며
  <공암나루터>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재의 이 주변은  한강 개발로 온통 매립하여 <공암바위>가
  오히려 땅 아래에 있으니 변해도 너~무 변했죠?
  매립지에는 학교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허가바위']

  ['허가바위' 내부]                         
  "공암바위 孔巖 (허가바위)-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 "
  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로 제법 큰 동굴이더군요.
  이곳에서 <양천 허씨 시조>인 <허선문 許宣文>이 탄생했다는데, <허선문 許宣文>은 <가야 김수로왕>과
  <인도 소녀 허황옥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으로 모두 <김해 김씨> <김해 허씨> 가문이죠.
  그러니까 <김해 허씨>의 분파 중에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니 모두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후손이고
  참고로 <인천 이씨>도 <김해 허씨>의 분파로서 <김해 김씨><김해 허씨><양천 허씨><인천 이씨>들은
  같은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후손으로 그래서 서로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동의보감' 집필지]                               
  또한 이 동굴에서 <허준선생>이 <동의보감>을 집필 했다는데...믿어도 되는지
  임금의 御醫로 거의 일평생을 보낸 <허준선생>이 이런 열악한 굴 속에서 방대한 자료와 함께 집필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의미를 극대화 하려는 의도일뿐 실제 이런 구멍바위에서 집필 활동을 할순 없었겠죠? 추측.ㅎ


  ['가양동 성당' 앞]                   2:42       
  <공암바위>를 탐방하고 다시 <가양동 성당>으로 나가 [양천향교역]으로 갑니다.
  앞에 보이는 <동양고등학교>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려 [양천향교역]으로 가면...


  ['9호선 양천향교역 1번출입구']               2:56         
  [지하철9호선 양천향교역 1번출입구]에서 <양천관아지>와 <궁산>등을 답사 시작합니다.
  여기서 부터 "겸재 정선을 따라 산수화 속을 걷다"라는 테마길이 시작되더군요.
  조금 직진하면...


  ['양천초등학교' 앞 '하마비']

  ['하마비']                     2:57           
  [양천초등학교] 정문 앞인 이 근처가 <양천관아>로 들어 가는 입구였나 봅니다.


  ['홍원사' 앞 사거리]                   3:02~3:07        
  <하마비>에서 <양천초등학교> 골목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홍원사>라는 절이 보이는 곳에서 사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을 보면....


  ['양천현아지' 로타리]

  ['양천현아지']

  [안내문]                  
  이 일대가 "양천 현아 陽川縣衙"가 있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판에 있습니다.
  이 주변을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진경산수화를 통해 그 규모와 경관을 알아 보겠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양천현아'] 

  [그림 설명]             
  그림은 <겸제 정선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고, 안내문은 이곳 안내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림 설명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에는 낙관이 세개 찍혀있는데
  그 중에 두개는 선생의 도장이고, 큰 낙관 하나가 눈에 띄는데
                                        
                                               "天金勿傳"
                                                천금물전
   <겸재 선생>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림에 경고 표시를 했습니다.
   중국의 <왕희지>가 옛 스승 <위부인>의 「필진도」를 읽고 난 뒤 자신이 평생 경험한 바를 적어 
   자손에게 남긴 「제위부인필진도후(題衛夫人筆陣圖後)」의 끝 구절에서 나왔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종해청조']

  [그림 설명]              
  화가인 <겸재 정선 선생>은 화가이기도 하지만 요즘으로 치자면 시장.군수 급인 현감이라는 벼슬도 했죠.
  이곳 <양천현감>은 선생이 66세 되던 해에 부임하여 4년여 근무했답니다.
  왕(영조)과 왕세자(사도세자)의 그림 가정교사도 했고....


  ['김희성'이 그린 '양천현아']

  [그림 설명]                  
  이 분의 그림이 <양천현아>를 더 전체적으로 그렸군요.
  <김하성>은 <겸재 선생>의 제자 뻘...


  ['양천현아' 모형형도]                  
  이 사진은 <겸재 정선 미술관>에 설치된 <양천현아 모형도>를 촬영 한것입니다.
  <양천형아>의 규모가 상당하며 반경 200m 이내의 읍치는 <양천현아>가 전국 유일이라고 합니다.
  뒤에 보이는 산이 <소악루>가 있고 <양천고성>이 있는 "궁산 74.4m"입니다.


  ['홍원사']             3:08     
  외형상 전통사찰은 아닌듯 한데 조계종이더군요.
  이 자리가 옛날 <양천현아>의 <객사>자리라는군요.
  골목을 따라 조금 더 들어 가면...


  ['양천향교']                  3:10~3:20

  [안내문]                         
  "양천 향교 陽川鄕校"를 만납니다.
  현재 행정구역 '서울특별시'에 남아 잇는 유일한 향교라고 합니다.
  이 지역이 1963년까지는 '김포군'이었답니다.


  ['향교 내부']

  ['양천향교 이야기']                                
  향교 내부를 둘러 보고


  [향교에서 조망]                           
  향교 정문에서 옛 <양천현아>를 생각해 봅니다.


  [공덕비]    
  향교 정문 옆에 있는 공덕비를 둘러 봤습니다.
  혹시 <겸재 정선 선생> 공덕비도 있는가 해서...ㅎㅎ 없었습니다.


  ['궁산근린공원' 입구]                  3:20       
  향교 정문 옆 공덕비 옆으로 <궁산근린공원> 산책로가 열립니다.
  조금 올라 가면...


  [운동시설]

  ['궁산' 중앙 통로]                 3:23       
  운동시설과 공원 중앙통로를 만나고, 중앙통로를 따라 100m 쯤 올라 가면


  ['소악루']                     3:26~3:35

  [안내문]                    
  "소악루 小岳樓"를 만납니다.
  이곳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설명 되 있습니다.


  ['소악루']      
  조선 <영조> 때 동북현감을 지낸 "소와 이유(1675-1753)"가 처음 지은 정자랍니다.


  ['소악루'에서 조망]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안현석봉']

  [그림 설명]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보물 제1950호>로 지정된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겸재선생>이 그린 "안현석봉"이
  이곳 <소악루>에서 한양 방향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안현석봉>은 지금의 <서울 안산의 저녁 봉화>를 보고 그린 그림이랍니다.
  산꼭대기에 봉화불이 빨갓게 보이죠? 그 뒷산이 북한산인듯...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소악후월']

  [그림 설명]                            
  <겸재선생>의 그림과 <이병연선생>의 詩를 연관지어 읽으면 감흥은 더 합니다.
  <이병연선생>은 <겸재선생>의 둘도 없는 친우이죠.
  <이병연선생>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선 엄청난 지위를 누리는 분이죠.
  이 분이 쓴 詩가 10,000수가 넘더라구요.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소악루']                   
  <소악루>의 정취를 가장 잘 나타낸 <겸재선생>의 그림은 바로 이 그림 "소악루 小岳樓"입니다.
  <양천관아>도 좀 보이고....


  ['소악루'에서 동쪽 조망]                      
  현재 <소악루>에서 바라보는 한강입니다.
  <겸재선생>의 그림과 비교됩니다. ㅎ


  ['소악루'에서 북쪽 조망]              
  <안산>과 <북한산>은 <대덕산>과 쓰레기산인 <난지도> 뒤로 희미하게 보이고


  ['소악루' 조망]            
  <소악루>에서 <궁산 정상>으로 올라 가며 뒤돌아 본 <소악루>입니다.
  저 <소악루>는 원래 자리가 아니지만 편의상 이곳으로 옮겨 신축했다고....
 

  ['양천고성지']                      3:36

  [안내문]

  ['궁산' 항공 사진]                   
  <궁산> 정상으로 올라 가면 "양천고성 陽天古城"이 있었다는 안내판이 있고
  친절하게 항공사진도 찍어놨습니다.


  ['성황사']

  ['안내문]                          
  "성황사 成皇祠"
  안내판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궁산' 정상]                    3:39~ 3:47          
  "궁산 宮山 74.4m"
  삼국시대엔 <한성백제>가 건너편 <덕양산>에 진을 친 <고구려>와 대치하던 城이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엔 <권율장군>이 진을 치고 있다가 건너편 <덕양산 행주산성>으로 옮겨
  <행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일제강점기시절엔 일본군이 주둔하며 <김포공항>을 건설하는 기지로 활용하고
  6.25 때는 미군이 주둔하고, 전쟁 후에는 한국군이 주둔한 군사요충지 였답니다.
  그러면서 <궁산 宮山>은 원형이 무지막지 홰손되었다는군요. 
  

  ['덕양산' 조망]                         
  <한강>의 關門인 <덕양산>이 <궁산>에서 가깝게 조망되고


  ['개화산' 조망]                        
 꽃이 피는 <개화산 開花山>, 꽃이 만발하는 <방화동 傍花洞>..모두 꽃동네라는 의미
 다음에 탐방할 예정입니다.


  [내림길]                       3:47

  ['궁산' 중앙 통로]                          
  <궁산 정상>에서 중앙 통로로 내려가면...


  ['겸재 정선 미술관']               3:52~4:24     
  <궁산공원> 정문을 나서면  "겸재 정선 미술관" 후문이 건너편에 있습니다.
  미술관 정문은 1층에 있어 내려가서 거꾸로 올라 가며 관람해야 하더군요.
  먼저 뒤에 보이는 <망동산 터>를 보고 내려 갑니다.


  ['망동산 터']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위대한 화원 "겸재 정선 선생"은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 까지 붓끝으로 감탄을 자아 내게했습니다.
  이곳은 옛날 "망동산 望東山"이라는 산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개발로 원형이 홰손되었다고
 

  ['겸재 정선 미술관' 전경]               3:56~4:24    
  "겸재 정선 미술관"

  [겸재정선미술관 홈페이지 인사말 캡쳐]
 

  ['금강내산총도' - 국립중안박물관 소장]

  ['18세기초 화단 상황과 정선]

  [양천 현령 시절]                         
  미술관에 들어 가면 먼저 <금강내산총도>가 내방객을 반겨주고
  선생의 생애와 당시 화단의 상황등을 알려 줍니다.
 

  ['계상정거도']                     
  많은 작품들 중에 눈에 확 들어 오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ㅎㅎ
  그 동안 1,000원자리 지폐를 수없이 만졌지만 이 지폐 속에 이런 그림에 대해선 무관심이었는데
  이 돈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34억짜리 그림이라던가, [보물585호]라던가, <퇴계선생>이 <도산서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던가 하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ㅎ


  ['총석정']                 
  너무 많은 그림이 있어 생략하고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그림은 "총석정"이었습니다.
  <관동팔경> 중에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는 <해금강>의 <총석정>을 여기서 알현하는군요.


  ['궁산 땅굴' 입구]                    4:25

  ['궁산땅굴']                        
  <겸재 정선 미술관> 앞에는 "궁산 땅굴"이 있습니다.
  오후 4시까지만 관람 할수 있어 들어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궁산 땅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굴착한 군사용 땅굴로서 군수 물자를 저장하거나
  김포 비행장을 감시하고, 공습 때에는 부대 본부로 사용하기 위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클릭하여 영상으로 보세요.
   "궁산땅굴 안내 영상" 


  ['9호선 양천향교역 1번출입구']                 4:34            
  [강서구 역사문화 탐방] 첫번째 답사를 마치고 <9호선 양천향교역>으로 돌아가 귀가 했습니다.
 

  [실트랙]                   
  걸은 거리는 10.5km였으며 4시간 4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의외로 많은 역사 문화를 간직한 <강서구>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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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역사문화 탐방』
 『부침바위-세검정-탕춘대-총융청-평창-백석동천』

 

  ['구글맵']

  ['구글어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부침바위터"를 알아 보고
  "홍지문-이광수별장터"를 들리고, "세검정-탕춘대터"를 찾아 봅니다.
  그리고 "조지서터-장의사 당간지주"를 확인하고 "총융청터-평창터"를 둘러 보고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부암동 백석동천"을 탐방합니다.


  ['윤동주문학관'앞]              11:10         
  2021년 1월 25일 (월) 맑음 
  지난번 <북악산 신규개방코스> 탐방 때에도 왔었던 "윤동주문학관-자하문고개"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창의문']

  [안내문]                      
  <창의문 안내문>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잠시후 방문하는 "세검정 洗劍亭"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조반정"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가장 명분없이 쓸데없는 나라 걱정으로 일으킨 쿠데타라고 볼수있죠.
  쿠데타로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직접 인솔하는 쿠데타 군들이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이 <창의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쳐들어가는데, <창덕궁> 경비훈련대장인 <이흥립>이 
  방어하는 대신 미리 찐대로 대문을 활짝 열어 주고 동조해 쉽게 쿠데타에 성공했죠.
  그때의 핵심 쿠데타 멤버들의 명단을 현판으로 만들어 이 <창의문> 안에 기념으로 걸어 놨습니다.


  ['부암동']                      
  <창의문>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를 지나면 <부암동>을 만나는데
  이번엔 좌측으로 진행합니다. 지난번 <북악산 신규개방코스>는 우측으로 갔죠.


  [1900년대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1900년경에 <창의문 주변>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해 놨습니다.
  당시 초가집들과 북악산이 인상 깊습니다.


  ['부암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이 펼쳐 집니다.
  이 고개가 옛날 [인조반정] 쿠데타군 7~800여명도 올라 <창의문>을 통과했던 "자하문 고개"입니다.
  현재는 이 고개 밑으로 <자하문터널>이 뚫려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나 차량들은 한산해 졌습니다.
  여기 우측에 있는 <'부빙'-부암동 빙수>라는 빙수집이 유명하죠. 월화요일은 휴업.
 

  ['부암동주민센타']                  11:13           
  <창의문>에서 <자하문고개>를 3분여 내려 가면 <부암동주민센타>를 만나며
  주민센타 뒤로 "인왕산 기차바위"가 조망됩니다.
  그리고  주민센타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세종대왕 3남 안평대군"이 살던 집인 "무계원"과
  친일파 "윤웅렬 별장"이 친일파 다운 크기의 별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다가 어려운 삶을 살다 간 '운수 더럽게 없는' "현진건" 선생이
  그 유명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쓰며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표지석만 있습니다.
  친일파와 항일파의 빛과 그림자가 있는 골목입니다.
  이곳에 대한 포스팅은 이 글 마지막에 부록으로 첨부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가 쓴 탐방기를 참고하시고..


  ['세검정' 가는 길]

  ['석파정 서울미술관']                    11:18           
  <부암동주민센타>에서 5분여 고개를 내려 가면 우측엔 <자하문터널> 출입구가 있는데
  앞에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있고, <이중섭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석파정']                                
  <흥선대원군>의 별서인 <석파정>의 정문인 <삼계동 三溪洞>이 있습니다.
  현재 <유니온약품그룹의 안병광 회장> 개인 소유가 되어 <서울미술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입장료 11,000원을 내야 들어가 볼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제가 탐방기를 포스팅 했으니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가 볼 필요 없이
  첨부 부록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AW 컨벤션센타' 앞]                 11:21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100m 정도 더 내려 가면 좌측에 "AW컨벤션센타"가 있고
  건너편엔 "부암동경노당"이 있는데, "부침바위 표지석"이 보입니다. 
  사진에 노란색 원으로 표시했는데 관심 가지지 않으면 찾기 어렵습니다.


  ['부암동 경노당']                 
  "AW컨벤션센타" 앞에서 "부암동경노당"을 바라보며 "부침바위 표지석"을 확인합니다.
  "부침바위"는 도시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백석동천> 탐방을 마치고 경노당 우측 골목으로 다시 내려올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백석동천>은 앞에 보이는 산줄기 뒤 계곡에 있었습니다.


  ['부침바위터']                   11:25          
  "부침바위터 付岩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던 바위랍니다.
  바위 크기는 약2m 정도였다는데 바위 표면에 벌집같은 구멍이 뚫린 자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돌을 대고 비벼서 돌이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고....
  이 바위 덕분으로 이 지역의 이름이 "부암동 付岩洞"이 되었답니다.


  ['세검정 삼거리']                 11:34        
  <부침바위터 付岩址>에서 10여분 더 내려 가면 "세검정 삼거리"를 만납니다.
  사실 <세검정동>이라는 행정구역은 없는데도, 이 지역 일대를 모두 <세검정>이라고 통칭하고 있습죠.
  이 삼거리는 <홍지동>인데도 <세검정삼거리><세검정파출소><세검정우체국>등등등 모두 <세검정>이
  이런 지명과 관공서 이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에 있는 <탕춘대성 홍지문>과 정면 <상명대 입구>에 있는 <이광수 별장>을 다녀와 
  우측에 있는 <세검정>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홍지문']                        11:37

  [안내문]                             
  "홍지문 弘智門"
  여러 古지도에는 "한북문 漢北門"으로 나오는 城門으로 "탕춘대성 蕩春臺城"의 유일한 大門.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은 우리나라 城 중에서 효용성 등에서 최하 城으로 왜 건설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城입니다. <인조반정> 때에 쿠데타 군이 이 문을 통해 들어와 <세검정>에서 칼을 갈고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창의문>을 통과해 <창덕궁>으로 돌진하는데 이용 했을 뿐....
  적군을 막는데 이용한 城門이 아니라 등잔 밑 쿠데타군이 이용한 城門이니....
 

  ['홍지문']                 
  "홍제천 弘濟川"에 붙어 있는 城門으로 "오간수문 五間水門"과 함께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 옆에도 <청계천 오간수문>이 있죠.
  <홍지문>을 둘러 보고 <홍제천>을 따라 <상명대 입구>로 돌아 가면...
 

  ['상명대' 입구]               11:44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대>로 올라 가는 입구에 "청와 설렁탕집" 좌측으로 골목이 이어 집니다.
  전봇대에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 가는 길이라는 명칭도 긴 이정표가 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 가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1:45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바로 만납니다.
  우리나라 미술교과서 등 관련 서적들, 미술학회지, 미술이론 관련 논문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이광수 별장터']                         11:46

  [안내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이광수 별장 터"를 만납니다.
  <춘원 이광수>가 '조선일보' 부사장이었을때 풍경이 좋은 이곳에 별장을 지었답니다.
  관련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별장']           
  현재는 개인 소유여서 들어 가 볼수 없어서 우측 돌출부로 기어 올라가 집 안을 촬영했습니다.
  남의 집안에 카메라를 들이 대는건 실례가 됩니다만,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집이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촬영을 했으니 주인장이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930년대 일제시대에 지은 집으로는 꽤 괜찮죠? 
  여기는 별장이고 그가 살던 집은 '효자동'에 있었으며 현재는 음식점이더군요.
  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조사를 받을 때엔 '남양주 사릉' 근처에 은거하다가, <봉선사>에 기거하기도
  제가 안내문에는 없는 이야기를 추가하여 언급하고 싶은 내용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인 <허영숙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3대 천재 중에 하나라는 <춘원 이광수>
  그는 19살에 [박혜순]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지요. 그 당시엔 집안에서 정해 주는대로 조혼을 하던 시대였죠.
  일본에서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중 운명의 여인을 만나는데 그녀가 바로 <허영숙>.
  그녀는 '진명소학교'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최초로 여의사가 개업한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죠.
  그야말로 '新女性'이었지요. 
  당시 소설 <무정>으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던 유부남 <이광수>를 차지하려는 신여성들이 많았죠.
  <랜의 애가>라는 시집까지 발표하며 구애를 했던 <모윤숙>..'랜'은 당연 <이광수>를 흠모하는 <모윤숙>.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한 <일엽스님>이 된 <김원주> 등등등...
  유부남인 <이광수>와 염문을 뿌린 여성들이 어디 한두명이 아니라고 알려져있지만...
  정작 <이광수>는 동경 유학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정월 나혜석"을 사랑했다고...
  그런 와중에서 <이광수>를 차지하려는 <허영숙>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모두 아시리라...
  <이광수>와 <허영숙>이 낳은 막내 딸 <이정화씨>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 미국에서 [분자생화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죠. 현재 86세쯤 될듯...
  "아버님(춘원 이광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다." 
  2014년 기자회견을 하며 친일파 낙인을 받은 아버지에 대해 딸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북악산' 조망]                    11:40         
  <이광수 별장>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입니다.
  <춘원 이광수>를 친일파라고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요? 물론 나중에 갑자기 변절했지만...
  애초 그는 열혈 독립군파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을 운영하기도 했죠.
  [상해임시정부]로 떠난 <이광수>를 찾아 <허영숙>은 엄청 부잣집이었던 자기 집 금고를 털어 가출을 했죠.
  "나의 상속 분을 미리 갖고 갑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비행기도 없던 그 시절 '상해'까지 여자 혼자서
  사랑 찾아 나선 여인.....<허영숙>
  그녀는 <이광수>를 설득하여 귀국하고... '산부인과'를 개원하고...남편은 독립운동가에서
  갑자기 친일행위를 하게 되고...<이광수>는 본처 <박혜순>과 이혼하고, 결국 결혼에 꼴인 ~~
  그렇게까지 하면서 쟁취한 사랑이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연애 할때와 결혼생활 할때의 남녀간의 사랑 감정은 이상과 현실로 바뀌는거죠.
  결혼 후 <허영숙>은 남편 <이광수>를 엄처시하로 만들어 꼼짝 못하게 했답니다.
  허구한 날 바가지를 박박 긁어 댓답니다. 딸 <이정화씨>의 인터뷰에는 '구박했다'라고 표현했더군요.
  <이광수>의 명작 소설 <유정>은 이런 아내 <허영숙>으로부터 탈출 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라고...
  바이칼 호수 인근 시베리아의 산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유정>의 주인공 '최석'. 
  그가 가출한 이유는 히스테릭한 부인 때문이었죠. 
  '최석'의 가출과 죽음은 아내 '소피야'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에서 죽음을 맞는 '톨스토이'의 최후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자는 정말 알수 없어요....
  <이광수>가 오죽하면 다음과 같은 시를 썻을까요.
  
                 아내의 설교
                               이광수
                『당신은 악인(惡人)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나는 손이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라도 돼 주소서』
  
  그렇게 집착적 사랑으로 본처와 이혼하고 <허영숙>과 재혼한 <이광수>이지만
  처음부터 예정된 것인양 1946년 <허영숙>과도 이혼하고 세상에서 사라지지요.



  ['세검1교'와 '세검정']                11:57~12:06        
  <북한산>과 <북악산>이 만들어 낸 계곡에 흐르는 "홍제천" 암반 위에 서 있는 
  "세검정 洗劍亭" [서울시 지방 기념물 제4호]
  현재야 철근콩크리트로 중무장한 건축물들이 주변 자연경관을 변형시켰지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긴 명승지였답니다.
  특히 <인조반정> 쿠데타군들의 "세검입의 洗劍立義", 즉 '칼을 씻어 정의를 세우겠다"는 유래를 가진것이
  어쩐지 그렇게 좋은 느낌 만을 주지는 않지만, 여하튼 우리들 어린 시절 소풍도 가고 여름철 피서지로도
  인기 있는 명승지 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한양진경도'에 나오는 '세검정' - '권섭'그림']
['세검정' 주변]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이라는 정자만 보면 <세검정>을 헛보는 것이죠. 앞에 있는 큰 암반 바위가 바로 "차일암 遮日巖"이고 물이 흐르며 고여 있는 곳이 "세초연 洗草淵"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롯데캐슬빌라>가 있는 곳에 "탕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도영'이 1925년에 그린 '세검정']
['홍제천'] "세초연 洗草淵" 역대 왕들의 실록 편찬이 끝나면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들고 세검정 일대의 맑은 개울에서 종이의 먹물을 씻어 내렸다고 합니다. 철저히 대외비인 문서이기 때문이었죠. 종이에 먹물로 쓴 글을 씻어내는 것을 "세초 洗草"라 하고..종이가 귀하던 시절 재활용을 위해서이기도.. 잠시후 들리게 될 종이를 제조하는 관립 공장을 종합관리하는 관청인 "조지서 터 造紙署址"가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1941년에 이 근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세검정>까지 불타버렸답니다. 현재의 정자는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아래 그림을 보고 복원한것이라고 합니다.
['겸재 정선'이 1748년에 그린 "세검정"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윗 그림의 '세검정'만 확대 촬영한 사진]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유세검정기 遊洗劍亭記"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세검정(洗劍亭)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 뿐이다... 비 개고 나면 산골 물도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 ” 다산이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明禮坊) 집에서 모임을 가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돈 끝에,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었다. 세검정의 물 구경을 보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다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벌주 열병을 내라고 했다. 우루루 뒤따라왔다. 그가 간곳은 소나기 쏟아지는 세검정. 산골짝에서는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다. 정자 난간의 나무는 뒤집힐 듯 미친 듯 흔들렸다. 폭풍이 몰아쳐 산골 물이 콸콸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가 물바다가 됐다. 황토 물살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렀다. 하얀 모래가 일어났고 돌멩이들이 구르면서 떠밀려 왔다. 잠시 후 소나기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천지는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친구들이 서로 엉켜 베개 삼고 기대고 누워 시를 읊조렸다. [안내문] "세검정 洗劍亭"에 대한 공식적 안내는 안내문을 참고 합니다. ['차일암'] "차일암 遮日巖" 바위에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구멍 두군데만 표시를 했습니다만 연속해서 있습니다. 史草를 세척해 없애는 일은 극비 사항이어서 洗草를 할때 이 구멍에 막대를 세우고 차일을 쳐 외부인들이 볼수 없도록 해서 이 암반을 <차일암>이라 한답니다. 또한 명문세도가들이 여기서 술을 마시며 놀때 외부인들이 못 보도록 차일을 치기도 했다는군요. ['탕춘대터' 조망] 12:06 <세검정>에서 <탕춘대>가 있었다고 하는곳을 바라봅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탕춘대터'] 12:07 "탕춘대터 蕩春臺址" 좌우에 있었던 산줄기는 도로 개설과 빌라 건설로 완전 절개되어 없어지고... 그래도 약간은 그 절경의 흔적은 느낄수 있도록 조금은 남겨 놓은듯 합니다. ㅎ <연산군>의 놀이터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어 군비를 든든히 한 임금 [영조]도 다녀갔고, 손자 [정조]도 다녀 갔답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기록에 전해지는데 [정조실록 정조14년(1790) 9월] 기록에는 <정조>가 이곳에 납신 기록이 보입니다. “임금께서 연융대(鍊戎臺)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활쏘기 시험이 끝난 다음 편여(便輿)를 타고 사정(射亭)에 나아가서 시위한 제신과 장신, 군교와 군사, 그리고 승장(僧將)과 승군에게 음식을 내리고 돌아오다가 세검정(洗劍亭)에 이르렀는데, 정자에는 영종(英宗: 영조의 초기 묘호는 영종이었음)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다. 임금이 차운하여 칠언 절구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幸鍊戎臺, 行瑞葱臺試射. 試射訖, 上仍以便輿, 御射亭, 宣饌于侍衛諸臣、將臣 校卒及僧將、僧軍. 還至洗劒亭, 亭上有英宗御製詩板, 上次韻爲七言絶句, 命諸臣賡進)” ['탕춘대터 표지석'] 12:08 "탕춘대터 蕩春臺址" 화려한 봄날을 완전 접수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죠? <연산군>이 전국에서 이쁘다는 기생들을 모아 문란한 환락행각을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죠. 특히 <연산군>은 기생들 등에 올라타고 노는 '말타기'를 즐겼다죠? ㅎ 그러다 잼없으면 자기 등에 기생들을 올려 태우기도 하며...한마디로 개판? ㅎ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서 이곳 <세검정><탕춘대>에서 발생한 성범죄가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청춘남녀들의 그런그런 장소였나 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육교로 갑니다. ['신영교' 앞] 12:10 이곳은 길찾기에 중요한 곳입니다. <평창터>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우측에 있는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계곡>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에 보이는 육교를 건너 <세검정초등학교>로 갑니다. [육교에서 조망] 12:12 육교를 건너며 앞으로 가야할 곳들을 미리 확인 할수 있어 좋았습니다. 먼저 좌측 아래 [세검정초등학교 버스정류장] 뒤에 있는 <조지서터>를 보고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장의사 당간지주>를 탐방합니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또 다른 육교가 있는 [신영삼거리]로 올라 가야 합니다. ['조지서터' 표지석] 12:13 "조지서터 造紙署址" <세검정> 주변에는 수백 가구가 종이를 만드는 일로 생업을 이어갔었고 종이 공장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던 관청이 있었다는 곳입니다. 조정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품질도 좋아야하고 지질도 일정해야 해서 공장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답니다. ['세검정초등학교'] 12:15 <세검정초등학교> 후문으로 먼저 올라 가면 운동장 한켠에 돌기둥 두개가 보이는데... [보물 제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랍니다. 그러니까 이 운동장은 "장의사"라는 절간이 있던 곳이란거죠. 또한 이곳은 <장의사>가 폐사되고 난 후 "총융청"이 있던 곳이라고... ['장의사 당간지주']
[안내문]
"장의사 당간지주" [보물 제235호]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통일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특히 '황산벌전투' 때에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에 "장의사 壯義寺"를 지었다는데..'황산벌 근처가 아닌 먼 이곳에 지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연산군] 즉위 12년(1506) '연산군'은 <무열왕>이 만든 <장의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들었다고 ['세검정초교 옹벽 벽화'] 12:17 <세검정초등학교>에서 다시 도로로 나가 학교 옹벽을 따라 올라 가면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역사와 생활상을 요약한듯... ['총융청터 표지석'] 12:18 <세검정초등학교> 정문 방향으로 올라 가면 담장에 "총융청터 摠戎廳址"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연산군 시대를 만나 쇠락하고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624년 인조2년에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이다. 그후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고종21년인 1884년에 폐지되었다." ['신영삼거리 육교'에서 조망] <신영삼거리 육교>에 올라 뒤돌아 본 <세검정초등학교> 정문과 <총융청터 표지석>입니다. 이 동네의 이름이 "신영동 新營洞"이 된 유래가 "軍營"인 <총융청>이 새로 들어서서랍니다. ['화정박물관'] 12:27 <세검정초등학교>에서 <평창터>를 찾아 가기 위해 <평창동> 방향으로 올라 가면 "화정박물관"을 지나며 앞에 <서울예술고등학교>가 보입니다. "화정박물관"은 포르노 보다 더 야한 "춘화도"를 전시 하는 곳으로 유명하죠. ['서울예고' 앞 삼거리] 12:29 <서울예고>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평창동'] <평창동>의 중앙통로라고 할수 있는 상가 거리가 이어지는데 앞에 보이는 [럭키평창빌라]로 가면... ['럭키평창빌라'] 12:30 ['평창터 표지석'] <럭키평창빌라> 정문 화단에 "평창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군량미를 보관 관리하는 "평창 平倉"이라는 창고가 이곳에 있었답니다. 이 고을이 <평창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유래가 되었다고... ['조지서터'] 12:40 <평창터>에서 다시 <조지서터>가 있는 <세검정초등학교>로 내려 가면 <탕춘대터> 못미쳐 [신영교]를 만납니다. ['신영정 소공원'과 '신영교'] 12:41~12:45 [신영교] 입구에는 <신영정 소공원>이 있고 ['신영교'에서 '백사실계곡' 가는 길] <백사실계곡>을 가기 위해선 [신영교]를 건너 직진해 올라 가야 하더군요. [갈림길 1] 12:48 [신영교]에서 골목을 잠깐 올라 가면 첫번째 갈림길을 만나는데 길안내가 없습니다. 주민에게 물어 좌회전 하여 올라 가면... [갈림길 2] 12:50 두번째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번엔 이정표가 있고 [갈림길 3] 12:51 이어서 세번째 갈림길을 만나 이정표가 시키는데로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갑니다. [뒤돌아 본 '세검정' 동네] 12:53~12:55 그러면 <백사실계곡 산책로 안내도>를 만나는데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고 ['백사실계곡 안내도'] [현위치]와 <백사실계곡 안내도>를 확인하고 ['현통사' 앞 갈림길] 12:56 ['현통사' 조망] 직진해 올라 가면 <현통사>라는 절간을 지나게 됩니다. ['백사실계곡 생태보전지역' 안내도] <현통사>를 지나면 다시 안내도가 길안내를 하는데 이 계곡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군요. 그러니 투기꾼들이 개발을 못하는거군요. [계곡 오름길] 12:58 계곡 오름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백사실 별서터' 전경] 1:02~ "백사실 별서 터"가 아담하면서도 은밀하게 다가 옵니다. 햐~~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이런 경승지가 아직도 이렇게 보전되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현위치' 안내도] [현위치]를 확인하고 ['별서 터'] [주춧돌] ['별서 터' 전경] [안내문] "백석동천 별서 터 白石洞天 別墅 址"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는데 제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추사 김정희"가 매입하여 그의 <별서 別墅>였다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집>은 현재 [경복궁역3번출입구] 근처에 있었다고 하지요. <창의문>만 벗어나면 바로 이곳이며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할수 있는 곳이니 자주 이용했을듯.. 그리고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내 역사를 정립시킨 업적도 여기서 이루어진듯... ['별서' 앞 연못] <백석정>이라는 정자 앞에 있는 연못입니다. 물이 말라 있지만 옛날엔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연못이었을듯... 이런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우리나라 좋은 나라 ['월암' 조망] 1:08 안내도에는 있지만 어디인지 잘 모르는 "월암 月巖"이라는 각자가 세겨진 바위가 봉우리에 있는데 가는 길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차 올라 가 봅니다. ['월암' 각자'] 1:11 "월암 月巖" 달맞이 바위? ['월암'에서 '별서터' 조망] <월암>에서 <별서터>를 조망하고 ['북악산' 조망] 고개를 들어 <북악산>을 조망합니다. 이곳은 <북악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시내물이 계곡을 이루는 곳이군요. 현재는 <북악스카이웨이>가 가로지르며 계곡의 허리를 끊어 놓고 있는데도 여기는 여전히 조용한 별천지 같습니다. ['능금마을' 방향 오름길] [삼거리] 1:18 <별서 터>에서 <북악산>을 향해 조금 더 올라 가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좌측길은 <능금마을>로 가는 길이고, 우측길은 <백석동천> 각자가 있는 바위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좌측 <능금마을>을 먼저 다녀와 우측 <백석동천>을 지나 하산 하도록 하겠습니다. ['능금마을 계곡'] 1:22 [안내문] 계곡으로 올라 가면 곳곳에 <도룡룡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자연보호를 외치고 있으며 <능금마을>에 대한 안내도 있습니다. ['능금마을'] 6분여 더 올라 가면 <능금마을> 가옥들이 있는데 특징없는 농촌마을 같았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이런 농촌이 아직도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 ['능금마을' 진출입 차로] 1:28 <능금마을> 끝에는 <북악스카이웨이>와 연결되는 진출입 도로가 있더군요. 지도를 보니 이 길로 나가면 바로 <북악스카이웨이>를 만나 <창의문>으로 가겠더군요.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전경] <백사실계곡 능금마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시 내려 갑니다. 왔던 길을 다시 8분여 내려 가면 ['백석동천' 삼거리 회귀] 1:36 다시 <백석동천> 삼거리에 도착하고 100m 정도 직진하면... ['백석동천' 각자] 1:38 [안내문]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를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백석동천 각자' 앞 전경]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에서 펼쳐지는 "白石洞天"을 조망하는데 그렇게 인상 깊지는 않군요. ['부암동' 주택가] 1:41 "白石洞天"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를 지나면 바로 <부암동 주택가>를 만나더군요. [현위치 안내도] 이곳에 설치된 현위치를 확인하고 주택가로 나가면.... ['백석동천' 출입구] 1:42 2층집 옥상에 정자와 소나무가 있는 집 옆으로 나오게 되더군요. 2층집 옥상에 있는 정자는 <관송루 觀松樓>라고 현판을 달아 놨습니다. [갈림길] <관송루 觀松樓>에서 조금 더 나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창의문>으로 가고, 직진하면 <부침바위>로 갑니다. ['부암동'] 1:45 <인왕산 기차바위>를 바라보며 제법 가파른 <부암동> 내림길을 8분 정도 내려 가면... ['AW 컨벤션센타' 앞] ['부침바위'] 1:53 출발지였던 [AW컨벤션센타] 건너편 <부침바위 표지석>이 있는 <부암동 경노당>에 도착하여 오늘의 역사문화 탐방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걸은 거리는 7.6km였으며 2시간 45분 정도 걸렸습니다. 고도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간단한 등산코스였습니다. [부록] 1. 부암동 "무계원-윤웅렬별서-석파정" 답사기 https://cafe.daum.net/paraanmoon/NcQ5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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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 코스']

  "북악산 신규개방코스"는 2시간 정도 걸리는 짧은 거리이고, 탈출로는 <성북동>이 가장 적합하기에
  계속해서 이번 기회에 <성북동의 이모저모>를 탐방하기로 하고, 미리 조사를 하여 답사에 나섭니다.
  코스는
  "삼청각-외국대사관저거리-성북우정의 공원-한용운공원-심우장-비둘기공원-
   북정마을-수연산방-이종석별장-복자사랑 피정의 집-간송미술관-마전터-선잠단-
   성북동별서(성락원)-최순우옛집-방우산장-김광섭옛집-한성대역" 까지 약6km 입니다.


  ['성북천 발원지']                 1:41                
  2021년 1월 15일 (목) 맑음 
  "북악산 신규개방코스"에 이어 하산길에 "성북동의 이곳저곳"을 둘러 보기로 합니다.
  "성북천 발원지"를 먼저 다시 보여 드리는 이유는 <성북동>이 <성북천> 계곡에 있기 때문입니다.


  ['삼청터널']                  1:52         
  "북악팔각정"에서 "성북동"으로 하산하면 "삼청터널"을 만나며
  터널 우측에는


  ['삼청각']                      
  "삼청각 三淸閣"
  1972년에 개관하여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던 최고급 요정이었죠.
  그후 민주화로 요정정치가 종말을 고하니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2000년에 서울시가 인수하여 문화시설로
  지정하여 리모델링해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새로 열었지만...
  현재 예식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을 운영하는데 '세종문화회관'이 경영한다고 하네요.
  결혼식 때문에 한번 가 봤는데 한정식 음료 차등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현재 리모델링 공사로 휴업 중이었습니다.


  ['외국대사관저 거리']                 1:54              
  <삼청각>을 지나면 '외국대사관 대사관저'가 밀집해 있는 <대사관저 거리>가 이어집니다.
  [일본대사관저]가 가장 크고 그외 수많은 나라 대사관저와 직원사택들이 있었습니다.
  <삼청터널>만 지나면 [광화문]이고  경비하기가 쉬운 지형이어서 밀집해 있는듯...  


  ['수월암']               2:04             
  <대사관저 거리>의 끝에는 "수월암"이라는 절간이 있고, 
  입구 좌측엔 "외교관사택단지"가 대단한 규모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알려 드릴 "성북동 비둘기"라는 詩가 더욱 감명을 주며 비교되는 <외교관저거리>였습니다.
 

  ['성북우정의 공원']                         
  삼거리엔 "성북 우정의 공원"이라는 근린공원이 있는데 
  <외국대사관저와 직원사택단지> 입주 나라들의 국기가 펄럭이는데 얼마나 많은 나라인지 알수 있고


  ['한용운 선사 공원']                    2:08              
  이어서 "만해 한용운 선사 소공원"을 만납니다.
  오가는 사람도 별루지만 궂이 찾는 사람도 없는 조그만 공원에
  <한용운 선사>가 추운 겨울에 쓸쓸히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한용운선사 동상']

  ['안내문]                        
  "님의 침묵"만이 휩싸고 도는 이곳에서 
  님은 '코로나사태' 방역수칙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며 계시는군요. ^*^


  ['심우장' 오름길]                   2:10                 
  소공원에서 선생이 살던 <심우장>까지는 비탈길을 좀 올라 가야 합니다.


  ['심우장' 정문]                  2:13~2:15                 
  <한양성곽>의 북사면에 있는 이곳 [북정마을]은 언제나 음지여서 고급주택은 거의 없고 '달동네'로 남아
  있는데, 가파른 달동네 골목 중턱에서 "심우장 尋牛莊" 정문을 만납니다.
  꼴도 보기싫은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 <한양성곽>의 북사면에 북향 집을 지었다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이 이런 골목에서 사시다가
  가셨다니 왠지 세상은 여전히 기득권자들의 세상이 분명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550호]로 지정되었다는데 집 앞에 주차장도 없는 비탈 골목이 안스럽습니다.
  <심우장>은 '코로나사태'로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갈수없어 대문 사이로 사진만 몇커트 간신히 찍었습니다.


  ['심우장' 앞마당]

  ['심우장']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1879~1944"
  '호'가 "만해 萬海"이고 이름은 "한용운 韓龍雲"이라고 아시는 분이 대부분이죠? 아닙니다. 
  본명은 "한유천 韓裕天"이고, 法名이 "용운 龍雲"이며, '호'가  "만해 萬海"인데
  우리는 왠일인지 무조건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이라고 호칭합니다.
  선생은 16세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2년정도 고용(雇傭)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18세에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출가 했는데, 
  그때 스승인 <김연곡스님>이 法名으로 "용운 龍雲"을 '호'로 "만해 萬海"를 주었답니다.
  그후 치열한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도 두번이나 하시고,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장편소설도 쓰셨죠.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계속해서 불교를 개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죠.
  역동적으로 치열하게 사신 선생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이곳 <심우장>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만해 한용운선사' 이력과 글]            
  "심우 尋牛"의 뜻을 알아야 선생이 자기 집 이름을 왜 "심우장 尋牛莊"이라 했는지 알수 있겠죠.
  제가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ㅎ
  
  "심우 尋牛"
  "찾을 심 尋" "소 牛" -- 한마디로 "소를 찾는다"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이 집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 아니면 외양간? ㅎ
  "심우 尋牛"는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니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 등에 벽화가 그려져 있죠?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열폭의 그림이 벽면이나 법당 안에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이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십단계 과정"을 그린 "십우도 十牛圖"입니다.
  마지막 단계 그림이 "어린 스님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 가는 그림"인데 본 기억이 있죠?
  그냥 건성으로 힐긋 봤는데 그 그림이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고요? ㅎ.
  한마디로 "십우도 十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불교가 추구하는 내용이지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대체로 <소>에 비유하지요.
  <선을 닦는 수련>의 그 첫번째가 "심우 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선다>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집 이름 <심우장>이 지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다음엔 "견적見迹", <소의 자취를 보았다>는 뜻이고,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는 뜻이구요.
  그리곤 "득우得牛", <소를 얻구요>. 그 다음은 "목우牧牛", <소를 기르지요>.
  그리고 다음 것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기만 존재>해요.
  그러다가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기와 소를 다 잊어요>.
  그리곤 "반복환원返本還源", <본디 자리로 돌아가고>....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침내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든다>는 거예요.
  "기우귀가 騎牛歸家", 즉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이죠
  결국 <십우도>는 마음을 찾고 얻는 순서와 얻은 뒤에 회향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
  
    "소는 마음이라고?"
    "그래요. 소는 마음을 뜻해요"
    
  "만해 선생"은 자기 집 마당에 크게 써붙인 글에선
  "잃을 '소'가 없는데, '소'를 찾을려고 하는게 우습도다.
   만일 '소'를 잃을게 분명하다면, 그 '소'를 찾은들 계속 지닐수 있겠냐
   차라리 찾지 못하면 잃지나 않지..."


  ['북정마을 방문 안내문']                    
  <심우장> 정문 앞에는 '우리마을'도 꼭 구경하고 가라고 안내문을 붙여 놨습니다.
  "북정마을 안보고 가면 평생 후회한다고"  ㅎㅎ
  아직도 오르내리기 힘든 이 비탈에서 온통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열악한 집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우리마을을 구경하고 가라'고 안내하는데 그냥 갈순 없죠.
  또한 이 마을에 <비둘기공원>이라는 공원이 있다고 하여 이미 탐방할 계획을 갖고 왔습니다.
 

  [갈림길]               2:18                  
  조금 올라 가니 벽면에 비둘기 조형물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내려 옵니다.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비둘기공원']                
  "비둘기 공원"이라는 쬐끄만 쉼터를 만나는데 이곳을 찾아 볼려고 집에서부터 계획했습니다.
  이런 조그만 특징없는 쉼터를 왜? 찾을려고 했냐고요? ㅎ
  좌측 벽에 붙어 있는 새들 보입니까?
  바로 <비둘기>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왔던 詩  "성북동 비둘기" 라는 詩가 쓰여 있는 공원이어서 찾은겁니다.
   

  ['성북동 비둘기' 詩]                             
  <북정마을> 진출입로 옹벽에 붙어 있는 <비둘기>와 詩.....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 김광섭 195년~1977년"
  '중동고등학교' 출신이죠. 공부 무지 잘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동고'에서 학교가 비용을 대고 보내는 '교비유학'으로 일본에 유학 가게 된 분이죠.
  '일본 애지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색맹으로 최종 단계에서 불합격하여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니고 졸업하신걸로도 유명하시죠. '교비유학'을 가면 졸업후 모교로 돌아와 일정 기간 후학을 위해
  복무해야 해서 '중동고 영어선생님'을 한동안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 영어를 잘 했으니 해방후 "미군정청 공보국장"도 하시고, '이승만대통령 초대공보비서관'을 하기도..
  60세이던 때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경희대와 고려대 야구경기"를 보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행활을 하시다가 어느정도 회복되어 그때부터 잠시후 탐방하게 될 <성북동집>에서 문학활동을
  하게되어 뇌졸중이 문학적 측면에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회고담이 있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 구상하고 쓰신 대표작이기에 <성북동>은 <성북동 비둘기>로 대변되기도 합니다.


  ['비둘기공원'에서 '성북동' 조망]                         
  자연의 파괴로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린 비둘기...
  인간 문명에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둘기...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평화를 잃어버린 비둘기...
  그 <비둘기>는 우리 자신이리라...
  공원 앞에는 완전 폐허가 된 달동네 집들이 <한양성곽> 북사면에 지쳐 쓰러질듯 쭈구려 앉아 있는데
  건너편 <성북동> 양지바른 곳엔 <외국대사관저>들이 즐비하고,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들의 저택이
  화려한 외모와 엄청난 규모로 둥지를 틀고 있는 양극화의 대명사 동네 <성북동>으로 펼쳐집니다.


  ['북정마을']                  2:20             
  <비둘기공원> 위로 올라 가면 "북정마을"이 <한양성곽> 북사면에서 삶을 부르짓고 있습니다.
  마을버스 종점인 이곳엔 작은 마을버스가 주민들을 시내와 내통하게 하고 있을 뿐 흔해빠진 마트 하나 없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를 연상케하는 집들이 여기가 '서울특별시 성북동'이 맞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북정마을 화장실']                          
  새로지은 건물이라곤 앞에 보이는 공중화장실인듯하고 <한양성곽>과 키높이를 재고 있는 마을인데
  조금전 <심우장> 앞에 "아름다운 우리마을 안보고 가면 평생 후회한다"는 안내문은 무얼 의미하고 싶었을까
  자연의 파괴로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린 비둘기...
  인간 문명에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둘기...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평화를 잃어버린 비둘기...
  <성북동 비둘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 옵니다.


  ['북정마을 진출입로']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의 마을은 전국에 여러곳 있습니다만, 대부분 [北亭마을]이라고 하는 마을인데
  이곳은 <한양성곽>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고 亭子도 없으니 [北頂마을]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봅니다.


  ['심우장']                 2:25               
  [북정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 가며 <심우장>을 조망하고

  ['만해공원' 조망]                  2:27               
  아직도 추운 겨울에 쓸쓸히 홀로 앉아 계시는 "만해 선생 동상"을 내려 다 보고



  ['성북구립도서관']               2:33                 
  <성북초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성북구립 도서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만들고 운영하는 미술관이랍니다.
  <성북2동사무소>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을 만들었다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 특성상
  1층은 <성북글로벌빌리지센타>로 조성하여 외국인들의 사랑방 역활을 한다고 하네요.
  도서관 뒤에 <수연산방>이 보입니다.


  ['수연산방']

    [안내문]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常虛 李泰俊" 선생은 [파란문]의 학교 선배님이고 해서 이 분에 대해선 좀 압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홍사용"
  <금삼의 피><임진왜란><세종대왕>등 역사소설의 대가 "월탄 박종화"
  <모란이 피기 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
  <아무일 없소> 등 소설의 대가 "상허 이태준"
  <향수><고향>의 시인 "정지용"
  <동백꽃><봄봄>등 단편소설의 "김유정"
  모두 "휘문고보"의 1~3년 차이의 선후배 사이로 함께 문학의 꿈을 키우며 학창시절부터 문학활동을 한
  우리나라 신문학의 선두 주자들이시죠.
  이 당시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이 이들의 국어선생님이셨죠.
  "상허 이태준" 선생이 다른 분들에 비해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이유는 <월북 작가>이기 때문이죠.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학예부장을 지냈던 선생은 이곳 <성북동 수연산방>에서 13여년을 살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그후의 삶은 정확히 알기 어렵답니다.
  문학적 관점에선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생인데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 그와 그의 작품들은
  언급조차 할수 없어 왔습니다.
  <아리랑>의 "나도향"과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배재고 출신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경기고 출신. <날개>의 "이상"은 보성고 출신....
  [수연산방]은 현재 선생의 손녀딸이 주택을 약간 개조하여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답니다.
  매우 유명해서 주말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 갈수 없다는데
  제가 방문한 오늘은 코로나사태로 휴업중이어서 구경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와서 차도 한잔


  ['덕수교회' 조망]                    2:35~2:42        
  [수연산방]에서 돌아 나와 건너편을 바라보면 [덕수교회]가 보입니다.
  제가 화살표 표시를 한곳으로 들어 가면....
  

  ['이종석 별장' 입구]                    
  좌측은 [덕수교회]고 우측은 [덕수교회수련관]인데 이 길 앞 우측에는


  ['이종석 별장']

  [안내문]                       
  "이종석 별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
  먼저 "이종석 선생 1875~!1952"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안내문을 보면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이종석선생"은 집안이 원래 엄청 부자였는데 9,900석을 소출하던 집안이었다나 뭐래나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유명한 <엄귀비>로부터 엄청난 하사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튼 엄청 부자였던건 확실한데 그는 자기의 富를 후학들을 위해 [보인학원]을 설립하는등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직접 이사장을 하기도 했답니다.


  ['일관정']

  [안내문]                          
  당시 <성북동>에 살던 문학인들과 그외 관련 문학인들과도 교류를 활발하게 해서
  자기의 별장을 그들과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며 그들을 위해 흔쾌히 개방해 주기도 했답니다. 


  ['이종석 별장' 전경]                         
  코로나사태로 휴관 중이어서 언덕배기 전망대에서 [이종석 별장]을 조망 하고 갑니다.
  이 별장은 [대림산업]  소유였다가 현재는 [덕수교회]가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답니다.


  ['복자사랑 피정의 집']                2:44               
  [이종석 별장]을 나와 [덕수교회] 건너편을 보면 "복자사랑 피정의 집"이라는 수도원이 있고


  ['성북초교앞 삼거리']                   2:48              
  다시 조금 더 내려 가면 <성북초교 앞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곳은 "성북천"을 복개해서 도로가 되었지만 예전엔 맑은 개천이 흐르던 곳이었답니다.
  좌측 <성북초등학교> 정문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가면...


  ['간송미술관 정문'과 '성북초교 정문']                 2:49        
  "간송미술관""성북초등학교" 정문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실제 문을 닫은지 오래 되고 전시회는 대부분 다른 곳에서 가끔 하고 있죠.
  오늘도 공사로 출입할수 없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1906년~1962년"
  이 분도 필자인 '파란문'의 학교 선배님이십니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대'를 나왔으며, 고종사촌 형이 앞에서도 언급한 "월탄 박종화선생"입니다.
  정지용 김영랑 김유정 이태준 등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앞의 "이종석"의 집안이 엄청난 부잣집이라지만 "전형필선생"의 집안에 비하면 조족지혈 정도로
  전형필 선생의 집안은 10만석 규모 이상으로 당시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했답니다.
  집안의 富를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에 사용하고,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셨는데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도 지내는등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사업도 하셨습니다.


  ['성북초교 삼거리']                 2:51       
  "성북동 삼거리"
  이 도로 밑에는 "城北川"이 흐르는 개천입니다. 복개공사로 개천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개천 바닦은 암반으로 맑고 풍부한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계곡이었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이 한양 시장에서 거래되는 포목을 깨끗이 빨아 널어 말리는 장소로 
  조정으로부터 독점권을 얻어 "세탁 일"을 하였는데, 이름하여 "마전터 麻田址"였으며 , 
  <성북동>의 옛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앞에 화살표로 표기한 곳이 "마전터 麻田址"라는 표지석이 있는 곳입니다.


  ['마전터 표지석']                    2:53

  [안내문]                      
  "마전터 麻田址"
  <한양성>을 건설 할때 전국에서 착출된 일꾼들이 이 근처에서 일하고 살았는데
  <성북천>의 물이 맑고 깨끗하나 계곡이 암반이고 좁아 농사를 지을수 없어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했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이들이 먹고 살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게 되는데 그것이 "마전 麻田"이었답니다.
  한양의 시장에서 팔리는 옷감을 깨끗이 빨아 햇볕에 말리기 좋은 장소여서 이곳이 세탁소가 된 것이지요.
  [영조] 때에 구축된 한양의 '자연 건조 세탁소'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려나? ㅎ


  ['선잠단' 조망]

  ['선잠단' 입구]

  [안내문]                            

  ['선잠단']                           
  <마전터> 건너편에는 "선잠단 先蠶壇"이 있습니다.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 先農壇"은 王이 "농사의 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농사 시범을
  보이는 곳이며, 이곳은 王妃가 "양잠의 神"에게 제사를 드리고 양잠 시범을 보이는 중요한 제단이죠.
  먹고 입는 문제의 중요성은 농경사회에서 필수조건이었으니 제사를 올리는 제단의 의미는 엄청 크지요.


  ['선잠단' 옆길]                    3:00       
  <선잠단> 좌측 옆길로 5분여 골목을 올라 가면...


  ['성락원']                       3:05~3:14

  ['성락원' 정문]

  [안내문]                              
  "성북동 별서 城北洞 別墅"
  안내문에는 "성락원 城樂園"이라고 되 있습니다만 얼마전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어 변경했답니다.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한 별서랍니다. 
  육교시사(六橋詩社)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고,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별궁으로 사용한 역사적 가치도 있는 곳이라는데
  명승지로 재 지정되었는데도 문은 잠겨 있어 들어 가 볼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의친왕 이강 李堈>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낳은 [고종]의 다섯번째 아들이고 
  <의친왕>의 친아들은 없고 후실이 13명으로 서자만 12명 서녀를 9명이나 두었는데
  마지막 열세번째 후실인 "홍정순"이 19살에 62세의 <의친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노래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석"씨이죠. 요즘 '전주 한옥마을'에 산다죠?


  ['성북동 별서']                            
  정문에서 우측 길로 올라 가면 <성북동 별서>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알수 있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쿠데타세력들이 들이 닥치자 <명성왕후>는 부랴부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 당시 "성북동 별서"였던 것이었습니다.
  도피의 명수인 <명성왕후>는 <임오군란>때엔 '여주 장호원'으로 가 숨어 지내다가 돌아 오고....
  두번씩이나 도피를 하면서도 살아 남은 왕비는 결국은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저승으로 갔죠.
  <명성왕후>의 도피행각에 대해선 앞으로 별도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홍대부고' 버스정류장']                  3:22

  ['최순우 옛집' 조망]                               
  <성북동 별서>를 둘러 보고 다시 <선잠단>으로 나와 길을 따라 내려 가면
  [홍대부고버스정류장]을 만나는데, 골목 안쪽으로 "최순우 옛집"이 보입니다.
  ♥ ♥표시 한곳압니다.



  ['최순우 옛집']                      3:24

  [안내문]                           
  "최순우 1916~1984"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시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선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안내문에 없는 이야기 하나 언급하자면...
  이 분은 조금 전에 방문했던 <간송미술관>의 [간송 전형필선생]과의 관계가 유명하죠.
  '6.25전쟁' 때에 <간송미술관>의 국보급 미술품들을 괴뢰군들이 북으로 반출하려 할때 재치로 막아주어
  [간송 전형필] 선생이 엄청 고마워하며 지어준 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우산장' 조망]                   3:27       
  <최순우 옛집>에서 나와 건너편 [홍대부고버스정류장]을 바라보면 보행로에 쉼터 같은게 보입니다.
  저 쉼터가 "방우산장 기념조형물"입니다.
  저곳으로 건너 가면....


  ['방우산장' 조형물]                       3:28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 안내문]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이 있는데, 이 근처에 "조지훈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군요.
  선생이 살던 집 이름이 "방우산장 放牛山莊"이라는데 조금전 <심우장>의 의미와 유사하죠.
  "放牛即牧牛" '마음 속에 소를 한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카우는 것과 같다."
  선생도 불교신자로서 어려운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큰 역활을 하셨죠.


 ['조지훈 기념 조형물']                   
  <조지훈선생>은 "술"을 무지 무지 좋아한 술꾼으로 유명하시지요? ㅎㅎ
  선생이 애주가의 등급을 바둑 단수처럼 메김한게 유명하죠.
     趙芝薰선생은 음주가 초짜에서 어느 경지로 올라 가면 급에서 단으로 간다고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悟達)한 사람 
     초단:애주(愛酒)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2단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3단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4단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한번 넘어서 임운자적(任運自適)하는 사람 
      5단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6단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7단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8단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
     趙芝薰선생은 마지막으로 9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열반주(涅槃酒)(술의 명인)
      9단 폐주(廢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9단이면 이미 술과 함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이니까 
      불교적 관점에서 열반주(涅槃酒)가 되며 
      바둑으로 치면 "入神의 경지,명인 名人"이 되는 것이죠. 死했다는 말 ㅎㅎㅎ
     그런데 선생도 술을 너무 마셔 결국 <9단 열반주(涅槃酒)(술의 명인)>의 경지를 48세의 젊은 나이에
     올라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스스로<술의 명인>임을 증명하며.....


  ['방우산장' 조형물]      
  <조지훈 선생>은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교수도 하셨지만
  '경기여고' 국어선생을 할때가 있었는데 그때 유명한 일화가 있죠.
     趙芝薰 詩人의 본명은 "조 동탁 趙東卓"입니다. "지훈(芝薰)"은 그의 雅號입니다.
     '동탁'이라니까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를 떠 올리시는 분 계십니까? 거기는 '마동탁'이죠? ㅎ
     趙芝薰 詩人은 처음에 자신의 아호(雅號)가 지훈(芝薰)이 아니라 "지타(芝陀)"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본인이 스스로 밝힌 아호(雅號)인 지훈(芝薰)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
     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내 호를 말했더니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더군.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니 "지타"라는 아호가 뜻이야 아주 고상하지만
     성과 합성하니까 발음이 "조지타"가 되는데
     걔네들이 내 호에서 다른 무엇(?)을 연상했나 봐. ^-^
     그래서 할 수 없이 "지훈" 으로 고쳤어."

  요즘 같으면 성희롱으로 문제 될만한 유머입니다만....ㅎ
  여하튼 술과 유머가 남달랐던 선생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라는 <승무 僧舞>를 쓴 불교신자였으며, 
  술을 너무 사랑하여 너무나 일찍 '열반주 涅槃酒'의 경지로 가신 애주가였습니다.


  ['김광섭 옛집' 입구]                3:34         
  <북정마을 비둘기공원>에서도 언급했던 "김광섭 시인의 집"을 찾아 올라 갑니다.
  <으뜸부동산>에서 앞에 보이는 언뎍으로 100m 정도 올라 가면....


  ['김광섭 옛집 터']                      3:36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 비둘기>를 보며 시감정을 불러 일으키며 살던 집이 있던곳을 만납니다.
  '성북동 168-34번지'
  지금은 [원익스카이빌]이라는 빌라로 그가 살던 집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번지만 남아있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며 기울어 가는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며 <성북동 비둘기>를 썻겠죠


  ['성북동 비둘기' 조망]                         
  외국대사관저와 사택단지...대기업 회장들의 저택...왕년에 한끗빨 했다는 사람들의 저택들이 즐비하지만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 중에 마지막 달동네 쯤 되는 판잣집들이 상존하는 <성북동>....
  건너편에 <북정마을>이 조망됩니다.


  [뒤돌아 본 '성북동']                   3:40      
  복개되어 도로가 된 <성북천>으로 다시 내려와 지나온 <성북동>을 뒤돌아 보면서
  [성북동 역사문화 투어]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갑니다.


  [벽화]                3:42     
  <한성대입구역>으로 가는 중에 벽화가 눈길을 끕니다.
  지금까지 탐방한 곳들을 벽화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한성대입구역']                   3:48       
  <한성대입구역-삼선교역>에서 "북악산 신규개방코스와 성북동" 답사를 마침니다.


  [성북동 투어 실트랙]                               
  <성북동 투어>는 약 6km로 대략 2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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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북악산 신규 개방코스』    


  ['북악산 신규개방코스']

 1968년 <1.21사태>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 있던 <북악산> 정상 부근은  문민정부 이후 점차 개방되었는데
 2020년 11월1일에는 <북악산 북쪽 사면>의 군경계지역을 일부 해제 단장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답니다.
 그러니까 개방한지 2달이 조금 지난 따끈따끈한 新作路여서 부랴부랴 탐방에 나섭니다.


  ['윤동주문학관' 앞]           11:45~11:50                 
  2021년 1월 15일 (목) 맑음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경복궁역3번출입구]에서 [7212번][7022번][1020번]이 있는데, 저는 [종로2가]에서 [7212번]을 타고 왔습니다.
  <창의문 입구>에는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이 있는데 내용이 좀....직접 읽어 보세요~~ㅎ
이곳이 발원지가 아니라는 발원지 표지석입니다. ㅎ
['창의문'] "창의문 彰義門" <한양성곽 순성길>은 우측 계단으로 올라 갑니다만, <신규개방길>은 [창의문]을 통과하여 성밖으로 나갑니다.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 11:50 [창의문]을 통과하면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를 다시 통과하게 되는데, 앞에 보이는 삼거리로 나가면 [삼거리] 11:51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부터 <종로구 부암동 付岩洞>이 시작됩니다. 우측길은 <북악스카이웨>로 이어지는 길인데 이 길로 가도 되지만 보행로가 없어 위험다고... 그래서 답사자들은 좌측 <부암동 가는 길> 골목을 이용하라고 전봇대에 안내판을 부착해 놨더군요. ['부암동' 통과] [부암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골목을 8분여 진행합니다. "부암동 付岩洞"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내노라하는 권세가들이 살거나 별장을 지어 나드리하던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경치 좋고 놀기 좋은 동네였다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원>,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그리고 [홍제천]이 흐르는 곳엔 <연산군>이 봄을 농락하며 기생들과 놀았다는 <탕춘대 蕩春臺>... [인조반정]을 성공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 洗劍亭>...일제강점시시절 친일매국노 <반계 윤웅렬>이 친일 댓가로 받은 돈으로 엄청난 별서를 지어 호위호식하던 별장.... <운수 좋은 날>이란 소설을 쓴 <현진건>선생이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다가 <더럽게 운수 나쁜 날>이 된 집.. 그리고 요즘은 빈곤층들이 밀집해 사는 달동네가 대부분인 아이로니칼 한 동네..... 부동산 투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동네를 눈 여겨 보시라...ㅎ 여기로 지하철 까지 들어 서면 달동네거 투기 장소로?...이낙연씨 공약이던가? ㅎ ['1번출입문'] 11:59 <창의문>에서 8분~9분 정도 <부암동 골목>을 진행하면 "신규개방코스 1번출입문"을 만납니다. 이 굴다리는 <북악스카이웨이> 밑을 통과하는 굴다리로서 위에 보이는 <아델라베이리>라는 음식점과도 통하는 통로더군요. ['현위치'] 이곳의 [현위치]를 확인하고...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 ['1번출입문'] <북악스카이웨이 굴다리>를 통과하면 출입문을 다시 통과하게 됩니다. 지난 2020년 11월1일에 <문대통령>이 개통식을 하며 문을 연 곳이기도 하더군요. 오늘 산행의 최정상인 <한양도성 곡장>까지는 1100m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뒤돌아 본 '1번출입문'] 12:00 <1번출입문>을 통과하여 뒤돌아 본 <1번출입문>입니다. <아델라베이리>에서도 출입 할수 있군요. [계단] <1번출입문> 부터는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만 하더군요. 앞 가운데에 보이는 산봉우리가 "북악산 342.5m" 정상이고, 좌측 봉우리가 "청운대 293m"입니다. 급경사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쉼터'] 12:05 한 숨 돌릴수 있는 쉼터가 있고 ['폐 초소'] 12:07 쉼터를 지나면 좌측 아래에 용도 폐기된 초소와 군숙소가 있는데 <철벽경계>라는 구호가 눈길을 끕니다. [김신조 일당]이 습격한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친곳' 인듯...ㅎ [산허릿길] 폐 초소부터는 산허릿길을 잠시 돌아 갑니다. [이정표] [산허릿길] 산허릿길에도 뻗어 내린 산줄기로 오르내림이 좀 있는데 7분여 진행하면.... ['군경계초소'] 12:15 "舊 경계초소"라는 곳을 만나는데, 이곳은 좌측 <2번출입문>에서 오는 길과 합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번출입문길>과 <2번출입문길>이 합류하여 <3번출입문>으로 가는 곳이었습니다. 우측으로 올라 서면... ['3번출입문'] 12:16 "3번출입문"이 있는 "청운대안내소"가 주차장도 갖추고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청운대안내소'] "청운대안내소"는 <북악산 청운대>로 가장 쉽게 빨리 접근하는 출입구이더군요. 안내원이 근무하며 출입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차요금은 무료이며 동절기엔 9:00~17:00까지이용할수 있으며 연중무휴랍니다. [현위치]
[이정표]
[현위치]와 이정표를 확인합니다. <곡장>까지 550m만 오름짓을 하면 오름길은 끝나더군요. 쪼끔 싱겁죠? ㅎ 그래서 저는 <성북동 투어>를 이어서 할 예정으로 왔습니다. ['청운대안내소 통과검색대'] 12:19 "청운대안내소"에선 안내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 "팻말"을 받아 지하철 타드시 검색대에 찍고 문이 열리면 통과하여 팻말을 목에 걸고 다니라고 알려 주더군요. 신분증도 필요 없고 그냥 팻말을 받아 통과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양성곽 순성길>에서 [청와대 구간]은 신분증 없이는 '트럼프'가 와도 안되었죠? ㅎ 그많큼 철저히 신분증 요구로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던지라 이번에 신분증 제도를 모든 구간에서 없앴답니다. 잘한 일이죠? ㅎ 경계근무를 하는 관계자들이야 괴롭겠지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첨단 과학기술로 내방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겁니다. (이 사진은 안내원의 허가를 받아 촬영했습니다) [오름길] [뒤돌아 본 '청운안내소'] <청운대안내소>를 지나 조금 올라 뒤돌아 본 <청운대안내소>입니다. 걷기가 좀 불편하신 분들..시간 없이 바쁘신 분들은 이곳을 이용하면 도움이 되겠더군요. [계단] ['옛 군견 훈련장'] 12:23
[안내문]
<청운대안내소>에서 4분 정도 계단 오름짓을 하면 "옛 군견 훈련장"이라는 곳을 만나는데 지금은 쉼터로 조성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계단] ['한양성곽 출입철책문'] 12:25 다시 계단을 2분 정도 잠깐 오르면 <한양성곽>으로 접근하는 철책문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청운대안내소>에서 5분 정도만 오르면 <한양성곽>에 접근 할수 있는거죠. [뒤돌아 본 오름길] [서쪽 조망] <청운대안내소>에서 올라 온 길을 뒤돌아 보고 실제 "청운대 293m" 방향인 서쪽도 바라보고 ['곡장' 조망] 진행 방향인 "곡장"이 있는 봉우리 "310.9m봉"을 조망합니다. ['암문'] 12:28 철책문 앞에는 "한양성곽 암문"이 열려 있더군요. 예전에 <한양성 순성길>을 할때에도 열려 있어 성곽길에서 나와 구경하고 다시 들어 갔는데.. 2011년 4월 20일의 사진 보여 드리면...
['서울성곽순례길'] 그래서 <암문> 안으로 들어 가 보니 <청운대 화장실>이 있는 곳이군요.
[성곽 축성 연대 학습장]
성곽 축성 시기별 성곽 모양을 공부하고.... 중요한건 <축성공사 실명제>를 이 때에 벌써 시행 했다는거죠. ['곡장' 조망] [계단] <곡장>이 있는 <310.9m봉>으로 올라 가면.... ['곡장' 외부 모양] 12:36~12:41 "곡장 曲墻"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곡장>에 올라 갔다 다시 돌아 나와야 합니다. ['곡장' 내부] "곡장 曲墻" 성곽 안에선 성곽 밖 아랫쪽 성벽의 상황을 볼수 없겠지요? 그래서 성곽에서 돌출부를 만들어 성곽 밖 성벽을 감시 할수있도록 한 곳이 "곡장"이죠. 이곳이 <한양성>의 북쪽 사면을 감시 할수 있는 천혜의 요새여서 당연 조망이 좋을수 밖에... ['북악산' 조망] <청운대-북악산-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의 서쪽을 조망하고 ['북한산 비봉능선' 조망] 북쪽으로는 <북한산 비봉능선>이 파노라마로 조망됩니다. ['서울시내' 조망] 남쪽으로는 '서울시내'가 조망되는데 <광화문>과 <세종로>..그리고 <남산> <관악산>까지 보이는데 연무가 껴 사진빨이 나쁘군요. 아쉽고... ['곡장' 앞 쉼터] <곡장> 밖으로 다시 나가서 ['곡장' 앞 이정표] 12:41 <곡장 앞 이정표>를 보면 [←창의문 1400m]이고 앞으로 갈 예정인 [팔각정 910m→]라고 알려 줍니다. ['곡장' 앞 출입문] 12:41 <곡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철책문을 통과합니다. 그러니까 <한양성곽>과 헤어지는 곳이 이곳이더군요. ['곡장 안내소'] 12:43 "곡장안내소"를 바로 만나는데 여기에서 팻말을 반환하여야 하더군요. [내림길] ['북악스카이웨이' 만남] 12:50 <곡장안내소>에서 내림길 370m를 7분 정도 걸려 내려 가면 <북악스카이웨이>를 다시 만나고 ['4번 출입문'] 12:53 [현위치] 이어서 "4번출입문"을 만나며 [현위치]를 확인하고 나가면... ['4번출입문' 앞 이정표] 12:55 <북악스카이웨이>에서 <4번출입문>을 뒤돌아 보고 ]'북악팔각정' 가는 길]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500m를 진행하면... ['팔각정' 차량 출구] 1:04~1:22 <북악팔각정>에 도착합니다. ['北岳八角亭'] "北岳八角亭" 정말 오랜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7~80년대 까지만 해도 결혼식날 식후 신혼여행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 할 정도였죠. ㅎㅎ '코로나사태'로 휴업 중이었고... 2층으로 올라 가면... [北岳八角亭' 2층 '하늘레스토랑'] 2층에 있는 <하늘레스토랑>도 문이 닫혀있는데 여기서 옛날에 양식을 먹었던 기억...ㅎㅎ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악산' 조망] 먼저 서쪽을 바라보고 ['남산' 조망] 남쪽으로는 '서울시내'와 '남산'이 날씨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산줄기가 <한양성곽>이 지나는 산줄기로 <혜화문>과 <낙산> <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낙산' '용마산' 조망] 동남쪽으로는 <한양성곽>이 이어지는 <낙산>이 가까이 보이며 [서울 市界]가 지나는 <용마산>과 <망우산>까지 일사천리로 조망됩니다. <개운산><배봉산>..그리고 <휘경원>.....<살곶이목장>이 펼쳐지는듯... ['북한산 비봉능선' 조망] 북쪽으로는 <북한산 비봉능선>과 <보현봉>이 서울의 대표<外四山>임을 과시하고 있고...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 계곡에 [평창동]이 펼쳐집니다. 옛날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는 보이지 않고....조만간 [평창동]을 탐방 할 예정입니다. ['형제봉능선' 조망] 북서쪽으로 <북한산 형제봉능선>과 <진달래능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구진봉' 조망] 동쪽으로는 "구진봉 335.4m"이 아주 가까이 있는데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성북동' 하산길 입구] 여기서 <성북동>으로 하산하는 길 입구를 찾아야하는데, 몰라서 팔각정 휴게소를 한바퀴 빙 돌았는데도 못찾았습니다. <성북동 하산길>은 좌측 <구진봉 군부대 정문> 방향에 있더군요. [뒤돌아 본 '팔각정'] <성북동 하산길> 입구에서 뒤돌아 본 <팔각정>이고 ['성북동 하산길' 출입문] 1:22 <성북동 하산길> 철책문을 통과해 나가면... [이정표] 철책문 안에 이정표가 잘 찾아 왔다고 알려 줍니다. 밖에 있으면 찾기 쉬울텐데... ['성북전망대'] 1:25 [조망] 이어서 <성북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하고 갑니다. <롯데월드>까지 장 보였는데 사진에는 아주 희미하군요. 이번 답사기는 아래에 보이는 <삼청각>까지만 쓰고 "성북동 투어"는 별도로 작성 할 예정이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어지는 "성북동 투어 답사기"를 보시기 바람니다. [내림길] 급경사 내림길을 10여분 내려 가면... ['숙정문' 조망] 1:36 우측 능선에 지나고 있는 <한양성곽>과 "숙정문"이 가까이 조망됩니다.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쫒겨나 한밤중에 일반인들도 거의 이용 않는 저 [숙정문]으로 나가 <낙산> 옆에 있는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마지막 하룻밤을 보내고 <청계천 영도교>를 지나 <왕십리 전관원>에서 <화양정>으로 가고 이어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여주>로 가서 육로를 이용하여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가 죽임을 당했다죠. 그 역사가 눈에 보이는듯 하군요. [계단] 다시 급경사 내리막 계단을 5분 정도 내려 가면... [데크 삼거리] 1:41 ['성북천 발원지'] 데크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이 "성북천 발원지"라고 알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탐방할 <성북동 투어>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쉼터] 1:43 ['삼청각 쉼터'] 1:45 이어서 두군데 쉼터를 더 지나면... ['숙정문 안내소'] 1:47 "숙정문안내소"를 만나는데, 그 옛날 [단종]도 이 길을 이용 했으리라 추측됩니다. [내림길] [날머리] 5분여 더 내려 가면 <삼청각> 앞에 있는 날머리에 도착합니다. ['삼청터널'] 1:52 "삼청터널" 앞이 날머리인데 이어서 계속 <성북동 투어>를 이어 갑니다. ['구글어스 실트랙'] 여기까지 걸은 거리는 약5km였으며 2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계속해서 <성북동 투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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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과 '영우원터' '휘경원터'』

                             - 배봉산 정상 -       

  ['구글어스']

  ['구글맵']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과 '전농동'에 걸쳐 있는 "배봉산 拜峰山 108.9m"을 찾아 가서 산행도 하고
  그 주변에 있는 역사유적도 둘러 보며 기울어 가는 2020년을 음미 해 보았습니다.


  ['휘경2동 주민센터']

  2020년 12월 26일 (토) 맑음 연무
  '동대문구' 두번째 역사탐방으로 잡은 "배봉산과 영우원터, 휘경원터"를 둘러 보기 위해 길을 나섯습니다.
  오늘은 요즘 3차 코로나팬데믹 사태로 대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모처럼 승용차를 이용해서 애견과 함께 갔는데
  먼저 "휘경원터"가 있는 "휘경중학교"를 찾아 보고, "영우원터"가 있었다는 "삼육보건대학교"를 다녀 와서
  "휘경2동 주민센타"에 주차를 하고 "배봉산"을 오릅니다.


  ['배봉산 둘레길' 입구]

  "배봉산 둘레길"의 들머리는 "휘경2동주민센타" 옆에 있었습니다.


  [안내도]

  둘레길 입구에는 친절하게 [배봉산 둘레길 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전체 거리는 4.5km라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 저는 산행보단 역사유적탐방에 있으니 오를 때엔 능선길을 이용하고, 돌아 올 땐 둘레길을 이용했습니다.


  [뒤돌아 본 '휘경2동주민센터']

  둘레길에 들어 서서 뒤돌아 본 "휘경2동주민센터"입니다.
  처음 가시는 분들은 '휘경2동주민센터'만 찾아 가면 어렵지 않게 접근 할수 있겠죠?
  이곳 이외에도 둘레길 출입구는 곳곳에 있었으니 편리한 곳을 이용하면 되겠습니다.


  [무장애 데크길]

  [배봉산 둘레길]은 데크로 꾸며져 생활산책길로 언제나 누구나 이용 할수 있도록 '무장애길'로 만들었더군요.
  남녀노소 장애인들까지 누구나 안전하게 이용 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사도를 낮추기 위해 지그재그로 설치된 데크길을 잠시 오르면...


  ['휘경관장' 갈림길]

  진짜 둘레길에 접속하는 데크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진짜 둘레길을 만나는데, 코로나사태로 우측으로 일방통행을 하라고 곳곳에 안내를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가운데엔 계단이 있는데 "휘경광장"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둘레길 보다 [배방산]을 오르기 위해 왔으니 가운데 계단을 이용해 올라 갑니다.


  ['휘경관장']

  계단을 40m 정도 오르니 "휘경광장"이라고 하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공원이 있었습니다.


  ['배봉산의 유래' 안내문]

  [휘경광장]에는 '배봉산의 유래'라는 안내판이 있어 한번 읽어 보고
  [휘경광장]을 둘러보고 직진해 나가면...


  [둘레길 합류]                   

  조금전에 헤어졌던 둘레길을 다시 만나더군요.
  둘레길을 잠시 진행하면...


  ['삼육보건대' 조망]

  우측 바로 아래에 산행 전에 탐방했던 "삼육보건대학 건물"이 보입니다.
  이곳이 "사도세자의 초장지-영우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오늘 역사탐방의 핵심이기에 잠시 후 상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육병원' 갈림길]

  우측 아래 [삼육보건대학교]를 보며 잠시 진행하면
  "삼육서울병원"과 통하는 갈림길을 만납니다.
  [배봉산] 좌우에는 많은 접속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휘경동' '전농동' '답십리동' '장안동'등 주변에서 쉽게 이용 할수 있겠더군요.


  ['히어리광장' 앞 갈림길]

  [삼육서울병원] 갈림길을 지나면 "히어리광장" 앞 갈림길을 만나는데...
  [둘레길]은 우측으로 가고,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가운데 길인데 
  저는 먼저 우측으로 가서 "영우원터 안내석"을 보고 가운데 "히어리광장"으로 돌아 올라 갑니다.
  먼저 우측 [둘레길]로 회전하면...


  ['영우원' 안내석이 있는 쉼터]

  [안내석 뒤]

  쉼터 정자가 보이며 앞에 "영우원터 안내석"이 보입니다.
  안내석 뒤로 올라가 내려다 보면 쉼터 정자는 코로나사태로 모두 사용금지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안내석 앞면]

  [안내석 뒷면]

  ['영우원' 위치도]

  "영우원터 안내석"을 먼저 읽어 봅니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으면 이곳 쉼터가 [영우원터]로 오해 될수도 있습니다.
  안내석 내용은 [배봉산] 중턱에 [영우원]이 있었었다는 이야기이고 이곳이 그곳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용도 제가 조사한 내용과는 조금 다름니다. [영우원터]가 [삼육병원본관자리]라고 표기해서..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오르기 바로 전에 "영우원터"라고 추정하는 곳을 직접 탐방하고 왔습니다.
  그곳으로 저와 함께 가 볼까요?

      첫번째 답사 "영우원 터 永祐園址"를 찾아서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기사]

  오리지날 [영우원터]를 찾기 위해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찾아 갔습니다.
  신문기사의 제목에 <永佑園>으로 표기된 것은 잘못 표기한 것이고 <永祐園>이 정확한 한자 표기이더군요.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서울위생병원 뒷산> "간호학교 신축부지" 공사중에 
  지하 5m 지점에서 <돌상자 두개-길이1m 폭50cm 높이75cm>를 발견하여 열어 보니
  납석으로 된 상자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상아 쪽에 쓰인 천릉문(遷陵文)이 적혀 있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신문기사를 제가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보면
  <서울위생병원>은 현재의 <삼육서울병원>이고, <간호학교>는 현재의 <삼육보건대학교>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부장품 중에 <묘지명 墓誌銘>도 나왔는데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묘지에 죽은 사람의
  덕이나 공로 따위를 새겨넣은 글'을 일컷지요.
  그 묘지명은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가 친히 쓴 것인데 다섯장의 청화백자에 기록되 있었고
  출토 된 <묘지명 墓誌銘>의 실물 사진이 다음 사진입니다. 


  ['사도세자 묘지명']

  "사도세자 묘지명 思悼世子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 38년 윤5월 21일-1762년>에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살해된 [사도세자]의 <묘지명> 입니다.
  이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1762년(영조38년)음력 7월에 썻다고 적혀 있군요.
  임금이 직접 쓴 묘지명이라고 이런걸 <어제 묘지명 御製墓誌銘>이라 하죠.
  청화백자에 기록되있는데 이 <묘지명>이 간호학교 신축공사 하다가 발견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살해 당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울며불며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했지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그리곤 아버지의 묘에 참배 조차 할수 없도록 할아버지로 부터 엄명이 내려져 제사를 지내며 절 조차 할수 없었죠.
  [영조]는 이 묘를 "수은묘 垂恩墓"로 낮추어 묘를 썻지만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묘를
  "영우원 永祐園"으로 격상하고 이곳에 14년간 원행하며 아버지를 추모했답니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이 <배봉산 拜峰山>이 된 유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곤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이 있던 [정조]는 천하명당이라는 "현륭원 -수원 화산"으로 천장을 결심하게 되지요.
  27년만에 아버지의 묘를 천장 할때 [영우원 묘]를 파 보니 묘에서 윗 사진의 문제의 <묘지명>이 나왔는데
  [정조]가 읽어 보니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에 대해 할아버지 [영조]는 "죽일수 밖에 없었다"라는 변명들이
  가득 쓰여 있어 기분이 더욱 나빠진 [정조]는 폐기된 묘에 이 <묘지명>을 파뭍고 덮어 버려 폐기했는데
  그것이 간호학교 신축공사하다가 땅 속 5m 지점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우원터>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다녀 온 <영우원터>를 저와 함께 가 보실까요? ^*^


  ['삼육보건대-병원' 입구]

  "삼육서울병원""삼육보건대학교" 정문으로 들어 가면 "삼육중앙교회"가 있는데
  [그린어린이집] 옆으로 난 길로 올라 갑니다. 50m 쯤 올라 가면...


  ['에덴동산' 앞]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공원앞에 도착하는데 학교 안내도가 있습니다.


  [안내도]

  먼저 학교 안내도를 보고 [삼육보건대]를 찾아 갑니다.


  ['에덴동산']

  ['에덴동산']

  [에덴동산]이라고하는 조그마한 공원이 "혹시 [영우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공원을 통과하여 조금 더 올라 가면...


  ['삼육보건대']
 
  신문 기사에 나온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에 있는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하는
  "삼육보건대학교 건물"이 나타납니다.
  [에덴동산]이라는 공원 위 이 곳이 "영우원 터" 였을 가능성이 커다고 '파란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조금전 [히어리광장]에 있는 안내석에는 "삼육병원 본관 자리"가 [영우원터]라고 하지만
  신문 기사엔 <서울시립병원 뒤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하며 주소까지 <휘경동 29-1번지>라고
  구체적으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저의 주장이니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만...
  [정조실록]에는 "왕은 부장품들을 정자각 동쪽에 나아가 모조리 태우도록 명하고
  '증옥함'을 비롯한 <묘지명>과 석물들은 '내청룡' 밖에다 묻어버리고 따로 표시하라 명령하였다"고
  기록되 있습니다..이때 묻은 부장품들이 1968년에 <간호학교 신축공사 중>에 출토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장품이 나온 곳과 묘터는 좀 다를 수 있다고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으니 
  [에덴동산] 위 이곳 둔덕이 아닐까?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현 지도]와 [옛 지도]를 보면 더욱 확신이 갑니다.


  ['네이버위성지도']

  첨단 과학 기술로 촬영한 위성 사진에는 그 옛날의 모습은 도시화로 신기루 같기만 하지만
  그래도 [배봉산 산줄기]의 흔적은 그런대로 남아 있는듯 합니다. 다행이죠?
  신문 기사에 나온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에 있는 <간호학교 신축부지>라고 추정되는
  "영우원터"가 있었다고 하는 <삼육보건대>에 제가 빨간색 점으로 표기했습니다.
  이 지도를 보고 다음 옛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을 보면...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

  [정조]가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상황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지요.
  이백여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들에게 나타난 '영우원보토소등록 永祐園補土所謄錄'을 보면 
  [영우원]의 위치를 풍수지리적으로 어떻게 해석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한자 실력이 짧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주변 山은 확실히 알수 있군요.
  이 지도는 원래 남북이 반대로 되 있는데.남북을 바꿔 윗 위성지도와 비교해 보면 
  [배봉산]과 [아차산] [천장산]에 둘러 쌓인 [영우원]의 풍수지리적 위치를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나저나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같나요? 도시화로 흔적 없이 사라진게 너무 아쉽기도 한데
  [아차산] [천장산] [봉화산]에 둘러 쌓인 "배방산"의 혈과 기가 흐른다는 "영우원"...
  하지만 [정조]는 이 터가 명당이 절대 아니라고 하며 <수원 현륭원>으로 천장을 했는데
  천장을 위해 묘를 파 보니 묘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정조]는 또 울었답니다
  "아버지를 물 속에 가두어 두었으니 어찌 불효가 아니었는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항변이라도 하는 듯...
  그리고 명당이 아니어서 천장을 결정한 자신이 백번 올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답니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계속 슬퍼하며 아들의 시호를 [사도세자 思悼世子]라고 까지 추모 했지만
  여기서 나온 <묘지명>에는 죽일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 놓은 것을 확인 할수 있어서
  [정조]는 할아버지의 교활함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영조]는 자기 아들의 <묘지명>에서도 아들에 대해 원색적 비난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조]가 직접 쓴 <묘지명>의 일부를 알려 드리면...
  "어찌 어리석은 행동을 하여 늙은 아비로 하여금 '못쓸 짓'(살해)를 하게 하였냐"는 자기변명의 글과 
  "세자 때부터 이처럼 무도한 자는 내 일찍이 보지 못했다. 풍족한 곳에서 태어나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마침내 미치기에 이르고 말았구나~'"라는 등의 비판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세자의 시호처럼 영조가 아들을 그리워하거나 죽인 걸 후회했다고 하지만
  <묘지명>만 봐도 [영조]는 절대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세자를 죽인 후 '개선가'를 연주했다는 <이재난고>의 기록과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유명한 <한중록>에도 세자의 장례에 무지 인색했다고 기록되 있죠..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 천인공노 할 인간이었다고 생각케하는 대목입니다.
  '탕평정책'을 쓴 위대한 왕? 웃기는 소리.....
  무술이의 아들이라는 트라우마...아들에게 쏠리는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과 똑똑한 아들에 대한 열등감..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27살의 세자를 죽이기 까지 하며 강화한 왕권을 향유하지도 못하고 죽인지 13여년 더 살다 그도 갔습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히어리광장']

  다시 [배봉산 산행]을 계속 합니다.
  [영우원터 안내석] 뒤에 있는 "히어리광장"입니다.
  '히어리'가 뭔 듯인가 했더니 식물 이름이군요. 식물에 대해 워낙 문외한이라서...ㅎ
  그런데 둘레길로 가면 이곳을 만날수 없습니다. 그러니 꼭 들려야 하는데...그 이유는


  ['히어리광장']

    ['휘경원' 안내판]

  "히어리 광장"에는 "휘경원터"라는 안내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보면 이곳 공원이 [휘경원터]였다고 오해 할수도 있는 안내판입니다.
  이곳엔 안내판만 있고 실제 [휘경원터]는 이곳이 아니어서 제가 산행 출발 전에 [휘경원터]도 다녀 왔습니다.
  저와 함께 [휘경원터]로 가 볼가요?

      두번째 답사 "휘경원터 徽慶園址"를 찾아서

  ['휘경2동' 골목]

  [휘경원터]는 [영우원터]와 달리 국가에서 그 터를 확인하여 표지판을 세워 놨기에 
  조사하고 뭐고 할거 없이 위치를 확인하고 그냥 찾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위치는...<동대문구 휘경2동 286-66번지>에 있는 [휘경중학교]입니다.


  ['휘경중학교 정문']

  "휘경원터 徽慶園址""휘경중학교 정문"만 찾아 가면 됩니다.
  오늘이 토요일인데다가 '코로나사태'로 학교 문은 철통방어로 잠겨 있습니다.
  들어 갈수는 없어서 정문 너머로 들여다 보면....


  ['휘경원터 안내판']

  우측 앞에 "휘경원터"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휘경원터 徽慶園址
               휘경원은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23년) 조성 되었다가 1863년(철종14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휘경원>에 대해선 제가 여러번 다른 답사기에서도 언급 한바 있습니다만, 한번 더 언급하면...
  이 묘터의 주인을 알기 위해선 [정조대왕]과 그의 여인들에 대해 알아야 
  이 묘의 주인을 쉽게 알수 있으니 제가 나름대로 아는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정조대왕]은 여성편력이 거의 없는 걸로 알려졌지만 그도 한명의 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었죠.
  정비인 "효의왕후"와는 세손 때인 9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14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했답니다.
  왕자를 생산해야만 하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로 상상 임신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죠.
  결국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어 [정조대왕]의 릉인 [건릉]에 합장되었습니다.
  비운의 왕비 "효의왕후"는 [정조]와 가례를 올리려고 할때 홍역을 앓아 곰보가 된 여인이죠.
  홍역 때문에 가례를 1년이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효의왕후"를 [정조]는 따뜻하게 배려했다는거 아시나요.
  [정조]보다 훨씬 더 오래살고 [정조]의 릉인 화성 [건릉]에 합장되어 남편 곁에서 지금까지 잠들고 있죠.
  다음으로 지난번 탐방한 [고려대 이공대] 교내에 있었던 <인명원>의 주인공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인데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치적 책략으로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정조]는 어쩔수 없이 당시 최고 정치세력인 "홍국영"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그녀가 "원빈 홍씨"입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후궁이 된지 1년도 않되 죽어버렸는데 
  그때 나이가 고작 14살이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현재의 [고려대 이공대] 안에 묘를 만들어 안장했는데...
  "개운산" 산줄기가 '성북천'과 '정릉천'을 분리시키고 있는 "개운산의 끝자락"인 곳에 
  "인명원 仁明園"이라는 이름의 묘소를 마련 했던 것이랍니다.
  그래서 14살에 죽은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여서 "<애기능>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고려대 이공대]를 [애기능캠퍼스]라고 부르게 되는 유래가 되겠습니다.
  [정조]는 정치적 가례를 몹시 싫어했죠.
  두번째 "원빈 홍씨"도 일찍 죽자, 다시 정치적으로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를 세번째 후궁으로 들이는데...
  "화빈 윤씨" 거소에 드나 들다가 "화빈 윤씨"를 시중드는 무술이와 눈이 마주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창녕 성씨"로서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 져 있죠.
  진정 사랑해서 얻은 여인으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남 "문효세자"를 얻는데,
  뭔 운명의 장난인가,, 간신히 얻은 장남 "문효세자"는 불행이도 5살에 죽어버리고 그녀도 죽어버렸죠.
  [정조]는 유일한 아들 장남이 죽자 엄청 슬퍼하며 "문효세자"의 묘를 썻는데 [효창원 孝昌園]이었고, 
  현재 "백범 김구선생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은 원래 [효창원 孝昌園]에서 유래한다는거 아시나요.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였으니 세자와 그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답니다.
  [영조] 때부터 완전 금기시되던 무술이와 무술이가 낳은 세자의 배척이 정적들로부터 표적이었던 때이니..
  [정조]까지 암살 당할뻔 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독살설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요.
  
  여자 福도 지지리도 없는 [정조]는 다시 마지막 후궁을 들이는데 
  그녀가 바로 "휘경원 徽慶園"에서 잠자고 있는 "수빈 박씨"이며, 
  그녀는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23대 순조"가 되니 "수빈 박씨"는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릉"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하죠.
  그래서 "휘경원 徽慶園"으로 명명된 "23대 순조의 어머니 묘"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대왕]의 마지막 아내였습니다.
  
  현재 "휘경동"이라는 洞名을 만든 "휘경원터"가 바로 이곳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옮겨간 실제 "휘경원"은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7번지'에 있는데
  제가 직접 방문하여 답사기를 쓰기도 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해 가 보세요.
   http://cafe.daum.net/paraanmoon/NdEA/1 [남양주] 광릉 수목원길 - 휘경원 봉선사 광릉


  ['배봉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

  <영우원터>와 <휘경원터>를 답사하며 왕조시대의 삶과 죽음을 쬐끔 느끼고
  다시 [배방산] 산행을 계속합니다.
  <히어리광장>에서 능선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쉼터]

  코로나사태로 온통 묶여 있는 쉼터 정자를 다시 만나는데 [배봉산]의 서쪽을 조망 할수 있는 곳이더군요.


  ['서울시립대' 조망]

  [안내문]

  [배봉산] 서쪽 아래엔 "서울시립대"가 자리하고 있고


  ['천장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지난번에 탐방했던 "천장산"과 <경희대>가 조망됩니다.


  ['운동시설']

  ['배봉산' 정상부]

  능선길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정상부에 도착하고


  ['정상부 보루 축성']

  [안내문]

  [배봉산 정상부]는 '결속토낭공법'으로 축성했다고 안내하며


  ['배봉산' 정상]

  "배봉산 拜峰山 108.9m"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정조대왕]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 참배에서 유래하는 산 이름이죠.
  [동대문구]가 매년 정초에 해맞이 행사를 하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산 이름이 조금 독특하죠?
  <拜峰>에 다시 <山>을 붙였죠. <峰우리> 정도의 작은 산이지만 높이기 위해 다시 <山>을 예의로 붙여준듯
  <도봉산>도 같은 맥락이지요,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서 벗어나 <道峰>에 더시 <山>을 붙이드시
  지난 "살곶이목장"을 답사 할때 목장의 북쪽 울타리 역활을 한 산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이 정상엔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 되었었는데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고...
  제가 돌아 보니 생활건강걷기코스로 넘 알맞더군요. 그래서인지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보루 유구]

  [유구 현황도]

  "배봉산 보루 拜峰山 堡壘"
  배봉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성 "보루"의 기저부 유구랍니다.
  2017년 2월 9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고...


  [서쪽 '서울시내' 조망]

  ['서울시내' 조망]

  서쪽을 조망하는데 맑은 날씨지만 연무와 미세먼지로 조망이 시원치 않아 아쉽습니다.
  '踏十里'니 '往十里'니 하는 이름 때문에 <한양성>과 많이 떨어진 변방 인줄 알았는데 넘 가깝지요?
  <한양성>을 둘러 싸고 있는 內四山이 지척입니다.


  [서북쪽 조망]

  서북쪽으로는 [북한산]까지 조망되고  


  ['천장산' 조망]

  북서쪽으로는 <홍릉터>가 있는 {천장산}이 보입니다.


  [동쪽 '용마산' 방향 조망]

  ['봉화산' 조망]

  동북쪽으로는 '신내동'의 [봉화산]이 조망 되는데 곧 탐방 할 예정입니다.


  [ 동쪽 '망우산-용마산' 조망]

  동쪽으로는 [수락지맥]의 <망우산><용마산><아차산>이 지척에 보이는데
  저 산줄기 아래엔 "면목동 面牧洞"이 자리하고 있죠.
  <살곶이목장>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面牧洞"이라 했답니다.
  저는 <살곶이목장>을 알기 전까지는 "사람 볼 면목이 없는 동네"라서 '면목동'이라 하는 줄ㅎㅎ


  [남쪽 조망]

  [배봉산]에서 바라보는 "화양동" 방향인 옛 "살곶이목장"입니다.
  이젠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아니라 빌딩을 키우는 곳이 되었군요.


  ['전농동' 방향 내림길]

  [배봉산] 정상에서 남쪽인 '전농동'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제 집사람이 [전농초등학교] 나왔다는데...^.^ 요즘도 초딩 동창회 한다고 열성이더군요.
  저는 초딩 동창회 해봤는지 기억도 안납니다.


  ['배봉정']

  잠시 내려 가니 "배봉정"이라는 정자 쉼터가 있어 쉬어 갑니다.
  오늘 저와 함께 [배봉산]을 등산한 저의 애완견 "우리"입니다. 종자는 "씨츄"이구요.
  집에 가니 골아 떨어져 종일 자더군요. ㅎ




  [생활체육시설]

  [휘경2동주민센터]로 돌아 갈때엔 [배방산둘레길] 동쪽 둘레길을 이용했습니다.
  이곳에는 가는 곳마다 생활체육시설이 상당한 규모로 여러곳 있더군요.
  현재는 코로나사태로 모두 폐장하고 있었고


  [무장애데크둘레길]

  ['배봉산 숲속광장']

  데크로 만들어진 무장애길에는 [숲속광장]도 있었는데 해맞이 명소라고 하네요.



  [둘레길]

  무장애숲길을 다시 통과하여 내려 가면....


  ['휘경2동 주민센터']

  "휘경2동주민센터"로 회귀하여 산행과 답사를 마쳤습니다.


  ['구글맵 실트랙']

  제가 걸은 실트랙입니다.
  [배방산]에서 거리는 3.7km였으며 1시간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영우원터>와 <휘경원터>가 있는 "삼육보건대"와 "휘경중학교"는 승용차로 다녀 왔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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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대문구 역사탐방』
     『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영휘원-
       세종기념관-홍릉터-천장산-의릉』

       

  ['구글맵']

  ['구글어스']

  오늘은 주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청량리동-회기동-이문동'을 탐방 할 예정입니다.
  주요 탐방지는 "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영휘원-홍릉터-천장산-회묘터-의릉"입니다.


  ['안암역 4번출입구']                    11:42

  2020년 12월 12일 (토) 맑음 
  <안암역4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고대병원' 앞 사거리]

  <안암역4번출구> 정면에 "고대 병원"이 보이며 
  병원 앞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 가면...

      제1부 "인명원터 仁明園址"를 찾아서 


  ['고대 이공대']                     11:44

  [고대병원] 앞 사거리에서 "고대 이공대" 캠퍼스 정문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진입로 끝에 전기밥솥같이 생긴 건물이 보이는데, 저 건물 앞으로 갑니다.


  ['애기능생활관']                      11:46

  전기밥솥처럼 생긴 동그란 건물이 "고대 이공대 애기능생활관"이라는 학생들 편의시설인데
  오늘 첫번째 역사탐방지의 랜드마크가 되겠습니다.


  [안내도]

  <애기능생활관> 앞에 [이공대안내도]가 있어 길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찾는 곳이 바로 제가 표기한 "인명원터"이기 때문입니다.
  추가로 [보제원터]와 [선농단]의 위치도 표기했으니 이 안내도를 참고하여 가면 되겠습니다.
  먼저 <애기능생활관>과 <과학도서관> 사이로 들어 가면....


  [육교]

  <애기능생활관> 정문을 지나면 다시 육교를 지나게 되는데 
  앞에 보이는 조그만 동산이 "인명원터"가 되겠습니다. 동산으로 올라 가면...


  [쉼터]                      11:49

  "인명원"이 있었던 동산의 정상에는 학생들을 위한 쉼터가 조성되 있군요.
  이곳이 옛날 [정조대왕]의 세컨드인 "원빈 홍씨"의 묘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외국인이 만들었다는 조각작품 하나가 학생들에게 "꿈을 향한 기다림"을 알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만, [이공대]가 아닌 [문과대]를 다녀 [이공대] 쪽은 거의 가본적이 없고
  또 워낙 옛날이라 기억도 가물가물 한데 특히 이런 유적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커진 캠퍼스가 생소하기만 하군요.
  <인명원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좌측으로 내려 가면...


  ['인명원터' 표지석]

  "인명원터 仁明園址" 표지석이 동산 아래 <애기능생활관> 옆에 다소곳이 서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어디서 알았냐구요? ㅎㅎ 문체부의 "한국문화유산포털"에서 알았습니다.

                     인명원터 
                     仁明園址
           인명원은 조선 후기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소이다
          1950년 6월 13일 서삼릉(西三陵) 내의
           귀인 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6.25가 발발하기 열흘 전 쯤에 이장했군요)
                
   이 묘터의 주인을 알기 위해선 [정조대왕]과 그의 여인들에 대해 알아야 
   이 묘의 주인을 쉽게 알수 있으니 제가 나름대로 아는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정조대왕]은 여성편력이 거의 없는 걸로 알려졌지만 그도 한명의 정비와 네명의 후궁을 두었었죠.
  정비인 "효의왕후"와는 세손 때인 9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14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했답니다.
  왕자를 생산해야만 하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로 상상 임신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죠.
  결국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어 [정조대왕]의 릉인 [건릉]에 합장되었습니다.
  비운의 왕비 "효의왕후"는 [정조]와 가례를 올리려고 할때 홍역을 앓아 곰보가 된 여인이죠.
  홍역 때문에 가례를 1년이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효의왕후"를 [정조]는 따뜻하게 배려했다는거 아시나요.
  [정조]보다 훨씬 더 오래살고 [정조]의 릉인 화성 [건릉]에 합장되어 남편 곁에서 지금까지 잠들고 있죠.

  다음으로 여기 <인명원>의 주인공인 "원빈(元嬪) 홍씨(洪氏)"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치적 책략으로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정조]는 어쩔수 없이 당시 최고 정치세력인 "홍국영"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그녀가 "원빈 홍씨"입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후궁이 된지 1년도 않되 죽어버렸는데 
  그때 나이가 고작 14살이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묘를 만들어 안장했는데...
  "개운산" 산줄기가 '성북천'과 '정릉천'을 분리시키고 있는 "개운산의 끝자락"인 이곳에 
  "인명원 仁明園"이라는 이름의 묘소를 마련 했던 것이랍니다.
  그래서 14살에 죽은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여서 "<애기능>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이 [고대 이공대]를 [애기능캠퍼스]라고 부르게 되는 유래가 되겠습니다.
  
  다시 정치적으로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들이는데...[정조]는 정치적 가례를 몹시 싫어했죠.
  "화빈 윤씨" 거소에 드나 들다가 "화빈 윤씨"를 시중드는 무술이와 눈이 마주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창녕 성씨"로서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 져 있죠.
  진정 사랑해서 얻은 여인으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남 "문효세자"를 얻는데,
  뭔 운명의 장난인가,, 간신히 얻은 장남 "문효세자"는 불행이도 5살에 죽어버리고 그녀도 죽어버렸죠.
  [정조]는유일한 아들 장남이 죽자 엄청 슬퍼하며 "문효세자"의 묘를 썻는데 [효창원 孝昌園]이었고, 
  현재 "백범 김구선생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은 원래 [효창원 孝昌園]에서 유래한다는거 아시나요.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였으니 세자와 그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답니다.
  [영조] 때부터 완전 금기시되던 무술이와 무술이가 낳은 세자의 배척이 정적들로부터 표적이었던 때이니..
  [정조]까지 암살 당할뻔 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독살설을 충분히 추리 할수 있지요.
  여자 福도 지지리도 없는 [정조]는 다시 마지막 후궁을 들이는데 
  그녀가 바로 "휘경원 徽慶園"에서 잠자고 있는 "수빈 박씨"이며, 
  그녀는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23대 순조"가 되니 "수빈 박씨"는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릉"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하죠.
  그래서 "휘경원 徽慶園"으로 명명된 "23대 순조의 어머니 묘"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대왕]의 마지막 아내였습니다.
  현재 "휘경동"이라는 洞名을 만든 "휘경원터"는 다음 역사 탐방지가 되겠습니다. 기대하시라


  ['인명원 묘터' 전경]

  주차장으로 나가 "인명원 묘터"를 조망합니다.
  위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이곳은 "개운산 開運山" 산줄기가 [청계천] 방향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인데,
  현재는 이 산줄기를 [고려대]가 몽땅 까뭉개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정조대왕]의 첫번째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인  "인명원터 仁明園址"만
  조그마한 동산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봄에는 철쭉동산으로 가을엔 단풍으로 유명하다는군요.


  ['인명원터' 좌측]                       11:54                       

  "인명원터" 좌측으로는 [이공대] 건물들이 학교의 명성을 뒷받침하고 있군요.
  제가 다니던 시절과는 너무 다르게 규모면에서 엄청 발전했습니다.
  
      제2부 "보제원터 普濟院址"를 찾아서 


  ['안암오거리']                       11:57

  [인명원터]가 있는 [고대 이공대] 남쪽문을 통해 나가면 추억의 "안암오거리"를 만납니다.
  [안암오거리]는 '성북구 안암동'과 '동대문구 제기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옛날에 "보제원 普濟院"이라는 공공여관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그 흔적은 오거리 건너편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번호 06-177] 옆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북구'에서 '동대문구'로 들어 가게 됩니다.


  [개운산' 조망]

  [안암오거리]에서 뒤돌아 보면 "개운산 開運山 130.5m" 정상이 쬐끔 보입니다.
  저 산 아래 "개운사 開運寺"라는 제법 유명한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은 조금 전에 탐방했던 "인명원터" 근처에 있었는데 묘가 들어 서며 옮겨 갔답니다.
  그런데 저 절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죠.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암중모색하던 <대원군 이하응>이 나중에 [고종]이 되는 아들 '명복이'를
  안전하게 숨기며 저 절의 '벽담스님'에게 맡겨 스님에 의해 자랐는데, 그후 '명복이'가 [고종]으로 왕위에
  오른 후 "운명을 여는 사찰"이라는 의미인 "開運寺"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죠.
  한마디로 "왕을 탄생시킨 대박 터진 절"이라는 닉네임을 얻었죠.
  "개운산 開運山 130.5m"은 [북한산]의 [보현봉]에서 뻗치는 [형제봉능선]에서 이어지는 산인데
  [북악터널]과 [미아리고개]를 지나 [성신여대],  [고려대]를 통과하여 이곳으로 이어지죠.
  그러니까 이 산줄기의 좌측은 [성북천]이 흐르고 우측엔 [정릉천]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암동 安巖洞"이라는 지명은 이 산줄기 어느 곳에 "앉으면 편안한 바위"가 있어서
  쉽게 표현하자면 "안락의자바위"에서 유래 한다는거 아셨나요? ㅎ [고종]이 어릴 때 앉은 자리? ㅎ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번호:06-177']

   ['보제원터' 표지석]                     12:00

  "보제원터 普濟院址" 표지석이 [안암오거리]에 행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쓸쓸히 있습니다.
  
                     보제원 普濟院 터  
                             1393년~1895년
                             여행자의 무료 숙박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국 각지에는 '공공여관'인 "원 院"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규모가 가장 큰 "院"은  "한양성의 4대문" 중에 3대문 밖에 있었던 '공공여관'인 "원 院"이었는데...
  확실히 알기 위해 옛 지도를 보며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보제원'과 '이태원' '홍제원' 위치]

  [서대문] 밖에는 "홍제원 洪濟院"이 있었는데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관리들이 이용했고
  [남대문] 밖에는 "이태원 梨泰院"이 있었는데 현재 [용산고등학교] 자리랍니다.
  그리고 [동대문] 밖 3리 쯤에 "보제원 普濟院"이라는 '강원도-함경도 방향' 역원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특히 [동대문] 밖 "보제원 普濟院"은 '공공여관'의 성격 보다 '공공병원'의 역활이 컷답니다.
  역병이 돌거나 가난과 질환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휼해 주던 의미있는 병원역활과 구휼역활을 했다는거죠.
  그래서인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한약재 시장인 "제기동 약령시장"이 발달 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오늘 <경동시장>과 붙어 있는 <한약재 약령시장>을 둘러 보려고 했는데 시간상 다음으로 미루고

      제3부 "선농단 先農壇"을 찾아서


  ['선농단' 가는 길]

  [보제원터]에서 남쪽방향인 [용두동] 방향으로 50m쯤 내려 가면 
  첫번째 좌측에 제법 너른 골목으로 들어 가는 골목 입구를 만나는데 
  [선농단]으로 가는 이정표가 100m 거리에 있다고 알려 줍니다.
 

  ['종암초' 가는 골목]

  ['종암초등학교']                     12:04

  [보제원터]에서 골목을 100m 정도 진행하면 [종암초등학교] 정문을 만나며


  ['선농단역사문화관']

  [종암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엔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있습니다.
  몇번 왔다 갔으나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은 꼭 관람을 하려 했으나 코로나사태로 휴관...ㅠ


  ['선농단' 입구]                   12:05~12:15

  [안내문]

  "선농단 先農壇"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
  조선시대 농사 잘 지어 풍년들라고 왕이 제사를 지내고 농사 시범을 보이던 곳이랍니다.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일이야말로 왕이 꼭 해야 할 의무같은거죠.
  한편 이와 같은 의미로 '성북동'에 가면 "선잠단 先蠶壇"이 있죠.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곧 다시 탐방 할 예정입니다.
  [선농단]은 왕이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고
  [선잠단]은 왕비가 '누에고치를 잘 길러 비단을 많이 만들게 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죠.
  먹고 입는 衣食문제 해결이 최고의 善이었던 농경사회에서 빼 놓을수 없는 중요한 일이니...


  ['향나무'와 '청량대 표석' 위치]

  '코로나사태'로 문을 잠가 놨지만 그냥 지나칠순 없어 월담을 해서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오로지 코로나 예방 차원으로 문을 닫았으니 혼자 들어 가면 코로나 문제는 없으니...ㅎ
  [천연기념물 향나무]와 [청량대] 위치를 확인하고 가까이 가면...


  ['천연기념물 '향나무']

  [안내문]

  "천연기념물 제240호 향나무"
  [선농단]이 만들어 질때 심은 나무라고 하는데 600여년 묵은 고목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향나무라고 합니다.


  ['청량대' 표석]

  "청량대 淸凉臺"
  일제강점기시절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선농단]을 없애고 일반 공원을 만들었다는 
  그 흔적인 "청량대 淸凉臺"라는 표석이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민족문화말살정책은 쪽바리들이 계획해서 한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앞장 서서 했습니다.
  쪽바리들이 우리나라 민족문화와 국토 정기가 흐르는 기와 맥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면 우리나라 문화와 민족정기를 상세히 알수 없는 사항입니다.
  백두대간 등 주요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고 중요 민족문화시설을 없애는데 먼저 나서서
  일제에 아부하며 자신만 잘 살기 위해 민족을 팔아 먹으며 실행에 옮긴 인간들은 
  쪽바리들이 아니라 친일파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그 인간들을 일일이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중지를 모아 친일파들의 행태를 
  지금이라도 알리고 청산해야겠습니다.


  ['제단' 입구]

  ['선농단 제단']
 
   [안내문]

   "선농단 先農壇" 제단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기동 祭基洞" 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이곳 [선농단]에서 탄생되었답니다.
   "제기 祭基"라는 말의 뜻이 "제사 지내는 터"라는 것이니까...
   풍년을 비는 제사가 끝나고 나면 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고
   행사에 참석한 관리들과 농민들이 행사가 길어져 배가 고파지면 농사 시범을 보일 때 이용한
   소를 잡아 많은 사람이 먹을수 있도록 큰 솥에 국을 끓여 국밥을 말아 먹게 했답니다.
   이 국밥을 "선농탕"이라고 했는데 훗날 음운변화로 "설렁탕"이 되었다고
   그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안내문의 내용에 대해 쬐끔 첨언하자면....
   "설렁탕"의 유래는 여럿 있습니다.
   제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기원은 이런것입니다.
   설렁탕은 주로 소의 뼈다구를 푹 끓여 고와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죠.
   그래서 옛부터 국물이 하얗다고 "설(雪)농탕"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는게 저는 더 믿음이 갑니다.
   어느 쪽을 믿느냐는 자기 판단...ㅎ

      제4부 "영휘원 永徽園"을 찾아서


  ['성일중학교']                     12:18

  [선농단]을 무단침입하여 둘러 보고 나와 [종암초등학교] 앞 골목을 따라 나가
  [성일중학교] 뒷골목으로 100m 정도 나갑니다.


  ['정릉천'과 '서울내부순환도로']                     12:20

  ['정릉천변 산책로']
 
  [성일중학교] 골목을 빠져 나가면 "정릉천"과, 그 위에 건설된 "내부순환도로"를 만납니다.
  [정릉천] 수변산책길로 북진합니다. 12분 정도 진행하면...


  ['개운산' 조망]                       12:32

  [제기1교]를 만나 도로로 올라 가서 [개운산]을 조망하고


  ['제기1교' 앞 이정표]

  ['영휘원 사거리']                      12:39

  [제기1교]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떡전교사거리] 방향으로 7분 정도 진행해서
  [영휘원사거리]를 만나면 좌회전 합니다.
  *<떡전>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 오거나 내려 갈때 떡 사먹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인데
  한자로 쓰면 '병점 餠店"이고 '수원' 남쪽에 "병점"이라는 동네도 있죠?
  동대문 밖에도 '청량리'에 "떡전"이 있었답니다.


  ['영휘원' 입구]                     12:42~12:56

  ['영휘원' 정문]

  이어서 유명한 "영휘원 永徽園" 정문에 도착합니다.
  입장료 1,000원, 노인들 무료
  코로나사태로 문을 닫았을거라 예상 했는데 다행이 열었고 발열체크를 하고 입장시켰습니다.


  ['영휘원' '숭인원' 전경]

  정문을 통과해 들어 가면 [숭인원]과 [영휘원]이 전체적으로 함께 보이는데


  ['가계도']

  먼저 이 무덤의 주인들 족보를 좀 살펴보고 들어 갑니다.
  "고종"의 정비인 '명성왕후"가 낳은 아들이 [27대 순종]이 되고
  "고종"의 세컨드인 "엄상궁"이 낳은 아들이 [영친왕]이죠.
  그러니까 [순종]과 [영친왕]은 이복형제지간인거죠.
  [영친왕]은 일본여자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우리 이름으로 [이방자]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이 지금 이곳 [숭인원]에서 잠자고 있는 "이진"인데...


  ['숭인원']

   [안내문]

  "숭인원 崇仁園"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고종"의 세컨드인 "엄상궁"이 낳은 아들인 [영친왕]과 
  '이토히로부미'가 애지중지 했다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이진"의 무덤이 되겠습니다. 일본여인의 피가 좀 섞인 황손 원자인데...
  2살 때 죽어 인생행로는 없으니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영휘원 홍살문']

  [비각과 묘]

  [안내문]

  "영휘원 永徽園"-"순헌황귀비 엄씨 묘 純獻皇貴妃 嚴氏墓"
  "고종"이 진짜로 사랑했던 여인은 [명성왕후]라기 보다 [명성왕후]를 뫼시는 [엄상궁]이었다고 하죠?
  이런 상궁을 '시위상궁'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명성왕후의 몸종'이라고 표현해도 되지요.
  [명성왕후]가 [엄상궁]보다 세살 많아 나이 차이도 거의 없었는데....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로도 많이 알려진 두 여인...
  [엄상궁]이 [고종]의 총애를 받자 [명성왕후]는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고 하죠?
  누구보다 미더웠고 가까웠던 엄상궁이었기에 배신감은 더했고, 
  차라리 자기보다 무지 어리고 예쁜 여자였다면 그래서라고 이해라도 했을 텐데
  인물도 나이도 별루인 [엄상궁]을 [고종]이 가까이 했다는 사실에 여자로서 크게 상처를 입었다죠.
  (하여간 남자나 여자나 왕이나 천민이나 사랑엔 장벽이 없나봐요~ㅎㅎ)
  그리하여 [명성왕후]에 의해 대궐 밖으로 쫓겨났던 [엄상궁]은 10년 후 을미사변(1896년)으로
  다시 대궐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됐답니다.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아관파천'은 그녀의 기지로 성사됐다고 하죠?
  이후 [고종]을 모신 [엄상궁]은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되니 [상궁]에서 졸지에 왕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 - "영원히 아름다워라~" 라는 '永徽園'입니다.


  ['어정' 위치]

   ['어정']

  [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는 "어정 御井"이 있고


  ['산사나무' 고사목]

  [천연기념물 해제 안내문]

  태풍 '볼라벤' 때에 피해를 입고 수명도 다해 고사목이 된 "산사나무"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것을 지정해제 한다고 알리고 있는데...
  멸망한 왕조의 그림자를 보는듯 합니다.

      제5부 "세종대왕 기념관"을 찾아서


  ['영휘원' 돌담길]                   12:57

  [영휘원]과 [숭인원]을 둘러 보고
  [영휘원] 돌담길을 따라 [세종대왕기념관]으로 가는데, 
  길바닥에 [동대문구 힐링산책길]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완 기념관' 입구]                   1:00~1:10

  [영휘원]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세종대왕기념관"이 붙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신도비 비각']

  ['세종대왕 신도비']

  [안내문]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된 "세종대왕 신도비"라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

  비각에서 조금 올라 가면 "세종대왕기념관"이 있는데 좀 초라합니다.
  그 이유는 "구 영릉터"에서 나온 유물들만 모아 놨고
  중요한 것들은 "여주 영릉"에 가 있기 때문이라고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동상>은 [덕수궁]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겼다고...


  ['구 영릉 석물']

  [안내문]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릉인 [헌릉]....'서초구 내곡동'에 있죠.
  [세종대왕]은 엄청 효자로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아버지 무덤 옆에 뭍어 달라고 어명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신하들도 어쩔수 없이 '내곡동 구룡산'과 '대모산' 사이에 있는 [헌릉] 옆에 릉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 [예종] 때에 자리가 나쁘다고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천장했답니다.
  그래서 [구 영릉]에 남아 있던 석물이 우연히 발굴되어 석물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게 됬다고...
  [여주 영릉]으로 천장 할때 석물들을 모두 새로 만들었기에 [구 영릉 석물]은 필요 없게 된 것.
  이곳이 [세종대왕기념관]이 된 사연이랍니다.


  ['주시경 선생 묘비']

  [안내문]

  "주시경 선생의 묘비"도 이곳에 있는데...
  선생의 묘가 국립묘지로 이장 될때 남겨진 비석을 이곳에 모셨다고...
  한글사랑이 남달라 한글 연구에 전념했기에 [세종대왕기념관]에 모신 사연이랍니다.
  이런 훌륭하신 분들은 대체로 너무 일찍 돌아 가셨지요. 선생도 39세에 급사하셨습니다.


  ['수표']

  "수표 水標 보물838호"
  <청계천 수표교>에 있다가 [장춘단공원]으로 옮기고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네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던데...어느게 진짜인지

      제6부 "홍릉터 洪陵址"를 찾아서


  ['산림과학원 정문' 조망]                        1:10

  <세종대왕기념관>의 정문으로 나가면 건너편에 "국립산림과학원" 정문이 보입니다.
  정문 앞으로 건너 갑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휘원-숭인원"을 [홍릉]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아니올씨다...ㅎ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숲) 정문']                     1:11~1:40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숲"
  "국립산림과학원"은 옛 "홍릉터"를 까뭉개고 설립한 우리나라 산림과학원이랍니다.
  그러니까 산림과학원 전체가 "옛 홍릉 터"라는거죠.
  [국가문화유산]이라는 싸이트에는 "홍릉터 표지판"을 정문 좌측 숲속에 세웠다고 나와 있는데
  숲속을 모조리 뒤져봐도 그런 표지판은 없었고, 정문 경비에게 물어봐도 그런 얘기는 처음이라고
  모른다고해서 미리 조사한 "홍릉터"를 찾아 들어 갑니다.


  ['홍릉 터' 찾아 가는 길]

  먼저 제가 답사하고 집에 와서 만든 '카카오위성지도'를 편집한 "홍릉터 위치도"를 보여 드림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자세한 안내도가 없었는데 이제 제가 처음으로 만들어 올립니다.
  앞으로 찾아 가실 분들에겐 무지 도움이 될것이며 찾아 갈 용기도 생길 것입니다.


  ['산림과학원 본관' 앞]

  정문에서 직진하면 [본관] 건물을 만나는데 [본관] 좌측이나 우측으로 가면 되는데
  저는 좌측으로 [본관]을 돌아 갔습니다.


  ['산림보존연구관']

  [본관] 건물 좌측으로 돌아 갔는데, 뒤에 [산림보조연구부동]이라는 건물이 또 있습니다.
  이 건물이 있는 자리는 앞으로 알게 되지만 [홍릉]에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 바로 뒤가 "홍릉"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우측으로 돌아 가면...


  ['침엽수원'']

  ['어정' 앞]

  [본관] 뒤 [연구부동]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 가면 <침엽수원>이라는 숲길이 있고
  이어서 [연구부동] 건물의 우측 옆에 "어정 御井"이 있습니다.


  ['어정']

  [안내문]

  [고종]은 당뇨등 질환이 있었는지 가는 곳마다 우물을 만들었군요.


  [갈림길]

  [오름길]

  [어정]을 지나면 바로 이런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으로 나무 계단이 있습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 가면....


  ['홍릉 터']

  예상보다 넘 초라한 "홍릉터 洪陵址"를 만납니다.
  봉분이 있었던 자리엔 밧줄로 둘러 그 흔적을 표시했고 표지석이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안내판에 안내문과 옛 사진이 빛바랜 모습을 하고 옛날을 추억하고 있어서 어쩐지 찐~했습니다.
  [명성왕후 민비]에 대해선 모두 잘 알기에 생략하고...
  안내판에 있는 사진들을 촬영해 확대하여 보여 드림니다.


  [안내문]

  워낙 유명해 모두 아는 분이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명성왕후]는 쪽바리들이 시해해 시신을 토막내고 이불을 덮어 석유를 뿌려 화장했기에 실제 시신은 없지요.


  ['옛 홍릉' 사진]

  ['옛 홍릉' 전경 사진]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촬영해서 포토샾으로 좀 밝고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조금전에 올라 오면서 본 [산림과학원 본관]과 [연구부동] 건물이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터]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천장산" 산줄기가 인상 깊은데 나무가 없는 돌산이었군요.
  지금은 [산림과학원]이 [홍릉숲]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잠시 후 저 산을 등산 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 洪陵"을 예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보면 


  [현재 '남영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제7부 "천장산 하늘길"를 찾아서


  ['천장산 하늘길' 가는 길]                     1:40

  [홍릉터]를 둘러 보고 다시 [산림과학원 정문]으로 나와 좌측 <경희대> 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산림과학원] 울타리를 따라 울타리 끝까지 가면....


  ['천장산 숲길' 입구]                         1:43

  [산림과학원] 울타리가 끝나는 곳에
  "천장산 숲길입구"가 나타 납니다.
  좌측은 [산림과학원]이고 우측은 [KAIST서울캠퍼스]였습니다.


  [안내도]

  이 안내도를 보고 출발합니다.
  특히 기억하고 가야 할 장소는 "경희여자중고등학교""연화사"입니다.
  왜냐하면 [경희여고] 자리가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의 묘>였던 "회묘터"이기 때문입니다.
  [천장산]에 올라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데크길]

  [첫번째 쉼터-홍릉터 조망처]

  "천장산 하늘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길엔 데크로 길을 만들어 이용하기 쉽고
  좌측엔 [산림과학원-홍릉터]가 있으며 우측엔 [KAIST서울캠퍼스]가 있더군요.
  5분여 데크길을 오르면....


  ['홍릉터' 조망]                      1:48

  첫번째 쉼터가 있는데 "홍릉터"를 조망 할수 있다고 안내하는데
  숲으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데크 내림길]

  [두번째 쉼터]                       1:54

  다시 5분 정도 데크를 더 진행하면 두번째 쉼터를 만나는데


  ['천장산' 안내문]

  "천장산 天藏山 140m"에 대한 설명 안내판이 있더군요.
  "하늘이 숨겨둔 산"이라는 의미의 산이어서 이 산 곳곳에 왕실의 묘를 썻다고...
  "홍릉" "회릉" "의릉" "영휘원.숭인원"등의 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의릉"과 "영휘원.숭인원"만 남았다고


  ['KAIST' 기숙사]

  두번째 쉼터를 지나니까 우측에 "KAIST 서울캠퍼스 기숙사"가 아주 가까이 있더군요.


  [데크길 끝-군사도로 만남]                       1:58

  [천장산 하늘길] 입구에서 데크길을 10분 정도 진행하니 데크길이 끝나고 군사도로를 만납니다.
  [천장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상당한 규모로 현재 있고, 예전엔 [중앙정보부]가 우측 아래에 있어서
  "숨겨진 산"이라는 이름처럼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 당했는데
  최근인 2020년 1월 17일에 [동대문구]가 길을 새로이 만들고 닦아 산책로로 개통했답니다.


  ['홍릉시험림']

  [군사도로]

  데크길이 끝나면 군부대 진출입로인 군사도로가 이어집니다.
  100m 정도 진행하면 어느 이름모를 봉우리에 오르는데 조망이 트입니다.


  ['경희대' 조망]                    2:00

  [천장산]의 오른쪽에 있는 [KAIST서울캠퍼스]를 벗어나 이제부턴 [경희대]가 산 아래에 펼쳐집니다.
  다시 150m 정도 더 진행하면....


  ['천장산 하늘길']        

  ['회묘 터' 조망]                         2:03

  우측 아래에 "경희여고""연화사"가 보입니다. 모르고 가면 당연 모르고 지나 치겠죠? ㅎ
  [경희여고] 자리가 옛날에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의 릉""회릉 懷陵"이 있던 자리.
  [조선 제9대 성종]의 계비로 <연산군>을 낳은 [제헌왕후]였지만 정적들의 공격으로 폐위돤 "폐비 윤씨"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피의 보복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며 [회릉]은 [회묘]로 격하되고 ....
  여러 영화나 드라마로 무지무지 울궈먹은 "여인천하"의 주제가 된 이야기여서 생략하고...
  잘 모르는 거 두가지 덧붙이자면...
  가수 '김영임씨'가 불러 히트했던 "회심가 懷心歌"가 "폐비 윤씨"를 노래한 '恨많은 노래'라는거...
  또 하나는 현재 "회기동 回基洞"이라고 하는 지명은 원래 "회묘동 懷墓洞"이었답니다.
  [제헌왕후]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懷墓"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것인데 
  "회묘 懷墓"가 "한 많은 무덤"이라는 의미까지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기분 나쁘다고
  한자를 "회기 回基"로 바꿧는데 "묘 墓""터 기基"가 비슷하죠?
  '한 많은 의미'의 "懷"도 "돌아 올 回"로 바꿔 "회기동 回基洞"으로 바꿨다고...^*^ ^.^
  "연화사"는 "의릉의 원찰"인데, "회묘" 바로 옆에 있어 "회묘의 원찰"로 오해 받기도 한답니다.
  "의릉"은 잠시 후 탐방합니다.


  ['천장산 하늘길']

  ['북한산 보현봉'-'개운산' 조망]                   2:09

  조금 더 진행하면 좌측 북서쪽으로 "북한산 보현봉""개운산"이 조망됩니다.
  아래에 펼쳐지는 동네는 [월곡동]이며 산 아래 붙어 있는 건물들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더군요.


  [군사도로]

  ['천장산' 정상부]                      2:11

  조금 더 진행하면 "천장산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군부대 출입문이 있으며, [천장산 하늘길]은 우측으로 내려 가야 하더군요.
  [천장산 하늘길]이 [천장산 능선]을 관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군부대 때문...


  ['천장산 정상']

  "천장산 140m 정상"은 좌측 군부대 안에 있지만 등산객들을 위한 정상은 이곳이랍니다.


  ['천장산' 허릿길]

  [데크 내림길]

  [천장산] 정상부에서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다시 데크길을 조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천장산 경사면'에만 데크를 설치했군요.
  첫번째 데크 계단을 내려 가면....


  ['봉화산' 조망]                      2:15

  [이문동]이 조망되며 '중량구 신내동'에 있는 "봉화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잠시후에 알아 보기로 하고


  [내림길]

  [전망대]                     2:20~2:25

  10여분 내림길을 내려 가면 전망명소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조망을 하고 갑니다.


  ['용마산-망우산' 조망]

  먼저 동남쪽으로 [망우리공동묘지]가 있는 "망우산"과 "살곶이목장"의 울타리 역활을 했다는 "용마산"이 보이고
  그 아랫 동네가 "면목동 面牧洞"인데 "살곶이목장과 마주 보고 있는 동네"라고 "面牧洞"이 되었다고


  ['불암산' '봉화산' 조망]

  동쪽으로는 "봉화산"과 "불암산"이 조망되는데....
  바로 아래엔 "옛 중앙정보부" 건물이 보입니다.
  이 부분은 줌인해서  보겠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줌인]

  "불암산과 수락산"은 [서울-경기도 市界]가 지나는 산줄기로 [수락지맥]입니다.
  저 지맥은 [한북정맥]의 <축석령> 근처에서 분기하여
  "용암산-수락산-불암산-구릉산-망우산-용마산-아차산"으로 이어져 "광나루"에서 그 맥을 다 합니다.
  "수락산" 정상 부근에 "용굴암"이라는 절 암자가 있다는거 아시나요?
  [임오군란] 때에 [명성왕후 민비]가 피난 가서 기도하며 며칠 숨어 지냈다는 절간입니다.


  ['옛 중앙정보부' 줌인]

  "옛 중앙정보부"가 숨어 있습니다.
  옛날 '유신시대'에 여기 끌려 가면 멀쩡한 사람도 간첩이 되었다죠? 무시 어시한 곳이었는데...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하여 발표한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미술관 음악실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네요.
  [의릉]과 [옛 중앙정보부 강당]을 기억해 두세요. 잠시후 방문합니다.


  ['경희대']

  [내림길]

  내림길을 5분 정도 내려 가면...


  ['경희대 본관']                         2:30

  [경희대 본관]이 보입니다.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라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답니다.


  ['천장산 들날머리']                       2:32

  정상에서 20여분 내려 가면 날머리를 만나는데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어린이도서관이 있습니다.


  ['숲속 작은 도서관']

  "숲속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문동어린이도서관' 앞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나갑니다.


  [안내도]

  여기도 [천장산 하늘길] 안내도가 있고


  ['이문동' 골목]                     2:33

  [어린이도서관]에서 직선으로 뻗은 골목길을 내려 갑니다.
  5분 정도 걸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계속 직진해 가면


  ['GS25편의점']                     2:38

  ['한예종' 가는 길]

  골목의 끝에는 [GS25편의점]이 있는데 여기서 좌회전 하여 4분 정도 직진하면...


  ['한예종 미술원' 후문]                    2:42

  [옛 중앙정보부]였던 [한국예술종합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이 문을 통과해 [의릉]으로 가야 합니다.
  이 문을 통해 몇백m만 가면 [의릉]인데 문을 걸어 잠거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코로나사태와 입시때문이라고...ㅠㅠㅠ
  이곳을 통과 못하여 '이문동'을 한바퀴 돌아 [의릉]으로 가야 했습니다.
  2~3분이면 갈길을 30여분을 돌아야 했으니.... 에구 ~ㅎ
  코로나사태가 끝나고 나면 통과 할수 있으니 후답자들은 참고 하시길


  ['GD25편의점' 회귀]                     2:46

  어쩔수 없이 다시 [GS25편의점]으로 돌아와 사이다 한캔 사먹고 '이문동'을 한바퀴 돕니다.

 
  ['이문동' 한바퀴]

  '이문동'은 현재 대단위 재개발 사업을 하고 있더군요.


  ['이문동 삼거리']                    3:02

  [이문동 삼거리]에 도착해서 좌측 [의릉]을 다녀와 우측 [신이문역]으로 갈 예정입니다.


  ['의릉' 앞 거리]

  ['의릉' 입구]                        3:07

  30여분을 빙 돌아 [의릉] 입구에 도착 했는데 [의릉 입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의 입구와 함께 있는데....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한예종 미술원' 정문]

  <옛 중앙정보부>인 조금전 후문에서 오는 정문이 있는데....속이 쓰립니다.
  잠깐이면 될껄 30여분을 돌았으니...


  ['의릉' 입구]                      3:09~3:40

  [의릉]으로 들어 갑니다. 입장료 1,000원, 노인들 무료



  ['의릉 조감도']

  "의릉"의 전체적 규모를 조감도를 통해 알아 보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왕과 왕비의 봉분이 좌우로 배열된게 아니라
  앞뒤로 배열 되었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의릉']

  [안내문]

  "의릉 懿陵"
  어려운 한자 "의 懿"는 '아름답다'라는 뜻. <영휘원>의 "徽"와 비슷한 뜻.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릉입니다.
  재위 기간이 고작 4년이고 병약하여 일찍 죽어 이렇다할 업적이 없어 잘 모르는 왕이죠.
  하지만 "장희빈의 아들"이라면 금방 쉽게 알수 있죠? ㅎ



  ['의릉']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세자인 아들을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해
  [숙종]도 그것마져 불허 할수 없어 세자를 만나게 해 주는 순간 아들의 성기를 붙잡고 잡아 당기며
  "내가 낳은 이씨 가문의 아들을 두고 죽을 순 없다"고 발악을 하며 아들 성기를 놓지 않았다죠.
  그통에 아들은 기절하고, [숙종]은 "저 요물을 한칼에 베지 못할까?”라고 분노하며 사약을 강제로
  먹이라고 "입을 벌려 사약을 넣어라! 천하의 요망된 것!" 호령하여 죽였다죠..
  그래서 아들 [경종]은 성불구자가 되어 후사 없이 일찍 죽게 되었다는게 일반적인 통설이죠.
  '함께 죽으면 죽었지 혼자는 못 죽겠다'는 독한 여자의 보복이었다는거고...ㅎ


  ['의릉' 좌측 숲길]

  ['구 중앙정보부 강당']

  [안내문]

  [의릉]의 좌측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구 중앙정보부 강당"이 있는데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곳이라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답니다.


  ['한예종 미술원']

  강당 바로 옆에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이 붙어 있습니다.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강당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사용되고


  ['이문동삼거리']                  3:43

  ['신이문역']                         3:50

  [의릉]과 [옛 중정]을 둘러보고 [이문동삼거리]로 돌아가 [신이문역]에서 귀가 했습니다.


  [실트랙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2km였으며, 4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역사유적과 정릉천, 천장산등을 걸었는데 역사 공부도 하며 걷는 즐거운 도보여행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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